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2(2003)년 3월 15일(토)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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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김일성주석 ≪세기와 더불어≫

통일여명 편집국 주해 2-39

 

서간도와 백두산지구에서 이루어진 항일혁명의 고귀한 열매는 그 하나 하나가 다 피어린 투쟁속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혁명이 심화발전될수록 그것을 파괴하기 위한 적들의 공세도 비할 바 없이 극렬해졌다.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그 중하에 짓눌려 허우적거리면서도 현대군사과학이 쌓아올린 모든 최신성과들과 수십 년에 걸치는 폭압정치와 영토팽창을 통하여 연마한 파시스트적인 억압수단을 모조리 동원하여 우리 혁명을 압살하기 위하여 발악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계략이나 권모술수도 우리의 전진운동을 멈춰세우지는 못하였다.

원쑤들이 힘으로 혁명을 압살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영활한 전법과 묘술의 힘, 동지적 단결과 혁명적 의리의 힘으로 적들을 타승하였다. 그리고 적들이 폭압에 미쳐날뛸수록 인민들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였고 우리 내부를 사상적으로 와해하려고 할수록 대오의 사상의지적 통일과 도덕의리적 단합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의리는 인간본연의 도덕적 관념이다. 낡은 사회에서도 참된 사람들은 의리를 중시하였고 그것을 인간의 기초적인 표정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종래의 낡은 사회의 도덕규범에는 어느 일방이 타방을 구속하고 타방은 그 일방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불평등이 설교되고 있으며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억제하는 제동기가 장치되어 있었다. 낡은 사회의 도덕규범은 애민이라든가 위민과 같은 진보적인 요구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혁명투쟁을 하는 과정에 낡은 사회에서 물려받은 이러저러한 봉건적인 인간관계와 도덕규범을 타파하고 새로운 공산주의적 인간관계와 도덕규범을 창조하였으며 그것을 후대들에게 하나의 재부로 물려주었다.

항일유격대에서 상하관계, 동지관계, 군민관계를 지배한 것은 사랑과 믿음에 기초한 공산주의적 의리였다.

이 세상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법이 있다.

하지만 천 갈래 만 갈래로 엮어지는 인간의 무한대한 실천활동을 법 하나만으로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법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만능의 무기가 아니다. 사람의 사고나 행동가운데는 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그런 분야도 있다. 사랑이나 우정을 법으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만일 법기관이 법령을 발포하여 오늘부터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너는 누구를 친구로 삼으며 너는 누구를 안해로 맞아들이라고 강요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그런 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법의 힘만으로는 세상만사를 다 총찰할 수 없다. 법이 못하는 일을 법을 대신해서 해내는 것이 바로 의리와 도덕이다.

우리는 동지를 얻는 것으로부터 혁명을 시작하였고 동지적 의리와 단합을 강화하고 인민들속에 깊이 침투하여 그들과의 혈연적 연계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혁명을 부단히 심화시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난날에도 동지애는 우리 혁명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생명선이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걸어온 수십 성상의 영광스러운 투쟁노정은 동지애와 동지적 의리의 발전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대오는 치부나 투기를 위해 모인 오합지졸이 아니라 조국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하나의 지향과 목적을 가지고 뭉쳐진 혁명가들의 집단이었다.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은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생사를 같이하게 하였다. 그런 것만큼 우리의 대오에는 동상이몽하거나 양봉음위하는 사람들이 있을 자리가 없었다.

동지애와 동지적 의리를 중시하는 것은 집단주의를 생명으로 하는 우리 대오의 존재방식인 동시에 본질적 요구이기도 하였다. 항일유격대원들은 한 자루의 총, 한 포대의 쌀, 한 켤레의 신발을 구하기 위해서도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았다. 그 과정에 그들은 ≪억천만번 죽더라도 원쑤를 치자!≫는 혁명적 신념과 함께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가장 고상한 공산주의적 윤리를 창조하였으며 단결이 곧 승리라는 하나의 진리를 도출하게 되었다.

항일혁명은 인류가 아직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혁명이었다. 그것은 간고성과 치열성에서 그 어느 시대의 혁명과도 대적할 수 없는 풍파사나운 혁명이었다. 우리가 걸어온 그 장구하고도 곡절많은 노정에는 여러 대를 두고 내려가면서 살아도 다 겪을 수 없는 온갖 곤란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난관이 겹쌓이고 시련이 중첩될수록 동지적 단결의 구호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동지애의 힘으로 그 모든 난관과 시련을 뚫고나갔다. 우리는 우리를 고립압살하려는 적들의 전략에 혁명적 의리와 단결의 전략으로 맞서나갔다.

항일혁명시절의 의리가운데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영도자와 대중사이의 의리이다. 우리는 조선혁명에서 통일단결의 중심이 형성된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영도자와 대중과의 관계를 강화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돌리었으며 영도자와 대중의 혼연일체와 도덕의리적 결합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우리가 강조하는 영도자와 대중의 관계는 옛사람들이 쓰던 군신유의류의 의리와는 다르다. 군신유의란 임금과 신하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영도자와 대중의 호상관계는 한 마디로 일심일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영도자는 대중을 위해 복무하고 대중은 영도자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바로 영도자와 대중사이에 흐르는 우리 식의 공산주의적 의리이다.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은 우리를 통일단결의 중심에 내세우고 영도자와 전사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민족의 운명개척을 위해 투신하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였다.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과 항일혁명투사들이 지니고 있던 공산주의적 의리가운데서 핵을 이룬 것이 바로 자기 지도자, 자기 사령관에 대한 충실성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파쟁이라는 것도 몰랐고 권력다툼이라는 것도 몰랐다. 일단 영도의 중심을 내세운 다음에는 곁눈을 팔지 않았다. 그리고 영도자에게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였다. 여기에 바로 그들이 지니고 있던 공산주의적 의리의 순결성이 있다.

김혁, 차광수 등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간고한 항일혁명전쟁시기 우리와 함께 전장에서 싸운 수많은 항일유격대원들은 하나같이 순결한 의리의 소유자, 고상하고 아름다운 도덕의 창조자들이었다.

항일혁명투사들의 의리를 두고 논할 때면 김일의 얼굴을 먼저 돌이켜보게 된다. 김일은 50년 가까운 세월을 푹풍우속에서 보낸 사람이다. 그는 나와 함께 항일전쟁도 하였고 새 조국건설도 하였다. 반미전쟁도 하였고 사회주의건설도 하였다.

항일혁명시절의 김일은 사업경험이 풍부한 노숙한 정치일군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는 안도와 화룡 지방을 중심으로 간도일대에서 지하당사업과 반일부대공작을 많이 하였다. 그 과정에 수많은 혁명가들을 육성하였다.

김일은 백두산시절에 두의순, 손장상, 전영림 등의 두령들이 지휘하는 반일부대들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공작하였는데 성과가 매우 좋았다. 그가 얼마나 공작을 잘하였던지 안도의 전영림은 부대를 데리고 인민혁명군에 편입하여 우리와 함께 싸울 결심을 하였다.

김일은 처음에 전영림부대를 무송으로 안내하였다. 우리 부대가 그 쪽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부대를 이끌고 무송지구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만강을 떠나 장백지방에 가있었다. 이렇게 되자 반일부대대원들은 김일이 자기네를 속였다고 하면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다가 식량난까지 겹쳐 김일은 참으로 딱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대장이하 전 대오가 사흘동안이나 변변히 먹지 못하고 행군을 계속하고 있을 때 몇몇 대원들이 어떤 산중에서 인삼밭을 발견하였다. 아사지경에 이른 대원들은 대장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무질서하게 달려들어 인삼을 캐먹기 시작하였다. 인민혁명군의 지휘성원인 김일로서는 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인삼을 캐먹는 것은 인민의 이익을 침해하는 떳떳치 못한 행위라고 하면서 두 팔을 벌이고 대원들을 막아나섰다.

이성을 잃은 반일부대대원들은 전영림을 찾아가 박덕산(김일의 본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김일성부대가 무송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무송에는 김일성부대가 없다. 이런 엄청난 거짓말에 속아넘어가면서 우리가 박덕산을 계속 따라갈 필요가 있는가. 그가 지금은 장군부대가 장백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그것도 믿을 수 없다. 박덕산은 우리가 인삼을 캐먹는 것까지도 방해하고 있다. 이것이야 우리를 굶겨죽이려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저 박가를 그대로 따라다니다가는 우리가 무슨 봉변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저놈을 제끼고 안도로 다시 돌아가자고 하였다.

김일은 반일부대사병들이 자기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좋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겠거든 죽이라, 그대신 청이 하나 있다, 내가 인삼밭주인을 찾아가서 사죄하고 돌아올 터이니 그때까지 기다려달라, 그대신 인삼은 더 축내지 말아달라, 인삼을 더 축내면 그것을 보상할 돈이 없다고 하면서 태연하게 그들을 설복하였다.

김일의 언행에 감동된 전영림부대장은 서슴없이 그를 보증해 나섰다. 그는 인삼밭에 두 번 다시 손을 대는 놈이 있으면 총살하겠다고 하면서 김일을 포전주인한테로 보냈다.

양삼포전주인을 데리고 부대로 돌아온 김일은 배낭을 풀어헤치고 초전주인이 쪄준 만두를 대원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그에게 아편덩어리를 내놓으면서 자기에게는 이 아편밖에 없으니 만두값과 대원들이 캐먹은 인삼값으로 받아달라고 하였다. 그 아편덩어리는 왕덕태가 비상용으로 쓰라고 김일에게 준 것이었다. 포전주인이 몇 번이고 사양했으나 그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동된 인삼밭주인은 산에 저장해둔 겨울나이용식량을 다 내놓았고 전영림부대를 만강까지 안내해주었다. 만강에 도착한 반일부대대원들은 김일한테 찾아와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다.

나는 반일부대를 데리고 백두산지구에 온 김일을 홍두산밀영에서 만나주고 전영림부대를 우리 주력부대에 편입시키었다.

김일은 답답하다고 할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었다. 첫 날 밀영에서 담화를 할 때 혁명에는 언제 참가했고 어떤 투쟁을 했는가고 물어보니 혁명에는 1930년 초부터 참가했는데 별로 해놓은 일이 없다는 외마디대답만 하였다. 아무리 물어보아야 매양 같은 대답이었다. 첫 대면이지만 지나치게 과묵하고 사교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흠이기도 하였다.

김일의 성격에서 좋은 점은 가식이 없고 고지식한 것이었으며 어떤 풍파가 있어도 드놀지 않고 한 본새로 충실하게 일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평생 조건타발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저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수걱수걱 일만 하였다.

김일은 우리의 명령, 지시에 대한 집행을 상급앞에 지닌 하급의 의무로만 간주한 것이 아니라 영도자에 대한 전사의 의리로 여기는 진짜배기혁명가였다. 그는 무슨 일이건 의리감으로 집행했기 때문에 임무수행에서 큰 파동이 없었다.

마당거우밀영에서 김일을 8연대 1중대 정치지도원으로 임명하던 때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8연대 1중대 정치지도원의 임무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연대장 전영림은 전 해에 휘남현성전투에서 희생되고 연대정치위원마저 적임자가 없어 배치하지 못한 형편에서 1중대 정치지도원은 임시로 연대정치위원의 임무까지 겸임해야 하였다. 중대장도 사업에는 충실한 사람이었는데 수준이 어리었다.

나는 이런 실정을 그대로 다 이야기하고 나서 동무가 어떤 위치에서 일하게 되는가를 알만한가고 물었다. 김일은 심중히 생각하던 끝에 ≪알았습니다≫하는 외마디대답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가 과업을 받을 때의 태도를 보면 언제나 한 본새였다. 무거운 일이건 가벼운 일이건 매양 ≪알았습니다≫하는 한 마디의 말로 받아들이었다. 그리고는 구구한 말을 하지 않았다.

김일의 사업을 도와주려고 다음날 1중대로 찾아갔더니 그는 없고 중대장만 있었다. 중대장의 말이 김일은 새 직무에 배치되기 바쁘게 1소대가 주둔하고 있은 무송현 북강군으로 떠났다고 하였다. 내가 그 전날 김일을 중대정치지도원으로 임명할 때 무송에 나가있는 1소대의 소식이 없다는 것을 지나가는 말처럼 얼핏 비치었는데 그 말을 깊이 새겨두었다가 북강군에 가서 1소대의 실태를 알아볼 결심을 한 것 같았다.

김일은 다음날 새벽 숱한 식량과 무기를 가지고 중대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당거우에서 북강군까지는 100리길이 잘된다. 김일이 중대로 돌아온 것이 분명하다면 그는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왕복 200리길도 훨씬 넘는 강행군을 한 것으로 된다.

김일은 배낭을 벗지도 못한 채 나를 찾아와 1소대동무들이 모두 무사하며 일도 잘한다는 것, 1소대와의 연계가 두절된 것은 연락임무를 받고 떠난 1소대 대원이 중도에서 길을 헛갈린 탓이라는 것, 북강군에 갔다가 지고온 식량과 무기는 1소대 동무들이 적을 치고 노획한 것과 인민들이 지원한 것을 합친 것이라는 것, 그 지방 청년들이 참군을 하도 간청하므로 사령부의 승인도 없이 데리고 왔다는 것을 간단히 보고하였다.

나는 김일을 숙소로 돌려보낸 다음 그가 데리고 온 참군요청자들과 담화를 하였는데 그 과정에 김일이 직접 1소대를 데리고 금룡군의 적경찰서와 악질 지주네 집을 습격하여 많은 무기와 식량을 노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일은 두 가지 타산밑에 적의 소굴을 습격하였다. 첫째로는 지주와 경찰들을 숙청하여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내가 제일 걱정하는 식량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식량부족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고 있었다. 수백 명이 한 밀영에 모여 몇 달 동안 군정학습을 하였는데 후방부성원들이 마련한 식량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싸움을 하지 않고서는 한 포대의 쌀도 구할 수 없는 때였다. 그런데 김일이 뜻밖에도 많은 양의 쌀을 해결해오는 바람에 전 부대가 그 덕을 입게 되었다. 나로서는 얼마나 고마운 생각이 드는지 몰랐다.

그 후 금룡툰인민들은 혁명군의 신세를 갚는다고 하면서 마당거우밀영에 4~5차례나 지원물자를 지고 왔다.

부대에 식량이 떨어지면서 노상 김일이 맨 선참으로 자진해서 대원들을 데리고 식량공작을 떠나군 하였다. 그는 적구에 가서 지하공작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자루에 쌀을 넣어가지고 오군 하였다. 자기는 굶거나 통강냉이를 먹으면서도 우리에게만은 늘 쌀밥을 지어주려고 여간만 애를 쓰지 않았다. 김일의 배낭이 다른 사람들의 배낭보다 곱절로 더 크고 무거웠던 것은 그가 그 배낭속에 예비식량주머니를 늘 넣어가지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김일은 어떤 경우에나 자기자신을 먼저 생각한 것이 아니라 동지들을 먼저 생각하고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당과 혁명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당과 국가의 높은 직급에서 활동하였지만 자기에게 특전, 특혜, 특대가 차례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래사람들이 자기를 특대하려고 하면 그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김일은 해방 후에도 항일혁명시절처럼 우리를 잘 도와주고 받들어주었다, 그는 내가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면 진일 마른일을 가리지 않았다. 당사업이면 당사업, 군건설이면 군건설, 경제지도면 경제지도 초소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복잡한 국사에 묵묵히 몸을 적시었다.

어느 해였던지 김일은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자기를 청천강화력발전소 건설장에 전권대표로 파견해줄 것을 요구한 일이 있다. 청천강화력발전소는 그 당시 국가적 투자와 이목이 집중되던 중요한 건설대상이었다. 그런 것만큼 나도 마음속으로 공사지휘를 담당할만한 인물을 은근히 물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제기를 받고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건강상태가 대단히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전처럼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는 날엔 무슨 화단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김일이 어찌나 집요하게 자기 요구를 되풀이하였던지 나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신 공사장에 가면 고문격으로 훈수나 하는 정도로 일하되 절대로 무리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내놓았다.

김일은 공사장에 가자마자 가설건물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7~8층짜리 아파트 높이만한 계단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오르내리면서 건설을 불이 번쩍나게 추진시키었다. 그는 섣달그믐날까지 공사장에 있으면서 불철주야로 일하다가 1호보일러에 물을 지피는 것까지 보고서야 평양으로 돌아와 나에게 그 동안의 사업정형을 보고하였다.

김일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그가 임종 사흘전까지 집무실에서 일을 했고 소속세포에서 당생활총화를 하였으며 당중앙위원회의 책임일군을 찾아 김정일동무를 잘 모셔달라는 부탁을 하였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김일이 한평생 우리를 충심으로 따르고 받들어온 것처럼 나도 한평생 그를 친혈육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산에서 유격전쟁을 할 때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김일은 그 장대한 체통에도 불구하고 병마에 종종 시달리었다. 한 때 의사들은 그에게 위암이라는 어마어마한 진단까지 내리었다. 그 보고를 받고 나는 그날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평안남도 온천지방으로 계획에도 없는 현지지도의 길을 떠났다. 평양에 그대로 있자니 일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데다가 밥도 먹고싶지 않고 마음마저 진정할 길이 없었다. 김일마저 세상을 떠나간다면 내 옆에는 나의 말동무가 될만한 사람도 얼마 남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의 의사들이 모두 김일을 죽을병에 걸렸다고 한다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암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의사는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다수가결에 버릇된 나였지만 그 날만은 웬일인지 그 의사의 진단에 굳이 매달리고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달리던 차를 멈춰세우고 외무상에게 전화를 걸어 암분야에 조예가 깊다는 쏘련의 이름난 의사들을 급히 초청할 데 대한 지시를 주었다. 외무상이 친 전보를 받고 쏘련당국에서는 우리가 요구한 의사들을 지체없이 보내주었다.

쏘련의사들은 김일을 진찰하고 나서 암이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었다. 그들이 김일을 데리고 쏘련에 들어가서 다른 명의에게도 보였지만 그 의사 역시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내리었다. 그때 만일 암이라는 최초의 진단결과만을 믿고 김일의 위를 잘라 버리기라도 했다면 그는 오래 살지 못하고 인차 잘못되었을 것이다.

김일이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를 만나 동무는 우리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다, 이제는 나와 함께 항일혁명을 하던 노투사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동무가 없으면 내가 허전해서 어떻게 견디겠는가,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을 돌보면서 일하라고 당부하군 하였다.

그러나 김일은 중병에 걸려 지팽이를 짚고 다니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에도 집무실이나 생산현장을 떠나지 않고 당과 혁명을 위해 한 가지 일이라도 더 많이 해 놓으려고 온갖 정열을 다 바치었다. 그러다가 불치의 병에 걸리었다.

한번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그가 나보고 병이 나으면 내년 4.15에 만경대에 가서 관성열차를 타보겠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어쩐지 섬찍한 생각이 들었다. 말수더구가 적은 사람이 그런 속생각까지 터쳐놓은 것으로 보아 그가 혹시 자기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한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이상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김일은 그 해 섣달그믐날 아이들의 설맞이공연관람에도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해마다 설맞이공연을 동무와 같이 보았는데 오늘 저녁에 동무가 곁에 없으니까 자꾸 눈물이 나와서 볼 수 없더군, 그래서 내 이렇게 왔소.≫

침상에 누워있는 김일에게 이런 말을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그는 오히려 현관문밖까지 따라나오면서 제 부탁인데 과로하시면 안됩니다, 절대로 과로하지 마십시오 하고 거듭 당부하였다.

나는 그날 저녁 김일의 건강에 해로울 것 같아서 그와 새해를 경축하는 축배잔도 찧지 못하였다. 그것이 지금도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다. 내가 집을 떠난 다음 김일도 나에게 축배잔을 권하지 못한데 대해 후회했다고 한다. 축배잔이나 마주 찧는다고 해서 병이 나을 리도 없고 또 나의 기분이 밝아질 수도 없는 일이다. 하건만 김일을 회고할 때면 매번 축배잔이 내 마음속의 아픈 곳을 건드리군 한다.

김일은 나를 대하듯이 김정일동무를 대하였고 나에 대한 의리를 지키듯이 김정일동무에 대한 의리도 지키었다. 나는 김정일동무에 대한 김일의 남다른 경모심에 한두 번만 탄복하지 않았다. 김정일동무가 중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김일은 지팽이를 짚고 역에까지 나가 그를 맞이하였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지도자에 대한 그의 진실한 자세를 두고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김정일동무도 김일을 혁명선배로서 각별히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김정일동무는 늘 김일부주석동지는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우리 당의 강화발전과 혁명승리를 위해 그 누구보다도 견결히 투쟁한 공산주의혁명투사의 모범이라고 하면서 그를 내세워주고 따뜻이 돌보아주었다.

내가 김일을 나의 오른팔이라고 한 것처럼 김정일동무도 그를 나의 오른팔로 보았다.

그래서 김일이 서거하였을 때 제일 애석해한 사람이 아마 김정일동무였을 것이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자기 지도자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데서 뿐 아니라 혁명동지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데서도 최상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사랑에는 사랑으로 보답하고 믿음에는 믿음으로 대답하며 은혜에는 은혜로 갚는 것이 항일유격대원들의 의리였다.

황순희와 김철호의 우정은 항일유격대원들속에서 발양되고 있던 동지애와 공산주의적 의리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황순희를 만날 때마다 저렇게도 체소하고 섬약한 여자가 백두산의 설한풍속에서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무장투쟁을 해왔을가 하는 생각을 하군 한다.

해방 후 평양에 돌아와 국내인사들에게 황순희가 10년 동안 유격투쟁에 참가한 여자라고 소개했더니 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에는 황순희만큼 체소한 여대원이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혁명을 해도 차돌처럼 옹골차고 담차게 하였다.

체통이 크다고 해서 반드시 혁명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의리를 잘 지키는 것도 아니다. 임수산은 황순희보다 몸집이 두 곱이나 더 큰 거구의 사나이였지만 곤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변절하였으며 동지들에 대한 의리도 저버리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황순희는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한시도 혁명을 중단하지 않았다. 의리와 신념이 강하면 여염집아낙네들도 혁명을 하며 김금순과 같은 꼬마들도 절개를 지켜 단두대에 오른다. 황순희가 그처럼 체소한 몸으로 끝까지 혁명을 할 수 있는 것은 신념이 강하고 의리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군복을 입은 황순희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은 미혼진밀영에서였다. 여대원들의 병실은 이전날 산림부대사병들이 사용하던 병실자리였다.

그 중국식병실의 캉이 대단히 높았다. 캉에 앉아서 내려다보니 낯설은 작달말한 처녀가 복도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할듯 말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가 바로 한 주일 동안이나 강떼를 써서 입대승인을 받아내고 부대의 뒤꽁무니에 붙어 미혼진까지 따라온 황순희였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때 그를 아동단원으로 보았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자기를 유격대원이라고 소개한 것이었다.

≪키도 작은데 어째서 벌써 유격대에 들어왔나?≫

내가 이런 질문을 하자 황순희는 일제에게 학살당한 아버지와 전장에서 희생된 언니의 원쑤를 갚으려고 유격대에 입대했다고 대답하였다. 그의 오빠 황태운도 최현부대의 중대장을 하다가 한총구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입대초기의 황순희는 부대의 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미구에 뭇사람들의 총애를 받는 혁명군의 꽃으로 되었다. 그가 매사에 이악하고 경우가 밝고 원칙성이 강하면서도 인정미가 있고 의리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김철호는 생전에 황순희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사경에서 구원되었던 1940년 봄의 일화를 자주 회상하였다.

어느 날 황순희는 최현연대장한테서 후방밀영에 들어가 부상병들과 노약자들을 얼마동안 보살펴줄 임무를 받고 일행과 함께 푸르허방향으로 떠났다. 일행의 태반은 부상병들이었다. 제일 큰 난사는 임신중에 있던 김철호가 노상에서 해산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새 생명을 받을 만한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기저귀는커녕 어린애를 감싸줄 한 쪼박의 천도 없었다.

황순희는 자기의 솜옷을 벗어 갓난아이를 감싸주었다.

해산 후 ≪토벌대≫가 총질을 하며 그들한테로 조여들었다. 산모는 어쩔 바를 몰라서 전우들만 쳐다보다가 황순희에게 아무래도 살리지 못할 아이인데 버리고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안은 채 일어서지 못하였다.

그때 황순희가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게 무엇 때문인가, 다 후대들 때문이 아닌가, 아이를 버리고 제 한 몸의 보신이나 할 바에야 살아서는 뭘 하겠는가고 하면서 산모의 품에 있던 아이를 와락 빼앗아 안았다. 그리고는 산등성이로 뛰어올라가 사람들의 눈길이 잘 미치지 않는 다박솔밑에 갓난애를 눕혀놓았다. 그러자 산모도 총을 들고 그를 따라갔다.

잠시 후 황순희는 짐을 찾으려고 다시 산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짐을 들고 산등성이로 돌아왔을 때 김철호는 눈물이 글썽해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셈판인지 갓 태어난 새 생명은 보이지 않았다.

황순희가 갓난애의 행처를 물으려고 김철호의 곁으로 다가가는 순간 지척에서 총소리가 또다시 울리었다. 두 여대원은 일행과 함께 맞불질을 하면서 적들을 꼬리에 달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이틀동안이나 달리었다.

적≪토벌대≫를 완전히 따돌리었을 때 산모는 의식을 잃고 땅에 곤두박히었다. 황순희는 양재기에 물을 끓여 김철호의 입에 떠넣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입이 좀처럼 벌여지지 않았다. 그는 숟가락으로 이발을 벌이고 억지로 더운물을 떠넣었다. 그 더운물이 결국은 산모를 살리었다.

그때에야 황순희는 아이생각이 나서 김철호에게 아이를 어떻게 했는가고 물으니 어느 덤불밑에 놓고 왔다고 하였다. 황순희는 그 먼길을 되걸어 ≪토벌대≫와 총격전을 벌이던 그 산에 다시 가보았다. 불쌍하게도 아이는 이미 숨이 진 몸이었다.

아이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홑적삼바람으로 먼길을 다녀온 황순희를 보자 김철호는 한두 시간밖에 살지 못할 애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애의 몸에서 차마 솜옷만은 벗겨오지 못하겠더라구나 하고 사죄하였다.

≪언니, 우리 어른들이야 솜옷이 없은들 뭐라나요. 이름도 없이 죽은 그 애가 춥지 말아야지요.≫

황순희는 시장기와 추위로 하여 우들우들 떨면서도 이런 말로 김철호를 위로하였다.

김철호는 그때 황순희가 발휘한 우정을 한평생 잊지 않았다.

임종을 얼마 앞둔 날 그는 병상을 찾아온 황순희에게 느닷없이 말했다.

≪순희, 내 명도 이제는 마지막이다. 내가 네 덕으로 푸르허에서 죽지 않고 일생동안 수령님슬하에서 사랑만 받으며 살아왔는데 빨치산시절처럼 너와 한 이불밑에서 자고싶구나!≫

두 전우는 그날 미혼진에서처럼 한 이불을 덮고 밤이 지새도록 빨치산시절을 회고하였다.

고난의 행군 때 장백에서 갓 입대한 신입대원이 밤이 우등불결에서 자다가 군복을 태운 일이 있었다. 어떻게나 심하게 탔던지 살을 절반도 가리지 못하였다. 그런 옷을 입고 그는 행군 첫날부터 우들우들 떨면서 대오를 따라갔다. 그가 추워하는 모습을 보고 모두가 동정도 하고 걱정도 하였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들도 한 사람같이 단벌옷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동지애가 강하였던 이을설은 신입대원이 당하는 고통을 보다 못해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군복저고리를 벗어들고 그 대원을 찾아갔다.

신대원은 아연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동무는 무얼 입고?…≫

≪나야 유격대생활에 익숙되었으니 웬만한 추위야 건드리지 못하지.≫

≪아니오. 제 잘못으로 옷을 태웠는데 내 무슨 면목으로 동무의 옷을 입겠소.≫

신입대원은 좀처럼 동료의 호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말로써는 그 대원의 고집을 좀처럼 휘어놓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을설은 그의 몸에서 불에 탄 옷을 강짜로 벗기고 그대신 그에게 자기의 군복을 입히었다. 그가 이런 선행을 베풀 수 있은 것은 구대원이 신입대원을 돕는 것을 응당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우들은 모두 이을설이 그 겨울을 견뎌내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가 경위중대에서 나이도 어리고 체질도 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주지방에서 한두 해만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은 그 고장 추위가 얼마나 지독한가를 잘 알 것이다. 추운 날에는 머리카락에 성에가 끼기 일쑤이다. 성에가 낀 머리카락들은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려만 놓아도 고드름처럼 쉽게 부서져나간다. 이런 강추위속에서 불에 타서 구멍이 숭숭 나 여름옷을 대충 기워 입고 여러 날 행군을 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을설은 춥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행군을 할 때마다 앞장에서 생눈을 헤치었다. 숙영지에서는 언제나 그가 선참으로 나무를 해오고 천막을 쳤다. 그는 기관총반의 일을 다하고 전우들이 우등불가에 둘러앉은 다음에야 불에 자기의 신발을 말리우군 하였다.

이을설의 강인성과 동지적 의리는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생활속에서 민족이 당하는 수난과 고통을 체험하는 과정을 통하여 착취받고 압박받는 인간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고 인민을 사랑하고 동지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을설은 남패자회의 후부터는 경위중대 기관총반에 배속되어 기관총 부사수로 있었다. 그날부터 그는 사령부를 보위하는 사업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한평생 손에 총을 잡고 궂은날이나 마른날이나 변함없는 자세로 나를 호위해온 경위대원이었다.

나는 북대정자회의에서 고난의 행군을 총화할 때 이을설을 동지애의 모범으로 내세우고 그의 품성과 동지적 의리를 평가하였다. ≪철혈≫편집집단도 창간호를 내면서 그의 모범을 찬양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왜 강했는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의리로 뭉쳐진 집단이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하군 한다. 우리의 단결이 도덕과 의리에 바탕을 두지 않고 순수 사상의지의 공통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우리는 그처럼 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규군의 지원도 없고 국가적 후방도 없는 최악의 상태에서 일본제국주의와 같은 강적을 상대로 하는 장기간의 혁명전쟁에서 우리가 승리자로 될 수 있은 것은 결코 병력이 많거나 무장이 우월해서가 아니었다. 수백만의 정규군을 가지고 있은 적에 비겨볼 때 우리의 병력은 수적으로 매우 간소한 것이었다. 적아의 무장은 대비할 바도 못되었다. 오로지 충성과 의리로 결합된 사상의지적 단합이 있어 우리는 강적을 타승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의 간부들과 당원들이 임춘추의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의리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임춘추는 당과 수령에 대한 의리를 높은 경지에서 구현한 투사였다.

내가 1930년 가을에 조양천에서 봉춘한약방주인의 간판을 가지고 간도지구 당 및 공청 비서처의 연락원으로 공작하던 임춘추와 첫 통성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간단히 소개한 바가 있다. 그때로부터 그는 장장 60년 가까운 세월을 고스란히 혁명에 바치었다. 당의 영원한 동행자, 충실한 방조자, 훌륭한 조언자라는 명구는 김정일동무가 인텔리들에게 붙여준 칭호인데 임춘추와 같은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다.

임춘추는 지식을 가지고 조선혁명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식을 밑천으로 하여 당건설활동도 하고 군의활동도 하고 저술활동도 하였다. 그의 생은 이러한 사업으로 일관되어 있다.

임춘추의 재능가운데서 가장 큰 장기는 독학으로 섭취한 의술이었다. 그가 18살 때부터 면허증을 가진 의사로 ≪영업≫을 벌이었다고 하면 아마 어떤 사람들을 잘 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는 의사라는 간판을 가지고 군중계몽도 하고 연락공작도 하고 혁명가육성사업도 하였다. 그가 팔도구근방의 용수평마을에 가있을 때만 해도 숱한 사람들을 유격대에 추천하여 보냈다고 하니 그의 의술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임춘추가 유격구로 들어오자 혁명조직에서도 그를 군의로 임명하였다. 그는 군의로 활동하는 기간 수많은 전상자들과 인민들의 병을 보아주었다. 14~15살 때부터 농사를 지으면서 자습으로 연마한 의술이라는데 임상성과가 대단히 좋았다. 그 의술의 덕을 한두 번 본 사람들은 다들 그를 명의라고 하였다.

임춘추를 명의라고 제일 요란하게 내세운 사람은 최춘국이었다. 최춘국이 중상을 당했을 때 그를 수술한 사람이 바로 임춘추였다. 위만군과의 불의적인 조우전에서 불행하게도 대퇴골이 직탄에 맞아 부스러졌는데 그 상처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리를 자르지 않으면 부상자를 살려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춘추만은 생각을 달리하였다. 다리를 절단하게 되면 유격대지휘관으로서의 역할도 끝장이려니와 인간으로서도 매우 불편한 몸이 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임춘추는 최춘국이 만 명의 적과도 바꿀 수 없는 유능한 군사지휘관이며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혁명군의 맹장이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였다.

그는 부상자의 허벅다리를 조금 째고 총알에 부스러진 대퇴골의 뼈조각들을 집게로 끄집어내는 식으로 수술을 하였다.

최춘국은 1년 후부터 대지를 활보하였다. 상한 다리가 짧아져서 조금씩 절기는 하였으나 그런대로 행군도 하고 전투지휘도 하였다. 임춘추의 대담무쌍한 수술이 크게 은을 낸 것이었다.

나도 1차 북만원정을 끝내고 삼도만 능지영에 있는 동만당 비서처를 찾았을 때 임춘추의 덕을 많이 보았다. 그는 효능이 좋은 초약과 보양제음식을 매일같이 가지고 와서 있는 성의를 다하여 나를 따뜻이 돌보아주었다. 최현, 오진우, 조아범, 조도언도 그의 치료를 받고 상처를 완치시키었다.

1937년 가을부터 1938년 가을까지의 옹근 한해 동안 임춘추는 금천현과 임강현, 몽강현 용천진의 대수림지대에 널려있는 인민혁명군의 밀영들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전상자들을 치료하였다. 그러다 나니 왕진도 많이 하였다. 그때의 왕진반경은 보통 수십 리씩이나 되었다. 지금은 의사들이 구급차나 승용차와 같은 현대적인 운수수단들을 이용하면서 왕진도 하고 위생선전도 하지만 항일전쟁시절의 군인들은 그런 호사를 할 수 없었다. 왕진을 다니다가 ≪토벌≫을 당하지 않으며 다행이었다.

임춘추는 언제인가 적들의 ≪토벌≫을 받았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이 있었다. 그는 황구령전투 후 최현이 준 전리품 솜바지저고리를 배낭뒤에 처매고 산고개를 오르다가 기관총연발사격을 받았다. ≪토벌대≫가 물러간 다음 배낭안을 헤쳐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속에는 기관총알이 일곱 발이나 있었다고 한다. 배낭뒤에 처맨 솜바지저고리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영락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항일전쟁시절의 임춘추는 당일군으로서 사람들과의 사업도 많이 하였으며 조직활동과 저술활동도 많이 하여 군민교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나는 여러 차례의 접촉을 통하여 임춘추가 정치일군의 기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실지로 그는 입대 전에 연길지방에서 대중단체 일군으로서 군중을 교양하고 통솔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군의사업과 함께 당사업을 맡기었다. 그는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위원도 하고 경위연대 당서기로도 활동하였으며 동만당공작위원회사업도 맡아 수행하였다.

동만당공작위원회는 발족 후 우리의 기대에 맞게 일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남패자회의가 끝난 후 임춘추를 동만당공작위원회의 책임적 지위에 임명하였다. 이 공작위원회의 사명은 간도지방에서 당조직을 확대하고 대중단체들을 늘이는 방법으로 인민들을 조직적으로 결속하여 무장투쟁의 지반을 강화하는 한편 당창건의 기초를 튼튼히 마련하는 것이었다. 동만당공작위원회는 장백현당위원회나 국내당공작위원회와 유사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동만당공작위원회의 주요활동무대는 간도와 함경북도 일대였다. 유격근거지가 해산된 후 간도지방의 당조직들은 모두 동만당공작위원회산하에 들어왔다.

임춘추는 나와의 연계밑에 무산, 연사 일대와 동만지방에 수많은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여 당조직과 대중단체들을 확대해나갔다.

소할바령회의 후 왕청, 연길, 돈화, 훈춘, 안도, 화룡 일대에서 소부대활동을 할 때 우리는 동만당공작위원회가 꾸려놓은 혁명조직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조직들이 기본이 되어 우리의 활동을 이모저모로 잘 도와주었다.

임춘추는 항일혁명시절의 당사업경험을 밑천으로 하여 해방 후 당건설활동에서도 큰 흔적을 남겨놓았다. 초기에는 평안남도당 제2비서로 일을 하였고 후에는 강원도당 위원장으로 사업하였다. 그가 강원도당 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분계연선사업이 아주 잘 되었다.

해방 직후 우리는 항일혁명투사들에게 될수록 높은 지위를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고위직은 국내인사들이나 해외에서 혁명운동을 하다가 들어온 사람들에게 주었다. 우리와 함께 무장투쟁의 시련을 겪은 사람들가운데 능력있는 인재들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다 망라하는 통일전선정치를 하자니 그런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북반부에 5개 도당밖에 존재하지 않던 그때 임춘추에게만은 강원도당위원장의 임무를 맡기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당사업경험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임춘추의 활동가운데서 내가 특별한 감회를 가지고 돌이켜 보게 되는 것은 그의 저술활동이다. 그는 많은 글을 써서 후대들에게 남기었다.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를 비롯하여 그가 쓴 글들 가운데는 국보적 가치를 가지는 것들이 적지 않다.

임춘추가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가 ≪3.1월간≫의 명예기자로 일한 다음부터였다. 그가 쓴 글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내기관지들에 여러 편 나갔다. ≪3.1월간≫에 실린 ≪만신창이 된 일본경제≫라는 그의 글은 성과작으로 평가되었다.

임춘추는 전투와 행군, 치료 사업으로 바삐 보내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시간을 아껴가며 매일같이 우리의 활동내용을 짬짬히 기록하였다. 종이가 바닥이 나면 봇나무껍질을 얻어서라도 거기에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일지를 정리해 놓군 하였다. 그 일지가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의 기초자료로 되었다는 것은 임춘추 자신도 여러 번 말하였다.

위증민은 생전에 임춘추를 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역사를 쓰라고 여러 번 권고하였다고 한다. 당사업도 좋고 군의사업도 좋고 명예기자사업도 물론 좋다, 그러나 그보다 못지 않게 중요한 임춘추의 사명은 조선빨치산의 활동역사를 쓰는 것이다, 동무는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결사전을 벌이다가 다 죽는 경우에도 동무는 살아서 이 사명을 완수하여 자기 사령관의 업적과 자기 군대의 투쟁역사를 후세에 꼭 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임춘추는 경위연대 당서기로 활동할 때 위증민의 곁에 오래동안 가있으면서 그의 사업도 도와주고 병치료도 해주었다. 그래서 위증민은 그와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늘 곁에 있어줄 것을 요구하군 하였다. 나와 위증민과의 연계를 보장하며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의 친선을 공고히 하고 두 나라 무장력의 공동전선을 강화하는데서 그가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임춘추의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를 내가 처음으로 받아본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사대주의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혁명전통교양이 잘되지 않아 인민들과 청소년들속에 우리의 무장투쟁역사가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었다. 적지 않은 간부들은 ≪쏘련공산당약사≫에 대해서는 ≪이스크라≫가 어떻고 부하린이 어떻다고 줄줄 외우면서도 남호두에서 무슨 회의가 있었는가고 물으면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가 출판되어 인민들에게 항일혁명에 대한 윤곽을 처음으로 그려주었다. 그때로부터 이 책은 항일혁명역사를 연구하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원전으로 되었다.

임춘추는 이 책을 내놓는 것으로 항일혁명에 참가한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적 인민들앞에 지닌 의리와 의무를 지키려고 하였다. 그는 자기자신을 소개하거나 그 무슨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기 위해서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의 만년대계의 재부로 되는 혁명전통을 추대들이 더 잘 계승하고 완성해나가도록 하려는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썼다.

임춘추는 김정숙, 김철주의 활동내용을 중심으로 한 회상실기들을 비롯하여 우리 당의 혁명전통과 관련된 많은 책들과 교양자료들을 써냈다. 그리고 많은 자료들을 고증하고 체계화하여 우리 당 역사에 빛나는 위훈을 세웠다. 그는 청년공산주의자들을 원형으로 하는 ≪청년전위≫라는 다부작 장편소설까지 창작하였다.

우리 당은 지금 임춘추를 우리가 개척하고 승리에로 이끌어온 항일전의 빛나는 혁명역사에 대한 권위있는 증견자, 힘있는 보증자로 평가하고 있다. 나는 그 평가가 정확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털어놓고 말해서 임춘추는 어려운 항일혁명을 하지 않고 의술만으로도 제 밥벌이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선의 고비를 수십 수백 번이나 넘으면서도 혁명의 길에서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자기 수령과 동지들앞에 지닌 의리를 한 번도 저버리지 않았다.

임춘추는 용정감옥에 갇혔을 때 자기가 죽어도 혁명은 승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자기 개인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혁명조직과 동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야수적인 고문을 이겨냈다. 그런데 혁명을 배반한 인간들은 자기가 죽으면 혁명도 의의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조직과 동지들이 피해를 입더라도 자기가 살아야겠다는 심보를 가지고 고문에 굴복하였다.

이것이 바로 진짜혁명가와 가짜혁명가들이 차이점이다.

나는 임춘추가 의리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해방 후 여러 가지 사실들을 통하여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그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준비를 위해 중국동북지방에 전권대표로 파견되어갈 때 나는 그에게 동만에 가면 항일혁명열사의 자녀들을 많이 찾아 조국으로 내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임춘추는 중국인민이 어려운 국내전쟁을 치르고 있는 때에 전선을 원호하고 정권기관들을 조직하며 교육사업의 토대를 마련하고 각계각층 인사들과의 사업을 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항일혁명열사의 자녀들을 빠짐없이 조사장악하여 조국에 내보내주었다. 그는 지어 부암동시절의 친지이며 혁명전우인 김정숙의 형제들을 찾으려고 신문에 광고까지 냈다.

그는 간부들의 협의회를 소집할 때마다 조국에서 혁명가유자녀학원을 세운다는 소식을 알려주었으며 한 명의 유자녀라도 더 찾으려고 직접 신들메를 매고 간도의 산재부락들을 발이 닿게 돌아다니었다.

누데기를 걸친 남루한 행색의 아이들이 광고를 보고 찾아올 때마다 임춘추는 그들의 품에 와락 끌어안고 너는 누구의 아들이구나, 너는 누구의 딸이지, 김일성장군님께서 너희들을 얼마나 안타깝게 찾고 계시는지 아느냐고 하면서 아이들의 볼을 막 비비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찾아낸 유자녀가 수십 명이 되었을 때 그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장군님, 1차로 찾아낸 유자녀들을 데리고 곧 조국에 나가겠습니다 하고 전보를 쳤다. 나는 그 짤막한 문구들에서 혁명전우들에 대한 의리를 지킨 데서 오는 임춘추의 격정과 희열을 느끼었다.

임춘추는 수많은 유자녀들과 혁명열사의 가족들을 찾아서 조국의 품으로 보내주었다. 그때 학원에 입학했던 아이들이 지금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으로도 되고 도당책임비서로도 되고 인민군장령으로도 되어 일을 잘하고 있다.

임춘추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얼마동안 지방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보건성에서 소집하는 회의에 참가하려고 평양으로 출장을 올 때마다 모란봉에 올라가 투사들의 묘소옆 잔디밭에 백포를 펴고 잠을 자군 하였다고 한다. 시내의 여관에서는 아예 유숙할 잡도리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의 모란봉에는 김책, 안길, 최춘국, 김정숙 등의 묘소가 있었다. 한지에서 그것도 전후좌우에 전우들의 무덤이 있는 산등성이에서 한 장의 백포에 몸을 맡기는 그런 노숙이라 잠이 잘 올 리가 만무하였다. 하건만 임춘추는 평양에만 오면 무작정 모란봉에 올라가 전우들의 무덤곁에 잠자리를 정하군 하였다. 그리고는 그 자신이 훗날 말한 바와 같이 ≪이 사람들아, 조국이 당신들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있은 때에 당신들은 어찌하여 이곳에서 잠들고 있는가. 장군님께서 지금 조선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지고 얼마나 고군분투하시는지 아는가?≫고 하면서 무덤속의 전우들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때여서 시민들 중에는 모란봉의 무성한 초목속에서 투사들의 혼백이 고이 잠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사람들이 그닥 많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떤 허우대 큰 사나이가 이따금씩 그 혼백을 안고 자다가는 첫아침에 조용히 모란봉에서 내려오군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 사연을 듣고 임춘추야말로 의리가 있는 참사람이며 참투사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항일유격대식 의리이다. 세상에는 인간의 의리와 사랑에 대한 미담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항일혁명투사들이 창조한 것보다 더 숭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의리를 나는 모른다.

임춘추는 항상 자기를 김정일동무의 늙은 제자라고 하면서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였다.

김정일동무 역시 임춘추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는 늘 임춘추동지가 앉아계시기만 해도 우리 당과 국가에는 귀중한 재부로 된다고 하면서 그를 극진히 아끼고 돌보아주었다. 임춘추에 대한 김정일동무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속에는 노혁명가들에 대한 지도자의 고결한 의리가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백두산에서 마련된 항일유격대식 의리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혁명적 의리와 절개를 잘 지킨 것은 아니었다. 우리 대오에서도 부분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변절자나 낙오자가 생기였다.

입만 벌이면 혁명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절개를 버렸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 대원들은 모두 상심하였다. 어제날까지 ≪인터내셔날≫의 노래를 부르고 혁명승리를 운운하던 사람들이 돌변하여 적의 앞잡이로 굴러떨어질 때 병사, 지휘관들이 느끼는 고통과 좌절감을 무슨 말이면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변절자들이 한두 명 생겼다고 하여 십 년 쌓은 성벽이 무너질 수 없었다. 우리는 대오의 사상의지적 통일과 도덕의리적 단합을 강화하는 것으로 적의 백색테러에 대답하였다. 우리가 이기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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