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8일(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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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얼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1940년대 전반기 조선민족은 민족으로서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못하는가, 유린당한 민족성을 부활시키는가 부활시키지 못하는가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있었다. 창씨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신사에 절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며 조선말대신 일본말을 상용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민에게 강요된 운명이었다.

우리 나라의 애국적 인민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이와 같은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항일의 영장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백두산을 우러러보며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벌여왔다.

이와 관련하여 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회상교시들은 다음과 같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악랄하게 ≪황민화≫를 강요하였습니다. ≪황민화≫란 조선사람을 일본사람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을 몇십 년 사이에 일본화하려고 했으니 그들의 식민지화정책이 얼마나 악랄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국민학교 입학생들에게 제일 선참으로 배워준 노래가 일장기에 대한 노래였습니다. 이렇게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국민학교시절부터 ≪충군애국≫을 강요하였습니다. 자결로써 ≪충의≫를 다했다는 광신적인 천황주의자 노기에 대한 이야기가 공연히 아이들의 교재에 포함된 게 아닙니다. ≪충군애국≫사상을 주입시키자니 노기와 같은 군국주의두목을 충군충효의 표본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황국신민의 서사≫ ≪황국신민체조≫ 역시 조선사람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키기 위해서 내리먹인 것이었습니다.

자원을 강탈당하는 것도 물론 살점을 떼우는 것만치나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자연부원을 약탈하다 못해 놋바리와 놋수저, 지어는 제상의 놋초대와 놋술잔까지 걷어갔고 여자들의 머리에서 비녀까지 다 뽑아갔습니다.

옛날에는 금강산에 수백 년 묵은 거목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부터는 금강산사찰주변에 있던 거목들까지 다 뽑아갔습니다.

너무나도 막대한 재부를 약탈해갔기 때문에 그것을 다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즉 조선사람들이 그걸 왜 분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분한 것은 일본인들이 조선사람들의 민족성을 없애버리기 위해 별의별 고약한 짓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색옷을 입어라, 창씨개명을 해라, ≪국어상용≫을 해라, ≪신사참배≫를 해라, ≪정오묵도≫를 해라 하고 못된 짓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내가 그때 일본사람들의 행실 가운데서 제일 고약하게 여긴 것은 조선사람더러 조선말을 못하게 하고 일본말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피줄과 언어의 공통성에 의해 특징지어집니다. 우리 말을 떠나서는 조선민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조선말대신 일본말을 쓰라고 한 것은 조선민족을 이 세상에서 영영 없애자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언어를 잃으면 민족이라는 것도 사멸하고 맙니다.

그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는 국어상용으로부터≫라는 구호를 내걸고 관청이요, 회사요, 학교요, 공장이요 하는데서는 물론이고 가정과 교회, 지어는 목욕탕안에서까지 일본말을 사용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황민일보≫라는 신문은 ≪국어보급≫을 전문으로 하는 신문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국어상용≫을 부르짖다 못해 조선작가들에게 일본말로 작품을 쓸 것을 강요하였으며 일본말로 된 ≪국민문학≫잡지까지 발간하였습니다.

왜정말기에 연극을 만들어도 1막 이상은 꼭 일본말로 공연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해방 후 황철, 문예봉, 조영출이랑 만나서 담화를 해보니 조선영화배우들에게 일본어발성을 강요하였고 조선가요를 레코드에 취입할 때에도 가수들에게 한 절 이상은 꼭 일본말로 부를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국민개창운동≫이라는 것을 벌려놓고 파쑈군가까지 부르게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일본말을 쓰지 않는 학생들은 비국민취급을 당했습니다. 조선말을 쓰면 관청이 상대도 하지 않았으며 배급도 주지 않았습니다. 일본말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차표도 팔아주지 않는 세상이었습니다.

≪가미다나≫라는 것은 일본의 개국신이라는 ≪천조대신≫의 명찰을 넣은 일본식귀신상자입니다. 그런 귀신상자를 집집마다 걸게 하고 ≪동조동근≫을 떠들었습니다. 해방 후 조국에 와보니 ≪신사≫곁에서 뒤를 보았다는 죄로 감옥밥을 먹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는 원동의 훈련기지에 있을 때에 어떤 농민이 성을 일본식으로 갈지 않으면 자식을 퇴학시키겠다는 공갈을 받고 마음에 없는 창씨개명을 하고 나서 조상에게 진 죄를 벗을 길이 없어 한탄하던 나머지 돌을 안고 우물에 빠져죽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시국이 이쯤 되고 보면 살아도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남의 나라를 강점한 침략자들이 식민지들에서 민족동화정책을 쓰는 것은 물론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터어키는 불가리아에서 그렇게 했고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제정러시아는 폴란드에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각각 자기 식의 동화정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국민에게서 말과 글을 빼앗고 자기네 식으로 성과 이름까지 갈게 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의 나라 궁성에 쳐들어가서 왕비를 난도질하는 것도 서슴지 않던 자들이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일제는 1940년대에 들어와 조선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지난 세기말의 왕가유린과 같은 악행을 뻐젓이 감행했습니다. 조선사람은 그야말로 사멸하느냐, 살아남느냐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조선의 지성인들앞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는가 아니면 복종하는가 하는 두 갈래의 길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지성인들은 저항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지식인들 중에는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으로 민족을 외면해버린 사람도 있었고 굴복하여 일신의 영달을 얻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을 쌍수를 들어 지지하고 협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는 원동의 기지에 있을 때에도 국내에서 발행되는 출판물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애국을 하고 누가 매국을 하는가, 누가 벼슬길에 오르고 누가 감옥행을 했는가, 누가 전향을 했고 누가 교수대에 올랐는가 하는 걸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동무들 중에 창씨와 관련한 이광수의 글을 읽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신보≫라는 신문에서 그 글을 읽었습니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식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성을 가야마라고 고치는 것이 좀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생각하기에 창씨를 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이광수는 일본의 신무천황이 왕위에 오른 고장의 산이름을 따서 가야마라고 성을 갈았다고 했습니다.

그 글을 읽어보면 조선사람의 체면이나 자존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이광수란 사람이 변해도 아주 너절하게 변했습니다. ≪민족개조론≫이라는데서는 두루마기와 저고리만 벗었다면 이 글에서는 아예 바지와 속옷까지도 다 벗어내치고 공공연히 친일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잡지에 지원병제를 찬양한 글까지 발표하였습니다.

해방 후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을 ≪민족보존≫을 위한 애국적인 소행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민족을 보존하자니 부득불 친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소리인데 그가 진실로 민족보존을 염원하고 있었다면 지원병제는 왜 찬양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원병으로 전쟁터에 나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불교인들가운데 한용운이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3.1인민봉기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불교승이었는데 조선독립은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행동파였습니다. 적들에게 체포되었을 때에는 변호사도, 사식도, 보석도 다 거절했습니다.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이 겁에 질려 동요하는 기미를 보이자 감방의 변기통을 들어 내동댕이치면서 이 더러운 것들아, 너희들이 민족과 나라를 위한다는 놈들이냐 하고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훗날 일본사람들은 그를 매수하려고 국유지를 떼주겠다고 구슬렸습니다. 그러나 한용운은 그것도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동료들과 친지들이 돈을 모아 서울 성북동에 자기 집을 지어줄 때에는 총독부 돌집이 보기 싫다고 하면서 기어이 그와 반대방향으로 집을 짓게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하루는 종로네거리에서 이광수를 만났습니다. 이광수가 조선청년들에게 학도병출전을 권유하며 돌아다니던 때라고 합니다. 이광수와 한용운은 가까운 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한용운이 이광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이광수는 한용운을 붙잡고 내가 춘원이다, 나를 모르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용운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자기가 알고 있은 춘원 이광수는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불교승이 민족혼을 저버린 이광수한테 내린 사형선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남선도 애국으로부터 친일로 방향전환을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은 일본문화화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소리까지 내놓고 하였습니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지식으로 말하면 제노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념이 없는 지식이나 글재주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최린도 일본사람들의 동화정책에 굴복하였습니다.

어떤 문인은 친일시를 써서 총독부에서 주는 상이라는 것을 타기도 했습니다.

일부 지성인들이 조선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며 조상을 갈고 일본옷을 입고 궁성요배를 하고 지어는 ≪천황을 위해 보람있게 죽자≫는 얼빠진 소리까지 해가면서 민족을 반역하고 있을 때 애국적인 학자들과 교육자들, 문예인들, 언론인들을 비롯한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그런 자들에게 침을 뱉으면서 완강하게 조선사람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이기영의 실례를 들어봅시다.

이기영은 ≪카프≫사건으로 2차례나 감옥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임화와 같은 사람은 감옥밥을 먹고나서 인차 변절했지만 그는 감옥문을 나선 다음에도 애국적인 문인으로서의 지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형무소 문턱을 넘어선 다음 실업자가 되어 서울장안을 방황하던 그 당시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라는 것을 공포하고 사상범으로 몰던 애국자들과 진보적 인사들을 사상범보호관찰소 지붕밑에 마구다지로 밀어넣을 때였습니다. 그리고는 친일사상에 의한 ≪보국≫을 강요하였습니다. ≪보국≫이란 곧 전향을 의미합니다.

이기영도 사흘이 멀다하게 경찰기관에 끌려가 전향을 강요당하였습니다. 적들은 그에게도 일본말로 작품을 쓸 것과 일본말로 친일강연을 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미가 참대쪽같은 그한테는 그 어떤 강압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적들이 ≪국민문학≫을 강요할 때 그는 오히려 조선글로 소설을 써내어 그들의 황민화정책에 대답하였습니다. ≪요시찰인≫으로 등록된 후의 그의 살림살이가 몹시 궁색했다고 합니다. 어찌나 돈에 쪼들렸던지 둘째아들이 죽었을 때에는 장례비가 없어 그 애의 시신을 옆에 두고 ≪돈≫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이기영은 경찰들의 성화를 받다 못해 가족들을 데리고 금강산밑에 있는 산골로 피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시의 눈초리는 산골에서도 계속 그의 뒤를 따라다니었습니다. 친일분자들의 돌팔매질에 그의 집 문짝이 여러 번 박살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애국적 지성인으로서의 대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밤이면 삼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징병, 징용 기피자들이 그의 조언을 들으려고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들에게 소나 말처럼 풀을 뜯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산에서 내려오지 말고 왜놈들에게 저항하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때 이기영한테서 영향을 받은 청년들이 해방이 되자 그가 살던 고장의 간부들로 되었다고 합니다.

이광수는 창씨를 했지만 이기영은 왜놈들이 망할 때까지 창씨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하면 개아들이 된다고 하면서 자기자신은 물론 친척들까지도 성과 이름을 갈지 못하게 했습니다.

해방 후 평양에서 이기영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선생은 몸도 약한 분인데 어떻게 그처럼 견결하게 옥중고초도 견디어내고 창씨선풍도 이겨냈는지 참으로 놀랍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말이 유관순과 같은 17살내기 처녀도 꽃다운 목숨을 바쳐 지조를 지키는데 나같은 문인이 절개를 굽히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간또대진재가 일어났을 때 도꾜바닥에서 왜놈들이 죽창과 일본도와 쇠갈구리로 조선사람들을 마구 학살하는 것을 보고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그놈들과는 꼭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얼을 빼기 위한 일제의 동화정책을 반대하여 견결히 싸운 애국자들가운데는 신채호도 있었습니다.

신채호는 권위있는 역사학자인 동시에 이름난 작가, 정론가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정말 글을 잘 썼습니다. 길림시절에 손정도목사한테서 신채호가 쓴 성토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조선을 미국의 위임통치령으로 해달라고 한 이승만을 때린 긴 글이었는데 어찌나 박력있고 예리한지 몇 번이고 곱씹어 읽었습니다. 손목사도 그래서 그 성토문을 그냥 간수한다고 했습니다.

신채호는 상해나 베이징 등에서 여러 신문, 잡지들을 발행하면서 타협주의자들을 때리는 글을 많이 썼습니다. 그가 쓴 글이 신문에 실릴 때면 사람들이 서로 밀고 당기고 하면서 경쟁적으로 신문을 샀다고 합니다. 그가 쓴 글들을 읽느라면 살아서 풀떡풀떡 뛰는 생명체를 보는 것 같은 감을 받게 됩니다. 구절마다 조선사람의 넋이 꿈틀거리는 글이었습니다.

신채호는 1920년대 말에 일제에게 체포되어 여순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옥중에서 보내면서도 일본놈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신채호는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민족의 얼이 고동치는 글들을 중단하지 않고 썼습니다.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계속 쓴 사실 하나만 놓고도 그가 얼마나 민족의 정통성과 얼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채호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짜내어 집필을 계속하다가 이국의 쓸쓸한 감방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감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한 몸을 불태워 민족의 혼을 지키고 민족정신을 깨우쳐주려는 애국지사들과 지성인들의 불굴의 저항정신을 깨우쳐주려는 애국지사들과 지성인들의 불굴의 저항정신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얼을 지켜주고 그 개개의 넋을 하나로 묶어세워 전민항쟁역량의 중요한 일익으로 내세워 주어야 하겠다는 것을 더욱 절박하게 느끼었습니다.

민족의 얼을 고수하는 문제와 전민항쟁준비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있었습니다. 민족의 얼을 지키는 문제는 전민항쟁준비의 정신적 기초일 뿐 아니라 그 중요한 일환이었습니다. 민족의 얼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이 없이는 전민항쟁대오에 광범한 애국역량을 묶어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지켜야 할 지식인들의 사명을 중시하고 국내외의 지식계층속에 공작원들을 부단히 파견하였습니다.

나는 국내로 떠나가는 정치공작원들에게 어머니가 있어서 자식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민족의 품에서 태어나며 죽어서도 민족을 떠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민족이라는 한집안에서 하나의 피줄로 이어져있다, 그러므로 민족을 지키는 투쟁에서는 주인과 손님이 따로 있을 수 없다, 혁명도 민족을 위해 하는 것이며 무장투쟁도 민족을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되찾자고 하는 것은 조국의 땅덩어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 민족 그 자체이다, 때문에 동무들은 전민이 무장을 잡는 것과 전민이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밀접히 결합시켜 전민항쟁준비를 잘하며 학자들, 교육자들, 언론인들, 문예인들을 비롯한 광범한 지식계층속에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여 그들 모두가 민족의 얼을 지키는 불꽃이 되고 총탄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군 하였습니다.

1938년 말에 ≪동아일보≫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적색연구회라는 비밀결사가 있었다는 혐의로 그 연루자들이 검거되었다는 기사를 실어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공화국의 초대교육상이었던 백남운도 적색연구회의 조직성원이었습니다.

굴복하면 ≪사람대접≫을 받고 저항하면 짐승취급을 당하던 험악한 세월에 백남운은 지식인으로서 민족성을 고수하고 견지하는 저항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백남운은 일본에 가서 고학으로 상과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 후 연희전문학교 교단에 섰습니다.

≪조선사회경제사≫는 그의 대표적인 역작입니다. 그는 교육활동을 하면서도 저술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일제가 민족경제를 압살하고 조선민족이라는 말 자체를 없애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백남운이 우리 나라의 사회경제사를 쓴 것은 대단히 애국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서울 연희전문학교에는 경제연구회라는 합법단체가 있었습니다. 이 단체를 혁명적인 색채가 짙은 조직으로 발전시키는데서 주동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백남운이었습니다.

백남운은 동료교수들과 함께 단순한 학술연구단체였던 경제연구회를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적색연구회라는 정치적 색채가 짙은 조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우리가 파견한 정치공작원과의 연계가 이루어진 때로부터 적색연구회의 모든 활동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실현하는데로 움직이었습니다. 방학 때에는 이 단체의 성원들이 모두 대중속에 들어가 계몽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 상황≫이라는 관헌자료에는 적색연구회가 공산혁명달성의 목적밑에 연구토론회, 강습회, 독서회 등을 열어 회원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주입과 선전을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해 왔다고 씌어있습니다.

백남운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무직으로 은거생활을 하면서 ≪이조실록≫을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조선사회경제사≫라는 글을 쓴 것이라든가, 경제연구회를 적색연구회로 발전시킨 것이라든가, ≪이조실록≫을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황민화≫정책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보천보전투소식을 들은 그 해 겨울부터 난로에 불을 때지 않고 냉방에서 강짜로 지냈다는 사람이 백남운입니다. 왜 난로에 불을 때지 않고 지냈는가. 김일성이하 빨치산의 모든 장병들이 춘하추동 사계절 가랑잎을 덮고 한지에서 자고 먹는다는 소식을 듣고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각을 조직할 때 백남운을 첫 교육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한때 과학원 원장도 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도 하였는데 일을 아주 양심적으로 하였습니다.

우리 인민이 낳은 세계적 유전학자이며 육종학자인 계응상선생도 민족적 자존심이 남달리 강하고 과학적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아주 직심스레 했습니다. 생활이 하도 어렵다보니 종이가 없어서 가랑잎에다 글을 썼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양말같은 게 생기면 신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남의 집에 갈 때에만 신었고 신발도 해질가 봐 노상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푼전을 아껴가면서 지독스레 공부한 덕으로 선생은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나중에는 대학연구원까지 졸업하였습니다.

계응상이 학창시절부터 수재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그가 연구원을 졸업하자 일본각지에서 오라고 초청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학시절의 지도교원도 계응상을 탐냈습니다. 그는 만주에 멋있는 농사시험장이 나오는데 거기에 가서 함께 일해보자고 구슬렀습니다.

그러나 계응상은 그 모든 요청을 다 거절해버렸습니다. 일본군대의 꼴을 보지 않고 살수 있는 고장에 가서 누에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조국에 가서 과학연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불같았지만 그것도 단념했습니다.

계응상은 오랜 고민 끝에 중국관내에 건너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 남방지대에는 일본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일본군대가 관내에로 쳐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7.7사변 이후부터입니다.

일본군이 광동을 점령한 그때에야 그는 비로소 조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이 왜놈세상으로 된 바에는 조상의 묘가 있는 땅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남중국에서 돌아올 때에도 이국땅에서 천신만고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품종의 누에알을 가지고 왔습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의 행실이 역겨워서 트렁크에 누에종자를 넣어 가지고 평양으로 들어왔습니다. 계응상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조선사람의 얼을 가지고서는 미군정의 치하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더라고 토설하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가 민족적 자존심이 매우 강한 학자라는 생각을 더욱 깊이하게 되었습니다.

계응상은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온 후 생산성이 높고 병에도 잘 견디는 훌륭한 누에종자들을 수많이 만들어냈습니다.

민족의 얼은 신념이 강한 사람들만이 지켜낼 수 있습니다.

지식인으로서 조국과 인민에게 참답게 이바지하려면 열렬한 애국심과 드놀지 않는 과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정말기 국내에서 민족의 넋을 고수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인 조직가운데는 조선어학회도 있습니다.

이극로의 말에 의하면 조선어학회는 1930년대 초에 나왔다고 합니다. 조선어연구회라는 것은 그 전신입니다.

조선어학회가 소문도 없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어학회가 조직된 후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우리 나라에 온전한 조선말사전이 없었습니다.

물론 사전을 만들어보려고 애쓴 학자들이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때여서 온전한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어학회 성원들이 그 중임을 스스로 걸머지고 나섰습니다.

언어를 떠난 문화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문화의 발전은 그 기초에 놓여있는 언어와 문자의 합리적인 정리와 통일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언어와 문자를 합리적으로 정리하고 통일하는데서 가장 힘있는 수단으로 되는 것이 바로 민족의 언어자원을 종합하고 집대성한 사전입니다.

민족어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은 품이 무한정 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그들에게는 돈도 없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뒤골목에서 가만가만 하는 일이어서 인민들의 후원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말과 문자의 표기에서 통일적인 표준으로 삼을 만한 것도 변변하지 못한 형편에서 방대한 사전편찬 작업을 하자니 얼마나 간고했겠습니까.

그들은 만일의 경우를 예견해서 원고도 2부씩 만들어 따로따로 감추어두었습니다. 나라가 망한 지도 수십 년이고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은 입이 있어도 벙어리 이상으로 천시를 당해야 하는 때에 막돌처럼 버림받던 조선어낱말들을 보물처럼 하나하나 모아 사전에 올렸으니 얼마나 장하고 의로운 애국자들입니까.

조선어학회는 비밀리에 대외활동도 적극적으로 벌였습니다. 1935년 영국에서 열린 국제음성학회와 이듬해에 덴마크에서 열린 세계언어학대회에도 참가하여 일제가 조선어를 어떻게 말살하고 있는가를 온 세상에 고발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조선글을 다듬고 연구한 첫 기관은 세종왕이 세운 정음청이었습니다. 세종이 최만리와 같은 사대주의학자들의 필사적인 반대를 물리치고 훈민정음을 권장한 것은 대단히 잘한 일입니다. 그는 ≪용비어천가≫도 조선글로 짓게 하고 공문서도 조선글로 쓰게 했으며 유고, 불교의 경전도 조선글자로 출판하게 하였습니다.

정음청이 폐지되고 조선글이 버림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연산군 때입니다. 조선글은 수백 년 동안 잡초처럼 천대를 받다가 1894년 갑오경장 때에야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기말부터 겨우 빛을 보기 시작한 조선글을 이번에는 일본사람들이 ≪국어상용≫이요, 뭐요 하면서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일어난 것이 다름아닌 조선어학회였습니다.

그런데 조국의 독립과 조선어의 정리보급을 위해 투쟁해오던 이 단체가 1942년 가을부터 적들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어학회에 망라되었던 수십 명의 학자들과 관계자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동무들이 국내에 갔다가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듣고 보니 분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쏘련군대가 독일군을 수십 만이나 녹여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야영이 술렁술렁 끓던 때였지만 우리 학자들이 수십 명이나 붙잡혀 줄경을 치른다는 말을 듣고 나니 밥맛조차 없었습니다.

그 학자들이 함흥감옥에서 많은 고생을 했는데 고문이 어찌나 지독했던지 몇 사람은 예심과정에서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일본경찰은 조선어학회를 반일독립단체로 지목하면서도 그 단체가 우리의 영향하에 있는 조직이라는 것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수감된 학자들이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리면서 비밀을 끝까지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어학회 내부에는 우리의 조직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이극로를 비롯한 선각자들을 망라한 비밀지하조직이 틀고 앉아 있었습니다. 최일천이 서울에서 살고 있은 이극로를 찾아간 것이 1936년 가을과 1937년 여름이었다고 하는데 그때 우리 조직에서 그에게 국내지식인들속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리는 과업을 주어 파견하였습니다.

최일천은 장춘에 있는 ≪동아일보≫지국장으로 서울에 들락날락하면서 우리의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이극로도 감옥에서 고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고문을 많이 받은 것은 동지들이 한 일까지 자기가 다했다고 스스로 ≪죄≫를 걸머지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울에 돌아가서도 만신창이 된 몸을 돌보지 않고 조선어학회를 거점으로 하여 민족역량의 단결과 자주적인 독립국가건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해방 후 이극로가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려고 평양에 들어왔길래 내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조선어학회사건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왜놈경찰들이 매일같이 고문을 들이대고 매를 너무 맞아 죽어가는 사람까지 생긴다니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조선어학회 성원들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굴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견결한 반일의지와 집단적인 애국심에 탄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극로는 내 말을 다 듣고 나서 그건 달래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믿는 데가 있으니까 그렇게 뻗친 겁니다, 우리 배짱이라는 게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백두산에서밖에 나올 데가 있었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보천보전투 후에 어학회성원들이 주머니를 털어 소주 한 병을 사다가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극로가 민족의 얼을 지키는데서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이고 또 공산주의자들한테서도 사랑을 받고 민족주의자들한테서도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4월남북연석회의 때 그를 주석단에도 앉히고 회의참가자들의 이름으로 전체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전조선동포에게 격함≫이라는 문건도 낭독하게 하였습니다.

4월남북연석회의가 끝난 다음 이극로는 평양에 남아서 나와 함께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모두 평양에 데려왔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내각에서 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상하를 불문하고 반말을 모르는 겸허하고 예절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언제인가 이극로가 쓴 이력문건을 보고 놀란 일이 있는데 안가본 데가 없고 못 만나본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중국, 일본, 쏘련,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유명하다는 곳은 다 가보았습니다. 그는 레닌도 만나본 사람입니다.

레닌을 만난 것은 모스크바에서 극동인민대표대회가 열렸을 때입니다. 그 무렵 상해에 있던 이극로는 이동휘, 박진순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었는데 크레믈린궁전에서 레닌을 2번이나 만나보았다고 합니다.

이극로는 민족운동자들 가운데서도 한다하는 사람은 거의 다 만나보았습니다. 그는 최일천, 변대우, 황백하를 비롯하여 동북지방에서 활동한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극로에게 독일유학을 부추긴 것은 모스크바에 체류중이던 윌헬름 피크였다고 합니다. 피크의 주선으로 베를린종합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언제인가 나는 이극로에게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는데 어떻게 되어 조선어연구를 전문으로 하게 되었는가, 선생이 조국에 돌아왔을 때 실업계에 나서라고 권고한 사람도 있고 벼슬길에 나서서 두각을 나타내라고 권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데 무슨 연고로 언어학자가 되었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극로는 아일랜드에 갔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모국어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 간판과 도로표식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영어로 표기된 것을 보고 조선 말과 글도 저런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 조국에 돌아가면 모국어를 지키는 운동에 한 생을 바치자고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조선어학회사건이 우리에게 준 충격이 대단히 컸습니다. 총칼도 교수대도 두려워하지 않고 피로써 민족의 얼을 지켜낸 지성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조국, 살아서 싸우는 내 나라를 보았습니다.

경성제국대학학생들도 조직을 뭇고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였습니다.

이 조직에 망라된 애국적 지식인들은 처음부터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정책에 반기를 들고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과감하게 벌이었습니다.

성대조직의 애국적 지식인들은 친일문인들과 어용학자들의 잠꼬대같은 주장에 반격을 가하는 한편 합법적인 연단을 통하여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널리 선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선민족은 나태한 민족도 아니고 파쟁을 즐기는 민족도 아니다, 조선사람이 잘살지 못하는 것은 나태해서가 아니라 왜놈들 때문이다, 그놈들이 우리 민족의 재부를 다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그 누가 감히 우리 민족을 낙후한 민족이라고 하는가, 조선민족은 지혜와 문명도에 있어서 세계에 대고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뛰어난 민족이다, 왜놈들이 제아무리 탄압을 해도 그리고 그 어떤 비싼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조선민족은 자체의 민족성을 고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론만으로는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과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이 지식인들이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큰산줄기들에 근거지를 잡고 탄광, 광산 노동자들과 산중에 숨어있는 징병, 징용 기피자들로 무장대오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다그쳤습니다.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학자들, 종교인들, 교육자들, 문예인들, 언론인들이 전민항쟁조직들에 망라되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반대하여 끝까지 과감하게 싸웠습니다. 조직에 망라되지 않은 지식인들도 신념을 가지고 적들의 동화정책에 항거해 나섰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억압과 철쇄도 각성된 지식인들의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성공한 지식인들은 예외없이 다 자기 조국과 민족앞에 충실하고 신념과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지식인들에게 조국과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며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혁명적 신념을 간직할 데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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