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2(2003)년 3월 9일(일)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지난 강좌 보기
     ※강조된 문단에 마우스를 올려놓으면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밀림 속의 병기창

 김일성주석 ≪세기와 더불어≫

통일여명 편집국 주해 2-33

 

나는 마촌에 있을 때 병기창에 자주 다녔다. 병기창이란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을 말한다. ≪창≫은 ≪공장≫의 중국식 이름이다. 우리는 그 당시 병기창을 소박하게 철공소라고 불렀다. 이런 철공소들은 간도의 어느 현에나 다 있었다.

마촌병기창 또는 소왕청병기창이라고도 부른 이 철공소의 초기 수준은 조직에서 파견된 한두 명의 노력이 화독에 숯불을 피워놓고 풀무를 당기면서 창이나 칼과 같은 소소한 무기를 벼려내는 정도였다.

마촌작전 직전에 철공소에 가보았더니 직원이 자그만치 7-8명이나 되었다. 그때의 철공소는 구정부 양식과장으로 소환되어간 박두경의 후임으로 김상욱이라는 사람이 주관하고 있었다. 철공소 일군들속에서 지금까지도 이름이 기억되는 것은 오학봉, 최상문, 양도길, 강해산, 박영복, 이응만 등이다. 이 사람들 중에 철공기술을 가지고 병기창에 들어온 기술자는 강해산밖에 없었다. 그 나머지는 거의나 쇠붙이를 다루어본 경험도 없고 더욱이는 무기수리 같은 것을 해본 전적이 한 번도 없는 초학도이거나 문외한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풋내기들이 나중에는 선반도 볼반도 쎄빠도 후라이스반도 없는 촌 야장간에서 현대적 군수공장에서나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작탄도 만들고 권총, 보총과 탄알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필요한 화약까지도 척척 만들어냈다. 이것은 항일전쟁만이 창조할 수 있는 기적이었고 이 전쟁의 승리가 민족자주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본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자력갱생의 혁명정신만이 낳을 수 있었던 기적이었다.

한때 간도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쏘련사람들의 도움으로 유격근거지에 수류탄공장을 하나 지으려고 계획하였다. 전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쏘련을 인류해방의 등대로 경건하게 우러러볼 때였다. 혁명을 먼저 수행한 나라의 덕을 보려는 사상은 사람들속에서 남에 대한 의존심을 조장시켰다. 남들에 대한 의존심, 남들의 뒷받침으로 혁명을 해보려는 지향이 민족주의자들속에서 자본주의열강들에 대한 사대주의사상을 낳게 하였다면 공산주의자들속에서는 쏘련에 대한 의존심을 낳는 근원으로 되었다. 우리는 그때 혁명승리의 테이프를 끊은 쏘련공산주의자들이 후진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도와주는 것은 응당한 국제주의적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쏘련측에서는 그 청원에 아무런 회답도 보내주지 않았다. 청원을 해결해주겠다는 약속도 없었고 해결해주지 못하겠다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통지도 없었다. 우리가 자력갱생을 해야겠다고 강하게 결심한 것이 그때였다. 쏘련사람들의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자력갱생만이 살길이라는 것, 혁명을 추동하는데서 결정적인 것은 자기 힘을 최대한으로 발동하는 것이며 남들의 원조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확고히 가지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병기창사업을 특별히 중시하고 거기에 화력을 집중하였다.

박두경이 창장으로 일할 때 우리는 모루, 멍치, 집게, 메, 풍구, 줄칼, 착공기 등의 철공도구들을 주어 병기창을 꾸리게 하였다. 이런 도구들을 가지고 병기창일군들은 파손된 무기들을 수리 재생하거나 새로운 무기들을 생산하여 유격대와 반군사조직들에 공급해주었다.

병기창이 생산한 무기 가운데서 이채를 띠는 것은 파손된 퉁포나 38식보총 총신을 잘라서 외방으로 쏘게 만든 단발권총이었다. 이런 권총은 군대에 주지 않고 자위대원들이나 소년선봉대원들에게 보내주었다. 어랑촌유격대에서 만들어낸 외알배기권총은 정치공작원들에게 주로 공급되었는데 사용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병기창사람들은 38식보총 탄피들에서 뇌관을 뽑은 다음 새 뇌관을 만들어 끼우고 화약을 장약하는 방법으로 탄약도 재생하였다.

그런데 병기생산에 필요한 자재나 원료가운데서 가장 절박하게 요구되면서도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가 어려운 것이 화약이었다.

처음에 유격구의 병기창들에서는 광산노동자들과 지하공작원들이 보내주는 화약으로 작탄도 만들고 탄알도 재생하였다. 그러나 이 구입방법은 상시적인 위험을 동반하였고 광산들에 모처럼 꾸려놓은 혁명조직들을 노출시킬 우려가 많았다. 실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화약 때문에 생명을 잃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용수평 늪사건이다.

용수평은 팔도구광산 근처에 있는 동네이다. 최현의 전우이며 부인이었던 김철호가 바로 이 마을에서 자라나 혁명가로 성장하였다. 동구앞에는 수심이 깊고 갈대가 무성한 늪이 있었다. 용수평사람들은 이 물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 고장 농민들의 생명수였던 용수평늪이 하루아침 사이에 피바다로 된 참변이 일어났다. 일본헌병대 야수들이 유격근거지에 화약을 반입한 팔도구광산 노동자 20여 명을 색출하여 이 못가에서 무참히 학살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유격근거지의 지도자들과 병기부문일군들로 하여금 광산조직들에 전적으로 의탁하여 화약을 해결하던 종전을 방법을 검토하고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유격구의 병기창에서 작탄과 총탄을 만들 때 쓰던 그 한 그램 한 그램의 화약은 그대로 다 투사들이 뿌린 피였고 살점이었으며 그 모든 것의 결정체였다.

우리는 화약도 자체로 만들려고 결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결심을 사상누각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사람이 각오만 하면 못해낼 것이 없다, 조상들이 만든 화약을 그 후손들이 왜 못 만들겠는가 하는 뱃심을 가지고 화약제조의 역사와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진지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 화약의 기본원료인 염초를 민간에서도 생산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염초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만들 수 있고 또 우리가 늘 보는 것이었다. 햇빛이 쨍쨍 내리쪼이는 어느 날 나는 병기창성원들을 데리고 재와 퇴비가 쌓여 있는 이치백노인의 집마당으로 갔다. 두엄더미 주변에 하얗게 쌓여 있는 흰 소금같은 것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염초라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병기창동무들은 손에 대통을 쥐고도 내 대통, 내 대통하는 할아버지격이 되었다고 하면서 한바탕 유쾌하게 웃어댔다.

변소자리나 외양간, 마굿간에서 나간 두엄더미 밑바닥 흙에서도 염초를 얻어낼 수 있었다.

고려시기에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하여 국방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가 만들어낸 화포는 곧 함선에 설치되었다. 고려의 수군은 그 화포로 진포해전에서 왜구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겼다. 그가 화약을 제조할 때에 사용한 염초도 역시 집 주변에서 얻은 재나 먼지를 정제한 것이었다고 한다.

한때 어떤 사람들은 고려시기의 화약이 최무선의 발명이 아니고 그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 배운 제조법을 도입하여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그런 화약을 발명해낼 만한 이론기술적 토대가 우리 나라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 않았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삼국시기에 신라에서는 벌써 화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무슨 발명을 했다고 하면 ≪그 나라 사람들은 확실히 두뇌가 비상해!≫하고 감탄하면서도 조선사람이 무슨 발명을 했다고 하면 ≪그게 정말은 정말이야?≫하고 고개부터 갸웃거리는 사대주의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려놓았다.

병기창사람들은 간단한 방법으로 염초를 얻어냈다. 염초를 뽑아낼 때 용기들로는 밑굽이 뚫린 토기시루나 양철시루, 오지항아리 같은 것을 사용하였다. 이런 용기들에 마굿간, 변소, 두엄더미 바닥에서 긁어온 흙을 다져넣고 물을 부었다. 그때 구멍으로 떨어져내리는 물을 그릇에 받아두었다가 가마에 넣고 달이면 하얀 결정체가 되는데 이것이 염초였다.

그때 생기는 윗층의 결정체를 가로발이라고 하였고 밑층의 결정체를 선발이라고 하였다. 선발은 곧게 나가는 성질이 있으므로 보총, 권총 탄알들에 장약되었고 가로발은 옆으로 퍼지는 성질이 있으므로 작탄제작에 많이 사용하였다.

화약을 만들 때에 소용되는 원자재는 군중이 동원되어 다 해결하였다. 필수원료인 유황은 경비전화선 애자에서 많이 긁어다가 해결하였다. 화약에는 알콜과 같은 가연성 물질이 있는데 우리는 그대신 빼주를 썼다.

우리는 실패에 주저앉지 않고 실험을 거듭하여 끝내 이상적인 배합비율을 얻어냈다.

그때 화약제조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손원금이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원래 나는 손원금이와는 별로 인연도 없고 서로 만나서 통성을 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손원금의 경력이며 활동내용을 십년지기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손원금의 투쟁사적을 처음으로 소개해 준 사람이 박영순이었다. 작탄강습에 출연하려고 마촌에 온 그는 나와 한방에 누워 뒹굴면서 며칠 동안 신변잡사에 대한 말을 많이 하였다. 그 말 가운데는 손원금의 이름도 이따금씩 껴묻어 나왔다. 열마디에 한마디 정도씩 드문드문 튀어나오는 이름이었지만 거기에는 박영순의 각별한 애정과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도 손원금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호기심을 가지고 듣군 하였다. 박영순은 그의 친근한 전우이자 입당보증인이었다.

사람은 업적으로써도 유명해질 수 있고 재능으로써도 유명해질 수 있으며 사건으로써도 유명해질 수 있다. 1932년 당시의 손원금은 경찰서탈출사건으로 간도지방의 혁명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약장사로 가장한 그는 바이올린을 들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통신연락임무를 수행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갔는데 고문에 만신창이 된 몸을 끌고 구정물이 허리를 치는 하수도구멍으로 빠져나와 옹근 하루낮을 강물속에서 보냈다. 경비가 철통같은 적의 소굴을 무사히 탈출하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하루해를 꼬박 물속에서 보냈다는 것도 경탄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유격대에도 입대하고 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 손원금은 이때부터 성실한 노력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금곡촌의 신성덕 수리바윗골 장대는 박영순이 책임진 화룡병기창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이 병기창 일군들이 처음으로 만든 작탄을 소리폭탄이라고 하였다. 소리폭탄은 그 후 고추폭탄으로 발전하였다가 연길폭탄이라는 위력한 작탄으로 완성되었다.

연길폭탄을 제작하는데 많은 자재가 들었다. 이 자재를 병기창성원들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자면 무수한 노고를 바쳐야 했다. 손원금은 언제나 이 노고의 앞장에서 걸린 고리들을 풀어나갔다.

≪한번은 소리폭탄은 만들다가 큰 난관에 봉착한 일이 있습니다. 장약함을 만들 종이와 천이 거덜났거든요. 모두가 방도를 찾느라고 머리를 썩였지요. 그런데 원금동무는 어느새 마을로 뛰어내려가 자기 집 문창호지와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뜯어오지 않았겠습니까. 재밤중에 헐떡거리며 병기창으로 돌아온 그를 보니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겠지요…≫

이것이 박영순이 마촌에서 나에게 한 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품성을 지닌 혁명가입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받아안은 감흥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토로하였다.

박영순은 말을 이어갔다.

≪원금동무는 무슨 일에서나 앞장에 서군 했습니다. 철사가 모자라서 작탄제작이 중단상태에 빠졌을 때에도 앞장에 선 것은 손원금이었습니다. 그가 수십 리밖에 있는 남양평에 가서 300미터나 되는 전화선을 끊어왔지요. 유황도 무쇠조각도 양철판도 그 사람이 구해왔습니다.≫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치는 어느 날 밤 양철판과 무쇠를 한 짐 지고 병기창으로 돌아온 손원금의 뒤로는 주소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생면부지의 할머니 한 분이 무쇠가마를 이고 따라들어왔다.

늙은이의 돌발적인 출현은 일군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원금이, 웬일인가? 시베리아 바람에 살점이 막 떨어져나갈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라고 이 밤중에 노인님을 모시고 왔나. 사람두 참…≫

박영순이 할머니의 머리에서 무쇠가마를 들어내리며 하는 말이었다.

손원금은 등짐을 벗어내치고 의미있게 도리를 흔들었다.

≪내가 모시고 온게 아니라 할머니가 자청해서 따라왔습니다.≫

박영순은 할머니한테 말을 걸었다.

≪할머니, 어떻게 되어 저 동무를 따라오셨습니까?≫

≪저 젊은이하구 난 구면이라우. 전에 내풍동에서 살 때부터 낯을 익혔수다. 우리 며느리가 중병이 들어 골골하면서도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있을 때 깽깽이를 들고 약장사를 하던 저 젊은이가 글쎄 돈 한 푼 안 받고 약두 지어다 주고 쌀도 사다주지 않았겠수. 그래서 우리 며느리가 살아났수다. 신세를 갚지 못해 알알했는데 오늘 아침 저 젊은이가 우리 마을에 왔더구만. 집집마다 다니면서 무쇠가 있으면 내라고 하길래 옳지 됐다, 이제는 신세를 갚을 길이 틔였다하고 무릎을 치지 않았겠수. 이건 우리 집 가마 중에서 제일 큰 게라우. 에구, 신세갚음이 되기나 되겠는지…≫

할머니는 미씸쩍은 시선으로 화독앞에 놓인 가마를 굽어보았다.

≪할머니, 지성은 고맙습니다만 우리는 마사진 가마만 받지 새 가마는 받지 않습니다. 이 가마는 도로 가져다 쓰십시오.≫

박영순이 송구스럽게 하는 말이었다.

할머니는 그 말에 왈칵 짜증을 내었다.

≪그런 말은 하지두 마우. 일본놈들이 내 아들을 둘이나 불에 태워 죽였는데 이까짓 무쇠덩지가 무얼 그렇게 아깝겠수!≫

병기창일군들은 그 이상 할머니를 설복하지 않았다.

나는 박영순의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화룡땅으로 달려가 손원금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를 매혹시킨 손원금의 인간상에서 핵을 이루는 것은 바로 강쇠같은 자력갱생의 정신이었다.

나는 흥분된 심정으로 박영순에게 말했다.

≪박동무의 이번 걸음에 손동무도 같이 올 걸 그랬습니다. 그 동무의 경험이 아주 교훈적입니다. 이 훌륭한 경험을 고스란히 돌려준다면 모두들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박동무가 손동무를 대변하여 다 말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촌 작탄강습을 계기로 손원금은 전 동만이 다 아는 인물로 되었다.

박영순이 강습을 끝내고 마천을 떠날 때 나는 이런 부탁을 하였다.

≪화룡에 돌아가면 손원금동무에게 그의 경험이 강습참가자들에게 아주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 주시오. 언젠인가는 우리들이 서로 만나 정을 나누게 될 것이라는 것도 전해 주시오.≫

그러나 나와 손원금의 상봉은 한 번도 실현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작업도중 폭발사고로 두 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불행까지 당했다.

화약을 제조하는 과정은 항상 위험을 동반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제일 위험한 것은 작탄이나 총탄에 화약을 재우는 일이었다. 박두경, 박영순, 강위룡은 다같이 화약을 제조하다가 중상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곤경을 겪으면서도 작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손원금이도 실명의 쓰라린 아픔속에서 낙심하거나 비관에 잠기지 않고 ≪동무들, 슬퍼 마라. 비록 두 눈은 잃었지만 나에게는 심장이 남아있지 않은가. 두 팔이 있고 두 다리가 있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동무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는 손더듬으로 쇠줄을 자르고 작탄을 조립하면서 인터내셔널의 노래를 불렀다.

한많은 세월의 바람받이에 아버지를 묻고 형을 묻고 누이를 묻고… 이제는 또 자신의 광명마저 잃은 손원금! 그는 아직 반생에 이르지도 못한 젊은 나이었다.

손원금은 유격구가 해산되자 전우들의 짐이 되지 않으려고 부대를 떠나 금곡촌으로 내려갔다. 그의 귀에는 날마다 유격대를 헐뜯고 공산당을 헐뜯는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유격대는 산에서 전멸되었다.≫

≪근거지사람들도 다 굶어죽었다.≫

≪처창즈에 가보라. 백골뿐이다.≫

≪공산당의 정치는 망하는 정치다. 공산당을 따라다녔대야 먹을 알이 쥐뿔도 없다.≫

손원금의 혈관속에서는 분노의 피가 끓어번졌다. 그는 집집을 찾아다니며 열변을 토하였다.

≪아니다. 유격대는 살아있다. 살아서 더 넓은 지역으로 나갔다. 지금 남북만 도처에서 적들을 치고 있다. 몇십 명으로 출발했던 유격대오가 지금은 대포와 기관총을 가진 수백 수천 명의 대오로 자라났다. 동포들, 형제들! 적들의 선전에 속지 말고 인민혁명군을 더 잘 원호하자. 항일전쟁은 반드시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손원금의 발자욱은 금곡촌의 범위를 벗어나 수백 리 밖에 있는 연길과 용정에서 찍혀갔다. 이전날처럼 바이올린을 둘러메고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서 더듬더듬 걸어가는 이 ≪소경걸인≫을 군경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노상에서 보천보전투소식을 들은 그는 연길의 거리거리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목메인 목소리로 외쳤다.

≪조선동포 여러분, 6월 4일 김일성장군이 부대를 거느리고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오매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진출하였다. 혁명군의 위력앞에 혼비백산한 적들은 지금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일제의 멸망은 확정적이다.≫

그의 불같은 연설에 연길시는 죽가마처럼 끓어번졌다. 그러나 그 대가로 손원금은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였다.

≪여러분, 나에게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산천이 환히 보입니다. 승리의 날까지 굳세게 싸워주십시오! 조선혁명 만세!≫

이것은 그가 사형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당년 25살의 자력갱생의 선구자 손원금은 이렇게 한 생을 마쳤다.

박영순은 손원금을 추억할 때마다 ≪원금이는 장가도 못 가보고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라고 하곤 하였다.

만일 손원금이 지금까지도 살아있다면 후대들앞에서 자력갱생을 두고 좋은 말을 많이 할 것이다. 그의 경력 자체가 자력갱생의 산 교과서로 되고 있을 것이다.

화약의 개발은 병기생산에서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화약이 해결되자 작탄제작이 부쩍 늘어나게 되었다. 작탄은 양철통을 이용해서 도화선을 물리는 방법으로 만들어냈다. 껍데기로는 통조림통을 많이 이용하였다. 적 통치구역이나 반유격구의 지하조직들에서 모아보낸 통조림통속에 화약이 장약된 기름통같은 것을 넣고 통조림통 껍데기와 기름통 사이의 빈 공간에 마시진 보습이라든가 파편으로 쓸 수 있는 쇠붙이들을 깨뜨려 넣고 심지를 물리면 곧 작탄이 되었다.

순수한 손노동으로 만들어내는 작탄이었던 것만치 물론 조작도 불편하고 볼품도 없었다. 손동작이 굼뜨면 조작과정에서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한 대원은 양수천자에서 적들을 칠 때 심지에 불을 다느라고 꾸물꾸물하다가 팔이 떨어진 사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작탄은 수류탄과는 대비도 할 수 없으리만큼 굉장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인들이 빨치산의 작탄이라면 벌벌 떨었다.

화약이 생기게 되면서 유격근거지들에서는 나무포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오의성의 부대는 지금의 반탱크총과 비슷한 쇠로 만든 대포를 꽝꽝 쏘아대며 싸움을 했지만 우리는 그런 호강을 하지 못하고 나무포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왕청사람들이 쇠스래나무를 가지고 처음으로 나무포를 만들어낸 것은 동녕현성전투 직후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대두천을 칠 때 이 포를 쏘아보았는데 소리가 뇌성벽력처럼 요란하였다. 손으로 두드려 만든 나무포가 위력을 내면 얼마나 큰 위력을 내겠는가. 그런데 그 포로 한 방 쏘자 적들은 놀라서 다 달아나버렸다.

화룡지방사람들도 어랑촌의 머구엔즈에 있는 병기창에 나무포를 만들어냈다. 그들이 그 포를 천리봉에 올려놓고 쏘면 30리 밖에 있는 이도구의 일본군경까지도 혼비백산해서 아우성을 치곤 하였다.

혁명군이 나무포를 쏘면 적들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하였다. 아무런 기술설비도 없는 유격근거지들에서 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무기 제작과 수리에서 병기창일군들이 발휘한 혁명적 적극성과 견인불발성, 창의창발성은 실로 세인을 경탄시킬 만한 것이었다. 그 당시 유격대의 병기창들에는 현대적인 기계나 공구가 거의 없었다. 왕청사람들이 착공기 1대를 가지고 있었고 박영순이 주관하고 있던 화룡병기창일군들이 대립자의 단야업자를 통하여 구해들였다는 손볼반 한 대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연길현의 두도구, 능지영 병기창들에 그런 기계수단들이 있었던지 없었던지 하는 것은 기억에 삭막하다. 착공기와 손볼반을 제외한 최상의 수단은 줄칼이었다.

병기창일군들은 줄칼을 가지고 별의별 것을 다 수리하였다. 그들은 줄칼로 쓸고 숫돌로 갈고 망치로 두드리고 불과 물과 진흙에 담금질을 하는 방법으로 보총의 약통물개도 고치고 격침도 수리하였다. 나중에는 기관총까지도 척척 재생시켰다. 병기부문일군들 중에는 박영순, 손원금, 강위룡, 박두경, 송승필, 강해산과 같은 재간둥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바늘에 구멍을 내는 재간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기적의 비결이 바로 자력갱생에 있었다. 만일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남의 나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환상에 포로되어 자력갱생할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자력갱생만이 살길이고 조선을 구원할 길이라는 투철한 신념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유격구에는 애당초 병기창이라는 것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나무포와 연길폭탄과 같은 위력한 무기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독립군들처럼 인민들에게 군자금을 내라고 호소하든가 동냥자루를 메고 남의 나라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구걸도 하고 그 무슨 하소연도 하였을 것이다. 구걸을 하느라면 남들에게 굽실거리게도 되고 남들이 발바닥을 핥으라면 발바닥을 핥고 눈꼽자기를 뜯어달라고 하면 눈꼽자기를 뜯어주는 비루한 속물이 되고 만다.

우리가 항일전쟁의 초기부터 자력갱생의 구호를 내걸고 그 관철을 위해 분발한 것은 당시 혁명앞에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일제의 만주침공은 조일, 중일간의 모순을 격화시켰고 이 모순은 불피코 조선공산주의자들앞에 무장투쟁이라는 높은 형태의 투쟁과제를 제기하였다.

만일 이런 때에 우리가 자력갱생에 의거하지 않고 남의 나라를 찾아다니면서 구걸외교에 매달렸더라면 우리는 일제의 만주강점 직후 그처럼 빨리 항일전쟁을 시작하지도 못하였을 것이고 우리의 유격대오는 불과 몇 해 사이에 강력한 역량으로 자라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자력갱생은 자주, 자강의 기초위에서 민족자력에 의한 나라의 독립을 갈망하는 인민의 지향과 요구를 가장 정확히 반영한 구호였다. 인민이 이 구호를 제때에 받아물고 도처에서 야장간을 병기창으로 전환시키거나 새로운 무기수리기지들을 창설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자력갱생, 간고분투는 비단 병기생산과 수리분야 뿐만 아니라 항일혁명의 모든 분야를 관통하는 기본정신으로 되었으며 혁명에 대한 충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되었다. 아무리 애국심이 강하고 공산주의사상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자력갱생, 간고분투하지 않으면 실속있는 혁명가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력갱생을 하는 여기에 혁명이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기본고리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민족운동지도자들이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현혹되어 외세의존의 길로 줄달음친 것은 바로 그들에게 자력갱생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길현의 의란구에는 남양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추수, 춘황 투쟁 후 일본군경들은 이 마을에 달려들어 무고한 주민들과 청장년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고 집들은 잿더미로 만들었다.

남양촌에 파견된 정치공작원들은 청년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동하였다.

≪우리들은 비폭력적인 정치투쟁을 하는데 놈들은 무기를 쓰고 있다. 맨주먹으로는 적을 타승할 수 없다. 총검을 들고 일제와 맞서서 판가리싸움을 할 때는 왔다. 동무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때 한 청년이 주먹을 흔들면서 말했다.

≪쇠붙이를 모아서 창이라도 만들자. 창만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적들을 찔러 죽이고 총을 빼앗을 수 있지 않는가.≫

그 청년은 대장장이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태순노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기 집 헛간에 아버지가 쓰던 야장도구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데 그것을 이용하면 칼이나 날창같은 것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말하였다.

청년들은 그 말에 대뜸 호응하였다

≪옳다. 창과 검부터 만들자. 그 다음에는 그 창과 검을 총으로 바꾸자.≫

이태순노인이 농쟁기를 벼리던 그 망치와 집게로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골짜기에서 박달나무 뿌리로 숯을 굽고 달구지 바퀴테를 벗겨다 창을 벼리었다. 단야공정을 거친 창들은 돌에 대고 갈아서 날을 세웠다.

동구밖에서 울리는 난데없는 망치소리는 야장일에 인이 박힌 옛 대장쟁이를 골짜기로 불러냈다. 청년들은 치던 창을 풀숲에 치워놓고 부시를 만드는 체하였다.

≪무얼 만드느냐?≫

이태순노인은 미심쩍은 눈길로 청년들을 둘러보았다.

≪부시를 만듭니다.≫

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할 짓도 없군. 메를 이리 다구.≫

노인은 눈깜짝할 사이에 부시 열 개를 쳐주고는 야장도구들을 빼앗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노인이 밭으로 나간 사이에 청년들은 그 야장도구들을 다시 들어내다가 날창을 벼리었다.

≪이 녀석들아, 어제 쳐준 부시는 어떻게 하구 또 이 짓들이냐?≫

벽도 지붕도 없는 청년들의 야장간에 이태순노인이 전날처럼 기척도 없이 나타나 엄하게 물었다.

≪동무들한테 다 빼앗겼습니다.≫

아들이 일동을 대표해서 하는 말이었다.

이런 일은 그 후에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이태순노인은 청년들이 만드는 물건이 부시가 아니라는 것을 인차 간파하였다. 농번기에 마을 청년들이 부시나 만들자고 야장일을 벌여놓았겠는가 무더운 여름날 강냉이밭 고랑을 타고 누구도 모르게 나타난 노인은 청년들이 아들한테서 기술전습을 받아가며 창을 벼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놈의 자식들, 봄내 여름내 무슨 꿍꿍이를 하는가 했더니 제 죽을 잡도리들을 하는구나.≫

노인이 야장도구들을 주섬주섬 걷어 모으며 야단법석을 하자 급해맞은 청년들은 그의 옷섶을 매달려 손이야 발이야 하고 빌었다.

≪아버님, 놈들이 청년들을 만나기만 하면 파리잡듯이 자꾸 잡아죽이는데 우리가 올방자를 틀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말문이 막히 이태순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다가 무게있게 말했다.

≪내가 집게질을 할 테니 너희들은 메질이나 해라. 그리구 망을 잘 봐야겠다.≫

그날 노인은 10여 명이나 되는 청년들에게 창을 한 자루씩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이웃마을 청년들이 잡쇠붙이들과 못 쓰게 된 달구지 바퀴테들을 가지고 와서 그 창들을 모조리 바꾸어갔다. 야장이 없는 이웃을 위해서 선심을 베풀라는 것이었다.

이태순노인은 떡쇠로는 창을 만들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 쇠붙이들을 모조리 밭고랑에 내던지게 하였다. 그대신 자기가 감추어두었던 팔모정 수십 개를 가지고 고강도 단도와 창을 수십 개나 만들어주었다.

20여 명의 남양촌청년들은 노인이 벼려준 창과 단도를 가지고 연길에서 구룡평 쪽으로 이동하던 위만군의 소부대를 습격하여 많은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였다.

이태순노인은 흐뭇한 심정으로 마을청년들의 전과를 치하했다. 그의 주관하에 남양촌의 비밀야장간은 그 후에도 많은 도창무기들을 만들어냈다. 나중에는 작탄까지 생산하였다. 노인은 전심전력으로 병기 생산과 수리를 하다가 적들에게 잡혀 희생되었다.

이것은 자력갱생의 생활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자력갱생은 이처럼 우리 나라의 민족해방투쟁사에서 처음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 이 생기발랄한 시대상은 인민의 힘과 지혜를 최대한으로 발동시켜 세상만사를 다 풀어나가는 공산주의적 방법이 정당하고 위력하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산 화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력갱생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서 주체를 세우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도의 하나였으며 자력갱생을 떠나서는 주체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논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조선혁명의 발전에 대해서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자력갱생만이 우리 인민의 근대 정신생활에서 큰 질곡으로 남아있던 사대주의를 종국적으로 추방하고 자주, 자강, 자립의 이념밑에 민족재생의 활로를 승리적으로 개척해나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자력갱생은 주체가 선 인간과 주체가 서지 못한 인간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일전쟁을 개시하는 첫날부터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으로 대중을 꾸준히 교양하였다. 남들이 도와주면 좋고 설사 도와주지 않아도 자기 힘으로 나라를 찾아야 하며 또 찾을 수 있다는 사상, 위에서 해결해주면 좋고 해결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만사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사상은 대중을 쉽게 공감시켰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힘을 믿지 않거나 과소평가하는 낡은 사상잔재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자기 인민의 힘을 믿고 그에 의거하여 혁명을 하자고 호소할 때 쌍수를 들어 환영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 크지 않은 무장문제가 제기되자 머리를 기웃거리며 난색을 짓는 경향이 나타났다.

우리가 안도에서 유격대창건을 앞두고 그 준비의 일환으로 군사훈련에 열중하고 있던 어느 날 이영배와 방인현이 무기청소를 하다가 격침을 부러뜨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총 한 자루 한 자루를 피와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시의 실정에서 이것은 그대로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비상사고였다.

나는 고장난 격침을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이영배와 방인현에게 말했다.

≪동무들에게 하루동안의 시간을 주겠으니 내일 이맘때까지 격침을 고쳐오시오.≫

두 사람 다 눈이 휘둥그래졌다. 내가 감히 그런 엄청난 요구까지는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현대적 군수공장에서 나오는 무기를 우리가 어떻게 고칩니까? 혹시 생명을 내대는 모험이나 싸움 같은 것이라면 몰라도 이거야 기술이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 아닙니까.≫

≪손쉽게 할 수 있는 일만 골라가며 하는 것이 혁명이라면야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을 혁명이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부르겠소. 보통사람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위업을 해제끼는 여기에 혁명의 참뜻이 있고 혁명가의 보람이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렇지만 강쇠로 만든 격침이 부러졌는데…. 이거야 어디 이론으로만 되는 일입니까?≫

방인현은 암담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격발기를 굽어보았다. 그 순간까지만 하여도 그는 격침을 원상복구하라는 나의 요구를 허황하고 무리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때에 지휘관이 자기의 지시를 철회한다면 어떤 후과가 빚어지겠는가.

나는 내 지시가 무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재삼 냉정하게 요구하였다.

≪고칠 수 없다면 앞으로 유격대원이 될 자격이 없다. 조그만 격침 하나 고치지 못하는 능력으로 복잡한 사회개조는 어떻게 하겠는가. 동무들이 정녕 그 격침을 고칠 의향이 없다면 내일부터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이렇게 엄포를 놓자 두 사람은 화다닥 놀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격침을 꼭 고쳐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는 방법을 대달라고 하였다.

≪나는 방법을 모른다. 방법은 동무들끼리 찾아 보라.≫

이영배는 방인현은 격발기를 들고 울상이 되어 훈련장을 떠났다.

다음날 그들은 격침을 고쳐가지고 희색이 만면해서 훈련장에 나타났다. 완전무결한 원상회복은 아니었으나 격침은 손색없이 작용을 하였다.

동무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수리를 명령한 내 자신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술이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하며 고치지 못하겠다고 하던 저 동무들이 무슨 갑작수로 저렇게 쉽사리 격침을 고쳐가지고 왔을까?

≪처음엔 철사를 얻어 줄칼로 새 격침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땅한 강쇠가 있어야지오. 그래서 격침을 불에 달궈 두드려 늘궜습니다. 돌에 갈아 형태까지는 그럭저럭 잡았는데 떡쇠를 강쇠로 만들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하소사하에 있는 오랜 대장쟁이노인을 찾아갔습니다. 그 노인이 하는 말이 떡쇠를 강쇠로 만들자면 기름에 담그라는 겁니다. 그말대로 했더니 이런 강쇠가 됐습니다.≫

방인현은 덤벼치면서 수리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들의 수리 경험은 동무들을 크게 분발시켰다. 자기 힘을 믿고 그 힘을 잘 발동하면 누구든지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교훈을 모두가 흥분된 심정으로 받아안았다.

수리한 격침을 들고 훈련장으로 뛰어올 때 이영배와 방인현의 얼굴에 활짝 피어났던 그 보름달 같은 미소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미소는 분명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한 다함없는 긍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힘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냈을 때에 맛보게 되는 쾌감과 희열보다 더 격렬한 환희가 이 세상 또 어디에 있겠는가.

격침 한 개란 사실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것을 수리하는 시간이면 새 보총 10자루도 능히 노획해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격침 한 개를 수리했을 때에 얻게 되는 교훈은 수소폭탄 한 개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산생시키고 확산시킨다.

맑스와 엥겔스는 인류발전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물론 정당한 규정이다. 인류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인 동시에 자기 발전의 역사, 자기 창조의 역사, 자기 완성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인류가 자기 자체에서 사람에게 고유한 힘과 재능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연마해온 창조의 역사이며 동시에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인류역사는 또한 자기를 정치사상적으로, 문화도덕적으로, 과학기술적으로 부단히 세련시켜온 혁신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는 이런 창조와 혁신의 힘으로 오늘날의 로케트시대, 컴퓨터시대, 유전자공학의 시대, 녹색혁명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자력갱생은 역사발전을 촉진시켜온 강력한 추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만일 자기 힘을 계발시키지 않고 천지만물의 창조자라고 하는 그 어떤 신이나 하느님의 은총만을 믿고 살아왔다면 우리는 아직도 구석기 시대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동만각지에서 병기창들을 활발하게 운영해 가지고 있을 때 사충항은 동녕현성에 왕덕림의 구국군이 경영하던 병기공장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슬쩍 귀뜸해 주었다. 이 통보를 받은 다음부터 우리는 동녕현성에 더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사충항의 말에 의하면 이 병기공장은 1932년 봄에 한두 대의 선반과 주물차, 재봉기를 가진 군기수리소로 발족하였다고 한다. 1932년 하반기부터 군기수리소는 수류탄, 박격포탄, 25발짜리 기관단총, 일명 돼지포라고도 불리는 포를 생산하는 본격적인 병기공장으로 발전하여 그 관하에 직원만 해도 200여 명이나 두었다. 그러는 사이에 공작기계를 비롯한 생산수단들과 설비도 보강되었다.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무기는 주로 왕청현 대전자와 영안지방의 구국군부대들에 공급되었다.

일본군의 강점과 함께 공장은 해산되었다. 그러나 설비와 기계수단은 종전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만일 우리가 1933년 가을에 동녕현성을 타고 앉는데 완전히 성공하였더라면 이 병기공장은 불피코 우리의 무기공장으로 되었을 것이며 우리는 보다 더 현대적인 경무기와 중무기로 자신들을 더욱 훌륭하게 무장하였을 것이다.

1930년대 전반기 유격근거지들에서 창조된 병기분야의 경험은 1930년대 후반기 백두산근거지에 건설되었던 병기창들에서 그대로 활용되고 계승발전되었다.

우리는 유격근거지마다에 재봉대를 꾸려 군복도 자체로 해 입었다. 천도 자체 해결이요, 염색도 자체 해결이요, 제작도 자체 해결이었다. 가둑나무와 가래나무, 황경피나무 껍질을 큰 가마에 넣고 우린 다음 그 물에 천을 넣으면 보위색으로 착색되었다. 나무의 종류별 배합비율에 따라 천의 색깔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였다.

왕청재봉대의 초기 성원은 김연화와 함께 한때 6호촌의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복무한 전문진이었다. 그밖에 남자재단사가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후 소왕청재봉대에는 이일파, 김명숙, 김순희 등이 보충되었다. 일손이 달릴 때에는 임시노력도 채용하였다.

소왕청시절의 나의 군복은 전문진이 지어준 것이었다.

내가 안도에서 왕청으로 가자 그곳 재봉대원들은 청년장군이 왔는데 좋은 옷을 지어드려야겠다고 하면서 코트와 군복을 일식으로 만들어주었다. 천은 손으로 물을 들인 수수한 광목이었지만 그 한 뜸 한 뜸에 스며있는 정성은 참말로 지극하고 섬세한 것이었다.

소왕청재봉대는 2-3대밖에 안 되는 재봉기를 가지고 대대나 연대에 소요되는 군복을 도맡아 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대나 연대부의 주문에 따라 반일부대장병들이 입을 군복까지도 일식으로 지어냈다. 일식이라고 하면 군복저고리와 바지는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따르는 군모와 행전, 탄띠까지도 다 포함된다. 재봉대에 부과되는 작업량은 공칭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생산능력을 뛰어넘는 과부하가 생길 때마다 근면하고 충실한 재봉대원들은 밤잠도 자지 않고 일손을 다그쳐나갔다. 잠이 오면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며 노래를 불렀다. 오죽 노래를 많이 불렀으면 모든 재봉대원들이 수십 가지의 혁명가요를 외우고 있었겠는가.

소왕청재봉대의 초대책임자는 김연화였다. 그 당시의 왕청사람들은 그를 활량이 또는 말괄량이라고 불렀다. 그가 이따금씩 담배질을 한다고 남자번지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덜렁덜렁한 말괄량이가 뜨개질이나 바느질만은 아주 솜씨있게 하였다.

김연화가 바느질을 배운 것은 부부생활을 시작한 후부터였다. 그의 남편은 다리가 한 쪽밖에 없는 불우한 사나이였다. 승산없는 가난과의 대결에서 그가 첫째가는 호구지책으로 삼은 것은 삯바느질이었다. 김연화의 재봉솜씨는 이때부터 축적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군복도 잘 만들었지만 중국옷도 맵시있게 만들었다. 김연화를 남자번지개라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그가 지어준 옷을 입고서는 ≪연화누님, 절을 받아주십시오!≫하면서 재봉대가 있는 골 안을 향해 꾸벅꾸벅 절을 하곤 하였다.

우리의 재봉대원 가운데는 병기창성원들 못지 않은 자력갱생의 선구자들이 많았다. 김명숙, 전문진, 한성희, 안순화, 최희숙, 김용금, 김수복, 최인숙, 박정숙, 조영숙, 박수환, 마인옥, 김선 등은 모두가 우리를 따라다니며 수천 수만 벌의 옷을 지어낸 간고분투의 명수들이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안순화의 최후와 간파하자밀영에서의 여섯 재봉대원들의 영웅적 순국을 사실 그대로 방불하게 그려낼 언어가 나한테는 너무도 모자란다.

우리는 유격구마다 병원을 차려놓고 부상자와 환자들도 자체로 치료하였다. 치료에 사용한 수술칼, 핀세트 등의 의료기구들은 모두 병기창기술자들이 자체로 만들어낸 것들이었으며 약간량의 신약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물약들도 의료일군들이 군중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자체로 마련하고 제조한 것이었다.

의사와 간호원을 데려올 데가 없으니 그것도 자체 해결이었다. 동의사 경력을 가진 한두 명의 선각자들이 무수한 후비들을 키워냈다.

임춘추, 이봉수 등은 치료사업에서 특출한 업적을 쌓은 명의들인 동시에 후비육성에도 무시할 수 없는 공로를 세운 권위있는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품에서 삶의 노래, 소생의 노래를 부르며 뛰쳐일어나 대오로 돌아갔던가.

우리는 식량문제도 자력갱생으로 해결하였다. 인민들에게 납부량을 정해주고 그것을 모아들이는 방법으로 식량문제를 푸는 것은 우리 식이 아니었다. 우리는 군대와 적위대, 반일자위대, 소년선봉대, 청년의용군을 비롯한 반군사조직들앞에 식량의 자급자족화 목표를 내세우고 유격구의 농경지들에서 자체로 곡식을 심어먹도록 강하게 요구해왔다. 조선인민혁명군이 광활한 지대에로 진출하여 대부대에 의한 유격전을 맹렬하게 벌이던 1930년대 후분기에는 후방부대를 파견하여 백두산기슭에서 전적으로 농사를 짓게 하였다.

자력갱생은 이처럼 기나긴 항일전쟁의 나날에 혁명군의 존망을 좌우한 생명선으로 되었다. 자력갱생하면 살고 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인식은 만사람의 머리를 지배하는 사고방식으로 되고 좌우명으로 되었다. 이 좌우명을 뼈와 살로 만든 사람은 절해고도에서 지조를 지켰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오를 떠나 변절투항하거나 중도반단의 길을 걸었다.

항일선열들이 백두의 설한풍속에서 고이 안고온 자력갱생의 불씨는 해방 후 온 나라 인민의 가슴에 옮겨져 새 조선 건설의 봉화로 타올랐고 동방 일각에서 전설의 천리마를 날린 원동력으로 되었다. 평범한 수리기지에 지나지 않았던 자그마한 공장에서 우리가 전기기관차 제작에 달라붙었을 때 한 대사는 조선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전기기관차를 만들어내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하였다. 우리의 노동자, 기술자들이 자력갱생의 힘으로 만들어낸 ≪붉은기≫ 1호는 그 경쾌한 기적 소리로 대사의 예언을 가볍게 짓눌러버렸다.

유격구의 병기창에서 울리던 자력갱생의 망치소리는 노동당시대의 맥박으로 되고 이 시대를 줄달음치게 하는 위력한 원동력으로 되었다.

항일전쟁의 폭풍속에서 태어난 자력갱생의 넋은 오늘날 김정일조직비서가 제시한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라는 구호와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구호속에서 힘차게 살아 고동치고 있다. 우리 인민은 ≪자력갱생행진곡≫을 부르며 풍랑 사나운 20세기 마지막 연대의 영마루로 치달아오르고 있다.

 

This counter provided for free from HTMLcounter.com! copyleft © 통일여명 편집국
이 문서는 Internet Explorer v5.0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