불후의 고전적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사상예술적특성에 대하여

불후의 고전적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영화로옮기는 사업에 참가하는

예술인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 1970 2 14

 

나는 얼마전에 동무들이 불후의 고전적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영화로 옮길 연출대본을 읽고 제기한 질문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당조직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동무들이 제기한 질문내용을 보면 모두 원작과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원작을 옳바르고 깊이 있게 리해하는것은 앞으로의 창조사업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영화로 옮기는것은 우리 당의 영광스러운 혁명문학예술전통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는 책임적이고도 중대한 사업이며 그것은 또한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본보기로 하여 영화예술전반을 새로운 높은 수준에로 끌어 올리기 위한 보람차고 영예로운 사업입니다.

동무들은 이미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영화로 옮겨 놓음으로써 당과 인민앞에 지닌 력사적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고전적명작들을 영화로 옮기는 사업은 앞으로도 계속될것입니다.

동무들이 이번에 맡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우리 문학예술의 혁명전통과 여기에서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 차지하는 위치와 사상예술적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항일혁명문학예술과 《한 자위단원의 운명》

 

우리 나라 문학예술의 혁명전통은 위대한 주체사상의 기치밑에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간고하고 피어린 항일혁명투쟁의 불길속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 인민의 민족적독립과 계급적해방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상비적인 혁명적무장력과 함께 있는 사상적무기인 혁명문학예술을 가져야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의 길에 나서신 시기부터 문학예술을 혁명투쟁의 강유력한 무기의 하나로 보시고 혁명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는 혁명적문학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조직지도사업을 정력적으로 벌리시였으며 과정에 우리 문학예술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창시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혁명의 성격과 임무를 과학적으로 정식화하신데 기초하시여 혁명문학예술의 사명과 역할, 창작원칙과 실현방도들을 전면적으로 밝히심으로써 력사상 처음으로 주체적문예사상과 리론을 창시하시였으며 친히 혁명연극과 혁명가극, 혁명가요들을 비롯한 수많은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창작하시여 주체적인 혁명문학예술의 시원을 열어 놓으시였습니다.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창작된 혁명문학예술은 조선인민의 가장 고귀한 사상문화적재부로, 우리 문학예술의 력사적뿌리로 되였으며 인류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항일혁명문학예술은 주체사상을 구현함으로써 반제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의 본질을 밝혀 낼수 있었으며 주체의 세계관으로 무장한 새형의 공산주의자의 빛나는 형상을 창조할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항일혁명문학예술은 우리 문학예술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당성, 로동계급성, 인민성의 원칙을 철저히 구현한 문학예술로, 민족적형식에 사회주의적내용을 담은 주체적이며 혁명적인 문학예술로 되였으며 인민대중을 혁명투쟁에로 힘차게 불러 일으킨 강력한 조직교양자, 선동자로 되였습니다.

항일혁명문학예술의 이와 같은 특징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작하신 작품들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령님께서 친필하신 작품들은 내용과 형식에서 다양할뿐아니라 사상예술적높이에 있어서 고전적본보기로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 진것만 하더라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필하신 작품들로서는 첫째로 사람들이 준엄한 생활을 통하여 혁명을 인식하고 투쟁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을 넓고 깊이 있게 그린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꽃 파는 처녀》,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와 같은 정극적인 작품들이 있으며, 둘째로 혁명의 원쑤들을 신랄하게 조소하고 풍자하면서 그들의 반동적본질과 멸망의 불가피성을 심오하게 밝히고 혁명투쟁의 정당성과 승리의 필연성을 있게 형상한 《성황당》, 《경축대회》, 민족주의자들의 파벌싸움을 풍자한 31당》같은 희극적인 작품들이 있으며, 셋째로 《딸에게서 편지》를 비롯하여 정극적인것과 희극적인것이 결합된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단심줄》과 같은 가무형식의 작품들과 《반일전가》, 《조국광복회10대강령가》, 《〈토벌〉가》, 《피바다가》를 비롯한 수많은 혁명시가들도 있습니다.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은 내용과 형식이 서로 다르지만 민족적독립과 계급적해방을 위한 조선인민의 투쟁에서 절박하게 나서고 있던 근본문제들을 제기하고 그에 옳바른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명작들은 주체의 사상체계에 기초한 불요불굴의 공산주의적혁명정신, 고귀한 혁명업적과 투쟁경험, 혁명적사업방법과 인민적사업작풍으로 일관된 혁명전통의 내용들을 예술적으로 심오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동무들이 지금 영화로 옮기려고 하는 《한 자위단원의 운명》도 바로 이러한 명작들가운데 하나입니다.

동무들이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영화로 훌륭히 옮겨 놓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먼저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특성을 옳게 파악하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러자면 작품이 어떤 시대적환경속에서 어떤 교양적목적밑에 창작되였는가 하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 창작공연되던 당시의 국내외정세는 매우 복잡하였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은 1920년대말부터 1930년대초에 걸쳐 전세계를 휩쓴 파국적인 경제공황으로부터의 출로를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과 국내인민들에 대한 무제한한 착취와 혁명력량을 말살하기 위한 파쑈화에서 찾았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일제침략자들은 정치적으로는 파쑈폭압기구를 대대적으로 늘이고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류혈적인 탄압에 미쳐 날뛰면서 《동조동근》과 《내선일체》를 떠벌이며 《황민화》정책을 강요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조선반도를 대륙침략의 《공고한 후방》으로 만들려고 획책하였습니다. 일제와 조선인민사이의 민족적, 계급적 모순은 더욱 첨예화되였으며 한줌도 못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한 각계각층 군중의 반일감정은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로 이런 정세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전반적조선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 올리기 위한 새로운 전략전술적방침을 내놓으시고 전체 인민들을 반일의 기치밑에 묶어 세워 조국광복을 위한 성전에 한사람같이 떨쳐 나서게 하시였습니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더욱 확대발전시키심으로써 광범한 애국력량을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로 불러 일으킬 원대한 구상을 무르익히시던 때에 창작하신 작품입니다.

작품은 일제의 식민지통치밑에서 착취 받고 압박 받던 사람들이 계급적으로 각성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에 일떠서는 과정을 깊이 있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피바다》에도 주어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은 서로 다른 형상적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바다》가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노의 처지에서 헤매이던 우리 인민의 비참한 생활을 어머니의 형상을 통하여 보여 주면서 조선인민이 민족적독립과 계급적해방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혁명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면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노예의 처지에서나마 자신의 념원을 이루어 보려고 모대기는 가난한 농민청년의 형상을 통하여 조선사람이 살길은 오직 일제를 반대하여 혁명에 나서는 길밖에 없다는 사상을 있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멸망이 가까와 오고 있던 시기에도 민족적자주의식이 부족하고 계급적으로 각성하지 못한 사람들가운데는 자신의 무권리와 가난을 타고 팔자로 여기며 일제침략자들이 나쁜놈들이라는것을 알면서도 그놈들과 엇서서는 살수 없다고 생각하며 지어 일제에 대한 환상까지 가지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일제를 때려 부시고 빼앗긴 조국을 찾는 혁명의 길에 나설 때에만 생존의 권리를 찾을수 있고 참다운 삶을 누릴수 있다는 생활의 진리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피바다》에는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밑에, 구체적으로는 혁명조직의 지도밑에 혁명가로 자라나는 주인공이 그려 있다면 《한 자위단원의 운명》에는 혁명조직의 지도와 방조가 없이 자신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혁명을 각오하고 투쟁의 길에 나서는 주인공이 그려 있습니다.

사람들의 혁명적세계관이 서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교시하신바와 같이 사람들의 혁명적세계관은 꾸준한 사상교양과 실천투쟁을 통한 의식발전의 일정한 단계를 거쳐 형성되고 공고발전됩니다. 그러므로 혁명적세계관이 서는 과정은 사람들의 성격과 생활환경에 따라서 저마다 다른것입니다. 《피바다》의 어머니는 혁명조직의 교양과 자신의 실천투쟁을 통하여 혁명적세계관을 세워 나가지만 《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주인공 갑룡이는 《자위단》에 끌려 가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굴욕적인 생활의 쓴맛을 깊이 체험하는 과정에 비로소 자신의 계급적처지를 깨닫고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따라서 갑룡이의 혁명적세계관은 《피바다》의 어머니와는 달리 비교적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 집니다.

《피바다》와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다같이 혁명의 길로 나가는 인간들의 운명을 심각하게 그리고 있는 혁명적대작입니다.

《피바다》는 1930년대초부터 후반기에 이르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점차 계급적으로 각성하여 투쟁속에서 성장발전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조선혁명의 전반적흐름을 넓게 보여 주고 있는 혁명적대작이라면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1930년대 후반기의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일시나마 적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본의와는 다르게 반역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였던 주인공의 계급적각성과정을 그려 냄으로써 무장투쟁의 필연성을 보여 주고 있는 혁명적대작입니다.

동무들은 《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이러한 형상적특성을 통하여 작품이 《피바다》에서와 같이 억압 받고 착취 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취급하고 있으며 인간들의 운명을 통하여 밝혀 내려는 사상적결론도 비슷하지만 교양 대상과 목적이 다른데로부터 생활을 다른 각도에서 그리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을것입니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심오한 사상적내용과 독특한 예술적형상으로 하여 항일혁명문학예술의 발전에서 새로운 경지를 열어 놓은 불후의 명작으로서 우리 문학예술의 혁명전통을 더욱 빛나게 하였으며 광범한 대중을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로 불러 일으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종자에 대하여

 

동무들은 질문에서 불후의 고전적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종자를 어떻게 보는것이 옳은가고 제기하였습니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영화로 훌륭히 옮기기 위하여서는 먼저 명작의 종자를 똑똑히 알아야 하는것만큼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봅니다.

종자란 한마디로 말하여 작품의 핵입니다. 그러므로 종자는 작품을 분석하는데서 언제나 기본으로 되며 출발점으로 됩니다. 종자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는 작품의 사상예술적특성을 깊이 리해할수 없으며 영화로 옮기는 사업도 옳게 해나갈수 없습니다.

동무들가운데 《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종자를 《피바다》의 종자와 같이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작품의 종자는 묘사된 생활이 서로 다른것처럼 같지 않습니다.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는 일제의 식민지통치밑에서 착취와 압박을 받으며 살아 가는 어머니의 생활을 통하여 혁명이란 무엇이며 혁명을 해야 하는가, 혁명을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것을 진실하고 깊이 있게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에서는 수난의 피바다를 투쟁의 피바다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상이 강하게 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자주성이 참혹하게 짓밟히고 초보적인 삶의 권리마저 빼앗긴 조선인민이 자기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먼저 일제를 때려 부시고 그와 야합한 지주, 예속자본가, 민족반역자들을 쓸어 버려야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선혁명이 일제를 타도하는 반일민족해방투쟁이며 지주, 예속자본가, 민족반역자들을 쓸어 버리는 심각한 계급투쟁이라는것을 말하여 줍니다.

사람들이 혁명할 결심을 가지고 투쟁에 나서기 위하여서는 혁명의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실천투쟁으로 혁명의 진리를 체득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혁명을 인식하는 과정이며 혁명적세계관을 세워 나가는 과정입니다.

《피바다》는 혁명에 대하여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머니가 생활의 모진 시련속에서 점차 혁명을 인식하고 투쟁에 나서는 과정을 깊이 있게 그려 냄으로써 착취와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인민들의 반항이 있는 법이라는 위대한 반제혁명사상과 천재적인 무장폭동사상을 심오하게 밝혀 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에 남편과 아들딸들의 영향을 받고 다음에는 혁명조직의 교양을 받으면서 투쟁을 벌려 나가는 과정에 점차 혁명사상을 깊이 체득해 나갑니다. 어머니의 이러한 형상을 통하여 작품의 종자가 실현됩니다.

《피바다》의 형상이 보여 주는바와 같이 작품의 종자는 주인공의 성격과 생활을 통하여 실현되는것만큼 언제나 주인공의 성격과 생활을 기본으로 하여 작품의 전반적인 형상을 깊이 분석해 보아야만 옳게 파악할수 있습니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에는 《피바다》의 어머니와 같은 사회적처지에 있는 갑룡이 일가의 생활이 그려 있습니다. 그러나 갑룡이의 생활은 어머니의 생활과 다릅니다. 갑룡이에게는 정치적영향이나 혁명교양을 조직이나 선각자가 없습니다. 이런데로부터 그의 혁명적세계관은 비교적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위단》에 들수도 없고 들지 않을수도 없는 막다른 운명의 길에서 모대기던 주인공이 《자위단》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 나서 참다운 삶의 길을 찾게 되는 그의 사상의식발전과정을 통하여 알수 있습니다.

계급적자각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어질고 순박하기만 하던 주인공이 인간의 존엄과 자주성을 참혹하게 짓밟는 식민지사회의 모순과 나라와 주권이 없는 인민은 아무리 량심적으로 살려고 하여도 모진 고생끝에 죽음밖에 차례질것이 없다는것을 깨달았을 비로소 그는 인간의 존엄과 자부심을 지니게 되며 원쑤의 가슴팍에 총을 돌려 대는 새로운 인간, 자주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여 납니다. 다시말하여 그는 일제놈들의 요구에 순종해도 죽고 그것을 거역해도 죽는 막다른 처지에서 벗어 나는 유일한 길은 일제놈들을 반대하여 싸우는 , 혁명의 길밖에 없다는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인공의 이러한 형상을 통하여 밝혀 지는 《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종자는 《자위단》에는 들어도 죽고 안들어도 죽는다는것입니다. 여기에 명작이 내놓은 인간문제의 철학적깊이가 있습니다.

작품은 갑룡이, 철삼이, 만식이의 생활을 통하여 《자위단》에는 들어도 죽고 안들어도 죽는가 하는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모두가 소작농의 자식들입니다. 갑룡이와 철삼이는 홀아버지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만식이는 나어린 누이동생을 데리고 있는 다같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 청년들입니다. 그들의 사회적환경과 생활조건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가정사정은 서로 다르며 현실을 대하는 태도와 생활의 길을 찾아 나가는데서도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사람들의 성격과 생활을 다양하게 그려 낼수 있는 전제를 줍니다. 사람들이 생활을 보고 판단하는데서 나타나는 의식수준의 차이는 그들의 생활에서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작품의 종자는 다양한 인간들의 성격과 그들의 생활을 통하여 밝혀 져야만 진실하고 생동하게 안겨 올수 있습니다. 한두인물의 형상에 매달려 생활을 틀에 맞추듯이 그리면 작품이 단순하게 되며 따라서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갑룡이, 철삼이, 만식이를 비롯하여 학대 받고 착취 받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형상을 진실하게 그려야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망국노의 비참한 운명과 일제식민지통치제도의 암담한 현실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 줄수 있습니다.

일제식민지통치하의 조선은 그대로 하나의 감옥이였으며 생지옥이였습니다. 일제침략자들이 살판치는 땅에서 가난한 조선사람들이 곳이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살아서 설곳이 없었고 죽어서 묻힐 곳이 없었습니다. 갑룡이나 만식이와 같이 《자위단》에 끌려 사람들은 일제놈들의 눅은 총알받이가 되여 개죽음을 당해야 했고 철삼이와 같이 《자위단》에 들지 않은 사람들 역시 고역과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어야 했습니다. 일제의 악독한 식민지통치가 계속되는 한 조선인민은 온갖 사회적불행과 민족적수난에서 벗어 날수 없었습니다. 《자위단》에는 들어도 죽고 안들어도 죽는다는 《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종자는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찾아 낸것이기에 그처럼 심각하고 교훈적인것으로 되는것입니다.

구장으로부터 《자위단》에 뽑혔다는 말을 들었을 청년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먼저 철삼이의 경우를 놓고 봅시다.

그는 《자위단》에 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고 하면서 도망치자고 동무들을 추깁니다. 그러나 동무가 망설이자 자기 혼자서 라도 저주로운 길에서 벗어 나려고 몸을 피합니다. 이렇게 철삼이는 죽어도 왜놈의 개질은 하지 않는다는 깨끗한 량심을 가진 조선청년입니다. 그러나 그는 참다운 삶의 길을 알지 못하였기때문에 소극적인 반항의 테두리를 벗어 나지 못합니다.

철삼이는 목재판주인이나 구장 같은 자본가, 지주를 옹호하는 사회제도와 그들을 비호하는 일제를 반대하여 투쟁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꿀수 없다는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목재판이건 어데건 왜놈들이 살판치는 세상에서는 《자위단원》과 같은 운명을 면할수 없다는것을 포대공사장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에야 깨닫게 됩니다.

늦게나마 자신의 체험으로써 철삼이의 말이 옳았다는것을 깨닫고 《자위단》에서 도망쳤던 만식이도 체포되여 총살 당하게 됩니다.

철삼이와 만식이는 서로 다른 생활의 길을 걸어 왔지만 그들의 운명은 결국 다같이 비참한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어찌하여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그들의 운명이 다같이 비참한 결과에 이르게 됩니까? 그들자신의 제한된 사상의식과 힘으로써는 피할 길이 없었던 비극적운명은 조선사람들에게 오직 불행과 고통만을 들씌우는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빚어 낸것입니다. 철삼이와 만식이의 죽음은 《자위단》에는 들어도 죽고 안들어도 죽는다는 명작의 종자에 대한 하나의 생동한 해답으로 됩니다.

작품의 종자는 갑룡의 운명을 통하여 완전하게 밝혀 집니다.

갑룡이가 일제침략자들에게 총부리를 돌리기까지에는 그가 심각한 생활체험을 쌓으면서 점차 계급적으로 각성되는 과정이 놓여 있습니다. 그는 인민들에 대한 《자위단》의 갖은 야수적인 만행, 만식이와 철삼이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뼈에 사무치는 체험을 겪고서야 비로소 환상에서 깨여나 원쑤의 정체를 알게 되며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복수심에 타게 됩니다. 부닥치는 사건들마다에서 그는 걸음걸음 계급적으로 각성되며 사상정신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주인공의 이러한 성격발전과정을 옳바르게 리해하기 위하여서는 그가 겪게 되는 고통의 본질적인 원인을 먼저 당시의 사회현실에서 찾아 보아야 합니다. 주인공이 《자위단》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는것은 일제의 책동에 기인되는것이며 그가 수난을 겪게 되는것도 환상과 맞지 않는 현실자체에 기인되는것입니다.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의 원인을 당시의 사회제도에서 찾고 인간의 운명을 통하여 사회혁명에 대한 근본문제를 밝혀 낸데 명작의 철학적깊이가 있습니다.

물론 갑룡이의 불행의 원인은 그자신과도 관련되여 있습니다. 아무리 일제와 앞잡이들이 《자위단》에 대한 환상을 퍼뜨린다고 하여도 계급적으로 각성한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그런 회유와 기만책동에 속아 넘어 가지 않을것입니다. 갑룡이는 자기가 바라는것과 현실사이에 넘을수 없는 담이 있다는것을 몰랐기때문에 《자위단》에 끌려 가는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환상이 《자위단》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나온것이지 그에 사상적으로 공감한데서 나온것이 아니라는것을 말하여 줍니다. 점을 옳게 가려 보아야만 그의 사상적제한성을 일면적으로 과장해서 보는 편향을 미리 막을수 있습니다.

갑룡이가 자기 가정에 덮씌워지는 가혹한 현실의 중하를 두어깨에 걸머지고 온갖 수모와 멸시를 참아 나가는것은 가난한 살림에도 어진 금순이를 안해로 맞아 들여 오직 자기 하나를 바라고 머슴살이와 소작살이에 등이 굽은 아버지에게 효도할수 있으리라고 믿기때문입니다.

갑룡이의 이러한 《꿈》은 《자위단》에 대한 환상과 얽혀 있습니다. 자기 혼자라면 철삼이처럼 도망칠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할수 없고 《자위단》가족에게는 부역을 면제 해준다니 《자위단》에 들면 조금이라도 효도를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이 《자위단》에는 들어도 죽고 안들어도 죽는다는 생활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 갑룡이가 환상에서 깨여 나서 진짜 효도의 길이 어데 있는가를 알게 되는 과정이 다름아닌 《자위단》에는 들어도 죽고 안들어도 죽는다는 생활의 진리를 체득하게 되는 과정이며 그의 혁명적세계관이 서가는 과정이며 작품의 사상이 밝혀 지는 과정입니다.

작품이 보여 주고 있는것처럼 참다운 효도의 , 그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려고 해도 념원을 용납하지 않는 착취사회를 자신의 힘으로 두들겨 엎을 때에만, 다시 말하여 망국노의 처지에서 벗어 때에만 열려 질수 있습니다. 작품에서 사상은 총부리를 원쑤놈들에게 돌려 반변을 일으키고 혁명의 길에 나서는 갑룡이의 성격발전의 새로운 전환을 통하여 완전히 밝혀 집니다.

사상은 준엄한 생활의 교훈에서 흘러 나온것이기에 오늘도 사람들의 심장을 억세게 틀어 잡고 그들을 혁명의 한길로 있게 떠밀어 주고 있는것입니다.

 

정치조직선문제

 

정치조직선에 대한 문제는 작품의 정치사상성과 직접 관련되여 있으므로 언제나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동무들은 모든 작품에 반드시 정치조직선이 있어야 하는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보는것은 일면적입니다. 작품에 따라서 정치조직선이 있을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습니다. 불후의 고전적명작들가운데서도 《피바다》에는 정치조직선이 있지만 《한 자위단원의 운명》에는 정치조직선이 없습니다.

《피바다》는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반일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작품에는 정치조직의 직접적인 지도밑에 사람들이 혁명화되고 혁명조직들이 무어 지며 광산과 농촌의 혁명세력과 도시의 혁명잠재력이 상비적인 혁명무력에 합세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전인민적인 무장폭동을 일으키는 과정이 그려 있습니다.

《피바다》에서는 이와 같이 광범한 인민대중을 묶어 세워 혁명투쟁에로 불러 일으키는 혁명조직의 의의와 단결의 힘에 대한 사상이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작품은 정치조직의 지도와 대중의 혁명투쟁을 옳게 결합한 무장폭동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도 매우 의의를 가집니다.

《피바다》에 정치조직선이 있는것은 작품의 종자와 관련되는 생활의 필연적요구입니다.

작품의 특성과는 상관없이 모든 경우에 반드시 정치조직선이 있어야 하고 혁명투사나 당일군, 정치일군이 나와서 정치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든가, 정치조직선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작품에 정치성이 있다 없다 하고 단정하는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은 종래의 낡은 틀을 가지고 작품을 재여 보는 도식적인 견해입니다. 어떤 작품이든지 일정한 틀을 가지고 거기에 맞추어 해석해서는 작품의 사상예술적가치를 옳바르게 리해할수 없습니다.

작품마다 종자와 주제사상이 다르고 인간성격들과 생활이 같지 않은것처럼 구체적인 교양적목적도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혁명적작품이라고 하여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지 정치조직선이 있어야 한다고 할수는 없습니다.

작품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어떠한 사상적문제를 내세우고 그것을 어떠한 인간성격들과 생활을 통하여 밝히고 있는가 하는것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종자의 요구와 교양적목적으로 보아 반드시 정치조직선이 들어 가야 작품에 정치조직선이 없다든가, 정치조직선이 없어도 작품에 그것을 억지로 넣었다고 하면 그때에는 문제를 세워야 할것입니다.

작품의 구체적인 형상적특성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덮어 놓고 정치조직선을 설정하면 사상을 생경하게 드러 내놓게 됩니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혁명문학예술작품들가운데서도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갑룡이는 조선팔도, 료동팔백리를 헤매면서 머슴살이와 소작살이에 시달려온 아버지의 여생을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드리려고 모진 애를 쓰며 살아 가는 순박한 청년입니다. 아버지의 여생과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본의아닌 반역의 길에서 허덕이면서도 고생끝에 락이 오려니 생각하던 주인공이 원쑤놈들과 싸우는 길만이 살길이라는 참된 진리를 깨닫기까지에는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운 쓰라린 고통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잔치날 아침에 《자위단》에 강제로 끌려 오게 , 잘해도 매를 맞고 못해도 매를 맞아야 하는 굴욕적인 《자위단》생활, 잔치집까지 들이 치고 털어 먹는 악질《자위단》놈들의 야만적인 행패, 산판로동자들의 파업진압에 내몰렸을 로동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강한 충격, 생사고락을 같이 하자던 만식이의 총살과 철삼이의 죽음, 그렇게도 모시려고 했던 아버지의 죽음, 모든 피의 체험의 축적과정을 거쳐서야 주인공은 강요 당한 생활에 항거하여 원쑤와 싸우는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사람들의 혁명의식이 이루어 지는 과정은 여러가지로 다를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혁명의식은 그들자신의 생활체험을 통해서도 생기고 남의 영향과 교양을 받는 과정에서도 생깁니다. 그런데 갑룡이의 혁명의식은 누구의 영향이나 지도에 의하여 생겨 난것이 아닙니다. 억눌리고 짓밟혀 생활이 그로 하여금 살길은 오직 원쑤를 갚는 반변의 길밖에 없다는것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갑룡이의 반변은 그자신이 걸어 생활로부터 흘러 나온 응당한 폭발이며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주인공의 성격발전과정이 자연스럽고 응당한것으로 되는것은 갑룡이가 걸어 , 그가 간고한 생활속에서 찾은 길이 짓밟힌 조국을 찾고 민족의 존엄을 고수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의 길과 잇닿아 있기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갑룡이의 성격발전과정이 피압박인민들은 오직 손에 무장을 들고 반혁명적폭력에 혁명적폭력으로 맞서 싸워야만 제국주의침락자들과 반동계급의 통치제도를 뒤집어 엎고 참다운 자유와 해방을 쟁취할수 있다는 무장투쟁로선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밝혀 주고 있기때문입니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이처럼 심오한 내용으로 하여 오늘도 미제국주의와 비호밑에 되살아 나고 있는 일본군국주의를 때리면서 민족적, 계급적 원쑤들을 반대하여 적극 싸우도록 사람들을 교양하는데서 혁명적감화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작이 보여 주는바와 같이 작품의 정치성은 어떤 인물이 나와서 정치적인 대사를 하거나 정치조직선이 설정되여야만 주어 지는것이 아닙니다. 작품의 정치성은 무엇보다 종자의 요구와 그것을 밝히는 주제사상에 의하여 규정됩니다. 이러한 형상의 론리를 무시하고 만약 《자위단》안에 조직선이 있게 한다면 가난한 농민의 아들인 주인공이 인차 혁명적영향을 받고 투쟁의 길에 나서리라는것은 명백합니다.

작품에서 정치조직선을 설정하지 않은 리유를 몇가지로 갈라 볼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작품의 종자의 요구와 교양적목적과 관련되여 있습니다.

조직선이 있는것으로 하면 《자위단》에는 들어도 죽고 안들어도 죽는다는 작품의 종자를 밝혀 낼수 없습니다. 조직선이 마을이나 《자위단》안에 있으면 기본계급출신인 갑룡이와 만식이는 처음부터 《자위단》에 끌려 가지 않을것이며 끌려 간다고 하여도 인차 뛰쳐 나올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위단》에 그냥 남아 있으면서 지하조직이 주는 임무를 수행할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갑룡이의 성격발전과정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될것이며 철삼이와 만식이의 운명도 다르게 될것입니다. 철삼이와 만식이가 지금처럼 원쑤의 총에 값없이 죽지 않고 계급적으로 각성되여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고 갑룡이가 《자위단》에 대한 환상에서 빨리 깨여나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된다면 결국 일제가 도사리고 있는 당대의 현실을 취급한다고 하여도 《자위단》에는 들어도 죽고 안들어도 죽는다는 종자의 요구를 실현할수 없게 됩니다.

또한 조직선이 있어서 갑룡이와 그의 동무들이 처음부터 모든것을 깨닫게 한다면 식민지통치제도의 반인민적본질을 알지 못하는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들을 각성시키며 지어는 놈들의 기만과 강압에 이겨 적기관에 끌려 들어 사람들까지 혁명의 편에 전취하여 그들을 전인민적인 항쟁에로 일떠세우려고 작품의 교양적목적을 실현할수 없게 됩니다. 조직선이 있게 되면 조직의 교양과 영향밑에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계급적으로 각성되여 일제를 때려 부시는 혁명투쟁에 나서게 될것인데 그때에는 각성된 사람들이 투쟁속에서 혁명가로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다른 작품으로 될것입니다.

둘째로, 주인공 갑룡이의 성격발전과정을 놓고 보아도 조직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동무들은 정치조직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만했지 정치조직선이 있으면 인물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것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치조직선이 있는것으로 이야기를 엮어 놓으면 주인공의 혁명의식이 그자신의 생활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혁명조직의 교양과 지도를 통하여 자라나게 될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갑룡이는 지금처럼 심각한 체험을 거쳐 투쟁의 걸음을 내디디는 성격이 아니라 《피바다》의 주인공과 같이 혁명의 준엄한 시련속에서 공산주의자로 자라나는 인물로 형상되여야 합니다. 이때에는 주인공이 성격이 종자와 맞지 않게 되며 결국 주인공의 성격발전과정을 통하여 종자를 밝혀 낼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작품에는 정치조직선이 없는것입니다.

셋째로,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로 보아서도 조직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작품의 기본이야기는 금순이와 결혼하여 늙은 아버지를 모시면서 오붓한 생활을 꾸려 가려던 갑룡의 소박한 리상이 《자위단》에 끌려 가는것으로 하여 깨여 지는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조직선이 있는것으로 하면 이야기는 다른 길로 뻗어 나가게 되며 따라서 그처럼 심각한 교훈을 안겨 특징적인 생활들이 완전히 다른 생활로 바뀌여 져야 할것입니다.

넷째로, 극조직의 특성으로 보아서도 조직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조직선이 있게 되면 조직의 영향밑에 곧바로 혁명의 길에 들어 서는 생활을 그리거나 조직의 지도밑에 계급적으로 각성되여 투쟁의 길에 들어서는 생활을 보여 주어야 하는것만큼 갑룡이의 고난에 운명선과 생활을 계속 끌고 갈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위단》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고 혁명의 길에서만 참된 삶을 찾을수 있는가 하는것을 깨닫게 되는 포대공사장면까지 그의 성격발전과정을 끌고 갈수 없게 됩니다. 주인공의 운명선을 포대공사장면까지 끌고 가야 일제에 대한 그의 증오심과 투쟁각오를 집중적으로 펼쳐 보여 줄수 있으며 극을 결정적으로 올릴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정치조직선이 없는 조건에서 투쟁의 길에 들어 서게 되는 인간의 운명을 그린 작품이며 그렇게 극조직이 되여 있습니다.

작품의 이러한 사상예술적특성을 옳바르게 리해할 동무들이 제기한 문제는 스스로 풀릴것입니다.

 

극의 절정과 반변의 계기

 

동무들은 질문에서 반변의 계기를 좀더 앞당길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것과 반변장면에서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좀더 높이면 어떻겠는가 하는것을 제기하였습니다.

반변의 극적설정과 장면에서의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옳바르게 리해하는것은 《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사상예술적특성을 파악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작품에서 주인공의 반변은 극의 결정으로 됩니다. 극발전과정에 놓여 있는 계기들을 모두 옳게 분석하였다고 하더라도 절정의 계기를 잘못 찾으면 작품의 전반적형상을 잘못 리해하게 됩니다.

극의 절정은 모순으로 얽혀 가던 인간관계가 극한점에 이르러 터지는 대목입니다. 생활의 모순이 절정에 이르러 폭발하고 해결되는것이 극구성의 일반적인 형태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극작품에서 절정은 복잡한 생활과정을 거쳐 얽혀 지고 발전하여 인간관계와 사건들의 성숙된 요구로, 필연적인 폭발로 되여야 합니다. 이것은 창작가가 마음대로 뒤로 밀수도 없고 앞당길수도 없는 극발전의 객관적론리입니다. 론리를 무시하면 극이 진실성을 잃고 인위적인것으로 됩니다. 반변의 계기는 포대공사장에서 극의 절정에 맞게 주어 있습니다.

극적설정은 종자의 요구에 따르면서도 언제나 성격과 생활의 론리에 맞아야 합니다. 작품에서 반변의 계기는 주인공의 성격발전의 론리로 보나 생활발전의 론리로 보나 결정적인 행동의 폭발로밖에 달리 될수 없는 성숙된 생활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포대공사장에서 반변을 일으키지만 이러한 폭발은 벌써 오래전부터 심각한 극적축적과정을 거쳐 준비되여 왔습니다.

주인공이 반변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잔치날 아침에 《자위단》으로 끌려 와서 갖은 모역과 학대를 받으며 강제훈련을 받는 생활, 《자위단》놈들이 잔치집을 털어 먹을 받게 되는 심리적고통과 울분, 파업진압에 내몰렸다가 목재판로동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강한 충격, 만식이의 탈출과 죽음,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까지 포대공사장에 끌어 내지 않으면 안되는 극적인 생활이 놓여 있습니다.

모든 극적설정들은 결코 사건의 단순한 라렬이나 반복이 아닙니다. 사건의 발전과정에서 인물들의 극적관계가 발전하고 더욱 심각하게 얽혀 들어 가며 과정에 주인공은 현실을 점차 깊이 인식하여 나가게 됩니다. 이것은 주인공이 새로운 사건에 부닥칠 때마다 차츰 계급적으로 각성하게 된다는것을 말하여 줍니다. 반변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에게 중첩되는 이러한 극적인 사건을 떠나서 그의 혁명적세계관형성과정에 대하여 말할수 없습니다.

반변을 앞둔 주인공의 정신세계는 원쑤에 대한 증오와 울분으로 있습니다. 그것은 폭풍전야의 세계와 다를바 없습니다. 이러한 주인공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드디여 결정적인 행동에로 나가게 됩니다. 그렇기때문에 반변의 계기는 결코 우연한것이 아니며 인위적인것도 아닙니다.

만약 반변의 계기를 만식이가 총살 당하는 장면으로 앞당길수도 있지 않는가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만식이가 총살 당하는 장면에서도 주인공은 타는 증오와 울분에 있지만 그것은 항거의 용단을 내릴만큼 성숙되지는 못한것입니다. 아직은 주인공의 계급의식이 그러한 높이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반변을 일으킬수 있는 정황도 조성되여 있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만식이의 총살을 계기로 반변을 일으킨다면 작품의 주제와 사상을 깊이 있게 밝힐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철삼이의 운명을 끝까지 보여 주지 않고서는 일제놈의 종살이를 하는 개인의 행복도,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려는 자그마한 념원도 이루어 질수 없다는 작품의 주제와 더우기 원쑤놈들에게는 빌어 봐도 소용 없고 사정을 해봐도 소용이 없다, 오직 일제놈들과 싸우는 길만이 자신의 운명을 구원하는 길이다는 사상을 있게 밝혀 낼수 없습니다.

반변을 앞당겨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원쑤들에게 만식이와 철삼이를 잃고 아버지마저 잃은 원한과 분노가 가슴에 넘쳐야 갑룡이는 결정적인 행동에로 나갈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사상정신적준비과정을 무시하고 반변의 계기를 앞당기면 그것은 생활의 론리를 어기고 작품의 진실성을 깨뜨리는것으로 됩니다. 그렇게 하는것은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높이는것으로되지 못합니다.

만식이를 총살하는 장면에서 관중들이 주인공을 두고 어째서 원쑤놈들에게 총부리를 돌려 대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가, 어째서 통탄만 하고 있는가고 안타까와 웨칠만큼 진지하게 생활을 그린데 작품의 형상적 깊이가 있습니다.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높인다고 하면서 만식이를 총살하는 장면에서 반변을 일으키게 한다면 《자위단》에 강제로 끌려 나오게 철삼이처럼 도망치지 못했는가, 남의 잔치집을 들이 치는 만행을 목격한 다음에 만식이처럼 원쑤의 소굴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는가, 파업진압에 내몰렸을 반변할 결심을 못했는가 하는 식으로 문제가 계속 꼬리를 물고 제기됩니다. 결국 이러한 사고방식이 지배하게 되면 작품에 있는 생활이 하나둘 빠져 나가게 되고 도식적인 론리만 남게 될것입니다.

또한 만식이를 총살하는 장면에서 갑룡이가 반변을 결심했다고 하여도 그러한 행동에로 나갈수 있는 정황이 조성되여 있지 않습니다. 왜병들과 《자위단원》들이 겹겹으로 둘러 싸고 있는 삼엄한 마당에서 반변을 일으킬수는 없습니다.

만식이를 총살하는 장면은 주인공의 사상의식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반변을 앞당기지 않는 만식이가 총살 당하는것을 보면서도 가만히 있는것이 주인공의 정신세계의 오점으로 되지 않겠는가 하고 우려할것은 없습니다. 주인공의 체험을 통해 작품의 사상을 밝히기 위해서도 장면에 주인공은 있어야 합니다. 주인공이 장면에서 받는 강한 충격이 있기때문에 절정장면에서 계급적분노가 더욱 세차게 터져 오를수 있는것입니다.

여기서는 다정한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수 없는 울분에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드러내면 됩니다.

작품의 절정에서는 주인공의 정신세계도 생활적으로 진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폭발의 계기가 심각하고 정황이 절박한 경우에도 주인공이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절정장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