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장기수들과 그 가족들을 찾아]

 


평양고려호텔에서 만난 신념의 강자들

지난 9월10일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나고 싶은 충동을 누를길 없어 그들이 머물고 있는 평양고려호텔을 찾았다.

우리가 고려호텔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이었다. 우리가 비전향장기수들과의 면담을 요청하자 그들을 안내하는 성원들이 몹시 난처해 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인즉 지금 당과 정부에서는 1주일전에 조국의 품에 안긴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최대의 안정과 휴식 그리고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려 온 그들에 대한 집중치료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와도 면담을 하지 않게 했다는 것이었다. 위대한 어머니의 품이 수십년간 감옥에서 잘 싸우고 돌아온 아들들을 얼마나 따뜻이 품에 안고 있는가를 눈물겹게 느끼게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한시라도 빨리 남녘민중들에게 전하려고 하니 잠깐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마침내 그 안내성원은 그들이 지금 대동강유람을 하고 돌아와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식사후 쉬어야 한다, 그러니 절대로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약조를 하고 그들에게 안내해 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비전향장기수는 김우택선생이었다.

첫눈에 선생은 대단히 어진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경상북도 예천군이 고향이라고 했다.

이북에는 일점 혈육도 없다고 하는 그는 조국의 품에 돌아온 소감을 묻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통일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한 것 없이 감옥살이만 하고 돌아온 저희들인데도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이토록 크나큰 사랑과 은정, 영광을 다 안겨주시니 죄송스런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에 떠받들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지옥의 유황가마 속에서 헤매이던 사람이 무릉도원, 천당에 온 기분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같이 온 모든 동지들이 구름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지요.』

그러면서 그는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만도 한가슴에 받아안기 어려운데 전체 조국인민들이 진심으로 환대해 주니 감사한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얼마전에는 기름기 도는 햇쌀과 정성들여 키운 열대메기를 굉장히 보내왔고 조선인민군 군인들은 병약한 몸을 추켜세우는 데는 산꿀이 좋다고 하면서 많은 양의 산꿀을 보내왔다고 감동을 금치 못해 했다. 그리고 매일 전국 각지에서 보내오는 편지를 읽으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김우택선생이 공화국제도하에서 생활한 나날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날은 인생의 참된 가치와 삶의 보람을 알게 된 나날이었고 그 귀중한 것을 절대로 저버릴 수도, 배반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선생은 어떻게 40년간 감옥에서 그 모진 고통을 이겨내며 신념과 지조를 지킬 수 있었는가고 묻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늘도 볼 수 없고 누울 수도 없는 0.75평의 독감방에서 참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념과 지조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대원수님과 김정일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랑에 대한 얘기는 정말 고무적이었습니다. 이인모동지가 북송된 후 이북서 들려온 소식은 참말로 저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위대한 사랑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억척같은 신념이 이 가슴에 자리잡더군요. 김일성대원수님과 김정일장군님께서 계시는 북쪽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또 드렸어요.』

그의 눈빛은 감사의 정으로 젖어든다.

남쪽에 있는 잊지 못할 동지들과 가족, 친척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시라고 하자 그는 모두 건강하여 통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자는 것과 굳세게 싸워 통일된 후 기쁜 마음으로 만나자고 했다.

이제는 선생을 쉬시게 해야 한다는 안내성원의 재촉을 받고 시계를 보니 언제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선생의 말씀에 심취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진 다음 같은 층에 있는 우용각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목소리도 쟁쟁하고 말씀도 논리있고 재미있게 했다. 어떻게 그렇게 수십년세월 몸서리쳐지는 그 고초를 이겨낼 수 있었는가를 묻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죽을 각오를 하면 견딜 수 있어요. 조국인민들도 죽음을 각오한 자 이 세상에 당할 자 없다는 각오와 배짱을 가지고 유일초대강국이라고 자처하는 미국과 싸워이기지 않았습니까? 죽으면 죽었지 우리가 어떻게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의 은공을 배반할 수가 있고 고마운 이 제도를 배신할 수 있겠어요.』

우용각선생은 그토록 경모하던 김일성주석님께서 서거하신후 언론매체들이 북의 「붕괴」요, 「변화」요 하면서 굉장히 떠들었다고 하면서 그때도 비전향장기수들은 끄떡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또 한분의 김일성주석님께서 계신다. 나는 조선노동당원이다. 당원은 당과 운명을 같이 한다, 이런 각오가 생기더군요. 이렇게 생각하니 무서운 것도, 두려운 것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풍파도 두렵지 않습니다.』

신념에 넘친 그의 목소리는 온 방안에 울려퍼졌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분열된 조국에서 사는 우리 민족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조국통일을 최대의 애국으로 삼고 살며 투쟁해야 합니다. 언제나 조국통일을 생각하고 하나의 일을 해도 조국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며 모든 사색과 활동을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애족의 위업에 바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국통일을 위해 한몸 내대고 싸운 것처럼 남은 여생도 그렇게 바칠 생각입니다.』

비전향장기수들, 그들은 참으로 마음이 끌리고 존경이 가는 분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남은 여생이나마 행복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라며 그들과 헤어졌다.

조국진 최경수 (평양특파원)
 

가족들의 심정

지난 9월 24일 우리는 비전향장기수들이 송환된후 그 가족들의 심정을 알고 싶어 취재의 길에 올랐다.

우리가 처음 찾은 곳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북새동에 자리잡고 있는 비전향장기수 김인서노인의 맏딸 김화심(54)씨의 집이었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아버지를 만나 얼마나 기쁘겠느냐고 말머리를 떼자 김씨는 『정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요. 늘 아버지생각에 가슴 속에는 수심이 차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말끔히 가셔지고 온 가정에 밝은 웃음이 넘쳐 납니다. 저는 요즘 자나깨나 우리 가정에 밝은 웃음을 찾아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 또 올리고 있습니다.』

김씨는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께서 자기 아버지를 비롯한 비전향장기수들을 구원해 오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시었는가를 다는 모를거라고 하면서 두꺼운 책 한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김인서노인의 사진과 함께 경력 그리고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께서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주신 사랑과 은정, 그들의 송환을 위해 취해주신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그 책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참으로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이시야말로 비전향장기수들의 보호자이셨고 구원자이심을 더욱 똑똑히 알게 되었다.

김씨는 장군님께서 아버지를 비롯한 비전향장기수들을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고, 혁명하는 사람은 의리를 지킬줄 알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간곡한 말씀을 주시면서 비전향장기수들을 위해 온갖 조치를 다 취해 주셨다고 말했다. 이북이 그처럼 어려운 고난의 행군을 하던 시기에도 장군님께서는 자기와 동생을 멀리 외국에까지 보내시어 40여년 만에 아버지와 전화로 상봉할 수 있도록 크나큰 은정을 안겨주셨고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것을 아시고는 귀중한 약들을 빨리 보내주도록 조치를 취해주셨다는 것이다.

『정녕 우리 장군님은 아버지와 우리 온 가족의 은인이시고 보호자이십니다.… 그분처럼 전사들의 운명을 책임져 주시고 그분처럼 숭고한 의리심을 지닌 위인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김씨의 목소리는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의 정에 젖어 있었다.

이날 우리는 평양시 선교구역 장춘 2동에서 살고 있는 비전향장기수 임병호씨의 아들 임광재씨의 집도 찾았다.

세칸짜리 아담한 주택에서 임광재씨의 다섯식구가 살고 있었다. 요즘 그의 가정은 매일 명절처럼 흥성거리고 가는 곳마다에서 축하인사를 받는단다.

『진정에 넘친 사람들의 축하인사를 받을 때마다 우리 장군님이 아니시면 어찌 아버지와의 상봉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젖어 납니다. 주석님과 장군님은 우리 아버지를 신념의 강자로 되게 해주시고 우리 집안에 행복과 기쁨을 안겨주신 은인이십니다.』

임광재(43)씨는 태어나 14일만에 아버지와 헤어졌다고 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10년이 네번이나 지나가도록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란 그는 이번에 아버지와 감격적인 상봉을 한 것이다. 임광재씨는 은혜로운 사랑의 품 속에서 원산경제대학과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국제관계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지금은 중앙기관에 소환되어 일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너무 기뻐 어쩔바를 몰라하면서 『그래 나도 그 은혜로운 사랑의 품을 절대로 배반할 수가 없어 지금껏 목숨걸고 싸웠다』고 말했다. 비전향장기수 임병호씨는 아버지 없는 아들을 공부시켜 주고 간부로 내세워 주신 주석님과 장군님께 감사를 드리며 아들의 얼굴을 쓸어보고 또 쓸어 보았다고 한다.

비전향장기수 가족들 그 누구를 만나보아도 자기들을 따뜻이 보살펴 주신 주석님과 장군님의 은혜로운 사랑과 은정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남편과 헤어지던 바로 그 집터에서 35년 세월을 기다렸다는 평양시 용성구역 용성 1동에서 살고 있는 비전향장기수 박완규씨의 아내 오덕실씨도 만났다.

지금 그 집터에는 현대적인 아파트가 높이 솟아있다. 오씨는 그 아파트 2층3호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지금까지 살았다고 한다. 당조직에서 중심구역으로 이사하라고 권유했지만 오씨는 혹시 남편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아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남편과의 상봉을 축하하자 그녀는 눈물이 글썽하여 『다 우리 장군님의 덕분이지요』라고 하며 사실 남편의 소식을 모를 때는 혹시 자기가 직장에 나간 뒤 남편이 빈집에 들어와 코를 골며 자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방문을 열때면 귀를 강구었는데 비전향장기수로 옥중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터는 살아서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 장군님이 아니셨으면 저의 남편이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고 제가 어떻게 남편을 만날 수 있겠어요. 경애하는 장군님은 진정 우리 모두의 생명의 은인이시고 삶의 태양이십니다.』

남편, 아버지를 만나게 된 감격에 앞서 그 상봉을 마련해 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정이 넘쳐나는 비전향장기수 가족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원하며 그들과 헤어졌다.

조국진, 최경수 (평양특파원)
 

과분한 환대, 넘치는 감격

얼마전 나는 또다시 비전향장기수들이 머물고 있는 평양고려호텔을 찾았다.

먼저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선생과 만났다.

「총각할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는 그는 이남에서 겪은 옥고에 대해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45년의 징역살이를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조국의 품에 안겨 생활하면서 그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돼요. 내가 45년동안을 징역을 산 것은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에는 언제나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께서 계셨습니다. 내가 그 땅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조국의 통일이 반드시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적 지조를 지킬 수 있었어요. 저는 어려서부터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버지와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어요.』

경기도 양평군 출신인 김선명선생은 김일성장군님의 품 속에서 값진 삶을 누려 본 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잊지 못할 기간이었고 그때 다진 맹세를 저버릴 수 없고 목숨바쳐서도 지켜야 할 귀중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인민군대생활 1년밖에 안되지만 처음으로 김일성장군님의 품에서 사람대접을 받았습니다. 감옥안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마다 이런 생각했습니다. 이제 전향하면 50년은 더 살 수 있겠지만 그 50년이 내가 사람대접을 받으면서 산 1년동안의 인민군생활에 어찌 비길 수 있겠는가. 절대로 바꿀 수 없다. 인민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김일성장군님의 품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남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인데 그런 세상, 그런 사람들을 어찌 배반할 수 있겠는가고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김일성장군님은 언제나 마음의 억센 기둥이셨고 운명의 태양이셨으며 김정일장군님은 오늘의 김일성장군님이셨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을 데려오기 위해 여러 차례 가르치심을 주셨고 6.15남북공동선언을 통해 그들을 전원 송환하도록 해주셨다.

비전향장기수들의 생명의 은인이시고 빛나는 삶의 태양이신 김정일장군님께서 꿈만 같은 과분한 환대와 은정을 베풀어 주시는데 대해 김선명선생은 감사의 큰절을 드리고 또 드린다고 말했다.

나는 김영달선생도 만났다.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인 선생은 평양에 와서 지금 「천국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 송환에 대해서, 위대하신 장군님의 노고에 대해서 올 때부터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넘어 왔습니다. 넘어 오면서 우리를 그렇게까지 환영해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그날을 장군님께서는 공일로 선포하시고 개성으로부터 평양으로 오는 연도에서 많은 인민들이 우리를 환영해 주었는데요. 정말 눈물도 많이 흘렸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할지 몸둘 바를 모르고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과분한 환대를 받던 감격에 대해 얘기하는 선생의 눈에는 맑은 이슬이 맺혔다.

잠시 격정을 누른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평양에 와서 생활하는 과정에서도 정말 매일 매 시각 생일을 쇠고 명절을 맞는 즐거움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고 오늘도 꿀을 아홉통이나 이렇게 건강을 회복하라고 보내주시고 또 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정말 장군님의 그 은정에 무엇으로 다 보답하겠습니까. 남은 여생을 강성대국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또 다지고 있습니다.』

그의 방에 놓여 있는 「산꿀」(산청)이라고 쓴 지함을 보니 나 역시 생각이 깊어졌다. 이미 장군님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께서는 조국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꿋꿋이 바쳐가고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그들을 다 데려다가 금방석에 앉히고 싶다고 하신 바로 그 위대한 사랑이 비전향장기수들의 생활의 구석구석에 그대로 미치고 있는 것이다.

전사들에 대한 사랑과 의리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지니신 천품이다.

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에 의해 잃었던 청춘을 되찾고 누구도 누릴 수 없는 참삶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그들을 축복해 주며 나는 호텔을 나섰다.

조국진 (평양특파원)
 

「푸른 소나무」에 비낀 신념

지난 9월 2일에 북송된 비전향장기수 이경찬선생이 거처하는 평양고려호텔의 방에 들어서면 유달리 눈길을 끄는 그림이 벽에 걸려있다.

가로 0.7미터, 세로 1.7미터 정도의 「푸른 소나무」그림이다. 이 그림은 보면 볼수록 뜨거운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선생이 남에 있을 때 손수 그려가지고 온 것이란다. 사시장철 푸르름을 변치 않는 억세인 소나무그림은 내용 그대로 선생의 변치않는 신념과 지조를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림이 아주 뜻이 깊은 것 같다며 어째서 잎사귀 뿐 아니라 가지며 기본줄기까지 푸르디 푸른 진한 녹색, 진하다 못해 검녹색으로 되어 있는가고 묻자 그는 바로 거기에 이 그림의 진의가 있다고 대답한다.

말하자면 애국충정과 불굴의 기개를 형상했다는 것이다. 이 그림 하나만으로도 선생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잘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과분한 치하라고 어줍어 하는 그를 이끌어 신념의 「푸른 소나무」를 배경으로 선생을 사진촬영했다.

선생은 소탈하고 대단히 어진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디에 그런 굳센 신념과 불굴의 지조가 간직되어 있을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선생은 참된 삶을 주신 김정일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정으로 몸둘 바를 몰라 한다. 조금 전에도 그는 청춘의 활력을 되찾은 듯 호텔의 계단을 오르고 내리며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몸이 건강해야 장군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통일을 위해 적으나마 보탬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그 신념과 의지를 저의 가슴 속에도 새겨넣겠습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취재방문이라기 보다 정신수양을 위해 배우러 간 학생 된 기분이었다.

이경찬선생은 개성시 장풍군 태생으로 광복년에 11살이었다고 한다. 1935년 11월 15일생인 선생은 35년간 옥중투쟁을 하면서도 김일성주석님의 품속에서 행복하게 살던 때를 잊을 수 없었고 사람답게 살도록 해주신 주석님의 은덕을 늘 생각했다고 한다.

선생은 방안에 가득 쌓여있는 선물들을 가리키며 『김정일장군님께서 저희들의 운명을 구원해 주시고 오늘은 또 저렇게 많은 선물까지 보내주시니 이 은혜에 무엇으로 다 보답하겠습니까』라며 감격해 한다.

그는 선물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보여주었다. 방한외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옷들, 이불들, 건강을 회복하라고 보내주신 산꿀, 심지어 손톱깎이까지 일식으로 마련된 생활필수품을 비롯하여 김정일장군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정말 크고도 따사롭고 다심하면서도 세심하다.

나는 그에게 이북에 온후 여러 곳을 참관했는데 느껴지는 것은 어떤 것인가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은 조국의 품에 안긴후 위대한 영수를 모시고 있는 자긍심이 넘쳐나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는 조선노동당창건 55돌 경축행사들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고 한다. 김정일장군님의 주위에 하나로 똘똘 뭉친 일심단결의 모습은 우리 나라밖에 없을 거라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단결의 중심이 확고해야 견고한 단결로 되는 거예요. 단결이 확고하자면 단결의 중심에 대한 신뢰감이 있어야지요. 내 자신도 그 신뢰감이 있어 수십년 세월을 그 생지옥에서 살아올 수 있었지요.』

이경찬선생은 조국에 돌아와서 보니 그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단결의 중심이 확고하니 마음이 든든해진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학자는 아니지만 고구려의 기상이 뚜렷이 안겨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수대의사당, 인민대학습당을 비롯해서 자기가 본 건축물들에서 그렇게 느꼈다고 한다. 웅장화려하면서도 만년대계인 이북의 건축물은 확실히 형식도 좋지만 내용도 좋다는 것이다. 이북의 건축물 하나를 봐도 자기의 토양에 든든히 뿌리를 박고 있는데 이남의 건물들은 눈가림식이고 겉치장 뿐이어서 보기에 벌써 사상누각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사대와 굴종을 몰랐던 옛고구려사람들처럼 강인하다고 말했다.

『10만명이 참가한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우리 나라밖에 못합니다. 설사 10만명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처럼 조직력있고 규율성있게 하나의 예술대걸작품으로 만들지 못해요. 부드러우면서도 용감하고 씩씩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보니 민족적 자긍심이 넘쳐 나더군요.』

그는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나는지 인상적인 장면들을 이야기했다.

이경찬선생은 자기는 앞으로도 「푸른소나무」의 기상을 간직하고 김정일장군님을 받들어 생의 마지막 호흡까지 다 바치겠다고 말했다.

조 국 진 (평양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