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광복 50돌



 

8.15조국광복, 그날의 기쁨을 통일의 환희로 이어놓자

 


3천리강산에 통일의 여명이 밝아오고 겨레의 통일열망이 뜨겁게 끓어번지고 있는 가운데 쉰다섯번째 광복절을 맞는다.

8.15조국광복은 어느 강대국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다. 역사는 강대국들이 작은 나라를 동정하고 약소민족에게 자유와 독립을 선사하는 전례를 알지 못한다. 한민족의 독립과 자주권은 오직 그 민족자체의 주체적인 노력과 불굴의 투쟁에 의해서만 쟁취되고 보존될 수 있다.

8.15조국광복은 분명히 강도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우리 겨레의 장구하고도 간고한 투쟁에 의해 이루어진 고귀한 결실이었다. 민족주체의 힘으로 쟁취한 자력독립이라는 여기에 바로 8.15조국광복의 참의미가 있고 중대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광복 55돌을 맞는 우리는 식민지민족해방투쟁사상 처음으로 자력독립을 이룩하시고 겨레에게 자유와 해방을 안겨주신 절세의 애국자이시고 만고의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주석님의 불멸의 업적과 은공을 가슴깊이 새김과 아울러 8.15광복을 맞던 그날의 기쁨을 통일의 환희로 이어놓을 결심을 더욱 굳게 다져야 할 것이다.

다 아시다시피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일찍이 조국광복의 길에 나서신 첫시기에 벌써 식민지민족해방투쟁을 종주국의 무산혁명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던 기성이론의 틀에서 벗어나 식민지민중이 자체의 힘으로 독립과 해방을 쟁취하는 자주독립의 진로를 모색하시었다. 그리고 화성의숙과 길림시절의 학생운동시기와 길림감옥과 출옥후 지하투쟁의 나날 민중 속에서 찾은 진리와 교훈을 종합체계화하신데 토대하여 1930년 6월 카륜회의에서 주체사상의 원리를 천명하시고 주체적인 당창건노선과 항일무장투쟁노선,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명시하셨다. 그리하여 사대와 파쟁의 악습으로 실패와 좌절의 악순환만 거듭하던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주체의 기치밑에 자주성의 원칙에 따라 단결의 위력으로 승리적으로 전진시킬 수 있는 활로가 열리게 되었다.

주석님께서는 특히 백두산기슭의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조선인민혁명군)를 창군하시고 15성상 백두산을 중심거점으로 하여 국내와 만주의 광활한 지역을 종횡무진하시면서 일만군경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하시었다. 그리고 「조국광복회」 (반일민족통일전선체)를 창립하시고 그 주위에 광범위한 군중을 묶어세우셨으며 항일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전반적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승리에로 이끄시어 마침내 조국광복의 대업을 이룩하시었다.

그러기에 8.15의 그날 온 겨레가 감격에 울고 웃으며 「김일성장군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것은 그야말로 광복의 은인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고 민족적 영웅을 환영하는 겨레의 대환호, 칭송의 대합창이었다.

그런데 광복의 기쁨이 졸지에 분단의 아픔으로 변할 줄이야. 미국의 강점으로 인한 국토양단과 분단구조의 고착으로 한국민은 또다시 외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반세기가 훨씬 넘도록 예속과 독재, 분단이라는 3중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와 현실은 한국민을 8.15광복의 기쁨을 되찾기 위한 성스런 투쟁에로 부르고 있으며 그것은 민족자주와 민족대단결에 의한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사적 대제의 실현을 촉구하고 있다.

6.15남북공동선언은 대망의 새 천년의 첫해, 광복 55돌을 맞는 뜻깊은 해에 세운 통일의 새로운 이정표이다. 공동선언의 발표와 그 이행을 위한 실천조치들로 하여 통일로 가는 길에 전환적 국면이 열리고 3천리강산에 통일의 서광이 비꼈다. 공동선언의 기본정신과 합의사항들을 차질없이 실천하여 통일로 이어놓을 때 한국민은 8.15광복의 기쁨을 되찾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남에 있건 북에 있건 해외에서 살건 누구나 통일위업에 공헌해야 할 회피할 수 없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한민전의 전위투사들과 각계 애국민중은 말로만 외치는 통일이 아니라 실천으로 8.15광복의 기쁨을 통일의 환희로 이어놓음으로써 조국과 민족앞에 지닌 역사적 소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기다리는 서울
 


한국사연구회 교수 한 성 철


 


해님이 뜨겁게 빛을 뿌린다.

열정의 이 계절에 행운이 깃들었는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김정일장군께서 적절한 시기에 서울에 내려 오시게 된다는 반가운 소식에 접했다. 50년전 바로 이 여름에 꿈속에서도 그리웠던 김일성주석께서 소문없이 오시어 이남땅에 햇빛밝은 참세상을 열어주셨던 그 서울이다.

행복과 기쁨에 울고 웃으면서도 그때에는 미처 몰랐던 주석의 서울행실록을 떠올리며 내 오늘도 북한산 넘어 북녘을 우러러 그리움에 젖어 이 붓을 든다.

소원이 풀리던 날

50년 7월16일이었다.

이남민중이 일구월심 뵙고싶어 하던 김일성주석께서 바로 이날 서울에 오셨다. 이 무렵 서울사람들은 미국과 매국배족집단의 북침에 정의의 성전으로 반격해 나선 인민군대를 맞아 감격과 환희에 넘쳐 주석께서 오실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김일성주석께서 서울에 오신 것은 햇빛같이 밝은 세상에서 살려는 이곳 사람들의 세기적 소망을 이루어주신 대경사였다.

아득한 옛날 조상들이 백두산지맥이 한강변에 솟구쳐 올린 북한산기슭에 자리를 잡은 후 그 소망을 안고 살아왔지만 서울은 언제 한번 밝은 빛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빼앗기고 버림받고 희망마저 다 잃어버린 서울이 한줄기의 광명을 보게 된 것은 김일성주석께서 저 백두산에서 울리신 항일대전의 총성이 북한산에 메아리쳐오고 그분의 곁에 항일의 여장수와 백두광명성이 함께 계신다는 소식이 전해진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서울은 기다리며 살았다. 주석은 우리 겨레에게 생명을 주시고 희망을 주신 광복의 태양이셨다. 그래서 서울사람들은 남대문에 그분을 칭송하는 구호를 써 붙이고 우러렀고 북한산계곡의 노송에 새겨진 3대장군칭송구호를 보며 힘을 얻었던 것이다.

주석을 기다리는 마음은 마침내 8.15광복을 계기로 활화산처럼 분출했으니 오늘도 그날의 환희를 잊을 수 없다.

백두산에 높이높이 진을 치고요

간도천지 왜놈들을 한칼에 꿰어

오신다네 우리 장군 김일성장군

동무들아 모두들 반겨맞으세

우리 조선 우리 겨레 자랑거릴세

만세만세 개선장군 김일성장군

그때 나는 「어린이동요」책에 실린 이 동요를 부르며 주석을 마중하려 어른들을 따라 옛 종로경찰서의 붉은 벽돌집 앞을 지나 역전광장으로 달려갔다.

노동자, 농민, 청년대표들이 주석께 편지를 올리고 인텔리, 종교인, 각계 인사들이 평양길에 오른 것도, 서울에 「김일성장군 입경환영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김일성장군지지동맹」이 활동한 것도, 4월연석회의때 백범 김구일행이 북에 다녀 온 것도 주석께로 향한 민심의 분출이었다.

주석을 모시고 통일된 조국에서 살고싶어 그분의 존함을 목메게 부르며 목숨바친 사람은 또 얼마였던가. 여운형, 성시백, 김삼룡열사도 있었다. 어둠이 짓누르는 감방에 밝은 햇살이 비쳐든다면서 『아, 보고싶은 북쪽하늘이여!』목메게 부르짖은 시인 유진오도 있었다.

그처럼 애타게 기다리던 그 태양 김일성주석께서 서울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서울사람들은 그것을 몰랐다. 사람들은 열광적인 환영의 꽃바다위에 주석을 모시고 싶었지만 그분께서는 너무도 조용히 오셨던 것이다. 평생을 민중을 위해 민중 속에서 민중의 봉사자로 사신 주석께서는 이남민중을 위해 전쟁의 험한 길을 소문없이 오셨다. 그것은 역사만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주변에서는 주석의 신변을 걱정하여 전선이 지척인 서울에 오시는 것을 극력 만류했다고 한다. 허지만 주석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다 한다.

…전선길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하여도 우리는 지체할 수 없소. 지금 전선의 동무들과 해방을 맞이한 남녘의 인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소. 그들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주저하고 있겠소.

자! 어서 서울로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김일성주석께서는 수수한 군복차림으로 일반 지휘관들이 타는 「가즈-67」형 군용승용차를 타시고 특별한 호위도 없이 서울길에 오르셨다 한다.

참사랑의 마음은 험한 길 궂은 길을 가리지 않고 찾아간다. 미군비행기의 폭격으로 길가에서 폭탄이 터져 화광이 번쩍이고 기총탄이 차체를 스치는 아슬아슬한 길이었고 탱크와 포차들이 붐비는 도하장도 건느는 험한 길이었다. 임진강 인도교가 끊어져 캄캄한 밤에 4백미터가 넘는 철교의 침목을 타고 넘으셨다니 그 어려움을 어찌 다 상상할 수 있으랴.

주석께서는 그 속에서도 길가에서 농민을 만나시면 차를 멈추시고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가고 하시며 여기서 싸움이 있었던만큼 주변에 폭발물이 많이 널려 있을 수 있으니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고 걱정하셨다.

김일성주석께서 험한 길을 헤쳐 미아리고개턱에 오르신 것은 이날 이른 새벽이었다. 밤새도록 달려온 승용차는 먼지를 뒤집어 쓴채 뜨거운 열기를 뿜는데 주석께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서울거리를 굽어보셨다. 악몽같은 세상에서 몸부림쳐온 서울은 그렇게도 뵙고싶었던 김일성주석께서 오신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이때부터 주석께서는 서울에서 소문없이 나날을 보내셨다.

그분께서는 7월16일부터 17일까지 처음 서울에 오신데 이어 7월31일부터 8월3일까지 두번째로 서울에 오시어 충청도 수안보의 미릅재아래 석문동까지 현지지도의 수백리길을 이으셨고 8월9일 또다시 오셔서도 8월14일 저녁까지 서울에 계셨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그 나날에 긴긴세월을 빼앗기고 짓밟히며 고통 속에 살아왔던 이남민중의 멍든 가슴을 쓰다듬어 주시고 이북과 같은 행복의 밝은 세상을 열어주셨다. 서울은 비로소 자기의 소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천년이 간들 잊으랴, 만년이 간들 잊으랴, 주석께서 베푸신 따스한 은정에 고맙기만 했던 그때를 어느 누가 잊으랴!

태양의 빛발아래서

해님은 소리없이 찾아와서 소리없이 비쳐준다. 서울은 소문없이 찾아오신 김일성주석으로부터 사랑을 받기만 했다.

주석께서는 서울에 오시자 민생을 살피시고 주기만 하셨던 것이다. 예로부터 승리한 군사령관이 전선이나 점령지구에 군사를 지휘하려 찾아간 일은 있어도 민생을 돌보려 찾아간 예는 없었다. 주석께 있어서 전쟁은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한 성전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가혹하면 할수록 민중에 대한 보살핌을 군지휘와 함께 뗄 수 없는 작전으로 여기신 주석이셨다.

김일성주석께서는 피로도 푸실 사이 없이 종로구 옛 「중앙청」에 자리잡은 전선사령부에서 작전을 지휘하시는 한편 이 땅에서 민중의 밝은 세상을 열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대책을 세우셨다 한다.

사랑은 고통이 있는 곳부터 찾아간다.

서울에 처음 오신 주석께서는 다녀보고 싶은 데가 많으셨겠지만 민족의 고통이 서려있는 서대문형무소부터 찾으셨다. 그때 주석께서는 우리 동무들의 피와 숨결이 어려있는 서대문형무소의 지붕과 담벽이라도 보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시며 형무소로 가셨다.

강우규의사와 오동진독립군사령을 비롯한 독립운동자들의 원혼이 스며있고 주석의 삼촌이신 김형권선생과 자신께서 키우신 권영벽, 이제순, 이동걸, 지태환 등 열혈혁명가들의 불굴의 넋이 깃든 곳, 8.15후 이 땅의 수많은 유명무명의 애국자들의 통일염원이 서려있는 바로 그곳에서 주석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셨다 한다.

주석께서는 서울시내를 돌아보시면서도 빈민지대부터 찾으셨다. 오늘의 청계상가 지구인 청계천 변과 시내 빈민굴의 헐벗은 아이들, 빈곤에 절은 여인들… 허지만 그들의 얼굴은 새 세상을 맞아 행복에 넘쳐 있었다.

주석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가난을 헤아리시며 마음 쓰려 하셨고 관계간부들을 부르시어 시민들이 생활걱정을 하지 않도록 조처하셨다.

경무대를 돌아보실 때에는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다 피란을 갔다는 것을 아시고 그들을 데려오도록 하셨다. 그리고 돌아온 보일러공 김재익씨를 만나주시고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고 하시며 그의 눈물겨웠던 과거사도 다 들어주시고 이제는 민중이 주인된 새 세상이 왔으니 자식들을 대학까지 얼마든지 공부시킬 수 있다면서 따뜻한 말씀도 해주셨다.

서울은 김일성주석을 맞이하여 너무도 크고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아 안았다.

주석께서는 이남민중에게 「하늘의 권좌」를 주셨다.

그분께 있어서 민중은 곧 하늘이었고 「이민위천」은 그분의 정치철학이었다. 주석은 고궁의 봉건통치에 짓눌려 살았고 총독부의 살인통치에 피흘리며 살았던 민중을 나라의 주인으로 내세워 주셨다.

시청자리에는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가 자리잡고 구청에서도 동사무소에서도 민중의 대표들이 일했다. 며칠전만 해도 억압 속에 살던 서울철도공장, 금성방직공장의 노동자도, 평택, 이천의 고용농민과 종로상가의 소상인도 각급 인민회의 대의원이 되고 서울역 앞에서 품팔이하던 지게꾼도 나라정사에 참여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서울에 오시어 민중에게 천하를 통째로 주셨다.

주석께서는 가진 것 없이 고통받던 노동자들이 공장의 주인으로 되게 하셨고 노동법령을 시행하시어 국가가 그들을 위해 온갖 봉사를 하게 하셨다. 받아안은 행운이 꿈인가 생신가 서울의 거리거리와 곳곳의 공장가에서 노동자들이 기쁨과 환희에 넘쳐 춤추는 세상이었다.

주석께서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제땅을 가지고 싶어하던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주시었다. 곳곳에 농민이 주인된 새 농촌이 탄생했다. 그 경사에 이남땅이 환희에 넘쳤으니 이농민의 서글픈 행렬이 흐르던 서울에도 행복한 농민대표들이 농악을 울리며 모여들어 감격의 경축행사를 벌였다.

참으로 그 세상은 무산자도 재부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평등의 세상이요, 이상천국이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중이 소원하던 모든 것을 다 주셨다.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을 봉건의 예속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과학자, 문화인, 연예인들에게는 민중을 위해 재능을 한껏 꽃피울 수 있는 넓은 길을 열어 주셨다.

세기를 두고 내려오며 범보다 무섭다던 세금제도를 철폐하고 웃으며 내는 민주적인 세금제도를 세우셨다. 누구나 나라에서 베풀어준 자녀교육과 의료의 혜택을 받도록 해주시고 각종 의약품까지 보내 주셨다.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거지, 방랑자들에게도 안식의 보금자리를 주셨으니 이 아니 복지세상인가.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남의 아이들에게 특별히 제일 큰 사랑을 주셨다.

아이들은 민족의 장래요 나라의 꽃봉오리라지만 사회적 불평등의 수난자로 버림받던 그들이었다. 주석께서는 아이들을 「왕」으로 내세워 주셨다. 노동자, 농민, 소상인의 자녀들도 대학공부까지 국비로 할 수 있게 해주시고 전쟁판에서도 안전하게 공부할 수 있게 조처하셨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국가적 조치도 취하고 이북의 각 대학교수들을 서울에 파견해 새 학기교육준비까지 도와주게 하셨다.

주석께서는 전쟁고아들을 두고 더욱 가슴아파 하시며 그 애들의 부모가 되시어 애육원과 학원에서 키워주셨다. 그들중에는 지금 이북에서 영웅으로, 교수, 박사로, 대의원(국회의원)으로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각계각층의 사람들도 차별없이 위해 주셨다. 그것은 문이나 빗장을 모르는 사랑이었다.

주석께서는 주의주장이 다른 사람들은 물론 미국과 이승만정권에 종사한 장성도, 국회의원도, 장차관도 민족사랑의 마음만 있으면 배척하지 않고 다 포용해 주셨다. 「상해임정」의 부주석이었던 김규식, 전 「미군정청」민정장관이었던 안재홍씨도, 군장성 송호성, 목사 권태희, 전 「국회의원」 최태규씨도 주석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누구나 얼굴에 그늘진데 없이 희망에 넘쳐 사는 세상, 매일 명절같은 세상이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서울에서 조상들이 남긴 역사유산들도 지켜 주셨다. 일본놈, 미국놈들이 약탈하고 파괴하고 그 남은 것마저 매국역적들이 버리고 파괴하고 도망갔지만 주석께서는 그것을 다 지켜 주셨다. 민족의 자랑 「이조실록」을 구원하신 그 고마움은 천만년 세월이 흘러도 못잊으리라.

가장 큰 사랑의 마음은 가장 작은 구석까지도 찾아간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서울 시민들의 부엌살림 구석까지 보살피셨다.

서울에 오신 첫날부터 시민들이 쌀이 떨어졌다는 것을 헤아리신 그분께서는 군사위원회와 내각전원회의를 소집하시고 군량미를 풀어 주도록 하셨다. 전쟁에서 군대가 민중의 식량을 징발해간 예는 있어도 군량미를 풀어준 예는 없었다. 그분께서는 심지어 서울시민들의 겨울용신탄을 해결하기 위한 내각협의회도 소집하셨고 군대를 동원해 춘천에서 신탄용통나무를 찍어 한강에 띄워 시민들이 건져 때도록 하셨다. 주석께서는 시민들의 겨울김장용 채소까지 해결해 주도록 미리 조처하시고 가정용약품과 살충약, 구충약도 보내주도록 하셨다. 정말 그분은 세심한 사랑으로 주기만 하신 민중의 자애로운 아버지, 호주이셨다.

이제 무슨 소원이 있으랴만 주석께서는 주신 것이 부족하신듯 더 마음을 쓰셨다.

두번째로 서울에 오신 7월 31일 중앙청 앞 세종로에서 칠순의 한 노인을 만나 거칠어진 그의 손을 잡으시고 새 세상을 맞이한 소감도 물어주시며 해방의 기쁨을 나누신 이야기, 문경새재 넘어 전선에서 포성이 끊임없이 울려오는 이른 새벽 수안보에 도착하시자 전선사령부 근처에 있는 제재소의 노동자들을 만나 담배도 권하시며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시고 한 농가의 고추장맛도 봐주신 이야기, 한강나루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느시며 그들의 생활을 걱정하신 이야기… 전설같은 일화들을 어찌 다 헤아리랴.

주석께서는 세번째로 서울에 오셨을 때도 약 일주일간 머무르시면서 전선사령부의 사업형편을 요해하시는 한편 이남지역에서 민생을 위해 밤늦게 관계부문 간부회의도 여시고 시내 곳곳을 돌아보시며 대책을 취해 주셨다.

그분께서 서울현지지도를 끝내시고 8월 14일 저녁 평양으로 가실 때의 일이다. 의정부근처에 이르신 주석께서는 차를 멈추시고 길가의 한 농가에 들리셨다. 집주인내외를 만나신 그분께서는 해방이 되어 살기가 어떤가, 땅을 분여받은 농가의 살림살이형편을 따뜻이 물어주셨다. 늦게야 주석을 알아본 주인부부는 『장군님! 참으로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이 허술한 집에 찾아오신 것이 고맙고 땅과 새 세상을 주신 것이 감사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날 주석께서는 늦게까지 집주인이 두서없이 말씀 올리는 과거사도 다 들어주시며 그의 생활을 보살펴 주셨고 학교에서 돌아 온 이집 어린 딸을 보자 어떤 공부를 하는가고 물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공부를 잘하여 나라의 훌륭한 일꾼이 돼야 한다고 자애에 넘친 말씀을 하셨다. 주석은 이날저녁 늦게야 마을을 떠나셨다.

이 고장의 한 농민은 그때 주석께 저녁식사를 대접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전설처럼 그날의 일화를 전한다.

주석께서는 평양에 가셔서도 이남민중의 생활안정을 위해 마음 쓰셨다. 8월 18일에는 제 23차 내각전원회의까지 소집하시고 「서울시임시인민위원회 사업정형에 대하여」라는 의제로 장시간 토의하고 서울시민들의 생활전반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해 주셨다.

참으로 김일성주석은 서울에 오시어 이남민중에게 천상천하를 다 주시고 만민을 품어 주신 찬란한 태양이셨다.

옛날 서구의 한 시인은 천국에서 살았던 일순간을 죽음으로써 보상해도 비싼 것이 아니라 했거늘 주석께서 펼쳐주신 태양의 나라, 천국같은 세상에 무엇으로 보답하랴.

그래서 곳곳에서 「감사궐기집회」를 열고 김일성주석께 감사편지를 올렸던 것이다.

평택군 팽성면 도두리의 노치영노인이 주석께 올린 편지를 잊을 수 없다.

…경애하는 김일성장군이시여!

나는 61년동안의 기나긴 세월을 어느 하루도 사람다운 생활을 하여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 나는 전혀 생활형편이 달라졌습니다. 당신의 영명한 지도하에 우리는 새 생활을 꾸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6천평의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의 우리들은 북반부동포들처럼 기계로 내 땅을 갈게 될 것이며 강물을 마음대로 끌어대게 될 것입니다.

내 지은 곡식을 누구도 빼앗아 갈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앞으로의 나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라도 나의 앞날은 행복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행복을 지키고자 이남민중은 일떠섰다. 영등포지구 노동자들과 성균관대, 이화여대 학생들을 비롯한 수십만명의 젊은이들이 의용군에 참군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5백여명의 저명한 과학자, 문예인들이 단성사에 모여 『김일성장군의 주위에 굳게 단결하여』반미성전에 총궐기할 것을 결의했고 이승만정부에 근무했던 사람들도 집회를 열고 주석을 받들어 싸워나갈 것을 맹세했다.

그때로부터 50년세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석을 우러르며 살아왔던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자 인민군에 참군해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며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음악교사 오경심씨, 북녘을 우러러 백두산 3대장군을 떠올리며 애국의 지조를 지킨 강규찬, 고진희부부, 그리고 이현상, 최백근, 조용수, 김종태… 고마웠던 그 세상을 생각하며 통일성전에 한몸바친 유명무명의 투사들이 잠못들고 기다린다.

아, 서울의 소원, 이남민중의 소원을 이루어주셨던 우리의 태양이시어, 그립고 그리운 자애로운 어버이 김일성주석이시여!

영원히 광명 속에

서울역광장에서 열차의 기적소리 들으며 한자국, 두자국. 한강변에서 북한산 저 넘어 바라보며 한자국, 두자국. 내 오늘도 김일성주석께서 다녀가신 성로를 따라 순례하며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을 떠올린다.

성스러운 사랑은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 영원이다.

주석께서는 서울을 다녀가신후 평생을 서울사람들과 함께 계시며 이남민중을 위해주셨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이남생각이었고 기뻐도 슬퍼도 이남민중을 위해서였다. 현지지도의 길에 서울에서 간 사람들을 만나시면 서울에서의 일들을 못잊어하셨고 이남출신을 만나시면 함께 그의 부모형제들을 그리워 하셨다.

주석께서는 심장의 고동을 멈추실 때까지 이남민중을 생각하셨다 한다. 서거하시기에 앞서 몽양의 자녀들과 이남출신인사들을 만나 통일에 관해 절절히 말씀해주신 주석이셨다.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50년전 8월 평양에 관광을 갔던 김치범농민을 회상하셨다. 그때 주석께서는 8.15광복 5돌이 되는 날 백수십명이나 되는 서울, 경기지구 관광단성원들을 다 만나 담화를 하시는 과정에 폭격때 헤어진 관광단원 한명이 도착못했다는 것을 아시게 됐다. 그는 서울근방의 김치범농민이었다. 그를 꼭 만나보고 싶으시어 접견시간을 여러번 연장해 가면서 기다렸지만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김씨는 폭격에 부상당한 어린애를 안아다가 병원에 입원시키느라고 시간을 지체했던 것이다.

다음날 그들이 만경대를 참관한다는 것을 아신 주석께서는 우정 시간을 내시어 이른 아침 그를 만나려 만경대로 가셨다. 만사를 제쳐놓고 고향집에 앉아서 할아버지와 함께 김치범농민을 기다렸지만 그날도 약속된 시간이 다 되도록 김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팔동교근방에서 폭격을 당해 늦어졌던 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수십년전 그때 일을 못잊어 하셨다. 당시 김치범농민이 환갑이 다된 사람이었으니 지금 살아있다면 백살이 넘었을 것이라면서 그를 만나주지 못한 것이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인간의 행복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세월은 흘러도 주석의 사랑 속에 사는 이남민중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닌가.

사랑의 화신이신 김일성주석께서는 오늘 김정일장군과 함께 이남땅에 찾아오신다.

나는 그것을 김정일장군께서 서울에 오셔달라는 정중한 초청을 받아들이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보았다. 하늘같은 도량과 정오의 폭양같은 민족애, 봄날의 향기같은 인정으로 이남민중을 감싸주시는 장군의 숭고한 모습에는 김일성주석의 해님같은 모습이 비껴있었다.

언제인가 장군께서는 주석께서 서른여덟살 되시는 나이에 호위병도 변변히 없이 서울에 가셨다고 감회깊이 회고하셨다. 분명 장군께서는 서울행을 약속하시면서 50년전 주석께서 만나주신 서울시민들의 모습을 생각하셨으리라. 저 수안보의 제재공들과 의정부근처의 농촌마을 사람들도 그려 보았으리라. 주석께서 못잊어 하시던 김치범농민의 후손들도 그려보았으리라.

주석께서 걸으신 길은 장군께서 걸으시고 주석께서 찾으셨던 곳은 장군께서 찾으신다. 요즘 항간에서 장군의 그 충성을 말하며 그분께서 서울에 오실 날을 기다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죄송한 마음에 휩싸인다. 주석께서 바라신 것은 통일이었다. 통일도 못하고 김정일장군을 서울에 모시겠다니 될 말인가.

김일성주석께서는 통일을 위해 밤을 지새우며 이남민중을 그리워 하시는 장군과 함께 계신다. 백두산에 오르시어 남쪽하늘을 바라보시는 장군과 함께 이남민중을 그리셨고 저 판문점에 나오신 장군과 함께 통일된 조국을 생각하신다.

어느해 2월16일, 장군의 생신날 밤이었다고 한다. 김정일장군께서는 만민의 축복을 받으셔야 할 이날에도 종일 정무를 보시고 자신은 생일을 쇠지 않는다시며 아래 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한다.

…수령님께서는 조국통일문제를 두고 제일 심려하십니다.

아, 정말 남조선인민들이 그립습니다. 지금 어떻게 사는지?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기만 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빨리 통일해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서울에도 부산에도 가보아야 겠는데 우리는 아직 통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전해 들으면서 언제나 주석의 마음을 안고 이남민중과 함께 계시는 장군의 모습을 보았다.

김정일장군께서는 주석께서 그처럼 위해주신 이남의 노동자, 농민들을 그리워 하신다. 북에 간 민주노총의 대표들을 주석께서 평생 사랑해주신 이남노동계급의 사절들이 왔다고 환대해 주셨고 이남의 농민들의 고달픈 생활소식을 들으실 때마다 주석처럼 걱정하시는 장군이시다.

장군께서는 주석께서 사랑하신 청년학생들을 못잊으신다. 그래서 한총련대표들을 비롯해 이남의 학생들을 생각하시며 희생된 학생들을 이북의 대학교들에 명예학생으로 등록한 것이 아니랴.

김정일장군께서는 주석께서 위해주신 이남의 각계인사들을 차별없이 모두 위해주신다. 문익환목사가 서거했을 때 주석과 함께 진지도 안드시고 슬픔에 잠기셨고 오늘도 그의 유가족들을 생각하고 계신다. 강경대, 이한열을 비롯한 열사들, 통일성전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과 비전향장기수들… 장군의 마음은 언제나 주석의 마음을 안고 그들에게 찾아오신다.

장군의 마음은 주석께서 제일로 사랑하신 아이들에게 찾아오신다. 양심적인 정계인사들과 재벌들에게도 찾아오시고 교회와 성당에도 찾아오신다. 과거에 죄많은 사람이라 해도 그들의 마음 속에 민족성이 반딧불로 반짝여도 찾아오신다.

참으로 김정일장군은 김일성주석의 모습 그대로이신 사랑의 태양이시다.

나는 고마우신 그분의 마음에 안기며 주석을 그리워하던 부모님의 마음까지 합쳐 서울에 오실 장군을 기다린다.

종로구의 한 노인은 주석께서 서울에 오시어 큰 사랑을 주셨다며 어서 통일하여 장군을 모시고 싶다고 눈물을 지었고 파주 송암동의 한 농민은 주석께서 서울에 오셨을 때 마을사람들이 40여정보의 땅을 분여받고 사람답게 살았다면서 통일이 실현되고 장군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다.

아침마다 북녘을 우러러 장군께서 어서 오셔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셔 달라며 삼가 인사를 올리는 사람도 있고 수재때에 이북에서 보내온 천으로 지은 옷을 다시 꺼내보며 주석과 장군의 은정을 회고하는 사람도 있다. 밤마다 장군의 저작을 읽으며 「겨울꽃」으로 사는 한총련학생들도 있고 저 북한산에 등반하여 「김정일장군의 노래」를 합창하며 격정을 터뜨리는 노동자들도 있다.

성인의 은정이 깃든 곳은 성인의 이름과 함께 영원하다.

김일성주석의 은정을 빛내이기 위해 통일후 서울남산에 그분의 동상을 높이 모시고 천만년 살고 싶은 심정이다. 주석께서 처음 오신 7월 16일을 「태양이 오신 날」로 기념하고 그분께서 처음 서울에 들어서신 미아리고개며 그분께서 돌아보신 청계천 옛 빈민굴자리며 세종로, 태평로, 이 땅 곳곳에 그분의 사적비를 세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것은 모든 것을 빼앗겼던 서울의 수난사가 오늘에 부치는 요청이요, 당연인줄로 안다.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광복직후 주석을 기다리던 서울역광장에 꽃대문을 세우고 주석께서 찾아 오신 그 길에 꽃주단을 깔고 김정일장군을 맞이할 통일의 경사일을 기다린다. 반세기를 두고 주석께 못드려 쌓이고 쌓인 감사의 정을 안고 서리서리 엉킨 슬픔도 아뢰우며 마음껏 울고 웃고 마음껏 춤추고 노래하고 마음껏 『김일성주석 만세!』, 『김정일장군 만세!』를 부를 그날을 기다려 이 마음 터뜨린다.

오신다네 우리 장군 김정일장군

김일성주석 오신 길 따라

통일을 안으시고 우리 장군 오신다네

만세만세 우리 장군 김정일장군

우리의 아버지 김정일장군이시여!

김일성주석께서 비쳐주셨던 사랑의 그 빛으로 서울의 소원, 이남민중의 소원을 이루어주시옵소서. 통일의 태양, 우리의 운명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