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 19일

통일여명 편집국

현대조선역사 2

통일여명 편집국 해설 5-2-5

 

3. 사회주의의 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

1) 사회주의기초건설

김일성주석은 1955년 4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발표한 테제 ≪모든 힘을 조국의 통일독립과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건설을 위하여≫에서 사회주의기초건설의 총적 과업을 전면적으로 규정하였다. . . .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전면적으로 실현하여 사회주의적 경제형태의 유일적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며 사회주의공업화의 기초를 쌓고 자립경제의 토대를 튼튼히 닦는 것이었다. . . . 첫 단계는 전반적 인민경제 복구건설의 준비단계로서 . . . 둘째 단계의 과업은 인민경제 복구발전 3개년계획을 수행함으로써 인민경제 각 부문에 걸쳐 전쟁전 수준을 회복 . . . 셋째 단계의 과업은 공업화의 기초를 축성하기 위한 5개년계획을 작성하고 그것을 실현함으로써 우리 나라 공업화의 제1단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전후의 국내정세, 사회주의 기초건설의 총체적 과업)

김일성주석은 전후경제건설의 기본노선을 뚜렷이 밝혀주었다. . . .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을 보장하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것은 복구건설의 방향선후차를 옳게 정하며 중심고리를 똑바로 틀어쥐고 거기에 힘을 넣을 수 있게 하는 가장 현명한 경제건설노선이었다. . . . 3개년계획에 예견된 공업총생산액은 2년 8개월만에 완수되었고 1956년말에 와서는 122%로 초과수행되었다. . . . 계획기간에 경제건설의 기본노선이 철저히 관철된 결과 연평균 생산수단생산은 59%, 소비재생산은 28%의 속도로 증가하여 1953년에 비해 1956년에 생산수단생산은 4배, 소비재생산은 2.1배로 성장하였다. . . . 3개년계획기간에 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노동생산능률이 빨리 높아지는 데 따라 1956년에 국민소득이 1953년에 비해 2.1배로 늘어났는데, 그것은 전쟁전 1949년에 비하여 146%에 달하는 것이었다. . . . 도시와 농촌에서 교육, 문화, 보건 시설들도 급속히 확장되었다. 3개년계획기간에 5,455개의 학교가 복구확장신설되어 전쟁전에 비하여 382개의 학교가 더 늘어났으며 1956년부터 초등의무교육제가 실시되게 되었다.≫(전후인민경제의 복구건설)

김일성주석은 사회경제발전의 합법칙적 요구와 현실적 가능성을 깊이 통찰한 데 기초하여 기술적 개조에 앞서 경리형태의 개조를 실시하는 데 대한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농업협동화방침을 내놓았다. . . . 사회주의적 개조의 이 독창적 방침은 기술적 개조를 앞세워야만 경리형태를 개조할 수 있다는 기존공식이나 남의 경험에 구애됨이 없이 우리 나라의 구체적 조건에 맞게 제시된 주체적인 방침이었다. 이것은 생산력과 기술발전 수준은 비교적 낮다 할지라도 생활이 낡은 생산관계의 개조를 절실히 요구하며 또한 그것을 맡아할만한 혁명역량이 준비되었을 때에는 사회주의적 개조를 미룰 수 없다는 입장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 . . 농업협동화운동에서는 우선 자원성의 원칙이 엄격히 준수되었다. . . . 이로부터 농업협동화운동의 경험적 단계를 설정하도록 하였다. . . . 농업협동조합들을 빨리 추켜세우며 농업협동화운동을 강력히 추진시키기 위하여 당과 국가의 지도방조를 강화하는 적극적인 대책들이 취해졌다. . . . 농업협동화운동이 빠른 속도로 전진하여 1956년 말에는 전체농가호수의 80.9%가 협동조합에 망라되게 되었으며 1958년 8월에 완성되었다. . . . 1947년부터 생산협동조합들이 조직되고 거기에 수공업자들과 영세업자들이 망라되었다. 생산협동조합은 처음부터 우월성을 나타내면서 급속히 확대발전되었다. . . . 개인수공업의 협동화는 전후시기에 와서 전면적으로 추진되었다. . . . . 전쟁에 의하여 기업가, 상인들도 파산되어 수공업자나 소상인과 거의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공업이 급속히 확대되고 농업과 수공업이 협동화되어 감에 따라 자본주의적 상공업자들은 원료, 자재를 지난 시기와 같이 사적 시장에서 사들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그들은 생산수단과 자금을 합치고 사회주의경리로 나아가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 상공업을 개조하는데서는 업종별로 생산협동조합을 조직하고 그것을 수공업의 개조와 밀접히 결부하여 진행하였다. . . .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는 날을 따라 빨리 추진되어 1953년에는 33.7%, 1957년에는 77.2%로 진척되었으며 농업협동화운동의 완성과 때를 같이 하여 1958년 8월에 완성되었다. 농업협동화와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성됨으로써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유일적 지배가 확립되었다. 공화국 북반부에는 우리 인민이 오랜 세월 염원하여 온 착취와 압박이 없는 선진적인 사회주의제도가 확고하게 수립되었다.≫(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

김일성주석은 1955년 12월선전선동일꾼들 앞에서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하는 데 대하여≫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 . . 조선혁명이야말로 우리 당 사상사업의 주체라고 한 김일성주석의 교시는 우리 당 사상사업의 목적과 방향, 방도를 명확히 집약적으로 밝혀준다. . . .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여 혁명과 건설을 성과적으로 밀고나가기 위하여서는 사상에서 주체를 세우는 동시에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을 철저히 구현하여야 하였다.≫(주체확립을 위한 투쟁)

1956년 4월에 있은 역사적인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는 사회주의기초건설을 완성하기 위한 5개년계획의 기본과업을 제시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의 두터운 신임에 기어이 보답하기 위하여 분연히 일떠선 강선의 강철전사들은 6만톤 이상은 절대로 생산할 수 없다고 하던 분괴압연기로 9만톤의 강재를 생산할 것을 결의하고 실제로는 12만톤을 생산하는 기적을 창조하였다. . . .사회주의건설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혁신들로 하여 5개년계획의 첫해과업인 1957년도 공업총생산액 계획은 117%로 넘쳐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공업생산이 한 해 동안에 44%라는 비상히 높은 속도로 성장하였다. 농업 생산에서도 대풍작이 이룩되어 알곡생산계획을 훨씬 넘쳐 수행하였다. 김일성주석이 지펴올린 투쟁의 불길 속에서 이처럼 사회주의건설은 비상히 빠른 속도로 전진하였으며 위대한 천리마운동이 일어났다. . . . 낙원기계공장과 북중, 용성기계공장 노동계급들도 광석, 석탄을 자동으로 옮기는 기계, 불도저, 8미터타닝반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현대적 기계와 설비를 생산해냈다. 주택건설에서도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한 세대의 주택을 14분에 조립하는 기적(이것을 ≪평양속도≫라고 불렀다.)이 창조되었다. 연이어 일어나는 기적과 혁신으로 하여 인민경제 모든 부문들에서 같은 자재와 자금으로 2배, 3배씩 생산하고 건설해 나갔다. 천리마운동의 불길속에서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이 일어났다. . . . 이 운동에 의하여 1959년 1년동안에만도 1만3,000여대의 공작기계를 계획이외에 더 생산하는 기적이 창조되었다. . . . 1956년에 전반적 초등의무교육제가 실시된 데 뒤이어 1958년부터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중등의무교육제(7년제)가 실시되었으며 1959년에는 각급학교들에서 수업료가 전반적으로 폐지되고 완전한 무료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 . . 공업총생산액을 2.6배로 높일 것을 예견하였던 5개년계획의 과제는 불과 2년반에 완수되고 1957-1960년까지 4년동안에 공업총생산액은 3.5배로 늘어났으며 이 기간에 공업생산은 해마다 평균 36.6%라는 높은 속도로 성장하였다. 5개년 계획의 4년동안에 알곡생산은 32%나 성장하였다. 국민소득은 2.1배로 늘어나고 노동자, 사무원들의 실질임금도 2.1배로 높아졌으며 농민들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중농 또는 부유중농 수준에 올라섰다. 인민생활분야에서 인민들의 의식주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대한 과업은 완전히 수행되었다. 5개년 계획이 성과적으로 수행된 결과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가 축성되고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가 튼튼히 쌓아짐으로써 우리 나라는 발전된 사회주의공업농업국가로 전변되었다.≫(천리마운동)

2)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

1961년 9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4차대회는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을 다그치기 위한 7개년계획의 웅대한 강령을 제시하였다. . . . 7개년계획의 기본과업은 승리한 사회주의제도에 의거하여 전면적 기술개건과 문화혁명을 수행하며 인민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데 . . .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실현하고 인민경제의 모든 부문을 현대적 기술로 꾸리며 모든 인민의 물질문화생활수준을 결정적으로 높여 사회주의의 높은 봉우리를 점령하여야 . . .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로의 이행)

김일성주석은 새로운 환경과 조건이 제기하는 이 요구를 제때에 포착하고 1960년 2월 보름 동안이나 몸소 평안남도 강서군 청산리에 대한 현지지도 . . . 과정에 위대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창조하였다. 청산리정신과 청산리방법은 우리 당의 전통으로 되어 있는 혁명적 군중노선을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현실에 맞게 구체화하고 발전시킨 대중지도에 관한 사상이며 방법이다. . . . 청산리방법의 기본은 윗기관이 아래기관을 도와주고 윗사람이 아래사람을 도와주며 늘 현지에 내려가 실정을 깊이 알아보고 문제해결의 올바른 방도를 세우며 모든 사업에서 정치사업, 사람과의 사업을 앞세우고 대중의 자각적인 열성과 창발성을 동원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 . . 김일성주석은 인민경제에 대한 지도관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61년 . . . 12월대안전기공장에 대한 현지지도를 하였다. 김일성주석은 10여일간 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 . . 지난 날의 낡은 공장관리체계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기업관리체계인 대안의 사업체계를 내왔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공장, 기업소들이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밑이 모든 경영활동을 진행하며 정치사업을 앞세우고 생산자대중을 발동하여 제기된 경제과업을 수행하며 위가 아래를 책임적으로 도와주며 경제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관리운영하는 사회주의제도의 본성에 맞는 훌륭한 경제관리체계 . . . 연이어 농촌경리에 대한 지도관리체계를 개편하는 새로운 조치를 취하였다. 김일성주석은 1961년 12월 평안남도 숙천군에 대한 지도과정에 . . . 군인민위원회로부터 농촌경리에 대한 지도기능을 분리하여 새로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를 내오도록 . . 으로써 지난날과 같이 행정적 방법으로가 아니가 기업적 방법으로 농촌경리를 지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농촌경리의 관리운영방법을 공업의 선진적인 기업관리방법에 끊임없이 접근시키고 모든 경영활동을 더욱 계획화하고 조직화하며 농업생산에 대한 기술지도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농업지도체계가 창설됨으로써 또한 전인민적 소유와 협동적 소유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 공업과 농업의 생산적 연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대안의 사업체계와 새로운 농업지도체계가 세워짐으로써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철저히 사회주의적인 새로운 경제지도관리체계가 확립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사회주의경제건설이 보다 성과적으로 진척될 수 있게 되었다.≫(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의 관철)

김일성주석은 사회주의농촌문제에 대한 연구와 구상을 심화시킨 데 기초하여 1964년 2월에 소집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우리 나라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를 발표하였다. . . . 첫째로, 농촌에서 기술혁명과 문화혁명, 사상혁명을 철저히 수행하여야 하며, 둘째로, 농민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도, 농업에 대한 공업의 방조, 농촌에 대한 도시의 지원을 백방으로 강화하여야 하며, 셋째로, 농촌경리에 대한 지도와 관리를 공업의 선진적인 기업관리수준에 끊임없이 접근시키며 전인민적 소유와 협동적 소유의 연계를 강화하고 협동적 소유를 전인민적 소유에 부단히 접근시켜야 . . . 1962년 지방당 및 경제일꾼 창성연석회의에서 국가적 지도의 지역적 단위와 거점으로서의 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을 제시한 김일성주석은 테제에서 이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 . . 농촌테제는 우리 인민에게 사회주의농촌건설을 다그쳐 도시와 농촌간의 차이, 노동계급과 농민간의 계급적 차이를 없애고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앞당길 확고한 전망을 펼쳐주었다. . . . 농촌테제가 발표된 다음 큰 규모의 관개공사들이 진행되는 동시에 중소규모의 관개공사가 널리 벌어졌다. . . . 농촌에 현대적 기술수단들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강력한 중공업건설이 촉진되고 특히 트랙터공장, 화학비료공장, 발전소, 연결농기계공장 등 농촌경리에 직접 복무하는 중공업건설이 힘있게 진행되었다. . . . 농촌경리의 전기화를 다그치기 위하여 대규모 발전소건설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에서 중소형 발전소건설을 전인민적인 운동으로 진행하였다. . . . 농촌경리의 화학화를 다그치기 위하여 효능이 높은 여러가지 화학비료와 농약의 생산을 더 늘이고 그 구성을 개선하도록 하였으며 우리 나라 토양과 작물의 특성에 맞는 미량원소비료도 더 많이 생산하도록 하였다. . . . 농민들 속에서 당정책교양, 혁명전통교양, 계급교양을 기본으로 하는 공산주의교양사회주의적 애국주의교양이 강화되었다. 특히 주인다운 태도를 가지고 모든 농사일을 알뜰하고 깐지게 하도록 농민들을 꾸준히 교양하였으며 집단주의교양을 강화하였다. . . . 1965년에 농업근로자동맹을 새로 조직하고 농업근로자들의 혁명화, 노동계급화에 전력하도록 하였다. . . . 1967년 4월 1일부터 실시된 전반적 9년제 기술의무교육을 농촌에서 정확히 실현하여 새세대농업근로자들의 문화기술수준을 결정적으로 높이도록 하였다. . . . 일꾼들로 하여금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의 요구를 철저히 구현하여 모든 사업에서 사람과의 사업, 정치사업을 앞세우며 아래에 내려가 실속있는 지도를 주게 하였다. . . . 농업현물세는 이미 1963년까지 수많은 협동농장들에서 면제되어 있었는데 1964년부터 매해 800여개의 협동농장들에서 면제받게 해줌으로써 1966년을 계기로 전면적으로 폐지되었으며 이에 따라 농촌에서 세금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사회주의농촌건설의 적극적 추진)

≪미제국주의자들은 1962년쿠바공화국을 반대하여 카리브해의 위기를 조성 . . . 월남민주공화국을 반대하는 바크보만사건을 도발하고 월남에서 침략전쟁을 확대 . . .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총칼로 탄압하는 한편 남조선을 저들의 원자 및 로케트 기지로 만들고 . . . 일본제국주의자들도 미제의 지지밑에 또다시 남조선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다. . . . 김일성주석은 조성된 정세의 추이를 깊이 통찰하고 1962년 12월에 소집된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키는 데 대한 전형적 방침을 제시하였으며 1966년 10월이 소집된 당대표자회의에서 이 병진노선을 철저히 관철하는 데 대하여 다시금 강조하였다. . . . 정세의 요구에 맞게 인민경제를 개편할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특히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민들과 군인들을 정치사상적으로 튼튼히 준비시키면서 당의 군사노선을 철저히 관철해나가는 데 대한 과업 . . . 전군간부화, 전군현대화, 전민무장화, 전국요새화를 기본내용으로 하는 당의 군사노선 . . . 1968년에 있은 미제의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 사건과 그 이듬해에 있은 대형간첩비행기 ≪이씨-121≫ 사건 그리고 1976년 8월에 있은 ≪판문점 사건≫ 때 우리 나라의 정세는 매우 긴장하였다. 우리 인민군대가 우리 영해에 침입한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를 나포하였을 때와 우리 영공에 침입한 대형간첩비행기 ≪이씨-121≫을 격추하였을 때 미제는 우리 나라의 문턱까지 많은 무력을 끌어다 놓고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공공연히 시도하였다. 그러나 위력한 전인민적, 전국가적 방위체계를 확립한 우리 인민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들이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으며 결국 미제침략자들로 하여금 우리 인민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 . . 판문점공동경비구역안에서 공화국북반부를 반대하는 엄중한 도발행위를 저지르고 오히려 그 사건의 책임을 우리에게 넘겨씌우면서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려고 책동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김일성주석과 영광스러운 당중앙의 두리에 철통같이 뭉친 우리 인민의 불패의 위력과 확고한 혁명적 입장, 만단의 전투태세 앞에서 미제침략자들은 . . . 또다시 우리 인민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병진, 전인민적 방위체계의 수립)

사상혁명을 수행하여 사람들을 공산주의적으로 개조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시기에 들어와서 가장 중심적인 혁명과업으로 나섰다. . . . 조선노동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근로자들을 김일성주석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는 것을 사상혁명에서 기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근로자들 속에서 주체사상교양과 당정책교양, 혁명전통교양이 전면적으로 강화되었으며 주체사상과 적대되는 자본주의사상, 봉건유교사상, 교조주의, 사대주의를 비롯한 온갖 낡은 사상을 반대하는 투쟁이 힘차게 벌어졌다. . . . 근로자들 속에서 계급교양을 기본으로 하는 공산주의교양을 강화한 것이었다. 공산주의교양에서는 김일성주석이 1958년에 발표한 고전적 노작 ≪공산주의교양에 대하여≫를 비롯한 일련의 노작들에서 천명된 방향에 따라 . . . 이와 함께 근로자들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반대하고 집단주의정신노동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무장시키고 사회주의적 애국주의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정신 그리고 계속혁신, 계속전진하는 혁명사상으로 무장시키는 사업이 강력히 전개되었다. . . . 천리마작업반운동생산에서의 집단적 혁신운동일 뿐만 아니라 근로자들을 공산주의적으로 교양개조하는 훌륭한 방법이며 사상혁명을 다그치는 대중적 운동이다. . . . 사상혁명이 심화발전하는 데 따라 사회의 모든 성원들의 혁명화, 노동계급화 과정은 더욱 촉진되었다. . . .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는 무계급사회를 실현함으로써만 이룩될 수 있으며 계급적 차이를 없애고 무계급사회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은 온 사회를 노동계급화하는 것이다. . . . 노동계급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영도계급이며 따라서 온 사회의 혁명화, 노동계급화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혁명화를 앞세우고 그를 본보기로 하여 다른 계급, 계층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해야 한다. . . . 온 사회를 혁명화, 노동계급화하는 사업이 적극 추진됨으로써 우리 인민의 사상정신적 풍모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의 혁명대오는 불패의 것으로 다져지게 되었으며 혁명과 건설을 더욱 힘있게 진전시켜나갈 수 있는 확고한 담보가 마련되게 되었다.≫(사상혁명, 온 사회의 혁명화, 노동계급화)

1961년부터 7개년계획수행에 들어선 우리 인민은 처음부터 무비의 헌신성과 대중적 영웅주의를 높이 발휘하였다. 연산 25만톤 능력의 황해제철소 제2호 용광로를 불과 반년 동안에 건설하였으며 ≪모든 것을 나일론 공장건설에로!≫라는 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세인을 놀래운 유례없는 높은 건설속도(≪나일론속도≫)를 창조함으로써 우리의 자재, 우리의 기술, 우리의 노력으로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세계굴지의 현대적 나일론 공장을 건설하여 놓았다. . . . 지난 2-3년 동안에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국방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 큰 힘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관계로 . . . 1964년에도 계속 7개년계획의 전반기 과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 . . 7개년계획의 상반기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한 우리 인민은 1965년부터 그 하반기과업수행에 들어갔다. . . . 그러나 미제국주의자들의 우심해지는 전쟁도발책동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에서 정세가 전례없이 긴장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방력강화에 더 큰 힘을 넣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6년 10월에 열렸던 역사적 당대표자회7개년계획을 3년 동안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은 불후의 고전적 노작 ≪사회주의경제의 몇가지 이론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사회주의사회에서 경제가 끊임없이 높은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합법칙적이라는 독창적인 사상을 천명하였다. . . . 강선의 강철전사들은 1970년 1.4분기에 제강소적으로 그 전해의 같은 기간에 비하여 강철생산을 2배로 끌어올리는 새로운 천리마속도, ≪강선속도≫를 창조하였으며 전국의 모든 공장, 기업소들에서 1970년 10월 현재 공업생산을 1969년에 비해 131%로 높였다. . . . 5개년계획과 7개년계획 기간 즉 공업화가 수행되던 전기간공업생산은 해마다 평균 19.1%의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였다. . . . 7개년계획기간에 기간적 중공업부문들을 정비보강하는 데 힘을 넣으면서 중공업기지를 대대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우리의 중공업은 자체의 강력한 기계제작공업을 핵심으로 하는 완비된 중공업으로 발전. . . 6,000톤 프레스와 중량자동차, 대형트랙터, 대형굴착기, 대형불도저, 전기기관차와 디젤기관차, 대형선박을 비롯한 대형기계들과 정밀기계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개별적 기계설비들 뿐 아니라 현대적 공장들의 설비를 종합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7개년계획기간에만 하여도 우리의 기계공업은 발전소설비, 야금공장설비, 화학공장설비와 같은 100여개의 현대적 공장설비들을 종합적으로 생산보장하였다. . . . 우리의 중공업은 1970년에 165억키로와트시의 전력, 2,750만톤의 석탄, 220만톤의 강철, 150만톤의 화학비료, 400만톤의 시멘트를 생산하였다. 경공업발전에서도 획기적인 전진이 이루어졌다. 인민소비품생산에서 대규모의 중앙공업과 중소규모의 지방공업을 병진시키는 데 대한 방침에 따라 7개년계획기간에 새로운 현대적 중앙경공업공장들이 건설되었으며 이와 함께 수많은 지방산업공장들이 건설되고 그 기술적 개건이 적극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한해 동안에 4억미터 이상의 질좋은 천을 생산할 수 있는 방직공업과 함께 식료가공공업, 일용품공업을 비롯하여 모든 경공업생산부문들이 다 갖추어졌으며 . . . 1970년에 인구 한사람당 전력은 1,184키로와트시, 석탄은 1,975키로그램, 강철은 158키로그램, 화학비료는 108키로그램, 시멘트는 287키로그램에 이르렀다 . . . 우리 나라는 발전된 공업국가들의 수준에 이르렀으며 부분적으로는 따라앞서게 되었다. . . . 농촌경리의 기술적 개건도 성과적으로 추진되었다. 7개년계획기간에 논관개를 완전히 끝내고 밭관개도 적지 않게 실현 . . . 우리 나라의 모든 시, 군에 농기계작업소가 다 설치되었으며 농촌에 현대적 농기계들이 많이 들어갔다. 1961-1970년 사이에 농촌경리에 복무하는 트랙터 대수는 3.5배, 화물자동차 대수는 7배로 늘어났다. . . . 나라의 모든 리에 전기가 들어갔으며 모든 농가에서 다 전기불을 보게 되었다. . . . 우리 나라는 농촌전기화 분야에서 이미 선진국가들의 수준에 이르렀다. 1960년에 비해 1969년에 논밭 정보당 화학비료 시비량이 3.2배로 늘어나고 여러가지 농약과 살초제가 많이 이용됨으로써 농업생산의 화학화에서도 커다란 전진이 이루어졌다. . . . 특히 가금업발전에서 커다란 전변이 일어나 해마다 7억개 이상의 닭알과 많은 닭고기를 공업적 방법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 . . 850키로미터 구간의 철도가 새로 전기화되어 중요간선들에서의 철도전기화가 기본적으로 끝났다. . . .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자본주의나라들이 옹근 한 세기 지어 몇 세기에 걸쳐서 한 공업화의 어렵고 복잡한 과업이 14년밖에 안되는 매우 짧은 기간에 빛나게 완수되었다. . . . 공업화가 실현되어 우리 나라가 공업국가로 전변됨으로써 우리의 혁명기지는 더욱 불패의 것으로 다져졌으며 남조선인민들의 혁명투쟁을 고무하며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더욱 힘있게 추진시킬 수 있는 튼튼한 밑천이 마련되게 되었다. . . . 국가는 노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의 임금을 대폭 올렸다. 먼저 낮은 임금을 받는 근로자들의 노임을 높인 데 연이어 1970년 9월에는 노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의 노임을 평균 31.5%나 올렸다. . . . 근로자들의 실질수입을 높이기 위하여 농업현물세를 없애고 근로자들의 소득세율도 끊임없이 낮추었다. . . . 7개년계획기간에 10여차례에 걸치는 대폭적인 물가인하가 실시되어 근로자들에게 추가적으로 50여억원에 달하는 혜택이 돌려졌다. . . . 1969년에만 하여도 1960년에 비하여 사회문화시책비는 2.1배로 늘어났다. 1960 - 1969년 기간에 사회문화시책에 의하여 근로자들이 받은 추가적 수입과 거저나 다름없는 식량공급, 국가보상에 의한 어린이들의 옷공급, 무료교육, 무상치료, 유급휴가 등 국가로부터 받은 추가적 혜택의 규모는 노동자, 사무원의 경우에는 그들이 받은 노임총액과 거의 맞먹었으며 농민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번 화폐수입의 거의 50%나 되었다.≫(사회주의공업화의 실현)

3)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투쟁

≪우리 혁명발전의 이러한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1970년 11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5차대회는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힘있게 벌여 사회주의제도를 더욱 공고발전시키며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앞당기는 데 대한 역사적 과업을 내놓았다. 당대회는 우선 사회주의경제건설의 중심과업을 제시하면서 6개년계획의 웅대한 전망을 펼쳐주었다. . . . 기술혁명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3대기술혁명 과업을 수행하여야 하였다. . . .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이 모든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노선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여나가야 하였다.≫(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과업)

1972년 12월 역사적인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는 전체 인민의 한결같은 의사와 염원을 담아 김일성주석을 국가주석으로 높이 추대하였으며 김일성주석이 작성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11장 149조)을 채택하였다. . . .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전면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새 형의 인민적이며 혁명적인 헌법이다.≫(온 사회의 정치사상적 통일의 강화, 국가사회제도의 공고화)

1970년대김일성주석과 당중앙에서는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는 데 대한 새로운 전투적 강령을 제시하였다. . . .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김일성주석에게 끝없이 충직한 주체형의 공산주의혁명가로 만들며 주체사상의 요구대로 사회를 철저히 개조하여 공산주의의 사상적 요새물질적 요새를 점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 . 김일성주석은 우리 혁명의 새로운 발전단계의 요구와 3대혁명수행을 위한 투쟁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에 기초하여 새로운 혁명지도방법, 3대혁명소조운동을 발기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은 1973년 초3대혁명소조운동을 발기하면서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벌일 것에 대하여 교시하였다. 당중앙≪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라는 혁명적인 구호를 내놓고 이 구호 밑에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전당적, 전군중적으로 벌일 것에 대한 역사적인 발기를 하였다. . . . 검덕광산의 노동계급과 청산리의 농업근로자들은 1975년 12월 초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의 첫 봉화를 추켜들고 이 운동에 떨쳐나설 것을 온 나라 근로자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불과 한 달 사이에 공업, 농업, 과학, 교육, 문화, 예술, 보건 등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부문, 모든 단위들에서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이 힘있게 벌어졌다. . . . 당중앙이 세워준 정연한 학습체계, 강연체계, 강습체계, 선동체계 등을 통하여 학습, 강연, 토론회, 회상기 발표모임, 강습, 담화, 예술공연, 노래보급, 영화감상 등 다양한 형식과 방법이 널리 적용되고 항일유격대식 학습방법문답식학습방법이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 . . . 전면적 자동화를 실현할 것에 대한 김일성주석의 구상을 꽃피우기 위하여 당중앙황해제철소에서 자동화의 본보기를 창조하고 그것을 온 나라에 일반화하기 위한 투쟁을 정력적으로 지도하였다. . . . 6개년계획기간 부침땅 100정보당 트랙터 댓수는 벌방지대에서 6대, 중간지대와 산간지대에서는 5대에 이르렀다. . . . 여성들을 가정일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하기 위한 기술혁명도 성과적으로 추진되었다. 온 나라 이르는 곳마다에 탁아소와 유치원이 많이 건설되고 여러가지 편의 봉사시설들이 대대적으로 늘어났다. . . . 그리하여 짧은 기간에 근로자들의 일반 지식수준이 전반적으로 중학교 졸업정도 이상으로 높아졌으며 모두 다 문명한 사회주의건설자로서 혁명과 건설에 더욱 적극적으로 이바지하게 되었다.≫(온 사회의 주체사상화강령, 3대혁명의 강력한 추진)

김일성주석은 우리 혁명발전의 요구와 조성된 정세를 깊이 통찰하고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나라의 방위력을 더욱 튼튼히 다지는 한편 생산과 건설에서 새로운 일대 앙양을 일으키는데 대한 사회주의대건설방침을 제시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이 사회주의대건설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당면하게 힘을 집중하여야 할 주요전선은 기본건설전선, 공업전선, 농업전선, 수송전전, 수산전선의 5개 전선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6개년 계획의 중요고지들을 점령하는 데 필요한 기본건설에 선차적인 힘을 넣어야 한다고 교시하였다. . . . 당중앙은 사회주의대건설전투를 힘있게 다그치기 위하여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속도전을 힘있게 벌이는 데 대한 혁명적 방침을 내놓았다. 속도전은 모든 사업을 전격적으로 밀고 나가 최단 기간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최상의 성과를 이룩하도록 하는 사회주의건설의 기본전투형식이며 혁명적인 사업전개원칙이다. . . . 사회주의대건설전투의 제1선의 하나였던 김책제철소 확장공사장에서는 1974년에 대형용광로를 빠른 속도로 일떠세웠으며 그밖의 대야금 기지건설장들과 동력공업기지, 화학공업기지, 건재공업기지, 경공업기지 건설장들에서 건설속도를 몇배로 높여 중요건설대상들의 완전 및 부분적 조업을 성과적으로 보장하였다. . . . 당중앙은 1974년계획을 넘쳐 수행하여 사회주의 대건설의 첫해 전투를 빛나게 결속짓기 위하여, 전당, 전국, 전민을 ≪70일전투≫의 총돌격으로 불러일으키고 온 나라에 새로운 대비약, 대혁신이 일어나게 하였다. . . . ≪평양속도≫, ≪강선속도≫를 뛰어 넘는 새로운 천리마속도 ≪70일전투속도≫가 창조되었다. 공업생산은 전투기간에 그 이전에 비해 평균 1.7배로 높아졌다. . . . 영웅적 노동계급은 당창건 30돐을 기념하여 18미터 타닝반을 비롯한 질높은 충성의 선물기계들을 만들어 냈으며 4,600미터 길이의 은률광산 대형장거리벨트콘베이어98킬로미터나 되는 무산-청진 사이의 대형장거리정광수송관과 같은 만년대계의 기념비적 창조물들을 일떠세웠다. . . . 김일성주석이 창조한 주체농법은 불멸의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현대과학이 이룩한 성과들을 우리 나라 토양과 기후조건에 맞게 농사를 적지적작, 적기적작의 원칙에서 하며 농업생산을 집약화하고 ≪녹색혁명≫을 일으켜 우량품종을 만들어내는 등 농사를 과학적으로 할 것에 대하여 밝혀준다. . . . 주체농법을 관철하기 위한 농업근로자들과 농촌지원자들의 힘찬 투쟁에 의해 1974년에 우리 나라에서는 불리한 기후조건에서도 700만톤의 이상의 알곡을 생산함으로써 6개년 계획의 알곡고지를 2년이나 앞당겨 점령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논벼의 정당수확고는 전국적으로 평균 5.9톤에 이르러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으며 전국적인 강냉이의 평균 정당수확고도 5톤에 이르렀다. . . . 1976년에는 899만톤의 알곡을 생산하는 데 이르렀다. . . . 김일성주석은 1976년 10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12차 전원회의에서 밭관개의 완성, 다락밭 건설, 토지 정리와 개량, 치산치수와 간석지개간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자연개조 5대방침을 제시하고 전당과 전체 인민을 그 관철에로 조직동원했다. . . . 도시와 농촌 주민들의 생활조건에서의 차이를 없애기 위하여 농촌버스화농촌수도화가 성과적으로 진척되었다. . . . 수도시민들의 교통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웅장화려한 평양지하철도가 건설되었다. . . . 6개년 계획기간 노동자, 사무원들의 실질소득은 1.7배로, 농민들의 실질소득은 1.8배로 높아졌다. . . .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 결정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3차 회의(1974. 3)의 역사적인 법령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는 1974년 4월 1일부터 세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세금없는 첫 나라로 되었으며 우리 인민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세금제도에서 종국적으로 해방된 행복한 인민으로 되었다. . . . 6개년 계획기간 공업생산은 처음에 예견하였던 성장속도(14%)를 능가하여 매해 평균 16.3%의 높은 속도로 발전하였다. . . . 우리 중공업은 6개년 계획의 주요 지표들 가운데서 280억키로와트시의 전력, 5,000만톤의 석탄, 300만톤의 화학비료는 1975년에 생산해내었으며 400만톤의 강철고지와 800만톤의 시멘트고지는 생산능력상으로 1976년에 점령하였다. 경공업부문에서는 9월 방직공장을 비롯한 새로운 방직공장들이 세워져 직물 총생산능력은 6억미터이상에 달하게 되었으며 . . . 특히 6개년 계획의 알곡고지는 2년이나 앞당겨 점령되었다. . . . 계획기간 380키로미터의 철길구간이 새로 전기화되었으며 나라의 동서부를 연결하는 이천-세포사이의 철길을 비롯하여 총 471키로미터의 철길이 새로 건설되었다. 수산업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발전시킬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그 생산량은 1975년에 160만톤에 이르렀다. 6개년 계획의 중심과업인 3대 기술혁명을 수행하는데서 커다란 성과가 이룩되었다. 공업부문에서 중노동, 고열노동, 유해노동을 없애기 위한 기술혁명을 통하여 기계화, 자동화, 원격조정화가 널리 실시되었다. . . . 6개년계획수행에서 이룩된 성과로 하여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앞당길 수 있는 토대가 튼튼히 마련되었으며 공화국북반부의 혁명기지는 더욱 강화되고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투쟁을 더 한층 힘있게 벌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사회주의 대건설투쟁, 인민생활의 향상)

1972년부터는 적지 않은 학교들에서 1년동안의 학교전의무교육과 10년동안의 학교의무교육을 주는 전반적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길에 들어섰으며 1975년부터는 모든 학교들에서 그것이 완전히 실시되었다. . . . 기술자, 전문가 양성사업의 강화발전됨으로써 . . . 6개년 계획기간에 새로 60만명이상을 키워냄으로써 100만 이상의 인텔리대군으로 늘어났다. . . . 김일성주석은 . . . 1977년 9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14차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를 발표하였다.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에는 사회주의교육발전에서 이룩된 성과와 경험이 총화되고 집대성되어 있으며 사회주의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향과 방도들이 전면적으로 천명되어있다. . . . 과학자, 기술자들은 과학연구사업에서 주체를 철저히 세우고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우리 나라 연료에 의거한 주체적인 야금법과 새로운 주물방법을 발명하였으며 대자연개조사업에 필요한 현대적인 기계설비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이와 함께 우리 나라 원료에 의거하는 합성고무공업과 새로운 화학섬유공업을 창설하기 위한 연구사업에 성공하고 농작물의 육종방법과 재배방법을 비롯하여 새로운 과학기술적 문제들을 수많이 해결하였다. . . . 당중앙김일성주석의 주체적인 문예사상을 찬란히 꽃피우기 위하여 공산주의인간학에 관한 이론과 종자론을 비롯한 수많은 독창적인 사상이론을 내놓으므로써 . . . 김일성주석의 주체적인 문예사상과 그 실현을 위한 당중앙의 독창적인 문예방침과 정력적인 지도에 의하여 우리 나라 문학예술은 찬란히 개화발전하였으며 1970년대에 주체예술의 대전성기가 펼쳐졌다. . . . 불후의 고전적 명작들을 영화와 가극에 옮긴 장편소설 ≪피바다≫≪한 자위단원의 운명≫, ≪꽃파는 처녀≫가 창작됨으로써 혁명소설의 본보기가 마련되었으며 혁명적 문예전통을 빛나게 계승발전시키는 실천적 모범이 이룩되었다. 또한 불후의 고전적 명작 ≪성황당≫이 연극무대에 성과적으로 옮겨짐으로써 연극혁명이 일어나고 실현되게 되었으며 ≪성황당≫식혁명연극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오게 되었다. . . . 김일성주석의 혁명역사를 예술적 화폭에 집대성한 총서 ≪불멸의 역사≫ 가운데서 장편소설 ≪1932년≫≪혁명의 여명≫, ≪고난의 행군≫, ≪백두산 기슭≫, ≪두만강지구≫ 등. . . ≪누리에 붙는 불≫,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 ≪백두산≫, ≪조선의 별≫ 과 같은 기념비적 혁명영화들이 수많이 창작되었다. . . . 송가작품인 ≪수령님의 만수무강 축원합니다≫를 비롯하여 ≪수령님 한분만을 모시렵니다≫, ≪동지애의 노래≫, ≪봄을 먼저 알리는 꽃이 되리라≫, ≪병사는 벼이삭 설레이는 소리를 듣네≫ 등 사상예술성이 높은 명곡들이 수많이 창작되었다. . . . 무용분야에서 아름답고 고상한 민족무용이 꽃펴났으며 우수한 무용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특히 ≪조국의 진달래≫, ≪눈이 내린다≫, ≪키춤≫, ≪사과풍년≫ 등과 같은 사상예술성이 높은 명작들이 창작완성되고 그를 본보기로 하여 무용작품의 질이 한층 높아졌다. . . . 교예도 기형적이며 비정상적인 온갖 이색적 경향을 철저히 극복하고 체육문화적으로 조화되고 사상예술적으로 건전한 사회주의적 민족교예로 발전하였으며 ≪공중날기≫, ≪널뛰기≫, ≪바줄타기≫를 비롯한 우수한 교예작품들이 수많이 창작되었다.≫(사회주의적 민족문화의 개화발전)

≪우리 인민은 6개년계획수행에서 이룩한 자랑찬 성과에 토대하여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웅대한 강령인 제2차7개년(1978-1984년)계획을 수행하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 . . 인민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를 추진하여 사회주의경제토대를 더욱 강화하며 인민생활을 한계단 더 높이는 것 . . . 농촌경리부문에서는 자연개조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농촌기술혁명을 다그쳐 농업을 공업화, 현대화하며 농업생산을 과학화, 집약화하는 것이 중심과업으로 나섰으며 계획기간에 1,000만톤의 알곡고지를 점령하고 10만정보의 간석지를 개간하여야 하였다. . . . 1980년에 들어와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를 높은 정치적 열의와 빛나는 노력적 성과로 맞이하기 위한 투쟁 특히 당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충성의 ≪100일 전투≫를 통하여 공업생산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전투기간에 공업생산은 전해 같은 시기의 실적에 비해 157%로 늘어나 우리 나라 공업발전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최고의 성장속도를 수놓았다. 그리하여 새 전망계획의 3년분과제를 1980년 9월까지 완수하는 자랑찬 성과를 거두었다. . . . 저수지에 물을 채우는 사업과 지하수를 뽑아쓰기 위한 투쟁은 온 나라 각지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주체농법이 더욱 철저히 관철되어 알곡 정보당수확고가 논벼는 7.2톤, 옥수수는 6.3톤에 이르렀으며 1979년900만톤의 알곡을 생산해냄으로써 우리 나라 역사에서 처음보는 대풍을 이룩하였다. . . . 수도 평양을 더욱 웅장하고 현대적인 도시로 꾸리는 것에 대한 김일성주석의 웅대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당중앙평양산원창광원, 창광거리, 인민대학습당 등 대기념비적 창조물들을 최상의 수준에서 현대적으로 빨리 건설하는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고 그 건설 방향과 방도를 명백히 밝혀주었으며 이 대규모의 건설공사들을 진두에서 정력적으로 이끌었다. . . . 당중앙의 영도밑에 인민소비품생산투쟁과 주택건설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도시들의 중앙난방화가 성과적으로 진척되었으며 상품공급사업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전체 근로자들에게 더 많은 물질문화적 혜택이 돌아가게 되었다. . . . 제2차 7개년계획수행에 들어선 후 우리 나라에서는 새로운 대중운동으로서의 숨은 영웅들의 모범을 따라배우는 운동이 힘있게 벌어지게 되었다. . . . 김일성주석은 1979년 10월 정력적인 과학탐구를 통해 중요한 작물의 새 품종을 만들어낸 여성과학자와 우리 나라 기후 풍토에 맞고 생산성이 높은 ≪상련종≫을 연구해낸 농업과학자, 그리고 새로운 주물방법을 창안해서 3대혁명소조원과 여성과학자의 연구사업을 책임적으로 도와준 농촌의 한 당초급일꾼을 몸소 찾아내어 그들에게 숨은 영웅이라는 고귀한 칭호를 안겨주고 뜨거운 신임과 배려를 돌려주었다. . . . 당중앙의 가르침에 따라 숨은 영웅들의 모범을 따라배우는 운동은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과 밀접히 결부되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이 더욱 힘있게 벌어져 사상개조사업과 기술, 및 문화 개조사업에서 보다 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 . . 1980년 10월에 열린 역사적인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는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는 것을 우리 혁명의 총체적 임무로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과업들을 전면적으로 밝혔다.

. . 사회주의경제건설의 10대전망목표는 가까운 앞날에 한해에 1,000억키로와트시의 전력, 1억 2,000만톤의 석탄, 1,500만톤의 강철, 150만톤의 유금속, 2,000만톤의 시멘트, 700만톤의 화학비료, 15억미터의 천, 500만톤의 수산물, 1,500만톤의 알곡을 생산하며 10년동안에 30만정보의 간석지를 개간하는 것이다.≫(사회주의건설에서 새로운 앙양을 일으키기 위한 투쟁)

4) 남조선인민들의 구국투쟁

≪정전협정을 계통적으로 위반해온 미제는 1957년 6월 21일 군사정전위원회회의에서 정전협정의 군사력증강의 금지사항(제13조 ?항)에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통고≫하고는 7월에 일본에 있던 ≪유엔군사령부≫를 남조선에 끌어들였으며 원자탄, 유도탄을 비롯한 신형무기를 대량적으로 반입하였다. 미제의 새 전쟁 도발과 식민지예속화 정책에 충실히 복무하던 이승만정권은 미국군대의 장기주둔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였으며 . . . ≪신국가보안법≫을 비롯한 각종 악법들을 새로 조작하여 인민탄압에 적용하였다. . . .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그 대부분이 국방군 무장군사시설에 돌려졌고 나머지는 미국과잉상품을 끌어들이는 데 돌려졌다. . . . 공장, 기업소들의 90% 이상은 50명 미만의 종업원을 가진 중소기업들이었는데 이것들은 원료, 동력 및 자금의 부족과 판로난, 과중한 세금으로 하여 조업을 단축하거나 파산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 . . 이승만정권이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남조선 농민대중을 무마하기 위하여 실시한 ≪농지개혁≫은 오히려 큰 후과를 남기고 남조선인민들을 걷잡을 수 없는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 . . 남조선에서 실업자 및 반실업자는 해마다 늘어나 1960년 현재 660만명에 달하였다. . . . 이러한 투쟁의 결과 1955년 12월에 남조선혁명가들의 합법적 당으로서 진보당이 나오게 되었다. 조봉암을 당수로 하는 진보당반제, 반파쑈, 평화통일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투쟁강령을 내놓고 각계각층의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세우며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민족분열정책과 파쑈정책을 반대하는 적극적인 투쟁을 벌였다. . . . 1956년에 있은 대통령 ≪선거≫ 때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폭압과 사기와 협작 속에서도 진보당이 내세운 ≪후보자≫(조봉암)가 200만표 이상의 찬성투표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로 된다. 진보당의 영향력이 남조선인민들 속에서 빨리 확대강화되는 데 겁을 먹은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유혈적인 탄압책동을 벌여 수많은 진보당 당원들을 체포투옥하고 그 당수 조봉암을 학살하는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으며 당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리하여 진보당은 1958년 1월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게 되었다. . . . 1960년 3월 남조선에서 진행된 ≪정, 부통령선거≫를 계기로 하여 일어난 4월인민봉기는 미제와 이승만정권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쌓이고 쌓인 원한과 분노의 폭발 . . . 서울 고려대학교 4,500여명의 학생들은 4월 18일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국회의사당≫ 앞에 운집하여 ≪행정부는 독재적 살인정책에 종지부를 찍으라≫, ≪민족의 역적을 몰아내자≫ 등 4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승만의 출두를 요구하며 농성투쟁을 벌렸다. 4월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은 폭동으로 넘어갔다. 봉기군중들은 ≪중앙청≫을 습격하고 경찰기관들을 파괴하였으며 ≪자유당≫본부(자유당은 이승만의 정당)와 ≪반공회관≫, ≪정부기관지≫인 ≪서울 신문사≫, 제2군 ≪특무대≫ 건물을 소각하였다. . . . 남조선인민들의 항쟁이 날이 갈수록 확대발전되는 가운데 4월 21일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그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하는 호소문 ≪남조선인민에게 고함≫을 발표하였다. 호소문은 남조선인민봉기의 의의를 지적하면서 남조선에 조성된 긴박한 국면을 뚫고나가기 위한 뚜렷한 방향과 명확한 길을 제시하였다. . . . 4월인민봉기에 뒤이어 남조선 애국자들과 인민대중의 혁명적 진출은 날로 강화되고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대두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사회대중당이 나오게 되었다. 남조선혁명가들의 지도밑에 사회대중당은 민족자주노선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통일국가의 창건을 당면과업으로 내세우고 인민들의 대중적 진출을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구국운동으로 이끄는 활발한 조직정치활동을 벌였다.≫(4월인민봉기)

≪남조선인민들의 4월인민봉기에 의하여 이승만정권이 무너지게 되자 미제는 통치기구를 ≪정비≫하고 식민지통치의 위기를 막기 위하여 우선 4월인민봉기 당시 이승만정부의 ≪외부부장관≫이었던 허정을 우두머리로 하는 이른바 ≪과도정부≫를 4월 21일에 조작하였다. . . . 1961년 5월 4일 서울대학교의 ≪민족통일연맹≫은 남북학생회담의 개시를 정식으로 제의하였으며 5월 5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발기인대회≫에서는 5월중에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개회하는 데 대한 새로운 제안을 들고 나왔다. 남조선의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은 ≪통일만이 살 길이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중적인 투쟁을 과감히 벌였다. . . . 이에 당황한 미제는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유지강화하기 위하여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등 군내의 극단적인 파쑈분자들을 내세워 ≪군사정변≫을 도발케하여 장면 ≪정권≫을 밀어던지고 그대신 가장 포악한 군사파쑈독재 ≪정권≫을 조작하였다. . . . 미제의 적극적인 부추김밑에 박정희정권은 ≪제3공화국의 운명을 걸고라도 ≪한일회담≫을 추진시키겠다≫고 떠벌이면서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의 계획에 따라 매국적인 ≪대일협상≫을 진행하였다. . . . 남조선의 광범한 애국적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은 1964년 3월 24일 박정희정권의 매국배족행위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재침책동을 반대하는 대중적 투쟁에 떨쳐나섰다. . . . 이와 같이 5월 20일부터 6월 5일까지 17일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6.3봉기에는 33개 지역의 89개 학교에서 7만 3,50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였으며 1만명의 시민들이 합세하였다. . . . 1965년 2월 20일에 남조선정부와 일본군국주의자들 사이의 매국적인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가조인하고 4월 3일에는 남조선과 일본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등 조선인민의 민족적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을 눅거리(값싼) 흥정으로 떠넘기는데 대한 ≪합의요강≫에 가조인하였다. 그리고 6월 22일에는 일제반동들과의 매국적 ≪조약≫과 ≪협정≫에 정식조인하였다. . . . 남조선정부와 일본간의 ≪협정≫을 반대하는 남조선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의 투쟁은 개학 첫날인 8월 20일부터 또다시 세차게 벌어져 새로운 고조기에 들어섰다. 8월 20일부터 27일에 이르는 기간에만도 남조선 각지에서 80여개의 대학과 중고등학교 학생 연 8만 3,000여명이 투쟁에 떨쳐나섰으며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인사들, 예비역군인들을 포함하여 각계각층 인민들이 여기에 합류하였다.≫(군사파쑈독재의 수립,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인민들의 투쟁)

≪남조선혁명가들은 1964년 3월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후 남조선혁명가들은 통일혁명당 지방조직들을 결성하여 지하혁명활동을 벌이면서 혁명적 당건설을 힘있게 다그쳐 나갔다. 특히 남조선혁명가들은 지난 시기의 남조선혁명운동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고 당을 건설하기 위한 조직사상적 준비를 튼튼히 갖추기 위하여 꾸준히 투쟁하였다. . . . 대중정치선전사업에서는 통일혁명당의 기관지 ≪청맥≫이 큰 역할을 하였다. ≪청맥≫은 1964년 8월에 창간호를 낸 후 1967년 6월까지 무려 수만부를 발행하여 남조선인민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각성시키고 그들 속에서 계급적 투쟁의식을 고취하였다. . . . 통일혁명당조직들에서는 1964년 6.3투쟁과 1965년 8월투쟁, 1967년 5.3≪대통령선거≫와 6.8≪국회의원선거≫ 반대투쟁, 1967년 7월 미제의 호전광인 전부대통령 험프리와 일본군국주의의 두목 사또의 남조선방문 반대투쟁, 1969년 7월 ≪3선개헌≫반대투쟁 등을 조직하고 규탄대회와 시위를 비롯하여 파업, 단식, 농성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 . . 1969년 8월 당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선언과 강령을 공포함으로써 통일혁명당창건을 온 세상에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 . . 통일혁명당은 선언에서 ≪통일혁명당의 지도이념은 맑스-레닌주의를 현시대와 우리 조국 현실에서 독창적으로 구현한 김일성주석의 위대한 주체사상≫이라고 선포하였다. 통일혁명당은 또한 자기 선언에서 조선혁명은 ≪김일성주석에 의해 향도된 항일무장투쟁의 영광스러운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 . . 통일혁명당은 강령에서 당의 최고목적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며 당면목적인민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여 부패한 식민지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전복하고 인민민주주의제도를 건립하며 나아가서는 조국통일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 . . 6.3봉기 이후 남조선인민들의 가장 큰 규모의 반파쑈민주화투쟁은 군사파쑈정권의 연장을 위하여 미제의 조종밑에 박정희정권이 조작한 1967년 6.8부정 ≪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대중적 정치투쟁이었다. . . . 남조선청년학생들의 반파쑈민주화투쟁은 1969년 박정희정권이 장기집권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감행한 ≪3선개헌≫책동을 계기로 또 다시 세차게 벌어졌다. . . . 남조선청년학생들의 의로운 투쟁에 발을 맞추어 남조선의 각계각층 민주인사들도 1971년 4월 19일 반외세, 반파쑈민주화투쟁에서 남조선의 광범한 민주세력의 통일전선조직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박정희정권의 협잡 ≪선거≫를 짓부수고 민주주의적 권리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힘차게 벌여나갔다. . . . 1972년 . . . 12월 23일에는 여기에서 박정희를 사실상의 종신 ≪대통령≫으로 하는 악명높은 ≪유신정치체제≫를 꾸며냈다. . . .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 300여명은 교내 ≪4.19의거탑≫ 앞에 모여 ≪누구를 위한 ≪10월유신≫이냐, 국민의 노예화를 위한 것인가≫라는 구호를 내걸고 ≪유신≫파쑈독재를 반대하는 항쟁의 봉화를 올렸다. . . . 남조선청년학생들의 통일적인 투쟁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지도밑에 진행된 이 투쟁은 1인1당파쑈독재체제와 정보폭압정치를 정면으로 반대하여 일어난 높은 형태의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었다. . . . 1976년 3월 1일 3.1봉기 57돐을 계기로 남조선의 정계, 종교계, 학계, 법조계를 비롯한 민주인사 12명의 연명으로 된 ≪민주구국선언-박정희퇴진선언≫을 발표하였다. . . . 1978년 7월에 와서는 각계각층 반파쑈민주단체들과 ≪민주구국선언≫관계자들을 비롯한 정계, 종교계, 학계, 문화언론계, 법조계, 청년학생 등 수많은 반≪정부≫민주인사들로써 폭넓은 반파쑈연합전선조직인 ≪민주주의국민연합≫이 결성되었으며 1979년 3월에는 이 조직을 모체로 하여 더 많은 민주화투쟁단체들을 망라한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조직되었다. . . . ≪와이에취무역회사≫ 여성노동자들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1979년 4월 중순부터 투쟁을 벌여오다가 정부의 비인간적 탄압만행에 격분하여 8월 9일부터는 투쟁장소를 신민당사로 옮기고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힘찬 투쟁을 벌였다. . . . 특히 이 투쟁에 대한 정부의 유혈적인 탄압만행은 ≪유신≫독재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불만과 반항심을 극도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것은 마침내 10월민주항쟁으로 폭발하였다. . . . 상전인 미제도 박정희를 더는 쓸모없는 주구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10월 26일 자기의 심복에게 사살되어 비참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이를 ≪10월사건≫이라고 한다.) . . . 미제는 박정희의 후임으로 ≪유신≫잔당의 두목 전두환을 내세웠다. 극악한 파쑈분자 전두환은 미제의 배후조종밑에 1979년 12월 12일 ≪숙군정변≫을 일으켜 군권을 탈취하였으며 군사파쑈통치체제를 전례없이 강화하고 그에 장애로 되는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 파쑈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 . . 5월 18일 ≪비상계엄령≫의 해제를 요구하여 시위투쟁에 떨쳐나선 광주시내 청년학생들은 군사파쑈정권이 병력을 대량적으로 내몰아 민주화투쟁에 일어선 시위자들에게 야수적 탄압을 가하자 이에 격분하여 폭력투쟁으로 항거해 나섰다. . . . 청년학생들의 폭동적 진출은 삽시에 온 광주땅을 휩쓸었으며 여기에는 남녀노소 할 것없이 시 안의 모든 인민들과 시 주변 노동자들, 농민들까지 합세하여 그 수는 며칠 사이에 무려 30여만명에 이르렀다. . . . 광주의 봉기군중들은 자치조직인 ≪시민위원회≫와 ≪민주투쟁위원회≫를 내오고 자위적인 무장조직인 ≪시민군≫, ≪특별경계부대≫, ≪돌격대≫를 만들어 기세를 올렸으며 . . . 봉기군중들은 방대한 군병력이 사면팔방으로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10일 동안이나 ≪계엄군≫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들이 차지한 광주시를 완강히 고수하였다. 겁에 질린 미제는 남조선 주둔 미군사령과 워컴을 호출하여 광주인민봉기를 무력으로 집압하는 데 대한 흉악한 살육작전계획을 작성하였으며 그에 따라 미국방부남조선과 미국 연합군사령부에 직속된 군 2개 사단을 인민봉기탄압에 내몰았다. 미국제 환각제를 먹고 흥분된 특전대 살인귀들은 짐승도 낯을 붉힐 잔인한 방법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간 군의 총칼에 의하여 5,000여명의 봉기군중이 학살되고 . . .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쑈민주화투쟁에 길이 빛날 자랑스러운 페이지를 남겨 놓았으며 자주성을 지향하는 피압박 인민들의 투쟁에서 특출한 의의를 가지는 역사적 사변이었다. . . . 특히 1973년 8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 일본본부가 결성된 데 이어 ≪한민통≫ 미국본부와 ≪한국민주수호국민전선≫(북구라파 교포단체), ≪남조선의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회≫(서독 교포단체), ≪한국자주통일추진회≫(프랑스 교포단체)를 비롯한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을 위한 여러 단체들이 해외교포들 속에서 조직되었으며 1975년 4월 18일에 통일혁명당을 지지하는 재일 조선교포인사들이 ≪통일혁명당 재일한국인연대위원회≫를 결성하였다. . . . 해외동포들이 벌린 적극적인 투쟁은 ≪유신≫파쑈독재를 부수고 남조선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며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겨 나가는 데 힘있게 작용하였으며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쑈민주화투쟁에 커다란 고무가 되었다.≫(통일혁명당의 창건과 반제반파쑈투쟁의 강화)

5)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투쟁

≪조선의 평화적 통일을 악랄하게 반대하는 미제의 태도는 1954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열린 제네바회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 . .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는 조선문제의 평화적 조정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인 ≪조선의 민족적 통일회복과 전조선 자유선거실시에 관하여≫를 내놓았다. . . . 미제와 그 주구 이승만정권의 파렴치한 술책과 간악한 책동에 의하여 제네바회의에서의 조선문제의 토의는 파탄되고 말았다. . . . 김일성주석은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서 . . . 조선의 통일문제를 구체적으로 토의하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와 정부, 남조선 ≪국회≫와 ≪정부≫, 남북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상설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미제를 반대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남조선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 인사들과의 연합을 실현하며 조국통일을 위한 공동전선을 결성하기 위하여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연석회의 또는 개별적인 정당, 사회단체, 개별적 인사들과의 회합을 진행할 것을 제의하였다. . . . 1958년 2월 5일 공화국 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조선에서 일체 외국군대의 철거와 조선의 평화적 통일은 이미 성숙되고 지체없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중국인민지원군을 포함한 모든 외국군대들이 조선으로부터 동시에 철거할 것과 외국군대가 남북조선으로부터 완전히 철거한 후 일정한 기간안에 전조선자유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할 것을 엄숙히 천명하였다. . . . 조중 두 나라 정부의 주동적 조치에 의하여 중국인민지원군은 1958년 3월부터 10월까지에 걸쳐 완전히 철거하였다. . . . 1964년 3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3차 회의에서는 파괴된 남조선경제를 수습하고 정상적인 발전을 도와주며 남조선인민들의 생활안정을 보장하기 위하여 남조선에 매년 200만석(30만톤)의 쌀, 10만톤의 강재, 10억키로와트시의 전력, 1만톤의 화학섬유를 비롯하여 많은 물자를 제공할 것을 결정하였다. . . . 그러나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방해책동으로 말미암아 공화국정부의 성의있는 동포애적 조치들은 어느 하나도 실현되지 못하였다.≫(조국통일을 다그치기 위한 주동적 공세)

김일성주석이 내놓은 폭넓은 남북협상방침에 의하여 북과 남 사이의 고위급정치회담이 마련되었으며 김일성주석이 제시한 조국통일의 3대원칙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게 되었다. . . . 쌍방간의 합의에 따라 1972년 7월 4일 평양과 서울에서 각각 동시에 발표되었다. . . . 1972년 10월 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들의 제1차 회의에서는 공동성명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그 합의사항을 성실하게 집행할 것에 대하여 토의하였으며 . . . 미제가 월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쫓겨난 후 불안과 공포에 싸인 남조선정권은 남북공동성명을 더욱 노골적으로 위반하면서 조절위원회 쌍방 부위원장들의 접촉마저 파탄으로 이끌어가려고 책동하였다. 그리하여 1975년 3월 14일 제10차 부위원장 접촉이 있은 다음 쌍방간의 접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 . . 남북적십자회담은 제7차 회의에 이르기까지 의제 제1항 토의에 머무른채 아무러한 진전도 보지 못하였으며 특히 남조선정권이 감행하고 있는 파쑈적 폭압과 우리측을 반대하는 ≪반공≫대결정책으로 말미암아 1973년 7월중순 이후부터 고착상태에 빠졌다.≫(7.4남북공동성명, 북과 남의 대화)

≪공화국정부는 조국통일의 3대원칙과 그에 기초한 7.4남북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미제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적극적인 부추김밑에 박정희정권은 입으로는 통일에 대하여 떠들면서 실세 행동에서는 북과 남 사이의 대화를 중단상태에 빠뜨리고 ≪두개 조선≫ 조작책동을 세상에 공공연히 선포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나라의 분열을 고착시키고 영구화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 . . 세상에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두개 조선≫ 조작을 위한 미일침략자들의 공모결탁은 1969년에 있은 일본총리와 미국대통령의 회담(사또-닉슨 회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첫 발현인 ≪남북조선 유엔동시가입≫론도 미제의 지시에 따라는 박정희정권의 ≪특별성명≫이 있기 전에 미일침략자들 사이에서 면밀히 꾸며졌다. . . . 김일성주석은 조국통일의 앞길에 조성된 이러한 엄중한 정세를 깊이 통찰한 데 기초하여 민족의 분열을 막고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5대방침을 천명하였다. . . . 북과 남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와 긴장상태의 완화, 북과 남 사이의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와 실현, 북과 남의 각계각층 인민들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의 소집, 고려연방공화국의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연방제의 실시, 단일한 고려연방공화국 국호에 의한 유엔가입을 그 내용으로 . . . 우리 공화국은 조국통일위업을 다그치기 위하여 외국의 내정간섭을 종식시키고 민족의 내부문제를 조선사람들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는 데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을 목적으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의하는 편지를 1974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이름으로 미국국회에 보냈다. . . . 쌍방은 서로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직접적 무력충돌의 모든 위험성을 제거할 것, 미국은 남조선 당국자들의 전쟁도발과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파쑈적 탄압행위를 사촉하지 않고 비호하지 않으며 조선의 북과 남이 남북공동성명에 따라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나라를 통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조선의 내정에 일체 간섭하지 않을 것에 대한 의무를 질 것, 쌍방은 무력증강과 군비경쟁을 그만두며 조선경외로부터 일체 무기와 작전장비, 군수물자의 반입을 중지할 것, 남조선에 있는 외국군대는 ≪유엔군≫의 모자를 벗어야 하며 가장 빠른 기간내에 일체 무기를 가지고 모두 철거하도록 할 것, 남조선에서 모든 외국군대가 철거한 후 조선은 그 어떤 외국의 군사기자나 작전기지로도 되지 않을 것 등이었다. . . .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는 오직 정전협정체결의 실제적 당사자이며 조선에서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실권자들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당국이 풀어야 한다.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에 대한 공화국정부의 제의에 대하여 미국은 아무러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은 김일성주석이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6차대회에서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이었다. . . . 연방국가를 형성하여 조국을 통일하는 것에 대한 방안은 북과 남에 서로 다른 제도가 오랫동안 존재하여 온 우리 나라의 구체적 현실과 그를 실현할 수 있는 실제적 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조국통일방안이다. 김일성주석은 연방국가의 창립방도와 연방정부의 기능 및 국호에 이르기까지 연방국가의 창립과 관련된 제반 문제를 전면적으로 밝혔다. . . . 1979년말 현재 세계 70여 개 나라에 조선통일지지위원회들이 무어져 활동하였으며 그 수는 무려 190여개에 달하였다. . . . 1971년에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170회 이상에 달하는 연대성 집회와 시위들이 진행되었다면 1977년에는 100여개 나라에서 1,600여 건이나 진행되었다. . . . 1973년 9월 알제리에서 열렸던 제4차 블럭불가담국가 수뇌자회의에 참가한 세계 80여개 나라의 국가 및 정부 수반들 그리고 그들의 대표들을 포함하여 100여개 대표단들은 조선에 대한 외국의 간섭을 종식시키며 조선인민의 자결권을 보장하고 조선인민 자신이 자기 문제를 해결하며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을 철거시키고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을 해체하며 조선의 유엔가입은 조선의 완전한 통일이 이룩된 다음이거나 남북연방제가 실시된 다음 단일국호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제와 박정희정권의 민족분열책동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에 강력한 지지와 고무를 주었다.≫ (≪두개 조선≫ 조작책동을 분쇄하고 통일위업을 다그치기 위한 투쟁)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제적 지위의 강화

자주, 친선, 평화는 조선노동당과 공화국정부의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이다. . . .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는 사회주의나라들의 통일단결을 강화하고 이 나라들과의 친선협조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 . . 우리 공화국정부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신흥세력 나라들과 우호적 협조관계를 발전시켜야 할 우리 혁명과 세계혁명의 절실한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영토완정과 주권에 대한 존중, 불가침, 내정에 대한 불간섭, 평등과 호혜, 평화적 공존의 5대원칙에 기초하여 신생독립국가들을 비롯한 모든 나라들과 단결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여 왔다. . . . 김일성주석은 세계혁명역량을 각개격파하려는 미제침략자들의 책동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미제의 흉악한 세계전략을 때려부시기 위한 세계 혁명적 인민들의 기본전략으로서 미제에 주되는 창끝을 돌릴 데 대한 방침국제적인 반미공동행동과 반미통일전선을 이룩한 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였다. . . . 우리 공화국정부와 우리 인민은 미제를 반대하여 투쟁하는 동시에 미제의 동맹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입장을 일관하게 견지하여 왔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자주적인 대외정책)

≪오늘 우리 나라는 사회주의나라들과 신흥세력 나라들을 비롯한 100여개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 . . 김일성주석은 정전직후인 1953년 9월과 11월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초청에 의하여 이 나라들을 공식 친선방문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은 1956년 6월 초순부터 7월 중순에 걸쳐 소련, 독일민주주의 공화국,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 불가리아, 알바니아, 폴란드 및 몽고 등 구라파아시아의 사회주의나라 정부들의 초청에 의하여 이 나라들을 친선방문하였다. . . . 신흥세력 나라들과의 친선협조관계를 확대발전시킴에 있어서 획기적 계기를 열어놓은 것은 김일성주석이 1965년 4월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국가방문하고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반둥회의) 10돐 경축행사에 참가한 것이었다. 김일성주석은 인도네시아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남조선혁명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였다. . . . 1972년 한 해 동안에만도 당과 정부 대표단을 비롯한 670여개의 여러 대표단들이 형제적 사회주의나라들을 방문하였으며 정부대표단, 정부친선대표단, 사회단체대표단, 경제문화대표단 등 수많은 대표단들이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에 파견되었다. . . . 특히 1978년 9월에 진행된 공화국창건 39돐 기념행사에는 여러 나라의 국가수반들을 비롯하여 5대륙에서 110개 대표단들이 참가하였다. . . . 우리 나라는 1960년 현재 아시아, 아프리카 경제협조기구를 비롯하여 49개에 달하는 각종 국제기구에 참가하였으며 1970년까지에는 106개의 국제기구들에 가입하였다. . . . 우리 나라는 미제와 박정희정권의 악랄한 방해책동에도 불구하고 1974 - 1975년에 만국우편동맹,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국제원자력기구 세계기상기구, 국제전기통신동맹을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에 가입하였으며 1976년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들의 ≪77개국집단≫에 가입하였다. 그리하여 1977년 현재 우리 나라가 가입한 국제기구는 150여개에 달하였다. . . . 1975년 3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진행된 블럭불가담국가 조정위원회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자주적인 대외정책이 블럭불가담정책의 원칙에 전적으로 부합되며 블럭불가담운동의 강화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일치하게 인정하고 우리 나라를 블럭불가담운동 성원국으로 받아들일 데 대한 찬성권고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 . . 정부 및 친선 대표단을 포함하여 해마다 우리 나라를 방문하는 각종 외국 대표단은 수백개에 달하며 1975년 한 해 동안에만도 1,000여개의 대표단의 8,000여명의 외국손님들이 우리 나라를 찾아왔다. . . . 김일성주석의 노작들은 1972년42개 나라에서 37개의 민족어로 510만부이상 번역출판되었으며 1976년에는 90여개 나라에서 50여개 민족어로 수억부가 출판되었다. 세계적으로 김일성주석의 노작이 실린 각종 출판물은 1980년까지 천여종이나 되며 그 부수는 40여억부에 이르렀다. . . . 1970년대 말 현재 무어진 연구소조들의 수는 세계 60여개 나라에서 800여개나 되었으며 여기에는 정계와 언론계의 이름있는 인사들, 박사, 교수들과 대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사들과 인민들이 망라되었다. . . . 1976년 9월 마다가스카르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는 세계 50여개 나라 당 및 정부 대표단과 이 나라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1,000여명의 각계각층 인사들의 참가밑에 세계적인 ≪주체사상에 관한 국제 과학토론회≫가 성대히 진행되었다. . . . 1977년 9월 평양에서 진행된 ≪주체사상에 관한 국제토론회≫. . . 에는 73개의 나라와 4개의 국제기구에서 온 89개의 대표단과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 . . 평양국제토론회의 결정에 따라 1978년 4월에는 일본 도꾜주체사상국제연구소가 창립되었으며 그 기관지로서 잡지 ≪주체사상연구≫가 발간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 세계적 범위에서 주체사상을 연구보급하는 사업이 국제적인 상설기관에 의하여 통일적으로 조직진행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대륙별 조직들인 라틴아메리카 주체사상연구소(1978.2)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1980.9)들이 창립되었다. . . . 그들은 해마다 김일성주석의 탄생일을 경사로 맞이하면서 한결같이 김일성주석을 ≪세계혁명의 태양으로, 20세기의 탁월한 영웅으로 무한히 흠모≫하며 김일성주석이 ≪인류의 영원한 봄을 위하여 길이길이 찬란한 빛을 뿌려주실 것을 충심≫으로 축원하면서 김일성주석에게 수많은 편지와 축문, 축전을 보내왔다. 1972년 4월 15일에는 5대륙100여개 나라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 혁명조직들을 비롯하여 주체사상 연구조직들과 사회단체들, 국제기구들이 김일성주석에게 2,100여건의 축하편지, 70여건의 축하시와 노래를 보내왔으며 그것은 1977년2,500여건으로 늘어났다. . . . 김일성주석에게 보내온 선물은 1980년 4월 현재 5대륙의 120여개 나라 국가수반들과 당 및 정부 지도자들, 각계 인사들과 혁명적 인민들의 것만도 무려 2만 5,000여점에 이른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외관계의 급속한 확대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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