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20일

통일여명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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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 김일성주석 ≪세기와 더불어≫

통일여명 편집국 주해 2-44 (6-2-3)

 

조선혁명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한 장의 사진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때지 못한다.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라는 위대한 수령님의 활달한 친필이 적혀있는 사진이다.

언제인가 혁명박물관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사진앞에서 이 사진은 자신께서 제일 아끼던 사진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이께서는 항일혁명시절을 추억하실 때마다 김정숙동지를 자주 회고하시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언제나 경애하는 수령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가장 귀중하고 친근한 동지로, 잊을 수 없는 혁명전우로 살아계시었다.

내가 이 사진을 찍은 것은 남야영에 머물러있을 때입니다. 남야영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과 항일연군 1로군산하의 부대들이 초기에 사용한 워로쉴로브근방의 임시기지입니다. 남야영을 B야영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거기서 한 해 겨울을 난 다음 나는 다시 만주와 국내에 나와 소부대활동을 벌였습니다. 1942년 여름부터 우리는 쏘독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급변한 정세의 요구에 맞게 동북항일연군과 쏘련군부대들과 함께 국제연합군을 뭇고 북야영에 정착하였습니다. 항일투사들이 A야영이라고 부르는 하바로프스크부근에 있는 기지가 바로 북야영입니다.

나는 하바로프스크회의가 있은 다음 남야영으로 갔습니다.

우리보다 한발 먼저 남야영에 와있던 최현이 멀리까지 나와 우리를 마중해주었습니다. 그가 털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쓴 나를 눈이 떼꾼 해서 쳐다보다가 웬 신사인가 했더니 장군이었구만 하면서 웃음을 터뜨리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최현이 어찌나 포옹을 세게 했던지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회의를 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무슨 회의를 그렇게 오래 했는가고 투정 비슷하게 농도 하였습니다.

남야영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가면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통하는 철길이 있고 자그마한 철도역이 있었습니다.

남야영에 모인 인민혁명군대원들은 자체로 병실도 더 짓고 주택도 짓고 창고며 식당이며 세면장도 지었습니다. 병실은 반토굴식이었는데 인민군대의 현재 병실들처럼 침대를 2층으로 놓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이 그때 건설공사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병실앞에는 널직한 운동장도 있었습니다.

남야영에 있을 때 국내와 만주에서의 소부대활동을 준비하면서 정치학습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대부분이 그때 처음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곳에 간 다음부터는 식량걱정을 안해도 되었습니다. 끼당 200그램 정도씩 얇게 썬 빵을 주었는데 처음에는 입에 잘 당기지 않았습니다. 입에 선 서양음식인데다가 찬도 변변치 않아서 다들 식성이 맞지 않아 했습니다.

거기에는 후방차도 있었습니다. 그 화물자동차가 근처에 있는 부업농장에 다니며 우리에게 필요한 후방물자를 날랐습니다.

운전수는 쏘련사람이었습니다. 이오송이 운전기술을 배우느라고 내내 그 사람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었습니다. 어떤 날은 부업농장에도 같이 갔습니다. 그는 운전수를 따라 다니는 과정에 자동차운전법도 배우고 술도 배웠습니다. 그 운전수라는 사람이 술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이오송은 그때 배운 밑천을 가지고 해방 후에도 얼마간 차를 몰았습니다.

그가 차라면 오금을 쓰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내 차를 몰다가 울타리를 들이받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 동무들이 그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남야영에서 생활하던 쏘련전우들이 우리 나라에 왔다간 일이 있습니다. 후방차운전수도 평양에 와서 옛 친구인 이오송을 만나고 돌아갔습니다.

원동에서 겨울을 나고 봄을 맞던 그 해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1941년은 우리 혁명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난 해이지만 세계적 판도에서 볼 때에도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많았던 해입니다.

6월에 히틀러군대가 쏘련을 침공했고 12월에는 일본군의 진주만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었습니다.

참으로 1941년은 인류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재난을 가져다준 불행한 해였습니다. 수천년을 두고 인류가 쌓아놓은 문명이 탱크와 대포앞에서 형체도 없이 박살나던 수난의 해, 전화의 해였습니다.

그러나 쏘독전쟁도 태평양전쟁도 아직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낙관과 신념에 넘쳐 1941년을 뜻깊게 맞이하였습니다. 조선혁명가들이 시대와 역사앞에, 조국과 민족앞에 지닌 성스러운 임무를 실현할 시각은 바야흐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새봄을 맞으면서 소부대활동과 앞으로의 공동작전과 관련된 구상을 많이 하였습니다. 일단 구상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우들과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김책과 주보중이 남야영에 얼마동안 와있었는데 그들과도 자주 협의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바로프스크회의 후 소부대들을 편성하여 국내와 만주에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나도 소부대를 데리고 떠날 차비를 하였습니다.

출동할 날자가 박두하자 김정숙은 나와 소부대공작에 나갈 동무들의 길차비를 도와주었습니다.

나와 김정숙은 그때 이미 결혼한 사이였습니다.

우리는 혁명을 하는 과정에 서로 알게 되었고 백두산을 넘나들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사이에 벗이 되고 동지가 되고 한 생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김정숙을 처음으로 본 것은 다홍왜회의를 하던 무렵입니다. 회의 후였던지 도중이었던지 삼도만에 갔습니다. 연길현에 속한 고장입니다. 삼도만 능지영이라는 곳에 당비서처가 있었는데 김정숙은 그 비서처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능지영에서 소집된 비서처일군들의 회의장소에서 김정숙을 만나보았습니다.

그 후 나는 마안산에서 우리 부대에 편입된 김정숙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명화와 함께 만강에서 나를 맞아주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날 그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듣고 보니 그는 의지가지할 데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가 믿고 의지할 곳이란 혁명전우들의 품밖에 없었습니다.

김정숙은 그 후부터 내내 우리와 함께 싸웠습니다.

김정숙이 우리한테 온 후 무송현성전투가 있었는데 거기서 그가 여투사로서의 담력과 지략을 남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무송현성전투에서 살아난 것도 김정숙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전투가 아주 심각한 전투였습니다. 김정숙은 전투장에서 좀 떨어져있는 잘루목에서 7-8명의 여대원들을 데리고 아침식사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잘루목에 밥을 지을만한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연기가 나도 다른데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적들이 갑자기 여대원들만 있는 잘루목에 달려들었습니다. 이 잘루목을 빼앗기게 되면 우리 부대가 앞뒤에서 얻어맞을 수 있었습니다. 정황이 몹시 위급하다는 것을 간파한 김정숙싸창을 뽑아들고 전우들과 함께 맹렬한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여대원들의 드센 반격에 부딪친 적군은 숱한 주검을 남기고 퇴각하였습니다.

이 싸움이 있은 후부터 그는 더욱더 전우들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되었습니다.

그 해에 우리는 장백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3월에 무송원정을 떠났습니다.

무송원정이 힘든 원정이었다는 것은 내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사실은 그때 나도 육체적으로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밤이면 대부분의 대원들이 다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김정숙만은 우등불곁에서 온밤 자지 않고 대원들의 해진 옷을 손질해주었습니다. 행군길이 하도 험하다나니 옷이 쉽게 해졌습니다. 신입대원인 마동희도 그 원정에 참가했다가 우등불에 모자를 태웠는데 김정숙이 새것처럼 기워놓았습니다.

후에도 체험한 바이지만 김정숙은 무슨 일거리든지 손에 잡기만 하면 온 심혼을 다 바쳐 맵시있게 마무리를 해놓군 하였습니다. 그날 밤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탄복하였습니다.

무엇에 탄복하였는가. 남을 돕지 않고서는 발편잠을 자지 못하는 그 남다른 성품과 인정미에 탄복하였습니다.

이 생활세부를 통하여 나는 여성으로서의 김정숙을 깊이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위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휘관들이 김정숙을 도천리지하공작조에 포함시키자고 제의할 때에도 서슴없이 동의하였습니다.

김정숙은 도천리와 신파 일대에서 많은 일을 해놓았습니다. 내가 그에게서 혁명가로서의 만만치 않은 수완과 능력을 발견한 것이 바로 그때입니다.

그에게는 군중을 감화시키고 각성시키고 동원시킬 줄 아는 비상한 솜씨가 있었습니다. 그가 정안군 놈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도천리와 그 주변 인민들이 경찰에 제출했다는 수백 명의 연명으로 된 ≪양민보증서≫는 김정숙에 대한 군중의 평정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되어 인민들한테서 그런 신임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김정숙이 한 몸을 내대고 일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한 몸을 내대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무엇이 두려우랴 하는 배심을 가지고 일하였습니다. 그러다나니까 위험한 고비에 부닥쳐도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김정숙은 인간을 불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을 위한 희생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동지들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 것이 그의 성품입니다.

1938년 4월 6도구의 적을 치고 나오다가 쌍산자라는 곳에서 싸움을 할 때였습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나까지 기관총을 잡고 일선에서 적들을 쏘아눕히었습니다. 사면팔방에서 적들이 조여들다보니 우리는 어데로 빠질 데도 없었고 잠깐 숨을 돌리며 식사할 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구리가 뜨끈해 났습니다. 호주머니를 만져보니 난데없는 만두가 들어있었습니다. 얼핏보니 김정숙이 전장을 돌아다니며 전우들의 손에 만두를 쥐어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만두를 하나씩 꺼내먹으며 전투를 계속하였습니다.

작식터는 벼랑아래 샘터 옆에 있었습니다. 그가 음식그릇을 가지고 그 아찔한 벼랑을 어떻게 톺아올라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전우들한테는 늘 끼니를 번질세라 싸움터에까지 뛰어들어 음식을 나누어주면서도 김정숙자신은 노상 배를 곯았습니다.

언제인가 부대에 쌀이 떨어져 모두 맨 감자만 먹고 지낸 때가 있었습니다. 감자도 여러 끼를 먹으면 대체로 새가 나고 입맛을 잃게 됩니다. 전우들이 며칠째 맨 감자로 끼니를 에우게되자 김정숙은 그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전우들의 입맛을 돋구겠는가를 줄창 궁리하였습니다. 그는 감자를 갈아서는 전우들에게 지짐도 해주고 산나물을 뜯어다가 볶아서 소를 넣고 떡도 해주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대원들이 감자음식을 모두 달게 들었습니다.

김정숙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지들을 위해 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동지애로부터 시작되었고 동지애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 공산주의적 도덕의리가 최대한으로 발양된 비범한 혁명가로 되었습니다. 그가 일생동안 해놓은 그 모든 것은 다 동지들을 위하고 인민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 것이었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김정숙의 관념속에는 자기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굶어도 좋고 얼어도 좋고 아파도 좋다, 그러나 동지들이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고 아프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내가 죽는 대가로 동지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웃으면서 죽음의 길을 택할 것이다 하는 것이 바로 김정숙의 인생관이었습니다.

김정숙의 동지애가 얼마나 진실하고 열렬한 것인가를 알려면 한 장의 모포에 깃들어있는 사연만 들어보아도 충분할 것입니다.

얼마전에 연길에서 살고 있은 김정숙의 전우인 서순옥이 나를 만나려고 평양에 왔다갔습니다. 그때 그가 모포 한 장과 쌍안경을 가지고 왔습니다. 서순옥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서 사령부작식대원으로 일하던 동무입니다. 그의 남편 김명주도 한 때 주력부대에서 군사지휘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연길감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송지방에 나와 활동할 때 7연대에 있었습니다.

서순옥은 최희숙이 요방자라는 고장에 지하공작을 나갔다가 데리고 와서 입대시킨 여대원이었습니다. 입대당시의 그의 나이는 열대여섯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최희숙은 서순옥을 부대로 데리고 올 때 그의 조카까지도 데려왔습니다. 엄광호가 청봉밀영에서 적의 밀정으로 몰아붙인 애숭이대원이 바로 서순옥의 조카였습니다.

서순옥은 김정숙의 사랑을 많이 받던 여대원이었습니다. 김정숙은 숙영지에서 늘 자기보다 몇 살 아래인 서순옥을 껴안고 잤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포 한 장을 함께 사용하군 했습니다. 그 당시 사령부가까이에 있은 여대원들이란 김정숙과 서순옥 뿐이었습니다.

서순옥이 가져온 모포는 김정숙이 애용하던 모포입니다. 김정숙의 배낭에는 언제나 그 모포가 얹혀있었습니다. 사람보다 배낭이 더 커서 누구인지 가려보기가 힘들 때에도 나는 모포를 보고 그를 알아보군 했습니다.

김정숙은 서순옥이 소부대기지에 갈 때 그 모포를 그에게 기념으로 주었습니다. 그 기지에 김명주도 있었고 현철도 있었습니다. 김명주와 서순옥은 거기에서 결혼하였을 것입니다.

서순옥은 떠나는 날 김정숙을 붙들고 자꾸 울었습니다. 한 모포밑에서 지내던 여성들의 이별이어서 눈물도 많았습니다.

그때 김정숙은 서순옥에게 줄 기념품을 마련하지 못해 안타까와 했습니다.

김정숙은 서순옥의 배낭에 그 모포를 넣어주면서 자, 기념으로 가지고 가거라, 새것은 아니지만 너를 친동생처럼 사랑해온 이 언니의 온기가 스며있다는 걸 잊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나서 그 모포가 다시 나한테로 돌아왔습니다.

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그 모포가 김정숙이 애용하던 모포라는 것을 인차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가져온 쌍안경도 내가 김명주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모포보다 더 소중한 물건이 있었다면 김정숙은 서순옥에게 그것도 서슴없이 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늘 받는 재미보다 주는 재미가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남들의 정을 받는 것도 좋지만 남들에게 자기 정을 줄 때가 훨씬 더 좋다는 것이 바로 김정숙의 인생철학입니다.

김정숙의 동지애는 나를 위한 노력, 나를 위해 자기를 깡그리 바친 헌신성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표현되었습니다. 자기 사령관에 대한 충실성도 그 본질은 동지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우리가 식량이 떨어져 몇 끼씩 굶으면서 전투를 계속하던 때였습니다. 한창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의 주머니에 무엇을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다보니 김정숙이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다음 주머니의 것을 꺼내서 펼쳐보았더니 잣을 알알이 까서 종이에 싼 것이었습니다.

나는 김정숙에게 어디서 얻은 잣인가고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습니다. 훗날 다른 여대원들이 하는 말이 그가 직접 잣나무에 올라가 따온 잣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정숙은 여러 번 나를 위기에서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는 내 신변안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육탄이 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우리가 대사하치기에서 전투를 할 때 내 주변에서는 아슬아슬한 정황이 조성되었습니다. 한 무리의 적들이 나한테로 은밀히 접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전투를 지휘하느라고 그런 정황이 조성된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김정숙이 아니었더라면 큰일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그는 몸으로 나를 막아서며 달려드는 적들을 모조리 쏴갈기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산에서 여러 해 동안 입고 다니던 솜외투도 실은 김정숙이 지어준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디서 총알이 명주솜을 뚫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다음부터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명주솜을 모아두었다가 나에게 솜외투를 해주었습니다. 여러 날을 두고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한뜸 두뜸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해서 만들어낸 외투가 내 몸에 꼭 맞는 것을 보자 그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였습니다.

나는 숙영지에서 밤을 새우거나 잠을 잘 때면 휴대하고 다니던 노루가죽을 땅바닥에 편 다음 그 솜외투를 덮군 했는데 그러면 몸이 훈훈했습니다.

지금은 여성들이 뜨개질을 별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계로 편직물을 짜내는 시대이니 그런 수고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뜨개옷을 볼 때마다 김정숙을 생각하군 합니다. 그가 나를 위해 뜨개질을 많이 했습니다. 작식일을 하느라면 일손도 딸리고 시간도 바쁘겠는데 시간을 어떻게 짜내고 털실을 어데서 구해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여튼 짬만 생기면 책을 읽든가 뜨개질을 하였습니다.

산에서 털실을 구한다는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바늘 한 쌈을 얻자고 해도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숙은 적들과 싸우느라고 사철 밖에서 자고 먹고 행군하는 나를 걱정하여 솜외투도 지어주고 배띠개도 만들어주고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털양말을 떠주었습니다.

그가 나를 위해 고생하는 것이 미안해서 나는 언제인가 그에게 털실은 어데서 어떻게 구했는가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김정숙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숙이한테는 털양말이 있는가고 물었더니 그 말에도 역시 대답이 없었습니다. 내가 물러서지 않고 자꾸 캐어묻자 마지못해 ≪장군님은 큰일을 하시는 분이니 그런건 몰라도 됩니다.≫하는 말만 하였습니다.

김정숙은 해방 후에도 나를 위해 뜨개질을 하였습니다. 내가 신은 양말이 해지면 깁지 않고 그것을 풀어 실토리에 감았다가 새로 양말을 뜨군 했습니다. 온밤 자지 않고 떠서는 아침이면 내 침상곁에 놓아두군 했습니다. 상점이나 시장에 가면 물론 그보다 더 좋은 양말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새것을 사지 않았습니다. 한번 사서는 실이 삭아서 못쓰게 될 때까지 그냥 풀어서 쓰고 풀어서 쓰고 하면서 제 손으로 양말을 떠서는 나에게 신기었습니다.

그는 양말 한 켤레라도 제 손으로 직접 떠서 나에게 신기고 싶어했습니다. 여성들의 정성이란 이런 것입니다.

김정숙의 그 남다른 정성앞에서 한번은 내가 본의 아니게 성을 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해 겨울이었던지 그가 내 옷을 빨아서 제 몸에 품어 말리웠다가 내놓았을 때의 일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한 노릇이었지만 그 소행에 감탄한 여대원들이 뒤에서 김정숙을 칭찬하는 말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습니다.

옷가지를 몸에 띠고 말리웠다는 말을 난생처음 들은 나는 아연해서 김정숙을 사령부로 불렀습니다. 너무나 얼어서 얼굴이 파랗게 질린 그를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생전에 우리 어머니도 해보지 못한 일을 그가 했다는 생각을 하니 나로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친어머니도 해주지 못한 일을 스스로 걸머지고 나서서 자신을 희생시킨 김정숙의 동지애,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기 사령관에 대한 혁명적인 동지애인 동시에 인간 김일성에 대한 뜨거운 정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정숙동무, 나를 위한 동무의 정성에는 나도 머리를 숙인다, 그것만은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동무가 어쩌자고 그런 노릇을 하는가, 그러다가 촉한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할텐가, 동무가 자기를 희생한 값으로 내가 덕을 보게 된다면 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정숙은 가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고생이야 고생이랄게 있습니까. 장군님만 무탈하시게 된다면…≫

비록 정숙이 앞에서는 성을 냈지만 나는 그를 돌려보내고 나서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왜 그런지 그 순간에는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김정숙이 나를 위해 기울이는 정성속에 어머니가 못다 주고 간 사랑도 겹쳐져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몸의 열기를 젖은 옷에 빼앗기고 오한으로 떨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김정숙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후에도 김정숙은 몸으로 나의 젖은 옷과 내의와 같은 것을 말리워 주군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김정숙은 몸으로 나에게 날아오는 총탄도 막아주고 눈비도 막아주고 촉한도 막아준 셈입니다.

지금 우리의 역사가들이 우리가 걸어온 항일혁명의 길을 전인미답의 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은 혁명 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였습니다. 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간고했지만 백두산부석우에도 사랑은 있었습니다.

부모자식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사제간의 사랑, 동지간의 사랑을 비롯하여 인간생활에 존재하는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헌신성이라고 봅니다.

자기는 굶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굶지 않게 하며 자기는 춥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춥지 않게 하며 자기는 아프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불속에도 들어가고 형틀앞에도 나서고 얼음구멍에도 뛰어드는 그런 자기희생적인 헌신성만이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고 진실한 사랑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다음 만경대에 가니 가족들과 친척들이 나에게 산에서 싸울 때 좋은 여자를 만났다는데 결혼식은 어디서 어떻게 했고 들러리는 누가 섰으며 상은 어떤 사람들이 차려주었는가고 자꾸만 물었습니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였습니다. 그런 물음에 대답하자니 갑자기 목이 메고 말문이 막히었습니다. 사실대로 설명하자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슴아파할 것 같고 친척들도 섭섭해할 것 같아서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산에서 싸울 때는 결혼식상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생활이 간고하고 어렵기도 하였지만 나라를 찾지도 못하고 망국민의 수치를 씻지도 못한 처지에 우리가 어떻게 결혼식이나 생일잔치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대오에는 그런 호사를 바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유격대식결혼이라는 것이 아주 간단합니다. 대원들앞에서 오늘 아무개동무와 아무개동무가 결혼을 한다고 선포하면 그만입니다. 지금의 청년들처럼 첫날옷을 차려입고 큰상을 받는 것 같은 예식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좀 괜찮은 경우라야 밥 한 그릇이 고작입니다. 밥이 없으면 죽을, 죽이 없으면 감자나 강냉이 같은 것을 나누었는데 그런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응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부부로 선포된 다음에도 소속 중대나 소대에서 종전과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지휘관이라고 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결혼을 하자마자 싸움터에 나갔다가 전장에서 쓰러진 부부가 있는가 하면 서로 다른 임무를 맡아 가지고 따로따로 떨어져 생활하는 동무들도 있었습니다.

나와 김정숙이 결혼하던 날 전우들은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마련해 보려고 하였으나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온 부대가 식량이 떨어져 끼니도 잇지 못하는 때에 어디서 무엇을 마련할 수 있었겠습니까.

첫날옷도 큰상도 주례도 들러리도 없었지만 그 혼례가 한평생 잊혀지지 않습니다. 김정숙이도 생전에 그날을 두고두고 추억했습니다.

새 세대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그럴 수가 있는가 하고 머리를 기웃거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때의 형편에서 달리야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그런 식으로 혼례를 치르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으로 여기었습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고난을 달게 받아들이며 참고 견디는데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이 바로 항일유격대원들의 낙이었습니다. 그들은 후대들을 위해서, 오늘의 조국을 위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나는 백두산밀영과 원동의 훈련기지에 있을 때 조국이 해방된 다음 전우들의 결혼식을 잘해주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라를 찾고 보니 그것도 마음뿐이었습니다. 해방은 되었으나 인민들의 살림살이도 넉넉하지 못하고 식량사정도 무척 긴장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방 직후 장시우가 나를 찾아와 빨치산출신이라는 사람이 평남도당의 자금을 꺼내다가 개인잔치에 쓰려고 하는데 그러면 되는가고 들이댄 적이 있었습니다. 누가 그런 행위를 했는가고 물으니 김성국이 도당의 돈을 꺼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김성국을 방에 불러다놓고 이을설이더러 그의 무장을 해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무슨 권한으로 도당자금을 마음대로 다루는가고 추궁하였습니다.

김성국이 울먹거리면서 ≪손종준이 잔치를 하는데 첫날옷도 해주고 이부자리도 갖춰주고 상도 차려주자고 그랬습니다. 혈육도 친척도 없는 사람인데 우리가 돌봐주지 않으면 어쩝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김성국을 호되게 비판하였습니다. 손종준에게 첫날옷을 해주고 이부자리도 갖춰주고 상도 차려주면 좋다는 것이야 낸들 왜 모르겠는가, 그렇데 지금 어디 그럴 형편이 되었는가, 밥 한 그릇도 변변히 떠놓지 못하고 결혼식을 하던 지난날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동무가 당에다 손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사정이 어려운 때에 빨치산 출신답게 동서남북을 살펴보면서 처신을 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해주고 김성국을 돌려보내긴 하였지만 가슴이 아팠습니다.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전우의 결혼식을 잘 차려주자고 애를 쓴 김성국의 그 마음이야 사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 투사들이 해방된 조국에 와서 결혼을 많이 했지만 다들 식은 소박하게 했습니다. 나는 그게 늘 속에 얹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정일동무는 그들이 생일 60돌, 70돌을 맞을 때에는 상도 차려주고 선물도 보내주군 합니다.

그런데 김정숙이만은 그런 낙도 보지 못하고 30살을 넘기기 바쁘게 이렇게 사진만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나와 정숙이가 이 사진을 찍게 된 것도 우연이었습니다. 아마 혁명전우들이 관심을 돌려주지 않았더라면 이것조차도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부대를 데리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하루는 동무들이 나를 찾아와 사진을 찍자고 하였습니다. 소부대공작을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되겠는지 모르겠는데 한 장 찍어서 기념으로 남기자고 하였습니다. 사진기도 얻어왔으니 장군은 얼굴만 빌려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군복을 입고 밖에 나가니 최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아직 쌀쌀했지만 어데서나 봄기운이 완연히 느껴지는 때였습니다.

나는 봄물이 오르기 시작한 나무에 기대어 전우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남야영에 와서 만난 기념,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게 되는 소부대공작기념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동무들도 둘씩, 셋씩 패를 무어 사진을 찍었습니다.

우리가 사진을 한창 찍고 있을 때 여대원들 몇이 어떻게 낌새를 챘는지 우리 곁에 달려와 자기들도 사진을 찍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대원들과도 몇 장 찍었는데 그들이 나와 김정숙이더러 둘이서 함께 찍으라고 했습니다.

김정숙은 그 말을 듣자 부끄럼을 타면서 여대원들의 등뒤에 가서 숨어버렸습니다. 여대원들은 김정숙의 등을 막무가내로 떠밀었습니다. 그는 내우를 하며 어쩔 바를 몰라했습니다. 전우들이 등을 떠미는 통에 그가 웃으면서 내곁에 밀려왔습니다.

동무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내가 일생에서 개별적으로 여전우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은 그것이 처음일 것입니다. 나와 김정숙에게 있어서는 결혼사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혈기왕성한 청춘들이었습니다. 꿈도 많고 웃음도 많은 때였습니다. 타향에서 봄을 맞이했지만 다들 신심에 넘쳐있었고 기세도 좋았습니다.

나나 정숙이로서는 결혼 후 처음으로 맞는 잊을 수 없는 봄이었습니다.

나는 그 봄을 영원히 기념하고 싶어 사진뒤면에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1941. 3. 1. B야영구에서라는 글을 써놓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진이 역사에 남아 이처럼 큰 박물관에 전시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항일혁명을 20년 동안이나 했는데 사진을 많이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진을 찍자고 발기한 동무들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김정숙은 다른 여대원들과 꽃같이 중발머리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머리모양새를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머리칼을 군모안에 모조리 뭉그려넣었기 때문에 알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다 사연이 있습니다.

그 해 봄에 내가 소부대를 데리고 만주와 국내로 나갈 때였습니다. 쏘련국경을 넘어 훈춘땅을 지나가는데 이상하게 발이 후끈후끈해 났습니다. 처음에는 행군을 많이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무심히 생각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 무엇인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와닿는 감촉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신발을 벗어보았더니 바닥에 머리칼로 만든 깔개가 깔려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때에야 김정숙이 방안에서도 별스럽게 군모를 벗지 않고 지내던 것을 상기하고 그가 나를 위해 머리카락을 솎아서 신발깔개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정숙이 군모를 쓰고 있은 것은 숱이 성글어진 머리를 남들에게 보이기가 멋적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날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던 사람들이 이제는 한 명도 없습니다. 안길이도 가고 최현이도 가고 정숙이도 가고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다 가고 나만 남았습니다.

나랑, 안길이랑, 최현이랑 기대어 서서 사진을 찍던 그 나무도 지금쯤은 거목이 되었을 것입니다.

남야영은 어떻게 변모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을 내어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도 납니다.

김정숙은 해방 후에도 지성을 다해 나를 받들어주었습니다.

그가 어느정도로 나에게 세심하였는가. 며칠에 한번씩 갈아대는 목달개도 풀을 먹여서는 다듬이질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다듬이질을 해야 목달개가 노긋노긋해지고 목에 닿아도 뻣뻣한 감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풀을 먹인 목달개가 인두나 다리미로 다리면 뻣뻣해서 피부가 상할 수도 있고 목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김정숙은 다듬이질도 내가 없을 때에만 했습니다. 내가 집에 있을 때에는 사색에 방해가 된다고 한번도 다듬이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충실성과 관련된 일화를 한 가지 더 말해주겠습니다.

조국해방전야에 내가 대일작전회의에 참가하려고 모스크바에 가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밤 나는 초대소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김정숙이 큰방에 책을 가득 가져다 놓고 나에게 이 책들을 마음대로 골라보십시오, 이만한 책이면 사령관동지께서 일생동안 보아도 다 못보실 것입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잠에서 깨어난 다음 동무들에게 꿈이야기를 했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대통령이 될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농질을 해가며 한참동안 어마어마한 해몽을 하고 나서는 꿈을 보면 내가 장차 운이 굉장하게 트일 것 같은데 축하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김정숙에게 꿈이야기를 했더니 그도 웃으면서 좋은 꿈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월이 한 달, 두 달 흐르는 사이에 그 꿈에 대한 추억도 희미해졌습니다.

그런데 김정숙이만은 그 꿈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광복된 다음 우리가 해방산기슭에 집을 잡고 살 때 그는 서재에 책을 가득 채워놓고 나더러 해방도 되었으니 이제는 책을 마음껏 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기념으로 사진을 찍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김정숙의 한 생은 나를 위해 바친 한 생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와 결혼한 다음에도 시종일관 나를 사령관으로, 지도자로, 수령으로 내세워주고 받들어주었습니다. 나와 김정숙과의 관계는 수령과 전사와의 관계, 동지와 동지사이의 관계였습니다.

김정숙은 자기를 늘 수령의 전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날까지 나보고 보통 집안에서 쓰는 호칭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부를 때에는 그저 ≪장군님≫이라고 하든가 ≪수상님≫이라고만 하였습니다.

해방 후 언제인가 여기자들이 김정숙을 소개하겠다고 하면서 그를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그때 김정숙은 그들에게 ≪ 전사의 일생은 수령의 역사속에 있습니다. 김일성장군님에 대해 더 많이 소개해 주십시오.≫하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그 말속에 김정숙의 남다른 품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숙은 일생동안 고생만 하다가 갔습니다. 일생동안 고생만 시키다가 보내는 것이 너무도 가슴아파서 그와 영결할 때는 손목에 시계를 채워서 보냈습니다. 시계를 채워보낸다고 그가 한평생 나를 위해 바친 지성을 보상할 수 있겠습니다. 또 그런다고 그를 잃은 상실의 아픔을 덜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그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습니다. 아무런 사연도 없는 보통시계라면 그런 궁리를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시계가 사연이 깊은 시계였습니다.

어느 해였던지 우리 할머니가 필요해서 그러는데 값이 좀 나가더라도 어디서 좋은 여자시계를 하나 구할 수 없겠는가고 하였습니다.

한평생 벽시계조차 걸어보지 못하고 살아온 할머니가 갑자기 여자용 시계를 찾는데다가 그것도 좋은 것으로 구해달라고 하기에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 여자용 시계를 사가지고 할머니한테 갔습니다. 할머니, 이 시계를 어디다 쓰려고 그러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너희들이 산에서 아무 것도 없이 결혼을 했다는데 그게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고 산에서 온 지도 퍼그나 되는데 이 할미가 상을 차려준게 있나 옷 한 벌 해준게 있나, 그래서 시계라도 채워주려고 그랬다면서 정숙이가 시계를 차고 다니는 걸 보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김정숙이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차고간 시계는 바로 이런 사연을 가지고있는 시계였습니다.

손자며느리에게 부어주는 할머니의 그 사랑이 참으로 극진하였습니다. 그 사랑은 오래전에 떠나가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까지도 대신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김정숙을 위해서 해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김정숙은 해마다 잊지 않고 소박하게나마 내 생일상을 차려주었지만 나는 가정을 이룬 후 1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도 그에게 생일상조차 차려주지 못하였습니다. 자기생일에 대해서는 말조차 번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김정숙의 성품이었습니다.

김정숙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나는 공화국이 창건되던 날 점심참에 집에 들어갔다가 그에게 술을 부어주었습니다. 그 동안 내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많은 수고를 했다,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여태 고생만 시켰는데 오늘은 내가 한잔 부을 터이니 마시라고 했습니다.

김정숙은 왜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그러십니까, 당을 창건하고 군대를 창건하고 공화국을 창건한 것이 얼마나 큰 선물입니까, 한 생에 쌓인 원을 다 풀어주시었는데 그것이면 더 바랄게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정숙이 돌아간 이듬해에 여투사들이 돈을 모아 당에 바치면서 그의 묘를 잘 꾸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란봉에 안치된 김정숙의 묘에 가보니 쇠울타리도 치고 석축도 하고 화강석으로 계단을 한창 만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공사장에 나와 일하는 여투사들에게 내가 동무들의 마음을 몰라서 그러는게 아니다, 저 집들을 보라, 인민들은 아직도 저런 작은 집들에서 살고 있다, 지난날 그렇게 피눈물속에 고생해온 인민인데 아직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 우리는 조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이런 때에 동무들이 화강석으로 묘를 꾸린다는 걸 정숙이가 안다면 인민들앞에 얼마나 미안해하겠는가, 동무들이 정 성의를 표시하고 싶거나 묘주위에 꽃이나 나무를 심으라, 그리고 그가 생각날 때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휴식도 하고 묘도 보라, 이것이 정숙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다, 그러니 공사를 당장 중지하고 저 화강석은 건설장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한평생 동지들과 인민들을 위해 모든 것을 송두리채 바치고 세상을 떠나간 김정숙이었지만 자녀들을 위해서는 한푼의 돈도 재산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가 소비한 돈은 내가 받은 생활비였고 그가 사용한 집과 가구들은 다 나라의 것이었습니다.

김정숙동무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김정일동무를 미래의 영도자로 키워 당과 조국앞에 내세워준 것입니다. 동무들은 내가 김정일동무를 후계자로 키워냈다고 하지만 사실 그 기초는 김정숙이 쌓아놓은 것입니다. 그가 혁명앞에 남긴 가장 큰 공로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김정숙동무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에도 김정일동무를 불러앉히고 그에게 아버지를 잘 받들라는 것과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김정일동무에게 남긴 유언으로 되었습니다. 그 유언을 남긴 후 3시간이 지나서 김정숙은 눈을 감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김정숙을 자주 생각하군 합니다. 그가 여러 해 동안 치마저고리도 입고 다녔지만 어째서인지 사복을 입은 모습보다 군복을 입은 모습이 더 자주 떠오릅니다. 제일 많이 떠오르는 것이 몸으로 말린 옷을 들고 나를 찾아왔을 때 오한으로 떨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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