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2(2003)년 3월 11일(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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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땅에 울린 하모니카 소리

 김일성주석 ≪세기와 더불어≫

통일여명 편집국 주해 2-35

 

인민을 위하여 싸우는 군대가 인민들한테서 냉대를 받을 때보다 더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원정대가 노야령을 넘는 첫 순간부터 이런 냉대에 부딪쳤다고 하면 독자들은 아마 잘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을 것이다. 참된 의리의 창조자이고 옹호자이며 대표자인 인민이 자기의 이익을 수호하는 혁명군대를 외면하거나 푸대접한 적이 있었는가고.

나는 있었다는 말로써 이 상식을 뒤집어놓을 수밖에 없다.

풍요하고 기름진 영안땅이 곡창지대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그러나 원정대가 노야령을 내려 북만지경에 들어선 초기만 하여도 영안사람들은 우리에게 밥조차 잘 지어주려 하지 않았다. 궁해서 그런 푸대접을 한다면 연민의 정이라도 느끼련만 오해와 불신을 앞세우고 무턱대고 등을 돌려대니 인민의 지지와 환대에 습관된 우리로서는 아찔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설피를 신고 행전을 친 원정대원들이 멀리서 나타나면 이 고장 사람들은 ≪고려홍군≫이 왔다면서 무작정 동네에 나가 돌아다니는 아녀자들을 불러들이고 문부터 닫아걸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우리의 동정을 살폈다. 이런 불미스러운 광경은 우리의 자존심에 험한 상처를 냈다.

우리는 얼마 동안 밥도 한지에서 지어먹고 잠도 한지에서 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간도에서 전혀 체험해 볼 수 없었던 생소한 현상이었다. 우리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마다 동만사람들은 떼를 지어 달려나와 북과 징을 두드리면서 박수도 쳐주고 가슴팍에 꽃다발도 안겨주었다. 더운물을 떠주고 풋강냉이를 쥐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언제인가는 마촌에 솔대문까지 세워 군인들을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영안사람들은 우리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정찰도 파견하고 지하조직도 발동시켜 보았지만 우리는 도대체 이 고장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동만에서 주보중이나 북만주 왕래가 번다한 고보배를 통해 사전에 요해했던 것보다 훨씬 더 냉혹한 대우였다.

영안현에는 옥랑하라는 마을이 있었다. 땅이 비옥하고 낟알이 풍족하다고 하여 지명마저 옥랑하라고 했다는 마을이었는데 밥은 고사하고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정치사업을 하려고 마을에 나타나서 군중들을 모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좀처럼 응해주지 않아 시국강연조차 할 수 없었다. 이성림은 노야령이 험하다고 짜증을 냈지만 이것은 노야령보다 더 험난하고 가파로운 장벽이었다.

어떤 대원들은 영안사람들이 본래부터 그런 냉혈인들이라고 단정하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장마다 민심이 조금씩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손님대접을 후히 하고 그들의 편의를 친절하게 봐주는 중국사람이나 조선사람의 미풍양속이 이 고장이라고 하여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정대를 아연하게 한 영안사람들의 인사불성은 어디에 기인되는 것인가.

역사기록에 의하면 영안땅은 한동안 발해의 수도가 자리잡고 있던 곳이었다. 이 유서 깊은 고도에는 한때 10만 명의 주민이 모여 산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개발역사도 비교적 오랜 셈이다. 토지는 비옥하고 인민은 근검하고 순박충실하며 신의가 투텁고 정의와 법도를 중히 여긴다는 것이 역사에 기록된 이 지방의 공인된 풍토이다.

발해의 수도가 타고장으로 옮겨지고 백성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후 인구의 부단한 증감과정이 수세기를 거쳐 되풀이되고 세대도 수십 차례 바뀌었지만 영안사람들의 미풍양속만은 퇴색하거나 엷어지지 않고 대대로 고스란히 이어져왔다.

영안사람들이 본래부터 차고 야박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타당치 못한 것이었다.

어떤 대원들은 영안이라는 지방이 원래 공산주의운동을 할 만한 고장이 못된다는 한심한 주장까지 하였다. 그들이 내놓은 첫 번째 논거는 영안사람들이 의식수준이 낮아 공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영안현에 토지가 많은 대신 그것을 경작해야 할 농민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사회계급적 관계에서 적대적 모순이 생기지 않으며 따라서 계급투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허무주의적 주장은 즉석에서 강력한 반격에 부딪쳤다. 세상에 공산주의를 할 만한 고장이 따로 있고 하지 못할 고장이 따로 있는가. 공산주의가 뚫고 들어가지 못할 고장이 있다면 그런 공산주의를 가지고 어떻게 전 세계를 전취할 수 있겠는가. ≪전 세계 노동자들은 단결하라!≫는 ≪공산당선언≫의 사상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겠는가.

주민이 적고 땅이 넓어서 적대적 모순이 조성되지 않는다는 것도 현실을 잘 모르고 내리는 피상적인 판단이다. 그런 이론대로 한다면 인구밀도가 높은 독일이 인구밀도가 희박한 러시아보다 계급적 모순도 더 첨예하고 혁명승리도 먼저 달성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가. 이것은 궤변이다 하고 그 논거를 일축해버렸다.

영안인민들이 공산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게 된 원인을 찾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반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죄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영안땅에서 공산주의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공산주의자들과 인민들 사이에 쐐기를 박기 위하여 일찍부터 비열한 반공선전을 집요하게 벌여왔다. 정치사상적 계몽이 비교적 굼뜨게 진행되어 온 영안에서 그 선전은 주민들속에 쉽게 먹혀들어갔다.

영안일대에 조성된 반공풍조의 책임은 파벌행위를 일삼아온 조선의 초기공산주의자들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에서 공산당이 창건된 후인 1920년대 중엽에 벌써 화요계의 인물들은 이 지방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라는 으리으리한 기관을 갖추어놓고 공산주의라는 신성한 이름을 팔아가면서 판세를 확대하는데 몰두하였다. 순박하고 어리무던한 민중을 향해 조선독립과 즉시적인 사회주의실현을 귀따갑게 외쳐대면서 그들을 무모한 폭동과 시위에로 내몰았다.

좌경의 마이크는 영안인민들을 5.30폭동에 궐기하라고 호소하였다. 이 폭동에서 주되는 투쟁대상이 간도에서는 일본의 식민지통치기관들과 중국인지주들이었다면 영안에서는 한족총연합회와 같은 민족운동단체들이었다. 그러나 현성에서 발달된 시위는 그 서막에서부터 된서리를 면치 못하였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단행된 1932년 5월 1일의 시위도 결국은 적들앞에 핵심을 노출시키고 영안시가를 피로 물든인 가슴아픈 결과만을 가져왔다. 이 모든 모험적인 시위로 하여 영안지방의 혁명조직들은 무더기로 파괴되었다. 5.1절 시위를 기점으로 영안지방에서 공산주의운동은 급속한 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당지도부는 무력건설과 유격구건설을 중단하고 목릉, 동녕, 왕청 등지로 제가끔 흩어져갔다. 혁명을 포기한 일부 사람들은 영안현성으로도 흘러들어갔다.

일제와 만주군경들의 무차별적인 백색테러는 사람들의 면전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인상을 무참히 짓밟아놓았다.

투쟁의 끝에 차례진 감옥과 죽음의 공포앞에서 사람들은 절망하거나 전율하였다. 혁명의 종착점은 죽음이라는 생각, 공산주의운동을 했대야 쓸데없다는 허무주의적인 인식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대중의 심층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불모지라는 선고를 내리고 떠나간 영안 땅에 중국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들어가서 재건작업을 시작하였으나 그들도 역시 혁명 일반에 대한 군중의 냉담한 표정앞에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의 일부 민족주의자들도 영안지방에서 반공독소를 전파시킨 직접적인 당사자라고 말할 수 있다. 경신년 대≪토벌≫에 겁을 먹고 러시아에 망명했다가 흑하사변 후 영안으로 돌아온 독립군의 잔여세력은 반소, 반공 선전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흑하참변이 쏘련과 결탁된 조선의 망명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발생된 것이라고 하면서 공산주의를 헐뜯고 쏘련을 헐뜯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심지어 김좌진이 죽은 것도 공산주의자들의 작간이라고 하였다. 이런 선전은 김좌진 피살의 진상을 왜곡한 것이었다. 그러나 순진한 인민들은 그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영안지방사람들은 공산주의만 경계한 것이 아니라 군대들도 경계하였다. 그들은 소속과 사명에 관계없이 군대란 군대는 다 싫어하였다. 그 모든 군대들이 쌀독과 돈주머니를 축내는 식객으로 백성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였기 때문이다. 일본군과 위만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항일구국을 표방하는 일부 중국인반일부대들도 인민들에게서 돈과 쌀과 가축을 강압적으로 걷어갔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도 영안땅에 신민부라는 행정기구를 만들어놓고 군자금과 군량미를 받아냈다. 여기에 걸핏하면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가는 토비들까지 무시로 달려들어 성화를 먹였으니 그 모든 식객들의 시중을 고스란히 들어주어야 하는 백성들의 심리가 어떠했겠는가.

이런 역사적 근원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영안인민들을 박정하다고 탓할 수가 없었다. 원정대가 물질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가장 심각한 고충으로 되는 것은 북만인민들에게 혁명의 씨앗을 심어주려고 한 우리의 중요한 원정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인민들이 정녕 우리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면 원정대가 북만을 혁명화하는 길은 영영 막히게 되는 것이다.

영안사람들을 혁명대로에로 불러내자면 어데든지 돌파구를 열어야 하였다.

우리는 팔도하자구 당사업을 요해하는 과정에 그곳 구당서기 김백룡을 통하여 영안현의 실태를 더 깊이 파악할 수 있었다. 김백룡의 말에 의하면 영안경내에서 그래도 그 중 혁명화가 잘된 곳은 팔도하자라고 하였다.

팔도하자를 일명 소래지팡이라고도 하였는데 바로 여기에 영안현당도 있었고 구당도 있었다. 팔도하자를 소래지팡이라고 한 것은 화룡현일대에서 대종교교주로 있던 김소래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내가 김소래에 대한 말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길림에서 육문중학교를 다닐 때 서중석을 통해서였다. 그는 한때 김소래가 설립한 화룡의 건원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김소래는 그 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장이었는데 서일과도 연계가 깊었고 북로군정서와 간도국민회의 상층인물들과도 친면이 두터웠다. 반일감정이 강한 그는 건원학교 졸업생들을 홍범도, 김좌진 같은 독립군 맹장들의 수하에 보내는 것으로 구국운동을 후원하였다.

김소래는 독립군이 북간도에서 철수한 후 팔도하자골 안에 와서 토지를 사고 거기에 눌러앉아 지주가 되어 김좌진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주었다. 이광도 유격대 초창기에 이 사람한테 와서 여러 자루의 무기를 구해 가지고 갔다.

김소래가 대종교의 교주라는데로부터 영안지방의 혁명가들은 한동안 그를 나쁘게 보았다.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종교를 일본종교로 오인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종교란 우리 나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환인, 환웅, 환검을 신주로 하는 순수한 조선종교였다.

김백룡은 팔도하자 골짜기의 길이가 적어도 80-100리는 잘된다고 하였다. 골짜기에는 수많은 산재부락들이 있는데 주민 구성에서 조선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한때 독립군의 후방기지로 번창했던 팔도하자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 영안유격대의 활동거점으로 되었다.

나는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적정도 알아볼 겸 주민들의 동향도 알아볼 겸 김백룡이 알선해주는 팔도하자의 한 부락에 정치공작조를 파견하였다. 그 정치공작조에는 한다 하는 선전선동 명수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인솔해 가지고 주민들속으로 들어갔던 5중대 정치지도원 왕대흥은 지친 듯한 표정으로 내앞에 나타났다.

≪또 실패입니다. 아무리 구수한 말을 해두 마이동풍입니다. 영안사람들과 거래를 하는 바엔 차라리 소귀에 사서삼경을 불어넣는 게 낫겠습니다.≫

그는 이런 보고를 하고 나서 절망적으로 머리를 떨었다.

옆에서 그 보고를 듣고 있던 김백룡은 마치 영안사람들이 동만손님들을 냉대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잘못이기나 한 것처럼 한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하여튼 영안사람들이 문제는 문제입니다. 동만경험을 배우려구 참관단까지 보내면서 공을 들였는데 요지부동이란 말입니다. 참관단이 돌아온 다음 겨우 아동단학교를 하나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아이들이 50명쯤 모여 오골오골하더니 웬걸 그것두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민이 자기의 이익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혁명가들을 외면한다면 그 인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난생 처음으로 이런 고고의 절벽에 부딪쳐보는 나로서는 생각이 깊었다. 푸르허오가자를 혁명화하는 과정이 단순치 않았다고 하지만 그 지방 사람들도 영안인민들처럼 그렇게까지는 냉정하지 않았다.

수수천 년을 헤아리는 우리의 유구한 민족사에서 인민이 나빠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한평생 인민을 좋은 인민과 나쁜 인민으로 구별해본 적이 없었다.

역사의 오점을 남겼거나 그 역사를 우롱한 것은 한 줌도 못되는 통치배들이었지 인민이 아니었다. 물론 개별적 인간들 가운데는 역적도 있고 수전노도 있고 사기꾼도 있고 협잡배나 야심가나 패덕한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쌀에 뉘만큼도 안 되는 소수자였다.

이 세상 전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인민이라는 거대한 집체는 항상 역사의 수레바퀴를 진두에서 성실하게 굴려왔다.

그 역사에 거북선이 필요하면 거북선을 만들었고 피라미드가 필요하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시대가 피를 요구할 때 인민은 육탄이 되어 서슴없이 화구앞으로 죽음을 맞받아나갔다.

문제는 영안사람들의 심장부로 통하는 지름길을 발견해내지 못한 데 있었다.

왕대흥이 인솔한 정치공작조도 분명 격동적이 호소적인 반일선전을 하였을 것이다.

영안사람들이 그런 연설을 적게 들었겠는가. 귀가 아프게 들었을 것이다. 독립군도 구국군도 비적들도 그런 연설을 다 한다. 그러니 왕대흥의 정치공작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잘못은 그들이 무작정 인민을 가르치려 한 데 있다. 언제부터 우리가 자신들을 인민의 선생이라고 여겼고 인민을 자기의 학생들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던가. 인민을 무지에서 광명으로 인도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사명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우리가 자신들을 인민의 선생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너무나도 주제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인민의 심장 속 깊이에로 침투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하지만 그 심장이 받아들이는 통행증은 단 한 가지밖에 없으니 그것이 바로 진심이다. 진심만이 우리의 피와 인민의 피를 하나의 동맥속에 융합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진심으로 인민의 아들이 되고 손자가 되고 형제가 되어 군중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안땅에서 영영 인민의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왕청아동유희대가 영안에 와서 공연을 할 때에는 매번 공연장소에 군중이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아동유희대도 혁명을 호소하고 유격대도 혁명을 부르짖었는데 왜 인민이 아동유희대는 환영하고 유격대는 외면하였겠는가.

나는 김백룡에게 물었다.

≪우리 아동유희대가 이 고장에 왔을 때 동무들도 공연을 구경했소?≫

≪했지요. 그 애들의 공연이 굉장했습니다.≫

김백룡은 왕청아동유희대가 그때 영안 땅을 들었다 놓았다고 하였다.

≪유희대가 가는 곳마다 초만원이었다는데 공산당선전을 달가워하지 않는 영안사람들로서야 천지개벽이 아니겠소. 군중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비결이 어데 있는 것 같소?≫

≪그 아이들이 이 고장사람들한테 귀엽게 굴었지요. 유희대공연으로 영안사람들의 혼을 쭉 뽑아놓고는 공산명월처럼 방글방글 웃으면서 그들을 감화시켰답니다. 애들이 내 아버지, 내 어머니한테 정을 주듯이 정을 주는데 아무리 목석 같은 영안사람들인들 왜 녹아나지 않겠습니까.≫

≪그 재간둥이들이 왕청에서도 인기가 대단하다오.≫

≪유희대공연도 공연이지만 아이들이 민심을 얻었지요. 그 아이들의 품성에는 나도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팔도하자 마을 청결은 이 아이들이 다했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는 온 동네를 다듬이돌처럼 반반하게 정돈해 놓지요. 낮이면 밭에 가서 어른들 일손도 돕구요.≫

김백룡이 유희대원들을 연방 칭찬하는 바람에 나는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그 애들이 나이는 어리지만 셈은 다 들었지.≫

≪아이들이 또 사람은 얼마나 따르는지…. 어른들만 보면 십리 밖에서부터 아동단경례를 붙이구 ≪할아버지≫, ≪아버님≫, ≪아재≫, ≪누나≫, ≪언니≫하면서 찰찰 감겨 돌아가는데 … 하여튼 평이 대단했습니다.≫

아동유희대가 북만사람들의 민심을 틀어잡은 것은 바로 그들이 사람들에게 정을 준 데 있었다. 우리가 두만강 얼음구멍속에 도끼를 빠뜨렸을 때 그것을 찾으려고 반나절 동안이나 극성스럽게 애쓴 것도 인민에게 바치는 진정의 표시, 사랑의 표시 아니었던가. 우리가 진정을 바칠 때 인민이 그 진정을 거절하거나 우리를 배척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왕대흥정치공작조의 실책은 바로 인민에게 그런 진정을 바치지 않았다는데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북만사람들을 혁명화해야겠다는 실무적인 목적만 생각하였지 인민들에게 정을 주고 친숙해지려는 궁리는 하지 않았다. 북만인민이 우리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우선 북만사람들과의 접촉을 연설로부터 시작한 것이 잘못이었다. 사람들에게 정을 먼저 주고 심금을 울리는 노래로 그 정을 더욱 두터이 한 왕청아동유희대의 활동은 얼마나 교훈적인가.

나는 정치공작의 형식부터 바꾸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지휘관들과 함께 그 방도를 토의하였다. 그런 다음 각 중대 정치지도원들에게 하모니카를 잘 부는 사람들을 전부 불러오도록 하고 그들이 지휘처에 다 모이자 한 명 한 명 차례로 불어보게 하였다.

연길중대에서 온 홍범이라는 대원은 청중들이 흥이 나서 어깨를 으쓱으쓱할 정도로 하모니카를 재치있게 불렀다. 때로는 하모니카로 손풍금 합주 비슷한 소리까지 냈다. 왕청 5중대 동무도 하모니카를 잘 분다고 하였는데 그에 비하면 따라지였다.

홍범은 소학교시절부터 하모니카를 불었다. 어떤 단골손님이 집에 놀러왔다가 두고 간 하모니카였는데 주인이 다시 나타나지 않아 자연히 그의 애용품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해를 거듭하여 부는 사이에 재간은 놀랄 정도로 늘어났지만 하모니카는 도금칠이 다 벗겨진 중고품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청만은 옛 그대로였다.

나는 뒤틀라즈에서 원정준비를 할 때 그 하모니카를 보고 새것을 하나 마련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기회가 생기지 않아 북만으로 떠날 때까지 그 결심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간도지방 유격대원들과 인민들 중에는 홍범의 경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보통대원에 지나지 않는 그의 경력이 사람들의 관심을 자아내는 화제거리가 되어 동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남다른 하모니카연주술 때문이었다.

하모니카연주가들은 어디서나 전우들의 사랑을 받았다.

홍범의 고향은 함경북도 종성이었다. 부모를 따라 어려서 간도지방에 건너온 그는 일찍부터 혁명운동에 참가하였다. 한때는 적위대에 입대하여 돈도선철도공사를 파탄시키기 위한 대중투쟁에 참여한 일도 있었다. 해란구유격구역이 해산된 후 그는 하모니카가 들어있는 배낭을 메고 왕우구로 옮겨와 거기서 유격대에 참군하였다.

나는 왕대홍에게 과업을 주어 전날 정치공작조가 침을 뱉고 돌아선 그 마을에 하모니카중주단을 데리고 가서 인민들의 심장을 다시 한 번 흔들어보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김백룡에게 지하조직을 발동시켜서 하모니카를 있는 대로 사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이날 인민들에게 배포할 선전문을 마련하려고 영안현 당비서처를 찾았다.

우리가 비서처동무들과 담화를 하고 있을 때 하모니카중주단을 데리고 마을에 나갔던 왕대흥이 희색이 만면해서 내앞으로 뛰어들었다.

≪대장동지, 성공입니다. 그 장승같이 무뚝뚝하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심장을 열어놓았습니다.≫

왕대흥은 결과를 먼저 보고하고 그 다음에 공작경위를 조리있게 말하는 지휘관이었다.

혁명군에 심장을 열어주지 않고 무정하게 외면하는 목석 같다던 사람들을 돌려세웠다는 하모니카중주단의 활동경험은 교훈적인 것이었다.

중주단의 활동은 마을 한복판에 있는 어떤 집 마당의 눈을 치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너렁청한 그 마당에 보초를 세우고 맨 선참으로 펼쳐 놓은 것은 바로 홍범 외 1명이 출연하는 하모니카 2중주였다. 중주단의 나머지 성원들은 그 2중주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러자 가까운 골목에서 팽이를 돌리던 두세 명의 조무래기들이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울바자앞으로 달음박질해왔다. 다른 골목에서도 아이들이 바지괴춤을 춰올리며 오락장으로 뛰어왔다.

2중주는 ≪총동원가≫로부터 ≪아동가≫≪어데까지 왔니≫로 얼른 곡목을 바꾸었다. 홍범의 하모니카에서 경쾌한 음향에 홀딱 반해버린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떤 아이들은 동네방네로 뛰어다니며 간도에서 온 ≪고려홍군≫이 댄스를 한다고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광고를 들은 어른들이 먼 발치엣 팔짱을 지르고 혁명군의 오락회를 구경하였다. 어떤 어른들은 오락장 가까이에까지 바싹 다가와 ≪고려홍군≫의 ≪풍각쟁이≫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구경꾼들의 수효가 40-50명쯤 되자 하모니카중주단은 ≪아리랑≫을 연주하였다. 그런데 이 ≪아리랑≫이 온 동네를 다 불러내고야 말았다. 관객의 수는 100명, 200명으로 불어났다가 다시 300명 계선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런 때에 고보배가 나서서 ≪평안도수심가≫를 불렀다. 그 청승맞은 노랫가락에 흥취가 오른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은 오락장을 가락지 모양으로 완전히 에워싸고 ≪고려홍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에 귀를 귀울였다.

고보배는 노래를 마지막까지 다 부르지 않고 중도에서 툭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좀 신파끼가 있는 억양으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여러 분. 여러 분네들은 고향이 어디십니까? 경상북도라구요. 함경남도, 강원도, 네네, 물론 평안남도 출신도 있겠지요. 제 고향은 구태여 묻지 말아주십시오. 거 뭐 제가 재세를 하는 건 아닙니다. 전 고향이 어딘지 모르고 살아온 놈이웨다. 조선은 조선인데 그저 해변가라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조선에서 살다가 부모 등에 업혀 강을 건넜는데 두만강인지, 압록강이었던지 그것두 알 턱이 없지요. 네네, 난 원래부터 그런 반편입니다.…≫

사람들은 고보배의 입담에 심취되어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수군수군 소감도 나누었다.

고보배는 간도에 들어와서 가랑잎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자라던 경위와 유격대원이 되어 왜놈들을 요정내던 몇 가지 장면들을 고사처럼 구수하게 엮어대다가 축음기 소리판을 뒤집어 끼우듯이 슬쩍 혁명에 대한 계몽으로 넘어갔다.

≪여러 분, 우리의 한결같은 소망이 뭘까요. 그건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조국으로 돌아가자니 왜놈들이 떡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 그놈의 오랑캐들을 가만 내버려두어야 하겠습니까? 난 참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총 잡구 유격대원이 된 거지요. 왜놈의 씨종자를 없애려고 영안에두 왔구요. 북만에서 돌아치는 일본군대 더 건방지다지 않겠나요.≫

연설이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고보배의 머리에는 난데없이 일본군대의 군모가 척 놓였다. 괴춤에 찔러가지고 간 것을 순식간에 머리 위로 날렸던 것이다.

그 다음은 연이어 그의 얼굴에 수염이 달리고 안경이 걸렸다. 사람들은 그가 손쉽게 해치운 분장이 일본장교를 형상한 것임을 누구나 쉽게 판단하였다.

고보배는 이런 희극적인 차림으로 기지개와 하품을 한바탕 늘어지게 한 다음 뒷짐을 뒤고 턱을 잔뜩 쳐들고 얼굴을 우습게 씰룩거리면서 오락장을 두어 바퀴 돌았다. 그것은 방금 잠에서 깨어나 병영마당에 나서서 산책을 하는 일본장교의 기분상태를 아주 그럴 듯하게 연상시켰다.

구경꾼들은 처음에 작은 소리로 키득키득 웃어대다가 나중에는 내놓고 포복절도하였다.

고보배는 그 폭소가 가라않기 바쁘게 구경꾼들 앞을 한 고패 빙 돌아가며 할머니앞에 가서는 노파의 웃음소리, 할아버지앞에 가서는 영감의 웃음소리, 젊은 여인들앞에 가서는 새각시의 웃음소리를 내는 식으로 성별과 연령에 따르는 각종 웃음소리를 흉내냄으로써 구경꾼들이 배를 그러쥐고 웃어대다 못해 눈물까지 흘리게 하였다.

하모니카중주단은 이렇게 마을을 흐물흐물하게 해놓은 다음 다시 한 번 항일선전을 하고 혁명군 원호를 호소하였다.

하루 전에 정치공작조가 들어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마음에 가서 하모니카중주단이 이처럼 놀라운 실적을 올릴 수 있은 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진행한 선전공작의 통속성과 진실성에 있었다.

우리는 이런 경험에 토대하여 군중들속에 더 깊이 들어가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영안현의 수십 개 마을을 점차적으로 혁명화하였다. 동만에서 온 ≪고려홍군≫과 영안인민들을 갈라놓고 있던 철의 장벽은 마침내 제거되었다. ≪고려홍군≫이 지나간 고장들에서는 당대열이 늘어나고 공청과 부녀회, 아동단을 비롯한 혁명조직들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기의 심장을 활짝 열어제낀 인민들은 혁명군을 지지하고 원호하는데서 최대의 보람을 느꼈다.

그 인민의 군상속에는 천교령목재소의 김노인, 다왜즈의 조택주노인, 옥량하의 중국할머니 맹성복, 남호두의 이노인 등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 수없이 많다.

맹할머니는 4촌동생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온갖 곤욕을 다 당하면서도 적의 동태를 반영한 귀중한 정보자료들을 원정대에 무시로 제공해주었다.

남호두의 이노인은 적들의 항시적인 감시속에 있는 요시찰인이었다. 적들은 그가 유격대를 원호한다고 8칸짜리 집에 불을 질렀다. 언제인가는 헌병대에 끌어나가 수십 개나 되는 곤장을 먹었다. 그런 졸경을 당하면서도 이노인은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과 신발을 지고 혁명군의 숙영지로 자주 찾아오군 하였다.

≪노인님 무섭지 않습니까.≫

한번은 내가 노인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무섭지요. 내가 혁명군에 물건을 가져다주는 것이 탄로나는 날이면 내 아들 셋은 물론이고 우리 일가가 멸족당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방법이 없지요. 혁명군 어른들이 나라를 찾아주겠다고 변변히 자지두 못하고 자시지두 못하면서 고생하는데 우리가 일신의 안전만 생각하면서 팔짱을 지르구 있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노인의 대답이었다.

조국을 사랑하고 정의를 옹호하는 불씨는 북만인민들의 가슴속에도 소중히 간직되어 있었다.

불씨의 열도는 동만인민들이 지니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은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껍질이 갑절 두터웠을 뿐이며 그 껍질을 통과하는 문턱이 한결 높았을 뿐이다.

인민은 자기를 동정하고 이해해줄 줄 아는 사람들앞에서는 그가 누구든지 서슴없이 마음의 대문을 열어제낀다. 그리고 불타는 열정으로써 그들을 품어안는다. 하지만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토양이 인민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배은망덕자들, 인민에게는 자기를 섬겨줄 의무가 있게 자기에게는 그 시중을 받을 권리만 있다고 여기는 건방진 인간들, 인민을 아무렇게나 다스려도 된다고 간주하는 관료배들, 인민을 아무 때나 짜도 우유를 내는 젖소처럼 여기는 착취자들, 인민을 사랑한다고 말끝마다 떠들어대면서도 인민이 고통스러워할 때에는 눈을 가리며 슬쩍 지나가는 말공부쟁이들과 위선자들, 건달꾼들, 협잡배들앞에서는 사정없이 빗장을 지른다.

지금은 우리 곁에 1차 북만원정을 회상할 전우들이 한 명도 없다. 170여 명이나 되는 원정대원들 중 광복된 조국에 돌아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왕청중대에서도 아마 오준옥, 연희수가 돌아왔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영안땅에 갔을 때 강건은 아동단원이었다. 나이로 보아서는 지금까지고 살아서 혁명을 해야할 사람이다. 그러나 그도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이 발발되었던 그 해 초가을에 최전선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그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었다.

고보배는 훗날 주보중이 지휘한 5군에서 연대정치위원으로 복무하였다.

그가 전장에서 죽었다는 말도 있고 쏘련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죽었다는 말도 있는데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잘 알 수 없다. 끝없는 우스개와 익살로 온 간도를 노상 웃음의 선풍속에 몰아놓던 재능있는 낙천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접했을 때 나는 그 소식 자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낙천가가 가버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보배와 함께 북만원정대의 통로를 선두에서 개척한 하모니카중주단의 과반수는 주보중의 요청으로 북만으로 떨어졌거나 귀환 도중의 격전들에서 전사하였다. 나머지 반수의 그 후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그것을 고증할 방법이 없다. 이제는 그들의 이름조차 삭막하다.

제1차 북만원정이 있은 때로부터 근 반세기가 지난 어느 날 나는 원정 참가자 한 명이 평양에서 살고 있다는 반가운 통보를 받았다. 해당부서 일군들이 올려보낸 사진을 보니 하모니카중주단의 1번수 홍범이었다.

그 눈언저리에는 우리를 위협하던 북만의 사나운 설한풍과 그 설한풍속에서 걸음걸음 힘겹게 톺아가던 유례없는 고초의 흔적들이 역력히 남아있었다. 세월의 심술궂은 변덕으로 얼굴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왜가리목처럼 쑥 뽑힌 그 유다른 목의 형태만은 반갑게도 옛모습 그대로였다.

이 사람이 정녕 간도사람들의 총애를 받던 그 유명한 하모니카명수 홍범이란 말인가. 1차 북만원정의 직접적인 참가자이고 증견자인 이 보배같은 사람이 어찌하여 내 가까이에 건재해 있으면서 인제 와 자기 존재를 알린단 말인가.

나는 해당 부서 일군들에게 사연을 알아보라고 부탁하였다.

홍범이 그때까지 우리를 찾아오지 않은 것은 지나친 순박성과 겸손성 때문이었다.

≪나는 항일혁명에 참가하였지만 자랑할 만한 공적이 없습니다. 나에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수령님을 모시고 북만에 원정을 갔다온 것뿐입니다. 그나마 북만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삼도만 막바지에서 열병을 앓느라고 유격구가 해산된 것도 모르고 지내다가 대오를 찾지 못하여 고향으로 나왔습니다. 내가 항일전쟁참가자라고 하면 당에서 금이야 옥이야 하고 보살펴주겠는데 나는 그런 부담을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생 말년에 이른 항일의 노투사 홍범이 한 말이다.

그때 70고령이었던 그는 전승분주소에서 수위로 일하고 있었다. 집도 소박한 단칸방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태어난 새 세대의 연주가들이 3칸, 4칸 되는 새 집으로 이사갈 때에도 항일장정의 풍랑속에서 온갖 고생을 다한 유격대 하모니카수는 그 단칸집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홍범은 그 이상의 특대나 특전을 바라지 않았다.

우리의 항일전쟁참가자들은 다 이런 사람들이었다.

홍범은 내가 영안에서 사준 하모니카를 일평생 간직해왔다고 한다. 우리 사적일군들이 취재를 위해 집에 찾아갔을 때 홍범은 그 하모니카로 북만원정 때 불던 혁명가요원곡을 연주하였다는데 그 솜씨가 대단하더라고 한다.

그는 당에서 배려해준 광복거리의 새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북만원정이나 고난의 행군과 같이 참담한 시련을 겪어온 투사들은 해방된 조국에 와서도 우리와 함께 오만가지 고난을 다 이겨냈다.

초년 고생은 금을 주고도 사지 못한다고 한 우리 조상들의 명언은 얼마나 심오하고도 박력있는 생활의 진리를 귀뜸해주고 있는가. 고난과 시련은 만복의 어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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