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미운동사 조명해 본다
 

 
- 1946년 첫 반미항전 -

한국민의 반미투쟁은 미국의 한국강점 첫날부터 벌어졌다.

당시의 세대였던 한양대 김승복교수는 말했다.

『8·15광복이라고 하지만 미군이 일본을 대신하여 식민지통치를 했거든요. 그래서 앉아서 죽는 것보다 일어서서 싸우자고 외치면서 반미항전에 분기해 나선 겁니다.』

1946년 6월 19일 미군정은 교육행정기관들을 완전히 거머쥐고 교육을 더욱 식민지예속화할 목적 밑에 「국립서울대학교안」 (국대안)을 조작했다.

「국대안」은 발표되자마자 청년학생들과 교사들을 비롯한 광범위한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청년학생들은 서울을 비롯한 곳곳에서 『「국대안」을 반대한다!』, 『학원을 민주화하라!』,『미국인총장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 동맹휴학 등 각종 투쟁을 벌였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형식상으로나마 「국대안」내용을 일부 뜯어고치고 대학총장과 이사직에 들어앉았던 미국인을 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투쟁도 줄기차게 벌어졌다.

그 대표적 투쟁이 1946년 8월 광주화순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이다.

이해 8월15일 새벽 3시 1천여명의 화순탄광노동자들은 광주에서 열리는 8·15해방 1돌기념행사 참가를 위해 광주로 떠났다.

미군정은 노동자대열을 해산시키기 위해 군용비행기와 탱크를 앞세운 미군기동부대까지 동원했다.

노동자들이 굴하지 않고 계속 행진하자 폭격기 6대의 엄호밑에 미군과 경찰대는 노동자들을 총칼로 탄압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조직되고 단결된 역량으로 미국놈들의 야수적 탄압과 폭행을 물리치고 광주에서 열린 8·15해방한돌기념행사에 참가했으며 광주시민들과 강력한 반미시위를 벌였다.

미군정은 비열하게도 시위를 끝마치고 귀환하는 노동자들을 매복습격하여 30여명을 학살하고 5백여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감행했다.

이것은 더 큰 반미투쟁의 폭발을 가져오게 했다.

1946년 8월 하의도 농민들은 미군정에 맞서 빼앗긴 토지를 반환할 것과 소작료납부, 「하곡수집」을 반대해 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돌맹이와 곡괭이를 들고 집단적으로 무장경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이렇듯 각 계층 애국민중은 미국의 한국강점 첫시기부터 그들의 식민지예속화정책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웠다.

침략자들에게 자주권을 빼앗긴 민중은 싸워야 한다는 것, 싸우는 것이 민족이 사는 길이라는 것,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교훈인 것이다.
 

제주도 4.3 봉기
 

『경애하는 부모, 형제 여러분! 4월 3일 오늘 여러분의 아들딸 형제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 일어섰습니다. …우리 함께 조국과 민중이 이끄는 길로 결연히 떨쳐 일어서 행진합시다.』

1948년 4월 3일 애국적인 제주도민들을 망국적인 5·10단선을 반대하는 투쟁에로 부른 호소문 내용이다.

당시 미국은 이남에서 군정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나라의 분열을 영구화하고 이 땅을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 목적밑에 오래 전부터 키워낸 이승만일당으로 단독정부를 조작하려고 했다.

4월 3일 새벽 2시 5·10단선을 반대하여 제주도민들이 분기했다.

봉기자들은 『이승만 단독선거 결사반대』,『주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고 외치며 한라산을 무대로 하여 과감한 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경찰에게서 빼앗은 무기로 토벌에 나선 경찰과 맞서 싸웠고 밤마다 경찰서와 선거사무소를 습격하여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선거등록서류와 투표함, 투표용지를 불태워 버렸다.

무장봉기에는 제주도주둔 국방경비대의 애국적 장병들까지 합세하여 전체 도민의 86%가 참여했다.

결국 제주도에서 5·10단선은 실현될 수 없었다.

이에 놀란 미국은 미군고문을 제주도에 파견하고 수많은 군대와 경찰, 군함, 비행기까지 동원해 제주도 봉기자들에 대한 무차별살육을 감행했다.

이 살육만행으로 당시 도민의 3분의 1이나 되는 7만여명이 무참하게 희생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굴함없이 투쟁하였다.

제주도민중봉기는 미국의 식민지통치를 청산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찾으며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영웅적 항전이었다.

저 서귀포 바닷가에서, 한라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들려오는듯 싶은 메아리 『미국의 지배와 식민지독재정치를 반대하여 승리할 때까지 싸우라!』 오늘의 우리 민중을 각성시키며 투쟁에로 부르는 그날의 절규이다.
 

반미구국투쟁 10월민중항쟁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 반대!』,『정권을 인민위원회로!』,『미군정을 타도하라!』,『북조선과 같은 민주개혁을 실시하라!』

1946년 10월민중항쟁의 그날에 우리 민중이 외쳤던 구호들이다.

우리 민중의 반미항전사에 뚜렷한 자국을 남긴 영웅적인 10월민중항쟁은 대구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에 대한 무장경찰들의 무차별적인 발포를 계기로 발단되었다.

10월1일 대구시민 1만여명이 시청으로 모여들어 『쌀을 달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자 무장경찰은 시위군중을 향해 마구 발포함으로써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0월2일 분노한 대구시민들은 총탄에 맞아 쓰러진 희생자들의 시체를 메고 시위투쟁에 나섰다.

대구시민들의 격렬한 시위투쟁에 질겁한 미군정청과 친미주구배들은 탱크까지 내몰아 무차별 총포사격으로 수많은 시위군중들을 또다시 사살했다.

시위군중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그들은 대구경찰서와 파출소들을 기습, 점거하고 폭동에로 넘어갔다.

급해맞은 미군정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혈탄압소동을 벌였으나 항쟁의 불길은 삽시에 경향 각지로 확산되었다.

영남과 호남, 중부지방과 제주도 등 전역에 확대된 10월민중항쟁은 11월에도 힘차게 벌어졌다.

항쟁자들은 경찰서를 습격, 파괴하고 무기와 탄약을 빼앗아 무장을 갖추고 구금된 애국자들을 구출하고 친미주구들을 처단했다.

11월1일 나주에서는 1만여명의 항쟁자들이 10여개의 경찰파출소들을 습격했고 11월7일에는 보성일대의 항쟁군중들이 악질관리를 처단한 것을 비롯해 각지에서 투쟁이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10월민중항쟁은 대구와 서울, 부산과 목포를 비롯한 73개 시, 군들에서 벌어졌고 여기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과 시민 등 무려 2백30만명에 달하는 각 계층 민중이 참여했다.

참으로 10월민중항쟁은 미국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파쇼폭압을 반대한 반미구국항전이었으며 다시는 식민지노예로 살지 않으려는 우리 민족의 기개를 과시한 애국적 장거였다.
 

2.7 구국투쟁

 

미국은 1947년 10월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비법적으로 토의결정한데 이어 1948년 1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이 땅에 끌어들여 그 감시하에 단독선거를 강행함으로써 우리 나라를 분열시키려고 꾀했다.

미국의 이러한 분열주의적 책동에 맞서 각 계층 애국민중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입국과 망국단선을 반대배격하고 나라의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구국투쟁에 과감히 분기해 나섰다.

1948년 1월 8일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이날 서울의 여러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으며 1월 19일에는 경성전기회사 노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입국을 반대하는 애국민중의 투쟁은 마침내 경향 각지로 확대됐다.

2월 7일 서울, 인천, 대전, 목포, 부산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철도노동자들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물러가라!』,『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이남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 등의 구호밑에 총파업에 돌입했다.

투쟁은 삽시에 40여개의 도시를 포함한 경향 각지를 휩쓸었고 철도, 체신을 비롯한 각부문에 걸쳐 수백개의 공장, 업체 노동자들의 참가하에 대규모적인 동맹파업으로 확대되었다.

같은 날 전라북도 완주군 농민들도 투쟁에 나섰으며 경찰의 탄압만행에 격분하여 경찰지서를 들이쳤다. 합천, 김제를 비롯한 각지의 농민들은 시위와 횃불투쟁 등을 벌였다.

2월 13일 청년학생들은 서울 탑골공원 앞과 종로 네거리, 남대문 거리들에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월 7일부터 10일까지의 사이에만도 투쟁참가자들은 33개소의 경찰기관을 습격하고 47명의 악질경관들을 살상했으며 68개소의 전선을 끊어버리고 39대의 기관차와 5개소의 철길과 도로를 파괴해 버렸다.

이 투쟁으로 이남 전역에서는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었고 대부분의 공장, 기업체들에서 생산이 정지상태에 들어갔다.

2.7구국투쟁은 미국과 그 추종자들의 가혹한 폭압 속에서도 3개월 가까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이 투쟁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등 무려 2백여만에 달하는 각 계층 애국민중이 참여했다.

참으로 2.7구국투쟁은 민족의 분열을 막고 통일독립된 조국에서 살려는 우리 민중의 굳센 의지를 내외에 널리 과시한 애국적 반미구국투쟁이었다.
 
 

자료를 통해 본 한국침략사
 
 
갑신정변과 미국

1884년 12월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붕괴에 직면한 봉건제도를 뒤집어엎고 부르조아적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혁신세력인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이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에 의해 지도된 개화파운동은 당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우리 나라에 침략의 마수를 깊숙이 뻗치고 있던 미국의 중대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것은 개화파들이 선진자본주의열강을 동경하면서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개화파들을 이용하여 저들의 침략목적을 실현해보려고 당시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로 일본에 가서 운동자금획득에 분망하고 있던 김옥균을 포용하려고 획책했다. 일본주재 미국공사가 김옥균을 만나 3백만원의 차관을 제공하는 대가로 우리 나라의 전체 광물자원을 장악하려고 꾀한 사실이라든가,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모르스의 「미국무역회사」가 김옥균과의 3차에 걸치는 차관교섭을 통해 을릉도에서 50만달러에 해당하는 목재를 벌목하려고 책동한 것은 그러한 사례의 하나이다.

한편 미국은 일본과 결탁해 개화파정권의 수립을 통해 저들의 침략을 확대강화해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기 시작했다.

1884년에 들어서면서 청, 불전쟁이 터지고 내외의 사정이 청국과 수구파에 불리하게 조성된 것을 본 미국은 일본과 공모해 개화파들로 하여금 정변을 일으키도록 추동했다.

동년 10월이후 미국공사관 당국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개화파들에게 정변준비를 촉구하면서 그에 대한 「지원」을 보증했다.

역사기록에는 당시 개화파들은 『정변에 앞서 모든 거사계획을 미국공사 푸트와 상담했다』고 씌어져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수구파와 청군의 반격으로 「3일천하」로 실패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미국의 파렴치한 배신행위 때문이었다.

청일양군의 교전에서 개화파에게 정세가 불리하게 되자 미국공사는 약속을 배반하고 애당초 아무러한 원조대책도 취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미국공사는 자기들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개화파와 미국간에 아무런 연계도 가진 일이 없는 듯이 꾸며댔다.

그후 일본침략자들은 적반하장격으로 구실을 붙여 「갑신정변」으로 받은 피해에 대한 「사죄」와 「배상」지불을 우리 나라에 요구하는 「한성조약」을 강요했다. 그런데 이 조약설계자중의 한사람이 바로 일본정부고문으로서 일본대표의 수원으로 온 미국인 스티븐스였고 「중개조정」이라는 명색하에 우리 정부에 조약의 접수를 강요한 자가 바로 미국공사 푸트였다.

이처럼 미국은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온갖 교활한 책동을 다해온 흉악한 침략자이며 「갑신정변」을 파탄시키고 나라의 근대적 발전을 방해한 간악한 원수이다.
 

신미양요
 

역사에 「신미양요」라고 기록된 1871년 미국의 무력침공은 우리 나라에 예속적 불평등조약을 강요할 목적밑에 감행되었다.

미국은 우리 나라와의 조약체결에 대한 전권을 북경주재 미국공사 로우에게 주었다.

로우는 미국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와 함께 「코로라도」호를 이끌고 우리 나라에 기어들었다.

미국함대는 5척의 군함과 포 80여문을 가진 1천2백30명의 침략군으로 구성되었다.

5월 30일 강화도 남방의 물치도에 정박한 미국함대는 경기도 연안 일대의 해역에 대한 측량을 비법적으로 진행했다.

6월 1일에는 우리 나라에 대한 무력침공을 위한 군사적 도발사건을 조작했다.

이날 침략군은 「모노카시」호, 「팔로스」호와 4척의 소정으로 소위 「측량함대」를 조직하고 강화해협과 한강을 「측량」하려고 했다.

이것은 전쟁을 일으킬 목적밑에 진행된 고의적인 도발이었다.

물치도 근거지를 출발한 「측량」함대는 강화해협을 지나 북상하면서 우리의 주요한 요새지인 손돌목을 향해 전진했다.

손돌목은 내외 공사선을 막론하고 통행증이 없는 선박은 일체 통과를 불허하는 지점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군대를 만재한 6척의 미국함선의 손돌목침입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발포했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미국함대는 우리 포대를 향해 대응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우리 군의 대타격을 받은 미국함선들은 우리 포대를 진압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손돌목전투 이후 정부에서는 미국함대의 대규모적 무력침공을 예견하고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한편 본격적인 무력침공준비를 완료한 미국함대는 6월 10일 군사행동을 재개했다.

이날 침략군 7백59명은 강화도 초지진 남방에 상륙해 그 일대를 점령했으나 어둠이 깃들자 일시 후퇴했던 우리 군의 야습으로 쓰디쓴 참패를 당했다.

초지진 부근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미군은 11일에는 광성진을 점령하려고 했다.

미군은 광성진을 수륙양면으로 포위하고 기술적, 양적 우세를 이용해 공격을 감행했다.

광성진수비대는 무장에 있어서 뿐 아니라 숫적으로도 우세한 미군과 맞서 용감히 싸웠다.

미군은 광성진수비대의 영웅적 항거에 부딪쳐 황급히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강화도전투는 미군의 결정적 참패로 끝나게 되었다.

미군은 광성진전투에서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를 크게 파괴당했고 수십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는 등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침략자들은 강화도패전 이후에도 침략목적을 포기하지 않고 달성하지 못한 목적을 새로운 회유와 위협공갈로 이루어보려고 우리 정부에 수차에 걸쳐 서신을 보냈다.

놈들은 『귀정부는 속히 현명한 방책을 세움으로써 금후의 분쟁을 면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뻔뻔스러운 경고를 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와 우리 민중은 이것을 단호히 일축해 버렸다.

결국 미국함대는 7월 3일 물치도 근거지를 떠나 도주했다.

참으로 1871년 「신미양요」는 우리 나라에 대한 미국의 파렴치성을 드러내보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일합병」과 미국
 

미국은 역사적으로 우리 민중에게 많은 원한을 남겼으며 죄악의 산을 높이도 쌓았다.

그 많은 죄악들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나라를 강제합병하기 위한 일본의 침략책동을 적극 지지하고 비호해준 것이다.

미국은 자기들의 언론매체를 동원해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합리화」하는 선전활동을 광범위하게 벌여 일본을 우리 나라 강제합병에로 적극 부추겨주는 범죄적 책동을 감행했다.

당시 미국신문「아트루크」는 우리 민중이 일본의 통치밑에 들어 가는 데서 「행복」을 찾고 있다고 했다. 「뉴욕 헤랄드 트리뷴」은 「기뻐하면서 소위 독립에 영원한 이별을 고하라」라는 제목 아래 『…우리는 일본의 보호하에 있는 한국에 대해 기뻐하면서 그의 소위 독립에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바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우리 민족을 모독하였다.

이 시기 한국봉건정부의 「외부고문」으로 있었던 스티븐스도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게 되면서부터 한국에 유익한 것이 많아졌다』고 하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을 정당화하였다.

심지어 미국은 1907년 9월 미육군장관 타프트를 일본에 파견해 일본 수상 사이온지와 우리 나라의 종국적 처리에 대해 자기들의 견해가 서로 일치하며 미국은 종전처럼 『일본의 벗으로 언제나 남아있을 것』이며 『선행자들 (가츠라와 타프트)에 의해 표명된 의견을 확고하게 시인』한다는데 대해 완전히 합의했다.

이처럼 미국은 사이온지-타프트 비밀합의로 지난날 「가츠라-타프트협정」으로 강도적인 「을사보호조약」의 조작을 담보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일본의 우리 나라 강제합병을 담보해 주었다.

이러한 비밀합의에 기초해 미국은 「한일합병조약」초안에 대해 그것이 세상에 발표되기도 전에 전적인 동의를 표시하면서 『한국의 합병에 대하여서는 각국이 모두 다른 의견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와 담보를 받은 일본은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침략적인 「한일합병조약」을 강요했으며 우리 민중의 반항이 두려워 「합병조약」체결 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있다가 8월 29일에야 공포했다.

그후 일본의 「강제합병」소식에 접하자 미국은 『한국은 금후 일본통치하에서 급속히 진보하게 될 것이다』, 『이는 한국사람의 행복인 동시에 또한 열강의 행복』이라고 하면서 일본이 우리 민중을 식민지노예로 만드는 것을 극력 찬양했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은 미국이야말로 우리 민중을 노예화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악랄하게 책동하여 온 우리 민족의 극악한 원수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