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2(2003)년 3월 16일(일)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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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

 김일성주석 ≪세기와 더불어≫

통일여명 편집국 주해 2-40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인민의 정권을 세우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근절한 쏘련은 사회주의와 사회적 진보를 지향하는 인류에게 있어서 이상향으로 되고 있었다.

전세계공산주의자들과 혁명적 인민들은 지난날 이 이상향을 옹호하고 고수하기 위해 사심없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낫과 아치를 새긴 쏘련의 붉은 국기에는 영웅적 쏘련인민이 바친 심혈과 함께 세계 여러 나라 국제주의전사들의 뜨거운 피도 어려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쏘련에 대한 군사적 위험이 조성될 때마다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는 구호를 높이 들고 일제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갈기었다.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시키기 위한 작전과정에는 희생된 대원들도 적지 않았다.

수령님께서는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던 나날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시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혁명과 세계혁명의 호상관계에 대해서 옳은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날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혁명에 관심하는 것은 맑스주의원칙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조선의 애국자들이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기 전에 쏘련혁명이나 세계혁명을 운운하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민족혁명과 세계혁명의 호상관계에 대한 좌우경적인 인식으로 하여 우리 나라 혁명운동에서는 한때 적지 않은 사상적 혼란과 대립이 조성되었댔습니다.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면서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는 구호를 내놓았을 때만 해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자들한테 공산주의자들을 헐뜯을 수 있는 언질을 주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제와 그의 앞잡이들은 우리더러 ≪쏘련의 희생물≫이 되지 말며 ≪스탈린의 제물≫이 되지 말라고 선전하였습니다.

국제주의에 대한 참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쏘련을 피로써 도와주자고 하면 그것을 무익한 희생이라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힘겨운 민족혁명을 하면서도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는 구호를 높이 들고 쏘련사람들의 투쟁을 피로써 도와준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정세가 그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쏘련은 그 당시 사면초가의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제국주의의 포위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공산주의자들이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는 것은 혁명의 이익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필요한 것이었지만 도덕의리상으로 볼 때에도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하던 첫 시기부터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기치높이 쏘련을 지지하고 적극 옹호하였습니다.

쏘련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투쟁은 1930년대 뿐 아니라 1920년대에도 있었습니다.

홍범도는 초기에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공산주의운동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민족운동으로부터 애국활동을 시작한 사람이었으나 그 울타리안에서만 맴돌지 않았고 민족운동 자체에 대해서도 절대시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독립운동자들가운데 3 1인민봉기 후 쏘비에트러시아에 들어가서 무장활동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민전쟁 당시 붉은군대와 원동빨치산에서 쏘비에트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 과정에 홍범도도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으며 레닌까지 만나보았습니다.

일제는 1920년대 초에도 백파도당을 지원하며 러시아 원동지방에 대한 무장간섭을 부단히 감행하였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원동의 공산당조직에서는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홍범도에게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독립군상층부의 일부 인물들은 조선사람이 제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하면서 남을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은 머저리짓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홍범도는 왜놈을 치는 군대는 다 우리편이라고 하면서 붉은군대를 피로써 도와주었습니다.

홍범도가 관여한 전투들가운데서 유명한 것으로는 이만격전을 들 수 있습니다. 이만은 우쭈리강변에 있는 고장입니다. 독립군부대가 얼마나 잘 싸웠던지 이만전투가 있은 다음부터 일본군과 백파군이 조선말구령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며 도망쳤다고 합니다.

벌써 오래전에 쏘련사람들은 이만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을 위해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이 하나의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는 조선인민과 쏘련인민사이에 맺어진 공동투쟁의 유대가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홍범도는 부하들에게 쏘련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무산자들의 공화국을 세운 나라이다, 그러니 우리가 도와도 주고 또 도움을 받아야 한다, 외로운 처지에 놓여있는 나라이니 어려운 일인들 얼마나 많겠는가, 잘 도와주자고 하였습니다. 공부깨나 했다고 으시대던 사람들보다야 얼마나 궁냥이 넓습니까.

쏘만국경일대에서 붉은 군대와 직접 대치하고 있던 관동군의 움직임만 놓고보더라도 제국주의자들이 그 당시 쏘련을 압살하기 위해 얼마나 발광적으로 준동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제는 1932년부터 1939년사이에만도 널리 알려진 하싼호나 할힌골 사건을 비롯하여 근 1,000번의 크고 작은 국경분쟁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며칠에 한 번씩 무장도발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쏘만국경지대에서는 초연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쏘일간의 적대관계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1904~1905년에 러시아와 일본사이에 전쟁이 있었고 이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가 일본에 많은 이권과 영토를 양도하였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10월혁명 후 신생쏘비에트공화국을 반대하는 제국주의열강들의 무력간섭이 진행될 때 일본제국주의자들도 거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나섰습니다. 그들은 시베리아에 군대를 출동시켜 노골적인 무장간섭의 방법으로 백파도당들을 지원해주었습니다.

쏘비에트러시아에 대한 무력간섭에 동원된 제국주의열강들의 군대가운데서 가장 악랄하고 야수적인 것이 일본군대였다고 합니다. 일본침략군은 그때 연해주지방을 피로 물들이었습니다. 일본군이 빨치산대장 나조를 체포하여 기관차화구에 넣고 태워죽인 것도 바로 그때에 있은 일입니다. 공동출병을 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 군대들이 붉은군대의 반격에 못이겨 철퇴한 다음에도 일본군만은 계속 병력을 증강해가면서 검질기게 달라붙었습니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력으로 눌러놓은 다음부터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는 과대망상증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일본이 정복하지 못할 나라란 있을 수 없으며 일본군이 타승하지 못할 강군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쭐해져 가지고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차례질 분배몫을 타산하며 거기에 매번 코를 들이밀군 하였습니다.

쏘련과 일본의 대립은 중일전쟁발발을 계기로 더욱 표면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7.7사변을 일으키자 쏘련은 중국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쏘일관계는 더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37년 8월에 중국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쏘련은 일본관할지역에 있는 자기 나라 영사관의 일부를 스스로 폐쇄한 다음 자기 나라에 있는 일본영사관의 일부도 폐쇄할 것을 상대측에 요구하였습니다. 해가 갈수록 쏘일사이의 모순은 더 심화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1938년 1월에는 일본당국이 만주땅에 불시착륙한 쏘련비행기를 억류한 사건이 발생하여 또다시 쏘일관계를 팽팽하게 만들었습니다. 쏘일사이의 대립과 모순이 국지전쟁이나 전면전쟁으로 번져가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내다보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36년 8월의 ≪5상회의≫에서 대쏘침략을 국책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회의에서 대쏘침략전쟁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하였는데 원동에 있는 쏘련군무력을 개전벽두에 즉각 소멸할 수 있도록 만주와 조선에 있는 병력을 보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히틀러독일이 2차 세계대전전야에 ≪바르바로스≫라는 대쏘작전계획을 세웠다면 그보다 앞서 일본군부는 ≪오쯔≫라는 대쏘작전계획을 세웠습니다. 쏘련을 넘겨다보는데서는 일본이 독일보다 한 수 더 앞선 셈입니다.

관동군사령관 우에다는 ≪만쏘국경분쟁처리요강≫이라는데서 국경선이 불명확한 지역에서는 현지사령관이 자의로 국경선을 정하되 충돌이 일어나면 병력의 다과, 국경선의 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승리를 기하라고 하였습니다. 일본군의 부당한 국경분쟁도발로 하여 쏘련은 어느 시각에 전면전쟁에 말려들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쏘련에 대한 일본군의 강도적인 도발행위를 보고 의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쏘련을 무장으로 지원하려는 우리의 결의는 관동군과의 피어린 싸움을 매일같이 벌이고 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지적 감정의 발현이었습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여 싸우는 우리에게 있어서 노동자-농민의 정권이 수립된 쏘련은 문자그대로 이상향이었으며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기생충의 무리들을 쓸어버린 사회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벌써 놀라운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를 흘리더라도 쏘련을 보호하고 고수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중인민들사이에 이간을 조성시키던 수법대로 조선인민과 쏘련인민사이에도 쐐기를 치는 정책을 부단히 실시했습니다. 한때 그들은 훈춘출신의 친일적인 조선청년들을 기본으로 국경감시중대라는 것을 조직하여 쏘만국경계선에 배치해놓고 쏘련사람들과 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만주국 군정부대신의 상금을 주는 놀음까지 벌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또한 간도에 있는 조선사람들 중에서 첩자를 많이 양성하여 쏘련에 침투시킨 듯한 여론을 내돌리면서 쏘련사람들로 하여금 조선사람들을 증오하고 경원시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소왕청에서 유격구생활을 할 때 훈춘연대동무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이간책동 때문에 자기네 연대와 쏘련국경경비대사이의 관계가 대단히 나빠졌다고 하면서 어떤 중대장은 조선사람들에 대한 쏘련사람들의 관점이 달라진 줄도 모르고 종전의 질서대로 그들과 접촉하려다 억류당할 뻔한 일까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1938년 여름에는 쏘련원동내무인민위원부의 한 고위장령이 훈춘을 통하여 일본으로 망명해갔다는 소문도 들려왔습니다.

1930년대 중엽에 원동에 살던 조선사람들을 중앙아시아지역에 집단적으로 이주시키는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습니다. 쏘련사람들은 카자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경내에로의 조선족의 집단적 이주가 자위를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치라고 설명하였지만 조선사람들은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 그 소식을 듣고 망국민의 설움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의를 위해 쏘련옹호의 기발을 계속 높이 추켜들었습니다.

우리가 쏘만국경일대에서 진행한 모든 전투들은 작전상으로는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쏘련을 돕기 위해 주동적으로 조직한 전투들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쏘련과 군사적 협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것도 아니고 또 홍범도네처럼 쏘련측으로부터 무슨 청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쏘련에 대한 동지적 유대와 공동의 원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스스로 결심하고 단행한 군사행동들이었습니다.

쏘련을 옹호하고 지원하려는 우리 대원들의 열의와 지향이 얼마나 높았는가 하는 것은 1934년 겨울에 쏘련비행기가 연습도중 광풍에 휘말려 만주의 호림땅에 떨어졌을 때 벌어진 비행사구출작전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쏘련비행사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광선이었습니다. 그 당시 박광선은 호림으로부터 몇 십리 떨어진 곳에서 반일인민유격대연락소 공작원의 신분으로 우양부대라고 부르는 중국인반일부대와의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쏘련비행기가 우수리강반에 떨어진 그날은 50여명의 끌끌한 조선청년들을 우양부대에 입대시킨 뜻깊은 날이었다고 합니다.

추락하는 비행기를 발견한 박광선은 연락소에 뛰어가서 전우들에게 쏘련비행사를 구원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놈들은 일본놈들대로 쏘련비행사를 사로잡으려고 밀려왔습니다.

유격대원들은 적은 역량으로 기관총과 소구경포까지 쏘아대는 100여명의 적들과 결사전을 벌였습니다. 적수송대를 습격하려고 출동하던 우양부대의 대원들도 싸움에 합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쏘련비행사는 안타깝게도 적아를 식별하지 못하고 비행기곁에 속수무책으로 서있었습니다. 박광선이 조선말로 안심하고 어서 오라고 고함을 쳤지만 비행사는 오히려 유격대를 적으로 알고 권총까지 쏘았습니다.

이런 정황에서 박광선을 도와준 것은 우양부대에 침투하여 반일부대공작을 하던 조선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창한 러시아말로 우리는 혁명군이니 빨리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쳤습니다.

비행사는 그제서야 아군쪽으로 기어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쏘련비행사의 신변을 보호하고 그의 건강을 추켜세우려는 유격대원들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격대원들은 강냉이죽조차 없어서 먹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나 쏘련비행사를 위해서는 적의 수송대를 쳐서 노획한 밀가루로 빵도 해주고 메돼지사냥을 해서 고기도 보장해주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우수리강에 나가 얼음을 까고 생선도 잡아들였습니다.

심한 타박상을 입고 포로의 수치를 당할 뻔했던 비행사는 우리 유격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사실은 인민혁명군부대들에서 국제주의교양자료로 널리 이용되었습니다.

1938년 여름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하싼호사건을 도발하였습니다. 일명 장고봉사건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건은 그때까지 일제가 도발한 국경분쟁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파렴치한 것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장고봉이란 당시의 웅기군 사회리 대안에 있는 쏘련의 자그마한 고지입니다. 쏘련사람들은 그 고지를 무명고지라고 불렀습니다. 고지근처에 하싼호라는 호수가 있습니다. 하싼호사건이니, 장고봉사건이니 하는 말들은 다 이런 지리적 개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처음에 하싼호를 자기네 영역이라고 주장하다가 그 주장이 통하지 않게 되자 장고봉에 있는 쏘련의 국경초소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들의 속셈은 장고봉을 점령한 다음 병력을 증강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이남의 연해주지역을 제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쏘련측의 초소를 점령한 다음 그 일대에 나남 19사단을 기간으로 하는 숱한 병력을 집중시키었습니다. 쏘련측은 큰 병력을 동원하여 조국강토를 침노한 일본침략자들에게 응당한 징벌을 가하고 그들을 자기 나라 영내에서 모조리 쫓아냈습니다.

하싼호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임강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적의 배후를 타격하였습니다.

일본군부는 쏘련이나 중국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때마다 항상 자기들을 배후에서 타격하는 인민혁명군의 존재에 대해서 몹시 신경을 썼습니다. 일본통치의 암으로 되고 있는 항일유격대를 없애버리지 못한 것, 이것은 일본의 정계나 군부가 제일 큰 두통거리로 여기고 있던 최대의 고달픔이었습니다.

우리가 임강현에서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기 위한 적배후타격전을 과감히 벌일 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자 인민혁명군의 모든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관철하였습니다. 인민들도 혁명군의 투쟁에 호응하였습니다.

일제의 쏘련에 대한 도발적인 침공을 반대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작전과 함께 국내의 애국적 인민들속에서도 항일투쟁이 활발히 벌어졌다.

다음의 자료는 이러한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정무국이 발행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에 실린 자료에 의하면 일제의 하싼호침공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8월 2일 밤 청진부두에서 15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작업을 포기하였으며 부두에서 파업에 참가하였던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빨치산으로 갔다고 한다.≫(≪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의 조선인민≫, 쏘련과학원출판사)

하싼호사건이 있은 다음 쏘일간에는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데서 쏘련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강경하였습니다.

일본의 군부호전계층은 쏘련의 강경자세에 위축되었습니다. 쏘련은 러일전쟁당시의 무능한 러시아가 아니라 만만치 않은 국력을 가진 대국이었습니다. 일제는 쏘련이라는 나라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저들이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던 대쏘침략계획을 놓고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쏘련에 대한 침략야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본에 대한 쏘련의 강경정책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볼 심산으로 만몽국경일대에서 새로운 군사적 도발을 준비하였습니다. 세칭 노몬한사건이라고도 부르는 할힌골사건은 이렇게 되어 발생하였습니다. 할힌골이란 쏘만국경 가까이에 있는 몽골의 강이름이며 노몬한이란 몽골말로 평화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일제가 할힌골사건을 도발한 목적은 할힌골강 동쪽의 몽골영토를 점령하고 저들이 부설하려고 하는 제2철도를 엄호하기 위한 방어지대를 구축하고 나아가서는 시베리아철도간선을 절단하여 러시아로부터 원동을 떼어내자는데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쏘련이 일본의 군사적 침공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가, 쏘련의 대일전략은 무엇인가, 쏘련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탐지하고 가늠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쏘련의 군사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나 공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많은 것이 미지수로 남아있었습니다.

그 무렵 쏘련군부에서는 적지 않은 고위군사지휘관들이 전열에서 제거되었는데 일본은 이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고 주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군부에서의 이러한 변화가 쏘련의 군사력에 얼마만큼한 영향을 미치었는가 하는데 대하여 몹시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오래동안 일본 정계와 군부에서는 북진론과 남진론이 대두하여 쏘련을 먼저 치느냐 남방을 먼저 먹느냐 하는 전략문제를 가지고 맹렬한 논전을 벌이었습니다.

할힌골에서의 군사적 도발은 북진의 가능성여부를 검증하기 위한 하나의 시험전쟁이었다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할힌골일대는 광막한 모래언덕과 초원으로 된 곳이라고 합니다. 할힌골사건은 몽골국경수비대원들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당치않은 트집을 걸어가지고 일본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도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국지전의 직접적인 동기를 마련해준 것은 할힌골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던 양떼들이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습니다. 소나 양과 같은 가축들이 국경이 무엇이고 통행금지구역이 어디인지 압니까. 그런데 일제는 만주국경찰들로 하여금 양무리들이 월경했다는 당치않은 구실을 붙여 몽골사람들을 수색체포하게 하고 그것을 기화로 할힌골사건을 도발하였다는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35년에 벌써 위조지도를 찍어내어 만주국의 국경을 저들에게 유리하게 몽골쪽으로 20여 킬로미터나 더 들이그어놓았습니다.

일본이 할힌골사건과 같은 대규모의 군사적 도발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사건에서 주공을 담당한 일본의 고위지휘관들 중 한 사람이 한때 일본대사관 무관으로 모스크바에 가있던 고마쯔바라장령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고마쯔라는 반쏘모략에서 수완을 보인 덕으로 대쏘작전에서 1선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라르주둔사단의 사단장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사건초기에 그는 사단을 이끌고 몽골령내에 깊숙이 쳐들어가서 할힌골 서쪽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그곳을 일본군의 교두보로 확보해놓았습니다. 거기에는 뭉골군이 얼마 없었습니다. 쏘련군대는 거기서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고마쯔바라는 이 약점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쏘몽군대가 연합하여 고마쯔바라사단을 비롯한 적의 대부대들을 괴멸상태에 몰아넣었습니다.

일제는 본토에서 병력을 끌어다가 대규모적인 집단무력을 편성하고 새로운 작전을 벌이었습니다.

쏘련측에서는 백러시아군관구 부사령관인 쥬꼬브를 할힌골전선에 파견하였는데 쥬꼬브는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부대를 탱크와 비행대에 의한 타격을 기본으로 하여 높은 기동력과 불의성으로 괴멸시키었습니다.

할힌골에서의 국지전은 그 해 9월 중순 쏘몽군의 승리로 결속되었습니다. 쏘몽연합군이 할힌골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기 위해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에 적배후교란작전을 벌일 데 대한 새로운 명령서를 작성하여 내려보냈습니다.

그 명령서에 따라 그 해 여름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은 수많은 전투를 벌여 일제의 쏘련침공을 저지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싸움으로는 1939년 8월의 대사하, 대장강 전투를 들 수 있습니다.

대사하, 대장강 전투는 적들이 할힌골에 투입할 제6군을 새로 편성하느라고 병력이동과 군수물자수송에 한창 혈안이 되어 날뛰던 시기에 벌인 교란작전이었습니다. 그 싸움을 이틀동안이나 했습니다. 적 500명을 소멸한 큰 전투였습니다.

김진은 대사하전투에서 가슴으로 적의 화구를 막아 부대의 돌격로를 열었습니다.

김진의 모범을 따라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수많은 인민군전사들이 몸으로 적의 화구를 막았습니다.

김진은 우리가 제2차 북만원정을 갔을 때 영안현 팔도하자에서 입대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팔도하자마을에 들어갔을 때 오진우가 한 머슴군청년을 데리고 왔는데 그 청년이 바로 김진이었습니다. 그가 혁명군에 받아달라고 너무 조르기에 입대시켰습니다.

김진에 대해서 오진우동무가 잘 압니다. 김진네 소대장이 바로 오진우였습니다.

김진은 서당공부를 며칠밖에 하지 못한 청년이었으나 입대 후 전우들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한동안은 내가 끼고 다니면서 직접 글을 배워주었습니다. 소박한 청년이었는데 우리 혁명에 큰 공헌을 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김진과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후대들에게 많이 소개하고 선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적의 화구를 몸으로 막은 영웅이 바로 쏘련의 할힌골격전을 지원하는 싸움에서 배출된 것을 매우 뜻깊은 사실로 생각합니다.

할힌골전투를 돕는 적배후교란작전에서 희생된 여대원 허성숙도 잊을 수 없는 동무입니다.

허성숙은 자위단장을 하는 아버지와 의절을 하고 어린 나이에 홀로 유격구에 찾아들어 왔다가 혁명군에 입대한 여대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위단장질을 하는 것 때문에 그가 이만저만 고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허성숙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위단장모자를 벗으라고 했지만 완고한 아버지는 딸의 애원을 매번 마이동풍으로 대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설복해내지 못한 허성숙은 분연히 집을 뛰쳐나와 삼도만류격구로 들어갔습니다. 1933년에 있은 일이니 그가 16~17살 나던 해였을 것입니다. 내가 허성숙과 관련된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몇 해 후였습니다.

사연은 어떻든지간에 나는 허성숙이 아버지와의 의절을 선포하고 아버지를 적대시하는 것은 좀 고려해볼 여지가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여성중대를 조직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허성숙을 만났을 때 그에게 동무는 아버지에 대한 입장부터 고쳐야겠다, 아버지가 자위단장을 하면 반역행위를 하지 않도록 꾸준하게 설복하고 도와줘야지 그렇게 원쑤처럼 대해서야 되겠는가고 가볍게 나무랐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아버지에 대한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하면서 손부터 내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허성숙에게 설사 아버지가 친일분자로 되었다 하더라도 동무는 지금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을 탓하기 전에 아버지를 혁명의 편으로 돌려세울 생각을 해야지 결별부터 선언하고 원쑤의 편으로 밀어던지면 어떻게 하는가, 자기 아버지 하나를 개조하지 못하는 불효자식이 혁명을 하면 얼마나 잘하겠는가, 멀지않아 우리는 여성중대를 꾸려보자고 하는데 동무가 아버지에 대한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그 중대에 망라시키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허성숙은 울먹거리면서 자기가 그 동안 처신을 잘하지 못했는데 앞으로 기회가 생기면 아버지를 잘 설복하겠으니 여성중대에만은 꼭 받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여성중대에 망라되어 잘 싸웠습니다. 그가 싸움을 잘하였기 때문에 전우들은 그를 가리켜 ≪허장군≫ 또는 ≪여장군≫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간삼봉전투가 있은 날 저녁 최현을 만나 허성숙에게 얼마동안 말미를 주어 집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부녀간의 상봉을 마련해서 그들의 관계를 개선하자는 생각에서 그런 권고를 했더니 최현도 얼른 동의해 나섰습니다. 그는 부대가 명월구부근에 가면 허성숙을 꼭 아버지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성숙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허성숙이 아버지한테 찾아가려고 길차비를 하고 있을 때 할힌골작전을 지원하여 대사하, 대장강 전투를 벌이기 위한 작전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허성숙은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는 큰 작전을 앞두고 어찌 사사일부터 먼저 치르겠는가고 하면서 집에 가는 일을 뒤로 미루겠다고 제기하였습니다.

대사하, 대장강 전투가 벌어지던 날 그는 보초소에서 불의에 적군용자동차편대와 조우하였습니다. 그날의 보초는 원래 허성숙이 아니라 부대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구대원이었다고 합니다. 허성숙은 식사 후 늙은 대원을 도와주려고 보초소를 찾아갔습니다. 보초소근방으로 적군을 실은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밀려오자 허성숙은 노대원을 시켜 지휘부에 정황을 보고하게 하고 혼자서 적들을 막아나섰습니다.

그가 총소리를 낸 것은 적들앞에서 자기를 스스로 노출시킨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자기를 노출시키더라도 적의 공격을 다문 몇 초 동안만이라도 저지시키자는 것이 그의 심정이었습니다. 적들의 화력은 자연히 그에게로 집중되었습니다.

허성숙은 몸에 여러 발의 총탄을 맞았으나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을 다 터뜨린 다음에야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영웅적인 소행으로 하여 그날 부대는 있을 수 있는 손실을 미연에 방지하고 제때에 전장으로 출동할 수 있었습니다.

허성숙이 희생될 당시의 나이가 아마 22살이나 23살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꿈이 있었겠습니까. 그 많은 꿈을 그는 쏘련의 할힌골격전을 지원하는 싸움에 바치었습니다. 국제주의의 꽃입니다.

전동규연대장과 양형우연대정치위원도 대사하, 대장강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모두 앞길이 구만리같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훈춘출신들이었습니다. 대원들이 그들을 몹시 따르고 존경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높은 인격과 자질을 가지고 이신작칙하는 지휘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양형우는 훈춘유격대 초창기부터 활동한 사람입니다. 그가 속한 부대는 대사하, 대장강 전투에 대사하를 친 다음 소사하의 고지를 차지하고 달려드는 적을 견제하라는 과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대사하전투가 너무 시간을 끄는 바람에 소사하의 고지를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고지를 먼저 차지한 것은 적들이었습니다. 소사하고지를 쟁탈하느냐 못하느냐 하는데 따라 대사하, 대장강 전투의 승패가 좌우될 수 있는 결정적 국면에서 양형우는 기관총을 틀어잡고 싸움의 앞장에 나섰습니다. 대원들은 그를 따라 고지로 육박해갔습니다. 그런데 아군이 고지를 거의 점령할 무렵에 양형우는 그만 적탄에 복부를 부상당하였습니다.

그는 왼손으로 총상자리를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기관총을 휘두르면서 왜놈들은 우리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쑤다, 놈들은 지금 쏘련을 침공하고 있다, 저 원쑤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시자, 쏘련을 피로써 옹호하자고 웨치며 대원들을 돌격에로 불러일으키었습니다. 대원들은 노도와 같은 공격으로 고지를 단숨에 점령하였습니다.

훈춘시절부터 양형우와 어깨를 겯고 성장한 전동규연대장도 적의 부대를 전멸시키고 영웅적으로 전사하였습니다.

대사하, 대장강 전투에서 희생된 유격대원들은 모두 혁명위업에 충실한 국제주의열사들입니다.

요차전투도 인민혁명군부대들이 쏘련을 돕기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조직한 전투였습니다. 새로 연대장으로 임명된 이용운이 이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연대는 이 전투에서 만도 수백 명의 적을 소멸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투를 지휘한 이용운은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총상자리는 다행히도 아물었으나 그는 소할바령회의 후 쏘만국경지대에서 국제당과의 연계를 취하며 소부대공작을 하다가 희생되었습니다. 그가 수행한 소부대공작도 역시 국제주의적 성격을 띤 것이었습니다.

화룡현 3도구 금광에 주둔하고 있는 경찰대습격전투, 안도현 푸르허습격전투, 왕청현 백초구습격전투를 비롯하여 할힌골사건 당시 인민혁명군이 쏘련을 돕기 위해 진행한 적배후교란작전의 실례를 들자면 많습니다.

인민혁명군부대들의 배후교란작전에 적들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가 하는 것은 그들이 쏘만국경지대로 통하는 모든 도로들과 철도주변의 100~200미터 구간에 있는 초목들을 모조리 베어버린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놀음으로는 인민혁명군의 매복습격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인민혁명군부대들의 대담무쌍한 활동에 의해 쏘만국경지대로 통하는 철도들에서는 군용열차폭파사건과 탈선사고들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인민혁명군부대들은 적의 후방을 연속적으로 타격하여 많은 유생역량을 소멸하였을 뿐 아니라 유격대의 활동구역에 수많은 적을 붙들어둠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쏘련을 반대하는 군사적 도발에 인적 역량을 원만히 동원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적들은 하싼호사건 때 우리의 역량을 견제하기 위해 간도지구에만도 2개 여단의 역량을 투입하였습니다. 할힌골사건 때는 그보다 더 많은 역량을 들이밀었다고 합니다. 보는 바와 같이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할 데 대한 구호를 들고 우리가 진행한 배후타격전은 일제의 대쏘침략을 좌절시키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산병선이 전진할 때 약진하는 선두대원을 위해 온 대오가 그를 엄호하는 것은 군사학의 초보적인 원리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시점으로 볼 때 이 행성에 하나밖에 없었던 사회주의국가 쏘련은 산병선의 선두에서 약진하는 병사와도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바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선두에서 약진하는 쏘련을 엄호하기 위해 관동군의 배후를 타격하였습니다.

승리한 혁명을 지지하고 옹호하며 그 혁명의 전취물을 보존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지니고 있는 국제주의적 임무인 동시에 의리이고 도덕이기도 합니다. 앞선 헉명을 잘 도와야 뒤떨어진 혁명도 그 연관속에서 성과적으로 약진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하여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연합은 서로 도와주고 지지하고 보충하는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할힌골격전은 관동군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5만에 달하는 사상자와 포로, 행방불명, 그것은 불질을 즐기는 호전광들에게 차례진 응당한 대가였습니다. 자기 부대의 유생역량을 다 잃어버린 일본군 지휘관들은 스스로 군기를 불사르고 자결하거나 상급으로부터 자살을 강요당하였다고 합니다. 관동군사령관 우에다를 비롯하여 참모장, 작전과장, 작전참모 등 관동군의 수뇌부는 정전협정이 맺어지기 전에 전원 철직당하고 말았습니다.

할힌골격전에서 쓴맛을 본 다음부터 일제의 대쏘정책에서는 일정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그때부터 쏘련에 대한 강경정책을 일시적인 유화정책으로 바꾸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 이 항일전쟁당시 쏘련을 피로써 도와주고 옹호한 것이 옳았는가, 쏘련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된 오늘의 현실은 지난날 쏘련을 옹호하여 기울인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지원이 헛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논의할 여지조차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 인민들속에는 그런 문제를 설정하고 가타부타하고 시비질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린 사람들이나 할 짓입니다.

우리는 쏘련에 대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지원을 허무주의적으로 대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쏘련이 붕괴되었다고 해서 지난날 우리가 쏘련의 혁명투쟁을 지원한 것이 헛된 일로 될 수는 없습니다. 정의를 위해 바친 의리나 노력은 헛되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쏘련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된 것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인류의 이상이고 역사발전의 응당한 노정인 것만큼 그 재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부정의가 아니라 정의입니다. 사회주의가 정의로운 것이라면 그 첫 체현자인 쏘련을 도와준 것도 정의롭고 성스러운 것으로 되지 허무한 일로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쏘련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을 때 무장을 들고 피로써 그들을 도와준 데 대하여 지금도 긍지감을 가지고 떳떳하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쏘련이라는 국호도 없어졌고 쏘비에트국가를 건설하던 초창기의 노혁명가들도 없습니다. 지금의 러시아땅에는 할힌골격전에 직접 참가한 노병들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시절에 우리가 쏘련을 위해 적의 배후에서 교란작전을 벌인데 대해서 회상할만한 사람들도 거의 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억해주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여 우리가 심혈을 바쳐 가꾸어온 국제주의의 화원이 무의미한 것으로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누가 알아주건 말건 그런 것에는 관계없이 무장을 들고 쏘련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것은 쏘련을 위한 일인 동시에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쏘련사람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에 대하여 국제주의로 대답하였습니다.

지금은 민족이기주의를 하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자기만 잘살면 된다는 사상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개인이기주의도 반대하지만 민족이기주의도 반대합니다. 자기만 잘살내기를 해서야 그게 무슨 인간다운 생활입니까. 사람이 누리는 낙중에 남을 도와주는 것보다 더 큰 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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