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주석님 서울현지시찰 50돌
 


김일성주석님의 그 은혜 만대에 길이 전하리


 


7월 16일은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역사적인 서울현지시찰을 하신 50돌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이 역사의 날을 맞으며 한민전 전위투사들과 각계 애국민중은 해방된 서울에 오시어 시민들의 생활을 육친의 정으로 보살펴주신 주석님의 크나큰 은정을 감회깊이 회억하며 그분의 영생을 삼가 기원하고 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서울현지시찰은 8.15광복직후부터 우리 민중이 일구월심 목마르게 고대해 온 절절한 염원이었다. 우리 민중은 일제식민지통치로부터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구원해 주신 주석님을 민족의 구세주, 조국광복의 은인으로 추앙하며 그분께서 서울에 오시어 이남민중의 열광적 축하를 받으시기를 절절히 기원했다.

그렇듯 일일천추로 고대해 온 그분의 서울현지시찰이 전화의 나날에 이루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감회도 새로운 주체39 (1950)년 7월 16일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이른 새벽 수수한 군복차림으로 야전용 지프차를 타시고 시내에 조용히 들어서시었다.

해방된 지역에서 토지개혁, 노동법령 등 제반민주개혁을 실시해 주신 그분께서는 시민들의 생활형편을 일일이 알아보시면서 이름없는 한 보일러공까지 만나시어 생활형편을 하나하나 알아보시고 흰쌀과 자신의 진지상에 올랐던 음식까지 보내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 주시었다.

그분께서는 7월 31일~8월 3일까지 서울에 두번째로 오셨을 때에는 시민들의 어려운 생활형편을 요해하시고 식량을 배급하도록 조처하셨고 8월 9일~14일까지 세번째로 오셨을 때에는 시민들이 땔감이 없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요해하시고 인민군 군인들까지 동원하여 땔감을 마련하여 보내주도록 하시었다.

태양같이 자애로운 주석님의 사랑이 있어 서울시민들은 엄혹한 전화의 나날에도 식량과 땔감을 공급받으며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참으로 민중의 어버이만이 하실 수 있는 숭고한 덕행이라 하겠다.

하기에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오늘도 서울시민들은 주석님의 그날의 사랑을 대를 두고 전하며 그분을 민족의 어버이, 영원한 태양으로 추앙해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남민중에 대한 위대한 주석님의 사랑과 은정은 오늘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에 의하여 빛나게 승계되고 있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주석님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을 높이 받들어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위업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해 불면불휴의 노고를 기울여 오시었다.

지난 6.25전쟁시기 서울시민들에게 베푸셨던 주석님의 사랑 그대로 그분께서는 언제나 이남민중을 잊지 않으셨고 지난 84년에는 수해피해를 입은 서울시민들을 위해 다량의 구호물자를 보내주시는 등 온갖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 오시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울에 평양학생소년예술단과 평양교예단을 보내주시는 은정깊은 조치도 취해주시었다.

지난 6.15남북공동선언발표를 통하여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서울방문을 수락하신 소식을 접한 우리 민중은 감격과 환희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환호를 올렸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 그대로이신 절세의 위인 김정일영수를 민족의 수위에 모신 것은 참으로 민족최대의 행운이고 무상의 영광이다.

우리 이남민중에게 돌려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은 만대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문 영 철>
 

서울에 오신 주석님


 


7월 16일은 우리 민중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더듬게 하는 뜻깊은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 이날에 바로 만고의 전설적 영웅이시고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이시며 구세제민의 태양이신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서울에 오셨던 날이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터진지 3일만인 6월 28일 인민군의 드센 반공격에 서울이 해방되었을 때 서울시민들은 남녀노소 모두 거리에 달려나와 『김일성장군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었던가.

광복직후부터 김일성장군님께서 서울에 나오시기를 목마르게 학수고대하던 시민들은 이때에도 장군님을 환영하는 횡단막과 솔대문을 세워놓고 그분께서 나오실 시각을 안타까이 기다렸다.

서울시인민위원회에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언제 나오시는가, 장군님을 환영하는 시민대회는 언제쯤 열리게 되는가고 문의하는 전화가 연일 빗발치듯 걸려왔다.

젊은 지성인들은 중앙청 앞과 광화문거리 등 김일성장군님께서 다녀가심직 하다고 생각되는 곳마다에 모여 그분의 초상사진을 들고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시민들 아니 온 이남민중의 염원은 너무도 조용히 이루어졌으니 장군님께서는 수수한 군복차림에 중좌(중령)의 계급장을 다시고 야전용지프차로 서울거리에 조용히 들어서시었던 것이다.

그날이 바로 50년 7월 16일 이른 새벽, 해방의 기쁨 속에 밤을 지새며 웃고 떠들던 서울시내가 온통 새벽잠에 혼곤히 취해 있을 때였다. 집집의 처마위에서 펄럭이는 공화국깃발, 담벽과 전봇대마다에 나붙은 구호와 거리를 가로질러 높이 걸린 횡단막…

약동하는 새 생활이 그대로 안겨오는 서울거리를 바라보시는 장군님의 안광에는 끝없는 반가움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서울시민들이 그토록 뵙고 싶어 하는 장군님을 감격과 환희로 설레이는 꽃바다의 광장에 모시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서운하고 안타까워 동행한 수원들은 눈굽을 적셨다.

그 시각 장군님께서는 서울시민들과의 상봉에 앞서 전쟁으로 인해 영락된 민중생활을 하루빨리 안착시키고 이남땅 전지역을 해방하실 구상을 하고 계셨다

어느덧 자동차는 북악산밑 경무대에 들어섰다. 차에서 내리신 장군님께서는 그자리에 서신채 근엄하신 눈길로 경무대를 바라보시었다.

1920년대에 세워진후 역대 일본총독이 틀고 앉아 우리 민족에게 유혈과 예속만을 강요하던 악마의 소굴, 8.15후에는 하지가 들어 앉아 침략과 약탈의 칼을 휘둘렀고 며칠 전까지는 미국의 주구 이승만역적이 들어앉아 민중의 고혈을 약취하던 복마전.

아무 말씀도 없이 한참이나 서계시던 장군님께서는 먼길의 피로도 푸실사이 없이 전선형편부터 알아보시었다. 그리고 해방지역에서 정권기관, 사회단체들의 복구정형과 민주개혁의 실시, 민중생활형편을 요해하시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셨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어 서울시내의 곳곳을 일일이 돌아보시었다. 청계천변과 서울변두리를 걸으시며 헐벗은 아이들과 여위고 창백한 여인들의 모습을 안광에 새겨넣으셨고 민생을 빨리 안정시킬 제반 민중적 시책을 펼치실 결심을 굳히시었다.

어느 정치인은 전쟁이란 피와 철의 소모장이라고 했다. 교전쌍방이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동원소모하는 것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아무리 가열처절한 전쟁일지라도 민중의 생명재산의 보호와 생활안정을 적군격멸과 함께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전적 방침으로 간주하고 계셨다.

민중을 하늘같이 여기는 「이민위천」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민중을 제일로 위해 주시는 김일성장군님의 사랑의 정치에 의해 서울을 비롯한 해방지역에서는 빠른 시일안에 토지개혁이 실시되고 노동법령이 발표되는 등 제반민주주의적 시책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오늘도 서울시민들은 그날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전하며 장군님께 다함없는 감사를 드리고 있다.

장군님께서 서울시민들의 신탄까지 염려하시어 전장에서 숱한 인민군군인들을 소환하시어 원목을 채벌하게 하시고 그것을 한강에 떠내려 보내주신 것도 그때에 있었던 일이다. 그 나무가 없었더라면 서울시민들이 그 엄혹했던 50년 겨울을 견디어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일치한 목소리이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50년 여름에만도 세번에 걸쳐 서울에 나오시어 시민들에게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 주셨다. 지금도 서울시민들은 장군님의 사랑의 치하에서 사람답게 살던 그때를 두고두고 잊지 못해 하고 있다.

사랑에는 보답이 따르는 법이다. 받아안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고 의리이다.

우리 민중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생전의 뜻이었던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통일의 새날을 앞당겨오는 것으로써 장군님의 크나큰 은덕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김 성 필>
 

그날의 일화


 


우리 민족이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불세출의 천출위인이신 김일성주석님께서는「이민위천」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언제나 민중과 운명을 같이 하시고 고락을 함께 하시었다. 주석님께서 지금으로부터 50년전 3차에 걸쳐 서울과 수안보를 비롯한 경향의 여러 곳을 현지시찰하시면서 민중들과 해방의 기쁨도 함께 나누시고 민생을 따뜻이 보살펴 주신 전설같은 이야기는 오늘도 만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날의 일화들중에서 몇가지 사실을 간추려 소개한다.

노동자 김씨의 행운

김일성주석님께서 경무대를 돌아보실 때에 있은 일이다.

주석님께서는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왜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가고 수원들에게 물으시었다. 경무대에서 미국놈들과 이승만에게 봉사한 사람들을 어떻게 주석님 앞에 가까이 세우랴 싶어 다 다른 곳으로 보냈다는 수원들의 보고를 받으신 주석님께서는 못내 서운해 하시며 어서 빨리 노동자들을 찾아 데려오도록 하셨다. 이튿날 김포비행장근처에 가있던 김재익이라는 보일러공을 데려왔다.

그를 반갑게 만나주신 주석님께서는 가정형편과 경무대에서 천대받던 일까지 일일이 들어주시고 이승만통치하에서 정말 고생이 많았겠다고 은정어린 말씀도 해주셨다. 그가 가족이 많아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까지 헤아려보신 주석님께서는 그의 집에 쌀을 실어보내 주도록 하셨고 자신의 진지상에 놓았던 음식까지 보내주셨다.

어둡고 차디찬 세상에서 소나 말처럼 부림을 당하며 천대받아 왔던 김재익씨는 자기를 사람답게 대해주시는 주석님의 따뜻한 인정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느한 농가에서

50년 8월 14일 저녁 무렵이었다.

김일성주석님을 모신 차가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의정부 부근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주석님께서는 도로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한 농가에 들리시어 주인을 찾으시었다.

살림형편을 비롯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분이 오매에도 경모해 온 김일성장군님이실 줄은 상상도 못했던 그 집 여인은 한참 후에 『어디서인지 꼭 뵈온 듯한 퍽 낯익은 분이신데…』라고 혼자말처럼 되뇌이다가 토지개혁으로 땅을 분여받던 날 집에 모신 주석님의 초상화를 보고 나서야 주석님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주인내외는 너무도 황송하여 어쩔바를 모르며 주석님께 『장군님, 참으로 고맙습니다』라고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허줄한 자기 집에 찾아오신 것이 고맙고 땅과 새 세상을 안겨주신 것이 너무도 감사해서 그저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

주석님께서는 주인내외에게 지난날 겪은 고생에 대해서 물으시고 토지개혁으로 땅을 얼마나 분여받았는가,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는가 등 생활형편을 구체적으로 물으시었다.

장군님 은덕으로 3천여평이나 되는 땅을 무상으로 분배받았다고 말씀드리는 주인에게 주석님께서는 농사를 잘해서 부러운 것 없이 잘 살아야 한다고, 아이들도 잘 키워서 나라의 훌륭한 역꾼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은정깊은 말씀을 해 주셨다. 보잘 것 없는 한 농가에 들리시어 친어버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먼길을 떠나시는 주석님을 바래드리며 주인내외는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한다.

세종로에서

김일성주석님께서 두번째로 서울에 나오셨을 때 있은 일이다.

어느날 중앙청앞 세종로에는 해방의 기쁨에 휩싸인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서 흥성이고 있었다.

주석님께서는 시민들이 운집해 있는 곳에 가시어 칠순에 가까운 한 노인의 두 손을 다정히 잡아주시며 고생이 많았겠다고, 해방을 맞이한 소감이 어떤가고 따뜻이 물으시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주석님께서는 모여선 시민들에게 해방이 되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3천리강토에서 자자손손 행복하게 살려는 우리 겨레의 소원은 지금 미국놈들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전체 민중이 힘을 합쳐 미국놈들을 쳐부수고 통일된 강산에 행복한 민중의 낙원을 세워야 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었다. 마디마디에 힘과 용기가 넘치는 말씀이었다. 시민들은 자기들 앞에 서계시는 분이 만고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님이시라는 것을 퍽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한다.

수안보의 제재공들

김일성주석님께서 수안보에 가셨을 때의 일이다.

주석님께서는 그곳에서 일하는 제재공들을 만나시어 무더운 날씨에 얼마나 수고가 많은가고 하시며 매사람의 손을 일일이 잡아 주시고 친히 담배까지 권하시었다. 그러시고는 몸둘바를 모르고 당황해 하는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시려는 듯 생활형편을 다정히 물어주셨다.

주석님께서는 제재공들이 하는 일을 걱정하시면서 지금 하는 제재방법은 일본놈들과 이승만도당이 노동자들을 마구 부려먹을 때 쓰던 낡고 위험한 방법인 것만큼 빨리 작업을 기계화하여 일을 헐하게 하면서도 전쟁승리와 복구사업에 필요한 목재를 원만히 보장해야 한다시며 그 방법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가르쳐 주시었다 한다.

<정 인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