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24일

통일여명 편집국

 

 

김정숙여사와 민족통일 1

 - ≪김정숙여사와 민족통일≫

통일여명 편집국 6-2-7

 

 

차 례

 

1. 아! 통일

최대의 염원 / 조선은 하나 / 금석의 통일의지

 

2. 자주적 통일노선을 받드시고

외세를 배제하고 / 자주통일의 토대구축 / 민족분열책동에 철추를

자주적 통일정부수립을 향해

 

1. 아! 통일

 

항일의 여장군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반만년의 유구한 민족사를 연면히 이어온 우리 민족이 타의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열된 첫날부터 조국통일의 길위에 만고의 거룩한 자국을 남기시었다.

그 불멸의 자국마다에는 여사님의 통일염원, 통일신념, 통일의지가 깃들어 있다.

통일은 여사님의 최대의 소망이었다. 외세에 의한 우리 민족의 인위적인 분열은 조선의 완전해방의 의미를 상실케 했다. 조선의 참된 애국자들이 장구한 세월 항일의 혈전을 벌인 것은 조국의 절반땅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조선의 혁명가들이 조국과 민족 앞에 지닌 자기의 책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사님께서는 해방후에도 항일의 초연이 슴배인 군복을 벗지 못하시었고 일제의 대군을 가을풀처럼 쓰러눕히시던 총을 손에서 놓지 못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통일을 투쟁좌표로 삼아 광복후에도 백두산시절의 자세와 모습 그대로 살며 활동하시었다. 그분께서 민주건국시기에 항일무장투쟁시기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를 뒤로 미루고 모든 공을 앞에 내세우신 것도 조국통일이 자신의 최대의 소망이었고 또 지고의 투쟁좌표였기 때문이다.

통일은 여사님의 신념이었다. 조선은 하나다, 이것이 바로 여사님의 가슴깊이에 천연의 옹벽으로 자리잡은 통일신념이었다. 그분께서는 사업을 하나 전개하셔도 북조선만이 아니라 전조선을 염두에 두셨고 회합을 하나 조직하셔도 이북민중만이 아니라 남북민중대표들이 다 참가하는 회합이 되도록 하셨으며 창작가들이 노래를 하나 지어도 온 겨레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짓도록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조선은 하나다라는 신념을 가치관으로 하여 모든 영광도 행복도 오직 통일을 위해 사양하시었다.

통일은 여사님의 의지였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변혁의 진군길을 한라산 백록담까지 이어 건국의 어버이이신 김일성장군님을 통일조국의 수위에 높이 모시려는 것이 여사님의 의지였다. 여사님의 이러한 견인불발의 통일의지는 여사님께서 민족사적 사변을 축하해 친히 부르신 노래로도 울렸고 남북분단의 선, 38도선이 가까운 곳에서 몸소 발사하신 총성으로도 울렸다. 여사님의 통일의지는 강철로 다져진 불굴의 기개였다.

여사님께서 외우신 ≪통일≫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었다.

여사님의 열화의 통일염원, 금석의 통일신념, 강철의 통일의지는 통일을 손저어 불러오는 매력적인 강인한 힘이었다.

여사님께서는 그 무비의 힘으로 백두산이 흔들리고 한라산이 울어댈 통일의 날을 감연히 열어나가시었다.

최대의 염원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해방되었다. 이것은 누가 선사한 것이 아니었다. 조국해방은 조국광복의 기치밑에 온 겨레가 김일성장군님을 구심으로 굳게 단합해 피어린 항일의 성전을 벌인 결과에 이룩된 고귀한 전취물이었다.

광복을 맞이한 겨레의 환희는 하늘에 닿아 있었다. 산천초목도 해방의 기쁨으로 설레이는 것만 같았다.

해방 닷새만인 8월 20일 전설적 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 앞에서 ≪해방된 조국에서의 당, 국가 및 무력 건설에 대하여≫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연설에서 해방된 조국에 항일의 불길 속에서 축성된 조직사상적 준비에 기반해 노동자계급의 당을 창건하며 노동자계급의 영도밑에 광범한 농민대중과 지식인, 양심적인 민족자본가 등 각계각층의 민주역량을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토대해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며 항일무장투쟁의 시련 속에서 단련 육성된 혁명투사들을 골간으로 하고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아들딸들로 정규화된 혁명군대를 창건할 데 대한 3대과업을 명시하시었다.

이것은 해방된 조국에 새 조국 건설의 기반을 튼튼히 구축하기 위한 당면한 민족사적 위업이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건당, 건국, 건군 노선을 높이 받들고 우리 민중은 새 역사 창조에 힘차게 떨쳐나섰다.

항일의 전설적 여장군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건당, 건국, 건군 노선을 해방된 조국에 빛나게 구현할 일념으로 가슴불태우시며 오매에도 그리던 조국에 개선하셨다.

그러나 여사님께서는 항일의 초연이 서린 군복을 벗지 못하셨다. 미군이 남조선에 진주했던 것이다. 주한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앞문으로 이리를 쫓아내니 뒷문으로 승냥이가 침입한 격이었다.

미국은 이남에서 식민지적 군정통치를 강제하면서 38도선을 남북분단선으로 정착시켰다. 이리하여 민족의 생활권인 국토는 허리가 잘리고 민족의 혈맥은 갈라져 반만년의 유구한 단일민족사를 기록해온 우리 민족은 본의 아니게 분단시대를 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겨레와 민중이 바라던 바가 아니며 항일의 혈전을 벌여온 김일성장군님의 전사들이 바라던 바는 더더욱 아니었다. 장군님의 전사들이 백두밀림에서 혈투를 벌이며 겨레와 더불어 바라고 바란 것은 조국의 해방과 완전자주독립이었다.

그런데 나라의 절반땅이 외세에 짓밟혔으니 이것은 나라의 완전한 해방이 아니며 민족의 절반이 자주권을 찾지 못한 것은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이 아니었다.

통일적 중앙정부를 수립하고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당면한 민족사적 대제였다. 그래서 김정숙여사님께서는 해방된 조국에 개선하시었어도 항일의 군복을 벗지 못하신 것이었다.

우리 조국의 완전해방을 실현하고 우리 민족의 완전자주독립을 성취하는 것은 김일성장군님의 전사들의 본분이었다. 조국과 민족의 절반을 외세와 반동들의 지배하에 남겨두고는 장군님의 전사들이 자기의 본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책임성으로부터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조국통일을 열렬히 희원하시었다.

여사님께서 간절히 바라신 것은 우선 조국의 완전한 해방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조국에 개선하시어 청진지방에서 얼마동안 정치활동을 벌이게 되시었다. 어느날 ≪새길신문≫ 기자들의 요청에 따라 회견을 진행하셨다. 기자들은 여사님을 만나자 여성의 몸으로 만주광야를 주름잡으시며 일제의 백만대군과 싸워 이기신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씀드렸다.

여사님께서는 웃으시며 자신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고, 다만 장군님께서 강도 일제를 때려부수던 이야기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다고 하시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어오신 김일성장군님의 종횡무진의 지략과 비범한 전략전술에 대해 감회깊이 회고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이렇게 호소하시었다.

≪여러분도 아다시피 조선해방이 아직 완전해결이 되지 않았으니 조선인민대중은 더욱 희생적 노력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여사님의 말씀에서는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에 대한 절절한 소망과 그것을 기어이 이루어내시고야 말 굳은 결의가 뜨겁게 울리고 있었다.

여사님께서 절절하게 바라신 것은 또한 외세의 지배와 민족분열로 인한 불행과 고통에서 이남민중들이 하루빨리 구원되는 것이었다.

민족분열이 우리 민족에게 가져다 준 불행과 고통은 아주 큰 것이었다. 특히 미국의 식민지적 지배하에 있는 이남민중이 당하는 불행과 고통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미군정은 이남민중에게 초보적인 민주민권도 허용하지 않았다. 민주와 통일을 위한 민중의 진출은 가차없는 유혈적 탄압의 대상으로 되었다. 노동자들은 일할래야 일자리가 없었고 농민들은 농사를 짓고 싶어도 땅이 없었으며 젊은이들은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었다. 거리마다에는 구직의 철새로 방황하는 실업자들이 홍수를 이루었고 골목마다에는 유랑걸식자들이 차고 넘쳤다.

조국을 통일해 이남민중을 이러한 불행과 고통에서 하루빨리 구원하는 것이 여사님의 바람이었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한 이남의 대표들 속에는 나어린 한 소녀가 있었다. 그는 이남의 여성애국투사의 동생이었다. 그의 언니는 서울거리에서 헤매던 동생을 북행하는 대표들 틈에 끼워 평양으로 보냈던 것이다.

여사님께서는 숙소에 나가시어 그를 만나주시었다. 한창 먹을 나이에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소녀는 몹시 허약했다.

여사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으시고 정말 용케 왔다고 하시면서 이름과 나이, 서울에서 한 일을 물으시었다. 그가 행랑살이를 했다고 대답하자 여사님께서는 그를 꼭 품속에 그러안아 주시었다.

소녀는 조그마한 양어깨를 들먹이며 울음을 터치었다. 서울에서는 실컷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던 울음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소녀에게 울지 말라고, 그치라고 거듭 말씀하시었다. 그러시는 여사님의 두눈가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미제의 악정아래 남녘동포들이 당하는 민족수난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시며 통일열망으로 가슴불태우시는 여사님이시었다.

잠시후 소녀는 들먹이는 어깨를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여사님께 말씀 올렸다.

≪어머니,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건강하세요? 저의 언니가 인사를 드려달라고 했어요. 언니는 저를 평양으로 떠나 보낼 때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어요. ≪온 남녘의 인민들이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얼마나 그리는지 너도 알게다. 지금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 그러나 나는 더 잘 싸워서 승리의 날 통일의 광장에서 장군님을 만나뵈옵겠다. 장군님의 품에 안기거든 이 언니의 마음까지 합하여 장군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해다오.≫≫

여사님께서는 다시 소녀를 꼭 껴안으시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갈리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었다.

≪그래, 장군님께서는 건강하시다. 너는 참 훌륭한 언니를 두었구나. 너의 언니의 인사를 장군님께 꼭 올리마.

우지 말아! 이제는 장군님 품에 안겼으니 마음을 놓아라. ……그리고 공부를 잘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장군님께 보답하는 길이고 싸우는 너의 언니를 돕는 일이다. 어두운 남녘땅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여사님의 말씀 속에는 하루빨리 나라의 통일을 이루어 남녘의 모든 어린이들과 인민들을 고통과 불행 속에서 구원하시려는 절절한 염원이 깃들어 있었다.

여사님께서는 그 소녀를 곧 만경대혁명학원에 보내주시었다.

참으로 여사님께 있어서 조국의 완전자주와 통일을 이룩하고 외세의 노예로 신음하는 이남동포들을 구원하는 위업보다 더 긴절하고 중요한 위업은 없었다. 조국통일은 여사님의 최대의 염원이었으며 새로운 투쟁좌표였다.

조선은 하나

김정숙여사님의 통일염원은 통일신념으로 이어졌다.

새 역사 창조의 나날이 흘렀다. 이북에는 김일성장군님을 수위에 높이 모신 민중정권이 서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이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변혁의 결과 이북의 노동자, 농민, 인텔리를 비롯한 광범위한 민중이 정권의 주인, 공장과 땅의 주인으로 되었으며 여성들은 실질적인 평등화를 성취했다.

나라의 면모는 민주풍토로 일신되었으며 민중의 행복은 꽃으로 피어났다.

격변하는 이북의 현실을 혜안으로 목격하시면서 여사님의 통일신념은 더욱 반석으로 다져졌다.

조선은 하나다, 이것이 바로 여사님의 통일신념이었다. 햇빛이 비치어도 남북에 똑같이 비치고 변혁이 일어나도 남북에 똑같이 일어나고 행복이 꽃피어도 남북에 똑같이 피어나야 한다.

여사님께 있어서 두개 조선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사님께서 백두광야에서 항일의 철화 속을 헤쳐오신 것도 하나의 조선을 위해서였지 분단된 강토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항일시기에 여사님께서 사선의 언덕을 넘고 넘으시며 지하공작을 벌이신 것도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전조선에 구현하시기 위해서였지 북조선에만 구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여사님께서 조국개선의 선상에서 다가오는 조국산천을 바라보시며 무르익히신 구상도 김일성장군님의 새 조국 건설 청사진을 전조선에 꽃피우시려는 것이었지 북조선에만 꽃피우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1946년 8월 말 김일성장군님의 뜻에 따라 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이 창립될 때에도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의 새 조국 건설 구상이 조속히 전조선적으로 실현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시었다.

하루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여사님께 새로 창립될 북조선노동당의 강령초안의 내용을 설명해 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당강령에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 토지개혁과 중요 산업의 국유화, 남녀평등권 등 제반민주개혁들과 민주주의적 시책들을 전조선적으로 실시할 데 대한 문제들이 반영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때 여사님께서는 장군님께 이런 말씀을 올리시었다.

≪사실 우리가 산에서 투쟁할 때 전조선을 해방하자고 투쟁했지 나라의 절반땅만 해방하자고 그 고생을 했겠습니까.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장군님께서 작성하신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일제통치를 청산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세우며 일제와 예속자본가, 친일지주들이 가지고 있는 공장, 광산, 농장토지를 몰수하고 8시간노동제를 실시하며 여성해방을 실현할 데 대한 문제 등 모든 것이 다 담겨져 있었는데 우리는 그때 벌써 그 강령을 전조선에서 실시하자고 싸우지 않았습니까.≫

조선은 하나다라는 여사님의 신념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이 없었다.

여사님께서는 이러한 통일신념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으시고 오늘을 위한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사시었다.

민족의 태양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1981년 9월 22일 밤 자리를 같이한 일꾼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바있다.

≪우리 어머님처럼 조국통일을 바라신 분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항일투사들이 찾아와 이제는 백두산시절과는 달리 영토도 있고 주권도 서고 나라의 재부도 많은 데 옷 한벌쯤이야 왜 못해 입으시겠느냐고 간절히 말씀해도 통일이 되어 모든 겨레가 다같이 잘 입고 잘살 때 우리도 비단옷을 입고 잘살아 보자고 타이르시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늘 조국통일을 먼저 생각하시며 모든 행복을 뒤로 미루시었습니다.≫

여사님께서는 늘 조국통일을 먼저 생각하시며 남들이 다 누리는 모든 행복을 뒤로 미루시었다.

조국광복은 환향과 재회라는 행복을 불러왔다.

손에 총을 잡고 조국해방투쟁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환국했고 일제의 징병, 징용으로 끌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환향했다.

살길을 찾아 고국을 멀리 떠나 서글픈 이국살이를 하던 사람들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다.

제 나라를 다시 찾은 덕분에 그들은 애타게 그리던 부모처자, 친척친우들과 감격적인 상봉으로 이산의 불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김정숙여사님께서 조국에 개선하시어 하신 첫 일은 항일의 나날 하루도 잊은 적 없던 고향을 방문하여 친척들을 찾는 일이 아니라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군중정치사업이었다.

청진을 찾으신 여사님께서는 옹근 한달동안에 걸쳐 함경북도의 여러 시, 군들을 찾으시어 현실을 요해하시고 민중을 새 민주조선 건설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시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사님께서는 부령야금공장과 고무산시멘트공장 복구정형을 요해하고자 부령으로 떠나시었다. 목탄을 때는 트럭을 타신 여사님께서는 정오가 거의 되어서야 부령땅에 들어서시었다.

부령야금공장 복구위원회 성원들은 여사님을 사무실에 모시고자 했으나 그분께서는 현장부터 나가보자고 하시었다. 변압기수리현장과 전기로복구현장에서 노동자들을 만나신 여사님께서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힘으로 복구하겠다는 결심과 꼭 할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힘으로 일제놈들이 파괴해놓고 간 공장들을 보란듯이 몇배 더 훌륭하게 복구해놓자고 하시었다.

한 처녀가 물주전자를 들고와 여사님께 더운물을 부어 드리었다.

여사님께서는 처녀에게 가정형편과 고향을 물으시었다. 처녀가 자기 고향이 회령이라고 하자 여사님께서는 그의 손을 다정히 잡으시며 ≪아니, 정말 고향이 회령이에요?≫라고 물으시었다.

고향처녀의 손을 따뜻이 쓰다듬어 주시는 여사님의 눈가는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젖어들었다. 여사님께서 어린 시절에 떠나신 후 꿈결에도 그리시던 고향 회령이 바로 지척에 있었다.

1936년 8월 되골령마루에서 김일성장군님께서 백두산너머 저 멀리 두만강가에 있다고 하시던 그 회령이 지금은 하루길도 안되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제 가게 되는 고무산시멘트공장도 회령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자동차로 달리면 회령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래서 일행은 이번 기회에 여사님을 모시고 회령까지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다. 자동차는 일행의 부푼 마음을 싣고 고무산쪽으로 기운차게 달렸다. 차가 큰길에서 고무산시멘트공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이르자 일행은 차를 세우고 여사님께 시멘트공장은 돌아오는 길에 들리고 곧추 회령으로 가시자고 말씀올렸다. 그리고 운전사에게 차를 그리로 내처 몰라고 했다.

그러자 여사님께서는 운전사를 만류하여 차를 세우시고 잠시 길가에 내려서시었다. 그분께서는 깊은 감회에 잠기시어 무산령너머 회령쪽을 바라보시었다. 철길도 자동차길도 회령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무산령 하나만 넘으면 꿈결에도 못잊어 불러보던 그리운 고향이었다. 휘영청 달밝은 밤 화톳불가에서 김일성장군님으로부터 배우신 ≪사향가≫의 은은한 선율로 향수를 달래곤 하시던 회령이었다.

회령쪽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여사님께서는 일행을 둘러보시며 조용히 말씀하시었다.

≪지금 장군님께서는 새 조국 건설노선을 제시하시고 그를 실현하시기 위하여 끼니도 휴식도 잊으시고 일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고향땅부터 찾겠습니까. 나는 여기 일을 하루속히 끝내고 평양으로 올라가 장군님을 보위하여야 합니다.≫

이날 여사님께서는 서운해하는 일행에게 회령에는 이다음 꽃들이 활짝 필 때 가보자고 하시고 고무산시멘트공장의 노동자들을 찾으시었다. 항일의 여장군다운 애국의 기개라 하겠다.

후일 사람들은 이 길을 ≪회령의 갈림길≫이라고 불렀다. 이 길이야말로 평양에 개선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바로 얼마전에 지척의 향리 만경대방문을 뒤로 미루시고 강선제강소의 노동자들부터 찾아가신 그 ≪만경대갈림길≫을 그대로 잇는 애국충정의 길이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강한 통일신념으로부터 고향방문뿐만 아니라 그리운 일가친척을 찾는 일도 뒤로 미루시었다.

1947년 4월 15일이었다. 김일성장군님의 탄생일을 맞이하여 장군님댁에는 만경대의 할머님을 비롯하여 일가친척들이 모였다.

이날 한 친척분이 여사님께 왜 여사님켠에서는 아무도 오시지 않았는가, 이제라도 편지를 하여 다 오시게 하자고 말씀드렸다.

고마운 일이었다. 일찍부터 두만강을 넘나들며 반일독립운동을 벌이신 애국투사이신 아버님께서는 이국땅에서 한많은 생을 마치시었고 어머님께서는 일제의 ≪토벌≫에 희생되시었다.

그리고 오라버님께서는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시다가 적들에게 학살당하시었고 남동생은 용감한 아동단원으로서 원쑤와의 결전장에서 생애를 마치시었다.

그러나 여사님께서 꼭 찾으셔야 할 친척들이 없은 것은 아니었다. 수난의 세월에 기약없이 헤어지신 언니의 생사여부도 알아야 하셨고 오라버님께서 남기고 가신 조카의 행방도 알아야 하셨다. 이런 친척들과 그 후손들이 오늘의 뜻깊은 자리를 같이한다면 기쁨이 얼마나 크랴.

그러나 민족분열의 고통과 불행이 커가고 있는 때에 공을 버리고 사에 집념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여사님이시었다.

그러기에 여사님께서는 친척분에게 빨리 나라를 통일하고 우리 형제들을 다 찾겠다고, 그들을 꼭 만나게 될 것이라고, 통일된 강산에서 모두 만나면 더 좋지 않겠는가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의 통일신념은 이렇듯 지척의 고향방문도 일가친척을 찾는 일도 뒤로 미루게 한 요지부동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여사님께서 뒤로 미루신 것은 고향방문과 일가친척을 찾는 일만이 아니었다.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가 끝난 날이었다.

경위병들이 여사님께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었으면 하는 청을 드리었다.

그러자 여사님께서는 장군님께서는 북조선에서의 합당사업에 이어 남조선에서 공산당과 신민당, 인민당의 합당사업때문에 매우 분망한 나날을 보내고 계시므로 지금은 장군님께서 시간을 내실 것 같지 못하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면 어머님만이라도 모시고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경위병들이 다시 간청하자 여사님께서는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사진을 찍어야 영광스러운 일이지 나와 찍어서 무슨 기념이 되겠는가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영도밑에 남북이 통일되고 전조선적으로 제반 민주개혁이 성과적으로 수행되어 온 나라 인민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게 될 때 우리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었다.

≪그날 우리 함께 남해바닷가에 가서 사진을 찍읍시다. 그날이 멀지 않아 돌아와요.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황주긴등벌과 연백벌을 지나 임진강을 건느고 한강을 건너 계속 남으로 가느라면 무연한 호남벌도 볼 수 있을게고 진해, 마산, 부산에도 가볼 수 있을거예요. 부산은 하늘에서 눈이 녹는다지요? 부산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곳 인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기막힌 고생을 하고 있으니 정말 가슴아픈 일이에요.≫(≪통일을 위해 걸으신 빛나는 자욱≫, 통일신보사, 1982년, 45~46쪽)

여사님의 말씀은 통일신념의 메아리로 경위병들의 가슴을 울렸다.

조선이 하나되는 그날까지 모든 것을 뒤로 미루시려는 여사님의 고결하고 열렬한 지향은 평범하게 흘러가는 생활의 갈피갈피에 그대로 면면이 스며들었다.

어느날에는 백두산시절의 전우가 댁으로 갔을 때 조밥을 드시는 것을 보고 이제는 나라도 해방되었는데 흰쌀밥을 드셔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자 여사님께서는 나라가 통일되어 인민들이 다 흰쌀밥을 들 때 같이 흰쌀밥을 들겠다고 하시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느날에는 항일의 전우가 수수한 무명옷차림을 하고 다니시는 여사님께 이제는 나라도 해방되고 민중들의 생활도 나아졌는데 좋은 옷을 좀 입어야 되지 않겠는가고 말씀드리자 여사님께서는 나라가 통일되어 인민들이 좋은 옷을 입고 다닐 때 자신께서도 좋은 옷을 입겠다고 말씀하기도 하시었다.

이렇듯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조선은 하나라는 철의 신념으로 분열의 오늘에도 언제나 통일의 내일에 사시었다.

금석의 통일의지

김정숙여사님의 통일신념은 통일의지로 이어졌다.

미국은 남조선이라는 비계덩어리를 물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은 한반도 영구분열을 추구하면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이남민중의 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했다.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은 간고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완전해방과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 민중이 지금까지의 투쟁보다 더 간고한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완전한 해방과 통일을 위한 투쟁이 아무리 간고해도 기어이 이루어내야 할 민족사적 대제이다. 조국이 하나되고 민족이 하나되어 온 겨레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겨 만복을 누려야 한다. 통일을 위해서라면 천만산악도 뛰어넘고 만리격랑도 헤쳐가야 한다. 이것이 여사님의 통일의지였다.

여사님께서는 해방된 다음해 여름 어느날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다가 김일성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귀국한 항일의 전우 강건을 저택에서 만나신 자리에서 하신 담화에서도 이러한 통일의지를 천명하신 바 있다.

여사님께서는 이남에 고향을 둔 전우에게 지난날에도 어려운 일을 많이 하였는데 앞으로도 어려운 일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조국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다, 미제침략자들이 남조선을 강점하고 우리 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형편에서 우리 혁명은 더욱 간고하고 장기적인 투쟁으로 될 것 같다, 그런 것만큼 우리는 앞으로 더욱 커다란 난관과 시련을 뚫고나갈 각오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통일의 길이 간고해도 우리는 민족의 숙원을 꼭 이룩하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처음 손에 무장을 잡을 때 언제면 조국을 해방할 것인가고 생각했지만 장군님을 모시고 그 소원을 풀지 않았는가, 그런 것과 같이 나라의 통일독립도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의 눈빛은 결연한 통일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이북에서 변혁이 심화되고 민중의 행복이 커갈수록 여사님께서는 민족분열의 아픔을 더욱 가슴깊이 감각하시었다. 그럴수록 여사님의 통일의지는 더 굳게 다져졌다.

여사님의 강도높은 통일의지는 그분께서 잡으신 총구에서도 강하게 울려나왔다.

여사님께서는 광복후에도 백두산시절의 군복을 벗지 못하시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에 잡으셨던 총도 손에서 놓지 못하셨다.

항일무장투쟁은 승리했으나 아직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의 위업은 완수되지 못했다. 무장한 적은 무장으로 대항해야 하며 총대에 의거해서만 민족의 해방과 독립도 이룩할 수 있고 민족적 자주권도 수호할 수 있었다.

더구나 미제와 반동들은 자주와 민주, 통일을 염원하는 이남동포들을 총칼로 학살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사님의 총구는 예나 변함없이 불의와 악을 향해져 있었다.

거기에서는 통일염원, 통일신념과 함께 통일의지의 불줄기가 토해져 나와 삼천리강산을 울리기도 했다.

1947년 9월 어느날 김정숙여사님께서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어리신 자제분과 함께 금강산을 답사하러 가셨다가 38도선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삼일포를 찾으시었을 때였다.

일행이 삼일포의 절경을 조망하고 있을 때 불현듯 와우섬 뒤쪽에서 물오리떼가 날아오르더니 장군대앞에 내려앉았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먼저 한마리의 물오리를 명중시키고 화염이 채 가셔지지 않은 싸창을 김정숙여사님께 넘겨주시며 한번 쏘아보라고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두손으로 그 총을 넘겨받으시었다.

이때 또 한떼의 물오리가 호수에 날아와 앉았다. 거울같은 수면위에 새하얀 물오리가 동동 떠가는 것이 가물가물 바라보였다. 출렁이는 물이랑사이를 오르내리는 물오리는 하나의 흰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방의 총소리가 울리자 한마리의 물오리가 몇번 날개를 퍼덕이더니 물위에 늘어지고 말았다.

≪야!≫ 하는 환성이 또다시 삼일포에 메아리쳤다.

여사님의 사격술은 경이로움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했다.

수원들이 여사님의 전설적인 사격술에 찬탄을 아끼지 않자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아직 우리 혁명이 갈길이 먼 데 장군님을 모시고 있는 혁명전사의 사격솜씨가 변하면 되겠습니까.≫(≪민족의 어머니 김정숙여사≫, 동방사, 1997년, 170쪽)

그러시고는 저 남녘땅에는 미국놈들이 승냥이떼처럼 욱실거리고 있다고, 그놈들을 몰아내고 우리 조국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자면 사람들이 총을 잘 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일행은 영랑호를 돌아보고나서 바다기슭에 높이 솟아있는 현종암에 올랐다. 거기서 이남지역은 지척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쌍안경을 드시고 망망한 동해바다와 이남땅을 관망하시었다.

이때 바다기슭의 너럭바위주변에서 물개가 자맥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저놈을 한번 명중시켜보지 않겠는가고, 38도선도 가까운 데 한방 쏘라고 이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물개를 향해 겨냥하시었다. 그런데 물개는 물위로 대가리만 올려밀었다가는 물 속으로 쑥 들어가곤 하여 좀처럼 바로 겨냥할 수가 없었다. 물개가 물위로 언뜻 하는 순간 야무진 총성이 울렸다. 멀리에서 보이는듯 마는 듯하던 물개가 몇번 솟구쳐 오르다가 너부러지고 말았다. 그 모습은 사람들의 감동을 더욱 증폭시켰다.

또 환성이 터져 올랐다. 모두가 여사님의 신비한 사격술에 경탄을 금치 못해 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도 만족의 미소를 지으시고 정숙동무의 사격솜씨가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계급적 원쑤, 민족적 원쑤들에 대한 증오심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었다.

남북분단의 선인 38도선 가까이에서 김일성장군님과 함께 울리신 김정숙여사님의 총성은 그 어떤 회오리바람에도 끄떡없는 민족통일의지의 분출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김정숙여사님의 강인담대한 통일의지는 그분께서 잡으신 총구에서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부르시는 노래에서도 강하게 울려나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이 선포된 날 여사님께서는 그 민족사적 경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백두산시절의 전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었다.

이 뜻깊은 자리에서 여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저 하늘에 나부끼는 공화국깃발에는 조국의 해방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싸운 혁명선열들의 붉은 피가 스며있습니다.≫(상동, 167쪽)

여사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천냥값이 가는 금언으로 항일투사들의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여사님을 우러러 사람들은 한동안 벅차오르는 감동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여사님께서는 민족해방을 위한 항일의 전장에서 피흘리며 쓰러진 전우들을 한사람 한사람 회고하시면서 그들의 염원대로 조국통일위업을 완성하기 위해 장군님을 높이 모시고 더 힘차게 투쟁하자시며 ≪공화국선포의 노래≫를 선창하시었다.

 

백두산천지에서 제주도 끝까지

새 깃발 높이어 3천만은 나섰다

산천도 노래하라 이날의 감격을

조선은 빛나는 인민의 나라다

아 자유조선 인민공화국

해와 별 빛나라 조국의 앞길에

백두산천지로부터 한라산 백록담까지 온 조선을 가슴에 안고 부르시는 노래였다.

노래를 끝내시고는 자신께서는 이 노래가 정말 마음에 든다고, 남녘땅 인민들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절절히 말씀하시었다.

조국이 통일되면 항일의 혈로를 헤쳐온 길에서 쌓이고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풀릴 것 같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 모두 굳게 뭉쳐 싸워나가자. 조국을 통일해야 혁명가로서의 자기 임무를 다했다고 떳떳이 총화지을 수 있다, 이런 통일의지를 담아 여사님께서는 노래를 부르신 것이다.

김정숙여사님의 통일염원, 통일신념, 통일의지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민족자주통일노선을 실현하기 위한 거족적 통일운동을 가속화시키는 활력소로 되었다.

 

2. 자주적 통일노선을 받드시고

 

변혁운동은 시대의 선각자의 선진사상에 의해 추동된다. 선각자의 선진사상이 민중의 심장에 파악되어 하나의 변혁운동을 일으킨다. ≪온갖 혁명은 시초에는 한사람의 두뇌 속의 사상이었다≫고 한 에머슨의 말은 바로 이같은 의미를 뜻한다 할 것이다.

조국통일위업이 그 진로를 명시한 자주적 통일 사상과 노선, 그것으로 정신무장한 광범위한 대중의 힘에 의해 추동될진대 위대한 사상과 노선으로 민중을 깨우치고 통일운동에로 견인해내신 분은 바로 절세의 애국자 민족적 영웅 김일성장군님과 더불어 김정숙여사님을 꼽아야 할 것이다.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천명하신 자주적 통일 사상과 노선에 따라 조국을 통일할 의지를 가다듬으시며 성스러운 통일위업에 혼신의 열과 성을 깡그리 바치시었다.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이라는 엄청난 비운이 드리운 해방정국의 상황을 명철하게 통찰하신 만고절세의 위인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저지배격하며 민족통일문제를 우리 민족이 주인이 되어 자체의 힘으로 해결할 것임을 천명한 자주적 통일방침을 선포하시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강렬한 자주적 지향과 의지에 대한 성찰과 우리 겨레의 무비의 창조적 힘에 대한 믿음과 확신에서 비롯된 위대한 애국애족의 노선이었다.

애국에 투철하고 정의에 과감한 우리 겨레는 장군님의 자주적 통일노선 관철에로 용기있게 떨쳐나섰으니 그 장엄한 흐름의 제1선에는 언제나 자주적 통일의지의 확고한 체현자이신 김정숙여사님께서 서계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각계민중 속에 들어가시어 분단근원의 실체인 미제를 척결하고 민족자력으로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자주의식과 신념을 깊이 심어주시었으며 몸소 투쟁의 기수가 되시어 미제와 반동들의 민족분열책동을 걸음마다 짓부수며 자주적 통일운동역사에 불멸의 위훈을 새기시었다.

달아오른 해방민족의 통일열기를 자주적 통일의지로 승화시키시고 민족자력으로 통일을 이루어낼 거족적인 역사적 운동의 개척기를 열어나가신 김정숙여사님의 빛나는 애국애족의 역정, 그것은 그대로 자주통일운동에 있어서 위대한 선전자, 투철한 조직자, 확실한 구현자로서의 여사님의 거룩한 위상을 확인해 주고 있다.

외세를 배제하고

일찍이 구한 말 개항 이전부터 한반도를 무한한 가치가 있는 대륙진출의 전초기지로 인정해온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를 기해 한반도의 군사전략적 가치관에 기반한 대한반도정책을 작성했다. 38도선분할점령안은 바로 미국의 이러한 대한반도정책의 산물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단계에 이르러 한반도 전역에 대한 지배야욕의 실현이 불가능하게 된 미국은 패망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분단선획정≫이라는 미명아래 일본관동군 관할과 일제대본영 직할 경계선, 바로 종전의 일제침략군 나남 19사단과 용산 20사단의 관할경계선인 한반도 북위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하여 분할주의 정책을 강제해 나섰다.

한반도 분단의 기원으로 되고 있는 38도선분획이 미국에 의해 기안되고 시행된 것과 관련하여 당시 미국정책작성의 최고결정자였던 트루먼은 ≪한국의 분단선으로서의 38도선은 결코 국제토의의 안건으로 되어본 적이 없다. 갑자기 일본의 몰락으로 한국에 공백이 생김으로써 하나의 실현가능한 대안으로서 우리가 제안한 것이다.≫라고 고백했다.(≪희망과 고난의 연대≫, 뉴욕, 1956년, 317쪽)

결국 38도선분할점령안은 1945년 8월 13일 트루먼대통령에 의해 결재되고 즉시 영, 소, 중(장개석)에 전달되었다. 8월 15일에는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 미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일반명령 제1호≫로 전달되었고 9월 2일 공식발표되었다.

한반도 분단은 이렇듯 미국의 일방적 독단안으로 기안되고 영, 소, 중의 명목상 동의를 얻어 실행된 것인만큼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인 책임은 바로 미국에 있다 할 것이다.

당시 미국이 추구한 목적은 장차 38도선 이남을 저들의 식민지군사기지, ≪세계제패의 제1선≫으로 구축함으로써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전초기지로, 대륙진출의 발진기지로 삼고 앞으로 한반도 전역과 아시아대륙을 속지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이남에서는 이북과는 달리 미군정통치하에 일제시기의 경찰기구가 존속되고 친일관리가 그대로 유임 또는 대거 등용되는 가운데 정국방향은 점차 분열지향적인 체제를 구축하고 그것을 고착화하는데로 유도되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분단이 강제되고 이로부터 한반도문제가 통일문제로 대두된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이남강점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었다.

미국의 음모적 시나리오에 따라 유구 반만년 한지맥으로 잇닿은 하나의 강토위에서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이어 민족분열이라는 엄청난 비운을 겪게 된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폐부로 절감하신 분이 바로 김정숙여사님이시었다. 그럴수록 여사님의 가슴 속에는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이라는 민족적 불행과 고통을 강요한 철천의 원쑤인 미제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다. 그것은 그대로 미제를 반드시 몰아내고 하나된 통일조국을 기필코 안아오고야 말 것이라는 투철한 의지로 다져지고 과감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김정숙여사님의 활동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비상한 설득력과 감화력으로 분단근원의 실체인 미국에 대한 조그마한 환상도 갖지 않도록 대중을 교양해 나가신 것이다.

당시 해방정국하의 일부 사람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과 한반도 지배책동의 저의를 올바로 간파하지 못하고 미국이 2차대전시기 연합국측에 속해 있었다는 현상적인 문제에 귀결시켜 미국을 ≪해방자≫로 오인하고 있었다. 이것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이승만은 입국 후 이튿날인 10월 17일 미국에 의해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미국사람들이 우리들에게 한번 기회를 주어보자는 것≫이니 미국을 지지하여 ≪모든 정당과 당파가 협동≫해야 한다고 운운했다. 그리고 나라를 통일하려면 ≪미국이외에 조선독립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느니, ≪미국정부 및 점령군과 함께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느니 하는 외세의존적 망언을 서슴없이 하면서 민중 속에서 올바른 대미관을 정립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북에 잠입한 ≪혁명가≫의 탈을 쓴 반동들에 의해서도 미국에 대한 환상이 조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침략적, 약탈적 역사는 제국주의가 약소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그 어떤 선의의 협력자, 원조자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환상과 기대, 사대의존의식이 예속을 자초하는 망국의 정신적 근원임을 바로 우리 나라의 역사적 교훈에서 확인하고 계시었다.

이로부터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각계민중 속에 들어가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의 화근인 미국에 대한 그 어떤 환상도 가지지 않도록 대중을 부단히 각성시키시었다.

언젠가 한 일꾼이 군중 속에 들어가 선전사업을 하다가 이남에 주둔한 미군이 ≪연합군≫인 데 그들도 ≪해방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똑똑한 답변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아신 여사님께서는 그 일꾼을 만나 미군이 ≪해방군≫으로 될 수 없는 이유를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성과 참전목적, 조미간의 역사적 관계, 38도선 이남에 대한 미군강점현실과 결부시켜 다면적으로 해설해 주시었다. 그것은 미국이 ≪연합군≫에 참가한 것은 ≪전승≫의 열매를 더 많이 차지하며 전패국들과 ≪동맹국≫들에 대한 지배를 통해 세계제패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탐욕적 야망에서 출발된 것이라는 것, 역사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약탈한 미제국주의가 조선해방을 위하여 피를 흘릴 수 없다는 것, 현실적으로 미군은 조선이 해방된 지 20여일이 지난 다음 총 한방 쏘지 않고 피 한방울 흘림이 없이 이남에 주둔한 침략자라는 것, 미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은 변할 수 없다는 것 등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이남에서 반미구국투쟁을 벌이다가 입북하여 내각성원으로 일하는 이극로와 부인을 만나신 자리에서도 미국놈들이 입만 벌리면 저들이 마치 해방자, 원조자인 것처럼 떠들고 있으나 조상때부터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데 이골이 난 미국이 갑자기 오늘에 와서 그 본성을 버릴 수 없으며 이남에 상륙한 미군을 그대로 두고서는 이남민중이 하루도 편안히 살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조국통일을 위해 진력해 줄 것을 당부하시었다.

미제에 대한 환상을 극복하도록 대중을 부단히 각성시켜오신 김정숙여사님의 활동은 이르는 곳마다에 미치었다.

1948년 12월 어느날 한 정치학원을 찾으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그곳 학생들이 준비한 연극 ≪산사람들≫을 보아주시었다. 이 연극은 제주도민중이 미제와 이승만의 ≪5·10단선≫을 반대해 일으킨 반미구국투쟁을 형상한 것으로써 그해 8월 해주에서 열렸던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했던 남조선의 애국자들이 대회기간에 창작하여 대회대표들 앞에서 공연한 작품이었다. 그것을 그 학원에서 공부하게 된 창작가들이 종전의 1막에서 4막으로 수정보충해 학원학생들을 직접 출연시켜 내놓은 것이었다.

. . . 남조선혁명가들이 직접 보고 체험한 사실들을 그대로 담으니 아주 좋다고, 미제가 우리 나라를 분열시키고 이남민중을 또다시 노예로 만들려고 하고 있는만큼 이 연극에서는 민족분단의 원흉이며 제주도민들의 정의의 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하고 있는 미국놈들의 침략적 본성을 폭로하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여사님의 지도를 받고 연극이 완성되었을 때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어리신 장군님과 함께 평양국립극장에 나오시어 연극 ≪산사람들≫을 또다시 보아주시었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으시고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이 연극작품을 국립극장에서 인계받아 더 완성하도록 하시었고 지방공연까지 조직하여 광범위한 군중 속에 반미의식을 함양하도록 이끌어 주시었다.

여사님께서 예술작품을 통해 민중 속에 반미의식을 높여주게 하신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48년 여름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국립영화촬영소에 나가시었을 때에도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기록영화 ≪38선≫을 보시고 비범한 미학적 안목과 풍부한 예술적 식견으로 영화창조에 대한 높은 요구성을 제시하시면서 미제의 침략적, 약탈적 죄행을 폭로하며 이남민중의 비참상을 잘 보여주는 영화를 많이 만들어 대중들을 반미의식으로 교양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보안국 구락부≫ 배우들이 가극 ≪지리산≫을 만들었을 때에도 여사님께서는 몸소 보아주시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이 가극은 미제와 이승만반동들의 식민지파쇼통치를 반대해 싸우고 있는 지리산빨치산의 투쟁을 형상한 것이었다. 여사님께서는 가극을 만든 배우집단의 지휘성원들을 만나주시고 지리산빨치산의 투쟁모습을 잘 형상했다고, 연기도 좋고 노래도 잘 째어 감동을 준다고,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면 남조선혁명가들처럼 싸우려는 각오를 가지고 더욱 힘을 내어 일할 것이라고 뜨겁게 고무해 주시었다. 그후 어느날에는 ≪보안국 구락부≫ 배우들을 댁에 부르시어 그들이 새로 창작하고 있는 연극 ≪은파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고 가극 ≪지리산≫창작에서 성과를 올린 것처럼 이번 연극도 훌륭히 완성하라고 뜨겁게 격려해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 몸소 지도하시어 완성해 주신 이러한 예술작품들은 대중 속에서 미제에 대한 환상을 불식시키고 반미의식을 높여 주는데서 큰 작용을 하였다. 사람들은 작품을 통해 미제가 해방자가 아니라 침략자이고 원조자가 아니라 약탈자, 착취자라는 것을 더 똑똑히 알게 되었으며 미제를 몰아내고 분열된 나라를 하루빨리 통일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게 되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민중의 반미의식이 높아져가는데 기반하여 미제에게 투쟁의 창끝을 돌리도록 대중을 부단히 견인해 나가시었다.

반미투쟁을 강화하는 문제는 절실한 문제였다.

이남땅을 강점한 첫날부터 미제는 식민지지배체제확립을 추구하면서 민중의 창의에 의해 세워진 인민위원회들을 모조리 해산시키고 모든 애국적 민주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을 탄압했으며 애국적 민주역량의 진출을 차단시키고 진보적 출판물들을 강제 폐간시켰다. 그리고 ≪적산불하≫라는 미명하에 이남경제의 명맥을 틀어쥐고 저들의 군사적 목적에 복종시켰으며 민족경제의 자주적 발전의 길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미제는 또한 이남을 세계제패를 위한 교두보로 전변시키고자 도처에서 군용도로와 군사시설들을 복구정비하고 새로운 군사기지를 닦았으며 국군무력을 육성증강해 나갔다.

요컨대 미제는 남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확고히 전변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이북을 침공하기 위한 준비에 부심했다.

미국의 식민지지배책동이 더욱 노골적으로 강행되는 상황하에서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미국놈들의 군화밑에 짓밟혀 피눈물나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남민중을 하루속히 구원하자면 미국놈들을 내쫓고 조국을 통일하여야 한다는 투철한 신념과 의지를 간직하고 반미투쟁을 과감히 벌여야 한다고 대중을 불러일으키시었다. 이때 여사님의 심중에는 미국과는 언제인가 겨루어야 한다는 각오가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한 통일애국투사의 여사님에 대한 회고가 이것을 잘 말해 준다.

여사님께서는 이남에서 간 한 통일애국투사를 만나주신 자리에서 지금 정세로 보면 우리가 앞으로 미국놈들과 결사전을 하여야 할 것 같은 데 이제부터 우리의 사격목표는 미국양코배기이고 나라가 해방되었어도 우리의 사격술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우리는 미국놈들을 내쫓고 통일독립된 국가를 세워야 하며 그래야 이남민중들도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겨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었다.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좌표가 무엇인가를 똑똑히 밝혀주시는 귀중한 가르치심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이 투쟁좌표를 자신의 심중에 뜨겁게 간직하고 계셨기에 항일투사들이 회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조국에 개선하신 이후 어느 하루도 반미투쟁의지를 가다듬지 않으신 때가 없었다. 그것은 여사님께서 항일혈전의 시기 부르시던 혁명가요들을 늘 부르시고 그것이 대중 속에서 널리 불리워지도록 하신 데서 찾아보게 된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어느날 여성항일투사들과 함께 청년학생들을 만나 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항일혁명가요 ≪토벌가≫를 몸소 부르신 다음 그들에게 이 노래를 배워 주시었다.

이 노래는 일제에 대한 강한 분노와 투쟁에 일떠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우리 민족민중의 절절한 사상감정을 담은 노래였다. 항일혈전의 나날에 김일성장군님께서 한구절 한구절 독창곡으로 완성시켜 주신 여사님께서 제일 사랑하시는 노래가운데 하나였다.

 

1. 어머니 어머니는 왜 우십니까

어머니가 울으시면 울고 싶어요

품안에 안기어서 울음을 운다

2. 돈이 없고 무기 없는 우리 민족은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죽은 자중에

네 아버지 그 가운데 한사람이다

여사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한소절 한소절 배워주시면서 김일성장군님께서 늘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청년들은 피바다에 잠겼던 지난날의 조국을 잊지 말고 오늘 왜놈들을 대신하여 남조선에 기어들어 또다시 우리 민족을 식민지노예로 만들려는 미국놈들을 반대하여 싸워야 한다고 하나하나 깨우쳐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 친히 보급하신 ≪토벌가≫가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이에 남긴 여운은 세월의 망각작용으로도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김일성장군님께서도 자주 이 노래와 더불어 김정숙여사님을 뜨겁게 추억하곤 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탄생 40돌을 앞둔 1957년 12월 23일 저녁 항일투사들과 여성간부들을 만나신 좌석에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정숙동무는 어려울 때마다 대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토벌가≫도 그럴 때 부르곤 했는데 그가 1절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2절을 부르기 시작하면 다 따라부르며 비장한 결의를 다지곤 했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그는 늘 이 노래를 부르고는 피바다에 잠긴 조국땅을 잊지 말자고 호소하였는데 그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고 감회깊이 말씀하시었다.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며 항일투사들은 항일투쟁시기와 같이 해방후에도 이 노래를 부르시며 반미투쟁의지를 가다듬곤 하시던 여사님의 모습을 못잊어 했다고 한다.

힘겨워도 어려워도 혁명가요를 높이 부르며 항일투쟁의 길을 헤쳐오신 김정숙여사님이시었기에 해방정국의 나날에도 그토록 민중의 가슴 속에 ≪토벌가≫의 선율로 반미투쟁의 불씨를 깊이 심어주신 것이었다.

김정숙여사님의 이같은 적극적인 대중선전선동활동으로 하여 남북의 각계민중은 미제야말로 민족분열의 장본인이고 철천지 원쑤라는 올바른 대미관을 정립하고 미국의 식민지지배와 민족분열책동을 저지배격하기 위한 투쟁의 파고를 불러오게 되었다.

자주통일의 토대구축

민족의 운명개척에서 결정적 요인은 민족 자체의 힘이다. 모든 민족에게는 자기의 운명을 자체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큰 민족이든 작은 민족이든 문제는 민족의 힘을 어떻게 조직하고 동원하는가 하는데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존망의 기로에 처했을 때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국광복의 기치아래 온 겨레를 하나로 결집시키시어 광복성전에 힘차게 불러일으키심으로써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빛나게 수행하시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장군님께서는 민족분열의 첫날부터 조국통일을 외세에 의거함이 없이 민족 자체의 힘에 의해 자주적으로 이룩할 데 대한 입장을 견지하시었다.

이로부터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해방직후 이북에 강력한 민주기지를 창설할 데 대한 독창적인 노선을 제시하시었다.

장군님의 민주기지창설노선은 유리한 여건이 성숙된 북반부에 임시적인 중앙주권기관을 창설하고 그에 의거하여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하여 이북을 강력한 민주기지로 전변시킴으로써 전조선적인 통일정부수립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김일성장군님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 근거지 창설경험을 해방후 조성된 새로운 정세적 요구에 맞게 발전시켜 제시하신 조국통일을 이루어내기 위한 중요한 실천적 대안이었다.

이리하여 이북에서는 역사적인 민주기지창설을 위한 장엄한 진군이 개시되었다.

1946년 2월 8일 김일성장군님을 수반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20개조 정강이 발표된 데 이어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주의적 개혁이 실시되었다. 이 민주주의적 변혁의 현장에는 예외없이 김일성장군님과 더불어 김정숙여사님께서 서계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장군님께서 제시하신 민주기지창설노선을 맨 앞장에서 관철해 나가는 것이 바로 자신께 부과된 무엇보다 중대한 임무로 뜨겁게 받아안으시었다.

북반부에 강력한 민주기지를 구축하는 것이 민족 자체의 힘을 키워 조국통일을 자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확실한 담보를 마련하기 위한 선결적인 문제라고 인식하신 여사님이시었다. 그래서 김정숙여사님께 있어서 북반부에 명실상부한 민주풍토를 세우기 위한 활동은 곧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투쟁이었다.

여사님께서는 우선 토지개혁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토지개혁은 농민들을 봉건적 질곡에서 해방하고 땅의 주인으로 되려는 그들의 세기적 숙망을 해결하기 위한 위대한 사회적 변혁인 동시에 조국의 자주적 통일 실현의 주체적 역량을 튼튼히 마련하기 위한 역사적 위업이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농민들 속에 깊이 들어가시어 김일성장군님의 독창적인 토지개혁사상을 해설해 주시었다.

조국에 개선하시어 선봉에 머무르고 계시던 1945년 11월 어느날 여사님께서는 어느 한 농가에 들리시어 몸소 도리깨를 잡고 콩마당질을 도와주시며 한줌도 못되는 지주들이 땅을 독차지하던 세상은 끝장났으니 밭갈이하는 농민들이 땅의 주인이 될 때는 왔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여사님께서는 바로 김일성장군님께서 일제와 싸우실 때부터 왜놈들과 지주들이 가지고 있던 땅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실 것을 구상하시었다고, 그 구상을 실현하고자 해방된지 닷새째 되는 날 벌써 인민정권이 실현할 행동강령에 친일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땅이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분배할 것이라고 규정하시었다고, 이제 제 땅에서 농사지으며 보란듯이 잘살아보자고 절절히 말씀하시었다.

김일성장군님의 새로운 토지개혁사상은 농민들의 의욕을 부풀어오르게 하고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땅의 임자가 되고 싶다는 절절한 요망을 담은 진정서들이 장군님께 연일 쇄도했다.

바로 그러던 1946년 2월 하순 어느날, 대동군 고평면 신흥리에 나가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마을농민들과 어울려 농사일을 하시면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수천수만의 진정서에 담긴 농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헤아리시고 이제 멀지않아 지주의 땅을 몰수하여 밭갈이하는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실 것이며 손바닥에 흙 한번 묻혀보지 않은 지주놈들이 땅을 독차지하고 농민들의 피땀으로 이루어놓은 낟알을 빼앗아 호의호식하던 그런 세월은 다 지나갔다고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하지만 땅을 위한 투쟁이 심각한 계급투쟁인만큼 원쑤들의 준동에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고 이르시었다.

사실상 어머님께서 예상하신 바대로 토지개혁법령이 발포되자 지주들은 가만히 앉아서 땅을 빼앗기려고 하지 않았다.

땅을 빼앗긴 지주들은 ≪며칠이나 땅을 가지는가 두고 보자≫느니, ≪지주 없이는 농사를 못짓는다≫느니 하면서 농민들을 위협해 나섰다. 어떤 곳에서는 지주들이 머슴들에게 빚문서와 돈뭉치를 주어 ≪세간≫내보내고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받지 않고 땅을 부치게 하겠다는 거짓 ≪약속≫까지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지주들의 얼림수에 귀를 기울이는 농민들이 없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을 헤아리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농민들속에 들어가시어 그들을 계급적으로 각성시키시면서 지주들의 준동에 철추를 내리시었다.

토지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어느날 한 농촌마을을 찾으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분여받은 자기 논에서 신명나게 일하는 농민들과 격의없이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그들에게 지주들의 음흉하고 교활한 속심을 하나하나 밝혀주시었다.

한번은 한 사나이가 댁에 찾아와 장군님께 ≪억울한 일≫을 당한 데 대한 ≪상소≫를 드리겠다고 했다. 그 사연인즉 땅임자에게 땅값도 안주고 공짜로 땅을 몰수하여 머슴이나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몰수당한 땅을 도로 찾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보아하니 당신이 많은 땅을 가지고 놀고먹던 사람 같은 데 무슨 권리로 자기를 땅의 주인이라고 하는가. 당신이 언제 한번 땅을 갈고 씨를 뿌려보았으며 김을 매고 곡식을 거두어 보았는가?≫고 서슬푸른 눈길로 사나이를 보시며 당신은 ≪땅임자≫이기 때문에 농사일은 안했다고 하는데 땅의 주인은 피땀 흘려 땅을 한뙈기 일구었고 자기의 노력으로 부지런히 가꾸어온 농민들이다, 이때까지 당신이 ≪땅임자≫행세를 한 것은 해방전의 사회가 한줌도 못되는 지주, 자본가들이 절대다수 근로인민의 피땀을 빨아먹고 사는 착취사회이기 때문이었다, 거꾸로 된 세상이었으니까 당신이 땅의 주인행세를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농민들이 땅의 당당한 주인으로 되었다, 장군님께서는 인민의 피땀을 빨아먹던 지주, 자본가들을 때려부수고 근로인민이 골고루 잘사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신다, 장군님께서는 이런 나라를 세우시려고 15성상이나 산에서 싸우시었으며 오늘 해방된 조국땅에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인민정권을 세우시었다고 준절히 말씀하시었다. 사나이는 얼굴이 벌개져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여사님께서는 여전히 노하신 어조로 당신이 ≪상소≫를 하면 땅을 도로 찾을 것 같은가,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돌아가 제손으로 벌어먹는 것이 좋겠다며 결연히 꾸짖으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사리정연한 말씀에 기가 꺾이어 주눅이 든 사나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황황히 가버리고 말았다.

1946년 3월 5일에 토지개혁법령이 발포된 후 20여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성공적으로 완료된 그 세기적 격변에는 바로 김정숙여사님의 정열적인 활동이 깃들어 있음을 가슴뜨겁게 감각할 수 있다.

토지개혁이 성공적으로 실시된 후 그 성과를 공고히 하는데도 여사님의 뜨거운 심혈이 슴배어 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땅의 주인이 된 농민들 속에 계시면서 씨앗도 함께 묻으시며 그들을 풍년을 마련하기 위한 영농사업에로 불러일으키시었다.

어느날 대동군 고평면 신흥리를 또다시 찾으신 여사님께서는 기쁨에 울고 웃으며 신명나게 일하고 있는 농민들을 만나시어 이제는 평생소원을 풀었으니 모두 농사를 잘 지어보자고 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지난날 우리 농민들은 한뙈기의 땅이 없었던 탓으로 피눈물을 쏟으며 살아왔습니다. 땅의 주인이 되어 제땅에서 마음껏 농사를 지어보았으면 하는 것은 대대로 내려오면서 우리 농민들이 간직해온 세기적인 숙망이었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우리 농민들의 이 절절한 염원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기나긴 세월 백두의 험한 산발을 타고 다니시며 일제놈들과 싸우시었습니다. 그리고 해방된 조국땅에서 제일 선참으로 토지개혁법령을 발포하시어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시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지주놈들의 소작살이로 등살을 깎이며 살아오던 우리 농민들이 드디어 땅의 주인으로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천지개벽이 아닙니까.

우리는 장군님께서 주신 은금보다 더 귀중한 이 땅에 풍년씨앗을 뿌리고 만풍년을 가꾸어 장군님의 크나큰 은덕에 증산으로 보답합시다.≫

여사님의 말씀을 높이 받들고 땅의 주인으로 된 이북농민들은 알곡증산투쟁에 힘차게 떨쳐나섰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노동법령과 중요산업국유화법령 발포를 전후한 시기에도 이북의 근로자들을 노동의 주인으로 되게 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약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 역사적인 노동법령에 따라 일자리 없는 사람들이 안정된 일터에서 노동의 참된 보람을 느끼도록 손잡아 이끌어 주신 감동적인 사례들은 여사님의 그 시기 활동자료에 수많이 기록돼 있다.

1946년 초여름 어느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백두산에서 싸울 때 부상당한 자리가 도져서 간부들이 차를 부르겠다는 것을 만류하시고 의원을 찾아 저택을 나서시었다.

힘겹게 걸어가고 계시는 여사님을 발견한 중앙기관에서 청년사업을 맡아보던 간부가 인력거를 끄는 한 노인을 데리고 와서 여사님께 아뢰었다.

≪어서 인력거를 타고 가십시오.≫

인력거채를 움켜쥐고 가긍한 정상을 하고 서있는 강마른 노인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시던 여사님께서는 그를 데리고온 간부에게 시선을 돌리시며 엄하게 타이르시었다.

≪나를 생각해 주는 동무의 그 성의는 고맙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 인력거를 탈 수 있겠습니까. 이 노인과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고 다같이 평등한 조선사람이 아닙니까. 동무는 아직도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투쟁목적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지 못합니다.

우리가 조국이 광복된 다음 인력거를 타고 거들먹거리자고 풀뿌리를 캐먹고 눈위에서 자면서 싸우지는 않았지요.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투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민들을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새 사회를 건설하자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동무는 인력거에 누구를 태워가지고 다니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태워가지고 거리로 다니는 그런 불평등을 없애기 위하여 투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해방의 참뜻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김정숙여사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노인의 얼굴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었다.

여사님께서는 노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시며 ≪노인님, 용서하십시오. 저 동무가 내 마음을 몰라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노인님은 조국이 해방되었는데 어째서 아직까지 인력거를 놓지 못하고 있습니까? 지난날 왜놈의 세상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인력거를 끌며 잘사는 놈들에게서 온갖 수모를 다 받으며 살아온 노인님이 해방된 오늘까지도 인력거를 끄는 것을 보게 되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지난날에는 노인님이 인력거를 끌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노동자는 공장의 주인으로 되고 농민은 땅의 주인으로 되는 그런 새 세상을 세워 주시자고 밤잠도 못주무시면서 일하고 계십니다.

지금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모자라서 일제놈들이 파괴하고 간 공장을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인님도 인력거를 끌지 마시고 공장에 나가서 새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며 보람있게 사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시었다.

여사님의 말씀에 깊이 감동된 노인은 자기는 반생을 이 거리에서 인력거를 끌며 ≪말하는 짐승≫처럼 살아왔다고 하면서 여사님의 말씀대로 이제부터라도 사람답게 살겠다고 말씀 올리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평양시안에서는 인력거꾼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들은 존엄있는 인간답게, 새 조국의 주인답게 살기 위해 공장으로, 건설장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중요산업국유화법령의 선포를 준비하시던 나날에도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그 성공적 실현을 위해 여러 공장과 기업소들에 나가시어 노동자들에게 중요산업국유화가 가지는 정치경제적, 사회적 의미를 정력적으로 해설해 주시고 그들을 노력적 위훈에로 고무해 주시었다.

1946년 8월 초 어느날, 여사님께서는 평양시 중구에 있는 한 피복공장에 들리신 적이 있었다.

여사님께서는 맨 마룻바닥에 노동자들과 격의없이 마주앉으시고 왜놈의 세상에서 지옥같은 공장에 들어와 공장주의 학대를 받으며 말 못할 고역을 치르어야 했던 피눈물나는 그들의 과거를 들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고생이 많았겠어요. 그러나 인젠 옛말하며 살 때가 왔어요. 지금 장군님께서는 노동자들을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할 중대한 시책을 법령으로 발포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라고 하시며 나라가 해방되고 인민정권이 수립되어 노동자, 농민들이 주인된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 노동자들이 공장의 주인이라는 것을 공포하지 못하였다고 하시면서 토지개혁법령으로 우리 나라에서 땅의 주인이 농민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한 것처럼 이제 중요산업의 국유화법령을 발포하게 되면 노동자들은 공장의 주인으로, 새 조선의 진정한 주인으로 그 지위가 법적으로 고착되고 공인되게 된다고 말씀하시었다.

계속하여 여사님께서는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면 일제와 민족반역자들이 가지고 있던 공장과 생산시설들은 나라의 것으로 되며 인민이 주인된 우리 나라에서 공장과 생산시설이 나라의 것으로 된다는 것은 곧 기계를 돌리는 노동자들의 소유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일깨워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중요산업국유화법령의 발포를 방해하는 반동세력들의 책동을 분쇄하는데로 대중을 힘있게 견인해내시었다.

이무렵 반동들은 산업국유화법령이 나오면 크건 작건 모든 개인공장이 다 몰수되어 국유화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 요언을 곧이들은 일부 중소기업가들 속에서는 성급하게 저들의 공장설비들을 시장에 내다 처분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을 요해하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8월 초순 어느날, 각계각층 민중이 많이 모이는 사창장마당에 나가시어 고물상주인에게 기계부속품을 팔아달라고 맡겼다는 중소기업가를 직접 만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그와 자리를 같이하시고 항일무장투쟁시기 유격구들에서 인민혁명정부가 양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의 기업활동을 장려해 준 사실을 이야기해 주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중요산업국유화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가지도록 해설해 주시었다.

특히 산업국유화가 중소상공업자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깊이 인식시키시었다.

이리하여 마침내는 민주역량에서 중소상공업자들을 떼어내고 산업국유화를 파탄시키려고 책동하던 반동들의 흉계가 제때에 분쇄될 수 있었다.

김정숙여사님의 불면불휴의 노고는 커다란 결실을 안아왔다.

이북의 모습은 일변했다. 노동자, 농민, 인텔리를 비롯한 광범위한 민중이 주인된 민주사회의 참모습이 펼쳐진 것이다. 사람들은 참다운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실질적으로 향유하게 되었다. 드넓은 전야에서는 땅의 주인된 농민들의 밭갈이 타령소리가 그칠 줄 몰랐고 공장, 기업소마다에서는 공장의 주인된 노동자들이 울리는 증산의 망치소리가 세차게 울리었다. 이러한 민주풍토의 참모습, 그것은 곧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확실하게 담보하는 튼튼한 토대였다. 여사님께서 제반 민주개혁의 나날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시며 바라신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민족분열책동에 철추를

미국의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을 고착하기 위한 책동은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미·영 3국외상회의에서 조선문제에 관한 결정이 채택된 것을 기화로 그것은 보다 새로운 단계에서 본격화되고 있었다. 당시 3국외상회의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후 국제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련의 문제들을 토의하면서 조선문제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 결정에 의하면 조선을 독립국가로 부흥시킬 것을 예견하여 우리 나라의 정당, 사회단체들과의 협의하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조선이 독립국가로서 민주주의적, 자주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도록 소·미·영·중 4개국이 5년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후견을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5년이내의 기한으로 4개국이 후견을 실시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의사와 다소 배치되는 점이라 볼 수 있었다. 그렇기는 했으나 이것은 조선의 민주주의적 발전과 자유롭고 통일적인 완전한 독립국가건설을 4개국이 원조협력하겠다는 것을 세계앞에 약속한 구체적 표현으로서 조선의 자주적 통일과 독립국가건설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이로부터 조선민족 전체가 이 결정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실현한다면 5년이내의 후견기한을 단축할 수 있었으며 조선의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촉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 나라의 통일을 하루속히 실현하고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는데 유리한 여건을 지어주기 위한 것으로 평가되고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이 마치 ≪5개년 조선신탁통치안≫인듯이 왜곡하면서 친미사대적 반동들과 미국의 왜곡선전에 기만당한 사람들을 긁어모아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작하고 ≪반탁운동≫의 역풍을 몰아왔다. 원래 조선에 관한 ≪신탁통치안≫은 미국이 대조선정책으로 제기한 것으로서 그것을 테헤란회담과 얄타회담에서 거듭 주장해 왔던 것이다.

모스크바3국외상회의에서도 미국측은 조선에서 소·미 양군이 군정을 실시하며 그것이 끝난 다음 10년동안 소·미·영·중 4개국의 대표들로 조선의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행사하는 기관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미국측의 이 제안은 사실상 해방된 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자는 것 외에 다름아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3국외상회의에서 미국측의 이같은 제안은 거부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자기들의 식민지화야욕이 차단되자 철면피하게도 이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찬성해놓고도 조선의 ≪신탁통치≫를 위한 결정인듯이 왜곡선전하면서 이 결정을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미군정청은 ≪동아일보≫를 통해 번즈 미국무장관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서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지역으로 일괄한 신탁통치를 주장≫하였다고 12월 27일발 기사로 왜곡보도했고 이 왜곡된 기사를 기정사실로 하여 ≪반탁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로부터 미국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실행을 위해 조직된 소·미 공동위원회 사업을 처음부터 지연파탄시키는데로 유도하였다. 결국 1947년 8월 그것은 파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세력들 가운데는 ≪반탁운동≫에 매달리면서 이 기회를 악용해 저들이 정국을 주도해 보고자 시도하였다. 심지어는 민족반역자들까지 ≪반탁≫의 슬로건하에 ≪애국≫을 표방하면서 3국외상회의 결정을 반대해 나섰다.

이같은 상황을 예리하게 분석투시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1945년 12월 31일 북조선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부장협의회에서 하신 ≪조선문제에 관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미국과 반동들의 ≪반탁운동≫의 본질을 폭로하시고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관철하도록 호소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드시어 대중 속에 깊이 들어가시어 모스크바3국외상회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그 결정을 반대하는 미국과 반동세력의 민족분열책동을 저지배격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하시었다.

일부 학생들이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일으키는 등 학생들의 동향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요해하신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헤아리시고 시내 중학생들을 위한 강연회를 조직하시고 자신께서 출연하시었다. 그때 반동들의 준동이 심한 데다 나쁜 놈들이 영향을 받은 일부 학생들의 무분별한 행동도 있을 수 있어 일꾼들은 여사님의 강연회출연을 극력 만류했으나 여사님께서는 앞으로 새 민주조선 건설에서 큰일을 해야 할 청년학생들이 갈길을 몰라 방황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1월 29일 직접 평양시 청년학생들의 강연회에 출연하신 것이었다.

여사님께서는 검소한 조선옷차림을 하시고 연단으로 나가시었다.

강연은 일문일답형식으로 시작되었는데 처음부터 청강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사님께서는 ≪신탁반대운동≫이 우리 나라를 또다시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반동적인 운동임을 폭로하시었다.

사리정연하게 이야기를 펴나가시는 김정숙여사님의 연설은 ≪동맹휴학≫에 참가했던 학생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하나하나 파헤쳐 그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뉘우치게 하였다.

장내에서 학생들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선생님! 정말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여사님께서는 이 진정에 넘치는 말에서 강연회에 모인 학생들 가운데 우리 나라가 다시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가 되기를 바라는 학생은 단 한명도 없으며 모두가 자주독립국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확인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조선의 청년학생들은 모두 우리 나라가 자주독립국가로 되기를 바라는 조건에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가담할 이유가 없다고 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여사님께서는 애국적 열정에 불타는 피끓는 학생들이 새 조선 건설의 기둥이 되고 나라의 운명을 떠메고 나갈 참다운 일꾼이라는 높은 자각을 가지도록 호소하시면서 우리 나라에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게 하려는 미제와 반동들의 책동에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고 하나하나 일깨워 주시었다. (≪김정숙동지혁명활동자료집≫ 해방후편, 조선노동당출판사, 1987년, 134쪽)

여사님께서 몸소 출연하신 강연의 평판은 가히 선풍적이었다. 이것은 비단 학생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여사님의 강연은 학생들을 통해 학부형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이토록 김정숙여사님의 적극적인 활동은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민중 속에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그 관철투쟁을 벌여나가는데서 힘있는 작용을 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한편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하는 것은 자주독립국가의 주인이 되는가 아니면 식민지노예가 되는가 하는 심중한 문제로 보시었다. 그리하여 해설과 설복으로써도 개심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하시었다.

각계민중이 통일적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열렬히 지지해 나서고 있을 때 여성운동내에 잠입한 불순이색분자들은 이남반동들의 ≪신탁반대운동≫에 발을 맞추어 이 결정을 정면으로 반대해 나섰다.

그들의 일거일동을 주시하시던 김정숙여사님께서는 북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명의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하시고 1946년 2월 여맹열성자회의를 통해 불순이색분자들의 반동적 죄행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여맹대오에서 제거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정력적인 활동에 의해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파탄에로 몰아가려고 책동한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정체가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3국외상회의 결정관철에로 호소하신 장군님의 의도가 제때에 대중 속에 파악되고 그것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민중은 투쟁에 일떠섰다.

이북에서는 공산당을 비롯한 정당, 사회단체들과 인사들의 명의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공동성명과 성명이 발표되었는가 하면 신문과 방송들이 연일 글을 발표했고 평양에서는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군중집회와 군중시위가 크게 벌어졌다.

이북민중의 투쟁에 고무되어 이남에서도 ≪반탁≫모략책동을 배격하기 위한 투쟁이 가열차게 벌어졌다. 1946년 1월 3일 서울에서만도 ≪반탁≫모략을 반대하는 민족통일촉성시민대회와 군중시위가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무려 30만명의 군중이 참가했다.(≪해방후 4년간의 국내외일지≫, 평양, 민주조선사, 1949년, 120쪽)

인천, 대구, 부산, 광주, 군산 등 노동자계급이 집결되어 있는 큰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이남각지에서 수십만 군중이 참가한 집회와 시위투쟁이 벌어졌다.

반미구국투쟁은 1946년 가을에 들어서면서 보다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마침내 대중적인 총파업과 전민중적 항쟁으로 발전했다. 그것이 바로 10월의 전민중적 반미항전으로서 여기에는 약 2백30여만명의 애국적 민중들이 참가하였다.

우리 민중의 과감한 투쟁에 의해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의 실현을 파탄에로 몰아간 미국과 반동들의 범죄적 책동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미제와 반동들의 민족분열책동을 짓부수고 자주적 통일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김정숙여사님의 활동은 또한 미제와 반동들의 ≪단선단정≫ 음모책동을 저지배격하기 위한 투쟁에서 더욱 적극화되었다.

미국은 소미공위를 통해 한반도문제를 저들의 지배주의적 목적을 실현하는데로 유도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남한만의 ≪단정≫수립을 유엔의 간판을 도용해서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를테면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지배전략의 방향성은 전조선의 지배로 변함없이 선 그어져 있었으나 당면하여 그 실현이 어렵게 되자 식민지화의 행동반경을 일단 저들이 발붙인 이남지역에 국한시키는데로 돌려졌다. 군정을 통한 구식민주의적 직접통치방식으로는 힘들게 되었다는 판단아래 신식민주의적 간접지배방식인 현지대리정권의 조작에로 이행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미국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파탄시키고 1947년 9월 한반도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끌고 갔다.

미국은 1948년 2월 유엔에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감시하의 38도선 이남지역에서의 ≪단독선거≫실시에 관한 미국무장관 마셜의 ≪결의≫를 강압통과시켰다.

바로 이 결정에 따르면 이남단독정부의 선거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감독밑에 실시하며 그 선거규정은 이남주둔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비준한 다음에야 효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결정은 우리 민중의 자주권을 난폭하게 짓밟고 우리 나라를 분할통치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은 한반도문제의 유엔상정 자체가 3국외상회의 결정위반이라는 점에서, 총선거가 미국이 좌지우지하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감시하에 실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또한 한반도문제를 당사자인 남북대표의 참가없이 미국과 추종국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토의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그 부당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런 까닭에 1948년 2월 조선에 관한 유엔총회 결정은 우리 민족은 물론 세계 진보적 민중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48년 5월 민주주의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민중의 열망을 차단하고 단독선거를 강행하여 끝끝내 이남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내세운 식민지대리정권을 조작하기에 이른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같은 변천상황에 대비하여 민족분열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민족앞에 망국적인 ≪단선단정≫책동을 반대배격하기 위한 거족적인 구국대책을 제시하시었다.

김일성장군님의 이러한 통일의지는 1948년 3월 9일 북조선민전 중앙위원회 제25차회의에서 하신 연설 ≪반동적 남조선 단독정부선거를 반대하고 조선의 통일과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에서 명백히 천명되었다.

장군님의 구국방안의 실현을 위해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시었다. 언제든지 장군님께서 제시하시는 노선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시고 어깨를 들이밀어 관철해오신 여사님이시기에 ≪단선단정≫음모책동을 저지배격하기 위한 장군님의 의지와 방침이 관철될 수 있도록 여사님께서는 48년 봄의 모든 사업을 여기에 복종시키고 지향시키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몸소 각계민중 속에 들어가시어 미제와 반동들의 민족분열주의적인 망국적 단독선거의 죄상을 예리하게 밝히시며 광범위한 대중을 망국적 ≪단선단정≫ 저지투쟁에로 궐기시키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이러한 투쟁의 한 단면을 항일투사 이종산은 자기의 회상담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1948년 1월 미제가 이른바 ≪선거≫를 감시한다는 명목밑에 저들의 어용도구인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라는 것을 이남에 끌어들이기 전인 어느날 점심때였습니다.

백두의 여장군이신 김정숙동지께서는 여느때와 같이 점심식사를 하러 들어오신 위대한 장군님께 이날 아침에 발행된 자료통신에 낸 자료를 말씀드렸습니다. 그중에는 남조선에 기어든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의 ≪분과책임자≫로 장개석도당의 대표라는 자가 선거되었다는 자료도 있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가소로운듯 호탕하게 웃으시었습니다.

제 코도 제대로 씻지 못하는 주제의 패잔병이 남조선에 기어들어 그 무슨 책임자노릇을 하겠다고 하니 그 꼴이 너무도 가소로웠고 또한 그런 놈을 책임자로 내세우지 않으면 안된 미국놈들의 신세가 너무나도 가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곁에서 이 소식을 듣고 놈들의 가련한 몰골이 눈앞에 안겨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크게 웃으시자 어리신 장군님(김정일동지)께서는 어머님께 자료통신을 좀 보자고 하시더니 그것을 넘겨받아 한자한자 읽어보시었습니다.

어리신 장군님께서는 자료통신을 다 보시고나서 어머님께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은 무엇이고 ≪유어만≫은 어떤 사람인가고 물으시었습니다.

저 역시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던 문제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은 지난날 일본놈들이 조선을 먹고 우리 인민을 못살게 굴던 것처럼 이번에는 미국놈들이 우리 나라 남쪽땅을 어떻게 하나 영원히 삼켜보려고 제놈들의 말을 잘 듣는 졸개들로 조직한 허수아비조직이라는 것, 그리고 ≪유어만≫은 중국사람인 데 중국인민들이 제일 미워하는 장개석과 한가마밥을 먹고사는 그놈의 졸개라는 것, 장개석은 미국놈을 제 할애비처럼 섬기면서 인민들을 못살게 군 더러운 놈이라는 것, 이놈들이 지금 총을 잡고 일떠선 중국인민들에 의하여 거의다 죽게 되었다는 것, 그 가련한 처지에 남조선에 기어들어 미국놈들의 각본에 따라 우리 나라 문제를 가지고 흥정하려 하고 있는데 우리 인민 자체의 힘으로 통일된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우리의 원칙적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시며 이런 놈들이 남조선에서 미국놈들을 물러가게 할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시었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 어찌나 생동하게 쉬운 말로 이야기해 주시었던지 저는 지금도 그때 하신 말씀의 구절구절이 기억에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

김정숙동지의 말씀을 받아안으며 저는 조국통일의 장애물은 다름아닌 미국놈들이라는 것, 미국놈들을 남조선에서 몰아내지 않고서는 한핏줄을 이어받은 우리 민족이 한강토위에서 단란하고 화목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더더욱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김정숙여사님께서 이북민중은 물론 이남민중의 가슴속에도 미국과 반동들의 민족분열주의적인 ≪단선단정≫음모책동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의 씨앗을 심어주시었음을 많은 자료들이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한 김정숙여사님의 활동가운데는 1948년 역사적인 4월남북연석회의 참석차로 평양에 갔던 이남여성대표들과의 만남도 있다. 여사님께서는 이남여성대표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나라와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여성조직들이 명심해야 할 점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시면서 지금 미제와 이남반동들이 다가오는 5월 10일에 단독선거를 강행하려고 하는 조건에서 우선 놈들의 이러한 책동을 철저히 파탄시키는데 힘을 집중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단선단정≫반대투쟁은 여성군중집회나 시위, 성토대회와 같은 공개적인 방법으로는 벌이기 어려운 여건에서 모든 여성조직들이 짜고들어 여맹원들과 선각자들을 광범위한 여성군중 속에 들여보내어 전체 여성들을 교양하고 조직동원하는 방법으로 반동적, 반민족적 단독선거를 반대배격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가르치심은 일찍이 항일혁명투쟁시기 여사님께서 창출하신 지하공작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이남여성대표들에게 새로운 사업의욕과 필승의 신념을 안겨준 투쟁의 등불이었다.

김정숙여사님의 정력적인 활동은 대중 속에서 커다란 작용을 하였으며 투쟁의 열풍을 불러오게 하였다.

이북각지에서는 이남에서의 단독선거 실시 및 유엔총회 결정을 반대하는 군중대회와 직장보고대회가 연일 진행되었다.

≪노동신문≫ 1948년 3월 20일자에 의하면 3월 17일 현재 이에 참가한 수가 무려 3백49만 9천4백63명, 여기서 채택된 항의문만도 1만 6천3백57통에 이르렀다.

투쟁의 불길은 이남에서도 세차게 타올랐다.

미제는 ≪단독선거≫를 강행하기 위해 ≪특별경비사령부≫와 테러단인 ≪향보단≫까지 조작했고 무장경찰들을 대량 늘이었으며 ≪비상경계령≫ 등 각종 포고와 명령을 연발했다. 서울에서만도 7천여명의 무장경관이 동원되어 완전한 전투준비를 갖추었다.

선거가 박두한 5월 7일~10일 선거일까지만 해도 5만여명의 민중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선거당일에는 5백여명이 학살되었다. (≪에이피통신≫ 1948년 5월 12일자)

그러나 그 어떤 야수적인 폭압도 분노한 민중의 진출을 억지할 수 없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물러가라≫,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는 등의 슬로건을 들고 10개 도(서울, 제주도 포함), 1백56개의 시, 군들 가운데 1백42개 시, 군들에서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에는 무려 1백만의 각계층 민중이 참여했다.

선거당일에는 도처에서 선거자들이 ≪투표장≫에 나가지 않는 불복종운동과 ≪선거표≫를 무효표로 만들기 위한 운동을 힘차게 벌였으며 여러 민주운동단체들이 서로 합동하여 ≪투표장≫에 불을 지르거나 ≪투표함≫을 운반도중 탈취하여 태워버리기도 했다.

이리하여 ≪선거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경상북도의 경우 유권자의 80~90%가 선거에 불참하였으며 제주도에서는 3개의 선거구가운데서 2개의 선거구가 선거를 진행하지조차 못했다. 나머지 선거구에서도 절대다수가 불참했다.

결과 선거가 진행되어 10여일이 지난 5월 22일까지도 30개 선거구의 투표결과를 발표하지 못했다. 이남에서 망국적 단독선거는 파탄을 면할 수 없었다. 이남에서의 망국단선을 파탄시킨 것은 우리 민족민중이 구국통일의 길에서 이룩한 커다란 승리였다. 여기에 바치신 김정숙여사님의 불면불휴의 노고와 업적은 오늘도 겨레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자주적 통일정부수립을 향해

미제는 전민족적인 치열한 투쟁으로 ≪단독선거≫가 파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결과를 날조하여 단독정부를 조작했다.

미국은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이른바 ≪대한민국정부≫를 조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미제는 이같이 단독정부를 조작한 이후 이남에서 식민지예속화정책과 군사기지화정책을 더욱 강행실시하는데로 나갔다. 이로 하여 민족분열의 위기가 더한층 심각화되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미국이 유엔의 깃발을 도용하여 남조선에서 ≪단선단정≫을 단행하여 영구분단책동을 감행하는 엄중한 사태에 대처하시어 이를 저지파탄시키고 남북을 하나로 잇는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거족적인 조치를 취하시었다. 장군님의 이 조치는 남과 북의 정당, 사회단체, 각계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남조선에서의 ≪5·10단독선거≫를 반대하는 투쟁과 함께 조선민중의 통일적 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기 위한 투쟁이 힘있게 벌어졌다. 이 거족적 투쟁의 앞장에는 김정숙여사님께서 서계시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은 김정숙여사님의 절절한 염원의 실현이었다. 해방된 조국에 개선하신 여사님께서는 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국토가 분단된 것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었으며 김일성장군님의 통일정부수립노선의 관철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그리하여 김정숙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통일적인 정권창건을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서시었다.

1945년 12월 1일 김정숙여사님께서 청진시인민위원회 일꾼들과의 좌담회에 참석하시어 하신 말씀은 그 생동한 사례의 하나이다.

이날 여사님께서는 일꾼들에게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건국노선에 따라 참다운 민중의 정권인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투쟁해야 할 사명감과 당위성을 밝혀주시고 우리에게 해방된 조국땅에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울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이 있는데 대해 긍지높이 말씀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인민혁명정부노선을 제시하시고 유격근거지에 진정한 민중정권을 세우시었으며 유격구에 세워진 인민혁명정부에 의해 제반 민주주의적 개혁과 민중적 시책이 실시되었다고 감명깊게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노동자계급의 영도밑에 광범위한 농민대중과 지식인, 양심적인 민족자본가 등 각계각층 민주역량을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기반한 인민정권건설 사상과 노선의 정당성을 산 현실을 가지고 힘있게 논증하시었으며 이같은 정권만이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광범위한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여 투쟁할 수 있는 애국적이며 민중적인 정권으로 될 수 있다고 강조하시었다.

이처럼 김일성장군님의 주체적인 건국노선을 적극 받들어오신 여사님이시었기에 장군님의 부르심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는 일에서 남모르는 수고를 많이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장군님께서 댁에 들어오시면 보실 자료들과 문건들, 참고서적들을 미리 읽어보시고 필요한 내용들을 고르고 제목들을 표시해두시었으며 어떤 것은 따로 적으시었다가 보고드리시었다.

그리고 공화국정부의 골간이 될 항일혁명투사들과 국내 애국인사들과의 만남의 기회를 자주 마련하시고 김일성장군님의 공화국창건 방침관철의 방안을 하나하나 의논도 하시고 기발한 대안을 제기하시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깊은 인연을 맺은 이주연, 이용, 이영, 장해우도 있었다. 여사님께서는 그들에게 조언과 고무를 주시면서 소문없이 공화국창건의 초석을 쌓아나가시었다.

여사님께서 공화국의 새 헌법초안의 작성과 국장 및 국기를 제정하는 사업에 불철주야 노고를 기울이신 사실은 통일정부수립을 향한 여사님의 활동업적을 그대로 실감하게 하고 있다.

1948년 봄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국장은 국기, 국장 도안이 잘 진척되지 않아 모색하던 끝에 장군님댁으로 여사님을 찾아갔다.

여사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국장과 국기가 북조선인민들 뿐 아니라 남조선인민들까지 모두 접수될 수 있게 하며 장군님의 새 조국 건설에 대한 원대한 구상과 방침이 잘 반영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공화국 국기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운 투사들이 흘린 붉은 피와 당의 두리에 뭉친 우리의 혁명역량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기본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민의 기백을 상징하는 표시와 미래의 승리를 상징하는 오각별을 반드시 넣을 데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시면서 국기와 국장 도안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장군님의 의도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시었다.

김정숙여사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선전국장은 그길로 도안창작사업을 하고 있는 미술가들한테 찾아가 장군님의 의도를 전달하였다. 이렇게 되어 국장과 국기초안이 새롭게 작성되게 되었다. 곧 그것은 신문에 발표되어 전민중적 토의에 붙여지게 되었다.

그 당시 국호제정문제와 관련하여 ≪인민≫과 ≪민주주의≫라는 말을 빼자고 하다가 장군님의 강한 타격을 받은 종파분자들은 국기와 국장 제정문제를 놓고서도 ≪조선적인 특성≫을 운운하며 국기의 동그라미안에 오각별대신 보습을 그려넣으며 국장에 용광로(당시 국장초안에는 용광로가 그려져 있었다.)대신 이조시기의 왕의 궁궐이었던 경복궁을 그려넣어야 한다고 하면서 제동을 걸었다.

김정숙여사님께서는 이같은 시대적, 민중적 지향과 어긋나는 반동적 견해를 격파하고 장군님의 의도대로 국기와 국장을 만들도록 해당 부문의 일꾼과 여러차례 자리를 같이하시고 그 대책을 논의하시었다.

국기와 국장을 마지막으로 심의하기 전날밤 여사님께서는 밤늦게 댁에 돌아오신 장군님께서 국기와 국장 초안을 책상위에 펼쳐놓으시고 새벽이 가까워오도록 깊은 사색에 잠겨 계시는 것을 보시고 장군님곁으로 조용히 다가서시었다.

장군님께서는 국장초안에 그려넣은 용광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시며 용광로는 우리 나라의 발전방향을 충분하게 반영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장차 우리 나라를 세계적으로 발전된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로 되게 하자면 나라의 전기화를 실현해야 하는 만큼 나라의 기술발전방향을 보여주는 전기화를 반영하는 그림을 용광로대신 그려넣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전기화를 반영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말씀드리시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계시다가 예지로 빛나는 눈길로 장군님께 발전소를 그려넣으면 전기화를 표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고 말씀드리었다.

≪옳소! 발전소, 우리 나라 수풍발전소를 넣는 것이 좋겠소.≫

장군님께서는 대단히 만족해하시며 수풍발전소와 고압송전선탑을 국장도안에 손수 그려넣으시었다.

이리하여 일성장군님의 의도와 김정숙여사님의 예지가 깃든 공화국 국기와 국장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김일성장군님을 충실히 보좌하시는 김정숙여사님의 활동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위업은 결속의 장을 펼치었다.

드디어 남북조선 전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북반부지역에서는 8월 25일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진행되었으며 노동자, 농민, 사무원, 인텔리, 기업가, 상인, 수공업자,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과 정당, 사회단체 대표 2백12명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었다.

한편 미제와 반동집단의 파쇼통치로 말미암아 남반부지역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먼저 7월 20일까지 유권자들이 비밀리에 서명의 방법으로 1천80명의 인민대표를 선거하고 그 인민대표들이 8월 21일 해주에 모여(1천2명이 참가) 대표자대회를 열고 3백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비밀투표의 방법으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전민족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투쟁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은 남북총선거에서는 역사적인 승리가 이룩되었으며 이에 기초하여 1948년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날 북에서는 신의주, 온성으로부터 남에서는 목포, 부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의 전국각지에서 선거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회의장인 모란봉극장에 모였다.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회의 참가자들의 열광적인 환호에 답례하시며 회의장에 나오시었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는 먼저 전민중적 토의를 거쳐 전체 조선민중의 일치한 지지와 찬동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을 심의하고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으며 전조선최고입법기관의 상설조직으로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선거하였다.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 제5일회의에서는 민족의 태양이시며 항일의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으로, 국가수반으로 높이 추대하였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한결같은 지향과 의지를 반영한 민족의 대행운이고 자랑이었다.

1948년 9월 9일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마침내 영광스러운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고 공화국정부를 조직하시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나라의 완전한 통일과 부강한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한 공화국정부의 투쟁과업을 밝힌 정강을 발표하시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우리 민족의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역량이 조국의 자주적 통일국가창건을 위한 투쟁에서 쟁취한 거대한 전취물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철두철미 남북 전체 민중의 총의에 따라 합법적 절차를 거쳐 창출된 중앙정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남북민중의 총선거, 즉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이남 총유권자의 77. 52%(6백73만 2천4백7명)가, 이북지역에서 총유권자의 99.97%가 선거에 참가하여 합법적으로 세워진 점으로 보아 극명한 사실이다.

공화국의 내각이 이북에서 선거된 대의원, 이남에서 간 대의원, 또 지난날 조국광복에 투신한 항일혁명투사들, 국내 독립운동자들, 양심적 민족주의자 그리고 노동자, 농민, 학자, 기술자 등 각계각층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또한 그것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다.

실례로 홍명희, 이용, 이극로, 백남운, 이병남 등 이남에서 입북한 애국적 인사들이 내각부수상, 도시경영상, 무임소상, 교육상, 보건상 등의 요직에 앉았다는 사실은 그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야말로 남북을 포괄한 합법적인 대표성을 지닌 정부임을 의미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이는 ≪조선사람은 자기 손으로 나라를 통일할 수 없으며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없다≫고 한 미국과 반동들의 요언을 물리치고 조선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능히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내외에 당당히 과시한 것이었으며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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