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2월 23일(목)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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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정상회담의 추진배경

한호석 2002 9 23

통일여명 편집국 해설 / 4-3-16

 

1. 들어가는 말

2002년 9월 1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변이 일어났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평양땅을 밟은 일본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상봉하여 조일정상회담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한(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일본은 ≪원수의 나라≫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궐기한 조선민중을 무참하게 학살한 이후, 1945년 8월 15일 패전으로 한(조선)반도에서 퇴각하기까지 50년 동안,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한(조선)민족에게 저지른 죄행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악랄한 것이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이후 57년이 지난 오늘까지 일본은 북(조선)에 대해서 적대관계를 유지해왔으며, 한(조선)반도의 통일을 반대해왔다.

그런데 2002년 9월의 조일정상회담에서는 적대국의 정상이 만나 최고 수준의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적대국의 정상이 만나 최고 수준의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일정상회담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최고위급회담에 이어서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역사적 사변이 된다. 2000년 6월의 남북최고위급회담이 제1차 대사변이었다면, 조일정상회담은 제2차 대사변이다.

세상에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북(조선)과 일본의 적대관계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가문 역사에 농축되어 있다. 그 가문의 선대는 친가와 외가 모두 항일혁명선열들이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가문은 항일혁명투쟁에 목숨을 바친 혁명선열의 가문이다. 따라서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있어서 일본은 민족의 원수이며 동시에 가문의 원수이다.

그런데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원수의 나라≫ 일본의 최고책임자를 평양에 초청하였고, 그와 함께 정상회담을 진행하였으며, 조일국교수립의 기본구도를 마련하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일본총리와 상봉한 것은, 2000년 6월에 김대중대통령과 상봉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김대중대통령은 동족이지만, 일본총리는 적대국의 최고책임자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김대중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공항에까지 영접하기 위하여 나왔고 남북최고책임자의 상봉을 수십만 평양시민들이 뜨겁게 환영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총리는 조용하게, 하루 밤도 묵지 않고 평양을 다녀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왜 ≪원수의 나라≫ 일본의 최고책임자와 만나 최고 수준의 정치적 합의를 하였는가? 일반상식으로는 풀기 어려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 이 논문의 주요 관심사다.

지금 항간에는 조일정상회담과 관련하여 나라 안팎의 언론들과 분석가들이 제멋대로 써갈기는 엉터리 시사해설과 정세분석들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들의 해설과 분석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내용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북(조선)의 경제재건에 막대한 자금이 요구되므로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여 보상금을 받아내기로 결단을 내렸다는 황당한 주장으로 요약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달러의 힘≫이 적대관계를 녹여버리고 있다는 궤변이다.

그들의 궤변대로, 만일 북(조선)이 경제재건자금을 얻어내려고 하였다면, 정말 달러 한 장이 아쉬웠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왜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려 하지 않았고, 어려운 고비를 일단 넘긴 지금에 와서 경제재건자금을 확보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을까? 거의 모든 언론들과 분석가들은 이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힌다. 저들이 내놓은 이른바 ≪경제재건자금 확보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황당무계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엉터리 시사해설과 정세분석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은 조일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사변의 의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조일정상회담의 의의를 파악하는 길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왜 조일정상회담을 추진하였는가, 그리고 그 정상회담에서 어떠한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냈는가 하는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다.

그 문제를 해명하는 방법은 간단치 않다. 정보의 제한성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대사변이 진행되는 동안 그 사변의 심층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국가이익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매우 은밀하게 추진되는 것이다.

정보의 제한성이라는 장벽을 뚫고 그 진상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올바른 관점을 세우는 것이다. 올바른 관점을 세우고, 그에 의거하여 변화의 흐름을 면밀히 고찰하면 진상에 접근할 수 있고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일정상회담과 같은 역사적인 사변을 분석하려 할 때는, 어떠한 관점을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언제나 가장 중요한 핵심과제로 나서게 된다.

조일정상회담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대답은 당연히 민족주체적 관점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고, 바라보아서도 안 된다. 민족주체적 관점이라는 말은, 한(조선)민족을 주체로 놓고, 한(조선)민족의 요구와 이익의 견지에서 조일정상회담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본민족을 주체로 놓고, 일본민족의 요구와 이익의 견지에서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한(조선)반도의 정세변화가 자국의 이해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주변 강대국들도 제각기 자기들의 요구와 이익의 견지에서 조일정상회담을 분석하고 있다. 그들이 제3자의 공정한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조일관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주체가 아니므로, 제3자의 공정한 시각이 아니라 객체의 피상적 관점밖에 지니지 못한다.

한(조선)반도의 정세변화를 이끌고 있는 주인은 그 어떤 주변 강대국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조선)민족 자신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할 때 민족주체적 관점이 성립될 수 있으며, 모든 정세변화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

조일정상회담을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분석한다고 하였을 때, 그 말의 본뜻을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한(조선)민족의 요구와 이익의 견지에서 조일정상회담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한(조선)민족의 요구와 이익은 무엇일까? 두 말할 것도 없이 조국통일이다. 조국통일은 해외동포를 포함하는 7천만 민족 전체가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는 역사적 위업이며, 21세기의 한(조선)민족에게 주어질 최대, 최고의 이익이다. 한(조선)민족에게 조국통일보다 더 절실한 요구는 없으며, 더 커다란 이익은 없다.

조일정상회담을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본다는 말은, 그 회담을 통하여 어떻게 조국통일위업이 실현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에 놓고 본다는 말이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조국통일위업을 달성하는 것을 최대의 임무로 여기고 있다. 북(조선)의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부문들에 대한 그의 정력적인 지도는 결국 조국통일위업을 달성하는 통일전략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오늘 한(조선)민족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으며, 한(조선)민족에게 가장 커다란 이익을 안겨주게 될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통일전략을 최우선적 과업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핵심문제를 놔두고 그 어떤 다른 문제를 가지고 조일정상회담을 대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알맹이는 내놓고 껍데기만 들여다보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새로운 천년기에 접어든 이후 지금까지 불과 2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한(조선)민족은 자기의 장래운명을 결정지을 두 개의 역사적인 사변을 맞이하였다. 2000년 6월의 남북최고위급회담과 2002년 9월의 조일정상회담이다. 이 두 회담은 모두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조국통일전략에 따라 준비되고 추진되었으며, 조국통일위업을 수행하는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은 대사변이었다.

2. 미국과 일본은 조일정상회담을 어떻게 추진하였는가?

남북최고위급회담과 조일정상회담에서는 공통적인 특징이 드러나 보인다. 공통적인 특징이란, 김정일국방위원장을 상대로 하여 회담에 각각 나섰던 김대중대통령과 고이즈미일본총리는 한결같이 미국의 북(조선)에 대한 관계개선의 기본구도를 추종하여 움직였다는 데 있다.

2000년 6월의 남북최고위급회담에서 김대중대통령이 어떻게 미국의 대북 관계개선의 기본구도에 따라 움직였는가 하는 문제는, 내가 당시에 발표했던 논문들에서 이미 해명하였으므로 이 논문에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이번에 조일정상회담에 나선 고이즈미도 역시 마찬가지로 미국의 대북 관계개선의 기본구도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므로 조일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부시정부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면, 조일정상회담이 성사된 배경의 한 측면을 모르게 된다.

미국은 조일정상회담을 통하여 무엇을 노렸던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미국은 조일정상회담을 통하여 북(조선)의 핵문제, 미사일문제의 해법을 노렸다는 것, 이것이 정답이다.

조일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사변이 있기까지 한(조선)반도의 정세변화에 사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은 매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지만 미국이 조일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언론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매우 은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미국이 조일정상회담에서 북(조선)의 핵문제, 미사일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했던 이유는,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미국을 압박하게 될 매우 긴장되는 시점인 2003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시정부는 2003년에 들어서기 이전에 서둘러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 길은 조미정치협상을 재개하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부시정부가 조미정치협상에 나서려면, 그들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조미정치협상을 통하여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사가 있음을 미리 파악하고, 북(조선)이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지금까지 부시정부 안에서 조미정치협상 자체를 반대해온 이른바 ≪강경파≫가 협상반대명분을 내세우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조치다.

이러한 제어조치는 국무장관 콜린 파월, 국무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 제임스 켈리로 이어지는 국무부 집행체계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파월-아미티지-켈리로 이어지는 집행체계가 조미정치협상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때는, 2002년 6월 중순이었다. 6월 14일 미국 국무부는 제임스 켈리를 7월 10일부터 12일까지 특사로 평양에 파견하겠다고 북(조선)에게 제안하였다. 켈리의 방북에 관련한 제안은 6월 25일에 제2차로, 6월 27일에 제3차로 이어졌으나, 북(조선)은 켈리 방북에 관한 미국 국무부의 제안에 대해 선뜻 응답을 주지 않았다.

미국 국무부가 북(조선)에게 제임스 켈리를 특사로 파견하겠다고 제안하고 북(조선)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6월 20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가 미국 대통령 부시에게 조미정치협상 재개에 관한 문건을 내놓고 대통령의 최종 결재를 받았던 일이다.

대통령의 최종 결재문건에는 일본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평양에 가서 조일정상회담을 성사시킨다는 중대한 계획이 들어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부시정부가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기 이전에 조일정상회담부터 개최하겠다는 새로운 전략으로 전환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클린턴정부의 대북 전략은 조미정상회담을 먼저 개최하고 그 다음에 조일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것이었는데, 부시정부에 들어와서 순서가 바뀐 것이다.

이처럼 조미정상회담 이전에 조일정상회담을 먼저 개최하는 전략은, 부시정권이 출범하기 직전에 이미 구상된 것이다. 그 전략구상은 당시 대통령 당선자 부시의 아시아전략문제 자문역을 맡고 있었으며 지금은 국무차관인 리처드 아미티지에게서 나왔다. 2000년 11월 31일 아미티지는 ≪요미우리신붕≫과 대담하면서 ≪북(조선)과의 관계개선은 맨 처음 남(한국)이 추진하고 다음은 일본이 추진하고, 미국은 맨 마지막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2002년 6월 29일에 느닷없이 서해교전이 일어났다. 서해교전은 파월-아미티지-켈리로 이어지는 집행체계가 추진하기 시작한 조미정치협상 재개에 제동을 걸어보려는 미국 군부와 강경파의 방해책동이었다. 서해교전으로 국면이 얼어붙자 파월-아미티지-켈리로 이어지는 집행체계는 7월 2일에 특사방북 제안을 철회한다는 발표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3년의 긴장된 시점을 앞두고 있는 부시정부는 특사방북 제안을 철회상태에 무한정 묶여 놓을 수는 없었다. 서해교전으로 철회되었던 특사방북 제안이 되살아난 것은 7월 31일 부르나이에서 열렸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의장에서였다. 콜린 파월은 회의가 시작하는 시각보다 일찍 그 회의장에 도착하여 백남순외무상에게 먼저 만나자고 제안함으로써 조미 외교책임자 회동이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그 극적인 회동에서 파월은 조미정치협상을 재개하겠다는 의사를 다시 표명하였다.

그렇다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라이스가 대통령 부시에게 결재를 받은 조미정치협상 재개에 관한 문건에 들어있었던 대로, 조일정상회담을 조미정상회담보다 먼저 추진한다는 부시정부의 새로운 조치는 어떻게 북(조선)에 전달되었을까? 그 조치가 북(조선)에 전달된 것은 8월 24일부터 26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던 조미일 삼각연쇄회동을 통해서였다.

8월 25일 평양에서는 북(조선) 외무성 마철수국장과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 다나카 히토시가 참석한 조일 국장급 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미국 국무부 코리아과 부과장 파리엘 새이드를 포함한 미국 국무부 실무대표단 5명이 방북하여 조미 실무회담이 동시에 열렸다. 조일 실무회담과 조미 실무회담의 회담시간은 우연하게 일치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평양에서 이루어진 조미·일 삼각연쇄회동은 파월-아미티지-켈리로 이어지는 집행체제가 일본정부당국자들과 사전에 미리 협의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일국장급회담에 참가했던 일본 외무성국장 다나카의 손에는 일본총리의 친서가 들려있었다. 다나카는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회담에 들어가기 전날인 8월 24일 일본총리의 친서를 북(조선)의 홍성남내각총리에게 전달하였다. 고이즈미의 친서를 받아야 할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그때 러시아 연해주지역을 방문하고 있었으며, 8월 23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조러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었다.

연해주지역을 방문하고 있었던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전달된 일본총리의 친서에는 조일정상회담을 위하여 평양을 방문하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있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일본총리의 정상회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극비정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공편으로 급히 평양으로 귀환한 강석주제1부상을 통해 8월 26일 저녁 평양에 머물고 있었던 미국 국무부 실무대표단과 일본 외무성 국장 다카시에게 각각 전달되었다.

그와 때를 맞춰, 파월-아미티지-켈리로 이어지는 집행체계 가운데 두 사람 아미티지와 켈리는 고이즈미의 조일정상회담 제안에 대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답신을 도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국무차관 리처드 아미티지와 방북 특사로 정해진 제임스 켈리는, 자신들이 평양에 파견한 국무부 실무대표단이 조일정상회담 제안에 대한 답신을 도쿄에 머물고 있었던 자신들에게 빨리 전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미티지와 켈리는 8월 27일과 28일 도쿄에서 열렸던 미·일 전략회의 제1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도쿄에 머물고 있었던 중이었다.

미국 국무부 실무대표단 성원 한 사람이 항공편으로 평양을 출발하여 도쿄로 직접 날아가서 전달했던 기별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일본총리의 정상회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그 기별을 받은 아미티지와 켈리는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 다케우치 유키오와 함께 제1차 미일전략회의를 진행하였다. 그 전략회의에서 조일정상회담 개최일정을 비롯하여 의제에 관한 미국과 일본의 견해가 최종적으로 조율·확정되었고, 그 확정사실이 곧 관방장관 후쿠다 야스오를 통하여 고이즈미에게 보고되었음은 물론이다.

아미티지는 8월 27일 총리관저에 들어가서 고이즈미를 만났는데, ≪니혼게이자이신붕≫ 2002년 9월 3일자 보도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는 조일정상회담에 관한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바람에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일본의 협력문제는 거의 다루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총리가 평양을 방문하여 조일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북(조선)과 합의하였다는 사실이 발표된 때는 8월 30일이었다.

조일정상회담에서 북(조선)의 핵문제, 미사일문제의 해법을 찾으려고 했던 부시정부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조일평양선언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어느 정도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쌍방은 조선반도 핵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을 위하여 해당한 모든 국제적 합의들을 준수할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쌍방은 핵 및 미싸일문제를 포함한 안전보장상의 제반 문제와 관련하여 유관국들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여 문제해결을 도모해야 할 필요성을 확인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이 선언의 정신에 따라 미싸일발사의 보류를 2003년 이후 더 연장할 의향을 표명하였다.≫

위의 구절에서 ≪조선반도 핵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을 위한 국제적 합의≫라는 말은 1994년 10월에 조미 사이에 체결된 제네바 기본합의를 의미한다. 미국은 조일정상회담을 통하여 북(조선)이 제네바 기본합의를 준수하겠다고 확인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위의 구절에서 핵 및 미사일문제와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화를 촉진하는 필요성을 확인했다는 말은, 조미정치협상을 재개하기로 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조일정상회담을 통하여 북(조선)이 조미정치협상을 재개하려는 의사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이번 조일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얻어낸 커다란 수확이다.

사실 이번 조일정상회담에서 미국이 가장 기대했던 것이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였다는 사실은, 미국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2002년 9월 16일 조일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미사일 확산문제를 다루지 않은 채 김정일국방위원장과의 회담을 성사시킬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북(조선)이 조일정상회담을 통하여 미사일 발사 보류를 2003년 이후 더 연장할 의사를 표명하였다는 것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미국 대통령 부시에게 전달하는 선명한 정치적 의사표명이다. 바로 이 의사표명에 의하여 부시는 올해 안에 조미정치협상을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북(조선)이 대일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목적

1999년 8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발표한 성명 ≪조일관계의 현 사태와 관련한 3가지 원칙적 립장천명≫에는 북(조선)이 대일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목적이 밝혀져 있다. 그 목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다. 첫째, 일본이 북(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정책전환으로 나오게 하는 목적이다. 둘째, 일본이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과거의 모든 죄행에 대하여 사죄하고 보상하게 하는 목적이다.

북(조선)은 이번 조일정상회담을 통하여 위의 두 가지 목적 가운데 상당부문을 달성하였고 나머지 부분도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것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대외전략이 이룩한 또 하나의 업적이다.

첫째,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조일정상회담을 통하여 일본의 북(조선) 적대정책을 파탄시켰다. 일본은 북(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종전대로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일정상회담은 일본의 북(조선) 적대정책이 파탄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난 반세기 이상 한(조선)민족의 조국통일을 가로막고 있었던 최대의 장애물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일본의 북(조선) 적대정책이 파탄된다고 하더라도, 조일 사이의 모순관계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두 나라 사이의 갈등요인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한(조선)민족이 자주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일본의 국가정책이 소멸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며, 그 국가정책이 소멸됨으로써 달성될 조일관계의 개선과 국교수립은 한(조선)반도의 통일에 유리한 전략환경을 조성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조일정상회담에 대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전략적 방침은, 대일 관계개선을 통하여 단순히 배상과 보상을 받아내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북(조선) 적대정책을 파탄시킴으로써 한(조선)반도의 통일에 유리한 전략환경을 조성하게 된 것, 이것이 조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달성한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한(조선)민족은 그 어떤 정치적 승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민족적 이익을 얻게 되었다.

한(조선)반도의 통일이 실현되려면, 미국이 대북적대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조미국교수립에 나서야 한다.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존속되고 있는 한, 한(조선)반도의 통일은 불가능하다.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소멸되는 길은 몇 갈래가 있겠지만, 일본의 대북적대정책을 파기시키는 것도 그 방도가 된다. 미국과 일본의 대북적대정책은 뗄 수 없는 연관 속에 얽혀있기 때문에 그렇다. 만일 미국과 일본의 대북적대정책 가운데 어느 하나가 파기되면 다른 한 쪽도 파기된다.

오래 전에 김일성주석은 이러한 정황을 갓끈 비유로 설명한 적이 있다. 김일성주석은 1985년 5월 23일 평양을 방문한 일본사회당 대표단을 접견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대표단 단장 다나베 마코도에게 다음과 같이 갓끈의 비유를 설명하였다.

≪나는 일본의 자유민주당 유지의원단 성원들에게 남조선≪정권≫도 자주성이 없다고 하면서 갓에 비유하여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남조선≪정권≫이 옛날에 조선사람들이 머리에 쓰고 다니던 갓과 같다, 갓에는 두 끈이 있는데 갓을 머리우에 올려놓고 두 끈을 매야 유지되지 한 끈만 끊어져도 바람에 날아가고 만다, 남조선≪정권≫의 두 끈 가운데서 한 끈은 미국이고 다른 한 끈은 일본이다, 지금 남조선≪정권≫은 미국과 일본의 두 끈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는데 한 끈만 끊어져도 끈떨어진 갓처럼 되고 말 것이다, 남조선≪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끈을 일본의 자유민주당에서 끊어놓으면 남조선≪정권≫은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사람이 일어나서 남조선≪정권≫을 유지하는 일본끈을 자기네가 끊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표단 단장이 아직은 남조선≪정권≫을 유지하는 일본끈을 끊을 힘이 없으므로 완전히 끊기는 어렵지만 일본끈은 허부럭하게 만들어놓을 수는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렇게만 하여도 좋은 일이다, 남조선≪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끈을 허부럭하게 만들어 바람 부는 데 따라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하게 되면 오래지 않아 남조선인민들이 그것을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남조선≪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끈과 일본끈이 든든히 매여있기 때문에 그것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기 힘듭니다.≫

미국끈과 일본끈 가운데 어느 끈을 먼저 끊을 것인가?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일본끈부터 끊어버리기로 결심하였다. 북(조선)이 조일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의향을 일본에게 밝혔던 것은, 조미정상회담이 일정에 올랐다가 성사되지 못하고 클린턴정권이 퇴진한 직후인 2001년 1월이었다. ≪아사히신붕≫ 2002년 9월 12일자 보도에 따르면, 2001년 1월 북(조선)은 당시 일본총리 모리 요시로의 측근인 관방장관 출신 나카가와 히데나오를 통해 일본총리 모리에게 평양을 방문해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2001년 1월 27일 싱가포르에서는 모리의 비공식 특사인 나카가와 히데나오와 북(조선) 외무성의 강석주제1부상의 극비회담이 이루어졌다. 이 극비회담에서 강석주제1부상은 조일 국교정상화를 위해서 현안문제들을 일괄타결할 의향을 밝혔으며 이를 위해서 조일정상회담을 제안했다고 한다.

모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신임총리인 고이즈미에게 북(조선)이 조일정상회담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전해주었다. ≪마이니치신붕≫ 2002년 9월 1일자 보도에 따르면, 조일 두 나라가 비공식접촉을 통해 정상회담 개최를 원칙적으로 합의한 시점은 2002년 5월이라고 한다.

조일정상회담 개최는, 조미미사일회담 재개를 원칙적으로 동의해놓고서도 성사 불가능한 조건을 제기하면서 회담 재개를 사실상 방해하고 있는 워싱턴의 ≪신보수주의자≫(속칭 강경파)들의 대결주의정책 한복판에 파열구를 내기 위한 강력한 정치공세였다. 조일정상회담이 개최됨으로써 부시정부 강경파들의 입지가 좁아졌고, 협상파들의 입지는 확장되었다. 조미정치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4. 일본이 한(조선)민족에게 저지른 과거죄행을

반성·사죄하는 문제

일본이 한(조선)민족에게 저지른 과거의 죄행을 반성·사죄하게 하는 목적은 조일정상회담에서 어떻게 달성되었을까?

2000년 4월초 7년만에 재개되었던 제9차 조일 국교정상화회담에서 북(조선) 대표는 일본정부의 최고책임자가 반성·사죄할 것을 요구하였다. 북(조선)의 그 요구에 대해서 일본은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하려 하였다. 첫째, 일본은 조일 국교정상화를 약속하는 문서와는 별도로 반성·사죄의 뜻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여 반성·사죄문제를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둘째, 일본은 1995년 8월 15일 종전 50주년을 맞아 당시 일본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발표했던 특별담화의 수준을 넘어선 반성·사죄는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무라야마의 특별담화가 발표된 이후, 1998년 10월 8일 도쿄에서 김대중대통령과 당시 일본총리 오부치 게이조 사이에 채택되었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나, 200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미·일 강화조약 체결 5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일본 외상 다나카 마키코가 한 발언에서는 일본의 반성·사죄문제를 표현하는 수준은 언제나 무라야마의 특별담화 수준을 넘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에게 일종의 불문율처럼 고착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북(조선)은 일본정부의 최고책임자가 반성·사죄하는 내용은 별도문서가 아니라 국교정상화를 확인하는 문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못을 박았으며, 무라야마의 특별담화에서 나왔던 ≪오와비≫라는 일본말은 충분하지 못하므로 ≪사죄≫라는 명백한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조일평양선언에서는 일본의 반성·사죄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그 선언에는 ≪ 일본측은 과거 식민지지배로 인하여 조선인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력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의 뜻을 표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성과 사죄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조일평양선언은 두 나라 말로 작성되었는데, 조선어본에서는 사죄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비해, 일본어본에는 오와비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두 개념 사이에서 타결점을 찾지 못하였으므로, 각기 자기 식의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일평양선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반성과 사죄의 주체가 일본이라는 국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무라야마의 특별담화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 반성과 사죄를 담은 모든 문서와 발언은 언제나 그 문서의 작성책임자 또는 발언자 개인이 주체로 되어 있었다. 일본총리나 일본 외상은 개인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대표자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일본총리가 개인자격으로 반성·사죄를 하였는지 아니면 일본정부 대표자로 반성·사죄를 하였는지가 불분명하였다. 일본정부 대표자로 반성·사죄한 것으로 해석하더라도, 일본이라는 국가가 반성·사죄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개인적 반성·사죄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후자는 정치적 반성·사죄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1995년 8월 15일에 발표되었던 무라야마의 특별담화에서 반성·사죄를 받는 대상은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아시아 여러 나라들로 되어 있다. 반성·사죄를 하는 주체도 불분명하였을 뿐 아니라, 반성·사죄를 받는 주체도 불분명하였다.

그러나 조일평양선언에서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반성·사죄를 명기하였으며, 반성·사죄를 받는 주체를 ≪조선인민≫이라고 명기하였다. 이로써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지난 시기 일본의 침략, 지배, 착취, 약탈에 의해서 희생당했던 한(조선)민족을 대표하여 범죄국가 일본의 정치적 반성과 사죄를 받아냈던 것이다. 이것 역시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조일정상회담에서 이루어낸 커다란 업적이다.

1965년 6월 22일 남(한국)과 일본이 조인하였던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및 그에 딸린 4개 협정 및 25개 외교문서에는 일본의 반성과 사죄라는 개념이 단 한 차례도 들어가지 않았다.

5. 조일평양선언에 제시된 경제협력이 의미하는 것

2000년 8월 24일 제10차 조일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일본측 대표는 북(조선)이 일본에 대해 재산권과 청구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는 보상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조일평양선언에 나오는 ≪재산 및 청구권≫이라는 개념은 재산권과 청구권을 의미한다. 재산권이란 식민지시기에 일본이 조선에서 약탈해 간 재산을 돌려 받는 권한을 의미한다. 청구권이란 식민지시기에 일본이 조선에게 입힌 피해에 대한 배상과 보상을 청구하는 권한을 의미한다.

일본이 식민지시기에 조선에게 입힌 피해는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 인명 살상의 피해다. 수만명의 항일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을 납치, 고문, 투옥, 살해한 범죄에 의하여 발생한 피해, 수백만 조선민중을 징용, 징병, 종군위안부, 학병 등으로 침략전쟁에 동원한 범죄에 의하여 발생한 피해, 조선민중의 정당한 사회활동, 정치운동을 유혈적으로 탄압한 범죄에 의하여 발생한 피해 등이다. 둘째, 정신적 피해다. 40년 동안 조선민중에게 가혹한 식민통치를 가함으로써 조선민중에게 정신적으로 발생한 온갖 형태의 피해이다. 셋째, 물적 피해다. 식민지조선의 물적 자원을 마구 강탈·도용·탕진함으로써 발생한 피해이다.

그런데 조일평양선언을 얼핏 읽어보면, 북(조선)이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하고 경제협력의 방식으로 보상하겠다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북(조선)과 일본이 식민지시기에 관련한 ≪재산 및 청구권을 호상포기하는 기본원칙에 따라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하였다.≫는 구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구절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이중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다. 그 구절은 재산권과 청구권을 상호포기하는 기본원칙에 따라 북(조선)이 재산권과 청구권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고, 앞으로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재산권과 청구권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 두 해석의 차이는 엄청나게 큰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의 해석이 올바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해설하기 전에 먼저 ≪재산 및 청구권을 호상포기하는 기본원칙≫에 관한 이해가 요구된다. 조일평양선언에 기록된 재산권과 청구권을 상호포기하는 기본원칙이라는 것은 국제관례에 의하여 성립된 원칙을 의미한다. 일본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나라들이 일본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수립할 때,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한 것은 일종의 국제관례로 되었다.

지난 시기 일본과 전쟁을 하였던 소련이 1956년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소·일 국교를 수립하면서 발표한 소·일 공동선언에서 두 나라는 재산권과 청구권을 상호포기함으로써 선례를 만들어놓았다. 1972년 9월에 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할 때 발표한 중·일 공동선언도 소·일 공동선언의 선례를 따라서 두 나라가 재산권과 청구권을 상호포기하였다.

일본이 전후처리과정에서 피해보상협정을 체결했던 나라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남베트남(당시), 버마(당시 나라이름)였다. 이들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하였고, 일본은 경제협력 방식으로 보상문제를 처리하였다.

남(한국)의 경우도 동남아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1962년 11월 12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도쿄에 보내 당시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와 비밀회담을 진행하게 하였다. 그 비밀회담에서 한일 국교정상화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남(한국)의 재산권과 청구권 문제는 다음과 같이 타결되었다.

일본은 10년 동안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지급하고, 7년 거치 20년 상환을 조건으로 하는 연리 35%의 정부차관 2억 달러를 10년간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으로 빌려주고,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를 빌려준다는 것이었다. 정부 및 민간의 차관 3억 달러를 제외하고, 남(한국)이 청구권으로 받은 자금은 10년 동안 분할지급된 3억 달러가 전부였다. 교활한 일본정부당국자들은 그 자금공여를 ≪독립축하금≫이라고 불렀고, 민족반역자들은 일본의 궤변을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조일평양선언에 나와 있는 ≪재산 및 청구권을 호상포기하는 기본원칙에 따라서≫라는 말은 위에서 언급한 국제관례를 적용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일 조일평양선언에서 재산권과 청구권을 상호포기하는 기본원칙에 따라서 처리한다고 명백하게 밝혔다면,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지고, 북(조선)이 재산권과 청구권을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만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의 구절을 자세히 보면,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하였다≫는 표현이 들어있는데, 이것은 앞으로 개최될 조일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재산권과 청구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문제의 구절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북(조선)이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북(조선)은 재산권과 청구권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따른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조일정상회담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간 고이즈미는 대언론설명회에서 조일정상회담의 토의내용 일부를 공개하였는데, 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조일정상회담에서 ≪보상문제는 대국적으로 판단할 용의가 있다. 총리가 말한 대로 일본 방식에 따라 앞으로 협의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일정상회담에서 일본총리가 말했던 ≪일본 방식≫이라는 것은, 동남아시아나라와 일본이 전후처리과정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북(조선)이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하고 경제협력 방식으로 보상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일본 방식≫을 그대로 따르겠다고 말하지 않고, ≪일본 방식≫에 따라 앞으로 협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은 북(조선)이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북(조선)이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조일평양선언 그 자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선언에서는 조일 경제협력문제에 관련하여 합의한 내용이 들어있다. 조일 경제협력 내용은 두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정부차원의 경제협력과 민간차원의 경제협력이다.

먼저 정부차원의 경제협력에 관해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일본은 북(조선)과 국교를 수립한 뒤에, 북(조선)에게 무상자금협력, 저이자 장기차관 제공,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제협력을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민간차원의 경제협력에 대해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일본은 ≪민간경제활동을 지원하는 견지에서 일본국제협력은행 등에 의한 융자, 신용대부 등이 실시되는 것이 이 선언의 정신에 부합된다는 기본인식 밑에 국교정상화회담에서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규모와 내용을 성실히 협의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일평양선언에서 경제협력 문제와 재산권, 청구권 문제를 서로 분리하여 경제협력 문제를 먼저 기록하였고, 재산권과 청구권 문제는 그 다음에 기록하였다는 사실이다. 만일 일본의 주장이 그대로 관철되었다면, 북(조선)은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하고 일본은 경제협력 방식으로 보상하기로 하였다고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경제협력 문제와 재산권, 청구권 문제를 분리시키고, 경제협력 문제를 먼저 기록하였다. 이것은 편의상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기록하였을까? 이 풀기 어려운 의문은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역량관계의 변화동향을 정확히 파악하여야 풀릴 수 있으며, 정세변화를 떠밀고 가는 막강한 힘의 실체를 해명해야 풀릴 수 있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배경설명이 요구된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1998년 8월에 북(조선)이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우주궤도에 진입시킬 때 우주발사체로 사용했던 3단계 로켓 ≪백두산 1호≫는 북(조선)이 이미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보유하고 있음을 암시한 거창한 사변이었다. 그 거창한 사변 앞에서 일본이 받은 충격은 컸다.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라는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쟁위협에 맞서서 한(조선)민족의 생명과 존엄과 자주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군사·정치적 전략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북(조선)이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던 우주발사체 3단계 로켓 ≪백두산 1호≫는 일본을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일본이 우주발사체 ≪백두산≫에 대한 공포의 도가니에서 빠져 나오려면 북(조선)이 ≪백두산 2호≫ 발사를 중지해야 하는데, 그러한 발사중지에 따른 손실에 대해서 일본은 응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정치·외교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경제적으로 응당한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일본이 ≪백두산 2호≫ 발사중지와 관련하여 북(조선)에게 지불하는 정치·외교적 대가는 조일평양선언에서 천명된 조일국교정상화를 ≪성의 있게≫ 추진하는 것으로, 그리고 국교수립을 ≪빠른 시일 안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로≫ 한다는 것으로 정해졌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지적한 대로, 조일국교수립이야말로 ≪백두산 2호≫ 발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제 ≪백두산 2호≫ 발사중지와 관련하여 남은 문제는 발사중지에 따른 경제적 보상이다. 일본은 북(조선)이 ≪백두산 2호≫ 발사 보류조치를 2003년 이후에도 더 연장하는 것에 대하여 경제적으로 보상해야 한다. 일본의 표현을 빌리면, 일본을 위협하고 있는 북(조선)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보류조치를 2003년 이후에도 더 연장시키는 데 대해 보상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의가 조일평양선언에서 재산권과 청구권 문제보다 먼저 해법을 찾은 정부차원 및 민간차원의 경제협력인 것이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조일평양선언에서 합의된 정부차원 및 민간차원의 경제협력은 북(조선)이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한 것에 대한 일본의 보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경제협력은 북(조선)이 ≪백두산 2호≫ 발사 보류조치를 연장하는 것에 대하여 일본이 경제협력이라는 명분으로 보상하는 것이다. 그 선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이 선언의 정신에 따라 미싸일 발사의 보류를 2003년 이후 더 연장할 의향을 표명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일본이 ≪백두산 2호≫ 발사 보류조치에 대하여 보상하겠다고 하였으므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일평양선언에서는 조일경제협력이 북(조선)이 ≪백두산 2호≫ 발사 보류조치를 더 연장한 데 대한 일본의 보상이라고 명문화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북(조선)은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며, 앞으로 진행될 국교정상화회담에서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의 보상은 ≪국교정상화 후 쌍방이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북(조선)은 ≪백두산 2호≫ 발사를 영구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잠정보류조치를 연장하는 것이며, 그것도 잠정보류조치를 연장한다고 기록하지 않고 ≪연장할 의향을 표명≫한다고 기록하였다. 북(조선)이 평양선언에서 그렇게 기록한 이유는, 북(조선)의 ≪백두산 2호≫ 발사문제는 조일 사이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미 사이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백두산 2호≫ 발사문제에 관련해서 일본은 미국의 요구와 견해를 추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평양선언을 통하여 ≪백두산 2호≫ 발사의 잠정보류조치를 연장하겠다는 의향을 고이즈미를 통하여 부시에게 표명하였던 것이다.

북(조선)이 ≪백두산 2호≫ 발사 보류조치를 더 연장하는 것에 대해 일본은 어느 정도의 규모로 보상할 것인가? 구체적인 사항은 앞으로 국교정상화회담에서 결정하게 될 것이지만, 그 문제에 관한 미국의 견해가 중요하다. 미국의 견해는 1999년 10월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열렸던 역사적인 조미 미사일협상에서 드러난 바 있다. 그 회담에서 미국은 북(조선)이 인공위성 발사(미국의 표현으로는 장거리미사일 발사실험)를 포기하면 미국이 일본을 설득하여 경제협력 명분으로 20억 달러를 보상하게 하겠다고 비공식으로 약속하였다.

북(조선)이 ≪백두산 2호≫ 발사를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이 제시한 20억 달러를 일본이 떠맡는 것은, 미국의 사활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대량파괴무기 비확산정책의 요구에 따라 그 정책수행의 경비부담을 일본이 전액 떠 안는 것이다. 이라크 침략전쟁은 미국이 일으키고 막대한 전쟁비용은 일본에게 떠넘기는 전형적인 수법인 것이다.

남(한국)의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2002년 9월 19일자 보도는 워싱턴의 한(조선)반도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고이즈미가 조일정상회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북(조선)에게 보상금을 우선 지불한다는 데 대하여 두 나라 사이에서 의견접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조일정상회담 직전의 비공개협상에서 일본은 북(조선)에게 일시불로 우선 보상금 20억 달러를 지급하는 문제가 거의 합의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20억 달러는 북(조선)이 ≪백두산 2호≫ 발사 보류를 더 연장한 데 대한 보상금이다.

이번에 열린 조일정상회담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간 고이즈미는 조일정상회담에서 오간 토의내용의 일부를 언론에 공개하였다. 그 정상회담에서 북(조선)의 미사일문제가 나왔을 때, 김정일국방위원장은 ≪ 조일관계가 순조롭게 회복되면 미사일문제는 없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일관계가 순조롭게 회복된다는 말은, 일본이 북(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북(조선)은 우주발사체 3단계 로켓 ≪백두산≫ 발사를 중지하는 대신 일본은 그 대가를 경제협력 명분으로 보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일정상회담에서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으며, 문제해결의 길이 열렸다.

지금 내외언론들은 일본이 북(조선)과의 국교수립을 서두르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지만, 사실 그 내막은 일본이 미국의 요구에 추종하여 조일국교정상회담을 급진전시킴으로써 2003년이 오기 전에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려고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6. 일본이 한(조선)민족에게 저지른

과거죄행을 청산하는 문제

조일평양선언에는 일본이 한(조선)민족에게 자행했던 과거죄행을 청산하는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이 원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조일 사이의 국교정상화를 가로막고 있었던 풀기 힘든 정치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으로서, 세간에는 일본의 과거청산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조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일본이 한(조선)민족에게 자행했던 과거죄행을 청산하는 원칙을 제시하고, 그 원칙을 조일평양선언에 포함시킴으로써 가장 중요한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것은 조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이룩한 또 하나의 거대한 업적이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제시한 과거죄행 청산의 원칙은 조일평양선언에 어떻게 포함되었는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발생한 리유에 기초한 두 나라 및 두 나라 인민의 모든 재산 및 청구권 호상포기하는 기본원칙≫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의 전체 내용을 규정하고 있는 핵심문제는 상호포기라는 개념에 들어있다.

상호포기라는 것은 북(조선)과 일본 두 나라 및 두 나라 인민이 재산권과 청구권을 서로 포기한다는 뜻이다. 피해자인 북(조선)이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라, 북(조선)과 일본이 재산권과 청구권을 상호포기한다는 것이다. 북(조선)이 일본에 대해서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가해자 일본이 북(조선)에 대해서 재산권과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재산권과 청구권의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 속에는, 참으로 놀랍게도 조일관계의 본질을 규정하는 엄청난 내용이 들어있다. 그것은 북(조선)과 일본이 서로 전쟁을 벌인 교전당사국의 관계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북(조선)과 일본이 서로 전쟁을 벌였으므로, 북(조선)에게도 전쟁피해가 있었고, 일본에게도 전쟁피해가 있었음을 상호인정한다는 것이다.

국제법상 교전당사국 사이에서 적대관계를 청산할 때는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을 쓴다. 옛 소련, 중국이 일본과 국교를 수립할 때, 그 두 나라는 일본에 대해서 각각 교전당사국이었으므로 당연히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적대관계를 청산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열 차례가 더 되는 기나긴 조일수교협상과정에서 일본은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해왔다. 그 이유는 북(조선)의 요구에 굴복하여 만일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을 쓸 경우, 일본은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첫째, 지금까지 일본은 일제 식민지시기에 김일성주석이 영도하였던 조선인민혁명군을 자기들과 전쟁을 벌인 교전당사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김일성주석의 조선인민혁명군은 일제침략군에 맞서 끝까지 싸운 조선민족의 유일한 무장세력으로서, 한(조선)민족의 항일민족해방전쟁을 담당하였던 유일무이한 교전주체다. 그 동안 일본은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한(조선)민족의 항일민족해방전쟁을 부인하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일본이 조선인민혁명군을 교전주체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민족해방전쟁역사를 부정하려는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시킨 역사의 근본을 허물어버리겠다는 악랄한 책동이다.

일본의 억지주장대로, 만일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적대관계를 청산하면, 일본은 조선인민혁명군을 교전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되고, 따라서 조일 관계에서는 교전당사국 사이에서 성립되는 전쟁배상이라는 개념도 성립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교전당사국 인민들 사이에서 성립되는 전쟁피해보상이라는 개념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조선)민족이 일본에 대해서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배상과 보상이다. 배상(reparation)이라는 개념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에 의해서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 가해국이 피해국에게 배상한다는 것을 뜻하는 전쟁배상이라는 개념으로 된다. 배상이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처리과정에서 전쟁에 의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서 패전국이 전승국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1919년 베르사이유조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었던 독일이 전승국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규정했던 것은, 국가간 전쟁배상에 관한 인류사 최초의 국제관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고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일본의 재산을 전쟁배상명목으로 몰수하였으며, 옛 소련도 1945년 8월에 만주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을 점령하고 만주국에 있는 일본의 재산을 전쟁배상명목으로 몰수하였다.

한편, 보상(compensation)이라는 개념은 식민지지배에 의해서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 보상한다는 것을 뜻하는 피해보상이라는 개념으로 된다. 국제법상 배상은 교전당사국들 사이에서만 성립되지만, 국제법상 보상은 교전당사국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국가 대 민간인 사이에서도 성립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범국이었던 독일(당시 서독)은 히틀러 정권이 유태인들에게 저지른 범죄적 과거를 청산하기 위하여 1953년에 이스라엘에게 보상하였다.

한(조선)민족과 일본의 관계에서는 전쟁배상, 식민지피해보상이 모두 성립된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해 제국주의침략전쟁을 일으켰으므로 전쟁배상을 해야 함은 물론, 조선을 식민지화함으로써 조선의 민간인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므로 피해보상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조일평양선언에 들어 있는 ≪재산 및 청구권≫이라는 개념은 전쟁배상과 식민지피해보상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교토통신≫ 2002년 9월 13일자 보도에 따르면, 북(조선)은 2000년 4월부터 10월 사이에 비공식 통로를 통해 재산권과 청구권의 규모를 130억 달러로 제시하였다고 한다.

둘째, 지금까지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조선에 대해 제국주의침략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의 억지주장대로, 만일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적대관계를 청산하면,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 전범국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일본은 지난 시기 옛 소련이나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옛 소련과 중국에 대해서 제국주의침략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에 따라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북(조선)에 대해서는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자신이 북(조선)에 대하여 전범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만일 일본이 한(조선)민족에게 대해서 전범국이 아니라면, 일본이 조선에 대해서 제국주의침략전쟁을 일으켰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부정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경우,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합방조약≫은 국제법적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다. ≪을사조약≫과 ≪합방조약≫은 두 나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서 체결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자기의 침략자적 정체를 은폐하기 위하여 날조하였던 것으로서 국제법상 전면적으로 무효인데도, 일본은 그 두 ≪조약≫이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서 성립된 것으로서 국제법적으로 정당하다는 궤변을 주장해왔다.

만일 ≪을사조약≫과 ≪합방조약≫이 국제법적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면,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며 조선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서 조선에 ≪진출≫한 것으로 된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면, 한(조선)민족이 식민지피해에 대한 배상권과 보상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소멸되고 만다. 결국 이것은 조일관계에서 한(조선)민족의 40년 항일혁명운동사 전체를 부정하는 궤변이 정치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일 두 나라의 적대관계 청산과정에서 상호포기라는 개념을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조일 관계에서 1905년부터 1945년까지 한(조선)민족의 40년 역사가 일본의 정치적 승리에 의해서 소멸되느냐 마느냐 하는 최대의 정치문제가 된다. 일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끈질기게 거부해옴으로써 한(조선)민족의 40년 역사를 감히 부정하려는 범죄적 책동을 계속하였다. 바로 이것 때문에 조일 국교정상화는 단 한 걸음도 진척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상호포기라는 정치적 개념을 명백하게 조일평양선언에 포함시킴으로써 한(조선)민족의 40년 항일혁명운동사를 감히 부정하려는 일본의 집요한 책동을 결정적으로 파탄시켜 버리는 대승리를 이룩하였다. 조일평양선언에 상호포기라는 개념이 포함된 것 하나만으로도 조일정상회담은 북(조선)의 정치적인 완승으로 빛나게 장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이 지난날 자국의 전후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는 과정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은 전범국이며 패전국인 일본을 상대로 하여 전승국인 미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나라들 사이에서 전쟁상태를 종식시킨 다자간 국제조약이었다. 일본은 전후처리과정에서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버마(미얀마의 당시 나라이름), 중국(당시 대만정부)과 별도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5개월 전에 일본과 미국은 남(한국)을 조인당사국으로 참가시키지 않는다는 밀약을 맺었다. 1951년 4월 23일 당시 일본총리 겸 외상이었던 요시다 시게루와 당시 미국 국무부 특별고문이었던 존 덜레스 사이에서 체결된 비밀각서가 그것이다. 요시다는 그 비밀각서에서 ≪조선은 일본과 전쟁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만일 조선이 조인당사국이 되면 재일조선인들은 연합국 국민들과 동등하게 재산과 보상금의 권리를 주장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남(한국)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조인당사국에서 배제시킨 미국과 일본의 밀약은, 일제에 맞서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한(조선)민족의 항일민족해방전쟁의 역사, 항일혁명운동사를 모조리 부정하려는 국제범죄책동의 일환이었다. 한(조선)민족의 항일민족해방전쟁의 역사, 항일혁명운동사를 부정하려는 일본의 집요한 책동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65년 6월에 박정희군사독재정권이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려 할 때, 남(한국)의 전체 민중이 들고일어나 결사적으로 저지투쟁을 벌였다. 당시 북(조선) 정부와 인민, 그리고 남(한국)의 전체 민중이 ≪한일기본조약≫을 용납할 수 없는 제2의 식민지협정이라고 단죄하였던 것은, 일본정부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침략사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는데도 박정희군사독재정권이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에 굴복·맹종하여 그 ≪조약≫을 체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족적인 반대와 투쟁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박정희군사독재정권에 의해서 이른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일관계에서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한(조선)민족의 40년 역사가 부정되고 말았다. 남(한국)이 아무리 자기의 4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해도, 그 주장은 적어도 한일관계에서는 국제법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1951년 미국과 일본의 밀약에 의해서, 그리고 1965년 일본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공모·결탁에 의해서 한일관계에서 국제법적으로 소멸되었던 한(조선)민족의 40년 역사는, 이번에 조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정치적 영도력에 의하여 37년만에 되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눈에 평범하게 보이는 상호포기라는 이 하나의 단어 속에는, 한(조선)민족의 근대사를 국제법적으로 소멸시키려는 일본 지배세력의 간교한 책동을 파탄시킨 위대한 정치적 승리가 농축되어 있으며, 일본 지배세력과 공모·결탁하여 자기 민족의 역사까지 팔아버린 민족반역자들의 용서하지 못할 범죄를 일거에 청산한 혁명적 조치가 들어 있다.

조일평양선언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내용은, 조일 두 나라가 재산권과 청구권을 상호포기하는 기본원칙이 적용되는 기간을 1945년 8월 15일 이전으로 정했다는 사실이다.

조일 두 나라가 과거사를 청산하는 문제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점령한 시기에 자행했던 지배·착취·약탈·전쟁범죄에 관하여 반성·사죄하고 그에 대하여 배상·보상하는 문제만이 아니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이후 지금까지 일본이 북(조선)에 대하여 자행해왔던 범죄적 과거사도 청산해야 한다.

8.15 이후에 일본이 북(조선)에 대하여 자행한 범죄적 과거사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일본이 한국(조선)전쟁에 참전하였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한국(조선)전쟁에 병력을 파견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조선)전쟁에 요구되는 전쟁정보, 후방기지, 전쟁물자를 미국에게 자발적으로 제공하였다. 남(한국)의 한 방송사가 지난해에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한국(조선)전쟁 당시 일본 우익의 대표자였으며 자민당을 설립한 고마다 요시로는 미군사령관 맥아더에게 보낸 ≪일본 참전 요청서≫에서 ≪동양인은 동양인이 잘 안다.≫고 하면서 참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참전의 대가로 한(조선)반도를 다시 통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한국(조선)전쟁에 일본이 어떻게 개입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역사자료들은 모두 북(조선)에 보관되어 있다. 조일 두 나라가 적대관계를 청산하려면, 일본은 자기들이 한국(조선)전쟁에 개입하였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반성과 사죄, 그리고 배상과 보상을 하여야 마땅하다.

또한 일본은 한국(조선)전쟁 이후에도 미국의 북(조선) 적대정책에 자발적으로 추종하여 자기 영토를 미국이 북(조선)을 공격할 수 있는 군사기지로 제공하여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조일 두 나라가 적대관계를 청산하려면, 일본은 자기들이 한국(조선)전쟁 이후 지금까지 자기의 영토를 미국에게 군사기지로 제공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사죄하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조선)전쟁 참전문제나 미국에 대한 군사기지 제공문제는 조일관계가 아니라 조미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풀릴 수 없는 문제들이다. 일본은 미국의 동북아시아정책을 추종하는 하위동맹국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번 조일평양선언에서는 일본이 과거사를 청산하는 기간을 1945년 8월 15일 이전으로 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이 한(조선)민족에게 저지른 죄행을 청산하는 문제는 이처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일본의 죄행을 청산하는 문제를 놓고 일본과의 타결점을 찾지 못하여 2003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결정적인 시점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먼저 국교를 수립하는 정치협상을 이끌어 가면서 배상 및 보상문제를 해결해나간다는 비상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7. 일본이 조선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반환하는 문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2002년 2월 4일자 아시아판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일본은 19세기말부터 1945년 8월까지 적어도 10만 점 이상의 진귀한 문화재를 조선에서 마구 약탈해갔다. 일본의 약탈자들과 관변 고고학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수많은 왕릉을 도굴하여 금세공품과 옥장식품, 고려청자, 돌조각품, 석탑 등을 국보급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약탈해간 것은 물론, 조선의 사찰들에 보관되어 있던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사리함들, 그리고 서울의 장서각들과 지방의 서원들에 보관되어 있던 진귀한 고서 수만 점을 약탈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약탈자들은 고려 왕릉에서만 발견되는 청자 등 최고로 엄선한 국보급 문화재는 일본 국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타임≫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일본의 점령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1948년에 있었던 라디오 연설 녹취록을 발견하였는데, 그 녹취록에는 ≪군사행동과 점령에 의해서 상실되거나 파괴된 문화재의 원상복귀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소수의견일지라도 아주 강력히 반대한다. 조선의 문화재를 반환하는 문제는 미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을 악화시키고, 일본을 이념적 압력에 취약하게 만들며, 전복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것은 미군정 당국이 일본의 문화재 약탈자들을 비호하여 일본의 조선 문화재 약탈범죄를 은폐하고 약탈한 문화재를 반환 받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조선의 문화재를 마구 약탈한 일본의 범죄에 대해서는 조일 국교정상화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될 것이며, 일본은 조선에서 약탈해간 국보급 문화재를 모두 반환하여야 할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에서는 일제가 약탈해간 모든 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로 인정해 버렸지만, 이번 조일평양선언에서는 ≪문화재 문제에 대하여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성실히 협의하기로≫ 규정하였다.

8.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문제

조일평양선언은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하여 ≪쌍방은 재일조선인들의 지위문제에 대하여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성실히 협의하기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일본사이에 체결되었던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에서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일본정부와 일본사회의 차별정책을 일본정부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버림으로써 아예 포기하였다. 이것은 해외동포의 안전과 이익을 보호해야 할 법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를 지고 있는 본국 정부가 그 책임과 의무를 내던진 것이다. 제 나라의 역사도 내던지고 청구권도 헐값에 팔아 넘긴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었으므로, 재일한국인에 대한 책임과 의무 같은 것은 처음부터 관심밖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정부의 법적, 제도적 차별, 그리고 일본인들의 사회적 차별이 극심하다는 사실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폭로·규탄되었다. 지난 시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백인정권이 흑인들에게 자행하였던 이른바 아파르테이트 인종차별정책이 전세계적으로 비난과 규탄의 대상이었지만, 오늘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민족차별정책은 더욱 심하고 그 악의 뿌리가 깊다.

재일조선인사회의 장래운명은 조일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있다.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해외공민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일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 나라의 해외공민인 재일조선인들의 법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재일조선인을 무국적자로 취급해왔던 것이다.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정부로부터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겪어야 했던 피해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제 조일 두 나라가 국교를 수립하면,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을 무국적자가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해외공민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차별정책을 철폐하게 된다.

북(조선)이 자국의 해외공민의 안전과 이익을 책임지는 것은 조국으로서의 신성한 의무이며, 조선민족의 한 구성부분인 해외동포들에 대한 민족적 책임이다. 지금까지 북(조선)은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고 책임을 수행하기 위하여 각별히 힘써왔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러할 것이다. 앞으로 진행될 조일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문제는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올바로 처리할 것으로 기대된다.

9. 일본인행방불명자 처리문제

일본은 한(조선)민족의 현대사에서 언제나 침략자, 약탈자, 가해자였으므로, 과거사 청산의 내용은 결국 일본이 반성·사죄하고 배상·보상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일본은 조일수교협상에서 침략자, 약탈자, 가해자로서의 정체를 가려보려고 무분별하게 행동해오던 끝에 일본인행방불명자 문제를 들고 나왔다.

만일 일본인행방물명자 문제마저 없었다면 일본은 조일수교협상에서 완전히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조일수교협상에서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일본인행방불명자 문제를 엄청나게 확대·왜곡하면서 악착같이 그 문제에 매달리게 되었다. 일본 언론이 거기에 맞장구를 쳤음은 물론이고, 일본 인민들이 언론의 선동적 보도에 휩쓸린 것도 물론이다.

원래 교전당사국들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수립하기 위하여 진행하는 정치회담에서는 전쟁시기의 행방불명자 문제를 처리하는 내용이 응당 포함된다. 만일 일본이 행불자 문제를 확대·왜곡하여 조일국교수립에 인위적인 장애를 조성한다면, 북(조선)은 항일민족해방전쟁 시기에 발생했던 조선인 행방불명자 처리문제를 국교정상화회담의 의제로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조선)은 항일민족해방전쟁 시기에 행방불명된 조선인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국교정상화회담의 의제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부당한 주장과 요구 때문에 국교정상화회담이 수없이 결렬되었으므로, 만일 조선인행불자문제까지 포함시키는 경우 문제해결이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번 조일평양선언에는 일본인행불자 문제에 관한 내용만 포함되었다. 그 선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조일 두 나라의 비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발생한 이러한 유감스러운 문제가 앞으로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확인하였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유감스러운 문제≫란 ≪일본 국민의 생명 및 안전과 관련한 현안 문제≫인 일본인행불자 문제를 뜻한다.

나는 이 글에서 ≪납치≫라는 개념이 아니라 행방불명자라는 개념을 쓴다. 그 이유는 ≪납치≫는 대상자에게 가혹행위를 가하는 명백한 범죄행위임을 이미 규정하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일본인 11명이 행방불명된 사건은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인 데도, 일본은 그 사건을 무조건 ≪납치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북(조선)을 ≪범죄자≫로 규정하려는 의도가 드러나 보인다.

행방불명된 일본인들이 북(조선)에 들어가서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북(조선)에서 살다가 병사하거나 사고사하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런데 그 일본인들이 어떻게 북(조선)에 들어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강제로 납치되었는지, 아니면 유인되었는지 정확한 진상은 아직 모른다.

이번에 밝혀진 사실은, 북(조선)의 특수기관에서 그 일본인들을 데려갔다고 한다. 데려가는 방식이 강제납치이었는지, 유인이었는지는 명백하게 밝혀진 바 없다. 그 일본인을 왜 데려갔는가 하는 문제가 밝혀져야 강제납치이었는지 유인이었는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에 등장하는 북(조선)의 특수기관이란 첩보기관인 것으로 보인다. 남(한국)이나 일본에 대한 첩보활동을 담당하는 북(조선)의 특수기관에서 첩보원 신분을 일본인으로 위장하려고 하였으므로 일본인을 데려갔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어느 나라나 첩보기관의 활동은 자국 안에서도 철저한 비밀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북(조선) 특수기관의 첩보활동에 대해서 북(조선) 정부의 다른 기관에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지금까지 일본인행불자 문제에 대한 북(조선) 정부의 공식견해가 전면부인, 또는 일본의 날조극이라는 주장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조일수교협상이 물밑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자 일본인행불자 문제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였으며, 그에 따라 해당기관이 진상을 밝혀냈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 대한 첩보활동은 북(조선)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있는 일반적인 활동이므로, 북(조선)의 대외첩보활동 자체를 문제로 삼을 수는 없다. 문제는 다른 나라 사람인 일본인을 첩보활동에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는 적대국 국민을 자기들의 첩보활동에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아직 전쟁상태를 청산하지 못한 조일관계에서 북(조선)이 적대국인 일본의 국민을 첩보활동에 이용하였던 것은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없다. 다만 여기서 부각되는 쟁점은, 북(조선)의 특수기관이 일본인을 첩보활동에 이용할 때 강제로 이용했는가 아니면 유인하여 이용했는가 하는 문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첩보기관이 자기의 활동에 대한 협조자를 확보하려면 자발적인 협조자를 확보하여야 하지 강제로 할 수는 없다. 강제로 하는 것은 협조자가 아니라 인질을 확보하는 것이다. 인질은 본인의 의사를 짓밟고 납치하는 대상이고, 협조자는 자발적으로 협조하도록 유인하는 대상이다. 미국의 중앙정보국이나 남(한국)의 국가정보원에서 협조자를 확보하는 경우에도 자발적으로 협조하도록 유인하는 공작을 벌이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강제로 납치한 인질은 첩보공작에서 쓸모가 없다.

물론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대상, 정치적 중요성이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납치공작을 자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북(조선)의 특수기관이 데려간 일본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일본정부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을 협조자로 만들 때는 그들을 인질로 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협조하도록 유인하는 법이다.

이번에 일본인행불자들 가운데는 제3국에 거주하던 남녀가 함께 북(조선)에 들어간 경우가 두 번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일본인행불자들 가운데는 조선노동당원이 되어 평양에서 살면서 그 동안 일본정부측 인사들을 평양에서 만난 사람도 있다. 이것은 일본인행불자들이 가혹행위에 의해서 강제납치되지 않고 유인에 의해서 북(조선)에 들어가 살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북(조선)은 일본인행불자들 가운데 생존자가 일본으로 귀국하거나 일본의 고향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하였는데, 이것 역시 일본인행불자들이 가혹행위에 의해서 강제납치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번 조일정상회담에서 일본이 얻어낸 성과가 있다면, 일본인행불자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은 것이다.

10. 결론을 대신하여: 제3차 대사변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이 논문을 시작하면서, 2000년 6월의 남북최고위급회담이 제1차 대사변이고, 2002년 9월의 조일정상회담이 제2차 대사변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제3차 대사변은 당연히 조미정상회담이 될 것이다.

이미 클린턴정부 말기에 조미정상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기로 일정에 올라있었다가 성사되지 못했다. 이제 부시정부가 그 뒤를 이어 조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두 나라 사이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며 국교를 수립해야 할 시기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다.

제3차 대사변으로 될 조미정상회담은 그 이전에 있었던 두 차례의 대사변을 능가하는 한(조선)민족 현대사의 최대 사변이 될 것이며, 전세계를 경탄케 하는 21세기 대사변이 될 것이다. 조미정상회담과 그에 의해서 진행될 조미국교수립은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변화·발전시킴으로써 조국통일의 결정적인 국면을 열어놓을 것이다.

20세기초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빼앗긴 자기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항일민족해방운동에 피땀을 흘렸던 민족, 20세기 중엽부터는 미국의 분단고정화 책동에 맞서 조국통일운동에 피땀을 흘려야 했던 민족, 그 100년의 수난사를 피어린 투쟁으로 헤쳐온 동방의 위대한 민족은 이제 20세기 제국주의시대가 강요한 모든 불행과 고통을 극복하고, 자주적으로 통일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어서고 있다. 21세기의 동아시아 판도를 뒤바꾸어놓을 자주시대의 눈부신 여명은 동방의 사회주의나라에서 그렇게 밝아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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