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25일

통일여명 편집국

 

 

백두산의 아들

 - 은혜로운 사랑의 태양 1

통일여명 편집국 6-1-25

 

차 례

 

1. 민족의 대통운

고향 / 백두산의 기상 / 만경대일가의 혈통 / 근로민중에 대한 경애심

 

2. 대망의 웅지

건국의 첫 삽도 함께 뜨시며 / 전야에서 그려보신 내일의 꿈

어머님의 영전에서 / 정원의 새벽을 지켜

 

3. 전화의 시련속에서

오각별 빛나는 조선지도 / 마음은 언제나 최고사령부에

포화속에 핀 진달래 / 아버님께 보내신 편지

 

4. 민중의 발걸음에 맞추시며

노래도 부르고 땀도 흘리시며 / 위대한 평민 / 학우들을 위해 모든 것을

 

5. 시대와 숨결을 같이하시며

강선의 정신을 안고 /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 / 일기장에 쓰신 시

 

6. 은정은 학창을 넘어

한집안식구가 되시어 / 스스로 맡으신 일 / 영웅의 어머니를 찾아서

 

1. 민족의 대통운

 

고향

. . . 김정일영도자님의 고향은 유서깊은 백두산이다. . . . 백두산 정점의 장군봉에서 동남쪽으로 약 40리 상거한 곳에 만리창공으로 치솟아오르려는 백두의 기상인양 천애의 봉우리 하나가 웅건히 솟아있다. 백두영봉에 태맥을 둔 이 나라의 천만산악을 한품에 그러안아 영원한 생의 활력을 부어주고 있는 듯한 이 봉우리가 정일봉이다. . . . 신령스런 운치가 초연히 감돌고 상서로운 기운을 은은히 발산하는 정일봉기슭 천고의 수림 속으로는 태초의 그날부터 백두의 계곡을 누벼내린 벽계수가 흐른다. 백두천상에 미명이 비낄 때 정가로운 물안개를 피워올려 서리꽃의 절경을 펼치기도 하고 천지호반에 뿌리박은 칠색무지개를 정일봉마루에 이어놓기도 하는 이 유정한 물줄기가 소백수이다. 이끼오른 분비나무, 가문비나무가 희끗희끗하고 갖가지 수목이 울울창창한 속에 절벽을 이루며 솟아있는 정일봉과 정가로운 소백수의 흐름이 어우러져 천혜의 택지를 이룬 아늑한 골안에 자그마한 귀틀집이 있다. 백두산일대의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천고의 수림 속에 전개된 조선인민혁명군의 수많은 비밀근거지들의 중심에 위치한 백두산밀영의 이 귀틀집이 바로 김정일영도자님의 생가이다. 항일의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1936년 2월에 역사적인 남호두회의에서 1930년대 전반기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활동을 통하여 이룩한 성과에 토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발전시킬데 대한 전략적 구상을 밝히시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조중국경일대의 넓은 지역에 새로운 형태의 비밀근거지를 창설할데 관한 방침을 제시하시었다. 이에 따라 1936년 가을부터 백두산의 수림 속에 밀영형태의 비밀근거지들이 수많이 전개되게 되었는데 소백수골에 위치한 백두산밀영에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가 자리잡았다. . . . 보천보의 밤하늘에 울린 총성으로 더욱 고양된 항일무장투쟁이 바야흐로 일제와의 최후결전을 준비하는 역사적 단계로 발전함으로써 조국강토에는 광복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이러한 때에 백두산밀영의 자그마한 귀틀집에서 탄생하시었다. 그날은 1942년 2월 16일이었다. . . . 슬픔은 나누고 싶고 경사는 서로 알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혁명조직성원들은 항일대전의 전장에서 백두의 기상과 슬기를 안고 탄생하신 그분께서 장차 조선을 빛내이는 태양, 겨레와 민중을 자애로운 사랑의 한품에 안아 영원한 행복에로 이끌어주는 태양이 되어주실 것을 기원하여 ≪백두광명성≫이라고 존칭하였으며 아름드리 거목에, 천연바위에 불멸의 글발을 새겨 그분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었다. ≪아, 조선아 겨레들아 백두광명성 탄생을 알린다≫(함경남도 신흥군 부연리). ≪백두산에 김일성장군의 계승인 백두광명성 탄생 삼천리강산에 밝은 빛 뿌리며 솟아난 백두광명성 만세≫(평안남도 안주시 입석리). ≪백두산에 광명성 떴다 백두광명성 삼천리를 비친다 모두 광명성 바라보라≫(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 . .

백두산의 기상

. . . 그분의 부모님들도 요람을 지켜주는 한가정의 아버지, 어머니만이실 수 없었다. 아버님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늘 전구에 나가 계셨고 어머님이신 김정숙여사께서도 혹은 자제분을 업으시고 혹은 밀영에 남겨두신채 전투임무와 지하공작의 길을 떠나곤 하시었다. . . . 1942년 6월 중순의 어느날이었다. 자제분께서 태어나시기전에 원정에 오르셨던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날 밀영에 돌아오시어 처음으로 아드님을 안아보시게 되었다. . . . 며칠후 소부대활동을 하던 몇몇 지휘관들이 백두산밀영에 도착하여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여사를 만나뵙고 아드님의 탄생을 축하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유격대의 밀영이라 검소할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소박한 방안의 정경을 보고는 전사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지휘관이 좌중의 마음을 대변하여 장군님께 머리 큰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서 형편이 이렇게 되어 면목이 없노라고 말씀드리었다. 장군님께서는 미소어린 안광으로 전우들을 둘러보시면서 물론 동무들의 마음은 알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후대들을 따뜻한 온실에서가 아니라 항일대전의 포성 속에서, 설한풍이 휘몰아치는 이 백두의 폭풍 속에서 억세게 키워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앞으로 해방된 조국땅에서 부러움없이 살 때에도 오늘을 돌이켜보면서 혁명을 계속해나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었다. . . . 여사께서는 밀영의 밤이면 아드님을 품에 안고 다독이며 자장가를 불러주시었다. ≪아가아가 자장자장 어서 자거라 / 어서 자라 속히 자라 총칼을 메고 / 조국해방 만세소리 활발한 곳에 / 너 앞서고 나 뒤에 나가 싸우자≫ . . . 영도자님께서는 항일대전을 이끄시는 부모님을 따라 일찍부터 총폭탄이 작렬하는 전장의 소음과 초연을 몸에 익히시었으며 경각에 박두한 신변의 위험도, 주야로 이어지는 행군과 살벌한 총검의 숲을 헤쳐야 하는 적구투쟁의 시련도 몸소 겪으시었다. 그 나날에 어리신 그분께서는 영장의 기개와 후더운 인정미를 깊이 체득하시었다. . . . 어느 추운 겨울날 당시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쏘련군 사령관 스티코프 대장김일성장군님의 저택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점심식사후 오침하고 계시는 때였다. 스티코프는 그날도 여느때처럼 정원에 들어서는 길로 저택현관으로 곧장 갔다. 그런데 어리신 영도자님께서 깍듯이 인사를 하시며 그가 현관에 들어서는 것을 막아나서시었다. 불철주야로 새 조국 건설에 진력하시는 아버님께 모처럼 차례진 휴식시간을 지켜드리시려는 것이었다. . . . 그분의 의젓하고 예의범절이 분명한 행동에 다시금 감동된 대장은 그분께 사의를 표시하며 자기는 밖에서 기다리는 편이 더 낫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어리신 영도자님과 함께 밖에 서있게 되었다. 그때 김일성장군님께서 오후 출근차로 현관을 나서시다가 스티코프 대장이 장승처럼 서있는 것을 보시고 왜 거기 서있는가고 물으시었다. 대장은 사연을 이야기하고나서 아무데나 거침없이 ≪무사통과≫해온 대장을 댁의 어린 주인이 내쫓아 졸장부로 만들어버렸다고 농담을 하며 웃었다. 장군님께서도 함께 호탕하게 웃으시었다. 스티코프 대장은 어리신 영도자님을 번쩍 안아 추켜올리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어린 영웅, 소년장군 하고 격찬해 마지않았다. . . .

만경대일가의 혈통

. . . 고조할아버님 김응우선생님은 일찍이 대동강에 기어든 미국해적선 ≪셔먼≫호를 수장해 버린 평양성사람들의 투쟁을 선도하시었고 증조부모 김보현선생님이보익여사는 왜놈들에게 착취와 구박을 받으면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그놈들을 반대하여 싸우다 죽는 것이 낫느니라고 하시면서 자제분들을 반일운동에 내세우시었을 뿐 아니라 김일성장군님께서 백두광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시는 전기간 일제의 갖은 탄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애국의 지조를 꿋꿋이 지켜오시었다. 할아버님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내 몸이 찢기어 가루가 될지언정 일본놈들과 싸워 이겨야겠다,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반일지하혁명조직인 ≪조선국민회≫를 뭇고 국내외의 광범한 반일애국역량을 결집해 나가시다가 일제교형리들의 야수적인 고문의 어혈로 세상을 떠나신 조선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시고 할머님 강반석여사는 남편과 자제분들의 혁명활동을 성심껏 후원하시는 한편 몸소 조국의 독립과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신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조선여성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시었다. 조선혁명군의 한 무장소조를 이끌고 국내에 진출하여 풍산군(현재 김형권군), 홍원군일대를 휩쓸면서 파발리주재소의 마쯔야마 왜놈순사부장을 처단한 것을 비롯하여 조선민중의 항일무장투쟁사에 빛나는 공적을 세우고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한 작은 할아버님 김형권선생님과 항일대전에서 전사한 삼촌 김철주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일가분들도 조선독립을 위하여 한생을 바쳤다. . . . 이튿날 증조할아버님께서는 고이 간수해두었던 벼루를 내놓으시며 증손자분에게 말씀하시었다. 이것은 너의 할아버지때부터 쓰던 것이다. 너의 할아버지는 여기에다 먹을 갈아 ≪지원≫(志遠)이라는 글을 썼다. 나라 찾을 큰뜻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지. 바로 그 뜻대로 너의 할아버지는 끝까지 용감하게 잘 싸웠다. 다음은 너의 아버지≪조선독립≫이라는 글을 썼다. 내가 짚신을 삼아 판 돈으로 먹과 붓을 사다주면 그것이 다 닳도록 쓰더구나. 그러더니 정말 나라를 찾고 돌아오지 않았니. 너의 할아버지의 뜻을 너의 아버지가 이었지. 그래 우리 증손자는 이것으로 무슨 글을 쓰겠니? 증조할아버님으로부터 붓을 받아드신 영도자님께서는 잠시 생각을 고르시었다. 어린 가슴에 간직해오신 신념의 글발을 불러내는 예지의 눈빛이 샛별처럼 빛났다. 이윽고 영도자님께서는 어머님께서 갈아주시는 먹을 붓에 듬뿍 묻히시더니 활달한 필치로 써나가시었다. ≪김일성장군 만세!≫ 아버님께서 찾아주신 조국을 대를 이어 영원히 빛내어갈 크나큰 포부를 담으신 의미깊은 글발이었다. ≪지원≫, ≪조선독립≫, ≪김일성장군 만세!≫, 정녕 깊은 뜻으로 이어지는 글발이었다. 지원의 애국사상에서 조선독립의 여명이 밝아왔고 독립된 조선은 김일성장군님의 현명한 영도에 의하여 더욱 살기 좋고 행복한 민중의 나라로 빛날 것이 아닌가! . . .

근로민중에 대한 경애심

. . . 영도자님께서는 그날 댁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어머님께 너무나 일을 많이 하며 고생하여 허리가 굽으신 증조할아버님걱정을 하시면서 이제는 왜놈들이 다 쫓겨가고 해방이 되었는데도 왜 그냥 힘들게 일하시는가고 안타까워하시었다. 어머님께서는 그러지 않아도 이젠 좀 쉬시라고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그때마다 왜놈세상에서는 애써 지은 곡식을 지주놈에게 다 빼앗겼기 때문에 분통이 터졌는데 지금은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나라가 강해지고 백성들이 잘살게 되니 얼마나 좋은가고 하면서 일손을 놓지 않으신다고 말씀해 주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왜 일을 많이 하면 나라가 강해지고 백성들이 잘살게 되는가고 또 물으시었다. 일을 많이 해서 기계도 많이 만들고 낟알도 많이 내고 집들도 많이 지으면 사람들이 더 잘 먹고 더 잘살게 될 것이고 우리 나라는 강대한 나라로 될게다. 그러니 우리 나라에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훌륭하고 제일 고마운 사람이란다. 영도자님께서는 어머님의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었다. 그후 어느날 만경대집으로 가신 그분께서는 증조할아버님께서 잠시 뜨신 사이에 밭에 놓고 가신 호미로 김을 매보시었다. 증조할아버님께서는 어렵지 않게 하시는 것 같았는데 정작 해보니 힘에 겨우시었다. 잠깐사이에 빨갛게 익은 얼굴로 땀이 흘러내렸다. 아서라. 넌 못한다. 발을 다치겠다. 증조할아버님께서 급히 소리치며 다가오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밝게 웃으며 말씀하시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할아버지처럼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훌륭하대요. 나도 할아버지처럼 일을 잘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어요. 그러시고는 또다시 허리를 굽히고 꼼꼼히 호미질을 해나가시었다. . . . 해방된 지 얼마되지 않다보니 힘든 일도 많았고 작업조건도 좋지 못했다.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일하는 조사공누나들의 손은 허옇게 부풀고 진무러져 있어서 보기에도 마음이 저려드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어머님에게 누나들의 손이 왜 저렇게 터졌는가고 물으시었다. 어머님께서는 한 조사공처녀의 터지고 물크러진 손을 어루만지시면서 하루종일 더운물에 손을 잠그고 일해서 그렇다고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김이 서려오르는 물에 두 손을 잠그어 보시었다. 뜨거운 물에 손가락이 빨갛게 되면서 아려났다. 누나들의 손이 정말 몹시 아프겠다고 생각되시었다. . . . 그날 저녁이었다. 그분께서는 자주 들리곤 하시던 이웃집에 찾아가 손이 아픈데 바르는 약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하시었다. 어떻게 하면 조사공누나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하고 종일 궁리하시다가 고약이라도 많이 보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이었다. 주인은 늘 허물없이 찾아와 재미나는 이야기도 나누고 축음기도 듣다가곤 하시던 그분께서 그저 약을 달라고만 하시는 바람에 의아해 하면서 있는대로 꺼내드리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 고약통들과 집에 가지고 있던 것까지 내놓으시면서 어머님께 말씀하시었다. 어머니, 이 약을 누나들에게 보내주세요.… 제사공장누나들이 이 약을 바르면 손아픈 것이 인차 나을거예요. 내 손이 텄을 때 어머니가 이런 약을 발라주시니까 인차 나았댔어요. 그러시고는 이다음에 크면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지 않고도 비단실을 뽑을 수 있는 기계를 꼭 만들어내겠다고 말씀하시었다. 너무도 웅심깊고 기특한 그 마음에 어머님께서도 감동을 금할 수 없으시었다. . . .

 

2. 대망의 웅지

 

건국의 첫 삽도 함께 뜨시며

. . .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시민들의 가슴에 맺힌 이 원한을 풀어주시려고 보통강개수공사를 벌일 것을 구상하시고 1946년 5월 21일에 친히 착공식에서 격려사를 하시었으며 착공의 첫 삽을 뜨시었다. 주석님의 연설에 고무된 사람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우레가 울고 비바람이 사나운 날에도 공사장에서는 춤판을 벌이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기세를 올렸다. 어머님과 함께 공사장에 나가신 영도자님께서는 어른들의 일손을 힘껏 도우시었다. 때로는 쟁기를 고치는 노인들을 거들기도 하고 공사장에 차려놓은 대장간에서 땀을 훔치며 풀무질도 도우시었으며 꽹이자루를 고쳐놓으면 그것을 일터에 날라다주기도 하시었다. . . . 노인은 영도자님의 머리를 정겹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는 더덕더덕 터갈라진 손으로 그분의 두손을 쓸어만지며 토성랑의 뉘 집 자손인가고 캐어물었다. 영도자님께서 토성랑에서 산 일이 없다고 이야기하시자 나이가 어리니 모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아버님은 계신가고 물었다. 아버님이 계신다고 대답하시자 노인은 무슨 일을 하는가고 또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님은 김일성장군님이시라고 대답해 주시었다. 노인은 엉겁결에 굳어지며 아니, 아버님이 김일성장군님이시라니?!… 하고는 한참이나 그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김일성장군님의 부인과 자제분께서 매일같이 공사장에서 이런 험한 일을 하시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들이었다. 어리신 영도자님의 손목을 잡고 여사께로 다가간 노인은 감탕에 얼룩진 여사의 차림새를 이윽토록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아하니 평백성이 분명한데… 아버지가 김일성장군님이시라기에… 그렇다면… 웬일인가 싶었던 여사께서는 그제서야 영문을 짐작하고 조용히 웃으시며 장군님의 자제라고 공사장에 못나온다는 법이야 없지 않는가고, 장군님의 자제일수록 이런 공사장에 나와서 한가지 일이라도 성심껏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여사의 말씀에 다시 한번 놀라며 굳어졌던 노인은 이윽고 깊이 머리숙여 인사를 올리며 목메인 소리로 이 나라 백성들이 하늘이 낸 김일성장군님을 태양으로 우러러모신 것만도 더 없는 행운인데 장군님의 부인께서 자제분과 함께 우리 백성들과 더불어 이처럼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니 그 높은 덕망이 놀랍기만 하다고 말했다. 이 소식은 삽시에 공사장과 온 시내에 알려졌다. . . .

전야에서 그려보신 내일의 꿈

1948년 6월 초에 영도자님께서 어머님을 따라 모내기가 한창인 평양근교의 미림벌로 나가시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농민들과 함께 부지런히 모를 꽂아나가시는 어머님께 연신 모춤을 날라다드리시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옷에 흙탕물이 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으시었다. 휴식참에 그분께서는 어머님에게 손이 아프지 않으신가, 허리는 괜찮으신가고 물으시었다. 여사께서는 늘 손으로 모를 내는 농민들이 힘들지 잠시 나와서 하는 나야 무엇이 힘들겠는가고 하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파랗게 물들어가는 논벌을 바라보시면서 허리도 손도 아프지 않게 모를 심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는 아드님에게 여사께서는 해방전에는 허리아픈 것보다 왜놈과 지주놈의 착취가 더 참기 어려웠다고 하시면서 인제는 왜놈도 지주도 없는 세상이 왔는데 농민들이 허리아픈줄도 모르고 농사 지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시었다. 그때 한 일군이 그분께 놀잇감자동차를 가져다드리면서 너무 힘들게 일했는데 이제는 논머리에서 좀 쉬시라고 말씀드리었다. 모두 그게 좋겠다고 한마디씩 했다. 영도자님께서는 놀잇감자동차를 이리저리 굴려보시다가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오르시었다. . . . 그분께서는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그 논배미를 다 끝내고 새 논배미로 옮겨가려 할 때에야 어머님을 부르며 달려가시었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또 모춤을 들고오시는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차분히 앙금이 가라앉은 논에 놀잇감자동차를 내려놓더니 천천히 굴리시는 것이었다. 자동차는 잘 굴러갔다. 자세히 보니 놀잇감자동차의 적재함을 떼고 그자리에 판자 하나를 가로질러놓아서 절반쯤 뜨면서 굴러가게 되어 있었다. 참으로 신통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자동차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분의 남다르게 비상한 예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분께서 필시 무슨 궁냥을 하고 계신 것이라고 짐작되어 궁금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러는 그들에게 이것은 모내기하는 자동차라고 말씀해주시었다. 그러시고는 이런 자동차에 척 앉아서 모를 심는다면 다리도 안아프고 허리도 아프지 않을게 아닌가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그분의 뜻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해했다. . . .

어머님의 영전에서

. . . 여사께서는 혼신의 정력을 모아 군복을 다리기 시작하셨다. 아드님께 남기고 싶은 천만마디의 말을 담아 다림발을 세워나가시는 여사의 가슴은 백두의 기상과 고결한 덕망, 비범한 슬기와 영장의 담력을 아울러 갖추신 아드님에 대한 크나큰 기대감과 철석 같은 믿음으로 그득히 차올랐고 장군님의 대를 굳건히 이어놓으신 안도감으로 평온해지시었다. 이윽고 방에 들어서신 아드님을 띠어보신 여사께서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안고 계시던 군복을 넘겨주시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씀하시었다. 이 옷은 아버님께서 조국을 해방하는 최후공격전에로 떠나실 때 입으셨던 군복이다.아버님은 나라를 찾아주시고 우리 인민들이 다 잘살 수 있게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분이시다. 너희들은 아버지장군님을 잘 모셔야 한다. 아버님께서 건강하셔야 우리 나라가 튼튼해지고 인민들이 더 잘 살 수 있게 된단다. 영도자님께서는 백두의 넋이 깃든 아버님의 군복과 간고한 혁명의 길에서 철의 신조로 체득하시고 빛나는 한생으로 지켜오신 어머님의 좌우명을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안으시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어머님의 그 말씀이 자신께 남기시는 마지막유언이라는 것을 모르고 계시었다. . . . 1949년 9월 22일 새벽이었다. 너무나 억이 막혀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치밀어오르는 오열을 가까스로 누르시며 여사의 영전에 이윽토록 서계시던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여사의 손을 따뜻이 감싸쥐시었다. 조국을 위해, 민중을 위해 그렇게도 열정에 넘친 한생을 살아오신 여사,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이 쓰다듬어주시고 주저하는 사람들을 떠밀어주시며 귀여운 어린이들의 볼을 어루어주시던 여사의 손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 . .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치밀어오르는 비감을 가까스로 누르며 말씀하시었다. 김정숙동무는 조국의 광복과 우리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운 열렬한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이름난 명사수였고 능숙한 지하공작원이었으며 모진 시련과 난관 앞에서도 굴할줄 모르는 강의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 동생을 잃고 친척들과도 생이별하고 고생이란 고생을 다 겪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남달리 조국을 사랑했고 동지들을 사랑했으며 혁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왔습니다. . . . 조객들 속에서는 더욱 세찬 흐느낌이 터져올랐다. . . . 며칠후 영도자님께서는 아버님을 모시고 동생과 함께 묘소로 가시었다. 빨간 흙이 눈뿌리를 저미는 봉분위에는 철이른 단풍잎이 점점이 떨어져있었다. 그속에 어머님께서 누워계신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치밀어올랐다. . . . 장군님께서는 자제분들을 차례로 안아일으키며 말씀하시었다. 너희들은 어머니를 잊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는 조선의 훌륭한 딸이었다. 그는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일찍이 손에 총을 잡고 10년세월 백두산에서 나와 함께 싸웠다. 아직도 백두산의 산발마다에는 너의 어머니의 피어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 . . 혁명의 길은 간고했지만 너의 어머니는 언제나 웃으며 싸웠다. 너의 어머니가 백두산줄기마다에 뿌려놓은 피와 땀은 헛되지 않았다. 오늘 우리 나라의 부강발전과 우리 인민의 행복한 생활 속에는 수많은 혁명열사들과 함께 너의 어머니가 바친 수고가 깃들어 있다. 우리 인민은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머니처럼 조국의 훌륭한 아들딸이 되어야 한다. 위대한 혁명가의 한생에 대한 값높은 칭송인 동시에 아드님께서 어머님의 염원을 빛나게 실현하실 것을 바라시는 크나큰 기대가 어린 말씀이었다. . . .

정원의 새벽을 지켜

. . . 어느날 새벽, 지저귀는 새소리에 이른잠을 깨신 영도자님께서는 얼른 아버님께서 계시는 방쪽을 살피시었다. 전날에 늦도록 담화하던 일군들을 돌려보내신 뒤에 또 서류들을 한가득 펼쳐놓고 한장한장 넘기시는 것을 보고 자리에 드셨는데 어느새 깨셨는지, 아니면 한밤을 또 고스란히 지새신 것인지 알 길이 없으시었다. 정원에서 소란스레 지저귀는 새소리가 문득 마음에 걸리시었다. 어머님께서 새벽마다 긴 나뭇가지끝에 연한 회초리를 잇대어 만든 장대로 새들을 날리시며 아버님께서 계시는 창가를 지키시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제부터는 자신께서 그 장대를 넘겨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굳어지셨다. 다음날부터 영도자님께서는 늘 뙤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침상에 드셨다가 새들이 우짖기 시작할 무렵이면 어머님께서 드셨던 장대를 드시고 정원의 뜨락을 가만가만 저겨디디시며 새들을 날리곤 하시었다. 그것은 여사께서 보여주신 친위전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 . .

 

3. 전화의 시련속에서

 

오각별 빛나는 조선지도

. . . 오만무례한 원쑤들의 북진공격을 좌절시킨 인민군대는 적을 38도선이남으로 내몰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침략자들을 연속 답새겼다. 6월 28일에는 서울이 해방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전이 해방되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나이가 어려 몸은 비록 후방에 계셨으나 마음만은 인민군대와 함께 남진의 길에 있었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보도로 연이어 전해지는 인민군부대들의 혁혁한 전과소식은 그분의 가슴을 무한히 격동시켰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벽에 걸어놓은 조선지도에서 인민군부대들에 의하여 해방된 이남의 도시와 마을들을 찾아보시던 그분께서는 하나의 생각이 섬광과도 같이 번쩍이었다. 인민군부대들에 의하여 해방되는 도시와 마을마다 오각별을 붙여나가느라면 미제침략자들을 때려부수며 노도와 같이 남진하는 인민군용사들과 발걸음을 같이하게 될 것이고 마을사람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게 될 것이었다. 가슴속에 묻어둘 수 없고 혼자서 묵새길 수 없는 것이 이런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빨간 종이로 오각별을 따가지고 그것을 조선지도의 해방지역마다에 붙이시었다. 별도 큰 오각별과 작은 오각별을 만들어 서울, 대전을 비롯한 큰 도시들에는 큰 오각별을 붙이시었다. 동무들과 마을사람들은 하루에도 몇차례씩 그분께로 찾아가 인민군대가 미국놈들을 어디까지 밀고나갔는가를 알아보고는 희색이 만면해서 돌아가곤 했다. 조선지도의 붉은 별이 늘어날수록 남녘의 해방민중은 날마다 늘어났고 영도자님의 마음 또한 남녘민중과 함께 감개가 무량함을 어쩔 수 없었다. 해방지역에서 민주선거가 실시되어 인민위원회가 복구되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인민적 시책으로 노동자, 농민, 지식인을 비롯한 남녘의 근로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 기뻐할 때 어리신 영도자님께서도 박수를 보내곤 하시었다. 전쟁은 준엄했다. 미제를 비롯한 침략자들은 단말마적으로 발악하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전쟁을 확대했다. 그리하여 전쟁은 장기성을 띠었고 그만큼 시련의 국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일영도자님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필승의 신념만이 차고 넘쳤다. 그분의 모든 사색과 행동, 생활 전체가 이러한 신념에 바탕을 두고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원쑤들의 맹폭으로 거리와 마을이 잿더미로 변하고 산과 들이 불타버릴 때에도 승리한 후 일떠설 새 거리와 마을을 그려보시었고 푸른 녹음으로 뒤덮일 조국의 아름다운 산야를 생각해보시었다. 여기에 전쟁을 이겨가시는 그분의 철의 의지가 있었다. . . .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이날을 그저 예사로이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시었다.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해놓고 싶으시었다. 그분께서는 아침일찍 동생의 손목을 잡고 장자산기슭 양지바른 곳에 이르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동생과 함께 두개의 구덩이를 파시었다. 동생에게는 거기에 심을 애기잣나무를 날라오게 하시고 자신께서는 구덩이안에 부식토를 두툼히 까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곧 나무심기에 달라붙으시었다. 동생에게 잣나무 윗초리를 잡게 하시고 자신께서는 구덩이에 흙을 밀어넣으시었다. 자신의 손으로 창조적 노동의 보람을 맛보는 동생은 신바람이 났다. 냇가로 달려가 하얀 차돌을 치마폭에 한가득 주어오는가 하면 놀잇감 바께쓰로 물도 길어왔다. 그리고는 이 나무가 언제면 내 키만큼 크는가고 묻는 것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이제 설을 세번만 쇠면 네 키만큼 클 것이라고 대답하시고 잣나무둘레를 발로 꼭꼭 밟아주시며 동생의 손목을 꼭 잡으시었다. 그러시면서 이 나무가 어른키만큼 큰 다음에 아버님을 모시고 꼭 와보자고, 그러면 아버님께서 몹시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동생은 너무 기뻐 어쩔줄 몰라하며 깡충깡충 뛰었다. 그때 한 일군이 다가와 그분의 일손을 거들어주었다. 그분께서는 그와 인사를 나누시고 미국놈들이 우리 나라를 먹겠다고 덤벼들었지만 절대로 안된다고, 미국놈들이 한그루의 나무를 불태우면 우리는 열그루, 백그루의 나무를 심어 우리의 산과 들을 더욱더 푸르싱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 . .

마음은 언제나 최고사령부에

. . . 1952년 6월 어느날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뜻밖에도 평안북도일대를 현지지도하고 계신 아버님께서 신의주에서 부르신다는 연락을 받으시었다. 그분께서는 지체함이 없이 길을 떠나시었다. 날개라도 돋친듯이 달려가시며 그분께서는 최고사령부에서 아버님과 함께 계시리라 마음을 굳히시었다. 그 결심은 전쟁 2년동안에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오신 심정의 응결체였다. 꿈결에도 그립고 보고 싶었던 아버님을 뵈옵는 영도자님의 눈가에는 뜨거운 이슬이 맺히었다. 그분께서는 달려가 아버님께 인사를 올리시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동안 몰라보게 성장하신 아드님을 꼭 껴안아주시고 … 험한 길을 참 용케 왔구나! … 그래 그사이 공부를 잘하였느냐? 하고 정겹게 물으시었다. 그분께서는 예 하고 대답을 올리고는 타는 듯한 눈길로 아버님을 우러르며 말씀올리시었다. 나도 이제는 최고사령부에 와있겠습니다. … 나는 아버님께서 가시는 길이라면 그 어디이고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분의 챙챙한 목소리에 수행원들은 놀랐다. 최고사령부로 가는 길은 멀기도 하거니와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후방에 계셔야 한다면서 만류했다. 그러나 그분의 결심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아버님을 따라 전선길을 걸으시겠다고 거듭 말씀하시었다. . . . 장군님께서는 아드님을 정겹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었다. 옳다, ……네가 잘 생각하였다. 최고사령부에 와서 나와 함께 있자. 그래서 우리 인민과 인민군대의 영웅적인 투쟁모습을 더 똑똑히 보고 체험할 때 미국놈들이 불지른 이 전쟁으로 인하여 겪는 인민의 아픔을 진실로 느끼게 될 것이고 또 조국과 인민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전쟁의 준엄한 시련을 겪어보아야 한다. 그러시면서 어려운 길을 걸어보아야 담도 커지고 의지도 굳세어진다고 하시면서 네 결심대로 나와 함께 있자라고 이르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소원이 풀린 한없는 감격에 휩싸이시었다. 이때로부터 50여일간 최고사령부에서 생활하시면서 아버님을 따라 수천리 전선길도 걸으시었다. . . . 1952년 7월 말의 어느날이었다. 최고사령부 작전실에서는 김일성장군님과 어리신 영도자님과의 담화가 진행되었다. 장군님께서는 작전도앞에 서시어 전쟁에서 전법을 잘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아드님께 물으시었다. 네 생각에는 전법을 잘 세우는데서 무엇이 제일 중요한 것 같으냐? 영도자님께서는 예지로 빛나는 눈동자를 반짝이시다가 맑고 챙챙한 목소리로 아군을 잘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대답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자신께서 그전에 군사놀이를 할 때에도 자신의 편 아이들 가운데서 누가 꾀가 있고 누가 겁이 없으며 누가 몸을 아끼지 않는가를 미리 알아두었다가 그들을 잘 배치하면 이기곤 했다고 하시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얼굴에 만족한 미소를 지으시며 그렇지, 그래, 네가 참 좋은 생각을 했다고 칭찬의 말씀을 주시었다. . . . 장군님께서는 이어 지시봉을 드시고 작전지도앞으로 가시어 1211고지와 그 주변 지형을 가리키시며 여기가 1211고지이고 그 양쪽에 도로들이 있다고 하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제꺽 그 도로가 양구와 인제쪽에서 들어오는 도로라고 대답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지시봉으로 1211고지 주변을 가리키시면서 미국놈들은 이 도로가 있는 두개 방향에서 우리의 방어를 돌파하고 아군을 포위소멸한 다음 그 북쪽으로 계속 쳐들어오려고 시도했으며 한편으로는 통천쪽으로 상륙하려고 했다고 하시며 놈들이 금강계선까지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으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렇게 되면 금강계선으로 올라온 적들과 통천쪽에서 상륙한 적들이 서로 만나 원산까지 밀고들어올 수 있다고 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아드님의 대답을 긍정해 주시고나서 우리가 1211고지를 내어주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다시금 물으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렇게 되면 적들에게 원산까지 내주게 된다고 하시고나서 1211고지가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아버지원수님께서 직접 1211고지에까지 나가시어 전투를 조직하고 지휘하시었다고, 우리의 영웅적인 인민군장병들에 의하여 1211고지는 영원히 조국의 고지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힘차게 말씀올리시었다. 참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대화였다. . . .

포화속에 핀 진달래

. . . 1952년 8월이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최고사령부를 떠나 후방에 와계시던 어느날 미국놈들의 폭격에 한쪽다리를 잃은 한 전상자처녀가 찾아왔다. 그 처녀의 언니가 영도자님의 담임교사였다. . . . 이때 여교사자매의 상봉을 두고 누구보다 기뻐하신 분도 영도자님이시었고 처녀의 불행을 두고 가슴아파하시며 따뜻이 위로해 주신 분도 영도자님이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자매와 함께 단란한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식사도 매일 함께 하시고 저녁에는 유쾌한 오락회도 마련해 주시었으며 동무들을 데리고 와서 재미나는 이야기도 들려달라고 하시었다. 어리신 영도자님의 각별한 사랑 속에 전상자처녀의 얼굴에서는 점차 수심이 가시어져갔다. . . . 얼마후 그 처녀는 언니에게 자기의 희망찬 생활을 적은 편지를 보내어왔는데 그 속에는 그가 쓴 ≪진달래≫라는 시가 있었다. . . . 영도자님께서는 세월이 많이도 흘렀지만 그때의 처녀전상자를 잊지 않고 지금도 기억 속에 간직하고 계신다. 20년이 지난 어느날 그분께서는 그의 남편을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 하시었을 때에도 자리를 같이한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시었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사실 나도 그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이 동무의 애인이 부상당하여 의족을 하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언니를 찾아왔던 때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감정도 풍부하고 시도 잘 지었습니다. 나는 그가 지은 ≪진달래≫라는 시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기억을 더듬어 조용히 시를 읊으시었다. 20년전 한 문학처녀의 습작시를, 그의 남편도 심지어 당사자까지도 까마득히 잊고 있는 어설픈 한편의 시를 구절 하나 빠짐없이 기억하고 계시니 정녕 이 세상에 그분같이 뜨겁고 자애에 넘친 은정을 지닌 위인이 또 어디에 있으랴!

아버님께 보내신 편지

. . . 전쟁의 최후승리가 목전에 다가오면 올수록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아버님의 건강과 안녕에 대하여 더 마음을 쓰시었다. 1953년 6월 1일,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영도자님께서는 아버님께 삼가 만수축원의 편지를 올리시었다. . . . ≪…가장 중요한 부탁으로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릴 것은 아버지는 개인의 몸인 것이 아니라 전체 조선인민의 수령입니다. …아버지께서 건강하시며 항공에 주의하고 항상 몸조심함은 전체 조선인민의 행복이며 또한 우리들의 행복입니다. 아무쪼록 건강에 많이 노력하실 것을 멀리서 축복합니다. 1953년 6월 1일 김정일 올림≫ 편지를 써내려가시느라니 포연서린 전선길에 계실 아버지장군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더욱 그리워지고 조국과 민중의 운명을 한몸에 걸머지신 장군님의 안녕을 바라시는 뜨거운 마음이 가슴가득히 차오르시었다. 그래서 영도자님께서는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지으시었다. ≪어둡던 강산에 봄을 주시고 / 조선을 빛내신 아버지장군님 / 저 멀리 하늘가 포연이 서리면 / 인민은 안녕을 축복합니다 // 나라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 아버지 장군님 인민의 수령님 / 준엄한 전선길 안녕하심은 / 온 나라 가정의 행복입니다 // 미제를 쳐부순 영웅의 땅에 / 낙원을 펼치실 아버지장군님 / 찬란한 조선의 미래를 위해 / 인민은 안녕을 축복합니다≫ 구절마다에 아버지장군님에 대한 충효심이 어려있고 나라와 민중에 대한 사랑심이 넘쳐흐르는 송가였다. 훗날 영도자님께서는 준엄한 전화의 나날에 전선길을 걸으시는 아버지장군님의 안녕과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지으신 이 노래의 제목을 ≪축복의 노래≫라고 붙이시었다.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 이렇듯 뜨거운 마음으로 쓰신 편지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최고사령부에 전해졌다. 장군님께서는 편지를 보고 또 보시었다. . . . 장군님께서는 그 편지를 전해 드리려고 찾아온 친척분에게 전쟁은 오래지 않아 끝나게 되며 인민들은 마침내 승리의 날을 보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전쟁 3년간에 어머니도 없이 자나깨나 아버지를 그리며 우리 애들도 어지간히 고생을 한 셈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러나 오늘 편지를 보니 우리 정일이도 그새 어른이 다되었다고, 벌써 그 나이에 나라의 운명과 인민의 행복을 놓고 생각을 할 줄 아니 정말 기특하다고 감탄을 금치 못해 하시었다. . . .

 

4. 민중의 발걸음에 맞추시며

 

노래도 부르고 땀도 흘리시며

3년간의 전쟁은 엄혹한 시련을 과감히 이겨낸 인민군대와 민중의 승리로 끝났다. . . . 복구건설의 동음이, 아니 장중한 교향곡이 천지를 진감했다. 이때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10대의 인민학교 학생이시었다. 그분께서 학업에만 열중하신다고 하여 누가 탓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복구건설에 떨쳐나선 민중들과 숨결도 같이하고 발걸음도 같이하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적은 힘이나마 복구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생각하시었다. 그러던 어느날 영도자님께서는 학급동무들에게 우리도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아동단원들처럼 노래와 춤으로 복구건설에 떨쳐나선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들을 힘있게 고무해 주자고 뜨겁게 호소하시었다. 학급동무들이 열렬히 호응해 나섰다. 그분께서는 지체없이 그들로 연예대를 뭇고 공연프로를 다채롭게 준비하시었다. 그 가운데서도 춤 ≪단심줄≫에 큰 힘을 넣으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단심줄의 붉은 기둥은 조선노동당을 뜻하는 것이고 줄들은 인민들을 뜻하는 것이며 기둥에 줄들을 땋아놓은 것은 당의 두리에 하나로 굳게 뭉친 인민의 깨뜨릴 수 없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연예대원들이 춤동작을 잘 익히도록 이끌어 주시었다. 그분의 세심한 지도밑에 공연준비를 갖춘 연예대는 평양의 주요건설장들을 순회공연했다. 공연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대절찬을 받았다. . . . 전승직후 가장 긴요한 것중의 하나가 벽돌이었다. 공장을 복구하자고 해도 벽돌이 요구되었고 주택을 건설하자고 해도 벽돌이 있어야 했다. 벽돌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벽돌공장부터 일떠세웠으나 거기서 생산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복구건설장에 나가 이런 형편을 알게 되신 영도자님께서는 부족한 벽돌문제를 풀 방도를 찾으려고 골똘히 생각하시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분께서는 수업이 끝나자 학급동무들을 이끌고 폭격에 무너진 집터로 가시어 이제부터 낡은 벽돌을 모아보자고 호소하시었다. 이것은 벽돌수집운동의 발단으로 되었다. 며칠후에는 전교생이 벽돌수집에 떨쳐나섰고 그것은 마침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영도자님께서는 벽돌수집사업에 하루도 빠짐없이 참가하시었다. 그날 계획한 양을 수집하기전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시었다. . . . 복구건설로 들끓던 어느해 봄날이었다. 이날도 영도자님께서는 학급동무들을 이끄시고 평양시의 한 공원으로 나가 나무를 심으셨다. 조국의 산천을 푸르러 설레이게 하실 일념으로 나무를 정성들여 심어나갔다. 그런데 몇몇 동무들은 구덩이를 대충 파고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신 그분께서는 그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오늘 나무를 심는 것은 미국놈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하여 불타버린 조국강산을 다시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미국놈들을 미워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덩이도 파고 나무도 심어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었다. 그러시고는 옷소매를 걷어올리고 구덩이 속에 박힌 큰돌을 몸소 들어내고 그 자리에 알맞춤한 나무를 골라 심으시었다. 동무들도 그 모범을 따라 나무를 성수가 나서 심었다. . . .

위대한 평민

. . . 경애하는 영도자님께서 평양 제4인민학교에 첫 등교를 하시는 날을 앞두고 벌어졌다. 그때 한 일군이 어머님이 계시지 않는 그분의 얼굴에 그늘이 질세라 새 가방과 학용품일식을 갖추어 가지고 그분을 찾아갔다. 그런데 영도자님께서는 뜻밖에도 보자기를 내놓으시며 거기에 책을 싸가지고 다니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일군이 그 사유를 묻자 그분께서는 우리 어머님은 늘 나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달리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고, 남들이 조밥을 먹으면 같이 조밥을 먹고 남들이 기운 옷을 입으면 같이 기운 옷을 입고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수령님의 아들된 도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다고, 해방전에 그리도 고생만 하신 어머님이시지만 해방의 된 후에도 왜 좋은 옷을 안입으시고 색다른 음식을 마다하셨는지 크면서 더욱 잘 알게 된다고, 어머님의 그런 뜻을 어기고 내가 어찌 남들보다 색다르게 생활하겠는가고 말씀하시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뜨겁고 머리가 수그러지는 말씀이었다. 일군은 더 말을 못하고 책가방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그분의 심중을 너무도 모른 자책감을 금할 수 없었다. 영도자님께서는 학급의 모든 동무들이 다 가방을 들고 다닐 때까지도 그 풀빛 보자기에 책을 싸들고 다니시었다. 참다운 멋은 화려하고 특수적인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보편적인 것 속에 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소박하고 평범한 생활을 좋아하시었다. . . . 전승의 해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때 학교에서는 난로당번을 정해놓고 순번으로 집에서 나무를 가져다 교실을 덥히곤 했다. 담임교사는 영도자님을 당번에서 제외시켰으나 그분께서는 자진하여 당번을 서곤 하시었다. 그날도 그분께서 난로당번이시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몸소 장작을 패시어 아드님께 지워주시면서 좀 무거워도 지고 가야 한다. 너도 어려운 때라는 것을 잘 알지라고 말씀하시었다. 이때 한 일군이 자기가 가져다드리겠다고 하면서 그분한테서 짐을 벗기려 하자 영도자님께서는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지워주신 나무단이니 제가 꼭 지고 가야 합니다라고 사양하시었다. 그러시고는 눈보라 속으로 땀흘리며 학교를 향해 걸어가시었다. . . .

학우들을 위해 모든 것을

. . . 동무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피는데서 그분처럼 섬세하고 친절하신 분은 없었다. 영도자님께서 초급중학교에 입학하신 해인 1954년 11월 어느날이었다. 그분과 함께 공부하던 한 학우가 그만 날이 저무는통에 저녁식사를 같이하게 되었다. 온 나라 민중이 우러르는 김일성장군님의 저택에서 밥을 먹게 된다는 황송스러움과 폐를 끼치게 되었다는 미안감이 겹쳐 그는 밥을 몇술 뜨지 못하고 수저를 놓고 말았다. . . . 식당에서 나와 그분의 공부방으로 다시 들어간 그 학우는 그제야 숨을 후 내쉬며 이마에 내돋은 땀을 닦았다. 그러는데 영도자님께서 한사람분의 밥과 찬을 챙겨가지고 들어오시었다. 의아해 하는 학위에게 그분께서는 웃으시며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난 못속인다고, 내앞에서야 사양할게 있는가고 하시며 수저를 쥐어주시고는 옆에 앉아 그가 자연스레 밥을 먹도록 옛이야기를 들려주시었다. . . .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시면서도 학우들의 건강에 대해서는 극진히 마음을 쓰시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중학시절 어느날, 학교담당 의사를 찾아가 여러장의 종이를 꺼내놓으시며 요즘 학급에 앓는 동무들이 많은데 이것을 참고로 해서 좀 도와달라고 말씀하시었다. 그 종잇장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의사는 그만 얼굴이 뜨거워났다. 그것은 의사인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매 학생들의 ≪건강요해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의사가 더욱 놀란 것은 다음날 그분의 ≪건강요해표≫에 기초하여 학생들을 검진해보니 그 결과가 ≪건강요해표≫에 게재된 사항과 일치하다는 사실이었다. 친부모나 의사들도 알지 못하는 병증세까지 구체적으로 적은 ≪건강요해표≫, 그것은 정녕 학우들에 대한 그분의 보살피심과 우애심이 얼마나 다심하고 열렬한 것인가를 웅변해 주었다. . . .

 

5. 시대와 숨결을 같이하시며

 

강선의 정신을 안고

1956년 12월 28일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강선제강소를 현지지도하시는 김일성장군님을 수행하시게 되었다. . . . 제강소에 도착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날 노동자들과 무릎을 마주하시었다. 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나라가 처한 어려운 형편을 상세히 설명해주시었다. 지금 우리 형편은 매우 어렵다, 어떤 나라 사람들은 자기네 종파를 내밀지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 나라와 한짝이 되어 우리를 내려누르려고 한다, 우리 나라 종파놈들은 제각기 자기 상전을 등에 업고 당을 반대하고 있으며 이승만은 미국을 믿고 우리에게 덤벼들려고 한다. 수령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고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시었다. 우리는 누구를 믿겠는가, 당신들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 수령님의 말씀이 끝나자 노동자들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 . . 강철은 염려마십시오. 수령님의 신임에 기어이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신심에 넘쳐 결의다지던 노동자들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흥분으로 하여 가슴을 진정할 수 없으시었다. 그것은 자신의 숨결이 수령님을 받들려는 노동자계급의 숨결과 맥박을 같이하고 있다는 기쁨에서였다. 민중의 힘을 믿고 민중에게 의거하면 백번 승리하지만 민중의 버림을 받게 되면 백번 패한다김일성장군님의 철의 진리, 이것이 바로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낳았고 그 정신을 가슴에 받아안았기에 강선노동자계급이 불같이 일떠서는 것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날 바로 이 진리의 정당성을 목격하셨고 그것이 강선의 혁명정신으로 꽃펴나는 것을 보시었다. 강선의 자력갱생의 정신, 천리마정신은 백두의 혁명정신이었다. 강선에서 돌아오신 영도자님께서는 이 혁명정신으로 학우들을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었다. . . . 어느날 학교강당에서는 제1차 5개년계획전망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강연에 나선 연사는 후에 반당반혁명분자로 판명된 사대주의자였다. 그래서 이날 강연은 사대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연사는 우리 나라는 땅덩어리가 작기 때문에 자동차나 트랙터, 선박과 같은 큰 기계들을 만들 필요가 없다, 지하자원과 온갖 과일이 풍부한 우리 나라에서는 그것들을 팔아서 기계를 사오면 된다고 떠벌리면서 학생들을 유혹하기 위해 우습광스러운 손짓, 몸짓을 해가며 열을 올리었다. 그는 사과를 내던지는 시늉을 하면서 옛다 받아라! 사과요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좋소, 자! 기계요한다고 떠벌였다. . . . 이러한 광경을 보시는 영도자님께서는 격분을 참을 수 없으시었다. . . . 그분께서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사리정연한 논거를 들어 그자에게 단호한 반격을 가하시었다. 우리 나라에서 자동차나 트랙터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수령님의 사상과 완전히 어긋난다, 수령님께서는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것을 조선노동당의 경제건설의 기본노선으로 제시하시었다, 그런데 기계들을 생산하지 않고 외국에서 사다 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남의 나라 기계를 사다가 과연 우리 나라를 사회주의강국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영원히 낙후하고 가난한 농업국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정확히 설명해 달라고 들이대시었다. 연사는 낯이 파랗게 질려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다시 연구하겠다고 어물어물 말하고는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 . . 1958년 11월 중순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학우들에게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 얼마나 위대한 창조물을 낳는가를 보여주려고 그들을 데리고 당중앙위원회 청사로 가시었다. 거기에는 노동자계급이 자력갱생하여 만든 트랙터가 있었다. 영화에서만 보아오던 트랙터를 실물로 보게 된 학생들은 저마다 야!하고 감탄의 소리를 연방 내질렀다. 이 멋진 트랙터를 우리 나라에서 만들었단 말인가! 영도자님께서는 동무들을 둘러보시며 외국영화나 책에서만 보던 트랙터가 우리의 협동전야를 달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만약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이 하자는대로 했더라면 우리 나라는 영원히 제발로 걸어가지 못하는 뒤떨어진 나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우리 당 정책은 현명하며 수령님께서 가리키시는대로만 하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었다. . . .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

. . .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원래 학습에서 정열가이시었다. 그분께서는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과학탐구의 대해를 헤쳐오시었다. 학습에 대한 그분의 지칠줄 모르는 정열, 그것은 조국의 미래를 책임진 계승자의 자각에 바탕한 것이었다. 조국과 민중에 대한 높은 사명감이 그분으로 하여금 지칠줄 모르는 정열과 완강한 의지, 끝없는 탐구력으로 과학의 높은 봉우리를 톺아오르게 했다. 초급중학교시절에 그분께서는 벌써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과목에만 매달리지 않으시었다. 김일성장군님의 노작들을 빠짐없이 공부하시었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한 주요고전들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서적들, 심지어 ≪광업편람≫, ≪축산편람≫, ≪금속재료≫, ≪닭기르기≫, ≪전기기구생산공정≫, ≪조선기후자료집≫ 등 자연과학기술서적들도 공부하시었다. 그 공부는 독경식이 아니었다. 과학의 요새, 지식의 대해를 점령하고 그것이 인류의 진보에 이바지되도록 산 지식을 소유하기 위한 극히 생산적인 학습이었다. 그분께서는 늘 동무들에게 학습의 성과는 얼마나 긴 시간을 바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긴장하게, 온 정신을 집중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하시면서 일단 책을 쥐면 누가 곁에 왔는지, 밤이 어떻게 깊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열중해야 하며 그래야 짧은 시간에 많은 책을 보면서도 내용을 깊이 파악할 수 있다고 말씀하곤 하시었다. . . . 이 무렵 그분의 책상위에는 하나의 글발이 정히 놓여졌다. 정열, 그것은 위대한 창조의 원천이다. 심오한 진리와 생활의 교훈을 사람들의 가슴속에 안겨주는 명구명언이었다. . . . 여기서 그분께서 중시하신 것은 모든 학습이 조선을 위하여, 조선혁명을 위한 학습으로 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학습의 근본목적이기도 하였다. 영도자님께서 이 시기 이 문제를 특별히 중시하신 것은 학생들 속에서 자기 나라 것을 귀중히 여기고 배우려는 것이 부족하고 남의 것을 교조적으로 배우려는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 . . 영도자님께서는 개별적인 학우들의 그릇된 관점을 고쳐주기 위해서도 큰 관심을 돌리시었다. 하루는 한 학우가 그분을 찾아왔다. 학교 생물연구소조원인 그는 연구발표모임 준비를 하는데 펭귄새에 대한 자료를 방조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펭귄새? 그분께서 이렇게 되뇌이시자 그 학생은 희귀한 새여서 놀라워하시는줄로 속단하고 펭귄새에 대한 지식의 보따리를 풀어놓는 것이었다. 그는 펭귄이 오직 남극주의 찬 바다 속에서만 사는 새이고 종류가 18종이나 되는데 날개와 깃, 발가락 등 몸구조가 어떻게 물에 적응되어 있고 땅에서는 어떻게 살고 새끼는 어떻게 기르는가 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 . . 그분께서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시다가 제비나 뻐꾸기, 종달새 같은 것은 연구하지 않는가고 물으시었다. 학생은 그런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인데 연구할 가치가 있는가고 하면서 소조원이라면 남이 모르는 희귀한 것들을 많이 알아야 권위가 선다고 하였다. 그의 대답은 일관하게 자기 나라의 것보다 희귀한 남의 것을 연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심중한 안색으로 제비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물으시고나서 제비 한마리가 하루에 몇마리의 벌레를 잡아먹는가고 물으시었다. 그 학생은 어느 하나도 제대로 대답 못했다. 말문이 막혀 더수구니만 긁는 학생을 바라보시던 그분께서는 제비 한마리가 한시간에 14마리의 벌레를 잡아먹으며 우리 나라에 제비가 모두 천만마리 살고 있다면 하루에 10시간씩 날아다니는 것으로 봐도 몇마리의 벌레를 잡겠는가고 물으시었다. 학생이 14억마리라고 대답하자 그분께서는 옳다고 하신 후 만약 제비가 우리 나라에 머무르는 날이 200일이면 모두 1만 4천톤의 나쁜 벌레를 잡는 것으로 된다고 가르쳐 주시었다. 그분께서는 놀라는 학생에게 뻐꾸기부엉이의 특징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해 주시었다. 학생에게는 모든 이야기가 듣느니 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펭귄이요, 캥거루우요 하는 따위의 동물에만 흥미를 가졌으니 제 나라의 새들이 귀하게 보였을리 만무하였다. 영도자님께서는 그릇된 학습태도를 두고 얼굴을 붉히는 그를 너그러이 바라보시며 우리는 역사를 배우건 지리를 배우건 생물을 배우건 우리 나라 혁명과 건설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우리가 남극에 가서 혁명을 하겠는가, 열대지방에 가서 건설을 하겠는가, 우리는 살아도 조선에서 살고 혁명을 해도 건설을 해도 조선에서 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의 것, 조선의 현실을 잘 알아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었다. . . .

일기장에 쓰신 시

1958년 봄이었다. . . . 민청지도원의 목소리가 교내를 드르렁거리며 울릴 때 당시 민청부위원장(위원장은 교원인 민청지도원)이시던 영도자님께서 사무실에 들어서시었다. 민청원들을 밖으로 내보내신 그분께서는 창가에 서신채 웃으시며 지도원선생님이 본때있게 욕을 해대시더군요, 운동장에서까지 다 들리게요, 여학생들이 민청사무실을 가리키며 지도원선생님이 뿔났다고 쉬쉬 하더군요라고 말씀하시었다. 성을 내지 말자 하다가도 그만… 지도원은 겸연쩍은듯 얼굴을 붉히었다. . . . 그분께서는 심각한 안색으로 물론 부정적 현상은 비판해야 하며 비판은 원칙적이고 날카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강한 비판이 높은 어성이나 과격한 언사에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엄하고 부드러운 말로 깨우쳐 주고 타이르는 비판이 더 큰 감화력을 가지는 법입니다라고 일깨워주시었다. 그분께서는 몇명의 민청원들이 자유주의를 한 것은 남달리 음악을 즐겨하는 그들이 새 명곡을 듣기 위해서였다고 하시고 집체행동에서 빠진 것은 물론 잘못된 일이며 비판을 해야 하지만 민청일군인 우리들로서는 새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청년학생들의 정서적 지향을 응당 이해해 주고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 . . 그를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영도자님께서는 창밖을 가리키시며 좀 보십시오, 꽃송이위로 맴도는 저 벌과 나비들을, 사람도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벌과 나비를 끄는 저 꽃처럼…… 그래야 군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사람에게서 향기란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인간미입니다, 사상이 견결하고 의지가 굳세고 원칙성이 강한 일군이라도 그가 너그러운 인품과 풍부한 정서가 없는 메마른 인간이라면 군중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청년일군일수록 누구보다 더 인간미가 풍부해야 합니다라고 뜻이 깊고 매우 교훈적인 말씀을 하시었다. . . . 1958년 10월이었다. 민청원들의 생활을 요해하시던 영도자님께서는 학습도 조직생활도 잘해오던 한 민청원이 이즈음 와서 숙제도 잘 안해오고 지각도 자주 한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다. 청년들에게서 결함이 나타나면 추궁하기에 앞서 그 결함이 나타나게 된 동기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시고 동지적 사랑으로 일깨워주시는 그분께서는 그 학생의 초급단체위원장을 불러 그의 가정형편을 알아보도록 하시었다. 초급단체위원장이 알아보니 학생의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고 아버지는 출장중이어서 그가 가사를 맡아보며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 동무가 고생이 많겠다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담이 크겠다고 거듭 심려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초급단체위원장에게 나타난 자료를 묶어 비판이나 해서야 되겠는가, 더욱이 고생하는 그를 도와줄 대신 비판만 주었으니 집단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그 민청원을 도와줄 대책을 취해 주시었다.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동무들이 찾아가 어머니 병문안도 하고 빨래도 청소도 같이하면서 미리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우리가 몰라서 그랬으니 이해하렴하고 말하자 그는 눈물을 머금을 뿐 아무 말도 못했다. 몇십, 몇백번의 추궁이나 비판보다 값진 효과를 얻은 것이었다. 영도자님께서는 그에게 그동안 혼자서 고생이 많았겠다고 하시면서 왜 조직에 말하지 않았는가, 제때에 말했더라면 동무들이 도와주고 부담을 덜어주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잘못되었다고 따뜻이 일깨워주시었다. . . . 1957년 봄이었다. 어느날 한 학우가 심한 자유주의를 부리고 집단을 깔보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동무들의 비판을 접수하지 않고 오히려 제편에서 대들었다. 영도자님께서는 집단위에 자기를 올려세우려는 그 민청원의 행동을 묵과할 수 없으시었다. 그분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은 그는 그날밤 잠들지 못하고 자기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비판한 그분께서 밤새 잠못 이루시고 아픈 가슴을 달래시며 뜬눈으로 새우고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영도자님께서는 일기장을 펴놓으시고 비판에 담긴 참다운 우정을 보여주는 시를 적어나가시었다. ≪… 우정이란 무엇인가 / 의리의 동지 / 언제나 진실하고 뜨거워 / 남이 자기로 되는 그 세계던가 … 만일 순간의 그 어떤 딱한 사정 / 이유며 조건이며를 용납한다면 / 인정에 져 번번이 두둔한다면 / 그것이 무슨 우정이랴 / 그늘 속에 자라는건 곰팡이뿐이더라 … 동무여, 참다운 우정이란 무엇이랴 / 가슴에 따로 둔 심장이 없는 / 비록 몸은 낱낱으로 되었어도 / 심장은 하나인 우리들의 넋이 아니랴 // 그렇다, 우리들의 넋이다 우정은 / 조국을 떠나 가치없고 / 집단을 위해서만 의미가 있는 / 성스러운 위업에 향한 충실성 / 그것으로 맺어지는 우리들의 넋이다 …≫ 빠져나가면 세워주고 비뚤어지면 바로잡아주시는 영도자님의 원칙적인 사랑은 청년들 속에서 남을 자기로 여기고 도와주는 참다운 동지적 관계가 꽃피워나게 하였다.

 

6. 은정은 학창을 넘어

 

한집안식구가 되시어

. . . 이리하여 그분께서는 1956년 6월 5일 혁명전적지답사단을 이끄시고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에 대한 첫 답사의 길에 오르시었다. 그 길은 항일의 빛나는 혁명전통의 기치를 대를 이어 높이 추켜들고 나아갈 신념을 굳게 다지신 역사적인 길이었다. . . . 그분께서 보천보를 거쳐 삼지연에 이르시었을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많은 임산마을 사람들이 영도자님을 뵙겠다고 모여있었는데 한 할머니가 그속을 헤집고 그분앞으로 곧바로 다가와서는 덥석 그분의 두손을 부여잡았다. 수령님의 자제분이 아니십니까? 영도자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다정히 물으시었다. 할머니, 왜 그러십니까? 꼭 그분을 만나뵈옵자고 그럽니다. 영도자님께서는 난처하신듯 할머니의 두손을 꼭 잡으시고 수령님의 아들이 별다르겠는가고, 우리 모두가 수령님의 아들딸들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겸손한 말씀이시었다. 그러나 세련된 몸가짐, 부드러우나 우렁우렁한 음성, 겸허한 성품, 그것은 틀림없는 수령님의 모색이었다. 영도자님을 알아본 할머니는 그분께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려고 하였다. 그러는 할머니에게 먼저 정중히 인사를 올리신 그분께서는 할머니, 제가 오히려 마을의 늙은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지 못하여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온 마을사람들이 우리들을 환대하여주어 감사합니다라고 사례의 말씀을 하시고는 답사대원들 앞에 할머니를 내세워주고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도록 하시었다. 영도자님을 모실 숙소 하나 꾸리지 못한 송구함에 몸둘 바를 모르는 할머니와 마을사람들에게 그분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며 말씀하시었다. 할머니, 우리가 특별한 집에서 쉬겠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이곳 임산노동자들이 사는 귀틀집에서 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분의 겸허한 말씀을 들으며 더더욱 송구함을 느끼고 있는데 영도자님께서는 답사대원들을 숙소에 배치하고 나시어 자신께서도 임산노동자의 귀틀집에 자리를 잡으시었다. 집주인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서시는 그분의 심중은 오래간만에 고향집에 온 기분이시었다. 경애하는 영도자님의 마음은 언제나 그러하시었다. 임산노동자의 집에 가시어서도 민중의 아들이시었고 보천보마을의 한 집에 유숙하실 때에도 같으시었다. . . . 답사대오가 포태리에서 잠시 휴식할 때였다. 영도자님께서 포태리상점을 몸소 찾으시었다. 그분께서는 점원에게 수고한다고 인사를 하신 다음 겨울신발과 여름신발을 보자고 하시었다. 그런데 상점에는 겨울신발은 있었지만 여름신발은 고무신밖에 없었다. 그분의 예견이 틀리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답사과정에 임산노동자들의 작업모습을 보시며 첫눈에 신발문제가 매우 긴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계시었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걱정어린 안색을 지으시더니 지금은 누구나 다 여름신발을 찾겠는데 그것이 없어서야 되겠는가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포태리사람들은 주로 산으로 다니면서 일하기 때문에 고무신보다 노동화를 더 요구할 것입니다. 영도자님께서는 노동자들의 신발에 대하여 크게 걱정하시면서 비록 전후의 어려운 형편이기는 하지만 일군들이 머리를 쓰고 달라붙으면 신발문제야 왜 풀지 못하겠는가고 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앞으로 군에서 포태리와 같은 산골에 먼저 신발을 공급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었다. 그분께서 상점을 다녀가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백켤레의 여름신발이 상점에 도착하였다. 영도자님으로부터 구체적인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것이었다. . . .

스스로 맡으신 일

어느 일요일날, 영도자님께서는 저택정원에서 학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다가 못가로 가시었다. 팔뚝같은 물고기들이 훌쩍훌쩍 뛰어오르는 못가의 광경은 참으로 볼만했다. . . . 그분께서는 손그물로 초어를 꺼내드시고는 물위층에서 사는 민물고기로서 1년에 한킬로그램이상 자란다는 것과 풀만 먹기 때문에 초어라고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연이어 잉어를 꺼내드신 그분께서는 잉어와 붕어는 물밑층에서 살기 때문에 초어와 한데 넣어 기르면 같은 크기의 호수에서 더 많은 물고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참으로 양어박사이시었다. 학우들은 너무도 신기하여 영도자님께 양어연구소에서나 아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가고 물었다. 그 물음에 영도자님께서는 이 못의 물고기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손수 기르시는 것인데 자신께서 수령님의 사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양어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고 말씀하시었다. . . . 1959년 여름, 학년말시험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영도자님께서는 한 학생과 함께 각도연합직매점에 가시었다. 각도연합직매점은 민중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어버이수령님께서 친히 내오도록 하신 종합적인 상업봉사기관이었다. 여기서는 지방마다 흔한 자재와 원료를 이용하여 만든 각 지방의 특산물들과 여러가지 생활필수품, 식료품들을 팔고 있었다. 매대들을 차례로 돌아보시던 그분께서는 평양시매대에서 처음보는 한 상품앞에서 걸음을 멈추시었다. 점원이 콩사탕이라고 소개하자 그분께서는 콩사탕하고 되뇌이시더니 아주 귀맛이 당긴다고 하시면서 점원에게 콩사탕을 만드는 방법과 생산량, 원자재소요량과 원가 등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시었다. 점원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그분께서는 콩사탕은 맛도 있고 영양가도 높고 값도 눅어 참 좋다고 하시면서 특히 어린아이들이 좋아하겠다고 대단히 기뻐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콩사탕 두봉지를 사서 가방에 넣으시었다. 그때 그분과 함께 동행한 학우는 콩사탕이 아무리 좋다 한들 그보다 좋은 고급사탕도 많은데 왜 그리도 기뻐하며 사가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이런 심정을 헤아리신 그분께서는 아버님께서 각도연합직매점에서 파는 상품들을 시민들이 모두 좋아한다는 것을 요해하시고 매우 만족해하시면서 앞으로 직매점을 크게 늘여 지방의 예비와 창발성을 적극 발양하도록 해야겠다고 말씀하신 사실을 이야기해 주시었다. 그러시면서 그분께서는 콩사탕이 비록 작은 것 같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인민생활을 위해 마음쓰시는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인민들이 좋아하는 식료품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내려는 뜨거운 충성심이 깃들어 있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는 늘 어떻게 하면 수령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어떻게 하면 수령님께 기쁨만을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라고 절절히 말씀하시었다. 그제서야 학우는 영도자님께서 직매점을 돌아보신 것도, 콩사탕을 사신 것도 다 수령님께 상품공급정형을 보고드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 .

영웅의 어머니를 찾아서

1958년 4월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학우들을 이끄시고 이수복영웅의 고향집이 있는 평안남도 순천군(오늘의 순천시) 금천리를 찾으시었다. . . . 김정일영도자님께서 학우들과 함께 영웅의 고향집마당으로 들어서시자 어머니가 반겨맞아주었다. 아들을 키워 조국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영도자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일행을 집안으로 안내하였다. 그분께서는 머리에 흰서리 내린 어머니의 갈퀴진 두손을 꽉 잡으시고 아들을 나라에 바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고 물으시었다. 어머니는 영도자님께 두손을 맡긴채 주름진 얼굴에 밝은 웃음을 지으며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어도 나라를 위해 한목숨 바쳤으니 더 바랄게 무엇이겠느냐고, 나라에서 극진히 돌봐주어 아무 근심걱정없이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영도자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도 그 슬픔을 억세게 누를 줄 아는 영웅의 어머니가 더없이 고맙게 여겨지시었다. . . . 영웅이 전선으로 떠나던 날 아침에 말끔히 쓸어놓고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 뜨락을 조심히 밟아보시던 그분께서는 학우들을 둘러보시면서 우리가 아들을 대신하여 집을 거두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자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남먼저 빗자루를 드시고 마당을 쓰시었다. 다른 학생들은 울바자도 손질하고 삽으로 집앞 물도랑도 쳐냈으며 여학생들은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 가서 물도 길어왔다. 삽시에 학생들을 데리고 집안팎을 환하게 꾸려놓으시는 영도자님의 모습을 우러르는 영웅의 어머니는 아무래도 범상한 분 같지 않아 한 여학생을 보고 저 학생은 뉘 집 자제분인가고 물었다. 여학생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머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머니, 저분은 김일성원수님의 자제분이에요. 뭐라고? 영웅의 어머니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허둥지둥 그분께로 다가가 손에 드신 빗자루를 덥석 잡았다. 이런 변이라고… 귀한 분을 내 집에 모셔놓고 마당을 쓰시게 했으니…그러자 그분께서는 어머니의 두손을 감싸잡으시고 말씀하시었다. 어머니, 우리는 우리 인민의 자랑인 이수복영웅을 대신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손님으로 대하지 말고 친자식처럼 여겨주십시오. 어머니의 집에 왔다가 마당이라도 한번 쓸어보고 가야 우리 마음도 기쁘지 않겠습니까. 저도 집에서 아침마다 마당을 씁니다. 여기 와서 이렇게 마당을 한번 쓸어보고 가면 내일 아침부터는 마당을 쓸면서 어머니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다정한 말씀에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슬퍼서가 결코 아니었다. 너무도 고마워 흘리는 눈물이었다. . . . 김정일영도자님께서 영웅의 고향에 불멸의 자국을 남기신 그날로부터 어느덧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영웅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지 퍼그나 오래 되었다. 하지만 언제나 사랑은 내리고 충성은 오르는 법이다. 영웅과 그 일가에 대한 영도자님의 의리깊은 사랑은 끊임없이 이어져오고 있다. 생전에 영웅이 다니던 학교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고 영웅이 복무하던 인민군중대의 부피 두터운 전투기록장에는 첫 영웅분대장인 이수복의 이름이 올라있다. 공화국영웅 이수복동무! 옛, 공화국영웅 이수복동지는 1211고지 전투에서 적의 화구를 몸으로 막고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웅이 복무하던 인민군중대의 취침전 점검시간때마다 사관장이 이수복영웅의 이름을 중대의 첫 대원의 이름으로 부르면 그에 대답하는 모습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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