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2일

통일여명 편집국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 은혜로운 사랑의 태양 6

통일여명 편집국 6-1-30

 

차 례

 

1. 민중의 소망을 헤아리시고

만수대에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 수령님의 환갑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만수축원의 노래 / 수령님의 초상휘장 / 그분의 높으신 뜻

2. 운명을 지켜주는 품

생일상 / 자그마한 흠집도 생길세라 / 이제는 시름을 놓겠소

3. 통일의지를 가다듬으시고

조국은 반드시 통일됩니다 / 입북어민들의 감격 / 다시 이어진 귀국의 뱃길

마음속으로 부른 노래 / 예술단을 보내시어

4. 추앙받는 지도자

노투사들의 흠모 / 존칭사 / 충성의 송가

 

1. 민중의 소망을 헤아리시고

 

만수대에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1972년 4월 15일은 전체 민중이 끝없이 경모하여마지 않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의 탄생 60돌이 되는 뜻깊은 날이었다. . . . 민중의 이 열화같은 소망을 실현시켜주시기 위하여 영도자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60돌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뜻깊게 맞이할 데 대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결정을 채택하도록 하시었다. . . .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결정이 전달되자 온 나라는 격정에 휩싸였다. 수령님의 탄생 60돌을 빛나는 노력적 성과로 맞이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희천과 구성, 만경대의 기계공장 노동자들이 3만대 공작기계생산에 떨쳐나섰고 모든 공장, 기업소들이 6개년계획의 2년분생산과제를 앞당겨 수행하기 위하여 일떠섰다. 농장원들은 만풍년의 가을을 마련하려고 이른봄부터 농사일을 알심있게 해나갔다. . . . 이런 속에서 평양에서는 만수대언덕에 수령님의 동상을 모시는 중요건설이 펼쳐졌다. 수령님의 환갑을 맞으며 민중들이 열망한 것은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모시는 것이었다. 강선제강소 강철직장의 용해공들은 당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옛날부터 이름난 위인이나 나라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큰일을 한 유공자들, 덕망이 높은 자선가들의 동상을 세워 그를 칭송하고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우리 수령님처럼 천재적 예지와 탁월한 영도력, 고매한 덕망을 겸비한 위인이 있었으며 시대의 지도사상을 창시하고 민족의 운명 개척과 나라의 융성번영, 인류위업에 그렇듯 커다란 업적을 쌓아올린 영도자가 있었으며 언제나 인민들 속에 있으면서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인민을 위하여 헌신한 인민의 수령이 있었습니까. 우리 수령님은 위인중의 위인이시고 혁명의 성인이시며 사랑의 화신이십니다. 하기에 수령님의 동상을 세워 수령님의 위대성을 온 누리가 칭송하고 그분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빛내이는 것은 너무나도 응당한 일입니다. 우리 강선의 노동계급은 어버이수령님의 환갑을 맞으며 혁명의 수도 평양에 수령님의 동상을 모실 것을 한결같이 바라고 있습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이미전부터 수령님의 동상을 모실 구상을 해오시었지만 민중들의 이런 목소리를 통하여 이 문제가 더는 미룰 수 없는 민중의 열망이고 민족의 소망이며 역사의 요청이라고 생각하시었다. 어느날 영도자님께서는 모란봉의 산줄기가 뻗어내린 만수대언덕에 오르시었다. 그분께서는 둔덕들을 하나하나 밟아도 보시고 언덕에 서시어 사방의 전망도 살펴보시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시었다. ≪수령님의 동상을 평양의 중심에, 사방에서 다 우러러보이는 가장 좋은 곳에 모셔야 한다.≫ 그분께서는 이런 곳으로 만수대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생각하시었다. 만수대는 평양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고 앞이 탁 틔어 멀리 문수벌이 한눈에 안겨오며 지척에는 녹음우거진 금수산의 봉우리들이 솟아있고 아래로는 대동강의 맑은 물이 억만 구슬을 굴리며 흘러내리는 경치 아름다운 곳이다. 영도자님께서는 이 언덕에 수령님의 동상을 모시고 그 양옆에 혁명의 붉은 깃발 휘날리며 전진하는 혁명투사들과 민중들의 군상을 세우고 그뒤에는 수령님의 혁명업적을 만대에 길이 전할 혁명박물관을 새로 건설하기로 결심하시었다. . . . 세상에 산이 많은 이북처럼 돌이 흔한 나라는 드물다. 그러나 그 모든 돌들이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을 모시기에는 너무나 작고 부족한 것만 같아 관계일군들은 받침돌로 쓸 석재를 찾아나섰다. 명산대천의 수많은 암석들을 살피고 어루만져 보면서 몇천리를 걸어 마침내 평남 용강땅의 장엄한 산줄기에서 커다란 화강암 하나를 찾아냈다. 티 한점 없이 희고 굳은 300톤이 넘는 널찍한 바위였다. 용강의 석재공들과 민중들은 자기 고장의 암석이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모시는 받침돌이 된다는 감격과 기쁨에 넘쳐 그 거석을 단 며칠사이에 캐내고 다듬었다. . . . 이뿐이 아니었다. 백두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은 진달래를 떠서 품에 안고 왔으며 금강산에 사는 사람들은 수많은 목란꽃을 뿌리째 떠가지고 왔다. 안악군의 한 농가에서는 자기 집에서 대대로 가꾸어온 3백년 묵은 향나무를 떠서 온 식구가 정성껏 운반해 왔다. 평양시의 할머니들 100여명은 단체를 무어가지고 와서 꽃밭을 가꾸는 일은 자기들이 아예 맡아서 하겠다고 요청해 나섰다. 이리하여 만수대언덕은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모시기전에 벌써 푸른 녹지와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핀 동산으로 변해 갔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만수대앞길에 까만 승용차 한대가 나타나 천천히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서더니 만수대의사당쪽으로 향해갔다. 그때로부터 얼마후 당중앙위원회의 한 일군이 숨가쁘게 달려오더니 수령님께서 오늘 아침에 지방에 나갔다가 돌아오시면서 보니까 만수대위에 무슨 건설을 벌여놓았던데 대체 그것이 무엇인가고 물으시기에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말씀드렸더니 수령님께서는 몹시 노하시며 지금 인민들에게 집도 다 지어주지 못하였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당장 그만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었다. 건설을 책임지고 일하던 일군들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건설장에도 그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누구도 일손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일군들은 안타까움에 모대기었다. 한 일군이 달려가 영도자님께 사실을 보고드렸다. 한참 생각에 잠겨 계시던 그분께서는 결연한 어조로 내가 시킨 것이니 내가 책임지겠소, 계획대로 계속 내밉시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수령님의 교시를 어느 한번도 어기신 적이 없는 영도자님이시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번만은 수령님의 교시대로 하실 수 없었다. 수령님의 동상을 모시는 것은 인민의 염원이다, 민심은 천심이다, 인민의 뜻은 어길 수 없다, 인민의 소망대로 수령님의 동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모셔야 한다. 이것이 그분의 부동의 신념이며 의지이시었던 것이다. 영도자님의 말씀을 받은 그 일군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날개라도 돋친듯 한달음으로 건설장으로 달려갔다. 건설장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드디어 대기념비건설이 완공되었다. 화창한 4월의 봄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의 동상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수많은 군중들이 손에 손에 꽃다발을 들고 만수대에로 모여왔다. 언덕은 온통 꽃으로 뒤덮였다. 맑고 푸른 하늘에는 고무풍선이 두둥실 떠있었다. 언덕을 가득 메운 군중들이 가슴을 들먹이며 우러르는데 동상을 씌운 흰천이 서서히 벗겨져 내렸다. 순간 만세의 환호성이 천지를 진감하며 터져올랐다. 혁명박물관의 벽면에 아로새긴 백두산의 웅자를 배경으로 항일혁명투쟁과 해방후 혁명과 건설을 상징하는 군상들을 좌우켠에 거느리고 오른손을 드시어 휘황한 앞날을 힘차게 가리키시는 수령님의 동상은 정녕 백두산에서 시작된 주체의 혁명위업을 승리의 한길로 영도하여 오시고 조선민중과 인류를 자주의 휘황찬란한 미래에로 이끌어 주시는 절세의 위인, 혁명의 영재의 거룩한 영상이었다. . . . 그러던 10월 어느날이었다. 제3차 남북적십자회담차로 평양에 머물던 남측 대표단도 만수대를 찾았다. 그들은 수령님의 거룩하신 동상앞에 고개를 수그리었다. 그리고는 창공높이 솟아있는 웅장한 이 대기념비에 경탄을 금치 못해 했다. 그들중 한 성원이 마침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우러러 경례를 올리고 돌아서는 15살가량 되는 한 소녀에게 자기 소개를 하면서 동상받침돌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가고 물었다. 소녀는 거침없이 아버지 김일성원수님의 동상 받침돌의 무게는 북남 5천만 민족의 심장을 합친 무게와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천만의 충성심이 받침돌이 된 동상! 남측 성원들은 세찬 충격을 억누르지 못했다. . . .

수령님의 환갑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드디어 4월 15일이 밝아왔다. 민중들은 수령님의 탄생 60돌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뜻깊게 성대히 기념하였다. . . . 벌써 며칠전부터 온 나라가 명절분위기로 들썩이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노작전시회가 열리고 수령님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의 위대성과 독창성을 논술하는 전국사회과학자대회가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과 사회활동가들이 수많이 참가한 가운데 연일 계속되었으며 중앙강연회도 있었다. 전국예술축전, 노동자예술축전을 비롯한 전국의 부문별 예술소조종합공연이 막을 올리고 전국체육축전이 벌어졌으며 영화상영월간이 시작되었다. 중앙경축보고대회와 각 도, 시, 군, 기관, 기업소 경축보고회가 있었다. 이 모든 경축행사들은 영도자님의 정력적인 지도밑에 마련된 것들이었다. 4ㆍ.15경축행사준비가 진행되고 있을 때 수령님께서는 자신을 위한 아무런 행사도 허락하려 하지 않으시었다. 심지어 경축연회에 대해서도 무엇 때문에 품을 놓고 차리겠느냐고 하시면서 손님들을 많이 청하고 요란스럽게 잔치를 벌이면 자신께서는 그날 평양에도 있지 않고 딴 데로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수령님의 환갑날만은 조용히 보낼 수 없다,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의 환갑잔치만은 정성껏 차려드리는 것이 조선사람들의 아름다운 풍속이 아닌가, 더구나 수령님의 덕분으로 온갖 행복을 다 누리고 있는 우리 민중들이 그분의 환갑잔치를 제대로 차려드리지 못하고서야 어찌 민중된 도리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령님의 환갑날만은 민족의 대경사로 쇠야 한다, 이것이 이북민중 모두의 한결같은 심정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민중들의 소원대로 수령님의 탄생 60돌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경축하기 위하여 몸소 행사준비위원회의 성원이 되시었다. 그분께서는 1971년 10월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일군들을 모아놓고 수령님의 탄생 60돌 행사를 원만히 보장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지금부터 잘하여야 한다, 수령님의 탄생 60돌에 즈음하여 여러 가지 뜻깊은 경축행사들을 성대히 진행하게 된다, 지금부터 행사준비를 빈틈없이 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영원히 높이 우러러 모시고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하려는 우리 당과 인민의 혁명적 의지를 남김없이 보여주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수령님의 노작과 수령님의 약전출판사업으로부터 예술공연과 연회준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업을 몸소 계획하시고 조직하시고 하나하나 세심히 보살피시었다. 그분께서는 전국체육축전의 우승컵을 준비하는데 대해서도 심혈을 기울이시었다. 1971년 11월 어느날 수령님탄생 60돌기념 전국체육축전의 우승컵도안을 보아주시고 축구우승컵에 위대한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모시도록 하자고 말씀하시었다. 크게 감격한 축전준비위원회 일군들과 전문가, 기술자들은 여러차례 협의회를 가지고 우승컵도안을 다시 만들었다. 그 도안은 정면에 위대한 수령님의 초상화를 정중히 모시고 뒷부분에는 조각글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탄생 예순돌기념≫이라고 썼다. . . . 영도자님의 불면불휴의 정력적인 지도밑에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60돌 행사들은 대정치축제로 대성황리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날을 매우 검소하게 보내시었다. 전날밤 한 보좌일군이 수령님께 다음날 일정을 알려드리자 그분께서는 동무들이 끝내 나를 연회장에 끌어내고야마는군…이라고 말씀하시며 난처해하시었다. 수령님께서는 4월 15일 아침, 경축연회가 있게 될 만수대의사당 앞마당에서 당과 국가 간부들, 항일혁명투사들, 과학, 교육, 예술, 출판보도 부문 일군들,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 대표들, 이남과 해외에서 온 인사들과 기념촬영을 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기시었다. 연회장에는 먼저 각 부문 대표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때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조용히 들어오시어 출입문앞의 좌석에 앉으시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인민군연합부대의 한 젊은 지휘관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경사로운 날에 마땅히 위대한 수령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자리를 잡으셔야 할 분은 영도자님이시었다. 그는 얼른 일어나서 인사를 올리고 그분을 앞좌석의 가운데로 모시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거듭 사양하시면서 오히려 그들과 자리를 같이하시었다. 이윽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연회장에 나오시자 장내를 뒤흔드는 환호가 터져올랐다. 김일 부수상이 축배사를 했다. 그는 수령님의 60평생이 얼마나 고귀한 혁명정신과 혁명업적으로 수놓아져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심으로 하여 조국의 융성번영도 민중의 행복도 있다는 것을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리고 전체 민중의 열화같은 충성심을 담아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만수축원의 축배를 드리었다. 이어 어버이수령님께서 조용히 연탁으로 걸어나가시어 말씀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일에 동지들이 이처럼 한자리에 모여 축하해 주니 영광스럽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하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도와주고 키워주었으며 자신과 함께 굳게 손을 잡고 싸워온 전체동지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40여년동안의 혁명투쟁과정에 공산주의적 도덕에 기초하여 이룩한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단결을 끝까지 고수해 나갈 것을 뜨겁게 호소하시었다. 장내는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뒤이어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차례로 그분께 다함없는 축원의 마음을 담아 축배잔을 드리었다. 혁명의 길에 아들 마동희와 딸, 며느리, 온 가족을 바친 장길부어머니가 술잔을 들고 수령님앞으로 다가갔다. 수령님께서는 얼른 일어나시어 술잔을 받으시며 어머니! 오래오래 사십시오. 꼭 백살을 넘겨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장길부어머니는 감격에 겨워 옷고름을 눈가에 가져가며 내야 이만큼 살았으니 곧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소. …우리 장군님이 건강하여 천년만년 오래 사셔야지…라고 하고는 목이 메어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이 숭엄한 화폭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 . . 위대한 수령님께서 탄생 60돌을 맞으시는 이해 설날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이날 만수대의사당에서 차린 성대한 연회에서는 어버이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연예인들의 신년축하공연이 있었다. 그런데 무대에 나온 여성소개자는 긴장한 나머지 수령님의 탄생 60돌을 맞는 해라고 하여야 할 것을 그만 쉰돌이라고 잘못 소개하였다. 그 배우는 자기가 너무나도 큰 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얼굴을 숙인 채 급히 무대뒤로 들어갔다. 영도자님의 곁에 앉아있던 한 일군은 가슴을 조이며 그분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으시고 배우를 찾아 무대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었다. 얼마후 돌아오신 그분께서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셨다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그 동무의 말대로 올해가 수령님께서 환갑을 맞으시는 해가 아니라 쉰돌이 되는 해라면 얼마나 좋겠소. 그 순간 그는 가슴이 뭉클하고 눈앞이 흐려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 .

만수축원의 노래

연회에서는 만수대예술단 연예인들이 충성의 송가 ≪수령님의 만수무강 축원합니다≫를 불렀다. 연회참가자들도 모두 일어서서 합창하였다.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도 정중한 자세로 함께 노래를 부르시었다. 이 노래는 영도자님께서 민중들의 한결같은 소원을 담아 탄생 60돌을 앞두고 몸소 마련하신 충성의 송가였다. 1970년 9월 어느날, 조선노동당 제5차대회 경축공연준비정형을 요해하시기 위하여 만수대예술단에 나가신 그분께서는 공연종목들을 하나하나 눈여겨 살펴보신 후 지금 위대한 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노래가 없는 것이 제일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창작가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문제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분의 가르치심은 창작가들 속에서 자책감과 함께 창작적 의욕과 열정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창작가들은 지혜를 모아 어버이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노래창작에 달라붙었다. 욕망은 크고 의욕은 넘치었으나 그분께 만족을 드리고 민중들에게 기쁨을 줄 그런 명곡을 창작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창작가들이 밤을 새워 가사를 쓰고 낮에 밤을 이어 곡을 붙였지만 명곡이라 할만한 노래는 나오지 못하였다. 그해가 지나가고 그 다음해도 거의다 저물어가던 무렵에야 그들은 몇편의 노래를 내놓았다. 시청회에 제출된 노래들을 하나하나 주의깊게 듣고 나신 영도자님께서는 적이 무거운 어조로 수고한 동무들에게 이런 말을 해서 안되었지만 노래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안타까운 심정을 푸시려는듯 정원으로 나가시었다. 정원에는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어깨위에 흰눈이 쌓이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사색의 깊은 세계에 잠기시어 조용히 정원길을 걷고 또 걸으시었다. 이윽고 그분께서는 뒤따르는 일군들과 창작가들에게 새해 아침에는 수령님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노래를 꼭 드리자고 했는데 동무들은 내 마음을 그리도 몰라주는가고 하시면서 동무들은 우리 수령님께서 얼마나 크나큰 심려와 노고를 안으시고 한평생을 고생 속에서 살아오셨는지 모르고 있다, 정말 우리 수령님께서는 인간이 겪어온 모든 고생과 슬픔과 괴로움을 다 체험하시었고 위험한 사선을 수없이 넘어오시었다, 수령님께서는 혁명의 길에서 잃은 전우들을 품에 않으시고 눈물도 많이 흘리시었고 오늘도 그들을 생각하시며 잠 못이루고 계신다, 우리 수령님께서 언제 한번 마음 편안하게 쉬신 적이 있었는가, 만주광야에서 20여년 세월을 눈비를 맞으시며 보내시었고 해방후에는 새 조국 건설을 위해 밤을 새우시고 전쟁 3년간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고생이 많으시었다, 전후에는 악랄한 종파놈들과 싸우시면서 인민들과 같이 허리띠를 졸라매시고 검소한 식사도 미루시면서 오늘까지 현지지도의 길에서 보내시지 않는가고 말씀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또다시 깊은 명상에 잠기시어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다가 갈리신 음성으로 우리 수령님은 우리 인민에게 오늘의 이 행복을 마련해 주시기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오신 인민의 수령이시다, 어버이수령님의 품 속에서 오늘의 이 행복이 마련되고 꽃핀 것이다, 때문에 우리 인민들은 해와 달이 다하도록 수령님을 높이 모시고 따르고 받들어 나가면서 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절절히 바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상과 감정을 그대로 옮기면 우리가 찾는 명가사와 명곡이 되지 않겠는가, 이 노래는 단순한 하나의 가요가 아니라 우리 인민의 절절한 염원과 소원을 담은 전인민적 송가로 되어야 한다고 이르시었다. 순간 창작가들은 세찬 충격을 받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금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의 완성된 명가사로 절절하게 안겨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흥분된 마음을 안고 창작실로 달려가서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가사에 담고 선율에 옮기었다. 그리고 그 밤으로 여가수를 준비시켜 노래를 들어보았다. 참으로 장중하고 유순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노래였다. 창작가들은 영도자님을 모시고 평양대극장에서 노래시청회를 가지었다. 피아노전주에 이어 여가수의 노랫소리가 울리었다. ≪우리에게 이 행복을 안겨주시려 / 한평생을 바치시는 우리 수령님 / 어버이 그 사랑 그 품 속에서 / 오늘의 이 행복은 꽃폈습니다 // 하늘땅의 끝까지 따르렵니다 / 해와 달이 다하도록 모시렵니다 / 수령님의 그 은혜 길이길이 전하며 / 일편단심 충성을 다하렵니다 // 위대하신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러 / 인민들은 만수무강 축원합니다≫ 영도자님께서는 피아노의 후주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환희에 넘치신 음성으로 됐소! 바로 이것이오! 이것이 바로 내가 바라던 노래요. 노래가 아주 좋습니다, 만점짜리입니다, 시가 아주 좋습니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시상도, 악상도, 가사도, 선율도 몸소 안겨주시고도 수고를 했다고, 만점짜리 노래라고 그리도 높이 치하해 주시고 기뻐하시는 영도자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우러르는 창작가들의 가슴은 끝없이 벅차고 온몸이 하늘을 훨훨 날으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분께서는 바라시던 소원이 풀렸다고 거듭 만족해 하시며 이 노래를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60돌이 되는 내년의 설날 신년경축공연에서 부르게 하자고 하시었다. 명곡 ≪수령님의 만수무강 축원합니다≫는 이렇게 생겨난 불멸의 송가이다. . . .

수령님의 초상휘장

4ㆍ15를 맞으며 민중들은 커다란 영광과 기쁨을 받아안게 되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전체 민중들에게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이 모셔진 휘장을 수여해 주신 것이다.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가슴에 모신 민중들은 전세계가 우러르는 만고의 위인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몸 가까이 모신 민중이라는 긍지와 자부가 가슴에 넘쳐나면서 자신이 더욱 돋보이고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그런 것만큼 사람들은 수령님의 초상휘장이 너무나도 소중하여 길을 걷다가도 고개를 숙여 그것을 보고 또 보았으며 그럴 때마다 높뛰는 심장처럼 어버이수령님을 높이 받들어 모시고 충성다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이처럼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가슴에 모신 영광과 기쁨, 긍지와 자부가 크면 클수록 김정일영도자님에 대한 고마움이 앞섰다. 원래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맨먼저 모신 분은 영도자님이시었다. 자신을 수령님의 혁명전사로 여기고 계시는 그분께서는 수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있는 긍지와 자부심, 수령님을 영원히 높이 받들어 모시고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빛나게 완성해 나가시려는 충효의 마음으로부터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모시었던 것이다. 그분의 앞가슴에 금빛 찬란히 빛나는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우러르게 된 당중앙위원회의 일군들은 한결같이 자기들도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모시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의 제기를 물리치실 수 없었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수여해 주시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방당일군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은 당중앙위원회의 일군들을 만날 때마다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선망의 눈길로 우러르며 어버이수령님을 가까이 모시고 싶은 마음은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지방사람들이 더 절절합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말씀드려 우리들도 어서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모시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지방당일군들의 염원에 대하여 보고받으신 영도자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모시는 영예를 안겨주기로 작정하시었다. 역사적인 조선노동당 제5차대회가 다가오고 있던 어느날 한 일군이 올린 대회참가자들에게 줄 선물명세를 보아주시던 그분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겨 계시더니 당 제5차대회 참가자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을 밝고 정중하게 모신 새로운 당깃발형 초상휘장을 수여합시다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바로 우리 당의 핵심이며 각급 당조직의 대표들인 대회참석자들에게 조선노동당의 창건자이시며 영도자이신 수령님의 거룩하신 영상이 모셔진 초상휘장을 수여해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분의 숭고한 뜻을 헤아린 그 일군은 가슴이 후더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망설여지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영도자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런 새로운 형태의 초상휘장을 형상할만한 능력있는 일군이 없었으며 또 현대적인 창작기지도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대회가 열리기까지 며칠밖에 없는 짧은 기간에 수많은 초상휘장을 제작해낸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수령님의 초상휘장도안이 문제였다. 일군이 난감해 하자 그분께서는 가볍게 웃으시며 책상위에 종이 한장을 꺼내놓으시고 만년필을 드시었다. 그러시고는 만년필끝을 종이위에 박으신 채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시었다. 일군은 울렁이는 가슴으로 만년필끝을 응시하고 있는데 이윽고 그분의 만년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창공높이 휘날리는 한폭의 붉은 조선노동당 깃발이 그려지고 다음에는 그 기폭 한가운데에 월계수가 그려졌으며 그위에 수령님의 영상을 모실 태양이 그려졌다. 그 다음에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줄기 두줄기 찬란한 햇발이 빛발쳐나가는 것이 그려졌다. 흰 종이위에는 어느새 당깃발형 초상휘장도안이 형상되었던 것이다. 그 도안을 보면 볼수록 깊은 뜻이 안겨왔다. 그는 그 도안에서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건하시고 이끄시는 영광스러운 김일성주석님의 당이라는 숭고한 뜻을 읽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도안에는 백전백승의 강철의 당, 조선노동당의 영광에 찬 역사가 집약되어 있었으며 위대한 수령님을 영원히 높이 우러러 모시고 당의 향도따라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 나가려는 민중의 철석의 신념과 의지가 뜨겁게 새겨져 있었다. 일군이 감동어린 눈길을 도안에서 떼지 못한 채 말이 없자 그분께서는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의견이 없는 것이라고, 그러면 이대로 하자고 하시면서 도안을 그에게 넘겨주시었다. 그 도안이 그대로 제작단위에 넘겨져 불과 며칠사이에 수령님의 초상휘장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대회참가자들은 감격과 기쁨으로 세차게 고동치는 심장이 있는 가슴에 새로운 당깃발형 초상휘장을 모시고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대회를 끝마치고 대표들이 돌아가자 그들의 가슴에 모셔진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본 민중들 속에서 초상휘장을 모시고 싶은 열망이 높아졌다. 위대한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모시도록 해줄 것을 바라는 민중들의 편지가 하루에도 수천통이나 당중앙위원회에 보내왔고 수많은 당조직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집단적으로 초상휘장을 수여해 줄 것을 제기해 왔다. 영도자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고 영원히 높이 우러러 모시려는 숭고한 감정에서 흘러나온 민중들의 이 한결같은 소원,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모시도록 해줄 것을 바라는 청원을 헤아려 보시고 즉시에 그것을 풀어주시었다. 1971년 12월 어느날 그분께서는 당중앙위원회의 한 일군을 부르시어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우리는 멀지않아 수령님의 탄생 60돌을 뜻깊게 맞이하게 됩니다. 수령님께서는 세상에 유례없는 험난한 길을 걸으시며 우리 혁명의 앞길을 개척하시었고 오늘도 오로지 인민을 위해 한평생을 다 바쳐오십니다. 우리 인민들은 언제나 수령님의 이 고마운 은덕을 잊지 않고 있으며 수령님께 충성다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잘 형상하여 언제나 모시고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인민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잘 형상하여 우리가 인민들의 이 소원을 풀어주도록 합시다. 그러시고는 그 일군에게 견본품을 생산할 데 대한 과업을 주시었다. 1972년 3월 어느날 그 일군은 영도자님의 가르치심대로 형상한 정면초상휘장들을 그분께 드리었다. 그분께서는 여러가지 정면초상휘장들을 일일이 보아주시고 민족최대의 경사스러운 명절인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60돌을 계기로 노동자, 농민, 사무원, 군인,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수여하며 만경대생가를 넣어 형상한 초상휘장은 수령님 탄생 60돌기념 선물로 마련할 데 대하여 가르치시었다. 그리하여 온 나라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60돌을 맞으며 전체 민중들에게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수여하는 사업이 성대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 . .

그분의 높으신 뜻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60돌은 만민의 칭송과 축복 속에 지나갔다.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4월 22일이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항일혁명투사들과 함께 만경대를 찾으시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도 새 세대 연합부대지휘관들을 데리시고 동행하시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도 새 세대 연합부대지휘관들을 데리시고 동행하시었다. 만경대에 이르신 수령님께서는 깊은 감회에 잠기시어 고향집을 돌아보신 후 항일혁명투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시었다. 한동안 수령님을 우러르고 계시던 영도자님께서는 새 세대 군지휘관들을 돌아보시면서 수령님께서 저 사립문을 나서시어 광복의 천리길에 오르신 때로부터 조선혁명이 시작되고 그때로부터 주체사상의 시원이 열렸습니다, 다시 말하여 그때로부터 우리 당과 조국의 영광스러운 새 역사가 펼쳐지고 이 땅위에 주체혁명위업의 새 시대가 밝아왔습니다, 여기 만경대에서 시원이 열리고 백두밀림에서 개척된 영광스러운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하여야 합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영도자님의 말씀에 새 세대 군지휘관들은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지워진 숭고한 사명감을 다시금 깊이 자각하였다. . . . 그해의 5월 어느날 양강도에 가시어 보천보전투승리기념 35돌 행사준비사업을 지도하시던 영도자님께서는 이날 아침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바깥날씨를 보시다가 일군들에게 오늘 다른 일은 다 미루고 백두산에 올라가보자고 하시었다. 그분의 깊으신 뜻을 모르는 일군들은 날씨가 좀 풀린 다음에 백두산탐승을 하시었으면 하는 의견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미 백두산에 올라가보았지만 눈보라 울부짖는 백두산에는 올라가보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먼저 승용차에 오르시었다. 날씨는 예견했던대로 사나웠다. 자동차가 무두봉을 지나 대연지봉기슭을 끼고 달릴 때 별안간 백두산마루쪽에서 쏴 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산등성이에서 세찬 바람이 눈가루를 하늘높이 휘말아올리고 있었다. 드디어 유명한 백두산의 눈보라가 터진 것이었다. 눈보라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타래쳐와 한치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한치한치 톺아오르던 자동차는 눈 속에 빠지고 말았다. 난생처음 이런 눈보라를 겪어보는 일군들은 당황해 하며 영도자님께 더 올라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분께서는 그래 백두산이 호락호락 길을 열어줄줄 알았소, 아마도 우리의 담을 시험해 보고 열어줄 심산인가보오라고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몸소 자동차뒤에 어깨를 들이미시었다. 자동차는 겨우 눈 속을 빠져나왔으나 얼마 오래가지 못했다. 백두교를 지나면서부터는 눈이 허리를 넘게 쌓여있어 자동차길이 아예 막혀버린데다가 눈바람이 아까보다 더욱 이악스레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차에서 내려 눈을 헤가르며 몇걸음 걸어갔을 때였다. 바람이 광목찢는 듯한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더니 눈산을 움씰움씰 밀고 일행쪽으로 내려왔다. 이제 얼마후이면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일군들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위험합니다. 돌아갑시다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태연자약하게 일군들을 보시며 생각해 보시오. ≪고난의 행군≫ 때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렇지도 않소. 자, 또 갑시다라고 격려하시고 앞서 걸음을 옮기시었다. 일군들은 영도자님의 앞을 성벽처럼 막아서며 더는 가시지 못한다고, 훗날 날씨가 좋은 때에 올라가시자고 애원하였다. 영도자님께서는 일군들의 얼굴을 바라보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무들은 왜 그리도 내 마음을 몰라줍니까. 내가 왜 이런 날에 백두산에 오르려고 하는지 압니까? 백두의 혁명정신이 어떤 간고한 시련 속에서 이루어졌는가를 마음속으로나마 더 깊이 체득해 보기 위해서요. 이렇게 백두의 사나운 눈보라와 맞서도 보고 험한 눈길도 헤쳐보면서 ≪고난의 행군≫길을 돌이켜보아야 조선혁명이 어떤 혈로를 헤쳐왔는가를 깊이 깨달을 수 있고 또 앞으로 우리 혁명의 앞길에 중중첩첩 산악이 막아서도 쉬이 넘을 수 있는거요. 우리는 혁명의 먼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들이 아니오. 혁명의 먼길을 변함없이 걷자면 지난날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오. 자, 백두산정으로 오릅시다. 그제야 일군들은 영도자님께서 눈보라 울부짖는 날에 백두산으로 오르시는 까닭이 헤아려져 절로 고개가 수그러지고 목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분께서는 백두산의 울부짖는 눈보라 속에서 항일혁명투사들이 수령님을 모시고 사나운 눈보라와 살을 에이는 추위, 참기 어려운 굶주림과 진드기처럼 따르는 대적을 이겨내며 조국진격의 혈로를 헤친 그 ≪고난의 행군≫을 돌이켜보시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만난을 맞받아나가 백번 쓰러지면 백번 다시 일어나 싸운 그 투쟁정신, 꺾이면 꺾일지언정 주체혁명위업에 대한 신념은 버리지 않는 그 혁명정신, 백두의 혁명정신으로 풍파사납고 시련에 찬 혁명의 길을 대를 이어 꿋꿋이 헤쳐나가시려는 억센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지시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숭엄한 감정에 휩싸여 그분앞에 길을 내드리었다. 눈바람은 변함없이 지동치며 태질하는데 영도자님께서는 근엄한 안색으로 백두산정을 향하여 한걸음한걸음 길을 톺으시었다. . . .

 

2. 운명을 지켜주는 품

 

생일상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자신의 생신일은 쇠지 않으시면서도 일군들과 근로자들의 생일은 일일이 기억해 두셨다가 생일상을 차려주곤 하시었다. 어느해 9월이었다. 그분께서는 열차로 평안북도일대에 대한 현지지도의 길을 떠나시었다. 그분을 모신 열차에 열차승무원처녀가 있었는데 그는 노래를 좋아했다. 노래를 부르면서 객차의 차창도 닦고 응접실 청소도 하곤 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 처녀를 만나시면 ≪명랑한 열차원≫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을 잊지 않으시었다. 이날도 그분께서는 그 열차원이 올리는 인사를 받으시며 아, 명랑한 열차원동무구만, 그새 잘 있었소라고 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시었다. 열차가 정주청년역을 지났을 때였다. 열차원은 그분께서 계시는 객차의 응접실안에 조용히 들어섰다. 차안의 온도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이날따라 바깥날씨가 높았으므로 차안은 몹시 무더웠다. 그분께서는 문건들을 보시는데만 열중하고 계시었다. 열차원은 얼른 선풍기의 스위치를 넣었다. 차안에는 서늘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분께서는 깊은 생각에 잠겨 차창밖을 내다보시었다. 수려한 산발도 지나가고 수정같이 맑은 강물도 흘러갔다. 이윽고 그분께서는 열차원을 보시며 오늘이 며칠인가고 물으시었다. 그는 9월 1일이라고 대답올리었다. 그러니 내일모레가 9월 3일이구만… 예, 그렇습니다. 대답하면서도 그 물으심 속에 얼마나 크나큰 사랑이 담겨져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열차원은 며칠후 가슴뜨거운 격정과 행복의 시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분의 현지지도일정이 끝나 다시 평양으로 향할 때였다. 그는 영도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접실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음식을 차려놓은 식탁앞에 그분께서 마주앉아 계시는 것이었다. 열차원은 그분께서 식사를 하시려는 참인줄 알고 송구스러워 얼른 돌아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어서 들어오라고, 기다렸다고 하시면서 일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오늘이 저 열차원동무의 생일이오. 열차원은 깜짝 놀랐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분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어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시며 부모가 없으니 누가 생일을 쇠주겠소, 우리가 쇠주어야지. 자, 어서 저리 가 앉으라고 하시며 친히 자리에 앉혀주시었다. 그는 북받치는 격정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끝내 흐느끼고야 말았다. . . . 수년전 어느날이었다. 그분께서는 현지지도의 길에서 인민군구분대의 한 여전사를 만나시었다. 그분께서는 그에게 부모가 다 있는가, 고향이 어딘가고 다정히 물으시었다. 이때까지 누구에게도 자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던 그는 자애로운 그분께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리었다. 8ㆍ15전에 자강도 산골에서 태어나 3살때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5살때에 어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고아가 된 그는 먼 친척집에서 자랐다. 곡절많은 그의 가정내력을 들으신 그분께서는 마음이 흐려지시었다. 다정다감한 처녀로서 친혈육의 정이 얼마나 그리우랴, 이것은 일찍부터 어머님의 후더운 정에 대한 그리움을 사무치게 체험해 오시는 그분께서만이 느끼실 수 있는 심정이었다. 여전사에게 다시 시선을 옮기신 그분께서는 군무생활에서 지침으로 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그날로부터 두해가 지난 어느날 또다시 구분대를 방문하신 영도자님께서는 여전사를 잊지 않고 찾아주시고 좋은 세월인데 공부를 많이 해서 위대한 수령님께 충직한 여성혁명가가 되라고 뜨겁게 고무해 주시었다. 그후 어느날 그를 당중앙위원회로 부르신 그분께서는 평양공산대학에 가서 공부하라고 이르시었다. 마음속의 충격과 감동을 억제하지 못한 여전사는 드디어 오열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분께서는 여전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시며 울지 마오, 동무에게는 수령님의 품이 있지 않소, 대학에 가서도 불편한 점이 있으면 제때에 알리시오, 동무의 학부형은 우리입니다, 방학때도 꼭 오시오라고 따뜻이 일러주시었다. 그후 어느날 또다시 그를 만나주신 영도자님께서는 학습과 생활 정형을 알아보시고 기초지식이 부족한 그가 우등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도 못내 기뻐하시었다.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당일군이 된 후에도 그분께서는 그의 사업과 생활을 세심히 보살펴주시었다. 그는 결코 고아가 아니었다. 고아들에게 가장 그리운 것이 부모의 따뜻한 정이며 사랑일진대 부모들도 줄 수 없는 고결한 사랑 속에 사는 그가 무슨 고아겠는가. . . .

자그마한 흠집도 생길세라

. . . 1972년 초의 어느날 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한 기관의 당조직에서 올린 서면보고자료를 놓고 생각이 깊으시었다. 그것은 한 일군이 범한 과오와 그를 당대열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당원들의 의사를 종합한 자료였다. 그 일군이 범한 과오는 정치적인 성격을 띤 것은 아니지만 그 후환과 집단에 미치는 영향으로 보아 용서받을 수 없는 엄중한 것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당원들의 의사에 수궁이 가셨다. 하지만 그를 꼭 당대열에서 내보내야 하겠는가. 이런 생각이 갈마드시었다. 그분께서는 그 일군을 잘 알고 계셨다. 그는 지난 시기 중요한 일도 맡아했고 칭찬도 받았었다. 그런 그가 이같은 과오까지 범하는 낙오자가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몇몇 일군들을 집무실로 부르시었다. 그 서면보고자료의 정확성 여부를 확인하고 나신 그분께서는 심중한 어조로 물으시었다. 그래 이런 책벌을 꼭 주어야 하겠습니까? 그 일군은 그래야 할 것 같다고 말씀올렸다. 영도자님께서는 이윽토록 깊은 생각에 잠기셨다가 또다시 그 일군에게 물으시었다. 동무 개인의 생각도 같습니까? 그는 용서를 받기에는 그의 과오가 너무 엄중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렸다. 영도자님께서는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시었다. 냉담하게 울리는 그 일군의 목소리를 되새겨보시는듯 그분께서는 방안을 천천히 거니시었다. 그러시다가 걸음을 멈추시고 말씀을 떼시었다. 모두가 다 엄격히 처벌하자고 하면 나도 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면 그의 정치적 생명에 흠집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정치적 생명을 보호해줄 사람은 바로 우리들인데 사상에 병이 생겼을 때는 고쳐주지 않고 있다가 과오를 범한 다음에는 ≪옛다 받아라. 이것이 네 과오의 대가이다.≫라는 식으로 처벌이나 준다면 그런 사람은 참된 혁명동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것이 가슴 아픕니다. 일군들은 형언할 수 없는 자책감에 싸여 머리를 숙이었다. 그분께서는 여러가지로 더 말씀을 이으신 다음 우리 모두 그 일군이 혁명화를 착실히 하여 다시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잘 도와주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 . . 1974년 정월 어느날, 영도자님께서는 중앙기관 당원들의 당생활정형을 요해하시다가 어느 한 당조직에서 결함을 반복하고 있는 당원들에게 책벌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다. 자정이 넘은 깊은 밤이었다. 그곳 당조직 책임일군집의 전화벨이 정적을 깨뜨리며 울렸다. 잠에서 깨어난 책임일군이 송수화기를 드니 놀랍게도 영도자님의 자애로운 음성이 울렸다. 단잠을 깨워서 안됐소. 그는 너무도 뜻밖이어서 인사의 말씀도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 그분께서는 꼭 책벌을 주어야만 그들이 결함을 고칠 수 있겠는가고 물으시었다. 그 일군이 대답을 드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분께서는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하시면서 엄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었다. 내가 언젠가 동무들에게 당일군들은 인간의 정치적 생명의 기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동무들이 당원들의 결함이나 캐고 그들을 처벌이나 해서는 정치적 생명의 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처벌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당원들에게 책벌을 주면 그들의 정치적 생명에 흠집이 생깁니다. 설사 흠집은 아물어도 자리가 남는 법입니다. 당일군은 이것을 가슴아파하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물론 과오가 엄중하면 책벌도 주어야 하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악하게 달라붙어 꾸준히 교양하는 것이라고, 당일군들은 늘 당원들 속에 들어가 살면서 그들을 위대한 수령님께 끝없이 충직한 혁명전사로 교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 . .

이제는 시름을 놓겠소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사회를 더욱 명랑하게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 . . 1970년 6월 어느날 깊은 밤이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어느 초급당위원회의 한 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었다. 그러시고는 한 당원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가 잘 있는가고 물으시었다. 일군은 적이 당황했다. 그로 말하면 얼마전에 다른 직무로 옮기기로 결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군이 더듬거리며 사연을 말씀드리자 그분께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그의 문제를 꼭 그렇게 처리해야 하겠는가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었다. 사람들의 정치적 생명을 책임진 당일군들이 그렇게 옹졸하고 편협해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머니는 자식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내가 늘 말하지만 우리 당은 어머니당입니다. 어머니당의 당일군은 언제나 혁명적 원칙성이 있으면서도 끝없이 너그러워야 하며 웅심깊어야 합니다. 그러시면서 그의 정치생활은 자신께서 보증하겠으니 동요하지 말고 더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이르시었다. 밤은 깊어갔다. 뼈를 깎는 자성을 촉구하는 고요한 밤이었다. 일군은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아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천금만냥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경솔한 처사를 두고 뉘우치는 바가 너무도 큰 그였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후 전화벨소리가 또 울렸다. 송수화기를 받쳐든 일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께서 또 걸어주시는 전화였던 것이다. 전화를 받은 일군이 자책감에 모대기느라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을 때 그분께서도 아픈 가슴을 안고 잠을 이루지 못할 한 당원을 생각하시어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시었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이제라도 동무들이 그의 집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그 동무가 밤잠인들 제대로 자겠는가고 이르시는 것이었다. 일군들은 그 밤으로 그의 집을 찾아가 그분의 말씀을 전달했다. 영도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도 울었고 전달받는 사람도 울었다. 원래 눈물은 기쁨과 슬픔, 감동과 자책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은 자책이 커서 울었으며 전달받는 사람은 감동이 커서 울었으리라. . . .

 

3. 통일의지를 가다듬으시고

 

조국은 반드시 통일됩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환갑을 맞으시며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큰 선물을 안겨주시었다. 1972년 7ㆍ4남북공동성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 . . 1972년 7월 19일,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판문점을 방문하시었다. 그분께서는 판문점노대에서 쌍안경을 드시고 오랫동안 남녘땅을 부감하시었다. 잡초만 무성한 황폐화된 땅, 기둥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예성강다리, 집 한채, 밭이랑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남녘하늘아래 신음하는 민중들의 애끓는 목소리를 들으시는듯 그분의 안색은 몹시도 흐려지시었다. 이윽고 그분께서는 일군들에게 조용히 물으시었다. 여기서 서울이 몇리나 됩니까? 옆에 있던 한 일군이 140리가량 된다고 말씀올리자 그분께서는 지척이구만라고 하시며 숙연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었다. 조국을 빨리 통일해야 하겠습니다. 나직하나 무게있는 말씀이었다. 그분의 통일의지가 바로 여기에 집약되어 있었다. 밤새워 수백리길을 달려오신 목적이 통일의지를 가다듬는데 있으신듯 그분의 안광은 결연한 광채를 뿜었다. 일군들은 숭엄한 감정으로 그분을 우러렀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방금전에 그분께서 남북적십자예비회담 북측 대표단성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신 일이 생각되었다. 이날 여기 판문점에서는 남북적십자예비회담 제23차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에 앞서 북측 대표단 단장은 뜻밖에 경애하는 영도자님을 만난 감격을 금치 못해하면서 그간 회담진행정형과 이날 회담에서 논의할 문제들에 대해 말씀드리었다. 그의 말을 들으시고난 그분께서는 회담에 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높은 뜻과 겨레의 크나큰 기대감을 명심하고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갈 것을 간곡히 부탁하시었던 것이다. 이날 판문점방문에 이어 개성시 자남산에 모셔진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의 동상을 찾으시었을 때에도 그분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제와 남조선괴되도당의 학정밑에서 짓눌려사는 남녘인민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심혈을 다 기울이고 계신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었다. 수령님의 동상앞에서 남녘하늘을 바라보시는 그분의 안광에는 어버이수령님의 뜻을 기어이 실현하고야말 굳은 의지가 어려 있었다. . . . 1972년 여름 어느날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양강도 혜산에서 한 이남혁명가를 만나주시었다. 그분께서는 남녘민중을 모두 그러안으시는 심정으로 그를 굳게 포옹하시었다. 오매에도 그리던 영도자님을 몸가까이 뵈옵게 된 그의 감격은 컸다. 그는 통일광장의 단상에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영도자님을 모시고 싶어하는 남녘겨레들의 한결같은 염원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그분께서는 그의 손이며 어깨를 다정히 어루만져주시면서 자신께서도 어느 한순간도 남녘겨레를 잊은 적이 없고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씀하시었다. 그 혁명가는 감격에 겨워 진정할 길이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와동지들과 남녘민중들의 절절한 심정을 죄다 아뢸 수 없어 안타까웠다. 영도자님께서는 그의 심정을 헤아리시어 그가 어려움을 잊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마음쓰시었다. 참으로 육친의 정 넘치는 담화였다. 그분께서는 그와 장시간 자리를 같이하시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었다. 그 가운데는 백두산과 그곳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위업에 대한 뜻깊은 이야기도 있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이번에 혜산에 왔던 걸음에 백두산을 꼭 보고 가라고 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산맥들은 백두산으로부터 뻗어내려온 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남해 한라산도 바로 백두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솟은 조국의 남쪽산이라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두산은 조선의 모든 지맥이 집중된 어머니산입니다. 우리 민족이 대를 이어 계승해야 할 귀중한 혁명전통이 형성된 혁명의 크나큰 품입니다. … 그분께서는 산과 땅에 산맥과 지맥이 있듯이 사람들에게는 혈맥이 있다고 하시면서 남녘인민들의 모든 혈맥, 남녘변혁운동의 혈통은 백두산에서 타오른 주체의 횃불아래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의 깊은 뿌리에서 뻗어내렸다고 강조하시고 조선을 알자면 백두산을 보아야 하며 조선에서 혁명을 하자면 백두산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시었다. 혁명의 심원한 진리를 집약하신 금언이었다. 그 혁명가는 이 말씀의 한마디한마디에 깃든 깊은 뜻을 되새기며 투지를 가다듬었다. . . .

입북어민들의 감격

1971년 4월 동해와 서해에 갑자기 폭풍이 들이닥쳤다. 때아닌 폭풍으로 이남의 고기잡이배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 . . 이때 조난상태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원된 고깃배들이 있었다. 그것은 풍랑에 밀려 이북영해에 들어온 배들이었다. 조선인민군 해군함정들이 사나운 폭풍을 무릎쓰고 희생적으로 출동되어 파손된 배와 어부들을 구원해준 것이었다. 해군함정들의 출동, 조난어부들의 구원은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의 동포애에 넘친 손길에 의한 것이었다. 이남어민들이 당한 재화를 놓고 가슴아파하신 영도자님께서는 난파선어민들이 날바다위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것을 헤아리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펴시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파손된 배에 의지하여 겨우 목숨을 유지하던 어부들이 죽음직전에 구조되어 이북의 포구로 실려갔다. 이남 난파선어민들이 구원되었다는 소식을 받으신 영도자님께서는 여간만 기뻐하지 않으시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동포애의 뜨거운 심정으로 보살펴주는 국가적 조치를 취하도록 하시는 한편 그들 모두를 평양에 부르시고 온갖 사랑과 배려를 다 돌려주시었다. 이남어민들은 난생처음 사람대접을 받았다. 뱃놈으로 불리우며 온갖 멸시와 천대만을 받고 살아온 그들을 이북의 모든 사람들,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관접대부로부터 정부요직에 있는 일군들에 이르기까지 진심으로 친형제나 친부모와 같이 대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이것이 고마웠다. 그들에게는 꿈에서나 그려보던 훌륭한 숙식이 보장되고 바다에서 입은 상처는 물론 몸에 지니고 있던 고질병까지 말끔히 가셔내는 치료대책도 세워졌다. 그리고 파손된 고깃배도 원래보다 더 훌륭히 고쳐주었다. 이 모든 것이 경애하는 영도자님의 관심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매일이다시피 그들의 신상에 대하여 걱정하시었으며 온갖 사랑과 은정을 베푸시었다. 무엇을 더 베풀어줄 수 있을까. 그분께서는 이렇게 늘 심려하시었고 관계부문 일군들에게 최대의 성의를 다해 그들을 보살펴주라고 당부를 하시었다. 한번은 관계부문 일군들이 작성해 올린 이남어민들의 평양체류일정문건을 보아주시었다. 체류일정은 기본상 잘 짜여져 있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으시었다. 거기에는 어민들을 잘 대접할 데 대해서는 충분히 계획되어 있었으나 그들에게 문화적인 휴식과 생활을 보장해 줄데 대해서는 덜 고려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편안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바람직한 것은 문화적인 휴식과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빈곤한 생활전선에 부대끼다나니 언제 한번 극장구경이나 해봤겠는가.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공백으로 되고 있는 그것을 안겨주고 싶으시었다. 그리하여 관계부문 일군들에게 남조선어민환영공연도 조직하고 어민들과 예술인들과의 상봉모임도 조직하라고 이르시었다. 이렇게 되어 관계부문 일군들은 입북어민들의 문화생활조직에 큰 힘을 돌리게 되었다. . . . 입북어민들에 대한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의 동포애의 정은 시간이 가고 체류일정이 길어질수록 더 뜨거워졌다. 어느날 어민들은 평양 보통강반에 새로 일떠서는 거리건설장을 찾았다. 한창 건설중인 10리 구간에는 고층주택들이 꽉 들어차있었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 공무원들에게 나라에서 지어주는 살림집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감탄을 금치 못해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의 동포애의 정은 어민들의 귀환길에도 뜨겁게 미치었다. 그분의 배려에 의해 말끔히 수리된 배들마다에는 쌀과 부식물이 가득 실리었다. 그리고 부모, 처자, 친지들에게 줄 선물도 마련되어 있었고 가는 도중 고기를 잡아 회를 쳐먹을 수 있게끔 식초와 고추장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드디어 입북어민들의 귀환의 날이 왔다. 환송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원산, 남포, 해주 항은 석별의 눈물에 젖어 있었다. 가는 사람, 보내는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떨어질줄을 몰랐다. 떠나는 사람들도 울고 보내는 사람들도 울었다. . . .

다시 이어진 귀국의 뱃길

. . . 1971년 2월 5일 우주공간으로는 하나의 격동적인 전파가 날았다. 그것은 일본당국자들이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던 재일동포들의 귀국의 뱃길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는 희소식이었다. 이것은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재일동포들의 귀국사업재개를 위한 조일적십자회담을 빛나는 승리에로 이끌어주신 결과에 이룩된 고귀한 결실이었다. 1959년 12월부터 시작된 재일동포들의 귀국사업은 1967년 말에 와서 일본반동들에 의해 중단된 후 귀국재개를 위해 회담이 계속되어왔으나 일본반동들의 방해책동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조일적십자회담 북측 대표단 단장을 부르시었다. 단장이 영도자님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분께서는 여러 일군들을 부르시어 매우 급한 사업을 포치하고 계시었다. 그러시던 그분께서는 단장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아무리 바빠도 귀국재개사업에 대한 보고부터 먼저 들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그를 데리고 옆방으로 가시었다. 단장은 조일적십자회담진행정형에 대해 상세히 보고드리면서 일본측이 부당한 주장을 집요하게 고집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만해서 회담을 성사시키기 어려울 것 같다고 솔직히 말씀드리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아예 신심을 잃은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었다. 그러시고는 적이 신중하신 어조로 문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회담에 임하는가 하는 것이다, 회담을 하루빨리 성사시키고 귀국사업을 다시 실현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것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재일조선공민들의 염원을 하루빨리 풀어주는가 못풀어주는가 하는 사활적인 문제이다, 상대측은 오늘 합의보아도 그만 내일 합의보아도 그만일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게 끌 수 없다, 우리는 한핏줄을 타고난 혁육들의 평생의 소원을 풀어준다는 숭고한 사명감을 가지고 회담에 임해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시었다. 혈육들의 평생의 소원을 풀어준다는 숭고한 사명감을 가지고 회담에 임하는 문제, 그것은 회담에서 취해야 할 근본 입장과 자세에 관한 문제였다. . . . 정녕 재일동포들에 대한 그분의 동포애의 정은 슬하에 있는 자식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에게 더 큰 관심을 돌리는 어머니의 심정 그대로였다. 그후 재일동포들의 귀국재개를 위한 조일적십자회담은 활기있게 진행되었다. 이북측은 회담을 지연파탄시키려고 하는 일본측의 책동을 분쇄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일본적십자측은 회담에서 귀국사업을 이미 귀국신청을 한 재일동포들에 한해서만 하자고 고집했다. 그리고 회담상대방인 조선적십자대표단의 일본입국도 완강히 거부했다. 이에 이북측은 재일동포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은 일제의 조선강점과 식민지약탈정책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정부는 응당 재일동포들의 자기 조국에로의 귀국사업을 보장할 역사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 귀국하려는 조선동포들이 일본에 많은데 그 범위를 제한할 수 있겠는가고 사리정연하게 들이댔다. 일본측은 할 말이 없었다. 회담의 주도권은 이북측에 있었다. 한편 총련에서는 동포대중을 발동시켜 항의요청투쟁을 벌이면서 귀국의 뱃길을 영영 끊어버리려고 하는 안팎의 반동들의 책동을 거듭 폭로규탄하고 일본당국에 재일조선공민들의 귀국재개를 위한 실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함께 일본당국이 이북의 공명정대한 제안을 받아들여 이미 귀국신청을 한 동포들의 귀국문제와 새로 귀국신청을 하게 될 동포들의 귀국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며 조선적십자대표단의 일본입국을 승인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드디어 일본당국은 궁지에 몰리고 세계여론을 더는 거역할 수 없게 되자 재일조선공민들의 귀국을 재개할데 대한 회담문건에 도장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같이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햇빛처럼 따사로운 동포애의 정으로 3년이상이나 끊어졌던 재일동포들의 귀국의 뱃길을 다시 이어주시었다. 그 길을 따라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민종의 대이동≫이 마침내 다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마음속으로 부른 노래

1970년 4월 재일조선인예술단이 조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들이 도착한 첫날부터 온갖 배려를 돌려오신 그분께서는 동포예술인들의 첫 공연이 뜻깊은 것으로 되게 해주시려고 마음을 쓰시었다. 그때 평양의 풍치 아름다운 보통강기슭에는 전통적인 조선식 합각지붕을 이고 현대적 시설을 갖춘 인민문화궁전이 방금 준공된 때였다. 규모에 있어서나 내부시설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평양대극장을 훨씬 능가하는 그야말로 문화의 궁전이었다. 그 첫 무대가 누구에게 차례지겠는가 하는 것이 하나의 큰 관심사로 되어 있었다. 시내의 이름높은 예술단들이 저저마다 그 무대를 남먼저 차지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그 무대를 재일조선인예술단의 첫 공연에 내주도록 하시었다. 그것도 수령님을 모시고 수령님의 탄생일을 경축하는 공연으로 되게 해주시었던 것이다. 참으로 크나큰 사랑이며 배려였다. 공연 당일이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인민문화궁전으로 나가시었다. 공연개막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그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관람석으로 향하지 않고 무대뒤에서 공연준비를 하고 있는 재일조선인예술단 성원들을 찾아주시었다. 수령님께서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그들의 등을 쓰다듬어주시면서 이렇게 자꾸 울면 분장이 다 지워져서 어떻게 공연을 하겠는가고 달래시었다. . . . 잠시후 공연이 시작되었다. 노래와 무용 등 다양한 종목들로 공연은 성황을 이루었다. 한 여성독창가수가 노래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를 부를 때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신데 대한 감사의 노래였다. 가수는 관현악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그의 노래는 관현악반주와 어긋나다가 잦아들듯 멎어버렸다. 가수의 노래가 불시에 끊어지고 관현악지휘자의 지휘봉도 허공에서 멎어버렸다. 일순 온 장내가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다. 다음순간 그 공간을 메우는 것처럼 선율아닌 하나의 음이 마이크를 타고 울려퍼졌다. 여성독창가수의 목이 멘 흐느낌소리였다. 상식으로 볼 때 그것은 큰 실수였다. 더욱이 어버이수령님과 이 영광의 무대를 마련해 주신 김정일영도자님을 관람석에 모신 것만큼 실수로 치면 그 이상의 실수가 없을 것이었다. 지휘자는 가수가 눈물을 거두고 다시 노래를 부르기를 재촉하는 엄한 눈초리로 지휘봉을 곧추 세워들었다. 가수도 그에 응하려고 한발자국 내디디며 다시 노래를 이으려고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다시 울리는 관현악반주를 타고 장내에 차넘치는 것은 방금전의 흐느낌보다 더한 여가수의 울음소리였다. 그의 울음소리는 온 장내를 뜨거운 눈물에 잠기게 했다. 지휘자는 그 감격의 충동에 끌리듯 지휘봉을 흔들었다. 음악의 역사가 생겨 일찍이 있어본 적이 없는 관현악반주였다. 관람자들에게 들리는 것은 관현악반주소리뿐이었다. 그러나 여가수는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불렀다. 마음속으로 부르는 노래는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보다 더 뜨거운 법이다. 관현악반주가 끝났을 때 여가수는 더없이 죄송한 듯 깊이 허리 굽혀 어버이수령님께 인사를 드리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온 장내를 뒤흔들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도 오래오래 박수를 쳐주시었다. 그리고 안경을 벗어 닦으시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도 여가수와 지휘자, 관현악연주성원들을 바라보시며 손수건으로 눈굽을 훔치시었다. 노래면 그보다 더 뜨겁고 아름다운 노래가 어디에 있겠는가. 수령과 민중이 사랑과 충성의 유대로 하나로 융합되는 숭엄한 장면이었다. 그 여성독창가수는 그때를 회상하여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조국을 방문하여 어버이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모시고 막을 올린 첫 공연무대였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리 노래를 부르려고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제가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하시었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치하의 말씀까지 하여주시었습니다. 재일조선인예술단은 김정일영도자님께서 베풀어주신 각별한 사랑과 배려 속에서 이처럼 첫 공연의 막을 올린 후 여러차례에 걸쳐 조국의 부모형제자매들의 동포애에 넘치는 환호와 절찬을 받으며 성과리에 공연을 진행했다. . . . 1973년 10월 하순의 어느날 그분께서는 관계부문 일군들로부터 제2차 재일조선상공인 조국방문단이 곧 도착한다는 보고를 받으시었다. 일군들이 올린 보고에는 동포상공인들에게 다른 대표단들보다 높은 대우를 적용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들이 큰 마음을 먹고 세운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분께서는 재일조선상공인 조국방문단 성원들을 여관이 아니라 숙식조건과 모든 설비가 최상의 수준에서 갖추어진 초대소에 들게 하라고 일군들에게 이르시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환영회도 크게 하고 예술공연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에 대한 후방공급은 자신께서 해당 단위에 지시해 보장해 주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시었다. 언제인가 그분께서는 재일조선상공인들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해 주시면서 그들은 혁명의 일시적인 동행자가 아니라 우리와 끝까지 같이 갈 영원한 동행자라고 하시었다. 동포상공인들에 대한 믿음이 이렇듯 크시기에 그분께서는 그들의 조국방문을 보다 뜻깊게 해주시려고 그토록 마음을 쓰시는 것이었다. 며칠후 그분께서는 관계부문 일군들과 협의회를 하시다가 조총련상공인들의 기업활동정형을 알아보시었다. 그때 동포상공인들 가운데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경제의 불황때문에 판로난을 겪고 있었다. 이것을 풀어주려고 관계부문 일군들은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힘써 보았으나 신통한 방도를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요해하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시었다. 재일상공인들이 생산한 상품을 우리가 사서 사회주의 시장에 판로를 개척하여주면 그들도 좋아하고 영예감을 가질 것입니다. 재일조선상공인들의 고충인 판로난을 해소시킬 수 있는 명안이었다. 관계부문 일군들이 그처럼 모색하던 출로가 드디어 열린 것이다. 이미 그분께서는 재일조선상공인들이 자금난과 원료난을 겪고 있는 사실을 헤아리시고 동포신용조합을 강화하도록 해주시었으며 조국에서 여러가지 원료와 자재, 특산물을 보내줄데 대한 조치도 취해 주시었다. 이것은 재일조선상공인들의 자금난과 원료난 해소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의 판로난 해소를 위해 또 획기적인 조치를 취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후 매우 바쁘신 가운데서도 재일조선상공인 생산품전시장을 찾아주신 그분께서는 그들의 상품을 사회주의 시장에 내보내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일련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요해하시고 필요한 대책을 다 취해 주시었다. 제2차 재일조선상공인 조국방문단 성원들은 그분께서 베풀어주시는 동포애의 정이 너무도 뜨겁고 고마워 격동의 눈물로 옷깃을 적시며 방문의 나날을 보냈다. . . .

예술단을 보내시어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의 은혜로운 사랑은 조국을 방문하는 동포들에게만 아니라 조국에 와보지 못한 동포들에게도 뜨겁게 미치어갔다. . . .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프랑스 등 수많은 나라들을 방문해 주체예술의 위력을 과시한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소식은 불꽃처럼 누리에 번져갔다. 그 소식은 일본각지에도 널리 퍼져 재일동포들과 일본사람들 속에서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열망이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73년 여름에 영도자님께서 만수대예술단을 일본에 파견하시었다. . . . 만수대예술단은 일본땅에 들어서는 첫 순간부터 재일동포들과 일본민중들의 열광적인 환영과 뜨거운 성원 속에 공연활동을 벌였다. 도쿄의 한복판에 거연히 솟아있는 조선문화회관에서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로 첫 막을 올린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은 삽시에 온 일본땅을 뒤흔들어놓았다. 만수대예술단이 무대에 올린 다채로운 음악무용과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를 본 재일동포들과 일본사람들은 가정과 거리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일본의 신문, 통신, 방송들은 만수대예술단의 공연내용을 서로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선풍적 인기를 얻었다. 만수대예술단이 공연하는 극장안은 언제나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공연이 끝나면 관중들 속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오르고 ≪김일성장군의 노래≫ 합창이 울려나왔다. 이렇게 되자 일본반동들은 이남당국자들과 공모해 만수대예술단의 공연활동을 저지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했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큰 모략사건이 도쿄 한복판에서 백주에 일어났다. 김대중납치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계획적인 반공모략극이었던 것만큼 만수대예술단의 공연활동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예술단의 인솔자들은 조성된 사태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조국에서 전화가 왔다. 한 인솔자가 송수화기를 들었다. 김정일입니다. 평양에서 전화를 겁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 감격이 너무도 벅차서 인사의 말씀도 올리지 못한 채 그의 말은 동강났다. 그동안 잘 있었습니까? 앓는 동무들은 없습니까? 예, 한사람도 없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극진한 보살피심 속에서 우리 모두는 몸건강히 공연활동을 맹렬히 벌이고 있습니다. 앓는 동무들이 없다고 하니 기쁩니다. 동무들의 공연성과를 축하합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그곳 소식을 매일 듣고 있습니다. 사랑 넘친 격려의 말씀에 그는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그분께서는 무게있는 어조로 도쿄에서 김대중납치사건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위축되거나 소심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미전부터 적들의 방해책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하지 않았는가, 그런 것만큼 주동을 쥐고 맞받아나가야 한다, 조금도 주저하거나 당황하지 말라, 경각성을 높이고 매사에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대담하게 냅다 밀라고 이르시었다. 이렇게 앞길을 밝혀주고 용기와 투지를 안겨주신 그분께서는 자애로운 음성으로 그럼 모두들 건강하여 공연에서 더 큰 성과를 바란다고, 전체 동무들에게 나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이에 무한히 고무된 연예인들은 승리의 신심드높이 반동들의 흉계를 걸음마다 저지파탄시키면서 공연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여나갔다. 50일동안에 걸치는 그 나날에 공연횟수는 60회에 달했고 관람객수는 18만명에 이르렀다. 관람자들 가운데는 일본민중들과 일본주재 외국인들도 적지 아니했다. 공연은 관람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조총련산하의 한 동포는 만수대예술단의 음악무용종합공연을 본 소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주체사상의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세계에 둘도 없는 공연이다. 나에게는 주체조국외에 딴 조국이란 있을 수 없다. 공연은 ≪민단≫계 산하 동포들 속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 . 공연이 일본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으킨 파고도 높았다. 도쿄의 한 대학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도 지도자를 잘 만나야 개화되는 법이다. 김정일지도자님과 같은 예술의 영재를 모신 조선의 예술이 단연 세계의 정상에 이를 수밖에 더 있겠는가. . . .

 

4. 추앙받는 지도자

 

노투사들의 흠모

자고로 덕망은 흠모를 자아내고 업적은 송가를 낳는다고 했다. . . . 그분을 누구보다도 높이 존경하고 열렬히 흠모해 마지않는 것은 항일의 노혁명가들이었다. 그들은 그분을 당과 민중의 지도자로 적극 내세우고 높이 우러러 모시었다. . . . 어느날 항일의 노혁명가들내각사무국 영화부장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의 현지지도를 기록영화로 수록하고 있는가고 물었다. 사실 이것은 관계부문 일군들이 제일 고심해 오는 문제의 하나였다. 영화부장은 그 고충을 솔직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무렵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영화촬영소들에 나가실 때면 그곳 촬영가들이 촬영기를 메고 나서곤 했지만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번은 영도자님께서 어느 예술영화촬영소를 현지지도하실 때 촬영기를 들고나선 한 촬영가에게 예술영화를 만들라고 준 필름을 가지고 다른 것을 찍으면 안된다고 가볍게 타일러주시었다. 녹음직장앞에 이르시었을 때 다시 그 촬영가가 나타나자 그분께서는 동무들이 자꾸 그러면 앞으로는 촬영소에 나오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그러지 말라고 간곡하게 이르시었다. 그런데도 촬영가가 촬영기를 돌리려고 하자 그분께서는 엄한 표정으로 정 그러면 돌아가고 말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날 촬영가는 끝내 그분의 현지지도를 화면에 담지 못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서 그분께서 한 영화촬영소를 현지지도하실 때에는 촬영가 한명이 16밀리 촬영기를 들고 멀리에서 조심스럽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촬영가를 보시고도 그분께서 아무 말씀도 없으시기에 수원들도 마음이 놓이었다. 촬영가도 그런 심정이었던지 용기를 내어 그분께로 조심스럽게 다가서며 촬영기를 눈에 가져갔다. 바로 이때였다. 그분께서는 저 동무가 누구인가고 물으시고 동무들이 왜 내 말을 듣지 않는가고 질책하시었다. 일군들은 머리를 숙이고 어쩔 바를 몰라하였다. 한 일군이 나서며 사실은 저희들이… 하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동무들이 아직도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섭섭합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라고 신신당부하시었다. 그후부터는 카메라를 들고나섰으나 그분께서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시었다. 예술인들이 기념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경위에는 가끔 허락해 주기도 했지만 그것도 될수록 못하게 하시었다. 영화부장의 말이 끝나자 항일의 노혁명가 최현 대장은 동정의 눈길로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추궁하듯 이렇게 말했다. 그러신다고 못찍을게 있소. 찍으란 말이오. 촬영기를 빼앗기야 하시겠소. 왜 그 멀리서 찍는 기계가 있지 않소. 그걸 가지고 멀리서 찍으면 안되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김일 제1부수상이 그를 대신해 신중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못하게 하시면 힘들 것입니다. 우리가 차츰 말씀드려서 반승낙이라도 받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것은 반승낙이라도 하셨으니 그것부터 잘하도록 합시다. 그러면서 그는 영화부장에게 사진을 찍는데서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기하라고 했다. 영화부장은 카메라는 영도자님께서 영화제작사업에 쓰라고 자신께서 사용하시던 것을 보내주신 것이 있는데 사진제작설비는 좀 낡은 것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런데 이 솔직한 말이 최현 대장을 노엽힐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동무, 무슨 소리를 하오. 여보 김일 동무, 이 동무 영화부장 자격이 없소. 그의 어성은 어지간히 높았다. 김일 제1부수상은 함구무언이었다. 한참이나 묵묵히 앉아있던 그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관심을 전혀 돌리지 못했습니다. 옳소, 김일 동무에게 책임이 있소. 그까짓 사진기 한대 못사준단 말이오. 김일 제1부수상은 카메라와 확대기, 그에 필요한 부속품명세와 필름, 인화지까지 다 살 수 있는 타산을 해가지고 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영화부장동무는 내각사무국의 국장, 부국장을 거치지 말고 제기되는 문제가 있으면 나에게 직접 찾아와주시오. 이날 노혁명가들과의 담화에서 영화부장이 받은바 감명은 대단히 컸다. 사실 그는 그때까지 오랜 혁명투사들이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을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높이 우러러 모시고 있는줄은 미처 몰랐다. 이틀후 그가 사진설비명세와 필요한 타산을 해가지고 찾아갔을 때 김일 제1부수상은 제기된 모든 것을 다 풀어주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부장동무, 거기에 좀 앉으시오. 내각사무국에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늘 가까이 뵙는 사람은 아직 동무밖에 없는데 일을 책임적으로 해주기 바랍니다. 우리는 친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위대한 수령님의 후계자로 높이 모시고 세상에 선포하자고 여러모로 애쓰지만 그게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 당원들과 인민들의 마음속에 이미 굳게 자리잡은 것이라고 말씀올렸는데도 수령님께서는 우리들의 말을 애당초 들어주시지를 않습니다. 김일 제1부수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세계에서 제일 좋다고 하는 사진설비를 일식으로 빨리 들여다가 사진만이라도 빠짐없이 다 찍어두자고 당부했다. 그후 사진설비들이 들어왔다. 이것을 우연히 알게 되신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몹시 노여워하시면서 우리가 시키는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 동무는 우리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새로 들여온 설비는 무조건 백두산창작단에 주어서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활동을 내용으로 한 예술영화 화보편집에 필요한 사진들을 찍는데 쓰도록 해야겠다, 내일중으로 그 사진설비들을 모두 백두산창작단에 넘겨주라, 우리의 말대로 못하겠으면 동무는 내일중으로 자기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분의 말씀은 준절했다. 눈물을 흘리며 서있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시던 그분께서는 적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우리가 늘 강조하는 문제이지만 오늘 동무에게 다시 한번 말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나도 수령님의 전사이다, 우리가 이 말을 동무들에게 몇번이나 하였는가, 동무들은 우리가 위대한 수령님을 더 잘 모시도록 도와주어야지 왜 자꾸 다른 일을 하자고 하는가, 나는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이르시었다. 그분께서는 잠시 말씀을 끊으셨다가 간곡한 어조로 그러면 안된다, 나는 수령님께 기쁨을 드릴 때가 제일 행복하다, 나의 이러한 심정을 동무들이 이해해 주리라고 믿는다고 강조하시었다. 그날로부터 몇달이 지난후 김일 제1부수상은 사진설비들을 써보니 어떤가고 물었다. 영화부장은 아직 쓰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왜 쓰지 못하고 있는가고 따지는 바람에 그는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그후 어느날 영화부장은 문서에 사인을 받기 위해 김일 제1부수상의 방으로 갔다. 그는 문서를 일일이 검토한 끝에 김일이라고 쓴 다음 사인을 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뜻깊은 이야기를 하였다. 영화부장동무! 한 일없이 나이를 먹고 보니 생각은 더 많아집니다. 내가 일을 잘못하면서 이런 말을 하기는 체면없는 일이지만 젊은 동무들에게 늘 말하고 싶었던 것이니 새겨들어주기 바랍니다. 우리는 40여년전에 수령님을 모시고 조국을 해방하자고 맹세했으나 아직까지 통일된 조국에 수령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무엇때문인 것 같습니까? 심각한 문제의 제기였다. 그는 긴장해졌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기본은 우리가 수령님을 잘 받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을 잘해서 모든 조선사람들을 다 수령님의 충신으로 만들었더라면 조국은 이미 통일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걸상에서 일어나 다른 의자에로 옮겨앉더니 동무는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이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은 내 나이 60이 넘은 다음이었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당사업을 지도하시면서 수령님의 두리에 전체 당원들과 문학예술인들을 묶어세우는 것을 보고서야 내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래전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처럼 사람들을 수령님의 충신으로 키울줄 아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벌써 조국은 통일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번씩 떠오르곤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잘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수령님께서 바라시는 조국통일도 하루빨리 이룩할 수 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도 우여곡절이 없이 성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우리 다같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진심으로 높이 받들고 지도자동지의 사상과 의도를 만나는 사람마다 자꾸 알려주어서 전체 인민이 다 그분의 충신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오랜 혁명의 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노혁명가의 심장의 고백이었다. 새 세대 영화부장은 노혁명가의 뜨거운 호소를 심장깊이 아로새기면서 그들의 모범을 따라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을 높이 우러러 모시고 따를 결의를 가다듬었다. . . .

존칭사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정치무대에 출현하신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정치입문의 첫걸음부터 두각을 나타내시었고 그분의 풍모와 덕망, 업적의 높이는 그분의 정치활동기간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민중들 속에서 그분의 명망은 비상히 높아졌으며 그것은 존칭사를 낳고도 남을만한 것이었다. 그분에 대한 존칭사는 영화예술인들 속에서도 나왔다. ≪윗분≫이란 존칭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날 오전 11시경 승용차 한대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정문으로 서서히 들어섰다. 누군가가 격정에 못이겨 외쳤다. 오셨다. 윗분께서 오셨다. 그러자 배우단청사에서, 촬영장들에서 사람들은 창문들을 활짝 열어제끼고 밖을 내다보았다. 내다보는 사람들의 얼굴들에는 기쁨이 꽃같이 피어나 있었다. 군중의 열광적인 박수갈채 속에 수수한 양복차림을 하신 젊은 분이 만면에 미소를 담으시고 차에서 내리시었다. 정기 도는 눈빛, 서글서글한 웃음어린 얼굴, 열정에 넘친 음성, 활달한 걸음걸이, 그분이 바로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이시었다. 이렇게 영화예술인들은 영도자님을 ≪윗분≫으로 모시고 따랐다. 여기에는 그분을 주체위업의 승계자로 우러러 모시려는 민중의 뜨거운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이에 대한 그분의 대응은 너무도 겸허한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일군들과 연예인들 속에서 ≪윗분≫이라는 존칭사를 들으실 때마다 자신도 수령님을 위해 일하는 한 당원인데 무엇때문에 따로 부르는가고 하시면서 존칭사를 쓰지 못하게 하곤 하시었다. 1970년 여름 어느날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현지지도하실 때였다. 그분께서는 일군들과 예술인들이 ≪윗분의 지시≫요, ≪윗분의 요구≫요 하면서 여러가지 존칭사들을 많이 쓰는데 앞으로는 그런 말들을 쓰지 말아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나는 수령님의 문예사상을 영화예술분야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지 그 어떤 찬사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촬영소에 나와 하는 말들은 다 수령님과 당의 의도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을 그저 ≪당에서 하는 말씀≫ 또는 ≪당의 지시≫라고 해야 하겠다고 이르시었다. 너무도 겸허하신 말씀이었다. 이러한 겸허성은 오히려 일군들과 연예인들의 가슴속에서 그분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더욱더 불타오르게 했다. . . . 그들은 그분을 어찌 그저 ≪윗분≫으로만 부르랴 하여 ≪경모하는 지도자≫, ≪영명한 지도자≫, ≪친애하는 지도자≫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그분에 대한 이러한 존칭사는 수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은 여러 가지 힘을 발휘한다. 흐르는 힘도 있고 모이는 힘도 있다. 물이 흐르는 것이 강이며 물이 모인 것이 호수이며 바다이다. 물은 이와 함께 퍼지는 힘도 가지고 있다. 물이 관개수로 되어 넓은 들을 적시는 것도 바로 그 퍼지는 힘때문이다. 그분에 대한 존칭사도 이와 마찬가지로 널리 퍼지는 힘을 지닌 듯했다. 연예인들 속에서 나온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라는 존칭사는 일군들과 근로자들 속으로 물결처럼 퍼져가 드디어는 전사회적인 것으로 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민중들 속에서 아침저녁 인사말만큼이나 많이 쓰이는 상용어로 되었다. 그러나 그분의 겸허성은 여전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라는 존칭사를 입에 올릴 때마다 엄하게 책망하시었고 특히 당일군들에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중들이 그런 존칭사를 쓰지 못하도록 제지할 데 대해 간곡히 당부하곤 하시었다. 그러나 민중들이 그런 존칭사를 쓰고 싶어하는 것은 심장으로부터 스스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으므로 누구도 막으려 하지 않았고 또 막을 수도 없었다. 명성에 국경이 없는 것처럼 존칭사에도 국경이 없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의 명성과 더불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라는 그분에 대한 존칭사도 국경을 초월해 외국인들 속으로 널리 퍼져갔다. . . .

충성의 송가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에 대한 민중들의 뜨거운 흠모의 정은 존칭사뿐 아니라 송가도 낳았다. 그 송가는 영화예술인들 속에서 나와 민중들 속으로 퍼져갔다. 1971년 2월 16일이었다. 이날 저녁에 소연회가 있었다. 그분을 보좌하고 있는 일군들과 영화예술인 몇몇이 참가한 소박한 연회였다. 그들은 경애하는 영도자님을 모시고 단란한 한가정의 식구처럼 둘러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났을 때 참가자 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가 바로 그분에 대한 송가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였다. ≪노을이 피어나는 이른아침에 / 인자하신 그 미소를 생각합니다 / 고요한 밤하늘에 별이 웃을 때 / 따사로운 그 사랑이 그립습니다≫ 노래는 어느덧 합창으로 변했다. 그분을 제외한다면 부르는 사람도 따로 없었고 듣는 사람도 따로 없었다. ≪정다운 그 품 속을 멀리 떠나도 / 그리움은 가슴속에 넘쳐납니다 / 언제나 어데서나 가슴속깊이 / 자애로운 그 모습을 그려봅니다 …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이으신 / 친애하는 지도자께 맹세합니다 / 비바람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 그들은 목소리로가 아니라 심장으로 노래를 불렀다. 성량도 음질도 서로 달랐으나 마음은 하나같이 뜨거웠다. 정다운 그 품 속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고 언제 어데서나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그들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밤은 깊어가도 노래는 끝날 줄을 몰랐다. 흠모는 흠모를 낳았고 노래는 노래를 낳았다. 이날 이후 영화예술인들 속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노래가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친위대 돌격대≫라는 노래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노래를 영화예술인들이 처음으로 부른 것은 그해 4ㆍ15명절 전날이었다. 4ㆍ15명절을 앞두고 모란봉경기장에서 제2차 예술인체육대회가 성황리에 진행되었는데 여기서 영화예술부문이 종합 1등을 했다. 특히 영화예술부문 축구선수단은 맞다든 모든 팀을 누르고 전승을 기록했다. 이 보고를 받으시고 더없이 만족해 하신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경기대회 마지막날인 4월 14일에 그들의 성과를 축하해 만찬을 마련하시고 친히 자리를 같이해 주시었다. 영화예술인들의 심정은 금상첨화란 말 그대로 비단위의 꽃이었고 기쁨위의 영광이었다. 만찬이 한창일 때였다. 영화예술인들이 그분앞으로 나와 횡대로 열을 지었다. 만장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그분께 정중히 축원의 인사를 올린 그들은 자기들이 노래를 한곡 부르겠다고 말씀올리었다. 그분께서는 동무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이번에 사상전, 투지전의 위력을 보여준 그 본때로 노래를 부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누구나 흔히 부르는 그런 노래를 부르리라고만 생각하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예상외의 것이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는 친위대 돌격대≫라는 노래였던 것이다. ≪피끓는 가슴에 충성을 맹세한 / 우리는 영예로운 친위대 돌격대다 /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높은 뜻 받들고 / 위대한 주체사상 빛내어 가리라≫ 1절이 끝나자 만찬에 참가한 일군들과 영화예술인들이 모두 일어나서 2절과 3절을 합창했다. ≪수령님 영상이 가슴에 빛나는 / 우리는 영예로운 친위대 돌격대다 / 햇빛보다 따사로운 그 사랑 안고서 / 한생을 혁명가로 억세게 싸워가리 // 사나운 폭풍이 앞길을 막아도 / 우리의 붉은 심장 영원히 변치 않으리 / 영명하고 친근하신 지도자동지께 / 일편단심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리라≫ 영화예술인들이 두달전에 부른 노래는 그분께 영원히 충성다할 결의를 담은 노래였다면 그들이 지금 부르는 노래는 그분의 친위대, 돌격대가 되어 그분을 옹위하는 성새가 되고 방패가 될 의지를 담은 노래였다. 그분께서는 자애로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시며 고맙소, 고맙소라고 거듭 말씀하시었다. 이 노래 역시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마음을 틀어잡았다. 사람들은 저저마다 이 노래를 심장의 목소리로 부르며 자신을 그분의 친위대, 돌격대의 반열에 세웠다. 참으로 이 노래는 일심단결의 송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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