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 20일

통일여명 편집국

현대조선역사

 - ≪향도의 태양 김정일장군님≫(1995, 평양출판사) - 80년대 이후의 현대조선역사

통일여명 편집국 해설 5-2-6

 

1. 민족의 아들

1) 민중의 추대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당중앙위원회에서 지도원, 과장, 부부장, 부장, 비서의 직책을 맡아 수행하시는 10년기간에 정력적인 사상이론활동으로 김일성주석의 혁명사상을 옹호하고 주체의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인 체계로 정식화하시었다. 동시에 김일성주석의 민중적이고 세련된 영도예술을 완벽하게 터득하시고 민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오신 수령님의 고매한 덕목과 품격을 고스란히 체내화하시었다. . . . 실천과 생활에서 그분의 영도의 현명함과 업적을 체험하고 확인한 이북민중은 그분을 충심으로 흠모하면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라는 친근한 존칭으로 부르면서 따르게 되었다. 드디어 김정일영도자를 향한 이북민중의 이같은 뜨거운 존경과 확고한 믿음은 그분을 김일성주석의 후계자로 추대해야 한다는 한결같은 의지로 응결되었다. 민중의 일치된 의사와 염원을 담아 조선노동당의 전체 당조직과 정부 각 부서, 공공기관, 사회단체(근로단체), 과학, 교육, 문화, 언론 등 사회 각계와 공장, 기업소 및 협동농장들 그리고 인민군대에서 친애하는 김정일영도자를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후계자로 높이 추대할 것을 요망하여 보낸 청원서가 당중앙위원회에 쇄도하였다. 1974년 2월 1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전원회의는 전례없이 엄숙한 분위기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예정된 의제외의 긴급동의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당중앙의 요직에 있던 항일전의 노투사가 김정일비서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추대할 것을 제의하였다. 순간 회의장은 우렁찬 박수갈채로 물결쳤다. 회의를 주재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가 비서는 아직 나이도 젊으니 그 문제는 일단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시었다. 긴급동의자인 노투사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정일동지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추대하는 것은 혁명의 요청이면 전체 인민의 열망입니다. 아직 너무 젊었다고 말씀하시지만 젊고 젊지 않은 것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수령님께서도 일찍이 김정일동지와 같은 연세에 조선혁명을 승리의 한길로 이끄시지 않았습니까. 혁명의 운명문제이며 그 장래에 관한 문제이니 수령님께서 고쳐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정치위원이 일어나 그의 의견에 찬성하면서 수령님께서 달리 생각하시기를 거듭 요청드리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전히 침묵속에 계시었다. 뒤이어 머리 희끗희끗한 항일혁명출신의 다른 정치위원이 결패있게 자리에서 튀여오르듯 일어섰다. ≪수령님, 유감입니다만 저희들은 이제 늙었습니다. 젊고 패기있는 동지들이 수령님을 보좌해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혁명도 청춘의 기백으로 더 활기있게 전진할 것이 아닙니까.≫ . . . 정치위원들의 거듭되는 제기를 들으시며 열기띤 회의장을 살펴보시던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마침내 모든 위원들의 의견이 정 그렇다면 거기에 좇을 수밖에 없겠다는 수락의 뜻을 표명하시었다. 이리하여 회의는 참가자들의 찬의를 묻는 공식절차를 밟아 김정일비서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추대하면서 주체혁명위업의 유일한 계승자로 확정지었던 것이다. 이로써 김정일영도자는 전당, 전민의 한결같은 지지와 여망 속에 조선노동당의 수위에 추대되고 민족의 지도자로 부상되어 중임을 맡기게 이르렀다. 그러나 김정일영도자께서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로부터 6년후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에서였다.≫(민중이 받들어올린 민족의 영수)

2) 문무충효의 겸비

1988년 6월 18일 경애하는 김일성주석의 접견실에서 캄보쟈의 시하누크국왕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각하야말로 김일성주석에 대한 충성과 효성이 매우 지극한 분이라고 자기가 보고 느낀바 소감을 말씀드렸다.≫(충신중의 충신, 효자중의 효자)

3) 수령복

1994년 7월 9일 12시, 평양으로부터 지구촌을 휩쓰는 비보가 전해졌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시며 세계자주화위업의 걸출한 영도자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전날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시었다는 부고였다. . . . 일본 자민당 원로의 한사람으로 알려진 가네마루 싱 (金丸伸)은 한번의 접촉으로 ≪남자로서 남자에게 반했다.≫고 하면서 수령님을 형님으로 존칭하여 일본정계에서 수령님의 성함을 딴 ≪가네마루≫로 부를 정도로 되었다. 지난날 정치적으로 대적관계에 있던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도 수령님을 뵙고난 인상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김일성주석은 미국의 초기 대통령이며 가장 명망이 높았던 죠지 워싱톤, 토마스 제퍼슨과 에이브라함 링컨 모두를 합친 종합체와도 같은 분이시다. 반대파가 있을 자리는 조금도 없다. 나는 김일성주석을 만나는 첫순간부터 완전히 매혹되었으며 이분이야말로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계를 편력하면서 많은 저명인사들과 접촉한 독일의 여류작가 루이저 린저도 그분에게 매혹된 한사람으로서 수령님의 서거소식에 접하여 ≪나는 매일 눈물이 앞을 가리어 어찌할 수 없다. 친아버지나 남편을 잃을 때보다 더 분통하고 가슴이 아파 못견디겠다. 나의 심장 한부분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다.≫고 슬픔을 토로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선물로 주신 금가락지를 심장깊이 품고 세상을 하직하겠다.≫고 하였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수상은 조의록에 ≪국제혁명운동은 위대한 보루를 잃다.≫라고 썼으며 서방 7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프랑스의 미떼랑대통령은 7개국 정상 가운데서 자기만이 유일하게 김일성주석을 만나뵈온 특전을 지녔다고 긍지높이 말하면서 ≪김일성주석은 제2차 세계대전후부터 오늘까지 활동하여 온 위인들 중의 한분≫이시라고 강조하였다. 정녕 경애하는 김일성동지이시야말로 역사상 존재했던 위인중의 위인이시고 희세의 성인이시었다. . . .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시었다는 비보가 전해진 다음 30분후부터 평양 만수대의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앞에 모여 들기 시작한 조객은 다음날 첫새벽에 이르러 그 수는 30만에 이르렀고 12일의 애도기간에 이북전역에서 연 2억 1천 2백만명의 각계층 민중과 군인들이 조의를 표시하였다. 60여개의 해외동포 조문단과 해외동포 조직대표들이 평양을 방문하여 조의를 표시하였으며 근 70개의 교포단체들과 수백수천명의 교포들이 그 나라에 주재하고 있는 이북의 해외공판을 조의방문하였다. 이남에서도 국상을 입은 슬픔과 조의표시를 여지없이 짓누르는 공권력에 맞서 조의 대자보를 게시하고 분향소를 설치하여 조의방문단의 북행을 시도하는 등 각종 형식과 방법으로 민족의 어버이를 잃은 절통함과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서거는 우리 민족의 범위를 넘어 온 인류를 크나큰 상실의 슬픔에 잠기게 하였다. 수령님의 서거에 즈음한 애도기간 세계의 1백 66개 나라에서 국가 및 정부수반들과 정당, 지도자들, 국제기구 및 사회단체들 그리고 각계인사들이 3천 4백 80여건의 조전을 평양에 보낸 것으로 발표됐다. 세계 여러 나라의 국가수반을 비롯한 각계 저명인사들이 조의를 표시하여 보내온 화환은 3천 3백여개가 된다. 쿠바, 파키스탄, 수리아, 앙골라, 적도기네, 타이 등 20개국유엔을 비롯한 다수의 국제기구들에서는 정부비상회의 결성, 대통령정령 등으로 애도의 날과 애도기간을 설정하고 김일성주석을 엄숙히 추모하였다. 미합중국 현직 및 전직 대통령들일본의 현직 및 전직 수상들을 비롯한 거물급의 정계인사들, 유엔사무총장과 유엔총회 의장도 김일성주석의 서거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 애도기간 세계 1백 20여개국에서 7백여종의 출판물이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추모특집을 게재하였다.≫(수령님은 가시었어도)

2. 사상이론의 거장

1) 비범한 사상이론적 예지

1994년 2월 16일 미국 로스앤절러스에서 ≪신한민보≫사와 ≪재미주체사상연구학회≫의 공동주최로 열렸던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의 탄생 52회 기념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에서 한 ≪신한민보≫사장의 기념사중에서 한 토막을 인용해본다. ≪평양을 방문했을 때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는 ≪주체의 언론≫에 대한 책을 쓰는데 필요한 문헌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인민대학습당에 있는 ≪김정일문헌고≫를 가보았는데 그곳에서 언론관계 뿐만 아니라 국정전반, 학문전반, 예술전반에 대해 쓴 친필론문들, 발표문들, 강연문들, 교시문들, 담화록들이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특히 김정일비서께서 언론분야만 해도 30년 동안 종사해온 자기보다 더 많은 양의 신문 사설과 논설, 논문 등을 쓴 것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천재중의 천재라는 인식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정력적인 사색과 탐구)

김정일영도자의 저술능력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분의 명저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본 세인의 반영 몇가지만 들어봐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1994년 2월 14일 러시아에서 진행된 남과 북, 해외의 교수들과 대학생들의 학술토론회에 참석했던 이남의 교수, 학생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저작은 맑스의 ≪공산당선언≫에 대비도 안되는 유일무이한 명저이다. 그분의 저작은 간결하고 알기 쉬우면서도 세상리치를 담고 있다. 친애하는 김정일지도자선생님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체사상국제연구소 이사장이며 일본 릿교대학 이노우에 슈하찌교수는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는 김정일비서의 사상이론적 예지의 빛나는 결실, 높은 사상이론적 권위의 빛나는 총화를 내외에 천명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저작은 읽을수록 사색이 깊어지고 읽을 때마다 거기에서 새로운 사상들을 많이 배운 군 한다. 저작에 담겨진 사상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마를 줄 모르는 진리의 샘과도 같다. 확실히 명작이다.≫라고 자기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프랑스 빠리 제1종합대학의 에드몽 쥬브교수는 ≪김정일각하의 이 저작에는 훌륭한 사상이 훌륭한 명제들로 훌륭하게 집대성되어 있다. 나는 이 저작을 읽은 후 동료교수들과 토론도 많이 해보았는데 그들도 다 동감이며 감탄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여 자존심이 강한 구라파 학자들 속에서 어떤 좋은 사상도 그 권위를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김정일각하는 이 유명한 저작을 통해 우리 구라파인들 속에서 사상이론의 대가로서 높은 존경을 받게 되었다.≫라고 술회하였다.≫(과학적 통찰력, 뛰여난 저술능력)

2) 주체사상의 대가

1974년 2월 19일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사변적 의미를 지닌다. 이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혁명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하여 선포하시고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조선노동당의 최고강령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그때로 말하면 2월초순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전민중의 일치된 념원과 의사에 따라 김정일영도자를 김일성주석의 후계자로 추대한 직후여서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그분에게 쏠리고 있었다. . . . 바로 이런 때인 1974년 2월 평양에서는 그분의 발기와 지도밑에 전국당선전일군강습회가 두주일째 계속되고 있었다. 강습을 마감하는 2월 19일 오후, 영명하신 김정일영도자께서 강습회장에 나가시여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사상사업의 당면한 몇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중대 결론을 하시었다. 그것은 후계 수령으로 추대되신 후 전당, 전국, 전민을 향해 발표하신 첫 정책대강이었다.≫(2월 선언)

사상론수령론은 그분의 모든 사색과 활동의 출발점이며 그분의 사상과 이론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기조사상이다. 사상론을 기초로 하고 수령론을 중핵으로 하여 새로운 원리와 명제들이 도출되고 심오한 이론이 전개되어있는데 바로 김정일사상의 근본특징이 있다.≫(사상론과 수령론)

3) 시대사상의 정화

≪일본에서는 이미 1993년 3월 도꾜 김정일저작연구회의 결성을 시발로 하여 30여개 지역과 단위에서 김정일저작연구회와 학습회가 연속적으로 출범하였으며 그것은 1994년 2월 오사까에서 전국조직인 ≪일본 김정일저작연구회 연락협의회≫를 결성하는데까지 이르렀다. 나이제리아에서도 1994년 6월 13일 각 주에 조직된 김정일저작연구소조 대표들이 오니짜에 모여 ≪김정일저작연구 나이제리아 전국위원회≫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이전 쏘련의 여러 지역에서 최근 수많은 김정일주의 연구소조와 쎈터들이 결성되어 활동을 개시하였다. 파키스탄, 네팔, 우간다. 짐바브웨이, 프랑스, 뽀르뚜갈, 뽈스까, 벌가리아, 메히꼬, 꼬스따리까, 에꽈도르, 가이아나, 오스트랄리아, 뉴질랜드 등 6대중의 거의 모든 나라와 지역에서 김정일저작연구회가 속출하고 있다. . . . 1994년 9월 3일 ≪아세아지역주체사상연구소≫는 전세계 주체사상신봉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의 존함으로 불리우는 새시대를 빛내이기 위해 그분의 탄생일인 2월 16일을 ≪주체의 날≫로 정하고 인류공동의 명절로 성대히 기념하는 것을 전통화할 것을 주체사상 지역연구소들과 민족위원회들에 호소하였다. 호소문은 또한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더욱 폭넓게 연구보급하기 위해 매년 2월 16일을 계기로 주체사상에 관한 국제토론회를 진행하며 주체사상연구보급사업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도록 할 것을 각 지역 연구소들과 민족위원회들에 호소하였다. 이 호소는 대륙별 지역연구소들과 각 민족위원회들의 일치된 찬성을 받았다. . . . ≪주체사상국제연구소≫가 1994년 4월에 집계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93년 한해동안에 세계적으로 14개국에서 39개의 주체사상연구조직들이 새로 결성되어 활동을 개시하였다고 한다.≫(시대사상의 정화)

3. 조선노동당과 향도자

1) 전당의 주체사상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당풍을 확립하는데서 언제나 솔선수범하신다. 그분께서는 당내에서 높은 당원, 낮은 당원이 따로 없는 만큼 2중규율이 허용될 수 없으며 전당원은 당의 기층조직인 당세포에 소속되어 당의 규약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스스로 당세포에서 당적 분공을 받아 수행하는 모범을 보이시며 전당원의 당조직 관념을 높여주시었다. 1993년 12월 그분께서 중앙기관의 한 책임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었을 때에 있은 일이다. 그때 그 간부는 옆방에 있는 당세포비서를 찾아가 그달 당비를 바치고 있었다. 그분은 전화를 받은 일군이 그 간부를 불러오겠다는 것을 만류하시면서 한 10분이면 되겠는데 기다리겠다고 하시며 그가 당원의 의무를 수행하고 돌아올 때까지 송수화기를 든 채 기다리시었다. 그분은 한 당원의 당생활규범을 지켜주기 위해 전당, 전국, 전군의 사업을 지도하시는 소중한 시간을 바치시었다. 그분께서는 모든 당원들이 당조직에 대한 관점을 바로 세우고 당생활총화를 정례화, 제도화하도록 하시었다. 좋은 점은 서로 배우고 결함은 더 조장되기 전에 극복하게 하는 것, 이것이 당세포들에서 당원들이 진행하는 당생활 총화제도이다.≫(당의 간부화, 정예화)

2) 금성철벽의 당

1990년 한해도 다 저물어가던 10월 평양의 조선중앙통신사 5국 2세포의 당원들김정일영도자에게 충성의 편지를 올렸다 그 편지는 그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그들의 숭배심, 조선노동당에서의 영도자와 당원들 사이의 혼연일체가 이 세상 그 어느 당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그들의 충성의 편지를 받아 보시고 친히 붓을 들어 활달한 필치로 회답서한을 보내시었다. ≪2세포 당원동지들에게 동지들의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나는 동지들의 수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편지를 받은 나는 힘을 더 내여 당원동지들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당과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할 것을 확언하는 바입니다. 동지적인 인사를 보내면서 김정일 1990. 11. 1≫ ≫(수령을 중심으로 일심단결된 당)

1990년 1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당일군들과 자리를 같이 하신 석상에서 사회주의를 하던 수많은 나라의 공산당, 노동당들이 혁명을 포기하고 민중을 배반하였으나 조선노동당은 절대로 민중을 배반할 수 없으며 하늘이 무너진대도 민중의 운명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하시며 . . .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 이것은 그분께서 조선노동당과 간부들 앞에 제시하신 엄숙한 슬로건이자 곧 그분자신의 철석같은 신조이기도 하다. 그분께서는 조선노동당의 당사업을 지도하시는 첫날부터 당활동의 전반이 철두철미 민중의 이익에 옹호하고 민중에게 충실히 복무하는데 지향되게 하시었다.≫(민중에게 봉사하는 어머니당)

4. 현대정치가의 귀감

1) 인덕정치, 일심단결의 대가정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서거직후 12일간에만도 이북의 500만 청년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167만여명이 김정일최고사령관을 결사옹위하는 총폭탄이 될 것을 맹약하고 조선인민군 입대 및 복대를 탄원해나섰고 근 3만명의 공장, 기업소 노동자들과 고등중학교 졸업생들이 김일성주석의 영도사적이 깃들어 있는 협동농장에 진출할 것을 자원했다. . . . 애도기간의 어느날 깊은밤 그분께서는 김일성주석의 동상이 높이 서있는 만수대언덕을 찾으시었다. 퍼붓는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새워 위대한 어버이의 동상을 찾는 시민대열속에는 화환이 비에 젖을세라 옷을 벗어 비를 받으며 계단을 오르는 대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옷섶밑에 꽃묶음을 정히 간수하고 다른 손으로는 연방 눈물을 닦는 백발의 할머니도 있었다. 하늘도 눈물을 쏟아붓고 땅도 몸부림치는 이밤 그분께서 보신 것은 민중이 잠긴 슬픔의 바다만이 아니라 옥같이 깨끗하고 금강석처럼 강한 대를 이어 변심없을 이북 민중의 충효일심이었다. 그날의 이 광경을 보시며 쏟아지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고 하시며 그분께서는 정말 우리 인민은 자기 수령을 흠모하고 받드는 사상감정과 정신도덕적 풍모가 세계 그 어느 나라 인민들과도 대비할 수 없이 고상한 인민이라고 칭송하시고 인민들이 수령복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인민복을 타고났다고, 우리 인민은 반드시 ≪위대한≫이라는 수식사를 붙여서 불러야 한다는 겸허한 말씀으로 자신의 감동을 표현하시었다.≫(일심단결의 대가정)

2) 자주정치의 강국

≪20세기의 마지막 연대인 90년대의 문턱을 넘자마자 인류는 구 쏘련과 동구권사회주의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이변을 보게 되었다. 얄따에서 시작된 동서냉전구조에 몰타에서 종지부가 찍힘으로써 쏘미대결구도는 사라졌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정치는 쏘미대결구도에서 조미대결구도로 세계의 정치축이 바뀌어진 상황에 있다. 미국회에서 통과된 1993∼94회계년도 국방예산은 2천 7백억 딸라이다. 이남당국의 1993∼94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이북의 1992년도 군사비지출은 55억딸라로서 미국과는 50 : 1이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영토상의 비례에서 78 : 1, 인구상으로 10 : 1이다. 게다가 미국은 제국주의연합세력의 총수라면 북은 단독고전이라 할 수 있다. 역량대비의 이같은 현격한 차이에도 불고하고 미국은 이북을 ≪미국안보의 최대위험≫이라고 한다. 동서대결의 시대이후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가에 초점을 두고 신세계전략을 전개하고 있는 미국은 이라크를 일격에 제압한 자신감을 안고 이북에 접어들었다. 미국은 93년 1월 26일≪팀 스피리트≫합동군사훈련의 재개를 발표했고 2월미전략사령부의 리 버틀러 신임사령관구쏘련을 목표로 했던 전략핵무기가 이북을 향해 목표 재조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임스 울시 미중앙정보국장은 이북이 ≪팀 스피리트≫라는 핵전쟁게임을 다시 시작함으로써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나라들은 핵보유국들에 의해 핵위협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NPT(핵확산금지조약)의 근본원칙을 위반하였다. . . . 그러나 미국이 ≪팀 스피리트≫로 위협하면 이북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미국이 ≪핵의혹≫소동을 벌리며 특별사찰압력을 가할 때에는 이북은 거치장스러운 NPT탈퇴라는 경천동지할 폭탄선언으로 불의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의 탁월한 지도력과 정치풍모는 조미회담과정에서 또다시 확인되었다. 준전시상태선포와 NPT탈퇴선언의 초긴장상황하에서도 김정일영도자께서는 강, 온의 전술을 영활하게 구사하시여 ≪팀 스피리트≫훈련이 끝나자 미국을 협상테이블에 끌어내었다. 이북은 1954년 조미제네바회담이후 40년동안 줄당기기를 해온 조미고위회담을 성사시키는 뛰어난 외교전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서울과 도쿄의 당국자들이 ≪국제공조체제≫를 운운하며 집요하게 방했지만 이북은 신축자재하고 능활한 협상전술로 마침내는 ≪핵의혹≫감투를 벗어던지고 조미국교정상화의 문까지 열어놓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미합중국대통령이 이북을 정식국호로 지칭하면서 김정일최고영도자에게 공약이행을 담보하는 이례적인 공식서한까지 보내게끔 되었다. . . . 파키스탄의 ≪더 뉴스≫지(1994년 10월 23일부)가 ≪북조선의 정치, 경제, 군사적 위력이 없었다라면 이번의 조미협상 승리를 기대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썼듯이 이북의 영도자와 민중의 혼연일체, 막강한 군사력이 백악관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국력이 강하다고 해서 어느 나라나 강국과 대결상황에서 기선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쏘련이 물리적 힘이 약해 총 한방 쏘지 못한 채 해체된 것은 아니였다. 강적으로 하여금 범접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국력을 신장시키신 분도 김정일영도자이시고 ≪신비경의 외교적 수완≫으로 ≪재치있게 목적한 바를 달성≫하신 분도 김정일영도자이시다. . . . 특히 3라운드 조미회담때 이북측의 흑연감속로의 경수로 대체제안은 불의에 기선을 잡고 상대를 제압한 그분 특유의 절묘한 외교예술이었다고 평해도 과장이 아니다. . . . ≪한양대학교≫의 이영희교수가 조미회담과정을 마치 ≪미국이라는 거인이 소인의 손바닥에서 노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협상외교의 극치≫로 묘사하면서 ≪충격적 감동이 새겨넣은 민족적 자부심≫을 토로한 것은 과장없는 동족의식이라 할 것이다. 1994년도 다 저물어가던 12월 17일에 발생한 남조선주둔미군 정찰헬리콥터격추사건의 경과 역시 자주성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모르는 조선의 단호한 입장과 능숙한 외교전술을 재확증하였다.≫(정치대국)

5. 사회주의건설의 총수

1) 사상혁명과 인간개조

1993년 12월 1일, 평양에서는 전국공산주의미풍선구자대회가 열렸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민중속에서 발양되는 공산주의미풍의 훌륭한 모범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그를 전민중속으로 보편화하기 위해 그 선구자들의 대회를 직접 발기하시었다.≫(주체형의 새 인간 화원)

2) 기술혁명과 사회주의경제건설

1987년부터 1993년까지의 이북의 제3차 7개년 계획기간공업생산은 1.5배로 늘어났고 공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5.6%를 기록하여 이를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그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북 특유의 자력갱생정신에 입각한 기술혁명의 성과적 수행과 이에 바탕한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정책에 그 비결이 있는 것이다. . . . 김정일영도자는 주체적 입장에서 기술혁명과 사회주의경제건설을 가속화하여 근로민중의 물질생활과 노동생활에서 전환을 이룩하신 경제건설의 영재로 칭송되고 있다.≫(기술혁명과 사회주의 경제건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90년대초 첨예화된 제국주의연합세력의 경제봉쇄와 그로 인해 새롭게 조성된 국면을 깊이 통찰하시고 새로운 혁명적 경제전략을 제시하시었다. 3년간을 완충기로 한 새로운 경제전략은 1993년 12월에 있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21차전원회의에서 제시되었다. 김정일영도자의 이 혁명적 경제전략은 급변한 환경과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앞으로 몇해동안 경제건설에서 농업제일주의, 경공업제일주의, 무역제일주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발을 맞추어 경제의 선행부문인 석탄공업과 전력공업, 철도운수를 확고히 앞세우며 금속공업을 계속 발전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 . . 새로운 경제전략은 불리해진 대외적여건을 성과적으로 극복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갈수 있는 경제의 주체성과 자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경제건설의 청사진)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대회에서 3대기술혁명과제가 제기된후 김정일영도자께서는 황해제철소에서 자동화의 첫 봉화를 지펴올리시었다. 그분께서는 산업텔레비젼화와 무선통신수단에 의한 지령체계를 세우도록 하시고 필요한 기술자들과 설비들을 보내주시었다. 이렇게 첫 발자국을 땐 황해제철소의 자동화는 전적으로 그분의 구상과 지도에 의해 실현되었다. . . . 그후 1975년 7월 1일, 김정일영도자께서는 검덕광산을 찾으시여 직접 갱막장에까지 들어가시었고 광산에서 애로사항으로 제기되고 있던 운광문제를 벨트콘베아화하여 해결해 주시었다. 그와 함께 광산의 중심이고 생산단위인 갱의 지휘체계를 강화하도록 갱종합지령대와 지령전화를 보장하도록 해주시었으며 1천만톤 능력의 세계적인 선광장을 새로 설치하도록 하시었다. 감탄할만큼 현대화된 검덕광산의 현실은 바로 광석보다 그것을 캐는 사람을 더 귀중히 여기고 그들을 찾아 지하 수천척막장을 내려가시는 김정일영도자의 사랑의 인간관에서 태여난 것이다. . . . ≪속도전≫의 진군이 개시되던 첫시기에 역사적인 ≪70일 전투속도≫가 창조되었다. ≪70일전투≫는 나라의 공업생산을 단번에 1.7배로 장성시켰다. 조선노동당의 사회주의 경제건설역사에 빛나는 장을 수록했던 ≪70일전투≫는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비범한 경제지도 풍모를 보여준 유명한 경제건설전투였다. . . . 김정일영도자께서는 최신기계들과 대형설비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제작하도록 이끌면서 ≪80년대속도≫를 창조해나가시었다. 이 과정에서 태어난 1만톤프레스와 대형산소분리기는 그분의 자력갱생의 정신과 속도전의 산아였다. . . . 이같은 기계공업의 매머드 1만톤프레스를 자력으로 제작할 결심을 하신 김정일영도자께서는 1984년 5월 룡성기계연합총국의 노동자들을 찾아가시어 그 제작을 맡기시었다. 그 며칠후인 6월 2일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일군을 기계공장에 파견하여 자신이 끝까지 뒤를 밀어주겠다고 보증하시고 6월 7일에는 명성높은 만수대예술단을 보내어 제작자들을 고무해주시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6월 8일에는 정무원에 만톤프레스제작을 위한 국가적 보장대책을 세우도록 지시를 하달하였다. 또한 유능한 과학자팀을 보내 과학기술적인 협력을 제공하도록 하시었고 기록영화촬영반을 보내여 제작자들의 모습을 역사에 기록하도록 하시었다. 이렇듯 김정일영도자의 세밀한 지도와 배려속에 1만톤프레스는 1985년 10월 드디어 탄생의 고고성을 올리었던 것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또한 제3차 7개년계획의 웅대한 설계도를 펼치시면서 ≪모두다 새로운 90년대속도 창조에로!≫라는 슬로건을 제시하시어 전국, 전민을 ≪90년대속도≫창조투쟁에로 불러일으키시었다. 그리하여 1987년부터 시작한 제3차 7개년계획기간에도 상당히 높은 성장률의 경제발전이 계속 유지되었다. 예컨대 1988년에 있은 ≪200일전투≫기간에 공업생산은 전해 같은 시기에 비해 1백 22% 성장하였다. . . . 그분께서는 공업부문에서는 검덕광산에서, 농업부문에서는 청산협동농장에서 이 운동의 봉화를 먼저 치켜들도록 하시고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대중자신의 운동으로 전환시키시었다. 여기에서 1986년 11월 평양에서 열렸던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선구자대회≫는 그 의미가 컸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이밖에도 각 부문의 기술문제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대중적기술혁신운동, ≪과학자, 기술자돌격대운동≫도 힘있게 벌리도록 하시었다. . . . 김정일영도자에 의해 전개되고 있는 기술혁신돌격대운동은 1975년 9월 함경남도 검덕광업연합기업소를 3대혁명의 시범단위로, 현대적인 비철금속생산기지로 꾸리기 위해 과학자, 기술자팀이 결성돼 파견된 것이 그 발단이었다. 그후 과학자, 기술자돌격대는 평안남도 안주지구탄광연합기업소, 함경북도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비롯한 이북경제의 중요기업체들에 파견되는 등 경제 각 부문에서 폭넓게 활약하고 있다. 1980년 한해동안에 6천여개의 공장, 기업소에 8만여명의 과학자, 기술자들을 망라한 ≪4.15기술혁신돌격대≫가 새로 구성되고 6만 5천여건의 기술혁신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농업기술혁명의 완성에서 당면한 역점사업인 농촌의 종합적 기계화를 실현하기 위해 종전보다 10배의 생산능력을 가진 금성트랙터종합공장승리자동차종합공장이 트랙터와 자동차 생산에서 일대 비약을 일으키도록 지도하시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평안남도 강서군의 청산리농촌을 종합적 기계화의 본보기로 만들고 그 경험을 보편화하도록 하시었다. . . .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대중소비품생산을 높이기 위한 운동으로 ≪8월3일인민소비품≫생산운동을 발기하시고 적극 추진시키시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또한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발전단계의 요구에 맞게 ≪정춘실운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의 대중운동을 힘있게 벌리도록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1994년 9월 이북의 당정 간부들을 자력갱생의 본보기단위인 자강도 전천군상업관리소그 원료기지를 참관하고 그 모범을 보편화하도록 하시었다. 이 운동의 원형인 정춘실은 전천군상업관리소의 소장인 2중노력영웅이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다. 정춘실은 처녀시절에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자기가 일하는 상점에 모시었던 영광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자력갱생, 간고분투하여 방대한 자영원료기지를 개척해놓고 군주민들에 대한 상업봉사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규모의 양계, 양돈과 많은 새끼돼지, 해리서, 은흑색여우 등의 사육을 통해 군주민들의 생활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속도전≫과 대중운동의 방식으로)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통이 큰 발상과 완강한 전개력, 능숙한 조직수완으로 이북의 ≪노동당시대≫를 빚내이는 대기념비적 창조물들을 많이 건설하시었다. 예를 들어 은률철산의 장거리벨트컨베아건설은 그 하나의 본보기일 것 같다. 당시 노천광인 은률철산에서는 1톤의 광석을 얻기 위해 25톤의 박토를 처리해야 했다. 그만큼 박토처리는 철광석생산을 좌우하는 기본문제였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이해 장거리벨트컨베아를 설치할 안을 통이 크게 제기하시고 광구로부터 바다기슭인 금산포를 지나 부근의 섬인 능금도를 거쳐 곰섬까지 15리의 벨트컨베아를 설치하게 하시었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과일군 월사리로 연장하여 3천 2백정보의 간석지를 얻어냈다. 이 사실을 두고 이북사람들은 김정일영도자의 천지확장술이라고 말한다. . . . 그분께서는 사회주의대건설에 광범한 대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국건설자대회≫를 위시한 여러 대회들을 개최하고 ≪속도전청년돌격대≫≪당원돌격대≫를 조직하여 기념비적 창조물건설을 진행하시었다. 80년대중반기에는 10만명인민군장병들을 제대시켜 사회주의건설장에 진출시키고 수많은 현역군인들을 중요대상건설에 동원하는 조치도 취하시었다. . . . 6백리 혜산-만포 철도공사와 나라의 중요지맥들을 련결하는 고속도로가 뻗어나갔다. 세계 7대 기적의 하나로 꼽히는 서해갑문을 위시하여 미림갑문, 봉화갑문, 순천갑문이 건설되어 천리 대동강의 갑문화가 실현되었다. . . . 김정일영도자의 건설작전에 따라 인민군연합부대와 건설기업체, 과학자, 기술자들과 강력한 기계화력량이 동원된 서해갑문 건설은 처음부터 지상과 해상, 수중에서 그분의 말씀대로 ≪대입체전, 대전면전≫으로 벌어졌다. 땜공사는 몇 개의 큰산을 허물어다가 쌓아놓고 또 10층 빌딩만큼 큰 대형블로크들로 바다를 막아가는 거창한 공사였다. 35톤트럭 6백여대가 골재와 흙을 실어다 메워야 땜이 겨우 1미터 전진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서해갑문의 8km 댐 공사량을 총 합하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수자가 된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비범한 통찰력으로 복잡하고 엄청난 공사의 중심과제와 주타격목표를 정확히 설정해주시고 거기에 역량을 집중하는 문제로부터 새 공법을 도입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지도를 주시었다. 그분께서는 서해갑문 건설을 수십차례나 지도해 주시면서 공사의 애로사항을 하나하나 해결해주시고 새로운 공법들을 제기하시었으며 대자연개조투쟁을 승리에로 종착시키시었다. 1986년 4월 착공한지 불과 5년기간에 경이적인 대공사 끝에 5만톤급까지의 각종 선박이 자유자재로 통과할 수 있는 여러개의 갑실과 수십개의 수문을 가진 서해갑문이 세상에 그 웅자를 드러냈다. 그리하여 수수천년 서해로 흐르던 대동강이 흐름을 멈추고 대인공호수로 전화되었으며 아득한 태고적부터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갈라져 바라만 보던 평안남도 남포시와 황해북도 은률군이 대언제로 연결되었다. . . . 90년대에 들어와 서해갑문-장수호역수물길, 서해갑문-신천-강령-웅진물길, 서해갑문-은진물길과 례성강-연백물길, 황해북도 남강-미루벌물길, 태천발전소, 평안북도 운전, 정주, 곽산 등 철산반도 간석지로 빠지는 물길을 비롯한 장장 2천리 물길이 새롭게 건설되어 대동강과 예성강, 압록강과 대령강을 하나로 연결시킨 대륜환식관개체계가 완성되었다. 8.15전 몇 개의 자연호수만이 있었던 이북에 1천7백여개의 대소 저수지와 2만5천2백10여개의 양수장이 생겨나고 관개수로의 총연장길이가 4만키로미터이상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이북의 농업은 이상기후 조건에서도 안전하게 농사를 지으며 홍수와 가물 피해를 영영 극복할 수 있는 전천후농업이 되었다. . . . 이북에서는 제3차 7개년계획기간에 기술혁명의 당면과제로서 기계공업과 전자공업, 자동화공업을 발전시키고 생산공정의 종합적 기계화와 자동화, 전산화와 로봇화의 실현을 위한 과학기술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어 내였다. 1994년 4월에 있은 제22차 제네바 국제발명 및 새 기술전람회에서 이북이 출품한 발명품, 새 기술제품인 ≪완전무기질명구방식무독성 방오도료≫, ≪지문호출조종체계 (지문열쇠)≫, ≪지향절환식영구대전측전기마이크≫, ≪구상흑연주철생상용혼합개량제≫가 각각 금메달을, ≪종합가스흡착제≫가 은메달을 받았다. . . . 김정일영도자의 측근에서 일해 온 한 일군은 자기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이께서 습관적으로 쓰시는 두가지 말씀이 있다. 하나는 인민들에게 기쁨을 주시고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실 때 ≪인민들이 좋아하오?≫라고 물으시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민들이 불편해 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아실 때 ≪인민들이 뭐라고 하겠소≫라고 하시는 것이다.≫ . . .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제13차 세계청년학생 평양축전을 계기로 건설된 평양시광복거리와 그후 통일거리 건설에로 연장된 5만세대 주택건설이라 하겠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의 웅대한 발상과 주도세밀한 지도에 의해 훌륭하게 건설된 광복거리, 통일거리, 창광거리 등은 확실히 현대적 감각과 조화미가 돋보이고 쾌적한 생활공간을 아울러 구비하고 있는 김정일시대의 대기념비적 창조물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기적의 창조)

3) 문화혁명과 사회주의민족문화건설

≪그분께서는 전반적 의무교육제를 발전완성시키는데 정력을 기울이시여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전반적 11년제무료의무교육제를 확립하는 세기적 공적을 이룩하시었다. 오늘 이북에서는 유치원으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8백만의 모든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무료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으며 현재 2백 44개의 대학을 가지고 있는 이북은 인구당 대학생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화대국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결과 1백 70여만의 지식인대군이 육성되어 기술자, 전문가의 국가적 수요를 자체로 충원하고 있다. . . . 11년제중등교육을 마친 후에도 일하면서 배우는 고등교육체계사회적인 학습체계에서 누구나 다 공부하는 ≪평생교육체계≫가 인류사상 최초로 이북에서 확립되었다. . . . 그분의 크나큰 은정속에 이북에서는 두메산골과 낙도(落島)마을 어디에서나 고등중학교와 그 분교들이 세워지고 배움의 종소리가 울리게 되었으며 ≪학교가 학생을 찾아가는≫ 사상 초유의 희한한 현실이 일상화되고 몇 명 안되는 학생의 통학을 위한 ≪사랑의 다리≫가 놓여지고 통학열차, 통학버스, 통학선박이 운행되는 신화가 창조되었다.≫(교육과 의료와 인간 만세)

≪이북을 방문했던 구라파, 아세아 국가들의 의사 또는 매스컴특파원들은 이북이 완벽한 무료치료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 전국적인 의료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돼 있다는 것, 모든 전염병이 퇴치되었다는 것을 보고하는데 일치하고 있다. 그들의 글은 병나기 전에 치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예방의학적 방침양의학과 고려의학(한의학)의 병진, 의사담당구역제라는 이북의 보건정책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 이북은 인구 1만명당 의사수에서 29.7명, 병원침대수에서 1백 36대, 평균수명은 74.5살로서 세계일류급 선진국 수준이다. . . .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흥동에 위치하고 있는 연건평 6만m²의 평양산원은 2천 30개의 방, 1천 5백대의 침대를 가진 산부인과 종합병원이며 연구기지이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1979년 2월 이같은 매머드 산원건설과 관련한 협의회를 가지시고 이어서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탄생일인 4월 15일에 산원의 현 위치를 잡아주시었다. 이날 그분께서는 강력한 건설집단을 조직하고 수백대의 중기계설비와 헬기까지 동원해 산원을 빨리 완공하도록 구체적으로 지도하시었다. 그리고 9월에는 병원의 내부시공안과 설비목록을 보시고 세계 일류급의 최신의료시설을 갖춘 현대적 병원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하시었다. 이렇듯 그분의 1백여차례의 구체적인 지도와 배려에 의해 오늘의 평양산원이 1980년 9월에 개원했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흥남지구 노동자들을 위해 함흥의 구강병원예방원건설도 친히 발기하시고 최신식설비를 마련해주시었다. 그분께서는 나라의 주체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예방사업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병을 없애기 위한 치료대책을 빈틈없이 세우고 의사들이 뜨거운 인간애를 지니고 정성운동을 힘있게 벌이도록 하시었다. . . . 이북의 보건부문에서 정성운동의 불길이 타오른 결과 가슴뜨거운 미거가 끊임없이 발현되고 있다. 신체부위의 60%에 3도 화상을 입은 북창의 두 3대혁명소조원도, 중상을 입고 60여일간이나 의식을 잃었던 기자도, 해발 2천메터가 넘는 외딴 산중에서 중태에 빠졌던 초단파중계소 처녀기대공도 의사, 간호사들의 정성에 의해 소생하여 다시 일터에 서게 되었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공해방지에 관해서도 그것이 단순한 기술실무적인 일이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인 사업이라고 하시면서 중요 산업지구들에 공해감시소를 내오고 공해연구사업을 강화하며 공장기업체에서 유독성물질을 내보내는 현상을 엄금하시었다. 그리고 보건부문의 해당 전문요원이 새 공장의 설계와 시공,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설공정에 책임적으로 참여하여 공해요소를 사전에 방지하도록 하는 현명한 조치를 취하시었다. 몇해전 김정일영도자께서 성천강 상류쪽에 큰 공장을 건설할 계획을 취소시킨 일이 있었다. 그분께서는 아무리 경제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는 공장이라 할지라도 민중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준다면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공장건설제안을 부결하시었다. 그리하여 성천강을 예나 다름없이 함흥시민들의 수원지로 이용되고 있다.≫(교육과 의료와 인간 만세)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문학예술의 위대한 영재이시다. 그분께서는 ≪주체문학론≫, ≪영화예술론≫, ≪음악예술론≫, ≪무용예술론≫, ≪미술론≫, ≪가극예술에 대하여≫, ≪연극예술에 대하여≫, ≪건축예술론≫ 등 수십권에 달하는 문학예술총서를 내놓으시어 주체문학예술의 찬란한 개화를 가져오게 하고 인류문예이론발전에 불멸의 공헌을 하시었다. 이같은 위대한 문예이론가의 현명한 영도밑에 이북의 문학, 영화, 연극, 가극, 음악, 미술, 무용, 건축 등 모든 분야에서 일대혁명이 일어나고 주체적 문학예술의 대전성기가 펼쳐지게 되었다. . . . 그분께서는 가요 ≪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를 비롯한 위대한 수령님을 노래한 송가들의 사상적 내용과 선율형상에서, ≪조선의 별≫을 비롯한 혁명영화들의 장면과 대사, 음악형상에서 숭엄한 정서적 색채가 흘러넘치도록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끄시었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또한 위대한 수령님의 형상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민중속에 계시는 수령님을 형상하는 원칙을 지키도록 하시었다. . . . 김정일영도자의 종자론이야말로 세계문학이론에 메가톤급 충격을 준 독창적인 문예이론이다. . . . 종자론의 창시에 의해 문예이론사상 처음으로 형상의 모든 요소를 전일적인 통일속에서 파악하며 문학창작의 싹을 틔우고 형상의 꽃을 피우는 사상예술성이 높은 문학예술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비결이 발견되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이북의 문학예술혁명의 돌파구를 뚫은 첫 포성을 영화예술부문에서 올리시었다. . . . 김정일영도자의 가극혁명의 요체는 절가방창이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문학, 영화, 가극뿐만 아니라 연극, 무용, 교예 등 문학예술의 모든 형태들을 우리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게 주체적으로 발전시키시었다. 김정일영도자께서 인류예술사에 특기할 공적을 이룩하신 것중의 중요한 것이 무용표기법을 창제하신 것이다. . . . 이북에서는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의 주체적인 건축미술사상이 빛나게 구현되어 건축예술분야에서도 세기적인 전환이 일어나고 노동당시대의 대기념비적 건축물들이 솟아올랐다. . . .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탄신 70회를 맞으며 건립된 주체사상탑개선문을 건설할 때 였다. 그분께서는 주체사상탑은 민족적 형식의 석탑으로 하고 그 높이를 세계적으로 제일 높은 1백 70미터로 정해주시었고 그리고 70단으로 된 화강석탑신 위에 봉화를 올려놓으며 탑신에는 ≪주체≫라는 글을 금문자로 새기고 탑앞에는 조선노동당의 마크를 높이 치켜든 노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의 3인군상을 세워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탑 좌우에는 주체사상의 불패의 생활력을 보여주는 여러 주체의 군상들을 배치하도록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평양의 개선문을 세계적으로 제일 높고 크게, 독특한 민족적 형식과 입체성을 가진 개선문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하시며 그 높이를 60미터로 정해주시었다. 그 구성은 툇마루형식의 기단을 닦고 4개의 주춧돌위에 4각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4개의 흥예문을 만들고 윗부분에는 4각형탑식으로 된 지붕들을 3층으로 얹어놓도록 하시었다. 앞뒤면 양쪽 기둥벽우에 부각하게 된 연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으시고 만경대를 떠나신 때로부터 개선하신 때까지인 ≪1925≫, ≪1945≫로 하도록 하시었다. 그리하여 주체사상탑은 2년, 개선문은 1년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 높이에서나 건축형식과 규모, 사상성과 예술성에서 세계에서 둘도 없는 대기념비로 거연히 일어서게 되었다. 주체사상탑은 지금까지 세계제일의 석탑이라고 말하던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워싱턴기념탑 555피트(약 166m)보다 더 높은 세계제일의 기념비이다. 그리고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착공돼 완공까지 30여년이 걸렸다고 하는 높이 50메터의 빠리 에토왈개선문을 압도한 단연 세계최대의 개선문이다. 이같은 노동당시대의 대기념비적 건축물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건축물중의 하나가 바로 평양 중심부남산재의 거연히 들어앉아 하늘을 가리며 솟아있는 인민대학습당이다. 인민대학습당은 기러기떼가 푸른 하늘로 줄지어 날아가는 듯한 크고 작은 아름다운 청기와합각지붕, 민족적 미감을 드러내놓는 둥근벽기둥 등 전통적 풍치가 짙게 풍기는 민족건축의 백미이다. 이 인민대학습당은 연건평 근 10만m²에 강당, 강의실, 녹음실 등 600여칸3천만부의 장서 그리고 각종 현대적 봉사시설을 갖추고 있다. 5월1일 경기장, 청춘거리의 현대적인 경기관들, 지하궁전으로 불리는 평양지하철도, 현란한 분수공원안에 장중한 건축미와 금강산 8선녀가 하강하는 듯 황홀한 실내장식이 조화된 만수대예술극장, 건축미와 율동미를 자랑하는 빙상관, 창광원,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등 이 모든 노동당시대의 기념비적 창조물들은 모두 김정일영도자의 독특한 주체의 건축미학사상의 정화이며 그분께서 민중에게 돌려주시는 뜨거운 은정의 산아들이다.≫(20세기의 문예부흥)

6.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 ≪일당백≫강군의 양성과 전민방어체계의 구축

≪경애하는 김정일장군은 불멸의 군사적업적과 민중의 절대적신뢰에 의해 1991년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1993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위원장으로 추대되시었다.≫(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94년 1월 조선인민경비대의 두 병사(김철진 23살 하사, 김경철 20살 상등병)가 쪽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이남의 해군경비정에 끌려가게 되었다. 서울 ≪육군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그들은 이남당국의 ≪귀순≫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들은 설득과 유혹을 뿌리치고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김정일장군을 칭송한 노래를 부르면서 ≪부모를 떠나서는 살수 있어도 김정일장군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응수하였다. 그리고 김정일장군님에 대한 호칭에서 존경어를 쓸 것을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관해 이남의 매스컴들은 북의 병사들이 고문과 기만에 실수라도 할까봐 ≪혀를 끊으려고 이빨로 깨물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의식을 차릴 수 없었다.≫고 하면서 ≪김정일최고사령관에 대한 노래를 부른 것은 탄복할 만한 일≫ (≪한국일보≫ 1994년 1월 30일부)이라고 전하였고 그들의 정치사상상태를 일등급의 군인기질을 보여준 것으로 평하였다.≫(≪일당백≫의 강군으로)

2) 필승의 영장

1991년 1월 중동에서 걸프전이 발발했을 때이다. 그때 세계의 매스컴은 걸프전의 불길이 임의의 시각에 ≪팀스피리트91≫,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벌어지고 있는 조선반도에로 확대될 수 있다고 전하였다. 김정일장군께서는 이런 긴박한 정세가 조성됐을 때에도 대외교류계획에 예정되어있던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의 쿠바방문을 취소하거나 연기함이 없이 그대로 실행하도록 하시었다. 정세가 긴장하므로 군사대표단의 쿠바방문을 유예하는 것이 좋겠다는 인민군 총참모부의 제의를 받으신 그분께서는 쿠바방문을 미루지 말고 계획한대로 떠나야 하겠습니다, 나는 당과 수령의 두리에 일심단결된 우리 인민과 인민군대를 믿습니다, 만일 미제침략자들이 감히 덤벼든다면 놈들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었다. 이렇게 되어 군사대표단은 2월초에 쿠바행 여객기안에서 조성된 긴박한 정세와 관련해 전국, 전민, 전군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함에 대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을 청취하게 되었다. 아바나공항에 마중나온 쿠바혁명무력의 총참모장은 이북군사대표단 단장의 손을 잡고 ≪우리는 정세가 너무 긴장하기 때문에 조선동지들이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위군사대표단이 서반구 멀리까지 온 것을 보면 조선의 담은 보통이 아니다.≫라고 하며 거듭 감탄을 표시하였다.≫(지용겸비)

1993년정초부터 시작된 ≪팀 스피리트 93≫합동군사훈련과 핵사찰압력은 김정일최고사령관께서 치르신 또 한차례의 대미지혜전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걸프전의 종전과 함께 ≪제2의 만전쟁은 조선≫이라고, ≪조선은 이라크보다 강하기 때문에 120일은 걸릴 것≫이라고 하면서 ≪120일 전쟁시나리오≫까지 짜놓고 이북을 위협해 나섰다. 드디어 미국은 ≪팀 스피리트93≫합동군사훈련을 선포하고 대기동을 개시했다. 핵무기를 적재한 신형전투기들과 함선, 각종 핵타격수단들이 조선반도와 그 주변수역에 집중 배비되었으며 미본토와 괌도, 하와이, 일본을 비롯한 아세아태평양지역의 미군기지들에서 20여만의 병력을 동원시켰다. 미국은 다른 한편으로 국제원자력기구를 사주해서 이북에 ≪핵특별사찰≫압력을 가하는 익측전선을 펴놓았다. 조선반도의 정세는 일촉즉발의 극한점에 이르렀다. . . . 이러한 전례없는 난국앞에서도 김정일장군의 태도는 자신만만하고 여유작작했다. 그분께서는 수십만의 적들이 하늘과 땅, 바다를 꽉 메우며 달려드는 때에 인민무력부의 한 일군에게 전화를 거시어 전승40돐을 앞두고 건립되는 전승기념탑 건설의 추진정형을 알아보시었다. 그분께서는 사회주의가 좌절된 세계 여러나라들에서 전승기념탑들이 반동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으나 우리는 보라는 듯이 그것을 더 높이 더 웅장하게 일떠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이북에는 일제의 백만대군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연합군을 이겨낸 영웅적 인민이 있고 현대적인 공격수단과 방어수단을 다 갖춘 일당백의 인민군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제일 중요하게는 수령, 당, 대중의 일심단결된 저력이 있고 혈연적으로 굳게 뭉친 군대와 민중의 막강한 역량이 있다는 것, 총체적으로 이러한 불패의 힘이 있는 한 이북은 그 어떤 침략자도 일격에 소탕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장군의 신념이고 의지였다. 김정일장군께서는 일촉즉발의 위험을 막강한 무력으로 뒤받침된 두뇌의 대결로 물리칠 결심을 내리시었다. 선열들이 피흘려 찾아주고 민중이 땀흘려 세운 사회주의조국의 그 모든 창조물에 자그마한 흠집도 내지 않게 하며 천금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과 민중의 보람찬 삶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려면 3천리 강토에 폭탄 한 개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하며 그러려면 총폭탄이 아니라 두뇌로써 싸워이겨야 한다는 것이 장군의 뜻이었다. . . . 원래 미국은 오래전부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김정일장군의 지략과 전략을 연구하는 ≪케이·제이·아이(K·J·I)연구소≫를 설립, 운영해왔다. 그러나 김정일장군의 변화무쌍한 지략은 컴퓨터로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분께서는 정세가 절정에로 치달은 3월 8일 드디어 이북의 전국, 전민, 전군에 준전시상태로 넘어갈 것을 결정한 최고사령관 명령 제0034호를 하달하시었다. 최고사령관 김정일장군께서는 불의에 급소를 맞고 얼떨해하는 미국측에 연속 강타를 가하시었다. 3월12일 이북정부는 나라의 최고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세계는 깜짝 놀랐다. 영토의 크기나 인구로 볼 때 미국과 비표조차 할 수 없는 작은 나라가 미국의 코를 잡고 휘두르는 것을 보고 폭풍같은 반향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겁먹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미국무성 동아시아 및 태평양지역 차관보는 ≪북조선은 단결력에 있어서나 군사력에 있어서 특수한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에 어떤 타격을 가해올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프랑스국방상은 ≪북조선은 이라크와 전혀 다르다. 북조선에는 세련된 김일성주석께서 계시며 40년이상 군사전략으로 째여진 군대와 인민이 있다.≫고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방송은 이북의 3월 12일 정부성명이 발표되자 곧 ≪지금의 대결은 북조선지도자의 영도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북조선의 작전가들은 김정일각하가 지휘하고 있는데 그분은 세계적인 지도자임이 틀림없다. 북조선의 모든 작전들은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따를 수 없다.≫라고 보도하였다. 이북의 단호한 대응앞에서 미국이 ≪팀 스피리트93≫군사훈련을 조기결속하자 김정일장군께서는 3월 21일 준전시상태의 해제를 명령하시었다. 그것은 역사에 총포성없는 ≪15일전쟁≫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의 엔. 에이취. 케이방송은 준전시상태해제에 관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보도를 전하면서 ≪김정일비서는 이번의 준전시해제로 이 나라가 만단의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는 자주성이 강한 나라라는 것을 온 세상에 시위하였다.≫고 하면서 ≪이것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지도력을 과시한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전화위복의 군사지략)

7. 민족의 구성

1) 민족주체성의 최고체현

≪민족의 어버이신 김일성주석의 간곡한 교시를 받아안은 학자들은 비로소 시조릉에 대한 발굴에 착수하여 마침내 단군의 유골과 유물을 발견하는 민족사적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1993년 10월에 발표된 공화국 사회과학원의 ≪단군릉발굴보고≫에 의하면 단군의 유골은 발굴당시부터 5011년전의 것임이 과학적으로 확증되었다. 단군은 평양에서 태어나 고조선국가를 세운 실재한 인물임이 증시되고 우리 민족은 동방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문명시대에로 이행하여 단일민족의 피줄을 이어온 슬기로운 민족이며 고조선이 수도인 평양은 민족의 성지로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천리혜안의 예지와 비범한 통찰력을 지니신 김일성주석의 걸출한 영도가 낳은 경이적인 발견이고 민족의 대경사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단군을 찾게 된 것은 우리 고고학의 대승리라고 못내 만족해하시며 팔순고령의 몸으로 몸소 강동땅을 찾으시어 대박산기슭의 명당자리에 시조릉을 최상의 수준에서 건설하도록 하시고 서거하시기 이틀전에도 단군릉의 최종형성안을 보아주시었다. 단군이 우리 민족의 원조로서 실재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확증되고 단군릉을 국보적 창조물로 건립하게 된 것은 김정일영도자의 정력적인 노고와 세심한 배려의 결과였다. 그분께서는 단군릉개건에 관한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단군릉복구위원회≫를 내오고 능건설을 위해 막대한 자금과 자재를 최우선적으로 보장하는 국가적 조치까지 취해주시었다. 그분의 지도에 의해 단군릉은 김일성주석의 생전의 뜻대로 동방의 강성대국 고조선의 기상에 어울리게 웅장하게 개건되어 우리 민족의 유구성과 단일성을 증시하여 후손만대에 더 없는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게 되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의 구상에 의해 단군릉개건준공식이 1994년 10월초에 국내외의 커다란 관심속에 능이 자리잡은 현지에서 성대히 진행되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10월 29일 새로 개건된 단군릉을 돌아보시었다. 그분께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오랜세월 역사의 풍운속에서 신화로만 전해오던 단군을 민족의 원조로 찾아주시고 시조릉을 완벽하게 개건하여 유구한 조국의 역사와 민족의 슬기를 자자손손 긍지높이 전할 수 있게 하여주시었다고 하시면서 이것은 우리 민족의 대경사로, 일대사변으로 된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리시고 그분께서는 단군릉은 후손들에게 만년대계로 물려줄 국보인만큼 자그마한 손색도 없어야 한다고 능보존과 민족문화재관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돌리시었다.≫(주체적인 민족사관의 정립)

≪민족주체성을 체현하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는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주창하시고 발양시켜나가시는 민족적 존엄의 화신이시다. 그분께서는 1986년 정초 어느날 우리겨레의 민족적 자존심을 높일데 관해 이렇게 명시하시었다. 민족적 자긍심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없이는 자기민족을 사랑할 수 없고 도대체 자기 힘을 믿지 않게 된다. 자기 나라 혁명에 충실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분께서 조선민족제일주의기치를 드신 숭고한 뜻이다.≫(조선민족제일주의)

2) 애국의 통일관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1993년 4월 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회의에서 발표하신 민족단합의 대헌장이며 통일대강이다. 여기에는 민족대단결의 목표와 이념적 기초, 근본원칙, 기본방도가 전면적으로 밝혀져 있다. 위대한 수령님을 통일단상에 높이 모시며 통일조국을 일일천추로 바라는 7천만 겨레의 민족적 비원을 실현하는 것을 자신의 최대의 사명으로 여기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90년대 통일시간표를 온 겨레앞에 제시하시었다. 그분께서는 80년대도 다 저물어가는 1989년 12월 어느날 이렇게 선언하시었다. ≪1990년대에는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결정적인 국면이 열릴 것입니다. 참으로 1990년대는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투쟁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장을 기록한 영광스러운 연대로 될 것입니다.≫ . . . 그분께서는 90년대 통일구상을 이미전부터 무르익혀오시었다. 그분께서는 1988년 11월에 포괄적인 평화통일방안의 내용을 강조하시면서 조국해방 50돐이 되는 1995년을 온 겨레에게 통일의 희망을 안겨주는 역사적인 해로 만들려는 구상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상설회의, 정무원 연합회의에 관한 보도에 담아서 내보내도록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 . . 90년대후반기부터 드높아지기 시작한 이남민중의 통일열기는 반미자주의식이 계발되는데 따라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반통일세력은 더욱 고립되고 있다. 해외교포들속에서의 통일운동도 그들이 살고있는 모든 대륙, 모든 나라들에서 날을 따라 확대되었다. 그리고 오늘 이북민중은 수령, 당, 대중의 일심단결로 민중중심의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빛내이면서 통일의 주체를 더욱 위력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애국애족의 통일대강)

3) 통일위업의 향도

≪이런 정세에서 김정일영도자께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에서 제시하신 주체적인 통일대강,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이해 11월 이북의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남과 해외의 민주인사들과 정당, 사회단체 활동가들에게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준비위원회를 내올 것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내며 이를 위한 예비회담을 빠른 시일안에 가질 것에 제안케 하시었다. . . . 1982년 말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의 통일을 지지하는 국제적 연대 단체, 기구들의 수는 2백 50여개에 달하였다. 또한 1981년 3월부터 시작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과 연방국가의 10대시정방침을 지지하는 서명운동에는 1년 사이에만도 1백여개국과 24개의 국제기구들에서 16억이상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1982년 2월 통일연방국가창립을 위한 협상기구로서 남과 북, 해외의 정치인연합회의소집에 관하여 제안케 하시었다. 다무적 원탁회의의 형식으로 될 정치인연합회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포함하여 제기될 수 있는 모든 통일방안을 토의하고 남북의 합작, 교류의 실현문제로 합의할 수 있다는 것이 명시되었다.≫(통일운동의 진두에 서시여)

≪그분께서는 1987년 1월과 1990년 5월에 북남고위급정치군사회담과 군축을 위한 제안을 밝히시고 조선인민무력을 일방적으로 감축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시었다. . . . 1984년 8월말에 예년에 없이 많은 비가 내렸다. . . . 그분께서는 수재민들의 피해상황을 헤아리시고 수재민들은 당장 식량, 주택, 의약품 같은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하시며 적십자기구를 통해 쌀5만석, 천50만메터, 시멘트10만톤, 많은 양의 의약품을 보내도록 하시었다. 그 구호물자는 금액으로 볼 때 국제적십자구제운동사에 일찍이 없었던 1천 8백만불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 . . 120여년간의 국제적십자구제운동의 역사를 볼 때 구제금의 액수가 가장 많았던 것은 1983년 스웨덴이 수해를 입은 인도에 보낸 75만불이었다. 또 이남당국의 요청에 의해 미국이 던져준 돈은 기껏해야 2만불이고 일본이 낸 돈은 10만불에 불과했다. . . . 9월 28일 구호물자를 실은 수백대의 화물자동차와 대형짐배들이 꽃물결 설레이는 거리와 부두에서 이북민중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육로로는 판문점을 통해 남녘으로, 해상으로는 인천, 북평으로 실려갔다. 근 40년동안의 국토분단이래 처음으로 구호물자와 더불어 혈육의 정이 북에서 남으로 굽이쳐가는 환희와 격동의 대화폭이 펼쳐졌다. . . . 그분께서는 이해 9월 예술단, 고향방문단 교환사업이 실현되게 되었을 때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 . . 이남에서 통일운동은 각계각층을 포괄하는 대중적 성격을 띠고 발전하고 있었다. 변화된 정세에서 야당인사들은 북측과 만나려는 의사를 표명하고 청년학생들은 남북학생회담을 제기하였으며 여성들과 종교인들도 북측 여성, 종교인들과의 접촉을 주장하여 나섰다. 이런 뜨겁고 거센 통일열망을 배경으로 1989년 3월 70고령의 문익환목사의 방북과 6월 제13차 평양축전참가 전대협대표 임수경학생의 방북이 단행되었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문익환목사의 애국충정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 통일애국의 마음을 온 겨레앞에 빛내어주시며 그의 방북의 모든 일정을 뜨거운 민족애의 손길로 각별히 보살펴 주시었다. 그분께서는 또한 불같은 통일의지를 안고 평양을 찾아온 임수경학생의 애국장거를 민족의 이름으로 높이 평가하시고 그를 ≪통일의 꽃≫이라고 은정이 담긴 이름으로 부르시었다.≫(전민족대단합실현의 길에서)

1990년 9월 제11차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한 쌍방선수들에 대한 공동응원문제가 실현된 다음 남북축구경기실행문제가 상정되었을 때였다. 이때 이남당국자들은 그 명칭을 8.15전에 있었던 ≪경평축구경기≫의 이름을 그대로 살려쓰자고 하였다. . . . 이 문제에 관해 김정일영도자께서는 일제식민지통치 때에 쓰던 ≪경평축구경기≫라는 이름을 그대로 되살려쓰는 것은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 90년대 통일의 견지에서 볼 때 통일지향적인 의미가 없고 남북대결을 조장하는 기운만 느껴진다고 하시면서 그 명칭을 ≪통일축구경기≫로 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었다. . . . 그분께서는 이해에 겨레의 90년대통일지향을 담아 북남축구경기와 함께 범민족음악회를 열도록 하시었다. 이해 12월 ≪90송년전통음악회≫를 서울에서 가지는 문제가 상정되었을 때 그분께서는 이 음악회의 목적과 의의를 조국통일과 연결시켜야 하며 90년대 첫해의 연말을 통일열기로 장식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 명칭을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로 하도록 가르치시었다. . . . 이런 민족화해의 분위기속에서 다음해 봄에는 분단이래 처음으로 북남단일팀이 탄생하여 제41차 세계탁구선수권대회제6차 세계청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하나된 민족의 슬기와 기개를 온 세상에 떨치었다. 90년대를 통일의 연대로 되게 하시려는 그분의 지향은 참으로 강렬하고 숭엄한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이 무렵 남과 북, 해외의 통일역량을 망라하는 첫 연합체를 내올 때에도 ≪조국통일범민족연합≫으로 이름을 다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었으며 평양시 낙랑구역일대에 옹근 하나의 도시에 맞먹는 규모의 새로운 현대적 주택거리를 건설할 때에도 그 이름을 ≪통일거리≫로 부르도록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 . . 그분께서는 조국해방 45돐이 되는 90년을 계기로 역사적인 1948년 4월 남북련석회의 당시 참석자들의 협의모임이 있었던 유서깊은 대동강 쑥섬에 사적지를 꾸려 ≪통일전선탑≫을 세우도록 하시었으며 ≪조국통일상≫을 제정하도록 하시는 등 남과 북, 해외에 있는 온 겨레의 90년대 통일열기를 높이는 조치를 연이어 취하시었다. 통일의 구상이신 김정일영도자의 정력적인 노력은 빛나는 열매를 맺었다. 1990년 8월 15일, 분단 45년만에 남과 북, 해외의 광범한 인사들이 참가한 역사적인 범민족대회가 열리었다. 대회에서는 90년대에 통일성업을 실현하려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의지를 내외에 과시하고 전민족적인 통일애국세력의 연합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결성하였다. ≪범민련≫의 결성에 이어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도 결성되었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전민족적통일열기가 높아가는 정세에서 통일의 전환적국면을 열어놓기 위한 남북고위급회담을 성사시켜나가도록 하시었다. 이렇게 하여 1990년 9월부터 민족분단이래 처음으로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그분께서는 이 회담에서 남북의 군사적대결상태의 해소, 통일지향적인 평화의 보장, 외국군대의 철수와 남북군축실현문제를 당사자들간의 협상을 통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천명하도록 하시었다. . . . 1991년 12월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북과 남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협력, 교류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고 뒤이어 ≪조선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발표된 것은 김정일영도자의 숭고한 민족애와 정력적인 영도의 빛나는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 . . 1993년초에 들어와 미제와 이남집권세력은 있지도 않는 ≪북의 핵의혹≫설을 내돌리면서 ≪팀 스피리트≫합동군사훈련의 재개를 선포하고 남북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을 유린하는 길에 들어섰다. 이러한 엄중한 사태로 하여 모처럼 마련되었던 남북대화가 전면 동결되고 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의 이행은 차단되었다.≫(90년대통일에로)

4) 해외동포를 통일애국의 한길로

≪오늘 이역땅에서 살고있는 우리의 해외교민들의 수는 일본에 70만, 미국에 120만, 중국에 200만, 구쏘련지역에 50만, 구라파에 10만, 남미주에 50만 등 500만을 헤아린다. 이들은 지구촌의 여러 지역에 살고 있었도 한조상의 피줄을 잇고 같은 말을 하는 한겨레이다. . . . 그러나 민족자주의 염원을 안고 통일애국의 대의에 참여하려는 교포인사들의 앞길을 그런 것으로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되어 미국에 있는 전≪배달민족회≫회장 최덕신, ≪조국통일촉진회≫회장 김성락, 카나다에 있는 ≪국제태권도련맹≫총재 최홍회 그리고 덴마르크에 있는 교포 임민식, 미국에 있는 임창영, 선우학원, 차상달, 양은식, 홍동근, 문명자등 인사들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들이 이북에 가서 보고 느낀바를 그대로 쓴 책자, 글들은 교포사회의 이남에까지 널리 알려져 민족단합과 통일의 열기를 확산시켰다. . . . 미국교포사회에 최덕신회장이 방북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81년 7월이었다. . . . 평양에 머무르고 있던 어느날 그는 김정일영도자께서 최덕신회장이 삭아진 이발 때문에 불편을 느끼는 것을 아시고 돌아가는 날자를 좀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조국에 온 기회에 새로 이를 해넣으면 좋겠다고 하신 말씀을 전달받게 되었다. . . . 그후 최덕신회장은 스스로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조국의 품에 안겨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천도교청우당중앙위원회 위원장, 통일신보사 사장 등의 중임을 맡고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통일애국에 진력하였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그의 사망을 애석하게 여기시어 장례를 국장으로 하게 하시고 그의 유해를 애국열사능에 안치하도록 하는 하해같은 은정을 베푸시었다. 카나다에 있는 배달신보 발행인이며 국제태권도련맹 총재인 최홍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1980년 9월 어느날 평양비행장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사람들은 저으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 . 미국에 있는 ≪조국통일촉진회≫회장이며 ≪한국인교회연합회≫고문이었던 김성락목사가 평양에 간 것을 1981년 6월말이었다. . . .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몸소 발기하시고 그분의 구상과 의도밑에 창작되는 세계명작인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최덕신, 최홍희 등을 주인공의 원형으로 내세워주시었다. 그분께서는 이 영화에서 그들이 반공이냐 연공이냐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며 방황하다가 연공의 길만이 참 애국과 삶의 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과정을 실감있게 그려내도록 하시여 민족의 운명은 곧 민족 매개 구성원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명시하시었다.≫(교민들의 은혜로운 품)

8. 세계자주화위업의 타수

1) 사회주의재건의 기치

김정일영도자께서는 오늘날 사회주의의 자본주의에로의 ≪평화적 이행≫을 주장하는 것은 지난 시기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혁명적 이행을 거부하고 개량의 방법을 설교한 사회민주주의와 그 반혁명성에서 본질상 같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뻬레스뜨로이까≫를 현대사회민주주의로 낙인을 찍으시었다. . . . 그분의 고전적 저작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은 허용될수 없다≫(1993년)는 제국주의와 반사회주의자들의 온갖 훼방으로부터 사회주의위업의 옹호고수를 위한 진로의 명시라는 특출한 의미를 지니는 문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 . 사회주의승리의 당위성에 관해서는 그분께서 집필하신 고전적 저작들인 ≪사회주의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로선≫(1992.1)≪혁명적 당건설의 근본문제에 대하여≫(1992. 10),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은 허용될 수 없다≫(1993. 3)를 위시한 주요저작들에서 극명하게 논증되어 있다. 일부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된 것은 역사발전의 기본흐름에서 볼 때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주의좌절문제에 임하시는 김정일영도자의 거시적 안목이다.≫(사회주의위업의 수호)

1992년 4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탄신 80회에 즈음하여 평양에 모인 70개의 세계 여러 나라 공산당, 노동당들과 진보적 정당의 대표단들에 의해 채택된 ≪평양선언≫ - ≪사회주의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자≫사회주의위업을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새롭게 재건할 것을 온 세상에 알린 역사적인 정치선언이었다. . . . 1992년 4월 20일 세계 70개 공산당, 노동당, 진보적 정당들의 48명의 당수들과 대표들이 선언의 첫 서명자로 되었다. . . . 1960년 모스크바에서 있은 각국 공산당, 노동당들의 회의이후 처음인 대회합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회주의 승리를 위하여 투쟁하는 세계 여러나라 정당대표들은 사회주의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켜나가려는 확고한 신념밑에 이 선언을 채택한다.≫는 선언채택의 취지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 선언은 오늘의 시대는 자주성의 시대이며 사회주의위업은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성스러운 위업이라는 현시대 사회주의위업의 지위와 본질을 밝히고 있으며 사회주의는 본질에 있어서 근로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 되고 모든 것이 근로대중을 위해 복무하는 진정한 민중의 사회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 . . 선언은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정립된 사회주의건설의 이론과 전략전술에 따라 사회주의재건운동을 벌려나갈 새로운 길을 과학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 . . 구쏘련과 동구라파의 사회주의가 좌절된 나라들에서 진보적 정당들이 사회주의재건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또한 일시적으로 주춤거리던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정당들이 ≪평양선언≫에 서명한 아프리카의 진보정당들은 1993년 4월 베닌공화국의 수도 꼬또누에서 현정세와 정당들의 과제에 관한 국제토론회를 가지고 아래와 같은 사항을 결정했다. ①인류의 필승불패의 위업인 사회주의기치를 끝까지 고수할 것이다. ②≪평양선언≫에 기초하여 새로운 국제적 연대성, ≪민중의 자주성을 위한 국제적 연대성≫을 실현할 것이다. ③사회주의건설을 과감히 성과리에 수행하고 있는 나라들을 지지할 것이다. . . . ⑥세계의 혁명력량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국제적 연대성의 탄생을 맞이한 사변으로 되는 ≪평양선언≫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20일을 ≪민중의 자주성과 사회주의위업을 위한 국제적 연대성의 날≫로 경축할 것이다. ⑦독점자본주의가 대중이 이룩한 민주주의승리를 가로채고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연합하여 대륙에 대한 새로운 정복을 시도하는 것을 반대하여 견결히 투쟁하면서 아프리카대륙의 부흥을 위해 투쟁할 것을 바라는 모든 민주역량과 인사들을 동원하기 위해 범아프리카 진보적민주주의자연합을 창설할 것이다. . . . 오늘 ≪평양선언≫에 서명한 정당수는 3배이상 늘어나 1994년 7월현재 215개에 달하고 있다. . . . 그들은 조선노동당이야말로 공산당, 노동당들, 발전도상국의 당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당이라고 하면서 ≪오늘 조선노동당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중심으로서의 영도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노동당의 사회주의건설경험을 배워 사회주의운동을 재건하며 조선노동당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더욱 강화해나가려고 한다.≫(벨라루씨 공산주의자당 공동위원장), ≪사회주의가 구라파에서 시작되었으나 오늘은 사회주의가 동방의 조선에서 구라파에로 전파되고 있다.≫(웽그리아사회노동당 대표단 단장), ≪이슬람교도들이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를 찾아가는 것을 평생의 의무로 여기는 것처럼 지금 여러나라 정치인들이 사회주의의 성새이고 보루이며 희망의 등대인 평양을 방문하는 것을 영광으로 정치가의 의무로 여기고 있다.≫(파키스탄사회주의당 총서기)고 말하고 있다. . . . 더욱더 중시되는 것은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를 사회주의위업의 상징으로, 자주시대의 공인된 걸출한 영도자로 칭송하면서 그분을 중심으로 반제자주역량, 사회주의역량의 단결을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진보정당 당수들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저명한 활동가들은 김정일영도자를 사회주의이론을 완벽하게 발전완성시키고 그것을 실천하심으로써 사회주의의 진로를 밝혀주고 계시는 사회주의재건의 위대한 영도자로 칭송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는 실생활과 투쟁경험을 통하여 존경하는 김정일동지이시야말로 세계혁명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탁월한 영도자이시며 그이께서 밝혀주시는 전략전술대로만 하면 구라파에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새로운 앙양을 이룩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었다.≫(불가리아공산당≪맑스주의≫중앙위원회 집행리사회 위원장)≫(사회주의재건의 강령 - ≪평양선언≫)

2) 신생독립국들을 반제자주의 길로

≪그분께서는 무엇보다도 농업분야에서 상호협력을 강화하도록 하시었다. 1981년 8월에 세계 81개국, 14개 국제기구 대표들의 참석하에 ≪식량 및 농업증산에 관한 평양토론회≫가 열리고 이 회의가 발전도상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식량위기를 극복하고 식량의 민족적 및 집단적 자급자족을 이룩하는 데서 새로운 이정표로 되게 하시었다. 또한 이북이 아프리카의 농업발전계획에 대하여 더욱 내실있는 협력을 제공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시었다. 그분께서는 1981년 8월 아프리카나라들의 농업발전에서 획기적 의의를 갖는 농업과학연구센터를 창설하도록 하시었다. 김정일영도자의 깊은 관심속에서 1982년 1월에는 서아프리카의 기네 ≪김일성농업과학연구소≫가 세워지고 이해 8월에는 탄자니아농업과학연구소가 창설되었다. 가나, 중앙아프리카, 적도기네, 잠비아를 위시한 여러 나라들에 농업시험장이 나왔다. 이와 같은 농업과학연구기관들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아프리카에서는 그곳 기후풍토에 적합한 과학적 영농방법이 개발되고 농업이 과학화되는 새 역사의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반제반식민주의기치)

1983년 6천명의 병력을 투입한 그레나더침공, 1982년의 1만 2천명의 니까라과반혁명분자를 무장시켜 좌익정부를 전복시킨 죄행, 1989년 파나마에 대한 무력침공과 노리에가합법정부 전복, 1991년의 다국적군에 의한 이라크전면전, 1993년소말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내전개입, 1994년아이띠침공 등으로 블럭불가담국들과 제3세계 민족들의 자주권을 유린하였다. . . .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블록불가담운동의 앞에 가로놓인 난국을 헤치고 통일단결을 이룩하는데서 나서는 원칙적 문제들을 천명하시었다. ≪블럭불가담나라들은 완전한 평등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지키고 서로 단결하여 제국주의의 침략과 간섭, 책동에 공동으로 맞서야 하며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견결히 투쟁하여야 한다.≫. . . . 그분의 이러한 의도가 1983년 2월에 발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 연합회의 보도에 담겨졌다. 이 보도에서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전쟁 책동을 반대하고 세계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는 것을 블럭불가담운동의 기본사명의 하나로 규정하였으며 블럭불가담국들이 제국주의, 식민지통치의 후유증을 씻어버리고 완전한 경제적 해방을 이룩하며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고 민족의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과제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후 1986년 6월에 발표된 연합회의의 보도에서는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정책을 반대하고 세계평화를 수호하며 기존의 국제경제질서를 공정한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로 바꾸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일 것을 지적했다. . . 김정일영도자께서는 한편 1981년 2월의 블럭불가담국가 외무장관회의, 1982년 7월1983년 1월의 블럭불가담국가 조정위원회 외무장관비상회의, 1983년 2월의 제7차 정상회의, 1986년 6월의 제8차 정상회의 등 블럭불가담운동 주요회의들이 반제자주의 기치밑에 통일과 단결을 공고히 하는 의의있는 회의로 되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시었다. . . . 세계는 이미 블럭불가담운동의 강화발전에 기여하신 탁월한 공적으로 하여 그분을 블럭불가담운동의 공인된 영도자로 칭송하고 있다.≫(블럭불가담운동의 진로)

3) 평화로운 새세계 창조를 위해

≪이에 대한 중요한 조치의 하나로 그분께서는 1980년대 초≪조선노동당과 일본사회당사이의 동북아세아지역 비핵, 평화지대 창설에 관한 공동성명≫을 채택하도록 하시었다. . . .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또한 ≪한≫반도 전지역에 대한 비핵화 노력을 시종일관 견지하도록 하시여 마침내 1992년초에는 북과 남사이에 ≪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되도록 남북대화를 주도해 오시었다. . . .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또한 1983년 5월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기자대회를 평화와 반제공동투쟁을 발전시키는 호기가 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시었다. 그분의 큰 관심속에 1983년 7월 ≪반제, 친선, 평화를 위한 세계기자대회≫118개국17개 국제기구에서 모인 169개 대표단과 대표들의 참석하에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대회에서는 새 세계 전쟁의 위험을 막고 세계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구체적 과제를 명시한 선언이 채택되었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또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반제연대성, 평화와 친선의 대축제로 되도록 현명하게 이끄시었다.≫(평화로운 새 세계 창조를 위해)

9. 인간 중의 인간

1. 의리의 화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의 숭고한 의리는 타계한 항일혁명투사들과 항일연고자들에게 영생의 영광을 안겨준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의 건립과정에도 깃들어있다. 혁명열사릉 개건확장공사가 한창인 1984년 6월, 대성산 주작봉마루에 오르신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이북의 창작가, 기술자들이 새로 창안하여 제작한 인조대리석과 경금속합금소재의 반신상 견본을 두고 양심문제를 제기하시었다. 그분께서는 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을 인조대리석으로 만들면 모르는 사람들은 돌로 만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간고한 항일의 나날 일편단심 수령님을 위하여 청춘도 생명도 다 바친 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을 인조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으면 우리의 양심이 허락치 않는다고 하시었다. 계속하여 그분께서는 합금소재로 만든 반신상을 보시고는 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을 경금속으로 만들어 세우면 후대들이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반신상을 다른 재질로 만들지 말로 으로 만들어 세우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께서는 혁명선배들의 유자녀들에게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의리를 지켜가고 계신다. 혁명가유자녀들을 잘 돌보아주는 것을 자신께서 지니신 소임으로, 마땅한 도리로 간주하시는 그분께서는 1980년 4월 황순희항일투사(현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의 둘째 며느리를 손수 고르시고 그들의 결혼식을 차려 주시었다. 그들 가족들이 다 모인 좌석에서 그분께서는 언제인가 김일성주석께서 황순희, 유경수 항일투사들이 항일무장투쟁시기 산에서 결혼하던 때의 일을 회고하신 내용을 상기하시었다. 수령님께서는 그때 김정숙여사가 비상용으로 보관했던 쌀을 털어 상을 차려주시면서 지금은 산속에서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차리지 못하지만 앞으로 조국이 해방되고 아들딸을 키워 시집장가 보낼 때에는 마음먹고 잔치상을 잘 차려주자고 말씀하시었는데 그만 유경수(황순희의 남편)가 너무 일찍이 가고 말았다고 회고하시었다. 김정일영도자께서는 수령님의 말씀을 듣고 앞으로 유경수, 황순희 투사들의 자녀들의 잔치를 자신이 차려 주리라고 생각했다고 하시었다. 그렇듯 김일성주석의 사랑의 마음이 김정일영도자에 의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여성노투사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다 .. . . ≪겨레여! 슬픔의 눈물을 거두라. 우리에게는 또 한분의 민족의 위대한 어버이가 계신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의 혁명동지들에 대한 불보다 뜨거운 의리는 34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비전향장기수이며 전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인 이인모옹을 조선노동당의 품으로 데려다 폐인을 완인으로 소생시킨 전설같은 이야기에서 그 정화를 이룬다.≫(의리의 화신)

10. 선군혁명실록

1994 ~ 2000 : 고난의 행군, 강행군(고난의 행군 : 1994 ~ 1997)

1994 10 : 군대이자 당이고 국가이고 인민이라는 군중시정치철학 천명

1994 11 9 : 최고사령관 명령 0051호(청류다리, 금릉2동굴건설을 당창건50돌전으로 끝낼 것)

1994 12 17 : 미군헬기격추사건 - 미국특사 평양방문, 사과

1995 1 1 : 다박솔중대의 현지지도로 선군정치 시작

1995 6 : 인민군대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무조건 집행하는 당적 기풍, 혁명적 군풍 확립 강조

1995 7 8 : 주체의 최고성지 금수산기념궁전 개관

1996 : 한해 2만 5천리 군현지지도

1996 1 : 오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의 발기

1996 2 : 인민군장병들에게 정세가 준엄할수록 혁명적 원칙을 고수할 데 대하여 강조

1996 4 : 길영조비행사를 자폭영웅으로 높이 평가, 공화국영웅칭호 수여

1996 6 24 : 군현지지도중 강냉이밭과 남새밭 건설의 모범 발견

1996 8 31 : 안변청년발전소(금강산발전소) 평가 - 혁명적 군인정신 언급

1996 9 : 도당책임자에게 자강도를 모범을 꾸릴 것을 지시(고난의 행군, 강행군기간 8차례 현지지도)

1996 11 : 판문점 시찰

1996 12 24 : 선군후노원칙 확인(≪선군후노의 원칙에서 혁명과 건설을 영도하고 있다≫)

1997 3 11 : 당중앙 책임일군과 ≪혁명적 군인정신을 따라배울 데 대하여≫ 담화

1997 6 10 : ≪혁명적 군인정신 = 수령결사옹위정신, 육탄정신, 자폭정신≫ 정식화

1997 6 19 :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할 데 대하여≫ 발표

1997 7 8 : 주체연호, 태양절제정(당중앙, 당중앙군사위, 공화국국방위, 공화국중앙인민위 결정서)

1997 8 4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 발표

1997 11 16 : 군현지지도중 양어장 건설의 모범 발견

1998 : 전환기(강행군 시작)

1998 : 현지지도 59차례 중 군사부문 - 28차례, 문예부문 - 14차례, 경제부문 - 9차례

1998 1 16 : 자강도현지지도 - 강계시의 북천띄우기식발전소 - 강계정신

1998 4 18 :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 발표

1998 6 1, 10 20 -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 현지지도

1998 3 9 : 성진제강연합기업소 현지지도 - 성강의 봉화

1998 5 : 동부전선 시찰길(강원도 창도군 대백리) - 대토지정리(강원도 → 평안북도 → 황해남도)

1998 5 : 미대통령특사 페리 평양방문

1998 8 31 : 인공위성 ≪광명성 1호≫, 우주발사체 ≪백두산 1호≫ 발사

1998 9 5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추대

1998 10 8 : 조선노동당 총비서 추대

1998 10 1 : 대홍단군 현지지도 - 대홍단정신, 대홍단기풍

1998 12 2 : 조선인민군총참모부대변인성명 - 미침략군의 도전에 섬멸적인 타격으로 대답

1999 1 ~ 4 : 중소형발전소 전국적으로 5천여개 완공

1999 : 미국방성의 컴퓨터시뮬레이션 결과 = 개전후 2주일만에 870억달러 소모하고 패배

1999 2 8 : 선군정치 선언(≪선군정치는 나의 기본정치방식≫)

2000 1 : 김정일장군님 백두산정에서 남북평양상봉 결심

2000 6 15 : 6.15공동선언 발표

2000 8 : 비전향장기수 전원 송환

2000 10 10 : 조선노동당창건 55돌경축대회

2000 10 12 : 조미공동코뮈니케 발표

2001 7 26 ~ 8 18 : 김정일장군님 러시아방문

2001 8 4 : 레닌묘 방문, 헌화

2001 8 4 : 조러정상회담, 조러모스크바선언 발표

2002 8 23 : 조러블라디보스톡정상회담

2002 9 17 : 조일정상회담, 조일평양선언 발표

2002 10 3 : 미특사 켈리평양 방문

2003 1 10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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