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31일

통일여명 편집국

 

 

태양의 수호성, 민족의 어머니 4

 - ≪태양의 수호성, 민족의 어머니≫

통일여명 편집국 6-2-14

 

 

차 례

 

바로 잡아 주신 협의회토의내용 / 상온포를 찾으신 사연

주인 된 자각을 불러일으키시어 / 한 중소기업가를 만나시어

우물집주인의 탄복 / 계급의식을 높여 주시어 / 다시 조직하신 강연회

사라진 연기 / 눈보라 속에 안고 오신 불돌 / 더 깔아 주신 가랑잎

모란봉에 깃든 이야기 /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 투사들을 키운 품

숲 속을 거니신 사연 / 몸소 지도해 주신 사격훈련

7연대를 기다리시던 그 밤에 / 몸소 문수봉에 오르신 사연

뜨개옷에 깃든 충정 / 새벽에 있은 일 / 무비의 용감성과 희생성

몸소 필자가 되시어 / 비범한 군사적 예지 / 연자방아와 함께 맞으신 생일날

어길 수 없는 일과 / ≪금로수≫ / 여성들을 혁명가로 / 도천리의 단오명절

가을날에 일어난 일 / 몸소 그려 주신 설계도안 / 건국의 자국은 염분진에도

 

바로 잡아 주신 협의회토의내용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군부대를 시찰하실 때마다 전투력 강화에 지침으로 되는 귀중한 가르침을 주시며 전사들의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따뜻이 돌봐주신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모습을 접할 때마다 우리에게는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자애로운 영상이 가슴 뜨겁게 안겨 온다.

50여 년 전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날 군사부문의 여러 일꾼들은 정규무력건설을 앞두고 군대의 규정, 교범 같은 것을 미리 연구해 볼 데 대한 주석님의 교시 관철을 위한 협의회를 가졌다. 그 협의회에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여사께서도 참석하셨다.

협의회가 시작되어 얼마 후 군대의 식사문제를 놓고 심각한 논의가 있었다. 군대의 주식을 빵으로 하자는 의견이 제기됐던 것이다. 그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군대생활의 특성을 이야기하면서 분과 초를 다투는 현대전의 요구에 맞게 식사를 하려면 빵을 먹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나라의 경험을 열거했다.

얼른 들으면 그 주장에도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이 말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때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신 김정숙여사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생각에는 빵보다 밥이 나을 것 같군요. 빵이 간편하기는 하지만 우리 군대는 조선사람 풍습대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맛으로 한두 끼 먹는다면 몰라도 집에서 밥과 국만 먹던 동무들에게 빵이 맞을 수 있겠어요. 또 우리나라에서 주로 생산되는 작물이 쌀인데 그 많은 양의 밀을 어디서 구해다가 빵을 먹이겠어요. 그러니 빵은 우리 사람들의 오랜 식생활 입맛에도 맞지 않으며 현실성도 없어요.≫

모든 문제를 오직 우리나라의 구체적 현실과 민중의 기호에 맞게 우리 식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이었다. 식생활문제까지 군대생활의 특성만 내세우면서 우리나라의 실정과 대중의 요구에 맞지 않게 외국의 본을 따려 했던 사람들은 심한 자책감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이 문제가 간단해 보이지만 만일 군인들에게 밥 대신 빵을 먹인다면 그들의 식생활습관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쌀을 팔아 밀을 사오느라고 나라의 경제생활전반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은 명백한 것이었다.

협의회에서 군대의 대열훈련 문제와 복장문제가 제기됐을 때에도 김정숙여사께서는 모든 것을 철저히 조선사람의 체질에 맞게 우리 식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날 일꾼들로부터 토의정형을 보고 받으신 주석님께서는 더없이 만족해하시며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는 다른 분야에도 큰 해독을 끼치지만 나라의 존망과 전사들의 생명을 좌우하게 되는 군사분야에서는 파멸적인 결과를 빚어낼 수 있다≫고 교시하셨다.

상온포를 찾으신 사연

상온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백두산 장군들의 거룩한 자국이 그대로 어려 있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역사의 땅 상온포.

우리는 1947년 9월 상온포에 새겨진 잊지 못할 사연을 여기에 소개한다.

그 시기 함경북도에 계시던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어느 날 상온포에 오르셨다. 경성에 도착하신 지 10여 일이 지난 기간에도 한번도 마음놓고 휴식을 하지 못하신 여사께 순간이나마 휴식을 드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 일꾼들의 가슴은 기쁨으로 넘쳤다.

역사의 그날 상온포에 이르신 김정숙여사께서는 깊은 감회에 잠겨 주변의 경치를 오랫동안 바라보시며 산에서 싸울 때부터 상온포가 이름난 명승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직접 와보니 정말 아름답다고 감탄하셨다. 여사께서는 ≪참 경치가 좋은 곳이에요. 여기에 휴양소를 세웠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시며 ≪장군님 덕분에 우리 노동자, 농민들이 벌써 휴양을 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우리 인민 모두를 휴양시키자던 장군님의 말씀이 현실로 될 것≫이라고 기뻐하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강 위에 놓인 무지개다리를 건너셨다. 다리 너머의 상온포 경치는 더욱 아름다웠다.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여사께서는 아름다운 주변경치를 감상하시면서 다시 강 건너 위쪽으로 걸음을 옮겨 너럭바위 앞에 이르셨다. 여울져 내리던 물이 너럭바위 앞에 와서 깊은 소를 이루는데 물살이 뜸해지고 물소리마저 잦아들어 한결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너럭바위를 한바퀴 돌아보시고 그 위에 앉아 맑은 물을 두 손에 담아보신 여사께서는 일꾼들에게 ≪나는 산에서 장군님을 모시고 싸울 때 식사를 지어드릴 때면 물이 맑지 못해서 늘 마음을 쓰고는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쩌면 물까지 이렇게 맑고 깨끗할까요. 돌까지도 곱고 모양 있게 생긴 것 같습니다. 산을 보면 푸른 소나무가 우거지고 물을 봐도 수정같이 맑으니 정말 삼천리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옳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평소와 다르게 기뻐하시는 김정숙여사께 일꾼들은 거리도 멀지 않으니 매일 한번씩 이곳에 다녀가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아무 말씀도 없이 환한 미소만 머금고 계시던 김정숙여사께서는 이윽고 일꾼들에게 ≪여기가 제일 좋습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그윽한 소리를 들으니 마음도 상쾌하고 몸이 막 날아갈 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 오시면 여기에 모십시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일꾼들은 김정숙여사께서 상온포를 찾으신 까닭을 알게 되었다. 주석님께서 경성에 내려오시기 전날에도 여사께서는 이곳을 찾으셨던 것이다. 골 어귀를 지날 때는 장마에 길이 패었는가를 알아보시고 급한 굽이에서는 차를 세우고 산사태가 생길 염려는 없겠는지 산세를 유심히 살펴보신 여사께서는 어느 한 골짜기에 이르러서는 산골 물에 파헤쳐진 길을 훌륭하게 수리하셨다.

그날 김정숙여사께서는 다시금 너럭바위를 돌아보시고 이번 기회에 장군님을 꼭 이곳에 모시자고 하시며 구석구석 미흡한 점이 있을세라 재삼 확인하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도 이북 민중 속에 주석님에 대한 김정숙여사의 충정을 길이 전하는 온포천 ≪충성의 다리≫에 대한 이야기도 그 시기에 있은 사실이다. 그때 김정숙여사께서는 참으로 뜻 깊은 말씀을 하셨다.

상태가 나쁜 다리를 수리하시던 김정숙여사께서는 일꾼들에게 ≪우리가 이곳에 와 있으면서 다리 하나 온전히 수리해 놓지 못해 장군님께 사소한 불편이라도 끼쳐 드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군님의 안녕과 건강은 온 나라의 가장 큰 행복인 것입니다≫라고 하시면서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명심하고 장군님의 안녕과 건강을 첫 자리에 놓고 모든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1947년 9월 22일 김정숙여사께서는 주석님을 모시고 상온포에 오르셨다. 그날 여사께서는 이미 보신, 경치 아름다운 너럭바위를 비롯해 여러 곳을 거쳐 낚시터로 주석님을 안내하셨다. 주석님께서는 몸소 계곡의 여러 곳을 돌아보시며 ≪상온포는 그야말로 우리 인민들의 휴양지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곳≫이라고 만족해 하셨다. 그러시면서 ≪하루빨리 이곳에 휴양소를 건설해 우리 근로자들이 이 아름다운 산천의 혜택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해주자≫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주석님의 안녕을 바라시며 그 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신 백두산호위장군의 불멸의 업적을 전하며 온포천의 맑은 물은 오늘도 출렁이고 있다.

주인 된 자각을 불러일으키시어

1947년 4월 어느 날이었다.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께서는 평양시의 한 차량수리공장을 찾으셨다. 얼마 전 한 일꾼으로부터 차량수리공장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자동차들의 운행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이 공장을 방문하셨던 것이다.

공장에 도착하신 여사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잠시 구내를 둘러 보셨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의 여기저기에 자동차들을 분해해 놓고 수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작업장은 무질서하기 그지없었다. 사방에 크고 작은 쇠붙이들과 기름걸레 조각들이 나뒹굴었다.

동행한 일꾼은 노동자들이 일이 바쁘다 보니 주변을 거두는 데는 관심을 덜 돌린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여사께서는 이것을 스쳐 지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 공장일꾼들과 노동자들 속에 지난날 왜놈들의 학정 밑에서 마지못해 일하던 노예살이 근성이 남아있는 것 같다고 지적하셨다.

잠시 생각하시던 여사께서는 차 수리를 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로 다가가셨다. 그리고는 날씨도 싸늘한데 밖에서 수고가 많다고 하시며 차 수리가 잘 되느냐고 물으셨다. 노동자들은 자재와 부속품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다 보니 일이 잘 진척되지 않을 때가 많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여사께서는 작업장 구석구석에 널려 있는 나사못도 모아 쓰고 못쓰게 된 기계설비들에서도 어지간한 부속품을 회수해 재생해 쓸 수 있지 않느냐고 그들을 일깨워주셨다.

이때였다. 공장일꾼들이 현장으로 달려와 김정숙여사께 인사를 드렸다. 그제야 비로소 자기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신 분이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이심을 알게 된 노동자들은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일꾼들의 안내로 작업장의 여러 곳을 돌아보시던 여사께서는 땅에 떨어진 나사못 한 개를 집어드시고 안색을 흐리셨다. 노동자들은 자재와 부속품이 걸려 차 수리에 지장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나사못과 철판 그리고 재생하면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속품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것이었다. 마당구석에 쌓여 있는 고철무더기에는 그런 것들이 더 많았다.

김정숙여사께서는 당황해하는 일꾼들에게 타이르는 어조로 ≪과거에는 우리가 일본 놈들의 공장에서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식민지 노동자였고 공장도 기계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우리의 피땀을 빨아먹는 자본가 놈들의 물건이 우리에게 귀중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다 나라의 주인이고 공장도 기계도 다 나라의 것이고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주인이 제 물건을 이렇게 내버려서야 나라살림이 어찌 되겠습니까≫라고 절절히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지금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이런 조건에서 없는 것은 만들고 있는 것은 아끼며 부강한 조국을 건설해야 합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의 말씀은 일꾼들과 노동자들의 심금을 세차게 울려주었다. 일꾼들은 커다란 자책을 안고 여사의 말씀대로 이제부터는 자동차수리에서 혁신을 일으키겠다고 말씀드렸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이렇게 가시는 곳마다에서 근로자들의 자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주석님의 새 조국 건설구상을 빛나게 실현해 나가셨다.

한 중소기업가를 만나시어

광복 후 새 조국 건설을 위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벌어 질 때였다.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께서는 노동자, 농민들뿐 아니라 중소기업가들도 애국의 한마음을 안고 새 조국 건설의 길에 힘차게 떨쳐나서도록 하는 데 깊은 관심을 돌리셨다.

1947년 가을, 경성군에 가셨던 김정숙여사께 양조업을 하는 한 기업가가 찾아 왔다. 그분이 자기들의 고장에 오시어 중소기업가들이 나아갈 앞길을 밝혀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이미 김정숙여사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으나 마음은 무척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광복 후 새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려고 적지 않은 자금을 기부금으로 내기도 했지만 일부 좌경분자들의 언동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여사께서는 양조업자를 반갑게 맞아 주시고 의자를 권하셨다. 백두의 여장군으로 명성 높으신 김정숙여사께서 너무도 스스럼없이 대해 주시는 데 매혹되어 그는 자기 생각을 다 털어놓았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양조업자의 지나온 생활경력과 고충을 들으시고 나서 ≪여기에 와서 보니 중소기업가들에 대해 ≪부르주아≫요, ≪타도대상≫이요 하면서 시비가 많은데 이것은 다 주석님의 뜻을 받들지 않는 종파분자들이 퍼뜨린 허황한 잡소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주석님께서는 일찍이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중소기업가, 상인들은 물론 민족자본가들까지도 다 믿어 주셨습니다. 그 믿음은 나라가 광복된 오늘에도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여사께서는 그에게 ≪광복 전에는 나라 없는 탓으로 왜놈들에게 천대를 받고 광복된 오늘에는 지난날 밥술이나 먹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살아간다는데 이 시각부터 그런 생각을 아예 털어 버리고 나라와 자신을 위해 건국사업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따뜻이 일깨워주셨다. 여사의 가르침을 받은 양주업자는 자기 동료들에게 그분을 만나 뵌 이야기를 전했고 경성일대의 상공업자들이 모두 건국위업에 떨쳐나서도록 선동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김정숙여사께서는 경성군 안의 사업을 지도하시느라 매우 바쁘셨지만 그 양조업자의 집을 몸소 찾으셨다. 그분은 기업운영실태를 하나하나 알아보시고 나라와 인민을 위해 일한다는 입장에서 기업을 운영해야 주석님의 높은 신임을 받을 수 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면서 ≪재삼 이야기하지만 광복된 오늘 수령님께서는 건국사업에 협력하는 중소기업가, 상인들에게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돌려주고 계십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지 절대로 흔들리지 말고 오직 수령님만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수령님께서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절대로 차별하시지 않습니다≫라고 하시며 그의 가슴에 굳센 신념을 심어주셨다.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그 사랑과 은정 속에 광복 후 갈림길에서 동요하던 양조업자는 새 생활의 길을 찾고 여러 중소기업가들과 함께 건국사상총동원운동에 떨쳐나섰으며 후에는 지방주권기관의 대의원으로까지 사업했다.

한 중소기업가에게 주석님만을 믿고 따르는 마음의 기둥을 굳세게 심어주신 이 이야기는 오늘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우물집주인의 탄복

조국이 광복된 해의 12월.

동해안의 어느 한 마을에 들리신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만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울리는 잊지 못할 일화를 남기셨다.

함경북도에서 사업을 끝마치신 김정숙여사께서 평양으로 돌아오시다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밤을 불편한 유개화차에서 지내신 다음날이었다. 이른 새벽 여사께서는 동행한 일꾼들이 깨어날세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양동이를 들고 물 길러갈 차비를 하셨다.

식사준비를 맡은 여인이 당황해하며 여사를 만류했다. 여인은 앞을 막아서며 여사의 손에서 양동이를 받으려고 했다. 여사께서는 그러는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눈짓을 하시며 정 그러면 함께 가자고 나직이 말씀하시면서 화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시었다. 밖에는 밤새 내린 눈이 발목이 빠질 정도로 쌓여 있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손수 빗자루를 드시고 길을 내시며 앞장 서 걸으셨다. 얼마 후 한 농가 앞에 있는 우물에 도착했지만 물을 길을 수 없었다. 두레박이 없었던 것이다. 주변을 살피던 여인이 그 집 처마 밑에 걸어 놓은 두레박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여사께서는 그의 행동을 제지시키시면서 아무리 밖에 둔 물건이라도 임자가 있는 물건인데 허락 없이 함부로 쓰면 되겠느냐고 조용히 타이르셨다.

그리고는 ≪인민의 재산을 귀중히 여기고 잘 지켜주는 것은 인민을 위해 일하는 일꾼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품성의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유격투쟁의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인민의 재산에 대해서는 바늘 하나도 귀중히 여길 데 대해 강조하셨으며 도끼 하나라도 인민의 것을 빌려 쓰다가 손상을 주었거나 제때에 돌려주지 못했을 때에는 반드시 물건임자를 찾아가 사죄하고 해당한 보상을 하게 하셨다≫고 참으로 뜻깊은 말씀을 하셨다.

여사께서는 계속해서 ≪인민적 풍모를 갖추는 것은 전체 인민을 새 조선 건설에 일떠세워야 할 지금에 와서 더욱 중요하게 나서는 문제≫라고 말씀하시면서 ≪조금만 있으면 사람들이 깨어날텐데 기다려 보자≫고 하시며 우물가의 눈을 쓸어 가셨다.

식사준비를 맡은 여인은 주석님의 한없이 인자하신 인민적 풍모를 그대로 체현하신 김정숙여사의 고결한 풍모를 가슴 뜨겁게 절감하며 그분을 따라 우물변두리의 눈을 쓸었다.

시간이 퍽 흘러 우물가의 눈을 전부 쓸었을 때에도 농가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그때의 한초 한초는 여사께 있어서 더없이 귀중한 시간이었다. 여인은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일행이 우물집 마당의 눈까지 거의 다 쓸 무렵이었다. 그제야 잠에서 깬 집주인이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것이었다.

집주인에게 ≪안녕하십니까. 저희들이 단잠을 방해하지 않았는지요≫라고 인사 말씀을 하신 김정숙여사께서는 ≪저희들은 기차를 타고 가던 길손들인데 물을 긷자고 우물을 찾아왔다가 두레박이 없어서 기다리던 중≫이라고 사연을 이야기하셨다.

첫눈에 벌써 김정숙여사의 민중적 풍모에 매혹된 집주인은 신발도 미처 신지 못한 채 문밖에 나서며 ≪아니, 두레박이 여기 바깥기둥에 걸려 있는데…≫라고 하면서 기둥에 걸린 두레박을 손으로 벗겨 내리는 것이었다. 단정한 군복차림을 하시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 계시는 분이 항일의 나날 백두의 여장군으로 명성을 떨치신 김정숙여사이시라는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집주인이었지만 그는 ≪내 집이 역 가까이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지나다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그분의 풍모에 탄복했다.

그러던 집주인은 ≪아 참, 이 정신 좀 보지. 모두 추우시겠는데 집에 들어가 몸들이나 녹이시지요. 농사꾼의 집이라 누추하지만…≫라고 하면서 급히 문고리를 잡으려고 했다.

≪자는 가족들을 깨우지 마세요. 말씀만 들어도 몸이 녹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빨리 물을 길어가야 합니다.≫

한없이 겸허한 민중적 풍모가 그대로 어려 있는 여사의 말씀에 집주인은 다시금 탄복했다. 두레박을 넘겨드리며 ≪손님들은 대체 어떤 분들이십니까?≫라고 묻는 집주인에게 여사께서는 ≪저희들은 평양으로 가는 길손들≫이라고 하시면서 두레박을 잘 쓰겠다고, 어서 들어가라고 인사하신 후 우물가로 향하셨다.

집주인은 경탄과 의혹이 실린 눈으로 그분의 숭고한 모습을 우러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웠다.

≪세상에 저렇게 인정 깊으시고 너그러우신 귀인도 있다니.≫

계급의식을 높여 주시어

1936년 8월 하순 주석님께서는 남호두회의 방침을 관철하기 위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이끄시고 압록강연안 국경지대에로 진출하셨다. 이 나날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께서는 압록강연안 여러 마을에 나가 군중정치사업을 정력적으로 벌리셨다.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 부대와 함께 신흥촌에 들리셨을 때였다.

여사께서는 이 마을에 행장을 풀자마자 여인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일손을 도와주시면서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한 조목 한 조목 알기 쉽게 해설해주셨다. 이 과정에 여사께서는 늙은 시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한 젊은 여인이 몇 해째 말 한 마디 없이 우울하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그날 저녁 한 여대원과 함께 그 집으로 숙소를 옮기셨다. 여사께서는 여인을 ≪형님≫이라고 부르시면서 부엌일을 도우셨으며 물도 긷고 나무도 패주셨다. 그분은 그 여인과 마주 앉아 감자껍질을 벗기시면서 고향은 어디며 어떻게 되어 여기에 오게 됐는지를 차근차근 물으셨다. 그러나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이 없이 감자껍질만 벗기면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한 며느리를 보기가 딱했던지 시어머니가 그를 대신해 지나온 생활경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며느리는 지주 집에서 머슴으로 살아온 불쌍한 여인이었다. 째지게 가난한 가운데서도 성례를 이루니 그래도 의지할 기둥이 생겼다고 집안에 화기를 돋구던 그는 농조운동을 하던 남편이 일제의 박해를 피해 집을 떠난 후 기별 한 장 없게 되자 말도 웃음도 다 잊어버린 듯 수심에 잠겨 남몰래 눈물만 지으며 살아왔다. 참으로 기막힌 정상이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남편과 생이별을 하고도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가엾은 여인에게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계급의 눈을 틔워주고 혁명의식을 키워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하셨다.

이튿날 아침 김정숙여사께서는 그 시어머니와 며느리 곁에 나란히 앉아 일손을 잡으셨다. 여사의 일솜씨에 그들은 세상에 처음 보는 일처럼 희한해했다. 언제 이런 일을 다 배웠느냐고 시어머니가 궁금한 듯 묻자 여사께서는 웃으시며 ≪저도 어렸을 적에 우리 어머니와 형님하고 밤늦게까지 앉아서 이런 일을 했다≫고 하시면서 그토록 살뜰하던 어머님과 마음씨 곱던 형님을 일제 놈들의 ≪토벌≫에 잃던 일이며 엄마 잃은 어린 조카를 품에서 떼어놓고 유격근거지로 들어가던 가슴 아픈 일들을 상세히 말씀하셨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어쩌면 자기네와 처지가 그렇듯 비슷하냐고 했고 며느리도 행주치마로 눈물을 닦았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이러한 그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어머님과 형님은 이 기막힌 슬픔과 쓰라림을 가져다준 일제 놈과 지주 놈들을 반대해서 싸워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잘 살 수 있고 기쁜 날을 맞을 수 있어요. 형님은 지주 집 종살이를 해서 누구보다 더 잘 알 거예요. 그놈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짐승보다 더 천대하지 않나요. 지주 놈들은 왜놈과 한 짝이 되어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등뼈를 갉아먹고 있어요. 우리는 이것을 똑똑히 알고 그놈들과 싸워야 해요.≫

김정숙여사께서는 ≪천대받고 압박 받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려면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김일성장군님 둘레에 굳게 뭉쳐 억세게 싸워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싸워서 우리 힘으로 쟁취해야 합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여사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속에 계급의식을 깊이 심어주었으며 얼어붙은 가슴마다 혁명의 불씨를 지펴주었다.

부대가 마을을 떠나는 날 며느리는 김정숙여사의 품에 안겨 흐느껴 울면서 힘있게 말했다.

≪저도 조국광복회에 들어서 싸우겠어요.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고 싸우겠어요!≫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여사께서는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각계각층 군중들을 노동계급의 혁명의식, 계급의식으로 튼튼히 무장시키셨으며 그들이 투철한 계급적 자각을 가지고 조국과 혁명, 민중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셨다.

다시 조직하신 강연회

광복 후 인민정권옹위를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신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모습은 오늘도 만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 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된 1946년 2월. 조국 땅은 광복의 그날처럼 기쁨으로 또다시 설레었다. 평양시 10만 군중의 경축시위를 비롯해 이르는 곳마다 경축의 환호성이 높이 울려 퍼지고 덩실덩실 춤판이 벌어졌다.

지난날 민중의 고혈을 짜내던 일제 통치기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중 속에 뿌리박고 민중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며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인민정권의 수립으로 온 나라가 감격과 격정으로 끓을 때 계급적 원수들은 갓 수립된 인민정권을 허물어보려고 발악적으로 책동했다.

어느 날 평양 제4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수립과 관련한 강연회 때에도 놈들은 악랄하게 책동했다. 그때 강연회에는 시안의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각계각층 군중들이 참가했다. 강사가 열변을 토하며 강연을 하는 도중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뒷좌석에서 어떤 자가 불쑥 일어나더니 불순한 의도에서 불의의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준비되지 못했던 강사는 미처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놈들은 바로 이 때를 노리고 있었다. 그자들은 인민정권을 헐뜯는 과격한 언사를 마구 떠들더니 품속에서 유인물까지 꺼내 뿌렸다. 장내에는 소란이 일고 강연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되신 김정숙여사께서는 반동들의 망동에 격분하시면서 일꾼들에게 다시 한번 강연회를 그곳에서 조직해야 하겠다고,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출연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일꾼들은 깜짝 놀라며 그 일만은 안 된다고 하면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당분간은 여사께서 그런 대중장소에 나서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말씀드렸다. 그러는 일꾼들에게 김정숙여사께서는 ≪장군님의 높은 뜻을 대중 속에 알려주는 중요한 일인데 위험하다고 그만두겠느냐≫고 하시면서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으셨다.

마디마디에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수령결사옹위정신이 차 넘치는 백두산호위장군의 말씀은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항일의 나날 주석님의 안녕을 위함이라면 원수의 총구 앞에도 서슴없이 나서셨고 사나운 눈보라 길도 단숨에 넘고 헤쳐오신 백두산 여장군의 모습을 우러르며 일꾼들은 여사의 강연회출연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사께서 취해주신 조치에 따라 며칠 후 평양 제4여자중학교에서는 다시 강연회가 조직되었다. 그날 강연회장은 앞서의 강연회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여사께서 출연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만사를 제쳐놓고 온 사람들이 강당의 모든 층을 꽉 메웠다.

초조한 시간이 흘러 얼마 후 요란한 박수갈채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여사께서 강연회연단으로 걸어나오셨던 것이다. 참가자들의 눈길은 일시에 김정숙여사께로 쏠렸다. 한없이 인자하신 눈길로 참가자들을 둘러보신 여사께서는 얼마 전에 역사적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을 성대히 경축한 사실을 이야기하시면서 ≪우리 인민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같은 자기의 주권기관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 인민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장군님께서 자기 주권을 갈망하는 우리 인민의 염원을 풀어주.기 위해 20성상 간고한 항일혁명투쟁을 조직, 전개하시고 광복 후 안팎의 원수들의 온갖 책동을 물리치시면서 주권을 세워주기 위한 정력적인 투쟁을 벌이신 결과≫라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계속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민중적 성격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반동분자들은 인민정권의 수립을 반대하고 노동자, 농민들이 자기 주권을 쥐고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있었던 강연회 때 한줌도 못되는 반동분자들이 너절한 유인물을 뿌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자들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을 반대해 나섰습니다≫라고 폭로하셨다.

불굴의 담력을 지니신 여사의 사리 정연한 웅변은 참가자들의 심장을 완전히 틀어잡았다. 여사께서 ≪모두다 김일성장군님의 주위에 굳게 뭉쳐 인민정권을 끝까지 사수하고 새 조국 건설위업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자≫라는 호소로 강연회를 끝마치시자 참가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김일성장군 만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만세!≫, ≪김일성장군의 노선을 받들고 민주주의 터전을 다지는 건국투사가 되자!≫ 등의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사라진 연기

혁명의 수뇌부를 결사 옹위하는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신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여사의 투쟁과 생활은 오늘도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사령부직속 소부대가 주석님을 모시고 간고한 행군 길을 다그치던 1940년 10월 중순경의 어느 날이었다. 소부대는 어느 한 골짜기에 이르자 경계근무를 빈틈없이 조직하고 야영준비에 착수했다.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께서는 그때 샘터에서 식사준비를 하시다가 야영지 부근에서 한줄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셨다. 날이 어둡기 전에는 야영지에서 불을 피울 수 없는 것이 유격대생활에서 하나의 철칙인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니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이라고 판단하신 여사께서는 일손을 멈추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가셨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뜻밖에도 몇몇 대원들이 벌 둥지를 털어 꿀을 내느라고 불을 피우고 있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너무도 기가 막히시어 잠시 아무 말씀도 없이 대원들을 바라보기만 하셨다. 전에 없이 엄한 눈길로 자기들을 바라보시는 여사의 모습을 보며 대원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해했다.

그러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그분은 ≪날이 아직 어둡지 않았는데 야영지 부근에서 연기를 내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제야 불을 피우고 꿀을 내느라고 법석 떠들던 대원들은 정신이 번쩍 들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모두가 달라붙어 황급히 불을 껐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채 꺼지지 않은 불씨를 끄시며 ≪동무들은 마당거우에서 얻은 교훈을 벌써 잊었느냐≫고 엄하게 지적하셨다. 대원들의 눈앞에는 마당거우 밀영에서 불을 피워놓고 산꿀을 내다가 연기를 보고 달려든 적 ≪토벌대≫의 습격에 귀중한 동지들을 잃은 뼈아픈 일이 곧 떠올랐다.

백두산 여장군께서는 ≪사령관동지께 꿀을 대접하겠다는 생각은 좋은 일이지만 경각성 없이 유격대의 규율을 어기고 불을 피우면 사령부의 안전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시면서 ≪사령관동지를 보위해야 할 무겁고도 영예로운 임무를 지닌 우리들에게 있어서 경각성은 첫째가는 생명이라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느냐≫고 준엄하게 비판하셨다.

대원들은 심한 자책으로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여사께서는 대원들을 둘러보시며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셨다.

≪동무들은 우리가 한순간이라도 해이되어 경각성 없이 행동한다면 한두 사람의 희생이 아니라 조선혁명에 엄중한 손실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해요. 동무들은 깊은 밀림 속이기 때문에 불을 피워도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물론 밀림 속이기 때문에 불길은 보이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연기는 어디서나 보일 수 있어요. 그러니 오늘 동무들의 경각성 없는 행동은 결국 불을 피워놓고 사령부의 위치를 적들에게 알려준 것과 다름없어요.≫

그분의 엄한 비판은 대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고 따뜻이 깨우쳐주시면서 ≪우리는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사령부의 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부터 먼저 생각해야 해요≫라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언제 어디서나 사령부의 안전부터 생각하시고 주석님의 안녕을 위해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에 세심한 관심을 돌리시는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를 우러르는 대원들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소용돌이쳤다.

김정숙여사의 숭고한 모범을 본 받아 수령결사옹위를 사업과 생활의 순간마다 철저히 구현해나갈 충성의 맹세가 대원들의 심장에서 불타올랐다.

눈보라 속에 안고 오신 불돌

간고한 항일전의 나날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언제나 자신보다 사령부를 먼저 생각하시고 혁명동지들을 먼저 위하셨다.

눈보라 세찬 어느 날이었다.

사령부창가에서만 불빛이 흘러나올 뿐 깊은 정적이 깃든 밀영을 지켜 한 대원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두툼한 솜옷차림에 솜 신도 신었건만 영하 30℃를 지나 자꾸만 내려가는 새벽녘의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교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발이 시리기 시작하더니 점차 온몸이 얼어드는데 아무리 손발을 놀리고 몸을 움직여봐도 추위는 막을 길이 없었다. 불을 피우면 좋으련만 적들이 언제 어떻게 달려들지 모르는 형편에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제자리걸음을 하며 하나 둘, 하나둘 입 속으로 셈을 세다가 나중에는 ≪혁명! 혁명!≫, ≪독립! 독립!≫하며 제자리 뛰기를 했다. 그랬더니 힘이 솟고 추위도 덜한 듯 싶었다. 한참 이렇게 하면서 강의한 의지로 추위를 이겨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눈보라를 헤치며 보초소로 다가왔다. 뜻밖에도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이셨다. 한다하는 장정들도 선뜻 나서기를 꺼려하는데 매운 추위와 눈보라를 뚫고 그분이 오실 줄은 몰랐다. 보초 서던 대원은 가슴에 차 오르는 고마움을 무엇이라 미처 표현할 길이 없었다.

≪수고합니다. 밤이 샐 때가 돼서 더 춥지요?≫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품에 싸안고 오신 것을 내려놓으셨다. 여러 겹으로 싼 보자기를 헤치고 덮어 온 대야를 여시니 확 하고 더운 기운이 느껴졌다. 여사께서 불에 달군 돌을 대야에 담아 가지고 나오신 것이었다.

≪이제 이 불돌이 식노라면 교대시간도 되고 날이 밝을 겁니다. 주머니에 이걸 몇 알 넣고 있으면 손도 녹을 거예요.≫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눈보라가 어찌나 세찬지 그분의 외투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북받쳐 오르는 격정에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 대원에게 여사께서는 ≪온 부대가 동무를 믿고 있어요. 춥고 힘들지만 사령부를 지키고 우리 혁명을 지킨다는 생각을 하면 용기가 날 거예요≫라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눈보라 속에 안고 오신 불돌.

그것은 뜨거운 동지적 사랑의 결정체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혁명의 사령부를 목숨으로 옹호, 보위할 일념으로 심장이 불타게 하는 불돌이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조국의 광복을 위한 간고한 혈전만리 길에서 이런 가슴 뜨거운 사연을 걸음마다 수놓으시며 대원들을 수령결사옹위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셨다.

더 깔아 주신 가랑잎

간고한 항일전의 어느 날. 며칠째 밤낮 없이 행군을 하다가 어느 한 밀림 속에서 부대가 숙영하게 됐을 때였다.

늦가을이라 밤이면 매우 추웠다. 걸으면서 잠에 몰려 끄떡끄떡 졸던 소년중대원들은 아이들처럼 좋아하며 잠자리를 준비했다. 천막을 친 다음 나무 아래에 두둑이 깔린 가랑잎들을 안아다 잠자리에 폈다. 그런 때면 언제나 그러하시듯 중대에 나오시어 숙영준비정형을 보살펴주시던 주석님께서는 소대장을 만나셨을 때 소년중대원들의 천막에 가랑잎이 두툼히 깔리지 않은 것을 두고 마음 쓰셨다.

주석님의 다심한 사랑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며 소대장은 소년중대원들에게 갔다. 그가 가랑잎을 더 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소년중대원들은 괜찮다고, 한지에서 말뚝잠도 잤는데 천막 안에 그만큼 가랑잎을 깔았으면 집안 구들이나 같다고, 장군님께서 우리들을 걱정해서 그러시지만 우린 괜찮다고 했다. 소대장이 ≪정말 괜찮은가. 새벽에 춥다고 우는 소릴 하지 않겠느냐≫고 정색해서 물었어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걱정 말라≫고 우겨댔다. 그 바람에 소대장은 그럼 좋다고 하면서 ≪식사나 일찌감치 하고 와서 자자≫고 했다.

잠시 후 그들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천막 안에서 와삭와삭 가랑잎 다루는 소리가 났다. 웬일인가 해서 천막 안을 들여다보니 어떻게 아셨는지 뜻밖에도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 소년중대원들의 천막 안에 직접 가랑잎을 더 깔아주고 계셨다. 놀란 소대장이 달려가 천막에서 잘 대원들 스스로 모두 괜찮다고 하니 그냥 두자고 말씀 올렸다. 그래도 여사께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 앞장에 서서 끝내 가랑잎을 더 두툼하게 깔고야 마음을 놓으셨다.

이윽고 잠자리가 다 준비됐을 때 김정숙여사께서는 소대장의 짧은 생각을 깨우쳐주셨다. 여사께서는 ≪장군님께서는 소년중대원들을 두고 하루 한시도 마음을 못 놓으시며 극진히 보살펴주고 계신다≫고 하면서 ≪가랑잎을 더 두툼히 깔아 밀림 속의 조건에서나마 소년중대원들이 춥지 않게 자게 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장군님의 사랑을 그대로 안겨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소대장은 뜨거운 격정을 안고 그분의 자애로운 모습을 우러렀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커다란 자책이 찾아들었던 것이다. 그는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진실로 반성했다.

그의 심정을 헤아려 보신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께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알았으면 됐어요. 동무가 언제나 장군님의 뜻대로 살아가리라는 걸 굳게 믿어요≫라고 하시면서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셨다.

모란봉에 깃든 이야기

대동강이 기슭을 치며 감돌아 흐르는 풍치 수려한 모란봉에 백두산 위인들의 거룩한 자국이 깊이 새겨져 오늘도 만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해준다.

광복 직후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께서는 모란봉에도 불멸의 자국을 남기셨다.

1947년 8월 하순 어느 날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주석님을 모시고 모란봉을 돌아보신 적이 있었다.

주석님께서 타신 승용차가 모란봉극장 옆을 지날 때였다. 이때 주석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며 즐기고 있는 유원지에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이라고 하시며 차를 세우셨다. 차에서 내리신 주석님과 김정숙여사께서는 거기서부터 내내 걸어 모란봉으로 오르셨다.

주석님을 모시고 아름다운 모란봉의 경치를 감상하시던 여사께서는 일꾼들에게 ≪장군님께서는 지난 항일무장투쟁시기 모란봉의 아름다움에 대해 저희들에게 자주 들려주시곤 하셨는데 정말 모란봉은 와 볼수록 경치가 아름답습니다≫라고 하셨다.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을 놓고 시종 밝게 웃으시던 김정숙여사의 얼굴은 을밀대 앞에 이르러 갑자기 흐려지는 것이었다. 광복 전 일제가 관리보존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아 모란봉의 문화유적과 유물들은 적지 않게 파손됐으며 정각들의 아름다운 단청도 거의 퇴색되어 볼품이 없었던 것이다. 파괴된 문화유적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시던 여사께서는 ≪모란봉의 고적들을 하루빨리 원상대로 복구해야 하겠습니다. 문화유적들의 퇴색된 단청도 원상에 손상이 없도록 색을 다시 입혀야 하겠습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을밀대를 돌아보신 김정숙여사께서는 최승대로 걸음을 옮기셨다. 그쪽으로 가는 오솔길은 몹시 험했다. 덤불이 엉키고 폭이 좁다 보니 걸어가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 길을 걸으시며 여사께서는 ≪모란봉은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휴식하는 유원지인 것만큼 사람들이 걸어다니기 편리하게 등산길을 잘 닦아 놓아야겠다≫고 하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최승대에 올라서서 오래도록 평양시의 전경을 바라보셨다.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하던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께서는 ≪모란봉은 우리 근로자들을 위한 참 좋은 문화휴식터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모란봉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원으로 꾸릴 원대한 구상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되면 모란봉의 풍경도 한결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라고 뜨거운 절절한 담아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주석님께 대동강에 다리를 하나 더 멋있게 놓아야 할 것 같다고 말씀 드리셨다.

잠시 후 여사께서는 주석님을 모시고 최승대를 내려 다시 을밀대 쪽으로 향하셨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시며 모란봉의 관리상태를 유심히 살펴보시던 여사께서는 일꾼들에게 ≪시민들과 청소년들 속에서 교양사업을 강화해 그들이 공원의 나무를 절대로 꺾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 가지 나무들을 많이 떠다 심어 사철 녹음이 우거지게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해서 공원을 찾는 근로자들이 아름다운 꽃향기를 한껏 마시며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게 해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젖게 하는 모란봉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손길 아래 면모를 일신하며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기쁨과 행복의 봉우리로 솟아 빛나고 있다.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새 조국 건설을 위한 투쟁으로 들끓고 있던 1947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바쁘신 와중에도 평양연초공장(당시)을 찾으셨다.

여사께서는 공장일꾼들에게 ≪이 공장에서 문맹퇴치사업을 잘한다기에 공장형편도 알아볼 겸 나왔다≫고 하시면서 문맹퇴치사업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셨다. 일꾼의 대답을 들으신 여사께서는 이 공장노동계급이 거둔 성과를 높이 치하하시면서 밝게 웃으셨다. 무엇보다도 이 공장노동계급이 주석님의 현지교시 관철에서 높은 충성심을 발휘한 것이 매우 기쁘셨던 것이다. 그 해 10월 주석님께서는 이 공장을 현지지도하시면서 지금 노동자들 앞에 나서는 절박한 과업은 기술기능수준을 높이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모든 노동자들이 꾸준히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 공장노동자들은 일제의 악독한 식민지통치의 결과로 거의 모두가 문맹자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주석님께서 주신 과업을 관철하기 위해 성인학교교육을 잘하고 자체학습도 부지런히 하게 해 이제는 문맹자들의 70∼80%가 우리 글을 제대로 읽고 쓰게 됐던 것이다. 여사께서는 밝은 미소를 지으시며 공장일꾼들에게 ≪성과에 절대로 자만하지 말고 문맹퇴치사업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벌여 우리 글을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성인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몇 명의 여성노동자들과도 담화를 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나이는 몇 살인가, 고향은 어디며 공장에는 언제 들어 왔느냐고 따뜻이 물으시고 그들의 광복 전 비참한 생활에 대해서도 들어주셨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조국을 찾아주시고 지난 날 착취 받고 억압받던 인민들을 나라와 공장의 주인으로 되게 해 주신 김일성장군님의 은덕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주스런 지난날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게 하기 위해 일을 더 잘해야 하며 열심히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노동자들의 일터를 돌아보신 다음 공장탁아소에도 들리셨다. 그분은 탁아소를 돌아보시면서 ≪어린이들은 나라와 혁명의 미래를 떠메고 나갈 주인들≫이라고, ≪어린이들을 잘 키워야 나라가 강해질 수 있고 흥할 수 있다≫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여사께서는 ≪우리가 지난날 피 흘리며 싸운 것이 어린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냐≫고 하시면서 공장에서 탁아소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일꾼들에게 지적하셨다.

사실 그때 공장에서는 생산에만 몰두하면서 탁아소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보육원들도 어린이들을 잘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여사께서는 그 같은 실정을 첫눈에 알아보시고 어린이 보육과 교양에 필요한 설비들도 충분히 갖추어주며 어린이들의 건강관리를 잘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정문 밖에 있는 이 공장 종업원들의 합숙까지 다 돌아보시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을 세심히 보살펴주셨다.

공장을 떠나기에 앞서 여사께서는 동행한 일꾼에게 ≪이 공장에서 문맹퇴치사업을 잘하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이 공장에서 창조되고 있는 문맹퇴치경험을 전국에 일반화하기 위해 신문에 그 경험을 제때에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 다녀가신 후 이 공장에서는 문맹퇴치사업에서 더 큰 성과를 이룩했다. 공장에서는 그 이듬해 1월 말까지 문맹을 완전히 퇴치했고 이와 때를 같이해 이 공장의 문맹퇴치사업경험이 신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두드러지게 소개되었다. 노동자들의 기술기능수준이 높아지고 탁아소와 합숙이 잘 꾸려지게 됐으며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투사들을 키운 품

간고하고 준엄했던 항일전의 나날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대원들을 어떤 곤란 앞에서도 굴할 줄 모르는 열혈투사로, 불사신의 용사로 준비시키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셨다.

1939년 겨울.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백두산 동북부에 집결된 10여만의 적들을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몰아넣으며 돈화 쪽으로 행군을 다그치고 있었다. 행군은 며칠째 계속되었다. 대오 앞에는 어려운 난관이 겹쳐 들었다. 갈수록 밀림은 깊어졌고 비상용 미숫가루마저 떨어졌다. 당장은 식량을 해결할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대원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씹으며 행군을 다그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신입대원들이 하나둘 주저앉기 시작했다. 맥이 진한 것도 있었지만 단련되지 못한 그들에게 구대원들의 설복만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행군대오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주저앉은 신입대원들을 달래던 구대원들의 심경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때였다. 대오의 앞쪽에서 행군 길을 다그치시던 김정숙여사께서 되돌아서서 주저앉은 신입대원들에게로 다가오셨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결사의 각오를 하고 혁명에 나선 동무들이 이만한 난관에 주저앉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시며 배낭 속에서 아끼고 아껴두었던 반 홉 가량 되는 미숫가루를 꺼내 물에 타시더니 신입대원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때 대원들이 받은 충격과 감동은 참으로 컸다.

김정숙여사께서는 부끄러워하는 신입대원들을 부추기시며 ≪동무들,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시련을 이겨냅시다. 강철은 불 속에서 단련되듯이 투사들은 이런 시련을 거쳐서만 단련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주저앉으면 부대가 걸음을 멈추게 되고 조국으로 가는 길이 그만큼 늦어지게 됩니다. 자, 어서들 갑시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신입대원들과 함께 행군하시면서 그들의 가슴속에 승리의 신심과 곤란 극복의 정신을 깊이 심어주셨다.

김정숙여사의 그날의 모습은 국내와 장백 일대에서 새로 입대한 신입대원들을 따뜻이 보살펴주시고 이끌어 무송을 향한 행군 길을 성과적으로 보장하신 숭엄하신 모습 그대로이셨다. 그때도 여사께서는 뜨거운 동지애와 실천적 모범으로 신입대원들의 가슴속에 불굴의 투쟁정신을 깊이 심어주셨던 것이다.

높고 험한 영들을 수없이 넘어야 했던 어려운 길이었지만 김정숙여사께서는 신입대원들을 도와 무거운 짐을 지시고 대원들을 고무하시며 행군 길을 다그치셨고 야영할 때는 행군의 피로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먼저 모닥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셨다. 그리고 신입대원들의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셨다.

김정숙여사의 이렇듯 뜨거운 사랑 속에서 신입대원들은 모두가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내는 불굴의 투사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이다.

숲 속을 거니신 사연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혁명생애는 주석님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신 위대한 친위전사의 모습으로 빛나고 있다.

1947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강원도에 대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주석님께서는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와 함께 어느 한 휴양소를 찾으셨다. 꿈결에도 뵙고 싶던 주석님과 김정숙여사를 가까이에 모시게 된 휴양생들의 기쁨과 감격은 이를 데 없이 컸다. 조용하던 산 속의 휴양소는 삽시간에 끝없는 감격과 환희로 끓었다.

주석님께서 어느 한곳을 돌아보고 나오시자 휴양생들은 만세의 환호를 올리며 그분께 달려갔다. 주석님과 여사께서는 휴양생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며 그들의 휴양생활에 대해 따뜻이 살펴주셨다. 이때 휴양생 중 한 명이 주석님의 앞으로 불쑥 나서며 기념사진을 찍도록 해주셨으면 하는 절절한 소망을 말씀드렸다. 휴양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또 다른 한 휴양생이 나서며 우리 휴양생 모두의 한결 같은 소원이라고 하면서 간청했다.

그들을 자애 깊은 눈길로 둘러보시던 주석님께서는 ≪우리 혁신자들의 요구라면 기꺼이 들어줄 수 있다≫고 하시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말씀하셨다. 휴양생들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둘러 사진 찍을 자리를 마련했다.

주석님께서 수행일꾼들을 데리시고 사진촬영장소로 내려오셨다. 그때 크나큰 영광의 순간을 그려보며 사진촬영준비에 여념이 없던 휴양생들과 경위대원들은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숙여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경위대원들은 주석님께서 현지지도하실 때면 김정숙여사께서 몸소 경위대원이 되시어 주변을 감시하시던 일이 떠올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은 주석님의 안녕을 지켜 저쪽 산기슭의 으슥한 곳에서 주변을 살피고 계셨다. 순간 경위대원들은 목이 꽉 메어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한 대원이 가까스로 여사께서 저기 산기슭에 계신다고 말했다.

휴양생들과 수행원들의 눈길은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꽉 들어차고 키 낮은 나무들이 우거진 산기슭의 숲 속을 천천히 거니시며 주변을 감시하고 계시는 김정숙여사. 주석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휴양생들과 함께 뜻 깊은 사진을 찍고 싶으신 마음이 어찌 간절하지 않으시랴. 그러나 그분은 주석님의 안녕을 위해 모든 소망을 누르시고 홀로 숲 속에 들어서서 호위임무를 수행하시는 것이었다.

주석님께서 휴양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시는 그 귀중한 역사적 순간을 지켜드리기 위해 몸소 숲 속을 헤치시는 김정숙여사의 숭엄한 모습을 우러르며 모두가 수령님의 안녕을 위해 바치시는 그분의 뜨거운 충성심 앞에 달아 오르는 마음을 걷잡지 못했다.

몸소 지도해 주신 사격훈련

오늘 이북의 인민군대는 김정일장군님의 품속에서 천하제일 강군으로 자라나 ≪세계최강≫이라는 미 제국주의자들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위용을 떨치고 있다. 인민군대의 위력을 말할 때 군관인 남편들을 따라 묵묵히 헌신하는 군인가족들의 깨끗한 충성심과 그들의 노고에 대해 빼놓을 수 없다.

오늘 ≪혁명가의 아내≫, ≪최고사령부 작식대원≫으로 칭송 받으며 남 다른 영예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영도를 충성으로 받들어 나가는 그들의 가슴속에는 광복 후 군인가족들을 참다운 혁명의 길동무로 키워주기 위해 온갖 노고와 심혈을 기울이신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숭고한 모습이 깊이 새겨져 있다.

1949년 3월 어느 날 김정숙여사께서는 제1중앙군관학교에 나가셨다. 이날 학교 책임일꾼으로부터 교직원 가족들이 사격장에서 사격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신 여사께서는 학교에 왔던 기회에 가족들이 훈련하는 것을 좀 봐야겠다고 하시면서 몸소 사격장을 찾아주셨다.

사격장에서는 교직원 가족들이 여러 조로 나뉘어 땅에 엎드리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면서 정확한 사격동작을 익히느라고 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있었다. 교직원 가족들의 활기에 넘친 훈련모습을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시던 여사께서는 훈련교관으로부터 가족들의 훈련정형에 대해 일일이 요해하고 나서 훈련하고 있는 가족들 곁으로 다가가셨다.

한 여성의 곁에 서서 동작을 세심히 봐주시던 김정숙여사께서는 방아쇠를 힘주어 당기면 총알이 내려 맞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길 때에는 숨을 멈추고 살그머니 당겨야 한다고 다정히 일러주시고 다른 한 여성에게 가서는 개머리판을 어깨에 단단히 받치고 총대도 제대로 유지해야지 무기를 대충 잡고 훈련하면 안 된다고 하시며 부족한 점들을 하나하나 바로 잡아주셨다. 여사께서는 이어 자신이 한번 해보겠으니 잘 보라고 하시면서 습기 찬 땅도 마다하지 않고 몸소 시범동작까지 보여주셨다. 그 시기 여사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불편한 몸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습기 있는 땅에 엎드려 시범동작까지 하시는 여사의 숭고한 모습에 교직원 가족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휴식시간이 되자 김정숙여사께서는 모여든 교직원 가족들에게 훈련이 힘들지는 않는지, 사격훈련에는 몇 번 참가했으며 총을 쏴본 경험들이 있는지를 다정히 물으시고 나서 ≪요즘 적들은 매일과 같이 38선 일대에서 무장도발행위를 감행하면서 침략전쟁의 불을 지르려고 날뛰고 있는데 우리는 미제가 우리나라에서 침략전쟁의 불을 지른다면 놈들을 이 땅에서 영영 쓸어버리고 갈라진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러면서 ≪동무들은 조국보위초소에 나선 혁명가의 아내로서 남편들이 전선에 나가면 동무들이 후방을 지켜야 하며 필요할 때에는 남편들과 함께 전선에 나가 싸울 수도 있다≫고 하시면서 간고했던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항일의 나날 여성들이 유격근거지를 보위하는 투쟁과 적 지역에서 지하투쟁을 잘하던 이야기며 조국광복을 위해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쳐 싸우던 여대원들에 대한 이야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안으며 교직원 가족들은 군사를 더욱 성실히 배워 일단 유사시에는 자신들도 남편들과 같이 총을 잡고 놈들과 용감히 싸우겠다는 불타는 결의를 가다듬으며 여사께 사격솜씨를 보여달라고 간청했다. 여사께서는 그들의 거듭되는 요청을 받으시고 ≪동무들의 요구가 정 그렇다면 한번 쏴보겠다≫고 하시며 보총을 들고 화선에 나가 100m거리에 있는 목표들을 겨냥해 선 자세에서 쏘셨다. 야무진 총성이 거푸 울려 퍼지고 목표들은 보기 좋게 명중되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교직원 가족들에게 ≪동무들도 꾸준히 훈련하면 얼마든지 총을 잘 쏠 수 있다≫고 하시면서 명중사격의 묘리에 대해 알기 쉽게 가르쳐주셨다.

그분의 정력적인 지도에 의해 총소리만 듣고도 놀라던 교직원 가족들은 높은 정열을 가지고 훈련을 거듭하는 과정에 누구나 총만 잡으면 자신 있게 목표를 소멸하는 사격술을 소유하게 되었다.

7연대를 기다리시던 그 밤에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의 간고한 나날 주석님께서 잠시나마 편히 쉬시도록 하기 위해 언제나 마음을 쓰시며 각별한 주의를 돌리셨다.

1939년 초 어느 날이었다.

주석님께서 오중흡이 인솔하는 7연대를 기다리시는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되었다. 그때 7연대는 사령부를 보위하기 위해 몰려드는 적의 대부대를 뒤에 달고 여러 날 동안이나 사선을 헤치고 있었다. 이날도 주석님께서는 먼 곳에 있을 사랑하는 전사들을 걱정하시며 숙영지 밖에까지 마중 나가시어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7연대 때문에 마음 쓰시는 주석님의 건강을 염려하며 온밤 잠들지 못하셨다.

7연대는 새벽녘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주석님께서는 먼동이 터 올 무렵이 되어서야 사령부 천막가로 걸음을 옮기셨다. 조금 후 대원들이 김정숙여사에게 조용히 다가오더니 사령관동지께서 자리에 드셨으니 이제는 마음놓고 쉬시라고 말씀 드렸다. 그러나 여사께서는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혹시 7연대가 이제라도 돌아오면 주석님을 한시바삐 만나 뵙고 싶은 생각에서 사령부로 달려갈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방 자리에 드신 주석님께서 또 주무시지 못하실 것이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주석님께서 기다리시던 곳에 다시 나가 눈보라에 옷자락을 날리시며 7연대 대원들을 기다리셨다.

사령부의 불빛이 꺼진 후 얼마 지나서였다. 산기슭에서 인기척이 났다. 7연대가 돌아오고 있었다. 여사께서는 기쁨을 금치 못하시며 그들에게로 달려가셨다. 7연대 대원들은 자기들을 마중 나오신 그분을 에워싸고 주석님께서 무고하신가 하는 것부터 물었다. 그들은 주석님께서 건강하시다는 것을 알고는 너무 기뻐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어느 새 오중흡도 한시바삐 주석님을 만나 뵙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 사령부 천막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는 오중흡 앞으로 급히 다가서신 김정숙여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연대장 동지, 벌써 동이 트는군요. 이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까요? 사령관동지께서는 연대장 동지를 기다리시느라고 며칠 밤을 지새우시다가 이제 방금 잠 드셨습니다.≫

오중흡은 주석님께서 자기들 때문에 며칠 밤을 지새우셨다는 것을 알게 되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더니 자기가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고 목 멘 소리로 말씀드렸다. 그는 자기의 경솔한 행동을 깊이 뉘우쳤다. 생각할수록 이 순간을 위해 그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한밤을 밝히는 여사의 충성심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또다시 사령부천막 주변을 거니셨다. 주석님께 잠시나마 안정을 보장해드리기 위해 찬 바람을 맞으며 천막 주변을 거니는 여사의 한없이 숭고한 모습을 우러르면서 7연대 대원들은 수령결사옹위의 맹세를 더욱 굳게 다졌다.

몸소 문수봉에 오르신 사연

온 나라 강산을 푸른 숲으로! 이것은 주석님과 함께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숭고한 뜻이었다.

1947년 봄 백두산 3대 장군께서 문수봉에 오르셨을 때였다.

그때 문수봉은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다박솔 포기들과 아직 잎도 피지 않은 아카시아나무들만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보이는 것은 방공호뿐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름 그대로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고 말하는 문수봉은 옛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벌거숭이가 된 문수봉을 바라보는 김정숙여사의 심경은 참으로 쓰리고 아픈 것이었다.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문수봉만 보아도 지난날 일제 놈들이 얼마나 악착하게 우리나라의 산림자원을 약탈해 갔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제 침략자들은 우리나라의 온 강산을 황폐하게 하고 가는 곳마다 이처럼 군사시설물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라도 더 많이 심어 벌거숭이가 된 조국의 모든 산들에 푸른 숲이 우거지게 해 일제 식민지통치가 남겨 놓은 후과를 하루빨리 가셔버려야 합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원수 일제에 대한 치솟는 증오를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더욱 불태우셨다.

온 나라 강산을 푸른 숲으로 뒤덮게 하실 숭고한 뜻을 더욱 깊이 새기신 김정숙여사께서는 그날 동행한 일꾼들과 함께 문수봉에 나무를 정성껏 심으셨다. 여사께서는 나무를 심으시면서 ≪나무 모는 자기 방향대로 심어야 한다≫, ≪그래야 나무가 모 살이를 오래 하지 않고 금방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하시면서 나무심기에서 지켜야 할 기술규정의 요구에 대해 알려주셨다.

나무심기가 시작되어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 때였다. 여사께서는 나무 모들 중에서 뿌리가 상한 것을 발견하게 되셨다. 여사께서는 곧 뿌리가 끊어진 나무 모를 집어 드셨다. 그리고는 ≪조국의 모든 산들에 나무를 다 심자면 나무 모가 많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 모라도 상하지 않게 아껴 심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여사께서는 이윽고 ≪그전에 들으니 상한 뿌리에 진흙을 발라 심으면 잘 살아난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해 한 그루의 나무도 죽이지 말자≫고 하시며 친히 끊어진 나무 모에 진흙을 발라 정성껏 심으셨다.

온 나라 강산에 푸른 숲 일렁이게 할 애국의 숭고한 뜻 안으시고 문수봉에 거룩한 자국을 새기신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그날의 모습은 조국통일과 민족번영을 힘차게 다그쳐 가는 우리의 가슴을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더욱 불타게 하고 있다.

뜨개옷에 깃든 충정

주석님께서는 생전에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고결한 충성심에 대해 감동 깊은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뜨개옷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언젠가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나는 뜨개옷을 볼 때마다 김정숙을 생각하곤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지금은 현대적인 편직물들이 많이 생산되는 시대이니 여성들이 뜨개질을 별로 하지 않는다.

뜨개옷. 항일혁명투사들은 이 말을 입에 올릴 때면 그처럼 준엄하고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의 나날 뜨개질을 하시던 김정숙여사의 모습을 회고하게 된다고 한다.

항일의 나날 김정숙여사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바쁘신 시간을 보내셨다. 전투와 행군 후에는 작식대 일을 하시느라 언제 한번 편히 쉬지 못하셨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사께서는 뜨개질을 하셨다. 그것은 주석님을 위해서였다. 사실 바늘 한 쌈을 구하려고 해도 생사를 거는 전투를 벌여야 했던 항일의 그 시절 산에서 털실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김정숙여사께서는 적들과 싸우시느라 사철 밖에서 눈비를 다 맞으며 생활하시는 주석님의 건강과 안녕을 염려하시어 털실을 한줌 두줌 모아 구해 두셨다. 그리고 틈틈이 뜨개질을 하셨다.

그러는 김정숙여사께 언제인가 주석님께서는 털실은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으신 일이 있다. 여사께서는 그저 웃기만 하셨다. 주석님께서는 ≪정숙 동무한테는 털 양말이 있느냐≫고 거듭 물으셨다. 간고한 항일의 나날 한해도 빠짐없이 털 양말을 떠서 수령님께 드린 김정숙여사이셨다. 여사께서는 이번에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자기 몸도 돌보기 힘든 간고한 항일혈전의 나날에 자신보다 오로지 주석님만을 위하시며 그리도 헌신하시는 사랑하는 전사의 고결한 마음이 뜨겁게 느껴져 수령님께서는 계속 물으셨다. 그러자 김정숙여사께서는 주석님께 ≪장군님은 큰일을 하시는 분이니 그런 건 몰라도 됩니다≫라고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남들과 꼭 같이 전투와 행군에도 참가하시고 작식대 일도 도맡아 하시느라 언제 한번 변변히 쉬지 못하신 김정숙여사이셨다. 그러나 여사께서는 주석님의 건강과 안녕을 그토록 바라시며 행군의 쉴 참에, 야영의 달밤에 그리고 눈 내리는 밀영의 모닥불 가에서 한뜸 한뜸 뜨개옷을 떠서 수령님께 드리셨다.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 간고한 항일의 나날 뜨개질을 하시며 정성껏 만들어 주석님께 드리신 뜨개옷. 그것은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께서 주석님께 바치신 고결한 충정의 고귀한 결정체이다.

새벽에 있은 일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주석님께서 저택에 계실 때면 늘 그분의 안녕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 각별히 마음 쓰셨다.

광복 후 어느 여름날이었다.

깊은 밤 주석님의 저택에서 보초근무를 수행하고 있던 한 보초병은 불이 환히 켜진 세면장의 창가를 주의 깊게 살피며 보초교대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초교대를 끝내면 세면장의 전등불부터 끄려는 것이었다.

새벽 2시, 보초교대를 끝낸 그는 걸음소리를 내며 급히 세면장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정숙여사께서 빨래를 하신 듯 소매를 걷어올리시고 세면장에서 나오시며 보초병에게 어서 그 자리에 서라고 급하게 손짓을 하셨다. 보초병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쩔 바를 몰라 하며 그 자리에서 주춤거렸다.

이때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김정숙여사께서는 귓속말로 ≪구두소리가 크게 들려요. 장군님께서 방금 자리에 누우셨는데 발뒤축을 들고 앞 축으로 조용히 걸어다니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보초병은 얼굴이 붉어 졌다. 주석님께서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되니 쉬시리라는 것을 자기는 왜 모르고 걸음소리를 냈을까 하는 생각으로 송구스러워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그러는 그에게 무슨 일로 왔느냐고 다정히 물으셨다. 보초병은 기어드는 목소리로 세면장에 불이 켜져 있기에 그것을 끄러오던 참이었다고 말씀드렸다. 여사께서는 보초병이 참 기특한 생각을 했다고 칭찬하시면서 피곤하겠는데 어서 들어가 쉬라고 이르셨다. 보초병은 여사의 살뜰한 사랑에 목이 메어 밤이 퍽 깊었는데 이젠 주무시라고 떠듬떠듬 말씀드렸다. 하지만 여사께서는 자신은 괜찮으니 빨리 돌아가 휴식하라고 거듭 재촉하셨다.

보초병이 발뒤축을 세우고 조용히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여사께서 다시 세면장으로 가시는데 자세히 보니 허리를 굽히시고 가만가만 걸으시는 것이었다. 보초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석님의 휴식에 자그마한 발자국소리마저 방해가 될까 염려되어 조용히 걸으시는 김정숙여사의 모습을 우러르며 보초병은 끓어오르는 감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숭엄한 감동에 휩싸인 보초병은 그대로는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세면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거기서는 여사께서 여전히 빨래를 계속 하고 계셨다. 어찌나 조용히 하시는지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보초병은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김정숙여사께서 빨래를 하시는 줄 알았지 귀로 듣고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10리 밖의 소리도 들린다는 이른 새벽이었으나 김정숙여사께서 뜨거운 충정의 마음을 안으시고 빨래를 하고 계시는 줄은 그날 밤 그 누구도 몰랐다.

무비의 용감성과 희생성

항일무장투쟁시기 수많은 격전장마다 새겨진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무비의 용감성과 희생성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은 우리 변혁운동가들의 가슴을 격동시키고 있다.

주석님께서 조직,, 지휘하신 노령전투 때였다.

그때 주석님의 돌격명령을 받들고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가 놈들과 육박전을 벌린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 속에는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도 계셨다. 앞에서 달려드는 적의 총창을 총신으로 비껴 치면서 놈의 가슴에 복수의 총창을 박으시는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모습은 다른 여대원들의 가슴속에도 무비의 용감성과 희생성을 새겨 주었다. 김정숙여사께서 연거푸 달려드는 놈들을 총창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번개같이 해치우시는 사이에 다른 여대원들도 육박전에 나섰다.

그 순간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 조성되었다. 한 여대원이 적의 가슴팍에 박은 총창을 뽑고 있을 때 다른 한 놈이 그 틈을 타서 벼락같이 그 여대원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순간 여사께서는 비호같이 몸을 날려 그놈의 면상을 개머리판으로 후려치셨다. 위험에서 여대원을 구원하신 여사께서는 달려드는 적들을 연방 요정내셨다.

그날 육박전으로 수많은 적들을 쳐 없애고 포로들까지 앞세우고 돌아오신 김정숙여사를 대원들은 ≪여장수≫, ≪여장군≫이라고 부르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육박전은 몸으로 적들과 직접 맞붙어서 쏘고 찌르고 하는 전투로서 말 그대로 생사를 가르는 결전이다. 순간에 고도의 정신력과 체력이 깡그리 동원되고 소모되는 결투인 육박전은 사실 여성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육박전에 김정숙여사께서 서슴없이 뛰어들었으니 그분이 지니신 무비의 용감성과 희생성에 사람들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령의 격전장만이 아니다.

여러 명의 여대원들을 지휘해 기관총으로 무장한 한 개 소대의 적들을 물리치고 전투승리에 크게 기여하신 무송현성전투와 혼자서 수십 명의 적들을 쏴 잡으신 홍두산전투, 희생된 전우들의 복수전으로 용맹 떨치시고 주석님으로부터 금반지를 수여 받으신 1938년의 춘기 대반격전들에도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용감하고 희생적인 영웅적 기상이 역력히 아로새겨 져 있다.

몸소 필자가 되시어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사업과 생활의 모든 면에서 항일유격대원들의 빛나는 귀감이셨다.

여사께서 군정학습과 규율, 사격술에서 발휘하신 뛰어난 모범으로 주석님으로부터 금시계와 권총을 선물로 받으신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여사께서는 혁명적 출판물에 실리는 글도 잘 쓰셨다. 언제나 주석님의 혁명사상을 깊이 체득하시고 남달리 총명한 기질과 열정을 지니고 계신 여사께서 쓰신 글은 언제나 사람들의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조국을 찾자, 혁명을 하자, 이것이 우리가 나갈 길이다.≫

이것은 항일무장투쟁시기에 김정숙여사께서 수많이 쓰신 감동적인 글 중 한 구절이다.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장백지구에서 활동하면서 반유격구 민중 속에서 군중선동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던 때였다. 어느 날 김정숙여사께서는 다음날 선전공작에 이용할 선전문을 부탁하기 위해 출판소 일꾼들을 찾아가셨다. 그런데 출판소에서는 급히 찍어야 할 다른 출판물 때문에 그날 밤으로 선전문의 원고를 쓸 사람이 없었다.

물론 이미 만들어 두었던 선전문을 가지고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에 마을에 내려가 그곳 군중들의 정치적 준비정도와 생활형편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신 김정숙여사께서는 그들에게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적 자존심을 높여주는 선전문이 꼭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여사께서는 이 글을 자신이 직접 쓰기로 결심하시고 출판소 일꾼들에게 글이 되면 늦어지지 않게 찍어줄 것을 부탁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글의 제목에 대해 잠시 생각하시다가 ≪조국을 찾자, 혁명을 하자, 이것이 우리가 나갈 길이다≫라고 큼직하게 쓰셨다. 이윽고 갈 길 몰라 헤매는 형제자매들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 북받치는 격정으로 가슴을 불태우며 여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가셨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산 설고 물 선 이국 땅에 와서 모진 학대와 주림 속에서 헤매는 사랑하는 부모님들과 오빠, 언니들!

조국을 빼앗긴 우리 조선인민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조국입니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글의 첫 머리를 떼신 김정숙여사께서는 대중의 혁명적 자각을 높여주기 위한 힘 있는 글줄들을 잇달아 써내려 가셨다. 이어 여사께서는 자기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을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알기 쉽게 해설하시면서 모두다 주석님의 영도 따라 반일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도록 힘있게 호소하셨다.

불타는 애국사상과 혁명적 열정이 넘치는 여사의 이 글은 나라 잃고 이국 땅에서 천대와 무권리 속에서 헤매는 우리 민중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혁명에 대한 신심을 북돋아주고 혁명의 길에 나서도록 힘차게 불러일으킨 귀중한 글이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잘 이해될 수 있는 쉬운 말로 알기 쉽고 소박하면서도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호소가 절절히 넘치게 쓰셨기 때문에 이 글은 읽는 사람들의 커다란 감명을 불러일으켰으며 유격대원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며 군중정치사업에서 표본적인 선전문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비범한 군사적 예지

처창즈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시어 혁명활동을 벌이신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그때 벌써 비범한 군사적 예지를 지닌 위대한 혁명가로서의 풍모를 남김없이 보여주셨다.

1935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처창즈 유격구에 1만여 명의 적들이 달려든다는 긴급통보가 날아왔다. 입수된 자료는 유격구의 공기를 긴장시켰다. 당시 처창즈에는 불과 100명의 유격대원들과 반일자위대 및 청년의용군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보나 무장장비로 보나 대비도 되지 않았다.

대원들은 전투위치를 차지했으나 적과 싸울 인원이 적은 데 대해서 근심했다. 이때 그들과 함께 진지를 차지하시고 방어구역 일대의 지형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던 김정숙여사께서는 ≪동무들, 저기를 보십시오≫라고 하면서 ≪저렇게 수심이 깊은 고동하와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데 적들이 아무리 많이 달려들어도 무서울 것이 있겠는가≫, ≪우리가 여기에 경기관총만 한 정 걸어놓으면 놈들이 어떻게 저 다리를 건너오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분은 ≪장군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가 이런 자연장애물을 잘 이용한다면 만 명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적이 덤벼들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대원들의 눈길은 일제히 주변지형으로 쏠렸다. 살펴보니 비길 데 없는 천연요새였다. 승리에 대한 신심이 대원들의 가슴속에 꽉 차 넘쳤다.

전투는 다음날 이른 아침에 벌어졌다. 서쪽과 동쪽, 북쪽에서 동시에 1만여 명의 적들이 비행기를 띄우고 포를 쏘며 달려들었다. 아군의 진지근방에서는 잇따라 적들의 포탄과 폭탄이 터졌다. 이렇게 되자 전투에 처음 참가하는 일부 신입대원들이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이때였다. 경기관총 좌지 옆에 자리잡고 계시던 김정숙여사께서는 ≪움직이지 말라≫, ≪적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쏘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면 우리의 진지가 노출된다≫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제지시키셨다. 아무리 폭격과 포격을 해도 반응이 없자 적들은 우르르 밀려나와 다리가 미어지게 건너왔다.

드디어 아군의 진지에서 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긴칼을 빼들고 졸병들을 내몰던 일제 지도관 놈이 거꾸러졌다. 여사께서 쏘신 총알이 단방에 그놈의 가슴팍에 맞구멍을 냈던 것이다. 지휘체계가 마비된 적들은 갈팡질팡했고 대원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기관총이 불을 토하고 대원들의 명중사격이 놈들을 무자비하게 쓸어 눕혔다. 다리와 그 주변은 순식간에 놈들의 시체로 뒤덮였다.

그러나 적들은 공격을 단념하지 않고 역량을 수습해 가지고 계속 달려들었다. 첫 전투에서 승리한 대원들은 신심을 더욱 굳게 가다듬으며 기세높이 놈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 무렵 서남차에서 동남차로 건너는 다리 목을 지키고 있던 청년의용군들에게 위험이 닥쳐왔다.

김정숙여사께서 그곳으로 달려갔을 때는 벌써 적들이 신변기재를 이용해 고동하를 건너오고 있었으며 이미 한 무리의 적들이 강을 건너 청년의용군이 차지한 고지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전투경험이 없는 청년의용군들은 너무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여사께서는 그들에게 ≪동무들, 돌을 굴립시다≫, ≪돌 사태를 안깁시다≫라고 외치시며 놈들을 향해 돌을 굴리셨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청년의용군들은 일시에 미리 준비해 놓았던 바윗돌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적들에게 있어서 예상치 못했던 타격이었다. 강을 건너 고지에 달라붙었던 적들은 순식간에 전멸되었다. 위급한 정황을 수습하신 여사께서는 대원들에게 ≪이제는 덤비지 말고 적을 한 놈씩 침착하게 조준해 쏘라≫고 하시면서 자신도 총 한방에 적 한 놈씩 영락없이 거꾸러뜨리셨다.

김정숙여사의 그날의 모습을 우러르며 처창즈의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중대를 맡으셔도 훌륭히 지휘하실 유능한 여성 지휘관이시라고 탄복했다.

≪신묘한 사격술과 함께 남 다른 예지는 그분의 천품이다.≫

처창즈의 하늘가에 울려 퍼졌던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에 대한 그날의 찬사가 새 세기의 하늘가에 더 높이 울려 퍼지고 있다.

연자방아와 함께 맞으신 생일날

1917년 12월 24일 회령의 오산덕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추녀 낮은 초가집에서 수난 겪는 조국의 딸로 탄생하신 김정숙여사께서는 눈물겨운 가난 속에 유년시절을 보내셨다. 여사께서는 인생의 첫 걸음마를 밭머리에서 떼셨으며 소꿉놀이보다도 나물을 캐고 이삭 줍는 일부터 손에 익히셨다.

여사께서 맞으시던 열세 번째 생일도 모진 가난과 천대 속에서 흘러갔으며 이날 역시 계급적 원수들에 대한 복수의 마음을 더욱 굳게 다지신 유년시절의 하루였다.

그 해 가을 부암동마을 여인들은 ≪되놀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혁명조직에서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풍속놀이와 관혼상제 같은 것도 대중을 계몽시키는 계기로 이용했다.

가을걷이를 하기 전이라 어느 집이나 식량사정은 어려웠으나 김정숙여사의 가정은 할머님의 장례를 방금 치르고 난 뒤여서 ≪되놀이≫에 들고 갈 쌀이 없었다. 이런 사연을 알게 된 김기송 선생님(김정숙여사의 친동생)은 그 길로 낫을 들고 소작 밭에 나가 수수 몇 이삭을 잘라다 누나의 ≪되놀이 쌀≫을 마련했다. 그런데 온 가족이 피땀으로 가꾼 밭에서 잘라 온 그 몇 이삭의 수수이삭이 불행의 화근으로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지주 놈은 ≪땅임자≫의 허락도 없이 수수를 베었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당장 ≪빚≫을 물지 못하겠으면 누구든지 자기네 집에 와서 한해 겨울 연자방아를 돌리라고 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법에 제소해 집을 헐어버리고 땅을 떼며 김기송 선생님을 꼴머슴으로 끌어가겠다고 을러댔다. 여사께서는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 지주 놈이 사라지자 어머님의 품에 안겨 흐느껴 우셨다.

그러나 세상은 일제와 지주 놈의 세상이었다. 끝내 김정숙여사께서는 어린 몸으로 지주 놈의 집에 가서 한해 겨울 연자방아를 돌리게 되셨다. 연자방아간은 지주 집 마당의 한 구석에 있었다. 지주 놈은 방안에 있다가도 연자방아소리가 멎기만 하면 달려나와 고함을 질러대곤 했다.

그런 가운데 여사께서는 열세 번째 생일을 맞으셨다. 그날 어머님께서 김기송 선생님과 함께 밥을 한 그릇 싸들고 연자방아간으로 찾아왔다. 생일날에까지 멍에 채를 잡고 계시는 어린 딸이 너무도 애처로워 어머님께서는 밥보자기를 풀어놓고 김기송 선생님과 함께 연자방아 채를 잡으셨다. 그러나 여사께서는 어머님과 동생의 손을 잡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 그만 두십시오. 무엇 때문에 어머니까지 이 집 연자방아를 돌리겠습니까. 어머니와 기송이가 이 집 쌀 한말 더 찧어준다고 우리 집 처지와 내 처지가 달라지겠습니까. 그저 가슴만 더 아프지…≫

어머님과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신 김정숙여사께서는 다시 멍에 채를 잡으셨다. 한바퀴, 한바퀴 힘겹게 연자방아를 돌리시는 여사의 가슴속에서는 이 세상을 그대로 두고서는 가난과 치욕, 모멸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불의의 이 세상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결심이 활화산같이 타올랐다.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열세번째의 생일을 이렇게 보내셨다.

어길 수 없는 일과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광복 직후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당보를 보는 것을 생활화, 습성화할 데 대해 자주 가르치셨다.

1946년 어느 날이었다.

이날 당보의 한 여성기자는 영광스럽게도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를 만나 뵙고 저택에서 여사와 함께 하룻밤을 지내게 되는 영광을 지니게 되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현 정세와 함께 새 조국 건설에서 당보가 틀어쥐고 나가야 할 투쟁방향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여사께서 손수 차려주신 저녁상까지 받는 크나큰 영광과 행복을 지니게 된 그의 감격은 그지없었다.

여기자는 그 감격을 안고 몇 밤이라도 지새우고만 싶었다. 이미 밤하늘의 삼태성도 기운지 꽤 됐으나 받아 안은 너무도 큰 행복과 은정에 목이 메어 그는 오랫동안 잠들 수 없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그가 눈을 떴을 때에는 아직도 한밤중인 듯 창문으로는 밝은 달빛이 고즈넉이 흘러들고 정원 풀숲에서는 벌레 울음소리가 밤의 정적을 고요히 달래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으려던 그는 가벼운 인기척을 느끼고 부엌 쪽을 내려다보았다. 부엌 쪽에서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게 스며드는데 여사께서는 벌써 일어나 아침준비를 하시며 신문을 보고 계시는 것이었다.

여기자는 자기가 단잠에서 깰세라 한쪽 전등불빛을 가리시고 신문을 열심히 읽으시는 김정숙여사의 모습을 우러르며 한없이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간고한 항일의 나날 주석님의 혁명사상을 학습하는 것을 첫째가는 의무로 삼으시고 <3.1월간>과 <서광>, <종소리>를 비롯한 혁명적 출판물들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고 읽고 읽으시던 그 변함 없는 충성의 한길을 광복된 조국에서도 순간도 끊임없이 이어가시는 여사이시었다.

여기자는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며 여사께 ≪나라가 광복됐는데 이제는 건강도 돌보시라≫고 하면서 ≪신문을 낮에 보셔도 되지 않느냐≫고 말씀드렸다. 그러는 그를 그윽하신 눈길로 바라보시며 여사께서는 ≪장군님께서는 매일 당보를 빠짐없이 보시는 것을 첫 일과로 삼고 계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제가 읽어두어야 장군님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당보를 보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혁명과업이라고 하셨다.

여기자는 오직 한마음 어제도 오늘도 주석님을 충성으로 받들어 나가시는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그 숭고하고 거룩한 뜻이 전류처럼 자기의 온몸에 흘러드는 것을 느꼈다.

아직 하늘의 별들이 총총한 이른 새벽, 전등불 아래서 당보를 그처럼 열심히 보고 계시는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거룩한 영상은 정녕 혁명전사는 주석님을 위해 어떻게 살며 일해 나가야 하며 당적 출판물들을 어떤 입장과 기풍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불멸의 화폭이었다.

≪금로수≫

1947년 9월 말 김정숙여사께서는 현지지도의 길에 오르신 주석님을 모시고 고성군 온정리에 도착하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이곳에 머무르시는 기간 어떻게 하면 주석님의 건강과 현지지도사업을 더 잘 보장해 드릴까 하는 데 언제나 마음을 쓰셨다.

숙소를 정하신 김정숙여사께서 몸소 주석님의 식사준비를 할 때였다. 주변을 돌아보고 온 한 일꾼이 다가와 멀지 않은 산기슭에 ≪금로수≫라는 좋은 샘물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렸다. 그러자 여사께서는 그 샘물을 장군님의 식사보장에 이용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일꾼들과 함께 샘터에 가시어 물도 갈아 채우시고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셨다. 샘물은 수정처럼 맑고 정갈해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그 샘물을 길어다 밥도 짓고 주석님께 정히 떠서 올리셨다. 주석님께서는 여사께서 정히 떠드린 시원한 ≪금로수≫를 드시면서 ≪우리나라에는 가는 곳마다 ≪금로수≫와 같은 약수들이 많다≫고 하시며 ≪어딜 가봐도 우리나라처럼 아름답고 물 좋은 곳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날 점심식사가 끝나자 김정숙여사께서는 주석님을 모시고 금강산을 향해 숙소를 떠나셨다. 만물상 구역으로 오르는 등산길은 험했다. 9월이라 하지만 한낮의 햇빛은 따가웠다. 얼마간 올라가는데 길가에서 함석집 한 채가 나타났다. 금강산 안내원의 집이었다.

주석님께서는 좀 쉬어가자고 하시며 그 집 툇마루 위에 걸터앉으셨다. 더위를 참아오던 일행도 함석집의 그늘 아래에 앉았다. 집주인과 이야기를 나누시던 주석님께서는 찬물을 찾으셨다. 수행한 일꾼이 준비해 가지고 다니던 물병을 드리려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였다. 여사께서는 주석님께 잠깐 기다리게 하시고 급히 주인집 아주머니를 찾으시고 가까운 곳에 샘터가 없느냐고 물으시더니 물동이를 빌려 가지고 샘터에 가셨다. 샘터에 이르신 여사께서는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신 다음 자신께서 먼저 물을 떠서 마셔보신 후에야 물동이에 샘물을 퍼담으셨다.

김정숙여사께서 떠오시어 정히 떠드린 물을 드신 주석님께서는 물맛이 참 좋다고 하시며 수행한 일꾼들에게도 권하도록 하셨다. 그 말씀처럼 물맛은 이를 데 없이 좋은 금강산의 샘물이었다. 급한 걸음을 하신 여사의 얼굴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시원한 물 한 그릇을 주석님께 올리시려고 순간의 다리 쉼도 없이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부으시는 김정숙여사를 우러르는 일꾼들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주석님을 모시고 다시 길을 떠나신 김정숙여사께서는 삼선암으로 오르는 험한 길을 앞질러 나가시며 돌계단도 살펴보시고 난간의 손잡이들도 든든한가 하나하나 확인해 보시며 수령님의 신변안전에 깊은 주의를 돌리셨다.

삼선암에 오르니 만물상이 한눈에 안겨 오고 천태만상의 황홀경이 펼쳐졌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저녁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사께서는 주석님의 저녁식사가 걱정되시어 일꾼들에게 수령님의 안녕 보장을 부탁하시고 숙소를 향해 산을 내리셨다.

동행한 일꾼들이 그렇게도 보고싶어하시던 만물상인데 마저 올라가 보고 내려가시라고 거듭 말씀 드렸다. 항일의 나날 타오르는 모닥불 가에서 수령님으로부터 전설처럼 들어오시던 금강산이었지만 오직 주석님의 안녕과 건강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오신 여사께서는 이날 천하절경을 앞에 두시고 오르시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셨다.

50여 년 전 그날에 보여주신 친위전사의 빛나는 모범은 오늘 6.15공동선언의 기치 따라 조국통일의 새 날을 열어나가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다.

수령결사옹위에 우리 민족의 긍지 높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휘황찬란한 통일강성대국의 내일이 있다고.

여성들을 혁명가로

김정일장군님의 품속에서 선군시대의 여성영웅, 여성혁신자, 여성과학자로 그 이름 떨치는 이북 여성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여성들을 혁명의 한길로 이끌어주시던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모습을 되새겨보게 된다.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광복 직후 청진에 머무르시면서 여성들을 새 조국 건설의 믿음직한 담당자로 키우시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셨다.

1945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이날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께서는 인곡동 여맹원들이 마련한 좌담회에 참가하셨다.

여맹원들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방안에 들어서신 여사께서는 허물없이 그들과 자리를 같이 하시고 여맹조직의 실태를 하나하나 알아보셨다. ≪여맹에 들기는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한 여성의 말을 들으신 여사께서는 ≪부강한 자주독립국가건설에는 남자들과 함께 우리 여성들도 적극 참가해야 합니다. 우리 여성들은 광복 전 설움만을 강요하던 썩어빠진 봉건인습과 일제의 낡은 사상잔재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숙청하고 사회적 해방을 이룩하며 공장, 기업소들을 하루빨리 복구하기 위한 사업에도 적극 참가해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여사께서는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 탓≫이라고 하시면서 ≪광복 전 각성된 우리 여성들은 손에 총을 잡고 조국광복의 성전에 나섰으며 부녀회를 조직해 유격대를 돕는 일도 잘했다≫고 뜨겁게 회고하셨다. 그분은 계속해서 도천리 부녀회원들의 슬기롭고 용감한 투쟁 이야기도 감명 깊게 들려주셨다. 여사께서 들려주신 부녀회원들의 용감한 투쟁 이야기는 여성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으며 그들에게도 새 조국 건설을 위해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신심을 안겨주었다. 활기에 넘친 여맹원들을 한참 바라보시던 김정숙여사께서는 ≪도천리의 부녀회원들처럼 이 자리에 모인 동무들이 핵심이 되어 동안의 모든 여성들을 여맹조직에 묶어세워 새 조국 건설에 적극 동원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도천리의 단오명절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 보여주신 능숙한 지하공작활동과 군중정치사업에 대한 이야기들 가운데는 도천리에서 있었던 단오놀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주석님께서 보천보의 적을 쳐부순 지 며칠 안 되는 1937년 6월 어느 날이었다.

도천리에서 활동하고 계시던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조국광복회산하 장백현 하강구위원회의 기구를 개편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하셨다. 그리고 개편된 위원회의 첫 사업으로서 도천리에서 보천보전투 승리를 경축하는 사업을 본때 있게 벌일 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셨다.

당시 보천보에서 호되게 얻어맞은 일제는 이 사실이 알려지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고 있었다. 여사께서는 ≪적들의 이러한 발악적 책동을 짓부수기 위해 김일성장군님의 국내진공작전승리를 경축하는 군중정치사업을 잘 조직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단오명절을 이용하면 군중대회를 조직하는 것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둘 것 같습니다. 소문을 크게 내고 운동회 같은 것도 하고 오락회도 흥미 있게 잘 조직해 봅시다. 그러면 13도구만이 아니라 신파 사람들도 올 것입니다. 그때 보천보전투 소식도 알려주면서 그들에게 조국광복에 대한 신념을 안겨주어야 합니다≫라고 힘있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명철한 발기었다.

김정숙여사의 제의는 회의참가자들의 가슴을 세차게 울려주었다. 회의에서는 즉시에 보천보전투 승리를 경축하기 위한 도천리 단오놀이 행사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인 조직사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도천리 단오놀이에 대한 소문을 크게 냈다. 조국광복회 성원들은 학교운동장도 새로 닦고 씨름터도 만들었으며 그네도 뛰기 좋게 잘 매놓았다.

드디어 단오 날이 왔다. 도천리 부락은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로 흥성거렸다.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날에 도천리에 와서 잠자고 이날 단오놀이에 참가했다. 그 가운데는 신파를 비롯한 국내에서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단오놀이는 매우 이채로웠다. 운동장은 달리기와 축구, 씨름경기로 온종일 떠들썩했으며 그네 터와 윷놀이 장에서도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치밀하게 조직된 보물찾기가 사람들의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보물찾기를 위한 종이쪽지들에는 보물의 이름은 없고 ≪3, 7≫또는 ≪4, 6≫과 같은 숫자가 적힌 것도 있었다.

이런 쪽지를 찾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숫자가 무슨 보물인가 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다. 이때 조국광복회 성원들은 미리 정해놓은 대로 그들에게 ≪3, 7≫이나 ≪4, 6≫은 김일성장군님께서 국내의 보천보를 들이치신 1937년 6월 4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들에게는 제일 값진 상품이 돌아가도록 했다. 그들은 그 상품을 가지고 자기 마을에 돌아가서 자랑하며 김일성장군님께서 보천보의 적을 족쳐버린 이야기를 신이 나서 했다. 조국광복회 성원들은 그뿐이 아니라 개별담화의 방법, 서로 인사를 나누는 기회를 이용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파를 비롯한 외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보천보전투 승리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도천리 단오명절놀이를 계기로 보천보전투 승리소식이 널리 퍼져 사람들이 법석 끓게 되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때로부터 눈물 속에 단오를 흘려 보내던 이곳 사람들은 보천보전투 승리에 대한 소식에서 김일성장군님만 계시면 조국광복은 기어이 성취되리라는 신념을 더욱 굳건히 하면서 처음으로 단오를 명절답게 즐겁게 쇠었다.

조국광복회 성원들은 이날 단오놀이를 보면서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비범한 예지와 뛰어난 조직적 수완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 단오명절놀이를 통해 그들은 실천적으로 자기들이 일을 어떻게 조직하고 벌여나가야 하겠는가 하는 것을 생동하게 느끼고 깨닫게 되었다.

가을날에 일어난 일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는 늘 민중과 고락을 같이 하신 민중의 참된 딸의 모습으로 우리 겨레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1947년 가을 어느 날 점심 무렵이었다. 시내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거리에 나오셨던 김정숙여사께서는 짐을 가득 이고 지고 힘겹게 걸어가는 노인내외를 목격하게 되셨다. 여사께서는 급히 그들에게로 달려가셨다. 어디로 가는 길손들이기에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시느냐고 물으시는 김정숙여사를 바라보며 노인내외는 아들네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여사께서는 그들의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노인들이 무겁게 짐을 지고 땀을 흘리며 다녀서야 되겠느냐고 하시며 할머니의 짐을 무작정 받아들려고 하셨다.

함께 동행했던 일꾼들이 뒤미처 달려와 김정숙여사를 만류하며 짐을 얼른 받아들었다. 그러자 여사께서는 이번에는 할아버지의 짐을 끝내 받아들고서야 걸음을 옮기시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레 벌어진 일인데다 낯모를 길손들에게 무거운 짐을 맡긴다는 것이 미안스러웠기 때문에 할머니는 계속 짐을 도로 달라고 재촉했다.

노인들의 속마음을 헤아리신 듯 김정숙여사께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처럼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가시는데 우리 젊은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 그냥 가면 되겠느냐≫고 하며 흔연하게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이 많은 분들이 왜 이렇게 무거운 짐을 가지고 다니시느냐≫고 또다시 친근하게 물으셨다.

노인내외는 ≪아들결혼식에 쓸 물품을 준비해 가지고 가는 길≫이라고, ≪광복 전 같으면 밥 잔치도 변변히 차리지 못할 것을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라를 찾아주시고 땅을 주신 덕분에 이렇게 힘겹도록 이고 지고 다니며 잔치준비를 하게 됐다≫고 주석님의 고마운 은덕에 대해 감동에 젖어 이야기했다. 그들의 진정 어린 말을 들으신 김정숙여사께서는 ≪잔치를 잘 차려주어 그들이 앞으로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도록 하라≫고 뜨겁게 말씀하셨다.

어느덧 김정숙여사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돋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노인부부는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이제는 자기들이 가지고 가겠으니 어서 짐을 달라고 거듭 조르는 것이었다. 잠시 후 노인내외가 짐을 받아들었을 때였다. 할머니는 얼른 짐을 헤치고 과일즙을 여러 병 꺼내놓으며 어서 시원하게 좀 마시고 땀을 들이라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김정숙여사께서는 대사에 쓸 물품을 우리가 축내서야 되겠느냐고 하시면서 그것을 다시 짐 속에 넣어주시는 것이었다. 노인부부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이처럼 고마운 분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혀를 차며 ≪보아하니 보통 분들 같지 않은데 어디서 사시는지 집 주소나 대달라≫고 했다. 그들의 청을 들으신 여사께서는 인자하게 웃으시며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도와드리는 것은 응당한 도리인데 뭘 미안해 그러느냐≫고, ≪어서 가서 잔치를 잘 차려 주라≫고 다정하게 이르시는 것이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짐을 목적지까지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걸리신 듯 짐이 무거운데 조심해서 잘 다녀가시라고 거듭 당부하셨다. 노인내외는 멀어져 가는 길손들을 배웅하며 오래도록 움직일 줄 몰랐다.

몸소 그려 주신 설계도안

이북의 그 어느 곳을 찾아가 봐도 조국의 미래, 혁명의 꽃망울들인 어린이들이 자그마한 구김살도 없이 행복하게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양실, 유희실, 식당, 침실, 젖먹이는 방, 목욕탕, 의료실 등 아이들의 지능발달과 건강에 알맞게 꾸려진 탁아소들의 훌륭한 구조와 시설에도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심혈이 뜨겁게 어려 있다.

나라가 광복되면 탁아소, 유치원들을 덩실하게 지어놓고 우리의 후대들을 훌륭히 키우시려는 것은 피 어린 항일무장투쟁의 나날 김정숙여사께서 언제나 간직하고 계신 소중한 염원이었다.

주석님께서 1946년 5월 북조선민주여성동맹 제1차 대표자회에 참가할 여맹 일꾼들을 만나시어 탁아소, 유치원을 많이 내올 데 대한 가르침을 주셨을 때였다.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주석님의 의도를 어떻게 하면 잘 받들 수 있겠는가 깊이 마음 쓰시며 우리 일꾼들을 손잡아 이끌어주셨다.

일꾼들로부터 탁아소를 꾸릴 만한 건물을 찾았다는 보고를 받으신 어느 날 여사께서는 현지를 찾으셨다. 그곳은 당시 중구지구에 자리잡고 있었던 2층 벽돌집이었다. 잘 개조하면 탁아소로 쓸 수 있겠다고 하시며 안으로 들어가신 여사께서는 1층과 2층의 각 방들을 일일이 돌아보면서 자주 수첩에 무엇인가 적으셨다.

얼마 전까지 음악학교 교사로 쓰던 그 집은 내부가 몹시 어수선했다. 함께 돌아본 한 일꾼이 이 집을 탁아소로 꾸리자면 품이 많이 들겠다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사께서는 ≪주석님께서 탁아소, 유치원을 내올 데 대한 과업을 주신 지 많은 시일이 지났는데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우리 힘으로 탁아소를 꾸리기 위한 투쟁을 벌이자≫고 하시며 자신도 힘닿는 대로 도와주겠으니 한번 잘 꾸려보라고 고무해주셨다.

그날 밤 김정숙여사께서는 책상 우에 커다란 종이를 펴놓으시고 건물을 돌아보실 때 무엇인가 써넣곤 하시던 수첩을 펼쳐보시며 자정이 넘도록 여러 가지 색으로 도안을 그리셨다. 그것은 그 2층 건물에 어린이들의 침실과 식당, 젖먹이는 방, 유희실, 의료실, 탈의실, 목욕탕, 취사장, 창고, 사무실과 같은 것을 어떻게 배치하며 각 방에 어떤 설비를 놓아야 하는가 하는 것까지 구체적으로 표시한 탁아소 설계도안이었다.

이틀 후 김정숙여사께서 가지고 오신 탁아소 설계도안을 받아든 일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탁아소를 어떻게 꾸려야 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들은 눈이 번쩍 트였다. 그러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여사께서는 일꾼들에게 방 배치와 꾸밈새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셨다.

탁아소가 꾸려져 어린이들을 받아 보육하기 시작한지 얼마 후 또다시 이곳을 찾으신 여사께서는 여성들의 국제적 명절인 3.8절을 의미해 3.8탁아소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직접 이름도 지어주셨다.

그 후 이런 사실을 보고 받으신 주석님께서는 몸소 3.8탁아소를 방문해 하나하나 돌아보시고 정말 잘 꾸렸다고 만족해하시며 이 탁아소를 본보기로 앞으로 전국에 탁아소, 유치원을 더 많이 내오며 그에 대한 관리운영사업과 후방공급사업을 잘할 데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주셨다.

이북에서 참다운 민중적인 어린이보육교양의 역사는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께서 꾸려주신 3.8탁아소를 본보기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백두산 여장군께서 몸소 그려 주신 탁아소설계도안. 그것은 우리 어린이들을 조국과 혁명의 꽃망울로 아름답게 키우시려는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여사의 소중한 꿈과 염원, 이상의 고귀한 결정체였다.

건국의 자국은 염분진에도

광복 후 주석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부강조국건설에 헌신하신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의 거룩한 자국은 북변의 외진 포구마을이었던 염분진에도 새겨져 있다.

주석님을 모시고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 염분진을 찾으신 것은 1947년 9월이었다. 광복 전까지만 해도 염분진은 사람 못살 고장이었다. 얼마나 살림이 구차한 고장이었던지 그곳으로 가는 변변한 길조차 없었다.

그날 어민들이 준비한 돛배를 타시고 염분진 뻘밭을 찾으신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여사께서는 도래굽이에서 섭조개를 따고 있는 여인들을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셨다.

포구에 부린 물고기를 처리하고 뚫어진 그물을 손질하는 등 마을여인들이 하는 일에 대해 요해하신 여사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 인민들이 행복하게 살 그날을 앞당기시려고 올해부터 우리나라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계획경제를 실시하도록 하셨다≫며 그에 대해 해설해주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투쟁을 힘있게 벌여 올해 인민경제계획을 초과 수행한다면 나라가 그만큼 부강해질 것≫이라고, ≪그러면 어부들도 지금처럼 힘들게 노를 젓지 않고 동력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쉽게 물고기를 잡게 될 것이고 무진장한 바다자원을 마음대로 채취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어부들의 생활도 지금보다 훨씬 나아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지난날에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뼈 빠지게 일을 해도 가난을 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일하면 일하는 것만큼, 고기를 잡으면 잡은 것만큼 살림이 늘어나게 된다≫고, ≪그러면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도 그만큼 앞당겨지게 될 것≫이라고 하신 김정숙여사의 말씀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었다.

여사께서는 수산합작사를 조직할 데 대한 주석님의 말씀 관철로 그들을 힘있게 불러일으키셨다. 당시 마을에는 자기 배와 어구를 가지고 물고기를 개별적으로 잡는 사람들도 있었고 배 있는 사람을 주동으로 여럿이 공동으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배도 그물도 없이 삯 배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일은 농사일과 달라서 혼자 하기 어렵다≫고, ≪더구나 밑천이 없거나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제각기 일해서는 물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없다≫고 일깨워주시면서 며칠 전에 다녀오신 집삼 마을의 실태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여사께서는 거기에서는 배도 없고 그물도 없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힘을 모아 배와 그물을 장만해 가지고 함께 물고기를 잡고 있더라고 하시면서 그들은 바다에 나가 일한 데 따라 잡은 물고기를 나누어 가지는데 개인어민들보다 배당되는 몫이 더 많았다고 하시면서 참으로 뜻 깊은 말씀을 하셨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자원이 풍부한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 생활이 펴지 못하고 있는 영세어민들을 두고 장군님께서 얼마나 걱정하고 계시는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오늘 이곳에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여사께서는 계속해서 ≪배를 가진 사람은 배를 내고 그물을 가진 사람은 그물을 내며 노력 있는 사람은 노력을 내어 모두가 힘을 합쳐 일하고 출자한 사람에게 해당한 값을 치른 다음에는 일한 데 따라 몫을 받는 수산합작사를 조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모든 어민들이 다 고르게 잘살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지난날 착취사회에서 고생을 많이 한 동무들이 군중의 앞장에 서서 장군님께서 제시하신 수산합작사를 조직하는 사업에 앞장 서야합니다≫라고 호소하셨다.

그날 김정숙여사께서는 마을여성들과 함께 섭조개도 까시면서 여맹원들 속에서 조직생활을 강화하며 어민들 속에서 문맹퇴치운동을 더욱 활발히 벌일 데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여사의 가르침을 받은 후 염분진은 이전의 낙후한 모습을 모두 털어 버리고 살기 좋은 어촌으로 완전히 일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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