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25일

통일여명 편집국

 

 

김정숙여사와 민족통일 2

 - ≪김정숙여사와 민족통일≫

통일여명 편집국 6-2-8

 

 

차 례

 

3. 민족의 대단합을 위해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기치아래 / 민족대회합에 깃든 노고

백범의 인생전환

 

4. 통일애국투사들의 스승

통일애국투사들을 이끄시어 / 통일전위투사 성시백

통일운동의 한쪽 수레바퀴를

 

3. 민족의 대단합을 위해

 

옛사람들의 병법에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했다.

인화란 사람들의 친화단합을 의미할진대 한민족의 생존과 운명개척에서 민족적 단합의 귀중함을 뜻하는 말로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천시와 지리를 얻어도 인화를 확보하지 못한 민족은 종당에는 멸망함을 면치 못하게 되며 반대로 아무리 천시와 지리가 불리해도 민족적 단합을 이루어 민족적 진운의 길을 걷는 민족은 모든 난관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일성장군님께서 일찍이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 재산의 유무와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계급, 계층이 민족공동의 요구와 이익을 우선 순위에 놓고 하나로 굳게 단합할 때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할 수 있다는 민족단합의 위대한 경륜을 펼치시고 그것을 변혁실천에 구현해 오신 것은 역사의 순리라 할 것이다.

항일혁명투쟁시기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기천만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자주독립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로 내세우시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방황하던 각계민중을 조국광복의 기치아래 결집하여 조국해방의 역사적 위업을 빛나게 이루어내시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러한 항일혁명투쟁시기의 귀중한 경험에 기반하시어 조국통일운동의 개척기부터 민족대단결을 통일의 천하지대본으로 삼으시었다.

오직 민족대단결만이 통일의 근본요인인 민족의 주체적 힘을 결정적으로 강화할 수 있고 통일에로의 역사적 운동의 성공적 추진과 발전을 기할 수 있으며 통일의 실제적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장군님의 민족대단합의 이념을 높이 받드시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에 열과 성을 다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대중을 하나의 주체적 역량으로 튼튼히 묶어세우는 것이 곧 조국통일이라는 신념을 간직하시고 북에 살건 남에 살건 사상과 이념이 같건 다르건 관계없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조국통일을 위한 대단합의 흐름에로 견인하시고자 불면불휴의 노고와 심혈을 다 바치시었다.

여사님의 비범한 견인력과 친화력에 이끌리어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들은 물론 양심적인 민족자본가와 종교인들, 심지어는 불미스러운 과거를 가진 극우익정객들까지 민족대단결의 거류에 합류해 통일이라는 거대한 바다로 용용히 굽이쳐 흘러갔다.

김정숙여사님께서 민족의 단합을 위해 걸음걸음 헤쳐오신 애국애족의 역정, 그 길위에 쌓아올리신 불멸할 공적의 탑과 그 한량없는 무게는 그대로 여사님이시야말로 우리 민족의 모습이시고 기상이시며 민족단합의 선도자이심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기치아래

8·15광복직후 국내정치정세는 참으로 복잡하였다.

주의주장을 달리하는 정당, 단체들이 앞을 다투어 세워지는가 하면 해외 각지로부터 형형색색의 가짜애국자들, 정상배들이 몰려들었다.

이같은 상황하에서 진흙 속에서 옥을 가려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했거니와 옥을 가려내어 소수의 선진세력만으로 변혁을 진전시켜 나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수백수천만의 군중을 잃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당시의 첨예한 문제는 당파나 정견, 신앙의 차이, 과거여하가 아니라 나라의 완전자주독립과 통일에 대한 올바른 입장과 적극적 태도여하에 달려 있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러한 상황하에서 나라를 사랑하며 민주주의적 입장에 튼튼히 선 모든 역량이 굳게 단결할 것을 호소하시면서 모든 애국적 민주역량의 조직적 결속을 이루어낼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결성노선을 제시하시었다.

노동자, 농민 뿐만 아니라 선진적이며 애국적인 지식인, 기업가, 상인, 종교인을 비롯하여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각계각층 민중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기치하에 결속해야 한다는 장군님의 노선은 그분께서 일관하게 주장하고 견지하시는 민족대단결사상을 해방후 새 조국 건설과 조국통일운동의 요구에 맞게 구현하신 참으로 정당한 전략적 노선이었다.

김일성장군님의 이러한 노선을 받들어 조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신 분김정숙여사님이시었다.

일찍이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사님께서는 대중 속에 들어가 각계민중을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1936년 5월 5일 창립)의 기치하에 하나로 결속해내신 풍부한 투쟁경험을 갖고 계시었다.

1936년 여사님께서 파견되어 활동하시던 장백현 하강구일대에서 불과 몇달사이에 20여개의 조국광복회 지회와 지회산하에 50여개 분회들이 조직된 사실만 보아도 여사님의 조직적 수완의 비범성을 웅변해 주고 있다.

이토록 능숙한 조직적 수완과 정치활동경험을 갖고 계신 여사님이시기에 백두산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 대중 속에 깊이 들어가시어 그들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기치하에 결집시키는 것을 자신께 부과된 시대적 임무로, 책임으로 간주하고 계시었던 것이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우선 상이한 정치세력과 각계각층 민중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기치아래 조직적으로 결속하는데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시었다.

당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민족대단결을 위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결성노선을 밝히시면서 남과 북에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당면과제로서 기존 사회단체들은 민주주의 길로 올바르게 인도하며 아직 사회단체들이 없는 곳에서는 사회단체들을 조속히 조직해내어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 등 각계각층을 묶어세워야 하며 각당, 각파의 정치세력들의 통일전선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장군님의 이 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중요한 고리의 하나가 해방된 청년대중을 조직적으로 결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시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국의 부강발전을 열망하는 광범위한 청년대중을 우선 단합시켜야 건국사업은 물론 여러 정치세력들과 각계각층 민중을 대단결에로 힘있게 추동하여 민족통일위업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각계민중을 조직적으로 결속하기 위한 김정숙여사님의 활동은 단일한 대중적 청년조직인 민주청년동맹을 결성할 데 관한 김일성장군님의 노선을 관철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당시 청년운동실태는 매우 복잡하였다. 각 지방들에서는 공산주의 청년동맹, 해방청년동맹, 해방농민청년동맹, 학생동맹, 무산청년동맹 등 각종 청년단체들이 출현했고 그것들은 통일적인 조직으로 묶어지지 못한채 종파분자들의 파벌싸움에 끌려들어가 서로 반목질시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기독교청년회, 백의청년회 등의 반동적 청년단체들이 저마다 청년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공산주의 청년동맹은 이름 그대로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무산청년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청년조직으로서 광범위한 청년대중을 포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민주를 지향하는 적지 않은 청년들이 공청밖에 방치돼 있는 실정이었고 당연히 공청에 가입해야 할 노동청년, 빈농출신 청년들도 의식수준이 낮다고 해서 공청에 받아들이지 않는 편향도 있었다.

이로부터 공청은 광범위한 애국청년들을 건국위업에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조직밖의 광범위한 애국청년들로부터의 고립과 그로 인한 대중적 지반의 약화라는 심각한 사태가 빚어질 수 있는 우려마저 있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청년운동의 이같은 실태를 직시하시고 ≪애국적 청년들은 민주주의 깃발아래 단결하라!≫는 슬로건을 내놓으시었으며 각계층 청년들을 망라하는 단일한 대중적 청년조직인 민주청년동맹결성 방침을 제시하시었다.

이러한 때에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청년들 속에 깊이 들어가시어 청년열성자들의 모임에도 참가하시고 청년들을 위한 강연회에도 출연하시었으며 또 청년단체 일꾼들을 만나 담화도 하시면서 장군님의 민청창립노선이야말로 각계각층 청년대중을 민주주의 깃발아래 묶어세워 새 조국 건설과 조국통일에로 견인해낼 수 있는 가장 정당한 노선임을 하나하나 일깨워 주시었다.

1946년 1월 17일 김일성장군님께서 북조선민주청년동맹의 창립을 선포하신 날 저녁 청년대표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체험한 실례를 들어가시면서 장군님께서 민청을 창립하신 의도를 알기 쉽게 해설해 주시었다.

≪해방된 새 조선의 청년들이 나아갈 참된 길은 오직 김일성장군님의 새 조국 건설노선을 받들어 나가는 길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청년들을 새 민주조선 건설의 기둥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혁명투쟁을 청년사업으로부터 시작하신 장군님께서는 조국광복을 위한 피어린 투쟁에서처럼 새 조국 건설사업에서도 청년들이 큰 몫을 맡아나설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동무들은 장군님의 새 조국 건설노선을 받들고 공장과 농촌, 학교 할 것없이 청년들이 있는 모든 곳에 들어가 장군님의 높으신 뜻을 깊이 심어 주어 그들을 민청조직에 튼튼히 묶어세워야 하겠습니다.≫

김정숙여사님의 훌륭한 대중사업경험은 청년일꾼들이 청년대중을 민주주의 깃발아래 민청에 조직적으로 결속하는데서 본보기로, 교과서로 되었으며 나아가서 청년대중이 새 조국 건설과 조국통일위업 수행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도록 하는데서 힘있는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렇듯 여사님의 활동에 의해 청년대중이 민주주의 깃발아래 결속됨으로써 장군님의 민족대단결 사상과 노선은 청년운동분야에서 먼저 빛나게 구현되었다.

각계각층 민중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기치하에 조직적으로 결속하기 위한 김정숙여사님의 활동은 해방후 여성동맹이 근로여성들 속에 튼튼히 뿌리박은 대중적 여성조직으로 강화발전되는 과정에도 빛나게 기록되어 있다.

1946년 2월 경위대가족 여맹초급단체를 조직, 본보기단위로 꾸려주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평양시와 평안남도, 함경북도와 강원도를 비롯한 여러 지방을 찾으시어 광범위한 여성들을 여맹조직에 결속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장군님의 의도대로 여성동맹은 극소수의 지주, 자본가,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각계각층 여성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대중조직인만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민주를 사랑하는 여성이라면 다 여성동맹에 받아들이도록 하시었다.

여사님께서 어느날 청진시의 각 구역 여맹간부들을 만나시어 여맹조직이 꾸려진 현황을 요해하실 때였다. 그때 동구에서 여맹조직을 책임지고 있다는 한 여맹간부는 자기네는 바닷가 구역이기 때문에 주로 가난한 어부의 아내들, 일제때 천대받던 달구지꾼, 지게꾼의 아내들만 여맹에 받아들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일제때에 학교를 다닌 여성들이 더러 들겠다고 하는데 그런 ≪소부르주아≫는 보기만 해도 밉살스럽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여사님께서는 그에게 여맹의 대중적 성격을 알기 쉽게 해설해 주시면서 노동자, 농민, 여성뿐만 아니라 그런 ≪소부르주아≫여성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면 여맹조직에 받아들여 단심줄을 꼬듯이 민족대단결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따뜻이 일깨워 주시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1946년 7월 어느날 김정숙여사님께서 시안의 여성들의 사상동태와 의식수준을 알아보시기 위해 평양시의 가두여맹원들을 만나 주시었을 때였다.

당시 시안의 여성들 속에는 일제의 사상잔재와 봉건유습이 남아 있고 개인주의, 이기주의와 소상인적 근성이 그대로 온존해 있었으나 여맹간부들은 이러한 낡은 사상과 구습을 버리지 못한 여성들과의 사업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우리 여맹일꾼들은 여성들의 구성이 아무리 복잡하다고 해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별의별 곡절을 다 겪을 수 있고 속타는 일도 많이 생길 수 있으나 그러한 애로들을 극복해내어 전체 여성대중을 장군님을 구심으로 해서 결집시켜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여맹가입대상에서 배제되었던 중소기업가, 상인, 종교인 등 여러 계층의 광범위한 여성대중이 여맹조직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결성당시 15만명이었던 전국의 여맹원쑤는 1946년 5월 여맹 제1차 대표자회의때에 이르러 60여만명, 이해 말에는 무려 1백만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것은 여맹조직건설에 관한 김일성장군님의 사상과 노선의 정당성에 대한 뚜렷한 확인인 동시에 김정숙여사님의 조직적 수완의 비범성을 보여주는 웅변적 증거로 된다.

김정숙여사님의 불면불휴의 노고에 의해 청년학생, 여성들의 대중단체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의 대중단체들과 각이한 정치세력들의 정당들에 광범위한 대중이 묶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북에서는 광범위한 애국적 민주역량을 총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결성문제가 일정에 오르게 되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1946년 7월 22일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시고 정당, 사회단체들의 상설적인 협의기관으로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를 내오시었다. 여기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4개의 정당과 13개의 대중단체, 6백여만명의 조직군중이 망라되게 되었다.

이남에서도 김일성장군님의 민족대단결사상과 통일전선이념을 받아들인 애국적 민주인사들에 의해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고 여기에 많은 민주주의적인 정당, 사회단체들이 망라되었다.

이렇듯 남북의 광범위한 애국적 민주역량이 망라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조국통일을 위한 민족대단결사업에서 이루어낸 역사적 전취물이었으며 민족대단결의 길위에 세워진 또하나의 빛나는 이정표였다.

그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 전조선적인 통일전선조직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으로 강화발전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남북의 71개 정당, 사회단체들이 총망라된 전민족적 애국역량의 총결집체로서 남과 북의 어느 한 지역에 한정된 통일전선체가 아니라 남북 전지역을 포괄하는 전민족적 통일전선체였음을 볼 수 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각계각층 민중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조직적으로 결속하시는 한편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을 위한 벅찬 실천투쟁에로 부단히 견인해내시는 과정을 통해 모두가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특색있게 기여하도록 이끌어 주시었다.

여사님께서 이 사업에서 견지하신 것은 김일성장군님께서 역사적인 조국개선연설에서 하신 가르치심이었다. 장군님께서는 연설에서 전체 조선인민앞에는 민주주의 완전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야 할 역사적 과제가 나서고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 민족이 민주주의 새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 힘을 합칠 때가 왔음을 강조하시었다.

장군님의 개선연설은 각계각층 민중이 누구나 다 애국적 열성을 발휘하여 새 조선 건설에 떨쳐나서서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며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사랑하는 전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장군님의 개선연설은 해방정국하의 각계민중에게 민족의 대단결 및 건국의 방식과 방도를 명시한 기치로서 이것이 가지는 감화력과 견인력은 비상히 컸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드시어 각계민중들 특히 인텔리, 종교인, 상공업자 등 지난날 공부를 했거나 일제기관에서 일했으며 소자산으로 중소기업을 운영해온 사람들을 단합시키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1947년 3월 초 오랜 인텔리출신의 한 간부가 평양에 이사올 때였다.

여사님께서는 그의 가족들이 평양에 도착하자 차를 보내어 그들을 댁으로 데려오게 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이삿짐이 도착할 때까지 댁에 머물러 있게 하시었다.

그후 며칠이 지나서 이삿짐이 도착하자 여사님께서는 그 간부의 아내를 데리고 댁 울타리안에 있는 아담한 벽돌집으로 가시었다. 그 집은 바로 장군님과 여사님께서 마련하여 주신 것이었다.

자기가 살게 될 집이 시내 어느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간부의 아내는 장군님댁 바로 곁에 자기네가 들 집이 있는 것을 보고는 한자리에 굳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여사님께서는 이젠 집주인인 데 손님을 안내해야지요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면서 알뜰하게 꾸려져 있는 방안으로 그를 안내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간부의 아내에게 멀리서 이사를 왔으니 김장을 가져오지 못했을텐데 댁에서 담근 김치를 다음끼니부터 어려워하지 말고 가져다 들라고 하시었다.

말씀은 고마웠으나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헤아리신 여사님께서는 손수 단지에 김치를 담아 가져다 주시었다.

진정이란 말은 아마도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1947년 10월 12일 만경대혁명학원 개원식에 참석하신 기회에 여사님께서는 강병석목사의 딸을 만나주시었다.

해방전에 공산주의를 적대시하고 배척했던 강병석목사는 해방후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이북의 정치현실 속에서 자기 운명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김일성장군님의 개선연설을 듣고 희망에 넘쳐 민주조국 건설에 결연히 나섰으나 불행하게도 반동테러단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강목사가 불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몸소 그의 문병도 해주시고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말라는 고무의 말씀도 해주시었다.

이런 사연을 가진 목사의 딸을 만나주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종교인이라고 하여 다 나쁘게 보지 않으며 종교인들 속에도 애국자가 많다고 하시면서 일본놈들과 산에서 싸울 때 조국광복회 회원들 가운데 종교인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목숨까지 바치면서 잘 싸웠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여사님께서는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해방된 조국땅에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려고 애쓰다가 반동들에게 테러를 당한 아버지는 애국자이며 그런 아버지를 모신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머리를 떳떳이 들고 다녀야 한다고 일깨워 주시었다.

목사의 딸의 얼굴에는 두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이야기는 강원도의 석왕사에도 있다.

인간사회와 담을 쌓고 심산유곡의 절간에서 덧없는 인생을 살아온 한 여승을 만나주신 여사님께서는 그의 지난날의 기구한 운명을 가슴아파하시며 불교를 믿어도 민중들과 같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면서 믿어야 한다고 하시며 이제는 여성들도 남자와 똑같이 국가사업과 사회정치생활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머리도 기르고 가정생활도 하여야 한다고 이르시었다.

여승의 감회는 자못 깊었다. 이제는 절간에도 재생과 단합의 광망이 비쳐든 것이다. 여승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올랐다. 새 생활을 창조하는 민족구성원의 일원이라는 자긍심이 그의 가슴을 친 것이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중소기업가들도 민족의 단합과 새 생활에로 따뜻이 이끌어 주시었다.

1947년 9월 30일 양덕군 온천면 온정리를 찾으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여관집 여주인과 이야기를 나누시었다.

여주인은 한숨섞인 어조로 다른 사람들은 보람차고 떳떳하게 살아가는데 자기들은 돈벌이만 하니 송구스럽다는 것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장군님께서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모두가 새 조국 건설에 떨쳐나서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면서 여관업을 하더라도 나라와 민중을 위해 떳떳이 일하면 그것이 곧 조국의 부강발전을 위한 것으로 된다시며 그곳에 출장오는 손님들과 병치료오는 환자들이 국가일을 잘하고 병치료를 잘할 수 있도록 생활조건을 잘 보장해 주라고 말씀하시었다.

그후부터 여관집주인은 새 조국 건설의 도도한 흐름에서 밀려난 한갓 검불이라는 생각을 달리했다. 양심적인 중소기업가들도 민족대단결이라는 거류에 합쳐진 하나의 물방울이었던 것이다.

1947년 초가을 어느날 함경북도 경성군에 내려가 계시던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숙소로 찾아온 한 양주업자의 아내를 만나주시었다.

지난날 밥술이나 먹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고 묻는 그에게 여사님께서는 조선노동당의 정책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시며 김일성장군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 참삶이 있음을 일깨워주시었다.

그후 여사님께서는 그 양주업자의 아내와 같이 방아도 찧고 키질도 하시면서 장군님께서 중소기업가, 상인, 수공업자들의 기업활동을 장려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크나큰 믿음과 배려를 돌려 주고 계시는데 대하여 하나하나 말씀해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말씀은 양주업자의 아내를 통해 그의 친척들과 가까운 이웃에 전달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여사님을 찾아뵙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받아안게 되었다.

어느날에는 그녀의 남편되는 사람과 동업하던 양주업소 주인이 여사님을 뵈옵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게 되었으며 그후 그는 애국적인 기업가라는 평가도 받았고 함경북도인민위원회 대의원으로까지 선거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파만파로 도안의 중산계층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새 조국 건설과 조국통일위업에 견인해내시어 민족단합의 거류에 합류시키시려는 김정숙여사님의 활동에는 한계가 없었으니 지난날 개인병원을 가지고 있던 한 의사를 만나시어서는 의술로 건국위업에 이바지하라고 힘을 주기도 하시었고 개인사진관을 영업하던 사람을 만나시고는 사진기술로 건국위업에 기여하라고 고무해 주기도 하시었다.

민족의 피가 흐르고 민족적 양심이 살아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의 가슴속에 재생과 단합의 활력을 부어 주시는 김정숙여사님의 중단없는 활동에 의해 사회경제적 처지와 재산의 유무, 신앙의 차이에 관계없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건국위업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이것은 그대로 조국통일을 위한 민족단합의 거대한 흐름을 의미했다.

민족대회합에 깃든 노고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의 비운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던 1948년 4월에 열린 남북연석회의는 민족대회합의 거대한 의미와 위력을 떨친 우리 민족사와 통일운동사에 특기할 장엄한 역사적 화폭이었다.

남북연석회의는 상반되는 남과 북의 두 지역에 사는 애국인사들과 정치세력이 민족공동의 요구와 이익에 기초하여 민족의 운명을 진지하게 상론하고 견해의 일치와 행동통일을 창출해내었으며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단선단정≫조작책동으로 인해 민족의 분열이냐, 통일이냐 하는 엄혹한 시기에 민족운명개척의 주체로서의 온 겨레의 거족적 단합을 이루어낸 민족적 대회합이었다.

남북연석회의는 김일성장군님의 민족대단결사상의 빛나는 승리인 동시에 회의의 성공적 보장을 위해 기울이신 김정숙여사님의 노고의 알찬 결실이었다.

1948년 2월 당시 미국이 유엔무대에서 비법적인 ≪단선≫결정을 조작해낸 것을 기화로 조성된 엄혹한 상황하에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제25차회의와 제26차회의에서 모든 민주주의적 역량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더욱 굳게 뭉치기 위한 광폭의 경륜을 제시하시면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소집을 발기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민족적 이념밑에 온 겨레가 단결할 수 있으며 민족의 단결을 이루어내기만 하면 나라의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전민족적 회합의 장인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제시하시었던 것이다. 이것은 민족의 분열이냐, 통일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민족대단결과 통일의 대로를 명시한 유일하게 정당한 통일방략이었다.

남북연석회의 소집에 대한 발기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남의 ≪자유신문≫ 1948년 3월 30일자는 ≪남북분열 3년의 암운을 헤칠 서광≫이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이 회합은 조선민족이 요구하는 유일한 활로이며 따라서 이를 희망하는 열의가 남조선 방방곡곡에 충만되고 있다. 이 구국운동이야말로 5천년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자지를 표현한 것이요, 모든 사대주의와 타력의존주의를 박차고 힘있게 진군하려는 민족의 거보로서 세계의 아무도 정당한 민족의 요구와 지향을 막지 못할 것이며 국내의 누구도 이 충만된 의욕과 의기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 그 뚜렷한 예증이다.

장군님께서 제시하신 남북연석회의 소집발기는 남북민중의 통일열기를 증폭, 확산시키고 있었다.

바로 그 전열의 기수의 위치에 서시어 달아오른 민중의 통일열기를 장쾌한 단결의 열파로 견인하여 민족대회합의 장?4월남북연석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데서 각방으로 지도력을 발휘하신 분김정숙여사님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회의준비에서부터 회의 개막과 진행, 회의 결속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을 일일이 살피시면서 연석회의의 성공을 위해 애써 노력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더 많은 이남대표들이 참석하여 이북의 대표들과 민족운명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상론할 수 있도록 그 준비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돌리시었다.

현실적으로 김일성장군님께서 발기하신 남북연석회의를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한 최선의 구국대책으로 받아들인 이남의 여러 정당, 단체들, 개별적 인사들 속에서 남북연석회의 참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날을 따라 늘어났다.

1948년 4월 3일, 서울 중구 필동에서는 1백여개의 중간 및 우익 정당, 사회단체 대표 2백여명이 모여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결성하고 유엔의 ≪단선≫결정에 항의하는 결의문과 ≪남북연석회의 추진에 관한 특별결의문≫을 채택했다. 앞을 다투어 회의 참가신청서를 낸 단체들 가운데는 이남의 여러 여성단체들도 있었다.

그러나 회의 준비위측은 여성들이 38도선을 넘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이남의 여성단체들에 한해서는 초청장을 적게 배정했다.

회의 준비위측에서는 이남민주여성동맹에서 3명, 이남자주여성동맹을 비롯한 중간여성단체들에서 한두명씩 해서 모두 6~7명만 참가시킬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남여성단체들의 의기를 저락시킬 수 있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4월 초 어느날 준비사업을 맡은 한 간부에게 장군님께서는 미제와 이남반동들이 망국적인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미쳐날뛰고 있는 오늘의 첨예한 정치정세하에서 나라를 사랑하며 조국의 통일을 원하는 각계각층 남녀인사들과 민중을 반미구국투쟁에로 한결같이 떨쳐나서도록 하기 위해 연석회의를 마련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강조하시었다.

≪장군님의 이 의도를 남조선의 모든 애국여성들이 깊이 인식하고 투쟁에 떨쳐나서게 하자면 연석회의에 참가할 것을 신청한 남조선의 여성단체들의 대표들이 다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즉시 간부들은 여사님의 가르치심대로 이남의 각계층 여성단체들을 포함시켜 대표인원수를 늘인 초청안을 김일성장군님께 올리게 되었다.

장군님께서는 그것을 보아주시면서 민주여성동맹을 비롯한 이남의 각계층 여성단체들에서 많은 대표들이 이번 연석회의에 참가하도록 초청하려는 것은 좋은 일이며 그들이 이번에 평양에 왔다가 새 조국 건설로 들끓는 북조선의 현실을 보고 온 민족의 힘을 단합하여 조국을 하루빨리 통일하려는 우리 민중의 절절한 염원도 알게 되면 새로운 열의를 가지고 남조선에 돌아가서 잘 싸워 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이렇게 되어 이남의 각계각층의 수많은 여성대표들이 여러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함께 김정숙여사님의 믿음과 사랑이 담긴 초청장들을 받고 38도선을 넘어 평양으로 오게 되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남여성대표들이 38도선을 무사히 넘어오도록 여러가지 대책을 친히 취해 주시었다.

당시 미제와 이남반동집단은 연석회의를 파탄시키려고 초청장을 받은 대표들에게 협박전화를 걸고 협박편지를 보내는 등 별의별 책동을 다해 나섰다.

38도선 곳곳에 깡패들을 매복시켜놓고 북행길에 오른 대표들을 폭행했으며 반당종파분자들은 회의 날짜가 달라졌다느니 뭐니 하면서 대표들 속에 혼란을 조성했다.

특히 이북에는 여성단체가 민주여성동맹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여성동맹이 아닌 여성대표들은 평양에 가도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비열한 요언까지 퍼뜨렸다.

여사님께서는 연락원을 지체없이 서울에 보내시어 38도선을 넘지 못해 어쩔 바를 몰라하는 그들에게 여성대표들끼리만 길을 떠나지 말고 백범 김구일행과 기자들이 들어올 때 함께 출발하도록 해주시었다.

이리하여 미군정의 노골적인 방해책동과 반동들의 테러위험 속에서도 20여명이나 되는 이남의 여성대표들이 38도선을 넘어 무사히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사님께서는 여러 여성대표들이 평양에 도착하자 그들의 기분상태며 건강상태를 알아보시었다. 그리고 옷차림이 각양각색인 그들에게 연령과 인품에 맞는 조선옷을 잘 지어 입혀 회의에 참가시키도록 하시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남녀평등권의 실시로 수천년 내려오던 봉건적 및 인신적 예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공장의 주인, 땅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고 보람찬 생활을 누려가는 이북여성들의 생활과 건국열의로 들끓는 이북의 공장, 농촌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제반 조치도 취해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적극적인 활동은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데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

드디어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온 민족의 지대한 관심 속에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가 성대히 막을 올렸다.

회의에는 북조선노동당, 조선민주당, 천도교청우당을 비롯한 북조선의 3개 정당, 12개 단체들과 남조선노동당, 근로인민당, 신진당, 청우당, 근로대중당, 민주한독당을 비롯한 남조선의 31개 정당, 사회단체를 포함하여 도합 56개 정당, 사회단체 성원 1천여만명을 대표하는 6백95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4월 21일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북조선 정치정세≫라는 역사적인 보고를 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보고에서 연석회의가 가지는 커다란 의의와 조성된 정치정세를 분석하신 다음 미국의 민족분열정책과 ≪5·10단선≫책동을 준렬히 폭로규탄하시었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당파와 종교의 소속, 정치적 견해를 가리지 말고 단결하여 망국적 단독선거를 파탄시키고 민주주의적 원칙에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거족적 투쟁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시었다.

대표들의 토론에 이어 회의에서는 김일성장군님의 보고정신을 반영하여 ≪조선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와 격문을 채택하였다.

연석회의는 부과된 사명을 훌륭히 수행하고 4월 23일 막을 내리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연석회의에서 천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사상과 취지를 이남대표들에게 깊이 인식시키고 그들을 연석회의과업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궐기시키기 위해서도 온갖 심혈을 다 바치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남의 여성대표들을 만나주시고 연석회의에서 하신 장군님의 보고와 접견석상에서 하신 장군님의 말씀을 지침으로 하여 일해 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연석회의의 기본사상은 조국분열의 위기에 처한 이 엄혹한 시기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모든 사람들이 당파와 종교의 소속, 정견의 차이를 가리지 말고 하나로 단결하여 일대 구국투쟁을 벌이는 것이며 이남의 민주주의적이고 애국적인 여성조직들은 마땅히 이번 연석회의의 사상대로 자기 대열에 더 많은 여성군중을 묶어세워 반미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었다. 그리고 당면해서는 미제와 반동들의 ≪5·10단선≫을 파탄시키는데로 투쟁의 화살을 집중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가르치심에서 크게 고무를 받은 이남의 여성대표들은 그후 필승의 신념과 투쟁의욕을 갖고 이남으로 돌아와 여성조직들을 발동하여 미국과 그 주구배들의 국토양단, 민족분열책동을 짓부수기 위한 과감한 투쟁을 벌여나갔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남북연석회의 나날에 또한 길을 잘못 들었던 정당, 사회단체들이 궤도수정을 하여 옳은 길에 들어서게 하고 잘못 살던 사람들이 인생전환을 하여 올바로 살게 하는데도 지도력을 발휘하시었다.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이남의 정당, 사회단체들 가운데는 자주여성동맹이 있었다. 4월연석회의에 참가한 자주여성동맹 책임일꾼으로 말하면 원래 민족주의적 영향을 많이 받은 불교관계자였다. 그는 공산당 영향하의 여맹조직과도 손잡기 싫고 이승만의 반동여성단체와도 손잡기 싫어 따로 자주여성동맹을 조직했었다.

이 동맹의 정치적 주장은 여성조직은 마땅히 여성해방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창기제도와 축첩, 인신매매행위를 없애는 것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여권옹호운동과 문화계몽운동 등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데로부터 자주여성동맹대표들은 남북연석회의기간 좀처럼 속을 주지 않았다. 연석회의 휴식시간에 다른 여성대표들은 서로 자기들의 소감을 나누곤 했으나 그들만은 함구무언이었고 휩쓸리려 하지 않았다.

황해제철소와 곡산공장 같은 여러 참관대상지들을 돌아보면서도 그랬다.

연석회의준비위측의 한 간부는 무슨 곡절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숙소를 찾아가 불편한 점이 없는가고 물었지만 나이많은 사람들이라고 방도 뜨뜻한 데 알선해 주고 끼니마다 진미로 성의를 다해 환대해 주는데 무슨 불편이 있겠는가고 하면서도 회의에서 논의되는 내용에 대해서나 여러 곳을 돌아본 참관소감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던 자주여성동맹 책임일꾼이 중앙여맹청사에서 김정숙여사님의 지도밑에 진행된 회의에 방청으로 참가한 후 숙소에 돌아와서 곧 회의준비위측 간부에게 전과는 달리 여사님의 접견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줄 수 없겠는가고 제기해 왔다.

여사님을 만나뵈옵고 자기가 모대기고 있는 문제를 말씀 올리고 가르치심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회의준비위측은 정치적 입장과 연석회의과정에 그들이 취한 태도, 특히 회의를 전후하여 몹시 바쁘신 여사님께서 시간을 내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 등 여러가지 사정을 고려해 그의 제기를 심중히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그들을 만나 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남의 자주여성동맹은 김규식의 민주여맹의 외곽단체와 같은 여성조직이기 때문에 이미 장군님께서 남북연석회의를 소집하실 때 가르쳐 주신대로 그런 민족주의 세력을 적극 묶어세우는 방향에서 사업을 해야 한다고 일꾼들을 깨우쳐 주시었다.

≪물론 자주여성동맹은 민주여성동맹에 비해 볼 때 작은 여성단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로 지식인들, 종교인들 그리고 생활수준으로 볼 때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지금 남조선반동들이 바로 이러한 계층출신의 여성들을 저들의 무슨 부인회라는데 끌어넣으려고 날뛰고 있는 조건에서 우리가 자주여성동맹과 잘 사업하고 그들과 긴밀한 유대를 이루어 나라의 통일을 위한 공동투쟁을 힘있게 벌여나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자주여성동맹대표단은 김정숙여사님의 접견을 받고 그분의 가르치심을 받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김정숙여사님의 겸허한 태도와 따뜻한 말씀에 깊이 감동된 자주여맹 책임일꾼은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의 극진한 보살피심에 의하여 참으로 훌륭한 조건에서 숙식을 하고 있으며 현실참관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고 말씀드리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접견좌석은 더욱 화기에 넘쳐났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그들과 허물없이 웃기도 하시며 다정히 담화를 하시다가 이제 모두 서울로 돌아가겠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고 하시었다.

그러자 자주여성동맹 책임일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주여성동맹을 남조선민주여성동맹에 합동하는 문제를 상론해 보겠다고 정중히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뜻밖의 제의였다. 접견에 동참했던 일꾼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 있을 때는 민주여성동맹을 좌익으로, 이승만계열의 부인회조직을 우익으로 치부하고 자기들은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순수한 여성운동단체임을 표방해온 그들로서 이것은 사실상 좌익에 흡수되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주여성동맹 책임일꾼은 이번에 북에 들어와 여성운동실태를 보며 많은 것을 느꼈으며 특히 자주여성동맹이 벌여온 여성운동을 비판적으로 돌이켜보게 되었다고 하면서 북조선에서 남녀평등이 법적으로 보장되고 여성들이 나라의 주인, 공장과 농촌의 주인으로서 떳떳하게 자기 권리를 행사하면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은 민족적 해방의 과업이 실현되고 주권문제를 해결한 결과라는 것과 그래서 이남민주여성동맹이 무엇보다도 미제와 그 주구배들을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한 투쟁에로 여성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씀올리었다.

그것은 분명 사상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여사님께서는 그가 여성해방에 앞서 민족해방과 나라의 독립, 민주정권의 수립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데 대해 격려해 주시면서 우리 나라 민족문제의 특수성으로부터 제기되는 여성운동의 특성에 대하여 다시금 하나하나 설명해 주시었다.

≪우리는 여성해방의 과업을 실현하는 것은 민족적 해방과 독립을 달성하는 문제와 밀접히 연결된 문제이며 민족적 해방을 이룩하고 나라의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며 인민이 주권의 주인으로 되어야 여성해방의 과업도 종국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민족해방이 실현되고 인민정권이 수립된 북조선에서는 여성해방문제가 성과적으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에서와 같이 아직도 인민들과 여성들이 미제침략자들의 예속하에 놓여 있고 인민의 주권이 없는 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해방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남조선여성들 속에서 문화계몽사업을 하고 그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당면하여 중요하게 나서는 남조선여성운동의 임무가 미제와 이승만매국도당을 반대하고 나라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데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주권이 인민들의 손에 장악되지 못한 조건에서 진행되는 여성운동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성해방문제에 관한 김정숙여사님의 사리정연한 말씀은 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자주여성동맹 책임일꾼은 인생의 거의 전부를 방황하다 노구에 이르러 비로소 맞이한 여성운동의 참다운 지도자,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하나의 조언이라도 더 듣고 싶어했다.

그의 심정을 헤아리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남의 구체적 실정을 분석하시면서 현단계에서 자주여성동맹이 민주여성동맹과 통합해서는 안되며 지금 두 조직을 합하면 여성운동에서 내세웠던 투쟁구호가 달랐던만큼 자주여성동맹의 구성원들과 민주여성동맹의 구성원들 사이의 융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 또한 자주여성동맹구성원의 구성을 놓고 볼 때 민주여성동맹과의 통합을 찬성하지 않고 또 다른 여성단체를 새로 조직하려 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시었다. 그리고 자주여성동맹에는 주로 민족주의적인 입장을 가진 ≪임정≫을 지지하는 지식인, 종교인, 상공인 출신의 여성들이 망라되어 있는 조건에서 남조선에 있는 이러한 계층의 여성들을 각성시키고 반미구국투쟁에로 이끄는데서는 근로여성들이 기본역량으로 되어 있는 남조선민주여성동맹보다 자주여성동맹이 더 적합하며 따라서 자주여성동맹은 자기 조직을 해체할 것이 아니라 유지하면서 중간층 여성들을 더 많이 자기 대열에 망라시키면서 남조선민주여성동맹과 공동보조를 취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벌여나가는 것이 오늘 중간층 여성들을 반미구국투쟁에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망라시키는 좋은 방도라고 할 수 있다고 하시었다.

자주여성동맹 책임일꾼의 감동은 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사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자주여성동맹을 반미자주통일을 위한 애국적 조직으로 튼튼히 꾸리고 이남민주여성동맹과 굳게 손잡고 나아가며 당면하여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투쟁에 적극 떨쳐나설 것을 굳게 맹약했다.

그후 자주여성동맹은 서울에 돌아와 여사님앞에서 다진 맹약을 지켰다. 이 동맹은 중간층 여성들을 자기 조직에 튼튼히 결속하고 이남민전에 망라되어 나라의 통일을 위한 성전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과 반동세력들은 이남의 자주여성동맹을 반동적 부녀단체에 끌어넣으려고 온갖 회유책을 다 썼으나 자주여성동맹은 자기의 입장을 확실히 지켜냈다.

1949년 6월 이남의 민전과 북조선 민전이 하나로 통합되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으로 강화발전될 때 자주여성동맹도 이남민주여성동맹과 함께 그의 적극적인 구성단체로 되었다.

백범의 인생전환

남북연석회의를 계기로 김구가 반공을 버리고 연공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커다란 인생전환이었다. 연공이라는 것은 공산주의를 용납할 뿐만 아니라 그와 손잡고 반외세, 자주의 길로 나간다는 것이니 그렇듯 반공에 집착했던 김구가 연공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그에게서 일대 인생전환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도 김정숙여사님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백범 김구로 말하면 공산주의와의 제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완고한 반공주의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8·15후 중국에서 돌아온 김구는 친일지주, 자본가 세력의 집단인 한민당이 임시방편으로 내세웠던 ≪임정무대≫에 편승하여 민주세력과 정면대립해 나섰는가 하면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이 전해졌을 때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이승만과 쌍벽이 되어 반탁운동을 벌이면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의 휘하에 결집되었던 우익반동들이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 강양욱목사의 아들, 딸을 테러살해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이무렵 ≪테러의 두목≫으로 불리울 정도로 민주세력 특히 이북민중에게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해방전 ≪임정≫시절에도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테러를 서슴치 않았다. 그의 영향하에 ≪임정≫과 기맥이 통하고 있던 동북의 민족주의자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가는 청년들을 부당하게 살해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를테면 김구는 해방전부터 공산주의와는 화해할 수 없는 반공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같이 반공우익계열의 거두로 알려진 김구가 비록 반북반공입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미국의 ≪단선단정≫책동에 동조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한 점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에게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한자리에 모여앉아 구국대책을 논의하려는 의사를 표명하시었다.

1948년 3·1 기념식장에서 38도선을 놔둔 채 단독선거를 강행하려는 이승만과 결별을 선언한 김구는 마침내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고 북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러한 김구가 김일성장군님의 의사를 따르기로 하고 연석회의 참가를 결심한 점에 유의하시고 그에게 김일성장군님의 민족자주사상에 대하여서와 공산주의자들이 이북에서 실시한 제반 민주주의적이며 민중적인 시책들에 대하여 똑똑히 알려준다면 그가 스스로 반공의 길에서 벗어나 연공의 길, 민족단합의 길에 나서리라고 믿으시었다.

이리하여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내놓으신 노선과 정책에 대하여 깊이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구와 이미 잘 알고 있으며 김구가 믿음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을 내세워 그와의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시고 그러한 적임자로 안신호를 택하시었다.

안신호는 민족주의자로서 명망이 높았고 한때 상해임정의 요직에도 있었던 도산 안창호의 누이동생으로서 안창호를 독립운동의 선배로 몹시 존경하여온 김구와 오래전부터 각별히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안신호는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의 각별한 믿음 속에 남포시 여맹위원장을 거쳐 이북의 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어 김구와 사업하기에는 여러모로 적임자였다. 하지만 안신호는 이러한 중임을 맡아나서기를 주저했다.

그 까닭은 김구의 사상과 정치적 견해, 그의 성격상 완고함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김구와의 단합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안신호를 만나시고 김구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장군님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는 것과 그러나 그가 최근에 미제의 침략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장군님과 손잡고 나갈 의향을 표명하였다는 점, 장군님께서는 그의 과거보다는 애국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현재의 지향을 귀중히 여기시어 그와 손잡기로 하시었다는 점, 진심으로 애국의 길로 나가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과거를 묻지 않고 손잡고 나아가는 것이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 시기부터 견지해 오신 장군님의 일관한 입장이라는 점에 대해 하나하나 일깨워 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계속하여 간고했던 항일혁명투쟁시기 위대한 장군님께서 한몸의 희생을 무릎쓰시고 민족주의자들과 중국인반일부대 두령들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신 사실을 생동하게 이야기 해 주시었다. 이어서 여사님께서는 편견과 아집으로 굳어진 사람들의 완고한 심장을 움직이게 한 것은 바로 진리의 힘이며 장군님께서는 언제나 진리의 편에서 진리를 주장하시었기 때문에 돌심장도 울리고 바른길로 들어설 수 있게 하시었다고 하시면서 김구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확신을 표명하시었다. 그러시고는 그가 일단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미제의 침략적 야욕을 감지했으니 장군님의 정책이 진리임을 일정정도 이해했을 것이며 그가 장군님의 정책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김구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이번 연석회의의 성사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상세히 가르쳐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김구의 사상동향에 대한 분석은 정확했으며 그에 대한 믿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게 된 김구는 민족자주정신, 민족애로 일관된 장군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비로소 민족의 위대한 영수의 모습을 뵈옵게 되었으며 자기의 북행길이 행운의 길임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연석회의에 참가하여 김일성장군님의 보고를 지지한다는 취지의 짧은 토론을 하는 것으로 심중의 변화를 표현했고 안신호와 더불어 북의 여러 곳을 편답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로서는 듣는 것, 보는 것 모두가 놀랍기만 하였다. 김구의 마음속에는 크나큰 격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일생동안 신조로 삼아온 반공이념이 물먹은 흙담처럼 무너져 내림을 의식하였다.

그는 이같은 인생전환의 심적 변화를 김일성장군님께 이렇게 술회했다.

≪……저는 이번에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애국자들입니다. 우리는 미국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애국자인 장군님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저는 이전에 공산주의자들이란 협애하고 몹쓸 사람인줄로만 알았으나 이번에 와보니 공산주의자들은 도량이 크고 관대하며 얼마든지 합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장군님을 받들어 나갈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장군님은 세계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분이시며 조선에서 유일무이의 수령이십니다.

장군님께 ≪상해임시정부≫의 인장을 드리겠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이번에 내가 남조선에 나갔다가 일이 잘 안되어 들어오게 되면 여생을 보내도록 과수원이나 하나 주십시오. ……≫

반공을 일삼던 완고한 민족주의자 김구는 이렇게 자기의 정치행로와 인생역정을 연공애국의 길로 궤도수정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김구로 하여금 이같은 확신을 갖고 연공애국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그의 심장을 강렬하게 두드리는 김일성장군님의 탁월한 구국의 경륜과 애국애족의 뜨거운 열정이었다. 더욱이 그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장군님의 겸허한 인품, 만사람을 품어안는 광폭적인 도량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탁월한 경륜이며 얼마나 위대한 인품인가, 바로 이런 분이시야말로 우리 민족이 받들어 나갈 참된 영도자이시다, 그분이 공산주의자이시면 어떻단 말인가, 그런 민족자주정신이 투철한 공산주의자라면 백번이라도 운명을 같이할 것이다. 이러한 격정 속에서 그는 김일성장군님께 조국과 자신의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해야 한다는 확고한 결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김정숙여사님께서 의도하시고 바라신 바였다. 한사람이라도 더 참애국의 길로 돌려세우시려는 여사님의 뜨거운 지성에 떠받들려 김구의 인생에서는 그토록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범 김구의 그후의 활동은 그것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이남에서의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소미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데 남북의 의견을 같이하였음을 밝히는 성명을 냈다.

그리고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등 80여개 단체로 이루어진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단선단정≫을 분쇄하고 민족통일정부수립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그의 영향력이 날로 커가는데 당황한 미제와 반동세력은 1949년 6월 26일 그를 암살했다.

당시 당국이 발표한 ≪범인의 진술≫은 김구가 단독정부반대, 평화통일이름아래 공산당과 제휴, 남북정치협상에 의한 연립정부수립기도, 미군철수주장, 미국경제원조반대, 북조선찬양 등 ≪불온선동≫을 하였기에 암살을 감행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김구가 민족앞에 서약한 연공애국의 길, 구국통일의 길에서 자기의 최후를 마치었음을 보여준다.

김구가 반동들에게 암살되었다는 비보를 들으신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이것은 틀림없이 미국놈이 쏜 것이라고 하시면서 김구는 우리와 언약을 하고 나가서 미국놈들을 반대하여 싸웠고 그는 비록 늦게나마 자기의 과거를 뉘우치고 애국의 길에 들어서서 연공을 지지한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하시면서 아까운 인물을 잃은 비통함을 금치 못해 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당시 평양에서 열리고 있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에서 고 김구선생에 대한 조의를 표시하도록 하시었다.

역사는 연공의 길, 구국통일의 길에서 쓰러진 김구의 최후를 두고 부끄럽지 않은 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정치가에게는 정치적 신념이 있는 것이다. 그런만큼 정치에 뜻을 품고 정계에 나선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번 그루를 박은 자기의 신념을 바꾼다는 것은 대단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더욱이 정치경력을 마무리하는 시기에 와서 자기의 정치이념을 바꾼다는 것은 누구나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인생의 노령기에 인생의 방향타를 돌려 반공으로부터 연공에로 정치이념을 바꾼 것은 장군님의 민족대단결사상에 공감하고 그 길이야말로 참으로 민족을 위하고 나라를 구원하는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범 김구는 자기의 파란곡절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김정숙여사님께서 기울이신 노고가 비상히 크고 바치신 열정이 한없이 뜨거워 통일위업의 개척기부터 민족대단결의 흐름은 무엇으로써도 막을 수 없는 격류를 이루었고 그에 힘입어 통일행 열차는 역풍을 제압하며 힘차게 전진 또 전진했다.

 

4. 통일애국투사들의 스승

 

훌륭한 인재의 곁에는 현명한 스승이 있는 법이다.

민족분열의 비운을 종식시키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헌신분투하는 통일애국투사들의 가까이에도 위대한 스승이 계시었다. 그분이 다름아닌 김정숙여사님이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백두산시절에 불멸의 넋으로 가슴깊이 새기신 주체의 진리와 해방후 김일성장군님을 보좌하시는 과정에 부동의 신념으로 체득하신 조국통일경륜으로 통일애국투사들에게 참된 인생의 철리와 투쟁의 진로를 명시해 주시었고 항일혈전의 나날 광범위한 대중 속에서 익히신 풍부한 지하공작경험으로 통일애국인사들을 유능한 정치활동가로 육성하시였다. 그리고 총대로 일제를 격멸소탕하고 혁명의 사령부를 보위하시면서 체득하신 신비한 양병술로 통일애국투사들을 무적의 용사로 키워주시었다.

그 손길에 의해 자라난 자랑스러운 통일애국투사들 가운데는 무장으로 김일성장군님의 자주통일노선을 받들어온 빨치산영웅들도 있고 능숙한 지하공작으로 조국통일운동의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온 통일전위투사들도 있으며 합법적인 대중운동으로 통일운동의 대하를 창출하는데 적극 이바지한 애국인사들도 있다.

참으로 김정숙여사님의 손길은 백두산시절에 터득하신 위대한 사상과 비상한 슬기, 뛰어난 용맹으로 통일애국투사들을 키워내신 은혜로운 손길이었다.

그러기에 김정숙여사님은 통일애국투사들과 우리 민중의 가슴에 민족통일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자애로운 스승의 영상으로 뚜렷이 새겨지고 있다.

통일애국투사들을 이끄시어

통일조국을 창출하고자 일떠선 이남민중의 투쟁열기는 방방곡곡을 휩쓸었다. 이러한 반미구국, 조국통일 투쟁의 선봉에 서서 대중을 이끌고 미국강점자들과 이승만반역도당을 전율케 한 이들은 바로 통일전위투사들이었다.

이들은 광범위한 대중을 계몽각성시켜 통일운동의 대오에 대거동참시키면서 합법투쟁과 비합법투쟁, 비폭력투쟁과 폭력투쟁을 적극 벌여 온 이남땅에 통일운동의 파고를 불러왔다. 이들 통일애국투사들에게 혁명의 진리, 투쟁의 진로를 가르쳐 주시고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시어 투쟁의 선도자적 책무를 다하게 하신 위대한 지도자, 자애로운 스승김정숙여사님이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조국통일운동이 중차대한 것이기에 통일운동의 선봉에 나선 통일애국투사들을 가장 귀중한 혁명전우로 여기시고 그들과의 사업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통일애국투사들을 참인생의 진리를 터득한 견결한 투사들로 육성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시었다.

통일애국투사들은 가장 아름답고 값높은 삶을 추구하는 통일운동의 전위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신의 안락을 버리고 생명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통일의 길에 흔연히 한몸바쳐 나섰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아름답고 값높은 삶이란 어떤 삶인가, 가장 값높고 보람있게 살자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사님께서는 통일애국투사들에게 이런 인생의 철리를 일일이 가르쳐 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무엇보다도 통일애국투사들의 가슴마다에 민족의 영수에 대한 충효를 깊이 심어주시었다.

민족민중의 영수에 대한 충효는 혁명가의 기본표징이고 인생의 가치를 최고가치로 승화시키는 기본요건이며 민중에 대한 헌신과 벽혁운동에 대한 투신을 낳는 기본원천이라는 것이 여사님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영수에 대한 충효는 영수의 위대성에 대한 절대적 공감의 반영이라는 것이 여사님의 철석같은 신념이었다.

이로부터 김정숙여사님께서는 통일애국투사들에게 김일성장군님의 위인상을 깊이 체득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시었다.

한번은 여사님께서 시인 조기천을 그들이 공부하는 한 학원에 보내시었다. 학원학생들에게 그의 장편서사시 ≪백두산≫낭송을 통해 김일성장군님의 위대성을 심어주시자는 의도에서였다.

시인은 시랑송에 앞서 김정숙여사님께서 말씀이 계시어 통일애국투사들 앞에서 미흡한 자기의 시를 낭송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다음 잠시 시상에 잠기는 듯하더니 열정과 기백이 넘친 어조로 원고도 없이 시 ≪백두산≫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

오오 조상의 땅이여!

오천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 때

떨어져나간 그 토막토막

얼마나 원한의 선혈로 딩굴었더냐?

조선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을 때

몇만의 지사 밤길 더듬어

백두의 밀림 찾았더냐?

가랑잎에 쪽잠도 그리웠고

사지를 문턱인듯 넘나든 이 그 뉘냐?

산아 조종의 산아 말하라-

해방된 이 땅에서

뉘가 인민을 위해 싸우느냐?

뉘가 민전의 첫머리에 섰느냐?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서사시에 펼쳐진 장엄하고도 격동적인 세계에 깊이 잠겨든 것이었다.

고요한 장내에 시인의 목소리가 계속 울리었다.

 

쉬-이-

바위위에 호랑이 나섰다

백두산 호랑이 나섰다

앞발을 거세게 내어뻗치고

남쪽하늘 노려보다가

≪따-웅-≫산골을 깨친다

그 무엇 쳐부수련듯 톱을 들어

≪따-웅-≫

 

……

산비탈 바위위에

청년 한분 버쩍 올라선다

후리후리한 키꼴에

흰 두루마기자락이

대공으로 솟아오르려는

거센 나래같이 퍼덕이는데

온몸과 팔과 다리-

모두다 약진의 서슬에 불붙고

서리발 칼날의 시선으로

싸움터를 단번에 쭉-가르며

≪한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부르짖었다

바른손 싸창을

바위아래로 번쩍이자

마지막 발악쓰던 원쑤 두놈이

미끄러지듯 허적여 뒤어진다-

≪한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재쳐 부르짖었다

이는 이름만 들어도

삼도왜적이 치떠는

조선의 빨치산 김대장!

이는 장백을 쥐락펴락하는

태산을 주름잡아 한손에 넣고

동서에 번쩍!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

축지법을 쓴다고-

북천에 샛별 하나이 솟아

압록의 줄기줄기에

그 유독한 채광을 베푸노니

이 나라에 천명의 장수 났다고

백두산두메에서 우러러 떠드는

조선의 빨치산 김대장!

학생들은 백두광야의 설한풍 속에서 광복의 혈전을 벌이신 만고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장군의 불멸의 위인상을 경건히 그려보며 흠모의 격정으로 가슴들먹이었다. 그리고 장군님을 충성으로 받들어 조국광복을 이루어낸 항일빨치산들처럼 싸워 조국통일위업을 기필코 성취하리라는 결의를 가다듬었다.

여사님께서는 통일애국투사들에게 참삶의 철리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1948년 가을 어느날이었다.

두명의 이남빨치산처녀들을 만나주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그들의 나이며 생활형편을 구체적으로 요해하시었다.

그들이 각각 20살, 23살 꽃나이라는 것을 들으신 여사님께서는 밝게 웃으시며 참으로 좋은 때라고, 자신께서도 동무들만한 때에는 범도 잡을 것 같았다고, 정말 세상에 무서운 것, 두려운 것 없고 못해낼 일이 없었다고 하시면서 여사님께서는 아까운 청춘시절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고 하시었다.

빨치산투쟁은 쉬은 일이 아니지만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사람이 있어야 통일도 되고 조국도 빛내며 민족의 자랑도 떨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여사님께서는 추억에 잠기신듯 잠시 동안을 두셨다가 말씀을 이으시었다.

≪우리도 산에서 싸울 때에는 온몸이 얼어서 감각을 잃은 때도 있고 땀과 비로 군복이 마르는 날이 없었고 밤잠도 제대로 못자고 투쟁했습니다. 더구나 지하투쟁할 때에는 억울한 일을 당하는 때도 많았지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사람만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으로서 사는 보람이 있고 영예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여사님께서는 잠시 말씀을 끊으셨다가 두 처녀에게 의미있는 눈길을 주시며 말씀을 이으시었다.

≪사람으로 한번 세상에 태어난 바에야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한몫 기여하였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조국과 민족의 운명이야 어떻게 되든지간에 자기 혼자만 편안히 살면 된다는 식으로 그날그날 밥이나 먹고 흥타령이나 부르며 허송세월을 해서야 무슨 사는 보람이 있겠습니까. 장군님의 말씀대로 하루를 살아도 똑똑히 살아야 합니다.≫

참인생의 진리를 밝혀주는 뜻깊은 말씀이었다. 심장에 새기고 뼈에 새겨야 할 고귀한 생의 철리였다. 그것은 그대로 통일애국투사들의 생의 좌표였다.

이날 여사님께서는 이남의 처녀빨치산들에게 혁명가들이 지녀야 할 혁명적 기질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그들중 한 처녀의 부모와 오빠가 미국놈들에게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꼭 부모와 오빠의 원쑤를 갚아야 한다시며 산에서 싸울 때 원쑤들에게 부모를 잃은 유격대원들이 많이 있었다고, 그들의 두눈은 항상 원쑤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이글이글 타번졌고 전투때에는 누구보다 먼저 총창을 비껴들고 돌격의 선두에 섰으며 부모를 대신하여 마지막까지 잘 싸웠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여사님께서는 항일유격대의 용감하고 슬기로운 여성대원들은 일상생활에서는 마음씨 곱고 순박했지만 전투에서는 펄펄 나는 싸움꾼으로 명성을 떨치곤 하였다고 말씀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러한 용감성과 대담성은 바로 불타는 적개심, 혁명에 대한 높은 자각, 무비의 희생정신에 바탕하고 있음을 강조하시었다.

여사님의 가르치심은 통일애국투사들의 슬기와 용맹을 키워주는 자양분으로 되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통일애국투사들에게 항일혁명투쟁경험 특히 자신께서 몸소 쌓으신 지하투쟁경험을 많이 가르쳐 주시었다.

1948년 8월 어느날 한 통일애국투사를 만나시고 하신 다음의 가르치심은 그 사례의 하나이다.

≪지난 항일무장투쟁시기 마을사람들 속에 들어가 지하공작을 해본 데 의하면 적구투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민대중 속에 뿌리를 박는 것이었습니다. 군중들 속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지 못하면 지하투쟁을 성과적으로 해나갈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혁명투쟁이 다 그러하지만 특히 지하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중 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을 굳게 믿고 대중과 조직에 의거하여 투쟁하는 것입니다. 대중 속에 깊이 뿌리박자면 자기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안의 군중의 사상동향과 생활풍습을 손금보듯 알고 있어야 하며 매사를 그에 어울리게 처리하고 조금도 어색한 감이 나지 않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대원들을 적구에 파견하실 때에는 그 지방주민들의 구성상태와 사상동향, 생활풍습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고 그에 맞게 투쟁하도록 하나하나 가르쳐 주시었습니다.

적구투쟁에서 중요한 다른 하나의 문제는 먼저 군중들 속에서 핵심을 장악하고 그들을 키우고 핵심을 중심으로 지하혁명조직을 튼튼히 꾸리며 그 주위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굳게 묶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핵심을 바로 장악하고 그들과의 사업을 잘하는 것이 지하투쟁의 성과여부를 좌우하는 생명선이라고 가르치시었습니다.

적구에서 지하혁명조직을 새로 내오거나 확대할 때에는 반드시 적들로부터 엄호조직을 잘하여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지난 항일무장투쟁시기 도처에 조직되어 있는 지하혁명조직을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위하고 그의 원활한 활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우수한 지하혁명조직성원들을 수많이 적통치기관에 박아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혁명조직성원인 ≪구장≫이라든지 ≪순사≫들을 끼고 지하혁명투쟁을 합법적으로 힘있게 벌여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하투쟁에서 중요한 문제는 또한 적아를 똑똑히 가려보고 매사에 혁명적 경각성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적구에서는 순간의 실수가 혁명사업 전반에 엄중한 후과를 미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의 말이나 한걸음의 행동도 거듭 생각해보고 심중하게 하여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지하투쟁을 하는 전과정에 여러번 느꼈습니다.

또한 지하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려운 난관에 봉착할수록 덤비거나 당황해하지 말고 오직 장군님만을 믿고 따르겠다는 혁명적 신념을 굳게 가지고 침착하고 결단성있게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 혁명의 앞길에는 장군님께서 서계신다, 장군님께서 우리 혁명을 영도하시는 한 혁명승리는 확정적이다, 장군님을 모시고 혁명하는 길에서는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이다, 이런 신념을 가지니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건국의 길위에 빛나는 불멸의 영상≫, 근로단체출판사, 1994년, 191∼192쪽)

그야말로 통일애국투사들의 심장 속에 항일의 혁명정신과 투쟁의 지침을 새겨주고 어떤 역경에 처해도 혁명가의 입장과 자세를 가다듬게 할 신념의 기둥, 마음의 기둥을 깊숙이 세워주는 귀중한 가르치심이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1949년 3월 이범열을 비롯한 이남의 여성빨치산대원들을 만나주시었을 때에도 적구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옳은 지하사업방법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군중 속에 발을 튼튼히 붙이고 핵심에 의거하여 사업하려면 군중의 심리, 정서, 요구를 잘 알고 그들의 친어머니가 되고 친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항상 경각성을 높이고 밀정을 조심하며 여성군중 속에 푹 파묻혀 앞뒤가 딱딱 맞게 행동해야 놈들에게 끈을 잡히지 않는다고 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적들과 불의에 맞다들어 피치 못할 정황에 부딪쳤을 때에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제정신으로 주도권을 쥐고 선수를 써야 한다고 일일이 가르쳐 주시었다.

여사님의 가르치심 하나하나는 어떤 경우에도 적후투쟁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막힘없이 처리하고 성공의 대안에 가닿을 수 있게 하는 귀중한 활동지침이었다.

하기에 통일애국투사들은 여사님의 가르치심을 받고나면 마치도 하나의 혁명대학을 나온듯 눈앞이 환히 열리고 자기들이 걸어가야 할 곧바른 투쟁의 길을 내다볼 수 있었다.

김일성장군님을 가까이 모시고 장구하고 간고한 항일전을 벌이시던 나날 여사님께서 몸소 쌓아올리신 투쟁경험들은 그대로 이남빨치산들에게 있어서 피와 살로 되었다. 김정숙여사님의 신비한 사격술 역시 이남빨치산대원들인 통일애국투사들에게 있어서 귀중한 교범으로 되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통일애국투사들은 파쇼테러가 난무하는 적구에서 활동하는 여건에서 사격술을 연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시었다.

원래 변혁의 길에 나선 사람은 사람들을 깨우치고 이끌어 주는 정치활동도 잘해야 하지만 원쑤들을 총대로 제압하는 사격술도 능해야 한다. 이것이 백두산시절부터 신비로운 사격술로 이름을 떨쳐오신 여사님의 지론이고 신념이었다.

그래서 김정숙여사님께서는 통일애국투사들이 여사님의 백발백중의 사격술의 비결을 알려고 할 때면 그 전수를 위해 시간과 정력을 아끼지 않으시었다.

산야에 갖가지 열매가 주렁져 무르익던 1948년 9월 어느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남빨치산 여대원들로부터 총을 잘 쏘신다는데 그 비결을 가르쳐 줄 데 대한 요청을 받으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요리사는 음식을 잘 만들어야 하고 재봉공은 바느질을 잘해야 하는 것처럼 빨치산은 총을 잘 쏘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시고 나서 백두산에서 싸울 때 빨치산들은 누구나 다 총을 잘 쏘았는데 사격술도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인 노력을 거쳐야 한다고 하시면서 명사수가 되는 비결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빨치산투쟁을 해본 사람만이 총알이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안다, 빨치산의 총알은 동지들의 피와 목숨의 대가로 얻어진 것만큼 절대로 빗나가는 총알이 없어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꾸준하게 연마하는 것이 명사수로 되는 비결이다, 조준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짬만 있으면 앉아서도 서서도 또 길을 가면서도 조준연습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총이 자기 몸의 한부분처럼 되어버려서 마치 그릇이나 옷가지를 쥘 때 손을 뻗치면 그것들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쏘려고 마음먹은 것은 틀림없이 맞히게 된다, 조준을 안해도 그쪽으로 총신을 돌려대고 당기면 맞는다, 이렇게 총이 제것으로 될 때까지 익히면 된다고 가르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꼭 맞히겠다는 정신이 중요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솜씨가 몸에 푹 배일 때까지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었다.

여사님의 말씀은 자신의 경험담이었다. 그래서 그날의 말씀은 더욱 실감이 있었다. 여사님께서는 사격술을 연마하는데서 본인의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기 위해 이조 선조때의 명필인 한석봉과 그의 떡장사어머니에 대한 옛이야기도 들려주시었다.

……옛날에 떡장사어머니는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10여년간이나 떡장사를 하였다. 아들이 공부를 끝내고 돌아온 날 밤 어머니는 켜놓았던 등불을 끄면서 누가 보지 않고 떡을 더 잘 빚고 글씨를 더 잘 쓰는가 내기를 하자고 아들에게 말했다.

이리하여 모자간에 내기를 하였는데 어머니는 여러가지 떡을 가?하게 잘 빚었는데 아들은 글씨를 잘 쓰지 못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보고 글씨를 잘 쓰자면 붓이 자기 몸의 한 부분처럼 되어서 보지 않고도 제가 마음대로 척척 쓸 수 있도록 숙련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아들이 글씨공부를 더 하도록 떠밀어 보냈다. ……

여사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시고는 떡장사가 불을 켜지 않고 여러가지 떡을 곱게 빚은 것처럼 총을 쏘는 것도 그렇게 숙련시켜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그날부터 빨치산여대원들은 여사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사격술연마에 적극 힘썼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자신의 신기한 사격술의 빛나는 모범으로 통일애국투사들을 가르쳐 주기도 하시었다.

1949년 3월 어느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자신께서 사격술의 비결을 가르쳐 준 그 빨치산대원들의 사격솜씨를 보시려고 그들을 모란봉사격장으로 부르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군복차림으로 한발 먼저 나와 계시었다. 혁대까지 단정히 띠셨는데 군복저고리 오른쪽 호주머니옆에 크지 않은 권총갑이 보이고 왼쪽에는 탄창이 대여섯개 꽂혀 있었다.

빨치산대원들은 김정숙여사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각종 소총을 엇바꾸어 가면서 쏘았다.

여사님께서는 그들 옆에 서시어 사격자세와 조준방법을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었다.

그들은 모두 소총사격에서는 높은 명중률을 보였으나 권총사격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총알은 빗나가기만 했다.

권총사격이 끝났을 때 처녀빨치산 이정숙이 누구보다도 얼굴이 빨개져서 부끄러워 했다.

여사님께서는 그의 팔을 다정히 잡아주시며 권총을 처음 잡아보니까 안맞는게 당연하다고 하시면서 아무 총이나 손에 익지 않으면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오늘 내가 선물을 하나 줄까 하고 여사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그는 여사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었다.

권총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닐까.

여사님께서는 이정숙에게 이미 쏜 권총사격목표판을 새 목표판으로 갈아세우고 오라고 이르시었다.

이정숙이 분부대로 하고 돌아오자 여사님께서는 소형 ≪모제르≫권총을 꺼내드시고 탄창을 끼우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영채도는 눈을 조금 쪼프리듯 하시면서 왼손을 허리에 짚고 권총을 든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리시었다.

그들이 여사님의 팔이 멎는 것을 볼 사이도 없이 ≪땅≫ 하고 첫 총성이 울렸다. 뒤이어 연발사격 총성이 울렸다.

두번째 탄창을 갈아끼우신 여사님께서는 이번에도 오른팔을 머리높이로 들어올리시었다가 총구를 숙이시며 역시 연발로 사격하시었다. 세번째 탄창부터 여사님께서는 목표판쪽으로 총구를 바로 내대시며 조준도 하시는 것 같지 않게 쏘시었다.

이렇게 여사님께서는 총신을 식혀가면서 대여섯탄창을 푸시었다.

사격이 끝나자 여사님께서는 이정숙에게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맞은 자리에 나무못을 꽂아서 가져오라고 이르시었다.

목표판으로 달려간 그는 열심히 총알자리에 나무못을 꽂아나갔다. 잠시후 이정숙이 ≪어마나!≫ 하고 환성을 올렸다. 그는 목표판을 뽑아 들고 달려왔다.

목표판 복판에는 ≪정숙≫이라는 두 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가로 세로 모로 건너간 곧은 획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정≫자의 ≪ㅇ≫받침까지 조금도 이지러진 데 없이 동그랬다.

≪제대로 되었어요?≫ 여사님께서 나직이 물으시자 그들 빨치산대원들은 그 목표판을 여사님께 가져다 드리며 제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데 말로 전해 듣는 사람은 곧이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귀신이 울고 가겠다고 탄성을 올렸다.

여사님께서는 그 목표판을 빨치산처녀 이정숙에게 안겨주시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열심히 훈련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시었다.

그제서야 이정숙은 자기에게 선물하겠다고 하신 김정숙여사님의 말씀의 참뜻이 무엇이었는가를 새겨안게 되었다.

이렇듯 김정숙여사님의 적극적인 지도밑에 수많은 통일운동전위들이 자라났다.

빨치산여대원 이범열도 그런 자랑스러운 민족의 아들딸중의 한사람이었다.

그가 속한 태백산빨치산은 청옥산과 지리산, 매복산을 거점으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적들은 악명높은 백골부대를 내몰아 태백산지구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벌였다.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그는 자기가 할 바를 다했다. 짬만 있으면 전우들에게 김정숙여사님의 말씀도 전달했고 ≪김일성장군의 노래≫도 보급했다.

그는 전투에서도 용감했다.

어느날 그는 전투장의 최선단에 자리를 잡고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 기어오르는 ≪토벌대≫ 연대장의 입에 총탄을 명중시키고 그놈의 권총을 노획했다. 그는 김정숙여사님께 한 약속대로 그 권총을 여사님께 꼭 올리기로 하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언젠가 김정숙여사님을 만나 가르치심을 받는 자리에서 그는 여사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잘 싸우겠다는 약속으로 적장교놈의 권총을 빼앗아 여사님께 선물로 드리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던 1950년 3월 9일 백골부대가 불의에 기습해왔다. 격전은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날이 저물자 보름달이 떠올랐다.

그는 전우 김춘옥에게 다가가서 ≪언니, 저 달을 보니 오늘저녁에는 별로 어머님생각이 더 나요, 어머님께서도 저 달을 보시면서 우리들을 생각하시겠지요. 어머님댁에서 군고구마를 먹던 생각이 나요. 이럴 때 한개만 있어도…… 그렇지만 일없어요. 어머님생각을 하면 배고픔도 잊어버리게 되고 무서운 것도 없어지고……≫ 하면서 두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잠시후 그는 자기 소대가 있는 쪽으로 갔다. 그가 간 쪽에서 총성이 한참이나 울리더니 뒤이어 그가 부르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전우들이 그쪽으로 달려가자 그는 다리에 심한 관통상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자리를 옮기면서 일부러 적들에게 자기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는 최후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전우 김춘옥에게 권총과 소총을 넘겨주면서 이 권총은 우리 여사님께 전해드리고 이 장총은 통일의 날 열병식때 자기 대신 메고 나가라고 하면서 장군님과 여사님께 자기가 어떻게 싸웠으며 여사님을 얼마나 그리워했는가를 꼭 전해달라고 부탁의 말을 남겼다. 그리고는 어찌할 사이없이 두개의 수류탄을 가슴에 품고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김일성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영웅적으로 자폭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물두살 꽃나이였다.

그후 6·25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대의 전략적인 일시적 후퇴가 시작되던 어느날 후퇴의 길에서 평양에 들린 이범열의 전우 김춘옥은 모란봉에 안치된 김정숙여사님의 묘앞에 사연깊은 그 권총을 드리고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전우의 부탁을 삼가 아뢰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 그처럼 사랑하시던 이범열동무는 전투에서 영웅적 최후를 마치고 이 권총만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그가 지난해 봄 어머님께 꼭 선물로 드리겠다고 약속했던 권총입니다. 이범열 동무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도 장군님과 어머님을 그리워했고 어머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끝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어머님, 저의 말을 들으십니까.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보고 싶은 어머님! ……≫

김정숙여사님께서 키워내신 통일애국투사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통일전위투사 성시백

광복직후 온 이남땅을 쥐고 흔들며 이남정세에 격동의 파고를 몰아온 혁명가 성시백(정향명), 그도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의 영향하에 통일전위투사로 된 사람이었다.

원래 그는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서울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에도 참가했고 열혈청년시절에 조국광복의 성전에 한몸바칠 각오로 고향을 떠나 한때는 ≪상해임시정부≫에 들어가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독립운동에도 참가하였다.

그후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공산주의사상에 공명하면서 지하공작도 하였다. 이 나날에 그는 적들에게 체포되어 9년간이나 옥중생활도 하였다.

해방전 독립운동시기에 이국땅에서 그는 정향명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그가 광복직후 ≪임정≫계열의 반일독립운동자로 이남에 귀국했을 때는 1946년 11월이었다.

그 당시 첨예하게 조성된 정치정세 속에서도 우리 나라에서는 하나의 뚜렷한 흐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절세의 애국자, 민족적 영웅 김일성장군님께로 쏠리는 민족의 강렬한 지향과 열렬한 흠모의 정이었다.

해방직후 남반부의 수많은 인텔리들, 각이한 정견을 가진 인사들과 혁명가들, 심지어는 반공을 일삼던 우익정객들까지 명예도 재산도 직위도 다 버리고 김일성장군님을 찾아 북으로 들어간 것은 그 뚜렷한 증시로 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타고 성시백도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게 되었다. 그가 조국강토가 두 동강이 나게 된 민족최대의 불행을 타개하실 분은 오직 항일의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뿐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김일성장군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옵게 된 그날 성시백은 장군님의 비범한 인간적 풍모에 대한 매혹으로부터 장군님의 위인상을 심장깊이 체득했고 그후 장군님에 대한 열렬한 숭배심을 간직하고 통일애국투사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김일성장군님의 부하로, 특사로 여기면서 장군님의 조국통일 사상과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진력했다.

2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반일투쟁경력도 있고 기성의 주의주장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연장자인 그가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자마자 절대적 숭배심을 지니게 된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는 자기의 심중을 자기의 연락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해내외에서 이젠 스무해가 넘도록 위인을 찾아 해매며 유명무명의 수많은 정치인들을 만나보았소. 그런데 김일성장군님과 같이 넓은 식견과 도량, 풍부한 인간성을 지니고 계시는 위대한 분은 보지 못했소. 참말로 김일성장군님의 그 식견이며 온몸에 넘쳐나는 인간애는 그저 이끌린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온 마음과 넋을 완전히 매혹시키었소. 처음 만나뵈옵는 사람도 단번에 백년구면처럼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시는 그 너그러우시고 겸허하시고 소탈하신 인품에 내 마음이 스스로 이끌리고 홀딱 반하게 되더란 말이오.

나는 이제부터 김일성장군님의 심복자가 되고 부하가 되겠소.≫(≪노동신문≫ 1997년 5월 26일자)

성시백이 김일성장군님께 충실한 통일운동의 전위투사로 나설 수 있도록 영향을 주고 적극적으로 뒷바침해 주신 분김정숙여사님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시고 김일성장군님의 조국통일 사상과 노선을 깊이있게 심어주시고 백두산시절 자신께서 몸소 쌓으신 풍부한 지하활동경험도 배워주시며 그가 정치활동을 원만히 할 수 있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 주시었다.

이 나날에 여사님께서는 그의 고향방문과 아들과의 만남, 그의 아내의 신상문제에까지 깊이 마음을 쓰시었다.

1947년 4월이었다. 20여년만에 고향을 찾는 성시백이 빈손으로 홀아버지와 처자들, 형제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 마음에 걸리시어 장군님께서 몹시 심려하신다는 것을 아신 여사님께서는 즉시 그의 가족 매사람들에게 안겨줄 옷감과 생활필수품명세를 만드시었다. 그러시고는 해당한 일꾼들에게 과업을 주시었고 친히 평양시의 여러 장마당들에까지 나가시어 물품들을 구입해 들이시었다.

이와 관련해 ≪노동신문≫ 1998년 9월 21일자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성시백 동지가 고향으로 떠나던 날이었다. 김정숙동지께서 지성을 다 바치시어 마련하신 은정깊은 선물들을 트렁크에 하나하나 정성을 다하여 차곡차곡 넣던 한 일꾼은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성시백 동지의 가족수보다 옷감이 한명분이 더 있었던 것이다. 그 일꾼은 여사께서 적어주신 명세를 보며 다시 확인해 보았으나 역시 한명분의 옷감이 더 있었다.

어인 일인지 알 수 없어 일꾼은 여사께 옷감이 가족수보다 한몫이 더 있다고 말씀드리었다.

그러자 여사께서는 내가 성동지의 어머니옷감도 준비했어요, 비록 성동지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20여년만에 고향을 찾아가는 아들이 어머니의 사후에라도 어머니의 옷감을 가지고 가도록 가족수보다 한명분을 더 마련했어요라고 말씀하시었다.≫

참으로 여사님의 다함없는 은정의 세계를 감득케 하고 있다.

1948년 8월 22일 성시백이 당시 평산에 있다가 중앙당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맏아들 성세창과 20여년만에 뜻깊은 상봉을 하게 하신 분김정숙여사님이시었다.

이날 평양에 체류하고 있던 성시백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소뜨락을 조용히 거닐고 있었다.

이때 승용차 한대가 그의 옆에 와멎더니 차안에서 20대의 젊은 청년이 내렸다.

≪아버지, 제가 세창이에요.≫

≪뭐? 세창이? 그럼 네가 내 아들 세창이란 말이냐?≫

성시백은 아들을 와락 그러안았다.

반일의 뜻을 품고 멀리 이국만리로 떠나가던 그때 고향의 할아버지의 집에 맡겨두었던 아들, 겨우 다섯살, 그때로부터 20년세월이 흘러 아들 세창이가 이제는 20대의 끌끌한 청년으로 자란 것이다.

아들을 그러안은 아버지도,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의 눈가에도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참으로 뜻깊은 부자간의 상봉이었다.

이 감격적인 상봉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모로 마음쓰신 김정숙여사님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성시백을 만나 담화하시는 과정에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즉시 관계부문 일꾼을 통해 그의 아들을 데려오게 하시었던 것이다.

여사님께서는 성시백이 아들과 함께 만경대에 가서 뜻깊은 하루를 보내도록 해주시고는 자신께서도 장군님을 모시고 만경대에 나가시어 이들 부자간의 상봉을 뜨겁게 축복해 주시었다.

이날 장군님께서와 여사님께서는 그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시면서 아들의 전망문제도 의논해 주시고 생활에서 지침으로 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성시백을 보시면서 아들걱정은 말라고, 아들을 맡아 돌봐줄테니 마음놓고 혁명사업을 하라고 뜨거운 말씀을 해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성시백의 아내에게도 깊이 마음을 쓰시었다.

1948년 여름 어느날 김정숙여사님께서 성시백을 만나신 자리에서 그의 아내가 노산이라는 사실을 들으시고 아내를 북으로 들여보내어 해산하게 하고 보약도 쓰도록 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는 아내의 신상문제를 두고 깊이 심려하시는 장군님과 여사님께 이남에서 같이 사업하고 있는 여성동지들이 돌봐주기 때문에 별일 없다고, 너무 근심하지 마시라고 몇번이고 말씀드리었다.

여사님께서는 그래도 안된다고 같은 말씀을 거듭했으나 그가 하도 자기 생각을 달리하려고 하지 않자 정 그렇다면 거기에서 동지들의 방조를 받아 순산하도록 아내를 각별히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일러주시었다.

그러시고는 그에게 귀중한 보약이 든 꾸러미를 안겨주시었다.

그 보약으로 말하면 강원도민들이 장군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올린 귀중한 약재였다.

여사님께서는 보약에 깃든 사연을 그에게 이야기하시면서 장군님께서 걱정하시지 않도록 아내를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시었다.

그후 성시백의 아내는 사랑어린 보약을 쓰고 순산했다. 그의 가정에는 또 한명의 옥동자가 태어났다.

그들의 셋째아들이었다.

장군님께서와 여사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친히 아들의 이름을 ≪자립≫이라고 뜻깊은 이름을 지어주시고 백날되는 날에는 은식기 한조와 꼭지숟가락까지 보내주시었다.

그들 부부는 한없이 고귀한 사랑이 담긴 선물을 받아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다.

≪여보, 장군님의 크나큰 은덕을 어찌 땅 속에 묻힌들 잊을 수 있겠소.

자립이와 아이들을 장군님의 충신으로 키우고 우리도 그분의 신하답게 살아야 하겠소. 통일된 다음에 아이들을 데리고 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립시다.≫

그는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께 맹약한 그대로 활동했다.

성시백은 김정숙여사님께서 들려주신 지하투쟁경험을 투쟁의 지침으로 삼고 준엄한 통일운동의 첫걸음을 조직을 꾸리는 사업으로부터 시작했다. 그가 꾸린 지하조직은 세칭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또는 ≪성시백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이남의 우익 및 중간 정당, 단체들, 미군정청, 경찰과 군부, 재외대표부들에까지 뿌리를 박았다.

성시백은 조직이 꾸려지고 공작거점들이 도처에 마련되자 먼저 선전공작에 힘을 넣었다.

그는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 데 이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종이나 되는 신문들을 발행하여 선전공작에 이용했다. 그는 영어, 중어, 프랑스어로 된 화보 ≪해방조선≫과 ≪조국통신≫을 발행하여 국제우편을 통해 여러 나라들에 배포함으로써 김일성장군님의 위대성을 해외에까지 널리 선전했으며 분열주의자들의 죄행을 만천하에 고발했다.

성시백은 김일성장군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적극적인 통일전선공작을 벌여 처음에는 5개 정당을, 다음에는 10개 정당과 그 산하 14개 단체들 그리고 그후에는 중간 및 우익 정당, 단체들까지 통일전선에 망라시켜 ≪13정당협의회≫까지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3정당협의회≫에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문제를 토의하고 유엔총회 의장앞으로 항의문을 보내어 우리 민중의 일치한 요구대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지체없이 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단호히 요청함으로써 국제적인 여론과 지지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는 김일성장군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김구를 비롯한 우익반공인사들을 돌려세우는 사업에도 큰 힘을 넣어 그들을 입북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역사적인 4월남북연석회의를 성공적으로 보장하는데도 이바지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남국회공작에도 힘을 넣어 국회 부의장과 수십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국회연단에서 ≪외군철퇴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했다. 이것은 미국과 그 하수인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이남민중에게 통일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같이 맹렬히 벌어진 성시백의 국회공작에 관해 이남출판물들은 ≪……배후에는 성시백이 움직이었다. 그는 마침내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남조선정권을 흔들어놓기 시작하였다. 국회는 갈수록 변색되어 우리의 국회가 아닌 남의 국회로 멀어져 갔다≫고 전했다.(≪대한연감≫, 1975년)

또한 그는 국방부와 각 병종 사령부, 국군사단들은 물론 그 아래 연대, 대대와 헌병대, 사관학교, 국군정보국 등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요소들에 조직선을 늘이고 적군와해공작과 정보공작을 전격적으로 벌이었다.

그는 군부계통만이 아니라 정부와 경찰, 정보계통, 심지어는 주한미군부대들과 서울주재 미국총영사관이며 장개석의 영사관 그리고 일본, 홍콩 등 해외에까지 정보조직선을 그물처럼 펼쳐놓고 적들의 정치, 군사, 경제정보를 폭넓게 수집했다.

이러한 정보들 가운데는 1949년 8월에 이승만역도와 장개석 사이에 있은 진해비밀회담에서 장개석이 이승만역도의 ≪북벌≫을 적극 지원하기로 한 약속과 1950년 2월 이승만역도를 도쿄로 불러들인 맥아더가 ≪북침≫전쟁계획을 검토하고 지령을 준 사실 등 최대극비로 여긴 군사정보자료들이 적지 않았다.

성시백의 이러한 활동을 두고 이남당국자들은 ≪대한민국의 심장과도 같은 특급 기밀이 성시백의 조직을 통해 평양으로 흘러들어갔≫고 ≪국가원쑤끼리 비밀리에 주고받은 회담의 내용까지도 그의 손에 입수되었으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고 비명을 올리면서 만일 ≪총액 1천만원을 들여서 성시백을 체포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역사는 그 양상을 달리했을 것이다.≫라고 실토했다.

세계 지하혁명투쟁사에는 이름있는 혁명가들의 위훈담이 수많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그 공작내용과 활동범위, 투쟁방식에 있어서 성시백의 지하활동과는 대비가 안되는 것들이었다.

성시백이 그토록 통일운동사에 자랑할 역사적 인물로 된 것은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의 적극적인 가르치심과 보살피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님께 일편단심 충성을 다했다.

이남에서 준엄하고도 시련에 찬 투쟁을 과감무쌍하게 벌여나가던 성시백은 그만 원쑤들에게 체포되었다.

미국의 고용간첩 박헌영, 이승엽 도당은 자기 졸개들인 한때 남로당에서 요직에까지 있다가 투항변절한 홍인표와 안영달놈을 시켜 성시백을 적들에게 밀고해 체포하게 했던 것이다.

적들은 성시백을 전향시키기 위해 형언할 수 없는 악형과 야만적인 고문을 하루에도 여러차례씩 들이대었고 또 참기 어려운 회유와 끈질긴 유혹도 계속했다.

그는 마음만 고쳐먹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해방직후에 김일성장군님을 처음 만나뵈옵고 그분께 매혹되어 김일성장군님의 부하로 싸우겠다고 한 맹세를 지켰다. 그는 최후의 순간순간을 불굴의 신념으로 자기의 삶을 더욱 빛내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아내가 면회를 왔다. 아내의 등에 업힌 돌이 지난 아들을 애무에 찬 눈길로 바라보며 그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두팔을 올렸으나 쇠고랑소리만 절렁거리고 부러진 두팔은 미끄러져내렸다. 성시백은 아내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이놈들은 나더러 전향하면 살려주겠다고 하는데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싸워온 내가 어떻게 전향을 하고서 살겠소. 그렇게 더럽게는 살지 않을 테니 그것만은 안심하고 돌아가오.≫

1950년 6월 27일 5시 적들은 이 새벽에 성시백을 사형장으로 끌어내었다. 그가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친 것은 서울이 인민군대에 의해 해방되기 24시간전이었다.

서울해방의 기쁜 소식에 뒤이어 성시백의 희생에 대한 비보를 받으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그토록 믿고 사랑하시던 전사를 잃으신 크나큰 비분으로 하여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시며 창너머 남쪽하늘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다가 ≪그렇게 가다니. 아, 단 하루만이라도 더 살아있었더라면.≫라고 하시고는 끝내 쏟아지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고 또 닦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한 일꾼을 전화로 찾으시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시백의 시체를 꼭 찾아내야 하겠다고 명령하시었다. 인민군 지휘관들과 관계부문 일꾼들이 서대문형무소와 육군형무소, 육군특무대와 헌병대의 지하고문장들이며 적들이 패주하면서 학살한 수많은 애국자들의 시체더미 속도 샅샅이 흩었으나 그의 시체는 없었다. 성시백의 존재를 무서워하던 적들은 그의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사랑하는 전사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으시자 갈리신 음성으로 그는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았고 혁명에 커다란 공헌을 한 우리 당의 이름없는 꽃이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었다.

통일전위투사 성시백은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내조의 공이 큰 아내 민순임과 더불어 영생의 모습으로 살아있다.

통일운동의 한쪽 수레바퀴를

김정숙여사님의 적극적인 활약에 의해 통일애국투사들의 대오가 무성하는 해바라기처럼 자라나 김일성장군님의 자주적 조국통일노선을 실현하는 투쟁의 제1선에 기세 드높이 진출했다.

통일애국투사들의 핵심적 역할이 높아짐에 따라 통일운동은 날로 활성화되어갔다.

이것은 남과 북의 진보적 정치세력과 각계층 민중이 조국통일을 민족지상의 과제로 간주하고 그에 적극 동참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일부 진보적인 대중운동은 민족사의 부름에 화답하여 조국통일운동에 응분의 낯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남의 여성운동이 바로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1945년 12월 하순 민주주의 기치아래 모든 애국여성들을 결속할 데 관한 김일성장군님의 여맹건설사상을 지침으로 하는 남조선민주여성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민주여성동맹은 활동방향, 슬로건의 제시 등 노선정립에서 시대적 요구를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자기들이 지지협력해야 할 정권이 서있지 않다는데로부터 통일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은 될수록 피하면서 ≪여권옹호≫와 ≪아동보호≫와 같은 운동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무릇 어느 사회에서나 여성은 사회구성원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만큼 그들은 사회적 진보운동이라는 수레의 한쪽 바퀴와 같은 위치에 있다. 수레는 두바퀴가 다 잘 굴러야지 한쪽 바퀴만으로는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남의 통일운동이라는 수레의 한쪽 바퀴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실태를 요해하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1946년 2월 어느날, 이남의 민주여성동맹의 한 일꾼을 만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문맹퇴치, 미신타파 등 문화계몽사업이 여맹에서 힘을 넣어야 할 사업임에는 틀림없으나 이것이 결코 남조선민주여성동맹앞에 나서는 유일하고 첫째가는 투쟁과업으로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오늘 남조선에 조성된 복잡하고 어려운 정세하에서 남조선의 민주여성들은 무엇보다도 미군정의 기만정책과 이승만, 김성수 매국도당의 반동적 책동을 폭로단죄하고 통일적인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하루빨리 세우기 위한 투쟁을 과감히 벌여나가야 하리라고 봅니다.≫

이남의 여성일꾼은 심중한 안색으로 여사님의 말씀을 경청했다.

여사님께서는 그러는 그를 미덥게 바라보시며 지금 남조선여맹안의 일부 동무들은 해방전 어느 한때 부르주아여성운동을 본딴 그 무슨 ≪운동≫이라는 것을 벌이던 것을 되살려 ≪여권옹호≫니, ≪참정권쟁취≫니 하는 말을 하면서 그것이 여맹이 벌여야 할 정치운동이라고 하고있는데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그대로 이어받은 미군정이 있고 미제상전에 아부굴종하며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이승만반역도당이 제 마음대로 날뛰고 있는 오늘의 남조선사회에서는 남녀불평등을 근절하고 근로여성들의 진정한 인권을 찾는 문제나 나라의 정사에 참가한다는 것은 도대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시었다.

그러시고는 남조선의 광범위한 여성들이 갈망하는 정치적 권리, 경제, 문화 생활에서의 권리 그리고 온갖 인신적 예속과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려는 인격적 권리는 통일적인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남조선땅에도 북조선에서와 같이 민주주의적 시책이 실시되어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이렇게 여성운동을 벌여나가는 것이 장군님의 의도대로 투쟁을 벌여나가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남조선민주여성동맹이 현시기 여성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나서는 기본투쟁임무를 놓치지 말고 그것을 튼튼히 틀어쥐고 여성들을 미제의 기만책동과 이승만반동집단의 매국적 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의 이러한 가르치심은 이남의 민주여성동맹을 위시한 애국적 여성단체들의 투쟁을 옳은 궤도에로 진입시키는데서 큰 힘으로 되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북의 여성들을 외세에 짓밟힌 남조선을 한시도 잊지 말고 통일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따뜻이 이끌어주시었다.

1948년 6월 어느날, 여사님께서는 그때 중앙당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 여성을 만나주시었다. 그로 말하면 김일성장군님을 가까이 모시고 일하다가 장군님의 배려로 공부하게 된 여성이었다.

여사님께서는 그의 학습정형과 생활형편을 알아보시고 학교를 졸업한 후 무엇을 할 생각인가고 물으시었다. 그가 선뜻 대답을 드리지 못하자 여사님께서는 자신의 생각엔 앞으로 여맹사업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오늘 우리 나라에서 여성들에게는 참으로 할 일이 많다는 것과 여맹이 할 일들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우리는 남조선의 여성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남조선을 강점한 미국놈들은 파쇼적인 군정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민주역량을 탄압하고 있으며 애국자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 현재 이남 민중들과 여성들의 처지는 일제때와 다름없다는 것, 이남여성들의 인권은 유린되고 있으며 인신매매가 성행되고 있다는 것을 차근차근 일깨워 주시었다.

그러시고는 남조선여성들도 북조선여성들과 같은 진정한 권리와 자유를 쟁취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조선여성들이 앉아서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일어나 싸워야 한다,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남조선여성들은 미제와 그 주구 이승만도당을 반대하여 성스러운 항쟁에 궐기해야 한다, 북조선여성들은 남조선여성들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성원해야 하며 건국사업을 일층 다그쳐야 한다고 간곡히 가르쳐 주시었다.

여사님의 말씀에는 이북의 여성들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도 늘 외세의 지배하에 있는 이남을 잊지 말아야 하며 건국에서도 한몫을 하고 통일에서도 한몫을 해야 한다는 심오한 뜻이 깃들어 있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여성들을 만나실 때마다 분열된 조국을 하루속히 통일시키자면 여성대중의 역할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강조하곤 하시었다.

여사님의 가르치심이 널리 전해지면서 이북의 여성들 속에서는 조국통일에 대한 관심이 비상히 높아지게 되었다.

여사님께서는 이북의 여성들이 조국통일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여성들의 회의를 하나 조직해도 그것이 조국통일문제와 결부된 회의가 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시었다.

1949년 정초에 국제민주여성연맹 제2차대회가 진행되었을 때였다. 이북의 중앙여맹에서는 이 대회정신에 입각하여 여성들 앞에 나서는 과업을 토의하기 위한 북조선민주여성동맹 열성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건의하면서 회의에서는 2개년 인민경제계획수행에 나선 여성들의 과업을 토의하였으면 하는 의향을 표시했다. 이것은 김정숙여사님의 의도에 맞지 않았다.

그것은 국제민주여성연맹 제2차대회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파쇼와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며 압제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여성들의 권리를 찾고 보호하는 것인데 우리 민족으로서는 이것을 우리의 새 사회 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는데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바로 김정숙여사님의 입장이시었다.

여사님의 이러한 입장은 그무렵 어느날 중앙여맹일꾼을 만나시고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북반부의 여맹열성자들을 모여놓고 국제민주여성연맹 대회사업결과를 알려주며 그들을 자기 맡은 일을 더 잘하도록 추동하는 것도 필요한 사업으로 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조국의 남쪽땅을 강점하고 인민들에게 온갖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고 있는 미제침략자들을 즉시 철거시키고 나라의 자주적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투쟁에로 모든 여성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김정숙여사님의 의도에 따라 북조선민주여성동맹 열성자회의는 폭을 넓혀 전조선열성자대회로 하기로 되었고 이 회의에서는 전체 여성들을 조국통일을 위한 거족적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 호소문을 채택하도록 낙착되었다.

여사님께서는 회의준비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특히 회의에서 채택하게 될 호소문은 자신께서 직접 그 초안을 하나하나 다듬으시어 무게있는 조국통일관련문건으로 완성되도록 하시었다.

드디어 1949년 2월 6일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이남의 애국적 여성운동단체 대표들 다수가 동참한 가운데 전조선열성자대회가 열리었다.

대회에서 보고자와 토론자들은 이남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이승만반동집단의 매국배족적 책동을 준열히 폭로규탄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모든 여성들을 반미구국투쟁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적극 동참시키기 위한 방도들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회의에서는 김정숙여사님께서 한자두자 고르고 다듬어 완성시켜 주신 호소문이 채택되었다. 호소문은 애국적인 남북의 전체 여성들이 힘을 합쳐 반미구국투쟁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과감히 떨쳐나설 것을 열렬히 호소했다. 이 호소문은 통신, 방송, 출판물을 통해 널리 보도되었고 남북조선의 전체 여성들 속에 깊이 침투되어 그들을 반미구국투쟁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미제와 반동들의 분열와해책동으로부터 남북의 진보적 여성단체들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었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결정관철을 위한 여맹중앙위원회 간사회의가 열렸을 때였다.

회의에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하신 보고의 기본내용이 전달되고 당의 정치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여성동맹의 과업이 토의되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갈 무렵에 왜 공산당의 정치노선만 토의하는가, 민주당의 ≪정치노선≫도 함께 토의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주석단에 앉아있던 한 이색분자가 기다렸다는듯이 여맹에서는 다른 정당들의 노선문제도 편중없이 대해야 한다면서 친일파건 민족반역자건 할 것 없이 ≪대동단결≫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부르주아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는 민주당의 ≪정치노선≫에 대하여 늘어놓았다.

회의집행부 성원이었던 여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안신호는 분김에 책상을 치면서 민주여성동맹이 지지해야 할 정치노선은 김일성장군님께서 밝혀주신 노선밖에 없다고 하였다.

회의는 아무런 결정도 채택하지 못한 채 휴회하고 말았다.

안신호는 그길로 김정숙여사님을 찾아갔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신 여사님께서는 오늘 회의에서 불순이색분자들은 자기들의 정체를 드러내놓았다고 하시며 그들의 책동을 제때에 분쇄하여야 한다고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미국선교사들과 결탁하여 기독교계통의 여성단체를 뭇고 조만식과 함께 일제의 주구단체인 ≪연정회≫에 가담하여 무저항주의를 설교한 한 이색분자의 해방전 죄과에 대하여서만 알고 있는 안신호에게 해방후에 더욱 똑똑히 드러난 그의 정책에 대하여 알려주시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기독교계통의 여성들을 규합하는 한편 조만식과 함께 민주당과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책임적인 자리에 들어앉아 김일성장군님의 새 조국 건설노선 관철을 방해해 나섰다.

그는 서울에서 조직된 우익반동정당인 ≪여자국민당≫에도 관계하고 있었다.

그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밝혀내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여맹은 노동자계급의 당의 영도를 받아야 여성해방의 과업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반민중적 정부를 세우려는 반동분자들의 책동을 분쇄하고 그들의 정체를 폭로할 데 대하여 가르쳐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가르치심대로 이튿날에 다시 열린 회의에서는 그들 반동분자들의 죄행이 적나라하게 밝혀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여성운동단체의 단결을 굳건히 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남의 여성운동단체들도 미제와 그에 추종하는 반동세력의 분열와해책동으로부터 보호하고 단결을 이룩하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시었다.

당시 이남의 진보적 여성운동단체들이 여사님의 가르치심대로 자기들의 활동좌표를 명백히 하고 반미구국, 조국통일운동을 적극화하는데 극도의 불안을 느낀 미제와 그 추종세력들은 이남의 공산당계열에 기어든 종파분자들을 끼고 교묘한 방법으로 진보적인 여성단체들을 와해시키기 위해 별의별 책동을 다해 나섰다.

이남의 민주여성동맹의 유영준위원장을 ≪혁명가적 전적≫이 없다는 것을 운운하면서 그를 공직에서 떼기 위한 음모를 꾸민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유영준위원장으로 말하면 반일의식과 민족애를 간직한 양심적인 의료인으로서 조국통일운동에 앞장서서 투신해오고 있는 적극적인 여성활동가였다.

그런 그를 공직에서 떼내려는 음모책동을 간파하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관계부문 일꾼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남조선여맹을 책임진 동무를 정당한 근거없이 교체하려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봅니다. ……

이것은 결코 그의 일신상 문제로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그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은 남조선 민주여성동맹대열의 단결을 굳건히 하는가 아니면 분열약화시키는가 하는 것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또한 그것은 민주여성동맹에 남조선의 광범한 각계각층 여성들을 더 많이 묶어세우는데 큰 영향을 주는 심중한 문제로 됩니다.

분열은 패배를 가져오지만 단결은 승리를 담보합니다.

남조선여성운동의 생명은 단결에 있습니다.≫

여사님께서는 이렇게 이남의 진보적 여성운동지도자를 적들의 마수로부터 구원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문제를 그 한사람의 운명문제가 아니라 이남의 진보적 여성운동의 운명문제로 보시고 지체없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한 여성일꾼을 해주에 대표로 파견하시고 그곳으로 유영준위원장을 불러 자신의 편지를 전달하게 하시었다.

여사님께서 보내신 편지에는 유영준선생에 대한 우리 당의 태도와 입장은 일관하다, 선생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남조선의 여맹이 창설되고 첫걸음을 뗀 어느 한 시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변함이 없다, 선생을 교체하게 한 장본인이 다름아닌 종파분자들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장군님께서 종파분자들의 작간에 타격을 주는 조치를 취하시었으니 선생은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신호선생한테 들어주기 바란다, 서울의 여름은 덥다고들 하는데 나이많은 몸 조심하여 건강히 지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김정숙여사님의 믿음어린 조치에 의해 유영준위원장은 마침내 구원되어 자기 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이남에서는 진보적 여성운동대오가 더욱 확대되었으며 반면에 반동적 어용단체들은 여성대중으로부터 점차 고립되어 종당에는 자기의 존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남의 여성대중은 단결을 굳건히 하고 통일운동의 주체적 역량으로 급속한 성장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같이 김정숙여사님의 지도력에 의해 남북의 여성운동은 자기의 활동좌표를 뚜렷하게 정립하고 정상궤도를 따라 활성화되어 갔다. 이것은 분명 통일운동의 믿음직한 한쪽 수레바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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