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햇볕정책」을 논박함

- 정치평론가 정 남 -


 


「국민의 정부」가 선지 1년이 지났다. 「대통령선거」때 청와대당국자는 TV토론회에서 『집권하면 1년안에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자신과 복안을 갖고 있다』고 장담했었다.

그 「복안」이란 것이 「햇볕정책」이었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조소와 비난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미국이 「햇볕」위에 새로 씌워준 것이 「포용」이라는 너울이었다.

「햇볕」이든 「포용」이든 그 본태는 같은 것이다.

현집권자는 얼마전 취임 1주년 회견에서 「햇볕정책」,「포용정책」을 계속할 저의를 드러내어 또 물의를 빚어냈다.

나는 남북관계개선에 백해무익한 「햇볕정책」,「포용정책」의 진의를 해부하고자 이에 붓을 든다.

「햇볕」의 허구성

이 땅의 역대 정부들에는 제머리로 펴낸 대북정책이란 있어본 바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한미대사관에서 건네주는 백악관의 지령서가 곧 대북정책으로 표방되곤 했다.

현당국의 「햇볕정책」도 그렇다.

미국의 이북에 「힘의 정책」이 통하지 않게 되자 고안해낸 「연착륙」정책을 한국화한 것이 바로 「햇볕정책」이다.

「햇볕정책」은 고대 그리스 이솝의 우화에서 따온 유치한 것이라 하겠다.

북풍과 해님이 길가는 행인의 외투벗길내기를 하면서 북풍이 찬바람으로 벗기지 못한 외투를 해님이 햇볕을 쨍쨍 쪼여 벗기었다는 동심의 우화를 흉내낸 모작품이 곧 「햇볕정책」이다.

따라서 「햇볕정책」은 기원전 2천년으로 거슬러 올라야 하는 태고적 이방인의 머리를 빌려 이북의 옷을 벗기겠다는 소리이다.

작년 7월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안보장관회의에서 「햇볕정책」은 북이 입고 있는 『통제사회라는 외투, 계획경제체제라는 외투, 군사적 대결이라는 외투를 벗기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서 이는 『강력한 안보태세를 유지하면서 북의 변화를 유도하여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했었다.

특히 최근 청와대당국자는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햇볕정책」은 미국이 이전 사회주의나라들을 붕괴시키고 개혁, 개방시킨 정책과 같은 것이라는 망발을 늘어놓았다.

이로써 「햇볕정책」의 나상은 드러났다.

지금 내외여론은 「햇볕정책」을 『강풍으로 이루지 못한 북의 체제와해를 소위 햇볕으로 이뤄내겠다는 교활한 술책』이라면서 그것은 『화해를 지향하는 통일정책이 아니라 대결을 전제로 한 분단관리정책』이라고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정치, 경제, 군사의 모든 면에서 북의 옷을 벗기겠다는 「햇볕」타령은 그 발상부터가 세인의 경악을 자아내고 있다.

원래 남의 옷을 벗기려드는 행위는 초보적인 예의조차 망각한 반인륜적 처사로서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남의 인격을 모독하는 극히 부도덕한 악행이며 패륜패덕의 극치이다.

그런데도 「국민의 정부」가 「햇볕」을 운운하며 동족인 이북의 옷을 벗기겠다고 설쳐대니 이런망녕된 짓이 어데 있겠는가.

북에 빛과 열을 주겠다는 「햇볕」타령은 제 처지와 분수도 모르는 과대망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국민의 정부」하의 이남땅에 어느 뉘에게 줄 한점 빛이라도 있고 남을 포용할 품이라도 있단 말인가.

반세기가 넘도록 미국의 식민지속국으로 있는 이남에서는 대통령도 백악관의 인준으로 만들어지고 군통수권도 펜터건의 수중에 쥐어져 있다. 경제도 국제통화기금의 신탁통치에 목이 매어 재기불능의 빈사지경에 있고 문화도 양풍왜색에 멍들어 제모습을 잃은 판국이다.

이런 식민지동토지대, 암흑천지에는 그 어떤 자주의 빛도 민주의 열도 없고 인덕의 품도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이다.

이 땅에 있다는 것은 짓밟힌 자존과 묶이운 민주민권 뿐이고 도탄에 빠진 민생과 줄을 잇는 기업파산, 넘쳐나는 실업홍수와 자살대군 뿐이다.

그 어디나 차거운 음지 뿐인 이 땅의 감옥안에서는 고문과 회유에 시달리는 양심수들이 한줄기 자유의 빛을 그리고 있고 감옥밖에서는 감시와 추적에 쫓기는 수배자들이 민주의 햇빛을 갈망하고 있다.

사상과 이념을 달리하는 이남땅의 민족민주운동가들도 포용하지 못하고 일점혈육없이 고독하게 지내는 비전향장기수들에게마저 선정을 베풀지 못하는 꽁꽁 얼어붙은 이 땅에서 어찌 오늘의 삶과 내일의 희망을 주는 빛과 열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빛은 남에 아니라 북에 있다.

세인이 우러르는 절세의 위인도 북에 있고 시대를 풍미하는 주체의 빛발도 북에서 비치고 있다.

민족의 존엄을 과시하는 자주정치도 자생자활하는 자립경제도 무적필승하는 자위국방도 이북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위대한 영수의 두리에 전민, 전군이 일심으로 뭉치고 혼연으로 일체화된 이북은 시대의 항로를 밝히는 자주국창조의 등대로, 삶의 희열과 낙관이 넘치는 이상국으로 각광받고 있다.

강성대국창조의 양양한 내일로 향한 이북의 도도한 진군은 초대국의 봉쇄정책도 「핵사찰」압력소동도 무력화시키고 있다.

정녕 이북이야말로 위대한 영수의 향도아래 최상의 경지에 이른 인간의 존엄과 나날이 증진하는 민중의 복리, 무궁번영할 창창한 미래로 하여 지구촌의 선망을 모으고 있는 유일의 태양국이다.

이런 이북에 포용과 햇볕을 베풀겠다는 언동이야말로 감탕 속의 미꾸라지가 승천하는 용의 흉내를 내는 격의 꼴불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남안에서도 지역감정, 지역대립을 해소하지 못해 현당국과 여당은 「지역정권」,「지역정당」으로 비난받는 상황이다.

심지어 정치권내에서조차 국정의 동반자라는 야당을 포섭하지 못하고 한이불 속에 든 자민련과의 짝사랑도 간신히 지탱해 가는 실정이다. 이런 주제에 오히려 정견과 신앙, 출신과 경력의 차이를 가림없이 믿어주고 품어주고 이끌어주는 광폭정치의 본산지 이북에 대해 그 무슨 「포용」을 운운하는 것은 앙천대소할 정치만화가 아닌가.

단언컨대 자주권상실과 민주민권의 말살, 민생파탄의 내우외환이 겹쳐 제코도 바로 씻지 못하는 「국민의 정부」가 북을 향해 빛과 열을 주겠다고 광고하는 것은 언어도단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하겠다.

사실 그 무엇을 비쳐주어야 할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빛과 열에 주린 이남땅, 한국일 것이다.

「햇볕」의 실체

「국민의 정부」가 불어대는 「햇볕」타령은 구두선에 불과하다.

구시대의 반북대결악폐를 답습하고 있는 현당국의 「햇볕」이나 「포용」의 실체는 무엇인가.

출범후 지난 1년간 「국민의 정부」가 남발한 표리부동한 행실과 가공할 폭언들에 의해 「햇볕정책」의 기만적 실체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현집권자는 취임사에서 『정경분리원칙에 입각하여 북과의 경제교류』를 실시하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대북경제교류는 정치군사문제와 별도로 경제 논리에 따라 추진한다는 정경분리원칙이「햇볕정책」의 기틀로 설정됐다.

그러나 경제인들의 대북접촉은 「통일부」의 엄격한 사전승인과 통제하에서만 가능하다. 남북경협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각종 법안과 시행령의 독소조항들에 매어 항시적인 정치적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정경밀착의 상황하에서 고창되는 정경분리원칙이야말로 공염불이 아니겠는가.

당국은 금강산관광성사가 『정경분리원칙의 첫번째 가시적 성과물』이라고 떠들고 있으나 그것도 어불성설이다.

금강산관광으로 말하면 이미 10여년전에 남북의 민간급에서 합의를 보았던 문제이다. 지금껏 정치문제들을 코에 건 당국의 간섭과 방해로 무산상태에 빠져있다가 북의 아량과 선의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 금강산관광이다. 금강산관광이 정작 실행단계에 이르자 현정권은 개밥에 도토리처럼 밀려난 자신들이 심술궂은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던가. 다 자란 호박에 말뚝박는 격으로 갖가지 규제와 훼방을 일삼아 첫 관광선 운항을 두달나마 지연시켰고 관광객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까다로운 금지사항들로 얽매어 모처럼 마련된 가을철 관광의 흥마저 깨어 버렸다. 심지어 북에서의 관광기념품구입까지 그 한계를 그어 통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북에서 관광규제를 심하게 하는듯이 여론을 돌려 관광신청자들의 뒷다리를 잡아끌고 있으니 과연 여기에 그 무슨 정경분리가 있고 교류협력이 있단 말인가.

「국민의 정부」는 상호주의를 남북관계의 기본원칙으로 내세웠다.

상호주의란 하나를 주고는 하나를 받아내는 골목장사꾼의 천박한 행상논리다. 그것은 북에 그 무엇을 베푼다는 「햇볕」타령과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당국은 집권초기에 열렸던 북경 차관급회담장에 상호주의를 들고 나가 회담자체를 결렬시켰다. 상호주의를 고창하며 이북출신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을 차단했으며 남북관계를 피도 정도 통하지 않는 상거래관계로 퇴행시켜 놓았다.

현집권자는 지난 3월 3일 이른바 「특별대담」에서 세인의 비난을 받고 있는 「상호주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는가 하면 북출신 비전향장기수 송환문제를 또다시 상호주의라는 저울대위에 올려놓아 내외의 빈축을 샀다.

그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고창한 3단계 일괄타결안이란 것도 본질에 있어서 이름을 달리한 상호주의이다.

지금 세론은 「햇볕정책」을 광고하면서 상호주의라는 넝마상품을 내흔드는 「국민의 정부」의 추한 작태를 양대가리 걸어놓고 개고기파는 양두구육격의 고약한 행위로 야유하고 있다.

당국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햇볕정책」은 안보에 바탕하고 있고 안보와 화해협력이 상충될 때에는 안보를 우선시한다고 역설하곤 한다.

그들이 말하는 안보란 다름아닌 정권안보이다. 따라서 안보를 우선시한다는 것은 통일을 지향한 화해협력보다 정권안보를 우위에 놓는다는 것이며 군과 경찰, 「정보원」 등 권력유지수단의 강화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정권유지를 위해 강화된 파쇼폭압역량이 남북간 불신심화와 긴장격화를 자초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결국 안보우선론은 곧 화해협력부정론이며 반북대결론이다.

「국민의 정부」가 떠드는 「햇볕정책」의 실체는 북을 「주적」으로 규정한데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당국자들이 외쳐대는 「주적론」은 이북과의 공존을 부정하고 이북체제를 없애겠다는 잠꼬대같은 북침넋두리이다. 작금들어 현당국이 미국의 「5027작전」수행의 첨병이 되어 광적으로 벌이는 제2의 6·25전쟁도발책동은 「주적론」의 집중적 발로로 된다.

온 국민은 피를 나눈 이북형제들을 무찌르고 타도해야 할 「주적」으로 선언하고서도 「햇볕」과 「포용」을 운운하는 당국의 이율배반적 행태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

제반 사실은 「국민의 정부」가 「전향적인 대북정책」이라고 광고하는 「햇볕정책」은 북과의 화해협력이 아니라 불신과 긴장격화를 추구하는 대결정책이며 공존과 공영이 아니라 붕괴와 전복을 꾀하는 전쟁책동이라는 것을 웅변해 주고 있다.

총평해서 「햇볕정책」이라는 것은 역대 정권들의 반북대결정책의 연장이며 그 탈바꿈에 지나지 않는다. 민심은 반민족이며 반통일적인 「햇볕정책」에 단호히 등을 돌려대고 있다. 그런데도 현집권자가 「햇볕」타령을 계속하면서 외국에까지 들고 나가 지지를 구걸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고 가소롭다 아니할 수 없다.

온 겨레는 「국민의 정부」가 「햇볕」이다 「포용」이다 하는 낱말로 세상사람들을 웃기지 말라고 절규하고 있다.

현당국은 진실로 「국민의 정부」로 모습을 보이려면 아무 시샘없이 이북의 자주정치, 민족대단결정치부터 따라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