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1일

통일여명 편집국

 

 

인간문명의 새 장을 펼치시어

 - 은혜로운 사랑의 태양 5

통일여명 편집국 6-1-29

 

차 례

 

1. 자동화의 봉화를 추켜드시고

황철자동화의 횃불  / 돈보다 사람을 / 민중의 힘을 믿고 / ≪용해공거리≫

2. 기계농사의 새 장

청산벌에 기계농사의 봄이 왔다 / 트랙터운전사들에게 하신 부탁

3. 여성해방의 새 역사

여성들의 부엌일을 덜어주시려고 / 복받은 어머니들

4. 민중에게 보다 문명한 생활

산간지대의 마지막 한집까지 / 공해 ≪0≫

 

1. 자동화의 봉화를 추켜드시고

 

황철자동화의 횃불

이북에서는 3대기술혁명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그 선봉에는 기계제작공업부문의 기술자, 노동자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3대기술혁명수행을 위해 도처에서 요청되는 공작기계 3만대 생산을 힘차게 벌여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3만대 생산목표를 실현하여 3대기술혁명수행의 돌파구를 열어놓았다. 이 첫 성과에 토대하여 경제의 여러 부문들과 단위들에서 자동화사업이 활발히 벌어졌다. 그런데 3대기술혁명의 중요 과업인 고열노동과 유해노동 부문에서 자동화사업이 잘 진척되지 못하고 있었다. 황해제철소만 놓고 보더라도 일군들이 소극성과 신비주의에 빠져 자동화를 힘있게 벌이지 못하고 있었다. . . . 1972년 5월, 주석님께서 황해제철소를 현지지도하시었다. 그런데 강철직장을 비롯한 여러 직장들에서 용해공들이 이전과 다름없이 고열 속에서 땀을 철철 흘리며 일하는 것이었다. 주석님께서는 심려어린 안색으로 용해공들에게 노앞에서 일하기가 얼마나 힘든가, 어느때가 제일 더운가고 물으시고는 책임일군들에게 하루빨리 이 작업을 자동화, 원격조종화해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김일성주석님의 심려는 곧 김정일영도자님의 심려였다. 수령님의 심려어린 황철현지지도를 놓고 그분의 마음은 황철용해공들에게로 달려갔다. 황철은 어느 공장보다 고열노동과 유해노동이 많아 노동자들이 힘들게 일을 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마음을 놓지 못하시던 곳이다. . . . 우리 나라는 예술의 왕국으로만 될 것이 아니라 기술면에서도 마땅히 자동화의 왕국으로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 사업을 우리가 틀어쥐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김정일영도자님께서 몸소 자동화의 진군로를 여시겠다는 위대한 선언이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황철을 자동화의 첫 본보기단위로 정하시고 이 사업을 정력적으로 이끄시었다. 1973년 1월 24일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황철에 파견된 자동화추진소조들을 집무실로 부르시었다. 자동화추진소조는 그분께서 황철을 자동화의 본보기로 꾸릴 결심밑에 1972년 말 친히 강력한 기술일군들로 무어 황철에 파견한 집단이었다.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신 그분께서는 그동안 추진정형을 요해하신 다음 황철자동화의 총적 방향과 구체적 방도를 밝히시었다. 그분께서는 황철의 자동화는 주체적인 ≪자동화의 왕국≫이 올라서야 할 그런 높이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종합적 원격화가 황철자동화의 총적 방향이고 우리의 이상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황철자동화의 단계와 순차성을 결정해 주시었다. 그분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산업텔레비전화와 무선통신수단에 의한 지령지휘체계를 실현하여 노동자들에게 자동화의 우월성을 인식시키고 그 다음에는 사별장과 같이 비교적 단순한 생산흐름으로 이루어진 공정을 원격화하여 사람들에게 자동화에 대한 신심과 경험을 체득시키며 점차 5.14직장, 소결로직장, 해탄로직장과 같이 두 공정이상의 생산흐름과 고열로를 가진 직장들의 원격화를 실현하고 그 성과에 기초해 용광로와 평로들을 완전히 원격화함으로써 야금공정 전반에 대한 종합적 원격화에로 나가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황철자동화의 전망을 펼쳐놓은 보랏빛 청사진이었다. 이 소식은 곧 황철에 전해졌다. 황철사람들은 쇠를 다루는 철의 노동자계급을 언제나 믿어주시고 크나큰 은정을 남먼저 베풀어 주시는 김정일영도자님의 하해같은 사랑에 환성을 올리며 흥분을 금치 못해하였다. 황철을 자동화의 첫 대상으로 정하시고 자동화의 첫 불길을 지피신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몸소 자동화실현에 끊임없는 노고와 심혈을 다 바치시었다. 그분께서는 황철자동화를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끼지 않으시고 최우선권을 부여하시었다. 황철에서 자동화를 실현하려면 그에 필요한 설비와 기구요소들을 먼저 해결해 주어야 한다면서 평양대극장에 특별히 설치했던 두대의 자동카메라와 영화촬영소에서 이용되던 무선전화기, 당중앙위원회에서 쓰려고 마련했던 지령교환대를 보내주시었으며 전국의 여러 공장, 기업소들에서 황철의 자동화설비를 우선적으로 생산보장해 주도록 하시었다. 그리고 국내에서 생산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는 자동화 요소, 설비들은 외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지체없이 해결해오도록 하시고 그것들이 들어왔을 때에는 만사를 미루고 현지에 나가 하나도 빠짐없이 보아주시었다. 그분께서는 일부 설비들에 대해서는 직접 조작도 해보시고 시동도 시켜 보시었으며 간혹 설비의 부족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서는 그것을 그대로 황철의 노동계급에게 보내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설비의 부족점을 보충하기 위한 자체생산 대책을 세워주시었다. 그분께서는 즉석에서 20여개의 공장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생산해야 할 수십종의 설비이름까지 하나하나 찍어도 주시었다. 이밖에도 자동화에 필요한 과학기술 서적들과 자료들을 현지의 기술자들에게 보내주곤 하시었다. 그리고 중요 회의도 뒤로 미루시고 무시로 찾아오는 자동화추진소조원들을 일일이 만나주시고 황철자동화를 위해 장시간 조언도 주시었다. 황철자동화에서 큰 문제가 제기될 때에는 친히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를 비롯한 중요 회의들을 마련하시고 황철자동화의 걸린 고리를 풀어나가도록 조치도 취해 주시었다. 황철자동화에 대한 그분의 노고는 참말로 큰 것이었다. 사실 이 무렵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분초를 쪼개가시며 매우 분망한 나날을 보내고 계실 때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혁명사상을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 체계로 정식화하기 위한 중대한 연구, 저술 사업을 하시었고 20세기 문예부흥의 위대한 화폭을 펼치시고 영화혁명을 수행한데 이어 가극혁명, 연극혁명을 추진하고 계시었다. 그리고 당사상사업을 비롯한 전반적인 당사업을 일층 개선하기 위한 사업을 벌여나가고 계시었다. 후일 김정일영도자님께서 회고하신 바대로 이 시기 그분께서는 하루에 세시간도 주무시나마나 하시었다. 이런 속에서 그분께서는 황철자동화를 줄기차게 밀고나가시어 마침내 황철자동화의 첫 돌파구를 열어놓으시었다. 강철직장의 산업텔레비전화와 무선통신에 의한 지령체계의 수립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젯날 수많은 용해공들이 땀을 철철 흘리면서 하던 일과 요란한 소음 속에서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지르며 뛰어다녀야만 했던 강철직장이 산업텔레비전으로 노안을 감시하고 당중앙위원회에서 쓰려던 지령대에 의해 생산지휘를 보장하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강철직작에서는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이게 꿈이요 생시요? 텔레비전을 보면서 쇳물을 끓이다니! 바로 이것을 두고 천지개벽이라고 하지요. 용해공들은 너무 기뻐 서로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자동화의 첫 단계 성과에 토대하여 황철자동화를 더욱 힘있게 추진하시었다. 그리하여 황해제철소의 전면적 자동화는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진척되어 힘든 노동이 원격화되어갔다. ≪인해전술≫로 광석을 부리고 사별하고 싣던 고된 사별장이 원격화의 시범단위로 번뜻하게 꾸려져 청장년노력만 해도 280여명이 하던 일을 단발머리 처녀가 지령탁옆에 앉아 조그마한 손으로 원격조종단추를 누르며 눈깜박할 사이에 해제꼈다. 사별장의 원격화보다 작업량이 근 4배나 되는 5.14직장도 종합적 원격화되었다. 그리고 환원구단광직장, 해탄로직장, 소결로직장도 자동화, 원격화되어 모든 일을 원격조종단추로 조종하기에 이르렀다. 오랜 세월 황철의 노동자들을 괴롭히던 고열노동과 유해노동은 드디어 종적을 감추고야 말았다. 전면적 자동화가 가져온 결실은 이처럼 풍만한 것이었으니 이것은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일어난 특기할 사변이었다. . . .

돈보다 사람을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모든 사업에서 언제나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시었다. . . . 황철의 소결로직장의 자동화문제가 일정에 올랐을 때였다. 이 직장은 황철이 생긴 초기부터 가동되어오는 오래된 직장이다. 그러므로 생산공정이 뒤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자동화된 공정으로 바꾸자면 거의 새로 건설하는 것과 맞먹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야 했다. 일부 사람들 속에서 소결로직장의 자동화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느니, 그 직장을 자동화하자면 세월이 없다느니 하면서 유보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결국 돈이 많이 들고 기술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황철의 전면적 자동화가 불가능하며 이런 힘든 노동은 불가피하게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결로직장의 자동화문제로 하여 황철의 자동화사업은 일시 중단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아시게 된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해 하시었다. 민중의 세기적 소망이 슴배어 있고 김일성주석님께서 기어이 우리 대에 완성하고자 하시는 기술혁명, 근로민중을 어렵고 힘든 일에서 해방하는 이 중대한 위업을 돈 귀한 줄만 알고 사람 귀한 줄은 모르는 일부 일군들의 경솔한 처사 때문에 한시라도 지체시킬 수 없으시었다. 1973년 1월 28일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을 부르시고 황철자동화에서 나서는 복잡한 문제에 대하여 전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돈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보아야 하며 근로자들을 위한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을 먼저 보는 원칙에서 자동화를 실현하여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체적인 자동화전법의 본질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동화전법은 사람을 제일 귀중히 여기고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하여 복무하게 하는 주체사상의 요구를 구현한 사람중심의 전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중심의 전법이라는데 우리의 자동화전법의 커다란 우월성이 있으며 또한 여기에 우리가 하는 자동화와 자본가들이 하는 자동화의 본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 . . 1973년 4월 어느날 그분께서는 관계부문의 한 일군을 투자방향 검토차로 황철에 파견하시면서 황해제철소를 자동화하는데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노동계급을 위하여 쓰는 돈은 계산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계산은 후에 해도 된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을 먼저 보는 원칙에서 투자를 해야 한다, 이런 원칙에 서지 않고서는 황해제철소와 같이 지은지 오래된 공장들을 자동화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이제 황해제철소에 내려가면 돈에 구애되지 말고 철저히 노동계급을 위하는 원칙에서 자동화를 위한 투자방향을 다시 검토하고 무엇이 모자라는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아가지고 오라고 이르시었다. 그러시고는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어디에 가서라도 다 해결해야 하겠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황철의 자동화를 위해서는 외화도 아끼지 않으시었다. 황철자동화에 필요한 설비구입차로 기술일군대표단이 다른 나라에 파견되었을 때에도 그분께서는 새벽 3시가 넘은 깊은 밤에 그 대표단의 사업정형을 알아보시고 물건값이 올라 몇가지 설비구입이 곤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는 돈이 모자라면 더 보내주겠으니 한대도 빼놓지 말고 다 사가지고 와야 한다고 이르시었다. 이렇듯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돈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투철한 입장으로부터 그렇게 어렵다던 소결로직장은 그뽥한 자동화의 새 설비들로 꾸려져 마침내 전면적 자동화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 . .

민중의 힘을 믿고

세기가 물려준 고열과 유해, 어렵고 힘든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하기 위한 전면적 자동화의 불길은 흑색야금공업부문뿐 아니라 광업부문에도 번져갔다. 이 역시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대담하고 통이 큰 자동화작전으로 세상사람들을 경탄시킨 은율광산의 대형장거리벨트콘베어건설로 불이 지펴졌다. 그때 황철에 쇳돌을 대주는 은율광산에서는 이미 자동화된 황철의 증대되는 쇳돌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은율광산에서의 쇳돌생산의 명맥이라 할 수 있는 박토처리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데 근본원인이 있었다. . . . 이제와서는 채굴장이 깊어지고 박토량이 방대한 조건에서 종전처럼 굴착기나 자동차의 대수를 늘여 운반이나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쇳돌생산을 감당해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광산일군들은 이 문제를 놓고 타개책을 찾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묘안이 나오지 않아 노동자들이 힘들게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모든 실정을 헤아려보시고 대담하고 통이 큰 작전으로 은율광산에 박토처리를 위한 자동화된 현대식 대형장거리벨트콘베어건설구상을 내놓으시고 현명하게 이끌어 주시었다. 1974년 1월 정초의 어느날이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의 한 일군을 부르시어 지금 광석을 제대로 대주지 못해 자동화된 황철이 은을 내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황철을 사수하자면 바로 옆봉우리인 은율광산에 힘을 넣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올해에 은율광산에 대형장거리벨트콘베어를 놓고 박토를 밀어내며 광석을 본때있게 캐보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자동화, 현대화 물결의 야금공업으로부터 채취공업에로의 확대를 의미하였으며 또하나의 어렵고 힘든 노동에서의 해방과 수송사업의 새로운 혁신을 의미하였다. 이날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구체적인 작전에 앞서 그 일군을 현지에 파견하시면서 공사실태를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시었다. 그런데 며칠후 현지에 내려갔던 일군은 낙심한 표정으로 그분앞에 나타났다. 막상 현지에 내려가보니 벨트콘베어건설은 너무 방대하고 아름찼기 때문이었다. 벨트콘베어를 청년광구로부터 바다기슭까지 놓자고 해도 거리가 매우 멀고 굴만 해도 근 300미터나 뚫어야 하는데다가 높고 험한 구월산맥을 넘어 150여리밖에서 송전선을 끌어와야 했다. 게다가 큰 파쇄장과 전동실도 새로 건설해야 하는 등 공사는 이를데 없이 방대하고 힘든 것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일군으로부터 실태를 죄다 청취하시고 공사가 힘들 것 같다는 일군의 말에 방이 울리도록 소리내어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하자고 결심해서 못해낸 일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영웅적 노동계급의 무궁한 창조적 지혜와 힘이 있지 않습니까. 신심을 가지고 한번 해봅시다. 그래서 은율광산 벨트콘베어를 우리 시대의 대기념비적 창조물로 만들어봅시다. 노동자계급의 지혜, 노동자계급의 힘에 대한 믿음이 넘치는 말씀이었다. 영도자님의 말씀에 일군은 무거웠던 마음이 후련해지고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는 감을 느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서신 그분께서는 벽에 걸린 조선지도 앞으로 다가가 한 지점을 가리키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내 생각에는 벨트콘베어를 바다기슭까지가 아니라 바다가운데로 쭉 뻗어나가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그 일군은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벨트콘베어를 그렇게 건설한 적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영도자님께서는 벌써 지도위에 붉은 화살표를 광구로부터 시작하여 바다가운데로 힘있게 그어나가고 계시었다. 바로 이 능금섬까지 벨트콘베어를 놓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 섬들을 모두 하나로 이어 놓읍시다! 지도위에 표시된 화살표를 바라볼수록 놀랍기 그지없고 희한하기 그지없었다. 바다가운데로 몇십리 뻗어나간 대벨트콘베어만 해도 대단한 것인데 그분께서 구상하시는 작전구도에는 대자연개조의 웅대한 전망까지도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광산에서 쏟아져 나오는 박토를 벨트콘베어로 날라 바다를 메우고 광대한 면적의 간석지를 개간하는 설계도였다. 그분께서는 신심에 넘치신듯 한손을 들어 지도를 짚으시며 만면에 환한 미소를 함뿍 담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어떻습니까. 신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분의 거룩한 모습을 우러르며 일군은 김정일영도자님의 대담하고 통이 큰 원대한 구상에 흥분을 금치 못해 하면서 한번 본때있게 해보겠다고 말씀드리었다. 마침내 금산포의 하늘에 공사의 첫 발파소리가 울리었다. 건설자들은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처음부터 줄기찬 투쟁을 힘있게 벌여나갔다. 그들은 노동시간이 따로 없이 밤과 낮을 이어 두몫, 세몫 일을 해제꼈다. 그러나 공사 자체가 너무 방대한 것인데다가 처음 해보는 일이어서 부닥치는 애로와 난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여기서 제일 큰 난관은 벨트콘베어를 떠받들 바닷물 속의 기초콘크리트공사였다. 서해바다의 심한 조수때문에 기초콘크리트공사는 거듭 실패하여 나중에는 공사 전반에 큰 지장을 주었다. 이 무렵 공사행정을 늘 장악하고 살피시던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제기된 난문제를 헤아려보시고 공사를 책임진 한 일군을 몸가까이 부르시었다. 그분께서는 그 일군에게 바닷물 속에서 하는 벨트콘베어 다리공사가 난관이 있다고 하는데 이 문제를 가지고 노동자들과 의논해 보았는가고 물으시었다. 뜻밖의 물음에 그 일군은 아직 노동자들과는 의논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솔직히 말씀드리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신중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무슨 일이든지 신비하게 생각하지 말고 해당 부문 일군들과 노동자들을 모여 놓고 협의하시오. 방법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그분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난관이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군중의 힘을 굳게 믿고 군중 속에 들어가 그들과 마주앉아 의논하시며 그들의 지혜와 힘을 발동하여 걸린 문제들을 풀어나가신다고 하시면서 모든 사업에서 이 위대한 모범을 따라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분의 말씀대로 현지에서는 일군들과 노동자들이 모여앉아 해상기초공사의 방도를 의논하였다. 여기서 수많은 창발적 의견이 모아져 이 난문제의 해결방도를 찾아냈다. 금산포의 바다 속내를 잘 아는 은율의 오랜 노동자들 속에서 기초공사의 걸린 난관을 뚫고나갈 수 있는 묘안이 나왔던 것이다. . . . 영도자님께서는 밤늦게까지 중요한 회의를 끝내고 나오시는 그길로 벨트콘베어건설정형을 보고받으시다가 구월산을 넘어 전주를 세우고 전선을 늘이는 어려운 공사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요해하게 되시었다. 구월산 험한 영은 자동차나 트랙터가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가파로운 곳으로서 노동자들이 무거운 전주대를 목도로 메어올린다는 사실을 들으신 그분께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시며 말씀하시었다. 그 육중한 전주대를 목도로 메어올리다니?! … 그분께서는 힘든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그려보시며 가슴아프신듯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우리 노동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수령님께서 제일 귀중히 여기시는 보배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분께서는 괴로우신듯 창밖에 시선을 보내시고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계시다가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말씀을 이으시었다. 우리 대에 와서까지 목도가 계속 남아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시대야말로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사람들의 어깨를 내리누르던 힘든 노동을 기계가 대신해야 할 시대입니다. 목도가 아니라 직승비행기가 전주를 물고 하늘로 날게 합시다. 우리가 하는 벨트콘베어건설장에 비행기가 날게 합시다! 헬기가 즉시에 금산포의 구월산상공에 날아가 힘든 노동을 대신해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힘겹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이 염려되시어 두터운 동복과 장화도 보내주시었으며 섬에 나가있는 노동자들의 생활편리를 위해 쾌속보트까지 보내주시었다. 그분께서 노동자들을 위하시는 은정과 사랑에는 끝이 없었다. . . . 제1단계공사가 완공된 것이다. 매일 수만톤의 버력을 바다로 실어내는 거대한 시설물의 운전을 나어린 처녀가 혼자서 원격조종으로 하는 완전히 자동화된 설비의 완공이었다. 이것은 어렵고 힘든 노동을 없애기 위한 투쟁에서 노동자계급들이 점령한 또하나의 새로운 빛나는 고지였다. . . . 이날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바다 저 멀리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과 해안의 전경을 이윽히 바라보시다가 결연히 한손을 드시어 그 섬들을 가리키시며 지도일군들에게 다음단계 공사를 힘있게 추진해야겠다고 말씀하시었다. 능금도와 웅도사이에 장거리벨트콘베어를 마저 놓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 웅도와 청량도사이, 청량도와 과일군 월사리사이의 바다도 막고 연결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 남포시와 은천군 제도리사이에 큰 다리를 놓고 제도리로부터 은율군 금산포, 과일군 백사장까지 도로를 연결시켜 서해안에 새로운 축을 하나 형성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펼치신 휘황한 전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바다를 메워 얻는 땅만 해도 한개 군의 넓이에 해당되며 산업, 교통운수, 민중생활의 모든 면에서 획기적인 전변이 이루어지게 된다. . . .

≪용해공거리≫

황철이 자동화되어 그 면모를 달리하고 있을 때 송림땅에는 현대적인 주택거리건설이 펼쳐지고 있었다. 용해공들의 행복한 보금자리가 건설되는 것이었다. 이 거리 건설의 발기자는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이시었다. . . . 그리하여 영도자님께서는 황철에서 자동화의 불꽃이 한창 일어번져 그 면모를 일신하고 있을 때 철의 도시 송림땅에 현대적인 살림집건설의 불꽃보라를 날리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황철의 용해공들을 위한 ≪용해공거리≫이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 황철용해공들의 주거생활에 관심을 돌이기 시작하신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다. 언젠가 그분께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모시고 송림에 가시었을 때 한 노동자의 집을 방문하신 일이 있었다. 그 노동자의 집은 두칸짜리 방이었는데 양부모가 있었고 또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여럿이 되는 큰 가정이었다. 이날주석님께서는 동행한 일군에게 식솔에 비해 방이 비좁은 감이 있다고 하시면서 단칸짜리 집에서 사는 용해공들은 없는가고 물으시었다. 한 일군으로부터 더러 있다는 대답을 들으신주석님께서는 근심어린 안색을 지으시었다. 이때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수행한 일군에게 심중한 어조로 용해공들보다 더 수고하는 사람은 없다고, 용해공들이 고열로앞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피곤을 풀자면 조용한 방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용해공들의 살림집문제를 꼭 해결하자고 거듭 강조하시었다. 또 언제인가 그분께서는 황철노동자들의 합숙을 찾아주신 일도 있었다. 방안에 들어서신 그분께서는 용해공들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방안에 있는 이불이며 포단, 베개를 만져보시며 옛날부터 조선사람들은 둥근베개를 베고 자는데 습관되었고 베개모에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라는 뜻에서 ≪수≫자나 ≪복≫자를 수놓았다고 하시면서 일군들에게 용해공들이 잠자기에도 편리하고 그들의 어머니들이 와보아도 좋아하게 조선베개를 만들어주며 이불도 위아래가 있는 두툼한 비단이불을 해주라고 이르시었다. 그러시고는 창문가로 다가가 커튼을 만져보시며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불앞에서 일하는 용해공들은 잠을 충분히 자야 합니다. 밤일을 한 용해공들을 푹 재우자면 두터운 천으로 창가림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햇빛이 들어오는 방에서는 밤일을 하고 들어온 용해공들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습니다. 일군들은 합숙방을 하나 꾸려도 노동자들의 생활과 건강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친부모의 심정으로 꾸려주어야 합니다. 일군들과 용해공들의 감동은 이루다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 . .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황철에 파견되어 있는 3대혁명소조원들에게 살림집건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지시를 내려보내시었다. 황철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들은 용해공, 압연공들에게 줄 현대적인 살림집건설을 직접 맡아 추진시키며 평양시 비파거리의 제일 좋은 살림집설계를 참고로 하여 설계하되 시공일군들을 비파거리를 견학시켜 그 수준에서 시공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시었다. . . . 마침내 황철의 자동화가 전면적으로 실현되는 때에 송림땅에서는 평양의 비파거리를 옮겨놓은 것 같은 용해공거리가 완공을 보게 되어 황철사람들의 격정을 더한층 고조시켰다. 널찍한 두세칸짜리 온수온돌방들로 이루어진 고층살림집들사이에는 ≪용해공상점≫, ≪용해공국수집≫, ≪용해공이발관≫, ≪용해공양복점≫ 등 편의봉사망들이 조화를 이루었고 그것을 배경으로 공원과 녹지들이 훌륭하게 꾸려져 말그대로 천하절승이었다. 새 거리가 일떠서자 황철사람들은 저마다 새 거리의 이름을 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새 거리의 이름으로 모아진 것이 이 거리는 김정일영도자님의 사랑과 은덕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므로 그 이름을 ≪사랑의 거리≫ 또는 ≪은덕거리≫라고 부르자고 했다. 새집들이를 앞둔 어느날 황해제철소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들은 김정일영도자님께 용해공살림집건설 완공에 대해 보고드리면서 아울러 노동자들의 염원대로 새 주택거리 이름을 ≪은덕거리≫로 부르려 한다는 것도 말씀드리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살림집건설참가자들에게 치하의 말씀을 주시면서 새 거리는 용해공들을 위하여 일떠세운 거리인데 거리이름도 용해공이름을 달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친히 그 이름을 ≪용해공거리≫라고 지어주시었다. ≪용해공거리≫는 이렇게 생겨났다. . . . 이러한 이상적인 거리는 송림땅에만 솟아난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김책제철연합기업소와 검덕광업연합기업소, 무산광산연합기업소, 상원시멘트연합기업소의 노동자계급을 위해서도 몸소 건설주가 되시어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한 이상적인 거리를 일떠세워주시었다. . . .

 

2. 기계농사의 새 장

 

청산벌에 기계농사의 봄이 왔다

1971년 5월 모내기철이 왔다. 6개년계획의 첫해 봄이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이런 때에 청산협동농장벌로 나가시었다. . . . 그분께서는 십여일전에도 모내기철 준비가 걱정되어 농장을 찾으시었다. 짙은 안개가 끼어 앞을 잘 분간할 수 없는 이른새벽에 그분께서는 논두렁길에서 물도랑을 넘어다니며 이 논배미, 저 논배미의 물꼬를 손질하기에 바쁜 한 농민과 대화를 하시었다. 그 농민은 안개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채 묻는 말에 응답했다. 논물관리공입니까? 예. 논갈이는 다 끝냈습니까? 다 끝내고 써레질이 한창이지요. 영도자님께서는 논은 얼마나 깊이 갈았는가, 거름은 얼마나 냈는가를 알아보신 다음 모를 실하게 자래웠는가를 물으시며 담화를 계속하시었다. 지금 몇잎이나 자랐습니까? 대여섯잎씩은 되지요. 맞춤하구만. 그래 모내는 기계는 얼마나 들어왔습니까? 참 깐깐도 하신 분이군. 논물관리공은 이런 생각을 하며 자기는 모내는 기계가 얼마나 들어왔는지 잘 모른다고 솔직히 말씀올리고 나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는데 자욱했던 안개가 가시기 시작하자 논물관리공은 영도자님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인사말씀도 드리지 못했다. 영도자님께서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시며 새벽부터 수고합니다. 청산벌이 보고 싶어 나왔습니다라고 하시면서 흙탕물이 묻은 그의 손을 덥석 잡아주시었다. 그래 모는 언제부터 냅니까? 3~4일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내려고 일손을 다그칩니다. 청산리는 모내기도 제철에 잘하여 전국에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올해에도 날씨가 좋지 않을 것이 예견되니 모내기때부터 단단히 잡도리를 하고 농사일을 잘해야 합니다. 이렇게 험한 논두렁길을 걸으시며 모내기준비상태를 알아보신 영도자님께서는 모내기에 착수한 청산벌이 보고 싶어 오늘 또다시 이 농장을 찾으신 것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농장관리일군들과 농촌지원단체 책임일군들과 함께 모내기로 들끓는 논벌로 나가시었다. 포전으로 걸음을 옮기시던 그분께서는 길옆에 세워놓은 속보판에서 문뜩 걸음을 멈추시었다. 속보판에 유별나게 큰 글자로 쓴 ≪밤중에≫라는 제목의 속보를 훑어보시었다. 내용인즉 남들이 깊이 잠든 새벽 3시에 혼자서 모판에 나가 모를 뜬 한 지원자의 소행을 소개한 것이었다. 모내기를 위하여 모두가 속보의 주인공처럼 새벽같이 모판에 나가 모를 떠서 모내기를 보장하라고 호소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자못 깊은 생각에 잠기시었다. 이곳 일군들이 아직도 기술혁명을 다그쳐 일을 헐하게 할 생각보다는 인력으로 바쁜 농사일을 하려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시었다. 그분께서는 이번에는 눈길을 돌려 논판을 둘러보시었다. 논배미마다 사람들이 하얗게 들어서서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모를 내고 있을 뿐 새로 만들어 공급해준 이앙기는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우는 기계란 써레질을 하는 트랙터 몇대뿐이었다. 그분께서는 관리위원장에게 물으시었다. 트랙터는 많이 보이는데 모내는 기계는 왜 보이지 않소? 그분의 물음에 관리위원장은 기계는 받았으나 제대로 다룰 줄 몰라 고장을 내어 창고에 걷어넣어두었다고 말씀드리었다. 그의 대답에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해 하시며 그분께서는 다시 물으시었다. 무슨 고장이 그리 많습니까? 관리위원장은 얼른 대답하지 못하였다. 사실 모내기철이 오면 해마다 국가적인 지원노력을 받아 모내기를 하여온데 습관이 되어 있다보니 이앙기 이용에는 그닥 머리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힘에 부치게 모를 내면서도 이앙기가 한두번 고장이 나면 내버려두는 것이 일쑤였다. 그분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셨다가 모내는 기계를 잘 손질하여 써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모내는 기계를 쓰지 않고 농민들이 힘들게 손으로 모를 꽂는 것을 보시면 가슴아파하실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모내는 기계로 모를 내야 합니다. 창고에 넣어둔 모내는 기계를 다 내다 손질하여 쓰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모내는 기계가 열번 고장나면 열번 고치고 백번 고장나면 백번 고쳐서라도 기계로 모를 내야 합니다. 그러시고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께서 휴식도 피로도 잊으시고 여러차례 기술자들을 만나시어 모내는 기계의 설계도를 보아주시던 일이며 그 기계를 빨리 완성시키려고 공장들을 현지지도하신 일들을 이야기하시었다. 모내는 기계를 처음 만들었을 때 수령님께서는 친히 포전에 나가시어 찬비를 맞으시며 기계들을 보아주시었소. 수령님께서는 기계가 제대로 돌아가자 이제는 농민들이 굽은 허리를 펴게 되었다고 기뻐하시면서 그 기계들을 청산리농민에게 먼저 보내주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런 기계이니만큼 꼭 완성하여 써야 합니다. . . . 이날 그분께서는 모내기장에 나왔으니 모를 꽂아보자고 하시면서 신발을 벗고 논판에 들어서시어 손수 모를 내시었다. 동행한 일군들이 점심식사시간이 훨씬 지났다고 거듭 말씀드리자 그분께서는 웃으시며 점심 한끼쯤 번지는 것은 일없다고 하시면서 청산벌에 풍년이 들 것을 생각하니 점심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관리위원장에게 농촌기계화를 완성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동무들이 흘리는 땀이 수령님께서 구상하시는 ≪세계의 청산리≫를 꽃피우는 거름이 되고 빗방울이 되고 약이 되기를 바랍니다. 청산리에 봄이 와야 온 나라에 봄이 오고 청산리사람들이 힘든 농사일에서 해방되어야 전국의 농민들이 고된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뜻깊은 말씀이었다. 영도자님의 현지지도를 받은 이후 청산리는 종합적 기계화로 더욱 들끓었다. 신비하게만 생각하던 청산리사람들은 트랙터와 이앙기 운전대에 올라앉아 밤가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기술을 익혔다. 관리위원장이 앞서고 관리일군들과 농장원들이 뒤를 따랐다. 청산벌에서 일어난 종합적 기계화의 불꽃은 사면팔방으로 번져갔다. 온 나라의 모든 농장들이 청산리의 모범을 따랐다. 1972년 말에 이르러 트랙터운전면허증을 받은 수는 무려 2만 5천여명에 달했으며 그 대열은 나날이 늘어났다. . . .

트랙터운전사들에게 하신 부탁

1971년 2월 12일 평양에서는 전국트랙터운전사대회가 열리었다. 대회는 6개년계획의 첫해에 제일 선참으로 소집된 큰 회의로서 농촌에서 종합적 기계화를 다그쳐 농민들을 힘든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과 함께 농업생산력을 높이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 . . 1966년 봄기운이 무르녹던 4월 말이었다. 평안남도 온천군에 대한 현지지도의 길에 오르셨던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서화벌을 돌아보시다가 논둑을 가로타고 서있는 한대의 트랙터를 보시게 되었다. 그분께서는 질적거리는 포전길을 걸어 트랙터가 서있는 곳으로 가시었다. 알고 보니 트랙터가 고장이 나서 운전사가 점심시간도 뒤로 미루고 열심히 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운전사의 기름묻은 손을 허물없이 잡아주시고 함께 고쳐보자고 하시고는 고장난 부분에 손을 대시었다. 손에 기름을 묻히며 노동자와 함께 일하시는 그분의 모습은 참으로 역사가 알지 못하는 민중의 영도자의 참모습이었다. 그분께서는 고장이 퇴치되자 운전사에게 발동을 걸어보라고 하시면서 기화기옆으로 다가서시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따라 트랙터운전사는 마그네토를 가지고 나오지 않아 발동을 걸 수 없어 급히 마을로 막 달려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자신께서 타고 오신 승용차를 타고 가서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시었다. 그러나 트랙터운전사는 진흙이 게발린 작업복차림으로 차에 오를 수가 없어 사양하고 마을로 뛰어갔다. 그분께서는 함께 온 운전사에게 트랙터운전사와 같이 마을에 갔다오라고 이르시었다. 얼마후 마그네토를 가져온 트랙터운전사가 헤덤비면서 마그네토를 맞추자 그분께서는 기화기는 자신께서 보아주겠으니 돌림대를 돌리라고 하시면서 공기조절변을 조작하시었다. 이윽하여 발동이 걸리자 그분께서는 그의 등을 다정히 두드리시며 아무리 갈길이 바빠도 동무가 써레질을 하는 것을 보고 가겠다고 하시었다. 그의 써레질솜씨를 한참이나 보아주신 그분께서는 트랙터운전사에게 운전을 잘한다고 하시면서 문제는 트랙터의 가동률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자면 트랙터의 기술관리를 잘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랙터의 수리정비사업을 제때에 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시었다. 그러시고는 농촌의 기계화초병으로서 주인답게 일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트랙터를 가지고 논밭도 갈고 김도 매며 운반작업도 하고 탈곡도 해야 한다고, 그러자면 여러가지 연결농기계를 갖추어놓아야 하며 트랙터를 만가동시켜 농민들의 힘든 일을 트랙터가 대신하게 해야 한다고 당부의 부탁을 남기시고 가시던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었던 것이다. 이렇듯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길을 가실 때에도 트랙터의 작업광경을 보시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셨고 그것을 다루는 트랙터운전사들이 미덥고 사랑스러워 그저 스쳐지나지 않으시었다. . . .

 

3. 여성해방의 새 역사

 

여성들의 부엌일을 덜어주시려고

. . . 1971년 4월 황해남도 과일군을 현지에서 지도하고 계시던 영도자님께서는 소문없이 이곳 풍천과실가공공장을 찾아주시었다. 7천여정보의 과수원안에 자리잡고 있는 공장은 1970년 12월 21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하신 김일성주석님의 교시에 따라 사과 10만톤을 가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공장으로 일떠선 이북에서 손꼽히는 과실가공품생산기지의 하나였다. 공장에 당도하신 영도자님께서는 그길로 먼저 공장제품진열대로 가시었다. 그분께서는 여러 가지의 과실가공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아주시면서 이런 과실가공품들이 집집의 식탁에 날마다 오르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생각하시었다.그분께서 민중들에게 더 많은 과실과 그 가공품들을 안겨주시려고 각별히 마음쓰시는 것은 지난날 그들이 너무도 못먹고 살아왔기 때문일지 모른다. 실제로 일제통치시기까지만 하여도 조선사람들은 너무도 못먹고 살아왔다. 그때에도 향기로운 과일은 열렸다. 그러나 그것은 왜놈들이나 부자집 창고로 모조리 들어갔다. 어린 소년이 조선에 와있는 미국선교사가 경영하는 과수원을 지나다가 떨어진 사과 하나를 주어먹었다고 하여 선교사놈이 청강수로 소년의 이마에 ≪도적≫이라고 새긴 그 저주받을 역사가 그대로 우리 민중이 겪은 참상이었다. 그러했기에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나라를 광복한 이 땅위에 백과주렁진 과일동산을 꾸려주시었으며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이날에는 민중들에게 더 많은 과실과 그 가공품을 안겨주기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진열된 과실가공품들을 다 보아주신 그분께서는 걸음을 옮기시며 생산현장으로 가시었다. 과실가공품의 생산공정을 일일이 돌아보시던 그분께서는 통조림살균작업장앞에서 걸음을 멈추시었다. 그분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과일병조림은 높은 온도에서 짧은 시간내에 쪄내야 과일의 독특한 맛을 보존할 수 있다고, 그래야 그 질도 높일 수 있다고 하시면서 새로운 살균방법을 가르쳐 주시었다. 사실 이 공장에서는 살균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아 병조림의 질이 그닥 높지 못하였다. 이런 고충을 한순간에 포착하시고 해결방책을 가르쳐 주시니 일군들은 감격을 금치 못해 했다. 그분께서는 조온실을 거쳐 건과작업반에 이르시어 노안에서 쉬임없이 돌아가는 사과살들을 주의깊게 살펴보시다가 발을 타고 떨어지는 건과 하나를 집어 꺾어보시면서 수분상태를 알아보시었다. 12%라는 일군의 대답을 들으신 그분께서는 건과기옆에 따로 진열해 놓은 사과가루주머니를 가리키시며 이것이 수령님께서 교시하신 것이 아닌가고 하시면서 비닐주머니 하나를 들어보시고 못내 만족하신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시었다. 수령님께서는 어린이들에게 먹일 건과를 많이 만들라고 교시하시었습니다. 과일가루를 더 많이 생산하여 어린이들에게 먹여야 합니다. 나라의 왕인 귀여운 꽃봉오리들에게 갖가지 과실가공품을 더 많이 먹이시려는 그분의 숭고한 사랑을 받아안은 일군들은 한없이 숭고한 감정에 휩싸여 더 많은 과실가루를 만들어 전국의 탁아소와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보내줄 굳은 결의를 말씀올렸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그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하루빨리 생산공정을 자동화, 반자동화하여 공장을 현대화하며 특히 과실가공공장인 것만큼 더 잘 꾸려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었다. 이윽고 생산공정전반을 돌아보신 그분께서는 그제서야 휴게실에 들리시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또다시 휴게실에 진열되어 있는 제품의 견본품들을 하나하나 보아주시면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견본품처럼 좋은 과일가공품을 많이 생산하여야 합니다. 단묵, 과포와 같은 과일가공품들을 많이 생산하여 상점들에 내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공장을 떠나기에 앞서 과포의 맛까지 보아주시면서 일군들에게 견본품의 수준을 떨구지 말라고, 질좋은 여러가지 과실가공품들을 더 많이 생산하라고 신신당부하시고 공장을 전국의 본보기공장으로 꾸리라고 말씀하시었다. 영도자님의 이날의 현지지도는 나라의 식료가공공업을 전반적으로 발전시켜 여러가지 가공품들을 더 많이, 더 좋게 생산하여 공급하게 하는데서 큰 의의를 가지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여러가지 질높은 식료품들을 더 많이 생산하도록 하시는 것과 함께 어떻게 하면 생산된 가공제품들이 여성들의 부엌에 미쳐 부엌일을 헐하게 만들겠는가 하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그분께서는 봉사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시고 공급사업에서 변혁이 일어나도록 하시었다. 결과 주식물공급체계가 더 잘 세워지고 주문봉사가 활발해져서 여성들의 부엌일이 한결 쉬워지게 되었다. 여기에 이런 일화가 있다. 언젠가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이른새벽 평양시안을 돌아보신적이 있었다. 그때 그분께서는 중구역 중성동 밥공장에서 종을 울리며 주민세대들에 국을 팔러 나온 한 여인을 만나시게 되었다. 국을 팝니까? 예. 값은 어떻게 받습니까? 그가 뉘신줄 알 리가 없는 여인은 그저 범상하게 대답했다. 한남비에 1원씩 받습니다. 국거리는 어디서 보장받습니까? 고기는 도매소에서 받고 남새와 조미료는 우리 자체로 해결합니다. 정말 좋은 일을 하십니다. 그래 잘 팔립니까? 때마침 국을 사러 왔던 한 할머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중성밥공장에서 당의 뜻을 받들고 이렇게 맛있는 고깃국을 아침저녁으로 찾아다니며 팔아주니 부부가 다 직장에 다니는 세대는 물론이고 모든 집들에서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는 너나없이 다 ≪복방울아주머니≫라고 부르고 따른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소행을 못내 대견해 하시며 밥공장아주머니들이 인민을 위해서 참 좋은 일을 한다고, 좋은 일을 할 바에는 국 한가지만 팔지 말고 김치랑 자반이란 나물무치개 같은 여러가지 부식물들을 만들어 갖고 나와서 팔아주면 사람들이 무척 좋아할 것이라고 이르시었다. 점원은 아직 그런 생각까지 못했다고 하면서 꼭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 올렸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밝은 미소를 지으시며 그렇게 해주면 주민들이 정말 고맙게 여길 것이라고, 밥공장아주머니들이 이렇게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아침저녁으로 울리는 종소리가 오늘은 하나지만 내일은 열, 모레는 백, 천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귀중한 말씀을 주시었다. 이날 그분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일군들에게 이른 새벽에 목격하시었던 그 종소리에 대하여 이야기하시고 나서 이 새 싹을 온 나라에 일반화하여 도처에 아침저녁매대, 이동봉사매대를 내올데 대한 지시를 주시었다. 그리하여 이르는 곳마다에 아침저녁매대, 이동봉사매대들이 수많이 생겨나 여성들의 부식물가공부담을 덜어주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 . . 그리고 찌는 듯한 삼복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머나먼 함흥목재가공공장까지 찾아주시고는 가구의 질을 최상의 수준에로 끌어올리며 한 세대에 가구를 50~60점씩 놓도록 가구의 품종도 늘여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시었다. 그리고 며칠후에는 견본품전시회장에 나가 친히 강사가 되시어 전시회참가자들에게 150여종에 달하는 견본품들을 하나하나 설명도 해주시었으며 전시회참가자들을 거느리시고 낙원거리 시범주택에 가시어서는 부엌세간을 최상의 수준에서 생산보장할 데 대한 과업을 주시었다. 그분의 극진한 노고 속에 낙원거리는 드디어 훌륭하게 완공을 보게 되었다. 매 세대에 훌륭한 현대식 부엌세간들이 그뽥히 갖추어진 살림집들이었다. . . . 드디어 낙원거리 새집들이를 하는 날이 왔다. 온 거리가 들끓었다. 영도자님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만면에 환한 미소를 한가득 담으시고 또다시 나가시었다. 18층짜리 고층건물의 2층 5호실을 찾아주신 그분께서는 부엌부터 먼저 들리시었다. 부엌에는 냉동기, 전기밥가마, 세탁기 등 훌륭한 부엌세간들이 그뽥히 갖추어져 있었고 수도꼭지로는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부엌은 참으로 잘 꾸려져 있었다. 그분께서는 인차 자리를 뜨지 못하시었다. 이제는 부엌이 여성들에게 힘겨운 부담을 강요하는 고역의 장이 더는 아니었다. 음식물의 변질을 우려할 것도 없었고 밥짓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도 없었다. 빨래질에 손끝이 닳아질 일도 없었고 물 때문에 고생할 일도 전혀 없게 되었다. 이윽고 그분께서는 찬장으로 눈길을 돌리시어 찬장을 좀 높게 만들어 자주 쓰는 그릇은 아래에 넣고 자주 쓰지 않는 그릇은 꼭대기에 넣었다가 손님이 올 때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찬장을 한 뼘정도 높여주라고 이르시었다. 그러시고는 냉동기와 세탁기도 만져보시면서 쓰기에 불편하거나 부족한 것은 없겠는가를 일일이 헤아려 보시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시고서야 다시 살림방에 들어가시더니 가볍게 침대에 걸터앉으시어 살림집이 이만하면 국제적 수준입니다라고 하시며 더없이 만족해 하시었다. . . .

복받은 어머니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여성들을 가정일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시키는데서 어린이보육부담에서의 여성해방을 중요한 문제로 보시고 이 사업에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었다. . . . 영도자님께서 1972년 5월 북방의 도시 혜산시를 현지지도하고 계실 때의 일이다. 그분께서는 압록강기슭의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자그마한 혜산탁아소를 찾아주시었다. 탁아소에 이르신 그분께서는 양지바른 곳에 아담하게 꾸려진 탁아소며 마당에 정결하게 꾸려놓은 어린이놀이터를 한동안 정겹게 바라보시었다. 이윽고 탁아소안에 들어서신 그분께서는 창가로 비쳐드는 햇살을 맞으시며 걸음을 옮기시다가 무춤 걸음을 멈추시었다. 그러시고는 두팔을 벌리시어 복도의 폭을 가늠해 보시더니 보육원에게 물으시었다. 국가표준수치보다 좁지 않습니까. 예, 탁아소를 지을 때 국가표준설계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글쎄, 어쩐지 좀 좁아보인다 했습니다. 품이 더 들더라도 어린이들의 마음이 확 트이도록 복도를 좀 넓게 해주었으면 좋았을걸 그랬습니다. 그러시고는 국가표준설계대로 쓰기 편리하게 탁아소구조를 개조해 주어야 하겠다고 이르시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어린이방앞에 이르신 그분께서는 보육원에게 한방에 어린이들이 몇명씩이나 들어 있으며 좁지는 않은가고 일일이 알아보시다가 왜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가고 물으시었다. 위생문화사업때문에 며칠째 아이들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보육원의 말을 들으신 그분께서는 적이 놀라신 기색으로 아이들을 받지 않으면 직장에 출근하는 아이어머니들이 얼마나 불편해 하겠는가고 하시면서 탁아소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린이들을 맡아 키워주는 곳이므로 탁아소를 빨리 꾸리고 내일부터라도 운영하라고 일깨워주시었다. 방안에 들어서신 그분께서는 천정에 매달아놓은 놀잇감 비행기를 보시고 나무비행기가 너무 투박하다고, 다시 만들어주라고 하시면서 문제는 재간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에 대한 관점문제라고, 수령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어린이들을 공산주의 미래의 훌륭한 역군으로 키우겠다는 입장과 관점이 바로 서있다면 놀잇감을 하나 만들어도 그들의 지적 발전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시며 우리 나라 속담에 세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어린이들에게 놀잇감을 아무렇게나 만들어주면 그들이 자라서 무엇을 만들어도 그런 식으로 만들게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보육원들은 말과 행동에서 언제나 어린이들의 거울이 되어야 하며 보육교양을 위한 직관물을 하나 만들어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심리세계와 지적 발전에 도움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그러시고는 어린이들의 건강관리와 위생관리에 세심한 관심을 돌려 그들을 문화적으로, 과학적으로 길러야 한다고 하시면서 수령님께서는 일찍이 보육원의 사업은 남의 집 아이보개일이 아니라 우리 혁명위업의 계승자들을 길러내는 영예로운 혁명사업이라고 말씀하시었다, 보육원들은 그 높은 영예와 긍지를 안고 보육교양사업을 책임적으로 함으로써 우리의 귀여운 어린이들을 공산주의 건설의 후비대로 훌륭히 키워내야 한다고 일러주시었다. 이날 그분께서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지금 큰 공장, 기업소들과 협동농장들에는 국가에서 크고작은 현대적인 탁아소, 유치원들을 건설해 주었기 때문에 아이어머니들이 불편을 모르지만 자그만한 공장의 아이어머니들은 자기 직장들에 탁아소가 따로 없으므로 거리가 먼 탁아소나 유치원에 아이들을 맡긴다고 하시면서 도시와 노동자구의 곳곳에 혜장탁아소와 같은 자그마한 탁아소를 새로 꾸려 어머니들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이리하여 얼마후에는 아이어머니들이 몇명 안되는 곳곳에 수많은 탁아소, 유치원들이 새로 꾸려지게 되었다. . . .

 

4. 민중에게 보다 문명한 생활

 

산간지대의 마지막 한집까지

조선노동당 제5차대회는 온 나라의 텔레비전화를 실현할 데 대한 방침을 내놓았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전국의 텔레비전화를 추진하는데서 그의 현대화에 큰 힘을 넣으시었다. . . . 원래 이북에서의 텔레비전방송에 대해 말한다면 그 창설과 발전과정이 다 영도자님의 노고와 관련되어 있다. 첫 방영을 마련하신 분도 그분이시고 녹화방송체계를 도입하도록 이끄신 분도 영도자님이시었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이북의 민중생활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친근한 벗으로 되고 그들의 문화정서생활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이에 만족을 모르시고 어떻게 하면 민중들에게 보다 더 밝고 훌륭한 텔레비전화면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고 늘 마음쓰시면서 텔레비전방송의 현대화를 더욱 촉진할 위대한 구상을 무르익혀오시었던 것이다. 1972년 8월 22일 영도자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와 텔레비전방송부문 일군들에게 흑백색텔레비전으로부터 천연색텔레비전방송을 도입할 데 대한 포괄적인 전망에 대해 밝혀주시었다. . . . 영도자님께서는 삼라만상이 다 잠든 깊은 밤에도 천연색텔레비전방송의 실현을 위해 최신공학도 연구하셨고 비교실험도 해보시었다. 그러시고는 연구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텔레비전기술자들을 찾아가셔서는 그들에게 귀중한 조언을 주시었고 조선사람들의 정서와 자연지리적 조건에 가장 알맞는 팔(PAL)체계를 도입하도록 그의 물질기술적 토대축성대책도 취해주시었다. 그분께서는 천연색텔레비전의 실현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끼지 않으시었다. 한번은 일군들이 방송설비를 현대화하기 위해 큰 마음을 먹고 막대한 자금액수를 명세에 적어 경애하는 영도자님께 올리었다. 그들은 거액의 금액지출을 예견한 명세표를 올리고는 지나친 욕심을 부린 것 같아 후회막심했다. 그런데 그후 그들이 되돌려받은 그 문서에는 놀랍게도 두배나 되는 막대한 자금액이 기입되어 있었다. 영도자님께서 손수 고쳐주신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텔레비전방송설비를 현대화하는데서 어느 한 부분이나 한두대의 설비가 아니라 천연색텔레비전방송은 물론 녹화방송에 필요한 모든 최신설비들을 일식으로 갖추도록 하시자는 것이었다. 그분의 불면불휴의 노고와 심혈이 자양소로, 활력소로 되어 마침내 1974년 봄에 조선중앙텔레비전방송은 첫 천연색전파를 날려 자기 발전의 새 장을 기록하였다. 이것은 이북의 텔레비전방송이 세계적 수준에로 비약하는 사변인 동시에 이북민중의 문화정서생활이 더욱 개화만발하는 획기적인 계기로 되었다.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는 모든 지역 주민들이 천연색텔레비전방송을 다 시청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 . . 그분께서는 텔레비전방송실의 한 일군과 함께 정적이 깃든 밤거리를 헤가르며 평양교외에 있는 삼석으로 나가시었다. 텔레비전수신시험을 해보려고밤중에 먼 길을 달리시는 것이었다. 한 산간지대에 이르러 시험작업에 착수했는데 계절이 계절인 것만큼 시험작업이 매우 어려웠다. 밤날씨가 찬데다가 녹지 않은 눈이 여기저기에 쌓여 있고 바위마다 얼음이 깔려있어 여간 미끄럽지 않았다. 동행한 일군은 그분의 신상이 염려되어 산에 올라가서 하는 수신시험은 자기가 하겠으니 승용차안에 계셔달라고 거듭 말씀드렸지만 그분께서는 그때마다 괜찮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앞장에 서서 산으로 오르시었다. 어느 한 산중턱에 이르신 그분께서는 뒤따라온 일군에게 텔레비전방송실에 전화를 걸어 전파를 날리고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하시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공무선전화기를 꺼내든 일군은 외치듯 말했다. 여기는 삼석이다. 지금 전파를 날리는가. 전파를 계속 날려라. 알았다. 전파를 계속 날리겠다. 그러나 텔레비전전파가 잡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러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분께서는 가파로운 벼랑길을 톺아오르기도 하시고 바가지밑처럼 깊은 골안에서 수신시험을 하기 위하여 골짜기아래로 내려가기도 하시며 많은 신고를 하시었다. 그러나 전파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마지막 수신시험도 성공 못하자 그분께서는 이날의 수신시험을 단념하시고 일군에게 앞에 있는 높은 산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었다. 안테나를 아무리 돌려도 산이 막혀 전파가 잡히지 않으면 산에 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다음에 시험을 다시 해보아야 합니다. 돌아가서 야외안테나를 준비해 놓고 송신기상태도 다시 검토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산이 막힌 곳에서 사는 민중들도 한날한시에 텔레비전화면을 볼 수 있게 하시려고 찬바람부는 산중턱에서 한밤을 고스란히 새우신 그분의 온몸에는 하얗게 성에가 내붙었다. 바로 텔레비전방송을 개시할 때 이러신 분이시기에 천연색 텔레비전화면을 나라의 모든 민중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주기 위하여 또다시 마음 쓰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영도자님께서는 텔레비전 중계소와 중계탑 건설을 전당적, 전민중적 운동으로 힘있게 밀고나가시었다. . . . 그러던 어느날 중계탑건설을 맡아보는 일군들 속에서 한가지 심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양강도와 자강도 같은 북부내륙지방에 주민세대가 불과 한두집밖에 안되는 깊은 오지가 더러 있는데 이런 곳까지 많은 자금과 자재를 들여 중계탑을 세우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견에 그분께서는 산간지대 인민들의 문화생활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양강도와 자강도를 비롯한 산간지대 인민들에게 텔레비전중계시설을 잘 갖추어 주어야 한다, 한대의 텔레비전을 위해서 기계공 두명이 아니라 열명이 근무하는 텔레비전중계탑을 세워도 좋으니 산간지대의 마지막 한집까지 다 밝고 아름다운 화면을 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었다. 이에 따라 깊은 산골에 있는 한두집을 위해서까지 텔레비전중계탑을 세우자니 공사는 더욱더 어려웠다. 한줌의 시멘트, 한삽의 모래, 한초롱의 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등짐으로 지어 날라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사를 중단없이 내밀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중계탑건설장 상공에 헬기가 나타났다. 건설자재를 운반하라고 그분께서 보내주신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10년 가까이나 걸린다던 초단파중계소 건설은 불과 2년 남짓한 기간에 완공되어 조업을 개시했다. . . .

공해 ≪0≫

. . . 1965년 여름 어느날이었다. 이날 그분께서는 확장되는 청수화학공장 건설장을 돌아보시면서 일군들이 당면한 카바이드직장확장공사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공장굴뚝이 밤낮으로 토해내는 시꺼먼 연기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보시었다. 현지지도를 마치고 돌아오신 그분께서는 일군들을 몹시 나무라시며 어쩌면 그럴 수 있는가, 우리야 인민의 운명을 전적으로 책임진 공산주의자들이 아닌가, 자본가놈들이야 돈벌이만 잘되면 그만이겠지만 우리는 대기오염정도가 설사 0.001%라고 해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우리는 인민들에게 공해 ≪0≫을 안겨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 . . 이날 그분께서는 일군들에게 공해현상이 사람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다음 그를 막기 위한 4가지 원칙을 밝혀주시었다. 그것은 첫째로, 공해방지를 철저히 생산에 선행시키는 원칙이며, 둘째로, 공업을 온 나라에 조화롭게 배치하고 공장지구와 주민지역을 엄격히 갈라놓는 원칙이며, 셋째로, 공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설비와 기대마다에 공해방지시설을 갖추고 강토를 끊임없이 녹화하는 원칙이며, 넷째로, 공해방지와 관련된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나라의 실정에 맞는 정화시설을 연구완성하고 온 나라에 정연한 공해감시체계를 세우는 원칙이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제시하신 이상의 4가지 원칙은 이북을 영원히 공해를 모르는 나라로, 산좋고 물맑고 공기 신선한 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사업에서 지켜야 할 지도적 지침이었다. 그분께서는 이 원칙을 철저히 구현해 나가시었다. 1966년 5월, 황해제철소에서 새로 건설된 6호용광로 조업식을 거행하려던 날이었다. 이날 그분께서는 조업식을 축하해 주시려고 그곳으로 가시었다. 그분께서 6호용광로에 이르시자 출선구에서는 주홍빛 쇳물이 사품치며 흘러내이기 시작했다. 그분께서는 만족하신 표정으로 용해공들의 작업모습을 대견스럽게 지켜보시다가 그들의 머리위에 먼지가 떠도는 것을 발견하시었다. 기쁨이 듬뿍 어리었던 그분의 얼굴에 그늘이 비끼었다. 그분께서는 한 일군에게 6호용광로에 가스제진장치를 하였는가고 물으시었다. 아직 제진장치를 완성하지 못하였다는 대답을 들으신 그분께서는 가스제진장치공사를 빨리 다그쳐 먼지를 말끔히 잡아야 하겠습니다, 가스제진장치를 하면 가스도 청정하여 쓰고 먼지도 나지 않아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분의 말씀에 일군은 쇳돌과 무연탄을 다루는 작업장이므로 아무래도 먼지가 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였던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께 그 일군은 앞으로 노를 보수할 때 제진장치를 완성하여 설치하겠다고 말씀을 드리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단호한 음성으로 모든 것을 제쳐놓고라도 그것부터 빨리 해야 하겠다고 이르시었다. 쇳물보다 사람을 더 귀중히 여기시는 불보다 뜨거운 말씀이었다. 그리하여 6호용광로는 공해방지시설이 갖추어지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로 조업을 중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타협없는 엄격성은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는 70년대에 들어와 더욱 철저히 구현되었다. 70년대에 이북에서는 도처에서 현대적인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서 숲을 이루게 되었다. . . . 1973년 7월 어느날이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한 일군이 가져온 공장설계도면을 주의깊게 살펴보시었다. 그것은 대동강기슭에 새로 일떠세울 필름현상소 설계도면이었다. 설계를 다 검토하고 나신 그분께서는 일군에게 필름현상소에서 나오는 퇴수를 어떻게 처리하겠는가고 물으시었다. 많은 화학시약을 쓰는 필름현상소에서 나오는 퇴수에 들어 있은 독성물질이 대동강물을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물으신 것이었다. 일군이 여과장치로 대동강물 오염을 방지해 보겠다고 말씀드리자 그분께서는 그래도 마음놓이지 않으시는듯 필름현상소는 대동강기슭에 자리잡게 되는 것만큼 여과장치를 철저히 하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시었다. 필름현상소 건설이 완공되어 조업식을 하는 날 이 현상소를 찾으신 그분께서는 물정화장치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시었다. 한 일군이 아직 정화장치가 완성되지 못했지만 필름을 현상하는 일이 급하기 때문에 조업을 한 다음에 마저 완성하겠다고 말씀드리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적이 놀라시며 아니, 여과장치도 완성하지 않고 조업을 한단 말인가, 안된다, 퇴수처리를 완성하기전에는 절대로 조업을 할 수 없다, 그 퇴수에는 유해물질이 섞여 있는데 그것이 대동강에 흘러들면 어떻게 되겠는가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대동강을 이윽토록 굽어보시다가 일군들에게 단호한 어조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빨리 여과장치를 완성하여 퇴수를 완전히 정화하여 대동강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그리하여 대동강의 맑은 물에 고기떼가 욱실거리게 하고 수도시민들이 사소한 공해도 입지 않게 해야 한다고 부언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돌아오시는 길에 승용차안에서 또다시 심려어린 음성으로 필름현상소에서 나오는 퇴수를 말끔히 정제하여 맑고 깨끗한 물을 대동강에 흘러보내야 한다고, 그리하여 현상소의 퇴수가 흘러나오는 강가에서도 낚시꾼들이 대동강의 이름난 숭어며 잉어, 붕어며 날치 같은 것도 잡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이것이 당의 구상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결국 필름현상소 조업은 퇴수정화장치가 완성되어 실험검사표에 공해 ≪0≫이라는 숫자가 표시된 다음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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