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2(2003)년 3월 8일(토)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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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촌작전

 김일성주석 ≪세기와 더불어≫

통일여명 편집국 주해 2-32

 

그 해 가을 유격구에는 열병이 돌았다. 오한과 고열이 겹치면서 피부에 불긋불긋한 반점이 생기는 이 급성전염병은 굉장한 전파력을 가지고 소왕청골 안을 휩쓸었다. 나도 이 병에 걸려 십리평에서 옴짝 못하고 앓았다. 후에 알게된 데 의하면 발진프스였다.

지금의 새 세대들은 발진프스를 모르고 산다. 벌써 오래 전에 전염병을 근절한 무균지대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산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60년 전까지만 해도 유격근거지 인민들은 전염병 때문에 모진 고통을 겪었다. 그리 크지 않은 골짜기에 수천 명 주민 오골오골 모여서 살다나니 병도 오만가지가 다 돌았다. 사흘이 멀다하게 ≪토벌대≫가 달려들어 불질을 하고 이산 저산 쫓아다니며 도륙질을 하는 때여서 위생조건이 불리해도 개선할 도리가 없었고 병을 예방하고 싶어도 적합한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전염병같은 것이 발생하면 삽짝문앞에 새끼줄을 치거나 바람벽에 ≪출입금지, 전염병≫이라고 쓴 광고딱지를 붙여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적들이 수천 명이나 쓸어들어 근거지를 없애보겠다고 날마다 사생결단을 싸움을 걸어오는 때에 전염병까지 겹쳤으니 우리로서는 최악의 시련을 겪는 셈이었다. 나까지 덜컥 열병에 걸리게 되자 지도부의 간부들은 다같이 사색이 되어 유격구의 운명을 두고 걱정하였다.

그들은 나의 호위 겸 간호를 위하여 김택근소대장과 그의 부인을 보내주고 1개 소대 가량의 병력까지 붙여주었다. 다른 부대들이 다 전투하려 나갈 때에도 그 대원들만은 남아서 십리평을 지켰다. 김택근부부는 둘 다 북만 액하라는 곳에서 살다가 동만땅에 와서 혁명투쟁에 참가해보겠다는 충동을 가지고 목릉을 거쳐 왕청으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이 부부외에 또 최금숙이라고 부르는 왕청현 부위가 당적으로 나의 간호를 책임지고 십리평에 와 있었다.

처음에 나는 춘자라는 여자의 집 윗방에서 병치료를 하였다. 그 여자의 남편 김권일은 구당서기로도 사업하고 후에는 현당서기로도 활동하였다.

적들이 유격구에 달려들기만 하면 김택근은 나를 업고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피해다니군 하였다.

≪토벌≫이 심해지자 그들은 나를 업고 물곬을 따라 십리평골 안에 깊숙이 들어가 적의 발길이 닿지 못할 어떤 바위츠렁밑에 막을 치고 밧줄을 타고 오르내릴 수 있는 자그마한 은신처를 마련하였다. 나는 여기서 세 사람의 도움으로 병을 완치하였다.

그 세 사람은 나를 사경에서 구원해준 잊지 못할 생명의 은인들이었다. 그들의 지성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십리평 골짜기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수도 일을 것이다. 병이 어찌나 심했던지 나는 그때 여러 번 정신을 잃기까지 하였다. 내가 혼수상태에 빠질 때마다 그들은 제발 정신을 차려주십시오, 이렇게 앓아 누우면 우리는 어떻게 하랍니까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김택근이 식량공작을 나가고 없는 날이면 최금숙이 나를 부축해 가지고 다니면서 숨을 곳을 찾아 헤맸다. 내가 이 여자의 덕으로 살아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는 원래 왕청에 온 초기부터 최금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가 남북만원정을 끝내고 마촌에 왔을 때 그는 대왕청에서 제2구 부위로 공작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현부녀회사업은 이신근이 맡아하였다. 최금숙이 사업토의를 하러 이신근을 찾아올 때마다 나는 이치백노인의 집에서 종종 그를 만나곤 하였다. 그들은 서로 자매간처럼 가깝게 지냈다.

이신근은 최금숙이 글을 빨리 쓴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무심히 들었다. 여자가 글을 빨리 쓰면 얼마나 빨리 쓰랴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그가 정리한 회의록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회의에서 한 발언내용들이 하나도 생략되지 않고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대 속기수들이 글을 빨리 쓴다고 하지만 그와 비교할 만한 속기수를 나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최금숙은 우리가 토론한 것들을 하룻밤사이에 다 정리해내군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회의를 할 때마다 그에게 기록을 위임하군 하였다.

최금숙은 남성들처럼 성미가 서글서글하고 인자하면서대가 있고 혁명적 원칙성이 강했다. 내 말이라면 모래불에서 배를 끌라고 해도 끌 그런 여자였다. 내가 그에게 공작임무를 주어 적통치구역에도 여러 번 파견하였는데 적구에 가서도 일을 아주 능란하게 하였다.

최금숙은 부모가 없는 나를 여성으로서 무척 동정하였다. 그가 나를 친동생과 같이 사랑해주었기 때문에 나도 그를 보면 누이라고 불렀다.

내가 싸움터에 나갔다 돌아오면 이 여자가 제일 먼저 나를 찾아왔고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물건들을 한 가지씩 준비했다가 살그머니 쥐어주곤 하였다. 어떤 때에는 옷도 기워주고 털실로 내의도 떠주었다.

최금숙이 이수구골 안에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을 때는 내가 그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남매간처럼 가깝게 지내다나니 만나기만 하면 서로 농도 자주 하였다. 함경도지방사람들이 대체로 다 그런 것처럼 그도 동네집 늙은이들을 만나면 ≪아배≫나 ≪아매≫라고 불렀다. ≪온성집 아배≫니 ≪무산집 아매≫니, ≪회령집 아재≫니 하는 식의 말은 어휘도 별스러웠지만 억양부터가 재미나게 들렸다. 내가 자기의 말투를 흉내내거나 좀 지나친 농을 하여도 그 여자는 성을 내지 않고 생글생글 웃기만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대범한 최금숙이도 한 가지 농만은 잘 받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를 가리켜 미인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자기를 보고 미인이라고 하면 그는 놀려준다고 야단이었다. 나는 최금숙이 내 잔등에 주먹질을 해대며 야단을 하는 것이 오히려 재미가 나서 그가 어색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미인이라고 농을 하였다. 사실 그는 뛰어난 미녀는 아니었지만 아주 복성스럽게 생긴 여자였다. 나의 눈에는 도회지의 아가씨나 숙녀들보다도 최금숙과 같은 유격구의 여자들이 훨씬 더 고상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이 세상에 유격구의 여성들처럼 아름다운 여성들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얼굴에 화장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매연속에서 고생고생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원망하거나 타발하지 않고 오직 혁명에만 전심전력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최상의 미를 찾았다. 내가 최금숙이를 가리켜 미인이라고 한 것은 이런 심리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때 근거지의 여성들을 돋보이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았다.

우리가 노획한 전리품들속에는 종종 분이나 크림과 같은 화장품들이 섞여 있을 때도 있었다. 처음에 우리 대원들은 그런 화장품들이 보이기만 하면 일본계집년들의 상판대기를 곱게 해주는 물건딱지들이라고 하며 개울속에 집어던지든가 발로 막 짓뭉개놓고 하였다. 얼마 동안은 나도 향내나는 고급 전리품이 그렇게 처분되는 것을 방임해두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들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우리 유격구의 여성들은 그 당시 화장을 하지 않았다. 분내나 향수내를 피우며 돌아다니는 것을 죄라고 보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간혹 명절같은 때 어쩌다가 화장을 하는 여자들도 있었지만 정작 대중집합소에 나타나면 뒷구석에 서서 줄곧 남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이것을 분하게 느꼈다. 그들이 일년내내 분도 바르지 못하고 검댕이나 잿가루가 묻은 얼굴로 포연내를 맡으며 고생스레 살아가는 것이 가슴아프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대원들에게 말하였다.

≪이제부터 누구든지 화장품을 버리지 말자. 우리의 곁에도 여성들이 있지 않은가. 유격구의 여성들은 여성이 아니라던가. 우리의 여대원들과 부녀회원들보다 더 훌륭한 여자들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내 말에 호응하였다.

≪옳습니다. 우리 유격구의 여자들보다 더 좋은 여자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은 벌써 1년반째나 이 유격구에서 초근목피로 끼니를 에우고 ≪토벌≫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애인들을 잃고 엄동설한에 홑옷을 입고 한지에서 떨면서도 적구로 내려가지 않고 유격대와 운명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남아들로서 그들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연지, 곤지를 찍어 세상에 내세우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고 한스럽습니다. 우리가 못 입고 못 먹더라도 좋은 것이 생기면 그들에게 다 보내줍시다. 화장품이 생기면 분도 바르라고 합시다.≫

우리는 어느 날 부녀회원들에게 줄 화장품을 노획해 가지고 최금숙을 찾아갔다. 최금숙은 그 화장품 보따리를 보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날부터 소왕청유격구에서는 분내가 돌기 시작했다. 명절날 아동유희대의 공연이 진행되는 구락부에 갔더니 거기서도 분내와 크림내가 났다.

그런데 최금숙이만은 웬일인지 며칠이 지나가도 화장을 하지 않고 다녔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 왜 화장을 하지 않는가고 물었다. 그는 대답대신 나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기만 하였는데 필경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 이신근을 통해 그 곡절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더니 최금숙이 자기 몫으로 남겨놓았던 화장품을 십리평의 부녀회원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우리는 적의 후방을 치고 다시금 많은 양의 화장품을 노획했다. 나는 그 중 일부를 최금숙에게 주면서 이번만은 자기 몫을 양보하지 말고 화장을 꼭 해보라고, 화장한 금숙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최금숙은 목숨을 걸고 구해온 화장품인데 대장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화장을 하겠노라고 하였다.

며칠 후 나는 최춘국중대의 사업을 지도하려고 십리평에 가다가 대왕청하기슭에서 최금숙을 만났다. 인적기가 없는 강가에서 행길 쪽으로 등을 돌려대고 앉아 물 속을 들여다보는 그의 청초한 모습이 보이자 나는 이성림전령병을 시켜 대왕청부녀회장이 왜 물가에 앉아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였다.

이성림이 최금숙의 곁에 다가가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이 멀리서 바라보였다. 무슨 일 때문인지 어린 전령병은 갑자기 배를 그러쥐고 까르르 웃어댔다.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의 곁으로 바삐 걸어갔다.

≪대장동지, 저 금숙누이의 얼굴을 좀 보십시오.≫

내가 물가에 나타나기 바쁘게 이성림은 웃음을 그치고 최금숙의 얼굴을 손짓해 보였다.

그순간 나도 부지중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복성스럽고 해맑은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부녀회장의 얼굴은 온통 연지와 크림으로 얼럭덜럭 매닥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금숙 자신은 영문을 모르고 우리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부녀회장 아지미, 얼굴이 만국지도가 됐어요.≫

이성림이 이런 말을 해서야 최금숙은 ≪에그머니!≫하고 시냇가에 펄썩 주저앉아 얼굴에 와락와락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화장을 서투르게 한 것이 죄가 될 수 없고 수치로 될 수 없건만 그는 큰 창피라도 당한 사람처럼 몸둘 바를 몰라하였다. 물가의 빨랫돌앞에는 며칠 전에 내가 보내준 크림과 연지통이 놓여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최금숙은 화장솜씨가 대단히 서툴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어찌 놀림가마리로 삼을 수 있겠는가. 최금숙은 화장을 처음 해보는 여자였다. 그에게는 거울조차 없었다. 그래서 시냇물에 얼굴을 비쳐보며 조심조심 크림도 바르고 연지도 찍었다. 그가 얼굴에 만국지도를 그린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고 우스꽝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이성림이 아까처럼 또 최금숙의 곁에 다가서서 시까스르려는 눈치를 보이자 나는 손을 가로저어 그를 제지시켰다. 아마 그때 이성림이 몇 마디만 더 했더라면 최금숙은 그 시냇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달아나버렸을 것이다.

아침마다 화려한 체경이나 삼면경대앞에서 고급화장품으로 얼굴을 다듬는 여성들이 이 대목을 읽게 되면 누구나 최금숙을 동정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처녀들이 시집을 갈 때 지참품으로 삼면경대를 가지고 가는 것이 하나의 풍조로 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생활을 보다 유족하고 문명하게 꾸려나가려는 우리 여성들의 욕구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 땅에 배를 붙이고 풀죽을 먹으며 근거지를 지키느라고 악전고투할 때만 하여도 소왕청주민들속에는 삼면경대는커녕 손거울을 가진 여자조차 몇 명 없었다. 그래서 화장을 하고 싶으면 모두 최금숙이처럼 강가로 나갔다.

나는 그날 최금숙의 화장솜씨를 흉보던 이성림을 나무란 것이 아니라 유격구의 여자들에게 거울을 마련해주지 못한 내 자신에게 화를 냈다.

우리가 여성들을 위해 바치는 정성은 그들이 우리에게 기울이는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나 인민이 우리를 섬겨주고 받들어주는 그 무한대한 온정을 능가할 수 없었다.

최금숙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가 자기에게 준 믿음보다 몇 배는 큰 사랑과 정성으로 시종일관 나를 따뜻이 간호해주었다. 나의 병이 호전되었을 때 그가 제일 먼저 뛰어간 곳이 100리나 떨어져 있는 도문이었다. 도문은 조선에서 넘어오는 여러 가지 물산의 집산지였다.

최금숙은 거기서 조선 배와 조선 사과를 한 보따리 사가지고 십리평으로 돌아왔다.

그 배와 사과를 보니 눈물이 났다. 멀리 저 세상에 계시는 어머니가 최금숙으로 소생하여 나에게 이런 사랑을 부어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환각도 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어머니나 친누이만이 베풀 수 있는 사랑이었다.

≪금숙누이, 누이의 이 신세를 어떻게 하면 다 갚을까!≫

나는 최금숙이 쥐어주는 조국의 과일향기를 가슴 뭉클하게 들여마시며 감사의 정에 넘쳐 말했다.

≪신세? 정 신세를 갚을 생각이라면 독립된 다음 평양구경이나 한 번 시켜주우다. 평양이 천하제일 강산이라는데….≫

최금숙의 대답은 농담 절반, 진담 절반이면서도 사뭇 절절하였다.

≪그건 염려마십시오. 아무렴 그런 소원이야 못 풀어주겠나요. 누이, 조국이 해방된 다음 평양땅을 밟아보기 위해서도 죽지 말고 싸웁시다!≫

≪나는 죽지 않는다우. 그런데 난 동생이 항상 걱정이라니까. 도무지 몸을 돌보지 않으니….≫

최금숙은 내 입맛을 돋구느라고 절구에 찧은 깨를 얻어다가 찬에도 넣어주고 죽에도 넣어주었다. 그는 내가 중병에 걸리게 된 것도 영양부족 때문이라고 하면서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해주지 못해 여간 애를 태우지 않았다.

정성은 극진하였으나 모든 것이 귀하고 바른 때였다.

김택근이 개천에 나가서 버들치를 잡아다가 썩장에 넣고 끓여도 주고 구워도 주었다. 근 하루에 70-80마리씩 고기를 잡고 하였는데 열성도 열성이거니와 솜씨 또한 여간 아니었다.

최금숙은 내 밥상에 끼마다 버들치밖에 놓아주지 못하는 것을 송구스럽게 여기던 나머지 마을에 가서 국수를 받아왔다. 그는 나의 안부를 묻는 유격대원들에게 대장의 몸을 빨리 추세워야겠는데 대접할 것이 없어 야단이다. 택근소대장이 잡아오는 버들치만으로 매일같이 밥상을 차리자니 딱해서 못 견디겠다. 그런데도 대장은 맛있다고만 하더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우리 부대의 고기잡이 명수들이 하루는 후리질을 하여 한 가마니나 되는 물고기를 잡아가지고 우리의 거처로 찾아왔다. 최금숙은 그 물고기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공하여 식사 때마다 내 밥상에 놓아주곤 하였다.

병에 차도가 좀 보이자 최금숙은 내가 정신을 잃고 앓을 때 어떤 알지 못할 여자의 이름을 줄창 부르더라고 하면서 우스개삼아 그 입내까지 냈다. 그 입내의 내용이라는 것은 그가 김택근의 아내와 함께 사전에 꾸며낸 것이었다. 아주 엉터리없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발병 후 처음으로 그들과 함께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눈물겨운 연극이었다. 나는 그들이 오랫동안 병상에 매인 나를 즐겁게 해주고 싶어 그런 연극을 꾸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금숙은 내가 병이 완치되기 전에 마촌으로 돌아갈 것 같아서 날짜까지 속여가며 나를 간호해주었다. 나는 실신상태에서 깨어날 때마다 며칠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가고 묻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 여자는 날짜를 줄여서 대답하곤 하였다. 가령 내가 이틀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으면 2시간이라고 대답하였고 닷새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았다면 5시간밖에 안 된다는 식으로 얼렁뚱땅해 넘겼다. 병이 완쾌된 다음 그가 말한대로 앓은 날짜를 합쳐보니 열흘도 되나마나하였다.

나는 열흘이라는 말에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가 대포를 불었다는 것은 최춘국이 나의 초막으로 문병을 왔을 때에야 들장이 났다. 이 고지식한 정치지도원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통 몰랐다. 그는 내가 앓은 것이 한 달 동안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 한 달이라는 말을 듣고 최금숙은 눈치가 곰발바닥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애꿎은 최춘국을 나무랐지만 나는 정신을 펄쩍 차리고 마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휘부에서는 산더미같이 쌓인 정보자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정보자료들에는 간도치안을 위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움직임이 다각적으로 반영되어 있었다.

내가 앓고 있는 한 달 사이에 적들은 동기≪토벌≫준비를 완료하였다. 일본내각에서 파견된 고위관리들이 간도 땅에 기어들어 군대, 헌병, 경찰, 외사 부문의 수괴들과 함께 동만유격근거지들에 대한 동기≪토벌≫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도쿄에서는 이 문제가 내각회의에서까지 논의되었다.

일제가 만주문제를 놓고 벌인 회의들에서는 ≪만주의 치안은 간도로부터!≫라는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들은 간도의 치안이 만주국 건설의 대업에 지대한 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일본제국 변경의 안녕에도 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만주국을 위해서나 일본 자체를 위해서도 최대의 긴급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쏘련에 대한 침공을 제일사명으로 하는 관동군사령관 자신이 만주의 경무기관을 통제하고 군대를 통제하게 되어 있는 헌병장이 간도치안의 제1선에 서게 한 것은 대만주국의 전도를 위하여 축복할 만한 일이라고까지 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국을 조작해낸 후 이 일대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각방으로 주요한 대책을 세웠다. 간도임시파견대를 대신하여 관동군사단을 새로운 ≪토벌≫역량으로 들이밀었으며 현을 단위로 무장한 행정경찰대를 편성하고 고등사법경찰과 산업경찰을 설치하는 등 경찰조직을 입체화하고 경찰기관들을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

반항분자의 근절소탕과 민심의 안정책을 도모하기 위한 일만합동자문기관으로서의 치안유지회가 중앙은 물론, 성과 현을 단위로 하여 만주전역에 조직되어 활동을 개시하였고 형형색색의 간첩주구단체들이 출현하여 공산주의진영에 검은 촉수를 뻗쳤다. 옛날 중국에서 이미 실시되었고 일본이 대만과 관동주의 치안유지에서 좋은 실적을 올려온 보갑제도의 도입으로 일만경찰은 백성의 손발을 더욱 철저히 얽어매어 놓았다. 재향군인들로 이루어진 일본인 무장이민의 대대적인 유입과 자위단 역량의 확대도 동3성 일대에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는 반만항일세력을 제압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일제는 토비공작에 종사하는 현지의 고등경찰관들에게 즉석에서 상대를 처형할 수 있는 ≪임진격살≫의 권리를 주었다.

이 모든 조치들은 일제가 식민지 만주국의 지배와 유지를 위해 얼마나 고심참담한 노력을 해왔는가를 실증해준다. 특히 동북일각에서 제국의 면상과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갈기는 간도지방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무장투쟁과 그를 골격으로 하는 광폭적인 민족해방운동은 그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골치아픈 일로 되었다. 일본의 어느 헌병장이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진압하는데 따라 간도치안의 9할이 성공된다고 한 것은 결코 허공에 뜬 엄살이 아니다.

이른바 대일본제국은 항일유격대와 그 전략적 지탱점인 유격근거지들을 이처럼 무서워했다. 그러므로 일제는 어떤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동만의 항일유격구들을 지상에서 쓸어버리려고 발악했다.

1933년 여름에 일본군부는 항일유격대의 공격에 만신창이 된 간도임시파견대의 일부를 조선으로 소환해 가지고 그대신 히도미부대를 비롯한 수많은 관동군의 정예부대들을 동만 각지에 투입하였다.

조선강점군의 기본역량은 유격구≪토벌≫작전에 즉시적으로 응할 수 있는 우리 나라 북부국경지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도합 만 수천 명에 달하는 막대한 병력이 간도의 유격구들을 포위하고 동기≪토벌≫행진을 개시하였다.

적들은 조선혁명의 참모부가 자리잡고 있는 소왕청유격구에 공격의 예봉을 돌리고 이 일대에 관동군, 위만군, 경찰, 자위단으로 구성된 5,000여 명의 무력을 들이밀었다. 방진대열을 짓고 적과 승부를 겨루던 매뉴팩츄어시기의 전쟁을 제외한다면 산병선이 출현한 이후부터의 전쟁에서 병력을 이런 정도로 조밀하게 배치한 실례는 러일전쟁 당시의 여순공방전밖에 없을 것이다.

비행대들도 출동준비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렸다. 간도특무기관이 주관하는 특별수사반도 유격구 일대에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동만의 모든 지역은 우리와 일본제국주의와의 가장 격렬한 혈전장으로 되었다. 몇 개 지역의 유격구를 보위하는 방위전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대결전이었다.

그런데 소왕청에는 2개 중대의 유격대역량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격구에는 식량의 예비가 얼마 없었다.

동만의 유격근거지들은 그 존망을 가늠하기 어려운 위기에 놓여 있었다. 대포와 비행기로 무장한 강적을 2개 중대의 역량으로 격파할 수 있다고 믿는 낙천가는 유격구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앞에는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다가 죽느냐, 아니면 유격구를 포기하고 적에게 굴복하느냐하는 두 갈래의 길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흰 기를 들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유격전술상의 원칙을 놓고 보면 이런 대결전은 사실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런데 대결전을 하지 않으면 적들이 일격에 두만강 연안의 모든 유격구들을 삼켜버릴 수 있었다. 우리가 유격구를 지켜내지 못하면 인민혁명정부의 혜택속에서 참다운 평등과 자유를 누리던 혁명군중이 엄동설한에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유격구를 잃는다면 인민이 다시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었다.

왕청도 가을이면 절경이다. 그런데 이 가을은 동기≪토벌≫의 폭풍에 뒤죽박죽이 될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

온 유격구가 숨을 죽이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군대의 표정이 어떤가에 따라 인민들의 얼굴은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였다.

나는 묘술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궁리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 주변에는 전술문제를 논의할 만한 인물들이 하나도 없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박훈도 가까이에 없었고 쏘련에서 몇 해 동안 군대생활을 하다가 나온 ≪쏘거우재≫ 김명균과 독립군사관학교 졸업생인 이웅걸은 ≪민생단≫으로 몰리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양성룡도 ≪민생단≫바람에 녹아났다.

홍범도와 같은 명장이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홍범도는 왕청땅에 큰 자국을 찍어놓은 의병장군이었다. 청산리와 봉오골에서 독립군부대들이 쌓아올린 혁혁한 무공의 출발은 바로 그의 지략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홍범도를 지략은 없이 요령으로만 싸우는 장군이라고 숙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였다. 그들이 말하는 요령이라는 것도 근본을 따지고 보면 결국 지략의 소산인 것이다.

홍범도가 뛰어난 지략을 갖춘 인물이라는 것은 우리 아버지도 생전에 여러 번 말씀하였다. 지략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고려령에서 그처럼 교묘하고 용의주도한 복병술로 일본군대를 대패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초부다운 모습에서 은은히 내뿜기는 지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감히 홍범도를 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할바령 일대를 쥐락펴락하던 대한독립군 총사령의 그림자가 왕청땅에서 자취를 감춘 지도 수삼 년이 되었다. 세월의 이끼에 덮여 이제는 사람들의 추억속에서 그의 모습마저 희미해져가는 상 싶었다.

어려운 때를 당하고 보니 선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 절절해졌다.

내가 전술문제를 두고 연일 지휘부 귀틀집에서 모대기고 있을 때 하루는 이치백노인이 꿀단지를 들고 자정이 다되어 나를 찾아왔다.

≪열병을 앓을 때 아무 것도 못해주었는데 이걸 쓰구 몸을 좀 추세우게.≫

노인이 내앞에 꿀단지를 내놓으면서 하는 말이었다.

≪산청이라는 게 금값에 가는데 용케 구하셨습니다.≫

≪황가리골치기에 사는 마영감이 구한 거라네. 일전에 영감이 산청을 뜬 게 있다구 자랑하길래 찾아갔더니 단지째로 넘겨주는 게 아니겠나. 김일성대장의 몸을 추세우는 일이라면 집을 팔아서라도 장만하고 싶은 생각이라고 하더군. 내 지금 그 영감을 만나고 오는 길이네.≫

나는 노인들의 지성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저야 젊은 사람이 아닙니까. 이 꿀은 아버님께서 쓰셔야 하겠습니다.≫

≪늙은 것들의 성의를 마다하면야 안 되지. 내 그러지 않아두 대장의 간호를 못해서 내내 가슴이 알찌근했는데… 대장이 요새 얼굴색이 말이 아니야.≫

노인은 집에 가서 밤참이나 같이 들자고 하면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노인을 따라나섰다. 밤참도 밤참이려거니와 나와 반성위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그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였다.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나의 정은 의연히 나를 친아들 못지 않게 따뜻이 돌보아주던 그 수더분하고 인심 좋은 집에 많은 몫을 남겨두고 있었다.

우리는 밤참으로 땅콩을 넣은 강낭죽과 호박을 먹었다. 방금 열병을 앓고 난 뒤여서 그런지 음식맛이 꿀처럼 달았다. 안주인인 서성녀어머니는 내 식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나에게 해주는 음식 가운데서 제일 이채로운 것은 구운 감자와 구운 강냉이였다. 간도지방 감자는 크기도 하거니와 한 해 묵은 것은 당분이 많았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날 통무우김치물에 이런 구운 감자를 먹으면 별맛이었다.

나는 밤참을 먹은 후 반성위가 묵어간 그 방에서 이치백노인과 함께 가지런히 잠자리에 들었다.

노인은 웬일인지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내처 한숨을 지었다. 몇 달전에 세상을 떠난 아들 생각이 또 가슴에 사무치는 모양이라고 나는 판단하였다. 노인의 아들 이민권은 1933년 봄에 투항해가는 관부대의 무장을 해제하러 갔다가 중상을 입고 치료도중 추월구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민권의 추도식 때에는 나도 참가했다. 1932년 9월에는 이 집에서 유격대원 최윤식의 추도식도 하였다.

≪아버님, 왜 긴 밤 한숨만 쉬고 계십니까?≫

나는 이불자락을 걷어젖히고 노인 쪽을 향해 모로 돌아누웠다.

≪잠이 안와서 그러네. 적들이 유격구 문밖에까지 와서 수천 명이 진을 치고 있다는데 어디 배포유하게 잠을 잘 수 있어야지. 이번 ≪토벌≫에 유격대가 거덜난다는 말이 도는데 대장 생각은 어떤가?≫

≪유격대가 망한다는 건 반동들이 내돌리는 요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떨떨하게 잡도리를 하면 유격구가 이틀이나 사흘 안팎으로 거덜이 날 수도 있습니다. 유격구의 운명이 사실은 경각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유격구가 거덜난다는 건 말이 안돼. 유격구가 없이야 무슨 재미로 살겠나. 차라리 죽어서 까마귀밥이 되든가 북망산귀신이 되는 게 낫지.≫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이 근거지를 베고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적은 수천 명이나 되는데 소왕청을 지키는 우리 군대는 적의 100분의 1이나 되나마나하니….≫

노인은 담배를 몇 모금 빨고 나서 내앞으로 바싹 베개를 밀어놓으며 근엄하게 말했다.

≪병졸이 부족하면 나도 대장의 부하가 되겠네. 우리 소왕청에 나처럼 불질을 할 줄 아는 늙은이들이 한둘이 아닐세. 총만 한 자루씩 쥐어주면 강화진위대 찜쪄 먹게 싸울 수 있네. 전에 우리가 살던 중경리 근처에 독립군들이 파묻고 간 총과 철알이 있을 것 같은데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포수나 독립군 출신 영감들은 말할 것도 없구 청년사업이요 뭐요 하면서 왔다갔다하는 우리 사위 중권이 같은 패들두 무장시킬 수 있지 않겠나. 모두가 싸움꾼이 돼서 너 죽고 나 죽고 해볼 판이지. 총이 없으면 하다못해 놈들의 멱다시를 잡구 배지개를 뜨면서라도 근거지를 지켜내야 할 게 아닌가.≫

노인이 이 말은 적아의 역량대비에서 오는 차이 때문에 고민을 겪고 있던 나에게 전민항전만이 닥쳐온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출로라는 것을 시사해주었다. 격전의 제1선에 유격대와 함께 배치하려고 이미부터 내정하였던 자위대나 소년선봉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 뿐만 아니라 비무장인원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도처에서 결사전을 벌인다면 싸움에서 능히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심이 생겼다. 소왕청방위전은 적국 대 항일유격대와의 싸움이 아니라 적국 대 유격구내 전체군민과의 싸움으로 되어야 했다. 우리의 편에는 반유격구인민들도 계산해 넣을 수 있었다.

이치백노인과의 담화는 나에게 힘을 주었다.

(그렇다. 인민이 싸운다면 싸우는 것이고 인민이 이긴다면 이기는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인민의 의지에 달려 있으며 인민을 얼마나 잘 동원시키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수천 명 왕청유격구 인민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노인의 침착한 음성을 들으면서 내가 받아안았던 첫 충격이었다. 우리가 구상하는 작전속에는 반드시 이치백노인이 헤쳐보인 것과 같은 인민의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

나는 우리가 벌이게 될 소왕청방위전투는 유격구의 남녀노소가 다 동원되는 전민항전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전민항전이라는 이 규정속에는 2년째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군대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유격근거지의 인민들에 대한 최대의 믿음이 담겨져 있었다. 싸움 그 자체가 생활로 되고 있었던 유격근거지에서의 짧지 않은 세월이 나로 하여금 그런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창설 후 2년 동안 유격근거지가 건재할 수 있은 것은 군대의 덕만이 아니었다. 그 요인 가운데는 군건설과 유격구보위에서 적지 않은 몫을 담당한 인민의 힘도 포함되어 있었다. 1대 10이나 1대 100의 힘에 부치는 싸움을 할 때에도 인민이 후위에 있으면 우리는 어려움을 몰랐다. 인민이 더운물과 주먹밥을 들고 전호로 뛰어오는 숨결 소리만 들어도 우리의 전투력은 천백 배로 강해졌다.

전민항전을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게 된 배경에는 인민의 힘에 대한 이런 타산이 적용하였다.

이 타산은 살아도 유격근거지에서 살고 죽어도 유격근거지를 베고 죽는다는 각오를 가지고 어떤 경우에도 군대와 혼연일체가 되려는 인민의 의사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인민을 최대한 동원한다면 그것은 무서운 힘으로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치백노인이 나에게 귀뜸해준 유격대의 예비였다. 아니 유격구의 인민은 우리가 의거해야 할 예비정도가 아니라 가장 믿음직한 주력군이었다.

우리는 적의 역량이 분산되어 있을 때에는 힘을 합쳐 습격소멸하고 적이 역량을 집결하여 쳐들어올 때에는 분산하여 도처에서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종래의 전술적 원칙을 다시금 확정하고 소왕청 관내 전체주민들에게 전민항전을 호소하였다.

유격구인민들은 그 호소를 받들고 조직별, 계층별로 격전준비에 한 사람같이 떨쳐나섰다. 자위대와 청년의용군은 유격대와 함께 방어진지를 차지하였고 총이 없는 청장년들은 방어전연의 경사가 급한 고지들에 돌무지를 쌓아놓았다. 장포수, 최포수, 이포수를 위시한 왕청의 명포수들이 마촌에 달려와 독립군 출신 영감들과 함께 포수대를 뭇고 전방으로 출동하였다. 작식대와 담가대에 망라된 여인들도 화선으로 달려갈 차지를 하였다. 아이들은 널판자에 못을 박아 적 군용자동차들이 지나갈 도로들에 파묻었다. 노약자들과 어린이들은 대피지로 소개되었다.

우리는 그때 싸우다가 죽으면 죽었지 왕청을 버리고 달아난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는 각오를 가지고 격전준비를 빈틈없이 하였다.

왕청땅에는 봉오골에 새겨진 전승의 기록만이 아니라 ≪토벌대≫무리들의 총검에 동포들을 내맡기고 철퇴하던 북로군정서 소속 독립군들이 남긴 통한의 아픔과 패전의 수치도 새겨져 있었다.

남만에 서로군정서라는 독립군단체가 있었다면 동만의 왕청현 서대파 일대에는 서일을 총재로 하고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북로군정서라는 독립군단체가 조직되어 군제를 확대하였다.

군정서 산하에 모여든 애국지사의 수는 500명이고 탄알은 100만 발이며 자금은 무려 10만 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북로군정서가 운영하는 십리평사관연성소(군관학교)도 400명 이상의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으리만큼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 왕청과 그 아근의 농민들이 군정서군인들에게 보낼 초신과 식량을 운반해갈 때에는 서대파까지 우마차가 꼬리를 달고 늘어섰다고 한다.

이 군대가 한때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협동하여 청산리에서 일본침략군대에 무리죽음을 주었다.

은색 세루군복에 군도를 찬 김좌진이 청총말을 타고 지나갈 때면 왕청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무슨 재상이나 이 왕의 행차라도 맞이하듯이 모두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였다. 그것은 독립군이 청산리에서 세운 전공에 대한 인사였다.

그런데 이처럼 명망이 뜨르르하던 김좌진도 일본군의 간도대≪토벌≫이 시작된다는 정보를 듣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저항도 없이 왕청땅에서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왕청사람들은 독립군이 ≪토벌≫을 피해 삽십육계를 놓은 줄도 모르고 김좌진총사령을 보겠다고 앞을 다투어 행길로 쓸어나왔다.

군정서에 남은 병력은 1개 중대뿐이었다. 이 1개 중대가 무슨 마음을 먹고 그랬던지 간도≪토벌≫ 직전에 동일학교 졸업식에 참가하였다. 그날도 동일학교에서는 관례대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놓고 졸업식을 성대히 하였다.

예식이 끝나기 바쁘게 독립군들은 서둘러서 ≪독립만세!≫를 삼창하고는 음식상앞에 마주앉아 막걸리며 인절미며 냉면이며를 정신없이 먹어댔다. 그러다가 ≪토벌대≫가 쳐들어오자 다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학생들과 학부형들도 산지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마치 개미굴을 터쳐놓은 것 같은 광경이었다고 한다. ≪토벌대≫는 아무런 보호나 방비도 없이 살 구멍을 찾아 갈팡질팡하는 적수공권의 인민들을 총으로 쏘고 군도로 치고 날창으로 찔러 닥치는 대로 죽였다.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은 다 망하고 병패여도산 격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도 기세가 도도하던 북로군정서가 하루 아침 사이에 빈 달구지가 되었다고 왕청사람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정권이 인민의 수중에 장악된 왕청땅에서 이런 비운이 두 번 다시 반복된다면 우리는 자신을 조선의 아들딸들이라고 떳떳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유격전의 요구에 맞는 매복전, 유인전, 기습전, 야간습격전과 같은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전법과 전술로 적들을 족치려고 결심하였다.

이러한 유격전법들은 적들의 거듭되는 ≪토벌≫공세를 물리치며 유격구를 지켜내는 과정에 우리 자신의 지혜로 창조해낸 것이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유격전을 무장투쟁의 기본형식으로 선택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던 초기에만 해도 우리는 사실 전술상으로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남들이 써놓은 경험이나 교범같은 것이라도 있었으면 참고했겠는데 그런 것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쏘련에 사람을 보내 공민전쟁 시기에 전투경험을 반영한 몇 가지 군사자료를 얻어오게 하였는데 유격투쟁의 개념이나 매복전, 습격전의 조직방법 같은 것을 이해하는데서 얼마간 도움을 주었으나 우리의 실정에는 잘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식의 유격투쟁 교범을 하나 만들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1933년 3월말 쟈피거우전투가 있은 다음 1년 남짓한 기간의 무장활동을 통해 얻은 초보적인 군사경험들을 종합하여 ≪유격대동작≫이라는 소책자를 써냈다.

≪유격대동작≫에는 유격대의 정신도덕적 품성으로부터 유격전의 일반원칙에 이르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밝혀져 있고 습격전, 매복전, 방어전, 행군, 숙영 등 유격대의 전투행동조직과 사격, 무기관리, 규율에 이르는 유격대동작의 모든 원칙과 방법들이 간명하게 규범화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은 ≪손자병법≫이라든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같은 요란스러운 병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름난 군사이론가도 없고 오랫동안 무장투쟁을 해본 노장들도 없었던 그 당시의 형편에서 그 소책자는 우리 식의 소박한 유격전쟁론을 대표하는 군사보감이었다. 유격대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이 책을 배낭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보풀이 일게 연구하였으며 거기에 밝혀진 교범들을 군사실천에 구현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유격대동작≫은 그 후에 발표된 ≪유격대상식≫과 더불어 우리의 혁명무력건설과 주체전법을 확립하고 발전시키는데서 원전적 기초로 되었다.

적들은 1933년 11월 17일에 보병, 포병, 항공대의 협동작전으로 3개방향에서 소왕청유격구를 포위 공격해왔다. 성난 이리떼처럼 눈에 살기가 잔뜩 어린 야마도의 후예들은 생나무라도 물어뜯을 험악한 기세로 유격구에 달려들었다. 그 오만하고 도도한 기세란 실로 왕청땅을 열다섯 번쯤 탕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대≪토벌≫은 엄혹한 동기조건에서 파상식으로 지독스럽게 감행되었다. 적의 비행대들은 군정지도기관들이 자리잡고 있던 마촌과 이수구를 연거퍼 폭격하였다. 전술도 이만저만 악착스러워지지 않았다. 적들은 유격구로 쳐들어 왔다가도 공격이 좌절되면 그날로 되돌아가는 종전의 피스톤식 ≪토벌≫로부터 공격이 실패해도 물러가지 않고 도달한 계선에 그대로 주저앉아 숙영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여 차지한 지대를 공고히 해가는 ≪보보점령≫의 전술로 이행하였다. 이것은 점령지역 안의 모든 생명체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일체 부동산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불사르는 지독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군대와 인민은 일심동체가 되어 유격근거지를 영웅적으로 사수하였다.

적아의 공방전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곳은 유격구의 관문이 뾰족산과 마반산 쑥밭골 초소였다.

뾰족산과 마반산을 지키던 3중대와 반일자위대는 적을 20미터 안팎의 근거리에까지 접근시킨 다음 불의적인 집중사격과 작탄세례, 돌세례를 안겨 달려드는 족족 모조리 소멸하였다. 적들은 파도식으로 악착스럽게 달려들었으나 유격구의 전초진지를 한 걸음도 넘어서지 못하였다. 마반산 계선의 방위자들은 높은 속도의 기동력으로 유격구를 우회공격하는 적 기병들을 대왕청하 굽인돌이에서 통쾌하게 섬멸하였다.

적의 대병력이 뾰족산과 마반산 진지에 연속 투입되자 우리는 전면적 방어전으로부터 유인기만전술을 위주로 하는 신축자재한 기동한 적극적인 방어활동에 의한 소모전에로 이행하였다. 이것은 여러 가지 전투형식으로 적의 병력을 끊임없이 소멸하고 동시에 주동에 서서 교전상대를 싸움에 부단히 끌어들임으로써 적에게 일분 일초의 안정도 허용하지 않는 특이하고 자유분방한 전법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전투형식을 제때에 택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인 방어전술에만 매달렸더라면 유격대는 수적 우세와 전투기술기재의 우세를 믿고 거머리처럼 악착스럽게 달라붙는 적의 공격앞에서 지리멸렬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제시한 새로운 전술적 조치에 따라 유격대원들은 반군사조직성원들과 함께 전초진지들에서 철수하여 유격구의 종심깊이로 적을 끊임없이 유인하면서 매복전, 저격전, 숙영지습격전, 불무지작탄전 등의 천변만화한 전법으로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고 통쾌하고 때렸다.

불무지작탄전이라는 것은 코흘리는 아이들도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 효율이 100프로였다. 우리는 진지를 옮길 대마다 다음 계선으로 철수하면서 불무지들에 작탄들을 파묻게 하였다. 적들은 우리의 방어진을 차지하기 바쁘게 불무지앞에 모여들어 언 몸을 녹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작탄이 폭발하여 적들을 요정냈다. 오백룡의 넷째 동생 오룡석도 자위대에 망라된 여자들과 함께 뾰족산 중앙보초소에서 이런 방법으로 적들을 살상하였다.

우리는 적들의 숙영지에 대한 야간습격전도 자주 조직하였다. 2-3명이나 4-5명 규모로 무어진 습격조를 적진속에 들여보내어 적군와해를 위한 삐라도 뿌리고 총도 몇 발씩 쏘고 오게 하였다. 적의 천막이나 불무지같은 데 총을 서너 방만 갈겨도 온 숙영지가 수라장이 되곤 하였다. 이런 야습은 하룻밤 사이에도 세 번, 네 번, 지어는 다섯 번씩 하는 때도 있었다. 적들은 온 밤 잠을 자지 못하고 공포에 떨거나 저희들끼리 헛총질을 해댔다.

우리의 연속적인 기습을 겁을 먹은 적들속에서는 전쟁정신병자까지 발생하였다.

어떤 적병들은 유격대원들이 뿌린 ≪일본병사들에게 격함!≫, ≪위만병사들에게 격함!≫과 같은 선전물들을 보고 우리측으로 투항해오기도 하였다.

포수들도 화승대를 들고 전장에 달려나왔다. 나이 많은 영감들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사격술은 대단하였다. 적 장교들만 골라가며 쏘아눕히는 그 탄복할 만한 솜씨는 현대 저격수들의 솜씨와도 견줄 수 있었다. 부녀회원들은 주먹밥과 더운물을 이고 연방 전호로 들락날락하였다. 열살 안팎의 아이들도 싸움터에 찾아와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면서 전투원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마촌작전 과정에 이채를 띤 것은 돌벼락작전이었다. 유격구와 군대와 인민은 뾰족산과 같은 전초진지들에 돌무지들을 마련하였다가 ≪토벌대≫가 달려들 때마다 무리죽음을 안기곤 하였다. 경사가 급한 산벼랑으로 돌사태가 쏟아져내릴 때 전장을 들었다 놓은 벼락치는 듯한 소리와 포연을 방불케 하는 자욱한 먼지구름은 침략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기병대열을 와해시키고 차와 포의 전진을 저지시키는데서는 이 돌벼락작전이 매우 큰 은을 냈다.

마촌작전이 낳은 영웅들 가운데는 ≪13연발≫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격대원도 있었다.

≪13연발≫은 왕청지방에서 모험청년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가 모험가로 소문나기 시작한 것은 공청조직의 위임을 받고 두만강변의 어느 세무서에 가서 무기를 탈취해온 때부터였다. 그는 세무서에 가서도 나으리들 안녕하십니까, 나는 조선청년이올시다, 공청원이올시다 하고 자기 소개를 한 다음 권총을 빼들고 여유작작하게 벽에 걸려 있는 보총을 세 자루나 노획하였다. 그런 다음 전화로 경찰관주재소를 호출하여 네놈들은 무엇들하고 있는 거야, 지금 여기에 공산당이 나타났다, 빨리 빨리 총동원해서 오라고 호통질했다. 경찰관주재소에서는 사건현장에 기마경찰대를 급파하였다. ≪13연발≫은 하마트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뻔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이와 비슷한 모험을 자주 되풀이하였다. 공청조직이 그에게 어떤 비판을 했으리라는 것은 여기에 구태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이 ≪13연발≫이 쑥밭골 초소에서 항일혁명사에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차지할 만한 위훈을 세웠다. 쑥밭골에는 10여 명으로 구성된 방차대가 상시적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그 방차대의 책임자가 바로 ≪13연발≫이었다. 그는 소대장 겸 이 대에 조직되어 있는 공청소조의 책임자였다.

일본군, 위만군, 자위단으로 이루어진 ≪토벌대≫의 대집단은 밤중에 은밀히 쑥밭골을 포위하고 초소에 달려들었다. 방차대는 새벽부터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들은 귀틀집 초소의 일각이 불타서 무너질 때까지 일곱 차례나 되는 적의 돌격을 물리쳤다. ≪13연발≫은 탄우속에서 공청소조회의를 열고 이렇게 호소하였다.

≪동무들, 우리의 뒤에는 유격근거지가 있고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다. 만일 여기서 한치라도 뒤로 물러선다면 우리는 조선청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자격이 없다. 몸이 열백 번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사적으로 초소를 지키자!≫

적개심에 불타는 방차대원들을 총칼을 꼬나들고 적들의 무리속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13연발≫도 그런 충동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날 개인영웅주의, 모험주의의 병집 때문에 사람들의 말밥에 올랐던 이 용감무쌍한 싸움꾼은 이처럼 혈전속에서 자기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고 조절할 줄 아는 세련된 지휘관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응원부대를 이끌고 쑥밭골에 달려갔을 때 그는 열세발의 총탄을 맞고 초소에 쓰러져 있었다. ≪13연발≫이란 별명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방차대 성원들 중에는 일곱 군데, 세 군데, 두 군데의 부상을 당한 전투원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도 ≪7연발≫, ≪3연발≫, ≪2연발≫이란 별명이 붙었다.

왕청사람들은 그를 이름 대신 ≪13연발≫이라고 불렀다. 나도 역시 그렇게 불렀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본명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아득히 사라져갔다.

그의 본명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본명보다도 항일전쟁이 만들어낸 ≪13연발≫이라는 별명이 독자들에게 더 좋은 여운을 안기게 될 것이라는데서 나는 위안을 얻는다.

전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치열해졌다. 일본군의 포화에 잿더미가 된 소왕청을 뒤에 두고 주민들은 십리평으로 피난하였다.

적들은 군사인원과 비군사인원, 어른들과 아이들, 남자들과 여자들을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족족 다 죽였다. 동기≪토벌≫은 소왕청에서 수백 명의 희생자를 냈다.

우리가 십리평 다섯째섬 목재막앞에서 부대를 데리고 전투를 하고 있을 때 피난민 옷차림을 하고 보초소를 통과한 일본군은 마촌에서 대왕청으로 이동하는 인민들의 뒤에 달려들어 기관총을 퍼부어댔다. 이 습격에서만도 우리는 수십 명의 군중을 잃었다. 밤중에 두천평마을을 포위한 적들은 기관총 집중사격으로 잠든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하였다. 유격구에서 연극대본을 잘 쓰던 구청년단 서기 백일룡이네 가족도 모두 죽었다. 그 해 ≪토벌≫에 소왕청의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유격구 형편이 최악의 상태에 달했을 때 이수구골 안에는 1,500여 명의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그 피난민들을 대왕청으로 빼돌리느라고 유격대원들은 그때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어떤 때는 대왕청으로 흐르던 피난민의 행렬이 적의 불의 습격에 두 토막으로 동강나 서로 종적을 찾느라고 온종일 산판을 헤매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하루종일 팔에 애기들을 안고 혁명군중을 엄호하였다. 다른 유격대원들도 싸움을 하면서 노약자들을 부축해주었다. 지금 우리 군대와 인민 사이에 흐르는 군민일치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눈물겨운 화폭이 이렇게 엮어졌다. 그 화폭을 이룬 한 점 한 점이 다 피였고 눈물이었다.

피난민들을 데리고 이수구에서 십리평으로 가던 그날의 정경을 회고하면 지금도 목에서 겨불내가 나는 것 같다.

피난민들 가운데는 ≪토벌≫을 겪느라고 20일 동안이나 낟알구경을 하지 못하고 콩깍대기와 무시래기 같은 것으로 끼니를 이어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십리평에 가서도 쌀이 없어 소가죽을 삶아 먹었다.

머리를 들고 하늘의 해를 쳐다볼 힘도 없던 그 기아의 해들에 유격구인민들이 먹던 ≪음식≫을 후대들앞에 전시한다면 그들은 선열들이 체험한 그 인간 이하의 주림앞에서 눈물을 금치 못할 것이다.

김명숙(연길)은 유격구시절에 보리고개를 넘기지 못해 생때 같은 두 자식을 잃고 자기도 죽을 뻔했다. 일주일 이상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그는 자식이 굶어 죽은 것을 보고서도 밖에 내가가 묻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두막에 그냥 누워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웃들이 와서 시신을 오두막으로 끌어냈지만 땅에 묻지 못하고 가랑잎만 덮어주었다. 그들도 김명숙이처럼 일주일씩 굶은 사람들이어서 땅에 구뎅이를 팔 힘이 없었던 것이다.

해방된 조국 땅에 돌아와 첫 쌀밥을 먹을 때 김명숙은 두 자식을 앗아간 유격구시절의 보리고개를 회상하며 슬피 울었다.

처창즈유격근거지에는 어랑촌전투 때 적의 기관총탄알을 여덟 군데나 맞고 두 개골이 빠개져서 뇌수가 드러났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 그 검질긴 생명 때문에 그는 ≪팔연발≫이라는 별명을 벌었다. 총탄 여덟 발을 맞고서도 살아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팔연발≫도 동남차정부에서 일하다가 굶어 죽었다. 그가 죽기 전에 동지들을 향해 이런 절규를 하였다.

≪차라리 적의 탄알을 여덟 발 맞았을 때 죽었더라면 영웅이라는 이름이라도 남겼을텐데 여기서 억울하게 굶어 죽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적들은 유격구들을 총검으로 봉쇄하고 그 울타리속에 인민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게 하였다.

조선사람들이 그때 참으로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그 시절에 당한 희생은 지금도 우리 민족의 심혼속에 큰 상처로 남아 있다.

일본지배층은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행을 두고 도덕적으로 심심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반성은 수치도 아니고 굴욕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이성적으로 재정돈하는 과정이며 완성에로 이끄는 과정이다. 눈을 감는다고 역사가 스스로 인멸되는 법은 없다. 일본이 구가하고 있는 고도성장의 비단이부자리 위에 조선민족의 피가 배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본도 이방인들의 철화에 생명을 잃고 사랑하는 누이와 딸들이 강점군들에게 정조를 강탈당하는 국난을 체험하지 않았던가.

적들은 만신창이 되어 허덕이면서도 검질기게 늘어붙어 장기전을 기도하였다. 인원도 무기도 식량도 공급받을 데가 없는 우리를 장기전의 함정에 빠뜨려 얼어 죽고 굶어 죽게 하려는 것이었다.

전국의 결정적인 전환만이 유격대와 유격구인민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 유격구방위전과 함께 적들의 종심에서 강력한 교란작전을 벌이는 것만이 유격구와 인민들을 보위하는 유일한 출로였다.

원래 나는 왕청에 온 초기부터 유격구사수에만 매달리는 방어일변도의 경향을 반대하였다. 다시 말하여 적들의 역량이 분산되었을 때에는 우리가 힘을 합쳐 적들을 습격 소멸하고 적들이 역량을 집결하여 우리한테로 쳐들어올 때에는 반대로 우리가 역량을 분산하여 도처에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법을 피실격허의 전법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활동해야 근거지도 고수하고 부대의 역량도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동만당과 현당에 앉아 있던 대부분의 간부들은 적들이 집결해 쳐들어올 때에는 무턱대고 우리가 집결해서 적을 방어해야 유격구도 지켜내고 인민들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가지 이론이 전술상 문제로 대치되어 나중에는 어느 주장이 진실로 맑스주의적인 것이고 어느 것이 비맑스주의적인 것인가 하는 어마어마한 논란까지 빚어냈다.

그들이 우리의 이론을 비맑스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나아가서는 현실도피적이고 투항주의적인 것으로 평가하므로 우리도 그때 날을 세워가지고 적구교란론의 정당성을 완강하게 고집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역량을 집결한다고 하여도 적을 감당할 만한 힘은 못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인민들을 사방에다 피난시키고 유격대도 일부만 남겨 여기저기서 뚱땅거리게 하자. 그러는 사이에 유격대의 나머지 역량은 분산되어 적 후방을 교란시키자. 가령 총을 멘 대원 10명이 적구로 나간다고 하자. 그 열 사람이 30-40명의 총없는 청년들을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적의 약한 고리들을 자꾸 답새기면 총도 얻고 먹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많은 동무들이 당시의 정황을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고 다 우리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일부 완고덩이들은 그것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슨 활동연조를 뽐내면서 ≪젊은 사람들이 투쟁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 좋다. 적이 쳐들어올 때 군대가 유격구 밖으로 나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것은 인민들이야 어떻게 되든 군대만 살고보자는 사상이다≫라고 터무니없는 까박을 붙였다.

유격근거지가 초토화되고 희생자와 전사자들이 속출하자 나는 동장영, 이상묵, 송일을 비롯한 특위와 현의 간부들을 만나 적후교란전을 벌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제는 모든 것이 마지막 계선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다가는 우리도 죽고 인민들도 다 죽고 만다. 가면 어데로 가겠는가? 자꾸 쫓겨서 산으로만 들어가는데 수림속으로 그냥 들어가면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쫓기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인민들을 보호할 수도 없다. 동무들이 유격대와 같이 적을 격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막연한 일이다. 당장 오늘밤이라도 유격대를 서너 패로 나누어 적구에 내보내야 한다. 적구에 나가서 후방근거지들을 몇 군데만 답새기면 ≪토벌대≫들이 반드시 소왕청에서 퇴각한다.≫

동만의 다른 유격구들도 그 무렵에는 소왕청과 비슷한 고전을 겪고 있었다. 훈춘사람들은 밀려서 금창과 화소포 쪽으로 갔고 왕우구사람들은 다홍왜와 삼도만 방면으로, 화룡현사람들은 처창즈 방면으로 각각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도간부들은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그래서 나는 적구교란론을 재차 상정시키고 ≪군대는 내가 책임졌으니 내 결심대로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런 다음 유격대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우리가 방어에만 매달리지 말고 적의 뒤통수도 쳐야 한다. 누가 적구로 가겠는가? 갈 사람은 나를 따라 서라. 많이 요구하지 않는다. 절반만 적구로 나가고 절반은 유격구에 남아 인민들을 보호해야 한다. 적구로 나갈 사람들은 나와 같이 오늘 밤중으로 포위망을 뚫자. 포위망만 뚫으면 살 길이 열린다. 적의 거점들과 지탱점들을 연이어 들부수면 소문이 난다. 소문을 내면서 여기에서도 치고 저기에서도 치면 후방이 녹아날까봐 산골 안에 들어왔던 ≪토벌대≫들이 다 달아난다.≫

이렇게 되어 유격대는 두 패로 갈라졌다. 한 패는 최춘국의 지휘하에 십리평을 지키고 다른 한 패는 내가 데리고 적구로 나갔다. 1,500여 명에 달하는 근거지인민들은 공청원들의 인솔하에 나자구에 소개하였다.

우리는 병중에 있는 동장영을 묘구방면으로 데리고 가서 간호할 데 대한 임무를 최금숙에게 주고 예비식량까지 다 모아서 그의 배낭속에 넣어주었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상면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으로 유격대의 한 개 편대를 데리고 배밀이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 후방으로 깊이 들어갔다. 우리가 예견했던 대로 적 후방은 오히려 텅 비어 있었다. 우리가 도시 주변의 첫 부락에 들렀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설 준비를 하느라고 한창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유격근거지에서 일제의 ≪토벌≫에서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고 하면서 교즈와 기장떡과 같은 설음식으로 우리를 푸짐히 대접하였다. 그날 밤 오백룡소대의 김생길이라는 대원은 교즈를 140개나 먹고 배가 아파 죽을 뻔하였다.

그 다음날은 너무 피곤하여 보초를 세우고 하루종일 대원들을 재웠다. 몇 달 동안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혹한속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잠을 늘어지게 자고 나니 눈꼽이 다 나오고 얼굴빛이 환해졌다.

우리는 다음날부터 적들을 답새기기 시작했다. 전술은 자그마한 ≪토벌≫거점들에 대한 습격을 기본으로 하면서 이에 비교적 큰 ≪토벌≫거점들에 대한 공격을 배합하는 것이었다.

맨 처음으로 친 것이 양수천자의 적이었다. 우리의 벼락같은 기습에 위만군과 자위단이 녹아나고 일본영사관 경찰병영이 완전히 점령되었다. 양수천자에서 적후교란의 첫 총성을 울린 우리는 멀리로 사라지는 척하다가 제자리에 돌아앉아 신남구라는 곳에서 이동하는 적 자동차수송대를 습격 소탕하고 많은 밀가루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우리는 신남구에서 멀리 떨어진 북봉오동의 산악지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쭉 빠져나가 새 전투를 준비하였다. 1934년 2월 16일 밤 북봉오동의 위만군과 경찰, 자위단원들은 모두 우리 부대에 의해 살상포로 되었다.

북봉오동에서 승리의 개가를 올리고 북고려령을 넘어 사동 방향에 진출한 우리 부대는 동골에 있는 산림경찰대를 공격하여 병영의 적들은 모조리 사살하거나 생포하였다.

적의 동기≪토벌≫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최후의 싸움은 도문-목단강 사이의 철길을 끼고 있는 주요 군사요충지 대두천에서 벌어졌다. 적≪토벌대≫로 변장한 우리는 100여 리의 험산준령을 강행군으로 단숨에 돌파한 다음 3개의 조로 나누어 대두천의 경찰서와 자위단실을 습격하고 군수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 전투가 있은 다음부터 적들은 유격구를 조이고 있던 포위망을 해제하고 90일 전의 출발지점으로 퇴각하였다. 적들은 ≪암≫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연 석달 동안 유격구의 존립을 위협하던 동기≪토벌≫의 운명은 서산낙일로 끝나고 말았다.

편의상 마촌작전이라고 불렀던 소왕청근거지방위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그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취임과 라이프츠히공판, 소미외교관계 수립으로 소란스럽던 세계의 일각에서 소문없이 생겨난 하나의 기적이었다. 소왕청유격구방위자들의 영웅적 위훈과 고난으로 얼룩진 그들의 행적을 방불하게 그려낼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다.

우리는 이 승리를 위해 비싼 대가를 치뤘다. 수백 명의 생명이 적의 포화에 목숨을 잃었다. 제일 애석한 것은 최금숙과 동장영을 잃은 것이다.

나를 친동생처럼 그렇게도 사랑해주고 돌봐주던 최금숙, 우리가 적구에서 돌아올 때 개선용사들을 향해 눈물을 뿌리며 달려오던 유격구인민들속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전령병이 메고 온 나의 배낭속에는 그에게 선물할 손거울이 있었다. 다른 부녀회원들에게 줄 전리품도 여러 마대가 되었다.

이 겨울에 우리 부녀회원들이 유격구를 지키기 위해 고생인들 얼마나 많이 하고 눈물인들 얼마나 많이 흘렸던가. 그들이 밥인들 얼마나 많이 짓고 풀뿌린들 얼마나 많이 캐었던가. 길 안내를 강요하는 적들을 유격대가 없는 딴 방향으로 유인하여 골탕먹이고 총살당한 혜숙이와 영숙이! 지휘부가 자리잡은 벼랑턱으로 적들이 기어오를 때 놈들이 쳐들어온다고 연방 외쳐대며 원쑤들을 자기에게로 유인한 최창범의 숙모!…

어찌 계월향이나 논개만 조선의 열녀이고 애국자이겠는가.

하지만 나의 때늦은 정성은 최금숙의 손에까지 닿지 못하였다. 적들은 내가 일생에서 유일하게 누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단 한 명밖에 없는 여성,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죽지 말고 싸우자고 말하면 오히려 자기는 불로장생하는데 대장이 몸을 돌보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하던 여성을 이렇게 앗아갔다.

동장영의 죽음도 나에게 있어서는 가슴아픈 손실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해주고 나의 사상을 존중해주던 중국 동지들 가운데서도 가장 잊지 못할 전우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중요한 노선문제를 두고 논쟁도 많이 하였다. 고집이 좀 세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그러한 견해상의 차이가 우리의 우정에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늘 조선사람들 가운데서는 내가 제일 믿음이 간다고 하면서 무척 나를 위해 주었다.

우리는 대두천전투 후 요영구방향으로 철수했다가 마촌에 돌아와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를 총화하였다. 그때 마촌에서는 소개지에서 돌아온 인민들이 잿더미 위에 집을 일떠세우고 있었다. 어떤 노인은 유격구에 들어온 후 70번째로 집을 짓는다고 하였다. 살아도 유격구에서 살고 죽어도 유격구에서 죽겠다고 결심한 간도인민들의 생명력은 이처럼 억척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인민의 지지와 후원이 없었더라면 우리 유격대는 적의 대≪토벌≫을 격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마촌작전의 승리는 군민일치의 열매이며 인민항쟁의 결실인 것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곤란을 맞받아나가는 우리의 공격정신과 그에 기초한 우리 식의 변화무쌍한 전법은 마촌작전의 승리를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다.

마촌작전의 전 과정은 혁명정권의 토양위에서 백절불굴하는 우리 민족의 의지와 기개를 안고 거목처럼 우뚝 솟아오른 유격구정신의 연소과정이었다. 이 정신은 비행기나 대포로써도 정복할 수 없는 견인불발의 힘을 가지고 소왕청의 한 치 한 치를 피로써 지켜낼 수 있게 하였다.

마촌작전을 통하여 적들은 심대한 군사정치도덕적 참패를 당하였다. 그대신 우리 혁명군의 군사적 권위는 비할 바 없이 부각되었다. 우리는 이 작전을 통하여 유격전법의 골격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전법들을 무수히 창조하였으며 장차 대부대활동에로 이행할 수 있는 군사조직적, 전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항일유격대는 적의 어떤 침공도 격파할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마촌작전은 소왕청을 고수함으로써 인접 현의 유격구들에 가해진 위기를 해소하는데도 기여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 조선혁명을 앙양시키는데도 큰 공헌을 하였다. 1211고지를 사수한 영웅전사들의 방위정신은 바로 1930년대에 탄생한 유격구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이 정신을 지니고 제국주의의 포위속에서 우리 식 사회주의를 빛내이며 일로매진하고 있다.

항일전쟁의 포화속에서 탄생하고 연마된 유격구정신을 압도할 힘은 이 세상에 없다. 이 정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 군대와 인민은 앞으로도 영원히 필승불패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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