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22일(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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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사건≫을 겪으면서

 

통일여명 편집국 주해

 

1937년은 항일혁명의 전성기였다. 우리 주력부대의 백두산지구 진출이 일으킨 파도를 타고 역사적인 전환의 시대에 들어선 조선민족해방투쟁과 조선공산주의운동은 전례없는 폭과 심도를 가지고 앙양에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만사가 우리의 의도와 의지대로 다 잘되어가던 그때 조선혁명은 사나운 도전에 부딪히었다. 우리가 백두산지구를 떠나 무송, 몽강현 일대에서 활동하는 사이 적들이 세칭 ≪혜산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우리의 혁명역량에 대한 대대적인 폭압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적들은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나온 후 한 해 남짓한 기간 꾸려놓은 지하조직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우리의 영도와 노선에 충실한 혁명가들을 무데기로 잡아다가 처형하였다.

수차에 걸치는 검거선풍을 통하여 적들은 수백 수천 명의 애국자들을 잡아 가두었다. 옥중에서 고문치사를 당한 사람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사건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국내당공작위원회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일사천리로 내달리던 당조직건설사업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사업은 심각한 손실을 당하였다.

나는 몽강현 대갑랍자밀영에서 김평과 김재수를 통하여 ≪혜산사건≫에 대한 상보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때의 통분하던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것은 수많은 억울한 희생을 낸 ≪민생단≫ 소동이후 처음으로 체험해보는 커다란 상실감이었다.

나는 ≪혜산사건≫을 겪으면서 혁명가의 신념과 의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혜산사건≫은 매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신념과 의지의 강도를 검증하는 일대 시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사건은 진짜 혁명가와 가짜 혁명가를 가르는 하나의 엄혹한 검열과정이었다. 신념과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혁명가로서의 절개를 지켜 원쑤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였고 반대로 신념과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혁명가로서의 존엄을 버리고 배신과 굴종의 길에 떨어졌다.

사건초기 고문에 못이겨 적들에게 대내의 비밀을 고스란히 섬겨바친 배신자들 가운데는 길혜선과 백무선의 철도공사장들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지하공작원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철도공사장의 노동계급속에 혁명조직들을 박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곤장을 몇 개 맞고는 인차 적들에게 투항해버리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조직의 비밀을 지키고 혁명의 이익을 고수해야겠다는 철석같은 각오와 불굴의 투쟁정신이 부족하였다. 그 몇 사람이 비밀을 불지 않았더라면 장백일대 혁명조직들은 건재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벌써 1차 검거에서 권영벽, 이제순, 박인진, 서응진, 박록금 등 수많은 지도핵심들과 조직성원들을 잃는 참변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념과 의지는 혁명가가 갖추어야 할 기초적 자질이다. 이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혁명가라고 말할 수 없다.

참된 인간의 표징을 논할 때 우리는 그가 무슨 사상과 신념을 어떻게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응당하게 중시한다. 왜냐하면 사상과 신념이 강한 인간일수록 삶의 목표가 뚜렷하고 그 목표를 점령하기 위한 노력에 성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가들을 육성하는데서 모든 사람들이 공산주의적인 신념을 소유하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었다.

우리가 신념을 혁명가의 중요한 표징으로 보고 그 배양에 막대한 노력과 정력을 기울이는 것은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의 기발밑에 진행되는 사회주의공산주의건설과정이 인류가 수행하는 모든 혁명가운데서 가장 간고하고 장기적인 변혁운동으로 되기 때문이다. 강철같은 신념과 의지가 없이는 자연과 사회의 온갖 구속과 도전으로부터 인간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어려운 변혁운동을 끝까지 승리에로 이끌어 나갈 수 없다.

신념을 신념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강력한 동반자, 보호자가 바로 의지이다.

신념과 의지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환경과 조건에 따라 더욱 굳건해질 수도 있으며 약화될 수도 있고 변질될 수도 있는 것이 신념과 의지이다. 혁명가의 신념과 의지에 변질이 생길 때 그 혁명은 헤아릴 수 없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하여 우리는 신념교양을 공산주의적 인간육성의 필수적인 공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신념과 의지의 연마는 혁명적인 조직생활과 실천활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부단한 교양과 자체수양과정을 거쳐야 견고하고 확실한 것으로 될 수 있다. 이런 공정을 경과하지 않은 신념이나 의지는 사상누각과 같다. 혜산경찰서의 취조실에서 혁명가의 신념을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혁명적인 조직생활과 실천과정을 거쳐 신심을 충분히 단련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사상의식은 폭풍속에서 연마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항일혁명의 전성기에 입대하여 승리하는 싸움질만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혁명이 상승단계에 있을 때에는 그 흐름을 타고 이처럼 대열내에 사상적으로 견실하지 못한 우연분자들이 끼어들게 된다.

≪혜산사건≫에 대한 보고를 들은 우리는 인차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비상회의를 열고 위기에 직면한 혁명조직들을 보호하고 당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기 위한 대책을 토의하였다.

1차 검거를 통하여 장백일대의 지도핵심들을 대부분 잡아 가둔 적들은 수사의 폭을 넓혀 서간도 전역과 압록강건너 갑산일대에 검은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적들은 조선혁명의 명줄을 다 끊어놓기라도 할 것처럼 그 무슨 실적을 뽐내면서 기세를 올리고 있었지만 우리가 애써 건설해놓은 지하조직들이 다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장백과 갑산 일대에는 적들의 폭압망에서 벗어나 타고장에 피신했거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 숨어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장백현당과 장백현조국광복회조직의 지도부는 권영벽, 이제순, 서응진, 박인진 등의 체포로 해체상태에 이르렀지만 박달, 김철억, 이용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해방동맹지도부는 그대로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1차적으로 장증열과 마동희를 국내에 파견하여 피신 중에 있는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도성원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통하여 조직들의 피해정형을 요해장악하며 파괴된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다. 우리의 총적인 지향과 의도는 적들의 탄압으로부터 오는 손실을 최대한으로 막고 화를 복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성원들의 행방을 찾아 갑산군 일대의 산간부락들을 차례로 훑어나가던 마동희와 장증열은 남흥동에서 산능지도구 서기로 일하는 김태선이라는 자의 밀고로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김태선은 마동희의 동향친구였다. 그 두 사람은 갑산땅에 와서도 청소년시절을 남다른 우정속에서 보냈다. 김태선의 장백현에 건너가서 무슨 강습소에 다니다가 학비난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에게 돈을 대준 사람이 다름아닌 마동희였다. 김태선이 강습소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처하게 되자 마동희는 서당돈을 5원이나 돌려 그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후에도 그는 삯김을 메주고 번 돈과 땔나무를 팔아서 번 돈, 대서인 노릇을 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모아 친구의 뒤받침을 직심스레 해주었다.

강습소를 졸업하고 산농지도구 서기의 자리에 취직하였을 때 김태선은 장길부어머니를 찾아가 어머니, 내가 지식청년이 되어 밥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다 동희가 나를 진심으로 도와준 덕입니다. 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내 한평생 동희의 우정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동희가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도부와의 연계를 지을 과업을 받고 갑산땅에 나갔을 때 남흥동의 김태선네 집을 피신처로 정한 것은 이런 우정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 적들의 충실한 노복으로 변해버린 김태선은 마동희와 장증렬이 자기 집에 나타나 숙식을 보장해달라고 하자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마련해주고는 김일성의 부하 두 사람이 자기 집에 와있다고 신고하였다. 그 김태선이라는 자가 아주 고약한 놈이었다.

마동희와 장증열은 적들에게 체포된 때로부터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다.

마동희가 어떻게 고문을 이겨냈고 어떤 방법으로 비밀을 지켜냈는가 하는 것은 항일투사들의 회상기들과 문예작품들을 통하여 많이 소개되었다고 생각한다. 마동희가 어떤 사람인가고 물으면 인민학교 아이들까지도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혀를 끊은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사람이 자기 혀를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각오 살아서 역적으로 되는 것보다 죽어서 충신이 되기를 바라는 참인간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일단 죽음을 각오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

마동희의 용기와 희생성은 신념이 강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 용기와 희생성은 어떤 고문이나 위협으로써도 거세할 수 없는 무쇠같은 의지의 발현이었다. 마동희는 자기가 비밀을 지키면 조직은 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자기가 죽어도 혁명은 승리한다고 말하였다.

마동희를 신념이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준 것은 혁명실천이었다. 그는 백암지방에서 살 때 반일회도 조직해보았고 교편을 잡고 화전민의 자식들에게 애국주의교양도 해보았다. 인민혁명군에 입대한 후에는 구대원들과 함께 간고한 무송원정도 해보고 경위중대의 학습강사로서 대원들의 정치, 문화적 자질을 높이기 위한 계몽사업도 해보았다. 그 과정에 사람이 망국노가 되면 상가집 개만도 못한 신세가 되며 민족이 살아나갈 길은 투쟁에 있다는 것, 혁명을 해야 살길이 열리고 혁명을 하지 않으면 자자손손 마소보다도 못한 노예살이를 하게 된다는 것을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이었고 그것을 확고한 신념으로 만들었다.

마동희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신념의 소유자로 될 수 있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불공정한 것, 몰염치한 것, 비양심적인 것과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았다. 상대가 너절한 인간이라는 것을 간파하게 되면 담임교원과도 단호히 결별하였다.

소학교시절의 마동희의 담임교원 조가는 교육자의 양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시정배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는 학업성적을 실력에 따라 평가한 것이 아니라 친, 불친을 가려가며 불공평하게 평가하였다. 뇌물을 많이 먹이는 집 아이들과 부자집 자식들, 권세가의 출신들에게는 실력에 관계없이 모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담임교원은 자기가 편애하는 학생들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다른 우수생들의 점수를 깎아내리는 것과 같은 비행도 서슴지 않았다. 마동희가 졸업반에서 공부할 때에도 조가는 그 버릇을 좀처럼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뇌물을 듬뿍 찔러준 어느 권세가의 자식을 1등생으로 내세우기 위해 전과목 최우수생인 마동희의 역사시험성적을 일부러 ≪갑≫이 아니라 ≪을≫로 매겨 버리었다. 교원의 처사에 불만을 느낀 마동희는 담임교원한테 서슴없이 찾아가 자기의 시험지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조가는 시험지를 보여줄 대신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하면서 그의 뺨을 후려갈기었다. 조가의 행위는 마동희의 분노를 격발시키었다. 그는 스스로 퇴학을 선언한 다음 담임교원앞에서 성적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동희의 아버지 마호룡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린 나이에 학교를 단념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낮에 장마당에서 사온 소학생모자를 아들에게 내보이며 네가 맨머리바람으로 다니는 것이 민망스러워 방금전에 모자까지 사왔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겠다니 그게 무슨 망발이냐, 훈장이 부자집자식편을 든다든가 권문세가의 눈치를 보는 거야 다반사인데 그런다고 선생한테 시비를 걸면 어쩔 셈이란 말이냐, 어서 담임선생을 찾아가서 사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동희는 끝까지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는 심지어 아버지가 담임선생을 찾아가는 것까지 한사코 막아 나섰다.

그 후 마동희와 담임교원은 각기 적대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마동희가 시대의 반항아가 되어 애국전선에 떨쳐나섰다면 조가는 교단을 버리고 매국반역의 길에 나섰다. 그는 순사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형사로 승진되어 애국자색출에 혈안이 되어 돌아갔다. 그가 눈을 곤두세우고 감시한 첫 대상이 바로 마동희였다. 조가는 마동희의 일거일동을 짓궂게 주시하였다. 똑똑한 건덕지가 없으면 사건을 날조해서라도 마동희를 형장으로 끌고갈 잡도리였다.

조가가 마동희를 본격적으로 미행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장백땅에 들락날락하면서 인민혁명군의 물을 먹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어느 날 마동희는 장백에 건너가서 유격대대표인 김주현을 만나 입대승인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다가 압록강 다리목에서 도사리고 있는 조형사와 맞다들었다. 조형사는 눈살이 꼿꼿해서 마동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동희는 다리목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대번에 직감했으나 태연자약하게 집에 돌아가 출발준비를 하였다.

그날 마동희의 어머니는 백두산으로 떠나가는 아들에게 하직밥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마동희는 그 밥마저 먹지 못하고 총총히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가가 그를 잡아가려고 순사들과 함께 뜨락에 나타났던 것이다. 마동희는 뒤문으로 집을 탈출하여 무사히 압록강을 건넜다.

스승이 제자를 잡으려고 돌아치는 것과 같은 말세기적인 현상은 일제통치자들이 강요하는 반인륜적인 풍조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해방 후 장길부여사는 나를 만날 때마다 이 일화를 옛말처럼 들려주곤 하였다.

마동희는 구시산전투 후 전투장 근처에서 우리 부대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도망치는 조형사를 만났다. 그자는 마동희를 보자마자 무작정 총질부터 하였다. 마동희는 조국도 민족도 제자도 안중에 없는 이 후안무치한 친일반동을 즉석에서 처단해버리었다.

이 일화를 통해서 마동희의 인간상을 알 수 있고 마동희가 지니고 있던 신념이 어떤 토양위에 서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내가 마동희를 데리고 다닌 것은 1년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마동희는 만사람의 사랑을 받은 충실한 유격대원이었지만 그가 유격대에서 생활할 때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나 일화를 남긴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한 가지 일화는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가 무송원정을 끝내고 동강밀영에서 군정학습을 진행하기 위해 식량을 구해들이던 때의 일이다. 그때 마동희네 7연대 3중대도 매일같이 식량공작에 동원되었다. 어느 날 밤 중대장은 식량공작을 떠나면서 발에 동상을 당한 마동희와 그 밖의 신입대원 동상자들에게 밀영에 남아 다음날 아침식사준비를 위해 통강냉이들 망에 갈라는 과업을 주었다.

마동희는 중대장의 명령대로 망에다 통강냉이를 갈기 시작했다. 종일 힘에 부친 설상행군을 한데다가 식곤증까지 겹쳐 그는 참을 수 없는 피로를 느끼었다. 그러나 마동희는 찬눈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졸음을 이겨냈다. 그런데 다른 대원들은 자기들은 먹지 않아도 좋으니 피곤해서 누워있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마동희가 혼자서 망질을 할 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정말로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마동희가 통강냉이를 다 갈아놓자 수고한 값을 어떻게 갚으면 좋겠느냐고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걱정하였다. 우리 신입대원들 가운데는 그들처럼 동서남북을 전혀 모르는 얼떨떨한 사람들이 간혹 끼어있었다. 마동희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두 신대원을 호되게 꾸짖었다.

내가 밀영에 도착하자 마동희는 이 사연부터 말하였다.

동지애는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저런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혁명을 하겠는가고 하면서 한탄하였다. 그가 몹시 낙심해하기에 나는 지금은 조직적 세련이 부족해서 그렇지만 교양을 잘하면 그들도 훌륭한 대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신대원들은 물론 그 후 일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진짜배기 강병이 되었다.

마동희는 입대 후 짧은 기간에 훌륭한 전투원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보천보시가에 대한 정찰도 아주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임무수행에서 발휘한 헌신성과 적극성을 높이 평가하여 나는 보천보전투승리를 경축하는 군민연환대회장에서 인민대표단이 우리에게 축기를 증정할 때 마동희를 조선인민혁명군 병사대표로 내보내어 그 축기를 받는 영예를 지니게 하였다.

그 후 생활이 증명해준 것처럼 마동희는 확실히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병사들을 당당히 대표할 수 있는 뛰어난 혁명전사였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하여 공산주의자의 표본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마동희는 누구보다도 사령부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비밀을 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사할 수 있었다.

마동희가 희생된 다음날 마호룡은 관을 짜가지고 혜산에 와서 아들의 시신을 싣고 경찰서앞으로 지나가다가 최경부와 맞다들었다.

최경부는 마호룡을 보자 이렇게 말을 걸었다.

≪영감, 죽은 아들을 싣고 가니 감상이 어떤가?≫

민족에게 백정질을 하는 최경부를 평소부터 밉살스럽게 보아오던 마호룡은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분연히 대답했다.

≪내 아들 동희는 조선을 독립하기 위해서 싸우다가 죽었다. 딸과 며느리도 그렇게 죽었다. 왜놈들의 물건을 훔치다가 죽은 것이 아니다. 나는 아버지로서 자랑으로 여긴다.≫

마동희의 아버지는 이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후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하는 마지막순간까지 혁명투사의 아버지, 애국자로서의 지조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교형리들과 맞서 싸웠다.

마동희와는 대조적으로 장증열은 곤장맛을 몇 대 보기 바쁘게 인차 자기가 아는 밀영들과 지하조직들을 다 불었다. 마동희는 혀를 끊으면서도 혁명가의 절개를 지켰는데 장증열은 어찌하여 혁명앞에 다진 맹세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저주스러운 배신의 길을 택하였는가.

학력이라든가 이론수준이라든가 사업능력으로 볼 때 그는 마동희한테 조금도 짝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유격대연한을 따지면 오히려 마동희의 선배라고 할 수 있었다. 똑똑하고 붙임성이 좋은 장증열은 입대하자마자 일반대원들로부터 ≪간부감≫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우리 사령부도 역시 그를 ≪간부감≫이라고 점찍어두었다. 그는 입대 후 보통사람들이 대체로 거쳐야 하는 계단식공정을 밟지 않고 일약 사단청년과장자리에까지 도약해 오른 인물이었다. 사단청년과장이면 그가 권영벽이나 김평에 못지 않은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장증열을 어느 정도로 신임했는가 하는 것은 장백현당이 조직되었을 때 그를 현당위원으로 선거한 사실만 놓고 보아도 충분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는 장증열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밥도 굶어보고 손발도 얼궈보고 밤도 밝혀보았다. 장증열은 우리가 당하는 곤란을 두고 비관에 잠기거나 신심을 잃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저 우리와 함께 만난을 묵묵히 참아냈다. 그러나 그는 철창안에 끌려가자마자 쉽게 흰기를 들고 말았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곤란을 다 참아내면서도 형장에서의 고문만은 견디어 내지 못하고 휴지장을 집어버리듯이 혁명가로서의 체면과 지조를 얼른 집어던지었다.

장증열의 변절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으면서 나는 철창밖의 인생관이 다르고 철창안의 인생관이 다를 수 있다는 진실을 통감하였다. 철창밖에서의 장증열의 세계관이 공산주의적인 것이 있다면 철창안에서의 그의 세계관은 유다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기 개인의 육체와 혁명의 이익을 바꾸어먹은 장사꾼으로 전락한 셈이었다.

장증열은 많은 비밀을 적들에게 섬겨바치었다. 그는 자기가 관여한 조직들을 다 공개하였고 장백현의 상강구와 중강구관하에서 자기와 연계를 맺고 있던 혁명조직의 지도핵심성원들을 다 불었으며 사령부의 위치와 밀영들의 위치까지도 아는 것은 다 대주었다. 그리고 경찰들을 데리고 19도구아지트에까지 와서 지태환과 조개구를 체포하게 하였다.

조개구도 장증열처럼 변절하였다. 그는 우리 재봉대가 자리잡고 있는 간파하자밀영에 경찰들을 안내하여 재봉대원전원이 희생되게 하였다. 간파하자에서 전사한 여대원들 가운데는 마동희의 안해 김용금도 있었다.

어찌하여 장증열은 이처럼 너절하고 추악한 인간으로 변질되었는가, 평상시 그가 지니고 있던 공산주의적 신념은 허울뿐이었단 말인가.

그도 물론 신념에 대한 말은 많이 하였다. 하지만 그가 소유한 신념은 공고한 기초를 가지지 못한 서푼짜리 것이었다. 그는 형장의 어마어마한 광경과 경관들의 독기어린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대일본제국의 위용에 겁을 집어먹은 것 같고 항일혁명으로 그 제국을 타승한다는 것은 실현불가능의 부질없는 공상이라고 회의주의에 침식된 것 같다.

공고한 기초위에 선 신념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자기가 숭상하는 이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며 그 이념을 위해서라면 굶어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 맞아죽을 각오까지 되어있는 그런 신념이다. 달리 말하면 자기 위업의 정당성과 자기 계급, 자기 인민의 힘에 대한 확신이며 자체의 주체적인 힘으로 만난을 극복하면서 혁명을 끝까지 완수해나가려는 각오를 의미한다. 그런데 장증열에게는 맞아죽을 각오가 없었다. 자기가 맞아죽더라도 혁명의 이익을 고수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하겠는데 그는 반대로 혁명이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기만 무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다.

장증열은 혁명을 팔아먹은 값으로 육체적 생명은 건질 수 있었으나 그대신 그보다 더 값비싼 정치적 생명은 잃어버리었다.

사람들이 마동희를 기억하면서도 장증열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동희와 장증열이 걸어온 서로 대조되는 두 인간의 행로를 돌이켜볼 때마다 나는 김혁과 장소봉을 의례히 회고해보곤 한다. 그들도 같은 시각에 같은 지점에서 같은 궤도를 타고 혁명을 시작하였지만 그 종착점은 서로 남극과 북극과 같은 차이를 자기고 있었다. 이 격차의 출발점 역시 두 인간이 지니고 있던 신념과 의지의 질적 차이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김혁이 조직생활과 혁명적 실천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장소봉은 이론에 밝고 두뇌가 명석한 대신 실천이 굼뜨고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혁은 어떤 고생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소봉은 육체를 혹사하는 그런 성격의 일에 몸을 깊이 잠그지 않았다. 한 사람은 물불을 모르고 열정의 사나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소낙비라 쏟아지는 날에도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진창속에서 돌을 골라 디디면서 신등에 흙을 묻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런 냉철하고 타산이 밝은 사나이였다.

우리가 카륜이나 고유수 같은 고장으로 왔다 갔다 할 때만 해도 나의 친구들은 김혁을 재사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가 혁명을 위해 큰 몫을 담당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시나 쓰고 작곡이나 하는 선비가 혁명을 하면 얼마나 잘하랴 하는 선입견이 작용했던 것 같다.

기타를 메고 거리를 몇 번만 오락가락하여도 풍각쟁이 대접을 받던 세월이었으니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김혁을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장소봉에 대해서는 모두가 상당히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가 후에 변절은 하였지만 명물이었다. 그는 가명으로 글을 많이 써서 발표하였다. 잡지 ≪볼쉐이크≫에 글을 제일 많이 낸 사람도 바로 장소봉이었다. 그 사람은 차광수와 동열에 놓을 수 있는 한다하는 이론가이고 선동가였다. 그가 이론수준이 얼마나 높았던지 화요파의 거두인 김찬도 그와 논쟁을 하면 늘 수세에 몰려 허둥지둥하였다. 우리는 카륜회의 때에도 장소봉네 집에 가있었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그가 몇 해 후 유치장에서 전향문을 쓰고 일제의 충견이 되어 우리를 반대하는 ≪귀순≫공작에 나서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이처럼 육체적 생명 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생명의 나이는 신념의 유무와 대소에 의해 결정된다. 신념이 강하고 의지가 강할수록 그 인간은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는데서 장수자가 된다. 신념을 일찍이 줴버린 사람들의 정치적 생명은 비명에 요절하고 만다.

우리 주력부대의 참모장으로 활동하다가 적들에게 투항한 임수산은 이종락이나 장소봉보다 더 한심한 반역행위를 하였다. 그는 ≪토벌대≫대장이 되어 지난날 한 전호에서 싸우던 전우들을 해치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다니었다. 적들은 그를 주구로 써먹다가 쓸모가 없게 되자 내던지었다. 그 후부터 임수산은 말구지를 끌고 다니며 술장사를 하였다. 사단 참모장으로부터 술장사에로의 전락, 그것은 신념을 잃어버린 그에게 차례진 서글픈 운명의 귀결이었다.

그는 해방 직후 달구지에 술통을 싣고 안도에서 삼지연을 거쳐 혜산으로 오다가 길가에서 유경수가 인솔하는 소조를 만났다. 그날 유경수네 일행은 백두산주변에서 출몰하는 일본군패잔병들을 소탕할 데 대한 나의 명령을 받고 현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임수산은 지난날 자기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을 보자 어색해하면서 당신들도 이제는 산에서 내려왔구만, 김일성장군은 아직도 산에 있는가, 왜 장군과 같이 오지 않고 당신들만 내려왔는가고 하였다. 그때 유경수, 이두익을 비롯하여 패잔병숙청사업에 동원된 항일투사들은 모두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임수산은 그들이 모두 자기처럼 일본사람들에게 귀순한 줄로만 알았다. 얼마나 정세에 암둔했던지 일본이 망한 것도 모르더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신념을 잃고 지조를 지키지 않으면 이 지경이 되고 만다.

손에 무장을 들고 우리와 함께 험난한 항일혁명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물론 신념도 강하고 의지도 강한 백절불굴의 투사들이었다. 그들은 최악의 역경에 처한 순간에도 혁명가의 지조를 버리지 않았고 조국해방에 대한 신념을 더럽히지 않았다. 우리의 전우들과 전사들은 낯설은 이역에서 황야의 티끌로 사라지면서도 ≪미래를 사랑하라!≫고 부탁하였으며 ≪공산주의는 청춘!≫이라고 부르짖었다. 신념을 가진 강자들만이 최후를 이렇게 장식할 수 있다. 이런 신념이 없었다면 우리의 항일유격대원들이 만주의 그 모진 추위와 주림을 견디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가의 신념과 의지를 두고 논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 전열에 유경수와 같은 사람들을 세우곤 한다. 자기 수령이나 지도자의 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그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한 생을 곧바르게 걸어가는데서 유경수는 만 사람이 따라 배울만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나와 유경수와의 첫 상봉은 1933년 동녕현성전투 직후에 이루어졌다. 싸움을 끝내고 소왕청으로 돌아와 대원들을 휴식시키고 있을 때 최현이 인솔한 연길유격대의 대원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 대원들 중에 최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어린 대원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유경수였다.

유경수는 통신원의 불찰로 연길유격대가 동녕현성전투에 참가하지 못한데 대하여 몹시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지각생≫의 신세가 된 분풀이를 최현에게 막 해댔다.

≪중대장동지, 소왕청까지 와서 밥만 얻어먹다가 어떻게 거저 돌아가겠습니까. 아무데라도 좋으니 김대장을 모시고 한번 답새기고 갑시다.

그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나는 유경수가 보통배짱군이 아니라는 것을 인차 간파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그가 혁명대오에 들어선 것은 16살 때였다.

≪김대장, 저 삼손이가 나이는 어려도 싸움군입니다. 애가 녹록치 않수다≫

삼손이란 유경수의 본명이었다.

이것이 유경수에 대한 최현의 총적 평가였다. 나는 그 한 마디의 평가를 듣고 최현이 유경수를 몹시 애지중지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살밖에 안되는 이 어린 대원의 짤막한 인생속에는 망국으로 해와 달마저 빛을 잃었던 내 나라의 구슬픈 얼굴이 비껴있었다. 유경수의 경력가운데서 특기할만한 점은 어릴 때부터 머슴살이를 한 사실과 10대에 춘황폭동에 참가하였다가 군벌당국에 체포되어 용정감옥에서 곤장맛을 본 사실이었다. 간도지방에 혁명가들이 많았지만 어린 나이에 감옥에서 물고문이나 고춧가루고문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장중열이나 이종락과 같은 인간들과는 달리 유경수는 그 시련을 용감하게 이겨냈다. 무심결에 유경수의 손을 잡아보았는데 손바닥에 썩살이 어찌나 험하게 배겼던지 쇠판대기 같았다.

나는 유경수가 어렸을 때 이삭공부를 했다는 말을 듣고 동정심을 금할 수 없었다. 이삭공부란 남들이 공부할 때 그 곁에서 눈과 귀로 글자를 익히고 이치를 새기면서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섭취하는 학습방법을 말한다. 그는 나무짐을 지고 장에 갔다올 때마다 사립학교 창문밑에 쭈그리고 앉아 나무가지를 들고 교원이 칠판에 쓰는 글을 열심히 따라 썼다. 그 과정에 조선말 자모와 구구표를 완전히 익히었다.

유경수의 이삭공부를 미구에 온 학교가 다 알고 동정하게 되었다. 유경수의 향학열에 감동된 곽찬영(곽지산)교원은 그를 학교에 입학시키었다. 그리고 학비는 자기가 부담하였다. 이삭글을 배우는 나무군총각에도 쉽지 않은 소년이었지만 낯도 모르는 생명부지의 아이에게 입학을 허락하고 그에게 학비까지 대준 훈장 역시 쉽지 않은 교육자였다.

하지만 유경수는 가정사정으로 인해서 학교를 졸업할 수 없었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지주집에 머슴군으로 끌려갔다. 그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자 곽찬영도 큰 충격을 받고 교사직에서 물러나 노동자, 농민들속에서 혁명적인 계몽사업을 시작하였다. 후에는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유경수는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계속 곽찬영의 지도를 받았다. 자기 제자에 대한 곽선생의 사랑과 관심은 실로 각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선생이 그만 억울하게도 ≪민생단≫올가미에 걸려들어 심판대위에 서게 되었다. 좌경배타주의자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를 중대장자리에서 철직시키었다. 그의 일거일동은 감시병들의 감시속에 놓여 있었다.

곽찬영이 군중심판장에 끌려나온 날 유경수는 목숨을 걸고 그를 보증해 나섰다. 그가 심판장에서 자기의 은사를 보증해 나선 것은 사실 만인의 찬양을 받을 만한 큰 용단이었다. 그 당시는 유경수 자신도 ≪민생단≫혐의자의 명부에 등록되어 있었다. ≪민생단≫혐의자가 ≪민생단≫의 딱지가 붙은 ≪피고≫를 두둔하거나 동정한다는 것은 총구앞에 달려가 자기를 죽여달라고 청원하는 것과 같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경수는 가슴을 내대고 스승의 무죄를 증명하였다. 그 ≪죄≫로 하여 그는 ≪민생단≫감옥으로 끌려갔다.

유경수의 용감한 행위는 제자가 스승을 위해 지킬 수 있는 최고의 의리였다. 그는 한평생 스승의 은정을 잊지 않고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그처럼 의리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신념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도덕과 의리도 잘 지키는 법이다. 혁명가는 정의를 옹호하고 불의를 증오하며 진리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 혁명하는 사람들이 동지들과 인민들에 대한 의리를 잘 지키자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가 지니고 있던 생활의 신조였다.

그는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이 ≪민생단≫이라고 규정한 사람들 중 절대다수는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며 혁명에 충실한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아무렇게나 처형하는 것은 범죄이라고 단호히 까밝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은 비록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벌어져 혁명대오내에서 혼란이 빚어지고 있지만 언제인가는 꼭 수습될 날이 있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민생단≫의 누명을 쓰고있는 견실한 혁명가들과 애국적 인민들을 견결히 옹호하였다.

생사결단의 각오를 가지고 심판장에서 자기의 은사를 구원해낼 유경수의 용감한 소행에 대한 풍문은 동만의 혁명가들과 인민들을 격동시키었다. 나도 다홍왜에서 그 소식을 듣고 소왕청에서 있었던 그와의 상봉을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돌이켜보았다.

나는 마촌에서 연길유격대의 전우들을 바래줄 때 최현에게 이런 농을 하였다.

≪저 삼손이는 어느 모로 보든지 욕심나는 싸움꾼이입니다. 우리의 상봉기념으로 저 애를 우리한테 넘겨주지 않겠습니까?≫

최현은 그 말에 농담절반, 진담절반으로 응수하였다.

≪최현은 안 되우다. 저 녀석이 싸움은 본때 있게 잘하지만 아직 속은 좀 궁글었수다. 3년만 더 키워서 김대장에게 바칠 테니 그때까지 참아주시오.≫

유경수가 우리의 가까이에 와서 중대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소할바령회의 이후부터였다. 소왕청에서의 첫 상봉이 있은 때로부터 근 10년 세월을 그는 최현부대에서 기관총수로 복무하였다. 그러다나니 그를 자주 만나보지도 못하였고 살뜰히 돌보아주지도 못하였다. 내가 유경수를 위해 해준 것이 있다면 ≪어린 혁명가≫라는 칭호를 준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경수는 그 칭호를 자기자신에 대한 표창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리를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혁명을 위해 한 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나는 지금도 우리가 무산지구전투를 성과적으로 결속하고 천보산일대에로 진출하던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

우리의 행적을 탐지한 적들은 그때 천보산과 그 주변지구에 ≪토벌≫무력을 집결하여 인민혁명군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전을 벌이려고 획책하였다. 최현부대는 우리에게로 쏠리는 적들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약화시키기 위해 천보산시가를 들이치는 싸움을 하였다. 그 시가공격전이 얼마나 가련했는가 하는 것은 적들이 여자들까지 내몰아 수류탄을 던지게 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성시의 적들은 대부분 섬멸하였다.

하지만 최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토벌≫역량을 소멸하기 위해 유인전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50명 남짓한 부대의 일부 성원들로 전투조를 조직한 다음 천보산시가에서 20리쯤 떨어진 수림속에 매복전을 퍼놓았다. 바로 그 전투조에 유경수가 망라되어 있었다.

유경수소조는 적을 유인하기 위해 ≪토벌대≫의 숙영지들을 연속적으로 기습하였다. 어떤 날 밤에는 같은 숙영지를 두 번씩이나 습격하였고 또 어떤 날 밤에는 ≪토벌대≫의 작전지도까지 탈취해옴으로써 적들로 하여금 악에 받쳐 인민혁명군을 추격해 오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유경수는 그때 옹근 사흘동안 물도 변변히 마시지 못하고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싸움을 도맡아하였다. 이 작전에서 유경수가 세운 공로를 두고 최현은 해방 후에도 이따금씩 생동한 회상을 하였다.

최현부대는 산고개를 일곱 개나 넘으면서 숨돌릴 사이도 없이 적들을 연방 족치었다. 적들은 흔들레판에서도 수백 명의 사상자들 냈다.

최현부대의 덕으로 우리 주력부대는 적들의 저항을 많이 받지 않고 천보산일대에 무사히 진출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당초에 계획했던 최현부대와의 상봉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신 최춘국부대를 만났다. 우리가 최춘국이네 부대를 만나고 있을 때 최현부대는 오히려 천보산으로부터 수십 리 떨어진 지점에서 다음차례의 유인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현의 말에 의하면 그때 4사의 전체 유격대원들은 우리를 만나지 못하는데 대하여 몹시 섭섭했다고 한다.

우리에 대한 유경수의 의리는 참으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의리가 얼마나 고결하고 진실한 것인가를 나는 소부대활동시기에 더욱 절절하게 체험하였다.

혁명가로서의 유경수의 인간미는 자기 사령관의 명령,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행정신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사령관의 명령을 집행하는데서 맹세나 약속을 번지르르하게 하지 않았지만 일단 한 맹세나 약속은 어김없이 이행하는 좋은 품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믿을 만한 사령관동지의 품밖에 없다. 사령과 동지를 잘 모시고 받들어야 우리는 조국의 해방도 이룩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운명도 개척할 수 있다. 사령관동지의 의도대로 하기만 하면 우리는 이긴다. 이것이 바로 유경수가 일상적으로 간직하고 있던 신념이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나의 명령이나 지시를 훌륭하게 집행할 수 있었다.

1941년 이른봄에 나는 만주각지와 국내에서 활동하는 소부대들의 사업을 지도하기 위해 유경수네 중대를 데리고 쏘련 원동의 훈련기지를 떠나 백두산일대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유경수는 중대성원들과 함께 나의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우리는 한총구에 사령부자리를 정한 다음 각지에 소조들을 파견하였다. 유경수도 나의 명령을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연락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사령부를 떠날 때마다 자기네 소조에 차례진 식량을 경위대원들에게 맡기며 장군님께 밥을 지어드리라고 당부하군 하였다. 그리고 우리한테 화가 미치지 않게 하려고 유인전을 자주 조직해서 적들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군 하였다.

사령부가 한총구에 자리잡고 있을 때 나는 유경수에게 화전현 노금창에 있는 연락지점에 가서 위증민을 만나고 오라는 과업을 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몇십 겹을 헤아리는 적의 보초소들과 봉쇄구역들을 돌파해야 하는 어려운 과업이었다. 그래서 사령부에서는 그에게 10명에 가까운 인원을 떼주었다. 그러나 유경수는 사령부호위를 염려하면서 두 명만 데리고 노금창으로 떠나갔다. 그는 3명분을 식량으로 내가 배당한 한 포대의 쌀마저 전문섭에게 슬그머니 맡기고 대여섯 되박밖에 안 되는 쌀만 휴대하였다.

유경수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총구는 온통 ≪토벌대≫의 불무지로 가득차 있었다. 사령부가 천막을 치고 있던 자리에서도 여러 개의 불무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라고 명령한 마지막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나어린 두 대원은 나의 생사를 걱정하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사실 그날 밤 한총구에 펼쳐진 불바다를 보고서는 사령부가 살아서 건재해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지만 유경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제 남은 시간은 30분밖에 없다. 이 30분 동안에 우리가 저 불무지가 있는 사령부자리까지 가지 않으면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어기게 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 위험속에서도 우리 세 사람을 끝까지 기다리실 것이다 라고 하면서 우는 대원들을 달래였다. 그리고는 그들을 산봉우리에 남겨두고 사령부의 천막자리를 향해 주저 없이 기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그 근처에서 우리가 떨궈 두고 온 대원을 만났다. 유경수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사령부자리부터 어김없이 찾을 것이라는 나의 확신과 정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자기 사령관이 소조를 파견한 출발지에서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부하들을 기다릴 것이라는 유경수의 판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였다.

내가 정해준 날자와 시간과 장소를 털끝만큼한 편차도 없이 엄수하려는 유경수의 드팀없는 자세와 철저한 집행정신은 자기 사령관은 어떤 정황에서나 대원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사령관의 신임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나 고통도 각오해야 한다는 진정한 의리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런 신념과 의리심을 가지고 유경수는 해방 후 철도경비대를 조직하고 탱크부대를 건설하였으며 전쟁의 매 단계에서 최고사령부의 작전적 방침을 실현하는 데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인민무력부의 지도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군인들을 그 어떤 정세변화나 역경속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념과 의지를 굳건히 지키는 강의한 투사, 충신들로 키우라고 말하군 한다.

역사적 경험은 혁명이 승승장구하고 정세가 유리할 때에는 대오안에서 동요분자, 변절자들이 나오지 않지만 내외정세가 복잡하게 변하고 혁명의 길에 어려운 난관이 조성될 때에는 대열안에서 사상적 혼란과 동요가 생기고 투항분자, 낙오분자들이 나와 막대한 해독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만주강점이나 중국본토침공과 같은 큰 국제적 사변들은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이나 공산주의운동 대열안에서 커다란 정치적 자극과 사상적 혼란을 일으키는 하나의 계기로 되었다.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은 9.18사변이후 일제를 반대하는 전면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역사적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보고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었다면 일부 민족운동자들과 혁명적 각오가 굳세지 못한 공산주의운동자들은 만주까지 강점한 일제를 더는 당해낼 수 없다고 단정하고 투쟁을 포기하는 길로 나갔다.

일제의 중국본토에 대한 침공을 놓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일제가 중국을 대거 침공하는 것은 불피코 역량의 분산과 소모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는 것만큼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발전에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할 때에 우리는 중일전쟁이 가져오게 될 새로운 정치군사적 난관을 모르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중일전쟁으로 하여 급변하는 어려운 정세에서 유리한 측면을 중시하고 불리한 국면을 유리하게 전변시키기 위하여 주동적으로 노력하였다. 혁명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로 조성된 난국을 과감히 뚫고 나가는 이러한 백절불굴의 투지와 신념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도 항일운동대열내에 끼여든 우연분자들과 일시적 동반자들속에서는 수습하기 어려운 사상적 혼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일제가 중국본토로 쳐들어가 무한, 삼진까지 삼키는 것을 보고서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였으며 이런 대세를 돌려세울 힘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사상적 변질과정은 결국 패배주의를 낳고 그것을 온상으로 하여 적지 않은 혁명의 탈락분자들과 시정배들, 배신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중국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태평양전쟁준비에 달라붙는 한편 만주에서의 항일운동을 종국적으로 말살하기 위한 대대적인 ≪토벌≫공세를 연속 벌였다. 결과 남북만 도처에서 그렇게도 번성하던 반일부대들이 거의 다 소멸되고 열하원정의 소용돌이속에서 남만의 양정우부대마저 큰 피해를 당하였다.

열하원정의 실패로 하여 동북항일연군의 적지 않은 부대를 이 시련을 겪고 있던 그 무렵에는 중국사람들속에서도 투항분자, 도주분자들이 생기었다.

1938년 여름 양정우휘하의 1군부대는 열하에로의 또 한 차례의 원정을 개시하자마자 적의 대포위에 들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그 당시는 적들이 군사적 공세와 함께 항일유격대원들에 대한 귀순공작을 집요하게 벌이고 있던 때었다. 항복한 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귀순자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이른바 만주국 황제의 ≪은사의 대조≫라는 것이 공포되어 혁명에서 타락한 사람들과 비겁분자들, 의지박약자들을 유혹하였다. 항일무장부대들에 대한 ≪토벌≫작전이 악랄하고 끈질지게 벌어지는 가운데 유격대와 인민을 갈라놓기 위한 ≪비민분리≫책동도 심화되었다. 혁명군은 인민들의 지원을 받을 래야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정들고 때묻은 본래의 유격근거지를 떠나 열하방면에로의 승산없는 원정길에 오른 항일연군부대들은 아무런 파악도 없는 생소한 땅에서 인민들의 지원도 별로 받지 못하고 적의 거듭되는 ≪토벌≫에 시달릴대로 시달리었다.

이런 때 양정우의 오른팔이라고 불리우며 남만의 항일맹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1군 1사 사장 정빈이 요녕성 본계에서 투항을 반대하는 정치일군을 총으로 쏘아 죽인 다음 부대를 데리고 적들에게 귀순하는 배신행위를 하였다. 이것으로 하여 1군 앞에는 심각한 난국이 조성되었다. 동북항일연군 제1군 지휘일군들의 활동경로와 소속부대의 번호, 밀영설치의 비밀들을 잘 알고 있는 정빈의 변절은 1군에 있어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정빈의 귀순으로 하여 1군의 서정계획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정빈은 그 후 통화성경무청장 기시다니의 앞잡이가 되어 양정우포살작전의 돌격대로 나섰다. 그가 안내하는 ≪토벌대≫와의 격전에서 남만의 명망높은 항일용장 양정우는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기시다니가 열하성부성장으로 조동된 다음 정빈은 거기에 따라가서 ≪열하일심대≫라는 경찰≪토벌대≫를 무어가지고 대장노릇을 하였다.

정빈이나 전광이와 같은 자들의 실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이지만 직급이 높은 사람들의 변절일수록 그 양상은 보다 악랄했고 후과도 몇 곱절 더 컸다.

정빈이 적들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적들의 진영으로 넘어갈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위불만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투항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내 판단에 의하면 정빈의 배신행위는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데서 온 것이다. 그는 7.7사변 후 매일과 같이 전과를 확대해가고 있는 일본군의 위세앞에서 겁을 집어먹었고 따라서 혁명의 전도를 암담한 것으로 보았다. 언제 성사될 지 모를 혁명을 하느라고 고생할 바에는 차라리 역적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내 한 몸이 안락하게 살아가는 길을 택하자, 이것이 분명 정빈이 적들의 편으로 넘어가게 된 사상적 동기라고 본다.

정빈은 이름난 싸움꾼이었지만 보매 사상수양을 잘하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염두에 둔 사상적 수양이란 주로 신념교양, 낙관주의교양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상단련을 잘하지 않으면 역경에 부닥쳤을 대 곤란앞에서 인차 굴복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도 사상제일론을 주장한다.

상전이었던 기시다니는 패전 후 가족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그러나 정빈은 그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많은 일본인 포로들을 제 손으로 사살한 다음 정체를 속이고 팔로군에 들어가 지휘관의 자리에까지 기어올라갔다.

하지만 그런 행운이 오래갈 리는 만무하였다. 정빈은 보호색을 쓰고 애국자로 가장하였지만 배신자로서의 자기 정체를 오래 숨길 수가 없었다. 해방 후 어느 해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가 우산을 받쳐들고 비 내리는 심양의 거리를 걸어갈 때 그 우산밑에 기어들어 비를 긋는 사람이 있었다. 그자도 역시 정빈이처럼 보호색을 쓰고 살던 반역자였다. 그는 정빈이 어떤 자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지 그들은 당국에 찾아가 서로 상대방을 변절자라고 고발하였다. 그 과정에 정빈이 투항분자였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신념을 버리고 적의 품에 기어 들어 혁명에 막대한 손실을 끼친 이 너절한 인간에게 인민재판은 응당한 판결을 내리었다.

정빈의 운명은 신념을 버리고 동지들을 배반하는 사람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생동한 실례로 된다.

양정우부대가 녹아난 다음부터 ≪토벌≫의 포화는 우리에게로 집중되었다. 적들은 김일성부대만 소멸하던 만주와 조선의 항일운동은 끝장이라고 하면서 사면팔방으로부터 우리를 포위하고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우리앞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난관이 가로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타도제국주의동맹시절부터 혁명투쟁을 해오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비겁분자, 투항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무렵에 동북항일연군앞에서 지휘관으로 있던 방진성, 박득범도 적들에게 투항하였다.

쏘련과 일본사이에 중립조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도 우리 대오에서는 도주자가 생기었다. 우리의 적지 않은 대원들속에는 쏘련에 대한 의존심 즉 지금말로 하면 사대주의가 있었다. 일부 지휘관들이 민족자주의식을 배양하는 교양에는 힘을 덜 돌리고 쏘련옹호, 쏘련중시, 쏘련제일의 사상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다나니 쏘련만 믿고 의존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폐단이 생겨났다. 말하자면 쏘련의 지지나 도움이 없이는 조선독립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처럼 내가 민족자주의식이야말로 혁명가의 신념을 좌우하는 하나의 결정적 요인으로 된다는 진리를 절감한 때는 일찍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을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자주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자력독립의 관점을 확고히 가지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도주자나 변절자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자신이나 자기 나라 인민의 힘은 하찮은 것으로 보면서 큰 나라의 덕으로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보려고 시도하던 사람들가운데서는 낙오자들과 투항분자들이 생겨났다.

사람이 자기 인민의 힘을 믿지 않으면 어려운 환경에 부닥칠 때 예외없이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며 패배주의에 빠지면 곧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을 잃고 투쟁을 포기하거나 중도반단하게 된다.

이런 유의 인간들은 큰 나라들이 혁명에서 곡절을 겪을 때면 자기 나라 혁명도 다 망한 것처럼 생각한다. 혁명이 국제적 성격을 띠는 것만큼 국제반제역량과의 단결을 지향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다른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실패에 동정을 표시하거나 그들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여기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또 큰 나라 혁명의 실패가 자기 나라 혁명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큰 나라 혁명이 일시적인 좌절을 당한다고 하여 작은 나라 혁명도 다 망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기발을 내던진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혁명은 국제적 성격을 띠기 전에 우선 민족적 성격을 띤다. 혁명이 민족국가단위로 진행되는 조건에서 매개 나라 공산주의자들이 자체의 힘으로 혁명을 완수하려는 확고한 결심과 신념을 가지고 자기 나라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완강하게 투쟁을 벌여나간다면 어떤 어려운 고지든지 능히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시종일관한 주장이며 지론이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혁명을 식은죽먹기로 생각하고 무장대오에 들어왔던 사람들, 신념이 뚜렷하지 못하고 의지가 박약한 자들, 종파근성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남을 깔보거나 따돌리는 사람들, 패배주의자들은 예외없이 내외정세가 복잡하고 혁명앞에 시련이 닥쳐올 때 배신의 길로 굴러떨어진다.

임수산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이 우리를 배신한 후부터 나는 전우들에게 이런 말을 종종 하군 하였다.

… 정세는 엄혹하고 투쟁은 점점 더 간고해진다. 우리 혁명위업이 열매를 맺어 나라가 반드시 독립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일치하게 믿고 있은 바이지만 그런 날이 언제쯤 오겠는가 하는 것은 누구도 모른다. 그런 즉 우리를 끝까지 따라갈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마음놓고 집으로 돌아가라. 도주는 비열한 것이지만 보고하고 가는 것은 일없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10년 이상이나 혁명을 같이하다가 인사도 하지 않고 헤어지겠는가. 집으로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바래워 주겠다. 그리고 투쟁을 중도반단한 데 대하여 문제시하지 않겠다. 힘이 모자라고 신념이 약해서 대오를 떠나는 거야 어떻게 하겠는가. 갈 사람은 가라.

이런 식으로 내놓고 말하면서 혁명승리에 대한 굳은 신심을 가지도록 대원들을 교양하였다.

내가 이렇게 선언했지만 대원들가운데는 전우들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조선의 참다운 공산주의자들은 아무리 정세가 복잡하고 난관이 심하여도 신심을 잃지 않고 완강하게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종당에는 일제를 때려부수고 조국해방의 대업을 훌륭히 성취하였다.

우리는 ≪혜산사건≫을 통하여 심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제때에 수습책을 세우고 그 손실을 보상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이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불요불굴의 투쟁에 의하여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는 사업은 중단됨이 없이 계속 줄기차게 진행되었다.

항일전쟁이 낳은 영웅들의 뒤를 이어 지금은 어려운 초소들에서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강자들이 끝없이 배출되고 있다. 김정일시대의 거창한 혁명투쟁과정은 곧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을 낳는 온상이며 터전이다. 김정일동무가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내세우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 이인모의 실례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가. 온 나라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김정일동무가 말한 대로 이인모를 따라 배우는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는 신념과 의지가 황금보다도 훨씬 더 값비싸게 평가되는 때이다. 우리 시대는 전체 인민들이 신념과 의지를 가다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과 국가가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철석같은 신념을 가지고 제국주의연합세력의 집요한 봉쇄정책과 반동적인 사상공세로부터 우리의 신념과 제도를 고수하며 금강석 같은 의지를 가지고 조성된 난국을 뚫고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혁명선열들이 피로써 고수해온 신념을 버리고 그 신념의 창조물인 사회주의를 버린 것으로 하여 지금 적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온갖 사회악과 패륜패덕이 난무하고 있다.

역사는 신념을 버린 자들에게서 응당한 대가를 받아내는 법이다.

우리 나라가 그 어떤 역풍에도 드놀지 않는 강한 나라로 된 것은 우리 당의 신념이 강하고 우리 인민의 신념이 강한 덕이다. 신념이 강한 당은 변질되지 않고 신념이 강한 국가는 붕괴되지 않으며 신념이 강한 인민은 와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날 어려운 길을 걸어왔지만 앞으로는 그보다 더 어려운 길을 걸어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인민은 그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념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변함없이 전진하는 인민들만이 자주시대의 상상봉에 올라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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