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2(2003)년 3월 17일(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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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할바령에서

 김일성주석 ≪세기와 더불어≫

통일여명 편집국 주해 2-41

 

소할바령회의는 항일혁명의 최후승리를 앞당기며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튼튼히 갖추어나갈 데 대한 새로운 전략적 방침을 채택한 중요한 역사적 회합이었다.

소할바령회의는 항일혁명이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조선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이 안고 있던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고 화를 복으로 바꾸기 위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바치신 피타는 노고와 열정의 소산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 회의의 준비와 그 진행과정을 두고 하신 여러 차례의 교시를 새롭게 되새겨 본다.

홍기하에서 ≪마에다토벌대≫를 소멸한 다음 우리는 화라즈의 수림속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걸어온 노정에 대한 총화를 하였습니다. 그것을 20만리장정총화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걸어온 노정이 20만리나 된다는 뜻입니다.

이 장정에서 거둔 성과를 공고히 하고 혁명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자면 일도 더 많이 하고 험한 길도 더 많이 걸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장정에서 이길 수 있게 된 기본요인은 정치사상적 우월성과 유격전술에 있다, 이것이 20만리장정의 주되는 총화이다, 조성된 정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엄중하다, 조성된 정황과 지대적 특성에 맞게 다양한 유격 전술과 전법을 능숙하게 활용하자, 인민들속에 깊이 들어가며 대중정치사업도 강화하자, 혁명의 최후승리를 위하여 수십만 리를 더 걸을 각오를 가져야 한다,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추호의 동요도 없이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해 나가자, 앞으로도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적들을 호되게 답새기자고 호소하였습니다.

1940년 봄이면 ≪노조에토벌사령부≫가 인민혁명군에 대한 공세를 종전보다 더 요란스럽게 할 때였습니다. 병력도 더 많이 들이밀고 혁명군을 소멸하기 위한 ≪토벌≫계획도 이모저모로 더 빈틈없이 세웠습니다.

형세가 이런 판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도권을 잡자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주동에 서서 계속 적들을 압도해 왔는데 시국이 어떻게 변하든지간에 주도권만은 앞으로도 계속 틀어쥐자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믿고 주도권을 쥐자고 했는가. 정신력과 전술을 믿었습니다. 우리 혁명군이 인적 후비나 무장장비에서는 적들보다 열세했지만 정신력이나 전술에서는 그들보다 훨씬 우세했습니다. 문제는 어느 쪽이 더 우월한 용병술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게 우리 편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화라즈골안에 들어갔을 때까지도 ≪노조에토벌대≫들은 다 산간지대들에 있었습니다. 혁명군이 드나들만한 길목들에 떡 버티고 서서는 좀처럼 물러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회의에서 주도권문제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사실 우리를 둘러싸고 있은 정황은 몹시 불리했습니다. 노조에는 동만의 병력으로는 성차지 않아 통화쪽에서도 응원대의 명목으로 병력을 끌어온다고 하였습니다. 오백룡의 말에 의하면 그 병력이 벌써 연길, 돈화 현경의 양병대쪽에 도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백쪽에서도 무슨 공작대라는 명칭을 가진 병력이 새로 증강해왔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이 역량을 증강하면서 ≪토벌≫을 계속 확대하고 있는 형편에서 장차 어떤 방법으로 그에 대처해야 하는가.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의 미명하에 감행된 적의 첫 단계 대≪토벌≫은 대부대선회작전의 방법으로 격파했는데 그보다 더 악랄하고 집요한 공세는 무엇으로 파탄시키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대부대선회작전이 은을 냈다고 하여 지금에 와서도 그런 방법을 되풀이하겠는가, 아니면 다른 전술로 나가겠는가, 동서방의 정세를 보면 독일과 일본이 강행하고 있는 전쟁의 불길이 조만간에 온 세계를 휩쓸게 되고 모든 열강들과 군소국가들이 다 그 불길에 말려들어가게 되겠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장래를 예견해서 어떤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앞에는 당면한 적의 ≪토벌≫을 격파하기 위한 전술적인 대책과 함께 급변하는 정세의 요구에 맞는 새로운 전략적 노선을 확립해야 할 과제가 동시에 제기되었습니다.

나는 우선 홍기하전투 후에 조성된 난국을 이겨내기 위한 전술적 방안을 세워나가면서 새로운 전략적 구상을 무르익히기로 하였습니다.

적들은 그 당시 산간지대에 모든 역량을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잡자면 분산활동으로 넘어가 야산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적들이 성시나 집단부락들은 경찰과 자위단에 맡기고 기본역량을 산간지대에 집중하고 있는 조건에서 배후를 교란시켜 ≪토벌≫역량을 분산시키는 것만이 승산이 확고한 전술이었습니다.

이런 타산에 기초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1940년 4월 중순 화라즈밀영에서 은밀히 빠져나와 적들의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을 최종적으로 파탄시키기 위한 싸움의 길에 나섰습니다. 우리는 먼저 소사하유역에 있는 큰 집단부락들인 동남차와 양초구를 동시에 치고 뒤따르는 적들을 수개봉골짜기에서 소멸한 다음 적의 병력을 떼버리고 처창즈쪽으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연길과 왕청 일대에서 활동하던 안길, 최현의 부대들도 주력부대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현의 중심지대들에서 적배후교란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몇 개 부락에서 총소리를 냈지만 적들은 별로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적들을 분산시키자면 좀 더 큼직한 미끼를 던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도현성 동쪽에 있는 3개 부락을 동시에 치기로 하고 어느 날 밤 남2도구, 북2도구, 신성툰에 대한 동시타격전을 벼락같이 해제꼈습니다.

이번에는 적들이 미끼를 덥석 받아 물었습니다. 안도와 화룡현 남부접경지대에서 완강히 버티고 있던 관동군부대들이 안도현성이 당장 떨어지는 줄 알고 와하고 몰려왔습니다. 조만국경을 지키던 국경수비대도 거기에 합세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품을 들여 적들을 안도현 중심부로 끌어들인 것은 적의 역량을 분산시켜 타격하는 것과 함께 두만강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이 움직이는 틈을 타서 또다시 국내에 무장투쟁의 불길을 확대하자는 데도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국내진출임무를 맡고 있던 부대는 김일이네 8연대였습니다. 나는 8연대에 국경일대로 서서히 내려가면서 분산활동을 하라는 과업을 주고 7연대와 경위중대는 안도현 북부로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적을 쳤습니다.

그 후 김일은 소부대 하나를 데리고 살금살금 국내로 들어갔습니다. 그 소부대는 5월중순경에 무산군 삼장면일대에 진출하여 국경수비대에 대한 기습작전을 벌이면서 이틀동안이나 인민들과의 사업을 하였습니다.

미나미총독이 국경으로는 단 한 명의 유격대원도 스며들지 못하게 하라고 호통치던 때에 조선인민혁명군의 1개 소부대가 국내에 뻐젓이 나타나 총소리도 내고 여유작작하게 정치사업도 한 것은 1940년대 전반기의 항일혁명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내진출의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두만강 연안과 안도현의 중부, 북부에서 타격전을 더 맹렬하게 벌려 적들을 녹여냈습니다.

이렇게 되자 ≪노조에토벌사령부≫의 새로운 ≪토벌≫작전은 그 첫걸음부터 된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토벌사령부≫와 ≪지구토벌대≫, ≪소지구토벌대≫사이에서는 매일같이 우가 아래에 책임을 추궁하고 한 인접이 다른 인접에 책임을 전가하는 소동들이 일어났습니다. ≪노조에토벌사령부≫는 새로운 ≪토벌≫지침을 하달한다 어쩐다 하면서 복닥판을 벌였습니다.

우리가 새 작전 준비를 한창 하고 있을 때 남만에서 한인화가 50-60명 가량 되는 1로군의 잔존부대를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위증민이 보내서 왔다고 하면서 우리 부대에 합류해서 활동할 의향이라고 하였습니다. 한인화는 1로군 참모 겸 경위여단 정치위원이었습니다.

우리는 남만부대와의 공동투쟁을 통해 그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6월에 접어들며 동경평과 상대동을 치었습니다. 치고 보니 동경평은 거의 무방비상태였습니다. 10여 일전에 친 부락을 또 치겠는가 하고 모두가 방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후에도 몇 개의 부락을 동시에 들이쳤습니다.

고동하목재소를 습격한 다음날에는 남만에서 온 동무들과 함께 전투에서 노획한 후방물자로 단오명절을 푸짐히 쇠었습니다.

한인화는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내 손을 잡고 위증민이 왜 나를 사령한테 보냈는지 이제야 알겠다, 지금 정세를 보면 간도쪽이 남만쪽보다 훨씬 더 험악한데 적≪토벌대≫들이 노조에나 우메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김사령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진행한 작전에서 얼마나 큰 인상을 받았던지 그는 2방면군이 제일이다, 김사령부대야말로 백전백승하는 부대이다, 이제는 우리도 자신이 있다, 액목이나 돈화쪽에 가서 진한장을 만나고 영안쪽에 가서 주보중을 만난 다음 한 바탕 본때 있게 싸워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대담무쌍한 활동앞에서 일본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 하였습니다.

적들이 내리막길로만 굴러가는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의 형세를 조금이라도 역전시켜보려고 간도전역에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을 때 우리 대오에서는 전혀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대마록구 부근 밀영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방면군 정치주임 여백기가 적들에게 체포되어 부대의 비밀을 속속들이 다 불었습니다.

우리는 여백기의 체포와 투항으로 하여 조성된 난국을 적들에 대한 부단한 공격과 다양한 전술상 변화로 타개하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우선 부대를 소부대화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방면군의 역량을 여러 개의 소부대로 나누어 도처에서 과감하고 영활한 소모전을 벌이자는 것이었습니다. 부대를 소부대화하면 활동에서도 기동성을 보장할 수 있었고 적의 조밀한 경계망도 용이하게 뚫고 나갈 수 있었으며 적들을 다시금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습니다.

부대를 소부대화해야 덩치가 작아지기 때문에 적들에게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날쌔게 자취를 감출 수 있었습니다.

이런 타산이 서게 되자 우리는 지체없이 방면군 역량을 여러 개의 소부대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소부대에 의한 전면적인 소모전을 시작하였습니다.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일본사람들의 공세앞에서 주춤거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맞받아나갔습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적들의 대공세에 위축되어 안전한 곳을 찾아 피해다니기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큰 손실을 입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은 것은 주동에 서서 적들이 정신을 차리기 못하게 연거푸 답새겨댔기 때문입니다.

주체29(1940)년 봄, 여름 작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승리했다는 것은 적들 자신도 인정하였다.

≪추기, 춘기 토벌의 예봉을 교묘하게 빠져나간 비단은 번무기를 타서 여러 곳에서 맹활동을 하며 특히 최근에 있어서는 제2, 제2선의 후방부락까지 적극적 습격을 하여오는데 그 상태는 참으로 방약무인이며 피해도 또한 적지 않게 보고 있은 것은 여러 분과 함께 극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일만군대, 헌병, 경찰, 철도경호대, 협화회 등 모두 수만 명이다. 아무리 계절의 영향과 지형이 불리하다 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위력을 떨칠 수 있게 하는 그 원인은 첫째로 토벌사령관인 나를 비롯하여 모두의 책임에 있다는 것은 물론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최근의 정황을 관찰하여보면 특히 토벌대 및 각 기관의 융화단결과 그의 동태에 내포된 수많은 약점과 결함이 현저하여 숙정제공작의 추진을 저애하며 나아가서 비단의 활동을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를 통감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움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치안숙정관계서류≫ 노조에토벌사령부, 소화 15년(1940))

1940년 봄과 여름의 작전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소부대활동에서 많은 경험을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종전까지 우리는 경우에 따라 소부대활동도 했지만 주로는 대부대활동을 벌여왔습니다.

그러나 1940년 여름에는 소부대들을 단위로 하여 도처에서 연속타격, 반복타격, 동시타격과 같은 영활한 전법들을 많이 적용하였습니다. 이 과정에 우리는 적들이 ≪토벌≫역량을 증강하고 포위망과 경비망을 물샐틈없이 칠 때일수록 전투단위를 작게 하여 소부대활동방식으로 유격전을 벌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중요한 경험을 새롭게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음 단계의 전략적 과업과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방도를 수립하는데서 큰 밑천으로 되었습니다.

이런 밑천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 해 8월에 열린 소할바령회의에서 대부대활동 대신 소부대활동을 하자고 주장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미 축적한 경험도 있고 자신심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소부대활동을 1940년대 전반기의 주되는 투쟁형식으로 삼고 계속 주도권을 틀어쥐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소할바령회의 이전에는 대부대활동만 하고 소부대활동은 그 이후에만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유격전의 특성은 조성된 군사, 정치 정세와 환경에 따라 임기응변하는데 있습니다. 소부대활동은 대부대활동이 위주였던 1930년대 후반기에도 중시되어 왔으며 필요에 따라 적용하였습니다.

1940년 상반년에 활발히 진행된 소부대분산활동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소할바령회의 이후부터는 모든 빨치산부대들이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이행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대부대선회작전의 후일담입니다. 역사학자들이 이 부분 연구에서 공백이 많다고 하기 때문에 오늘 공을 들여 말해주었습니다.

소할바령회의를 기준으로 하여 문제를 본다면 1940년 봄과 여름에 우리가 벌인 활동은 그 회의의 준비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세의 흐름에 맞게 전략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구라파에서 일어난 전쟁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던 때부터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동아공영권≫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전쟁을 결속하지 못한 채 동남아시아지역에로 전쟁의 불길을 확대하려고 미쳐 날뛰면서 ≪후방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최후발악을 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적들의 우리에 대한 대대적이고 끈질긴 ≪토벌≫공세와 우리 인민에 대한 파쑈적 폭압과 약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악랄해진 것은 바로 이러한 침략정책의 강화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확대하면 확대할수록 국제국내적으로 더욱더 고립되고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헤어날 수 없는 궁지에 깊숙이 빠져들어간다고 보았습니다.

전반적인 정세는 일제의 멸망이 확정적이고 시간문제이며 우리 인민이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성취할 날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나는 지난 10년간의 항일무장투쟁행정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들을 총화하고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여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역량보존축적을 잘할 데 대한 새로운 노선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잘 해나가는 것은 당시 우리 혁명발전의 합법칙적 요구로 되었습니다.

새로운 전략적 단계에로 넘어가자면 객관적인 정세변화 일면만 보고 거기에 피동적으로 따라가는 식으로 되어서는 안되며 언제나 주동에 서서 투쟁을 끌고 나가며 최후승리를 앞당길 수 있는 주체적 역량에 대한 타산과 지난 시기의 투쟁에 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선 선행단계에서 규정한 전략적 과제가 해결되었는가를 따져보았습니다.

남호두회의에서 제시된 전략적 임무를 꼼꼼히 따져보았지만 미해결문제는 없었습니다. 당창건을 위한 조직사상적 기초축성,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과 확대발전, 국경지대에로의 진출,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는 문제… 어느 것이나 해결되었다고 총화할 수 있었습니다.

무장투쟁의 전략적 단계를 규정하는데서 반드시 고려해야할 다른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적아의 역량관계의 변화입니다.

숫자상으로 볼 때 적아의 역량은 대비도 되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그때 우리를 ≪창해일속≫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다속의 좁쌀알만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보통상식으로써는 역량대비라는 말이 성립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량대비방법은 그런 산술적 비교법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군대 한 명이 백 명의 적, 천 명의 적을 당해낸다는 것이 우리 식의 비교법이었습니다.

남호두회의가 있은 후 조선인민혁명군은 정치사상적으로나 군사기술적으로 급속히 자라났습니다. 우리 군대는 수적으로는 비록 적들보다 적었으나 수십 배 또는 수백 배되는 대적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승리하는 싸움만 해왔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 인민혁명군은 그 어떤 정황에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다양한 전법과 전술을 소유한 강군으로 자라났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군사적 사명과 함께 정치적 사명도 동시에 수행하는 새 형의 특수한 혁명군대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 뿐 아니라 전반적 조선혁명수행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차지하고 있는 확고한 영도적 지위와 증대되는 핵심적 역할우리가 혁명무력건설을 튼튼히 틀어쥐고 그것을 모든 사업에 선행시키는 원칙을 견지한 것이 천백번 옳았다는 것을 뚜렷이 실증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주권전취를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서 정치적 영도기관으로서의 당을 먼저 꾸리고 그 다음에 무력건설에 착수하는 것이 하나의 원리로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혁명투쟁, 특히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혁명무력, 폭력적 진출이 가지는 결정적 역할과 당시 우리 나라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먼저 무력을 건설하고 다음에 당을 건설하는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우리는 1932년 4월에 첫 혁명적 무장력으로서의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그것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확대발전시켰으며 바로 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의거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의 불길을 높여나가면서 전반적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새로운 앙양에로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의 영도와 무력적 담보밑에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도, 조국광복회조직과 통일전선운동의 확대발전도, 전민항쟁 준비도 성과적으로 이끌어나갔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항일혁명시기 우리 혁명의 중추적 핵심역량이며 정치적 향도자이며 민족적 이익의 무력적 담보자였던 조선인민혁명군은 그대로 우리의 군대이자 당이고 정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전략적 단계의 과업을 능히 맡아 수행할 수 있는 주체적 핵심역량이 믿음직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민대중의 의식화, 조직화를 다그쳐 그들을 정치사상적으로 준비시키는 사업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때 조국광복회 산하 회원이 20여 만이나 되었습니다.

국내에는 또한 노동자돌격대나 생산유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조직들이 모체가 되어 도처에서 전민항쟁을 위한 무장부대들을 조직하고 있었습니다.

비조직군중들의 동향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 무렵에 김일이네가 국내에 나와 적을 치고 두만강쪽으로 행군해가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대오의 뒤로 어떤 절름발이 농사군이 부지런히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유격대 어른들이 이곳으로 두만강을 건느자고 하는 것 같은데 오늘저녁에는 다른 길로 가야 하우다. 이 근방에는 놈들이 쭉 깔렸수다.≫하고 말했습니다.

김일이네는 그가 제공해준 정보를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결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파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무들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그 농민은 품에서 신문쪼박지를 꺼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런 사람이나 믿어도 되우다.≫라고 하였습니다. 손바닥만한 신문쪼박지를 내놓고 자기를 믿어달라 하니 우리 동무들은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참 훑어보니 거기에 실린 글이 1939년 5월의 무산지구전투를 소개한 보도기사였습니다. 오랜 유격투쟁의 감각으로 정보를 가지고 온 사람이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더러 어느 쪽으로 가야 두만강을 무탈하게 건너갈 수 있는가고 물었습니다.

농민은 자기가 안내하는 데로 가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거기도 경비는 서지만 다 혁명군 편을 드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날 밤 우리 동무들은 그 농민의 도움으로 두만강을 무사히 건너갔습니다.

경비에 끌려나왔던 마을의 주민들은 유격대가 강을 건너가는 것을 보면서도 못 본 체하고 눈을 감아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가 얕수다.≫, ≪거기는 깊수다.≫하면서 길안내까지 해주었습니다.

인민대중의 정치사상적 준비의 강화와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는 항일무장투쟁을 확대발전시키는데서 여전히 위대한 추동력으로 되고 있었습니다.

무장투쟁의 전략적 단계를 규정하는데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다른 하나의 문제는 적의 전략전술적 기도에서 일어나는 변화였습니다.

1940년 여름에 우리는 황구영 도로공사장에서 일본공병장교를 포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장교를 심문하는 과정에 우리 동무들은 적들이 간도일대와 남만쪽에서 방대한 군용도로망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안도현을 중심으로 하여 화룡, 연길, 돈화, 화전, 무송은 물론, 국내와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백두산동북부의 험한 골짜기들에까지 도로를 건설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군용도로들의 건설정형은 ≪노조에토벌사령부≫를 거쳐 관동군사령부에까지 매일같이 보고되었습니다. 포로된 공병장교의 말에 의하면 노조에사령관이 오래지 않아 공사중에 있는 도로들을 시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도로는 인민혁명군을 ≪토벌≫할 때 써먹자는 기동로였습니다. 영만 떨어지면 이 도로들로 조선과 동북땅 여기저기에서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으로 숱한 병력들이 쓸어들 판이었습니다.

적들은 우리의 주변에 비행장들도 대대적으로 건설하였습니다. 야전비행장들은 노조에의 극비지령에 따라 동남부 3성에다 건설된다고 하였습니다. 공병장교는 자기가 아는 야전비행장의 위치와 비행기들이 ≪지구토벌대≫는 물론, ≪소지구토벌대≫에도 전속된다는 것까지 실토하였습니다.

그 장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적의 야전비행장들로 포위되어 있는 셈이었습니다.

적들은 이 무렵에 ≪노조에토벌사령부≫를 길림으로부터 연길로 옮기려 하였습니다. 연길에 있던 ≪동지구토벌대≫사령부도 도문으로 옮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활동지역들에 적의 병력이 끊임없이 증강되고 있다는 정보자료들과 정찰자료들이 사령부로 계속 날아들었습니다. 징후들을 보면 적들이 오래지 않아 어떤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판을 내려고 잡도리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적정의 급격한 변화는 종전의 전략적 방책만으로써는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의 전략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이로부터 나는 무모한 전투로 인한 손실을 피하면서 주동적인 행동으로 혁명역량을 보존축적하는 것을 우리 혁명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과업으로 제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전략적 방침은 1940년 8월에 소집된 소할바령회의에서 채택하였습니다.

우리가 안도-돈화현경에 이르렀을 때 15연대장 이용운과 임철중대장이 4~5명의 호위성원들을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주재일에게 소할바령에서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게 되는 취지를 말해주고 그 회의를 위해 중대장, 중대정치지도원 이상의 군정간부들을 다 불러오라고 하였습니다. 도착날자는 8월 9일, 음력으로 7월 7석 전까지 다 모이게 하되 왕청, 동녕쪽에 가 있는 안길, 최현에게는 훗날 회의결과를 통보하게 하고 13연대와 14연대들에서는 가까이에서 활동하는 중대들에만 연락하라고 하였습니다. 15연대에서는 이미 이용운과 임철이 왔기 때문에 더 부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소할바령회의는 10일부터 11일까지 이틀동안 하였습니다.

회의과정에 크게 논의된 문제는 앞으로의 전략적 단계를 혁명적 대사변의 시기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여 다음 단계에 들어가서 조국해방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마디로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물론 지금도 일본군대는 강하다, 그러나 망해가는 군대다, 일본군이 망해가는 군대라는 것은 관동군의 정예라고 하는 공군부대에서 폭동이 일어난 사실만 보고서도 알 수 있다, 도주자와 의거자가 속출하기 때문에 중일전쟁마당에서도 그 단속을 하느라고 쩔쩔맨다고 한다, 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일본이 패망할 날도 오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은 얼마 전부터 특별지원병령인가 뭣인가 하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조선청년들을 대포밥으로 내몰고 있었습니다. 대만과 만주에서도 이런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일본이 자기네한테 원한을 품고 있는 식민지나라의 청장년들을 대포밥으로 끌어갈 지경이 되었으니 병력의 부족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러겠는가.

9.18사변 후 7.7사변 전까지 일본군은 만주에서만도 근 20만에 달하는 병력의 손실을 보았습니다. 중일전선에서는 한 해에 그보다 더 큰 손실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전략물자의 예비도 한계점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소할바령회의 직전에는 적들이 탄알도 1939년 이후에 생산한 것을 썼습니다. 간삼봉전투 시기에 사용한 탄알들은 1920년대에 생산한 것들이었습니다. 탄약의 예비도 바닥이 났다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정계도 대단히 복잡했습니다. 사흘이 멀다하게 내각이 교체되고 입씨름질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군부도 모순투성이었습니다. 군장성들과 장교들이 여러 파로 가라져 옥신각신하게 되니 작전에서 통일성과 협동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노자간의 모순, 군민간의 모순, 종주국과 식민지간의 모순이 폭발직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본토의 주민부락들에도 정보원들을 박아 넣어 국민의 입에 자갈을 물리는 판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회의에서 우리가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는데서 일본의 국책이 구라파에서 일어난 전쟁을 이용하여 동남아를 치자는 속심을 공공연히 내비친 것으로서 만일 일본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경우 그것은 그들 자신이 제 무덤을 파는 길로 되리라는 점을 특별히 고려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회의에서는 대사변의 시기에 실행해야할 전략적 과업에 대해 토의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사업에서 조선혁명의 중추역량인 조선인민혁명군의 역량을 보존축적하면서 그들을 유능한 정치군사간부로 키우는 것을 새로운 전략적 과업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 대사변은 적아 쌍방의 정치군사적 잠재력이 최대한으로 동원되는 최후결전을 전제로 하는데 그런 결전에서 승리자가 되자면 매개 대원들이 종전보다 몇 등급 높은 직무를 수행해야 하였습니다. 조국이 광복되면 바로 그 대원들이 핵심이 되어 새 조국건설도 해야 하였습니다.

최후결전과 새 조국건설, 이 두 가지는 우리 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고 우리 인민의 운명에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전략적 과제로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대신해줄 수도 없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해야 하고 조선인민이 해내야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이 이 장기간의 항일혁명과정을 통해 마련한 주체적 역량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인이 되어 최후결전을 벌일 때 남들이 스스로 우리를 도와주면 좋은 것이다, 그래서 동무들, 수준을 두세 등급씩 높일 수 있는가고 물었더니 다들 자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전민을 무장시켜 항쟁에 동원시킬 수 있는가고 물었더니 그것도 해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전략적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대부대작전으로부터 소부대작전으로 이행할 데 대한 새로운 투쟁방침을 제시하였습니다.

물론 이 안을 두고서도 논의는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적이 도처에서 대무력으로 달려들 때 우리가 대부대로 맞서지 않고 소부대로 대결하게 되면 각개격파 당하지 않겠는가고 우려하였습니다.

나는 그런 동무들에게 대부대전성기는 지나갔다, 대부대로 와와 밀려다닐 때가 아니다, 적들이 대병력을 동원하여 우리를 단꺼번에 그물에 잡아넣어 일망타진하려고 할 때 우리가 대부대작전을 계속한다면 것은 적들의 계책에 빠져 자멸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호박을 쓰고 돼지우리로 들어가는 격으로 된다, 소부대단위로 움직이면서 싸움도 하고 대중정치사업도 하면 식량도 쉽게 해결할 수 있고 기동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식량을 해결하려다가 적들에게 희생되었는가, 그런데 그렇게 목숨과 바꾼 식량도 대부대가 나누어 먹다나니 얼마 못 가고 인차 바닥이 나군 하지 않았는가, 소부대로 활동하게 되면 적의 역량도 최대한으로 분산시킬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이번 봄과 여름에 진행한 소부대타격전의 전 과정이 증명해준다, 과녁을 작게 하자는 것이 우리의 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전략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조선과 만주의 광활한 지대에서 소부대군사활동을 영활하게 전개하면서 대중정치사업을 강력히 벌이며 매개전사들과 지휘관들의 정치군사지식수준을 높이기 위한 사업을 빨리 조직하며 세계의 모든 반제역량과의 연대성을 강화할 데 대하여 다시금 강조하고 구체적인 대책들을 합의한 다음 회의를 끝냈습니다.

소할바령회의는 항일무장투쟁의 중요한 전략적 노선들을 제시한 1931년 12월의 명월구회의, 1936년 2월의 남호두회의와 더불어 우리 혁명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던 시기에 전략적 노선을 바꾸기로 결정한 역사적인 회의입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대세의 흐름을 제때에 보지 못하고 목전의 성과에만 급급하여 대부대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역량도 보존하지 못하고 자기 존재를 끝마쳤을 것이며 역사에 순국한 열사들로만 남아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소할바령은 돈화현과 안도현의 경계를 타고 뻗어내린 할바령의 꼬리부분입니다. 회의는 그 영의 북쪽 비탈면에서 하였습니다. 앞에는 새초밭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소할바령회의라 하면 그 새초밭이 생각납니다. 인가와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그런지 새초를 베어가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때 그 새초밭을 굽어보며 김책이랑, 허형식이랑, 박길송이랑 말을 타고 다닌다는데 북만동무들이 이런 새초밭을 보면 좋아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소할바령의 새초밭에서 그려보았던 북만의 전우들을 나는 원동에 들어가서야 만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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