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31일

통일여명 편집국

 

 

≪충성의 한길에서≫ 총서 맛보기

통일여명 편집국 6-2-15

 

 

차 례

 

제1부 유격구의 기수

제2부 사령부로 가는길

제3부 광복의 해발아래

제4부 그리운 조국산천

제5부 진달래

 

제1부 유격구의 기수

 

철늦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날 저녁 김기준동지는 첫째봉앞아지트에서 ≪상촌신보≫ 제5호를 읽고 있었다. 상촌근거지와 태봉지하조직사이의 연락을 통해서 은밀히 발송되어 오는것이니 매번 늦게야 받아보군 하는 신문인데 이 5호도 한달전에 찍은 것을 인제야 받아 읽는다. 김기준동지는 등사로 밀어낸 한페지의 글을 열심히 읽어나갔다. 너무도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 누이동생이 근거지에 들어가 이렇게 신문에 나도록 일을 잘해나갈줄은 몰랐다. 누가 썼는지 감동적인 문장으로 썼다.

김일성장군님께 끝없이 충직한 혁명전사

≪근거지의 누나≫ 김정숙동무의 투쟁실기

이런 표제밑에 쓰인 실기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영특하고 지혜로운 처녀가 어떤 고생속에서 자라났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부암에서의 눈물겨운 생활이 자세히 이야기되어 있는가 하면 그 생활속에서 벌써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진리에 눈을 뜨고 혁명을 위한 투쟁의 길에 거룩한 발자국을 찍어나가기 시작했다고 썼다. 김기준동지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읽어나갔다.

숨막히는 생활의 중하는 그의 의식발전을 채찍질했고 그가 가진 천부의 총명과 지혜는 민족이 수난을 몸으로 감득하며 자라나게 했다. 고생자욱으로 얽힌 어머니의 얼굴도, 배고파 우는 어린조카의 울음소리도 그리고 선량한 올케의 참혹한 희생도 한겹두겹 그의 가슴에 계급적 각성의 갑옷을 두르게 했고 혁명이 승리하는 그날까지는 결코 풀리지 않을 응혈이 지게 했다.

김기준동지는 가슴이 무둑해져서 잠간 멈췄다가 다시 내리읽었다. 실기는 동생이 부암에서 ≪토벌≫을 맞고 상촌으로 떠나던 정상을 눈앞에 보는 듯이 그렸다. 오빠와의 이별에 대해선 아마 의식적으로 한마디도 언급을 안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고열에 떠서 달구지에 누워 들어가며 그 누군가를 몹시도 불렀다는 이야기는 절절하고 뜻깊은 문장으로 씌어져서 김기준동지는 대뜸 그것이 자기를 불렀다는 소리임을 짐작할수 있었다. 실은 그도 이미 경식이로부터 누이동생이 헛소리를 치며 근거지로 들어가 병원에 입원해있었다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은적이 있었다.

투쟁실기는 계속하여 상촌에서의 김정숙동지의 투쟁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초창기의 근거지엔 집도 먹을것도 부족했다. 이런 곳으로 혁명군중이 밀려들었다. 어디 가나 사람의 사태였다. 먹을 것도 있을 집도 없는 사람들이 욱실거렸다. 어려운 시련의 시기가 닥쳐왔다. 강가엔 불에 끄슬려 굴러온 고아들이 널리었다. 잃어버린 엄마, 아빠를 그리는 슬픔이 강가를 덮었다. 이 강가에 나타난 것이 아직 병색을 벗지 못한 김정숙동무였다. 그는 수십명의 고아를 한품에 붙안고 너는 어디서 왔으며 이름이 뭐고 또 너는 엄마, 아빠를 어디서 잃었으며 나이는 몇살이냐고 물으며 한 아이 한 아이 눈물들을 닦아주었다. 이로부터 이 불행한 아이들에겐 지혜롭고 총명한 사랑깊은 어머니가 생겨났다. 뜨거운 정과 자애의 맑은 눈물이 어린 넋들의 상처를 다심히 씻어내며 굳세게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투쟁실기는 주인공이 수많은 고아들을 단간방인 합숙에 집결해놓고 먹이고 입히고 거두어나가는 생활을 눈물겹게 그렸다. 그러는가 하면 아이들을 그저 어루만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동단조직에 튼튼히 묶어세워 원칙적으로 교양해나가며 어떤 땐 호되게 꾸짖고 회의에서 엄하게 비판도 한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혼자 울기도 하고 또 어떤 땐 달아나는 애들을 찾아 해종일 산과 들을 헤매기도 했다고 썼다. 특기할 일은 아이들의 힘을 조직하여 저들이 살 합숙을 저들의 손으로 짓도록 재목을 베들이게 하고 돌을 모아들이게 하며 그들을 일에 단련시키고 규율에 닥달되도록 이끌어나갔는데 이것은 그 누구도 주인공에게 가르쳐준 일이 없는 자립정신의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투쟁기는 홑적삼에 해진 치마를 입은 이 훌륭한 아동단지도자가 산에서 나무를 굴리다가 부상을 입고도 피에 젖은 몸으로 바위우에 일어서서 구령을 지르며 애들을 지휘했다고 하면서 그 영웅적인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호소했다.

김기준동지는 신문을 채 읽지 못하고 얼굴을 들었다. 그는 두눈을 슴뻑이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감격도 크지만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홑적삼에 해진 치마라니 안개더기우에서 갈라질 때 입었던 그 옷이 분명하다. 하기야 어려운 근거지안에서 무슨 천을 어떻게 구해서 새옷을 해입을수 있을것인가. 그는 종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나서야 다시금 신문을 내리읽었다. 신문은 김정숙동지의 투쟁기록을 한단 더 쓰고나서 이리하여 근거지에서는 ≪우리 누나≫, ≪우리 정숙동무≫하고 부르는 친근한 말이 생겨났다고 했다. 신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상촌근거지에는 엄마, 아빠를 잃은 고아집단을 중심으로 한 규모가 큰 아동단조직이 억세게 태동하며 자라고 있다. 소선대와 공청의 후비군이며 무장대오의 후비군인 씩씩한 대오가 발맞춰 걸어가며 맑은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게 노래부른다.

목에다 두른 것은 붉은넥타이

등에다 짐을 지고서 훈련을 나간다

장하다 그의 이름 아동단 아동단 아동단

세상이 모두다 칭찬한다 아동단 아동단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누구나 다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우리 정숙동무≫, ≪근거지의 누나≫를 깊이깊이 칭송한다.

투쟁실기를 다 읽고난 김기준동지는 신문을 접어 돌려놓고는 감동을 못이겨 자리에서 불쑥 일어섰다. 그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자꾸만 손수건으로 두눈을 닦다가 바삐 밖으로 나왔다.


한기천은 토방으로 올라서며 문을 두드렸다. 방안이 가뭇 조용해졌다. 부녀회원 하나가 문을 열고 내다보더니 ≪에그머니나≫하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했다. 그는 뒤손질로 엄지손가락을 내흔들며 한기천이 왔다는 신호를 했다.

한기천이 들어서자 방안에 둘러앉아있던 아낙네들이 죄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정숙동지께서도 얼굴이 약간 붉어져 일어서시었다.

≪앉으십시오, 이거 회의를 하는데 방해를 해서 안됐습니다.≫

≪온 선생님두… 안목에 들어가 앉으시오. 그러지 않아두…≫

배증녀가 말끝을 흐리며 한기천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는 겁이 더럭 났다. 알리지도 않은 회의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알수 없었다. 무슨 벼락같은 소리라도 치지 않을가싶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김정숙동지께서도 가슴이 두근거리시었다. 한기천이 십상 좋은 감정으로 찾아오지 않았을텐데 인제 그앞에서 회의를 어떻게 끌어나갈가 하는 불안이 당장 가슴을 누르시었다. 그이께서는 한기천의 긴 얼굴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시었다. 딴 아낙네들도 모두 자리에 앉았다. 한기천의 량옆으로는 여인들이 다가앉지 못하고 사람 하나 앉을 자리만큼씩 비우고 밀려나가 죄여앉았다. 한기천은 널직하게 내놓은 자리에 가위다리처럼 무릎을 올려고이고 앉아서 우선 담배부터 한 대 붙여물었다. 그는 푸른 양말을 신은 발목을 한손으로 거머쥐고 앉아서 담배연기를 뿜었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하겠어요.≫

앞에 앉아계시던 김정숙동지께서 얼굴빛이 약간 발깃해진채 말씀을 꺼내시었다. 그이께서도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으신 것 같았다.

≪우리는 하루빨리 부녀회를 늘여서 온 마을 여성들을 부녀회두리에 묶어세워야 해요. 우리말 여성들가운데 박대동이 여편네같은걸 내놓구는 누구 하나 부녀회에 둘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없어요. 수준이 어린 것은 일없어요. 이미 부녀회에 들어있는 아주머니들도 특별히 수준이 높은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누구는 수준이 높고 누구는 수준이 낮다 하고 부녀회에 들이는걸 수준을 가지고 구별해 들일수는 없어요. 나라를 찾고 우리 여성들의 권리를 찾자는 각오만 선다면 누구나 다같이 부녀회에 들수 있어요. 모르는건 부녀회에 들어서 배우면 돼요. 우리는 부녀회에 들어가지고도 배우지 않는테 탈이예요. 하긴 배워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배우려 해도 배울수 없겠지요.≫

한기천은 올방자를 고쳐틀었다. 그는 괜히 몇마디 기침을 했다.

≪그담 층층시하에서 부녀회에 들어두 일을 못한다는것인데 이것이 무슨 부녀회에 못들 조건이 되겠어요? 층층시하에 가족이 많은 집의 아주머니일수록 빨리 부녀회에 받아들여가지고 잘 교양하여 그 집안에 영향을 주어 가족들을 모두 혁명의 편에 끌어들이게 한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혁명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어요. 뭐 당장 아주머니들을 묶어세워 총을 메워가지고 왜놈들과 싸우러 나가자는것도 아니지 않아요. 저는 큰 힘이건 작은 힘이건 가리지 말고 다 한데 뭉쳐 있는 힘껏 혁명을 도와나서는 것이 우리 부녀회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래목에 앉아있는 여인들이 웃목에 있는 한기천을 넘겨다보느라고 연방 목을 빼들었다.

웬일인지 한기천이는 웃쪽으로 그늘지게 고개를 돌리고 앉아있어서 그 표정을 엿볼수 없었다.

≪그담 또 친정에서 소짝이나 매고 농사를 짓는다는 아주머니문젠데 친정의 일이 무슨 상관이겠어요? 설사 친정에서 밭날갈이나 가지고 소매고 농사짓는다고 한들 그게 뭐 나쁜 일이예요? 그런 집이 우리 혁명의 원수가 되겠어요? 상촌에서도 이런 집 땅은 한평도 빼앗지 않았어요. 김일성장군님께서 그런 집 땅을 빼앗으면 안된다고 공작원을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그 공작원이 직접 지주놈들 땅만 몰수해 가지고 농사군들한테 천평씩 2천평씩 노나주었어요.≫

방안의 여인들이 웅성거리며 끓었다.

≪세상에… 그런걸 가지고 땅 한평만 있어도 무슨 유산계급이라고 들써덕했구만…≫

≪그럼 그렇겠지요뭐… 밤낮 죽나발만 부는게 무슨 유산자람!≫

한기천은 낯이 검붉게 질려 앉아서 말이 없다. 그건 그가 금방 이 지역에 내려왔을 때 군중을 모여앉히고 사회주의사회는 사적소유전반을 페절한다는 소리 끝에 한 이야기가 그것인데 그때엔 무슨 소린지 알아듣는 것 같지도 않던 아낙네들이 아직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가 떠들며 웅성거린다.

정숙동무!≫

한기천이 가위다리한 정갱이를 버쩍 더 끄당겨올리고 붉어진 얼굴을 쳐들며 불렀다.

≪네?≫

≪동무는 덕산동부녀회확장문제를 마치 그 어떤 제3자가 조종을 해서 안되는 것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모여앉히고 그런 선동을 하면 되겠소?≫

≪제가 뭐…≫

≪뭐라니? 사람을 받고 안받고 하는 그런 조직내부의 질서문제까지 마구 군중앞에 터놓고 이야기하면 되오? 그런 얘기를 하려면 이 회의를 그만두는게 좋겠소. 내부문제는 우리끼리 먼저 토의해야 하오.≫

김정숙동지께서는 얼굴빛이 붉어졌으나 당황하지 않으시었다.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요? 설사 제가 무슨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기왕 사람들이 모여온것이니 회의야 해야 할 것 아니예요?≫

≪회의에 온 것은 마실을 왔던 푼수로 쳐도 손해날 것은 없을줄 아우.≫

≪마실을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말이 너무도 억울해서 입을 다무시었다. 아래목에서 아낙네들이 웅성거렸다.

≪아이구 온… 이 바쁜통에 회의가 아니라면 마실이 무슨 마실이겠소?≫

≪모두 공작원동무의 말이 귀에 쏙쏙 들어가서 밤새도록 듣고싶어들하는데…≫

이쯤 되니 한기천이 말은 못하고 얼굴만 점점 더 시뻘겋게 동해올랐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제발 한기천이 과격하게 나와주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부드럽게 말씀을 꺼내시었다.

≪물론 제가 잘못 생각하거나 잘못 말을 할수도 있다구 보아요. 그렇지만 제 생각엔 오늘밤 이 모임이 그 무슨 조직규율을 위반하는 모임이라고는 보아지지 않아요. 부녀회원들이 저희들끼리 모임을 가지고 장군님의 말씀에 비추어 지나간 일이 잘됐는가 하는 것을 따져보며 앞으로 잘해나갈 의논을 하는게 무슨 잘못이겠어요? 전 제가 배운것도 없고 아는것도 부족하기 때문에 오늘밤회의에 책임자동지가 참가하신걸 무척 기쁘게 생각해요. 책임자동지로서야 회의를 헤쳐버릴 생각을 마시고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고쳐주시고 회의를 바로 해나가도록 이끌어주셔야 할 것 안야요. 책임자동지의 지도밑에 우리가 오늘밤 회의에서 앞으로 장군님의 말씀을 잘 받들어나갈 대책을 옳게 세운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낙네들은 김정숙동지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고쳐 쳐다보았다. 한기천의 앞에서 말이 막힐가봐 조마조마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는데 막히기는커녕 사리가 정연한 말로 뢰성치는 하늘이라도 잠재워낼듯한 진정의 호소로 달래나갔다. 모임을 헤쳐버리겠다고 접어들었던 한기천을 인젠 모임이 끝날 때까지 옴짝을 못하게 붙들어 매놓았다.

한기천은 피줄이 동해 앉아서 뻗닿게 담배만 피웠다. 온 방안에 혼자 피우는 담배연기가 자욱해졌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공청에 가맹하시던 지난해여름이 문득 회상되시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기쁨과 설음이 함께 북받치면서 아버지, 어머니 생각, 그리고 올케생각으로 더욱 가슴아프던 그날… 조국의 광복과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이제부터 더욱 억세게 싸워야 하겠다고 속다짐하던 그날이 떠오르시었다. 엄숙하고 준엄하게 느껴지시던 그 공청회의에서 은근히 떨리는 다리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그저 김일성장군님의 충직한 혁명전사로 목숨바쳐 싸우겠다고 거듭 결의하시며 솟구치는 눈물을 훔치던 일이 어제같으시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잠시 방안을 둘러보시고 담담하나 힘있는 어조로 말씀하시었다.

≪제가 오늘 아주머니들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저도 지난날엔 혁명이란 무엇인지 똑바로 알지 못했어요. 그런걸 야학에서도 배우고 실지 투쟁속에서도 배우고 공청생활을 하면서도 배웠어요. 세상에 완성된 혁명가는 없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이마에 내돋은 땀을 가볍게 훔치고나서 아까하던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시었다.

≪아주머니들도 부녀회에 못들 아무런 조건도 없어요. 다들 부녀회에 들어서 한덩어리가 되어 손잡구 나갈수 있어요. 우리는 망국의 설음을 안은 민족이예요. 그런데 우리 여성들이 어째서 우리 아버지나 오빠나 남편이 나서서 싸우는 길에 들어서서 싸우지 못하겠어요. 우리 여성들의 힘은 약하지 않아요. 온 나라 여성들이 다 뭉쳐서 남자들과 힘을 합친다면 남자들로만 싸우는 힘보다 얼마나 더 큰 힘이 되겠어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혁명의 수레에는 두 개의 바퀴가 있는데 그 한쪽 수레바퀴는 여성들이 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이구, 정말이지 세상에 한바퀴 굴러가는 달구지야 어데 있수?≫

≪그렇지만 우리 동네 수레는 아직 한바퀴라우.≫

≪그러니 그게 어디 제대로 굴러가겠수, 소리만 삐걱거리지.≫

아낙네들이 흥성거리며 웃었다.

김정숙동지께서 계속하시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말 여성들도 모두 부녀회에 뭉쳐서 어서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를 맡아나서야 해요. 백여호나 되는 집의 아주머니들과 딸들이 모두 뭉친다면 그 힘이 얼마나 크겠어요. 그 힘을 일곱명만 뭉친 힘에다 대기나 하겠어요? 금년 봄에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공청확대회의에서 공청사업에 좌경관문주의경향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공청에 들수 있는 청년들을 지식이 부족하다는둥 작풍과 태도에 결함이 있다는둥 하면서 청년들을 받아들이지 않아 백여명이 망라된 군중단체내에 공청원이 불과 3∼4명밖엔 없다는곳도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린 이 말씀을 놓고 덕산동부녀회를 생각해봐야겠어요. 백호가 넘는데 부녀회원 일곱명이니 이걸 어떻게 봐야겠어요? 장군님께선 좌경은 비겁한 기회주의라고 말씀하셨어요. 문을 꽉 닫아매고 제편도 안들여놓는 것이 적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한기천은 모닥불을 쓰는 것 같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비겁분자요, 기회주의요 할 때는 자기에게 맞지 않는 소리라고 껄껄 웃을수 있었으나 좌경관문주의란 말엔 어쩐지 웃을수도 없고 분을 터뜨릴수도 없었다. 이건 김기준동지한테서도 못듣던 소리다. 아낙네들이 흘끔흘끔 한기천을 훔쳐보았다.

≪글세 백여명 군중단체에 공청원 서너명 있는것이나 백여호 사는 동네에 부녀회원 일곱명 있는것이나 뭐가 다르겠어요. 이걸 어떻게 장군님의 말씀을 받들고 일하는것이라고 보겠어요? 우리는 모든 일을 다 장군님의 말씀대로 해야 돼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점점 더 열기를 띠며 아낙네들을 둘러보시었다.

정작 가슴속에 불구름처럼 피여오르는 말은 인제 남아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부녀회사업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조선여성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도 싸워야 하지만 우리 여자들자신의 해방을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정말 우리 여성들이 이날 이때까지 무슨 권리가 있게 살았어요? 입을걸 못입구 먹을걸 못먹구 그러면서도 시부모를 위하여 남편과 자식을 위해선 온 정성을 다 바치구, 그러고나선 그게 기뻐서 그렇게도 좋아하구… 그게 뭐 나쁘기야 하겠어요? 그렇지만 전 여기서 여자들이 겪는, 권리가 없는 설음을 너무도 아프게 보았어요. 이건 물론 약과예요. 전 이걸 얘기하자는게 아니예요. 이 세상 구석구석을 한갈피 더 깊이 들여다보자는거예요. 여자들이 권리가 없는 것으로 하여 얼마나 울고 피눈물을 뿌리며 죽어가고 있는가를 보자는거예요.≫

한 아낙네가 김정숙동지께 랭수사발을 가져다드리었다.

≪한모금 마시구 얘기를 해요. 입술이 조글조글 말랐어요.≫

≪고마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랭수사발을 받았으나 마시지는 않고 옆에 놓으시었다. 지금 그이의 가슴 한복판에선 손을 대이면 델 것 같은 뜨거운 것이 기둥처럼 솟아올라 입밖으로 터져나오려 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눈망울이 흐려지시었다. 방금 달려가 보고오신 분임이의 모습이 떠오르는것이었다. 분임이는 의식이 없었다. 두눈을 꽉 감고 주먹을 돌같이 틀어쥐었다. 앙다문 입술밖으론 피가 흘러나왔다. 흔들어도 모르고 잡아당겨도 몰랐다. 숟가락치로 악문 이발을 뚜져벌리고 꿀물을 부어넣어도 그것이 입술밖으로 도로 흘러나왔다. 저주할 이 세상과는 다시 교섭을 않겠다는 것 같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손을 주물러보고 얼굴을 만져보고 하시었다. 온통 피골이 상접한 차디찬 돌멩이였다. 그래도 한참만에 찬바람같은 가느다란 숨기가 돌아왔다. 그 처참한 모습이 지금 그대로 눈앞에 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타들어간 입술을 감빨며 다시 말씀을 이으시었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난 ≪죄≫아닌 ≪죄≫ 때문에 어떻게 비참한 길을 걷다가 죽어가는가를 너무도 많이 보고 있어요. 그리고 퍽 드물지만 시집을 가도 량반의 집에 시집을 갔기 때문에, 돈많은놈의 집에 시집을 갔기 때문에 불쌍하게 되어 자기의 한생을 피눈물로 끝맺는 여자들도 있어요. 천대와 구박을 받다가 우물에 빠져 죽고 목을 매서 죽고… 아주머니들은 바로 오늘밤 이 덕산동에 그런 슬픈 사실이 감추어져 있는줄 아세요? 바로 그렇게 봉건과 돈의 희생물로 되어 시집을 안올수도 없는 형편이 되어 시집을 왔다가 끝내는 살지 못하고 명주필에 목을 매고 드리운 여성이 덕산동에 있다는걸 아세요?≫

아낙네들은 모두 눈둘이 둥그래서 서로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요?≫

≪박대동네 며느리 얘긴 것 같수.≫

≪죽었나요.≫

≪아까 없어졌다고 법석 들끓는 것 같더니…≫

아낙네들이 저마끔 수군거렸다. 배증녀는 아무말없이 독이 오른 기상을 하고 앉아있는 한기천의 얼굴만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한기천이가 분임이의 이야기를 하며 김정숙동지를 눌러놓는걸 보았기 때문에 김정숙동지께서 어쩌자고 오늘밤 일어난 끔찍한 이야기를 꺼내는가 해서 조마조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김정숙동지대로 이 자리에 한기천이가 와 앉았기 때문에 더욱 그 이야기를 꺼내시는것이었다.

≪저는 우리 여성들이 겪는 억울한 일을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하겠기에 박대동네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어요. 박대동네 며느리를 우리가 한마디로 원수의 편이라고 막아친다면 그건 너무도 생각이 짜르다고 보아요. 그가 어째서 오늘밤 돌배나무 높은 가지에 목을 매고 드리웠는가! 원수의 집이 좋았으면 그가 그렇게 했겠어요? 원수와 진짜로 한편이 됐으면 그가 그렇게 했겠어요? 여기에는 우리가 여성들 입장으로서도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할것이 있고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혁명하는 사람들로서는 더더욱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보아요.≫

모두 조용히 들었다. 한기천이도 표정이 아까같지는 않았다. 무언가 얼굴에 심각한 그늘이 비끼기 시작하는 것 같기도 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한참동안 분임이네 집 형편과 그가 자라나던 이야기를 하시었다. 그리고 못살게 된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팔리다싶이 되어 박대동네 집으로 출가했다는 사연을 눈물겹게 들려주시었다.

≪분임이는 바로 이런 여자예요. 저는 이 여자가 딱히 우리 편인지 우리 편이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 여자의 문제가 우리의 혁명투쟁, 우리의 여성해방운동과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겠어요? 전 제가 본 좁은 세상에서도 가난한 집 여자들이 빚값에 몰려 소나 말처럼 팔려가는걸 수태두 보았어요. 그리고 부자놈들이 여자를 사다가 노리개처럼 롱락하다간 차버리는것도 수없이 봤어요. 여자들이란 바로 이렇게 학대를 받으며 설음에 우는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박대동네 며느리 분임이가 이런 불쌍한 여자들과 뭐가 다른게 있겠어요. 바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 모든 불쌍한 여성들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여성해방문제를 중요하게 말씀하셨어요. 참말 장군님께서는 우리 여성들의 밤중같은 캄캄한 앞길에 빛을 주셨어요. 우리는 이 빛을 받아안고 인제 사람몰골이 되어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겠다는 말도 하게 되었어요. 장군님께서는 우리들을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부녀회에도 들어 배우고 혁명도 하라고 그처럼 간곡히 말씀하셨어요. 우린 생각만 해도 목이 메여요. 고마워서 목이 메여요. 인젠 이 세상에서 그 슬프고 억울한 일들이 영원히 없어지고말 것 같아 너무도 고마워 목이 메여요.≫

김정숙동지의 목소리는 흐느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었다. 그이께서는 그걸 자제하느라고 한참 말을 끊고 저고리고름으로 눈물을 닦으시었다. 아낙네들도 모두 목이 메는 심정이 되어 눈굽을 훔쳤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또 한참동안 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근거지이야기를 하시었다. 모두 그 자유의 세상과 거기서 누리는 여성들의 권리와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엔 환희와 꿈을 실은 눈으로 김정숙동지를 쳐다보았다.

≪…여기도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해요. 여기뿐아니라 하루빨리 온 조선땅에 장군님께서 마련하여주신 근거지와 같은 세상을 만들고 우리 여성들이 다시는 열두폭치마를 눈물로 썩이지 말아야 해요. 그러나 그러한 세상은 그 누가 만들어서 우리에게 갖다주진 않아요. 우리가 제힘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러자면 우리 여성들도 모두다 김일성장군님을 높이 받들고 그이의 가르치심대로 함께 뭉쳐 혁명에 떨쳐나서야 해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대중을 각성시키고 그들을 조직에 튼튼히 묶어세워야 싸워서 이길수 있다고 가르쳐주셨어요. 우리가 이런 이치를 깨닫구 모두다 부녀회에 뭉쳐 일편단심 장군님을 따라나선다면 그것은 무섭게 큰 힘이 될거예요. 왜냐 하면 여자들 힘이란 그만치 더 자기 문제를 들고나서는 북받치는 힘이니까요. 그러니 우리들은 하루빨리 온 마을여성들을 일깨워주어 부녀회에 묶어세우고 장군님의 말씀을 받들고 싸워나가도록 해야 해요.≫

아낙네들은 모두 가슴이 시원해졌다.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공작원처녀의 얼굴을 고쳐 쳐다보고싶었다. 혁명혁명하니 그저 한기천이처럼 들부시듯 연설을 하는것만 그 무슨 혁명을 하는것같이 알았는데 이건 마디마디 절절하고 부드러운 말로 사람의 맘을 그러쥐고 놓지 않는다. 다 듣고나니 진짜로 여자들이 혁명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북받친다. 얼마나 세상물계를 깊이도 알고 넓게도 아는가!

한기천이도 무섭게 호된 방망이에 후려갈기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 앉아있다가 김정숙동지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어 불쑥 일어섰다. 여인들이 왜 벌써 가느냐고 만류를 했으나 들은체 않고 나가버렸다.

한기천이 나가자 여인들이 모두 웅성거리며 김정숙동지께서 어쩌면 그렇게도 이야기를 잘하느냐고 했다. 그들은 인제 몇삼년 배우고 난 것 같이 눈앞이 환해졌다고 좋아들 했다.

얼마후엔 모두 김정숙동지를 둘러싸고 모여 앉았다. 그들은 부녀회에 받아들일 대상자들의 명단도 만들고 그것을 몇사람씩 노나 맡아가지고 교양할 분공도 짰다. 그저 인젠 활 열려진 길로 달음박질이라도 칠 것 같은 기세들이었다.

 

제2부 사령부로 가는길

 

≪수고들 합니다.≫

맨앞에 군복을 입으시고 걸어오시는 키가 후리후리하신 장군님께서 말씀하시였다. 모두 일하던 어지러워진 손을 털새도 없이 장군님께서 내미시는 손을 잡고 악수를 하였다.

≪장군님!≫

봉희 할아버지는 악수를 하고나서 또 장군님을 우러르며 절을 올리였다.

김정숙동지께서도 활랑거리는 가슴으로 악수를 하고 또 어깨를 숙여 인사를 올리시였다.

≪우리 근거지에서 두번째로 나이 많은 할아버지입니다.≫

키가 큰 구정부회장이 봉희 할아버지를 소개해서 말씀을 올리였다.

≪그 다음 동무가 바로 인제 말씀을 올린 공청현위에서 내려온 지도원동무입니다. 그담 동무는 이 할아버지의 손녀이구요.≫

≪모두 수고를 합니다. 할아버지는 지금 집안살림이 어렵지 않습니까?≫

장군님께서 봉희 할아버지에게 물으시였다. 로인은 또 머리를 수그리며 말씀을 올리였다.

≪좀 생도가 어려운들 어떻습니까. 앞을 내다보며 기쁨을 가지고 사옵니다.≫

≪생활이 어려우면 혁명정부에 이야길 해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앞을 내다보며 기쁨을 가지고 산다는것은 좋은 일입니다. 아무쪼록 조선이 독립되는 날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죄송하옵니다.≫

장군님께서는 그담엔 김정숙동지를 잠간 바라보시였다. 약간 볕에 감실감실해진것 같은 얼굴에 단정히 단발머리를 하고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고계시였다.

≪이 동무가 이번에 큰 수고를 했습니다. 삼도만을 아동단의 노래소리로 들썩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니 정말 우리 세상 같은 맛이 납니다.≫

정부회장이 또 장군님께 말씀을 올리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고개를 숙이시였다.

정숙동무를 한번 만나보려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렇게 뜻밖에 상봉을 합니다. 그리고 동무는 이 할아버지의 손녀라구요?≫

≪네…≫

봉희도 치마앞자락을 여미며 대답을 올리였다. 그는 그래도 숙인 얼굴이 발그래해져서 웃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잠간 마당에 널린 물건들을 바라보시였다. 마당엔 별게 다 있다. 대패질하던 널판자가 얼기설기 흩어져있고 도끼, 톱 거의 만들어진 칠판들, 봉희 할아버지가 북을 메우겠다고 얻어다놓은 가로세로 활을 해 뻗친 개가죽…

장군님께선 아무 말씀이 없이 군모채양을 넘겨미시고 땀을 씻으시며 널린 물건들을 바라보시였다.

≪글쎄 능지영지도원애기가 와서 아동단을 크게 만들고 숱한 애들의 등을 밀어주니까 저녀석들이 별걸 다 만들어내라고 조릅니다. 북을 만들어달래, 나팔을 만들어달래… 제 그래서 나팔두 하나 만들어볼가 해서 여기 생철과 납도 구해다놓았습니다.≫

봉희 할아버지가 장군님께 말씀을 올렸다. 정말 퇴지우엔 생철두루마리, 납덩이, 청강수병 따위가 놓여있었다.

≪만들어보십시오. 그것두 다 사람이 만드는건데 무얼 못만들겠습니까? 아이들한테 나팔 하나 쥐여주지 못하는 우리가 면목이 없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무거운 안색으로 말씀을 받으시였다. 모두 숨을 죽이고 둘러서서 심려어리신것 같은 장군님의 안색을 살피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여전히 사람들옆에 치마폭을 여미고 서계시였다. 그곁에 봉희가 가지런히 서있다.

정숙동무, 동무가 상촌에서 책임지고있던 아이들은 지금 모두 어떻게 되였습니까?≫

장군님께서 물으시였다.

≪지금도 상촌근거지에 있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얼른 장군님을 우러러보며 대답을 올리시였다. 그저 눈물이 쏟아질것 같은 심정이기도 하시였다. 어쩜 이렇게 상촌아이들 말씀부터 하실가. 간고한 나날 한번 들으신 이야기를, 신문에서 얼핏 보셨을 이야기를 그렇게도 잊지 않으시고 이처럼 각근히 말씀해주실가.

≪상촌에 아이들을 잘 거두는 동무가 또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아주 좋은 일입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든지 문제는 우리 혁명에 리롭게, 조선혁명을 책임진 혁명가답게 생각하고 일하는 마음씨가 중요한것 입니다.

내 정부회장동무로부터 능지영현일군들은 아동단문을 닫아걸고 받지않는걸 동무가 이번에 와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숱한 아아들을 받아들여 삼도만이 지금 아이들의 왕국같이 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내세우는 주장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현당에 있다는 어떤 사람은 아동단을 무슨 ≪삐오네르≫요 또 무슨 ≪아이들의 볼쉐위크적 조직≫이요 했다는데 우리 아이들의 조직은 그런 조직이 아닙니다. 조선의 아이들을 다 받아서 혁명의식이 자라도록 교양도 주고 훈련도 주자는 것이 우리 아이들의 아동단조직입니다. 어떤 선발된 아이들만 뭉쳐가지고 나가자는것이 아닙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얼른 손길을 들어 훔치며 장군님의 말씀 한마디한마디를 가슴에 새기시였다.

장군님의 말씀은 겉으로 듣기에는 퍽 부드러운 듯하시였으나 어쩐지 가슴의 분노를 힘겹게 참고계시는 듯하였다.

북만원정에서 갓 돌아오신 그이께서 벌써 김기도, 오상묵이들이 저지른 그 몸서리치는 죄악을 모두 알아내신것일가. 그렇다면 간고한 원정의 길을 헤쳐오신 그이의 가슴이 오죽이나 아프실 것인가.

김정숙동지께서는 어쩐지 그이를 뵈옵고보니 이미 희생된 동지들의 모습이 얼찐얼찐 눈앞을 스쳐지나는가 하면 그렇게도 불안스럽게 지켜보던 한동길이며 평강촌정부회장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루명을 벗고 장군님 품에 안기여 다시 혁명을 하겠구나 하는 기쁨이 안도감과 함께 가슴에 넘치도록 차오르시였다.

이 생각이나 저 생각이나 그저 하염없는 눈물과 함께 송구스러움을 자아내는 생각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격한 기쁨과 송구함이 한데 어울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살눈섭을 적시며 슴새여나오는 눈물을 닦으실념도 못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김정숙동지의 고개 숙이신 모습을 잠시 지켜보시더니 이번에는 확연히 노기가 어리신 목소리로 말씀을 계속 하시였다.

≪내가 왜 이 문제를 두고 사람들이 혁명하는 자세에 대해 말하게 되는가? 아동단을 그 무슨 볼쉐위크적 조직이다 어쨌다 하는 이러한 주장들이 바로 우리 혁명을 송두리채 말아먹고 혁명적력량을 갈갈이 헤쳐놓자는 반혁명적인 책동과 한줄에 련결되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중농이 혁명에 반기를 들고나올 요소가 다분히 있다고 규정을 내리면서 그들이 혁명대오에 접근하면 계급진지가 물렁물렁하게 되여 혁명을 할수 없다고 합니다. 저 혼자 혁명을 다 할 것처럼 피대를 돋구는 이러한 주장이 실지는 바로 음흉한 반 혁명적책동과 련결되여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벌써 중농을 혁명의 중요한 동력으로 규정한지가 오랩니다. 중농뿐아니라 그보다 더 부유한 계층까지도 일제를 미워하는 량심적인 계층은 다 우리편으로 간주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아동단에 들이는데 중농의 자식은 무산계급이 아니라고 배격한다니 아이들한테 어릴 때부터 그런 정신적 타격을 가해서 장차 우리 혁명을 어디로 끌고가자는 것입니까? 현당 간부든 누구든 이런 주장으로 목대를 세우고 다닌다면 그건 우리의 혁명로선도 모르고 방침도 모르는 아주 좋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혁명의 원칙과 관련되는 문제에서는 크든 작든 조그마한 타협도 없이 싸워야 합니다.≫

모두 정신이 쩡 드는것 같은 느낌이였다.

≪아동단은 이렇게 꾸려야 합니다. 바로 이렇게 하자는 것이 우리 혁명의 주장입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저 다소곳하고 서서 말씀을 들으시였다.

눈에는 이슬이 그냥 괴여있었다.

장군님께서는 한참동안 아동단실정에 대하여 물으시였다. 아동단원이 모두 몇명이나 되느냐, 몇살씩이나 먹었느냐, 글은 어느만치 알고있느냐, 구체적인걸 세세히 물으시였다. 그러시고는 김정숙동지에게 래일 간부회의를 하겠으니 참가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다른 마을로 떠나가시였다. 몹시 중요한 사업을 돌보시려 오신것이 분명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한참 서서 밭머리길로 걸어나가시는 장군님을 그렁한 눈길로 바라보시였다. 속으로 장군님을 부르며 자신께서 정말 꿈을 꾸고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하시였다. 그렇게 안타까이 그리워하던 장군님, 그 장군님을 우러르며 수많은 슬픔도 디디고 넘었고 험한 가시밭도 헤치며 걸어오지 않았는가.

곡절 많은 혁명의 길에서 수없이 눈물도 흘렸고 답답한 생각에 뜬눈으로 밝힌 밤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장군님의 영상을 그리면 힘이 솟고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김기도네의 피비린 만행이 저질러진 능지영의 밤길을 꿋꿋이 걷기도 하였고 억울하게 고생하는 동지들때문에 장군님 돌아오실 날을 목마르게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장군님을 몸가까이 만나뵈왔을 뿐아니라 장군님께서 철없는 아이들의 일을 가지고 그처럼 치하해주시고 그것을 혁명의 근본문제와 결부된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로 보아주실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군님께서는 벌써 해빛같이 밝으신 눈으로 김기도일당의 죄악을 꿰뚫어보시고 그처럼 분노에 차서 규탄하셨으니 장군님께서 제일 귀중하게 보시는 사람들문제, 그중에도 혁명가들의 운명과 관련되는 문제야 그중 선참으로 풀릴것이 아닌가.

이제는 장군님께서 돌아오셨다. 근거지에는 또다시 밝은 생활이 펼쳐지고 모든 사람이 혁명의 거세찬 흐름을 이루어 와-와- 소리치며 흘러갈 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어느덧 고마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두볼을 적시는것도 못느끼고 장군님 걸어가신 밭머리길만 바라보시였다.

얼마후에야 그이께서는 다시 일손을 잡으시였다.

그이께서는 봉희를 데리고 이날엔 밤에도 일을 계속하시였다. 마당가에 솔광불을 피워놓고 톱질, 대패질을 하시였다. 봉희 할아버지도 수건을 동이고 마당으로 나와 북통을 만들 나무속에 뚝딱뚝딱 끌질을 했다. 새벽녘엔 칠판 두개에다 문필가루가 떨어져 내릴 홈탁도 만들어붙였다. 오상묵이 같은 인간이 와서 보면 입을쩍 벌리고 넘어지게 칠판은 둘 다 웬만한 집의 한벽을 차지할만큼 크게 만들었다.

애들은 칠판에 먹칠을 하느라고 먹을 여기 문대고 저기 문대고해서 손과 얼굴이 얼룩고양이같이 되였다. 한낮이 다 되여 야학할 집으로 칠판을 옮겨갔다. 애들 한패가 휘뚝거리는 칠판밑에 머리를 디밀고 이야 소리치며 일어섰다. 다른 하나는 김정숙동지께서와 봉희가 맞잡아들고 일어섰다. 거기에도 애들이 개미떼같이 달라붙었다.

≪인젠 걸어요. 머리우에 칠판을 인 동무들이 앞서서 걸어요.≫

김정숙동지께서 말씀하시였다. 애들이 칠판밑에서 숫가마가 아프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넓은 칠판을 둥둥 띄워가지고 나가며 멋있다고 소리치기도 하였다. 봉희 할아버지도 못뽑이와 망치를 들고 뒤따라 걸었다. 애들이 어떻게 세찬지 김정숙동지께서 맞든 칠판도 거의나 그들의 어깨힘에 들려서 나갔다. 애들은 그저 바글바글 끓었다. 정말 불개미진의 역사였다.

그들이 혁명정부가 있는 큰동네로 가느라고 앞등성이를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뜻밖에 벌판쪽 언덕길로 장군님께서 경위성원들과 함께 걸어올라오시였다.

정부일군들은 보이지 않는다. 애들이 먼저 장군님께서 오신다고 소리를 질렀다.

≪놓자!≫

≪응야라 놓자!≫

애들은 길바닥에 칠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걸어오시는 장군님 앞으로 우르르 달려가 장군님께 굽석굽석 절을 했다.

≪어, 꼬마둥이들이 수고를 하는군… 할아버지도 수고를 합니다.≫

≪수고가 무슨 수고겠습니까… 이녀석들이 장군님의 발등까지 밟아치며… 비켜서지들 못할가?≫

봉희 할아버지가 엄하게 소리쳤다. 그래도 애들은 들은체 않고 장군님의 팔을 잡는다 손을 잡는다 법석을 한다.

≪칠판을 야학할 집으로 옮겨갑니까?≫

장군님께서 물으시였다.

≪네, 큰 마을에 집 둘을 얻어놓았기에 그리로 옮겨갑니다.≫

김정숙동지께서 대답을 올리시였다.

≪음, 그래서 꼬마둥이들이 한바탕 신명이 났군.≫

장군님께서는 에워싼 애들을 돌아보시며 웃으시였다. 애들도 모두 싱글벙글 웃었다. 칠판을 메고오느라고 얼굴마다 땀이 번질번질 흘렸다. 코끝에서 땀방울이 떨어지는 애도 있다.

장군님께서는 한아이 한아이 뒤머리를 쓸어주시였다. 어떤 아이는 땀이 번질거리는 둥근뺨을 자작자작 두드려주시기도 하시였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고 물으시며 머리에 이고 온 애들은 숫가마우를 눌러보시기도 하시였다.

≪자, 그럼 우리가 칠판을 메고가자구. 석진동무가 앞에서 메오. 내가 뒤에서 멜테니 그리고 한동길동무와 최동무는 저 꼬마들이 이고오던 칠판을 메라구.≫

장군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이를 수행하여 온 유격대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중 한사람이 김정숙동지 앞으로 달려와서 말을 못하고 우뚝섰다. 한동길이였다.

≪아니 동길동무 아니예요? 나왔군요. 나왔군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어엿한 군복차림으로 서있는 이 끌끌한 청년이 더운 죽가마곁에서 눈물짓던 그 한동길이가 옳은가싶어 그의 모습을 구석구석 살펴보시며 격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정숙동무, 고맙소. 정말 고맙소. 장군님께서 우리를 다 구원해주셨소. 평강촌아바이랑 다 나왔소. 어제 삼도만에 오는길로 정숙동무를 찾아보려고 했댔는데 우리는 솔모루에 먼저 가다나니 이제야 왔소.≫

한동길은 아직 물집이 잡힌채로 있는 입술을 떨며 부르짖다싶이 말했다.

≪가만 한동길동무는 정숙동무에게 할 이야기가 많겠는데 우리끼리 갑시다.≫

장군님께서 두사람을 바라보시며 웃음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어쩔바를 몰라하며 장군님께서 메시는 칠판으로 달려가시였다. 한동길이도 달려갔다.

≪장군님, 저희들이 메겠습니다.≫

≪일없습니다. 우리도 힘을 좀 보탭시다.≫

장군님께서는 김정숙동지의 말씀에 대답하시며 넓은 어깨우에 칠판을 올려놓으시고 성큼성큼 걸어나가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장군님의 어깨가 무게를 받지 않으시게 따라나가며 부축하시였다. 봉희도 부축했다. 모두 얼굴들이 딸기빛이 되였다.

칠판에서 놓여난 애들은 마을로 먼저 달려내려가며 장군님께서 칠판을 메고오신다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 찔떼군들이 무슨 소리야?≫

동네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장군님께서 우리 야학방 칠판을 메고오셔요. 인젠 삼도만에서 우리 아동단이 첫째예요.≫

≪에끼, 이놈들. 희떠운 수작 말아.≫

그래도 애들은 뛰여돌아가며 동네방네에 대고 장군님께서 칠판을 메고오신다고 더 버쩍 소리를 질렀다. 그통에 동네 사람이란 사람은 죄다 모여들었다. 동네사람들이 나가서 장군님께서 메고 오시는 칠판을 받아메였다.

장군님께서는 크게 웃으시며 애 하나의 손을 잡으시고 걸으시였다. 약삭바른놈 하나가 칠판이 동네사람들 어깨로 넘어가자 냉큼 달려들어 장군님의 손을 쥔 것이였다.

칠판은 사립문우로 둥둥 떠들어갔다.

딴 야학방에 칠판을 가져다놓은 사람들도 장군님 계신 곳으로 죄다 몰려왔다. 안팎마당에 어른들 애들 사태가 났다. 방안에다 칠판을 다는 것도 장군님께서 손수 달아주시였다.

칠판을 달아놓으니 정말 벽하나만큼은 컸다.

≪흥, 찔떼군들이 성수가 났다.≫

≪성수가 나다마다 인제 또 나팔을 불고 북을 친다던가.≫

≪뭐 뭐 목에다 시뻘건 넥태도 두른다고 합디다.≫

≪넥태가 아니라 넥타이라우.≫

사람들은 떠들며 웃었다. 애들은 신이 나서 어른들을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칠판을 다 다신 장군님께서는 애들을 방안에 빼곡 모여앉히시였다. 그러시고는 아이들에게 한참 말씀도 하시였다.

애들의 눈엔 기쁨이 끓었다. 까딱 움직이지도 않고 장군님의 말씀을 들었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 선생님의 말씀도 잘 들어야 한다, 나팔도 잘 불고 행진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불러야 한다, 규률도 잘 지키고 자기 잘못이 무엇인가를 깨달을줄도 알고 그 잘못을 고칠줄도 알아야 한다, 만약의 경우 어디 멀리로 떠나가도 울지 말고 떠나가야 한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감격해서 눈에 눈물이 다 글썽해지시였다.

어쩌면 장군님께서 아동단아이들 생활에까지 이처럼 심려를 기울여주실가. 어느 한구석 그늘진데가 있을가봐 이러실가. 큰 빛발을 세상에 비쳐 그 빛발속에서 세상이 소리치며 일어나게 만드시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로고를 바쳐 찾아다니시며 어느 한구석이라도 시들세라 사랑우에 사랑의 샘물을 더 부어주시는가! 아 장군님, 장군님!

근거지는 웅성거리며 끓었다.

장군님께서는 이날 저녁 근거지 간부들을 모여앉히시고 협의회를 여시였다.

정부회장과는 이미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시였지만 딴 동무들은 이게 무슨 말이냐고 놀랄수도 있다고 하시면서 요영구회의에서 채택된 근거지해산방침에 대하여 한참 말씀하시였다.

승승장구 발전해온 우리 혁명이 오늘에 와서는 고정된 근거지를 지키고만 앉아있을수 없게 되였다, 전략적인 방어로부터 전략적인 공격에로 넘어가야 한다, 우리의 모든 혁명력량이 광활한 무대로 달려나가 종횡무진 일제를 타격해야 한다, 그래서 남북만주는 물론 조국강토도 들썩들썩하게 만들어놓아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고 그 영향하에 자라나는 전인민적항쟁을 우리의 투쟁에 배합시켜야 한다.

장군님께서는 천하를 휘여잡으시는것 같은 안광으로 회의장을 돌아보시며 말씀을 이어나가시였다. 고생을 겪는 사람들이 모두 신중한 얼굴로 앉아서 처음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들었다.

김정숙동지께서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장군님의 말씀을 조용히 새겨들으시였다. 근거지해산이라니 처음엔 놀라운 생각이 드시였다. 이런 큰 문제를 가지고 오셔서도 어쩌면 그렇게 온화하신 안색으로 아동단 야학방에 칠판을 달아주시고 아이들한테 다심한 말씀을 해주셨을가 하는 생각도 드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우선우선하신 안색으로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이 일은 우리 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목마르게 바라고있는 조국광복의 서광을 하루빨리 앞당겨오는 길이다, 그러기때문에 우리는 먼저 이 근거지에서 여러해동안 활동한 당 및 공청 일군들, 인민혁명정부 일군들 그리고 반군사조직과 혁명조직들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뽑아서 혁명군에 입대시켜야 한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재봉대, 병기창에도 받아들여 일을 하게 해야 한다, 그 다음 근거지 군중은 적구로 내려가거나 친척을 찾아가게도 하고, 국내로 들어가게도 해야 한다, 그래서 적구로 들어가는 혁명군중은 적구에서 과감하게 활동을 벌리면서 적구에 지하조직도 내오고 적구 전체 군중을 혁명화시켜 반일투쟁에로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게 바로 전인민적항쟁을 조직하는 길이다.

장군님께서는 누구나 다 알아듣게 말씀하시였다. 인제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가슴이 쿵덩거리며 뛰였다. 장군님의 통이 큰 전략이 머리속에 석연히 들어오고 혁명의 미래가 어떻게 된다는 것이 눈앞에 펼쳐져보이기도 했다. 김정숙동지께서도 가슴이 뛰시였다. 방금전만 해도 무슨 말씀이신지 딱히 몰랐는데 인제야 가슴속에 거창하고 눈부신것이 확 다가와 안기는것 같기도 하시였다. 창창한 혁명의 미래, 조국광복의 찬란한 미래가 눈부시게 펼쳐져보이시였다. 정말 장군님께서 천하를 한줌에 걷어쥐시고 쥐락펴락하신다는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긴가 하는것을 더 깊이 깨달은 듯 싶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또 한참 근거지일군들이 오늘밤부터라도 곧 이동해야 할 인민들에 대한 개별료해를 시작하라고 말씀하시였다. 누구는 어데로 갈수 있는가, 가자면 로자는 얼마나 들어야 하겠는가, 량식은 얼마나 있어야 하겠는가, 입고 떠날 옷들이나 변변한것이 있는가, 죄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혁명정부가 그 자료를쥐고 일을 시작하라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잠시 방안을 둘러보시다가 말씀을 이어나가시였다.

≪근거지를 해산하고 광활한 지대로 진출한다는 것이 물론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근거지를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부터 공격으로 나가 적이 있는 모든곳에서 군사적으로도 치고 정치적으로도 치며 광범한 혁명력량을 묶어세워 근거지의 혁명력량을 전국적판도로 넓혀나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준비를 갖추기 위하여 4년동안이나 근거지를 지켜왔습니다. 그러한 투쟁과정에 유격대도, 혁명군중도 크게 자라났으며 적구의 인민들에게 거대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혁명력량이 능히 광활한 지대로 진출하여 전인민적항쟁을 조직할만한 력량으로 장성강화되였습니다. 이것이 지난 기간 우리 근거지들이 수행한 력사적 사명이라고도 볼수 있습니다. 우리 혁명이 얼마나 튼튼히 자라났는가 하는 것을 나는 이번 북만원정에서 돌아와서 들은 한두가지 사실을 가지고도 느낄수 있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가슴에 끓어번지시는 걱정을 진정시키시려는 듯 한동안 말씀을 중단하시고 생각에 잠기셨다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우리가 북만원정에 나가있는 틈을 타서 일제와 야합한 종파사대주의자들은 이렇게 억세게 자라나는 우리 혁명을 내부로부터 순을 잘라보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습니다. 여기 능지영에서도 김기도, 오상묵이 같은 혁명의 배신자들에 의하여 아까운 동무들이 적지 않게 희생되였습니다. 이놈들은 혁명가들을 학살하였을 뿐아니라 정수분자요, 대렬쇄신이요 하면서 광범한 군중을 우리 혁명으로부터 떼내려고 하였습니다. 그 간악한 책동이 바로 여기 삼도만의 아동단사업에까지 뻗어왔습니다. 아동단을 어린이들의 볼쉐위크적 조직으로 꾸려야 한다는 반혁명적구호의 뒤에는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의 가슴에까지 못을 박고 그것을 통하여 그 부모들과 주변의 군중들을 우리 혁명에서 멀어지게 하자는 실로 악독한 흉계가 숨어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충실한 혁명가들에게 ≪민생단≫의 루명을 들씌워서 학살한 것과 똑같은 반혁명적 책동입니다. 알고 보면 얼마나분한 일입니까. 내 그래서 근거지가 해산된다 하더라도 나쁜놈들이 어린 가슴에 지어놓은 상처는 가셔서 보내고싶어 떠나기전까지는 새 칠판앞에 앉아 글을 배우라고 오늘 새 칠판을 달아주었습니다. 아동단조직에 못들어서 비실비실 쫓기다가 아동단생활도 하게 되고 동무들이 다같이 모여서 공부도 하게 되였다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던 그 반짝반짝하던 눈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아픈 심정으로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시였다.

장군님께서 그렇게 깊이 분석해주시니 이제는 김기도, 오상묵이 같은 놈들이 벌린 음흉한 책동의 본질을 낱낱이 알게 되시였지만 그놈들이 높은 자리에 틀고앉아 장군님의 사상과 분명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렇게도 안타깝고 분하던 생각이 이제는 고마운 눈물이 되여 살눈섭을 축축히 적셔주었다.

≪이번에 다홍왜와 요영구에서 회의를 열어 이 반혁명집단의 본질은 낱낱이 밝혀졌고 그 후과들은 수습되였습니다. 능지영에서도 내가 김기도와 오상묵이 같은 우두머리들은 기본적으로 처리하고 오는 길입니다. 물론 그 잔당들은 아직 적지 않게 남아있기때문에 그 잔뿌리를 낱낱이 뽑아던지기 위한 투쟁을 한시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자는 것은 놈들의 책동은 간악했지만 우리 혁명은 이런 놈들과의 싸움속에서도 억세게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내가 북만에서 돌아오니 능지영에서 ≪민생단≫의 루명을 쓰고 억울하게 희생된 동무의 말을 누가 전해주었습니다.

그 동무는 종파분자들이 적의 ≪토벌≫때 가두어둔채 달아났기때문에 목숨이나 건지기는 쉬운 일이였지만 동무들과 함께 돌멩이를 굴리면서 적들과 싸웠고 적들이 도망치자 다시 잡혔습니다.

자기는 ≪민생단≫이 아니라는것을 기어코 밝히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 동무가 학살당하면서 나에게 전한 말이 나는 억울하게 죽는다, 그러나 나는 우리 혁명의 미래를 락관한다, 지금 ≪민생단≫혐의자를 동정하면 ≪민생단≫에 몰리여 누구나 목숨을 잃게되는 판인데 그런 속에서도 밥을 들여보내주고 전투속에 끓는 죽가마를 이고 와서 우리를 먹여살려주는 혁명전우들이 있다, 이런 밝은 눈, 깨끗한 마음씨를 가진 혁명가들이 장군님의 사상을 지켜싸우는데 어찌 우리 혁명이 승리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그렇기때문에 비록 우리는 억울하게 죽지만 조선혁명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 동무와 전적으로 같은 의견입니다. 자, 여기 삼도만에서도 봅시다. 김기도, 오상묵이 같은놈들은 우리 어린것들의 가슴에 못을 박자고 그렇게 발광했지만 결국 여기서도 밝은눈과 혁명에 대한 깨끗한 충성심을 간직한 동무들에 의하여 아이들의 노래소리와 웃음소리가 랑랑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우리 혁명이 크게 자라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가지 실례이며 동시에 우리가 요영구회의에서 근거지해산에 대한 새로운 방침을 채택한것이 정당하다는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마침내 얼굴을 치마폭에 묻고 흐느끼시였다. 밥을 넣어주러 가셨을 때 지주집 창고안에서 그 누군가가 그렇게도 절통하게 부르짖던 그 말까지 장군님께서는 다 들으시였으며 그 넓으신 가슴에 그들을 잃으신 슬픔과 함께 그들의 깨끗한 충성심을 깊이 품어주신다는것을 느낄 때 아무리 참자고 해도 눈물을 멈출길이 없으시였다.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모대기고 모대기다가 저로서 할수 있는 일을 한데 지나지 않는 자신의 일까지 념두에 두시고 이처럼 혁명의 중대한 문제와 결부시켜 높이 평가해주시니 고개를 들수가 없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회의를 잠간 쉬시는 사이에 김정숙동지를 따로 불러주시였다.

정숙동무, 정말 고맙소. 아주 잘 싸웠소. 내가 회의에서는 일반적으로 말했지만 사실 동무가 한 일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송구한 생각을 금할수가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리시였다.

≪장군님께서 오늘 밝혀주신 사상을 제가 좀더 미리 알고있었더라면 이렇게 장군님의 가슴을 아프게 해드릴 일을 조금이라도 더 막을수 있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들뿐입니다. 저는, 저는 정말 한일이 너무도 없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회의에서도 말했지만 정숙동무가 한 일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나쁜놈들이 혁명대렬의 책임적인 지위에 숨어들어 간교하게 날치는 속에서 옳고 그른것을 바로 보며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동하고 투쟁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짜 혁명가의 눈과 심장이 없이는 해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점을 놓고 생각할 때에도 내가 능지영의 이야기를 듣고 또 이번 삼도만에 와서 정숙동무가 아동단사업을 하는걸 보니 아주 기쁩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과분한 치하에 몸둘바를 몰라 고개를 다소곳하고 앉아 치마주름을 주무르시였다.

≪어쨌든 정숙동무는 이번 근거지를 해산하는 일에도 어깨를 디밀고 한몫 해주어야겠습니다. 내 생각엔 동무는 빨리 상촌으로 내려가는게 좋겠습니다. 거기 가서 이동하는 인민들이 고통이 없이 떠나가도록 조직사업과 보위사업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정숙동무가 가게 되면 내가 상촌근거지문제는 마음을 놓겠습니다.≫

≪장군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용하면서도 굳은 결심이 어린 목소리로 대답을 올리시였다. 가슴속으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시였다. 어떻게 되여 이처럼 장군님 앞에 앉아 장군님의 무거운 심려를 갈라서 받아안는것 같은 영광스러운 과업을 맡게 되였을가 하는 감격스러운 생각으로 목이 메시였다.

≪그 다음 내 한마디 더 하고싶은 것은 앞으로 동무는 우리 녀성들의 힘을 키우는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이때까지는 아이들 일에 힘을 썼지만 이제부터는 녀성문제에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조선녀성같이 천대와 멸시속에 산 불쌍한 녀성은 없다고 하시면서 녀성문제를 생각하실 때마다 가슴속에서 눈물이 흐르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번 근거지해산에서도 녀성들에게 제일 무거운 부담이 갈수 있으니 녀성들을 잘 보살피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리고 이 불행한 녀성들을 하루빨리 눈을 띄워서 투쟁에 떨쳐일어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 동원되여 일어나 혁명의 한쪽수레바퀴를 밀고나가게 해야 합니다. 이건 우리 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2천만이라고 한다면 그중 1천만은 녀성이 아니겠습니까. 이 1천만이 각성되여 일어나 제 한몫을 한다면 그 힘이 어데입니까?≫

≪장군님!≫

김정숙동지께서는 얼른 얼굴을 들며 장군님을 우러러보시였다. 장군님께서도 김정숙동지를 마주보시였다.

≪꼭 녀성혁명화의 앞장에 서야 하겠습니다. 녀성들이라고 총 한자루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총을 못들겠습니까? 총을 들고 싸우게도 만들고 조직을 꾸려가지고 적후에서 싸우게도 키워내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녀성이 다 들고일어나 싸움에 참가한다면 우리의 힘이 얼마나 커지고 강해지겠습니까? 꼭 이 문제를 명심해야겠습니다.≫

≪장군님, 명심하겠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장군님의 말씀을 뜨거운 심장에 새기고새기시였다. 얼른 옷고름을 들어 눈물을 닦으시였다.

영원히 잊을수 없는 삼도만의 밤은 깊어갔다. 눈물속에 흘러간 부암의 나날부터 긴긴 날을 두고 흠모하여온 장군님을 따뜻이 모시고 앉아 장군님으로부터 혁명사업을 어떻게 하라는 절절한 말씀을 듣는, 한생의 영광으로 새겨질 력사의 밤은 깊어갔다.


이튿날 아침엔 구정부회의실에서 간부회의가 열렸다. 마침 적들의 공세도 좀 뜸해졌다. 놈들이 병력을 더욱 증강해오며 전술을 변경시킬것 같은 기도가 엿보인다고도 전해지였다. 어쨌든 전화가 멎은 조용한 분위기속에 구정부회의실엔 사람들이 가득 모여앉았다. 모두 원쑤의 뿌리를 송두리채 뽑아낸 시원한 쾌감속에서 강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속에 와 앉아있는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이 뛰기도 하고 눈물이 글썽거려지기도 하시였다.

리억겸이, 그 가증스러운 놈을 능지영에 련락하듯마듯 강호가 와서 잡아가두고 일을 바로잡아준 것이 꿈만같기도 하시였다. 꼭 그리운 오빠가 나타나 자신의 가슴을 쑥 열어준것 같은 생각도 드시였다. 태봉시의 인연이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시였다.

강호는 혁명의 전반적 정세를 한참 설명했다.

그리고는 반≪민생단≫투쟁의 좌경적오유가 혁명에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입혔는가 하는것을 또 한참 이야기했다.

그는 이 심각한 피해를 씻기 위해서 금년봄 북만에서 왕청으로 돌아오신 장군님께서 이어 그 난국을 타개하는 투쟁의 진두에 나서시였다고 했다.

틀이 큰 그는 한마디 한마디를 심장에서 퍼올리는것 같이 이야기했다.

≪바로 이것을 바로잡으시기 위해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금년 이른봄 두차례의 회의를 여시였습니다. 다홍왜에서 십여일간 회의를 하시고는 다시 요영구에서 회의를 여시였습니다. 그 결과이 반혁명집단의 우두머리들은 곧 처단되였습니다. 그러나 잔당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기때문에 그것을 뿌리뽑기 위한 단호한 조치와 방침을 세우시고 각지로 공작원들을 파견하시였습니다. 우리가 능지영으로 온것도 바로 장군님의 명령에 의해서 그 반혁명집단의 여독을 깨끗이 가셔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참으로 장군님의 현명하신 령도가 없었다면 우리 혁명이 어찌될 번했습니까? 우리는 능지영에 와서 몸서리치는 일을 알게 됐습니다. 능지영에서는 일제의 주구 김기도와 과거에 엠엘파족속이였던 종파사대주의자 오상묵이 한패거리가 되여 사람잡이를 했습니다. 종파사대주의자 오상묵은 출세에 눈이 멀어서 김기도가 일제의 개인줄도 모르고 서로 붙안고 미치광이춤을 췄습니다.≫

강호는 김기도, 오상묵이들이 ≪민생단≫혐의를 들씌워 가둬넣었던 사람의 수효, 죽은 수효를 다 이야기했다.

≪바로 여기 기여들었던 리억겸, 조택구, 권일표 이놈들도 그런짓을 하기 위해 김기도가 박아넣은 놈들입니다. 참말 위험천만한 일이였습니다. 여기 동지들이 누구나 다 경각성을 가지고있었기 때문에 기여든 놈들이 저 능지영놈들같이 표면에 나서서 활개를 칠수도 없었고 또 조택구 같은놈을 잡아낼수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잘 싸웠습니다. 인젠 이 술기막골도 마음이 놓입니다. 참으로 조선혁명은 위기에서 구원되였습니다. 이건 능지영이나 술기막골에서만 있은 국부적인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혁명의 광범한 전선에 뿌리가 뻗어서 피해를 입힌 엄중한 사건이였습니다. 정말 장군님의 령도가 아니였다면 어찌될 번했습니까?

능지영은 물론 여기서도 아직 리억겸, 권일표를 잡아내지 못하고 저놈들이 고동하 건너편의 적들과 내통하면서 또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뉘 알겠습니까. 장군님께서 대책을 세워주셨기 때문에 능지영도 깨끗이 되고 여기도 깨끗이 되고 또 다른 곳도, 혁명의 넓은 전선이 깨끗이 정돈되였습니다.≫

강호는 땀을 씻었다. 체구 큰 사람이 허기증이라도 오는지 몰랐다. 얼굴과 목으로 땀이 흘러내린다. 강호는 근거지해산문제를 놓고도 한참 이야기했다. 근거지해산은 여기 모여온 군중이 어려운 환경속에서 단련도 잘하고 농사도 잘지어 가을에 가서 식량을 한짐씩 지고 적구로 흩어져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쨌든 여기 동지들이 잘 싸웠습니다. 기아를 극복하면서 농사도 시절을 놓치지 않았고 대내에 기여든 원쑤도 발을 못붙이게 만들었고 또 일심동체가 되여 지금 고동하건너편의 적도 잘 막아내고 있습니다. 저는 인제 다른 보고와 함께 장군님께 여기 형편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곧 련락을 띄우겠습니다.

이 보고를 받으시면 장군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기쁨이 만면하시여 술기막골 동지들을 생각하실게 아닙니까? 우리 혁명가들은 언제나 장군님께서 기뻐하실 그 감격을 머리속에 그리며 어떤 난관이고 돌파해나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조선혁명가들이 가지는 정신의 원동력으로 되여야 합니다.≫

모두 자세를 바로잡으며 우실거렸다. 양기훈이, 한기천이들은 어험어험 큰기침을 하며 손수건을 눈으로들 가져갔다.

강호는 땀을 씻으며 고동하건너편의 적을 어떻게 막아내야 하겠다는 것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전투조직문제, 군중동원문제, 군중조직의 강화문제, 농작물 보호문제, 로약자들의 대피문제, 그는 숱한 문제를 이야기했다. 벌써 해내야 하겠다는 일의 규모도 그렇고 담보도 보통 일군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거의 한낮이 되여서야 구정부에서 나오시였다. 두어깨가 가벼워져 해빛이 화창한 들판으로 걸어나가시였다.

그 어데서 오는 가느다란 바람이 귀가에 무엇인가를 속삭이며 지나가는것 같기도 하다. 안도감! 커다란 안도감이 가슴속에 큰폭을 가지고 들어앉는 듯 싶으시였다.

강호의 이야기가 다시 절절히 펼쳐져 떠오르신다. 혁명의 전국면이 큰 시련을 겪고있었다는 것, 이 시련에 찼던 전선이 장군님의 정력이 넘치신 령도에 의하여서만 정돈될수 있었다는 것이 자신의 체험과 겹치면서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김정숙동지의 눈앞엔 위대하신 장군님의 모습이 우렷이 그려졌다. 장군님을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 거리에서 우러러뵙는듯도 싶으시였다. 생활속에 계시는, 투쟁속에 계시는, 그러시기때문에 더욱 곁에 계시는 친근하신 장군님의 거룩하신 영상이 우렷이 떠오르신다.

삼도만에 오셨을 때에도 사람들을 어데로 보내느냐, 아이들은 어데로 옮겨가느냐, 옮겨가도 여기서 꾸린 생활을 그대로 가지고 가서 맘대로 뛰며 노래부르며 살게 해야 할것 아니냐고 열가지백가지 무거운 시름을 다 한가슴에 붙안으시고 말씀 한마디 하시고는 땀을 씻으시던 장군님, 우러러뵙기에도 송구스럽던 우리 장군님, 아, 오늘의 이 안도감! 넓은 전선이 깨끗이 정돈되고있다는 이 커다란 안도감은 오로지 친근하고 위대하신 장군님께서 계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고마우셨다. 너무도 가슴이 넓어지고 절절해지시는 고마움이였다. 장군님의 해발을 받아안고 혁명하는 참된 보람을 오늘처럼 가슴벅차게 느껴보기는 처음이시였다. 이 우주의 영원한 광원인 태양을 떠나서 빛나는 별을 상상할수 없듯이 장군님의 찬란한 해발을 떠나서 혁명전사의 참된 삶을 생각할수 없다는 신념을 이 시련의 술기막골 땅에서 배우셨다고 생각하니 나무 하나, 풀 한포기까지도 다 정다와 보이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미풍이 살랑거리는 들길을 한참 걸으시였다.

산기슭에 들어서니 여적 띠여보지 못했던것 같은 붉은 나리꽃들이 여기도 피고 저기도 피였다.

그 아름다운꽃들, 그 무슨 정열에 불타듯 진하게도 붉게 핀꽃들, 이것들도 행복한 순간에 이렇게 활짝 피여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보내는것이 아니냐.

김정숙동지께서는 작식대 있는 골짜기로 가지 않고 산마루턱하나를 넘어서시였다. 오래간만에 농사형편이 어떻게 됐는지를 보고싶으시였다. 동네에서 곡식이 우거진다, 이랑이 무겁게 실린다 하는 소리를 떠들긴 했으나 바쁜 일에 몰리면서 여적 들판에 나가 보질 못하시였다. 마루턱을 넘어서니 구름릉이 아득히 저쪽으로 보이는 그안 버덩이 정말 시퍼런 바다같았다. 곡식이 힘을 써도 되게 쓰며 우거지기 시작했다. 걸어나가면서 보시니 조고 수수고 벌써 오금을 지나친다. 싸움이 터지는바람에 손이 못가서 인제 겨우 초벌김을 쳐준 곡식인데 당장 장잎이라도 쑥쑥 올려밀것 같으시였다. 어느 밭이고 매한가지다. 감자밭, 콩밭들은 벌써 넝쿨처럼 우거졌다.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괭이로 땅을 파던 것이 엊그게같기도 한데 벌써 이런 보람이 나타났다. 나물 무친걸 한줴기씩 끼니로 굼때고나와 씨앗도 없는 땅을 파일구며 지쳐서 눕기도 하고 현훈증이 나서 서로 붙들며 부축도 하던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핑그르르 돌기도 하신다.

되골과 큰벌 곡식은 이 능수리곡식보다도 더 무던하다고 했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땅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 땅에 뿌린 피눈물도 만난고초도 다 이렇게 곡식으로 우거지게 했다.

기쁨으로 우거지게 했다. 장군님께서 주신땅에 인젠 이렇게 기쁨을 실었으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가. 장군님께서 주신 땅이기에 이렇게도 솔곳이 피눈물과 만난고초의 값을 우거지게 실어올리는것 아닌가!


이날밤 바로 온 중대에 출발한다는 긴급명령이 내렸다. 모두 들썽거리며 끓었다. 동네사람들도 혁명군이 떠난다고 함께 끓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정대환네 맞웃방에서 금실이, 확실이, 영애, 금옥이, 수월이들에게 새 군복을 갈아 입히시였다.

≪저는 중대장동지의 위임에 의해서 이 새 군복을 동무들에게 내드려요. 모두들 김일성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된다는 영광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이 군복을 받아주세요. 그리고 우리가 조선녀성으로서 영광스러운 혁명의 길을 어떻게 걸어야겠다는 각오를 가슴에 새기며 이 군복을 받아주세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군복과 군모를 두손으로 받들어 한사람 한사람에게 내주시였다.

그이의 눈엔 이슬기조차 어리시였다. 이 내도산에 와서 숱한 쓰라린 생각을 감쳐물고 속에 배여흐르는 눈물로 가슴속도 수없이 썩여내며 사랑의 손길로 아끼고 이끌어 녀성대오에 안아들인 혁명동지들! 그들에게 새 군복을 입히는 일이니 감격의 눈물이 왜 없으실가, 그이께서는 새로 태여나는 다섯명의 아름다운 얼굴을 눈에 한번 소담히 담아보고싶어 거듭거듭 바라보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한사람 한사람 군복을 입혀주시였다. 금실이와 금옥이, 확실이들은 군복을 타입으면서 자꾸 울었다.

≪우지들 마세요. 이 기쁜 날 눈물을 보여서야 되겠어요.≫

정숙동무는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주느라구…≫

금실이가 종시 쏟아져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부르짖었다. 하기야 하동거리 일을 생각하면 꿈만 같지 않을가, 매맞아 죽게 된 몸으로 오두막에 갇혀서 서슬사발을 붙안고 자살할 생각을 할 때 같아서야 이런 군복을 살아생전에 입어보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인젠 몸도 참제비 갈아지고 군복까지 타입고 총을 메고 나서게 되였으니 왜 실컷실컷 울고싶지를 않을가.

김정숙동지께서는 군복치마저고리를 입혀놓고는 품이 맞는가, 기장이 짜르지 않는가, 길지 않는가, 다심히 잡아당겨보고 쓸어내려보고 하시였다. 금옥이와 확실이의 군복은 더욱 알심을 넣어 지으라고 수월이에게 이르시였는데 요행 품들이 맞고 기장도 알맞았다. 나이먹고 뼈가 거세여진 몸들에 군복마저 품이 맞지 않는다면 볼모양이 있겠는가, 영애와 금실이, 수월이의 군복들도 품이 잘 맞았다. 셋은 군복을 입혀놓으니 더욱 몸들이 날씬해겼다.

≪자, 한번 자기 모습들을 비쳐보세요.≫

모자까지 다 씌우고난 김정숙동지께서는 조그만 거울을 꺼내주며 모두 제 모습들을 비쳐보라고 하시였다. 자기 한생에 영광스러운 고개마루로 오르는것과도 같은 일인데 제 모습이 어찌되였다는걸 알아보기나 해야 하지 않을가. 모두 제 얼굴을 비쳐보았다. 금실이, 수월이, 확실이들은 제 모습들을 마주보며 수집게들 웃었다. 영애는 군모를 바로잡으며 제 웃음씨 그대로 발씬 웃는다. 다만 단발을 안하고 상댕기 드린 낭자머리우에 군모를 쓴 금옥이만이 제 얼굴을 비쳐보지 않았다. 그는 시부모몽상, 남편몽상을 벗기전엔 단발을 안한다고 고집해서 부득이 낭자머리우에 군모를 씌웠다. 아무러면 어떨가. 조선녀성이 왜적을 치자고 들고 일어난줄 누가 모를가. 이게 설음속에 아름다운 마음씨를 굳게 간직하려는 진짜 조선녀성의 모습이 아닐가. 김정숙동지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낭자머리에 쓸 금옥의 군모는 자신께서 손수 조금 크게 만드시였다. 그래서 머리에 사뿐 들어가 맞았는데 금옥이는 제모습이 우스을가봐 그러는지 거울은 종시 보지 않았다.

얼마후에야 녀대원들은 김정숙동지를 따라 엄숙히 렬을 지어 내도산밑으로 나갔다. 벌써 내도산우엔 둥그런 달이 떠올랐다.

귀틀집을 헐어낸 산기슭에는 대원들이 가뜩 들어섰다. 모두 한아름씩 되는 배낭들을 지고 총들을 메였다. 기관총들은 달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놈들이 내도산앞 야산에 쳤던 천막들도 죄다 빼앗아서 중대재산으로 되였는데 그 짐도 몇짐이 되는지 알수없다.

쑥바치에서 온 아동단애들도 벌써 나와서 주런이 늘어섰다. 애들은 누나를 보고 싱글벙글 웃는다. 저들도 인젠 중대의 대원들측에 든다는거다.

모두 배낭도 혁명군대원들 배낭만큼씩 큰걸 졌다. 배낭속엔 별물건이 다 들어있다. 쌀, 담요, 하불 그리고 오포수가 하동거리에 가서 공책, 연필, 지우개, 지어는 세수비누까지도 한개씩 사다가 넣어주었다. 쌀은 동네아낙네들이 애들 먹을건 근기있는 량식을 줘보내야 한다면서 모두 조찹쌀을 댓되박씩 밀어넣어주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애들의 배낭을 하나하나 살펴보시였다. 끈이 늦지 않는가, 밭지 않는가, 늦은 끈은 죄여주고 밭은 끈은 늘구어주시였다. 사지에서 살아온 애들이라 더욱 불같은 사랑을 퍼부어주고 싶으시였다.

녀대원들은 모두 짐들을 내려놓았다. 그들의 짐이 오히려 남대원들 짐보다 많았다. 그들은 등에도 지고 머리에도 이고갈 예정이였다. 금옥이는 낮에 굴리던 자기의 재봉기대가리를 개다리소반채 보에 싸이고 나와서 앞에 내려놓았다.

아래웃말 인민들이 하얗게 밀려나왔다. 모두 중대장, 소대장들의 손목을 붙들고 장군님께 가거들랑 이 내도산백성들이 장군님의 만수를 빈다고 말씀올려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했다. 정대환이, 장윤학이들도 나왔다. 정대환은 군복입은 녀대원들앞에 와서 우뚝 서더니 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과연 놀랍다는 소리다. 바로 이렇게 만들어내자고 정숙이가 제 목도리에 구멍이 숭숭 뚫어지게 적탄이 날아오는데로 달려다니며 안아들이고 업어들이고 했고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치는것이였다.

정숙아, 가서 몸조심해라. 네가 튼튼해야 한다.≫

≪할아버지, 고마와요.≫

≪내가 너를 잊지 못하겠다.≫

≪할아버지, 무슨 말씀을…≫

정대환이 물러서자 숱한 사람들이 와서 김정숙동지의 손목을 잡고 부탁했다. 우리 내도산에서 새로 입대한 사람들을 잘 거두고 보살펴서 장군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게 만들어달라고 했다.

영애의 시할머니는 영애가 군대로 되였기때문에 제 남편을 남편으로 알지 않을수도 있으니 그런 때엔 채찍을 만들어두었다가 쫙쫙 갈기라고 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눈물이 어려 웃으시며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시였다. 할머니도 눈물을 씻었다.

정말 영애는 오씨가 우스개소리로라도 걱정을 할만치 철없이 굴긴 했었다. 그는 이 순간에도 군모를 썼다벗었다하며 깔깔대고 돌아치다가 제 남편한테 옆구리를 질리웠다.

≪얘쿠…≫

≪왜 까불어? 군규를 지킨다는게 뭔지 알아?≫

정선일은 후리후리한 키에 군복을 입으니 의젓하길 짝이 없었다.

≪애개, 별나켄 구네.≫

≪별나킨 뭐가 별나? 집안망신시켰다간 없어.≫

정선일은 소대가리같은 주먹을 쳐들어 흔들었다. 그제야 영애는 찍소릴 못하고 녀대원들속으로 달아났다.

얼마후 중대는 나팔소리를 울리며 떠났다. 긴 대렬이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 붉은 기발을 펄펄 날리며 내도산고개길을 향해 올라갔다.

≪잘들 계셔요!≫

≪잘들 가라구!≫

인민들도 손을 흔들고 대원들도 산아래를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팔소리는 더욱 랑랑히 울리고 붉은기는 기세차게 날았다.

 

제3부 광복의 해발아래

 

김정숙동지께서는 지도에 낮추 허리를 굽히시고 희망에 넘친 눈길로 들여다보시었다. 혈맥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 높은 산맥과 험한 영들이 한 눈에 안겨왔다.

장군님께서는 낭림산 줄기를 따라 북으로 부전령 산줄기와 함경산 줄기, 서쪽으로는 강남산 줄기와 묘향산 줄기를 가리키시고 남쪽으로는 북대봉 산줄기와 아호비산 줄기를 거쳐 조선 중부 이남의 크고 작은 산맥들과 연결된 태백산 줄기를 짚으시었다.

≪여기를 보오.≫하고 장군님께서는 침착하게 김정숙동지를 지켜보시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낭림산을 중신으로 하여 묘하게 영결된 하나의 거대한 산악지구를 내려다보시었다. 순간 그것은 어떤 거창한 발견처럼 그이의 의식에 번개같이 비쳐들었다. 거기서부터 미지의 폭풍 같은 사변이 움틀 것 같은 예감이 맹렬히 꿈틀거리었다. 그이의 시선은 다시 압록강 연안에서 굽이쳐 나간 붉은 산맥들의 세세한 부분을 밟아 나갔으며 그러자 점점 명료해 지는 듯 한 하나의 생각에 집착하시었다.

낭림산 줄기를 중심으로 펼쳐진 조선의 북부와 중부, 서부와 남부의 방대한 산악지대가 우리의 작전구역으로 될수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사령관동지께서 낭림산 일대에 혁명기지를 꾸리고 국내의 광범한 지역에서 유격활동을 하려는 방대한 구상이라도 하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김정숙동지께서는 점점 못 견디게 가슴이 뛰었고 호홉이 높아졌으며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올랐다.

≪사령관동지. 혹시 이곳에 우리의 작전기지가 생기는 게 아닙니까?≫

≪그렇소. 우리의 국내 활동거점이 꾸러지게 되오. 우리는 북부 조선 일대를 근사적으로 제압하고 백두산 근거지를 낭림산맥 일대에로 확대할 결심이요. 그리고 여기에 의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조선 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 것이요. 그런 즉 김정숙 동무는 무엇을 하게 되는가? 바로 국내에 백두산 근거지와 같은 하나의 혁명기지를 꾸리는 거창한 사업을 하게 되는 것이요. 알만하오?≫

장군님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힘과 무게와 담력이 느껴졌으며 행복하고 기쁨에 찬 감동이 어려 있었다. 그리하여 김정숙동지께서는 목메 이는 환희와 고마움에 가슴이 뛰었으며 그와 함께 그토록 중대하고 거창한 사업을 감당해 나갈 앞날의 불안과 걱정으로 하여 가슴이 조이는 것을 느끼시었다.

정숙동무. 일은 대단히 어려울 것이요.≫

장군님께서 저력 있는 음성으로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나는 동무를 믿소. 정숙동무가 이곳에 파견되면 신갈파를 중심으로 한 낭림산맥 일대는 우리의 국내기지로 될 것이요. 정숙동무는 국내공작을 위해 먼저 도천리 일대에서 발판을 닦고 시급히 신파로 들어가야 하오. 신파에 들어가되 조국광복회 조직을 꾸리고 혁명적 군중지반을 튼튼히 마련해야 국내에서 혁명투쟁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기 위한 기틀이 준비되는 것이요. 어떻소. 감당 할만 하오?≫

조용히 그러나 아주 주의깊이 바라보시는 그이의 안광에는 정체가 넘쳐 번쩍이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똑 바로 자세를 바로 잡으시었다. 얼굴은 땀에 젖은 듯 축축해 졌고 약간 고동 빛의 긴장한 색조에 물들어 있었으며 힘껏 움켜지신 단단한 작은 주먹은 허리 아래에 드리워 꼭 붙어 있었다.

≪장군님 믿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김정숙동지를 바라보시는 장군님의 몸가짐은 반석 같은 믿음과 충만 된 힘에 넘쳐 계셨으며 불 그래 혈 조가 피여 오른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떠돌고 있었다.

장풍천장이 바람을 안고 펄럭거렸다. 밖에서는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였다. 장풍 우로 눈가루들이 스치며 날아가는 소리가 쌔릉쌔릉 울렸다.

장군님께서는 장풍자락을 들치고 밖을 내다보시었다. 온 밀림이 갑자기 눈사태 속에 파묻히고 눈보라의 은빛 세계가 끝간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열기와 흥분이 피어올랐던 그이의 안색은 흐려지시었다.

≪적구활동을 하기가 어려운 계절이요.≫

장군님께서는 걱정스레 말씀하시었다.

≪이제 큰골 마을에 들리면 며칠 휴식하면서 그쪽 방면의 자료도 연구하고 행군 준비랑 단단히 해 가지고 떠나오.≫

장군님의 마지막 음성은 바람에 날려가 들리지 않았다.

행군이 시작되었다. 사흘 밤, 사흘 낮이 지나갔다. 유격대의 긴 대오가 뿌연 눈보라 속에 온통 휘말려 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작식대와 함께 걸어 시었다.

부대를 떠나 중요한 공작지로 가셔야 할 김정숙동지를 생각하시어 가까이에서 동무해 주시며 우리 혁명이 어떤 피의 노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말씀하시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마디마디 눈물을 삼키고 오열을 씹으며 그리고도 견딜 수 없으시어 가슴속으로 조용히 울어 가시며 그이의 말씀을 들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슬픔과 고통, 아픔과 비애의 가장 높은 절정 우를 걸어오시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슬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수난을 장군님께서 겪으시었다.

조국과 혁명, 이것이 아니라면 장군님께서 이처럼 모진 시련을 겪으실 수야 있었겠는가?

≪우리는 인간의 의지로는 참고 견디기 어려운 그런 준엄하고 시련에 찬 혁명의 길을 걸어왔소.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조국을 광복하기 위해서였소. 그리하여 우리는 그 무수한 희생과 모질고도 모진 온갖 비극과 상실의 아픔을 씹어 삼키면서 오직 조국을 광복하는 역사의 시각을 준비하여 온 것이요. 바로 그날이 오고 있소. 그 역사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소.≫

장군님께서는 흥분하여 말씀하시었다.

대오를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행군하였다. 태양은 향군대오의 뒤에서 엇비스듬히 비치고 있었는데 울 바자처럼 빽빽이 다가붙은 그림자들이 눈 우에 진하게 떨어져 대오와 함께 가고 있었다. 햇빛이 총창이며 총신들 우에서 반짝 그렸다. 눈가루와 함께 세차게 몰려오는 바람은 총 끝에서 휘파람 소리를 울리며 맴돌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눈물어린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바라보시었다. 숲처럼 솟아오른 무수한 총창 하나 하나와 그것을 받들고 선 유격대원들의 군복 어깨를 잠시라도 무심히 대할 수 없으시었다.

어떻게 마련되어 온 우리 혁명인가? 어떻게 받들고 모셔야 할 우리 장군님이신가? 장군님의 앞길에는 천만산악도 막아설 수 없게 하고 조약돌 하나라도 밟히지 않게 해 드려야 한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목 메여 오는 뜨거운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그냥 눈을 슴벅이시면서 적후에 가서 하여야 할 일들을 생각하셨다.

장군님께서는 우리가 그 동안 만 난을 극복하고 조선 혁명의 주체적 역량인 조선인 혁명군 대오를 장성시켰기 때문에 대부대의 강력한 역량으로 조국진군을 단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이제 각계각층의 반일역량을 묶어 세워 일제를 반대하는 전 민족적인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전선이 남아 있는데 이것을 김정숙 동무와 같은 지하공작원들이 해야 한다고 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조국광복의 두 전선중의 한 전선, 그 한 고리를 바로 동무가 맡게 된다고 거듭거듭 믿음과 고무의 말씀을 들려주신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한 전선의 복잡하고도 어려운 임무를 감당하여 장군님의 기대와 노고를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자 이 순간 이상하게 머리 속이 복잡해지면서 마음도 또한 불안하기 시작하였다. 장군님께서 도천리 일대의 조직들이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으셨다고 하셨다. 그와 함께 장군님의 음성에서 울리던 불안이 다시금 생생히 떠올랐으며 근심은 곱절이나 커갔다. 마치 도천리 일대의 조직에 난처한 사건들이 벌어진 것 같았고 하루 속히 도움을 바라는 급한 일이 놓여있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으시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장군님의 조국광복위업에 장애가 되는 조그마한 일도 발생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몇 개의 골짜기와 수림과 등성이를 경황없이 지나가시었다. 앞에서부터 대오가 갑자기 술렁대며 들레기 시작했다. 큰골 마을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발구가 삭정이를 흘리며 지나간 자리가 있고 방금 떨어진 소똥에서 김이 오르고 있었다. 유격대원들은 그것을 보고 환성을 질렀다.

장군님께서도 대원들을 향해 즐겁게 한마디하시었다.

≪동무들, 힘을 내오. 고개 하나를 넘으면 마을이요. 저것 보오.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군.≫

순간 대오는 고무줄처럼 팽팽해지면서 고개 마루를 치달아 올랐다. 작식대원들도 기세를 올리며 달렸다. 금숙이가 맨 앞에서 껑충거리고 그 뒤로 혜숙이가 달팽이처럼 굴러갔다. 장철구도 ≪정숙동무, 왜 그러고 있어요. 빨리 달려요.≫하며 금숙이를 따라 뛰어갔다.

≪예, 어서 가요. 곧 떠라 갈테니요.≫

그러나 김정숙동지의 마음은 벌써 경황이 없으시었다. 그이께서는 장군님 앞으로 나아가 잠시 주저하시다가 말씀드렸다.

≪사령관동지, 저를 공작지로 떠나가게 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요?≫

장군님께서는 놀라웁게 반문하시었다.

≪마을에 다 왔는데 그르지 마오. 아무리 임무가 중요하더라도 동무를 여기서 떠나 보내지는 못하겠소.≫

장군님께서는 김정숙동지의 등을 가볍게 떠미시며 앞으로 걸음을 떼시었다.

≪사령관동지, 저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저는 그곳에 피지 못할 난처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애 그럽니다.≫

장군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시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말씀을 계속하시었다.

≪팔도구에서 적구 공작을 할 때 일이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그때 하루만 늦게 가도 바로잡지 못할 일을 때마침 가서 바로잡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틀을 늦게 가서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고 안타까워 울든 일도 있습니다. 장군님, 장군님께서 어떻게 키워오신 우리 혁명이기에 제가 … 잠시라도 …≫

김정숙동지께서는 목메어 끝까지 말씀을 드리지 못하셨다.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었다. 그리고 추위에 얼어 선홍빛이 된 김정숙동지의 얼굴을 오래오래 들여다보시었다. 문득 조용히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쉬시었다.

≪고맙소, 동무의 심정이 고마워!≫

장군님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고 갈리시었다. 그 다음은 말씀 없이 그이의 등을 미시고 산마루까지 오르시었다. 햇빛은 떨어지고 산정에는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펑퍼짐한 골짝 바닥에서 부락의 등불이 반짝거렸다. 개짓는 소리,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푸르스름한 저녁 연기가 떠돌았다.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게 되는 마을의 광경인 것이다.

≪마을이요, 정숙동무!≫

장군님께서는 하염없이 마을을 내려다보시다가 조용히 입속말로 외우시었다.

≪하루 밤 동무들과 함께 언 몸을 녹이고 떠나지, 정숙동무.≫

≪사령관동지!…≫

김정숙동지께서는 그 다음의 말씀을 입밖에 내지 못하시고 고개를 숙이시었다. 이 순간의 장군님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그이께서는 아시고도 남음이 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걷잡을 수 없는 부산한 마음을 안고 돌아서시었다. 눈앞에는 수 만리 눈보라 속을 뚫고 온 전사가 있고 척후에는 적의 백색 테로의 광란 속에서 갈 길을 몰라 조직의 지도를 기다리는 전사들과 인민들이 있는 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온통 눈가루가 푸실푸실 떨어지는 김정숙동지의 옷이며 고드름이 달라붙은 신발을 내려다보시었다. 이 언 발, 아무리 따뜻하고 후더운 온돌방에 누운들 이 전사에게 휴식이 될 수야 있겠는가?…

든든히 입지도 못하고 한번 마음 편히 쉬우지도 못하고 내내 어려운 일만 맡겨오다가 또다시 이 눈보라 속을 떠나 보내게 된다니 …

순간 장군님의 가슴은 통절한 아픔으로 조여들었으며 이 용서 없이 가혹하게 들 씌워지는 세레앞에 소리쳐 항변하고 싶은 격동이 솟구치시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사람들을 이렇게 모질고도 모진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는가? 무엇이 이 소박한 사람들의 가슴에 그토록 용서 없고 무자비한 넋을 안겨주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이 이 소중한 여성들의 한 몸도 추위 속에서 막아 줄 수 없게 하였는가 ?… 그러자 마음속 가장 깊은 언저리에서 하나의 눈물겨운 생각이 솟아올랐다.

조국, 혁명, 이 성스러운 이름만 아니라면 우리는 이렇게 까지 모진 사람들로는 살지 않았을 것이며 아픔에도 호소하고 고통에도 호소하며 보통 사람의 여유를 가지고 살 앗을지 모른다.

장군님께서는 목이 메이시었다. 그리하여 그이께서는 김정숙동지의 신발에 매달린 고드름 하나 하나가 그토록 마음이 저리시었으며 야속하게 울부짖는 이 눈보라와 이제는 전혀 안정을 줄 수 없는 마을의 등불이며 죄다 크나큰 고통으로 되시었다.

≪떠나오. 따뜻한 온돌방에 누운들 동무에게 휴식이 될 수야 없지 … 우리 앞에 도탄에 빠진 조국이 있고 칠성 판에 오른 인민의 운명이 놓여 있지 않다면 어째서 이렇게 까지 모질게 행동하겠소. 가도 이것만은 잊지 마오. 정숙동무!… 이제 나라를 찾고 인민의 세상을 세운 다음 오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테지 …≫

장군님께서는 고개를 숙이시고 모자를 벗으시었다. 그리고 찬바람 속에 하염없이 이마를 내맡기시었다. 하루 밤 더운 방에서 언 발을 녹이도록 못하고 척후 수백리 길을 홀로 가셔야 할 김정숙동지를 생각 하시여 함께 추위에 시달리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찬바람은 눈가루를 안고 몰려와 그이의 머리칼을 흩날리며 몸부림쳤다.

작식대원들이 떠나는 김정숙동지를 에워쌌다.

정숙동무, 이렇게 가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장철구가 김정숙동지의 어깨를 그러안고 울먹거렸다. 금숙이도 혜숙이도 울고 다른 여대원들도 울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애써 마음을 누르시고 웃는 낮으로 그들을 만류하시었다.

≪동무들, 왜들이래요. 사령관동지께서 괴로워하시는데 이러 지들 말아요, 장철구어머니, 작식대 일을 잘해 주세요. 그리고 금숙동무, 오늘밤 온돌방에 누워서 조국으로 진군하는 꿈을 마저 꾸어요. 돌아와서 꿈 이야기를 마저 들을 테예요.≫

그 말씀에 금숙이는 더욱 괴롭게 어깨를 떨며 흐느끼었다. 꿈속에서 김정숙동지를 보지 못했노라고 말한 것이 지금은 그지없이 가슴에 맺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꾸며서라도 좋은 말을 들려줄 수 있었던 것을 … 이제 와서 그것을 후회한들 무엇하겠는가?

금숙이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씻고 흑흑 흐느끼면서 목도리를 풀었다.

≪이거라도 둘러요. 어떻게 이 눈보라 속을 혼자 가요.≫

그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목도리마저 사양하시었다.

≪나에게는 이제 집도 있고 따뜻한 온돌방도 있고 뭐든지 다 있을 텐데요.≫

그이께서는 방싯 웃으시며 돌아서시더니 홀개 바람으로 걸어가시었다. 골짝 바닥에 내려가 산마루를 돌아다보시었다. 황혼 속에 둘러선 사람들의 모습이 성벽처럼 꺼멓게 보이고 그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맨 머리바람으로 서신 장군님의 모습이 검스레한 윤곽으로 보이시었다.

장군님께서 건강하시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시며 아우성치는 눈보라 속으로 걸어가시었다.


≪동지들?…≫

김정숙동지께서는 목메인 소리로 그리고 힘들게 말머리를 떼시었다. 그러시고 분명하시자던 말씀을 잊으시고 방안을 둘러보시었다. 옆에 누군가 얼른거리는 것이 느껴지시어 이번에도 은연중 그리로 시선을 돌리시었다. 거기에는 권용산이 아니라 머리를 무겁게 떨구고 어깨가 꺼져 내린, 구래서 아주 조그마해진 것 같은 강성태의 모습이 보이시었다. 얼른 보기에도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 옆이 앉은 지세경은 눈물이 떨어지는 얼굴을 창문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동지들…≫

애써 비애를 누르시며 그이께서는 한걸 다잡으신 음성으로 부르시었다. 안광에는 불현듯 뜨거운 눈물, 그르지 말자고 거듭거듭 결심하신 그 눈물이 문득 고이었다.

뜻밖의 일에 부닥친 청년들은 숨을 죽이고 그이의 모습을 주시하였다. 벌써 그이의 안광에는 방안의 청년들이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뽀얗게 보이시었다.

≪오늘 이 모임을 마련하느라고 그렇게도 애써오던 권용산동지가… 권용산동지가… 이 자리에… 없습니다.≫

마디마디 눈물에 젖은 음성이 그르지 않아도 무거운 방안의 공기를 눌렀다.

≪그렇게도 어질고 순박하고 예절이 밝고 인정이 많던 동지를… 그가 소원한 것은 제 나라, 제당, 자기의 고향을 도로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생 남에게 성 한번 내보지 못했고 남에게 아픈 말도 못한 어진 동지였습니다. 그런데 원수 놈들이…≫

김정숙동지의 음성은 자연 높아지시고 비분에 잠겨 떨리었다. 그리고 그이께서는 권용산이의 일생을 깊은 애도의 심정으로 조용히 전하시며 머리를 떨구시었다.

방안은 뜻밖의 소식에 잠시 긴장해 졌다가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터져 올랐다. 뒤이어 가슴아픈 슬픔을 삼키는 흐느낌의 물결이 파도처럼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였다. 벙글벙글 웃으며 원목을 끄는 소잔등을 커다란 손으로 철썩 때리면서 이제 있게 될 모임을 눈앞에 그리며 그렇게도 생의 기쁨에 충만 되었던 사람이 갑자기 가다니… 슬픔은 이어 분노로 바뀌었다. 청년들은 눈물을 씻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

≪동지들, 우리는 권용산동지가 걸음걸음 피를 뿌린 이 채벌장에서 권용산동지가 목숨으로 마련한 이 성스러운 모임을 가지게됩니다. 이 모임은 그가 생전에 그렇게도 염원했고 바랬으며 또 손꼽아 기다리던 모임입니다. 동지들…≫

김정숙동지께서는 권용산의 오늘의 모임을 준비하느라고 다급히 만들었을 터실터실하고 아직도 습기가 축축한 책상을 떨리는 손으로 쓸어만 지시며 잠시 말씀을 멈추시었다.

방안은 엄숙하고도 긴장한 공기가 흘렀다. 눈물이 마른 충열된 눈들이 일시에 김정숙동지를 우러르며 까딱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동지들, 원수놈들은 우리의 혁명동지를 빼앗아 갔습니다. 원수들은 우리의 전진을 걸음걸음 총칼로 막으려고 더 큰 슬픔과 희생을 강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수들을 맞받아 투쟁에 일 떠서야 하며 혁명동지의 피 값을 천백배, 아니 천만배 받아내야 합니다.≫

김정숙동지의 낮으나 강경한 음성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동지들, 실지 투쟁은 이제부터 시작되며 이제부터 간 고하고 복잡한 정황들에 부닥치게 될 것입니다. 지난해와 금년 초에 걸쳐 압록강연안과 장백일대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타격을 받고 수세에 빠진 일제 놈들은 동변도를 안전지대로 만들기 위해 무슨 ≪특별대강≫이라 는걸 꾸며 가지고 그 실현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관동군사령부는 유격대에 대한 ≪토벌≫로서는 도저히 기세를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이 지대에서 집단부락을 만들고 인민들과 유격대를 분리시키며 각종 선전공작을 들이대어 인민들에게 ≪황국정신≫을 주입할 목적으로 이와 같이 특별≪치안≫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놈들은 그 첫 대상을 장백지대에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범을 도천리일대에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지들이 잘 알다시피 도천리에는 놈들의 토성공사, 포대공사가 실패에 직면하고 있으며 놈들의 앞잡이인 백 지주가 인민들로부터 고립을 당하여 맥을 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도천리에서 놈들이 망하면 장백일대에거 망하게 되고 장백에서 망하면 동변도의 전지역에서 망하며 나아가서 일제의 ≪치안≫정책은 총 파산은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놈들에게 있어서야 이게 얼마나 큰 사변으로 되겠습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청년들을 굽어보시었다. 놀라움과 감격이 뒤엉킨 하나같은 시선들이 그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혁명사업의 규모와 중대성, 내용의 심각한 정황이며 사변들이 눈앞에 똑똑히 떠올랐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찍 겪어볼 수 없었던 흥분과 긴장을 동시에 느끼게 하였다.

≪형편이 이렇게 되고 보면 놈들이 이제부터 얼마나 강압적 조치를 강구하고 발악적으로 나올 것인가 하는 것이 짐작이 갑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시었다.

≪놈들은 우선 실패에 직면하고 있는 토성공사, 포대공사를 빨리 다그쳐 인민들을 성안에 가두고 무서운 각종 폭압 조치를 취하여 유격대와 연계를 강제로 끊으려 할 것이며 밀정들을 풀어 지하조직의 냄새를 맡으려고 발광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하여 인민들을 빨리 각성시켜 놈들의 공사장에 나가지 않도록 하며 할 수 없이 나가는 경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을 태만하고 파괴하여 공사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조직을 급속히 확대하여 마을을 지하조직망으로 뒤덮고 한놈의 밀정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놈들이 어떠한 정책도 실현 할 수 없게 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바로 동지들, 이 채벌장에 있는 동지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채벌장에는 마을들에서 끌끌한 청장년들이 뽑혀와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핵심들이 여기서 나와야 하고 투쟁을 또한 여기서부터 크게 벌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매일같이 찍고있는 나무들은 장백일대의 집단부락 토성과 포대공사에 들어갈 목재들이며 관동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에서 군수용으로 쓸 특수 목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모로 투쟁을 벌려서 채벌 인부들이 나무를 찍지 않도록 하며 찍어놓은 목재들을 못쓰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투쟁을 벌릴 수 있겠습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여기서 잠깐 말씀을 멈추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눈 여겨 살피시었다.

잠시 동안을 두시었다가 김정숙동지께서는 강성태며 지세경의 얼굴을 일별하시고 말씀을 계속 하시었다.

≪혁명은 인민들이 하는 것이며 인민들을 옳게 묶어 세워 투쟁에로 궐기시키려면 혁명조직이 꾸려져야 합니다. 그 동안 동지들은 ≪상조회≫와 같은 것을 내옴으로써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며 인부들의 이익을 옹호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간악한 원수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인부들 모두를 힘있게 동원하고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혁명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여기 산 판에 혁명조직을 내올 기초가 튼튼히 마련되었고 실지 투쟁 속에서 단련되고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이 뭉쳐 있습니다. 오늘은 이 산 판에 ≪반일청년동맹≫조직을 결성하게 됩니다.≫

청년들은 기쁨과 감격, 긴장하고 엄숙함이 깃 든 얼굴을 들고 숨을 죽여가며 김정숙동지를 우러렀다. 그들은 한결같이 오늘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그이께서는 ≪반일청년동맹≫의 성격과 사명에 대하여, 이 조직이 김일성 장군님께서 조직영도하시는 조국광복회조직의 한 형태이며 장군님의 사상을 받들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싸우는 혁명조직이라는데 대하여 차근차근 설명하시었다.

≪저는 오늘 산 판의 ≪반일청년동맹≫조직을 결성하면서 이 조직의 책임자로 도천리 상덕동지를 추천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출입문 곁에서 일어서는 상덕에게로 쏠리었다.

키는 크지 않으나 어깨가 벌어지고 몸이 다부지며 나이에 비해 눈빛이 의젓한 상덕이가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청년들 앞이 아니라 김정숙동지의 쪽으로 얼굴을 도리었다.

약간 당황한 눈길이 얼마동안 허공에서 언뜻 하였으나 김정숙동지의 엄숙한 모습과 강성태의 엄한 기침소리에 힘을 얻고 머리를 힘있게 들었다.

≪상덕동지는 원수들에게 아버지를 빼앗기고 불쌍한 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가난하고 천대받는 집에서 자라면서 나라 없는 민족의 설음과 도통을 뼈에 사무치게 체험한 동지입니다. 지금도 집에서는 아버지를 잃은 어린 동생들이 죽물도 없이 배를 곯고있고 어머니는 앓은 몸으로 소작밭에 나가 땅을 허비고 있습니다. 저는 상덕동지가 우리와 같은 처지의 농민 청년으로서 반일청년동맹조직을 책임지면 자신의 몸과 마음 다 바쳐 싸우리라고 믿게 됩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믿음에 찬 시선으로 상덕을 바라보시었다. 이마를 덮은 총이 센머리를 한번 손으로 쓸어 올린 상덕은 자기를 지지하여 손을 높이 든 동무들의 사랑과 애정과 믿음이 담긴 시선을 바라보며 가슴이 높뛰는 것을 느끼었다.

뜻이 깊고 무거우나 벅찬 박수가 한동안 방안을 울리었다. 한결같이 상덕을 지지하는 박수였고 기다리던 혁명조직의 탄생을 기뻐하는 박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용히 생각에 잠기시어 박수를 치시었다.

그러신 다음 ≪반일청년동맹≫이 앞으로 벌려나갈 사업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었다. 처음으로는 적들의 모재 채벌계획을 파탄시키며 목재의 채벌과 운반을 될수 있는 것 지연 파졨시킬 문제가 논의되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직원들의 의향을 물으시었다.

벽 안쪽에서 한 사람이 일어났다.

≪공작원동지, 13도구 조직원인 임우걸입니다. 어제 상덕동무가 상급조직의 지시라고 하면서 그 문제에 대해서 연구를 해 가지고 회의에 참석하라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여?≫

≪찍어놓은 목재를 못쓰게 만드는 방법은 저희들이 생각해 냈습니다. 지금 이틀째 산 판에 비가 내리는데 경사지의 원목더미를 받침대가 없으면 모두 넘어갈 형편입니다. 감독 놈들은 모두 해내기 들이어서 이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선손을 써서 해치우면 됩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상덕을 돌아보았다. 어제 저녁에 올려보내어 연구를 해보라고 하셨는데 벌써 포치를 하여 조직원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상덕이의 그 책임성이 하도 미더우시어 그이께서는 친근하고도 생각 깊은 시선을 보내시었다.

≪저의 생각에도 그럴 듯이 느껴집니다.≫

강성 태는 시무룩히 웃으며 그이의 얼굴을 마주보더니 조직원들을 향해 다시 물었다.

≪동무들은 어떻소. 임우걸동무의 제의가 마음에 드는가요?≫

≪마음에 들 다뿐이겠습니까. 우리 대호상조직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절벽에 처박을 무지가 열댓 무지는 됩니다.≫

대호상에서 온 키가 큰 젊은 이었다.

≪저 동무가 대호상청년조직 책임자입니다.≫

강성태가 김정숙동지께 밤씀드렸다.

≪참, 모두 끌끌한 동지들이군요. 열 다섯 무지면 얼마나 됩니까?≫

≪삼분의 두 분은 되지요. 그걸 새로 찍자면 스무날은 걸릴 겁니다.≫

≪대단하군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감탄하시었다.

≪그러면 동지들, 지체없이 원목을 절벽에 굴리기 위한 투쟁을 벌립시다. 놈들에게는 여간만 타격이 아니겠습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채벌을 반대하는 운동도 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찍어놓은 원목을 못쓰게 만들고 새로 꼬박꼬박 찍어주어서야 안되지요.≫

≪그렇지 않고요.≫

≪그건 안됩니다.≫

조직원들은 사방에서 떠들었다.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채벌을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13도구조직원인 임우길이 다시 일어났다.

≪그건 도천리에서 하는 방법대로 봄 씨붙임을 하겠다고 일제히 들고일어나 부락으로 돌아가면 되겠지요.≫

≪그렇게만 해서 될까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웃으시며 반문하시었다.

≪장백일대에서 온 농민들은 돌아간다 치고 외지에서 온 농민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이 지주의 임지를 채벌해 줄텐데요?≫

그것은 마못 심중한 문제였다. 산 판 인부들을 어떻게 일제히 채벌에서 떼 내겠는가? 하루라도 벌지 못하면 굶게 되는 형편인데 그들은 당장 씨몛임을 해야 하는 절박성도 없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문제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외지에서 온 농민들을 어떻게 투쟁에 인입 하겠는가? 그들이 채벌을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각성되고 나중에는 혁명을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투쟁에 궐기시킬 것인가? 저의 생각에는 산 판에서 일삯을 올리고 대우를 개선할 데 대한 문제를 내걸고 일제히 파업을 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합쳐 말하였다.

뒤쪽에서 얼굴이 거밋거밋하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함흥에서 온 청년이 일어났다.

≪우리가 일하는 채벌장에 함흥늙은이가 있습니다. 함흥에서 돈을 벌려고 이년 전에 소를 끌고 왔다가 감독 놈에게 소까지 떼우고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불쌍한 늙은인데 앉으면 산 판에 불을 처지르겠다고 해요. 인부들이 싸움을 벌리면 이 늙은이가 가만있겠습니까?≫

≪우리 신방자 채벌장에는 말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청년이 일어나서 스무나문 잘되는 경상도 인부들이 고생을 겪고있는 실정을 이야기하였다. 청년들은 앞을 다투어 일어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깊이 듣고 계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신심에 넘쳐 말씀하시었다.

≪확신이 생깁니다. 노동자출신 ≪반일청년동맹≫원들이 한 개 채벌장씩 맡아 가지고 외지에서 언 농민들에게 선전공작을 벌리십시오. 싸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절박한 처지를 깨우쳐 주십시오. 그래서 일제히 파업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한쪽에서 쌓아놓은 원목더미를 절벽에 처박고 농민들은 마을에 돌아가고 외제에서 온 농민들도 파업을 이으키고…이렇게 되면 놈들은 안팎으로 녹게 됩니다. 장백현일대의 마을들에서 버리고 있는 공사들은 다 중단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놈들이 몇 달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면 그 사이에 우리는 마을들에 조직을 확대하여 혁명 촌을 꾸릴 수 있고 다음 단계의 투쟁을 주동적으로 끌고 나갈 수 있습니다.≫

바람을 맞은 수림처럼 방안은 설레었다. 투쟁의 목표와 전망이 똑똑히 내다보이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신심이 북받쳤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자못 흥분하여 말씀을 계속하시었다.

≪조직원동지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비록 목숨은 바칠지언정 변절하거나 투항하지 않으며 백사의 난간을 극복하고 결단코 싸워 이기리라는 맹세를 다지고 혁명에 나선 몸들입니다.

강도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기 위해 한 몸바쳐 사우는 것은 조선청년으로서의 영예이고 자랑이며 크나큰 행복입니다. 반만년의 빛나는 문화와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는 이천 삼 백만 우리 민족이 결코 강도 일제에 의해 멸망해 버릴 수 없습니다.

조선이 일제에게 강점된 후 주선인민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싸워왔습니까? 그러나 조선민족은 승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조선을 이끌고 나갈 영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며 위대한 영도자의 지도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위대하고 영명하신 영도자가 계십니다. 그이는 조선이민이 한결같이 높이 받들어 모시는 김일성장군님이십니다. 장군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시어 강도 일본 제국주의를 삼대같이 쓸어 눕히시고 계시며 조국광복회를 창건하시고 전체 조선인민을 조국광복전선에 묶어 세우고 계십니다.

동지들은 조국광복회산하에 조직된 ≪반일청년동맹≫원들로서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전사들입니다. 장군님의 혁명전사, 이 말보다 세상에 더 고귀하고 빛나며 자랑스러운 칭호는 없습니다. 동지들은 자기들이 일하는 채벌장에서 핵심청년들을 선발 교양하여 오늘과 같은 조직을 내오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려 조직을 확대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은 비록 하나의 조직이 나왔지만 동지들이 나가 투쟁을 잘하면 열, 백의; 동지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국내 여러 지역에서 온 동지들은 고향에 다녀올 때도 그렇고 여기서 일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가는 경우에도 혁명투쟁을 계속 하며 국내 곳곳에 혁명조직을 내와야 합니다. 나는 동지들이 김일성 장군님의 전사답게 혁명가의 절개를 지켜 조국이 광복되는 그날까지 굴함 없이 싸워 나가리라는 것을 굳게 확신합니다.≫

폭풍 같은 박수가 터져 올랐다. 김정숙동지께서도 높이 손을 들어 조직원들에게 박수를 보내시었다.

조직원들은 저마다 키를 솟구고 눈을 슴벅거리며 김정숙동지의 격려에 무한한 감동을 표하였다.

 

제4부 그리운 조국산천

 

이풍우는 보름 가까운 시일을 거의 혼자서 남만의 이주민 촌락들을 돌아다녔다. 만척출장소에서 길 안내 차로 한사람을 따라 보낸다고 하기에 고맙게 여기고 길동무로 삼았더니 하는 노릇이 몇 곳의 ≪모범부락≫이라는 곳만 골라 다니는 눈치여서 도중에서 떼어버리고 말았다.

이풍우는 ≪조선이주협회≫의 거듭되는 요구에 마지못해 시찰에 응해 나서긴 하였으나 내심 조선이주민들의 생활형편을 지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 판별하리라는 속구구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제발로 낯선 고장을 찾아다니자니 길 고생이 막심하였다. 그는 손수 등산배낭을 등에 지고 손가방은 끈을 매어 어깨에 매었으며 든든한 바바리지 춘추외투겸용의 비옷자락은 휘잡아 허리에 감고 두팔을 자유롭게 내저으면서 걸었다. 그는 아무 예고 없이 부락들에 들리고 사무소관리들과 인사 없이 떠나버리군 하였다. 그는 객주 집들에서 요기를 하고 지나가는 마차도 얻어 탔으며 길에서 비를 맞고 난벌에서 옷을 말리워 입었다.

이풍우의 얼굴은 반쪽으로 졸아들고 눈확이 깊숙이 꺼져 들었으며 턱에는 수염이 텁수룩히 덮여 있었다. 신파에서 새로 지어 신고 떠난 밤색 말가죽 구두는 남만대륙의 진창길과 흑토에 짓이겨져 미투리처럼 발목에서 철떡거렸다. 그는 흡사 유랑하는 집시를 방불케 하였다.

그러나 지치고 여윈 대신 얼굴의 선들은 칼칼해지고 눈빛은 엄하고 날카로워졌다. 남만의 참혹하고 욕스러운 인상들이 그의 이성에 몸서리치는 자취를 남겨놓은 것이었다. 이풍우는 남만을 거쳐 북만까지 내처 편답할 작정이었으나 도중에서 불시에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예화로부터 급히 돌아오라는 지급전보를 받은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예화가 시찰중에 있는 사람에게 전보를 날렸을 때는 시간을 다투는 급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첫 전보를 어느 촌락의 우편배달부에게서 받고 그후 봉천에 나와서 두 번째 전보를 받았다. 그래서 6월초순에는 벌써 신의주에서 기차를 내려 신파로 가는 프로펠러 선에 몸을 실었다.

그는 자못 흥분하여 몸둘 바를 몰라 하였다. 봉천에 나와서 조선인민혁명군이 보천보를 공격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아직 전투의 규모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에 진격하였다는 그 한 사실이 이풍우에게는 더없이 중요하였으며 그것만으로도 그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예화가 만척출장소도 걸치지 않고 복잡한 수속을 밟아 가며 자기의 거처를 알아 전보를 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풍우는 신파 땅에 내리는 첫 순간부터 미상불 자기에게는 준엄한 생활이 부딪칠 것이고 그 격동적인 생활의 와중에 불피코 휘말려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비장한 감정을 체험하였다.

자기의 기분이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선박안의 분위기도 유달리 엄엄하고 팽팽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의주에서 배에 오를 때부터 신분조사가 별로 까다롭고 관광자들을 단속하는 눈치더니 배에 올라온 사람들은 대개 군인들이거나 경찰들이고 간혹 사복한 몇 사람도 관공서의 관리들임에 분명한 행색들이었다.

군인들 속에는 다리에 누런 각반을 친 병졸은 한명도 없고 모두가 장화를 신고 긴칼을 늘여찬 장교들뿐이었다.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오는 장교들인가 하여 그들의 병종표식을 한 령장을 살펴보니 적색, 황색, 주색, 검정색 등 각각이다. 그런즉 이 장교들 중에는 보병장교도 있고 포병장교도 있고 기병장교도 있고 공병장교도 다 있는 셈이다.

(이들은 어디로 가는 군인들인가?) 이풍우의 호기심은 날카로워 졌다.

이풍우에게는 기자로서의 일반 호기심 외에 국경연안의 소요에 자주 끌려들어 ≪토벌≫부대들을 따라 장백의 밀림 속을 줄창다닌 ≪전방 야전기자≫의 몸에 밴 습관이 있었으므로 누구의 설명이 없이도 벌써 전장의 화약 내를 감촉하였다.

이풍우는 틀림없이 보천보전투에 뒤이어 압록강연안에서 큰 사변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믿어 버렸다. 그리고 한뭉테기 운집해선 이 장교들은 대대적인 전투를 앞두고 병종간의 긴요한 협동을 위한 작전모의에 불리워 가는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풍우는 자기가 타고 가는 이 프로펠러 선이 신파나루이상 더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장교들의 행선지가 신파나 혜산쯤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배에 탄 경관들을 보더라도 일반순사나 사복형사 같은 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경부보가 여럿인데 그 중에는 경부견장을 단 놈도 있었다. 순사라고는 투박한 긴칼을 차고 모자끈을 턱에 내려건 뚱뚱한 선박경찰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승객들을 굽어보는 이풍우의 눈치가 이상하였던지 선박경찰이 그에게로 다가와 경례를 붙이더니 지금 이 배에는 경부님이 타고 계신데 당신더러 어디서 무엇 하는 사람이고 무슨 일로 배에 올랐는가 상세히 물어오란다고 하였다.

≪나는 ≪동아일보≫ 신파지구 특파기자요. ≪조선이주협회≫의 촉탁을 받고 남만의 이주민촌락들을 시찰하고 돌아오는 길이요. 신의주에서 배에 오를 때 당신에게 대충 설명한 그대로요.≫

선박경찰은 다시 경례를 붙이고 죄송스러워 하면서 물러가더니 다시금 돌아와 아래 칸으로 내려가시는 게 좋겠다고 말하였다.

≪그게 경부님의 지시오?≫ 하고 물으니 경찰관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풍우는 배낭과 취재가방을 한 손에 엇갈아 들고일어났다. 선박경찰이 얼른 다가서서 배낭을 받아 아래 칸으로 내려다 주고 자리도 구석 쪽에 잡아 주었다.

이풍우는 철망을 씌운 뿌연 남포등이 흔들거리는 어둑시그레한 선실을 둘러보면서 다시금 집요한 생각에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보천보전투가 있었으니 국경연안의 공기가 얼마나 긴장할 것인가? 보천보전투에다 남만이주민 시찰 …

이풍우는 자기를 향하고 다가오는 무형의 압력과도 같은 긴박한 공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 속에는 일종의 구슬픔과 애수를 자아내는 쓸쓸함이 있고 용솟음치는 의분의 뜨거운 불덩이도 살아 있었다.

결국 따져 보면 허인해의 촉탁으로 이루어진 남만시찰이라는 것은 ≪조선이주협회≫측으로 볼 때 이로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영이었다.

≪고국동포들에게 무엇인가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이풍우의 이 물음앞에 이주민 촌락의 농민은 무어라고 대답했던가?

≪그래 죽어도 고향서 죽으락꼬 … 쩍하면 ≪에라 만주나 가보자.≫ 이런 말은 다시 말라고 … ≫

참담한 생활고의 우울을 잊고저, 그 고적을 깨뜨리고자 낮에도 술을 마시고 호득이던 육자배기의 구슬픈 곡조가 지금도 이풍우의 귀에는 쟁쟁하였다.

이풍우는 자기가 양심의 한쪼각이라도 지키고 있는 한에는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고국을 향해 부르짖는 농민의 말을 무시할 수 없고 그것에 반역할 수 없으며 ≪조선이주협회≫를 향해 공격의 화살을 날리지 못하는 경우에 침묵으로라도 농민의 뜻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는 내심의 강한 호소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허인해는 이렇게 속절없이 끝나 버릴 남만개척촌 시찰을 부디 나에게 맡겨 떠밀어 보냈는가? …

이풍우는 자신에 대한 일종의 무시와 함께 언론인을 향해 가해진 사회의 압력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나약하고 우유부단함을 통감하였다. 자기를 굳건히 방비하지 못해 생겨난 조그마한 틈새기로 탕수가 밀려들어 감탕과 검부럭지들이 쌓이고 덧쌓인 것이다.

누구를 탓하랴. 이풍우는 지나온 일을 생각하면 금시 숨막힐 듯한 수치와 오뇌로 하여 혼자의 거울 앞에서도 지리멸렬하는 듯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청산하는 의미에서도 ≪조선이주협회≫를 향해 단호히 진실을 밝히고 세상을 향해서도 엄연한 현실을 밝혀 보일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을 향해 냉정하게 묻고 솔직한 대답을 받아내려고 하였으나 이미 지치러진 마음의 문은 굳게 닫긴 채 침묵으로밖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 언제까지나 벙어리 같은 침묵으로만 이 불합리한 현실을 대하고 있어야 옳단 말인가?)

이풍우는 자신에 대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몸부림과 울분이 끓어올랐다.

이풍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누군가 옆으로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후창쯤 해서 배가 잠깐 멎었던 것인가? 그러나 옆의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것은 알바가 아니다. 등을 기대고 앉은 뱃전으로는 물이 빠르게 스쳐가는 요란한 음향이 들려 온다. 갑판의 선미에 설치한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서는 세찬 바람소리로 밖에는 달리 들리지 않는다.

혼돈된 시대의 넋도 이러할는지 모른다 …)

이풍우의 마음속 번열과 고민의 세계는 시간을 따라 더한층 깊어 갔다.

배는 어느덧 신파기슭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선창의 둥근 유리를 통해 낯익은 계선장의 뿌연 모습이 바라다 보였다. 각기 짐들을 찾아 들고 술렁거리며 돌아가는 승객들을 지켜보면서 이풍우는 자기도 어차피 서둘러 짐들을 찾아 들어야 하며 배가 기슭에 닿으면 계선장으로 빠져나가 짐꾼을 불러다 배낭이랑 맡겨야 한다는 것을 두루 생각하였다.

이풍우가 짐들을 이리저리 찾아 들고 계선장에 나서기 바쁘게 예화가 나는 듯이 달려와 가방이며 배낭이며 팔에 걸려 있는 춘추외투 등을 걷어 안더니 짐마차와 인력거들이 나와 있는 계선장의 한쪽으로 바삐 떠밀고 갔다.

≪이 사람, 어서 오게, 수고를 했네.≫

장인이 마주 다그쳐 오며 소리쳤다.

≪아버님 나오셨습니까? 어머님도 나오셨군요 … ≫

이풍우는 머리에서 모자를 벗고 넙석 허리를 굽혔다.

≪먼길에 탈은 없었는가 ? 예화의 전보를 받고 오는 길인가 ?≫

≪그럼요. 첫 전보는 어느 이주촌 시찰중에 우편배달부에게서 받았고 그 후 봉천에 나와서 두 번째 전보를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전보를 치라고 하셨습니까?≫

≪가부간 이야긴 집에 들어가 하기로 하고 짐마차에 올라타게.≫

이풍우가 장인의 손에 떠밀리어 짚검불이 널려 있는 마차 위에 장모며 예화와 함께 올라앉자 채찍소리가 울렷다.

정지천은 달려가는 마차 뒤로 부지런히 단장을 휘두르며 따라오고 있었다.

≪아저씨는 보천보 사건을 좀 들으셨어요?≫

예화가 조용히 낮은 귓속말로 이풍우에게 물었다.

≪봉천에 나와서 간단한 소식을 들었다. 상세한 내용은 모른다. 형편이 어떻게 되었느냐?≫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보천보 시가지를 들이치고 거기 있던 놈들을 모조리 몰살시켰어요. 면사무소, 산림보호구, 농사시험장은 모두 불타 하늘로 날아나고 경찰관 주재소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손에 완전히 들어갔었어요.≫

너무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여서 이풍우는 첫순간 어안이 벙벙하고 무어가 무언지 도무지 사리를 판단할 수 없는 혼돈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김일성장군님께서 보천보시가를 공격하고 그곳을 완전히 점거했다는 그 한가지 사실만은 머릿속에 활촉같이 들어박혀 온몸의 피를 갑자기 역순환시키는 것 같은 커다란 흥분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허인해가 만주시찰을 두고 어떠한 협박을 가해 올까? 요시하라는 이 문제를 두고 어떠한 올가미를 만들어 자기의 의지와 양심을 저울질하려 들까? 줄곧 생각하고 고민하고 번민에 시달리며 그 때문에 십여년 고생을 치른 듯한 심뇌에 빠져 허덕이던 그 생활상의 절박한 문제들은 죄다 뒤로 밀리 우고 말았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으로 진군하였다는 이 거창한 사변을 앞에 놓고 보면 보천보가 어떻게 되었으리라는 것과 거기서 어떠한 열광적인 사변이 연이어 일어났으리라는 것을 예화의 말이 아니라도 그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미상불 보천보 거리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세상으로 되었을 것이다.

예화는 마치 자기가 그 열광적인 전장의 목격자이기나 한 것 같이 흥분에 들떠 이야기하고 장군님께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밀려나온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신 장문의 긴 내용까지 줄줄이 외워 바쳤다. 마차는 마치도 예화의 높이 솟아오른 그 흥분의 열광적인 기분에 휘말려 들기라도 한 듯이 길섶으로 자갈을 내뿌리며 기운차게 달려간다. 마차꾼의 꾸불럭 거리는 긴 채찍은 허공 중에서 쉴새없이 원을 그리며 마차의 버주기를 딱딱 때렸다.

집으로 돌아온 예화는 아버지의 발길이 닿기도 전에 늙은이의 문갑을 열어제끼고 성경책 밑바닥에서 누렇게 등사잉크가 번진 종이를 꺼내었다. 그것은 조선인민혁명군 출판소에서 찍은 격문과 삐라들이었으며 읍거리에 나붙은 포고문이었다.

≪어디 보자.≫

이풍우는 몇 사람의 손을 거쳐 이곳으로 왔는지 몇 곳이 째지고 한쪽 귀도 떨어지고 게다가 수십번 접었다 폈다 하여 글자들이 비비어 흐려지기도 한 포고문을 펴 들고 가쁜 호흡 속에 읽어 내려갔다.

≪…

우리 조선민족은 생사존망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리들은 자기 민족의 출로를 개척하고 자기 살길을 타개하며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국을 광복하기 위하여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이다. 우리들이 6∼7년간 만주광야에서 필사적 투쟁으로 일본제국주의 약탈자들에게 치명적 타격을 준 것은 세인이 다 인정하는 바이다.

본군은 조선에 있는 애국지사의 열혈적인 본군 용사들의 강력한 단결에 기초하여 조선민족의 피를 빨아 배를 불리는 흡혈귀 조선총독부와 직접 싸울 목적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함남북일대에 원정하게 되었다.

가련한 조선동포 형제들 ! 속히 출동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단결하여 각종 투쟁으로써 본군의 유격전쟁에 호응하라 !

하루속히 일제통치를 분쇄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의 정부를 수립하는데 매진하자!≫

이풍우는 앉은자리에서 몇 번을 다시 읽고 고쳐 읽고 하였으나 좀처럼 포고문의 글줄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비록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리고 공산주의자들과 반목 질시해 살아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포고문의 글발은 그의 가냘픈 민족의 양심 위에 열광적인 고무의 맥박을 가하고 가슴속에서 후더운 피를 끓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로구나!)

이풍우는 안경을 벗어 들고 눈구석에 핑그르르 고이는 눈물을 닦으며 깊은 한숨 속에 부르짖었다.

(나라를 빼앗고 민족의 넋을 짓밟은 간악한 왜놈의 머리 위에 이다지도 거세찬 불벼락을 안기다니 …조선사람치고 이 장쾌한 소식에 접하여 그 누가 기쁨이 없고 웃음이 없고 환희와 격동과 찬탄이 없겠는가? 이 소식이 울려 가는 이 나라의 방방곡곡 그 어디서나 장군님의 이야기로 한동안은 간도 잊고 고생도 잊고 속이 후련하여 명절처럼 들떠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과 사상으로 통하지는 못해도 민족의 핏줄로 이어지는 이 정이야 어찌 물리쳐 버릴 수 있을 것인가?)

≪예화야, 그런데 어떻게 네가 전보를 쳤느냐?≫

≪옥순언니가 전보를 치라고 하셨어요. 온 국경연안이 보천보전투의 자랑찬 소식으로 끓어 번지고 있는 때에 황토먼지 이는 남의 나라 땅을 밟고 다닐 이풍우선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시면서 … ≫

이풍우는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고마워 … 하긴 내가 지금까지도 남만의 흑토를 짓이기고 돌아간다면 그건 필경 비극일 게다. 와 보니 내가 오기를 참말 잘한 것 같구나 … ≫

이풍우는 가슴속에 차 흐르는 감격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어 헐떡헐떡 더운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새 집안형편은 어떻니? 내가 남만시찰을 떠날 때에는 예숙이가 약방경영을 해보리라는 의향이 있었고 아버지는 조국광복회 대표와 그냥 엇서 나가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는데 …≫

≪예숙언니는 약방을 차리고 나앉았어요. 그렇지만 안존한 약방주인으로 살지는 않을 거예요. 편벌장 폭동이후로 늘 번민에 싸여 있더니 다시금 의기를 가다듬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아버지는 이전에 비해서야 많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공산주의자들과 단합을 이룩하는 면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요.≫

≪그것참 뜻밖이로구나. 아버지는 언제나 민족의 단합을 갈망해 오셨고 그것을 위해 힘과 재정을 아끼지 않으려던 분이 아니냐?≫

이풍우는 참으로 놀라운 듯 안경다리를 잡았다 놓았다 하였다.

≪바로 그랬어요. 아저씨 말씀대로 아버지는 언제나 민족의 단합을 주장하셨지요. 그래서 조국광복회 대표와의 면담에도 응하셨고 얼마동안은 실천으로도 그것을 고수해 나가는 기세를 보이셨구요.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보면 그것은 한갖 보기 좋은 허울에 불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단합을 주장하시면서도 털끝 만한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으며 일단 손해가 미친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정없이 등을 돌려버리고 말아요. 이것이 과연 그토록 민족의 단합을 목마르게 바라던 아버지의 옳은 처사일까요?

저는 어쩐지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버지의 처세를 날마다 자꾸 들여다보는 것 같아 괴롭기 그지없어요.≫

≪네가 너무 심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설마하니 아버지가 그럴 수 있느냐? 아버지는 정직하고 선량한 부이다. 아버지에게서 어떤 위선을 찾아본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풍우의 낯빛은 다소 엄엄해졌다.

≪그렇지 않아요. 아저씨!≫

예화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이풍우의 말을 부정해 버렸다. 다른 모든 일을 이렇게 저렇게 이해한다 해도 향옥이의 일을 두고 취했던 아버지의 행동은 머릿속에 가시처럼 박혀 언제나 아픈 자극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버지로서는 그러지 말아야 했을 것이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서 쏟아질 비난이 두렵고 자신의 체신에 흠이 된다 하더라도 그토록 불행한 처지에 이른 향옥이를 어찌 딴 곳에 보내려고 할 수 있었단 말인가?

하다면 옥순언니는 아버지처럼 향옥이로 하여 발생할 이런저런 난사들을 생각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그이께서는 그러시지 않았다. 일단 향옥이를 옳은 삶의 길로 인도하려고 각오한 이상에는 그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사상과 민족주의자들의 ≪대동단결≫사상은 얼마나 카다란 하늘땅의 차이를 가지는 것인가?

자기의 피와 땀을 바치지 않고 자기의 이해를 각박하게 지키면서 그 누구와 간결하고 합작하겠다는 것이야말로 순전히 거짓이고 허위가 아닌가? …

이풍우는 놀라움에 약간 헤벌어진 입을 그냥 다물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예화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향옥이 같은 여인 하나를 위해서도 초개같이 목숨을 던질 각오가 돼 있는 공산주의자의 정신적 기초에는 과연 무엇이 작용하고 있단 말인가? 나라를 사랑하고 인민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자의 의무라는 단순한 말로는 그 정신적 내면의 복잡한 구조를 다 밝히기 어렵니 않겠는가? 그것을 알려면 아직도 얼마만한 시간과 정력의 소비가 있어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단 한가지 명백한 것은 이러한 간난신고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은 기어이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이룩하고 조국의 광복이라는 크고도 거창한 위업을 달성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이라는 느낌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정지천이 한벌 땀에 떠서 들어섰다.

≪아저씨만 남구 너는 안방에 들어가거라.≫

예화는 아버지가 벗어 주는 대로 모자며 두루마기며 저고리를 받아 횃대에 걸쳐놓고 급한 김에 방안으로 끌고 들어온 단장만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예화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정지천은 방바닥에 앉기 바쁘게 적삼 깃을 들어 바람을 일구면서 물었다.

≪예,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거창한 소식입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하신 연설내용도 듣고 방금 전에는 포고문이며 격문과 삐라들도 읽었습니다.≫

≪잘했네. 그 동안 우리는 다시 조국광복회 대표와 상종할 기회를 가졌었네. 차차 이야기할 테지만 향옥이 일로 그렇게 되었네. 놀라지 말게.≫

≪그렇다면 아버님은 조국광복회 대표와 손잡고 혁명하기로 결심하셨습니까?≫

≪아닐세. 내 말은 그게 아니네. 내가 조국광복회 대표를 존대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나서자는 게 아니네. 지금 읍거리의 공기는 험악하네 자칫하면 놈들의 칼에 맞을 위험이 있네. 그러니 자네도 공산주의자들 편에 아주 기울어질 생각은 하지 말게. 남만이주민들의 생활형편에 대해서도 아주 외면을 해 버리고 침묵하는 자세로 나가게. 지금은 그래야 하겠네.≫

이풍우의 두터운 도수안경알속에서 벌거우리하게 상혈된 두눈이 끔벅거리며 정지천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버님. 공산주의자를 존대한다면 그들과 손잡고 나설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아버님도 잘 아시는 것처럼 저는 지금가지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해오지 않았습니까? 농민계몽도, 빈민구제도 심지어는 유격대의 선전까지도 …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이 비록 크지는 않으나 민족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그 때문에, 그 자그마한 정당성의 고수 때문에 줄곧 쉬지 않고 부지런히 육신을 놀려 온 것입니다. 이번에도 저의 이 근본입장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아버님도 조선인민혁명군 원정대의 포고문을 읽으셨겠지요. 조선사람의 피가 있고 넋이 있고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의 피를 끓이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남만에서 돌아 칠 때만 해도 의기를 잃고 주저하면서 번민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오늘 예화에게서 이곳의 사변들을 알게 되고 보천보전투의 소식을 상세히 듣게 되니 힘이 생깁니다.≫

정지천은 한동안 방바닥만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무어라고 자네한테 더 설명을 해야 할 지 모르겠네. 아무튼 생각대로 하게.

자네도 뜻이 있고 분별 있는 사람이니 순순히 내 말만을 믿고 따를 수는 없을 걸세.≫

이풍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남씨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먼동이 푸름 푸름 터오고 있었다.

한성욱은 밤새 김정숙동지의 탈출을 준비해 오던 포대산 수림 속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깔나무, 잣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수림 속에 새벽빛이 어리는 걸 보면 도천리 등판에는 멀리 달구지가 지나가는 것도 보일상 싶다.

한성욱은 해뜰 임박에 13도구쯤에 가 닿을 작정을 하고 떠났으나 어두운 길을 더듬으며 걷노라니 예상처럼 되어지지 않았다. 한때 도천리의 권용산에게도 지지 않을 걸싼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 한성욱의 걸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눈을 번히 뜨고도 길을 헛갈려 먼굽이를 에돌아 가고 밤눈이 어두운 사람처럼 길의 고름새도 가늠하지 못하고 풍덩풍덩 내짚다가 넘어지기도 하였으며 장마 때 패워나간 작은 홈태기에 빠져도 오랜 시간 허우적거리고야 겨우 일어서군 하였다.

한성욱은 눈을 떴다 뿐이지 세상이 온통 캄캄하였다. 몸을 움직이고 숨을 쉬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느낌으로써 살아 있는 자기 존재를 겨우 의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는 길도 그에게는 그리 반가운 걸음이 아니었다.

그는 김정숙동지께서 남영이를 통해 조직에 보내 주신 편지를 정지천에게 가지고 가는 걸음이었다. 당조직에서 문제를 그렇게 결정하고 그 집행을 한성욱에게 맡긴 것이었다. 통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정숙동지를 구원하지 못하고 그이의 편지만을 들고 정지천을 향해 발을 옮겨놓다니, 그이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스스로 놈들의 손에 몸을 묶이우고 그 묶이운 몸으로 원수를 맞받아 나아갈 작정을 하신 것인가?…

이성으로도 감정으로도 다 받아들이지 못할 울분이 그의 마음속에서 모닥불처럼 타 번지고 있었다.

혁명조직과 동지들을 위해서 그리고 민족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을 위해서 그이께서 자신을 희생하시는 그 몇 백분의 일을 혁명의 수확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단 말인가?…

압록강 줄배로 강을 건너 신파읍에 들어서니 중낮이 가까웠다. 한성욱은 사람들이 적게 다니는 뒷골목 길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정지천은 지금 어떤 모양을 하고 사랑방에 들어박혀 있을까?

밤을 넘길 수가 없어 며칠 동안 미음으로 살아간다는 정지천이다. 어제 한성욱이 찾아갔을 때 정지천은 앉은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온몸을 화들화들 떨기만 하였다.

여느때의 그 당당하던 거동과 의젓한 위풍은 간데온데 없이 사라지고 볼편이 우무러들 정도로 여위고 초췌해 졌으며 등이 휘고 얼굴에 주름도 늘고 성긴머리 카락은 더 성기어져 뻘겋게 고민을 겪는 불행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한성욱에게는 정지천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한성욱의 눈앞에는 김정숙동지께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들씌워 놓았으며 우리 혁명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죄 많은 인간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한성욱은 정지천을 향하여 쏟아 놓았던 불소나기 같은 말들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유산자의 위선, 유산자의 허위에 대해서 증오를 담아 규탄했던 것만은 생생히 기억된다. 오늘은 한성욱이가 그것조차 저저히 사과하지 않으면 안될 괴로운 처지에 빠져 정지천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 이것이 어쩌면 가혹한 운명의 장난은 아닌가?…

한성욱은 마치 갈증이 난 사람같이 안타깝게 목을 휘저으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정지천의 집 대문을 열고 뜰 안에 들어섰다. 마침 사랑방에서 수수한 검정소반에다 미음그릇 하나를 담아 들고 나오던 남씨 부인이 한성욱을 띄어 부랴부랴 안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한선생이 오셨어요.≫

사랑방문이 펄쩍 열리고 병자처럼 두손으로 문턱을 그러잡은 정지천이 가슴을 헐떡헐떡하며 내다보았다.

≪어떻게 되셨소? 어서 들어오시오.≫

정지천은 오금을 펼 힘조차 없는 듯 앉은자리에서 문턱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한성욱이가 어제 태주삼의 집에서 김정숙동지를 즉시 구출해 내겠다고 벼르면서 떠나갔기에 그 여부를 알고저 새벽바람으로 예화를 도천리에 건너 보낸 정지천이다. 김정숙동지께서 성한 몸으로 세상에 나서면 자기도 오금을 펴고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이의 몸에 변고가 생기면 스스로 사약을 먹고서라도 세상을 가 버리리라 작정한 정지천이다.

한성욱은 휘적휘적 다리를 떬겨 놓으며 마루에 올라섰다. 그의 옷은 이상하게 몸에 붙지 않고 옆구리에서 펄럭펄럭 바람을 일으킨다.

정지천은 돗자리 두 잎을 이를 맞물려 깔아 놓은 그 한쪽으로 바삐 물러나 앉으며 한성욱이 앉을 자리를 내었다.

남씨 부인은 안으로 바삐 뛰어 들어가 냉수 한 그릇을 대접에 떠가지고 정지천의 미음그릇이 담긴 소반 위에 올려놓았다.

한성욱은 이 집에 오면 냉수 밖에 찾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이렇게 허술히 맞을 수야 있는가? 정지천은 아내에게 성난 눈길을 던졌다.

≪그만두시오. 맹물도 목으로 넘길 형편이 못됩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그이께 무슨 일이 생겼기에?…≫

정지천이 저고리 앞자락을 후들후들 떨면서 따져묻자 남씨 부인이 방문을 급히 닫으며 문턱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남정들의 이야기판에 한번도 끼인 적 없는 남씨 부인이었지만 오늘만은 예의를 무릅쓰고 끼어 앉은 것이다.

≪어서 말씀하시오. 가슴이 조여서 순간도 견디지 못하겠소.≫

한성욱은 대답대신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에는 깊은 비애와 헤아릴 길 없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 그는 저고리 단추를 벗기고 안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넣어 종이에 싼 얄팍한 물건을 꺼내었다.

≪이건 무슨 물건이게 이렇게 정히 싸서 나한테 주는 거요?≫

≪공작원동지께서 탈출하시기를 거부하면서 조직에 보내온 편지입니다.≫

≪아니 그분께서 탈출하시기를 거부하셨단 말씀이시오?≫

≪예.≫

한성욱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방바닥만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어인 연고로 그렇게 되셨소? 탈출하지 않으면 놈들에게 끌려갈 잡도리를 하셨단 말씀이시오?≫

≪아무튼 편지를 보십시오. 말로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인님께 편지를 들고온 겁니다. 여기에는 그이께서 이름을 찍어 밝히지 않았으나 분명 노인님을 향해 말씀하신 구절도 있습니다. 어서 읽으십시오!≫

정지천은 천천히 눈을 감고 한동안 가슴만 헐떡헐떡하다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태주삼의 글씨가 분명한 어떤 낡은 문서장 뒷등에 연필로 촘촘히 박아쓴 편지다. 정지천은 뒷손질로 문갑 위의 돋보기를 가져다 끼고 조용히 편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동지들, 귀중한 나의 혁명동지들 ! 기어이 탈출에 성공하기 바라는 동지들의 심정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너무나 잘 알고 너무나 잘 알기에 거절하기에도 그만큼 힘이 듭니다. 동지들의 간절한 요구와 권고를 접하고도 거기에 응해 나설 수 없는 것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될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의 탈출이 결국에 가서는 적의 백색 테로 앞에 혁명군중들을 내맡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지천은 편지를 든 손이 너무나 후들거려 글줄을 밝아 나갈 수 없었으므로 팔굽을 고이는 사방침을 가져다가 그 위에 편지를 올려놓았다. 안경알을 닦은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훔치고 다시 눈구석의 땀을 누르고 나서 돋보기를 꼈다.

≪동지들, 우리가 어떻게 무어온 조직이고 어떻게 키워온 혁명동지들입니까? 그리고 제가 갇힌 이 집안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해서도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댁 노인님과 손을 잡자고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이분들의 장래운명까지 책임질 것을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단순히 어떤 이용대상으로나 가식적인 외교적 입장에서 대해서는 안됩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의 통일전선 노선은 일시적인 전술이 아니라 혁명의 최후승리를 이룩할 때까지 고수해야 할 변함없는 우리의 기본 전략이라고 하시면서 혁명은 인민을 위한 사업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성스러운 일이라고 항상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대로 자기 생명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역경에 처하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자인 까닭에 그 길에서 피하지 못하며 죽음을 맞받아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자기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 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같아서는 무사히 풀려나 갈 가망이 거의나 없습니다. 이번 사건이 13도구 경찰서 지도관의 모략으로 빚어졌다는 통보를 받고서는 더욱 비장한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빚어진 사태가 험악하다 해도 지금의 환경에서 달리는 행동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해 주세요. 조직과 동지들을 위해 그리고 이 댁사람들을 위해 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제가 죽는다 하더라도 태주삼 노인이 저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리라는 것과 우리 조직이 성장하고 우리의 혁명대오가 성장하게 되리라는 것만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한사람의 혁명가는 죽어도 다른 한사람의 혁명가는 태어납니다. 아니 두사람, 세사람의 혁명가가 태어날 것입니다. 혁명은 이렇게 자라납니다. 우리의 대오는 이렇게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죽으면서도 미래를 확신하고 승리를 내다보며 웃는 것입니다. 한성욱, 민족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내성을 가지고 피와 땀을 바치며 그들을 혁명에 인입하기 위해 힘써 주세요. 한사람의 벗을 얻기 위해서도 피와 땀을 바쳐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민족주의자들을 혁명에 인입 하는 사업이 어찌 쉽사리야 되겠습니까. 한사람의 민족주의자를 얻기 위해 필요하다면 열 사람, 스무 사람의 공산주의자가 생명을 바칠 수도 있다는 장군님의 말씀을 명심해 주세요. 조국과 인민을 위해 일생을 고스란히 바치기로 결심한 혁명가만이 장군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높고 험한 인생의 고개를 넘어 조국으로 가는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혁명가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조선의 진정한 혁명가들인 것입니다. 필경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판가리 싸움터로 가면서 저는 동지들을 믿고 있기에 마음은 편합니다. 동지들, 안심하십시오. 나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직은 살 것입니다. 나의 재산의 전부인 2원을 보냅니다. 조직의 자금으로 써 주십시오.

조선혁명 만세!

공산주의적 인사를 보내면서 …≫

편지를 넣은 봉투 속에는 돈 2원이 들어 있었다. 1원은 두 군데나 종이부대를 한 종이 돈이고 나머지는 오십전 짜리 은전 한 잎에 십전 짜리 동전 다섯 잎이다.

너무도 소박한 재산이다. 그나마 이 돈 한잎 한잎을 얼만 힘들여 모아 조직을 위해 간수해 두었으랴 싶은 눈물어린 생각이 그 작은 재산을 휘감고 돈다.

다달에 돌아가는 상업자금만도 3천여원, 그 중이 순 이득금만도 사오백원을 넘는 자기의 재산에 비하면 이 돈 2원이 돈이라고 할 수 있으랴, 밤마다 술집에서 부서지는 돈도 수십원은 넘는다. 허인해를 상대로 하여 몇 사람이 둘러앉아 하룻밤을 밝히면 백여원의 돈이 들어간다. 그래도 정지천은 그 돈 몇 심원 몇 백원이 그리 아까운 줄 몰랐다. 자기는 만여원의 자금을 쥔 부호가 아니었던가?

정지천에게는 웬만한 액수의 돈은 돈으로 보이지 않았다. 읍내 교인들에게 자선을 하거나 화전촌의 빈민들에게 자선을 한다고 하면 백여원의 돈을 내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예화의 마차를 따라가던 그날에도 마부에게 1원짜리 한 장을 종잇장처럼 던져 주지 않았던가. 1원이 다 무엇인가? 그 열 배를 한번에 내던져도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지천은 한 혁명가가 자기 재산의 전부를 조직에 보내 준 돈 2원을 바라보며 눈물을 떨구었다. 한 인간의 재산으로서는 너무도 적은, 그러나 황금으로 어지러워진 이 세상에서는 옛말 속에서나 있을 법산 고결한 마음이 그 작은 돈에 여려 있기에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다.

눈물방울이 쉼 없이 솟아 나와 수염을 밀지 못한 거뭇한 턱으로 뚝뚝 떨어졌다.


정지천은 구장누이에 대한 자기의 유다른 관심이 표가 나지 않게 하려고 외조카딸인 향옥이가 빨래하다 물에 빠져죽게 된 것을 목숨을 내대고 구해준 은인이 구장누이라고 하면서 은인의 신세를 갚자고 왔으니 도와 달라고 하였다.

부회장은 자기가 경무통제위원회의 고문을 겸하고 있는 조건에서 아래 경찰의 난동쯤은 엄히 단속할 수 있다고 하면서 가와사끼대좌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보자고 하였다.

강성태가 일본말로 정성껏 박아 쓴 도천리일대 인민들의 ≪진정서≫와 백지주의 ≪항의서≫, 신파와 장백현 하강구일대 유지들의 서명서를 내보였다. 그리고 ≪안민촌≫인 도천리의 얼굴을 깎자고 드는 13도구 경찰서 지도관의 행위는 그 동안 수고스레 ≪안민촌≫을 꾸려 놓고 그 ≪모범≫을 온 장백땅에 일반화하려고 애쓰는 가와사끼대좌에 대한 엄중한 모해가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문건들을 보고 강성태의 설명까지 듣고 난 부회장 늙은이는 성이 독같이 올라 건넌방으로 가더니 현공서와 협화회 회장에게 사정을 알리고 그들의 동의를 받아 가와사끼의 부관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안민촌≫인 도천리의 체면을 깎는 것은 가와사끼에게만 아니라 경무통제위원회나 협화회나 현공서나 할 것 없이 모두 불벼락을 맞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북부동변도 치안공장위원회≫에서 열리는 회의에서는 자주 도천리 ≪안민촌≫의 모범이 소개되었으며 그 때마다 현의 수뇌부인물들이 칭찬을 받군하였던 것이다.

가와사끼대좌는 이튿날 아침시간에 정장로와 강성태를 만나 주었다. 경무통제위원회의 고문 늙은이와 협화회 회장도 자리를 같이하였다. 가와사끼는 강성태와 정장로에게서 구장누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13도구 경찰서 지도관이 음흉하게 ≪정안군≫을 내세워 도천리를 수색케 한 모든 진상을 보고 받고 나서 자신이 직접 아래에 내려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언명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오후에 정장로와 강성태는 가와사끼의 자동차를 타고 도천리로 내려왔다. 가와사끼는 우선 도천리의 지주이며 장백현 협화회의 이사인 백지주를 친히 방문하여 억울한 처사를 상소 받고 야학방이며 마을의 자위단을 직접 살펴보고 농민들을 만나서도 담화를 하였다. 그는 태오장과 태오장 댁을 불러 그 동안의 이야기를 상세히 듣기도 하였다.

가와사끼는 흥분 할대로 흥분하였다. 구장누이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도천리에 대한 스즈끼의 갑작스런 수색은 결국 자기에 대한 적대심에서 출발한 것이며 죄 없는 구장누이를 붙잡아다 공산당 감투를 씌우자는 것은 결국 ≪안민촌≫의 위신을 허물고 가와사끼 당자의 명예에도 크나큰 손상을 주어 북부동변도 통제자의 위치에서 제거해 버리자는 음흉한 술책이라고 보았다.

가와사끼대좌는 긴 수속이 없이 현지에서 스즈끼의 철직을 선포하고 새 지도관이 부임될 때까지 능포산 장에게 경찰서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능포산은 그 동안 강성태와 결의형제를 뭇고 ≪구장≫이 지하혁명조직과 연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상종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스즈끼 대위가 가와사끼대좌에 대한 은근한 반감을 가지고 도천리 ≪안민촌≫을 파보려 한다는 것도 능포산 서장이 강성태에게 발설한 것이었다.

능포산은 스즈끼의 철직이 결국 지하조직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서장은 14도구 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는 구장누이를 즉시 13도구 경찰서에 올려 보내라는 지시를 떨구고 강성태에게는 ≪양민보증서≫만 만들어 오면 석방시키겠다고 하였다.

단 하룻밤 사이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양민보증서≫에 도장을 눌렀다. 신파와 도천리 일대의 여러 개 부락들에서 그리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망라되어 만들어진 ≪양민보증서≫에는 정지천, 태주삼, 이풍우같이 김정숙동지께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안겨 준 사람들의 도장이 첫 자리에 박혀 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 체포되어 가신 날부터 보름 가까이 지난 어느 날 13도구 경찰서장으로부터 혐의자의 범죄근거 불명과 주민들의 보증을 조건 삼아 무죄 석방한다는 소식이 부락들에 날아갔다.

김정숙동지를 맞이하려고 신파와 장백현 일대의 수십개 부락들에서 모여 온 사람들이 도천리등판에 하얗게 모여 있었다.

한성욱은 군중들 속에서 차마 잊어버리지 못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았다.

김정숙동지께서 피와 땀을 바쳐 혁명의 폭풍 속으로 이끌어 들인 사람들이다. 다만 여기에 한사람의 얼굴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국내에 가 있는 향옥이다. 향옥이, 그 여성의 기구한 운명의 굽이굽이에 서려 있는 김정숙동지의 은정을 생각한다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 얼마나 눈물겨운 가지가지 이야기가 지나온 날의 자욱자욱을 안개처럼 휘감고 떠오르는 것인가?

정지천, 태주삼, 주창범, 이풍우 태오장 댁 …

그들을 행해서도 결코 달리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 중의 누구를 우리 혁명에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이나 했던가! 그토록 나 자신도 협애한 눈을 가진 혁명가였고 그 사람들 역시 혁명 앞에 시련을 던져 준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벌써 흘러가버린 옛 이야기다. 사람들은 즐겁게는 지난 일을 추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픔과 고통, 수치와 회오를 거쳐서만 돌이킬 수 있는 과거를 누가 자주 생각하려 하겠는가?

그렇지만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이를 위해서, 그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이를 내내 마음속 깊이 간직하기 위해서 아프더라도 우리는 자기들이 걸어온 구불구불한 오솔길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자주 청렴한 의식으로 그때를 돌이켜보자. 이렇든 저렇든 우리는 이제 혁명을 이해하고 그이를 따라 혁명 전에 나서지 않았는가?…

지난날이야 어쨌든 우리는 모두 혁명가들이다.

아, 이 사람들이 이처럼 열렬히 혁명을 받들고 나갈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저 멀리 김정숙동지께서 걸어오신다. 누렇게 자라 오른 조가 그이의 겨드랑 밑에서 물결쳤다. 그이께서 포승을 지고 도천리 등판을 떠나실 때는 언제 여기서 이삭을 보랴 싶게 새파란 조가 숲을 이루고 섰더니 …

사람들이 와- 김정숙동지를 향해 밀려갔다. 그이께서는 조 한 이삭을 훑어 손바닥에 놓으시고 들여다보시더니 내내 이 조가 이삭을 패고 알알이 여물기를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신 듯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부르짖으시었다.

≪조가 여물기 시작했어요. 이젠 됐어요. 한결 살아가기가 쉬워졌어요 … ≫

그리고는 좀더 크고 목메이는 듯한 목소리로 외치시었다.

≪그간 얼마나 고생들 하셨어요.

난 정말 모두 보고 싶어 혼났어요.

남영아, 난 네가 보고 싶어 울기두 했단다.≫

남영이는 길을 에돌지도 않고 조밭을 곧장 꿰차고 내달아가며 울먹거렸다.

≪아줌마, 왜 이제야 오나? 우리두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

조밭에서는 종달새들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아득한 창공 위에서 맑은 목청으로 지종지종 우짖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도 그 옛날 회령땅의 둔덕 밭에서 나물 바구니를 밟고 올라서서 구경하시던 그날의 종달새 울음소리처럼 그렇게 다정다감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귓전에 울려왔다.

 

제5부 진달래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이 옥죄여져 잠자코 서계시였다.

≪남패자에서도 강조했지만 이 집중행군의 최종목적은 조국으로, 조국으로 나가는거요. 어떻게나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오. 포위환의 약한 고리를 치고 돌파해나가 력량을 최대한으로 보존해야 하오!≫

안에서 지휘원들의 회의가 열린듯하였다.

그이께서는 녀대원들의 천막으로 돌아왔다가 두시간후 사령관동지의 부르심을 받게 되시였다.

사령부천막안에는 이미 리금준이 와있었다.

그는 웬일인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천막안에 들어서는 김정숙동지를 흘깃 돌아보았다. 언제 부상당했는지 그의 손과 팔목에 붕대가 칭칭 감겨져있었다.

털외투의 앞섶을 열어놓은 사령관동지께서 흥분에 상기된 얼굴을 약간 숙여 그이의 인사를 받으시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였다.

정숙동무, 동무는 이 리금준동무와 함께 환자들과 녀대원들을 데리고 청봉밀영으로 떠나야 되겠소. 작식대의 장철구동무만 남기고… 동무네는 밀영에서 건강도 회복하고 군정학습도 하면서 이 겨울을 지내고 봄에 련락을 보내면 그때 돌아오오. 리금준동무는 밀영의 정치사업을 책임지고 동무는 녀대원들을 책임져야 하겠소. 동무들은 밀영에 가서 우선 환자치료사업을 잘해야겠소. 그래서 래년봄에 예견되는 주력부대의 중요한 군사작전에 모든 동무들이 빠짐없이 참가하도록 해야겠소. 알겠소?≫

김정숙동지께서는 너무 아연하여 놀란 눈으로 그이를 쳐다보시였다. 리금준은 머리를 수굿하고 있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멀리에서 울려오는 위혁적인 포성에 잠시 귀를 기울이시다가 조용히 말씀을 이으시였다.

정숙동무도 알고 있지만 나는 청봉밀영에 저장된 식량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소. 그런데 거기 갔던 통신원은 좁쌀 한배낭만 지고왔소. 통신원동무는 분개해서 ≪토벌≫을 당해 식량이 없어졌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거기 공기가 이상하다고 하면서 나한테 거기에 검열대를 파견할것을 제기했소. 나는 그 동무의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소. 밀영동무들을 우선 믿고싶었고 그 동무 한사람의 추측과 인상으로 밀영 전체를 의심한다는건 신중치 못한 일이기때문이요. 그리고 또 지금은 그렇게 할 경황도 못되오. 동무들은 그저 이런 일이 있었다는것을 알고만 있고 선입견을 가지거나 더우기 거기 가서 밖에 내비쳐서는 절대 안되겠소. 주력부대와 오래동안 멀리 떨어져 외로운 환경에서 고생한 동무들인것만큼 거기 동무들을 존중하고 그 동무들한테 의거하면서 화목하게 지내오. 엄장호동무를 비롯한 거기 동무들과 합심해서 밀영을 잘 꾸려나가기 바라오. 이제 곧 떠나오. 어디로 해서 어떻게 빠져나가겠는가는 리금준동무한테 말했으니 지체말고 떠나가오!≫

김정숙동지께서는 특별임무를 받고 사령부를 떠나 멀리로 가신적이 한두번만 아니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어떤 어렵고 위급한 정황에서나 임무를 주시고는 너그러운 아량과 다감한 심정을 보이시며 다른 의견이 없는가, 애로되는것은 무엇인가고 차근차근 물으시였는데 이번만은 그러시지 않고 손을 굳게 잡아주실뿐 더 말씀이 없이 지도쪽으로 인차 돌아서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억이 막히고 눈앞이 막막해지시였다. 이런 때에 어떻게 사령부곁을 떠나 안전처로 가는가, 행군해오면서 사령관동지께 내내 미음이나 풀죽만 끓여드리고 이밥 한번 변변히 지어드리지 못한채 어떻게 떠나가는가! 사령관동지의 발밑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리며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싶은 심정이시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바위같이 움직이지 않고 범접 못할 엄한 기상만 풍기시는 사령관동지의 등을 지켜보다가 한마디 말씀도 드리지 못한채 밖으로 나오시였다.

리금준이 긴 한숨을 내쉬고 그것으로 모든것을 체념해버린듯 흔연하게 위로의 말을 하였다.

≪어찌겠소. 너무 섭섭해 마오. 이제부터 분산행군으로 넘어가기때문에 모든 부대들이 다 사령부와 혜여지게 되오. 우리만 아니요. 다 갈라지는데 어찌겠소.≫

그는 간부회의가 있었는데 7련대는 적의 포위를 돌파하여 장백현 곰의골일대에로,3련대와 독립대대는 무송현 동강일대에로 진출하게 되였다고 했다.

≪사령부는 경위중대와 기관총소대만 거느리고 맨 선참으로 포위를 돌파하여 장백현 가재수방향으로 진출하게 되오.≫

≪아니, 사령부가 처음에 돌파해요?≫

≪그렇소. 간부회의에서 그렇게 결정이 됐소. 아마 사령관동지 결심인것 같소.≫

돌파! 포위환의 한점을 타격하여 파구를 뚫고 거기로 탈출해나가는것을 의미하는 이 전투행동이 어떤 희생과 모험을 동반하는것인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천막곁에 그냥 서계시는데 강태수가 무슨 급한 정황이 생겼는지 숨이 턱에 닿아 달려와서 천막안으로 거침없이 뛰여들어갔다. 몇분후 사령관동지께서 강태수와 함께 천막에서 나와 아래쪽으로 뛰여가시다가 그이와 리금준을 돌아보시였다.

≪동무들은 왜 우물거리는거요! 빨리 떠나가오. 빨리!≫

그이께서 녀대원들의 천막으로 돌아오시니 장철구와 최정덕이 근심어린 얼굴로 앉아있다가 반겨 일어났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함께 고생하며 싸워온 장철구와 여기서 헤여지게 된것이 못내 가슴아파 잠시 망설이였으나 어차피 알려야 될 일이기 때문에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조용히 전달하시였다.

장철구는 처음에 몹시 놀랐으나 인차 년장자의 지각으로 그이의 괴로운 심정을 가늠하고 오히려 태연한척하며 말했다.

정숙이하구 갈라지기 섭섭해서 그렇지 어찌겠소. 장군님 명령인데. 군소리없이 그대루 해야지. 지내보니까 내내 붙어다니기보다 오래 헤여졌다가 만나문 더 반갑구 서로 귀한줄두 알구 해서 좋은 점두 있더라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아쉬움과 괴로움을 감추는 그의 심정에 가슴이 뭉클해지시였다.

장철구는 터져오르는 한숨을 삼키는것 같았다.

≪에그, 그저 소식을 서로 전하지 못하는게 답답하겠구나.≫

그이께서는 장철구의 꽛꽛하고 거쿨진 손을 꼭 잡아쥐시였다.

≪철구어머니, 어디 있거나 매일 아침 일어나 서로 새별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인사도 하고 말도 하자요. 그러면 되지 않아요?≫

≪원…≫

장철구는 얼굴을 외로 돌리며 손바닥으로 눈언저리를 씻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목이 메여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서계시다가 배낭속에서 머리칼로 만든 신발깔창을 꺼내시였다.

≪철구어머니, 이걸… 추위가 점점 더 심해지겠는데 이걸 사령관동지 신발밑에 깔아줘요.≫

그이께서는 설음같은것이 왈칵 터져올라 고개를 깊이 숙이시였다.

장철구가 그이를 힘껏 부둥켜안고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정숙이, 정숙이, 우리 죽지 말구 만나자구!≫

≪철구어머니!≫

산악들을 들었다놓는 포성의 메아리에 하늘이 허물어져내리는듯했다.

청봉밀영으로 가는 대원들은 여러명이였다. 그들속에는 최정덕, 서영순이도 있고 지세천의 퉁퉁 부은 얼굴도 보였다.


정숙동무, 내 말에 무슨 의견이 있소?≫

≪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엄장호동지가 그런 생각까지 품고 있는줄은 몰랐습니다. 밀영책임자로서… 저희들은 믿으려고 했습니다.≫

≪좋소… 내 말을 더 깊이 새겨듣고 의견이 있으면 말하오.≫

그리고 엄장호는 흔연한 기색으로 다른 대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계속했다.

≪또 다른 동무들은 의견이 없소?≫

대원들은 어정쩡해진 얼굴로 혹은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로 엄장호와 김정숙동지를 번갈아쳐다보았다.

겁에 질린 눈, 분개한눈, 얼떠름해진 눈들이 방안의 어스름속 여기저기에서 번뜩거렸다.

리금준이 난처해진 얼굴로 그냥 서계시는 그이를 달래였다.

정숙동무, 않소. 앉아주오.≫

김정숙동지께서는 놀랍게도 곱게 순응하여 도로 자리에 앉으시았다. 최정덕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이를 못마땅하게 돌아보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불덩어리같은 그의 주먹을 꼭 잡아주시고 자신의 가슴도 지그시 누르시였다. 그이께서는 엄장호의 속생각을 더 듣고싶으셨던것이다.

리금준이 그이를 대신하여 엄장호에게 사과하듯 말했다.

≪이야기를 계속하십시오.≫

엄장호는 문득 노여움이 풀리지 않는듯 응대도 없이 천장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였다.

≪의문이 생길수 있소. 납득이 가게 말해야 되는건데 그러지 못했거던… 사실은 동무들이 알아듣지 못할가봐 깊은 리론문제는 피하고 평이하게 이를테면 될수록 통속적으로 말한다는게 그렇게 됐소. 오늘 여기서 론의되고 있는건 사실상 로선문제요. 따라서 어려운 혁명리론을 풀어야 모든게 석연해지겠는데 어떻게 말해야 알기 쉽겠는지… 옳바른 로선을 세우자면 우선 전반적인 정세분석을 주관이 없이 랭철한 리성으로, 과학적으로 해야 되고 그에 기초해서 어떻게 할것인가, 어느 길로 나갈것인가 하는 로선을 선택하게 되오. 지금 일제는 우리 혁명력량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로 나오고 있소. 그래서 지난 l년동안 우리는 막대한 손실을 당했소. ≪혜산사건≫을 계기로 국내와 만주의 지하조직들이 거의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거나 왜놈들에게 잡혀 놈들의 야만적인 고문장에서 신음하고 있소. 우리 혁명군도 적지 않은 상실을 당했소.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었소. 우리의 기치는 선혈로 즐벅히 젖었소. 지금은 어떤 시기인가? 로씨야혁명사에 비교해 말하면 쓰뜨로뛴반동기와 같은 시기요. 우리 혁명군이 저 보천보를 내치던 때를 혁명의 고조기라고 한다면 지금은 퇴조기요. 망망한 대해에 만조와 간조가 있는것이 대자연의 섭리라면 혁명에서는… 어느 나라 혁명이나 다 고조와 퇴조의 부단한 반복을 거치는것이 법칙적현상이요. 유감스럽게도 이건 숙명… 숙명이요. 왜 그런가? 바다에 만조와 간조가 생기는건 달의 인력때문이라고 하오. 혁명은 소박하게 단순화해서 말하면 두 사회세력간의 힘의 대결이며 투쟁이요. 따라서 여기에도 물리적인 힘의 법칙같은것이 작용하여 이쪽이 힘이 세지면 고조기요, 저쪽이 강해지면 퇴조기요. 파도처럼 출렁이는 고조와 퇴조의 이 물결속에서 혁명이라는 배를 어떻게 몰아가겠는가 하는것이 혁명의 타수앞에 나서는 과제요. 동무들, 지금은 혁명의 퇴조기요, 퇴조기의 기본과제는 혁명력량을 적의 공세로부터 보호하며 보존하는것이요. 쓰뜨로뛴반동기에 로씨야볼쉐비크당이 바로 그렇게 했소! 레닌이 령도하는 볼쉐비크당은 그렇게 했소! 그러나 지금 우리 주력군은 남패자를 떠난이후 국경쪽을 향해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소. 적은 장백, 림강 일대에 대무력을 계속 집결시키며 2중, 3중… 아니 4중 5중으로 전투전개를 하고 있소. 그런데도 심중해져서 행군을 멈추거나 돌아설 대신 무슨 의지인지 계속 돌진하고 있소. 적의 대무력의 포위속으로 계속 뚫고들어가고 있소. 이 행군을 죽음의 함정으로 찾아들어가는, 파멸의 낭떠러지를 향해 눈감고 달려가는것이라고 해서 과언이겠는가! 아, 통탄할 일이요! 나는 우려하지 않을수 없소. 정숙동무, 내 말에 이의가 있소? 동무는 아까 무척 분개한것 같았는데 이제는 내가 악한 심보로 근거없이 비난하거나 허는것이 아니라는게 리해되오?≫

숨을 죽이고 앉아있는 청강자들속에서 일을 하 벌리고 듣고 있다가 의미심장하게 머리를 끄덕이는 대원들도 있었다. 엄장호는 온돌바닥에 천천히 앉아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가 도로 빼며 김정숙동지를 돌아보았다.

정숙동무, 왜 말이 없소? 의견이 있으면 말하오. 난 아무 소릴 해두 다 듣겠소. 토론시간인데 맘놓구 말하오.≫

김정숙동지께서 일어서시였다. 리금준이 의기가 저상된 얼굴로 그이를 흘낏 돌아보았다.

그이께서는 엄장호쪽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대원들을 둘러보시였다.

≪동무들, 나는 이자 33년 겨울 동만유격근거지로 왜놈들 대무력이 밀려들던 때 일을 생각했어요. 그때도 적의 공세를 과대평가하며 우는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사령관동지께서는 오직 조선혁명 하나만을 생각하시며 18명의 대원을 거느리시고 우리가 있는 마안산을 거쳐 동강으로 나가실 때도, 36년 봄 경계가 삼엄한 국경을 돌파하고 조국으로 쳐나가자고 할 때도 우는소릴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리앞으로는 언제나 왜놈들의 대무력이 접어들었고 그때마다 비겁하게 우는소릴 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돌이켜보면 장군님께서는 어느때나 적의 대공세앞에서 퇴각이 아니라 과감한 돌진으로 역공세를 취하셨고 그래서 매번 승리했어요. 장군님께서 정세를 깊이 분석하시고 적의 약점을 민감하게 포착해서 그 약한 고리를 내칠 단호한 결심을 내리시고 그 결심대로 우리 혁명군을 이끌어주셨기때문에 매번 승리했어요. 동무들, 나는 이번 주력부대의 집중행군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요! 동무들도 다 여겨들었겠지만 엄장호동지 말에 적이 대무력으로 공세를 취한다는 소리밖에 다른것이 더 있어요? 적의 대공세가 처음 당하는 일도 아닌데 놀랄건 없다고 봐요. 비관주의자, 패배주의자들한테는 적의 대공세만 크게 보이고 우리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우리것은 다 보잘 것 없고 그래서 믿을수 없는것으로 보이지요. 지금 조국인민들이 당하는 수난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구태여 긴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 혁명군의 국경연안에로의 진출은 어느 누구의 주관적의사도 아니고 조국과 력사의 요구입니다. 남패자회의가 끝난 다음 모두 그렇게 말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적의 허약한 구석을 보셨기때문에 국경쪽으로 능히 나갈수 있다고 결심하셨습니다. 장군님의 판단과 결심은 남패자회의와 그 직후에 열린 지휘원 및 병사대회에서 열광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장군님에 대한 절대적신뢰로 해서 우리 주력부대는 만난을 겪으면서도 티끌만한 의혹이나 추호의 동요도 없이 강행군을 계속할수 있었습니다. 동무들, 생각해보자요! 우리 주력군이 33년도나 35년도의 그런 청소한 유격부대인가요? 이제는 유격전쟁의 불바다속에서 벼려진 강철의 무장대오입니다. 유격전의 각종 묘술을 다 몸에 익힌… 왜놈들이 말하는것처럼 신출귀몰의 무장력입니다. 이런 군대가 적의 공세가 좀 심하다고 국경까지 못가겠는가요? 아닙니다. 반드시 갑니다! 여기서 감히 파멸적인 행군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는데 동무들, 우리 주력부대의 저 행군이야말로 우리 나라 력사에 류례없는,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가장 성스러운 애국적인 행군입니다!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만이 그런 결심을 하실수 있고 장군님의 결심은 백번 정당하고 빈틈없는 정확한것입니다! 사령부의 현 로선은 눈물겹도록 옳은것입니다!≫

그이의 웨침소리에 방안공기가 설레였다.

엄장호가 얼굴을 홱 돌리고 펄펄 타오르는 눈으로 그이를 지켜보다가 환자들이 앉아있는쪽을 돌아보았다.

≪그럼, 어디 행군을 겪은 동무들이 좀 말해보오. 동무들도 저 동무처럼 생각하오? 솔직히 말해보오.≫

태반의 환자들이 그의 기상에 눌려 머리를 수굿하고 있었다. 지세천이와 두세명의 대원들이 얼굴을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말을 못하오? 혹한속에 동상당한 발로 행군해오며 풀뿌리를 씹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그거라도 말하오. 그래 저 동무처럼 그 행군이 옳다고 생각했소? 음? 얼고 굶주리던 나머지 걷다가 눈속에 쓰러진채 숨진 동무까지 있었다는데 그 동무가 숨지기전에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인륜의 견지에서 봐도 그렇지…≫

환자들속에서 지세천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슴을 와락 쥐여뜯다가 주먹으로 다리를 내리쳤다.

≪뭐라구요?… 책임자동문 그가 어떻게 죽은줄 알기나 합니까? 알기나 해요!… 이건 정말 너무합니다.≫

최정덕이 일어났다.

≪세천동무, 앉으라요! 동무들, 인륜이라는게 무슨 소리요? 나는 유식한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해 묻소. 인정인가, 인간도덕인가 하는 소리가 아니요? 그렇게 인정이 많구 행군에 고생하는 우리가 불쌍하문 예? 어째 여기서 쌀을 푹푹 퍼서 보내주지 못했는가요? 예? 우리들이 뭘 먹었는지 아는가요. 우리가 지나온 길옆 나무들은 껍질을 벗겨먹어 다 하얗게… 하얗게…≫

최정덕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두손으로 얼굴을 와락 싸쥐며 어깨를 떨었다. 지세천이와 다른 환자들도 머리를 떨구고 흐느낌소리를 삼켰다. 그들은 비분과 설음, 살아남은 자신들과 희생된 동무들이 당한 모욕을 앙갚음하지 못하는것이 안타까와, 그리고 종잡을수 없는 격정에 어깨를 떨며 울음을 삼키는것이였다. 어느덧 환자들이 앉아있는쪽은 울음판이 되고말았다.

최정덕이 갑자기 얼굴을 번쩍 쳐들고 불찌같은 눈으로 엄장호를 쏘아보았다.

≪얼어죽었다는게 윤상범동무 소리같은데 그 동무가 어째 숨이 졌는지 아는가요? 아는가요?≫≫

리금준은 이 녀대원의 험악한 감정이 란폭한짓을 벌릴것 같아 얼굴빛이 당황해졌다.

≪정덕동무, 그만… 그만… 됐소, 앉소.≫

≪금준동무, 둬두오.≫ 엄장호가 앉은채로 거칠게 소리쳤다.

정숙동무, 동무는 누구를 고립시켜보자고 선동을 했는데 결과가 이게 무슨 판이요?≫

≪저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이 동무들도 같아요!≫

≪진실이라…≫ 엄장호가 몸을 무겁게 놀려 일어섰다.

≪동무, 내 이제는 할수없어 묻는건데 노엽게 생각 마오. 레닌의 저서 ≪일보전진 이보퇴각≫을 읽어봤소?≫

≪…≫

≪읽어봤는가말이요?≫

≪그전에 장군님께서 학습때 참고로 말씀해주셨어요.≫

그이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엄장호는 리금준을 돌아봤다.

≪강사동무는 읽어봤소?≫

리금준은 얼굴이 벌개져 황황히 대답했다.

≪예… 그전에 읽어봤습니다. 동강밀영에서…≫

≪그 저서에서 웨. 이. 레닌은 혁명의 퇴조기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사상을 피력했소?≫

≪예?…≫

리금준은 얼떠름해진 얼굴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저… 제 기억에는 레닌동지가…≫

≪그렇소, 레닌동지가…≫

≪저…그 저서에서는…≫

≪혁명의 퇴조기에는 력량을 보존하면서 전략적인 퇴각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예…≫

리금준은 애매하게 대답하였다.

≪혁명의 령수 레닌동지는 바로 그렇게 강조했소. 일보전진 이보퇴각! 얼마나 천재적인 정식화요! 정숙동무, 레닌까지 부정할테요?≫

≪저는 여기에 레닌까지 끌어올 필요가 없다고봐요.≫

≪대단하오. 대단해! 동문 그래 공산주의자라면서 레닌의 학설의 국제적보편성까지 부정하자고 접어드오? 동문 도대체 무슨 공산주의자요?≫

방안에 침착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조선공산주의자지요. … 레닌의 권위를 함부로 휘둘러 누구를 누르자고 하지 말아요. 그 책에는 이자 말한 그런 대목이 없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사령관동지의 이야기를 들은지 오래지만 그 책의 중심내용은 기억하고계시였다. 그것은 혁명의 전략전술이 아니라 당의 조직원칙을 밝힌 저서였다.

레닌은 로씨야사회민주당 2차당대회후 볼쉐비크들이 더한층 철통같이 단결되여 당이 조직적강화의 측면에서 1보전진했다면 멘쉐비크들이 떨어져나갔기때문에 이보퇴각했다는 뜻에서 ≪일보전진, 이보퇴각≫이라는 표현을 썼던것이다.

≪다른 나라 당의 문헌을 자기한테 편리하게 외곡하지 말아요. 레닌까지 끌어오지 않아도 이 밀영사태만 봐도 모든걸 다 알수 있어요. 사령부에는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많이 저장해두었다고 보고해 놓고는 그 쌀은 다 어찌고 환자들한테까지 멀건 강냉이죽이나 감자두세알밖에 주지 않았어요? 왜 급식문제를 좀 제기하면 몸에 불이 달린것처럼 그렇게 펄펄 뛰는가요? 사령부에 보고한만큼 이 밀영에 식량이 있기나 한가요? 그리고 또 여기 동무들은 어째 사령부의 의도, 사령관동지의 로선에 대해 그토록 깜깜인가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한때 혁명에 그처럼 충직했던 박두성동지를 랭대하고 구박해서 절망에 빠뜨린게 누군가요? 엄동지는 그를 정신이상자로 몰지만 그가 어디 정신병자인가요? 저 보기엔 정신이 똑똑해요. 바른소리만 하니까 그렇게 몰았지요.…엄동지는 약재를 채집하려고 수림속을 돌아다니는것도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밀영이 적들한테 발견된다고… 이렇게 깊은 밀림속에 들어와있으면서도 왜놈들이 그렇게 무서운가요? 비관주의, 패배주의, 타락한 기운이 밀영의 공기를 어지럽히지 않았다고 할수 있습니까? 여기서는 장사치들과 물건거래를 하겠다고 모피상처럼 산짐승가죽을 주무르는데 열이 오른 대원들도 있었어요. 타락이면 이런 타락이 어디 있어요?

우려한다고 하면서 사령부의 로선에 대해 여러가지 말을 많이 했는데 그게 어디 우려하는 사람의 목소리입니까? 그건 로골적인 비방이고 중상입니다. …장군님께선 국경연안으로 나가자고 악전고투하고계시는데 도움이나 보탬은 못줄망정 뒤에선 이런 비방과 중상이…≫

그이께서는 억이 막혀 말씀을 잇지 못하시였다. 그이의 눈에 피눈물이 끓었다.

≪우리를… 밀영 전체 성원들을 어디로 끌고가자고 그런 소리를 했는가. 동무들 이건 따져봐야 할 문제입니다!≫

엄장호가 험악한 얼굴로 벌떡 뛰여일어나 리금준에게 소리쳤다.

≪강사- 중지시키오- 이게 학습토론이요 뭐요?≫ 그리고는 문을 차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살벌한 바람이 방안에 회오리쳤다. 놀라서 엉거주춤 일어났던 대원들이 얼어붙은듯 움직임없이 서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 심각한 안색으로 그들을 둘러보며 준절하게 말씀하시였다.

≪진정하자요. 우리가 단합하면 무서울게 없습니다. 동무들, 장군님께서는 주력부대를 이끌고 국경연안으로 꼭 나가십니다. 장군님의 로선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리금준은 얼굴이 흙빛으로 질려 그이의 뒤에 서있다가 엄장호가 사라진 문쪽으로 황급히 뛰여나갔다. 서영순이 문쪽을 지켜보다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 의지하려는듯 최정덕의 팔을 잡았다. 최정덕은 께름한것이 와닿은듯 팔을 빼며 그를 언짢게 돌아보았다.


북대정자로부터 멀지 않은 소덕수등판예서 5.1절을 잘 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사령관동지의 친솔밑에 푸른빛이 짙어가는 수림속을 휩쓸며 조국을 향해 진군하여 압록강가의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가파로운 산비탈밑에는 폭이 넓지 않은 산골물이 굽이쳐흘렀는데 그것이 압록강이고 그 건너는 조국땅이였다.

휴식명령이 내렸으나 지휘원들과 대원들은 흩어지지 못하고 배낭과 총을 멘채로 걷잡을수 없는 기쁨과 흥분, 숭엄한 감정에 휩싸여 조국땅을 건너다보았다.

때마침 아득한 하늘가에 잇닿은 수림의 바다우에 아침해가 떠오르며 동녘하늘이 온통 연보라빛으로 물들여지고 줄기차게 뻗어내린 산발들이며 멀고 가까운 골짜기들에 흐르는 설핀 안개의 흐름들이 확연히 바라보였다. 저 아래 굽어보이는 압록강물은 어둑한 그들속에 묻혀 산굽이들을 소리없이 감돌아흐르고 있었다.

산등성이에 성벽처럼 늘어서서 조국땅을 밟아보고싶은 조급한 마음으로 물건너를 바라보는 사람들속에는 다 잘, 더 많이 보자고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는 대원들도 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지를 넓게 벌린 가둑나무밑에 서서 조국의 산발들을 바라보시였다. 밑에서부터 불어올라오는 시원한 강바람에 군모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날리였다. 그이께서는 문득 지난 겨울의 어려운 행군길이 떠오르고 눈속에 묻고온 윤상범이며 여기로 오지 못한 많은 동지들이 생각나 가슴이 에여지고 목이 꽉 메이시였다. 어느덧 그이의 눈에 이슬기가 반짝이였다.

누구인가 곁으로 달려와 나무가지를 건드리는바람에 굵은 이슬방울들이 그이의 군복어깨며 앞가슴에 화라락 뿌려졌다.

그이께서 놀라 돌아보시니 지세천이였다. 그는 군모를 벗어 이마의 땀을 씻으며 신이 나서 말했다.

정숙누나 드디여 왔구만요! 정말 꿈같습니다. 여기서 소리치면 저기서 대답할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어째 빨리 건너가지 않고 여기서 멎어섰는가요? 누나도 마음이 조급해져요?≫

≪다 그래서 앉지 못하지 않아요. 이제 세천동무가 조국에 나왔다는걸 알면 집에서 어머니랑 모두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신파가 여기서 멀어놔서 알기나 하겠습니까… 여느때는 몰랐는데 조국땅을 보니 정말 어머니생각이 못견디게 나는구만요. 아이때처럼… 북대정자를 떠날 때는 틀림없이 신파쪽으로 쳐나갈게라고 생각했는데 …≫

≪걱정 말아요. 총소리만 몇방 울리며는 조선땅이 들썩해지겠는데 집의 어머니도 우리 애도 왔겠구나 하고 짐작하겠지요. 너무 섭섭해 말아요.≫

그래도 지세천은 못내 아쉬운듯 응대를 안하고 조국땅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튿날 주력부대는 5호물동을 단숨에 건너 조국의 북변기슭에 들어섰다. 그러나 마중하여 달려나온 사람도 없고 저항의 총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적들도 몰랐고 인민들은 더욱 알수 없었던것이다.

산간에서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산비탈과 말못하는 바위들과 나무들이 부대들을 맞이했다.

조국의 기슭에는 태고연한 정적이 깃들어있었다.

강에 건너질린 진대다리와 징검다리 혹은 물동으로 나는듯이 달려와 조국땅에 뛰여든 지휘원들과 대원들은 아름찬 감격과 환희, 이름할수 없는 격정에 목이 메여 무슨 구령이 있은것도 아닌데 모두 그 태고연한 정적속에 저절로 서버렸다.

줄기가 희끗희끗하고 연두색 이파리들이 반짝거리는 봇나무들이 듬성듬성 선 나지막한등성이 넘어 저 멀리에는 장엄한 산줄기의 군청색파도가 일렁이였다. 그 산줄기에서 가지를 쳐 이쪽으로 연연히 뻗어내린 산발들사이의 골짜기들에는 이른아침의 보라빛 그늘이 비꼈는데 그 썩 아래에서는 젖빛 안개가 굼실거리며 설피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지휘원들과 대원들은 조국의 정취와 자연의 신비에 넋을 빼앗기고 어정쩡해져 단숨을 헉헉 몰아쉬며 두리번거리기만 하였다.

아침노을빛이 연하게 스며든 상쾌한 대기속에도, 굽이쳐흐르는 물에도, 산비탈의 이슬에 젖은 잡관목들과 강대나무가지들, 골바닥의 이끼바위와 풀포기들에도 조국의 기맥이 약동하는것 같았다.

대원들속에 서계시는 사령관동지께서 군모를 벗고 이마의 땀을 훔치시고는 나직하면서도 격동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조국이요, 드디여 조국땅에 왔소!≫

≪야-≫

≪다 왔구나-≫

대오에 터지는 탄성과 환희의 선풍속에 그이곁에서 누구인가 무릎을 끓고 땅에 풀썩 꿇앉아 두손으로 흙이며 풀포기들을 그러쥐더니 그채로 소리없이 어깨를 떨었다. 강태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도 그만 가슴이 뭉클해져 눈을 슴벅이시는데 뒤쪽에서 누구인가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에 대고 쾅쾅 일제사격을 했으면 좋겠소. 우리가 왔다! 하구말이요.≫

≪총이야. 이제 실컷 쏘게 될텐데뭐…≫

설레이는 대원들속을 헤집고 장철구가 눈물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허둥허둥 다가와 김정숙동지의 팔을 와락 잡아쥐고 흔들었다.

≪어째 가만있소? 그렇게 고생하구두 어째 가만있소?≫

뒤따라 최정덕이 묵직한 배낭을 들썩거리며 달려와 땀내를 풍기며 김정숙동지와 장철구의 어깨를 얼싸안았다.

정숙이, 철구어머니! 우리 언젠가 조국땅에 들어서면 맘껏 웃자고 했지? 그랬지? 자 웃자구 떠들썩하게…!≫

그러나 그이께서도, 최정덕이와 장철구도 웃지 못하고 서로 붙안은채 눈물을 쏟았다.

이윽고 장철구가 몸을 돌리다가 최정덕의 배낭뒤에 쳐맨 법랑소랭이가 눈에 띄여 시꺼멓게 그슬린 그 밑굽을 쓸어만지였다.

≪너도 행군길에 수고가 컸지. 눈만 끓여먹을 때는 이런 날이 올것 같지 않더니 끝내… 끝내… 왔구나. 이것아, 너도 먼길에 정말 수고가 컸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등에 업힌 아기처럼 소랭이 밑굽을 도닥여주었다. 누구도 그 모습을 보고 웃지 못하였다.

이때 휴식명령이 떨어져 대원들은 흩어져 잡관목들속이며 수풀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들은 무거운 배낭들을 벗어놓고 풀밭에 다리를 퍼더버리고 앉아 조국의 청신한 공기를 한껏 들이키며 땀을 들이기도 하고 물가로 달려가 시원한 강물로 떠들썩하게 세수도 하였다. 강물은 기쁨에 겨운듯 번들번들 굼닐며 거품을 일으키고 수면에 비껴 어른거리는 의로운 그림자들을 싣고 어리광스럽게 설레이였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홍조를 띠는듯 연분홍빛을 번쩍번쩍 반사하였다.

그것은 강가를 휩쓰는 연분홍의 물길같은 진달래들이 물에 비쳐서인 것 같았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오솔길가의 수풀속에 뒤짐을 쥐고 서서 하늘에 높이 떠서 지저귀는 메새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고계시였다.

배낭을 벗어놓고 사령관동지의 그 모습을 바라보시던 김정숙동지께서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강가의 진달래밭으로 뛰여들어가시였다. 이슬을 머금고 하늘거리는 진달래꽃송이들이 유격대원들을 반겨 키돋움하며 설레이는듯하였다. 이역만리의 하늘밑에서 조국을 그리며 그 아름다움을 담배쌈지에까지 수놓았던 진달래, 진달래를 생각하면 조국강산이 떠오르고 조국강산을 생각하면 진달래가 떠올랐었다.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끝내 꽃을 피운 진달래와 지난 겨울의 어려운 행군과 혈전의 수천리길을 걸어 끝내 조국의 기슭에 다달은 유격대원들의 심혼과 의지는 이 봄, 이 아침에 과연 하나로 이어진것이 아닌가. 아, 조국의 진달래!

그이께서는 기쁨에 겹고 아름다움에 취하여 연분홍의 불길속을 더듬더듬 돌아가며 꽃가지들을 가슴에 와락와락 안아보시였다. 탐스러운 꽃가지들은 가슴가득 살뜰하게 안겨들며 신선한 향기를 풍기고 야드르르한 그잎들로 그이의 목이며 볼을 부드럽게 쓸어만졌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 연분홍의 불길속에서 싱싱하고 정갈한 꽃들을 골라 정성스럽게 꺾어쥐시였다. 그이의 심정이 인차 가늠이 되여 최정덕이와 서영순이도 뛰여들어와 꽃을 꺾었다. 장철구까지도 그들을 따라 꽃을 꺾었다.

김정숙동지께서 먼저 사령관동지에게로 다가가 진달래꽃을 드리시였다.

≪장군님, 진달래입니다!≫

뒤따라온 녀대원들이 그이께 꽃을 드리였다.

≪허 이거 갑자기 꽃부자가 됐구만…≫

사령관동지께서는 앞가슴에 가득 진달래꽃을 안으시고 못내 기뻐 환하게 웃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이슬이 흐르는 하르르한 꽃송이들을 들여다보며 향기를 맡아보시다가 다감한 눈길을 들어 김정숙동지와 녀대원들을 둘러보시였다.

≪조국의 진달래는 볼수록 아름답소. 정숙동무, 내가 만약 시인이라면 이 진달래꽃에 대한 시를 쓰겠소. 진달래는 우리 빨찌산녀대원들이다! 이런 내용으로…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진달래가 더 고운지 우리 빨찌산의 투쟁과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녀대원동무들이 더 고운지 모르겠다니까. 허허허…≫

하늘거리는 꽃송이들에서 굴러떨어지는 이슬이 사령관동지의 손등이며 군복소매를 축축히 적시였다.


1939년 5월 23일 국내진공작전을 승리적으로 끌마친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은 철수하여 조국땅을 떠났다.

두만강쪽으로 열린 골짜기의 소로길을 따라 우불구불 길게 늘어선 행군종대는 승리자의 자부와 환희를 안고 걸음을 다그치고 있었다. 지원물자와 로획품들을 잔뜩 지고 따라나선 인민들까지 어간어간에 끼여있어 행군서렬은 더욱 흥성거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골짜기어귀의 길가에 서시여 활기에 넘쳐 걸어지나가는 대원들을 흡족한 안색으로 바라보시였다. 그옆에서 군수처일군들이 로획한 무기들과 물자들을 두두룩하게 쌓아놓고 짐이 가벼운 대원들에계 그것들을 하나씩 떠맡겼다. 그래서 행군종대는 거기 와서 주춤거리게 되였고 무기나 로획품 하나를 더 얻어멘 대원들이 그것들을 아주 달라고 떼를 쓰는바람에 웃음판을 벌려놓군 하였다. 지나가는 대원들은 한나같이 웃음어린 얼굴이고 하나같이 활기에 넘친 걸음이였다. 그러나 비서처행군서렬의 뒤꼬리에 따라가는 아련하게 생긴 녀대원만은 유독 어깨가 축 처져 맥없이 걸음을 옮기는데 얼굴에 수심이 어려있었다. 그 대원은 홀쭉한 배낭을 지고 보총이 어깨에 걸렸을뿐이지만 군수처동무들은 그에게 무엇을 더 맡기려고 하지 않고 그냥 지나보내였다.

그 녀대원이 서영순이라는것을 알아본 사령관동지께서는 가슴이 쓰려나시여 측은한 눈매로 그의 뒤모습을 여겨보시였다.

리금준이 지휘원으로 그냥 있다가 부상당해도 모르겠는데 모진 비판을 받고 대원으로 강직된후에 그렇게 되고보니 못내 가슴아프고 생각도 많아지는 그이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리금준의 중상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다음 지어 그를 지휘원으로 그냥 둬두고 고쳐줄수는 없었겠는가 하고 후회까지 하시였다. 그러나 그런 심정을 누구에게도 내비치지 않으시였다. 군의는 탄알이 장기들은 다치지 않고 흉벽만 뚫고나갔기때문에 파상풍이나 염증이 생기지 않고 기타 다른 합병증이 겹쳐들지 않으면 생명은 위험하지 않고 잘되면 한두달사이에 회복시킬수도 있다고 장담했다. 손으로 만져보고 장기들을 다쳤는지 어쨌는지 어떻게 알며 또 그런 증상들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수 있겠는가, 죽지 않으면 산다는 식의 말공부인지도 모른다. 그런 소리들이 환자에게는 위안을 줄지 모르나 사령관동지께서는 몹시 불안하여 군의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으시였다. 활기에 넘친 사람들속에 끼여 언뜻 눈앞을 스쳐지나가 이제는 그 그림자도 보이지 않지만 그 녀대원에 대한 생각은 사령관동지의 심중에서 떠날줄 몰랐다. 저 동무가 리금준이때문에 얼마나 고민했고 남모르는 눈물은 얼마나 흘렸겠는가… 그래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고 그를 계속 위해주었다니 얼마나 기특하고 장한 일인가… 사령관동지께서는 그 녀대원이 고맙게도 여겨지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번민하며 몸부림치던 애인이 쓰러진 지금 그 녀대원의 심정, 안타깝고 분하고 절망감도 없지 않을 그 기막힌 심정을 생각하면 할수록 어떻게나 그를 도와주고싶으시였다.

신심과 용기만 생기면 죽어가던 생명도 피여날수 있는것인데 무엇으로, 어떻게 하면 그것을 줄수 있을가… 문득 신사동의 저녁에 김정숙동지께서 들어와 기관총문제를 제기하던 일이 생각나시였다. 그때만 하여도 제기하는 심정은 리해되지만 기관총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 의견을 덮어두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에게 모든것을 다 주고싶다. 게다가 로획한 기관총이 바로 곁에 두정이나 있지 않는가!

≪전령병동무!≫하고 그이께서는 뒤에 서있는 마영남을 부르시였다.

마영남은 곁으로 뛰여와 차렷자세를 취하였다.

≪비서처에 뛰여가서 서영순동무를 데려오오. 멀리 가지 않았을거요.≫

얼마후 마영남을 따라 뛰여온 서영순은 영문을 몰라 긴장된 눈빛으로 사령관동지를 쳐다보았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련민의 기색이 전혀 없는 근엄한 얼굴로 녀대원을 맞이하여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그 나직하면서도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서영순동무, 금준동무가 잘 싸웠소. 리금준동무에게 수여되는 기관총을 동무한테 맡기자고… 그래서 불렀소.≫

그이께서는 군수처일군이 드리는 가볍고 새것이나 다름없는 경기관총을 받아서 녀대원에게 내주시였다.

서영순은 한순간 어정쩡해져있다가 두손으로 그것을 받아 가슴앞에 꼭 붙이였다.

≪동무가 가지고 다니면서 소제도 계속하고 기름도 잘 발라두오. 금준동무가 회복될 때까지만. 녹이 쓸게 해서는 절대 안되겠소. 알겠소?≫

≪예…≫ 녀대원의 고운 눈에 물기가 핑 어리였다.

≪가보오.≫

서영순은 그이께 인사를 올리고는 기관총을 어깨에 메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자기가 걸어가는지 뛰여가는지 알지 못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날렸다. 저 푸른하늘과 산들과나무들이며 이 세상 모든것들이 갑자기 색채가 선명해지고 거리감이 없어지며 가까와진것처럼 느껴지고 옆으로 언뜻언뜻 스쳐지나가는 낯모르는 얼굴들도 모두 친근하게 느껴졌다. 행군종대의 대원들은 기관총을 메고 나는듯이 달려가는 그를 바라보며 저동무가 무슨 공로로 기관총을 수여받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축하의 미소를 보내였다. 그러나 처녀의 얼굴은 문득 가맣게 질리였다. 리금준이 이 순간에 별안간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찌랴싶은 불안감이 가슴을 옥죄여서였다. 행군종대의 선두는 벌써 두만강복판에 들어서고 있었다.

서영순은 강기슭을 내려 물속으로 뛰여들어갔다.

물방울들이 튀여올랐다. 그는 흐름이 빠른 여울물을 헤가르며 걸어나가 리금준의 담가에 다가갔다.

피기없는 얼굴로 담가에 누워있는 리금준은 혼미한 의식속에서도 누가 오고 있다는것을 느낀듯 눈을 떴다.

서영순은 담가곁에서 걸어가며 어깨의 기관총을 내려 그에게 보이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걸 봐요. 기관총이예요. 기관총…≫

≪웬거요?≫

≪동무거예요.≫

≪내거라니 …?≫

서영순이 발을 헛디며 비청거리는바람에 물방울들이 튀여올라 담가채를 적시였다.

≪장군님께서 동무한테 수여하는거라고 하셨어요. 잘 싸웠다고… 잘 싸웠다고 하셨어요!≫

리금준의 가슴에 비방울같은것이 후두둑 날아떨어첬다.

≪장군님께서 나보구 가지고다니면서 소제도 하고 기름도 바르고 녹이 쓸지 않게 하라고 하셨어요. 녹이 쓸지 않게…≫

리금준은 녹이 쓸지 않게 하라는 그 말씀에 담긴 다른 뜻이 가슴뜨겁게 안겨와 마음속에 그 말씀을 되새기였다. (녹이 쓸지 않게…)

그의 눈에 맑은 눈물이 괴여올랐다.

≪이거 봐요. 총탁에 긁힌 자리 하나 없고 부혁도 새거야요!≫

≪좀 여기… 곁에 놔주오.≫

서영순이 흐느껴울며 그것을 금준의 팔곁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둘은 이름할수 없는 행복감에 휩싸여 그것을 쓸어만져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금준에게 기관총을 메워주고싶어 김정숙동지께서 사령관동지를 찾아가 어떻게 말씀드렸으며 지휘원도 아닌 보통전사의 립장에서 그런 말씀을 드리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대정자의 그 운명적인 날에 김정숙동지께서 앓는 몸으로 시령관동지를 찾아가 그를 엄가놈과 갈라놓고 구원해 보자고 눈물을 뿌리며 어떤 절절한 말씀을 드렸는가를 감감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수 있는것이였다.

행복에 겨워 울며 웃으며 기관총을 쓸어만지는 그들의 밑에서 여울물이 주절주절 떠들며 사품치고 머리우로는 물촉새 한마리가 날아지나갔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저쪽 조국의 강기슭에서 따라나온 인민들에 게 에워싸여 작별의 인사를 나누시고 김정숙동지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여울을 건너오고계시였다. 식료품들이 가득 들어 터질 듯이 팽팽해진 배낭뒤에 풍천까지 말아서 처맨 부피가 크고 묵직한 짐때문에 몸이 자주 뒤로 젖혀져 그이께서는 웃몸을 앞으로 숙일사하고 조심조심 발을 옮겨디디며 여울물을 헤갈라나가시였다. 배낭끈이 어깨를 아프게 파고들어 목이며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고 볼을 따라 땀발이 번들거리며 흘러내렸다. 문득 웃쪽에서 떠내려오는 진달래가지가 그이의 눈길을 끌었다. 어느 누구의 배낭뒤주머니나 손에서 떨어진것 같았다. 그 진달래가지는 떠올랐다 잠겨들었다. 물결과 숨박곡질을 하며 둥둥 떠내려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진달래를 그렇게 흘려보내는것이 아쉽게 여겨지시였다. 그이께서는 내리누르는 짐무게때문에 간신히 허리를 굽혀 그것을 건져올리시였다. 진달래가지에는 서너송이의 꽃이 붙어있었는데 어느것이나 물살에 부대끼고 물에 젖어 후줄근해졌다. 그 꽃가지를 가볍게 흔들어 물기흘 터시던 그이께서는 문득 5호물동을 건너 조국땅에 처음 들어서 장군님께 진달래꽃묶음을 드리던 일이 떠오르시였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조국의 진달래는 볼수록 아름답다고 하시며 이 진달래꽃이 더 고운지 우리 녀대원들이 더 고운지 모르겠다고 롱조로 말씀하시였다.

여울에 서서 이마에 철철 흐르는 땀을 씻는 그이의 구리빛 얼굴이 한결 환해지는듯했다. 그쯤한 말씀만 들어도 그리고 그 말씀을 돌이켜보아도 가슴에 행복감이 차올라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는 듯이 느껴지는 그이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 꽃가지가 행복한 추억에서 떨어진 이삭처럼 여겨져 그것을 웃호주머니에 찔러 간수하고 얼굴을 돌려 뒤따르는 장철구와 최정덕을 살펴보시였다. 그들도 역시 남대원들에 못지 않게 무거운 등짐들을 져서 몸을 앞으로 숙일사하고 조심조심 걸어오고 있다. 저쪽 강가의 연두빛이 짙어가는 골짜기들과 산등성이들 그리고 저멀리 하늘가에 우중충하게 솟은 조국의 연연한 산발들이 바라보이자 그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 어리였다. 앞에는 그 간고함과 험난함을 예상할수 없는 혈전의 길이 놓여있었다. 그이께서는 걸음을 다그쳐 대원들속에 어울려서 물살에 밀리지 않으려고 몸을 웃쪽으로 기울일사하고 여울물을 힘있게 헤쳐나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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