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 18일

통일여명 편집국

현대조선역사 1

통일여명 편집국 해설 5-2-4

 

1. 항일혁명투쟁

1) 부르조아민족운동시기의 종말, 초기공산주의운동

≪미제의 지배층은 이미 러일전쟁 당시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찬성하는 의사를 표시한 바 있었으며 1905년 7월 일본총리 카쓰라와 미육군장관 테프트 사이의 협정(이른바 ≪카쓰라-태프트 협정≫과 1908년 11월 주미일 본대사와 미국무장관 사이의 협정 (이른바 ≪다까히라-루우트 협정≫)에서는 일제의 조선강점을 완전히 승인하였다.≫(20세기 초엽 조선의 사회경제형편)

≪3.1봉기 후 민족주의세력은 와해과정을 밟게 되었다. 부르조아민족주의운동의 상층부의 대부분은 민족개량주의자들로 굴러떨어져 일제와 완전히 야합하게 되었다. . . . 다른 민족주의자들은 독립군을 뭇고 반일투쟁을 일정하게 진행하였으나 그 일부는 얼마 안가서 쇠멸되고 다른 일부는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민족해방투쟁을 계속하였다. . . . 이렇듯 민족주의운동이 쇠퇴되어 감에 따라 그것은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 지배적 지위를 잃게 되고 뒤로 밀리게 되었다. 이와 반면에 공산주의운동이 급속히 발전하여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민족주의 운동의 쇠퇴와 공산주의운동의 발생, 종파의 해독적 작용)

2)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출발

≪광범한 대중을 묶어세울 반일지하혁명조직을 결성할 것을 구상한 김형직선생1917년 3월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하는 역사적인 회의를 소집하였다. . . . 김형직선생은 1919년 8월 관전현 홍롱구에서 역사적인 관전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는 회의에서 변화하는 국제 국내정세를 정확히 분석한데 기초하여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 영향밑에 진행되던 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사상에 기초하는 혁명투쟁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데 대한 방침을 내놓았다.≫(반일민족해방운동의 방향을 전화시키기 위한 투쟁)

김일성주석은 혁명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옳은 투쟁강령을 가지고 대중에 의거하여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벌여나가는 혁명의 전위조직을 건설할 것 등에 의거하여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벌여나가는 혁명의 전위조직을 건설할 것을 구상하고 1926년 10월 17일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결성하였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참다운 공산주의적 혁명적으로 밝힌 투쟁강령을 내놓았다. . . . 당면과업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할 것을 내세웠으며 최종목적으로 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며 나아가서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세계에 공산주의를 건설할 것을 규정 . . . 타도제국주의동맹이 결성은 우리 나라에서 종전의 당과 구별되는 새형의 당, 주체형의 혁명적 당창건을 위한 투쟁의 출발점으로 되었으며 이 때로부터 당의 영광스러운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ㅌ.ㄷ≫의 강령은 당의 강령의 기초로 되었고≪ㅌ.ㄷ≫가 내세운 자주성의 원칙은 당 건설과 당활동의 원칙으로 되었으며 ≪ㅌ.ㄷ≫가 키워내기 시작한 새세대공산주의자들은 당 창건의 골간으로 되었다.≫(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

김일성주석은 1930년 6월 만주의 장춘현 카륜에서 진행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에서 주체사상의 원리를 천명하고 조선혁명의 주체적인 노선을 밝힘으로써 조선혁명의 지도사상과 노선, 전략전술을 튼튼히 확립하였다. . . . ≪조선혁명의 진로≫에서 . . . 주체사상의 원리를 천명하고 주체사상의 창시를 선포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은 당시 우리 나라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한다고 하던 초기공산주의운동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본질적 제한성을 꿰뚫어 보고 이들과는 다른 길,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대중에 의거하여 투쟁하는 참다운 혁명의 길을 걸었으며 혁명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동원하여야 혁명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김일성주석은 또한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안에 나타났던 사대주의, 교조주의의 후과로부터 심각한 교훈을 찾고 혁명은 그 누구의 승인이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신념에 의하여 자기가 책임지고 하여야 하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이 두 진리는 주체사상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 . . 조선혁명의 기본임무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는 것과 함께 봉건적 제관계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실현 . . . 조선혁명의 기본임무로부터 출발하여 현단계에서의 조선혁명의 성격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 . . 김일성주석은 우선 항일무장투쟁노선을 제시하였다. . . . 다음으로 모든 반일애국역량을 각성시키고 튼튼히 묶어세워 반일투쟁에 한결같이 불러일으키는 데 대한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제시하였다. 그가 천명한 당창건 방침에서 중요한 것은 자주적으로 당을 창건하는데 대한 것이었다.≫(주체사상의 창시, 주체적 혁명노선)

김일성주석은 그 어떤 오물에도 물들지 않은 새세대의 참신한 청년공산주의자들로 ≪ㅌ.ㄷ≫을 결성하고 그들을 공산주의전위투사로 키웠다. 그 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내오고 그 역할을 높이면서 당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사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이러한 준비에 기초하여 카륜회의 직후인 1930년 7월 3일에 몸소 육성한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을 비롯한 새세대 공산주의자들로 첫 당조직을 결성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은 이러한 준비에 기초하여 1930년 7월 6일 이롱헌 고유수에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핵심들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첫 혁명적 무장조직인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였다.≫(주체형의 첫 당조직의 결성. 무장투쟁의 준비)

3) 항일무장투쟁의 개시, 무장투쟁의 첫단계

김일성주석은 1931년 12월 명월구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데 대하여≫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하였다. 연설에서는 일제의 만주강점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정세가 개괄되고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역사적 교훈이 분석되었으며 이에 기초하여 유격전의 형식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는데 대한 방침이 제시되었다. . . . 김일성주석은 이 모든 준비사업에 기초하여 1932년 4월 25일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였다.≫(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

≪해방지구형의 유격근거지를 창설하는 데서 가장 적당한 지대는 두만강 연안의 산악지대였다. 그러므로 이 지대에서 해방지구 창설을 위한 강력한 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 . . 이 지역들에는 당 및 공청조직을 비롯하여 농민협회, 반제동맹, 혁명호제회, 부녀회, 아동단 등 각종 혁명조직과 함께 적위대, 소년선봉대 등 반군사 조직들이 나오고 광범한 군중이 여러 혁명조직들에 조직적으로 결속되게 되었다. 해방지구들에는 혁명정권이 서고 유격대의 병영과 학교, 출판소, 무기수리소, 재봉소 등이 설치되었다. . . . 김일성주석이 내놓은 인민혁명정부노선은 벌써 카륜회의에서 천명된 주체적인 정권건설노선에 기초한 것으로서 혁명의 기본문제인 주권에 관한 문제를 새롭게 밝힌 독창적인 노선이었다. . . . 해방지구는 항일무장투쟁의 믿음직한 군사전략적 거점, 강력한 후방기지 그리고 전반적 조선혁명의 책원지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 . . 해방지구들의 주변에 반유격구들을 건설하는 사업도 성과적으로 추진되었다. . . . 반유격구는 유격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보이지 않는 후방기지였으며 해방지구를 지원하고 보호하는 믿음직한 전초기지였다.≫(두만강 연안 유격근거지의 창설과 그 공고화)

김일성주석은 1934년 3월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고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내오는 획기적인 대책을 취함으로써 모든 당조직들에 대한 통일적 지도체계를 정연하게 확립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의 두리에 굳게 뭉친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은 반종파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으며 이에 따라 종파분자들의 지반은 급속히 무너져갔다. 반종파투쟁속에서 당조직들과 공청조직들이 강화되고 그 역할이 높아졌으며 당원들과 공청원들이 조직사상적으로 더욱 단련되었다. . . . 해방지구와 반유격구에는 농민협회(농민위원회), 반일회(반제동맹), 혁명호제회 그밖에 여러 가지 대중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적 통치구역에도 반일회를 비롯한 대중단체들이 수많이 조직되었다.≫(혁명조직들의 확대)

1933년 4월 적은 인민혁명군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소왕청유격근거지에 대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하여 왔다. 이에 따라 치열한 소왕청방어전투가 전개되었다. 피어린 공방전에서 항일유격대와 근거지인민들은 400여명의 적을 소멸하고 적을 물리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유격대오의 성장과 무장투쟁의 강화)

1935년 3월 요영구에서 열린 조선인권혁명군 군정간부회의에서는 이 문제가 중요하게 토의되었다. 김일성주석은 이 회의에서 ≪유격구를 해산하고 광활한 지대로 진출하는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하였다. . . . 유격구를 해산하고 인민혁명군부대를 광활한 지대로 진출시키는 데 대한 방침은 무장투쟁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전술적 방침으로서 당시의 주객관적 조건들이 깊이 타산하고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의 반일혁명투쟁을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유일하게 정확한 방침이었다. . . . 북만에 진출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이곳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던 유격부대들과 밀접한 연계밑에 투쟁을 벌였으며 그 부대들은 여러 면에 걸쳐 지원해주었다. 김일성주석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우수한 지휘관들과 대원들을 북만의 유격부대들에 파견하여 그 부대들을 정치군사적으로 강화하도록 하였다.≫(조선인민혁명군의 광활한 지대로의 진출)

4) 항일무장투쟁의 확대발전, 무장투쟁의 둘째단계

김일성주석은 1936년 2월 남호두에서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에서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강화발전을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라는 역사적인 보고를 하였다. . . . 보고에서는 먼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국경지대로 진출시키며 투쟁무대를 점차 국내로 확대하는 데 대한 방침이 제시되었다. . . .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더욱 확대발전시키는 데 대한 방침이 제시되었다. . . . 당조직건설사업을 전국적 범위에서 적극 추진시키는 데 대한 방침이 제시되었다.≫(반일민족해방투쟁을 더욱 강화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방침)

김일성주석은 1936년 5월 5일 조국광복회의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회의는 김일성주석이 내놓은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규약, 창립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기관지로 ≪3·1월간≫을 발간할 것을 결정하였다. 조국광복회는 유일한 강령과 규약, 조직체계를 가지고 민주주의중앙집권제에 기초하여 활동하는 상설적인 통일전선조직이었다.≫(조국광복회 창건과 그 10대 강령)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많은 성원들은 백두산 일대의 넓은 지역에서 수많은 밀영들을 설치하였다. 백두산 밀영지들에는 지휘처, 병실, 무기수리소, 피복수리소, 병원, 출판소, 연락소 등이 있었다. . . . 밀영건설과 함께 지하혁명조직들을 결성하는 사업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무송일대와 장백현을 비롯한 압록강 연안의 넓은 지역에 당조직과 조국광복회 하부조직, 여러 지하혁명조직들이 수많이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백두산 주변일대는 형식상으로는 적통치밑에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영향밑에 반유격구, 혁명화된 지대로 전변되었다.≫(백두산 근거지의 창설)

김일성주석은 수많은 정치공작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며 당건설사업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 . . 공산주의혁명투사 김정숙여사와 권영벽, 김주현, 지태환, 박록금, 최희숙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공작원들이 압록강, 두만강 연안일대와 국내 깊이에 파견되었다. . . . 특히 김일성주석의 크나큰 신임을 받고 1937년 3월 중순 장백현 도천리일대에 나온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여사는 국내 신파지구와 장백현 하강구, 상강구 일대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 . . 1937년 1월 국내에 조국광복회 신파지회, 조국광복회 북청지구위원회, 조국광복회 풍산지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조국광복회 조직들이 묶어져 활동하였다. . . . 한때 공산주의자들을 몹시 배척하던 민족주의자들의 ≪독립군≫들이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지지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나중에는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되게 되었다. . . . 진보적인 천도교인들도 다수 조국광복회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풍산을 비롯한 여러 지방의 천도교인들은 자진하여 조국광복회조직을 결성하고 맹렬히 활동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은 1936년 12월에 국내당공작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국내의 전반적 당조직 건설사업에서 일꾼들이 자주적 입장을 철저히 지키도록 이끌었다. . . . 김일성주석은 1937년 5월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핵심들로서 당소조를 결성하였으며 국내 도처에 뿌리박은 조국광복회조직안에 당조직들을 결성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 . . 결과 짧은 시일안에 중요도시들과 탄광, 광산, 농어촌 등 여러 지역에 당조직이 꾸려지고 그에 대한 지도체계가 확립되었다. . . . 그리하여 조선인민혁명군 부대안의 당조직으로부터 지방당조직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의 통일적 지도밑에 움직이는 정연한 당조직지도체계가 확립되었다.≫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의 확대와 당건설사업의 적극적 추진)

김일성주석의 친솔밑에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일제가 ≪금성철벽≫이라고 호언장담하던 국경경비진을 뚫고 1937년 6월 4일 보천보를 공격하였다. 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용감하고 민활한 전투행동으로 적들을 쓸어눕히면서 경찰관 주재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순식간에 소탕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인민들 앞에서 일제침략자들의 흉악무도한 만행을 폭로규탄하면서 조선인민혁명군은 복수의 총검을 더욱 억세게 틀어잡고 기어이 조국을 광복하고야 말리라는 것 그리고 모두가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호소하는 역사적인 연설을 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의 지휘밑에 조선인민혁명군 연합부대는 6월 30일 간삼봉에 진출하여 대섬멸전을 벌여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다.≫(보천보전투)

김일성주석은 1937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 및 병사대회에서 한 연설과 같은 해 9월 중일전쟁 발발과 관련하여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새로운 정세에 대처한 투쟁임무를 명확히 밝혔다. 김일성주석은 일제의 취약성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하고 일제가 침략전쟁을 확대하면 할수록 자체의 멸망을 촉진시킨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 . .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1937년 8월의 장백현 신방자전투와 임강현 요강전투, 9월의 휘남현성전투, 10월의 무송-서강사이의 도로매복전투를 비롯하여 성시공격전, 습격전과 매복전, 군사시설파괴전을 과감히 진행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의 고전적 노작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우리 나라 공산주의자들과 인민들이 반일혁명투쟁을 발전시키는 데서 견지하여야 할 원칙적 입장과 전력전술, 당면한 임무와 투쟁과업들을 전면적으로 집대성한 강령적 문헌이었다. . . . 1937-1938년 겨울 몽강현 마당거우라는 깊은 산속에 설치한 밀영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집중적인 정치군사 학습과 훈련이 진행되었다.≫(중일전쟁발발 후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활동의 강화, 조선인민혁명군의 집중 학습과 훈련)

≪일제는 김일성주석의 지위밑에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적 배후교란작전을 위하여 백두산 근거지를 일시 떠난 틈을 타서 1937년 여름부터 1938년에 걸쳐 대검거선풍을 일으켜 권영벽, 이제순, 마동희, 박달동지들을 비롯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과 인민들을 검거투옥하였다. ≪혜산사건≫으로 불렸던 이 대검거사건은 그 규모로 보아 우리 나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책동에서 가장 큰 검사사건이었다. . . . 김일성주석은 1938년 11월 25일부터 12월 6일에 걸쳐 남패자에서 진행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에서 ≪열하원정≫의 좌경모험주의적 본질과 그 엄중한 후과들을 분석비판. . . 새로운 투쟁대책을 내놓았다. . . .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제2방면군은 김일성주석의 지휘밑에 몽강현으로부터 압록강 연안 북부국경일대를 향하여 행군길에 올랐다. 이리하여 고난의 행군으로 알려진 100여 일간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행군은 말할 수 없이 간고하였다. . . . 특히 항일의 여성영웅이며 불요불굴의 공산주의혁명투사인 김정숙여사청봉후방 밀영에 가서 노약자들과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 대한 명령을 받고 활동하는 과정에, 그 곳 후방 밀영에 있으면서 혁명임무수행에 태만하고, 견실한 혁명동지들을 모함하며, 혁명대열을 분열시키려고 책동하던 타락분자의 반혁명적 행위를 반대하여 견결히 투쟁함으로써 김일성주석의 절대적인 권위를 철저히 옹호하는 모범을 보였다. . . . 연대장이었던 오중흡동지김일성주석을 높이 모시면서 김일성주석의 명령지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한 치의 드팀도 없이 집행하곤 하였다. 그는 사령부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자기 연대를 사령부로 가장하고 적들을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김일성주석의 안전을 희생적으로 보위하였다. 고난의 행군과정에서 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더욱 단련되었으며 그 어떠한 역경속에서도 오직 혁명의 한길로 억세게 싸워나가는 공산주의투사로, 강철의 전사로 믿음직하게 자라났다. . . . 김일성주석은 1939년 4월 북대정자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고난의 행군에 대한 총화를 하고 당면한 투쟁과업을 제시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의 지도밑에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1939년 5월 18일 압록강 상류지대에서 국경을 넘어 국내에 또다시 진출하여 청봉의 수림속에 도착하였다. . . . 5월 19일 김일성주석의 영도 밑에 건창방향으로 이동하여 숙영하고 포태리방향에 파견되었던 소부대와 합세한 후 그 다음날에는 베개봉으로 이동하여 다시 숙영하였다. . . . 베개봉을 떠나 삼지연을 거쳐 100여 리의 ≪갑무경비도로≫를 대낮에 보무당당히 행군하여 순식간에 두만강가의 무포에 도착하였으며 대홍단지구로 진출하였다. . . . 대흥단지구에 진출한 인민혁명군 부대는 신사동과 신개척 일대를 장악하고 주민들속에서 정치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 . . 김일성주석의 지휘밑에 인민혁명군부대는 5월 23일 대흥단벌에서 적들에 대한 대섬멸전을 벌여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고난의 행군과 무산지구 진출)

≪인민혁명군은 일제가 1938년 7월 하싼호 지역에서 쏘련에 대한 무력침공을 하였을 때 적의 배후에서 적극적인 교란작전을 벌였던 것처럼 놈들이 1939년 5-9월 할힌골 지방에서 반쏘적인 대규모적 무장도발을 또다시 일으켰을 때에도 국제주의기치를 높이 들고 적의 배후를 연이어 타격함으로써 적의 군사행동을 견제하고 계급적 형제인 쏘련인민들을 돕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이 짠 활동계획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두만강연안의 여러 곳에서 적들을 들이치면서 일제를 유인하여 화룡현일대의 산발과 골짜기에 몰아넣고는 순식간에 북쪽으로 수백 리를 진군하여 돈화현 오지에 이르렀다. 돈화오지에 진출한 인민혁명군 부대는 1939년 12월 육과송을 불의에 치고 뒤이어 쟈신즈를 공격하여 커다란 승리를 이룩하였다. 육과송과 쟈신즈의 목재소 노동자들 속에서 입대를 탄원해나선 200여 명의 선진적 노동자들이 인민혁명군 부대에 입대하였다. . . . 적들은 . . . 허둥지둥 돈화쪽으로 모여들었으나 그 때에는 벌써 인민혁명군 부대가 남쪽으로 빠져 안도-무송현경 송화강 유역에 이른 뒤였다. . . . 김일성주석은 집중적인 정치군사학습을 통하여 인민혁명군 대오의 전투력을 더욱 강화한 다음 1940년 2월 부대를 인솔하고 백석탄을 떠나 이미 정한 노정을 따라 무산지구 대안에 진출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1940년 3월 일제의 ≪토벌대≫가 둥지를 틀고 있는 국경지대의 적 본거지의 하나인 대마록구를 공격하고 적을 소탕한 다음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대마록구에서 참패를 당한 적은 다시 역량을 수습해 가지고 대마록구 산발들을 뒤졌으나 그 때에는 부대가 이미 화라즈밀림속에 깊이 들어가서 숙영하고 있었다. . . . 김일성주석은 추격해 오는 적들을 결정적으로 타격할 것을 결심하고 1940년 3월 일제의 가장 강한 ≪정예부대≫로 알려진 ≪마에다부대≫를 순식간에 전멸시킨 홍기하전투를 조직지휘하였다. . . . 홍기하전투 후 인민혁명군 부대는 봄과 여름에 걸쳐 안도, 화룡, 연길, 돈화 일대를 선회하면서 민활한 작전들을 벌였다. . . . 대부대선회작전은 적의 20만 대군의 대포위작전을 여지없이 짓부시고 놈들에게 심대한 정치군사적 패배를 주었으며 이르는 곳마다에서 인민들에게 조국광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안겨주었다.≫(백두산 동북부에서의 대부대선회작전)

5)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투쟁, 항일무장투쟁의 셋째단계

김일성주석은 1940년 8월 소할바령에서 열린 조선인민혁명군정간부회의에서 한 보고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할 데 대하여≫에서 새로운 투쟁방침을 제시하였다. 김일성주석은 파쑈국가들에 의하여 침략전쟁이 세계적 범위에서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는 것과 일제가 침략전쟁을 확대해 나감으로써 국제국내적으로 더욱 고립되며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깊이 빠져들어 간다는 것을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이러한 정세하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은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밝혔다. . . . 조선인민혁명군이 대부대활동을 중지하고 소부대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조선혁명의 전망에 비추어서 뿐만 아니라 세계혁명의 견지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 김일성주석은 이 새로운 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소부대와 정치공작소조들을 편성하고 첫째로, 대중정치사업을 강력히 조직전개하며 둘째로, 조선과 만주의 광활한 지대에서 소부대군사활동을 영활하게 전개하며 셋째로, 매개 전사들과 지휘간부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더욱 튼튼히 준비시키며 넷째로, 세계의 모든 혁명역량과의 연대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는 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였다.≫(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하기 위한 투쟁방침)

김일성주석은 소할바령회의 후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집중적인 군사정치훈련을 위한 사업을 포치하는 한편 조선인민혁명군의 소부대활동을 조직영도하였다. 수많은 소부대, 소조들이 편성되어 국내와 만주 각지에 파견되었다. . . . 소부대들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적의 병영의 중요경비지점, 군용열차와 군용도로 등을 연속 기습파괴하였다. . . . 정치공작소조들은 우리 나라 국경지대에는 물론 함경남북도의 여러 지방과 평안남북도일대 그리고 중부 및 남부 조선의 여러 지역들에 파견되었으며 만주일대일본에까지 파견되었다.≫(광활한 지대에서의 소부대활동)

김일성주석의 역사적인 연설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는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하며 해방된 다음 새 조국건설에서 중요한 임무들을 담당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함에 있어서 강령적인 문헌으로 되었다. 전체 인민혁명군 지휘원들과 대원들은 김일성주석의 연설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군사정치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 . . 군사교육과 훈련에서는 우선 유격전쟁의 경험과 전술을 더욱 깊이 체득시키기 위한 교육과 훈련이 실시되었다. . . . 이와 함께 현대전의 전법을 습득시키기 위한 군사과학기술적 문제들이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정규군의 기본병종훈련과 여러 가지 특수병종훈련이 진행되었다.≫(조선인민혁명군의 군정훈련)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적 영향이 빨리 확대되고 조선인민혁명군 소조들과 정치공작원들, 혁명조직들의 대중정치사업의 강화되고 일제가 모든 전선에서 패전을 거듭함에 따라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전인민적 항쟁준비태세가 튼튼히 갖추어져 갔다. . . . 1943년에는 정치공작원들과 조국광복회조직성원들에 의하여 각성된 혁명적 노동자들과 인민들이 김일성주석의 이름을 딴 비밀조직인 ≪김일성대≫를 결성하였다. . . . 인민들은 김일성주석을 ≪독립후의 조선의 최고지도자≫, ≪장래 조선의 대통령≫, ≪대원수≫로 높이 우러러 모시면서 김일성주석의 영도밑에 조국이 광복되고 융성발전될 앞날을 희망에 차서 내다보고 있었다. . . . 1944년 여름 평양에서는 ≪조국해방단≫이 조직되어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의 넓은 지역에서 맹렬히 활동하였다. . . . 1943∼1945년 시기에 평안북도일대와 강원도일대, 풍산을 비롯한 함경남도 지방들과 회령을 비롯한 함경북도의 여러 지방들에서도 무장봉기조직들이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 . . 함경북도 성진시의 선진적 청년학생들은 김일성주석이 활동하는 백두산이 조선혁명의 근거지라는 취지에서 ≪백두산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투쟁하였다. . . . 반일봉기를 위한 투쟁은 일본에 가있던 조선인청년학생들 속에서도 광범히 벌어졌다. 또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과의 연계밑에 무장봉기를 일으키기 위한 준비는 일본군대에 강제징집된 조선청년들은 1944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에 참군한 것을 결의하고 병영에서 탈주하였다. . . . 1942년 7월 홍남비료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1943년 6월과 1944년 6월 두 차례에 걸치는 성진고주파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비롯하여 중요군수공장들에서 파업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또한 일제의 전시생산시설에 대한 방화파괴투쟁과 폭동 등 보다 적극적인 투쟁도 벌였다. . . . 전국각지에서 교원들과 학생들의 비밀결사사건과 동맹휴학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으며 징병과 징용, 강제동원을 반대하는 청장년들의 투쟁도 힘차게 벌어졌다.≫(전인민적 항쟁태세의 강화)

6) 항일무장투쟁의 위대한 승리

≪1945년 5월 9일에 파쑈독일은 드디어 무조건 항복하고야 말았다. . . . 김일성주석은 임의의 시각에 최후공격작전에 나설 수 있도록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의 전투서열을 완성하는 등 모든 사업을 빈틈없이 추진시켰다. . . . 김일성주석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의 공중낙하지점들과 활동구역들, 상륙지점들과 진격방향들을 확정하고 이에 해당한 역량배치계획을 구체적으로 짰으며 쏘련군대가 대일전쟁에 참가할 때 그와 협동작전을 벌일 계획도 세웠다. . . . 김일성주석은 전면적 공격작전에 앞서 위력정찰을 목적으로 1945년 8월 8일 조쏘국경지대인 우리 나라의 선봉군(웅기군) 토리에 대한 습격전투를 조직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은 드디어 1945년 8월 9일 조선인민혁명군 전체 부대에 조국해방의 최후공격작전을 개시하는 데 대한 전투명령을 내렸다. . . . 김일성주석의 명령을 받은 조선인만혁명군 부대들은 총공격으로 넘어가 대일작전에 참가한 쏘련군대와 긴밀한 연계를 취하면서 질풍같이 진격하였다. . . . 아군부대들은 일거에 두만강을 도하하여 은덕(경흥)일대와 새별(경원)일대로 진격하였으며 넓은 지역을 해방하였다. 다른 부대들은 선봉에 상륙하여 전투활동을 확대하면서 나진, 청진으로 계속 진격하였다. . . . 최후공격작전에는 이미 국내 도처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 그 지도밑에 조직된 인민무장대들, 무장조직들과 광범한 인민대중이 적극 참가하였다. . . .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 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에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인민혁명군 대원들과 정치공작원들은 각지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과 인민대중을 묶어세우면서 공산당조직들과 지방정권기관들을 내오는 사업을 지도하였다. 일제의 식민지통치기구는 종국적으로 청산되고 최후발악하던 일제의 저항이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최후공격작전)

≪항일무장투쟁의 승리는 무엇보다도 김일성주석의 주체사상과 주체적 혁명노선의 빛나는 승리였다. . . . 또한 김일성주석의 탁월한 군사력과 유격전술의 빛나는 승리였다. . . . 또한 김일성주석이 내놓은 혁명적 군중노선과 혁명적 사업방법, 인민적 사업작풍에 기초하여 조선인민혁명군과 인민대중의 혈연적 연계가 튼튼히 보장되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 . . 조선인민혁명군은 세계 혁명적 인민들과의 전투적 단결과 국제주의적 연대성을 강화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의 승리를 이룩하였다.≫(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의의)

≪그 역사적 의의는 첫째로, 이 투쟁이 우리 인민의 혁명투쟁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발전시켰으며 민족해방의 역사적 위업을 빛나게 실현하고 새 사회 건설의 넓은 길을 열어놓았다는 데 있다. . . . 둘째로, . . . 조선혁명을 앞으로 힘차게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이 튼튼히 꾸려졌다는 데 있다. . . . 셋째로, . . . 항일혁명투쟁의 거세찬 불길속에서 우리 당과 인민이 영원히 계승발전시켜야 할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이 이룩되었다. 넷째로, . . . 항일무장투쟁의 국제적 의의는 무엇보다 먼저 그것이 주체의 기치밑에 진행되는 혁명의 새로운 길을 밝혀주었다는데 있다.≫(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의의)

2. 새 조국 건설. 조국해방전쟁

1)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수행

≪이어 1945년 10월 10∼13일에 평양에서 당창립대회가 열렸다. 김일성주석은 대회에서 ≪우리 나라에서의 맑스-레닌주의 당건설과 당의 당면과업에 대하여≫라는 역사적인 보고를 하였다. 보고에서는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창설안이 제기되고 당의 조직노선과 정치노선이 천명되었다. . . . 보고에서 천명된 당의 정치노선은 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기본정치과업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4대 당면과업을 밝혔다. . . . 당의 정치노선에는 이와 함께 북조선을 부강한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설을 위한 강력한 민주주의적 기치, 혁명적 민주기지로 만드는 데 대한 당의 정치과업이 천명되었다. . . . 이 민주기지노선, 혁명적 민주기지노선은 세계반동의 원흉인 미제와 직접 맞서게 된 어렵고 복잡한 환경에서도 혁명을 주동적으로, 진공적으로 추진시켜 나갈 수 있게 하는 아주 현명한 노선이었다.≫(주체형의 혁명적 당, 공산당의 창건)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 대표들의 협의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 . . 김일성주석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인민정권의 수립)

토지개혁의 결과 l00만 325정보의 토지간 몰수되어 72만 4,522호의 농민들에게 98만 1,390정보의 토지가 무상으로 분여되었다. 그리하여 토지개혁전에는 자작농 20%, 자작 겸 소작농이 30%, 순소작농이 50%이던 것이 토지개혁후에는 농민의 100%가 자작농으로 되었다.≫(민주개혁의 성과적 수행)

≪1946년 7월 29일에 열린 북조선공산당 및 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확대연석회의에서 두 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을 창립하는 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 . . 지방 당조직들의 통합에 기초하여 1946년 8월 28일 평양에서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가 열렸다. . . . 1946년 7월 22일 평양에서는 북조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회의가 소집되어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북조선 민전에는 3개의 정당(즉 노동당, 민주당, 천도교청우당)과 직업동맹, 농민동맹, 민주청년동맹, 민주여성동맹을 비롯한 10여개의 사회단체가 망라되었다.≫(공산당과 다른 근로자당들의 합당)

2) 사회주의혁명단계로의 이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

≪첫 민주선거의 승리에 기초하여 1947년 2월 17일 평양에서 북조선 도, 시, 군 인민위원회대회가 소집되었다. . . .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우리 나라에서의 첫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이었다. 이 정권이 수립됨으로써 북조선에서 혁명은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들어서게 되었다.≫(북조선인민위원회의 수립.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개시)

1947년에 국영공업총생산액계획은 102.5%로 초과수행되었으며 그 전해에 비하여 공업생산이 70%이상 늘어났다. . . . 1948년 인민경제계획도 성과적으로 완수되었다. 국영 및 협동단체 공업총생산계획은 102%로 초과완수되었으며 1947년에 비하여 공업생산이 50.6%나 더 증가하였다. . . . 1948년에 알곡수확고는 전년보다 60만톤이나 증수되어 해방전 최고수준이었던 1939년 수준을 110.4%로 능가하였다.≫(인민경제의 부흥발전)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 미, 영 3국외상회의에서 미국대표는 남북조선에서 일정한 기간(결국 얼마나 계속될 지 모르는 기간) 미군과 쏘련군의 군정을 실시하며, 그것이 끝난 다음 5년간 4개국(소, 미, 영, 중화민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며, 필요에 따라 그 기간을 다시 5년 연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미국제안은 조선에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방해하고 식민지통치제도를 세우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쏘련대표는 미국의 제안을 반대하고 조선에서 곧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들에 의한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연합국은 이것을 돕기 위하여 5년간의 후견제를 실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회의에서는 결국 미국안은 부결되고 쏘련안이 채택되었다. . . . 우리 인민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 관철된다면 미제의 침략야망을 보다 쉽게 꺾어놓을 수 있으며 또 우리 인민이 건국사업을 잘해 나간다면 5년간의 후견기간을 능히 단축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촉진할 수 있으리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미제는 5년내에 조선반도에 통일적 자주독립국가가 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결정을 반대하는 데로 나아갔다. 당시 미국대통령 트루만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국무장관 번즈가 미국정책에 어긋나는 결정을 받아가지고 왔다고 하여 그를 즉시에 파면시키고 이것을 신호로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 하지모스크바3상회의결정 집행을 계획적으로 방해하고 나섰다. 그는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제기한 미국측 방안은 감추고 조선사람들이 3국외상회의 결정을 반대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거듭 공언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상 반동세력들에게 동 회의결정을 반대하는 이른바 ≪반탁운동≫을 사촉하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 . . 1947년 1월에는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친일, 친미파, 민족반역의 무리들이 남조선반동의 두목 이승만을 고문으로 하는 ≪반탁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쏘미공동위원회의 재개를 반대하여 시위를 조직하였으며 7월에는 민전 의장단성원이며 근로인민당 당수였던 여운형과 기타 애국적 인사들에 대한 테러행위를 감행하였다.≫(민족분열의 위기의 격화. 4월남북연석회의)

≪미제침략자들은 남조선인민들의 온갖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말살하기 위한 여러가지 악법들을 만들어냈다. . . . 미제는 1946년 5월에는 이른바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을 날조하여 공산당본부를 습격하였으며 당기관지인 ≪해방일보≫를 강제폐간시켰다. . . . 미제는 1946년 8월 강제공출을 반대하는 전라남도 하의도의 농민들을 야수적인 방법으로 진압하고 학살하였으며 광주에서는 8.15해방 1주년기념시위를 하는 화순탄광노동자들을 비행기, 탱크까지 동원하여 수많이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 . 미제는 1945년 9월에 공포한 ≪군정법령≫ 제2호 ≪적산에 관한 건≫을 비롯한 일련의 ≪법령≫들을 발포하여 일본국가, 일본인에게 소속되었던 철도, 선박, 체신시설, 금융기관, 토지, 관개시설, 주택, 창고, 점포, 재고상품 및 기타 모든 재산을 ≪적산≫이라는 이름밑에 ≪접수≫하고 ≪미군정청≫의 소유로 만들었다. . . . 미제가 빼앗은 재산 가운데는 24개의 기본생산부문을 망라한 공장, 기업소들과 32만여정보의 토지가 들어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남조선재산총액의 80%이상에 달하는 방대한 것이었다. . . . 1946년 9월부터 4만여명의 남조선 철도노동자들은 식량보장과 임금인상, 미군정의 온갖 폭압의 즉시중지,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의 실시를 요구하여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철도노동자들의 총파업에 호응하여 남조선의 각 산업부문 30여만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였으며 학생들과 사무원, 시민들도 노동자들의 투쟁에 합세하였다. . . . 10월 1일 대구에서 군중들에 대한 무장경찰들의 발포를 계기로 폭발한 인민항쟁은 점차 남조선 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항쟁군중들은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 반대!≫, ≪정권은 인민위원회로로!≫, ≪북조선과 같은 민주개혁을 실시하라!≫ 등의 구호를 들고 힘차게 싸웠다. . . . 인민항쟁은 두달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며 여기에는 약 230만명의 애국적 인민들이 참가하였다.≫(민족분열의 위기의 격화. 4월남북연석회의)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는 온 민족의 관심속에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개막되었다. 회의에는 극우반동을 제외한 남북조선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가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은 회의에서 한 ≪북조선정치정세≫라는 역사적인 보고에서 나라에 조성된 정치정세를 깊이 분석하였으며 온 민족이 통일단결하여 남조선에서의 망국단선을 분쇄하고 통일적 민주주의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하는데 대한 과업을 천명하였다. . . . 회의에서는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열렬한 토론들이 벌어졌으며 4월 23일에는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호소문 ≪전조선동포에게 격함≫이 채택되었다.≫(민족분열의 위기의 격화. 4월남북연석회의)

1948년 1월 8일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남조선에 들어와 5월에 남조선에서 저들의 감시밑에 단독선거를 실시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였다. . . .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은 물러가라≫, ≪미군은 즉시 철거하라≫, ≪남조선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라는 애국적 구호를 외치면서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등 200여만의 각계각층 애국적 인민들이 떨쳐나서 파업, 시위투쟁을 벌였다. 남조선의 식민지통치체계는 완전한 마비상태에 빠졌다. . . . 제주도를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곳에서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제주도인민들은 무장으로 반동경찰을 제압하고 ≪선거≫를 완전히 분쇄해 버렸다. 바빠맞은 남조선반동들은 대구, 함양 등지에서는 강제적으로 인민들을 ≪선거장≫에 끌어냈으나 참가율은 겨우 10∼30%에 지나지 않았다. . . . 이와 같이 남조선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에 의하여 미제가 강압실시한 5.10단선은 사실상 완전히 파탄되었다.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실패한 ≪선거결과≫를 날조하여 1948년 5월 31일 ≪국회≫를 조작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투표없이 ≪당선≫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이른바 남조선 ≪정부≫를 꾸며냈다.≫(민족분열의 위기의 격화. 4월남북연석회의)

김일성주석은 우리 조국에 조성된 정치정세와 우리 혁명발전의 성숙된 요구를 깊이 통찰하여 1948년 6월 29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를 소집하였다. 김일성주석은 회의에서 지체없이 전조선적인 통일적 중앙정부를 세우는 데 대한 현명한 방침을 내놓았다. . . . 남북조선 전지역에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는 1948년 8월 25일 온 민족의 비상한 열의와 감격 속에서 진행되었다. 북반부지역에서는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유권자의 99.97%가 참가하여 98.49%의 찬성투표로서 212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 . . 미제와 국내반동들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인민들은 높은 애국적 열의와 구국항쟁의 투지를 가지고 선거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전체 유권자의 77.52%에 해당하는 673만 2,407명이 선거에 참가하여 1,080명의 대표를 선출하였다. . . . 역사적인 남북총선거에 기초하여 1948년 9월 2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는 남북조선에서 선거된 572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였다. 김일성주석은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으로, 국가수반으로 추대되었으며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을 발표하였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

≪북조선노동당이 창립된 후 당대열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가 소집될 때에는 당원수가 70여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경제적 위력의 강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

≪공업생산에서 1949년도 계획이 102.8%로 초과수행되어 1946년에 비하여 336.7%로 성장되었다. 공업생산액에서 사회주의경제형태가 차지하는 비중은 90%이상으로 성장하였고 1947년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수공업자들의 생산합작사(생산협동조합)가 빨리 늘어났다. 기계공업과 경공업이 새로 창설되기 시작한 것은 가장 중요한 성과의 하나였다. 기계생산은 1944년에 비하여 1949년에 벌써 246.9%로, 경공업생산은 152.7%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시기에는 만들지 못하던 공작기계류들을 생산하게 되었고 500톤급 철갑선과 240마력 열구기관도 생산해 내었다. 농촌경리에서 혹심한 한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8년에 알곡총수확고는 1946년에 비하여 140%나 더 늘어났다. 그리하여 알곡이 몹시 모자라던 북반부는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지대로 전변되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경제적 위력의 강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

≪영웅적 노동계급은 1950년초흥남비료공장 노동자, 사무원들의 호소에 따라 1950년도 계획을 4개월 앞당겨 8월 15일까지 완수하기 위한 노력투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 당초에 예견된 2개년 계획을 1950년도 상반기에 기본적으로 완수하는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경제적 위력의 강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

1948년 2월 조선인민혁명군이 정규적 혁명무력인 조선인민군으로 강화발전되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경제적 위력의 강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

1948년 10월에 여수주둔 ≪국방군≫ 제14연대의 애국적 병사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제주도인민항쟁을 진압하라는 동원령을 받은 14연대 병사들은 동족살육에 내모는 정권의 배족행위에 분격하여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단연 폭동에 궐기하였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경제적 위력의 강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

김일성주석은 이 엄중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남조선노동당을 북조선노동당에 합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주석의 지도밑에 1949년 6월 30일 평양에서는 남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연합전원회의가 열렸다. . . . 회의에서는 남북조선 노동당을 합당하고 조선노동당의 창건자이며 영도자인 김일성주석을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높이 추대하였으며 김일성주석을 수반으로 하는 유일적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경제적 위력의 강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

1949년 6월 26일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정식으로 결성되었으며 여기에는 남조선민전에 들어있지 않던 24개의 남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들이 새로 가입하여 북과 남의 70여개의 정당, 사회단체들이 망라되게 되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경제적 위력의 강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

미제와 이승만정권은 1949년 한해 동안에만도 38도선에서 무려 2,617차례의 무장침습을 감행하였다. . . . 1948년 11월에 악명높은 ≪국가보안법≫을 조작한 후 각종 살인악법들을 연거푸 날조하고는 애국적 인민들에 대하여 전대미물의 테러적 폭압을 가하였다. . . . 인민유격대에 대한 ≪토벌≫은 후방안정을 위하여 나선 가장 선차적인 전략적 임무로 간주되었다. . . . 미제와 이승만정권은 애국적 인민들에 대한 파쑈적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국방군내에서도 ≪숙청≫소동을 미친듯이 벌었다. . . . 1949년부터 미국의 군사비가 평화시기의 군사비로서는 미국역사상 최고수준에 도달하였고 병력도 미증유로 확장되었다. . . . 일본을 조선침략의 전초기지, 후방기지로 전변시키기 위하여 미제는 무엇보다 먼저 일본의 민주화를 규정한 포츠담선언을 휴지장으로 만들고 일본군국주의세력을 부활시켰다. . . . 1950년초에 들어서면서 기계공업, 화학공업을 비롯한 적지 않은 일본의 공장, 기업소들이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의하여 군수공장으로 전환하고 군수품을 생산하였다.≫(미제와 남조선정권의 전쟁준비, 군사기지화정책의 강화)

미제는 비밀소조들을 조직하여 유엔담당 국무차관보의 지도밑에 유엔에 ≪제소≫할 사기문건의 초안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쟁도발을 구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조선문제에서 손을 뗄 것이라는 허위성 명문도 만들어놓았다. . . . 미제는 이처럼 미국이 남조선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듯이 가장하는 동시에 한창 ≪북벌≫소동에 열을 올리고 있던 남조선정부에게도 ≪실지회복≫에 대해서 더는 떠들지 말고 조용한 자세를 취하도록 명령하였다. . . . 이승만정권의 고립은 ≪5. 30선거≫에서의 대패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선거≫는 이승만의 직접적인 감독밑에 30명의 반대파 입후보를 가두어 놓고 인민들에게 가혹한 파쑈테러를 감행하는 공포속에서 진행되었으나 이승만의 지지자는 210석 가운데 겨우 47석밖에 차지하지 못하였고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이승만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 . . 트루만은 이승만의 급보와 요청에 대하여 신속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승만≪정부≫의 붕괴를 막아주지 않는다면 남조선에 ≪미국정책에서 독립된 중간파정당≫이나 ≪중간파대통령≫이 출현하는 것을 방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국무성고문이며 ≪전쟁상인≫으로 알려진 덜레스를 특사로 남조선에 급파하는 한편 국방장관 죤슨과 합동참모본부의장 브랫들리를 도꾜에 보내 맥아더와 더불어 전쟁도발에 필요한 모든 절차들을 최종적으로 검열하고 전쟁도발 날짜를 확정하도록 하였다.≫(전쟁전야의 긴박한 정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의 강화)

1950년 6월 1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국가주권기관들 측으로부터 평화적 조국통일에 대한 대책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여부를 토의하는 데 대한 6월 16일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의 요청을 접수하고 ≪평화적 조국통일추진에 관하여≫라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 결정서는 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국회≫를 단일한 전조선입법기관으로 연합하는 방법으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며 전조선입법기관은 헌법을 채택하고 정부를 구성하며 헌법에 기초하여 앞으로 전조선입법기관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 . . 이 제의는 당시 전체 조선인민을 매우 격동시킨 가장 적극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이었으나 미제와 이승만정권은 이것도 묵살하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이미 계획된 전쟁의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전쟁전야의 긴박한 정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의 강화)

≪여기에 또 하나의 요인이 첨가되어 미제와 이승만정권은 서둘러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 요인이란 이른바 ≪대만위기설≫이었다. . . . 이 결정을 현지에서 집행하기 위하여 트루만의 명령을 받고 국방장관 죤슨과 합동참모본부의장 브랫들리 그리고 국무성고문 덜레스가 트루만의 특사로 도꼬에 날아와 맥아더와 더불어 비밀회담을 가졌다. ≪도꾜4자회담≫으로 불린 이 회담에서는 일본과 남조선간의 ≪강화조약≫문제를 협의한다는 공식성명과는 달리 실제상 ≪조선전쟁문제≫를 중심의제로 토의하였으며 ≪새로운 적극적 정책(전쟁도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전쟁전야의 긴박한 정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의 강화)

3) 조국해방전쟁

미제와 이승만정권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공화국정부의 합리적인 방안들을 거부하고 1950년 6월 25일 끝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국방군은 이날 새벽 38선전역에서 침공을 개시하여 해주, 금천, 철원 일대에서는 북반부 영역에 1∼2키로미터까지 쳐들어왔다. . . . 김일성주석은 6월 25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와 내각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적들의 무력침공을 격퇴하기 위한 대책들이 토의되었다. 인민군부대들과 경비대들에게 적들의 진공을 저지시키고 즉시 결정적인 반공격으로 넘어가는 데 대한 명령이 내려졌다. . . . 미제가 도발한 전쟁은 한마디로 말하여 세계제패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는 침략전쟁이었다. 반면에 미제와 이승만정권의 무력침공을 반대하는 조선인민의 전쟁은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이었다. . . . 김일성주석은 6월 26일 전체 인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을 전쟁승리로 조직동원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방송연설을 하였다. . . . 전쟁개시후 불과 수주일 동안에 84만 9,000여명의 청년학생들이 전선출동을 탄원하여 나섰으며 노동계급은 노동자연대를 조직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 . . 김일성주석은 적의 무력침공을 좌절시키고 신속히 반공격으로 넘어가 미제침략자들이 대병력을 증강하기 전에 높은 기동력과 연속적인 타격으로써 적의 기본집단을 짧은 시일안에 격멸소탕하고, 공화국 남반부 인민들을 해방하는 데 대한 전략적 방침을 제시하였다. . . . 인민군부대들은 충천한 기세로 적을 무찌르면서 진격하여 6월 28일에는 미제의 식민지통치의 거점이며 반동의 소굴인 서울을 완전히 해방하였다. 서울시민들과 해방된 지역 인민들은 손에 손마다 공화국기를 들고 거리에 떨쳐나서 인민군대를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 . . 7월 5일 미제의 선견대로서 오산계선에 진을 치고 있던 보병과 포병 두개 대대는 인민군과 조우하는 첫 순간에 격멸되고 말았다. . . . 7월 20일 새벽 인민군 보병연합부대들은 탱크연합부대와의 긴밀한 협동작전으로 대전시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 . . 대전을 지키고 있던 미군 제24사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사단장 딘은 전사복으로 갈아입고 도망치다가 생포되었다. . . . 최고사령관의 적극적인 작전적 방침과 전선지도에 무한히 고무된 인민군장병들은 적들을 포위소멸하면서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였으며 7월말∼8월초에 걸쳐 적들을 낙동강 좌안으로 완전히 구축하였다. 적들은 포항-대구-마산계선의 100평방키로미터의 좁은 지역안에 갇혀 발악하였다. . . . 이렇듯 인민군대는 반격을 개시한 지 불과 1개월반 동안에 적들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고 남반부 전지역의 90% 이상에 달하는 넓은 지역과 남반부 총인구의 92% 이상을 미제의 식민지통치에서 해방하였다.≫(조국해방전쟁의 개시. 남반부 넓은 지역의 해방)

≪이른바 ≪총공세≫에 동원된 적병력은 28만여명이었으며 4,700여문의 포와 970여대의 탱크, 1,800여대의 비행기, 300여척의 함선이 망라되었다. 적들은 9월 중순5만여명의 병력수백척의 함선, 1,000여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대규모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 . . 인천의 관문인 월미도 방어를 담당한 인민군 용사들은 비할 바 없이 우세한 적들과 싸워 적의 상륙계획을 지연시켰으며 인천, 서울지구 방어를 맡은 인민군부대들은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희생적으로 싸운 결과 적들의 공격을 14일간이나 막아냈다. . . .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인 김일성주석은 조성된 군사정치정세를 과학적으로 통찰한 데 기초하여 전쟁 제2단계의 전략적 방침을 제시 . . . 우리 당의 전략적 방침은 적들의 진공속도를 최대한으로 지연시키면서 시간을 쟁취하여 인민군주력부대들을 구출하고 새로운 후비부대들을 편성하여 강력한 반공격집단을 형성하며 계획적인 후퇴를 조직하는 것 . . . 38도선 계선과 원산, 양덕 일대의 방어전투들에서 얻은 고귀한 시간을 이용하여 낙동강계선에 진출하였던 인민군 연합부대들은 적을 후면으로부터 타격하면서 조직적인 후퇴를 진행하여 적의 포위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으며 600∼700키로미터의 장거리 후퇴를 성과적으로 수행하였다. . . . 미제에 의하여 우리 인민이 학살된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황해도 한 도에서만도 12만명 이상이 학살되었고 황해남도 신천군에서는 전체 주민의 4분의 1인 3만 5,000여명이 학살되었으며 이 군의 일부 리에서는 주민의 87%가 희생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일시적으로 강점된 다른 도들에서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 . . 적의 강점지역 인민들은 유격투쟁을 조직전개하는 데 대한 김일성주석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원쑤들을 복수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였다. . . . 김일성주석은 새로운 반공격준비를 위하여 한편으로는 인민군부대들을 전반적으로 정비하고 확대강화하며 다른 편으로는 적후에서의 대규모적인 배후작전을 조직전개하는 데 대한 방침을 내놓았다. . . . 김일성주석은 새로운 반공격을 준비하면서 정규군의 연합부대들로 적후에 강력한 제2전선을 형성하는 사업을 조직영도하였다. . . . 김일성주석이 제시한 적의 깊은 종심에서 정규군의 연합부대들로 제2전선을 펴고 적을 앞뒤에서 타격하는 데 대한 방침은 전례없는 완전히 새로운 방침이었다 이 방침은 인민군 연합부대들이 적후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적들의 기동을 마비시키며 적을 대포위환 속에 몰아넣고 소멸하게 하는 영활한 방침이었다.≫(조선인민군의 전략적 후퇴와 반공격준비)

1950년 10월 하순부터 전쟁은 제3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 . . 제3단계의 전략적 방침은 적의 공격을 좌절시키고 빠른 시일안에 반공격으로 넘어가 적들을 38도선 이남으로 몰아내면서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적의 역량을 소멸약화시키는 한편 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우리의 역량을 튼튼히 갖추는 것이었다. . . . 전선 동부의 아군연합부대들은 적을 좁은 지역으로 압축하면서 맹렬한 타격을 가하였다. 살아남은 적들은 황급히 흥남항을 통하여 12월말까지 도주하였다. 이로써 38도선 이북의 전지역이 해방되었으며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던 적들의 ≪총공세≫는 완전히 파탄되고 ≪12월의 총퇴각≫이 시작되었다. . . . 미제의 핵공갈도, ≪긴급사태선언≫도, ≪정전≫의 기만극도 패전의 운명을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아군 연합부대들은 적을 계속 추격하여 1951년 1월초에는 적을 37도선으로 몰아냈다. . . . 인민유격대들은 최고사령관 김일성주석이 제시한 유격투쟁방침에 따라 무엇보다 먼저 적의 지휘부와 기관, 유생역량을 기습, 소탕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였다. . . . 1951년 1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가 소집되어, 인민생활안정을 위한 여러 가지 대책들이 세워졌으며 그에 기초하여 내각결정들이 채택되고 구체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 . . 1951년 1월 내각전원회의에서는 ≪조국해방전쟁에서 희생된 인민군장병 및 빨치산들과 애국열사들의 유자녀학원설치에 관한 결정서≫가 채택되었으며 이에 따라 각 도 및 중요 도시들에 유자녀보육원과 유자녀학원 및 전쟁고아들을 위한 초등학원이 설치되어 4월 1일부터 일제히 수업을 시작하였다. . . . 농민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의하여 1951년도 밭갈이와 봄씨붙임을 평화시기보다 10∼15일이나 더 앞당겨 끝냈다. 공업생산을 보장하기 위하여 파괴된 생산시설을 복구정비하며 공장, 기업소들을 지하에 차려놓고 전시생산을 보장하기 위한 사업도 세차게 벌어졌다. . . .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238호 ≪비행기사냥꾼조를 조직하는 데 대하여≫에 의하여 저격무기로 무장한 비행기사냥꾼조가 광범히 조직되었으며 고사포부대들의 활동도 강화되었다. . . . ≫(전국의 근본적 전환, 조선인민군의 반공격)

1951년 6월에 이르러 전선은 기본적으로 38도선계선에서 고착되었다. 이에 따라 전쟁은 제4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 . . 전쟁 제4단계의 전략적 방침은 적극적인 진지방어전을 벌여 이미 차지한 계선을 견지하고 적을 끊임없이 타격소멸하는 한편 시간을 쟁취하여 인민군대의 전투력을 한층 강화하고 후방을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위한 모든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 . . 짧은 기간에 전연과 동서해안에 갱도를 기간으로 하는 튼튼한 방어체계가 완성되어 우리의 진지는 철벽의 요새로 전변되었다. . . . 1951년 7월 10일부터 정전담판이 시작되었으나 미제의 부당한 주장으로 말미암아 담판은 제대로 진척될 수 없었다. . . . 1211고지 방위자들과 우리 인민들이 발휘한 이러한 대중적 영웅주의는 김일성주석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표시였다. 탁월한 군사전략가인 김일성주석의 정확한 작전적 방침과 현명한 영도, 무한히 충직한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에 의하여 미제의 ≪하기 및 추기 공세≫는 1951년 11월 초순에 완전히 격파되고 말았다. . . . 습격조, 비행기사냥꾼조, 탱크사냥꾼조, 저격수조 등의 활동은 김일성주석이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창조한 독창적인 전법을 현대전의 요구에 맞게 발전풍부화시킨 주체의 전법들로서 방어전연에 있는 적의 활동을 구속할 뿐 아니라 적후 종심 깊이에 있는 적들의 유생역량과 전투기술기재를 소멸함으로써 적의 작전을 파탄시킬수 있게 하는 적극적인 전법이었다. . . . 김일성주석은 전시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전국농민열성자대회와 산업운수부문전국열성자대회를 비롯한 인민경제 각 부문별 열성자대회를 소집하고 노동자, 농민들의 애국적인 헌신성과 창발성을 고도로 발양시켰으며 몸소 공장과 농촌들을 현지에서 지도하고 근로자들을 증산투쟁으로 힘있게 고무하였다. . . . 1952년의 공업총생산액은 1951년에 비하여 119%로, 알곡총수확고는 113%로 성장하였다. 교육, 문화, 보건 분야에서도 커다란 성과가 이룩되어 1952년말에 와서는 각급 학교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게 되었으며 1953년 1월부터 국가부담에 의한 전반적 무상치료제가 실시되었다. . . . 1952년 한해 동안 평양시에 대해서만도 5만 2,380여개의 각종 폭탄을 퍼부었으며 전쟁 3년간에는 무려 42만 8,700여개의 각종 폭탄과 네이팜탄을 떨구었다. . . . 미합동참모본부는 전쟁포로들에 대한 세균탄 실험효과에 기초하여 1951년 10월에 조선에서 세균전을 개시할 것을 지령하였다. . . . 이 지령에 따라 오끼나와기지의 ≪비29≫폭격기들은 1951년 10월부터 ≪시험적인 단계≫의 세균전을 개시하였고 1952년 5월 하순부터 작전단계에서 그 규모를 더욱 확대하였다. . . . 미제는 ≪씨. 아이. 에이≫특무들을 동원하여 조국으로의 송환을 요구하는 우리측 포로들에게 이른바 ≪자원송환≫을 강요하였고 ≪탄원서≫를 강제로 쓰게하거나 ≪멸공≫, ≪반공≫ 등의 구호를 몸에 세겨놓게 하였으며 그래도 응하지 않는 포로들에 대해서는 기관총, 화염방사기를 발사하여 집단적으로 살해하였다. . . . 사회주의나라 인민들을 비롯한 세계 진보적 인민들의 힘찬 반미투쟁과 반전운동에 의하여 미제는 더욱더 곤경에 빠지게 되었으며 조선인민은 강력한 국제적 지지성원속에서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더욱 촉진할 수 있게 되었다.≫(적극적인 진지방어전)

≪전원회의가 있은 다음 각급 당조직들에서 전원회의 문헌토의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당원들의 당성이 비상히 높아지고 당의 전투력이 강화되었으며 종파주의를 비롯한 온갖 반당적 경향들이 폭로되었다. 특히 박헌영, 이승엽 등 간첩종파도당의 죄행이 낱낱이 드러났다. 박헌영은 이미 해방전부터 일제에 투항하고 미제의 간첩으로 굴러떨어진 혁명의 배신자로서 ≪화요파≫계열, ≪서울콩그룹≫계열의 종파분자들과 변절자들을 중심으로 간첩종파집단을 형성하였으며 해방전후를 통하여 오랫동안 자기 정체를 교묘하게 숨기고 조선혁명운동발전에 막대한 해독을 끼쳤다. 박헌영도당은 해방후 미제의 지시밑에 남조선에서 당조직을 파괴하고 인민들의 혁명투쟁을 말아먹었다. 이자들은 북반부에 들어온 다음에도 간첩, 암해분자들을 규합하고 우리 당을 파괴하기 위하여 온갖 악랄한 책동을 다하였으며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는 당, 국가 및 군사 비밀을 미국첩보기관에 계통적으로 넘겨주었다. 1951년 미제침략자들이 ≪하기 및 추기 공세≫를 감행하던 때에는 적의 공세와 때를 같이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며 아이젠하워가 ≪신공세≫를 기도하자 또다시 적의 공격과 배합하여 무장폭동으로 당과 정부를 전복하려고 책동하였다. 당원들의 정치적 각성이 비상히 높아지고 또한 박헌영, 이승엽의 공모자, 추종자들과 그들의 죄과를 아는 사람들이 다수 북반부에 와있던 조건에서 그자들이 자기들의 엄중한 죄과를 숨겨낼 수는 없었다. 그자들은 자기들의 죄행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자 수천명의 방청자들이 참가한 공개재판에서 그 모든 사실을 시인하고야 말았다. . . . 인민군부대들은 1953년 5월 중순부터 7월 하순까지 3차에 걸치는 적에 대한 강력한 타격전을 벌였다. 세차례에 걸치는 강력한 타격 전에서 인민군부대들은 금성 남쪽계선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많은 적을 소멸하고 적들의 중요방어지대를 탈취하였으며 약 343평방키로미터의 지역을 해방하였다. . . . 적들은 3년간의 전쟁기간에 미군 40만 5,400여명을 포함하여 156만 7,100여명의 병력과 1만 2,200여대의 비행기, 560여척의 각종 함선, 3,250여대의 탱크 및 장갑차를 비롯한 전투기술기재와 군수물자를 잃어버렸으며 1,650억달러의 직접 및 간접 군사비를 탕진하였다. 조선전선에서 당한 미제의 돌이킬 수 없는 군사, 정치, 도덕적 패배는 전쟁광신자들인 미제로 하여금 감히 더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미제는 ≪자원송환≫이란 부당한 구실을 만들어가지고 1년 6개월 동안이나 끌어오던 포로송환문제에서의 저들의 그릇된 입장을 철회하였으며 1953년 7월 27일에는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조인하였다. 조선에서 정전이 실현됨으로써 전조선을 강점하며 나아가서 아시아와 세계를 제패하려던 미제의 무모한 침략계획은 여지없이 파탄되었으며 조선인민은 세계역사에서 첫번째로 미제국주의를 타승한 영웅적 인민으로 되었다.≫(조선노동당의 조직사상적 강화. 미제의 군사적 모험의 파탄과 조선인민의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의 승리)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조선인민의 승리는 무엇보다도 김일성주석의 위대한 주체사상의 빛나는 승리였다. . . . 김일성주석의 현명한 영도밑에 조선노동당이 전쟁의 전기간 자기 대열을 튼튼히 꾸리고 전투적 기능을 끊임없이 높이면서 모든 조직정치사업을 옳게 보장함으로써 이룩될 수 있었다. . . . 김일성주석이 마련하여준 인민민주주의제도의 무궁무진한 생활력과 이에 기초한 후방의 공고성에 의하여 보장되었다. . . . 조선인민군이 김일성주석의 주체적인 군사사상과 군사적 방침들을 빛나게 구현하고 무비의 영웅성과 애국적 헌신성을 발휘함으로써 이룩될 수 있었다. . . . 세계 혁명적 인민들의 국제주의적 지지성원속에서 이룩되었다. . . . 그것은 첫째로, 조선인민이 미제침략자들을 타승함으로써 영광스러운 조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호하고 혁명의 전취물을 굳건히 보위하였으며 우리 공화국과 인민민주주의제도의 무궁무진한 생활력과 우리 인민의 불패의 힘을 온 세상에 힘있게 시위하였다는 데 있다. . . . . 둘째로, 전쟁의 준엄한 시련을 통하여 전체 인민이 김일성주석의 주위에 더욱 굳게 단결되었으며 우리의 주체적 혁명역량이 비상히 강화되고 고귀한 경험이 축적되었다는데 있다. . . . 셋째로, 조선인민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는 국제적으로도 큰 의의를 가졌다. . . . 미제는 자기의 오랜 침략역사에서 처음으로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였으며 전세계 인민들 앞에서 그 ≪강대성≫의 신화는 여지없이 산산조각이 났다.≫(조국해방전쟁승리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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