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2(2003)년 3월 7일(금)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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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에는 무장에로

 김일성주석 ≪세기와 더불어≫

통일여명 편집국 주해 2-31

 

9.18사변으로 하여 우리에게는 항일전쟁을 시급히 개시해야 할 절박한 과업이 나서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부정의의 포성에 정의의 포성으로 대답할 절호의 기회가 닥쳐온 것이다.

일제가 만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가들은 모두 지하에서 나와 자기 진지를 차지하였다. 대륙을 뒤흔드는 포성에 만주지방사람들은 그 해 가을 단단히 정신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포성은 사람들을 위축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성시키고 분발시키었다. 적의 폭압으로 초토화되었던 만주지대에는 또다시 새로운 투쟁기운이 태동하였다.

우리는 군중을 투쟁속에서 단련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도래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솔직히 말하여 그 당시 만주지방사람들은 폭동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 때문에 누구나 고민하였다. 혁명을 다음단계에로 상승시키자면 그들에게 신심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격문이나 뿌리고 빈말공부나 해가지고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었다.

실패에 습관된 군중에게 힘을 주고 신심을 주자면 새로운 투쟁에로 그들을 궐기시키고 그 투쟁을 반드시 승리로 결속지어야만 하였다. 대중을 투쟁속에서 단련시키지 않고서는 설사 몇몇 선각자들이 무장투쟁을 시작한다고 하여도 크게 은을 낼 수 없었다.

9.18사변의 발발은 동만지방인민들이 다시 한 번 투쟁에 일떠설 수 있는 계기를 지어주었다. 국내인민들의 폭동진출이 또한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국내에서는 농민들이 소작쟁의와 반일폭동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었다. 고원동척농장 소작쟁의, 용천불이농장 소작쟁의, 김제다목농장 소작쟁의가 그 대표적인 실례였다.

용천지구에서는 1929년 이후에도 농민들의 투쟁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때 그곳 조직들이 우리와 연계를 가지고 투쟁을 잘하였다. 용천땅에는 우리 공작원들이 많이 나가있었다.

영흥의 3000여명의 농민들과 삼척의 2000여명 농민들은 9.18사변 후 ≪비상시국≫을 표방하며 파쑈적인 폭압과 약탈을 강화하고 있는 일제를 반대하여 큰 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때 우리는 간도지방에서 추수투쟁을 조직하였다.

각지의 투쟁위원회는 자기 산하에 선전대, 규찰대를 두고 삐라와 격문을 찍어내며 투쟁구호를 제정하는 등 준비작업을 빈틈없이 한 다음 혁명조직구별로 추수투쟁에 들어섰다. 초기의 투쟁은 소작표를 낮추기 위한 합법적인 경제투쟁이었다.

한때 어떤 역사가들은 이 투쟁에 ≪추수폭동≫이라는 이름을 붙이었는데 나는 그런 명명을 적중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추수투쟁은 5.30폭동의 모방이 아니고 재판도 아니었다. 이 투쟁은 이립삼의 좌경망동적인 사상여독을 완전히 청산한 기초 우에서 새로운 전술적 원칙에 의하여 전개한 승리한 대중투쟁이었다. 5.30폭동에서는 종파분자들이 주역을 놀았지만 추수투쟁에서는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키를 잡고 군중을 지휘하였다.

추수투쟁은 폭력을 기본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5.30폭동이 변전소와 교육기관에 불을 지르고 지주, 자산가 일반을 타도하면서 방화와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면 추수투쟁참가자들은 소작료의 3.7제, 4.6제와 같은 정당한 요구를 내걸고 투쟁위원회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인접과의 보조를 맞추면서 질서정연하게 행동하였다.

소작료를 낮추라는 요구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농민들의 처지로 볼 때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 요구가 정당하기 때문에 길림성정부도 소작료를 3.7-4.6(지주 30~40프로, 소작인 60~70프로)제로 한다는 것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주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폭력이 사용되지 않았다. 폭력이 발동된 것은 투쟁위원회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해나서는 악질지주들과 농민들의 투쟁을 총검으로 탄압하는 군경들에 한해서였다.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완고한 지주들에 대하여서는 양곡을 밭에서 3.7제나 4.6제의 비율로 소작인의 몫을 실어가거나 창고를 헤치고 나누어가졌다.

약탈적인 동척금융부와 고리대금업자들, 일제의 통치를 협조하는 조선인거류민회와 같은 반동단체들도 투쟁의 과녁이 되었다.

내가 연길지방에서 추수투쟁을 지도하고 안도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5.30폭동 후 일제의 수사를 피해 숨어다니던 최동화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추수투쟁이 점점 폭력적인 성격을 띠어가는데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였다.

안도지구에서 5.30폭동을 선동한 장본인이고 또 후에는 그 폭동을 좌경맹동이라고 규정한 우리의 입장에 의견을 가지고 논쟁까지 하겠다고 하던 그가 돌변하여 폭력의 유해설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성주동무! 어떻게 된 일이요? 5.30폭동을 좌경맹동이라고 비난하던 동무네가 순수한 경제투쟁에서 폭력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이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오?≫

최동화는 이런 질문을 하고 나서 팔짱을 지르고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마 정통을 찔렀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흐뭇해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이 5.30때 제창한 ≪붉은 폭력≫과 우리가 추수투쟁에서 사용하고 있는 폭력이 같다고 생각하시는게 아닙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이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것을 따져볼 사이도 없이 나는 그만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물론 미세한 차이야 있겠지. 그러나 폭력이야 이렇든 저렇든 폭력이 아니겠소.≫

≪우리는 정당한 이유로 타당성이 있을 때에만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주가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완력으로 쌀창고를 헤쳤습니다. 군경들이 사람들을 잡아갈 때면 실력행사로 동지들을 탈환하기 위한 투쟁을 했습니다. 그래 놈들이 폭력을 휘둘러 투쟁을 탄압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선정을 베풀어야 합니까?≫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맑스주의의 일반적 원리를 내가 몰라서 동무네를 시비하는 게 아니요. 지금은 그렇게 1대 1로 완력을 행사할 때가 아니라는 거요. 5.30폭동은 벌써 아득한 옛말로 되었소. 우리 혁명은 불행하게도 퇴조기에 들어섰소.≫

≪퇴조기라구요?≫

≪그렇소. 퇴조기요. 이보퇴각의 시기요. 쓰톨리핀반동기도 아마 지금보다는 더 암담하지 않았을 거요. 관동군이 일거에 전 만주를 강점한 것을 보지 못하오? 장학량의 30만 대군도 퇴각했소. 이런 때에 혁명역량을 노출시키지 말구 보존해야 한단 말이요. 적을 서뿔리 건드리다가는 동만땅에서 경신년의 대토벌과 같은 참사가 재연될 수 있소.≫

최동화는 추수투쟁이 폭력투쟁으로 번져가는 것을 막고 무장을 드는 것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의 무장투쟁구상에 대해서도 시기상조이고 사상누각이라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사실 그와의 논쟁은 힘에 부친 것이었다. 최동화란 사람이 원래 두뇌도 명석하고 공산주의의식도 높은 지식인이어서 웬만한 말은 이가 들지 않았다. 그는 말끝마다 고전의 명제를 끌어내어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논증하군 했는데 다 아귀가 맞았다. 최동화를 납득시킨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결국 혁명이 퇴조기에 들어갔다는데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그는 일제의 대대적인 무장공세나 장학량군의 패주나 독립군의 와해와 같은 불리한 징후들은 보면서도 국내와 동만 인민들의 폭동적 진출은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내앞에는 분명히 눈을 뜨고도 현실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있었다.

반혁명의 공세와 비겁한 무리들의 패주가 곧 혁명의 퇴조기로 될 수는 없었다. 문제는 혁명의 주체인 인민대중의 동향에 달려있었다.

최동화는 전 세대 공산주의자들이 다 그러했듯이 인민대중의 힘에 대하여 너무나 소홀히 여기고 있었다.

그는 인민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보지 못하였으며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과소평가하였다.

나는 그때 혁명의 퇴조기를 운운하는 최동화의 모습을 통하여 전 세대 공산주의자들과 우리와의 근본적 차이를 느끼었다. 그들과 우리와의 모든 차이는 결국 인민대중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데서부터 산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이상과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우리와 그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남남처럼 지낸 것을 바로 그 차이 때문이었다.

나는 최동화에게 말하였다.

≪역설이라고 판단하실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민대중이 일제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혁명의 고조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고조기를 놓치지 않고 추수투쟁을 끝낸 다음에는 대중을 더욱 각성시키고 조직화해서 항일투쟁을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대세가 어떻게 되어가든 이 결심은 변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최동화는 더 말을 못하고 쓴 입을 다시며 돌아갔다.

최동화와 같은 사람들이 혁명적 폭력의 불리성을 운운하면서 우리에게 제동을 걸었지만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주로를 조금도 이탈하지 않고 신심에 넘쳐 추수투쟁을 지휘하였다.

10여만명의 간도농민들은 1931년 9월부터 그해말까지 일본군경들과 반동군벌의 야만적인 탄압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피어린 투쟁을 벌이었다.

이 투쟁과정에 조선민족의 영웅적 기개를 보여주는 전설적인 일화들이 수많이 창조되었다. 개구지방 인민들이 시위도중 두만강얼음 우에서 일만군경들과 벌인 육박전에 대한 이야기는 한동안 만주지방사람들의 심혼을 흔들어놓은 화제거리가 되어 돌아갔다.

여성투사 김순희의 극적인 최후에 대한 일화도 추수, 춘황투쟁의 불길속에서 태어났다. 김순희는 약수동의 적위대대원이었고 추수투쟁위원회의 위원이었다.

약수동에 나타난 ≪토벌대≫놈들은 만삭이 된 그의 배를 총끝으로 쿡쿡 찌르며 배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김순희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일본수비대원들과 영사관경찰들을 쏘아보면서 ≪잘 낳으면 임금이구 못낳아도 대문전거리를 지나다니는 너 같은 것들이다≫라는 유명한 대답을 하여 적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중에는 조직의 비밀을 고수하기 위해 자기의 혀까지 끊어버리었다. 그는 적들이 싸지른 불속에서 22살의 아까운 꽃나이를 마치었다.

추수투쟁은 농민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 투쟁을 통하여 동만지방 인민들은 신심을 얻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투쟁의 승패가 대중자신의 불굴의 의지와 지도방법에 결정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깨닫고 추수투쟁을 승리에로 인도한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을 경이적인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그들의 주위에 굳게 결속되었다.

대중은 추수투쟁의 승리를 통하여 5.30폭동을 실패한 원인을 스스로 찾아냈으며 폭력의 양이 결코 투쟁전과를 결정하는 기본요인으로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5.30폭동이 실패한 원인이 폭력을 적게 투하된 데 있지 않았던 것처럼 추수투쟁이 승리한 요인 역시 폭력이 많이 투하된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모두다 잘 알게 되었다. 폭력은 결코 만능이 아니었다. 그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정당하고 분별있는 시기적절한 폭력만이 그것을 틀어쥔 사람들에게 승리를 기약해줄 수 있다. 오직 그런 폭력만이 사회를 개조하고 역사발전을 추동하는데 참답게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런 폭력만을 지지할 뿐이다.

문제는 대중을 어떻게 동원하고 조직하며 지휘하는가 하는데 달려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하나의 모범을 창조해놓은 셈이었다. 추수투쟁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고 평화적 방법과 폭력적 방법을 적절하게 배합하면서 시종일관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적을 피동에 몰아넣은 독특한 투쟁이었다. 다음해 봄에 있은 춘황투쟁도 이런 투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추수투쟁을 통하여 조중인민들의 단결이 강화되고 조중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 유대가 공고화되었다.

추수투쟁은 인민대중을 각성시키고 단련시키는 훌륭한 계기로 되었다. 이 투쟁대오에서 소박한 보통사람들이 투사로, 혁명가로 자라났다. 동만의 혁명조직들은 추수투쟁에서 훈련된 수많은 핵심들로써 자기의 대오를 튼튼히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핵심들이 마련된 것은 미구에 도래하게 될 무장투쟁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었다.

추수투쟁의 과정에서 배출된 수많은 청년혁명가들이 훗날 동만의 각 현들에 조직된 유격대의 골간으로 되었다.

나는 추수투쟁을 지도하면서 무장투쟁에 대한 구상을 계속 심화시켜나갔다. 투쟁속에서 발현되고 있던 동만인민들의 대중적 영웅주의와 불굴의 투쟁정신은 새로운 단계의 혁명노선을 모색하고 있던 나를 무한히 고무해주었으며 우리가 일단 무장을 잡고 일제와의 혈전을 벌이게 되면 대중이 반드시 우리를 지지성원해 나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추수투쟁의 불길이 온 동만땅에 번져가고 있던 1931년 10월에 나는 함경북도 종성지방에 잠깐 다녀왔다. 내가 종성에 나가게 된 것은 국내동무들을 만나 무장투쟁문제를 논의하고 육읍일대에 파견되어 활동하는 공작원들을 소환하여 그들에게 무장투쟁과 관련된 중요한 임무를 주자는데 있었다. 나를 종성까지 안내한 것은 채수항과 오빈이었다.

종성은 채수항의 고향이었으며 거기에는 그의 처자가 있었다. 그의 선친들은 구한국말기까지 거기서 살았다. 증조할아버지는 종성좌수의 벼슬을 지냈다. 채수항이네 일가가 조국을 떠나 화룡현 금곡땅으로 이주한 것은 ≪한일합병≫직후였다.

채수항은 간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으나 항상 어린 시절의 꿈이 묻혀있는 고향땅을 그리워하였다. 그는 나와 함께 종성으로 건너갈 때마다 기쁨을 걷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기분상태가 별로 침울해 보였다.

나는 추수투쟁의 파도가 채수항의 집 낟가리도 헐어간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넌지시 물었다.

≪채동무네도 수탈의 대상이 된게 아니요?≫

채수항이네 집은 부유한 지주가정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곱지 않게 보는 덕신사 사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탈은 무슨 수탈, 우리는 농민들이 요구하기 전에 3.7제의 비율로 밭에서 직방 곡식을 나누어주었소.≫

≪현당서기네 가정이 다르긴 달라. 그런데 왜 얼굴빛이 그렇게 어둡소?≫

≪일부 사람들이 나더러 아버지를 설복하여 사장직을 그만두게 하라고 하는데 아버지가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구만.≫

채수항은 자기 아버지가 혁명조직의 위임을 받고 덕신사사장의 자리를 맡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규율이 규율이니만치 아버지는 그 내막을 아들에게 까밝힐 수 없었다.

그러니 채수항이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 민망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듣고 보니 채수항이 머리를 썩일만도 하였다. 그 당시 상급당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일군들 중에는 혁명의 이익에 배치되는 극단적인 요구를 마구 내리먹여 아래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좌경분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채수항에게 아버지와의 계급적 ≪계선≫을 가르지 못했다는 ≪과오≫를 뒤집어씌워 그를 현당서기의 직책에서 해임시켰다가 다시 복직시키기까지 하였다.

나는 채수항의 울적한 기분을 돌려세우려고 무장투쟁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자 채수항은 농조로 이제 우리 군대가 조직되면 선참으로 입대하여 기관총수로 되겠다고 하였다.

≪무관은 어울리지 않아. 채동무한테야 문관이 천분이지.≫

나도 웃으면서 농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 농속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를 타고난 정치일군이라고 생각하였다. 채수항이 만일 살아남아서 혁명군에 입대하였더라면 틀림없이 연대나 사단급의 정치일군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유격대를 창건하고 무장투쟁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 그는 대립자부근에서 일본≪토벌대≫놈들에게 학살되었다.

오빈은 용정동흥중학교 시절부터 체육선수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훈춘현 운동대회에서 씨름에 1등을 하여 황소까지 탄 일이 있는 소탈하고 쾌활하고 날파람있는 동무였다.

나는 오빈이야말로 혁명군대의 맹장이 될 수 있는 무관형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람을 사귀면 이 사람은 혁명군대에서 어떤 직무를 담당할 수 있겠는가 하고 가늠해보는 나의 버릇은 이 무렵부터 생겼다고 할 수 있다. 항일전쟁을 목전에 둔 당시의 긴박한 정세가 나를 그러한 ≪타산가≫로 만들었던 것 같다.

석건평나루에서 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간 우리는 동관진의 두량조합 콩정선장에 들리었다. 이 조합에서는 일제가 만주에서 약탈해오는 콩을 등급별로 나누어 계량하고 그것을 마대에 넣어 일본으로 실어보내는 일을 하였다.

우리는 간도에서 품을 팔러 나온 인부로 가장하고 노동자들이 일손을 도와주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간도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추수투쟁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추수투쟁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대체로 비관적이었다. 왜놈들이 만주를 강점하기 전에도 간도에서 숱한 폭동들이 일어났다가 실패했는데 하물며 그놈들이 만주를 침략하고 있는 때에 추수투쟁 같은 것이나 벌여가지고 무슨 승산이 있겠는가. 이 투쟁도 결국은 5.30폭동들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은 어떤 투쟁을 벌여도 소용이 없다. 보라.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있고 게다가 강대국들이 모여있는 국제기구에서도 그놈들의 편역을 드니 약소민족이 바라볼 데가 더는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때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한 말을 듣고 나는 세 가지 측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 바 하나는 혁명가가 민심을 잘 알려면 항상 대중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장투쟁을 시작하려면 무엇보다도 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조직화하는 사업을 더 다그쳐야 하겠다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의 충격은 그 어떤 형태의 투쟁도 대중이 그 의의를 충분히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동원되기 전에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노동자들의 허무주의적이고 자포자기적인 견해를 들으면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무장투쟁을 한시라도 빨리 시작하여 우리 민족에게 재생의 희망,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어야겠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였다.

그날 우리는 광명촌청년회 회장으로 사업하고 있던 최성훈의 집에서 국내정치공작원들과 지하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열고 무장투쟁과 관련된 국내혁명조직들의 과업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나는 회의참가자들에게 9.18사변 후의 급변한 정세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역사적 교훈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벌일 것을 절박한 요구로 제기하고 있다는 것과 무장투쟁을 개시하는 것은 우리 혁명투쟁의 합법칙적인 요구이며 질적인 비약이라고 강조하고 나서 두 가지 큰 과업 즉 군사적 준비를 튼튼히 갖추는 과업과 함께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튼튼히 축성해야 할 과업을 제기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이라는 격동적인 사변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무장대오의 조직을 돕기 위한 창발적인 의견들을 내놓고 열변을 토하였다.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기 위한 혁명역량준비문제는 1931년 5월의 공수덕회의에서 이미 논의되고 확정되었다. 이런데 기초하여 광명촌회의는 무장투쟁이라는 새 사변을 앞두고 국내혁명조직들앞에 나서는 실천적 과제를 토의한 셈이었다. 이 회의는 국내 인민들과 혁명가들에게 보내는 무장투쟁의 예령이었고 사전신호였다. 회의과정에 표현된 무장투쟁에 대한 국내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공명은 나에게 큰 힘을 주었다.

나는 종성에서 하루를 묵고 인차 간도로 돌아와 채수항, 오빈과 헤어졌다. 우리는 12월 중순경에 명월구에 다시 모여 무장투쟁준비사업을 총화하고 무장투쟁의 구체적인 방도와 전략전술문제를 토의하기로 하였다.

그 후의 나의 모든 일정은 명월구회의에 바쳐졌다.

회의준비라고 하면 보고서나 결정서와 같은 문건들을 먼저 염두에 둘 수 있는데 그때의 회의준비란 노선문제를 구상하고 전략전술을 규정하는 모색과정을 의미하였다. 사상을 성문화하는 것은 부차적인 공정이었다.

나는 특히 무장투쟁의 형식을 선택하기 위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바치었다.

맑스-레닌주의 이론에서도 무장투쟁의 의의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형식으로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공식규정은 없었다. 어느 시대에서 다 들어맞고 또 어떤 나라에나 다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처방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무장투쟁의 형식을 모색하는데서도 교조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무장투쟁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키고 새로운 정세에 대처할 과업을 토론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동장영을 만나기 위해 동만특위로 찾아갔다. 만주땅에서 무장력을 창건하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는 것만큼 우리는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협조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무장투쟁문제는 만주지방의 중국공산주의자들속에서도 일정에 오르고 있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의 노농홍군은 9.18사변 후 군중을 조직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며 무장으로써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자고 호소하였다.

같은 과녁을 향해 함께 총구를 겨누어야 할 조중공산주의자들앞에는 그 어떤 철퇴로써도 깨뜨릴 수 없는 튼튼한 공동전선을 맺고 서로 긴밀히 협조하고 지지해야 할 절박한 과제가 제기되었다.

특위서기로 임명된 동장영도 일본군대의 ≪토벌≫에 죽을 뻔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용정시가지에 들어와 있으면서 나를 만나려고 하였다.

밀정들이 우글거리는 용정시가지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를 명월구로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동만특위에서는 아직 간도실정에 어두운 동장영이 특위가 이동된 것도 모르고 그 행방을 수소문하느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밀정들에게 걸려들어 감방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뜻밖의 소식은 나를 실망케 하였다. 만주성당 서기 나등현과 성당군사위원회 서기 양림은 9.18사변 후 심양을 떠나 행처를 감추고 있었고 양정우는 아직 감옥에 갇혀있는 몸이어서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어떤 수단을 쓰든지 동장영을 구원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동지들과 함께 그 방도를 의논하였다.

이런 때에 고보배(보배는 별명)라는 사람이 자기가 동장영을 구원해보겠다고 자청해 나섰다. 요술가처럼 특별히 손놀림이 빠른 그는 ≪쓰리≫를 잘했다. 마주앉아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주머니에 꽂혀있는 만년필도 눈깜빡할 사이면 뽑아내군 하였다. 고보배가 이런 장난을 잘하기 때문에 그가 가는 장소에서는 매번 물건이 ≪잃어지는≫ 소동이 일어나군 하였다.

이 사람이 용정시내에 가서 쓰리를 한번하고 우정 경찰에 잡혀들어가 감방에 있는 동장영을 만났다. 고보배가 감방에 들어가서 경찰들을 어떻게나 구슬려놓았던지 특위서기는 그 후 구류장에서 인차 풀려나왔다. 그렇게 되어 그가 명월구회의에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1931년 12월 중순경에 명월구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우리가 편의상 ≪겨울명월구회의≫라고 부르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차광수, 이광, 채수항, 김일환, 양성룡, 오빈, 오중화, 오중성, 구봉운, 김철, 김중권, 이청산, 김일룡, 김정룡, 한일광, 김해산을 비롯하여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서 대중의 총애와 인망을 받고 있던 40여명의 청년투사들이 참가하였다.

그때 나는 명월구에서 영채김치라는 것을 처음으로 먹어보았다. 내가 명월구 뒤골 안에 도착한 날 저녁 이청산이네가 땅콩을 넣은 강냉이죽과 영채김치를 들여왔는데 그것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영채김치는 함경북도의 길주, 명천사람들이 잘 담근다. 지금은 이 김치가 국가연회상에도 오르고 있다.

명월구회의 때 이광이 어디서인가 꿩 다섯 마리를 잡아가지고 왔다. 회의를 하는 동안 대표들이 강낭죽에 조밥만 먹는 것이 가슴아파서 공청열성자들과 함께 꿩사냥을 한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이청산은 좋은 꾸미감이 생겼다고 하면서 국수를 눌렀다. 명월구골 안에 흰쌀은 귀했지만 농마가루는 있었다.

그런데 국수라면 오금을 못쓰는 차광수가 덜렁거리면서 이광에게 ≪이것 보라구, 왕청아즈바이, 꿩 다섯 마리를 가지고야 어느 코에 바르겠나.≫하고 집적거리었다. 그는 위탈이 심하여 끼니때면 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도 청년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늘 허기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대식가연하였다.

≪저 길림양반은 강낭죽 한 사발도 못 제끼는 주제에 큰소리만 탕탕 치는군. 이보라구 차덜렁이, 그 꿩 다섯 마리두 쌀짐우에 덧지고 오느라고 녹초가 됐네.≫

이광은 웃으면서 차광수의 말에 농으로 대답하였다.

차광수는 꿩 다섯 마리면 고기가 얼마 되지 않으므로 대표들을 두 방에 가르고 한 방에서는 꿩고기를 놓은 국수를 먹게 하고 다른 한방에서는 닭고기를 놓은 국수를 먹게 하자고 열이 나서 떠들었다.

그러나 대표들은 모두 그의 제의를 반대하였다. 우리는 그날저녁 꿩고기와 닭고기를 한데 섞어서 꾸미를 만들게 하고 한방에 다같이 모여 앉아 사이좋게 국수를 먹었다. 식성이 좋은 박훈은 세 그릇이나 곱배기를 하여 ≪국수대감≫이라는 별명을 벌었다.

회의를 실속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본회의에서 앞서 이청산의 집에서 예비회의를 하였다. 그 모임에서는 회의안건과 회의참가자, 회의순서문제 등이 토의되었다.

예비회의를 끝낸 다음 10일 동안 집행된 본회의에서는 무장투쟁을 하되 어떤 형식의 무장투쟁을 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낙착되어야 무장조직의 형식과 근거지의 형태 문제 같은 이여의 문제점들이 동시에 결정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없으니 정규군에 의한 항쟁은 바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당장 전민이 동원되어 무장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조건도 성숙되지 못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나의 마음은 자연히 유격전으로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레닌은 유격전을 대중운동이 이미 실지로 폭동에 이르렀을 때나 또는 국내전쟁에서 대전투와 대전투 사이에 얼마간 중간기가 닥쳐오고 있을 때 불가피적으로 나타나는 보조적인 투쟁형태로 규정하였다. 레닌이 유격전을 기본전투형태로 보지 않고 일시적이며 보조적인 투쟁형태로 본 데 대하여 나는 매우 아쉽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때 흥미를 가지고 탐구에 탐구를 거듭한 것은 정규전이 아니라 유격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상비적인 혁명무력에 의한 유격전을 우리가 수행해야 할 무장투쟁의 기본형식으로 선택하는 경우 그 투쟁형태가 우리 나라 실정에 적합하겠는가 적합치 않겠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여보았다. 그 과정에 ≪손자병법≫도 보고 ≪삼국지≫도 다시 보았다. 우리 나라 병서들 가운데서는 ≪동국병감≫이나 ≪병학지남≫과 같은 것을 보았다.

유격전의 시원이 기원 400년대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유격전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맑스와 엥겔스가 제일 흥미를 가지고 연구한 유격전은 1812년 러불전쟁시기의 러시아농민무장부대의 활동이었다. 러불전쟁이 낳은 빨치산영웅 제니쓰 다위도브, 정규부대와 빨치산의 연합작전을 능숙하게 지휘한 꾸뚜조브장군의 이야기는 유격전에로 끌리는 나의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해주었다.

유격전을 기본형식으로 규정하는데 있어서 임진조국전쟁은 나에게 많은 것은 시사해주었다. 나는 임진조국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의병들의 투쟁을 유격전의 역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는 하나의 모범이라고 간주하였다. 곽재우, 신돌석, 김응서, 정문부, 서산대사 그리고 최익현, 유인석 등 의병출신 명장들이 발휘한 용감성과 다양한 전투방법은 나를 완전히 매혹시키었다. 유격전이라는 말은 발톱까지 무장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대전을 눈앞에 둔 나의 심혼을 온통 틀어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국가적 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이 있어야만 유격전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야단이었다. 맑스-레닌주의 고전가들이 명시해놓은 이런 부대조건은 나로 하여금 무장투쟁형태를 선택하는데서 복잡한 탐구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후방으로 될 국가도 없고 정규군도 없는 조선의 실정에서도 유격전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은 그 누구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미지수로 남아있었다. 이것이 우리들사이에서는 심각한 논쟁거리로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는 혁명을 추동하는 극적인 사변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장개석과 장학량의 투항주의에 불만을 품은 구동북군의 애국적인 장병들속에서 병변이 연이어 일어났다. 왕덕림도 당취오도 이두도 장학량을 따라가지 않고 모두 반변하여 구동북군에서 떨어져나왔다. 마점산과 같은 장군도 병변을 일으킨 다음 무장을 들고 항일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런 인물들을 주축으로 하여 만주각지에서 반일부대들이 조직되고 구국군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사태는 무장투쟁을 지향하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환경을 지어주었다.

나는 무장투쟁형태가운데는 역사적으로 정규전과 유격전이 있었는데 정규전은 주도적인 것이었으며 유격전은 보조적인 것이었다는 것, 우리는 이 두 가지 형태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택하여야 하는데 나 개인의 견해로 볼 때에는 유격전이 우리 나라 실정에 더 적합할 것 같다는 것, 정규전이 불가능한 우리 나라의 조건에서는 기존관례에 구애됨이 없이 유격전이 주도적인 투쟁형태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변화무쌍한 유격전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본무장투쟁형식이다. 국가가 없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 정규전으로 일제와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군사기술적으로나 양적으로 열등한 무력으로 강대한 일제침략군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만큼 변화무쌍한 유격전을 해야 한다. 이외에 다른 출로란 있을 수 없다.≫

장학량의 군벌군대나 독립군이나 일본군대밖에 보지 못한 청년들한테는 유격대에 대한 표상이 전혀 없었다.

나는 정규군과 유격대의 차이를 설명하여 주고 강대한 일본침략군과 싸워 이기자면 소부대와 대부대의 영활한 배합작전, 기습전, 매복전, 정치활동, 정치공작, 생산활동 등 군사, 정치, 경제 활동을 다 벌여야 하며 그러자면 자유자재로 분산과 집중을 거듭하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유격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몇몇 동무들이 나의 말을 듣고 나서 그런 형식의 무장투쟁으로 적을 타승할 수 있겠는가. 탱크와 대포, 비행기와 같은 현대적인 정예무기로 장비된 수백만대군을 국가적 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도 없이 그것도 남의 나라 영토에서 유격대와 같은 비정규적인 무력으로 이겨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표시하였다.

그들이 그런 의문을 표시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내 자신도 사실 그런 가능성 여부를 여러 번 저울질해 보았다.

우리가 몇 자루의 총을 가지고 일본과 같은 군사강국에 감히 대항해 나선다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의병도 독립군도 장학량의 30만대군도 모두 일본군대의 위력앞에서 풍전등화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는데 우리는 무엇을 믿고 그들을 타승하려고 하는가. 우리에게 국권이 있는가. 영토가 있는가. 재부가 있는가?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국권도 영토도 자원도 다 빼앗긴 망국노의 아들들이다. 지금은 남의 나라 땅에 곁방살이를 하는 적수공권의 청년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주저없이 도전해 나섰다. 무엇을 믿고? 인민을 믿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려고 결심하였다. 인민이 국가이고 인민이 후방이고 인민이 정규군이다. 싸움이 시작되면 전민이 병사가 되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벌이게 될 유격전은 인민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장시간의 논쟁을 거쳐 유격전을 기본으로 하여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 데 대한 문제에서 완전한 의견합치를 보았다.

유격전은 자체의 역량을 보존하면서도 적에게 커다란 정치군사적 타격을 줄 수 있고 적은 역량을 가지고도 능히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우세한 적을 소멸할 수 있는 무장투쟁방법이다.

우리는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지지성원과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에 의거하면서 유격전의 방법으로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한다면 종국적으로 적을 타승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남들이 다 유격전을 정규전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보고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기본적인 투쟁형식으로 확정하고 방침으로 채택한 것은 우리의 실정에 부합되는 과학적이면서도 창조적인 결단이었다.

유격전을 기본으로 하여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벌일 데 대한 회의가 끝나자 우리는 그것을 관철하기 위한 방도를 협의하였다.

먼저 혁명무력건설문제가 상정되었다. 우리는 그때 처음에는 지방마다 소규모의 유격대를 조직하고 그를 무장시키기 위한 투쟁을 해가면서 점차 그것을 대부대의 혁명무력으로 발전시키되 첫단계에서는 대대를 건설하였다가 그것을 점진적으로 확대시켜 인민혁명군으로까지 발전시키자고 토의하였다. 뒤이어 무장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도 토론되었다.

유격대 조직에 관한 논의는 근거지에 대한 화제에 자리를 내주었다. 반일유격대가 조직되면 활동기지를 어디에다 두겠는가, 산에 두겠는가, 도시에 두겠는가, 농촌부락에 두겠는가 그리고 조선도 만주도 다 일제의 강점하에 있는 형편에서 유격전의 기지를 국내에 두겠는가, 만주에 두겠는가 하는 문제를 설정하고 의견들을 진지하게 교환하였다.

어떤 군대에나 지탱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소학생도 알 수 있는 간단한 상식이다.

우리 무장력이 국가적 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도 없이 싸우는 것만큼 전투가 끝난 다음 안전하게 휴식하면서 대열도 정비하고 무기와 탄약도 보충하고 군사훈련도 하고 부상자도 치료할 수 있는 근거지가 있어야 유격전쟁을 장기간에 걸쳐 끈기있게 해나갈 수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유격대를 조직하는 동시에 자체의 힘으로 근거지도 꾸려야 하였다.

우리는 활발한 논의 끝에 군중토대가 좋고 물질적 보장조건도 괜찮으며 지형이 유리한 간도의 산간지대들에 유격근거지를 창설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넓은 면적을 가진 만주대륙은 조선보다 적들의 통치밀도가 희박한 것만큼 간도에 먼저 기지를 정하고 때가 오면 국내에도 나가 백두산 대수림지대와 낭림산줄기를 타고 앉자고 하였다.

근거지는 적들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해방지구형태가 기본으로 되어야 하며 국내작전을 하는데서나 조국인민들의 지원을 받는데서 다같이 편리한 두만강연안의 산간지대들에 반드시 꾸려야 하였다. 두만강연안에는 물질적 보장조건이 좋고 적들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나 우리가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지형이 산간마을들이 적지 않았다.

근거지로 꾸릴 구체적인 대상지들을 선정하기 시작하자 이광, 오빈, 김일환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이 앞을 다투어 좋은 의견들을 많이 내놓았다. 그들의 제의에 따라 어랑촌, 우복동, 왕우구, 해란구, 석인구, 삼도만, 소왕청, 가야허, 요영구, 대황구, 영통라자와 같은 천험의 요새들에 근거지를 꾸리기로 하였다. 그 지역들에는 추수폭동 후 일제의 ≪토벌≫을 피하여 들어온 혁명군중들이 집결되어 있었으며 이미 적위대까지 조직되어 혁명조직들과 인민들을 지키고 있었다.

논의가 심화되고 구체화될수록 근거지를 장기간 운영하고 유지하는 문제 즉, 농업생산과 경제운영은 어떻게 하며 무기수리소와 병원은 어떻게 꾸리며 주민행정사업은 누가 맡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복잡한 실무적 문제들이 끝없이 제기되었다.

우리는 본회의에서 무장투쟁을 위한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는 문제와 조중인민의 반일공동전선을 형성할 데 대한 문제, 당조직사업과 공청사업을 강화할 데 대한 문제도 토의하였다.

이 모든 것은 유격전을 기본으로 하는 무장투쟁을 벌이는데서 반드시 해결을 요하는 중요한 문제들이었다. 회의에서는 이 모든 문제가 방침으로 정식화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거대하고도 심원한 창조적 사업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유격전사를 들추어보아도 우리 나라 혁명실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표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자기 머리로 모든 문제를 생각하고 자기 힘으로 근거지를 꾸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국가적 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이 없는 역사상 유례없이 간고한 조건에서 유격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우리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피할 길 없는 숙명적인 과제였다.

이 과제해결에서 만일 우리가 정규군의 지원을 전제로 하여 그와의 배합으로 유격전을 벌인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교조적으로 모방하였더라면 만회할 수 없는 엄중한 실패를 당하였을 것이다.

어느 해인가 라틴아메리카 항쟁운동자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유격전쟁의 경험을 들려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항일전쟁시기의 경험을 몇 가지 들려주고 나서 유격전에는 만능의 공식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적인 지혜가 가장 높이 발휘되어야 하는 거창한 창조적 투쟁이다, 우리의 경험이 당신들에게 일정한 도움으로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절대화하고 기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나라마다 실정이 다른 것만큼 당신들도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는 투쟁방법과 형식을 창조하고 활용해 보라, 거기에 바로 승리의 비결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 항쟁운동지도자는 내 말을 듣고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자기네 나라에는 산악지대가 많은데 지금까지 그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도시유격전에 치우쳐왔다, 그래서인지 성과는 적고 손실이 많았다, 앞으로는 실정에 맞게 산을 끼고 농촌유격전을 기본으로 항쟁운동을 해나가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본회의를 끝내고 활동지역들에 돌아가면 곧 유격대조직에 착수하기로 하고 토의를 끝내었다. 일제침략자들의 유혈적인 탄압과 ≪토벌≫에 혈육들을 잃고 동지들을 잃을 때마다 가슴을 치며 그렇게도 갈구하던 우리 군대, 우리 무장력의 탄생을 가까운 내일의 일로 바라보게 된 청년들은 일제히 일어나 ≪혁명가≫와 ≪인터내셔날≫노래를 부르며 그 장중하고 우렁찬 선율로 사랑하는 조국과 혁명앞에 드리는 선서를 하였다.

명월구회의에는 동장영을 비롯한 중국공산주의자들도 여러 명 참가하였다. 그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조선주민들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동만의 특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일대에서의 조중인민의 친선과 조중공산주의자들의 합작을 처음부터 매우 중시한 선견지명이 있는 혁명가들이었다.

동장영은 동만에서 오래동안 투쟁해왔고 경험도 많이 축적한 조선동지들이 중요한 발언을 하여달라고 거듭 요청하였다.

나는 회의에서 거론된 문제들을 골자로 하여 무장대오조직과 무장투쟁에 대한 우리의 구상을 두고 중국말과 조선말을 엇바꾸어가며 선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중국동지들도 그 구상에 전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유격전쟁의 형식문제, 유격대조직문제, 유격근거지문제를 비롯하여 어느 문제에서나 그들은 우리와 의견을 같이 하였다.

그때로부터 공동의 원쑤 일제를 반대하는 조중인민의 무장투쟁은 대륙을 진감시켰고 위대한 조중친선의 전통은 혈전속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31년 겨울명월구회의는 항일무장투쟁의 시초를 열어놓은 회의이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역사적인 회의였다. 카륜회의에서 제시되었던 무장투쟁노선은 이 회의를 통하여 심화발전되었다.

카륜에서 반일민족해방운동을 그 최고단계인 무장투쟁에로 이행시키려는 조선민족의 의지가 확인되었다면 명월구에서는 그 의지가 거듭 확인되고 ≪무장에는 무장에로, 반혁명적 폭력에는 혁명적 폭력으로!≫라는 구호밑에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항일전쟁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바로 이 회의에서 유격전의 방향을 규정해주는 전략과 전술적 원칙의 골자가 마련되었으며 그것을 기초로 하여 비상히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무장투쟁의 전법들이 창조되었다.

명월구회의가 끝난 다음 나는 백바위밑에서 동장영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대련감옥에 갇혀있는 김리갑과 방직공장에 적을 두고 공청사업을 하면서 그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는 전경숙에 대한 이야기를 동장영한테서 들은 것이 그때였다고 생각된다.

동장영은 주민구성 뿐 아니라 동만당조직들의 당원구성을 분석해보아도 그 대다수가 조선동지들이라고 하면서 나더러 그들을 대표하여 자기 사업을 잘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동만에서 혁명투쟁의 주력군은 조선사람들입니다. 조선족 주민들에 의거해야 유격전쟁을 승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아무리 이간질을 해도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적 편견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특위는 앞으로 조선동지들과의 사업에 특별한 주의를 돌리려고 하는데 많은 방조를 바랍니다. 나는 김일성동지를 믿겠습니다.≫

나는 그의 당부를 뜨겁게 받아들이었다.

≪두 민족간의 단결에 대해서는 우리도 특별한 관심을 돌리고 있으니 마음을 놓으십시오. 조중인민들 사이에 생긴 일시적인 불신은 유격전쟁의 총성이 다 제거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웃으면서 서로 굳게 손을 틀어잡았다.

그 후 나와 동장영은 이날을 자주 회상하였다.

주은래총리는 내가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연회연설이나 회담들에서 1930년대초 항일유격대의 창건과 일제를 반대하는 조중무장력의 공동투쟁을 통하여 조중친선이 높은 단계에로 발전하였다고 하면서 그 친선의 뿌리깊은 전통에 대하여 감동적인 말을 많이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조중친선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명월구의 회의장을 생각했고 우리와 함께 포연탄우 속을 헤쳐온 위증민, 동장영, 진한장, 왕덕태, 장울화, 양정우, 주보증, 호진민을 비롯한 중국의 친근한 공산주의자들을 목메이게 기억하군 하였다. 친선의 정도 인간감정인 것만큼 구체적인 인간관계를 통하여 맺어져야 공고한 것으로 되며 또 그렇게 맺어진 정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식을 줄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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