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27일

통일여명 편집국

 

 

더욱 밝아진 당중앙의 불빛

 - 은혜로운 사랑의 태양 3

통일여명 편집국 6-1-27

 

차 례

 

1. 백두의 넋으로 살자!

민중의 자주위업을 지켜 / 백두산에 오르시다 / 영광의 자취를 따라

2. 다시 한번 비약의 나래를

천리마의 고향을 찾아 / 가슴마다에 신심과 열정을

사랑의 자국은 그 어디에나

3. 민중에게 보다 유족한 생활을

저택정원의 시험포전 / 비단섬의 전변 / 파도위에서 보내신 하루

두번씩이나 맛보신 해주장

4. 일당백의 강군으로

잊을 수 없는 밤 / 무비의 담력을 안겨주시며 / 바닷가초소에서

5. 의리깊은 사랑

뜻깊은 연환회 / 투사들의 부탁을 지켜

영예군인들은 당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1. 백두의 넋으로 살자!

 

민중의 자주위업을 지켜

. . . 어느날 그분께서는 당사업실태를 요해하기 위해 한 일군과 담화를 나누시었는데 그에게서 ≪10개년계획≫이라는 생소한 말을 들으시게 되었다. 혹시 그 일군이 당 제4차대회가 제시한 7개년계획이라는 말을 잘못 번지지 않았는가 하여 다시 알아보았더니 ≪10개년계획≫이라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 . . 며칠후에 밝혀진데 의하면 그것은 사로청에서 10년동안에 해야 할 전망계획이라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자기 고장의 연혁사를 연구하고 ≪향토사≫라는 것을 만들며 ≪향토사연구실≫을 지어놓고 날마다 ≪향토사≫를 학습하며 옛날의 중농들로부터 농사경험을 배우며 도처에 정각이나 무도장 같은 것을 지어놓고 ≪나비쌍쌍≫, ≪제비쌍쌍≫하는 지정곡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부르면서 현대적인 연애를 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향토사연구실 운영경험발표≫, ≪결혼식 방식상학≫, ≪실농꾼들과의 좌담회≫ 등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청년들 속에 그것을 널리 퍼뜨릴 것이 계획되어 있었다. 청년들이 거기에서 배울 것이란 봉건유교사상, 자본주의 사상 수정주의 사상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일군들은 그 해독적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 . 현지에서 돌아온 일군들의 보고를 받으신 영도자님께서는 1966년 여름 어느날 그들에게 민중 특히 청소년들 속에서 사회주의 애국주의 교양을 힘있게 벌일 데 대한 당의 방침을 교묘하게 왜곡한 반당수정주의분자들의 정체와 그들의 책동의 본질을 하나하나 까밝혀주시었다. 그분께서는 . . . ≪10개년계획≫을 내놓은 자들은 당의 이 사회주의애국주의교양방침을 왜곡하였다고 하시면서 세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시었다. 첫째로, 거기에서는 지난날 낡은 사회에서 타락한 난봉꾼들이 술판에서 흥얼거리던 것과 같은 음탕한 노래를 청년들의 지정곡으로 내리먹였는데 청년들이 날라리를 부리면 혁명의 전도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고, 둘째로는 지난날의 빈고농들은 제 땅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농사를 착실히 지을줄 모른다고 하면서 땅마지기나 가지고 잘살던 사람들을 ≪실농꾼≫, ≪농촌핵심≫으로 내세웠는데 지난날 남을 착취하여 잘살던 사람들을 내세워가지고 사회주의 농촌을 어데로 끌고가려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고, 셋째로는 돈냥이나 있던 아무개가 자기 동네에서 첫 기와집을 지은 ≪무릉도원≫건설의 ≪선구자≫이고 또 지주의 아들 아무개가 자기 고장이 낳은 향토시인이라는 따위의 내용으로 ≪향토사≫를 만들고 ≪향토사연구실≫도 짓게 하였는데 도대체 그렇게 해가지고 민중의 자주위업을 어디로 이끌어가려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 . . 일군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당수정주의분자들의 교활한 술책이 명백해질수록 지난날 청맹과니가 되어 그들을 환상적으로 대해온 자신들의 행동이 후회막급했다. 한방울의 작은 물방울에 비낀 그림자를 보고 우주의 천기를 헤아리는 천리혜안의 예지와 비범한 통찰력으로 민중의 자주위업을 해치려는 배신자들의 교활한 책동을 제때에 가려보시는 경애하는 영도자님의 현명성에 머리가 숙어졌다. 아울러 교묘하게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외부정세가 복잡한 기회를 틈타 안으로부터 사회주의를 허물어뜨리려고 머리를 쳐든 배신자들에 대한 치솟는 격분을 금할 수 없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모든 것이 명백해진 것만큼 지방의 당 및 사로청 조직들에서 ≪10개년계획≫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놀음을 당장 걷어치울 것을 지시하시었다. . . .

백두산에 오르시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1968년 7월에 백두산일대의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들을 현지지도하시었다. 민중에게 항일혁명전통교양의 훌륭한 거점들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서였다. 몇몇 항일투사들과 함께 열차로 양강도땅에 이르신 영도자님께서는 먼저 보천보혁명전적지를 찾아 그곳 일군들에게 항일혁명유적유물들을 빠짐없이 발굴복구하고 전적지를 민중의 정신수양을 위한 거점답게 더 잘 꾸릴데 관하여 이르시었다. 보천보를 떠나신 그분께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1939년 5월 무산지구진공시에 거쳐 가신 노정을 따라가시다가 삼지연못가에 잠시 머무르시었다. 거기서는 백두산이 한눈에 바라보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못가를 거니시며 길섶에 돋아난 산나물 몇포기를 정히 따드시고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심신이 숭엄해지는 백두성산의 웅자를 깊은 감회에 잠긴 눈길로 이윽히 부감하시었다. 그때에 못가로 나온 여성항일투사는 그분께서 들고 계시는 산나물을 보는 순간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있었던 김정숙여사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것은 1936년 4월 마안산밀영에서 있은 일이었다. 그때 김정숙여사께서는 몹시 앓고난 뒤여서 음식맛을 잃고 아무것도 잡숫지 못하시었다. 음식이라야 끼니마다 한줌씩 차례지는 삶은 옥수수에 소금이 고작이었다. 어느날 밀영근처에서 삭정이를 주워모으시던 여사께서는 파란 민들레싹이 눈가에 얼핏 스치는 것 같아 얼른 나무꼬챙이를 찾아드시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야 방금 띠어보신 민들레싹을 다시는 찾을 수 없으시었다. 나무꼬챙이로 주변을 샅샅이 헤집으며 안타까이 찾으시었으나 허사였다. 착각하신 것이었다. 얼마나 햇나물이 잡숫고 싶었으면 그러시었으랴. 기진하신 여사께서는 그만 무릎위에 군모를 벗어놓으신채 진대나무에 기대앉아 머나먼 고향 회령의 하늘가를 하염없이 더듬으시었다. 민들레랑 길짱구랑 이른봄에 돋아나는 들나물들을 캐어 후더분한 토장국을 끓여잡수시던 어린 시절을 그려보신 것이다. 며칠후에 여대원들이 정말 갓 돋아난 민들레를 한줌 캐어드리자 여사께서는 너무나 반가워 막 환성을 올리시는 것이었다. 그러시고는 눈물을 머금고 선 전우들에게 우리는 풀뿌리를 씹으면서라도 기어이 조국으로 가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영도자님께 이런 이야기를 해드리는 여투사의 주름진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분께서도 가슴속에 차오르는 격정을 누를길이 없으시어 손에 들고 계시던 산나물을 여투사에게 넘겨주시고 가문비나무가 울울창창한 숲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었다. 어머님께서 생존해 계셔서 그 옛추억을 더듬으신다면 얼마나 감회로우랴 싶으시었다. . . .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그러는 투사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시며 말씀하시었다. 정말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 싸우던 투사들의 머리에는 벌써 흰서리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조국의 절반땅은 아직 해방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땅에 공산주의 낙원을 일떠세우자면 더욱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혁명은 계속됩니다. 백두산에 오르니 혁명을 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집니다. 백두산! 우리 인민은 백두산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조국의 대지가 한가슴에 안겨오는 혁명의 성산 백두산정에서 주체혁명위업의 시원이 열린 영광의 노정을 숭엄하게 돌이켜보며 하시는 그 말씀은 정녕 뜻깊은 것이었다. . . .

영광의 자취를 따라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백두산을 내리시는 길로 혜산시에 있는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돌아보시었다. . . . 그분께서는 그러한 의지를 가다듬으시며 항일혁명투쟁의 발자취가 찍혀져 있는 김정숙군(신파군)과 김형직군(후창군) 일대의 혁명 전적지와 사적지들을 돌아보시었다. 김형직선생님의 혁명활동연고지들인 연포리 주막집과 하산포여울목에도 들리시고 김일성주석님께서 조국광복의 웅지를 품고 압록강을 건느신 포평나루터, 일제놈들이주석님을 귀순시켜 보겠다고 이보익 여사를 강제로 데리고 다니며 감금해두었던 압강여관과 후주여관에도 들리시었으며 김정숙여사께서 활동하신 광선사진관도 돌아보시었다. 유서깊은 노정을 따라 험한 길도 걸어보시고 혁명선열들이 그랬던 것처럼 노상의 모닥불가에서 삶은 감자 몇알로 끼니를 에우기도 하시면서 낮에 밤을 이어가신 그 길은 그분께서 온 나라의 혁명 전적지와 사적지들을 혁명전통교양의 거점답게 대노천박물관으로 꾸리고 사람들의 가슴속에 백두의 혁명정신을 깊이 심어주어 그들이 어떤 역풍에도 드놀지 않고 부닥치는 시련과 난관을 꿋꿋이 이겨내며 혁명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마음의 기둥을 간직하도록 하시려는 위대한 구상을 무르익히신 역사적 노정이었다. 김형직군과 김정숙군 일대의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들을 돌아보시고 혜산으로 돌아오시는 길에서였다. 그분께서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에 어느 한 영마루에 차를 멈추고 내리시었다. 간단히 요기나 좀 하고 가시려는 것이었다. 여투사가 아침에 그분께서 말씀이 계시어 준비해 가지고 떠났던 보자기를 끄르고 감자 몇알을 정히 벗겨 그분께 올렸다. 그분께서는 일행중의 여러 항일투사들과 함께 감자를 드시면서 감자맛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고 말씀하시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여투사의 가슴에는 또 잊지 못할 추억의 한토막이 떠올랐다. 어느해엔가 밀영에서는 식량이 떨어져 며칠째 감자 몇알로 끼니를 에우고 있었다. 그때 어리신 영도자님께서는 처음 얼마동안 그런대로 잡수시던 감자를 며칠후부터는 아예 넘기지 못하시었다. 그 여투사는 그러는 그분을 보다 못해 여대원들이 얼마간씩 가지고 있던 돈을 모아가지고 쌀사러 민가로 내려갔었다. 그런데 그만 급한 정황이 생기는 바람에 빈손으로 밀영에 돌아오게 되었다. 수십년 세월이 흐른 백두산기슭의 그 저녁에 문득 감자를 드시는 그분을 뵈옵게 되니 그때의 일이 못견디게 아픈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여투사는 더 참지 못하고 그분께 말씀드렸다. 지금이야 산에서 싸울 때와는 다른데 식사나 제대로 하시면서 일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뜻있는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감자도 먹어보고 험한 길도 다녀보면서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을 돌이켜 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지난날을 잊지 말아야 혁명을 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 . . 혜산에 여장을 푼 그날밤 자정이 넘어서였다. 그 여투사가 문득 깨어보니 그분께서 계시는 방에는 아직도 불빛이 환했다. . . . 저는 벌써 한숨 잤는데 아직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길래… 그분께서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시고 이왕 오셨으니 한가지 물어보자고 하시면서 중학생들이 겨울 눈길을 하루에 몇리나 걸을 수 있는가고 물으시었다. 화제를 돌리신 것이다. 여투사는 항일무장투쟁때 아동단원들은 아무리 춥고 배고파도 하루에 60리길은 실히 걸었다고 말씀드렸다. 하루에 60리길을 걸을 수 있습니까? 그분께서는 확인이라도 하시듯 되받아 물으시고는 혼잣말처럼 다시 한번 뇌어보시는 것이었다. 하루에 60리라… 그러시고는 지도에서 눈을 떼고 허리를 펴시며 다른게 아니라 이제부터 수령님께서 12살 어리신 나이에 걸으신 배움의 천리길로 자라나는 새 세대들을 모두 걸어보게 하자고 그런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배움의 천리길이란 김형직선생님께서 압록강건너 중국땅의 8도구에서 혁명활동을 하실 때 거기에서 소학교를 다니시던 김일성주석님께서 왜놈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면 조국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신 아버님의 뜻을 받드시고 12살 되시던 1923년 3월 16일에 눈보라 사나운 험한 길을 홀로 떠나 고향 만경대까지 천리길을 걸어나오신 노정이다. 그 길이 이태 후에는 아버님께서 일경에게 체포되시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나라를 찾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투쟁의 길을 떠나실 때 다시 걸어가신 광복의 천리길로 되었다. 영도자님의 구상은 새 세대들이 바로 그 영광의 노정을 직접 걸어보면서 김일성주석님께서 개척하신 현대조선의 빛나는 역사와 혁명의 큰뜻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 . 그분께서는 여러가지 색깔의 부호로 가득찬 지도를 여투사쪽으로 끄당겨놓으시면서 이 지도는 내가 가지고 다니면서 표시한 것인데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된 압록강과 두만강 기슭 그 어디에나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들이 없는 데가 없다, 그 어디에 가나 위대한 수령님의 거룩한 발자취가 어려 있고 선열들의 뜨거운 숨결이 깃들어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한번 와서 보기만 해도 큰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정열에 넘쳐 말씀하시었다. . . .

 

2. 다시 한번 비약의 나래를

 

천리마의 고향을 찾아

1967년 7월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천리마의 고향 강선땅을 찾으시었다. . . .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시고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며 현장게시판에 나붙은 속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시던 그분께서는 한 속보판에 시선을 멈추시었다. 100%는 수치, 200%는 보통, 300%는 괜찮다. 투박한 글씨, 서툰 필체이지만 성과에 만족을 모르고 끊임없이 새로운 속도를 창조해 나가는 강선의 노동자계급의 불굴의 기개가 약동하는 글발이었다. 자기의 책임량만을 수행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운 일로 여기며 과제를 두배, 세배로 넘쳐 수행하기 위하여 심장의 피를 끓이는 것, 바로 이것이 이곳 노동자들의 양심이었다. . . . 이날 저녁 늦도록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시고 귀로에 오르신 영도자님께서는 돌아오시는 그길로 당중앙위원회의 집무실로 향하시었다. 탁상을 마주하신 그분께서는 단숨에 구호들을 써내려가시었다. 천리마대진군을 계속 다그쳐 다시한번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자! 50년대의 그날처럼 소극성과 보수주의, 기술신비주의를 다시 한번 불사르라! 100%는 수치, 200%는 보통, 300%는 괜찮다. 모두다 새 기준량 창조에로! 천리마기수들이여, 천리마작업반칭호쟁취운동을 천리마직장, 천리마공장 칭호쟁취운동에로 확대발전시키라! 인민경제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달리는 천리마에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라! 이 구호들은 민중을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에로 부르는 깃발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 깃발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세차게 나부끼도록 하시었다. 그것은 곧 소극성과 보수주의, 기술신비주의를 극복하는 투쟁이기도 했다. . . . 어느날 그분께서는 검덕광산이 전해에 비해 1.5배의 증산을 예견한 1967년도 광물생산계획을 조절하여 절반으로 줄이려고 한다는 놀라운 사실에 접하시게 되었다. 당의 의도를 받들고 생산자들이 결의한 계획인데 갑자기 변경시키다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으시었다. . . . 그분께서는 검덕의 노동자계급을 새로운 위훈의 창조자, 시대의 영웅으로 내세울 것을 결심하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 일군을 검덕으로 다시 파견하시면서 생산을 장성시키자면 첫째로, 고속도굴진운동을 힘있게 벌려 하루빨리 올해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채광장을 마련해야 하며 둘째로, 당원들과 청년들로 돌격대를 조직하여 광산전망개척에서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 노은동지구를 개발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었다. 그러시면서 이것은 매우 아름찬 과제이지만 그곳 광부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전투를 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면 모든 것이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분의 말씀을 전해들은 광부들과 온 검덕골이 들끓었다. 갱막장들에서 공개당총회들이 열리고 그분의 크나큰 믿음에 생산적 앙양으로 보답하자는 불같은 외침이 터져나왔으며 ≪6·19청년돌격대≫를 비롯한 수많은 돌격대가 무어져 고속도굴진운동이 힘있게 벌어지고 노은동지구개발을 비롯하여 광물생산을 늘이기 위한 전망을 조성하는 주요 과제들을 부리나케 해제꼈다. 연말에 검덕의 광부들이 당앞에 다진 결의를 빛나게 수행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그분께서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라고 기쁨을 금치 못해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 . .

가슴마다에 신심과 열정을

강선과 검덕에서 대고조의 불길을 지펴올리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창조와 기적으로 들끓는 전국의 수많은 공장, 기업소들을 찾아 끊임없는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었다. 그분께서는 불꽃튀는 기대곁에서 노동자들과 허물없이 마주앉아 걸린 문제 해결의 묘술도 의논하시고 산악이라도 떠옮길 담력과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시었다. 그무렵 용성기계공장에서는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6천톤프레스를 제작할 새 과제를 받아안았다. 이 과제를 놓고 일부 일군들과 기술자들은 과연 자체의 힘으로 기계제작공업의 극치라고 일러주는 이 특대형프레스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동요했다. . . . 1967년 8월 8일,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용성기계공장을 찾아 떠나시었다. . . . 문제해결의 열쇠가 천리마운동의 불길 속에서 3천톤프레스를 만들어내던 그런 열정, 만난을 맞받아나가는 혁명적 담력에 있다고 보신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용성기계공장 노동계급은 8미터타닝반과 3천톤프레스를 만든 영웅적 노동계급입니다. 용성기계공장 노동계급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용성기계공장 노동계급을 믿으시고 언제나 어려운 과업을 맡겨주십니다. 용성기계공장에서는 하루빨리 6천톤프레스를 만들어 수령님께 기쁨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영웅적 노동계급! 힘있는 노동계급! 용성의 노동자계급은 이 한마디한마디의 말씀을 통하여 당정책관철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할 자신들의 응당한 도리를 한순간에 상기했으며 영도자님께서 자기들이 혁명적 담력을 가지고 대담하게 6천톤프레스 제작에 달라붙을 것을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었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부쩍 커지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을 것 같은 벅찬 심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러는 그들을 미더운 눈길로 둘러보시고나서 두주먹을 힘있게 흔들어보이시며 용성기계공장은 나라에서 제일 큰 대상설비생산공장이며 공장을 낳는 어머니공장이다, 용성기계공장은 나라의 전반적인 공업을 발전시키는데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다시금 크나큰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주시었다. 그러시고는 일군들에게 노동자들의 무궁무진한 힘을 남김없이 발양시킬 수 있도록 당사업과 경제조직사업을 짜고들며 공장관리운영에서 대안의 사업체계의 요구를 철저히 구현하여 다시한번 혁명적 대고조의 열풍을 일으켜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었다. 용성노동자계급의 가슴에 무비의 담력과 열정의 불길을 지펴주신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는 흥남비료공장으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었다. 그분께서 이 공장을 찾으신 주요한 목적은 무연탄가스화에 의한 암모니아생산능력을 대대적으로 늘이기 위한 돌파구를 열어놓으시려는 것이었다. 무연탄가스화에 의한 암모니아생산능력을 확장하는 것은 화학공업의 주체성을 더욱 강화하고 화학비료생산을 결정적으로 늘여 농업생산에서 새로운 앙양을 이룩하기 위한 기본고리였다. 그래서 조선노동당 제4차대회에서는 7개년계획기간에 무연탄가스화에 의한 암모니아생산공정을 완비할 것을 예견하고 암모니아생산계획을 높여 놓았다. 그런데 당시 이 공장에서는 가스발생로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당장은 무연탄가스화에 의한 암모니아생산을 더 늘일 수 없다고 하면서 이미부터 해오던 물전해방법에서 예비를 찾으려 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의 의도와 어긋나는 것이었다. . . . 그분께서는 그러는 그들에게 무연탄가스화는 수령님께서 창설하신 우리의 주체공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연탄가스화를 높은 수준에서 정상화하는 것은 수령님의 주체사상을 빛내이는 영광스러운 투쟁이라고 절절히 말씀하시었다. 무연탄가스화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시는 말씀이었다. 많은 일군들이 노현장을 다녀갔고 그때마다 생산장성과 정상화에 대하여 적지 않게 강조했지만 그처럼 심오하고 절절하게 이야기해 준적은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한 노공이 정숙을 깨뜨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연탄가스발생로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다른 노공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나 해내겠습니다. 당의 방침을 어겨본 적이 없는 흥남의 노동계급을 믿어주십시오. 기술자들도, 일군들도 모두가 세찬 충격을 받은듯 얼굴들이 상기되었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가슴을 두드리며 결의를 다지는 노공들의 손을 뜨겁게 잡으시고 흥남비료공장 노동계급이 혁명적 열정이 있고 활기가 있습니다. 수령님의 교시대로 혁명적 대고조의 불길을 세차게 일으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킬데 대한 당의 노선을 철저히 관철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시며 동무들을 믿고 가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이렇듯 나라의 경제건설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공장, 기업소들을 끊임없이 찾아가시어 이르는 곳마다에서 혁명적 대고조의 불길을 지펴올리시었다. 그분께서 안겨주신 담력과 용기를 받아안고 떨쳐나선 용성의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은 힘과 지혜를 합쳐 그해 연간계획을 당창건기념일인 10월 10일전으로 앞당겨 끝내면서도 그처럼 아름차고 막연하게 생각되던 6천톤프레스의 설계를 성과적으로 끝내고 본격적인 설비제작에 들어갔으며 흥남비료공장에서는 알탄생산을 기계화하고 그 강도를 높여 유효가스성분을 늘이는 방법으로 가스발생로의 공칭능력을 갱신하여 7개년계획에 예견된 암모니아생산과제를 넘쳐 수행할 수 있는 확실한 전망을 열어놓았다.

사랑의 자국은 그 어디에나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현지지도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었다. 용성과 흥남을 찾으신 그해 여름에만 해도 중화군, 삼석구역을 비롯한 평양시내 여러 단위들과 남포시를 현지에서 지도하신데 이어 함경남도 북청군, 덕성군, 함흥시, 영광군, 홍원군 일대의 공장과 농촌, 포구와 학교들을 돌아보시었다. 언제나 민중을 찾아가시고 그들에게 의거하여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며 민중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으시는 것은 그분의 천품이다. 영도자님께서는 처음부터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하기 시작한 그해 여름에 벌써 황해북도 황주군, 사리원시, 황해남도 신천군, 삼천군, 송화군, 장연군, 태탄군, 옹진군, 벽성군, 해주시, 평안남도 개천군, 증산군, 온천군, 순안군, 평원군, 숙천군, 문덕군, 안주시, 평안북도 구성시, 창성군, 삭주군, 벽동군을 돌아보시었는데 그때의 현지지도노정이 장장 4천여리에 달한다고 한다. . . . 1967년 여름 함경남도일대의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실 때만 해도 그랬다. 그분께서 신포어류통조림공장에 들리신 날은 몹시 무더웠다. 공장구내를 돌아보시던 그분께서는 물고기가공품의 질을 높이자면 냉장시설이 좋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냉장고를 찾으시었다. 잘 얼군 물고기가 꽉 차있는 냉장고안벽은 얼음꽃이 하얗게 피어 한겨울의 설경을 방불케 했다. 일군들이 간편한 여름옷차림이신 그분께서 냉장고안으로 더 들어가시지 말았으면 했지만 그분께서는 냉장고에 고기가 가득 차있으니 보기가 좋다고 못내 만족해 하시면서 서슴없이 들어가시어 냉장고안의 곳곳을 일일이 살펴보시었다. 그러시면서 냉장고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겨울신과 솜옷, 솜장갑을 잘 만들어 주라고 이르시었다. 며칠전 북청군 용전리를 찾으시었을 때에는 흐르는 땀에 옷섶까지 흥건히 젖어드는 것도 아랑곳 않으시고 계단식 과수원이 펼쳐진 장가산마루로 오르시며 석축한 과수원계단을 제때에 보강하고 과일나무에 대한 비배관리를 과학기술적으로 할 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더니 이날에는 또 영하 8~9도를 오르내리는 냉장고안까지 일일이 돌아보시며 가슴뜨거운 노고를 기울이고 계시는 것이었다. . . . 그분께서 신창읍(현재는 북청군 신창노동자구)을 지나치실 때였다. 어느 골목에선가 여인들이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 것을 띠어보신 그분께서는 곧 차에서 내리시어 급수망 건설정형을 요해하시었다. 당시 그곳에서는 산에서 나오는 샘물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수도공사를 하기는 했으나 아직 우물을 길어다먹는 세대가 적지 않았는데 그것조차 수질이 좋지 못했다. 일군들로부터 이런 실정을 보고받으신 그분께서는 잠시 생각을 더듬으시다가 여기서 남대천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고 물으시었다. 한 일군이 10리가 잘 된다고 말씀올렸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남대천물을 끌어다가 주민들에게 먹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일군들은 엄청난 자재와 노력이 들어야 하는 그 방대한 수도공사를 즉석에서 지시하시는 그분을 우러르며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는 나라 사정도 아직 어렵고 또 꿈에도 상상 못해본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주민들이 물때문에 불편을 느끼고 있는데 그것을 외면한다면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인민을 위한 일에 무엇을 아끼겠는가, 인민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보람있는 일은 없다고 하시면서 즉시 공사에 착수하라고 단호히 말씀하시었다. . . . 신창읍내 주민들에게 남대천물을 끌어다주자고 하신 그분께서는 며칠후 북청군 나하대리를 지도하실 때 몸소 남대천에 나가보시었다. 그분께서 그곳 일군들에게 벌판에 있는 볼품없는 집들을 경치좋은 산기슭으로 옮기고 논판을 정리하여 농사일을 기계화할 데 대한 전망을 펼쳐주시며 강가에 이르니 체격이 그뽥하고 잘 생긴 청년이 홀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그의 인사를 받으시고나서 강가에 홀로 나와 무얼 하는가고 물으시었다. 청년은 아이들이 강에 나와 놀다가 물에 빠질까봐 경비를 선다고 하면서 여자나 늙은이들은 장난 세찬 아이들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장정들이 번갈아 지킨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이 바쁜 농사철에 강에 나와 경비를 서느라고 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수영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어떤가, 그러면 아이들이 마음껏 헤엄을 치면서 튼튼하게 자라나 바다를 정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 . . 그분께서 타신 차가 덕성군 동중리의 검은골어구에 이르렀을 때였다. 논판과 바위서덜사이로 난 외통길에 석탄을 만재한 화물자동차가 멎어 있는데 방금 부리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운전사가 차를 멈추고 내려서 보니 도저히 어길 수가 없게 된 곳이었다. 게다가 화물차뒤로 또 한대의 자동차가 서있는데 역시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판이었다. 동행한 일군들은 1분 1초가 귀중한 그분께서 바쁘신 걸음을 지체하게 된 것이 안타까워 석탄을 부리고 있는 화물차를 뒤로 좀 비켜세우려고 하였다. 석탄을 부리던 농장원들은 자기들 때문에 승용차가 멈추어 서있게 된 것을 몹시 송구스러워하면서 곧 적재함을 닫고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때 보시던 문건을 덮어놓고 차에서 내리신 그분께서는 첫눈에 모든 것을 헤아려보시고 금시 움직이려는 화물자동차를 멈춰세우시었다. 사실 그 화물차는 뒤로 피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고 설사 움직인다 해도 많은 석탄을 길가에 흘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었다. 영도자님께서는 화물자동차의 좌우켠을 살펴보시었다. 오른 쪽은 논판이고 왼쪽은 자동차 하나쯤은 어길 수 있음직한 돌밭인데 높이가 40~50센티미터가량 되어 보이는 바위가 비죽이 쳐들려 있었다. 그분께서는 그쪽을 가리키시면서 차라리 저기에 우회도로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손수 큼직한 돌멩이들을 안아다가 턱이 진 바위밑에 처넣으시면서 이렇게 돌을 채워넣으면 자동차들이 얼마든지 어길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는 운전사들이 여기서 차를 어기지 못해 애를 먹는 일이 없도록 손댄김에 잘해놓자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석탄을 부리던 농장원들이 황급히 달려와 일손을 거들었다. 순식간에 번듯한 우회도로가 만들어졌다. . . . 함께 유쾌히 웃고 계시던 그분께서 그렇게 마구 덮쳐서야 송어를 잡나, 머리를 써야지라고 하시며 강복판에 그대로 가만히 서있다가 송어들이 발목에 와서 감길 때 살그니 앉으면서 덮치라고 일깨워 주시었다. 청년노동자는 그분의 말씀대로 물 속에 버티고 서서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까 조금 있으니 고기떼가 다시 모여들어 발목을 툭툭 건드리며 지나갔다. 그분께서 물으시었다. 그래 발밑에 다 왔소? 예, 발을 막 쫏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살그니 앉으면서 덮치시오. 그는 정말 살그니 앉으면서 벼락같이 덮치었다. 잡았다! 큼직한 송어 한마리가 두손으로 움켜잡아 번쩍 쳐든 그의 손아귀에서 푸들쩍거렸다. 영도자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맨손으로 커다란 송어를 잡은 그 노동자는 너무 기뻐 첨벙첨벙 물을 걷어차며 그분앞으로 뛰어왔다. 그통에 머리에 썼던 밀짚모자가 훌렁 벗겨져 강물에 둥둥 떠내려갔다. 저런, 저런… 모자가 떠내려가오. 두손으로 송어를 움켜잡고 어쩔줄을 모르는 노동자와 떠내려가는 모자를 번갈아 보시던 그분께서는 바짓가랭이도 걷을 새 없이 물 속으로 성큼 뛰어드시었다. 그러시고는 모자를 건져 물기를 툭툭 터신 다음 그의 머리에 꾹 눌러쒸워주시었다. 청년이 당황하여 말했다. 그까짓 모자가 뭐길래… 옷까지 적시며… 옷이야 좀 젖으면 뭐라오. 더운 때 시원해서 더 좋소. 동무는 나를 위해 고기를 잡고 나는 떠내려가는 동무의 모자를 건지고 참, 인상적입니다. 그분께서는 이날 젖은 신발과 양말을 햇볕에 널어놓으시고 강가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점심식사까지 나누시었다. . . .

 

3. 민중에게 보다 유족한 생활을

 

저택정원의 시험포전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의 저택정원에는 여러가지 농작물을 가꾸는 포전이 있다. 이 포전들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농작물 시험포전이고 그분께서 거기에 손수 여러가지 농작물을 심고 가꾸시면서 영농법을 연구하고 계신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분께서 시험포전을 마련하고 영농법을 탐구하시는 것은 어떻게 하나 농사를 잘 지어서 민중의 식생활을 더 풍족하게 하시려는데 있었다. 그분께서는 경지면적이 제한된 조건에서 알곡소출을 높이는 길은 나라의 실정에 맞는 과학적 영농법을 창조하여 농업생산을 고도로 집약화하는데 있다고 보시고 여기에 지대한 관심을 부여하시었다. 그리하여 정원쑤가 자라고 화단이 펼쳐져야 할 저택의 뜨락에 자름자름한 뙈기밭들을 만드시고 벼, 옥수수, 콩, 밀 등 알곡작물은 물론 배추, 무우, 쑥갓 등 남새작물들과 여러가지 가축사료작물들까지 재배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한 일군이 저택으로 찾아가니 그분께서 옥수수밭에 콩을 심고 계시었다. 유다른 정원풍경과 손수 호미질을 하고 계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경탄해마지 않는 그 일군을 반갑게 맞아주신 영도자님께서는 거기 밭머리 어디에 호미가 있을터이니 그것을 가지고 어서 밭으로 들어오라고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호미를 찾아들고 다가온 그 일군에게 뒷그루로 심는 콩은 잎이 작게 나오기 때문에 총총히 심어도 햇빛을 잘 받는다고 하시면서 씨앗을 될수록 배게 묻으라고 이르시었다. 그 일군은 그분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씨앗을 묻으며 이렇게 배게 심으면 뒷그루에서만도 정당 두톤쯤은 날 것 같다고 말씀올렸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석톤은 나올 것이라고, 그래서 앞그루와 뒷그루를 합쳐 모두 여섯톤반을 예견하고 있다고 말씀하시었다. 일군은 눈이 둥그래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밭농사에서는 두벌농사법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간혹 두벌농사를 한다고 해도 정당 수확고가 넉톤을 넘어서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분께서는 놀라워하는 그 일군에게 자신께서 벌써 몇해째 쌀보리 대 밭벼, 쌀보리 대 그루조, 쌀보리 대 콩 등 알곡 대 알곡을 2모작으로 정하고 앞그루는 10월 5일경에, 뒷그루는 6월 28일경에 심어보았는데 여섯톤반 수준에 올랐다고 하시면서 좋기는 종자개량을 하여 품종을 개선해야 알곡소출을 높일 수 있지만 그러자면 시일이 많이 걸릴 것이니 당장은 2모작농사, 밀식농사에 예비가 있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면서 벌방지대에서 한해에 두벌농사를 하고 중간지대에서 두해에 세벌농사를 하며 모든 곡식을 배게 심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시험포전을 바라보는 일군에게는 그 포전들이 농작물의 생태를 관찰하고 연구하는 단순한 시험포전이 아니라 나라의 농업정책이 구상되고 확증되는 온상이라고 생각되었다. . . .

비단섬의 전변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주민들의 입는 문제에도 깊이 관심하시었다. 이북에서 주민들의 입는 문제를 푸는데서 긴절한 문제로 나선 것은 자체의 원료에 의거하는 섬유생산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적인 추세는 석유화학공업에 의해 섬유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북에서는 자체로 석유를 생산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남의 나라 석유에 의존하여 입는 문제를 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체의 섬유원천을 개발하고 그에 의거하여 방직공업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석회석과 무연탄을 가지고 화학섬유를 생산하는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되고 있었지만 인조펄프에 의한 견사생산은 일련의 난제들을 안고 있었다. 주되는 문제는 인조펄프원료인 갈을 대량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신의주에 건설된 대규모 화학섬유공장에 원료를 대기 위해 압록강하구의 무명평이라는 섬에 갈밭을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그 생산이 여의치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 섬의 갈들이 대가 굵지 못하여 약간한 바람에도 쉽게 넘어져 생산성을 높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문가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연구사업을 심화시키느라 했으나 성공을 보지 못하게 되자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갈대를 굵게 만들기 위한 연구사업을 포기하다시피 했고 관계부문에서는 할 수 없이 다수확품종으로 알려진 다른 갈품종을 가져다가 심어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신통치 않았다.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이러한 때인 1966년 여름에 갈재배를 전문으로 하는 어느 한 시험장을 찾으시었다. 그분께서는 이곳 일군들로부터 시험정형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시고 친히 갈모를 뽑아 살펴보기도 하시면서 여러모로 요해해 보시었다. 시험장에서는 여러가지 갈품종을 시험재배하고 있었는데 들은 바대로 시원치 못했다. . . . 며칠후 영도자님께서는 김일성주석님을 모시고 무명평을 찾으시었다. 현지에서 압록강변에서 자라는 갈의 생태를 직접 살펴보시자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몹시 나빠 신의주에서 배를 타신 두분께서 무명평에 이르시었을 때에는 창살같은 비가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두분께서는 억수로 쏟아지는 빗발을 고스란히 맞으시며 섬의 동둑길을 걸으시었다. 김일성주석님께서 갈밭머리의 백양나무밑에서 걸음을 멈추시고 빗바람에 넘어진 갈을 가리키시면서 한 연구사에게 갈대를 굵게 하면 아무리 빗바람이 세게 불어도 넘어지는 일이 없고 또 섬유질 함유량도 많아 정당 수확고를 높일 수 있겠는데 그 방도가 없겠는가고 물으시었다. 그 연구사도 수확고를 높이자면 키를 크게 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었다. 이때 영도자님께서는 친히 갈밭에 들어서시어 넘어진 갈들을 헤치며 주의깊게 살피시었다. 마침내 대가 실하고 튼튼하게 생긴 갈포기 몇그루를 발견하신 그분께서는 그것을 허리가 부러진 연약한 갈과 대비해 보시었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서 자란 갈은 연약했고 습하고 비옥한 땅에서 자란 갈은 실하고 싱싱했다. 그분께서는 그 두그루의 갈뿌리를 당겨 뽑아 주석님께 보여드리시었다. 메마른 땅에서 자란 갈은 가늘고 연약하지만 습하고 비옥한 땅에서 자란 갈은 실하고 튼튼하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분께서는 이런 점에 대하여 주석님께 말씀드리고 문제해결의 열쇠가 토양의 비옥도를 높이고 비배관리를 잘하는데 있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정보당 수확고를 높이기 위하여서는 갈의 생물학적 특성에 맞게 비배관리를 잘하여 갈대가 굵게 돋아나오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기술실무적 문제들을 과학이론적으로 밝혀주시었다. 순간 연구사들과 일군들은 아하, 그것이었구나 하는 환희로운 감격에 휩싸이면서 문제의 정곡을 순간에 포착하신 그분의 비범한 예지에 탄복하였다. . . .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영도자님께서 다녀가신 후 그곳 연구사들과 일군들, 갈생산자들은 갈의 과학적인 재배방법과 비배관리 요령을 연구완성함으로써 갈생산에서 일대 전환을 이룩했다. 몇해사이에 갈대는 종전에 비해 1.5배나 굵어지고 정보당 수확고는 3.5배로 늘어났다. . . .

파도위에서 보내신 하루

. . . 1965년 5월 어느날이었다. 그분께서는 이날 하루를 고스란히 바람세찬 파도위에서 보내시었다. 그 무렵에 조선노동당에서는 민중에게 물고기를 떨구지 않고 넉넉히 먹이도록 하기 위해 큰 배로도 잡고 작은 배로도 잡으며 먼 바다에서도 잡고 가까운 바다에서도 잡으며 깊은 바다에서도 잡고 얕은 바다에서도 잡는 식으로 사철 바다를 비우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런데 수산부문의 일부 일군들은 성어기에 큰 고기떼를 만나 손쉽게 생산실적을 올릴 것만 꿈꾸면서 세소어업에는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 지방에서는 주민들에게 물고기를 정상적으로 공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도자님께서 실태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강원도 수산관리국 직매점을 비롯하여 몇몇 단위들에 들려보시니 우려하신 바대로 상점들에 물고기가 들어올 때에는 매장이 흥성거리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뜨문했다. 수산부문 일군들의 말에 의하면 해류의 급격한 변동으로 물고기의 회유상태가 일정하지 않아 고기를 정상적으로 잡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 . . 그분께서는 그날 아침 일찍이 몇몇 일군들을 불러 바람도 쏘일 겸 바다에 나가보자고 말씀하시었다. 일군들은 기뻐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분께서 오래간만에 휴식의 한때를 보내시려는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닷가로 나가보니 파도가 높았다. 일군들은 날씨가 나쁘니 바다에 나가는 것을 좀 미루시면 좋겠다는 의향을 말씀올렸다. 그분께서는 바다라는거야 파도도 있고 갈기도 날려야지 그저 잠잠하면 무슨 바다맛이 나겠는가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먼저 배에 오르시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염기를 머금은 눅진한 해풍이 옷자락을 날리고 뱃전에 파도가 부서지며 사정없이 물갈기를 휘뿌렸다. 배는 포구에서 멀어져갔다. 옷자락이 화락하니 젖어드는 것도 아랑곳 않으시고 수면을 주의깊게 굽어살피시던 그분께서는 이윽고 여기에 물고기가 좀 있음직한데 이쯤에서 한번 그물질을 해보자고 말씀하시면서 팔소매를 걷어올리고 나서시었다. 그제서야 그분의 의중을 헤아린 일군들이 그물다루는 일만은 그만두시라고 거듭 만류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이런 일을 해보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뭍에 앉아서 잡아온 물고기를 구경하는게 낫지 무엇하러 여기까지 나오겠는가고 하시면서 어서 그물을 늘이자고 재촉하시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갈매기들이 끼륵거리며 뱃전을 감돌고 그물 속에 든 고기들이 길길이 뛰어올랐다. 영도자님께서는 저것 보라, 숭어가 들었다고 환성을 올리시며 팔에 더욱 힘을 주시었다. 여기저기서 고기가 빠져나간다고 소리치면서 그물을 바싹 당기라고 고함들을 질렀다. 흐뭇한 수확의 기쁨과 다급한 긴장, 열띤 흥분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물을 당기던 일군들이 하나둘씩 얼굴이 하얗게 되어 비칠거리기 시작했다. 멀미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애써 그런 티를 감추러 드는 그들을 보고 웃으시며 늘 바다위에서 살다시피 하는 어로공들도 흙냄새를 맡고 배에 오르면 멀미를 하는데 동무들처럼 짠물맛이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멀미를 이겨낼상 싶은가, 괜히 센체 하지 말고 선실에 들어가 누우라고 말씀하시었다. 일시에 웃음이 터졌다. 도의 일군들도 따라 웃었으나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실 도민들에게 더 많은 물고기가 차례지게 하려면 도안의 민생을 책임진 자기들이 누구보다도 바다를 잘 알고 바다에 익숙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그들은 승선지도 한번 하지 않고 있었다. 말하자면 짠물맛을 모르고 있은 셈이었다. 정녕 자기들이 일을 바로 했더라면 영도자님께서 그렇듯 사나운 날바다에 몸소 나오시어 그물질까지 해보시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일군들은 그분께서 즐겁게 웃으시며 하시는 말씀을 자신들의 그릇된 일본새를 깨우쳐 주시는 간곡한 훈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었다. 뱃전에 그물을 바싹 끌어당겨놓고 물고기를 퍼올리면서 보니 상상외로 대단한 수확이었다. . . . 미소를 머금은 그분의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일군들의 가슴은 세차게 달아올랐다. 영도자님께서는 몸둘 바를 몰라하는 일군들에게 주민들에게 물고기를 정상적으로 넉넉히 공급하지 못하는 것은 바다에 물고기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군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더 많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조직사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데 있다고 하시면서 나는 일부 일군들이 바다에 물고기가 없다고 하는 말을 애당초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실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동무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 오늘 바다로 나왔다, 나는 오늘 바다에 나와 보고 일부 일군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소어업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우리 인민들에게 물고기를 풍족히 먹이기 위해서 확고히 틀어쥐고 나가야 할 중요한 고리의 하나라는 것을 다시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었다. 계속하여 그분께서는 호망을 하기 좋은데는 호망을 하고 자망이나 연승을 하기 좋은 데는 자망이나 연승을 하여야 한다, 호망, 자망, 연승, 후리ㅡ 홀치기, 낚시질 등 여러가지 중세소어업을 발전시키면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수산부문에서는 원해어업과 중세소어업을 잘 배합하여 더 많은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세소어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까지 일일이 밝혀주시었다. . . .

두번씩이나 맛보신 해주장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민중의 아픔을 깊이 헤아리시고 몸소 풀어주시는 모범을 보여주기도 하시었다. 어느해 봄에 황해남북도일대의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고 계시던 그분께서는 해주시안의 살림집형편과 주민들에 대한 부식물공급정형을 요해하시다가 해주식료공장에서 생산하는 장맛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다. 그분께서는 곧 해주식료공장에서 만든 된장과 간장을 가져오게 하시고 그 맛을 보시었다. 어딘가 씁쓸하고 시큼털털한데가 있었다. 일군들이 어쩌면 이런 장을 주민들에게 공급하고서도 마음편히 지낼 수 있었을까, 당에서는 민중에게 보다 유족한 생활을 마련해 주려고 그렇게도 애쓰는데 과연 해주시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단 말인가, 그분께서는 생각하실수록 맛없는 장을 되는대로 만들어 공급하여 시민들의 생활에 불편을 주고 있는 그곳 일군들의 처사가 야속하게 느껴지셨다. 그분께서는 이윽토록 말씀이 없으시었다. 사실 장은 조선사람들의 식생활에서 한끼도 없어서는 안될 주요 식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장맛이 곧 입맛이라 일러왔고 장맛이 단 집에 복이 많다든가 말단 집 장이 쓰다는 등의 속담까지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장 담그는 일은 가정일의 무거운 부담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을 국가가 공업적 방법으로 생산공급하게 됨에 따라 그 부담에서 해방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고마워 장맛 같은 것은 문제로도 삼지 않았다. 그럴수록 지도일군들이 민중의 불편을 더 속속들이 헤아리고 제때에 풀어줄줄 알아야 하겠는데 그저 그 많은 주민세대에 장을 떨구지 않고 보장해 주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그분께서는 일군들에게로 눈길을 돌리시며 장맛이 이렇게 좋지 못한데 동무들은 매끼 먹어보면서도 왜 대책을 세우지 않았는가고 물으시었다. 자책에 휩싸여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던 한 일군이 당면한 생산과 건설에만 몰두하면서 그런데에 미처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고 솔직히 말씀드리었다. 그분께서는 지도일군들의 불찰로 시민들이 얼마나 불편을 느끼겠는가고 엄하게 질책하시면서 당장 대책을 세우라고, 해주장이 평양장만큼 좋아졌을 때 다시 와서 맛보겠다고 하시었다. 그분께서 다녀가신 후 도와 시의 지도일군들은 장맛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짜고들어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평도 좋았다. 일군들은 그만하면 그분께서 주신 과업을 수행한 것으로 여기고 다소 안심했다. 그들은 민중을 생각하시는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를 아직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후인 그해 5월에 또다시 해주시를 찾으신 그분께서는 시내에 들어서시는 길로 시의 일군들에게 낮에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시면서 식탁에 해주장과 평양장을 가져다놓으라고 이르시었다. 공장과 남새포전들을 돌아보시며 분망한 시간을 보내시고 점심때가 퍽 지나서야 식탁을 마주하신 그분께서는 오늘 해주장맛을 좀 보려고 가져다놓으라고 했는데 다같이 장맛부터 보고나서 식사를 하자고 하시면서 자신께서 먼저 맛을 보시었다. 장맛은 이번에도 그분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시큼털털한 맛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평양장보다 단맛은 못했던 것이다. 민중에 대한 사랑이 큰 것만큼 요구성도 높았다. 그분께서는 장맛 하나를 놓고도 일군들이 인민의 충복이라는 자각을 얼마나 깊이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해주시에서는 왜 평양장처럼 달게 만들지 못하는가고 물으시었다. 한 일군이 아직 기술이 낮아서 그런 것 같다고 말씀올렸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물론 기술적으로 걸린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고 보지만 여기 모인 일군들이 마음먹고 달라붙으면 그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겠는가고 하시면서 자신께서 생각하기에는 일군들이 장맛쯤은 별치 않은 문제로 여기면서 관심을 덜 돌려서 그런 것 같다고 말씀하시었다. 하루빨리 민중의 충복된 본분을 자각하고 어머니다운 심정으로 그들의 생활을 책임적으로 돌보는 참다운 일군으로 될 것을 바라시는 간절한 호소가 어린 말씀이었다. 일군들은 그분께서 두차례나 몸소 장맛까지 보아주시면서 그토록 심려하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책에 휩싸여 해주장을 꼭 평양장처럼 만들 것을 굳게 다짐했다. 황해남도와 해주시안의 일군들은 시민들에게 맛좋은 장을 공급하기 위하여 고심어린 노력을 기울인 결과 1년후에는 과연 맛좋고 색깔고운 간장과 된장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 . .

 

4. 일당백의 강군으로

 

잊을 수 없는 밤

. . . 1967년 8월 5일이었다. 그무렵 인민군대를 당과 수령, 조국과 민중을 위해 한몸바쳐 싸우는 일당백의 강군으로 키우기 위해 군부대들에 대한 정력적인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영도자님께서 이날 오후 동해안의 한 연합부대를 찾으시었다. 그 부대의 부대장은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김일성주석님께서 몸소 키워오신 오랜 투사였다. 부대안의 여러 곳을 돌아보시며 전투준비상태를 구체적으로 요해하신 그분께서는 부대지휘관들과 소박한 저녁식사를 나누시고나서 부대장을 데리고 숙소로 가시었다. . . . 부대장은 한없는 기쁨에 휩싸였다. 사실 부대장은 4년전에 한 전연구분대에서 그분을 모신 일이 있었는데 그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분께서는 무척 기뻐하는 그에게 넓은 침대를 내주시고 자신께서는 좁은 침대에 자리를 잡으시었다. 딱하게도 그 침실에는 넓은 침대와 좁은 침대가 각각 하나씩 뿐이었다. 부대장은 영도자님께서 넓은 침대에서 주무셔야 한다고 황망히 간청했으나 그분께서는 나이 많은 분이 좁은데서 자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하시며 굳이 넓은 침대로 이끌어다 앉혀주시었다. 부대장은 딱하게 되었다. 불원천리하고 찾아오신 그분을 어찌 좁은 침대에 모시랴 싶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권하고 서로 사양하여 좀체로 낙착이 안되는데 결국 그분께서 두 침대를 다 그만두고 바닥에서 같이 자자는 명안을 내놓아서야 일이 풀렸다. 그리하여 부대장은 응접실 바닥에 그분과 한이불을 덮고 나란히 눕게 되었다.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행복한 그밤 부대장은 일제놈들에게 일가친척을 다 빼앗기고 12살 어린 나이에 김일성주석님의 품에 안겨 자라온 지난날의 가지가지 일들이 자꾸 떠오르면서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의 이런 심정을 헤아리신듯 이야기나 좀더 하다가 자자고 하시면서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할 때 무슨 훈련이 제일 힘들었는가고 물으시었다. 순간 그의 눈앞에는 백두의 원시림 속에 자리잡은 훈련기지에서 군정훈련을 다그치던 나날이 어제일같이 선히 떠올랐다. 그때 훈련기지에서는 강행군훈련, 전술훈련, 사격훈련, 무선훈련, 스키훈련 등 여러가지 훈련이 맹렬히 진행되었는데 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그에게는 무선공학에서 배우는 무슨 법칙이요, 원리요 하는 것들이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송수신훈련도 여간 애먹는 일이 아니었다. 전술훈련이나 스키훈련 같은 것도 조련치 않았다. 그때 항일의 여성영웅이신 김정숙여사께서 원쑤 일제를 때려부수고 빼앗긴 조국을 기어이 찾겠다는 강심을 먹고 달라붙으면 무엇을 못하겠는가고 하시며 도와주는 바람에 훈련의 그 어려운 고비들을 넘길 수 있었다. 부대장의 이런 회고담을 들으신 그분께서는 40년대에는 일제를 때려부수었다면 이제는 미제를 타승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러자면 군인들의 훈련을 강화하여 싸움준비를 완성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지금 일부 부대들에서 여러가지 잡다한 일을 자주 조직하면서 훈련을 소홀히 하고 있는 일을 두고 몹시 심려하시었다. 그분께서 심려하시는 것과 같은 문제는 그 부대에도 있었다. 윗단위의 개별적 지휘관들이 내리먹이는 부당한 지시로 하여 훈련강령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억이 막히신듯 한참이나 말씀을 못하시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타이르시었다. 부대의 전투준비와 훈련에 대하여 당앞에 책임진 사람은 다름 아닌 부대의 책임일군이라는 것,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일당백의 구호를 관철하는데서 기본은 훈련이라는 것,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지 이 기본을 틀어쥐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차근차근 깨우쳐 주시었다. 부대장이 받아안은 충격은 컸다. 김일성주석님께서와 김정일영도자님께서 몸소 전연에 위치한 대덕산초소를 찾아주시고 일당백의 구호를 제시하시면서 젊은 병사들을 잘 교양하고 일당백으로 준비시켜 그들이 한몫 하게 하라고 간곡히 가르쳐 주신 뜻깊은 말씀을 직접 받아안은 자신이 아닌가. 기억도 새로운 1963년 2월 6일, 신생 쿠바를 요람기에 압살할 목적으로 카리브해위기와 같은 엄청난 사태를 격발시킨 미국이 주한 유엔군과 국방군에 전투비상까지 걸어놓고 있던 그 무렵 온밤 내려쌓인 숫눈길을 헤치며 대덕산초소를 찾아주신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모든 군인들을 일당백으로 준비시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군인들이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방어공사와 전투훈련을 잘하면 일당백이 될 수 있다고 교시하시었다. 인민군대에 ≪일당백≫이라는 유명한 구호를 제시하신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때 크나큰 격정에 휩싸여 수령님앞에서 그 어떤 원쑤들이 달려들어도 일당백으로 방어해 내겠다고 결의다지는 지휘관들에게 김정일영도자님께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물론 한사람이 적을 열놈, 백놈 담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비롭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동무들이 수령님의 혁명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자기 무기에 정통하며 진지를 철벽으로 다지고 그에 의거하여 적을 족치는 전법에 숙련된다면 일당백은 문제없습니다. 지휘관들은 군인들을 일당백으로 준비시키기 위하여 적극 힘써야 하겠습니다. 생각할수록 그분께서 하신 말씀의 구절구절이 쟁쟁히 되살아오르면서 그 귀중한 말씀을 직접 받아안은 자신이 이러저러한 장애가 있다고 하여 군인들의 훈련에 모를 박지 못한 자책이 가슴을 쳤다. 그분께서는 괴로워하는 그를 위로하시려는듯 시간이 많이 갔으니 이제는 자자고 하시면서 너그러이 웃어보이시었지만 부대장은 잠들 수 없었다. 당과 국가 사업에 그처럼 바쁘신 그분께서 어찌하여 멀고먼 전연부대에까지 찾아오시었는지 그리고 딱딱한 방바닥에 한이불을 덮고 누우시어 그토록 간곡한 말씀을 해주시는 것인지 그 모든 것이 깨달아졌다. 먼 농가쪽에서 새벽닭의 울음소리가 아스랗게 들려왔다. 초소의 군인들을 찾아주시고 ≪일당백≫의 구호 관철을 위한 귀중한 말씀을 들려주신 뜻깊은 밤이 지새고 있는 것이었다. . . .

무비의 담력을 안겨주시며

1968년 1월에 조선동해에서는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인민군 해병들이 공화국의 영해깊이 침입하여 정탐행위를 감행하던 미국의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것이다. 이 사건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일당백의 용사로 키워내신 조선인민군이 조국과 민중의 안녕을 침해하는 그 어떤 침략자도 용서치 않는다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준 충격사건이었다. . . . 그때 미국은 어리석게도 수정주의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일부 사회주의나라들을 부추겨 이북에 간첩선과 승무원들을 돌려보내라고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가 하면 그 무슨 보복을 운운하면서 파렴치한 군사적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베트남전선으로 출동중이던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비롯한 제7함대소속의 수많은 함선들을 조선해역으로 돌렸으며 오키나와주둔 미군 2개 비행대대를 이남에 급파하고 주한 미군과 국방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렸으며 미전략공군사령부 예하 추격기무력에도 경계령을 떨구었다.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세계가 숨을 죽이고 사태를 주시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평양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군으로 개편한지 스무돌이 되는 날을 뜻깊게 경축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리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연회연설에서 미제가 이 사건을 군사적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그들에게 차례질 것은 시체와 죽음뿐이라는 것, 조선인민은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미제의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단호히 언명하시었다. . . . 이때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인민군장병들의 전투적 기세를 한껏 높여주시었다. 그분께서는 모든 장병들이 언제나 ≪일당백≫의 용맹과 담력으로 적들과 대적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시었다. 1968년 9월 1일이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어지러이 뒤채기고 바람세까지 사나운 그날 영도자님께서는 한 비행구분대를 찾으시었다. 일기조건이 불리한 정황에서의 비행훈련을 현지에서 지도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분께서 도착하시니 마침 중요한 비행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비행기를 받기 위한 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상황이 복잡했다. 짙은 구름 속에 들어간 비행기가 자주 요동치면서 한쪽으로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승조원들이 무진애를 쓰고 있었으나 비행기는 좀처럼 자기 항로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 . . 이윽고 그분께서는 자신께서 한번 비행지휘를 해보자고 하시며 민첩하게 비행마이크를 잡으시더니 즉시 비행사를 호출하시었다. 나의 말이 잘 들립니까? 지휘소와 비행기 안에 그분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예, 잘 들립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한없이 자애롭게 마음을 어루어주는 그 음성, 누구실까? 오매에도 그립던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몸소 비행마이크를 잡으시고 자기들의 착륙을 지도해 주실줄이야 그들이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김정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그분의 음성이 리시버를 통해 귀청을 때렸다. 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한치앞도 가려볼 수 없는 먹구름 속에서 세찬 바람에 부대끼면서 안간힘을 쓰다가 오매에도 그립던 그분의 존함을 들은 순간 승조원들의 온몸에 격정의 세찬 전류가 흘렀다. 이제는 됐다는 생각이 심신을 거뜬하게 만들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지금 여기에 바람이 세찬데 주의해서 착륙해야겠다고 주의를 주시고나서 고도와 속도, 방향각들을 연이어 물으시었다. 비행지휘소의 모든 지휘관들은 바싹 긴장해졌다. 비행사가 대답드리는 족족 그에 대한 제원을 구해 주시면서 비행기를 활주로로 유도하시는 그분의 음성만이 지휘소와 비행기, 온 우주에 가득 찼다. 이윽고 비행장 한쪽 상공에 동체를 드러낸 비행기가 세차게 갈개는 바람을 맞받으며 기수를 낮추더니 서서히 활주로를 타기 시작했다. 영도자님께서는 달려오는 비행사들을 향해 급한 걸음으로 마주가시었다. 그러시고는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시며 수고했다고, 날씨가 나쁜데도 아주 잘 내렸다고, 그간 훈련을 많이 한 것이 알린다고 치하해 주시었다. 구분대 지휘관들은 다급한 정황 속에서 당황하여 비행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들을 책할 대신 오히려 치하해 주시는 그분을 우러르며 가슴뜨거워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백전백승의 영장이신 그분께서 안겨주신 담력이 든든히 자리잡았다. . . . 언젠가 그분께서 어뢰정에 올라 해병들과 함께 항해하실 때의 일이다. 파도사나운 난바다에 그분을 모시게 된 전대지휘관들은 그분의 신변이 염려되어 소정된 전투속도를 내지 않도록 훈련과정안을 조절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러는 그들에게 훈련도 전투라는 심정으로 실전과 같이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훈련강령에 반영된 내용을 그대로 집행하라고 이르시었다. 항로를 이리저리 바꾸며 ≪적≫을 향해 돌진하는 어뢰정의 기상은 그야말로 노한 사자를 방불케 했다. 선미에서는 물보라가 비행운처럼 내뻗치고 무선기안테나는 활등처럼 휘었다. 요란한 폭음을 울리며 종횡무진으로 내닫는 함선들의 용맹한 모습을 만족스레 지켜보시면서 그분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어뢰정 성원들은 대담하고 용감하여야 합니다. …싸움의 승패는 누가 더 용감하게 싸우는가 하는데 달려있습니다. 수령님을 위하여, 당을 위하여 자기의 한목숨도 서슴없이 바쳐싸우는 충성심과 용감성, 자기 희생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시고는 사나운 파도도 그 어떤 강적도 일격에 짓부술 일당백의 담력은 훈련을 강화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일당백은 구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당백의 기본열쇠는 훈련을 강화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무들은 시간을 아껴가면서 훈련하고 또 훈련하여야 합니다. 군대에서는 첫째도 둘째도 훈련입니다라고 해병들의 훈련열의를 더한층 고무해 주시었다. 인민군군인들은 그분께서 키워주신 이런 무비의 담력을 가지고 적들의 도발책동을 걸음마다 짓부수어 버림으로써 미제의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사건을 계기로 전쟁광증을 일으키던 적들의 거만한 콧대를 보기 좋게 눌러놓았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공화국의 영공에 불법침입했던 미제의 간첩비행기 ≪이씨ㅡ121≫도 단호히 격추해 버리었다.

바닷가초소에서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1967년 7월 어느날 동해안의 한 해안포중대를 찾으시었다. 그때로 말하면 미국과 이남당국이 그해 봄에 있은 ≪경호함 56≫호사건을 계기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를 비롯한 동서해안과 휴전선 일대에서 연일 광란적인 군사연습을 벌이며 긴장을 격화시키고 있던 때였다. . . . 영도자님께서는 그러는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최전연에서 적들과 총을 맞대고 싸우고 있는 초병들이 보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위험한 곳에 자식을 보내놓고 그것이 걱정되어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친부모의 정이 흥건히 실린 그 말씀에 군인들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지만 경애하는 영도자님의 안녕은 곧 전체 민중의 안녕이고 조국의 미래와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안됩니다. 절대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가슴들을 내대고 성벽같이 막아섰다. 영도자님께서는 그러는 그들의 어깨며 가슴들을 일일이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시었다. 동무들이 아침저녁으로 다니는 길을 나라고 왜 나가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가 적들과 총을 맞대고 싸우는 초병들도 만나보지 않고 그냥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초소들을 찾으시는 그분의 심정은 이런 것이었다. . . . 배는 어느덧 기슭에서 퍼그나 멀어졌다. 군인들의 사기도 높고 진지위장도 잘되었다고 높이 평가해 주신 그분께서는 군인들에게 내외정치정세도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시고 경각성을 높여 조국의 바다와 해안에 그 어떤 적들도 얼씬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시었으며 사격술을 높여 적함을 단방에 명중시키라고 격려해 주기도 하시었다. 행복한 시간이 흘러갈수록 군인들은 그분께서 함께 바다로 나가보자고 하신 깊은 뜻이 더욱 가슴깊이 안겨왔다. 뭍으로 돌아오신 그분께서는 후방물자 창고들과 식당, 군인들의 병실들을 차례로 돌아보시었다. 절인 물고기를 저장해둔 독뚜껑도 열어보시고 층층 당반을 매고 말린 물고기를 차곡차곡 쌓아둔 것을 보시고는 싸움준비를 잘했다고, 이만하면 군인들의 식생활문제도 마음놓을 수 있겠다고 치하해 주기도 하시었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 한낮이 기울기 시작했다. 영도자님께서는 떠날 차비를 서두르는 일군들에게 오늘은 여기서 전사동무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시면서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시었다. 군인들은 너무나 기뻐서 환성을 올리며 어려움을 잊고 그분을 따라 식탁둘레에 모여앉았다. 그분과 함께 온 일군들이 몹시 딱한 표정으로 서있다가 그분께서 거듭 독촉하셔서야 아침에 준비해 가지고 떠났던 식사를 차려놓았다. 빵과 두어가지 반찬이 전부였다. 너무도 검소한 그분의 식찬을 보고 나어린 신병들을 물론 지휘관들도 모두 놀랐다. 그리고 이럴줄을 알았더라면 모처럼 오신 영도자님께 식찬이라도 몇가지 따로 만들어 올릴걸 그랬다고 후회막심해 했다. 그러는 좌중을 둘러보시며 그분께서는 왜 그러고들 있는가, 어서 와서 앉으라고 하시면서 어서 국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시었다. 지휘관들과 취사병들은 더욱 난처해 했다. 온 중대가 먹을 수 있게 큰 가마에 국을 끓였는데 그것을 그분께 올리자니 딱했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보신 영도자님께서는 괜찮다, 전사들이 먹는 음식을 우리라고 해서 왜 못먹겠는가, 우리가 먹어서 안될 음식이라면 응당 전사들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며 자애롭게 웃으시었다. 그분께서는 취사병들이 정히 떠올린 국을 맛보시고 국맛이 참 구수하다고 치하하시고나서 즐겁게 식사를 하시면서 군인들이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하는가, 철따라 나오는 과일들은 다 맛보는가를 알아보시고 지금은 수박이 한창인데 전사들에게 그런 것도 많이 갖다먹이라고 이르시었다. 정녕 한가정과도 같이 화기애애한 식탁이었다. 영도자가 전사들과 한가마국을 함께 드는 이런 희한한 일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날 바다로 기어드는 적은 바다에서 소멸해 버려야 한다, 그러자면 사격훈련을 잘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시면서 몸소 사격훈련장에 나가시어 여러 가지 사격훈련동작도 하나하나 지도해 주시었다. 뜻깊은 시간이 흘러 긴긴 여름해가 서켠으로 기울 무렵 헤어지기 서운해하는 초소 군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신 영도자님께서는 초소 지휘관들에게 간곡한 당부의 말씀을 남기시었다. 오늘은 바닷가초소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 동무들에게 있어서 하루하루는 전투준비에서 매우 귀중한 시간입니다. …전투준비를 더욱 다그쳐야 합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알겠습니다. 초소는 염려마십시오. 언제나 만단의 전투준비를 갖추고 조국의 해안초소를 철벽으로 지켜내겠습니다. . . .

 

5. 의리깊은 사랑

 

뜻깊은 연환회

1967년 10월 11일은 만경대혁명학원창립 20돌이 되는 날이었다. . . . 영도자님께서는 이런 그들이 학원창립 20돌 기념일을 맞으면서 김일성주석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뜻깊은 상봉연을 갖게 해주기로 하시었다. 그래서 온 나라의 각이한 초소들에 가있는 졸업생들을 다 부르고 재학생들의 기념행사도 다채롭게 준비하여 이날을 뜻깊고 성대하게 기념하도록 하는 사업을 미리부터 짜고드시었다. 그 가운데는 재학생들의 예술공연이며 집단체조, 분열행진 같은 것도 있고 졸업생들의 모임도 예견되어 있었다. 모처럼 만나 함께 밤을 보내며 회포를 풀라고 행사기간도 이틀로 잡아주시었다. 재학생들도 졸업생들도 가슴설레이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중에는 어느 한 비행구분대에서 함께 근무하는 두명의 비행사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비행임무가 예견되어 있어서 혹시 행사에 참가 못하게 되지나 않을지 초조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 . . 영도자님께서는 남모르게 조바심에 휩싸여있는 그들의 심정까지 헤아리시고 행사 전날에 친히 그들이 근무하는 구분대를 찾아가시었다. 그러시고는 두장의 초대장을 그들의 손에 꼭 쥐어주시면서 어버이수령님을 모시는 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행사가 끝날 때까지 동무들에게 비행임무를 주지 않기로 하였으니 마음놓고 어서 준비하고 떠나라고 떠밀어주시었다. 두 비행사는 학원을 졸업한 유자녀들이 한사람이라도 빠지게 될세라 그처럼 마음쓰시는 그분의 은정에 목이 메었다. 이튿날 유서깊은 만경대의 풍치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은 학원구내에서는 김일성주석님을 모시고 성대한 연환회가 열리었다. . . . 이날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행사 전과정이 훌륭히 거행되도록 온갖 심혈을 기울이시었다. 행사가 한창 고조에 이르렀을 때 김일성주석님을 우러러 흠모하는 모임참가자들의 한결같은 감사와 지극한 축원의 마음이 그대로 하늘에 사무쳐 감격의 이슬로 된듯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빗물이 어우러져 흥분에 격정을 더해 주는 그 시각 영도자님께서는 얼른 방송기재들을 설치해 놓은 곳으로 다가가시었다. 그분께서는 행사를 보장하는 방송기재들이 비를 맞게 되어 몹시 당황해 하는 방송원을 자애로운 미소로 안심시키면서 몸소 우산을 받쳐주시었다. 학원구내에 설치된 확성기에서는 졸업생들이 부르는 우렁찬 노랫소리도, 재학생들의 응석기어린 결의토론도, 그 모든 목소리에 화답하시는 김일성주석님의 호탕한 웃음소리며 저 애는 누구더라, 아, 아무개의 딸이 벌써 저렇게 자랐나! 시집을 갔겠구만 하고 감회겨워하시는 말씀도 간간이 흘러나왔다. 확성기에서 흐르는 그 모든 음향은 유기체의 신경선과도 같이 행사장에 감도는 감격과 격정을 뜨겁게 이어주었다. 영도자님께서도 그 감격과 격정에 휩싸이는 심정을 누를 길 없으시었다. 몰라보게 늠름한 모습으로 성장한 졸업생들과 한점 그늘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재학생들을 바라보시느라니 어버이수령님께서 그들 한사람한사람을 다 찾아 데려오시려고 온갖 노고를 바치신 일들, 그들의 부모들을 두고두고 잊지 못해 하시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회고하시던 일들이 눈가에 삼삼히 어려오면서 자못 가슴이 후더워지셨다. 정녕 어버이수령님의 품 속에서 나라의 역군으로 자라나고 있는 저들 모두가 자기 부모들처럼 김일성주석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나가는 혁명의 핵심대오, 친위전사로 영원히 살며 싸워나가야 한다는 엄숙한 생각도 드시었다. 그래서 이튿날 학원졸업생들과 같이한 자리에서 혁명가유자녀들은 김일성주석님을 정치사상적으로 옹호보위하는 친위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담화를 나누시었다. . . .

투사들의 부탁을 지켜

해방직후 어느날 그분께서 어머님과 함께 항일투사 안길의 병상을 찾으신적이 있었다. 안길은 백두산에서부터 김일성주석님을 모시고 싸워온 조선인민혁명군의 오랜 지휘관이었으며 해방후에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새 조국 건설과 현대적인 정규무력건설을 위하여 몸바쳐 투쟁한 훌륭한 혁명가였다. 그날 자기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던 그 투사는 김정숙여사에게 하나뿐인 아들이 자기가 걷던 길을 변함없이 이어가도록 잘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여사께서는 전우의 유언을 지켜 그의 유가족을 극진히 돌보아주시었다. 여사께서 서거하신 후에는 영도자님께서 어머님을 대신하여 계속 그의 유가족을 보살피시었다. 그런데 그 투사의 아들은 몸이 허약하여 그분께서 마음을 놓지 못하시었다. 1967년 여름에 동해바닷가의 어느 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마침 함남도일대의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시던 그분께서 그의 병상을 친히 찾으시었다. 환자는 뜻밖에 찾아온 그분께 수술한 자리가 좀 도져서 휴식삼아 입원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드렸다. 빈틈없이 맞물려진 현지지도노정을 따라 분망한 시간을 보내셔야 할 그분께서 병원에까지 찾아오신 것이 송구스럽기도 하고 자기의 병을 두고 너무나 심려하실 것이 걱정되어 돌려댄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신 그분께서는 그것 때문에 몸이 이렇게 축갔겠는가고 하시며 몹시 가슴아파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이날 그와 식사도 함께 하시고 치료에서 주의할 점들도 세세히 일러주시면서 시간을 함께 보내시다가 날이 저물녘에야 무거운 걸음으로 떠나시었다. 함경남도에 체류하시는 기간 내내 그를 두고 걱정하시던 그분께서는 현지지도를 마치고 귀로에 오르신 길에 그를 데리고 떠나 평양의 한 전문병원에 입원시키시었다. 그분께서 그렇게 마음쓰시는데도 그의 병세는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어느날 그분께서 또다시 병원을 찾으시었을 때였다. 병색이 짙은 그의 얼굴을 지켜보시는 그분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셨다. . . . 깊은 생각에 잠기셨던 그분께서는 이윽고 자리를 뜨시면서 고통스러워도 며칠만 더 참으라고 이르시고 큼직한 지함 하나를 주고 돌아가시었다. 안동무 치료도구라고 친필로 정히 쓰신 그 지함에는 복대와 왼손잡이 기계낚싯대가 들어 있었다. 그분께서 언제인가 입맛을 잃은 그를 데리고 바닷가에 나가 섭죽을 쑤어주신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가 왼손잡이라는 것을 눈여겨 보아두셨던 것이다. 이날 그의 병치료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다른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신 그분께서는 며칠후에 기후조건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그의 치료에 효과가 있음직하다는 어느 한 나라로 그를 떠나보내는 조치를 취하시었다. 그리고 환자를 간호도 할 겸 그의 아내가 함께 따라가도록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그들 부부가 떠나는 날에는 공항에 나가 몸소 비행기에까지 오르시어 그들의 출발준비정형을 살펴보시고 승무원들에게 그들을 잘 돌보아주라고 당부도 하시었다. 그러시던 그분께서는 눈길을 더듬으시며 누군가를 찾으시더니 수영이가 왜 보이지 않는가고 물으시었다. 수영이는 그들의 막내딸이었다. 한 일군이 어린애는 외삼촌집에 맡겨두고 떠나기로 했다고 말씀드리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영도자님께서는 철없는 것을 두고 가면 마음이 몹시 허전하겠는데 그래서야 병치료가 제대로 되겠는가고 걱정어린 말씀을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떠난 뒤에도 수시로 치료정형을 알아보시고 필요한 약재들을 조국에서 구해 보내도록 하시며 마음쓰시었다. 그러다가 1차 치료결과가 좋고 병이 급한 대목을 넘겼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너무나 기뻐 이제는 됐다고 하시면서 회복기에 들어서면 조국이 그립고 어린애생각을 더하겠는데 어서 그들을 데려오자고, 특별기를 띄워서라도 설전으로 데려다가 평양에서 설명절을 함께 쇠고 치료도 계속 받게 하자고 말씀하시었다. 이런 극진한 보살피심 속에서 그 유자녀는 그처럼 위중하던 병을 고치고 마침내 다시 초소에 설 수 있게 되었다. . . . 그분께서 잊지 못해 하시는 혁명가유자녀들 가운데는 항일투사 이봉수의 아들도 있다. 그분께서는 그를 아버지의 유언대로 인민군대에 입대시켜 정치일군으로 사업하게 해주시고 걸음걸음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 주시었다. 1968년 3월 11일이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돌제사날이 되어 휴가를 받고 집에 와있는 그에게 친히 전화를 거시었다. 그의 안부며 가족의 근황을 차례로 묻고나신 그분께서는 내일이 동무아버님이 돌아가신 날인데 지금 어떻게 지내는가, 동생들이 슬퍼하지 않는가고 물으시었다. 뜻밖에 그분의 전화를 받고 다심한 위로의 말씀에 접한 그는 목이 메어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굳어졌다. 송수화기에서 다시 그분의 음성이 조용히 울리었다. 오늘밤을 그저 슬프게 보내면 안됩니다. 이제는 동무가 집안의 기둥인 것만큼 동생들을 앉혀놓고 일생을 수령님께 충성다한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니한테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화는 끊어졌지만 그는 오랫동안 두손으로 송수화기를 부둥켜안은 채 움직일줄 몰랐다. 식구들은 여전히 그분의 자애로운 음성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은 전화기를 지켜보면서 그분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가슴에 새기었다. 그때로부터 이틀이 지난 3월 13일 이른새벽이었다. 그분께서는 평양에 왔을 때 한번 만나보자고 하시면서 동트기전 첫 새벽에 그를 불러주시었다. 군복차림을 한 그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던 그분께서는 옆자리에 끌어당겨 앉히시면서 말씀을 시작하시었다. …동무의 아버지는 아주 낙천적이고 훌륭한 혁명가였습니다. 그 어떤 난관앞에서도 주저할줄 모르고 일제놈들과 지주, 자본가놈들을 반대하여 견결히 싸웠습니다. 동무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동무가 집안의 기둥입니다. 집안에는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늙으신 어머님도 계시고 동생들도 있는데 동무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어머니를 잘 모시고 동생들을 잘 이끌어서 대를 이어 혁명을 해야 합니다. 혁명의 꽃을 계속 피워나가야 합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김정일영도자님을 따라 혁명에 충실할 것을 엄숙히 맹세했다. 그분께서는 그를 자리에 끌어앉히시고 그가 새로 맡아하기 시작한 정치부중대장의 사업에 대하여 하나하나 물으시며 오랜 시간을 두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그분께서는 이날 정치부중대장의 위치와 임무로부터 사업 방법과 작풍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실례까지 들어가면서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었다. . . .

영예군인들은 당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1968년 8월 초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을 헤치고 함흥영예군인수지일용품공장을 찾으시었다. . . . 영예군인들을 아껴야 합니다. 영예군인들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당과 수령을 위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희생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운 사람들이므로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휴식을 하여도 됩니다. 그러나 영예군인들은 휴식하지 않고 이렇게 직장에 나와 일하고 있습니다. 영예군인들은 당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정녕 영예군인(상이군인)들에 대한 그분의 믿음은 그 높이를 가량할 수 없는 것이었고 기울이시는 사랑은 그 열도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분께서 영예군인들이 절대로 무리하게 일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그저 밥맛이 날 정도로 일하면서 휴식과 생활 조직을 잘하여 모두가 건강한 몸으로 혁명의 꽃을 계속 피워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금치 못해하던 영예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모습을 그려보는 일군들은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영도자님께서 공장에 도착하시니 지난해에 그분을 만나뵙고 크나큰 영광을 받아안은 영예군인인 지배인이 정문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병사시절처럼 부동자세로 정중히 인사를 드리는 그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시며 영예군인들이 다 건강한가, 동무들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다고 말씀하시었다. 감격에 목이 메인 지배인은 빗발 속에 허리를 짚고서시어 공장구내를 둘러보시는 그분께 어서 사무실로 들어가시자고 하면서 우산을 받쳐드리었다. 그분께서 우산을 도로 지배인에게 주시며 사양하시었다. 지배인이 난처해하자 그분께서는 몸도 성하지 못한 동무가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럼 우리 함께 쓰고 가자고 하시면서 한손에 우산을 받아드시고 다른 손으로는 지배인의 어깨를 끌어당겨 감싸안고 걸으시었다. 지배인이 송구스러워할수록 더 힘주어 껴안으시며 그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주시는 바람에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까지 맞아 그분의 옷은 잠깐사이에 푹 젖어들었다. 정문에서 공장사무실까지 몇걸음 되지 않는 그 길을 하루에도 수없이 오가는 지배인이었지만 자신의 옷이 젖어드는 것은 전혀 감촉하지 못하시는 듯 의족을 한 그의 다리에 걱정스러운 눈길을 주신 채 천천히 걸으라고 하시며 살뜰히 부축해 주시는 그분의 품에 안기고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걸음은 더욱 허둥거려졌다. 이윽고 작업현장에 다다르신 영도자님께서는 어느 전투에서 부상당했는가, 그때가 몇살 때였는가, 의족한 다리로 걸어다니기가 불편하지는 않은가, 아이들은 몇인가고 다정히 물으시며 영예군인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도 나누시고 그들이 만든 제품도 일일이 보아주시었다. . . . 여러가지 시제품들까지 다 돌아보시고 더없이 만족해하시던 그분께서는 문득 일하는데 애로되는 것이 없는가고 물으시었다. 지배인이 영예군인들을 대표하여 아무런 불편도 애로도 없다고 말씀드리자 사소한 것이라도 서슴없이 말하라, 영예군인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다, 동무들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다 풀어주겠다고 하시면서 다시금 깐깐히 물으시었다. 사실 그들에게는 자그마한 불편이나 애로도 없었다. 나라에서는 그들이 온갖 사회적인 특혜를 다 받도록 해주고 다달이 보약까지 보내주며 휠체어나 버스 같은 것도 넉넉히 보장해 주고 있다. 온 나라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 속에 살고 있는데 무엇이 더 그립겠는가!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올리지 못하고 서있는 지배인을 서운한 눈길로 바라보시며 그래도 일해 나가느라면 애로되는 문제가 있을 텐데 어려워말고 어서 말하라고 거듭 재촉하시었다. 그러시고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기셨다가 악기는 매 사람에게 다 차례지는가고 물으시었다. 지배인이 매 사람에게 다 차례지지는 못하지만 예술소조를 운영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금시 안색이 환해지신 그분께서는 그것 보시오, 악기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이제야 내가 도와줄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모든 동무들이 악기를 한가지씩 다룰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영예군인들이 악기를 타는 것은 예술소조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생활을 낙천적으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악기도 더 주고 텔레비전도 보내주겠습니다라고 하시며 못내 기뻐하시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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