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26일

통일여명 편집국

 

 

김정숙여사와 민족통일 4

 - ≪김정숙여사와 민족통일≫

통일여명 편집국 6-2-10

 

 

차 례

 

6. 민족의 성모

백두산형의 장군으로 / 민중의 아들로 / 통일의 구성을 키우신 품

영원한 통일의 별 / 분열은 가고 통일은 오다

 

6. 민족의 성모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어느날 전설적 여장군 김정숙여사님에 대해 감회깊이 추억하시면서 한평생 동지들과 인민들을 위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치고 세상을 떠나간 김정숙동지였지만 자녀들을 위해서는 한푼의 돈도 재산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가 소비한 돈은 내가 다달이 받은 생활비였고 그가 사용한 집과 가구들은 다 나라의 것이었습니다, 김정숙동무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김정일동무를 미래의 영도자로 키워 당과 조국 앞에 내세워 준 것입니다, 동무들은 내가 김정일동무를 후계자로 키워냈다고 하지만 사실 그 기초는 김정숙동무가 쌓아놓은 것입니다, 그가 혁명앞에 남긴 가장 큰 공로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사람의 생은 길어도 한생이고 짧아도 한생이다.

김정숙여사님의 생애는 너무도 짧은 한생이었다.

그러나 여사님께서는 주체위업의 불멸의 연대기에 금자탑으로 높이 쌓아올리신 업적은 역사의 준봉위에 거봉으로 우뚝 솟아 찬연히 빛나는 것이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광휘로운 공적은 김정일영도자님을 김일성형의 장군으로 키워 주체위업계승완성의 확고한 초석을 마련해놓으신 것이다.

항일의 총포성이 울부짖는 백두산시절부터 여사님께서는 어리신 자제분께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시는 김일성장군님의 탁월한 경륜과 비범한 풍모를 거울로 삼아 걸음마를 떼고 말을 익히며 새 삶의 환경에 익숙해지시도록 하시었다.

일제놈들이 파괴하고 간 빈터위에 새 민주조선을 일떠세우던 해방후의 간고한 나날에도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모든 곳에 자제분을 세우시고 아버님의 사상을 따르고 아버님의 위인상을 온몸에 익히도록 하는데 혼신을 다하시었다.

해방후 국토분단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마주하신 여사님께서는 자신의 대에 이루지 못하면 아드님의 대에 가서라도 조국통일을 기어이 이루어내야 한다는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좇아 자제분께서 확고한 통일의지와 사명감을 간직하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시었다.

조국통일은 김정숙여사님의 생전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남기고 가신 위업이다.

여사님의 몸은 비록 가시었으나 그분의 높은 뜻은 김정일영도자님에 의해 빛나게 실현되고 있으며 조국통일의 여명은 밝아오고 있다.

오늘 광란하는 역풍을 제압하면서 주체위업이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주체위업의 계승자로, 21세기를 주도할 영수로 부상되고 있는 역사적 전환기에 그분을 김일성형의 장군으로 키우신 김정숙여사님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성모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백두산형의 장군으로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을 백두산형의 장군으로 키우시었다. 자제분께서 백두산형의 장군으로 성장하시는 것은 우리 겨레의 요망이고 기대였다.

자고로 지령이 인걸을 낳는다고 했다. 신령스러운 땅에 위인이 내린다는 것이다. 백두산은 천하의 명산이고 성산이어서 여기서 천하를 평정할 성인이 내릴 것이라는 이야기는 우리 민족 창생의 초기부터 전해져 왔다.

그리고 백두산은 그 지형지세가 3대 위인이 내릴 신령스러운 산으로 일러왔다. 백설을 떠이고 높이 솟은 백두산은 장군봉을 중심으로 남으로 마천령산맥, 동북으로 노야령산맥, 서남으로 장백산맥이 뻗어있으니 그 산줄기가 셋이요, 용왕담이라 불리우는 백두산천지로부터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이 흐르고 있으니 그 물줄기가 셋이다. 그리고 세줄기의 산맥을 타고 내도산, 홍두산, 포태산이 거연히 솟아있으니 백두산을 옹위하는 봉우리가 셋이요, 백두산 입구에 삼지연이 있으니 그것 역시 세개의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백두산을 조종의 산으로 하여 펼쳐진 우리 나라가 삼천리금수강산이요, 그것을 둘러싼 바다 또한 동해, 서해, 남해의 셋이다.

이처럼 신기하게도 ≪3≫이라는 길수와 관련된 산이니 사람들은 일찍부터 백두산이야말로 3대위인이 내릴 성지라고 믿어왔다.

김일성장군님은 우리 민족이 수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전설적 위인이시며 백두산의 제일 명장이시다. 김정숙여사님 역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항일의 여성영웅이시며 백두산의 전설적 여장군이시다. 두 장군님의 자제분으로 탄생하신 김정일영도자님께서도 백두산의 정기와 기상을 체현하신 백두산장군이 되시어 백두산에서 개척된 주체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해 나가실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어마지 않았다.

그리하여 항일유격대원들은 자제분을 ≪백두성≫, ≪백두광명성≫이라고 칭송했다.

이러한 민족의 기대와 역사의 부름에 부응코자 여사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시었다.

일찍부터 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의 가슴에 우리 민족의 운명개척에서 백두산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 의미를 깊이 새겨주시었다.

1936년 가을 어느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고향집을 지켜선 듯 높이 솟은 봉우리에 오르시었다. 그때 백두산해돋이를 부감하시면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선의 여명은 이곳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장쾌하고 아름다운 백두산의 해돋이에 조선민족의 슬기와 용맹, 순결한 마음이 비껴있다고, 저 백두산의 해돋이가 바로 조선의 기상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리고 거대한 산발들과 밀림의 바다를 보시며 백두산은 조종의 산이라고, 조국땅의 거창한 산발들도 백두산에서 시작되며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들도 백두산천지에 그 시원을 두고 있다시며 삼천리 아름다운 조국강산은 백두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백두산에 조선혁명의 뿌리를 튼튼히 박고 혁명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백두산의 주인, 조선혁명의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해나가야 한다는 뜻깊은 말씀을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자제분께 김일성장군님의 이 말씀을 자주 이야기해 주시었다. 백두산밀영의 화톳불가에서도 들려주시었고 조국개선의 선상에서도 이야기해 주시었으며 해방후 저택의 정원에서도 상기시켜 주시었다. 그 나날에 백두산은 하나의 정신적 지주로 자제분의 가슴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여사님께서는 자제분께서 백두산의 기상을 그대로 닮도록 하시었다. 군정훈련을 맹렬히 벌이고 있던 어느날 여사님께서는 전우들과 함께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시는데 자제분께서 커다란 바위위에 오르려고 애쓰고 계시었다. 왜 바위위에 오르시려는지 전우들이 의아해하자 여사님께서는 저 바위가 높으니 아마 거기에 올라가서 저 아래 밀림을 내려다보려고 하는 것 같다고 하시었다.

어리신 자제분을 전우들이 도와드리려고 하자 여사님께서는 제 힘으로 오르려고 생각하는데 끝까지 올라가게 놔두라고, 백두산의 아들이 그쯤한 바위에 오르지 못하겠는가고 하시며 굳이 막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그때 벌써 자제분의 배짱과 용감성에서 불굴의 기상과 무비의 담력의 싹을 발견하시고 모든 사고와 행동을 대담하고 통이 크게 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시었던 것이다.

자제분을 백두산형의 장군으로 키우시려는 여사님의 노고에는 끝이 없으시었다.

자제분께서 자연과 사회의 이치를 깨닫기 시작하실 때부터 여사님께서는 백두산에 깃든 불멸의 항일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었다.

해방후의 어느날, 자제분을 데리고 만경대로 갈 차비를 하시던 여사님께서는 자제분으로부터 내 고향은 어딘가라는 물으심을 받으시게 되었다.

그때 여사님께서는 울울창창한 밀림 속에 자리잡은 백두산밀영, 소백수가의 소박한 귀틀집과 돌도 안된 자제분을 동지들에게 맡기고 적구로 떠나시던 일이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실 적이면 전방초소에까지 마중나온 전우들의 품에서 아드님을 받아안고 두볼을 비비시던 일들을 떠올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네 고향이야 백두산이지 어디겠니. 너의 고향은 조선에서 제일 높은 백두산이란다. 백두산은 천지가 있고 나무도 많고 또 아버님께서 왜놈들을 때려눕힌 곳이란다.≫

자제분에게 ≪유격대행진곡≫에 담겨져 있는 것처럼 쓰러졌다가도 백번 다시 일어나 끝까지 싸워 승리한 혁명정신이 백두산에 깃들어 있다고 하시면서 여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백두산은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조종의 산으로 일러왔지만 아버지장군님께서 역사에 없는 투쟁을 벌이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오늘 혁명의 성산으로 더욱 높아졌다.≫

그러자 자제분께서는 힘차게 말씀하셨다.

≪그래요. 백두산은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이에요.≫

≪그래. 백두산이 제일 높다. 그것은 백두산에 깃든 혁명정신이 세상에서 제일 높고 백두산에 스며있는 혁명업적이 세상에서 제일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백두산을 알아야 오늘의 조선을 알 수 있다.≫

자제분께서는 침중한 눈빛으로 어머님을 우러르셨다.

아득히 높아보이는 백두산이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자신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얽혀져 있음을 새삼스럽게 절감하시는 것이었다.

자제분의 가슴속에는 드디어 설한풍 거센 백두산을 주름잡으시며 일제침략자들을 타승하신 부모님에 대한 크나큰 긍지와 존경심이 뿌리내렸다.

어느날 글씨연습을 하시던 자제분께서는 학습장에 ≪백두산≫이라는 세 글자를 또박또박 정성담아 쓰시었다.

그러시고는 어머님께 백두산은 우리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아버님께서 왜놈군대를 때려부순 곳이라고 하시면서 나도 어서 커서 아버님처럼 조국과 인민을 위해 일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과시 백두산의 아들다운 말씀이었다.

아버님의 위업을 명실공히 이어받으려는 자제분의 열렬한 지향을 읽으신 여사님께서는 ≪그래, 어서 커서 아버님을 받드는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라고 이르시었다.

여사님의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어느날, 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의 글씨연습학습장을 펼치시었는데 거기에는 ≪백두산≫이라는 세 글자가 많이 씌어져 있었다.

거기서 여사님께서는 백두산이 지닌 천혜의 기상과 신비, 순결과 담력을 뜨겁게 감각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일찍부터 자제분의 가슴에 심어주신 백두산의 민족사적 및 혁명적 의미와 위용은 김정일영도자님의 성장을 떠밀어주는 원동력으로 되었던 것이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자제분께서 백두산형의 장군상이 뿌리내린 만경대의 혈통을 꿋꿋이 이어가도록 하시었다.

조국에 개선하시어 첫 만경대고향집 방문 이튿날 여사님께서는 자제분께 이 만경대고향집 어른들은 다 나라와 인민을 위해 원쑤와 용감히 싸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간곡히 말씀하시었다.

≪할아버님께서도 그러하셨고 할아버님의 할아버님께서도 그렇게 싸우셨다. 그분들의 뜻을 이어 아버님께서는 끝내 나라를 해방하셨다. 그러니 이제는 제가 어서 커서 아버님의 뜻을 이어 해방된 우리 나라를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만경대의 혈통을 이어가는거다.≫

다사다망하신 가운데서도 여사님께서는 시간을 내시어 자제분과 함께 만경대는 물론 만경대일가의 성스러운 발자취가 스민 칠골, 봉화리도 찾으시었다.

만경대를 찾아 만경봉에 오르시어서는 자제분의 할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지으신 시 ≪남산의 푸른 소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시었고 만경대일가분들의 혁명활동 사적지인 봉화리가 지척인 맥전나루에 가시어서는 아버님께서 퍽 어리신 나이였지만 할아버님의 뜻을 받드시고 할아버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우셨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시었다.

대대로 외래침략자를 반대하고 조국과 민중을 위해 싸워오신 혁명일가의 근본을 잊지 않도록 하시려는 여사님의 뜻깊은 말씀은 자제분의 가슴에 불멸의 넋으로 새겨졌다.

이러한 나날을 거쳐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과 꼭 같으신 백두산형의 장군으로 성장하시었다.

1989년 11월 어느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백두산을 볼 때면 김정일동지를 생각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김정일동지는 백두산의 아들이고 백두산은 그의 고향이며 담을 키워준 요람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나 성격을 보아도 그렇고 취미와 습관을 보아도 그렇고 그는 신통히도 백두산을 닮았다고 하시면서 백두산의 정기와 기상이 그의 온 정신과 온몸에 차넘치고 있다, 김정일동지야말로 백두산형의 인간이라고 하시었다.

자제분께서 백두산과 더불어 사시는 것은 여사님의 생전의 뜻이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어머님의 뜻대로 백두산에 자주 오르신다.

어느날 백두산에 오르신 영도자님께서는 백두산에 오를 때면 밀림 속을 지나 백두산을 눈앞에 바라보며 걸으니 고향집 대문을 열고 뜰안에 들어서는 것만 같다고 감개무량해 하시었으며 걸음을 다그쳐 백두산 정상에 오르시어서는 연연히 뻗어간 조국의 산줄기들을 굽어보시며 백두산에 오르니 혁명을 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진다고 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 생전에 바라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민중의 아들로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을 백두산과 더불어 사는 백두산형의 장군으로 뿐만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사는 민중의 아들로 키우시었다.

새 나라 건설도 그렇고 조국통일도 그렇고 다 민중을 발동하고 민중과 더불어 해야 할 위업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사님께서는 늘 자제분과 함께 민중 속으로 들어가시었다. 민중적 생활체험을 통해 자제분께서 민중의 창조적 힘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들을 아끼고 존대하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생의 최고가치로 된다는 인식을 가지도록 하시자는 의도에서였다.

1947년 4월 어느날, 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을 앞세우고 평양제사공장에 나가시었다.

해방의 기쁨을 안고 건국열의에 넘쳐 그해 인민경제계획 수행에 분기한 노동자들을 고무격려하시기 위해서였다.

여사님께서 자제분과 함께 조사직장앞에 이르시었을 때였다. 동행한 일꾼들은 증기가 뽀얗게 서린 작업장을 보고 어리신 자제분의 건강을 염려하여 거기에 들어가시지 않도록 만류했다.

자제분의 건강을 염려해 주는 것은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으나 여사님께서는 그에 응할 수 없으시었다. 공기가 나쁘다고 하여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조국의 벅찬 현실 속에서 자제분을 민중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몸에 익히도록 키우시려는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일꾼들에게 사람들이 일하는 곳인데 왜 못들어가겠는가, 노동자들이 얼마나 수고하는가를 보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의 손목을 잡고 끝내 조사직장에 들어가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자제분에게 이 조사공누나들이 인민들의 옷감을 만드는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면서 아버님께서는 그들을 나라의 귀중한 보배로 여기신다고 말씀해 주시었다.

어머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으시며 조사공들의 일솜씨를 바라보시던 자제분께서 문득 걸음을 멈추시었다.

더운 물에 손을 잠그고 일하는 조사공누나들의 험해진 손이 걱정되신 것이었다.

자제분께서는 누나들의 손이 왜 저렇게 터졌는가고 어머님께 물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하루종일 더운 물에 손을 잠그고 일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었다.

≪아버님께서는 노동자들이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시면 제일 가슴아파하신다.

그러니 너도 빨리 커서 공부를 많이 하여 누나들의 힘든 일을 없애주어야 한다. 그러면 아버님께서 무척 기뻐하실게다.≫(≪민족의 어머니 김정숙여사≫, 동방사, 1997년, 252쪽)

어머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 계시던 자제분께서는 김이 피어오르는 물에 두손을 담그어보시었다. 물은 뜨거워 손가락 마디들이 저리어날 정도였다.

그날 저녁에 자제분께서는 부모님들에게 조사공들을 위해 크림과 의약품들을 마련해 주실 것을 말씀드리시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와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시어 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들에게 많은 위문품들을 보내주시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도 취해 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의 근로정신 함양을 위해서도 마음을 많이 쓰시었다.

근로민중이 하는 일이면 무슨 일이나 다 할 줄 알아야 한다.

여사님께서는 자제분께 이런 높은 요구를 제기하시었다.

어리신 자제분께서는 어머님의 요구에 기꺼이 응하시어 어머님과 함께 만경대 증조부댁을 자주 찾아가시어 호미로 김을 매는 일도 하시었고 민중이 떨쳐나선 건설장에 나가 일손을 거들기도 하시었다.

1946년 5월 평양에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착공의 첫 삽을 뜨신 보통강개수공사가 한창이었다.

평양시민들이 보통강일대의 토성랑을 민중의 유원지로 개변하는 일에 떨쳐나섰다.

김정숙여사님께서도 자제분을 앞세우고 매일같이 나가시었다. 자신께서는 치마폭을 질끈 동여매시고 여염집아낙네들과 꼭같이 감탕에 들어서서 돌도 주어내고 삽질도 하시는 한편 자제분께서는 노인들이 고쳐놓은 삽이나 곡괭이를 날라다 주는 일과 같은 알맞춤한 일감을 잡아주시었다.

자제분께서는 땀을 흘리며 극성스럽게 뛰어다니시었다. 건설장에서 제일 나어린 건설자이시었다.

며칠을 두고 자제분의 직심스런 일솜씨를 지켜보던 한 노인이 하도 기특하여 물었다.

≪그래, 너희 집에서 너 혼자 여기에 나오느냐?≫

자제분께서는 어머님을 가리키시며 어머님과 함께 나온다고 대답하시었다.

노인은 자제분께 아버님은 계시는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가고 집안내력을 자꾸 캐물었다.

자제분께서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말자니 노인을 노엽히는 불손한 일 같아 공손히 사실대로 말씀올리시었다.

그러자 노인은 대번에 굳어졌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어리신 자제분께서 어떻게 힘든 공사장에 나와 어른들과 어울려 일할 수 있단 말인가.

노인은 정녕 믿기 어려워 자제분의 손목을 잡고 감탕 속에서 땀흘리며 흙을 퍼올리시는 여사님께 다가갔다.

여사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고 겸허한 자세로 말씀하시었다.

≪할아버님, 장군님의 자제라고 이런 공사판에 못나온다는 법이야 없지 않습니까.

장군님 자제일수록 이런 공사장에 나와서 한가지 일이라도 성심껏 도와야지요.≫(상동, 254쪽)

여사님의 말씀은 노인의 가슴을 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었다.

여사님께서는 이렇게 자제분을 앞세우시고 민중의 참된 삶의 현장을 찾아 끊임없이 걷고 또 걸으시었다.

그 나날에 자제분의 뇌리에는 근로하는 민중의 참모습이 선명하게 각인되고 그분의 가슴에는 근로하는 민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고즈넉이 깃들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자제분께서 언제나 민중과 한치의 간격도 없이 나란히 서있도록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수령님의 자제일수록 민중과 꼭같이 입고 꼭같이 먹어야 한다고 자제분에게 말씀해 주곤 하시었다.

여사님의 말씀은 실행으로 이어졌다. 어느해 여름에 여사님께서는 공기도 잘 통하지 않고 땀도 빨아들이지 않는 흰 낙하산천으로 소매짧은 웃옷과 검은 천으로 바지를 지어 자제분께 입히시었다. 겨울에도 여사님께서는 그때 아이들이 흔히 입던 수수한 보통옷을 자제분께 해입히곤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남이 기운 양말을 신을 때에는 자제분께서도 기운 양말을 신도록 하시었다.

어느날 자제분께서는 어머님께서 기워주신 양말을 신고 경위대에 가신 일이 있었다.

경위대의 젊은 병사들은 장군님의 아드님이신데 기운 양말을 다 신으시다니 하고 놀라워했다.

자제분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신 여사님께서는 ≪그건 아저씨들이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한거란다. 기운 양말을 신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이겠니.≫라고 하시며 자신께서는 어렸을 때 추운 겨울날 양말은 고사하고 발을 감쌀 한조각의 천도 없었고 산에서 싸울 때는 신발마저 다 꿰져서 노끈을 감고 산에 오른적도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었다.

≪조국이 해방되었지만 사람들은 아직 잘살지 못하고 있단다. 새 양말을 신은 아이들보다 기운 양말을 신은 아이들이 더 많은 것을 너도 보았지?

장군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남이 조밥을 먹을 때는 우리도 조밥을 먹고 남이 기운 양말을 신을 때에는 우리도 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그러시면서 남들이 기운 옷을 입고 기운 양말을 신을 때 새옷을 입고 새 양말을 신으면 그게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다음날 경위대원들을 찾으시고 이렇게 조용히 타이르시었다.

≪동무들이 어제 공연한 말을 했나봅니다. 장군님의 아들이라고 왜 기운 양말을 못신겠습니까. 아직 우리 나라의 형편이 어렵다보니 모든 아이들에게 새 양말을 신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의 아들이라고 어찌 새 양말만 신기겠습니까. 앞으로는 그런 말을 삼가해야 하겠습니다.≫

여사님께서 이렇게 애써 키워주신 소박하고 소탈한 성품은 자제분께서 나이가 들어가시어도 여전하였다.

유치원과 인민학교에 다니실 때에도 자제분께서는 언제나 남과 같이 면양말에 고무신이나 운동화를 신고 다니시었으며 옷도 남들이 입는 옷을 입으시고 동무들과 꼭같이 수수한 책보를 들고 다니시었다.

고급중학교와 대학에 다니실 때에도 그분께서는 수수한 학생복을 입으시고 동무들과 어깨나란히 한치의 간격도 없이 생활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식생활도 검소하게 해나가시었다.

1947년 가을 함경북도 경성군에 가셨을 때에도 여사님께서는 자제분께 좁쌀을 섞은 잡곡밥을 지어주시었다.

한 여성일꾼이 이 사실을 알고 몹시 안타까워하자 어리신 자제분께서는 ≪우리 아버님은 조밥을 먹어야 좋은 사람이라고 하셨어요.≫라고 챙챙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산에서 싸우실 때 늘 대원들과 같이 식사하시면서 대원들이 죽을 들면 죽을 드시었고 강냉이를 먹으면 강냉이를 잡수시었습니다.

지금도 장군님께서는 전체 인민이 아직 흰쌀밥을 먹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라고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하시며 잡곡밥을 지어드려야 마음놓고 드십니다.≫

그 여성일꾼이 그럼 아드님에게만이라도 흰쌀밥을 지어드릴 수 있지 않는가고 하자 여사님께서는 웃으시며 사람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꼭같이 먹고 지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의 노고는 헛되지 않았다. 자제분께서는 일찍부터 특정을 모르고 오로지 소박과 검박을 미덕으로 아는 민중 속의 평민으로, 민중의 아들로 자라나시었다.

오늘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수수한 점퍼를 평상복으로 삼으시고 쪽잠으로 피로를 푸시며 줴기밥(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시며 현지지도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는 것은 어리실 때부터 몸에 익혀오신 평민적 생활의 연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자제분의 용명과 지모는 뛰어나고 기개는 천지를 덮고도 남을만한 것이었으니 그분은 정녕 평민 속의 위대한 평민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지니고 계시는 민중적 품성을 자제분께서 명실공히 이어받으시도록 하시었다.

어느날 저녁 자제분께서는 다림질을 하고 계시는 어머님께 여느 사람들은 보초병 앞을 지날 때 거저 지나가는데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는 왜 인사를 하는가고 물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이 물음에 소홀히 대하지 않으시고 예절과 도덕에 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보초병아저씨들은 아버님의 안녕을 지켜드리기 위하여 언제나 수고하시니 인사를 해야지.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예절이란다.≫

여사님께서는 예절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반드시 자각적으로 지켜야 하는 도덕규범인데 예절을 잘 지키는가 지키지 못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존엄과 인격이 평가된다고 하시면서 예절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예절을 지키자면 인사성과 문화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인사성에 대해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알기 쉽게 말씀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때문에 인사를 잘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인사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허리 굽혀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처신을 잘하는 것도 인사이고 다른 사람과 기쁨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도 인사라고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자고로 예절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권세가 높고 재물이 많아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윗사람을 존경하고 동무들과 어린 동생들을 사랑하며 모든 사람들을 예절있게 대해야 민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었다.

어머님의 가르치심대로 자제분께서는 어리실 때부터 예절을 아주 잘 지키시었다.

만경대에 계시는 이보익증조할머님께서 댁에 와 얼마간 계실 때였다. 자제분께서는 아침이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깨끗이 몸가짐을 하고 증조할머님방에 가시어 ≪할머님, 편히 주무시었습니까?≫ 하고 아침인사를 드리시었고 저녁에는 또 증조할머님께서 밤중에라고 물을 드실 수 있게 물그릇을 가져다 드리시고 ≪할머님, 안녕히 주무십시오.≫라고 인사를 드린 후에야 잠자리에 드시었다.

이보익증조할머님께서는 너무도 기특하시어 ≪어쩌면 우리 어린 장군이 이렇게 예절바를까.≫라고 하시며 감동을 금치 못해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자제분께서 민중을 존중하고 민중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고결한 품성도 지니게 하시었다.

여사님께서 자제분을 데리고 경성군에 가계실 때였다.

여사님을 만나뵙고 가르치심을 받으러 왔던 그곳 여성들은 거듭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련해 가지고 온 이부자리를 두고서야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을 바래워주고 돌아오신 여사님께서는 가정들에서 이불을 한번 손질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렇게 새 이불을 가지고 온 성의가 얼마나 큰가고 하시며 이부자리를 깨끗이 건사했다가 돌아갈 때 그대로 돌려주자고 말씀하시었다.

일꾼들이 자제분께만은 이불을 드리면 어떤가고 말씀드리자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인민들의 이익에 저촉되는 일을 철저히 경계하셨는데 우리가 인민들의 성의라고 하여 그들이 아껴쓰는 이불을 덮고 자서야 되겠는가고 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자제분께서도 댁에서 가지고온 모포만 사용하게 하시었다.

자제분께서는 자신은 모포가 더 좋다고 하시며 아버님처럼 인민의 이익에 조금이라고 저촉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의 어깨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며 정말 용타, 우리는 언제나 아버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간곡히 이르시었다.

자제분께서는 어머님의 말씀대로 아버님의 민중적 성품을 거울로 삼아 언제 한번 자신을 남다르게 생각하신적이 없었다.

자제분께서는 민중의 소중한 모든 것을 온몸에 익히시고 민중과 동고동락하시었다.

통일의 구성을 키우신 품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을 민중의 아들로 뿐만 아니라 민족의 아들로 키우시기 위해서도 품을 많이 들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외세의 군화에 짓밟히는 이남민중을 언제나 잊지 않고 사는 뜨거운 동포애의 정이 자제분의 가슴속에서 일찍부터 싹터 자라나도록 하시었다.

민족의 아들은 민족을 알고 민족을 위하는 마음의 체현자이어야 한다. 우리 민족은 분열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한쪽은 주인으로 위세를 떨치고 다른 쪽은 노예로 짓밟히고 있다. 행복에 웃는 한쪽만 알고 불행에 우는 다른 쪽을 잊는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민족의 아들일 수 없다.

여사님께서는 이런 뜻으로 자제분을 늘 교양하시었다.

장소와 시간이 따로 없었다. 여사님의 세심한 관심 속에 평범하게 흘러가는 생활이 그대로 교재였고 강단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자제분께서 한가지 옷을 입고 한켤레의 신발을 신어도 남녘의 헐벗은 어린이들과 동포들을 생각하게 하시었다.

언젠가 한 일꾼이 저택을 찾아간 일이 있는데 그때 자제분께서 깨끗은 하나 기운 옷을 입고 계셨다. 신으신 양말도 기운 것이었다.

여사님의 소박하고 소탈하신 성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까닭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여사님께 귀하신 자제분께서 아무렴 기운 옷을 입으시고 기운 양말을 신고 다니시게 해서야 되겠는가고 정중히 말씀올렸다.

이젠 당도 있고 주권도 있고 민중생활도 높아지고 있는데 무엇이 없어서 시련에 찬 변혁의 길을 걸어오면서 고생스럽게 키워오신 자제분께 옷과 신발 하나 변변히 마련해 드릴 수 없겠는가 하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한 말이었다.

여사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마음을 모르시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제분께 기운 옷을 입히고 기운 양말을 신기는 자신의 진심을 일꾼도 아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여사님께서는 나직한 음성으로 자식들을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싶은 마음이야 어느 부모나 다 같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 그렇게 할 때인가, 저 남녘땅에서는 지금 어린이들이 몸에 의복 하나 걸치지 못하고 맨 몸으로 다니는데 어찌 우리 아이들만 새옷에 새 신발을 신고 다니겠는가, 그러니 비록 나라가 해방되었어도 우리는 하나라도 더 많이 절약하여 하루빨리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남조선동포들을 구원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의 말씀 마디마디가 진정의 호소로 일꾼의 폐부에 스며들었다.

여사님께서는 이젠 내 마음을 알만한가고 물으시었다. 일꾼은 말없이 머리만 끄덕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알았으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부드럽게 타이르시었다.

이렇듯 소박하고 검박한 생활의 나날에 자제분의 가슴속에는 외세에 억눌리고 짓밟히는 남녘겨레들을 잊지 않는 동포애가 깊이 뿌리내렸다.

여사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통일을 방해하는 원쑤가 누구인가를 자제분께서 똑바로 알도록 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었다.

민족의 원쑤를 모르는 민족의 아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견지에서 여사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우리 조국의 통일을 방해하는 외세가 바로 미국놈들이라는 것을 늘 일깨워 주시었다.

한번은 여사님께서 자제분의 글씨공부를 지도해 주시면서 ≪백두산≫, ≪조선해방≫이라는 글씨를 써보라고 하시었다.

자제분께서는 그 글자들을 한자한자 정성담아 쓰시었다.

그러시고는 백두산은 우리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이고 아버님께서 왜놈군대를 때려부순 곳이라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도 어서 커서 아버님처럼 조국과 인민을 위해 일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백두의 혈통을 용용히 이어가시려는 불같은 결의가 담겨진 의미심장한 말씀이었다.

여사님께서는 못내 대견해하시며 그래, 어서 커서 아버님을 받드는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아버님께서는 악독한 왜놈군대를 때려눕히시고 우리 나라를 해방하셨다, 일본놈들은 쫓겨났지만 지금은 남조선에 미국놈들이 기어들어 조선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있다, 그러니 미국놈들도 우리의 원쑤란다, 너도 크거들랑 아버님의 뜻을 받들고 미국놈들을 때려부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의 말씀은 자제분의 가슴속에서 반미구국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게 했다.

일찍부터 자제분께서 얼마나 불같은 반미감정을 지니고 계셨는가 하는 것은 그분께서 어려서 군사놀이를 하셔도 반미투쟁의 내용을 담은 군사놀이를 하신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1949년 7월 어느날, 자제분께서 다니시던 유치원에서 여름방학식이 있었다.

여사님께서 학부형들과 함께 여기에 참가하시었다. 방학식은 유치원 강당에서 진행되었다.

모임이 끝나자 자제분께서 출연하시는 뜻깊은 연예공연이 시작되었다.

자제분께서 출연하시는 군사놀이를 형상한 군무를 비롯한 다채로운 종목들이 무대에 올랐다.

자제분께서 출연하시는 군사놀이는 어린이들이 인민군대처럼 군모를 쓰고 허리에 혁대를 띠고 총을 들고 나와 미제와 이승만역도를 쳐부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러 학부형들과 함께 자제분께서 출연하시는 군사놀이를 무척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다가 여사님께서는 곁에 앉은 홍명희 선생의 부인을 보시며 우리 정일이는 집에서도 군사놀이 할 때마다 저렇게 미제와 이승만역도를 친답니다, 나는 그것을 그저 군사놀이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남조선에 미제와 이승만역도를 그대로 둘 수야 없지요라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부인은 자제분께서 군사놀이에 담은 반미구국의 뜻이 바로 여사님께서 간직하신 반미애국의 뜻에서 이어진 것임을 절감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일찍부터 자제분께서 조국통일에 대한 사명감을 가슴깊이 간직하도록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통일이냐, 분열이냐 하는 것은 민족의 사활이 걸린 운명문제였다.

그러므로 통일을 떠난 애국애족이란 있을 수 없었고 애국애족을 떠난 민족의 아들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사님께서는 유수처럼 흘러가는 순간순간이 천금같이 귀중하신 가운데서도 자제분의 가슴에 조국통일의 사명감과 의지를 심어주시는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었다.

1947년 9월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자제분과 함께 금강산에 가시었을 때였다.

어느날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과 함께 자제분의 손을 잡으시고 입석 옆 높은 바위에 오르시어 아름다운 해금강의 경치를 부감하시었다.

맑게 개인 날이었다. 내리쪼이는 햇빛을 받아 물결은 금빛 은빛으로 넘실거리었다. 바다밑에서 일만이천봉우리가 솟아오른 것 같은 기암괴석들은 천태만상이고 담담히 풍기는 가을향기는 바위들을 감돌아쳤다.

볼수록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이 해금강인 것이다.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자제분과 함께 해금강의 절승경개를 부감하시던 여사님께서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었다.

행복한 순간일수록 생각이 깊어진다고 한다.

여사님의 얼굴에는 알릴듯 말듯한 그늘이 비껴있었다.

이윽고 여사님께서는 어제와 오늘에 걸쳐 금강산과 해금강을 돌아보니 조국을 광복한 다음 장군님을 모시고 삼천리금수강산에서 마음껏 행복을 누리자고 하면서 일제와 맞서 용감히 싸우다가 희생된 동지들의 모습이 가슴아프게 안겨온다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남녘하늘가를 바라보시었다.

거기서 남녘땅은 지척이었다. 분단의 장벽때문에 남조선민중들과 함께 금강산을 보지 못하는 것이 몹시 가슴아프신듯 여사님께서는 한동안 묵묵히 서계시었다.

잠시후 여사님께서는 언제면 38도선 이남에 기어든 미제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남조선인민들에게 이 아름다운 금강산을 구경시킬 수 있겠는가고 말씀하시었다.

동포애의 정이 온정의 샘으로 흘러넘치는 말씀이었다.

어머님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계시던 자제분께서는 양손으로 어머님의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드리는 것이었다.

≪어머님, 제가 빨리 커서 미국놈들을 때려부수고 조국을 통일하겠습니다.≫(≪통일을 위해 걸으신 빛나는 자욱≫, 통일신보사, 1982년, 30쪽)

자제분의 챙챙한 목소리는 햇빛 넘치는 해금강의 창파위로 멀리 메아리쳐 갔다. 남조선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감으로 가슴깊이 새기시는 자제분이시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자제분의 담찬 결심이 너무도 대견하신듯 아드님의 어깨위에 손을 얹으시며 우리 정일이가 장하다고 치하하시었다.

여사님께서도 자제분의 손을 꼭 쥐어주시었다. 어머님의 말없는 체온에서 자제분께서는 자신의 통일의지에 대한 어머님의 크나큰 기대를 뜨겁게 감각하시었으리라.

우리 민족의 한결같은 추앙 속에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높이 떠오르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 민족의 밝은 앞날을 위해 심혼을 바쳐 조국통일의 구성을 안아키우신 것은 만대를 두고 민족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영원한 통일의 별

김정숙여사님께서 항일혈전의 길에서 그려보시던 푸른 꿈은 광복된 조국땅에 눈부신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조국광복직후에 제시하신 건당, 건국, 건군 노선이 빛나게 실현되어 우리 민족은 진정한 자기의 당, 자기의 정권, 자기의 군대를 가진 존엄있고 힘있는 민족으로 되었다.

김일성장군님을 구심으로 온 겨레가 굳게 뭉쳐 장군님께서 제시하신 자주적 조국통일노선 관철에 힘차게 분기하여 통일조국의 광휘로운 미래를 열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 민족이 그 무엇으로써도 보상할 길 없는 크나큰 상실을 당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항일의 불비 속을 헤쳐오신 항일의 전설적 여장군 김정숙여사님께서 삶의 푸른 언덕을 앞에 두고 그처럼 바라시던 조국통일의 날도 보지 못하신채 애석하게 서거하실줄이야 누가 상상하였으랴.

그날은 새 사회 건설의 노랫소리 높이 울리던 1949년 9월 22일이었다.

여사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신 모습은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깨끗한 충성심을 최상의 높이에서 보여주신 친위전사의 거룩한 모습이었다.

여사님의 서거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서거 전날인 9월 21일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새 조국 건설에 떨쳐나선 민중을 찾아 토산군에로의 현지지도의 길에 오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여느 때처럼 문밖에까지 나가시어 장군님을 바래드리시었다. 걸음도 여전하시었고 인사말씀도 여전하시었다.

그러나 그때 여사님의 병환은 매우 무거운 상태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사님께서는 그런 내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으시었다. 먼길을 떠나시는 장군님께 근심을 끼치지 않으시기 위해서였으리라.

여사님께서는 자제분과 함께 정문가에서 밝은 기색으로 웃으며 장군님을 바래우시었다.

이때도 오직 장군님의 먼길에 안녕이 있기만을 기워하신 여사님이시었다.

여사님께서도 이것이 장군님에 대한 마지막 바래움으로 될 줄은 아시지 못했다.

승용차가 멀리로 사라지자 시계를 보신 여사님께서는 그때껏 옆에 서계시는 자제분에게 책가방을 메워주시었다.

자제분께서는 선뜻 걸음을 떼지 못하고 주춤거리시었다. 갑자기 무거워진 어머님의 병세를 그분께서는 감각하시었던 것이다.

자제분께서는 절절한 눈길로 어머님을 바라보시며 오늘만은 유치원에 가지 않고 어머님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올리시었다.

여사님께서는 한동안 사랑하는 아드님을 바라보시다가 조용히 말씀하시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네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어머니의 병은 네가 공부를 잘하면 저절로 나을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생각말고 어서 가거라.≫

자제분께서는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걸음을 옮기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아드님까지 그윽한 미소로 바래주고 나서야 천천히 방으로 들어오시었다.

이제까지 참고 참으셨던 아픔이 일시에 엄습해 왔으나 여사님께서는 모진 아픔을 이겨내시며 일감을 잡으시었다.

그것은 장군님께 드리려고 짬시간마다 손수 떠오시던 털내의를 마저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참기 어려운 아픔 속에서도 장군님께서 입으실 털내의를 마저 뜨시었으니 그 모습은 정녕 충성을 낙으로 알고 행복으로 여기시는 충신의 사표의 모습이었다.

여사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신 모습은 또한 주체위업의 미래를 위해 자신께 지워져 있는 역사적 사명감에 무한히 충실한 민족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토산으로 향하시는 장군님과 유치원에 가는 자제분을 바래주신 후 시간이 퍽으나 흘러 털내의를 다 마무리하시었을 때 아픔은 더욱 심해져 여사님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하신 여사님께서는 모진 아픔 속에서도 겨레의 밝은 미래를 위해 자신께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몰려드는 아픔을 가까스로 누르며 옷장문을 열고 가장 소중히 간직해오던 장군님의 군복을 꺼내시었다.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쳐가시던 나날 숙영지의 등잔불 아래에서 며칠밤을 새워가며 손수 지어 장군님께 드리셨던 군복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사연깊은 그 군복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시었다.

삼도만유격구에서 장군님을 처음으로 뵙던 그날로부터 장군님을 모시고 걸어온 멀고먼 길을 회억하시었으리라. 그 길은 내리는 사랑의 길이었고 오르는 충정의 길이었다.

모름지기 여사님께서는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장군님의 옷가지들을 빨아 품에 넣어 자신의 체온으로 말리우시던 일과 장군님의 믿음 속에 때로는 생명까지도 내대야 했던 어려운 적후공작임무를 수행하고 사령부로 귀환하시던 일을 추억하시었으리라.

안도현 대사하치기에서 사령부로 향한 적들의 총구앞에 자신의 한몸을 서슴없이 내대시던 일과 청봉밀영에서 추악한 배신자와 사상논쟁으로 장군님의 사상을 결사옹위하시던 일도 돌이켜보시었으리라.

여사님께서는 유치원에서 돌아오신 자제분을 가까이 불러앉히시고 ≪이 옷은 아버님께서 조국을 해방하는 최후공격전에로 떠나실 때 입으셨던 군복이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의 무릎위에 군복을 올려놓으시었다.

자제분께서는 군복을 가슴에 꼭 안으시었다. 방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사님께서는 아드님의 손을 꼭 잡고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아버님은 나라를 찾아주시고 우리 인민들이 다 잘살 수 있게 보살펴 주시는 위대한 분이시다.

너희들은 아버지장군님을 잘 모셔야 한다.

아버님께서 건강하셔야 우리 나라가 튼튼해지고 인민들이 더 잘살 수 있게 된다.≫

어머님의 간절한 기대가 무겁게 실린 말씀이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자제분의 안광은 비장한 결의로 샛별처럼 빛났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여사님의 병세는 더욱더 위독해졌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병원으로 가셔야 한다는 권고를 마다하시었다. 장군님께서 귀가하시기 전에는 자리를 뜰 생각이 아니시었다.

부관은 여사님의 위급한 병세를 장거리전화로 장군님께 알려드리려고 했다.

그러나 여사님께서는 전화를 걸지 말라고, 장군님 사업에 지장을 드려서는 안된다고 굳이 만류하시었다.

부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움에 입술만 깨물었다.

여사님께서는 흐려지는 의식을 가까스로 다잡으시며 가쁜 숨을 쉬시었다.

부관의 두눈에는 눈물이 고여올랐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여사님께서는 감고 계시던 눈을 힘겹게 뜨시었다.

그러시고는 더이상 만류할 수 없으시었던지 사정하듯 말씀하시었다.

≪그럼 정 전화를 걸겠으면 장군님께서 언제 돌아오실 수 있는가 그것만 알아보아 주세요. 내가 앓는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고……≫

여사님의 의식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여사님께서는 자제분을 침상곁으로 부르시었다.

눈물을 흘리시는 자제분의 두손을 꼭 잡고 여사님께서는 아버님을 잘 받들어 모시며 아버님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완성해 나갈 데 대해 간곡하게 말씀하시었다.

여사님께서 자제분에게 하신 마지막 유언은 바로 이것이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그때 돌아오는 길에 계시었다.

장군님께서 타신 차가 전속으로 달려 여사님께서 서거하시기 세시간 전에 저택에 당도했을 때에는 여사님께서 이미 혼수상태에 계시었다.

골목길에서 운전사는 저택 정문을 애타게 지켜보며 연신 경적소리를 울렸다. 그것은 여사님께서만이 알아들으시는 신호경적이었다.

어느날 운전사를 따로 만나신 여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저는 간혹 장군님께서 돌아오시는 것도 모르고 방에 있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정말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장군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방법이 없을까요?≫

이날 여사님과 운전사 사이에는 신호경적이 약속되었다.

그때로부터 여사님께서는 어김없이 정문으로 달려나와 장군님을 정중히 마중하곤 하시었다.

그러나 이날은 아무리 신호경적을 울려도 정문앞에 여사님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사님께서는 이미 경적소리만이 아니라 그처럼 애타게 기다리시던 장군님께서 옆에 서계시는 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 계시었다.

≪정숙동무! 이게 웬 일이오?≫

장군님의 음성은 떨리시었다. 너무도 낮고 갈리시어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도 미처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러나 여사님께서는 깊은 혼수상태 속에서도 장군님의 음성을 가늠해 들으시고 눈을 뜨시었다.

≪오셨군요.≫

여사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애쓰시었으나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여사님께서는 생전 처음으로 장군님을 누우신 채로 맞이하고 다시 의식을 잃으시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즉시 여사님을 병원에 입원시키도록 하시었다. 의식을 잃으신 채 여사님께서는 병원으로 실려가시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여사님께서 수술을 받고 입원실 침상에 누우신 지 얼마후 장군님께서 방에 들어오시었다.

한 여성일꾼이 여사님의 몸을 가볍게 흔들며 장군님께서 오셨다고 말씀드리었다.

여사님께서 잠드신듯 감고 계시던 눈을 뜨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여사님의 한손을 잡고 맥박을 가늠해 보시었다.

장군님을 우러르시는 여사님의 눈가에는 이슬처럼 맑은 것이 고여올랐다.

장군님을 처음으로 뵈옵던 삼도만의 능지영밀림 속을 그려보시는지, 아니면 봄빛짙은 만강의 냇가에서 장군님으로부터 ≪사향가≫를 배우시던 잊을 수 없는 그날을 그려보시는지 눈가에 깊은 추억의 빛이 비껴흘렀다.

임종의 시각은 분초를 다투며 다가오고 있었으나 여사님께서는 밝은 미소를 지으시었다.

≪장군님! 밤이 퍽 깊었습니다. 저 때문에 너무 근심마시고 어서 돌아가 보시던 일을 마저 보십시오. 치료를 받으니 정신이 들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치료를 좀더 받고 곧 집에 돌아가겠습니다.≫

너무도 밝은 미소였고 너무도 평온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미소, 그 말씀이 여사님께서 이 세상에 남기시는 마지막 미소, 마지막 말씀이 될 줄을 어이 알았으랴.

여사님께서 다시 잠이 드시는 것을 보신 장군님께서는 입원치료를 받고 있던 항일투사 강건의 건강을 알아보고자 옆방으로 가시었다.

장군님께서 그와 마주앉아 문병의 말씀도 채 못하시었는데 한 일꾼이 문을 열었다.

≪장군님! 여사께서……≫

일꾼은 그만 억이 막혀 오열을 터뜨렸다.

≪그게 웬 말이오?!≫

강건은 장군님앞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버럭 소리쳤다.

장군님께서는 급히 여사님께서 계시는 방으로 돌아오시었다.

방안은 벌써 가슴을 저미는 흐느낌으로 가득차 있었다.

간호원들이 여사님의 품에 얼굴을 묻고 몸부림쳤다.

≪어머니,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 왜 눈을 뜨지 못하십니까. 장군님께서 오셨단 말입니다. 어머니!≫

아무리 애타게 부르고 불러도 여사님께서는 다시 눈을 뜨지 못하시었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던 여사님의 결곡한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아직 따스한 여사님의 손을 움켜쥐시었다.

≪이제 방금 웃던 사람이 가다니…… 그 불같던 사람이 가다니…… 이렇게 빨리……≫

장군님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비통하게 울렸다.

≪나와 영원히 함께 있자고 하였고 원쑤를 앞에 두고서는 죽을 수 없다던 김정숙동무가 너무도 일찍이 우리곁을 떠나갔습니다. 인민들에게 행복을 주고 아이들에게 웃음만을 주자고 그리도 열렬히 말하던 동무가 큰일을 앞에 두고 이렇게 눈을 감으니 정말 애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너무도 비통하여 더 뒷말씀을 잇지 못하시었다.

≪꿈 같구만. 꿈 같애……≫

장군님께서는 몇번이고 이렇게 되뇌이시었다.

그분께 일꾼들이 뒷일은 자기들에게 맡기고 댁으로 돌아가실 것을 말씀드렸다.

≪정숙동무를 두고 어찌 내 혼자 가겠소.≫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여사님의 얼굴을 하염없이 보시었다. 쌓이고 쌓인 피로를 푸시려고 잠깐 잠에 드신듯 조용히 그 이름 부르면 금시라도 깨어나실 듯 생전의 모습 그대로이시었다.

그러나 여사님의 서거는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 없고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노동신문≫을 비롯한 신문, 방송들이 여사님의 서거에 대한 부고를 보도했다.

온 나라가 눈물의 바다로 화했다. 온 겨레가 오열하고 전민중이 통곡했다.

평양은 거족적 비애의 축도로 되었다.

여사님의 영구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회의실에 안치되었다. 조객들이 당중앙위원회 회의실로 물결쳐 쇄도했다.

여기에 나오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향기 그윽한 생화 속에 잠든듯 누워 계시는 여사님을 오래 굽어보시다가 눈물어린 목소리로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김정숙동무는 조국의 광복과 우리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운 열렬한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이름난 명사수였고 능숙한 지하공작원이었으며 모진 시련과 난관 앞에서도 굴할줄 모르는 강의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 동생을 다 잃고 친척들과도 생이별하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남달리 조국을 사랑하였고 동지들을 사랑하였으며 혁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왔습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동지를 위한 것이었지 자기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무도 크신 비통함으로 말씀은 한동안이 지나서야 다시 이어졌다.

≪그는 나라가 해방은 되었으나 남북이 통일되지 못하고 정세가 복잡하니 어찌 한시인들 제자리를 떠날 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일가친척을 찾는 것도 미루어온 혁명동지입니다. ……

나는 그가 단 하루라도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게 살았다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일생동안 고생만 시키다가 먼저 보낸 것이 제일 가슴아픕니다.≫

장군님의 말씀은 여사님의 거룩한 한생에 대한 총화였고 여사님께서 이루어놓으신 위대한 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였다.

장군님의 절절한 말씀은 조객들의 애통함을 더 크게 했다.

9월 24일 오후 여사님의 영구를 모신 삼두마차는 당중앙위원회 회의실 앞마당을 떠났다.

아직 이루어내지 못한 위업을 앞에 두시고, 먼 길을 가셔야 할 장군님을 더 이상 보필하지 못하시고, 아직은 잠결에도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그리워할 너무도 어리신 자제분들을 두시고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시는 여사님의 무거운 마음을 실은 듯 마차는 서서히 움직였다.

이제 가시면 영영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는 길이었다.

수십만 군중의 눈물에 젖은 연도를 지나 여사님의 영구는 모란봉에 당도했다. 추도회가 엄숙히 거행되었다.

여사님의 빛나는 약력소개에 이어 그분의 서거를 애도하는 각계층 대표들의 추도사가 있었다.

비장한 조포소리가 하늘땅을 울리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렇게 가셨다. 당년 32세였다. 너무도 일찍이 가셨다.

그러나 여사님께서는 그 짧은 생애에 동서고금의 어느 혁명가도 기록해본 적이 없는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 불멸의 업적을 이루어놓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총대로 주체위업의 수뇌부를 결사옹위하시고 조국해방과 민주조국건설위업 수행에서 큰 업적을 쌓으시었다.

여사님께서 조국통일의 길에서 쌓아올리신 공적도 그에 못지 않게 크고 값높은 것으로 섬광처럼 사해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의 자주적 조국통일노선을 높이 받드시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에로 온 겨레를 힘있게 불러일으키심으로써 분열노선에 대한 통일노선의 필연적 승리의 대로를 개척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민족단합의 기치를 높이 드시고 김일성장군님을 구심으로 하여 남북의 온 겨레를 굳게 묶어세우심으로써 지난날 조국광복위업이 필승의 위업이었던 것처럼 조국통일위업이 그 개척기로부터 필승의 위업으로 되게 하시었다.

여사님께서 우리 겨레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가신 통일업적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고의 업적은 김정일영도자님을 미래의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안아올리신 것이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 민족은 김정일영도자님을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높이 모시고 통일경륜을 받들어도 영도자님께서 밝히신 통일경륜을 받들고 하나의 구심에 뭉치어도 그분을 구심으로 뭉치고 있으며 영도의 손길을 따라도 그분의 영도의 손길을 따르고 있다.

여사님께서 이루어놓으신 통일업적은 그분께서 쌓아올리신 모든 공적과 더불어 나이를 초월하는 불멸의 업적이다.

김정숙여사님은 그것으로 하여 우리 민족통일의 앞길을 휘황히 밝혀주는 영원한 통일의 별이시다.

분열은 가고 통일은 오다

사랑하는 어머님을 여의신 후 어리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두 어깨가 매우 무거워지는 것을 절감하시었다.

9월 22일 밤 병원의 침상에서 김정숙여사님의 마지막 모습을 끝없는 비애 속에 보시고 저택으로 돌아오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뜻밖에도 책상위에서 눈에 익은 여사님의 필적을 보시었다.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신문에 실으려고 민주청년사에서 가져온 원고입니다.

장군님께서 너무 바빠하시기에 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꼭 보아주시고 가르치심을 주시기 바랍니다.

1949년 9월 21일

김정숙≫(≪통일을 위해 걸으신 빛나는 자욱≫, 통일신보사, 1982년, 325쪽)

여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바로 전날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필적이었다.

여사님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시는 듯 장군님께서는 글발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시었다.

이윽고 장군님께서는 여사님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가신 신문원고의 글줄을 더듬어 나가시었다.

이때 한 일꾼이 장군님께 조용히 다가서며 말씀드렸다.

≪장군님, 잠시라도 일손을 놓아주십시오. 지금 온 나라가 크나큰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장군님께서 이러시면……≫

눈물에 젖어 목소리도 떨리어 일꾼은 말끝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일손을 놓을 차비가 아니시었다.

일꾼은 아무리 중대한 일이라도 훗일로 미루어 주실 것을 다시금 간절히 말씀드리었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절절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었다.

≪아니오. 보아야 하오. 꼭 보아야 하오. 정숙동무가 후대들을 위하여 부탁하고 간 글이오…≫(상동, 326쪽)

여사님의 몫까지 두몫, 세몫 일하시어 여사님께서 받들어오신 주체위업을 기어이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뜻의 말씀이었다.

장군님께서는 원고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일손을 계속 놀려나가시었다.

그 숭고한 모습을 우러러보시며 자제분께서는 어서 커서 어머님을 대신하여 아버님의 중하를 덜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시었다.

그러나 자제분의 두어깨가 무거워지신 것은 비단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머님을 대신하여 자신께서 하셔야 할 일은 많고도 많았다.

아버님의 건강과 안녕을 지켜드리는 일도 대신해야만 하셨고 아버님의 현지지도를 수행하는 일도 대신해야만 하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동생을 보살피고 키워주는 일까지도 맡아안아야만 하셨다.

어머님의 장례식이 있은 날 밤이었다. 어리신 김정일영도자님의 여동생은 정적이 깃든 그날 밤에 다시는 보이지 않는 어머님의 얼굴이 보고 싶어 엄마가 어디 갔느냐고, 산에 가서 엄마를 빨리 데려오라고 소리내어 울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눈물겨운 음성으로 동생을 달래시며 네가 자꾸 울면 산에 가신 엄마도 눈을 감지 못하시고 큰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도 좋겠느냐고 타이르시었다.

그러시고는 아버님의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주시며 울지 마시라고, 엄마를 대신해서 꼭 조국을 통일시키자고 말씀하시었다.

유년기라는 나이를 너무도 뛰어넘은 깊은 생각이었고 높은 뜻이었다. 그래서 자제분의 기특한 소행이 김일성장군님과 일가친척들, 일꾼들을 더 가슴아프게 했다. 저택의 밤은 눈물 속에 잠겨 있었다.

바로 이때 중앙통신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 일꾼이 목소리를 낮추어 전화를 받았다.

여사님께서 서거하시기 며칠전에 김일성장군님께서 미제와 이승만도당이 은파산일대에서 자행하는 침략행위를 폭로규탄하는 글을 쓸 데 대한 과업을 주셨는데 장군님께 완성된 기사를 올리기로 약속한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아랫방에서 김일성장군님의 갈리신 음성이 울리었다.

≪어데서 온 전화요? 중앙통신사에서 온 전화가 아니오?≫

일꾼은 잦아드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올리었다.

≪곧 그 기사를 가져오라고 하시오.≫

≪장군님…… 오늘만은……≫

≪정숙동무가 혁명을 하다가 갔는데 우리도 일을 합시다. 빨리 가져오도록 하시오.≫

≪……알았습니다.≫

얼마후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중앙통신사에서 가져온 원고를 검토하기 시작하시었다.

크나큰 상실의 비애를 위업에 대한 헌신으로 묵새기시는 장군님이시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동생의 손목을 잡고 아버님의 근엄하신 모습을 숙연히 우러러보시었다.

이때 철없는 동생이 울먹이는 소리로 엄마를 찾으며 아버님께로 다가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얼른 동생의 손목을 잡고 곁방으로 가시어 울음을 머금은 음성으로 동생을 타이르시었다.

≪이젠 엄마를 찾으면 안돼, 네가 엄마를 찾으면 아버지는 일도 못하시고 속상해 하신다. 이제부터 엄마가 보고 싶으면 아버지한테 가서 울지 말고 나한테 와야 해, 그래서 함께 어머니사진을 보자.≫(상동, 328쪽)

눈물에 젖은 자제분의 말씀은 모두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셔주었다.

이처럼 어린 동생을 보살펴 주고 키워주는 일까지도 어머님을 대신하여 하셔야만 했으니 그분의 두 어깨가 어찌 무겁지 않으실 수 있었으랴.

자제분께서는 이렇게 일찍부터 어머님께서 하시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성장하시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바로 이런 분이시기에 그분의 어깨에는 오늘 주체위업이라는 대업이 실리고 조국통일이라는 중하가 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어머님으로부터 조국통일의 유언을 받으신 때로부터 5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 민족의 조국통일운동은 거족적으로 발전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튼튼한 토대가 닦아졌으며 조국통일의 밝은 전망이 열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일영도자님의 탁월한 사상과 현명한 영도의 결과이다.

한없이 숭고한 조국애와 민족애를 지니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문제를 두고 어느 하루도 심려하시지 않은적이 없으며 어느 한때도 편히 쉬신 날이 없다.

그분께서는 안팎의 분열주의 세력의 도전과 반통일책동을 걸음마다 짓부수고 북과 남, 해외동포들을 분기시켜 조국통일운동을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고히 전환시키시었다.

그분께서는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과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조국통일 3대헌장을 제시하시어 조국통일의 근본 원칙과 방도를 전면적으로 밝혀주시었다.

그분께서는 조국애와 민족자주정신을 기초로 삼으시고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초월해 북과 남, 해외동포들을 조국통일의 기치밑에 하나로 굳게 단합시키심으로써 조국통일의 주체적 역량을 마련하시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렇듯 위대한 통일운동 방략, 역량을 마련하심으로써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튼튼한 토대를 구축하시었다.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 민족에게 남기신 한없이 고귀한 유산이며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업적이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구축하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튼튼한 토대를 더욱 공고발전시키시어 조국통일의 더욱 밝은 전망을 열어놓으시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었다.

≪조국통일은 나의 높은 사명입니다. 조국통일은 수령님 앞에서 책임진 나의 당면과업입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어머님께서 일찍부터 키워주신 통일사명감에 무한히 충실하시어 어머님께서 바라시던 조국통일의 뜻을 빛나게 실현해가신다.

그분께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를 비롯한 여러 조국통일관련 저작들을 발표하시어 통일경륜을 더욱 선명히 밝혀주시었다.

그분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한생을 바쳐 조국통일위업에 쌓으신 불멸의 업적을 고수하며 조국통일의 주체적 노선과 방침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방략을 밝히시면서 자주의 원칙에 기초하고 애국애족의 기치, 조국통일의 기치밑에 온 민족이 단결하며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반통일세력을 반대해 투쟁하며 남과 북, 해외동포 사이의 내왕과 접촉, 대화, 연대연합을 발전시킬 데 대한 민족대단결 5대방침을 제시하시어 통일의 활로를 열어놓으시었다.

그분께서는 비상한 정치지도력을 발휘하시어 남과 북, 해외의 온 겨레를 분기시켜 반통일 역풍을 제압하고 통일의 열풍을 불러오신다.

그분께서는 ≪하나의 조선≫노선에 기반하여 미국과 이남당국자들의 ≪두개 한국≫ 조작책동을 저지파탄시키시어 우리 민족의 영구분열위기를 제거하시었으며 신축자재한 방략으로 반통일분자들을 대화와 협상의 마당에 끌어내어 통일에 유리한 환경과 여건을 마련하시었다.

그분의 주도하에 80년대와 90년대에만 해도 남북적십자회담, 남북고위급회담, 경제회담, 체육회담 등 여러 갈래의 대화의 장이 마련되고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마침내 또하나의 민족공동의 통일합의문이라 할 수 있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창출되고 1994년 7월에는 남북정상회담이 기정의 사실로 되기에 이르렀다.

그분께서는 뜨거운 동포애와 비범한 친화력으로 남과 북, 해외동포들을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하나로 굳게 묶어세우시어 조국통일의 결정적 역량인 주체적 역량을 비상히 강화하시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남과 북, 해외를 포괄하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이라는 실체가 창출되었으며 조국해방 45주년이 되는 1990년 8월 판문점에서 남, 북, 해외동포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범민족대회가 소집되고 그것이 정례화되고 있는 것은 조국통일의 주체적 역량이 얼마나 위력해졌는가를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분께서는 세계를 움직이시어 우리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각방으로 방해하는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과 반동들의 국제적 연합구도에 파열구를 내시었으며 북의 자주적 조국통일노선에 대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지지를 불러일으키시고 각종 연대조직들에 기반해 북의 통일노력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목소리가 가일층 높아지도록 하시었다.

이것은 반통일세력의 범위는 최소화시키고 통일지지세력의 범위는 최대화시켜 우리 나라의 통일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이라는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통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쉽지 않은걸 해내는게 지도력이다.

김정일영도자님의 무비의 정치지도력에 의해 온 겨레의 넋과 에너지가 하나로 더욱 굳게 결집되고 삼천리강산에 통일열풍이 세차게 소용돌이치며 그 뜨거움과 세기가 무한대로 증폭되는 가운데 분열은 가고 통일은 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김정숙여사님께서 생전에 바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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