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26일

통일여명 편집국

 

 

김정숙여사와 민족통일 3

 - ≪김정숙여사와 민족통일≫

통일여명 편집국 6-2-9

 

 

차 례

 

 5. 사랑의 대하

숭고한 동지관 / 몽양과 그의 두 딸

벽초와 허헌의 딸 / 뜨거운 동포애

 

5. 사랑의 대하

 

예로부터 고기는 물 속에 살고 사람은 인정 속에 산다고 했다. 인정이란 사람들 사이에 서로 나누는 따뜻함이다. 이를테면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며 남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받아들이어 함게 슬퍼하고 도와주며 기쁨도 같이 나누는 감정이다. 인정, 곧 인간에 대한 사랑과 정(情)은 인간관계의 정신적 바탕이라 할 것이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일찍부터 무한대한 인정의 세계를 안고 계시었다.

여사님의 천품적인 그 다함없는 인정은 민중의 자주위업을 위한 성스러운 길에서 불보다 뜨거운 동지애로 승화되었고 각계각층 민중을 한품에 안는 응집력으로 굳어졌음을 볼 수 있다.

김정숙여사님께서 통일전위투사들과 애국인사들, 이남민중 모두에게 베푸신 사랑은 숭고하고 고결하며 광폭적인 사랑이었다. 그것은 통일전위투사들의 가슴을 적셔 충효정신을 키워낸 생명수로 되었고 애국인사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그들의 생에 영광을 준 햇살로도 되었으며 각계각층의 개성을 조화시키고 마음을 융합시켜 변혁에로 견인해낸 열풍으로도 되었다. 그리고 불미스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들의 굳게 닫겨진 마음의 문을 열어 삶의 궤도를 수정하게 한 활력소로도 되었다.

여사님의 고결하며 숭고한 광폭적인 사랑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각계각층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흐름에 합류하여 통일대하를 이루게 했고 조국통일운동을 힘있게 추동했다.

바다보다 더 광대한 것이 하늘이요, 하늘보다 더 광대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하지만 하늘보다도 넓고 바다보다도 더 웅심깊은 김정숙여사님의 사랑의 세계는 조국통일운동사에 불멸의 서사시로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 것이다.

숭고한 동지관

변혁은 동지를 얻고 동지적 사랑을 맺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동지애의 위력에 의해 전진하게 된다. 뜨거운 동지애로 하는 것이 변혁투쟁이고 걸음걸음 동지적 사랑과 믿음으로 수놓아지는 것이 혁명가의 인생행로이다.

김정숙여사님의 인생행로도 그러한 것이었다.

일찍이 부모형제를 다 잃고 변혁의 길에 나서신 여사님께 있어서 동지의 품은 유일한 삶의 보금자리였다.

여사님께서는 전생애를 바쳐 동지들과 고락을 같이하시며 오직 동지를 위해 살아오시었다.

운명을 같이하는 동지들과는 순간도 떨어질 수 없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것이 김정숙여사님께서 지니셨던 숭고한 동지관, 인생관이었다.

그러기에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김정숙여사님의 동지관, 인생관에 대해 김정숙동무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지들을 위해 한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동지애로부터 시작되었고 동지애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 공산주의적 도덕의리가 최대한으로 발양된 비범한 혁명가의 생애로 되었습니다, 그가 일생동안 해놓은 그 모든 것은 다 동지들을 위하고 인민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 것이었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김정숙동무의 관념 속에는 자기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굶어도 좋고 얼어도 좋고 아파도 좋다, 그러나 동지들이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고 아프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다, 내가 죽는 대가로 동지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웃으면서 죽음의 길을 택할 것이다 하는 것이 바로 김정숙동무의 인생관이었습니다라고 술회하시었다.

통일애국투사들에 대한 김정숙여사님의 뜨거운 사랑과 은정도 여사님의 이러한 인생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시 이북으로는 국토양단과 민족의 분열을 끝장내며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지리산과 태백산, 한라산을 주름잡으며 투쟁하던 수많은 통일애국투사들이 앞을 다투어 김일성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자 끊임없이 들어갔다. 이들은 조국통일투쟁의 진두에 기폭마냥 우뚝 서서 자기 개인의 안락이나 향락 같은 것은 전혀 생각지 않고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쳐나선 통일운동의 전위투사들이었고 민족의 귀중한 보배들이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바로 이들 모두를 귀중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온갖 사랑과 은정을 베푸시는 것을 이들에 대한 동지적 의리로, 혁명적 본분으로 여기시었다. 때문에 여사님께서는 통일애국투사들의 친어머니가 되시고 언니가 되시고 누나가 되시어 그들에게 온갖 지성을 다 바치시었으며 각별한 사랑을 부어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무엇보다 다심하고 세심한 인정의 세계로 통일애국투사들과 그 가족들을 한품에 안아주시었다.

1948년 9월 하순 어느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남에서 간 두 빨치산처녀들을 그들이 들어 있는 숙소에서 만나시었다.

밝은 미소를 지으시고 방안에 들어서신 여사님께서는 장군님으로부터 말씀을 다 들었다고 하시며 산에서 싸우느라고 고생이 많겠다고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시었다.

그러시고는 동행한 일꾼들을 바라보시며 장군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두 건강하고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처럼 맑고 순결한 동무들이라고 하시며 매우 만족해 하시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사님의 눈가에 그늘이 비꼈다. 한 처녀의 동상입은 두손을 보셨던 것이다.

여사님께서는 측은해 하시는 어조로 이런! 손을 얼궜었군요. 아직도 이렇게 푸릇푸릇한걸 보니 얼마나 저리고 쑤셨을까. 심하게도 얼궜었군요라고 하시며 그의 양손을 만져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손이 얼었으니 발도 얼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어디 발을 좀 보자고 하시었다.

그는 차마 동상입은 발을 여사님앞에 내놓을 수 없어 발은 일없다고 말씀드리면서 치맛자락 속에 감추었다.

그러자 여사님께서는 내 눈은 못속인다고 하시며 그의 발을 끌어당겨 양말을 벗기시었다. 그리고 발등과 발가락 사이에 얼룩져 있는 검푸른 반점들을 어루만지시면서 이럴줄 알았다고, 얼마나 고생했겠는가고 하시며 지금도 밤에는 못견디게 근질근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그의 손을 꼭 잡으시고 우리도 산에서 싸울 때 손발이 얼어서 고생했다시며 손을 자주 놀리고 주의하면 동상은 입어도 심하게 입지 않을 수 있는데 발은 자기도 모르게 잘 언다고, 빨치산의 날개는 발인데 경험이 없어 이렇게 심한 동상을 입었다고, 손발을 얼구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고통을 모를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산에서 싸울 때 자신께서도 몇번이나 동상을 입은 적이 있다고 하시면서 언독을 빼는 방법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쳐 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언독을 빼자면 자그마한 베자루 4개를 만들어서 콩을 담고 그속에 손발을 넣는 것이 제일 좋다고, 물론 약도 있지만 우리 조상들이 오랜 경험을 통하여 알아낸 그 방법이 간단하고 지저분하지도 않고 제일 좋다고, 그래도 언독이 잘 빠지지 않으면 얼음이 버석버석한 물에 손발을 담그어야 한다고, 물론 손발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저리고 아프지만 인내성있게 참아야 한다고, 목숨을 내걸고 적과 싸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쯤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렇게 콩자루와 얼음물에 번갈아가면서 손발을 넣으면 아무리 심하게 배긴 언독도 깨끗이 뺄 수 있다고 말씀하시었다.

빨치산처녀들의 두볼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여사님의 한없는 인정에 감동된 격정의 눈물이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 통일애국투사들에게 베푸신 사랑은 자신보다 먼저 동지를 생각하고 자신보다 먼저 동지를 위하는 고결한 사랑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어쩌다 새 신발이 하나 생겨도 통일애국투사들과 그 가족들을 먼저 생각하시고 그들에게 돌려주곤 하시었다.

한번은 조국에 개선하신 여사님을 위해 누군가가 구두 한켤레를 마련해 드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사님께서는 그 구두를 들고 한 통일애국투사의 집을 찾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들고오신 구두를 그의 아내에게 내놓으시며 어서 신어보라고 하시었다.

통일애국투사의 아내는 여사님께서 일찍이 어려서부터 헐벗고 굶주리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으시었고 해방후에도 새 신발 한켤레 신으신 적 없으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뜻 여사님께서 주시는 구두를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사님께 말씀드렸다.

≪산에서 그토록 고생하신 여사님께서도 고무신을 신고 계시는데 어떻게 제가 먼저 구두를 신을 수 있겠습니까. 여사님께서 신으셔야 합니다.≫

여사님께서는 가볍게 웃으시며 우리 여성들이 지난 시기에는 살림이 구차하여 구두 한번 신어보지 못하고 살아왔으나 앞으로는 다 구두를 신고 넉넉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시며 자신의 걱정은 말고 어서 구두를 신어보라고 이르시었다. 구두는 그의 발에 꼭 맞았다. 참으로 눈물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여사님의 뜨거운 은정이 아닐 수 없었다.

여사님께서는 그후 그 통일애국투사의 어머니가 환갑을 맞을 때에는 손수 꼬박 밤을 지새우시며 만드신 등거리와 옷을 보내주시었고 정원에서 손수 가꾸신 아름다운 꽃들을 보내주시어 환갑상을 이채롭게 차려주기도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자신보다 먼저 동지를 생각하시며 옷감이 하나 생겨도 그것을 동지들에게 주고서야 마음을 놓곤 하시었다.

여사님께서 남강원도의 궁벽한 산촌에서 가난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나 일찍부터 모진 고생을 겪어온 한 빨치산처녀를 한동안 친동생처럼 댁에 데리고 계신 적이 있었다.

여사님께서는 그를 치과에 데리고 가시어 상한 이빨도 때고 백금으로 곱게 씌우도록 해주시었고 자신께서는 수수한 광목을 물들여 옷을 입으시면서도 그에게는 비단저고리와 남색뉴똥치마, 내의와 속치마까지 해입히시었다.

이런 여사님이시었기에 그분께서는 생의 마지막시기에 새옷이란 없었다.

항일투사 김명화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49년 9월 23일 아침에 있은 일이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곁을 떠나신 여사께 새옷을 입혀드리려고 여사의 의롱을 열어보던 우리들은 그만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여사님의 의롱 속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모두 깨끗이 손질해두신 낡은 옷들밖에는 없었습니다. 종시 세상을 떠나시는 날까지 온전한 나들이옷 한벌 갖추지 않으시고 지내신 여사이시었습니다.

그 옷가지들을 붙안고 우리는 모두 목놓아 울었습니다.

어찌하여 여사님께서는 옷 한벌 변변한 것이 없이 지내셨습니까. 이런 생각이 북받쳐 올라 울고 또 울었습니다.≫(≪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정숙동지를 회상하여≫ 해방후시기, 조선노동당출판사, 1982년, 298∼299쪽)

김정숙여사님께서 통일애국투사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또한 죽어서도 영생하는 삶을 빛내주는 그토록 열렬하고 뜨거운 동지적 사랑이었다.

여사님의 이러한 사랑은 사선을 헤치고 단두대에도 웃으며 오를 수 있게 떠밀어 주는 용기의 원천이고 양심과 도덕, 의리, 지조를 지키고 혁명적 신념을 고수할 수 있게 해주는 정신적 양식이고 마음의 기둥이었다.

여사님께서 삶을 통일위업에 바친 강규찬, 고진희부부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에도 그런 고명한 뜻이 깃들어 있었다.

이들 부부는 해방 후 제주도에 인민위원회를 세우고 김일성장군님의 정치를 온 남녘땅에 펼치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으며 미제의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1948년 3월 아들딸 4남매를 제주도에 남겨둔채 김일성장군님품으로 찾아간 애국투사들이었다.

장군님께서는 강규찬은 당중앙위원회에서, 고진희는 평양시인민위원회에서 중요한 사업을 맡아보도록 하시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위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때 이남민중들로부터 대의원으로 선거받고 최고인민회의에 참가한 그들 부부를 만나주신 장군님께서는 제주도에서 선출된 싸우는 부부대의원이라고 높이 치하해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고진희를 여러차례 만나시어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 주시었다.

그가 중앙고급지도간부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를 만나주시고 학교에 가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여학생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공부를 잘하라고 격려해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고진희와 자주 만나시어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그들 부부가 제주도에 두고 온 4남매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이 사실을 장군님께 보고 올려 아이들을 데려오도록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그들 부부가 새집들이를 할 때에는 가구비품 일식과 함께 이부자리, 쌀, 부식물까지 마련해 보내주시었고 그들의 집을 찾으시어 아이들을 한품에 안아주시고 육친의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 주시었다.

그들이 뜻하지 않은 화재로 하여 집과 가장집물들을 잃어버리었을 때에도 장군님께서와 여사님께서는 지체없이 새살림을 꾸려주시면서 식구들이 갈아입을 옷에 이르기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그후에도 고진희를 자주 만나주시고 항일혈전의 나날 조선인민혁명군 여대원들이 온갖 풍상고초를 이겨내며 일제놈들과 용감히 싸우던 이야기들을 감명깊게 들려주기도 하시었고 그를 데리고 만경대혁명학원에도 나가시어 조국의 휘황한 앞날을 실감있게 보여주기도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이제 조국을 통일한 다음 장군님을 모시고 한라산의 백록담에 함께 가자고, 그때에는 한라산기슭에서 공골말을 타고 달리는 고진희의 모습을 보겠다시며 그에게 통일열망을 북돋아주기도 하시었다.

고결한 사랑은 고상한 인간을 배출하는 것이다.

김정숙여사님의 자애깊은 사랑 속에서 강규찬, 고진희부부는 김일성장군님께 충직한 충신으로 자라났다.

그러한 모습은 6·25전쟁시기에 그들이 걸어간 깨끗한 삶의 길에서 잘 나타났다.

미제와 이승만반역도당이 북침전쟁을 도발하자 반공격에로 넘어가 남진하는 인민군대와 함께 해방된 이남땅에 나와 사업하던 그들 부부는 인민군대의 전략적 후퇴시기 마지막 대오가 북행길에 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후퇴의 길에 올랐다. 그들은 적들의 포위에 들어 이미 때가 늦었음을 알자 적구에서 유격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협곡에서 수백명의 적을 섬멸하는 전투가 계속되던 1951년 초 어느날 강규찬은 적의 포위 속에 든 동지들을 구원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 비보를 전해들은 고진희는 한없는 슬픔을 힘으로 바꾸어 남편의 몫까지 싸울 것을 동지들 앞에서 맹세했다.

남편이 전사한 한달후 정찰임무를 받고 나갔던 그는 변절자의 밀고로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적들의 악착스러운 고문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던 끝에 그는 감방벽에 ≪김일성장군 만세!≫, ≪조국통일 만세!≫의 글을 피로써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정숙여사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여사님께서 부어주신 사랑과 믿음 속에 혁명가의 변치 않는 신념과 의지를 간직한 이들 강규찬, 고진희 부부는 전쟁의 준엄한 포화 속에서 통일애국투사들이 어떻게 살며 어떻게 죽는 사람들인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여사님께서 부어주신 그 사랑은 남녘의 수많은 애국자들을 강규찬, 고진희와 같은 불사조들로 키워냈다.

그 가운데는 해방직후의 이남정세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한 지하활동가도 있고 적진에 뛰어들어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소리높이 부르며 장렬하게 자폭한 태백산빨치산의 처녀영웅도 있으며 지리산빨치산의 무명의 유격대원들도 있으니 이들이야말로 여사님의 사랑으로 꽃피워난 민족의 자랑스러운 아들딸들이라 할 것이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고 했다. 통일의 길에서 한생을 바친 통일애국투사들이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었으니 김정숙여사님은 그러한 불굴의 인간, 의리의 인간들을 키워낸 동지애의 화신으로 겨레의 심장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몽양과 그의 두 딸

여운형은 몽양(夢陽)이라는 자기 호의 의미와도 같이 꿈속에서도 햇빛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60평생은 비바람 몰아치는 풍운 속에서 자기의 앞길을 밝혀주고 이끌어 줄 구원의 햇빛을 찾아 헤매인 수난에 찬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그가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을 만나뵈옵고 자기의 평생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원래 일찍이 청년시절에 나라 찾을 청운의 뜻을 품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3·1운동에도 참가하여 만세도 불렀고 동방민족의 자결권을 위한 국제회의장에 달려가서는 식민지약소민족의 설움도 토로하였다. 민족주의에도 뜻을 두고 ≪상해임시정부≫에도 찾아갔고 선진사상에 기대를 걸고 공산주의 운동자들도 만났다. 하지만 민족의 앞길에 칠흑같이 겹쌓인 숨막히는 어둠의 장막은 가셔지지 않았다.

갈수록 그의 마음속에서는 민족을 구원할 햇빛을 찾는 마음이 더욱 강렬해졌다. 민족해방의 길을 찾으려고 그는 중국, 인도, 필리핀 등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다니면서 간디와 네루, 손문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과 무릎을 마주하고 반침략투쟁방도도 모색했고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도 만나 민족자결권 문제를 두고 의논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길에서 우리 민족을 구원할 걸출한 위인이 없는 것을 한탄하여 바람스산한 이국의 하늘밑에서 비통한 눈물을 머금고 가슴을 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그의 가슴속에서는 이 세상의 이름있다는 정치인들과 영웅호걸들을 제 눈썹아래로 내려다보는 도고한 마음이 생겨났고 그것은 하나의 습벽처럼 굳어졌다.

어느해인가 일본총리대신은 그를 도쿄의 궁성에 불러다가 대신들 앞에서 ≪천황≫의 칙령으로 남작의 벼슬을 주고 대만총독으로 임명하겠다고 하며 은근히 구슬려 보려고 하다가 개코망신만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몽양은 설사 남작, 총독보다 더 높은 벼슬을 준다 해도 그것은 독립된 조선에서 머슴꾼으로 사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역적으로 통하는 길과 단호히 결별하였다.

이럴수록 태양의 빛을 그리는 몽양의 마음은 더욱더 깊어갔다.

이러한 그의 가슴속에 활화산의 화광과도 같은 광명의 빛이 비쳐왔으니 그것은 20대의 만고의 빨치산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일본 백만 대적과 맞서 항일혈전을 벌이신다는 소식이었다.

그때부터 여운형은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우러러보았고 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던 절세의 영웅을 이제야 맞이하게 되었다고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그가 김일성장군님께서 벌이신 보천보전투소식을 듣고는 보천보로 달려갔으며 자기가 경영하는 ≪조선중앙일보≫에 특별보도로 취급했다. 그것을 편집한 날 밤에 집에서 편집인들과 그 감격을 누를길 없어 축배잔까지 들었다는 사실은 당시 그의 심중을 잘 알게 한다.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그의 흠모심은 날로 더욱 불타올랐다. 해방후 뜻있는 정치인들이 다 그러했지만 여운형도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야만 외세에 의한 국토양단을 끝장내고 조국을 통일할 수 있다는 확신에 따라 평양으로 장군님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가 바로 1946년 정초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그를 진정 반갑게 맞아주시고 복잡다단한 그의 과거를 이해하여 주시었으며 비상한 예지와 선견지명으로 그가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었다.

그날 여운형은 김일성장군님을 따라 댁으로 가면서 김정숙여사님은 총을 잡고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던 여장군이시니만치 아마도 무관다운 위엄이 있는 호걸풍의 인물이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따뜻한 인사의 말로 그를 방안으로 안내하시는 김정숙여사님과의 첫 대면에서 그 인자하심과 소박하심, 소탈하심이 안겨오는 여사님의 고결한 성품, 사람의 마음을 끝없이 정화시켜 주시는 자애에 넘치신 밝은 그 웃음, 정말 초면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정든 친혈육을 맞아주는 것 같으신 한없이 친근하고 부드러우신 그 음성은 굳어졌던 여운형의 마음을 순간에 봄눈처럼 녹아내리게 했다.

하기에 그는 객지에 나가 있다가 자기 집에 돌아온 것 같은 심정에 휩싸여 저고리도 벗어놓고 세수도 하고 편한 마음으로 방에 올방자를 틀고앉았으며 장군님과 겸상을 할 때에는 20대에 끊었던 술도 부어주는대로 잔을 비우며 마음속 깊이 쌓아두었던 속셈을 툭 터놓았다.

여사님께서는 그가 댁에 한달가까이 머무르는 기간 내내 온갖 성의를 다해 돌봐주시었다.

그가 서울로 떠나던 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미국놈들이 살판치는 남반부로 떠나시는 선생님이 염려됩니다. 아무쪼록 몸 조심하십시오. 남조선에서 선생님 같으신 분들이 앞에 나서서 일을 해나가시느라면 꼭 통일될 것입니다. 그때에 다시 우리 집에 오십시오. 그때는 정말 불편한 점이 없이 해드리겠어요.≫라고 말씀하시었다.

여운형은 여사님의 은정깊으신 말씀에 거듭 감격해하며 서울로 돌아왔다.

그후 여사님께서는 그가 두차례나 찾아갔을 때에도 여전히 뜨겁게 맞아주시고 이남의 변혁운동을 도우시는 심정으로 그에게 여러가지 뜻깊은 말씀도 해주시었다.

여사님을 만나뵈옵고 받은 가르치심은 그후 그가 장군님의 뜻대로 싸워나가는데서 큰 고무를 주고 신념을 부어준 힘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김정숙여사님의 인품에 너무나도 감격했던 여운형은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그리고 군중앞에서 연설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평생에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국에서도 한다하는 여걸들과 여성명사들을 많이 보아왔소. 그러나 백발백중의 명사격수로 이름 떨친 여장군이신 데다가 정치적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정치활동가이시지만 그처럼 현숙하고 상냥하고 소박하고 소탈하신 분을 내 또 어디에서 만나보았겠소. 김정숙여사 같으신 분은 동서고금에 두분도 없을게요.≫

이러한 경모심으로 하여 여운형은 사랑하는 두 딸을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께 서슴없이 맡기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딸 여연구는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아버지가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간지 얼마 안되는 어느날이었다.

미군정에 있는 자가 아버지를 찾아와 그때 이화여대에 다니던 우리 두 형제를 미국에 유학보내자고 회유책을 썼으나 아버지는 그 비열한 선심술책을 단호히 물리쳤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우리 두 딸을 불러앉히고 ≪너희들은 내일아침 평양으로 떠나거라.

……장군님께서는 너희들을 친자식처럼 돌보아주실게다. ……

너희들은 그저 김정숙여사께서 가르치시는대로만 하여라. 그분을 따르고 배워 그분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하였다.

우리 형제가 평양으로 떠날 때 어머니가 근심어린 표정을 하자 아버지는 이렇게 나무람하였다.

≪뭘 그렇게 걱정이 많소.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고 김정숙여사께서 계시는데 어련히 돌봐주실라구…… 우리는 마음을 푹 놓읍시다. 당신은 조국이 통일되면 그분들께 찾아가 인사를 올릴 차비나 하오.≫ 이렇게 되어 우리 두 형제는 아버지장군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으며 김정숙여사의 사랑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불요불굴의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동지 혁명활동자료집≫ 해방후편, 1987년, 140쪽)

1946년 7월 초 서울을 떠나 38도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한 여운형의 두 딸은 즉시 장군님댁으로 달려갔다. 이들을 맨 먼저 따뜻이 한품에 안아주신 분은 김정숙여사님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장군님께서 농촌에 나가셨는데 학생들이 오거든 우리 집에 머물도록 하라고 몇번이나 당부를 하셨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어느 한 방으로 안내하시었다. 거기에는 이불 두채가 포개어져 있었고 그곁에는 연한 하늘색 모기장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여사님께서는 서울에서 학생들의 아버지가 왔을 때에도 이 방에 계셨는데 이제는 학생들이 아버지대신 이 방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장군님의 뜻에 따라 그들이 댁에서 함께 살면서 이튿날부터 학교에 나가도록 조처하시었다.

그들이 한창 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때 김일성장군님께서 돌아오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너희들이 잘 왔다고 하시면서 너희 아버지의 부탁도 있고 해서 자신께서는 너희들을 좀 단단히 공부시키자고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공부를 아주 잘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한집안식구가 되었는데 조금도 어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은 다 자신께 말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장군님께서와 여사님께서는 정사에 바쁘신 가운데서도 두 형제의 학부형이 되시어 날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알아보기도 하시고 학용품을 사 쓰라고 돈도 주시고 명절에는 만경대로 데리고 나가시어 잘 익은 참외도 안겨 주시며 즐겁게 휴식하도록 해주시었다.

이렇게 김정숙여사님의 극진한 보살피심 속에서 자라며 배우던 그들 자매는 김일성장군님의 배려로 외국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떠나기에 앞서 그들은 서울에 계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저희 형제는 그동안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어머님의 따뜻한 품 속에서 응석을 부리면서 자랐습니다. 배움이 한없는 기쁨이 되고 삶이 한없는 자랑이 되는 그런 나날을 보냈습니다. …… 저희들은 장군님과 어머님의 혜택으로 곧 유학의 길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먼 나라로 가더라도 저희들은 결단코 장군님의 품, 어머님의 품에서는 떠나지 않습니다. ……≫

두 형제가 평양을 떠나던 날이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정히 간수해두었던 만년필을 꺼내 그들의 손에 쥐어주시면서 당부하시었다.

≪변변치 못한 것이지만 내 마음이니 받아라. 생각 같아서는 불쌍한 남조선아이들을 다 안아다 너희들처럼 공부시키고 싶다만 미제놈들과 민족반역자놈들이 원쑤로구나. ……

공부를 잘해라. 남들보다 두몫세몫 더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글 한자를 배워도 그 어떤 개인적인 명성이나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도탄에 빠진 남조선인민들을 구원하기 위해 한몸바쳐 싸우는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평양을 떠나 외국에 간 그들 자매는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던 1947년 7월 그들은 뜻밖의 비보에 접했다.

인민당 당수로서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고 민주세력의 통일전선을 이루어내기 위한 활동을 힘있게 벌이던 아버지가 백주에 서울 한복판에서 반동들의 저격을 받고 희생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 두 형제는 이 비보가 실린 신문 한장을 온통 눈물로 적시었다.

장군님께서와 여사님께서는 두 형제에게 편지를 보내시어 슬픔을 이겨내고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고 격려해 주시었다. 그들이 조선음식을 먹고 싶어할 것을 염려하시어 고추장과 쌀도 보내주신 장군님과 여사님의 사랑에 그들 두 형제는 슬픔을 딛고 일어났다.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여운형선생의 자녀들은 김정숙여사님의 사랑을 가슴깊이 새기며 조국을 알고 민족을 알며 민중을 아는 어엿한 일꾼들로 자라났다.

벽초와 허헌의 딸

김정숙여사님의 통일에 대한 절절한 염원은 자애로운 사랑의 손길이 되어 월북인사들과 그 가족들에게도 뜨겁게 미치었다.

역사적인 4월남북연석회의참가차로 평양에 간 이남의 여러 정당, 단체의 인사들은 김일성장군님의 구국통일경륜과 민주건설을 통해 변모된 이북의 눈부신 현실에 접하고 감탄한 나머지 이북에서 장군님의 정치를 받들며 민족중흥에 이바지할 것을 열렬히 희망했다.

그때 월북한 이남의 민주인사들 가운데는 ≪조선의 3재(三才)중 하나≫로 평판이 높던 벽초 홍명희도 있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일제의 박해에 굽힘없이 민족적 양심과 지조를 지켰던 벽초는 해방후에도 이남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면서 장군님께서 내놓으신 새 조국 건설 방침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나섰다.

그는 ≪민주독립당≫ 당수로서 해방직후에 허헌을 비롯한 진보적 인사들과 함께 ≪김일성장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이 되어 장군님께서 서울에 오시기를 학수고대하던 사람이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손수 명주필에 쓰신 남북연석회의 초대장을 받고 크게 감동된 벽초는 사선을 넘어 평양에 들어갔고 남북연석회의에서 제시하신 김일성장군님의 구국통일방침과 이북의 장엄한 민주건설모습을 보고 감탄과 격동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1948년 5월 6일 그는 장군님의 접견을 받게 되었다. 그 기회에 장군님께 그는 북조선에 남도록 해주실 것을 정중히 말씀드리었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제의를 수락하시고 앞으로 손잡고 일해보자고 고무격려해 주시었다.

그무렵 벽초는 환갑을 앞두고 있었다. 가족을 이남에 두고 객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형편에서 벽초 자신조차 환갑에 대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장군님께서는 그의 환갑날을 알고 계시었다.

하루는 장군님께서 저녁식사를 하시면서 김정숙여사님께 가족들을 이남에 두고 객지생활을 하는 그에게 환갑상을 차려주어야 하겠는데 서울음식법을 잘 모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고 적이 걱정하시는 것이었다.

여사님께서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계시다가 서울음식을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 물어가면서 자신께서 해보겠다고 장군님께 말씀드리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다음날부터 한 일꾼의 아내로부터 서울음식 만드는 법을 하나하나 배우시면서 환갑상을 성의껏 준비하시었다.

환갑상은 이채로웠다. 거기에는 보통 환갑상에 놓는 음식들외에 서울사람들이 환갑상에 놓는 음식들이 있는가 하면 그가 제일 즐기는 음식들인 갓나물김치, 수정과, 약과, 약밥, 포육, 깍두기도 올랐다.

그날 저녁 좀 일찍이 귀가하신 장군님께서는 환갑상이 잘되었다고 기뻐하시며 홍명희를 댁으로 모셔오도록 하시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댁에 들어선 그는 진수성찬을 차린 큰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이 바로 홍명희선생의 환갑날이라기에 이렇게 우리 집 사람이 상을 좀 차리느라고 하였는데 그리 변변한 것 같지 못하다는 장군님의 겸허한 인사의 말씀을 들은 벽초는 너무도 감격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때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마치 남녘땅에 두고 온 그의 일가친척들을 대신하듯 정중히 예의를 표시하시고나서 홍명의 선생이 서울에서 이날을 맞이하였다면 아들, 며느리들과 일가친척들이 훌륭한 상을 차리고 큰절을 올렸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자신께서 서울음식을 잘 알지 못하다보니 구미에 맞지 않을 것이지만 그저 성의로 알고 많이 들어달라는 진정어린 인사를 하시었다.

이어 장군님께서 조선의 독립과 새 조국 건설을 위하여 애국충정을 바쳐가는 그의 환갑을 열렬히 축하하여 몸소 술을 부어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축배까지 받은 벽초는 지난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아무 한 일 없는 자기에게 베풀어주시는 장군님과 여사님의 환대를 통해 깊은 사랑과 믿음을 심장에 각인하였으며 특히 여사님의 고마운 은정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것이어서 눈에 흙이 들어가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벽초의 가족들에게도 대를 이어 길이 전할 사랑을 베풀어 주시었다.

벽초가 환갑상을 받은지 몇달이 지나 장군님의 조치에 의해 서울에 있던 그의 가족들이 평양에 왔다.

그런데 가족수는 20명이나 되었다.

당시 평양의 중심에는 그런 대가족이 들 집이 흔하지 못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생각끝에 자신의 저택을 그들에게 내주기로 작정하시고 김정숙여사님의 의향을 물으시었다.

장군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여사님께서는 기꺼이 동의하시었다.

이렇게 되어 홍명희일가는 분에 넘치게도 장군님의 저택에 들게 되었다.

이사하던 날 일꾼들은 저택에 있는 가구들을 자동차에 실으려고 서둘렀다.

그러자 여사님께서는 가구들을 홍명희일가가 그대로 사용하도록 그냥 두게 하시었다.

이리하여 홍명희일가는 장군님께서 쓰시던 침대며 응접탁, 여사님께서 쓰시던 재봉기, 독, 단지 심지어 자제분께서 타시던 어린이용 자전거까지 고스란히 넘겨받게 되었다.

1949년 4월 꽃이 피고 태양이 눈부신 민족적 경사의 달에 김일성장군님이 저택으로 이사온 홍명희일가는 아직도 여사님의 온기가 스며있는 가구들과 부엌세간들을 쓸어보며 격정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었다.

그날 마당에 그냥 세워둔 어린이용 자전거를 본 홍명희의 손자는 이사때의 사연은 모르고 며칠후 자기와 한 유치원에 다니시는 어리신 김정일영도자님께 자전거를 가져가지 않았더라고 말씀드리었다. 그러자 영도자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그 자전거는 네가 타라고 둬두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 자기들의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한 입북민주인사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김정숙여사님의 사랑은 이렇듯 고결한 것이었다.

이북의 당과 국가, 사회단체의 요로에서 활약한 허정숙도 김정숙여사님의 숭고한 사랑 속에서 운명의 전환기를 빛내인 여성이었다. 허정숙이 해방전에 양심적인 민족주의자, 변호사였으며 이남에서 신민당 당수를 지낸 허헌의 딸임은 자타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해방전에 모진 세파에 부대끼며 오랜 세월을 해외에서 보냈다. 그의 해외생활이란 자기 운명을 기꺼이 의탁할 영도자를 찾아 방황하는 불운의 역정이었다.

해방후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겨서야 그는 비로소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가 김정숙여사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 것은 조선노동당 기관지 ≪정로≫(≫노동신문≫의 전신)의 기자로 일하고 있던 1946년 정초의 어느날 김일성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장군님의 저택으로 갔을 때였다.

그가 댁앞에 이르렀을 때 수수한 치마저고리를 입으신 분이 조용히 걸어나오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그러안으시듯 그의 두팔을 잡아 반기시며 방으로 이끄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그의 건강상태며 서울에 있는 일가친척들에 대해 걱정해 주시었다. 잠시후 여사님께서는 자리를 뜨시었다가 손수 음식을 날라들이기 시작하시었다.

허정숙은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 그리고 자제분들과 자리를 같이했던 그날의 점심시간을 두고두고 잊지 않고 회상하곤 하였다. 그것은 그 점심식사야말로 허정숙이 흘러간 세월 속에 상처만 남은 마음을 처음으로 활짝 열고 김정숙여사님의 봄볕처럼 따사로운 사랑을 받아안은 뜻깊은 자리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사님을 만나뵙고 싶은 마음이 늘 밀물처럼 한가슴 가득히 안겨오던 허정숙은 그후부터 한주일이 멀다하게 장군님의 댁을 찾았다.

여사님께서는 언제나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고 따뜻이 대해주시었으며 합숙생활에 불편한 점이 있을세라 세심히 보살펴 주시었다.

집을 떠나 이국의 매운 하늘아래서 부모의 따뜻한 정을 그리워하던 그에게 있어서 김정숙여사님의 품은 정녕 온정의 샘처럼 마음을 덥혀주는 어머니품과도 같았다.

그해 1월 하순에 그는 갑자기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가 혼미상태에 빠져 있는데 지방에 현지지도 나가셨다 돌아오신 장군님께서는 그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는 것을 보고받으신 즉시로 그를 찾아 주시었다.

그때까지 그의 병에 대한 확진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신 장군님께서는 즉시 평양시내의 이름있는 의사 10여명을 부르시어 협의진단을 하게 하시었다. 복막염이라는 확진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병을 오래 길렀기 때문에 수술을 해도 생명을 건지기 어렵다는 의사들의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밤 2시에 의사들의 확진내용과 소견을 보고받으신 장군님께서는 당장 수술할 것을 지시하시었다.

장군님의 지시에 따라 그는 그 밤으로 수술대에 올랐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그가 입원했을 때에는 그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들을 손수 만드시어 친히 들고 가기도 하시고 보내주기도 하시었다. 그리고 퇴원한 날에는 그를 댁으로 불러 손수 쑤신 잣죽을 내놓으시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차분차분하며 사탕이나 꿀로써도 낼 수 없는 은근한 단맛과 깨소금이나 참기름의 고소함도 당할 수 없게 향기로운 잣죽이었다.

여사님께서는 그윽한 미소를 지으시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잣죽이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좋다고 합니다. 입맛이 없는 중환자도 잣죽은 입에 대니까 하는 말인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산에서 싸울 때 부상당한 동무들에게 잣죽을 드리느라고 애쓰곤 했어요. 지금은 약이 많지만 그때에야 약도 구하기가 힘들었고……환자에게 좋다니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잣죽을 쑤려고 잣나무를 찾아 산판을 오르내리곤 했었지요. 복부수술을 했으니 큰 상처를 입은 환자와 다를바 없겠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

그에 대한 김정숙여사님의 사랑에는 끝이 없었다.

1946년 12월 하순 어느날 여사님께서 점심시간에 잠깐 왔다 가라고 하시었다는 전갈을 받고 그는 댁으로 찾아갔다.

그를 반갑게 맞아주신 여사님께서는 별식이라도 있는 줄 알았습니까, 먹을 것은 국수밖에 없어요라고 하시며 그를 안방으로 이끌고 가시더니 보통국수집에서 받아온 평양냉면을 권하시는 것이었다.

점심상을 물리신 여사님께서는 의롱을 여시고 옥색양단저고리감과 수박색모직치마감을 꺼내시면서 ≪……동무의 겨울옷은 처음 만나던 지난 정초때부터 보아야 이 검은 양복 아니면 진곤색치마저고리뿐이더군요. 별로 좋은 것은 못되지만 이걸 해서 입으세요. 늘 검정옷만 입고 다니지 마시고…… 아직 젊었는데 색깔고운 옷도 해입으셔야지요. ……≫라고 하시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그 옷감을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사실 그의 겨울옷인 검은 양복과 진곤색치마저고리로 말하면 그것도 장군님께서 군데군데 기운 솜옷을 입고 있던 그를 보시고 선물로 주신 옷이었다.

그는 어버이장군님의 뜨거운 은정이 깃든 그 귀중한 옷들을 즐겨 입었다. 그리고 그 두벌옷이 그의 겨울옷의 전부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 옷감은 받을 수 없다고 그는 굳이 사양했으나 여사님의 뜨거운 혈육의 정을 더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사모님, 어떻게 된 옷감인지나 알고 제가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게 주시려고 일부러 끊어오셨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올렸으나 여사님께서는 아니라고, 거저 한벌 생긴 것이라고 하시며 억지로 안겨 주시었다.

조국통일과 새 사회 건설위업에 헌신하는 민주인사들과 그 혈육들에 대한 김정숙여사님의 사랑은 이렇듯 자애롭고 숭고한 것이었으며 남모르게 바치는 어머니의 따사로운 사랑 그대로였으니 그런 사랑을 받아안은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뜨거운 동포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언제나 남녘민중 모두를 한가슴에 안고 계시었다. 그분께서 지니신 동포애의 정은 그만큼 뜨겁고 강렬한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의 당과 인민정권이 세워지고 제반 민주주의적 개혁의 실시로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이북민중의 밝은 모습을 대할 때마다 여사님께서는 이남민중에게는 그것이 가닿지 못한다는 아쉬움으로 늘 마음쓰시었다.

1946년 6월 말 노동법령이 발포된 후 어느날이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노동신문에서 노동법령의 발포로 새 생활 창조의 기쁨을 맛보며 행복한 생활을 누려가는 이북노동자들의 생활과는 상반되는 이남노동자들의 불행한 처지를 읽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한 일꾼에게 자신께서 보시던 신문을 넘겨주시면서 오늘 신문에 중요한 기사가 실렸다고, 한번 읽어보라고 하시었다. 그가 그 기사를 읽고 나서 일제치하에서 자신이 강요당해온 고통을 되새기며 자기의 소감을 피력하자 여사님께서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왜정시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험악한 미제강점하의 이남사회에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기막힌 처지를 생각하시었다고, 미국놈도 일본놈도 꼭 같은 그놈이 그놈이라고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지난날 산에서 싸울 때 삼천만 인민을 다 해방하자고 그리도 많은 피를 흘렸는데 아직 나라의 절반땅에서는 우리 노동자들과 인민들이 비참한 운명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미국놈들을 내쫓고 남조선인민들에게 하루빨리 민주주의적 혜택이 돌려지도록 해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었다.

불보다 뜨거운 동포애의 정이 넘쳐 흐르는 여사님의 말씀에 일꾼은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

여사님께서는 공장에 가시면 이남의 노동자들을 생각하시었고 농촌에 가시면 남녘의 농민들을 생각하시었다.

1948년 5월 어느날 여사님께서 평양 교외에 있는 금탄리의 양수장을 돌아보실 때의 일이었다.

흡수수로로 삼단같은 물기둥이 흘러 떨어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동행한 일꾼들은 물소리만 들어도 기운이 나는데 우리 농민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고 하면서 무척 기뻐들 하였다.

그러나 이때 여사님께서만은 생명수가 흘러 좋아하는 이북농민들만 생각하신 것이 아니었다.

여사님께서는 그 시각에도 물이 없어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는 이남농민들의 처지를 생각하고 계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일꾼들을 둘러보시며 ≪우리 농민들은 지금 물걱정을 모르고 농사를 짓고 있지만 남조선의 대부분의 농촌에서는 농사 지을 물이 없어 모내기도 제대로 못하고 있답니다. 땅에 꼬챙이로 구멍을 뚫고 거기에 동이로 물을 길어다 부으면서 한대한대 꽂고 있답니다. 참 가슴아픈 일이에요.≫라고 말씀하시었다.

이북의 논밭을 적시는 한줄기 물을 보시고도 말라버린 남녘의 전야를 생각하시는 여사님이시었다.

여사님께서 지니신 이남민중에 대한 동포애의 정은 이렇듯 뜨거운 것이었다.

그러기에 여사님께서는 분단선을 넘어 입북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모로 마음쓰시었고 한품에 안아 재생의 길도 열어 주시었으며 댁에까지 초대하여 극진한 환대를 베풀어주기도 하시었다.

당시 김일성장군님의 정치에 지지를 표시하며 장군님께 자기의 운명을 의탁하고자 입북하는 이남사람들의 대열이 늘어나는 가운데 1948년 10월 공화국창건을 경축하여 평양에서는 북과 남의 체육인들의 조선전국종합체육대회가 열리었으며 1949년 1월에는 이남의 예술인 일행이 입북하였다. 또한 이무렵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피선된 인사들이 이남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평양에서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2차회의에 참석했는가 하면 이해 5월에는 이남의 국군장병들 수백명이 집단적으로 의거입북했고 이남의 해군장병들이 또한 함정을 몰고 의거입북을 단행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누구보다도 기쁨을 금치 못하시며 뜨거운 동포애의 정으로 그들 모두를 세심히 보살펴 주시었다.

1948년 11월 어느날 저녁이었다.

이남에서 들어간 노동자들인 계월백, 임진환은 장군님의 저택으로 갔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영월탄광과 영등포의 한 공장에서 들어간 노동자대표들이었다.

그들을 반갑게 맞으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동무들이 남조선으로 다시 떠난다기에 식사나 한끼 대접하자고 불렀다고 하시며 그들이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큰 음식상을 들여오시었다. 상위에는 뚜껑을 씌운 밥그릇과 두부탕, 김치, 나물 등 여러가지 식찬들이 놓여 있었다.

뒤이어 여사님께서 부글부글 끓는 냄비국을 들여오시더니 차린 것은 없지만 제 집처럼 생각하고 많이 들라고 따뜻하게 권하시었다.

너무나 송구스러워 어쩔 바를 몰라하던 이남의 노동자대표들은 여사님의 권고에 못이겨 밥그릇뚜껑을 여는 순간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사님의 따뜻한 정인듯 김이 피어오르는 팥밥이 그릇에 넘치게 담겨져 있었다. 그들은 평범한 것 같이 보이는 점심상에서 자기들에 대한 여사님의 극진한 환대의 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들은 뜨거운 것을 삼키며 식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만일 이날 그들이 장군님댁에서 일상 식생활이 얼마나 검소한가 하는 것을 알았다면 차마 음식을 들지 못했을 것이다.

여사님께서는 보통 장군님의 음식상에 조밥을 차려드리기도 하시고 때로는 수제비국도 만들어 드리시었다. 찬도 그저 된장국에 김치가 오르고 상치, 쑥갓이 나오면 그것을 드리기도 하시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조밥이 소화도 잘되고 맛있다고 하시며 조밥을 달게 드시었고 여사님께서 수제비국을 만들었다고 하시면 그것이 참 좋은 음식이라고 하시며 맛있게 잡수시었다.

한번은 저택에 들린 한 여성투사가 김정숙여사님께 이제는 나라도 해방되고 조국에 돌아오셨는데 어찌하여 장군님께 조밥에 된장국을 드리실 수 있겠는가고 말씀올렸다.

그때 여사님께서는 이런 내용으로 말씀하시었다.

나라는 해방되었어도 인민들은 아직 넉넉하게 살지 못해요. 인민들이 조밥을 먹는데 우리라고 어떻게 흰쌀밥을 해먹겠나요. 이제 앞으로 인민들의 살림살이도 펴이고 나라도 통일된 다음에 흰쌀밥을 해먹자요.

여사님의 진정어린 말씀에서 그 투사는 여사님의 참된 인민성과 고매한 인격을 거듭 절감하였다.

이렇게 여사님께서는 민중과 꼭같이 검소하게 생활하시면서도 이남의 혁명가들과 민주인사들, 애국적 민중이 찾아가면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들어 성의를 다해 대접하시는 것이었다.

객지에서 따끈한 숭늉을 마실 때에는 저절로 고향생각이 난다고 얘기하지만 진정 여사님께서 들여오신 숭늉그릇을 두손으로 받아든 그들은 이토록 육친의 정을 그대로 부어주시는 여사님에 대한 감사의 정으로 가슴이 더욱 뜨거워짐을 느꼈다.

≪참말로 고향의 친어머니보다도 더 정성이 지극한 분이시다! 이처럼 덕망이 고결하신 분은 그 어디서 다시 찾으랴!≫

그들은 김일성장군님 댁을 떠나면서도 김정숙여사님에 대한 존경과 다시 뵙고 싶은 마음이 북받쳐 올라 좀처럼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어머니와 자식의 사랑이 젖줄기로 이어지듯이 여사님께서 차려주시는 식사는 단순한 성찬이 아니라 김정숙여사님과 이남민중을 혈육의 관계로 맺어주는 사랑의 젖줄기였다.

영월탄광 대표는 귀환후 김일성장군님의 댁에 가서 김정숙여사님의 환대를 받던 이야기를 가족들과 동료들에게 했다. 그 이야기는 강원도일원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김정숙여사님의 숭고한 동포애의 정은 이렇게 직접적인 체험자들에 의해 민중의 가슴마다에 굽이쳐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남민중 속에서 통일의 열기를 북돋아주는 활력소가 되었던 것이다.

진정 통일위업에 바치신 김정숙여사님의 사랑은 영원한 뜨거움을 간직한 생명수였다.

위대한 인간만이 위대한 사랑을 지닐 수가 있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만일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서 정력을 바친다면 아마도 저명한 학자, 훌륭한 시인, 유명한 천재가 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진정 위대한 인간으로는 될 수 없다고 했다.

김정숙여사님의 일생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동지, 민중, 겨레를 위한 고귀한 생애, 나라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한 숭고한 생애였다. 그래서 김정숙여사님은 분단의 강에 사랑의 가교를 놓으신 민족의 위대한 어머님이시고 정열적인 활동가의 귀감으로 민족의 칭송 속에 영생하고 계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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