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28일

통일여명 편집국

 

 

문예혁명의 나날에

 - 은혜로운 사랑의 태양 4

통일여명 편집국 6-1-28

 

차 례

 

1. 변혁의 포석

나는 동지들을 믿고 동지들은 나를 믿고... / 창작가들의 은사

동지애가 넘치는 대오로

2. 지새우신 창작의 밤

몸소 써주신 작품의 주제가 / 무대에서 맞으신 새벽

성공의 기쁨도 함께 나누시며

3. 믿음속에 자라난 인재들

새 싹을 꽃피워주신 사랑 / 단역배우를 주역배우로

당원으로 키워주신 손길

4. 속도전의 선구자로

사랑과 충성의 40일 / 나는 동무들을 굳게 믿기 때문에 큰일을 맡깁니다

5. 민중을 위한 문학예술로

인민들에게 합격된 셈입니다 / 대중을 문학예술의 창조자로

6. 극진히 아끼시는 마음

압록강을 건너간 특별기 / 동무는 일어나야 하오 / 밤사냥에 깃든 마음

 

1. 변혁의 포석

 

나는 동지들을 믿고 동지들은 나를 믿고...

1964년 가을 어느날이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몇몇 책임일군들은 당중앙위원회에로 갔다. 그들의 손에는 두툼한 편지뭉치가 들려져 있었다. 그들은 해당 부서의 책임일군앞에 그것을 내놓으면서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영화예술사업을 지도해 주실 것을 청원하는 창작가, 연예인들의 편지라고 했다. 작가, 연예인들이 영도자님께 편지를 올리게 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분께서는 이미 종합대학시절에 문학예술부문에 많이 참여하시면서 창견을 주시었던 것이다. 영화예술부문에만 해도 1961년에는 예술영화 ≪공장은 나의 대학≫, ≪갈매기호 청년들≫, 1962년에는 ≪새봄≫, 1963년에는 다부작 ≪대지의 아들≫ 등 수많은 영화들을 봐주시고 중요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특히 예술영화 ≪정방공≫은 창작포치로부터 종자와 형상방도에 이르기까지 그분께서 다 지도해 주시었던 것이다. 문학예술사업에 대한 이런 지도과정을 통해 그분께서 지니신 천부의 예술적 재능에 탄복하게 된 작가, 연예인들은 오늘에 이르러 김정일영도자님의 지도를 받는 문제는 나라의 영화예술은 물론 문학예술 전반의 장래 운명과 관련되는 중대사라고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절절한 소원을 담은 편지를 써서 조직에 제출했던 것이다. . . . 일군들과 약속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 보고를 올리시었다. 그 자리에서 수령님께서는 인자하신 음성으로 문학예술사업이 힘은 들지만 보람있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그분께 의향을 물으시었다. 그분께서는 영화창작사업을 요해하는 과정에 이 부문에 많은 주의가 돌려져야 하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자신께서는 아직 나이도 젊고 모든 것이 생소한 것만큼 다른 부문 사업이면 몰라도 이 부문 사업만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리셨다. 너무도 겸허한 말씀이었다. 그분께서는 수령님과 대중 앞에서 늘 자신을 그렇게 낮추시었던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나신 수령님께서는 그럼, 어렵지… 어렵구말구…라고 긍정하시면서 털어놓고 말해서 자신께서는 문학예술사업때문에 늘 마음을 쓰고 있다고, 이 부문 사업만 추켜세워놓으면 한시름 놓겠다고, 당적 견지에서 보아도 그렇고 작가, 예술인들의 요구도 절절한데 한번 이 부문 사업을 담당해 보는 것이 어떤가고 재삼 의향을 물어보시었다. 어버이수령님의 당부의 말씀도 절절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자세를 바로하시며 충효일심을 담아 수령님께서 바라신다면 제 힘껏 해보겠습니다. 문학예술부문을 꼭 추켜세워 수령님의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정중히 말씀올리시었다. . . . 그후 며칠이 지난 어느날 그분께서는 문화예술부문 일군들을 몸가까이 부르시었다. 발랄한 얼굴마다에 기쁨이 한껏 내배인 그들을 보시자 매우 반가워하시면서 자리를 권하신 그분께서는 지금 우리 당 사상사업에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고 하시면서 이 사업을 빨리 한계단 높이자면 무엇보다 대중교양의 힘있는 수단인 영화예술부터 추켜세워야 한다, 영화는 대중 속에 당의 노선과 정책을 해설선전하고 그 관철에로 그들을 분발시키는 위력한 수단이다, 이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영화예술사업을 튼튼히 틀어쥐고 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절절하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동지들을 믿고 동지들은 나를 믿고 지혜와 힘을 합친다면 반드시 수령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수령님의 심려를 덜어드리고 수령님께 기쁨과 만족을 드리는 것보다 더 크고 보람있는 일이 어데 있겠습니까. 종합예술인 영화예술부터 변혁하여 어버이수령님께 기쁨과 만족을 드리고 여기서 생의 보람을 찾자는 뜻의 말씀이었다. 일군들은 그 고결한 뜻을 가슴깊이 새기고 문학예술의 찬란한 개화발전을 위해 쇄신분투할 의지를 가다듬었다. 문학예술부문을 맡으신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그 변혁을 위한 원대한 구상을 세우시고 처음부터 그 구현을 위한 사업을 통이 크게 밀고 나가시었다. 우선 그분께서는 영화예술부문을 혁신하는데 역점을 두시고 그에 지도력을 집중하시었다. 그것을 위해 이북의 영화계와 세계영화계의 실태를 요해하고나신 그분께서는 밖으로부터 유입되는 여러가지 어지러운 탁류의 오염을 막고 주체영화예술의 급속한 발전을 위해서는 어버이수령님의 지도를 받는 것이 절박하다고 보시고 수령님께서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현지지도해 주실 것을 요청드리시었다. . . . 1964년 12월 8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들과 지도간부들을 거느리시고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먼저 촬영소구내를 돌아보시고 현지에서 역사적인 당중앙위원회 이동정치위원회를 소집하시었다. . . . 이날 회의에서 수령님께서는 혁명교양, 계급교양에 이바지할 혁명적 영화를 더 많이 만들자라는 뜻깊은 연설을 하시었다. 수령님께서는 연설에서 먼저 지난 기간 영화예술부문에서 이루어놓은 성과에 대해 언급하시고 우리의 영화예술인들은 혁명적 예술인이라는 고상한 칭호를 받을만합니다라고 높이 치하하시었다. 연이어 수령님께서는 민중에 대한 혁명교양, 계급교양을 강화하는데서 영화가 노는 역할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시고 현실발전의 요구와 조성된 정세에 맞게 영화창조사업에서 일대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상세한 과제를 제시해 주시었다. 회의에 참가한 작가, 연예인들은 자기들을 그토록 아끼시며 당의 참된 문예전사로 키워주시려는 어버이수령님의 하늘같이 큰사랑을 가슴깊이 새기고 수령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영화창조사업에서 혁신을 일으키리라 굳게 마음다지었다. . . . 이렇게 그분께서는 영화예술부문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는 한차례의 전기를 마련하시었다. . . .

창작가들의 은사

창작가, 연예인들에게 문학예술의 새로운 원리들과 독창적인 이론들을 하나하나 전수시키시던 1968년 봄 어느날이었다.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만든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의 작업필름을 봐주시고나서 창작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형상과정에서 종자를 놓치면 작품의 생명도 없어지게 됩니다. 형상의 전과정에 종자를 틀어쥐고 나가야 한다는 것은 생활의 씨앗을 놓치지 말라는 요구이며 사상적 핵을 잊지 말라는 요구입니다. 창작가들은 생활에서 일단 종자를 골라잡으면 그것을 틀어쥐고 형상을 한곬으로 깊이 파고들어가야 하며 잡다한 생활소재에 사로잡혀 종자를 놓쳐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창작가들은 비로소 작품의 종자란 생활의 씨앗, 사상적 핵이라는 것과 작품형상과정에 그 종자를 일관하게 틀어쥐고 나가야 창작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분의 종자론은 동서고금의 어느 문예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이론이다. . . . 예술에서 형식과 규모는 작품의 사상적 내용에 의해 규정되며 따라서 형식보다도 내용이 대작으로 되어야 사람들에게 깊은 인식을 줄 수 있고 그들의 혁명적 세계관 형성에 적극 이바지할 수 있다고 그분께서는 이르시었다. 그분의 이 가르치심은 대작에 대한 창작가들의 구태의연한 견해를 단번에 바로잡아주시었다. 결국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도 그분의 세심한 지도에 의해 대작으로 완성되어 혁명교양의 교과서적인 영화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 . . 영도자님께서는 1972년 3월 25일 예술영화 ≪보통강반에 깃든 이야기≫ 작업필름을 봐주시었다. 작업필름을 다 보고나신 그분께서는 창작가들에게 영화가 생활을 깊이있게 파고들지 못하고 ≪홍길동식≫으로 비약이 너무 심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영화에서 작은 것이란 생활을 진실하게 그리고 인간관계를 잘 맺어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고 평범한 생활이 마지막에 가서는 큰 은을 내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활을 찾고 인간관계를 깊이있게 그릴 대신 큰 것만 붙잡고 파노라마식으로 하려 하고 있습니다. … 문학이란 인간학입니다. 산 인간들을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그리는 것이 곧 문학입니다. . . . 창작가들은 장막시극 ≪보통강의 서사시≫의 내용을 영화로 펼친다고 하면서 문학의 본성적 요구를 무시하고 생활을 날림식으로 또 비약의 연속으로 조립해 놓았던 자기들의 실책을 즉석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종자론과 혁명적 대작 그리고 인간학에 관한 이론외에도 작품창작에서의 속도전에 관한 이론, 주체적인 창조체계와 창작지도체계, 혁명가극과 혁명연극 이론을 비롯하여 주체의 문학예술에 관한 심오하고도 독창적인 이론들로 창작가, 연예인들을 튼튼히 무장시키시었다. 그 나날에 창작가, 연예인들은 급속히 성장했다. 이처럼 문학예술의 담당 주체가 키높이 자라난 것은 이북에서 문학예술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동지애가 넘치는 대오로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작가, 연예인들 속에 남아있는 낡은 사회의 사상잔재들과 생활유제들을 일소하는 사업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 . . 어느날 영화연예인들의 무대공연총화회의가 있은 뒤였다. 한 오랜 배우가 회의에서 다른 배우를 비판한데 대해 한 신인배우가 자기의 공정한 의견을 제기했다. 그런데 문제로 된 것은 오랜 배우가 동지적 입장에서 성실하게 상호비판을 하지 못하고 사실과 맞지 않게 과장해서 비판한데 있었다. 이에 대해 회의가 끝난 다음 신인배우가 그에게 좋은 말로 그렇게 비판하면 되겠는가고 하여 결국 둘사이의 관계가 나빠지게 된 것이었다. 총화회의 진행과정을 요해하시던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이 사실을 들으시고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것을 스쳐버려서는 아니되겠다고 생각하시었다. 거기에는 낡은 도제관계가 냉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 . . 그분께서는 즉시에 총화모임을 소집하시었다. 회의에서 그분께서는 먼저 연예인들의 생활에서 나타난 몇가지 편향에 대해 지적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예술영화촬영소의 전반사업을 개선하는데서 우선 도제관계의 낡은 틀을 깨버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여느 때는 우리가 오랜 배우들을 존중했지만 오늘은 좀 털어놓고 할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삽시에 회의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분께서는 어린 배우에게 오랜 배우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한 사실들을 그대로 말해 보라고 이르시었다. 아무래도 수술을 해야 할 병집인데 어서 터쳐놓으라고 고무해 주시었다. 어린 배우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그분의 고무에 힘을 얻고 가슴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죄다 털어놓으며 여러 선생님들과 언니들이 나어린 배우들을 너무 업신여긴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계시던 그분께서는 가만, 그 ≪선생님≫, ≪언니≫란 말부터 없애야 하겠소, 동무라는 훌륭한 말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런 고리타분한 말을 쓰겠소, 동무라고 하시오라고 시정시켜 주시었다. 이에 더욱 힘을 얻은 어린 배우는 자기는 대학에 다니다가 큰 포부를 안고 촬영소에 왔는데 선배배우들이 궂은 일 마른 일 다 시켜 허리를 펼 겨를도 책볼 사이도 기량훈련을 할 짬도 없다고 말했다. 다른 신인배우들도 자기들의 속마음을 터놓았다. 어린 배우들의 말을 다 듣고나신 그분께서는 신인배우들에게 중요한 과업을 주겠다고 하시면서 우선 ≪선생님≫, ≪언니≫라는 말을 쓰지 말고 다시는 그런 시중을 들지 말며 오랜 배우들의 결함을 묵여두지 말고 제때에 비판하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만약 힘이 모자라면 자신에게 서슴없이 지원을 청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있는 힘껏 도와주겠다고 확언하시었다. 나는 신인들을 앞날의 영화예술의 기둥으로 믿고 있습니다. 당의 신임이 큰 것만큼 그 신임에 정치적 자각과 기술로써 충성으로 보답하여야 합니다. 영도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터무니없이 말꼬리를 잡고 동지를 헐뜯으려고 한 그 배우를 엄하게 비판하시고 노배우들의 낡은 사상관점 특히 가부장적인 도제관계를 준절히 비판하시었다. 그분의 공명정대한 비판과 가르치심에 노배우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깊이 자성하면서 정치사상면에서나 윤리도덕면에서 자기 수양에 힘쓸 것을 마음 다지었다. 또 신인배우들은 그들대로 오랜 배우들을 존경하고 그들에게서 허심하게 배우면서도 할 말은 하고 나쁜 것은 따르지 않으며 대바르고 원칙성있게 사는 것이 현대 청년들의 올바른 자세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 . . 1969년 5월 어느날 평양대극장에서 영화연예인들의 무대공연이 있었다. 공연을 앞두고 분장실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두 여배우가 목소리를 높여 언쟁을 벌이었던 것이다. 공연에 암영을 던지는 일이었다. 그런 일로 공연을 중단할 수 없었다. 일군들은 그들을 겨우 얼려서 무대로 내보냈다. 두 여배우의 연기가 매우 우려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연한 걱정이었다. 그들은 언제 싸웠던가 싶게 서로 웃으며 멋지게 연기를 진행했다. 공연이 끝난 뒤 총화시간에 그들의 얼굴에는 또다시 냉기가 풍기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책임일군들은 총화를 마치고 이 문제를 따로 토의하고 있었는데 이때 영도자님께서 방으로 들어서시었다. 일군들의 인사를 받고 나신 그분께서는 무거운 방안의 분위기를 일별하시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고 물으시었다. 한 일군이 일어서서 벌어진 일의 진상을 그대로 말씀드리자 그분께서는 촬영소안에서만 그러는 줄 알았더니 여기에 나와서까지 그러느냐고 혼잣말처럼 뇌이시었다. 하도 죄송스러워 한 일군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대책을 세우겠다고 말씀드리자 그분께서는 아닙니다. 그놈의 드살이 그렇게 쉽게는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동무들은 그것이 한갓 말다툼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배우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고질화된 드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자기만이 똑 제일이라고 자처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소총명분자들, 완고한 개인영웅주의 분자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한손을 쳐드시고 손가락을 꼽아가시며 ≪심술드살≫, ≪입심드살≫ 등에 대해 열거하시다가 어이없으신듯 크게 웃으시었다. 모두 따라 웃었다. 이윽고 그분께서는 사실 이 드살이판이 영화계를 좀먹고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말다툼을 한 두 여배우를 부르시고 한 여배우에게 물으시었다. 동무는 최근 어떤 영화에 출연하였습니까? 여배우는 혁명전통주제영화의 주인공역을 맡아 출연했다고 대답을 올리었다. 그 주인공은 아주 훌륭한 혁명가였습니다. 그래, 그 배역이 동무의 마음에 들었습니까? 그는 네하고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그분의 물으심에 여배우는 어지간히 당황해졌다. 주인공이기 때문이었습니까? 그분께서 이렇게 물으시자 그는 정통을 찔리운듯 그만 얼굴을 붉히었다. 영화에서 혁명가가 되었으면 실지 생활도 혁명가답게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께서 또 이렇게 물으시자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올리었다. . . . 아무래도 할 말은 해야 하겠습니다. 내막은 어쨌건 동지들 사이에 다툼질한 그 자체를 나는 타매합니다. 시비를 가릴 필요조차 없습니다. 두사람 다 옳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또 다른 여배우에게 물으시었다. 동무는 싸워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여배우는 눈물을 삼키며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전 그저 지지 않겠다는… 지면 약이 올라 밥도 먹고프지 않고… 일도… 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 이겼습니까? 배우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말해보시오. 그는 얼굴을 싸쥐고 이기지도 지지도 않고 창피만 당했다고 하면서 더 크게 흐느꼈다. 그분께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드살의 후과란 말입니다. 드살을 부리다간 종당엔 수치와 모멸밖에 당할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허무맹랑한 짓입니까? 수치를 느껴야 합니다. 수치를… 두 여배우의 눈에서는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허망한 짓을 한 자신들을 비로소 통절히 자책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그분께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사이에도 그렇고 동지상호간에도 그렇고 개인감정을 앞세우면 문제가 풀리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불화와 불신임, 나아가서 집단의 사상의지적 단합에 저애를 주는 엄중한 결과밖에 가져올 것이 없다, 결국 개인감정이란 자기만이 똑 제일이라는 소총명, 개인영웅주의에 바탕을 둔 사상감정으로서 예술인들사이에 알력과 이간, 불화를 조성하게 하는 근본화근이다, 이 화근이 예술인들 속에 고질화되어 있는 드살이다, 동무들은 오늘 자기들의 수양정도가 얼마나 저조한가를 스스로 드러내놓았다고 엄하게 지적하시었다. . . . 그러시면서 영도자님께서는 예술인들의 교양대책에 대해 가르쳐 주시었다. 동무들! 당이 왜 예술창조과정을 혁명화, 노동계급화 과정으로 되게 하라는 방침을 제시하였는지 압니까? 그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드살꾼들을 없애자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시고는 배우들이 새로운 영화창조사업에 진입할 때마다 그들로 하여금 영화의 주인공들의 정신세계부터 심장으로 체득하도록 사상사업을 본때있게 들이댄다면 그 어떤 드살도, 왕드살도 머리를 쳐들지 못할 것이라고 이르시었다. 그때로부터 드살은 연예인들의 대오안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 .

 

2. 지새우신 창작의 밤

 

몸소 써주신 작품의 주제가

문학예술혁명에 대한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의 정력적인 지도는 창작가, 연예인들의 사상을 개변하고 실무적 자질을 높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문학예술혁명의 첫날부터 늘 창작가, 연예인들 속에 계시면서 예술창조사업을 구체적으로 지도하시는 한편 그 대오의 일원이 되시어 창작실천의 수범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기도 하시었다. 이것은 뛰어난 예술의 거장이시고 영도의 대가이신 그분 특유의 지도방식이었다. 그분께서 지난 전쟁의 불길 속에서 조선노동당원으로 자라난 한 나어린 간호원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한 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창조사업을 지도하시던 때에 있은 일이다. 그때 창작가들은 영도자님의 말씀에 따라 그 가극의 특성에 맞게 모든 노래의 가사가 시적 서정을 담은 명가사로 되게 하며 특히 주제가의 가사를 명가사로 창작하기 위해 있는 힘과 지혜를 다 동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줄의 가사에 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의 주제사상을 감동깊게 담는다는 것은 조련치 않은 일이었다. 창작가들은 모대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창조집단의 고충을 헤아리신 그분께서는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창조사업에 대한 지도를 뒤로 미루시고 가극창조현장에 나오시었다. 그분께서는 창작가들과 무릎을 마주하시고 그동안 써놓은 수백편의 가사를 주의깊이 읽으시며 주제가로 될만한 것을 고르고 또 고르셨지만 신통한 것이 없었다. 거의나 다 개념화되었거나 상징화된 것들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자정이 넘었다. 창작가들은 그분의 건강을 염려하여 이젠 그만하실 것을 말씀드리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오히려 동무들을 쉬우지 못하고 늘 밤을 지새우게 하여 가슴에 걸린다고 하시면서 가극을 훌륭하게 만들어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린 다음 푹 쉬자고 격려하시었다. 원고를 하나하나 보고 또 보시던 그분께서 원고무지 속에서 주제가로 쓴 한편의 가사를 골라내시었다. 창작가들에게 그것을 보이시면서 그분께서는 동무들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이 가사가 마음에 듭니까라고 물으시었다. 한 일군이 지금까지 나온 주제가들 가운데서는 그중 나은 것 같다고 말씀올리자 그중 나은 것 같다…?!라고 되뇌이시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말씀이 없으시었다. 이윽고 그분께서는 언제 어데서나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며 흠모하는 주인공의 아름답고 순결한 사상감정을 절절하게 담아내지 못한 것이 가사의 부족점이라고 하시면서 그것은 창작가들이 가극의 원형인 안영애 영웅의 숭고한 정신적 특질을 체험하지 못한데 기인된다고 이르시었다. 그러시고는 오늘은 이만하자고 하시면서 자리에서 일어서시는 것이었다. 창조현장을 떠나신 그분께서는 쌀쌀한 바람에 가로수가 설레이는 늦가을의 깊은 밤길을 승용차로 달리시었다. 깊은 생각에 잠기신 그분께서는 저 멀리 밤하늘에 빛나는 북두칠성을 바라보시었다. 뭇별들 속에 유난히 빛나는 북두칠성은 잊지 못할 추억을 불러냈다. . . . 북두칠성이 불러온 잊지 못할 추억을 안고 집무실로 돌아오신 그분께서는 그날밤 가사의 글줄을 고르시었다. 그분의 집무실은 밤새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그분께서는 창작단의 한 일군을 부르시었다. 그 일군이 집무실에 들어서자 그분께서는 언제나와 같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어젯밤 주제가의 가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다가 몇자 적어넣었는데 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창작가들이 보고 참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시며 책상위에 놓여있던 종이 한장을 주시는 것이었다. 종이를 받아든 일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기에는 그분께서 활달한 필체로 쓰신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이라는 주제가의 가사가 적혀있었다. ≪북두칠성 저 멀리 별은 밝은데 / 아버지장군님은 어데 계실까 / 창문가에 불밝은 최고사령부 / 장군님 계신 곳은 그 어데일까 // 적후천리 밀림 속 밤은 깊은데 / 우리의 장군님은 어데 계실까 / 가을바람 찬바람 불어올수록 / 따사로운 그 품이 그립습니다≫ 가사를 단숨에 읽고난 그 일군은 심원한 시세계에 심취되어 넋을 잃었다. 정녕 웅건한 필치의 심원한 시구였다. 시련에 찬 후퇴의 나날 그리운 장군님을 경모하는 주인공의 고결한 감정세계가 생활적으로 진실하게 안겨오고 전략적 후퇴시기 장군님의 품을 찾아 북으로 향하는 인민군대와 민중의 일체화된 대오, 그속에 굳건히 서있는 주인공의 장한 모습이 눈앞에 선히 안겨왔다. . . . 그분께서는 작품의 주제가뿐 아니라 ≪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네≫를 비롯한 가극에 나오는 많은 노래들의 가사를 친히 고쳐주기도 하시고 ≪어디에 갔는가 태백산병동≫을 비롯한 작중인물들의 노래를 불러보시면서 모든 노래들이 명곡이 될 수 있도록 정력적으로 지도해 주기도 하시었다. 그분의 예지로운 손길아래 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은 사상예술성이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른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 . .

무대에서 맞으신 새벽

. . . 불후의 고전적 명작 ≪피바다≫를 혁명가극으로 옮기는 사업이 바야흐로 마지막 고비에 들어서고 있던 1971년 7월 11일이었다. . . . 창조집단이 무대형상을 다듬는 작업을 긴장하게 하고 있을 때 그분께서 또다시 창조현장에 나오시었다. 무대위에서 환호하는 예술인들에게 답례를 보내시면서 객석에 앉으신 그분께서는 연습을 계속하라고 이르시었다. 곧 무대에서는 연습이 계속되었다. 여러 장면들이 펼쳐지다가 일제군경놈들의 토벌이 진행될 때 나어린 원남이와 갑순이가 ≪토벌가≫를 불렀다. 웬일인지 목소리가 심히 갈리고 호흡도 짧아 듣기가 딱할 지경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모든 것을 헤아리신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아이들이구만. 잠을 자다가 나온 것 같습니다. 하기야 지금쯤 아이들이 한창 잠잘 때인데 무대연습에서 어른들 못지 않게 열성을 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기특합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어린이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그분의 어버이심정이 어린 말씀이었다. 그때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가극의 마지막 장면까지 다 봐주시고나서 구체적인 형상세부에서 나타나는 결함들까지 지적해 주시고 그 시정대안들을 일일이 가르쳐 주시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새벽 3시가 되었다. 한 책임일군이 그분의 건강을 염려하여 좀 쉬셔야겠다고 말씀드리자 그분께서는 나는 일없습니다. 작품을 완성하자면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는 밤도 깊었는데 오늘은 배우들을 다 집에 보내어 휴식하도록 하고 내일아침부터 연습을 다그쳐야 합니다. 배우들을 다 집에 보내고 우리끼리 가극에 넣을 노래들을 들어봅시다라고 하시며 휴게실로 걸음을 옮기시었다. 오히려 배우들을 생각하실 뿐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밖에 계시었다. 휴게실에서 한창 가극의 노래에 대해 그분의 가르치심을 받을 때였다. 대기실에서 전화벨소리가 울리었다. 한 일군이 가서 송수화기를 들자 나어린 교환수의 근심어린 목소리가 울리었다. 혁명가극 ≪피바다≫의 무대연습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아직 저녁식사도 못하셨다고 합니다. … 그 일군은 전화를 받는 순간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느냐고 자책하며 말끝을 변변히 맺지 못하고 말았다. 그분에게 다가간 일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내용을 알려드리자 그분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혁명을 하느라면 끼니를 번질 때도 있고 밤잠을 못잘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시며 수령님의 불후의 고전적 명작 ≪피바다≫를 가극으로 옮기는 영광스러운 일을 하는데 한두끼를 건는들 뭐라는가, 어서 가극을 완성할 형상방도나 마저 토론하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창작가들은 솟구쳐 오르는 격정을 금치 못했다. 그후에도 가극에 대한 그분의 지도는 계속되었다. 배우들의 구체적인 무대인상과 어린 배우의 노래형상에 대해 말씀해 주기도 하시었고 자막공간과 관현악연주의 부족점을 지적해 주기도 하시었다. 어느덧 새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영도자님께서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시었다. 드디어 벽시계가 6시를 알리었다. 그제서야 그분께서는 창밖을 내다보시면서 아 날이 밝는군! 벌써 아침이오. 동무들과 함께 일하니 힘든 줄 모르겠소라고 하시며 창문을 활짝 열어제끼시었다. 유난히 맑은 수도의 동녘하늘에 아침노을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그 아침노을을 바라보시며 먼 훗날에는 이런 아침도 역사의 한페지를 빛내일거요라고 하시며 일군들을 둘러보시었다. 창조의 밤을 지새운 일군들을 격려하시는 뜻깊은 말씀이었다. 문학예술혁명을 향도하시는 나날 그분께서는 이렇게 창작현장과 무대들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하시었다. 1969년 12월 어느날에는 예술영화 ≪피바다≫의 주인공역의 연기형상을 완성시켜 주시기 위해 날이 새도록 지도하시었고 1972년 10월 9일에는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를 명작으로 완성시켜 주기 위해 밤을 지새우시면서 배우들의 연기형상수준을 높이는 문제로부터 편곡, 무대미술, 조명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지도해 주시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혁명가극 ≪피바다≫에 나오는 모든 노래를 이렇게 선택하여 주옥같이 다듬어주시었다. 제4장의 광산마을장면에서는 30여곡중에서 처음에는 열곡, 다음에는 여섯곡, 네곡, 나중에는 한곡을 선택해 주시었고 제3장에서는 여섯차에 걸쳐 100여곡을 들어주시고 명곡들을 골라주시었다. 어떤 날에는 밤을 지새우시며 수많은 노래를 들으시고 한곡도 고르지 못하신채 돌아가기도 하시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한편의 노래를 거듭 수십번씩 들으시면서 명곡을 찾아주기도 하시고 부족점을 고쳐 명곡이 되도록 가르쳐 주기도 하시었다. 진흙 속에서 옥을 고르시듯 혁명가극 ≪피바다≫에 들어갈 노래 47편을 위해 2,400여편의 곡을 들으시고 명곡으로 다듬어주신 그분의 깊은 사색과 끝없는 정력, 숭고한 노고만으로도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넉넉한 것이었다. 인류문예사에는 음악의 대가로 불리우는 예술가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분께서처럼 짧은 기간에 그토록 많은 노래를 듣고 분석해 주시며 명곡으로 완성시켜 주신 문학예술의 영재는 일찍이 없었다. 그분의 빛나는 예지와 정력적인 지도에 의해 불후의 고전적 명작을 각색한 예술영화를 비롯한 혁명가극 ≪피바다≫, ≪꽃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 ≪한 자위단원의 운명≫, ≪당의 참된 딸≫, ≪금강산의 노래≫가 불과 수년어간에 창조되어 세상을 뒤흔들어놓았다. 이것은 20세기 주체의 문예부흥을 알리는 장엄한 포성이었다.

성공의 기쁨도 함께 나누시며

. . . 1969년 5월 하순의 어느날이었다. 그분께서는 예술영화촬영소의 한 배우를 당중앙위원회로 급히 부르시었다. 그 배우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황급히 그분께서 계시는 집무실로 달려갔다. 그가 방으로 들어서자 그분께서는 언제나와 같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축하할 일이 생겨서 불렀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수령님께서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를 높이 평가하시면서 인민상을 수여할 데 대한 배려를 돌려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수령님께서는 동무를 직접 지명하시며 인민배우칭호를 수여하라고 교시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배우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어서 어떻게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몰라 그냥 서있기만 했다. 이때 그는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 겨우 30대 초입에 들어선 자기가 별로 한 일도 없는데다가 그간 몇편의 예술영화창조에서 주인공역을 담당하고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도 모두 영도자님의 세심한 지도와 노고의 결과였지 자기가 재간이 있어서 이루어놓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그 성과를 죄다 자기에게 돌려주시면서 노동당시대, 김일성시대에 교육받은 신인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인민배우칭호를 받는다고 못내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이튿날 평양대극장에서 인민상수상식과 명예칭호 수여식이 있었는데 행사가 끝난 뒤였다. 그는 감격에 겨워 한동안 그 자리에 못박힌듯 앉아있었다. 그때에 한 일군이 찾아와 표창장을 가지고 1층 어느 한 방으로 가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는 곧 그 방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그를 기다리시며 방안을 거닐고 계시었던 것이다. 배우를 보신 그분께서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표창장을 어디 좀 보자고 하시었다. 인사도 미처 올리지 못한 그가 표창장을 드리자 그것을 한참동안 유심히 보고 나신 그분께서는 거참 대단하구만. …축하하오. 축하해!라고 하시며 못내 기쁨을 금치 못해하시었다. 그 배우가 감격의 눈물로 옷섶을 적시며 목숨이 지는 순간까지 오직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충성다하겠습니다라고 결의의 말씀을 올리자 그분께서는 대견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시며 꼭 수령님의 신임에 보답하리라고 믿는다고 고무해 주시었다. 슬픔은 나눌수록 가벼워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는 법이다. 영도자님께서는 창작가, 연예인들과 함께 성공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라면 먼길을 마다하지 않으시었다. 1970년 5월 하순의 어느날이었다. 남포방향으로 한대의 승용차가 전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창작가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시려고 그분께서 한 집필장소로 가시는 길이었다. 깊은 밤중에 쾌속으로 달리는 승용차가 웬일인지 느리고 더딘 것만 같아 그분께서는 운전사에게 좀더 빨리 몰 수 없겠는가고 거듭 말씀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예술영화 ≪안해의 일터≫를 보시고 높이 평가해 주신 소식을 한시라도 더 빨리 알려주고 싶으신 심정에서였다. 집필장소에 차가 도착한 것은 새벽녘이었다. 집필에 몰두하던 창작가들은 모두 잠들어 방안의 불빛은 다 꺼져있었다. 오직 창작지도일군들의 방에서만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분께서는 창작가들을 깨울가봐 경적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시고 창작지도일군들의 방으로 곧장 올라가시었다. 고요와 정적이 깃든 깊은 밤에 그분께서 갑자기 나타나시자 일군들은 너무도 뜻밖이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 그분께서는 일군들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격정에 넘쳐 말씀하시었다. 수령님께서 예술영화 ≪안해의 일터≫를 보시고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하시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안해의 일터≫는 낙천적인 생활과 웃음이 있는 명랑한 영화라고 하시면서 이런 영화를 많이 만들라고 교시하시었습니다. 이렇게 수령님의 교시를 전달해 주신 그분께서는 기쁨에 넘친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었다. 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안해의 일터≫를 보시면서 여러번 웃으시었습니다. 수령님께서 영화를 보시면서 즐겁게 웃으신 일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나는 오늘의 기쁨을 작가, 연출가, 심의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하여 새벽길을 달려왔습니다. 작가, 연출가, 심의원들을 비롯하여 모든 창작성원들은 수령님께서 예술영화 ≪안해의 일터≫를 보시고 하신 교시를 깊이 연구하고 좋은 작품들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일군들은 비로소 그분께서 심야에 먼 길을 오신 사연을 알고 감격에 목이 메어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 영화로 말하면 그분께서 친히 종자를 잡아주시고 꽃피는 사회주의 현실을 잘 형상하도록 세심한 지도를 주신 작품이었다.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그 모든 공로를 창작가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시며 수령님께 기쁨을 드린 그 영광과 행복을 함께 나누시려고 밤길을 달려오신 것이었다. . . .

 

3. 믿음속에 자라난 인재들

 

새 싹을 꽃피워주신 사랑

불후의 고전적 명작 ≪꽃파는 처녀≫를 각색한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의 배역을 선정하던 1971년 7월 27일이었다. 연출가를 비롯한 관록있는 배우들은 경애하는 영도자님께 주인공 꽃분이역을 이름있는 명배우에게 맡겨주셨으면 하는 의향을 말씀올리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친필하신 고전적 명작인 것만큼 주인공역을 맡아할 배우를 잘 골라야 한다고 하시면서 영화에 한번도 출연하지 않은 어린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면 더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하고 있던 한 나어린 처녀를 꽃분이역으로 선정해 주시는 것이었다. 연출가들과 창작지도일군들은 적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어린 배우로 말하면 양강도 두메산골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예술영화촬영소 배우양성반에 갓 들어온 열여섯살의 애어린 처녀였다. 그는 영화가 무엇인지도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영도자님의 관찰력과 고견의 정확성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 어린 처녀가 과연 명작의 주인공역을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속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이런 생각을 헤아리신 그분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며 대담하게 결심하고 한번 새 배우를 키워낸다는 입장에서 훈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그후 그분께서는 꽃분이역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도록 친히 어린 배우를 따뜻이 이끌어주시었다. 어느날 창작단 의도발표회가 진행될 때였다. 그때 신인배우는 주인공 꽃분이가 장거리에서 꽃을 판 다음 자기의 기막힌 운명을 하소할 곳 없어 점괘를 보는 장면을 연기하게 되었다. 무대에 나가기전에 그는 웬일인지 자기가 신어야 할 짚신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며칠전에 짚신을 거꾸로 신고 무대에 나갔다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창피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날도 그의 연기는 신통하지 못했다. 의도발표회가 끝나자 영도자님께서는 배우들의 발에 맞게 짚신을 잘 삼아 신기라고 하시면서 꽃분이역을 맡은 배우에게 짚신 신는 방법도 배워주고 지난날 조선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도 잘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꽃분이의 형상을 잘할 수 있다고 이르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신인배우에게 오랜 배우를 붙여 경험도 듣게 하고 농촌에 내보내어 농민들의 비참했던 과거생활을 듣게도 하시었다. . . . 그분께서는 신인배우의 고충을 헤아리시고 의도발표회와 촬영장면, 작업필름을 봐주실 때마다 그의 걸음걸이로부터 옷차림, 노래형상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따뜻이 지도해 주시었다. . . . 이렇게 그분께서는 첫걸음마를 떼는 아기의 발걸음을 돌봐주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주인공의 복잡한 역형상을 지도하시면서 어린 신인배우의 연기를 완성시켜 주시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오가자의 가극무대에서 혁명의 꽃씨앗을 뿌리던 꽃분이가 영화화면에 다시 나타나 많은 사람들에게 계급적 각성을 촉구하는 오늘의 꽃분이로 재현될 수 있었으며 나어린 신진배우인 그도 역시 어엿한 영화배우로 자라나게 되었다. . . . 1972년 9월 23일이었다. 이름없는 한 신인가극배우를 부르신 그분께서는 그에게 노래를 여러번 부르게 하시고 경력을 물으시었다. 그는 극장에 오기전에 공장에서 선반공을 했다고 말씀드렸다. 선반공? 음, 선반공을 하던 동무구만. 우리는 이런 동무들을 잘 키워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이날 그에게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역을 맡겨주시었다. 그후 그분께서는 그의 노래연습과 주인공의 역형상수준을 자주 보살펴주시면서 그의 음악적 기초를 다져주기 위해 유능한 공훈배우를 강사로 붙여주기도 하시었다. 그리고 자신께서도 직접 극장에 나와 노래형상에서 현대가극의 양상을 살리고 주인공의 역형상을 소박하고 진실하게 하며 노래를 가사의 내용에 맞게 유순하고 곱게 부르도록 일일이 가르쳐 주시었다. 그의 몸이 좀 약한 것을 헤아리시고 건강관리대책까지 세워주신 그분께서는 사업이 분망하여 현장에 나오지 못하는 날에는 전화로 배우의 훈련정형을 요해하시고 마음도 얼굴도 곱고 인정도 많은 꽃분이의 모습과 내면세계에 맞게 표정을 부드럽고 차지 않게 하며 노래형상에서 감정조직을 잘하게 하라고 일러주기도 하시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위에도 꽃이 핀다는 말그대로 영도자님의 고심어린 지도밑에 신인배우의 연기와 노래형상에서는 발전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것을 두고 그분께서는 누구보다도 기뻐하시었다. 어느날 시연회를 보아주신 그분께서는 배우가 노래도 잘 부르고 연기도 관중들의 동정을 받을만하게 소박하게 잘했다고 높이 치하해 주시었다. 그후 1972년 11월 30일이었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를 공연하였는데 전반부에는 다른 배우가 출연하고 후반부에는 그 신인배우가 출연했다. 공연이 끝나자 관람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올랐다. 몸소 무대에 오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인배우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면서 선반공이었단 말이지, 선반공이 꽃분이가 되었단 말이지, 장해, 장하단 말이야라고 하시며 못내 대견해 하시었다. . . .

단역배우를 주역배우로

. . . 1970년 봄의 어느날이었다. 머리에 흰서리가 내이기 시작하도록 배우생활을 해오면서도 연기수준을 높이지 못해 단역밖에 맡아하지 못하던 한 영화배우가 ≪아름다운 거리≫라는 예술영화의 주인공역을 맡게 되었다. 당시로 말하면 영화제작에서 일대 앙양을 일으킬데 대한 영도자님의 통이 큰 구상에 따라 단번에 10여개의 창작단이 무어져 일제히 창작사업에 진입한 때였다. 창작과제가 워낙 방대하다보니 이미 명배우로 정평이 나있는 사람들만으로 그 과제를 수행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어느 창작단이 남 먼저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모두 마음을 쓰고 있는 때에 배우생활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는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제딴에는 한번 본때있게 해볼 심산으로 영화문학에 형상된 주인공의 역형상을 몸에 익히느라 남몰래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창작단의 일부 일군들은 단역으로 출연하면서도 연기형상이 신통지 못해 애를 먹곤 하던 그 배우를 가지고는 영화를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주인공역을 다른 배우로 바꿀 것을 위에 제기했다. 그분께서는 그 제기를 받아들일 수 없으시었다. 자기도 언제인가는 명배우로 되어 창작적 지혜를 마음껏 꽃펴가리라는 큰 포부를 안고 배우생활을 수십년 해온 그가 인생의 황혼기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도록 주역 한번 맡아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제껴놓는다면 과연 그의 전도는 어찌 되겠는가, 이제 모처럼 안겨준 믿음까지 그에게서 빼앗는다면 그가 무엇을 바라고 생활하겠는가, 그분께서는 지금 그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시었다. 믿음은 충성을 낳는 법이다. 믿음을 안은 사람은 반드시 그에 보답하기 위해 지혜와 열정을 남김없이 발양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를 굳게 믿고 계시었다. 비록 연기기량이 약하지만 그는 기어이 자기가 맡은 주역을 수행할 것이라고 확신하셨다. 그분께서는 배역을 바꿀 것을 제기해 온 일군들에게 영화의 주인공으로 분장한 배우의 시험화면을 보았는데 괜찮더라고 하시면서 대담하게 믿고 한번 맡겨보라고, 신심을 가지고 잘하라고 일러주면 해낼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 . .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는 그에게 믿음을 베풀어주시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으시었다. 연기도 하나의 기술인 것만큼 기량이 약한 그가 맡은 배역을 원만하게 수행하자면 세심한 지도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다망한 현지지도의 길에서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예술영화 ≪아름다운 거리≫ 현지촬영장들을 찾아주시면서 그 배우의 연기형상을 여러 모로 이끌어 주시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의 크나큰 믿음과 뜨거운 보살피심에 의해 예술영화 ≪아름다운 거리≫의 주인공역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해낸 그 배우는 예술영화 ≪노동가정≫, ≪언제나 한마음≫, ≪그날의 맹세≫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들에 주역으로 출연하여 성공의 개가를 올렸다. 드디어 온 나라가 다 아는 명배우로, 민중의 사랑을 받는 공훈배우로 된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혁명적 예술인의 영예를 빛내이게 되었다. . . .

당원으로 키워주신 손길

. . . 그분께서 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 창조사업을 지도하실 때였다. 가극창조현장에 나오신 그분께서는 지도일군들과 담소하시다가 가극의 주인공 연옥이는 어버이수령님께 충직한 조선노동당원인데 그 역을 맡은 배우가 당원이 되지 않고서는 주인공을 잘 형상할 수 없다, 창조과정에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를 당원으로 키워야 하겠다고 사려깊이 이르시었다. 그후 그분께서는 친히 그의 조직사상생활에 깊이 관심하시면서 당원의 고상한 정신도덕적 풍모를 갖추도록 여러 모로 따뜻이 보살펴 주시었다. 1971년 11월 10일 저녁이었다. 한대의 승용차가 네온등의 불빛이 황홀하게 명멸하는 평양의 밤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승용차안에서는 그분의 말씀이 간단없이 이어졌다. 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의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분께서는 가극의 주인공역을 하자니 힘들 것이다, 그러나 수령님의 위대한 혁명사상을 꽃피워나가는 일은 참으로 보람차고 영예로운 일이다, 우리는 이 가극을 하루빨리 잘 만들어 수령님께 기쁨을 드려야 한다, 그러자면 동무에게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었다. 수령님께서는 당에 헐하게 들려고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반드시 혁명적 실천투쟁 속에서 단련된 다음에 입당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었습니다. 동무는 지금 혁명적 실천 속에서 검열받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한 의지로 그 난관을 이겨내야 당원 안영애처럼 불굴의 의지를 가진 혁명가로, 당원으로 될 수 있습니다. 혁명적 의지는 조선노동당원의 고귀한 품성입니다. 달리는 차창밖으로는 밤하늘을 비치는 건설장의 불꽃들이 장엄하게 안겨왔다. 그분께서는 그 불보라를 바라보시며 우리 노동계급은 이 밤에도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창조의 불꽃을 날리고 있다, 강철의 의지를 가진 우리 노동계급은 그 어떤 난관도, 시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동무도 노동계급의 의지를 가지고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시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당원으로 되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고 수령님에 대한 충성심을 안고 어떻게 자기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데 대해 일깨워주시었다. 그제서야 배우는 밤이 지새는줄도 모르고 창조의 불꽃을 날리는 밤거리를 보여주시는 영도자님의 의도를 알고 그분의 말씀대로 노동자계급의 강철의 의지를 가지고 당원 안영애처럼 자신을 준비해 나가리라는 결심을 굳게 다지었다. 그후 그는 훈련중에 뜻하지 않게 발목을 상하게 되었는데 일어서기조차 힘든 그때에도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창조현장에 나갔다. 어느날 가극창조사업을 현장에서 지도하시던 그분께서는 그가 일어났다고 못내 기뻐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배우에게 …가극의 주인공이 되기전에 안영애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시면서 당원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 숭고한 풍모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 자상히 말씀해 주시었다. 당원의 자질을 갖추게 된 그는 마침내 조선노동당원의 영예를 지니기에 이르렀다. 영도자님께서는 주인공역을 담당한 배우뿐 아니라 다른 신인배우들도 정성들여 꽃을 가꾸는 원예사처럼 그들을 잘 키워 당원으로 내세워주시었다. 한 신인배우의 입당과정이 그러했다. 그분께서는 그 배우를 당원으로 키우기 위해 많은 노고를 바치시었다. . . .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는 그후에도 신인배우의 입당준비를 각별히 보살펴주시었다. 그해 12월 중순 어느날에는 신인배우를 또다시 불러 예술영화 ≪금강산 처녀≫에 출연하여 높은 연기성과를 거둔데 대해 치하하시고 그동안 사업과 생활에서 나타난 우점과 결함들을 하나하나 지적해 주시었다. 그분의 세심하고 따뜻한 보살피심 속에서 그도 정치사상적으로 준비되고 맡은 임무에 성실한 배우로 자라나 드디어 조선노동당의 한 성원으로 되었다.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 이끄시는 문학예술혁명과정은 명작, 명곡들이 많이 창작되는 과정인 동시에 우수한 당원들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과정이었다. 불후의 고전적 명작 ≪피바다≫를 혁명가극으로 옮길 때에는 99명,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예술영화로 옮길 때에는 28명의 연예인들이 한날한시에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들 가운데는 50대의 창작가들도 있었고 30대의 애기어머니 배우들도 있었으며 가정주위환경이 복잡한 사람들도 있었다. . . . 창작가, 연예인들 속에서 조선노동당원의 수가 늘어날수록 주체예술의 무대는 더욱 밝아지고 화려해져갔다.

 

4. 속도전의 선구자로

 

사랑과 충성의 40일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이끄시는 문학예술혁명은 속도전의 시대를 열어놓은 혁명이기도 했다. 김일성주석님께서 지펴올리시어 사회주의건설의 총노선으로 된 천리마운동의 정신과 기상을 빛나게 구현하고 있는 속도전은 대중의 힘과 지혜를 최대로 발양시켜 모든 일을 불이 번쩍나게 가장 빨리 끝내면서도 질을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주의건설의 기본전투형식이다. 속도전은 영도자님의 정력적인 영도밑에 불후의 고전적 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단되었다. 1970년 2월 초 어느날이었다. 그분께서는 한 연출가(영화감독)를 집무실로 부르시어 불후의 고전적 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예술영화로 옮기는 사업을 불이 번쩍나게 해제껴 영화예술분야에서부터 속도전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게 해보라고 말씀하시었다. . . . 이런 야외촬영시에 제일 애로되고 그래서 무엇보다 긴요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열차이용과 숙식조건 문제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김정일영도자님이시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철도부에 과업을 주어 침실과 식당, 분장실과 작업필름을 볼 수 있는 영사실, 창작실무 토론을 할 수 있는 사무실과 촬영기재며 소도구들을 보관할 방까지 일식으로 꾸려진 촬영용 특수열차를 만들어내게 하시었다. . . . 이튿날 아침이었다. 연출가와 주역배우들이 공항으로 나가니 그분께서 벌써 나와 2월의 맵짠 바람에 옷자락을 날리며 서계시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환한 미소를 보내시며 자신께서도 함께 다녀오겠다고 말씀하시었다. 모두 놀라며 날씨도 사나운데 그만두시라고 말씀올리자 그분께서는 이 추운 날에 예술인들을 보내놓고 우리만 뜨뜻한 방에 앉아있어서야 되겠는가, 나왔던김에 속시원히 촬영현지에까지 가보고와야 마음놓겠다고 하시면서 먼저 비행기에 오르시었다. 뜨거운 사랑과 한없는 격정을 싣고 헬기는 바람세찬 하늘로 날아올랐다. 혜산에 도착하신 그분께서는 그길로 시내의 여러 촬영장소들을 돌아보시면서 촬영준비사업을 지도해 주시고 예술인들과 점심식사까지 나누시고서야 귀로에 오르시었다. 그후 그분께서는 매일 전화로 촬영현지의 실태와 집을 떠난 연예인들의 가정형편을 보고받으시면서 그들의 사업과 생활을 뜨겁게 보살펴 주곤 하시었다. . . . 내리는 사랑에는 오르는 충성이 있는 법이다.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백두고원의 혹한은 사나웠지만 연예인들은 그분의 뜨거운 어버이사랑에 심장이 불같이 달아올랐다. 촬영가들은 얼어드는 촬영기를 가슴에 품어 녹이고 운전사들은 발전차가 얼세라 솜옷을 벗어 덮어주며 밤에도 발동을 끄지 않았다. 배우들은 너덜너덜한 홑옷차림의 분장의상으로 언 발을 눈위에 끌며 하루에도 몇차례씩 촬영기 앞에 나서곤 했다. 한없는 은정에 고무된 연예인들의 기세는 백두의 혹한도 지동치는 눈보라도 이겨내게 했다. 연예인들은 촬영에 필요한 귀틀집처마의 고드름을 보다 생동하게 형상하기 위해 촬영소에서 만들어가지고 간 ≪고드름≫을 쓰지 않고 밤새껏 물을 한방울 한방울 떨구어 진짜 고드름을 만들었으며 언땅에 우물을 만들기 위해 강에서 얼음을 까다가 펴놓은 다음 그위에 나무로 우물방틀을 해놓고 기온이 제일 떨어지는 한밤중에 바가지로 물을 끼얹어 얼음이 엉켜붙은 ≪우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해발 2천미터가 넘는 소백산지구에서 촬영할 때에는 모자와 얼굴에 성에가 하얗게 끼는 것도 아랑곳 않고 목소리를 합쳐 혁명가요를 부르며 뛰어다녔다. 분장사며 장치사, 행정원들도 벌목공옷을 걸치고 촬영기 앞에 나섰으며 배우들도 자기 화면을 찍지 않을 때에는 취사당번이 되고 의상관리원이 되어 함께 뛰었다. 오후 5시가 되어 해가 서산에 기울고 빛이 모자라 더 촬영할 수 없게 되면 허리를 치는 생눈을 헤치고 햇빛을 따라 산마루로 톺아오르면서 촬영을 계속하여 하루 촬영과제를 세배, 네배로 해제꼈다. 그리하여 단 40일사이에 장편예술영화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혁명적 대작으로 완성하는 전례없는 기적이 창조되었다. . . .

나는 동무들을 굳게 믿기 때문에 큰일을 맡깁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영화예술에서 창조된 속도전의 고귀한 모범을 지체없이 가극예술부문에 일반화해 나가시었다. 1971년 여름에 불후의 고전적 명작 ≪피바다≫를 각색한 혁명가극 ≪피바다≫를 창조하여 피바다식 가극의 새 시대를 열어 놓으신 그분께서는 연이어 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 ≪밀림아 이야기하라≫, ≪꽃파는 처녀≫, ≪금강산의 노래≫를 기념비적 걸작으로 창조할 대담한 구상을 펼치시었다.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분께서는 새로운 가극창조집단인 평양예술극단을 조직하시었다. 그런데 거기에 망라된 성원들은 가극과는 인연이 없는 다른 예술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이므로 가극에는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일군들은 과연 그런 사람들을 가지고 혁명가극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심심한 우려를 표시했다. 평양예술극단 연예인들도 가극집단의 성원으로 된 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면서도 자기들이 혁명가극을 창조한다는데 대해 신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분께서는 평양예술극단의 책임일군들을 몸가까이 부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동무들, 생각해 보시오. 지금 예술인들의 대부분이 당의 품 속에서 우리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새 세대들이 아닙니까. 또 그들은 주체예술을 꽃피워보겠다고 무대에 나서서 당을 따라오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문제는 동무들이 군중과의 사업을 어떻게 하는가, 다시 말하여 사람들을 어떻게 믿고 사랑하며 이끌어주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시고는 정치사업을 잘해서 연예인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그들을 다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 주체예술을 떠메고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우선 피바다가극단에서 이미 창작하여 지금 공연중에 있는 혁명가극 ≪피바다≫를 무대에 올릴데 대한 과업을 주시었다. 여기에는 어려운 창작과제를 받고 자신심을 못가지고 동요하는 연예인들에게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며 그들의 예술적 기량도 키워주자는 뜨거운 믿음과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첫걸음을 떼어주시는 사랑의 조치였다. 자기들을 혁명가극 ≪피바다≫공연무대에 불러주시었다는 소식에 접한 연예인들의 기세는 하늘에 닿을 듯했다. 그들은 낮에 밤을 이어가면서 연습장과 무대에서 불꽃튀는 창작활동을 벌이었다. 인간의 자각적 열의와 창조적 적극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을 낳는 법이다. 뜨거운 사랑과 믿음에 고무된 연예인들의 심장마다에서는 무비의 힘과 열정이 용솟음쳤고 지혜와 기량이 꽃피어났으며 마침내 창조의 빛나는 열매가 주렁지게 되었다. 배우라 부르기에는 아직 이른 학교를 갓 졸업한 나어린 가수, 오랜 배우생활을 해오면서도 아직 주연무대 한번 타보지 못한 연주가, 이곳 저곳에서 모여와 안면조차 미처 익히지 못한 연예인들이 한마음한뜻으로 달라붙어 한달도 못되는 사이에 혁명가극 ≪피바다≫를 훌륭히 재현해 냈다. . . . 공연을 주의깊게 보아주신 그분께서는 짧은 사이에 몰라보게 성장한 그들의 모습에 만족을 금치 못해하시면서 분에 넘치게 치하해 주시고 나서 이번에는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를 창조할 데 대한 무거운 과업을 맡겨주시었다. . . . 온 창작집단이 무거운 마음을 안은채 고심어린 나날을 보내고 있던 1972년 4월 18일이었다. 그들의 고충을 헤아리신 영도자님께서 오신다는 기별도 없이 문득 극장을 찾으시었다. 창작적 성과를 안고 그분을 맞이했다면 얼마나 기뻤으랴만 크나큰 신임과 기대에 보답하지 못한 자책감에 휩싸여 있는 연예인들의 얼굴은 수그러져 있었다. 언제나처럼 환히 웃으시며 왜 모두들 이렇게 풀이 주었는가고 물으시는 그분께 한 책임일군이 가극창조사업이 잘 진척되지 않고 있는 실태와 일부 연예인들이 신심을 잃고 있는데 대해 사실대로 말씀 올렸다. 그분께서는 생각 깊으신 안색으로 말없이 듣고만 계셨다. 극장안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분께서 좌중의 무거운 분위기를 단번에 확 날려버리는 싱싱하고 저력있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동무들! 나도 혁명가극창조집단의 한 성원이오! 나는 동무들을 도와서 이 혁명가극을 완성하고 동무들은 나를 도와 우리 당의 주체예술을 계속 꽃피워나갑시다! . . . 그분께서는 천백배의 용기를 가다듬는 연예인들과 무릎을 마주하고 작품형상방도를 토론해 주기도 하시고 막힌 고리들을 시원히 풀어주기도 하시었다. . . . 이런 크나큰 믿음과 하해 같은 은정 속에서 평양예술극단은 한해사이에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를 창조해 냈다. 이것은 불후의 고전적 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영화로 옮기는 사업을 40일동안에 끝낸 기적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 . .

 

5. 민중을 위한 문학예술로

 

인민들에게 합격된 셈입니다

. . .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는 민중에게 자주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참다운 사상, 참다운 도덕, 참다운 문화를 줄 것을 근본사명으로 하고 있는 문학예술 자체의 본성과 높아지는 민중의 문화정서적 요구를 깊이 헤아리시고 발전하는 시대와 민중의 지향에 맞는 문학예술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는데 깊은 주의를 돌리시었다. . . . 바로 이러한 때인 1969년 12월 어느날이었다. . . .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는 교향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민중의 사랑을 받고 민중의 정서생활을 더욱 고상하고 풍만하게 해주는 음악예술로 발전시킬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음악예술부문의 한 책임일군과 이야기를 나누시었다. 사실 그때 국립교향악단은 민중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해체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문학예술의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민중의 정서를 반영하고 그들의 미감과 지향에 맞아야 하겠는데 사람들이 듣고도 잘 알 수 없고 마음이 끌리지 않는 서구의 고전교향곡이나 그것을 본따서 만든 교향곡을 가지고 출연했으니 대중의 공감을 자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교향곡이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민중의 문화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교향곡감상능력을 키워준다는 그 무슨 ≪해설음악회≫라는 것을 조직하는가 하면 관객을 확보한다고 하면서 미리 3개월분의 정기관람권을 예매하는 놀음까지 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관객은 줄어만 갔고 마침내 극장을 더는 운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연주가들이 악기 대신 만담같은 종목을 가지고 무대에 나서서 관중의 환심을 사보려고도 해보았으나 허사였다. 중앙무대에서 더는 인기를 회복할 수 없게 되자 지방순회공연을 떠났는데 처음에 교향곡에 대한 요란한 광고를 보고 모여들었던 관객들도 정작 공연을 시작하여 한참이 지나면 슬금슬금 다 돌아가고 몇사람이 객석에서 쿨쿨 잠이나 자는 정도였다. 해방직후에 새 조선의 문화건설에 이바지하려고 여기저기서 모여온 음악가들로 무어져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로 첫공연의 막을 올린 국립교향악단이 민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국립교향악단의 현 실태를 주의깊게 듣고나신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결연히 말씀하시었다. 교향악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사대주의자들이 떠벌린대로 우리 인민이 무식하여 교향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음악을 즐기고 사랑해 온 인민입니다. 문제는 어떤 교향악을 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자신께서는 우리 시대, 우리 인민이 요구하는 새 교향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선언하듯 말씀하시었다. 그 책임일군은 자책감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이미전에 벌써 그분께서 선행 교향악의 한계성을 하나하나 지적하시면서 교향곡형식의 음악을 대담하게 혁신하여 시대의 요구에 맞는 새로운 관현악을 창조할데 대해 가르쳐 주시었다. . . . 그분께서는 그때 이미 기존 교향악의 시대적 및 계급적 한계성을 지적하시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관현악창조 원칙과 방도까지 밝혀주시었다. 우리는 새로운 형식의 관현악을 창조하는데서 어디까지나 인민의 생활 감정과 정서를 옳게 반영하며 인민이 이해하고 인민이 즐길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원칙민족적 선율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시대정신을 옳게 구현하는 원칙을 철저히 견지하여야 합니다. . . . 우리는 교향악을 우리 인민이 즐겨 부르는 민요와 인민대중에게 널리 보급된 명곡편곡하는 원칙에서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교향악이 인민대중의 사랑을 받는 음악으로 될 수 있습니다. 천재적인 예지를 지니신 분만이 착상제시할 수 있는 명안이었다. 민중의 것은 민중에 의해서 창조되고 발전할 때 민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생활의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 . . 그분께서는 새로운 신심과 의욕에 넘쳐 있는 그 일군에게 대담하게 3관편성교향악단을 꾸이기 위한 안을 만들 것과 민요 ≪그네뛰는 처녀≫, 전시가요 ≪내 고향의 정든 집≫ 등 민중 속에 널리 알려진 명곡들을 교향곡으로 편곡하여 형상할 것을 지시하시었다. 국립교향악단의 일군들과 창작가, 연주가들은 신심에 넘쳐 분발하였다. . . . 드디어 새로 만든 교향곡 ≪그네뛰는 처녀≫와 ≪내 고향의 정든 집≫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리는 날이 왔다. 이날 공연이 진행되는 평양대극장은 연주가들과 관중이 관현악의 선율 속에 하나로 어우러져 울고 웃는 격정의 도가니로 화했다. 연주가 채 끝나기도 전에 폭풍같은 갈채가 터져올랐다. 그것은 시대와 민중의 지향을 담은 새로운 관현악의 탄생에 대한 민중의 열화같은 환호였다. 이날 교향악단의 공연성과를 두고 누구보다도 기뻐하신 분은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이시었다. 그분께서는 이제는 새로 나온 교향악이 인민들에게 합격된 셈이라고 만족스럽게 말씀하시면서 그 기세로 밀고나가 더욱 심오하고 다채로운 교향악과 협주곡 작품들을 계속 내놓으라고 격려하시었다. 국립교향악단에서는 그후 ≪사향가≫, ≪피바다가≫, ≪아리랑≫, ≪도라지≫, ≪조선은 하나다≫,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등 수많은 작품들을 연이어 창작하여 민중의 정서생활을 더욱 풍만하게 하는데 적극 이바지했다.

대중을 문학예술의 창조자로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사회주의문학예술이 철두철미 민중 자신의 것으로 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이 문학예술 창조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시었다. . . . 그분께서 무엇보다도 중시하신 것은 군중 속에서 문학통신원활동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문학통신원이란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서 공장이나 농어촌, 학교 등 현장에서 일하면서 문학예술작품들을 써서 투고하는 방법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문학통신원들은 현실에 직접 몸담고 있기 때문에 참신하고 사회적으로 문제성이 있는 작품의 종자와 소재를 제때에 포착하고 특색있게 형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문학예술창조사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성도 높일 수 있다. . . . 그분께서는 문학통신원대열을 늘이고 그들과의 사업체계를 정연하게 세우시었으며 군중문학작품심의와 평가사업을 개선하여 문학통신원활동을 활기있게 벌여나가도록 하시었다. 1970년 11월에는 전국영화문학통신원대회를 마련하여 군중문학창작경험을 서로 나누게 하시고 강습과 견학을 통해 견문도 넓히도록 하시었다. . . . 그분께서는 군중문학통신원들의 작품들 가운데서 잘된 작품들을 영화나 서적으로 묶어 널리 보급하게 하시고 친히 예술영화 ≪우리 열차 판매원≫, ≪정다운 거리에서≫ 등의 작품들을 영화로 실현하는 과정을 세심히 지도하여 대중의 절찬을 받는 우수작으로 완성시켜 주시었다. 뿐 아니라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문학서클원들의 작품집 ≪강선의 백양나무≫를 비롯한 작품집들도 많이 펴내게 해주시었다. 그리하여 공장과 농어촌의 근로청년들을 비롯하여 사무원, 학생 심지어 가정에 파묻혀있던 여성들까지 군중문학창작에 관심을 모으고 창작사업에 열의를 보였다. 그분께서는 군중예술서클활동을 활발히 벌이도록 하는데도 큰 관심을 돌리시었다. 1966년 12월 31일 저녁이었다. 명멸하는 축등이 수도의 거리를 아름답게 장식한 설명절전야의 밤에 그분께서는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을 찾으시었다. 언제인가 공장예술서클원들이 준비한 공연을 보아주기로 약속하신 적이 있었는데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하시다가 그밤에야 겨우 기회를 마련하신 것이었다. 명절분위기로 들끓는 밤에 무대에서 그분을 맞이한 서클원들의 감격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너무 기뻐 발을 동동 구르는 그들에게 손저어 인사를 보내시고 나서 공장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공연을 보시었다. 공연은 200여명의 노동자예술서클원들이 출연한 합창 ≪노동자와 농민은 한마음≫으로 막을 올렸다. 합창에 출연한 노동자들은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을 모신 크나큰 영광과 행복을 안고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미소를 담으시고 무대를 지켜보시던 그분께서는 합창이 끝나자 제일 먼저 박수를 보내주시면서 노래도 좋고 부르기도 잘 불렀는데 저 합창을 누가 창작했는가고 물으시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일군이 집체작이라고 말씀올리자 그분께서는 노동자들이 창작한 노래가 아주 훌륭하다고 하시면서 노동자와 농민이 한마음한뜻이 되어 수령님과 당을 받들어나간다는 사상을 잘 표현했다고 높이 평가해 주시었다. 이번에는 무용 ≪병사와 처녀≫가 무대에 펼쳐졌다. 그분께서는 공장에 안무가가 있는가고 물으시었다. 역시 집체작이라는 대답을 들으신 그분께서는 이 공장 예술서클이 당정책을 작품에 옳게 반영했다고 다시금 높은 치하의 말씀을 주시었다. 뚱뚱한 공장식당 책임자여인과 제비같이 날씬한 접대부처녀들이 여성민요제창 ≪남새풍년 좋을시구≫에 이어 ≪우리 식당 경사났네≫를 부르면서 북을 치고 어깨를 들썩이며 돌아갈 때에는 제법 민요맛이 나고 낭만적이 생활이 있다고 하시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하시었다. 이날 그분께서는 공연종목이 바뀔 때마다 출연한 서클원들이 어느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고 묻기도 하시고 민요를 많이 발굴하여 인민들 속에 보급하며 현대음악도 민요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시켜야 인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시면서 마감종목까지 다 보아주시었다. 이렇게 세모의 분망한 시간을 내어 이름없는 공장노동자 예술소조원들이 준비한 공연을 보아주시면서 군중예술의 실태를 요해하신 그분께서는 예술서클활동을 전국의 모든 단위들에서 더욱 활발히 벌이도록 하시었다. . . .

 

6. 극진히 아끼시는 마음

 

압록강을 건너간 특별기

1971년 10월 어느날이었다. 혁명가극 ≪피바다≫를 가지고 인방인 중국을 방문하고 있던 민족가극단 연예인들은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보내주신 두편의 영화를 감상하고 낙엽지는 숙소의 정원길을 거닐고 있었다. . . . 이때 한 일군이 급히 달려오더니 영도자님께서 전화를 걸어오셨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뜻밖의 소식에 접한 연예인들은 숙소의 전화기앞으로 달려가 정중히 둘러섰다. 송수화기에서는 그분의 친근한 음성이 울려왔다. 동무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평양입니다. 말이 잘 들립니까? 앓는 사람은 없습니까? 지방순회공연을 성과적으로 마친 동무들을 축하합니다. 송수화기를 잡은 일군도, 그옆에 둘러선 연예인들도 감격에 목이 메어 어쩔바를 몰라했다. 이윽고 그분께서는 예술인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며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시었다. 연예인들은 차례로 전화기앞에 다가섰으나 목이 메어 제대로 대답을 드리지 못했다. 송수화기에서는 그분의 자애로운 음성이 다시금 뜨겁게 울려나왔다. …동무들, 오늘 그곳에 특별비행기가 도착할 것입니다. 동무들의 외투를 싣고 가는 비행기입니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아직은 10월이라 눈도 내리지 않았는데 비행기를 띄워 외투를 보내주신다니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이날 오후 공화국깃발을 새긴 특별기와 함께 어버이수령님의 선물이 도착했다. 연예인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만세!를 목청껏 부르면서 뜨거운 것을 삼키었다. 포장함에 들어 있은 풀빛색깔의 외투에는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새겨져있었다. 더우면 더울세라 추우면 추울세라 귀한 자식을 살뜰히 보살펴주는 친부모의 사랑인들 어찌 이보다 더 극진하랴. 일군들과 연예인들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감격의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바로 이때 특별기편으로 온 한 일군이 정중한 자세로 그들에게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는 민족가극단 성원들이 중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공연을 진행하고 있는데 대하여 치하하고 이번 공연기간을 수령님에 대한 충성심을 키우는 중요한 계기로 삼으며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하고 검박하게 생활함으로써 수령님께서 키워주신 혁명적 예술인의 칭호를 존엄있게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한 다음 이렇게 지적하고 있었다. 수령님의 배려에 의하여 중국을 방문하여 공연하고 있는 민족가극단 전체 성원들에게 외투를 선물로 보냅니다. 나는 중국을 방문하고 있는 민족가극단 예술인들이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높은 정치적 자각과 기술로써 보답할 충성의 마음 안고 남은 기간에도 사업과 생활을 계속 전투적으로 하여 보다 큰 성과를 이룩하고 돌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전체 성원들의 몸건강을 바랍니다. 친서는 연예인들의 눈시울을 또 한번 화끈하게 해주었다. 거기에 깃든 사랑과 기대가 그만큼 큰 것이었다. 친서전달을 마친 일군은 가슴뜨거운 사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예인들을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시는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얼마전에 새벽이슬을 맞은 가랑잎이 한잎두잎 떨어지는 것을 보시고 선기가 나기 시작한다고 하시면서 중국방문공연에 나가있는 예술인들에게 외투를 보내주어야 하겠다고 교시하시었다.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는 수령님의 뜻을 받드시고 관계일군들을 부르시어 연예인들이 가있는 곳의 기후가 예년에 없이 갑자기 차져서 그들이 감기에 걸릴 수 있다고 하시면서 빨리 손을 써서 외투를 만들어 보내줄데 대해 가르치시었다. 이에 따라 그길로 수많은 승용차들이 예술인들의 집으로 달려가 그들의 외투를 양복점에 날라갔으며 그날중으로 거기에 맞추어 수백벌의 새 외투가 지어졌다. 이 보고를 받으신 영도자님께서는 즉시에 특별기를 띄우시었던 것이다. . . . 어느해 말에 있은 일이다. . . . 이 영화의 주역을 담당한 배우가 갑자기 앓아눕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그분께서는 곧 관계일군들을 불러 그 배우가 무슨 병에 걸렸으며 치료대책은 어떻게 세웠는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시었다. . . . 이때 한 일군이 그 배우가 촬영해야 할 분량이 하루이틀이면 다 끝날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마저 끝낸 다음 본격적인 치료를 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올리자 그분께서는 하루이틀이 아니라 한순간도 안된다, 유능한 의사들을 빨리 데려다가 진단을 내리고 치료대책을 세워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보건부문의 한 책임일군을 전화로 찾으시고 그 배우에 대한 치밀한 검진을 하고 치료대책을 세우라고 이르시었다. 며칠후 그분께서는 관계일군들을 또다시 부르시고 환자의 병세가 좀 어떤가고 물으시고는 창작일보는 꼭꼭 내면서 그의 치료일보는 왜 내지 않는가, 영화가 중한가 사람이 중한가 하고 엄하게 꾸짖으시었다. 일군들은 머리를 숙이고야 말았다. 사실 영화촬영중에 갑자기 앓아누운 배우에 대한 치료대책을 세워주신 후 그분께서 줄곧 관심을 돌리신 것은 그가 무슨 진단을 받고 어떤 치료를 받고 있으며 매일매일의 그의 병상태는 어떠한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군들이 그분께 올려보낸 일보에는 작품창작과 관련된 것뿐이고 그에 대한 내용은 한마디도 없었으니 그들은 결국 환자에 대한 치료를 하루이틀이 아니라 한순간도 미룰 수 없다고 하신 그분의 뜻을 잘 받들지 못했던 것이다. 일군들의 심정을 헤아리신듯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이으시었다. 일보의 첫자리에는 언제나 사람문제가 올라야 합니다. 영화촬영은 하루이틀 미룰 수 있어도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일분일초도 미룰 수 없습니다. 환자의 치료정형과 병세를 손금보듯 환히 알고 있어야 제때에 대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일을 보기 전에 사람을 먼저 보라는 뜻깊은 말씀이었다. 일군들은 그날부터 일보의 첫자리에 그 배우의 치료정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치료일보에는 치료정형은 물론 섭생상태, 환자의 호소와 요구조건까지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 . .

동무는 일어나야 하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더없이 가슴아파하고 괴로워하시는 것은 창작가, 연예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이다. 산야에 신록이 무르녹던 1969년 5월 어느날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아침 일찍부터 중요한 회의를 지도하시다가 2.8예술영화촬영소 천상인 연출가의 생명이 경각에 이르렀다는 긴급보고를 받으시었다. 그분께서는 회의를 좀 미루더라도 그를 찾아가 보자고 말씀하시었다. . . . 그분께서 그를 알게 되신 것은 1964년부터였다. 그때부터 그분께서는 그를 재능있는 영화연출가로 믿어주시며 극진히 아끼고 사랑해 오시었다. 자주 그를 몸가까이 부르시어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기도 하시었다. 그가 영화창작에서 엄중한 오류를 범하고 번민에 잠겼을 때에는 몸가까이 부르시어 낙심하지 말고 창작에서 범한 오류는 창작을 통해 씻어야 한다고 재생의 힘을 안겨주시었고 그가 오류를 고쳤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기뻐하시며 당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고치는 사람들을 변함없이 믿고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용기와 신심을 안겨주시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며칠째 야외촬영장에 몸소 나와 그의 연출작업을 지도해 주시던 그분께서는 쉴참에 그를 몸가까이 부르시었다. 그분께서는 그와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하루에도 수십장면의 영화를 찍게 지휘하는 동무가 자기 사진을 똑바로 찍어둔게 있는가고 물으시었다. 그는 사실대로 변변한 것이 없다고 말씀올렸다. 그분께서는 그럴 것이라고 하시면서 오늘 날씨도 좋은데 기념으로 사진이나 한장 찍어두라고 하시며 친히 그의 사진을 찍어주시었다. 사진은 곧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 뒷면에는 친필이 씌어져 있었다. 그에 대한 영원한 믿음과 사랑을 기약하는 뜻깊은 글발이었다.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을 때에도 그분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을 기울여주시었다. 그분께서는 한 일군을 병원에 보내어 병세를 알아보게 하시고 병력서까지 가져오게 하시었다. 의사들과 가족들까지도 더는 어쩔 수 없다고 단념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분께서만은 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일군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으시었다. 그분께서는 매일같이 그의 병력서와 체온표를 보아주시면서 멀리 외국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좋다는 약은 다 구해다 주시었다. 그러시고도 무엇인가 더 주지 못한 사랑이라도 있는듯 그가 임종에 놓여있는 지금 괴로운 마음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시는 것이었다. 그분께서 병원에 도착하시었을 때 환자는 거의나 의식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목메어 부르며 그리도 뵙고 싶어하던 그분께서 곁에 오셨건만 환자는 그 한없는 영광과 행복마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들과 의사들, 일군들은 너무도 안타까워 소리없이 몸부림만 쳤다. 어린 자식들이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그렇게 뵙고 싶어하던 친애하는 지도자선생님께서 오셨다고 애타게 외쳐도 환자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시며 비통한 심정을 누를 길 없으신듯 그분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었다. 이윽고 그분께서는 조용히 환자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흔드시며 목메인 음성으로 부르시었다. 나를 모르겠소?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소?! 귀에 익은 그분의 목소리는 드디어 그의 뇌수에 파동을 일으켰다. 그는 놀란듯 가볍게 입술을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햇빛같이 뜨겁고 우주같이 무한대한 그분의 위대한 사랑은 마침내 기적을 낳은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두팔을 벌려 그를 부둥켜안으시었다. 그 품에 환자는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거룩한 사랑에 대한 서사시적 화폭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숭엄한 감정에 휩싸여 눈시울을 적시었다. 환자의 눈물은 모름지기 그분의 하해같은 은덕에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서러움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었으리라. 환자는 흐려지는 의식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간간이 끊어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아뢰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이렇게 떠나게 되니… 정말…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괴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시던 그분께서는 닥쳐온 불행을 부정하시듯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왜 그런 말을 하오. 동무는 일어나야 하오. 아니 꼭 일어날 수 있소.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함께 큰일을 하자고 서로 결심하지 않았소… 그분께서도 그만 격해지시어 더 말씀을 잇지 못하시었다. 일군들은 이젠 그만 자리를 뜨셔야겠다고 거듭 아뢰었지만 그분께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으시는듯 환자곁에 오래도록 서계시다가 인간의 의지가 병을 좌우한다고, 마음을 든든히 가지고 병치료를 잘하라고 환자에게 거듭 이르시고서야 자리를 뜨시었다. 계단을 내리시는 그분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워보였다. 밖에 나오신 후에도 그분께서는 승용차에 인차 오르지 못하시고 환자가 있는 입원실창가를 오래도록 지켜보시었다. 그날 그분께서는 집무실에 돌아오시어서도 창문밖을 응시하시며 혼잣말처럼 조용히 지금 천동무는 몹시 괴로워하겠지. 내가 찾아준 것을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에게 이젠 마지막 시각이 다가왔구나 하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을까… 하고 뇌이시었다. 그날의 만남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의 마지막 시각을 뜻깊게 장식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날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온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자는 듯이 운명했다. 이 비보에 접하신 그분께서는 선뜻 믿으려 하지 않으시었다. 애지중지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하실 때마다 처음에는 잘 믿으려 하시지 않는 것은 어느덧 습관처럼 되어버린 것이었다. 인민배우 태을민이 공연을 앞두고 갑자기 심장이 멎었다는 비보를 받으시었을 때에도 그분께서는 태을민 동무가 잘못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라고 하시며 도무지 믿을 수 없으신듯 일군들을 바라보시다가 자신께서 직접 촬영소에 전화를 거시었다. 그러나 수화기로 들려오는 소식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분께서는 정말 떠나갔단 말이오? 혁명을 끝까지 같이하자고 했는데 그렇게 떠나다니라고 하시며 일군들에게 어서 촬영소로 가자고 하시었다. 승용차는 지체없이 떠났다. 그런데 전속으로 달리던 승용차는 서평양역철다리를 지나서 더 갈 수 없게 되었다. 도로수리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길위에는 온통 흙무지, 자갈무지들이 널려져 있었던 것이다. 한 일군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자신들이 장례식준비를 빈틈없이 하겠으니 되돌아가시자고 말씀드리자 되돌아가다니 무슨 소리입니까. 태을민 동무와의 마지막 이별의 길인데 어떻게 하나 가야 합니다. 차를 세워놓고 걸어갑시다라고 하시며 친히 앞장서 걸으시는 것이었다. 일군들은 당황하였다. 전날밤에 내린 비로 길이 어지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또 고인물이 나타났다. 일군들은 아무래도 단념하셔야 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분께서는 손수 바지를 걷어올리시고 물이 고인 진창길을 걸으시며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자고 하시면서 걸음을 재촉하시었다. . . . 영구앞에 이르신 영도자님께서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누워있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시다가 그처럼 사랑하던 예술을 버리고 왜 기척없이 누워있는가고 하시면서 눈가에 손수건을 가져가시는 것이었다. 일군들도 가족들도 울었다. 이때 고인의 아들딸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오셨어요.라고 아버지를 부르며 오열을 터뜨리자 그분께서는 그 오누이의 눈물을 친히 자신의 손수건으로 닦아주시면서 일군들에게 말씀하시었다. 태을민 동무는 당에 충실한 동무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특기와 예술적 재능으로 우리 예술의 대전성기를 이룩하는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당을 믿었고 자기의 모든 운명을 전적으로 당에 의탁하였습니다. 그가 남달리 예술을 열렬히 사랑한 것도 당의 은덕에 성실히 보답하려는 뜨거운 충성심때문이었습니다. 떠나간 그의 한생을 하나하나 더듬으시면서 상실의 아픔을 누르지 못해하시는 그분을 우러르며 일군들과 유가족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일군들이 앓는다는 소식만 들으셔도 동무들이 앓으면 내 마음도 앓는다는걸 왜 모르오!라고 안타까워하시며 치료대책, 요양대책, 휴식대책, 섭생대책들을 다 취해 주시는 그분, 혁명의 길에서는 희생도 있고 병사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비보를 접하실 때면 끝내 갔단 말이지. … 너무도 일찍이, 이젠 없단 말이지요… 아니, 아니지. 그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오라고 거듭 외우시며 안타까워하시는 그분, 정녕 그분의 은정은 그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 . .

밤사냥에 깃든 마음

1970년 12월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한 작가의 아내가 불치의 병에 걸려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었다. 작가의 집을 다녀온 일군의 말에 의하면 어느 의사가 처방을 하나 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약을 짓자면 아주 희귀한 짐승을 몇마리 구해야 하는데 이 한겨울에 어데 가서 그런 짐승을 잡겠는가고 하면서 한숨을 쉬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 . . 그 짐승을 우리가 잡아봅시다. 혁명동지를 위한 일인데 천리라도 가서 꼭 잡아냅시다. 그러면서 그 작가의 아픈 마음도 풀어줄 겸 함께 사냥에 데리고 떠나겠는데 당분간 이 밤사냥의 목적을 비밀에 붙이라고 하시었다. 그날밤부터 사냥이 시작되었다. 있음직한 곳은 거의다 돌아보았으나 찾는 짐승은 한마리도 볼 수 없었다. 원래 그 짐승은 한겨울에는 으슥한 곳에 들어박혀 좀처럼 나와다니지 않기 때문에 사냥꾼들도 겨울에는 잡을 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때에 험한 밤길을 헤치며 찾는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사냥은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나 그 짐승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채 날이 새고 말았다. 꽁꽁 언몸으로 수백리길을 되돌아 오느라니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아파트들의 창가에 아침밥을 짓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얼른거리고 있었다. 사냥은 다음날 밤에도 그 다음날 밤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종시 목적을 이루지 못한채 연말이 다가오고 바쁜 일이 제기되어 사냥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그분께서는 더욱 분망한 나날을 보내시게 되었다. 그 작가도 그분의 배려로 외국방문의 길을 떠났다. 그분께서 아내의 병치료는 걱정말고 바람을 좀 쏘이면서 머리나 쉬우라고 친히 떠나보내신 것이었다. 사냥에 함께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새해의 복잡한 일에 파묻혀 거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분께서는 외국에 가있는 그 작가가 돌아오기전에 약재라도 구해 놓아야겠다고 하시면서 다시 사냥을 시작하시었다. 대소한의 강추위가 하도 사나워서 다문 하루이틀이라도 날씨가 조금 수그러진 다음에 떠나시자고 말씀을 드렸으나 그 작가가 아내의 건강문제를 우리에게 맡기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러 떠났는데 어떻게 하루라도 지체하겠는가고 하시면서 기어이 사냥에 나서시는 것이었다. 사냥은 며칠밤을 두고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더 보충되어 일행이 몇곱으로 늘어났고 밤사냥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기세도 높았다. 마침내 몇마리의 짐승을 잡게 된 날이었다. 그분께서는 시내에 들어서시는 길로 한 일군에게 잡은 짐승들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아침이 되면 곧 작가의 집에 가져다주라고 이르시었다. 한 두어시간이 지나서 그분께 작가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올렸던 일군이 그분의 집무실에 찾아갔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집무탁 의자에 몸을 걸치신채 쪽잠에 들어계셨다. 온밤 계속된 사냥에 모두 곤죽이 되어 눈위에 털썩털썩 주저앉을 때에는 사내대장부들이 그게 무슨 꼴인가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 주시던그분, 잡은 짐승들을 차에 실으며 이제는 되었다고 그렇게도 기뻐하시던 그분께서 만시름을 놓으시고 쪽잠에 드신 것을 보는 순간 그 일군은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 . . 외국출장에서 돌아와 일군들로부터 이런 사연을 전해들은 작가와 그의 아내는 자기들이 받아안은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깊이 느끼며 그분께서 몸소 마련해 주신 약재로 약을 만들어 복용했다. 그리하여 그 작가의 아내는 난치의 질병이라고 하던 병을 깨끗이 고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작가는 그분께서 바라시는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써내어 그 고마운 은정에 보답하리라는 일념으로 창작사업을 힘껏 벌였다. 그 불같은 보은지심은 일찍이 체험해 보지 못한 창작적 흥분을 자아냈다. 작가는 영도자님의 은정에 힘입어 시나리오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 ≪조선의 별≫을 비롯한 대작들을 연이어 창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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