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2일(수)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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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와의 최후결전을 위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에 전인민적 봉기와 배후연합작전을 하나의 통일적인 체계속에 결합시킬 원대한 구상을 무르익히시고 그것을 조국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인 노선으로 제시하시었다. 혁명무력과 전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복대업을 이룩하시려는 통이 큰 이 구상에는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성장해온 우리 인민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기대가 어려있었다.

몇몇 선각자나 투사들의 힘만으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세계혁명운동사의 총화인 동시에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사의 교훈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일혁명을 시작한 첫날부터 시종일관 전민항쟁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말한 전민항쟁이란 전민을 혁명화하여 항일혁명에 총동원시킨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온 나라, 온 민족을 망라하는 거족적이고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반일항전으로 나라의 해방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전민을 혁명화하자면 그들을 의식화, 조직화해야 하며 전민항쟁으로 일제를 타도하자면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인민을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튼튼히 준비시켜야 한다는 것이 전민항쟁과 관련된 우리의 주장이었습니다.

전민항쟁 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백두산에 틀고앉아 무장투쟁을 압록강연안과 국내에로 확대하면서 조국광복회의 기치밑에 당건설과 통일전선운동, 대중조직건설을 활발히 벌이던 때부터였습니다.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나라의 해방을 이룩할 것을 호소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사실상 전민항쟁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리가 전민항쟁방침을 독자적인 노선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무적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다음부터였다고 봅니다. 전인민적 반일항전문제를 가지고 백두산밀영에서도 회의를 했고 초수탄과 신흥에서도 회의를 하였습니다. 9월호소문은 전민항쟁호소문이라고 이해해도 됩니다.

우리는 백두산에 나와 있을 때 북선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할 데 대한 구상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간백산에 꾸려진 강습소를 통하여 지방조직들에서 단련된 사람들을 뽑아다가 전민항쟁에 필요한 지도핵심들을 많이 길러내는 한편 북부지대를 비롯한 국내의 여러 곳에 반군사조직들을 더 많이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데 큰 힘을 넣었습니다.

국내에 파견된 우리의 정치공작원들은 도처에서 노동자돌격대와 생산유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최후결전의 날이 다가옴에 따라 우리는 전민항쟁을 위한 작전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조선지대의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았습니다.

논의의 초점은 최후결전준비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모임에 참가한 조선지대의 모든 지휘관들은 전체 인민을 반일항전에 동원하기 위한 준비를 빈틈없이 갖추며 우리 자체의 힘으로 조국광복을 이룩하자는 나의 제의에 전폭적인 지지를 표시하였습니다.

그 후 우리는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대중단체건설 정형, 그리고 비밀무장조직들의 활동정형을 요해한데 기초하여 조국해방의 3대노선을 내놓았습니다. 조국해방의 3대노선이라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그에 배합한 전인민적 봉기, 배후연합작전으로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이룩할 데 대한 노선입니다.

그것은 실현할 가망이 충분히 있는 노선이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가망이 있다고 했는가. 민심을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 당시의 민심이라는 것은 몽땅 우리한테로 쏠리고 있었습니다. 백두산을 쳐다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유격대에 찾아가서 김일성의 부하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징용, 징병을 기피한 사람들도 산속에 들어가 야장간을 꾸리고 왜놈들과 결판을 낸다고 하면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일본놈치하에서는 지긋지긋해서 더는 못살겠다, 김일성빨치산부대가 조선으로 쳐들어올 때에는 우리도 들고일어나서 왜놈들에게 철추를 내리자, 죽든지 살든지 결판을 내자는 것이 그때의 민심이었습니다.

부산과 시모노세끼를 오가는 관부연락선 ≪고안마루≫3등선실 천장에 ≪조선독립대장 김일성≫이라는 글발이 나타나고 서울남대문에 ≪근일 김일성대장 조국개선≫이라는 ≪불온낙서≫가 발견되어 일본관헌들이 와짝 떠들던 때가 바로 이 무렵입니다.

19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각계각층의 광범한 인민들은 더욱더 우리에게 민족의 운명을 의탁하고 우리가 조국을 광복시켜줄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합니다. 민심에는 인민들의 지향과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민심만 준비되면 그 어떤 대사든지 다 치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 가능성이었습니다. 조국해방 3대노선이라는 것은 이런 점들을 참작한데 기초하여 내놓은 노선입니다.

최후결전을 위한 작전계획의 골자는 우리 주력부대가 신속히 국내에 진출하여 모든 도들을 차지하고 거기서 전투행동을 벌이는 한편 전국에 호소문을 내어 산에 숨어있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집결시켜 무장대오를 조직하도록 하며 여기에 배합하여 전인민적 무장봉기를 일으켜 일거에 적들을 요정내고 나라를 해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승산이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단련된 혁명군대원들을 골간으로 하고 국내의 애국적인 청장년들도 무장대오를 확대한 다음 여기저기서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인다면 우리자체의 힘으로 얼마든지 나라를 해방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결정적 시기에 인민을 항쟁마당에 불러내는 것인데 그것도 어려울 것은 없었습니다. 3.1인민봉기 때는 독립만세를 부르느라고 200여 만이 떨쳐나섰는데 최후결전을 한다고 해보시오, 얼마나 많은 인민이 항쟁마당에 달려나오겠는가.

물론 이 방침을 아무런 논란도 없이 모두가 다 척척 쉽게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처음 전민항쟁노선을 제기했을 때 일부 사람들이 고개를 기웃거리는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승산이 확고한 방침이라고 하면서 지지하였습니다.

우리의 전민무장방침에 대해서는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관들도 탄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신네 나라는 완전식민지인데다가 무장투쟁도 주로 국외에서 하는 형편인데 어떻게 그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가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전민무장, 전민봉기는 우리의 주관이 아니다, 인민이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인민이 갈망하고 요구하는 것을 구호로 들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는 국내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통치체계가 점차적으로 마비되어가고 있던 때입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확정적인 것으로 되어감에 따라 관리들속에서까지 직무를 태공하는 현상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내가 조명선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내에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그가 산에서 순사를 붙잡은 적이 있습니다. 조명선은 그 순사에게 이 비상시국에 왜 건달군처럼 산속에서 어정거리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순사는 일본이 오래지 않아 망할걸 생각하니 만사가 귀찮아지는데다가 속이 하도 답답해서 사냥이나 하러 나왔다고 실토하였습니다.

당시 일본관헌들의 정신상태라는 것이 이런 형편이었습니다.

적들의 정신상태가 이 지경이었으니 통치체계가 흔들흔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적의 통치체계에 생긴 이와 같은 취약성은 국내항쟁조직들이 통이 크게 전민항쟁준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어주었습니다.

우리의 정치공작원들과 항쟁조직성원들은 적들의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밑으로는 면의 관리들과 경찰들로부터 시작하여 우로는 도지사들과 총독, 지어는 총리대신이나 천황에 이르기까지 고하를 가림이 없이 선언문도 보내고 경고장도 보내어 적들을 벌벌 떨게 하였습니다.

주체32(1943)년 2월 국내항쟁조직들은 징병제실시와 관련하여 일본 수상 도죠에게 여러 통의 경고장을 보냈다.

벽성군 청년일동의 이름으로 된 경고장을 아래에 소개한다.

≪수신인 ; 도꾜시 도죠수상관저 도죠총리대신 각하
   …
   조선은 독립한다.
   … 적국 일본이여 각성하라. 너희들이 아무리 반도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대를 양성하려 하지만 나는 조속히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총검을 돌려달라. 우리의 적은 일본인이다.…
   우리들은 조국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들로서 적국 일본에는 어디까지나 반항한다. 죽을 때까지 반항한다. 죽어서도 역시 반항한다. 우리들은 … 징병에 선참으로 나가련다. 우리의 가슴에 품고 있은 숙원을 풀기 위하여, 적국 일본에 반항하기 위하여, 아니 멸망시키기 위하여.≫≪특고월보≫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 18년(1943년) 2월분 72페지≫

우리는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에 특별한 주목을 돌리었습니다. 하나는 국내에 있는 비밀근거지들을 전민항쟁의 군사정치적 거점으로 더욱 튼튼히 다지면서 새로운 임시 비밀근거지들을 꾸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내에 더 많은 소부대들과 소조들,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여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전민항쟁역량을 조국해방작전에 철저히 준비시키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국내의 전민항쟁역량에 대한 통일적 영도를 실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전민항쟁이란 무장봉기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활동거점이 없이는 성사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찍이 전민항쟁과 관련된 노선을 제시하면서 낭림산줄기를 비롯한 큰 산줄기들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의 활동기지, 작전기지, 후방기지, 전민항쟁역량의 무력적 지탱점으로 될 수 있는 비밀근거지들을 꾸리는 사업에 선차적인 주의를 돌렸습니다.

그리하여 백두산줄기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부지역, 압록강연안과 낭림산줄기, 부전령산줄기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내륙지역을 비롯하여 서부지역과 중비역 등 전국 도처에 수많은 비밀근거지들이 꾸려지게 되었습니다.

1940년대에 와서는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이러한 비밀근거지 외에 조국해방작전수행에서 전략전술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전국의 주요요충지들에 여러 가지 형태와 규모로 임시 비밀근거지들을 건설하였습니다.

우리는 근거지건설을 선행시키면서 국내에 수많은 소부대와 소조들,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였습니다. 나도 소부대를 데리고 여러 번 국내 깊이에 진출하였습니다.

우리가 파견한 소부대들과 소조들, 정치공작원들은 두만강,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 뿐 아니라 서울을 포함한 중부조선일대와 부산, 진해를 비롯한 남부조선일대 그리고 멀리로는 일본에까지 침투하여 정치, 군사 활동을 활발히 벌였으며 광범한 반일군중을 전인민적 항전에로 준비시키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파견하신 정치공작원들의 활동에 대하여 일제의 한 관헌자료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김일성부하 사상반장의 검거
   재만불령조선인의 수령 김일성은 종래부터 항일불령책동에 광분중인데 첨예분자인 그의 부하 사상반장 김모가 최근 불령목적으로 간도성도문에 잠입하여 지하공작을 종사하던 중 그곳 경비기관에 검거되어 목하 엄중취조중인 바 현재까지 판명된 잠입목적과 활동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잠입목적 일쏘개전시 만주와 조선에서의 후방교란 및 조선계 제5열부대조직과 일본은행권을 거둬들이기 위하여
   2) 활동상황 김일성의 사상반장으로서앞에서와 같은 사명을 띠고 하바로프스크로부터 비밀리에 만주에 들어와 도문에서 조선계 불령분자 약 20명을 획득…
   3) 배후관계 경성(서울)에 제5열 본거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명료하여 목하 상세한 취조 중이다.≫
   ≪특고월보≫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 18년(1943년) 2월분 82페지≫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데서 또한 중요한 것은 국내항쟁운동에 대한 통일적 지도를 실현할 수 있는 영도기관을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국내당공작위원회가 결성된 후 우리 나라에서는 각지에 당소조들이 조직되어 대중단체들에 대한 지도를 보장하였습니다. 1930년대 말부터 여러 지역에 산발적으로 꾸려진 당소조들과 반일대중조직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실현할 사명을 지닌 지구당위원회들이 태어나 지역적 영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실례로 김정숙이 조직한 연사지구당위원회를 들 수 있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에는 평안남도 일대에서 공산주의선각자들을 망라한 지구당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습니다. 평안남도지구당위원회는 자기 산하에 평양, 개천, 남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당소조를 두고 있었으며 이 당소조들을 통하여 도내 각지의 조국광복회조직들과 전민항쟁조직들을 지도하였습니다.

함경북도에 조직된 청진지구당위원회는 일철을 중심으로 청진지구의 공장들에 수많은 당세포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거족적인 반일항전으로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우리의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정치군사활동에 의하여 1940년대 전반기 국내에서는 전민항쟁세력이 급격히 장성하였습니다. 1942년 일제가 탐지해낸 국내의 반일지하조직만 해도 180여 개가 되고 조직적 역량이 50만이 넘는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은 조직까지 합치면 그 수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 국내외에서 활동한 반일단체들의 활동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된 것은 대부분의 조직들이 정치적 성격과 함께 군사적 성격을 띤 조직들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과 전민봉기와 무력항쟁을 중요한 투쟁 목적과 과업으로 내세우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시기 많은 투쟁단체들은 자기의 투쟁목적이 전민항쟁, 일제봉기, 무장폭동,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에 합세하는데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었으며 조직명칭자체를 ≪김일성대≫라든가 백두산회라는 식으로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달기까지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조직되어 제주도 모슬포와 국내각지 그리고 일본에까지 그 세력을 확대한 ≪김일성대≫는 목적이나 활동방식으로 보아도 항일혁명의 마지막시기에 활동한 주목할만한 전민항쟁조직이었습니다.

김일성대≫라는 항쟁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1945년 6월경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때 니이가다현 경찰부가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있던 조선사람들속에서 ≪김일성대≫라는 조직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그것을 들춰내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습니다.

김일성대≫는 광범한 반일대중을 묶어세워 항쟁태세를 단단히 갖추고 있다가 우리 혁명군이 국내진공을 개시할 때 거기에 합세하여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최후성전에 참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투쟁하였습니다.

이 조직은 주요 군수공장과 기업소, 항만과 군사건설장을 비롯한 노동현장들에 뿌리박은 조직이었습니다.

구일본의 비밀문건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김일성대≫는 대동아전쟁은 인차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며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조선은 독립한다는 것, 패전 후 조선의 정치형태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을 누리는 정치형태로 된다는 것 그리고 ≪독립후의 조선의 최고지도자는 김일성≫이라는 것 등을 선전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1942년도 3월에 제주도의 한 비행장에서 있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대규모적인 폭동을 ≪김일성대≫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것도 일리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에 미국 ≪뉴욕타임스≫ 주체31(1942)년 7월 18일 호에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조선인들이 큰 일본기지를 파괴
   노동자들이 조선서해로 가는 입구에 있는 큐얼파트(제주도를 말함)에 대한 공격에서 공국무력 142명을 사살
   애국자폭동 계속
   …
   워싱톤발 7월 17일 … 지난 3월 조선에서 계속되는 적극적인 반일폭동은 큐얼파트섬 혹은 사이슈에 있는 일본공군기지의 심한 파괴를 초래하였다.…
   큐얼파트섬은 조선반도의 남쪽끝에서 떨어진 곳에 있으며 조선해협과 조선서해입구의 주요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3월 29일 섬에 있는 조선노동자들이 공군기지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무선소를 파괴하고 4개의 지하격납고에 불을 질렀다. 이 습격에서 142명의 일본인 비행사들과 기술인원들이 죽었으며 다른 299명이 화상을 당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두 개의 휘발유저장탕크와 69대의 비행기도 파괴되었다. 일본은 그 후에 습격 후 살아남은 400명의 조선사람들을 모두 죽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3월 1일 북부조선에서도 조선사람들이 폭약으로 세 개의 발전소를 폭파하였다고 한다.≫

백두산회는 1942년 여름에 함북도 성진(김책)에서 조직되었습니다. 일본경찰들이 남긴 자료를 보면 백두산회는 와세다대학에 적을 둔 사람의 지도밑에 조직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싸우고 있다는 데로부터 그것을 조직의 이름으로 삼고 활동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료에는 백두산회가 조선독립을 위해 인민혁명군 참군투쟁과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는 기록도 있었습니다.

평양일대에는 조국해방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항쟁조직이 있었습니다. 나의 4촌동생 김원주가 들어있던 조직입니다.

조국해방단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해방작전에 합세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킬 것을 주되는 목적으로 삼고 있던 적극적인 항쟁조직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양을 비롯한 우리 나라 중서부의 공장지대들과 농촌들에 들어가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군중들속에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조직망은 경찰기관과 적의 관공서에까지 뿌리를 내리었습니다.

조직의 운동방침도 굵직굵직하고 진취적이었습니다. 실례로 조국해방단은 조선청년들을 징병, 징용으로 강제연행해가는 제1선기관들을 파괴할 것을 계획하고 우리 부대에 줄을 놓아서 무장을 해결한 다음 조직성원들 중 우수분자들을 선발하여 무장투쟁에 직접 참가시킬 것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서와 면사무소도 습격하겠다, 공출미도 도로 빼앗겠다, 징병, 징용 문서도 탈취하겠다, 교통기관도 파괴하겠다, 구월산에 야장간을 꾸리고 도창무기도 만들어내겠다… 보다시피 하겠다고 설계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조국해방단 지도부는 일본군대나 군수공장에 조직을 박아넣을 궁리까지 하였습니다.

원주의 말에 의하면 조국해방단은 두단리에서 조직되었다고 합니다.

원주가 체포된 것은 왜정말기에 권총을 탈취해낸 사건 때문입니다.

원주가 체포된 다음 경찰놈들은 매일같이 집에 달려들어 감춘 총을 찾느라고 수색을 해댔습니다.

경찰들이 원주를 붙잡은 다음 김일성의 4촌 동생을 잡았다고 하면서 굉장히 떠들었다고 합니다.

국내의 항쟁조직들 가운데서 그 중 규모가 큰 조직으로는 일철비밀결사와 경성제국대학출신들로 조직되었던 무장봉기준비결사를 들 수 있습니다.

일철비밀결사는 우리의 한 소부대에서 파견한 정치공작원의 지도밑에 일철의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무어진 조직입니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 일철에 공산당재건조직이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 조직을 주도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운동경력으로 볼 때 기성세대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노조나 농조운동에 관여하다가 감옥밥을 몇 번씩 먹어본 사람들입니다.

일철비밀결사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에 합세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기본목적으로 내세우고 그 준비작업을 하였습니다. 이 결사는 부윤지구에 비밀근거지를 꾸리고 무기와 식량, 의약품들을 저장하고 삐라와 소책자도 찍어냈습니다. 주요공장들에 행동대를 조직하고 무장폭동의 개시 신호와 날자, 무기탈취대상과 그 순차와 방법을 밝힌 구체적인 행동계획까지 짜놓았습니다.

일철비밀결사는 조직이 탄로되기 전까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전시생산에 제동을 걸기 위한 파괴공작도 잘하였습니다.

이 항쟁조직에서는 공장주변에 있는 일본군대의 고사기관총을 탈취할 대담한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일철반일회조직은 철생산을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과 함께 생산된 선철을 일본으로 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상선거부투쟁도 조직하였습니다. 그래서 숱한 짐배들이 철을 싣지 못하고 청진항에 여러 날 동안이나 머물러 있은 적도 있습니다.

서울에서 조직된 무장봉기준비결사도 규모가 크고 잡도리가 만만치 않은 조직이었습니다.

경성(서울)지구 무장봉기준비결사에는 기성세대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인텔리들이 많이 참가하였는데 국내의 비밀결사들가운데서 지식인들이 그만큼 많이 참가한 조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명 성대비밀결사라고도 하는 조직입니다. 해방 전 항간에서 ≪성대사건≫이라고 떠든 것이 바로 이 결사로 해서 생긴 사건입니다.

경성제국대학을 약칭해서 성대라고도 합니다. 이 결사를 배후에서 움직인 것은 우리가 준비시켜 파견한 공작원이었습니다.

경성지구 무장봉기준비결사의 조직자들인 김일수나 서중석은 내가 길림에 있을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오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김일수는 쏘련 원동지방에 들어가 이준의 아들 이용과 함께 쏘련적위군 조선인대대에서 중대장으로 복무한 적도 있습니다. 백파를 격멸하는 전투들에도 여러 번 참가하여 많은 군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1920년대 초에는 고려공산당의 이동휘네를 따라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김일수는 한때 조선공산당 재건활동에도 참가한 적이 있는데 후에 말하기를 당을 재건하되 감자도장을 가지고 국제당에 찾아다니는 놀음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당건설을 중앙을 먼저 내오고 그것을 선포하는 하향식방법이 아니라 대중속에 들어가 기층당 조직을 먼저 내오면서 상향식으로 해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도 허심하게 받아들이었습니다.

훗날 만주로 망명해간 김일수는 동만특위에서 일하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여러 해나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형을 마친 다음 우리 부대를 찾으려고 동북지방에 들어와 여기저기로 많이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우리를 만나지 못하게 되자 다시 조선에 나와 노동계급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노동계급을 중시한 것으로 보아 때벗이를 잘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서중석, 서완석 형제도 내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서중석은 원래 서울파에 속해 있다가 후에 엠엘파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길림에 있을 때 황귀헌의 아버지 황백화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나는 서중석이 길림에서 청년사업을 할 때부터 그와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숙을 정하고 있던 장철호네 이웃에서 서중석이 살고 있다나니 그와도 얼굴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우리와 많은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 후 서중석은 파벌놀음을 걷어치운다고 했습니다. 1국1당제에 따라 남들이 다 중국당으로 적을 옮길 때 그는 마지막까지 버티면서 당재건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여러 해나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주견도 있고 지조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형제는 해방 후에도 조국의 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무장봉기준비결사를 내온 국내항쟁투사들은 흥남질소비료공장을 비롯하여 각지의 공장, 광산들과 학교들에 조직을 확대해나갔습니다.

경성지구 무장봉기준비결사는 비밀활동거점을 꾸리고 무기구입과 출판물인쇄로부터 군사정보수집에 이르는 폭넓은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었습니다. 지어는 조직성원들에게 무기사용법도 배워주고 군사훈련도 시키었습니다.

일제시기 조선에 하나밖에 없던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제노라는 수재들이고 그 대부분은 유산층의 자제들이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을 계몽시키자고 그런 대학을 세운 것은 아닙니다. 조선사람들이 자체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벌이니까 그것을 못하게 하고 그대신 제국대학이란 이름을 붙여 식민지통치의 하수인들을 길러내는 대학을 하나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런 대학에서 무장봉기준비결사가 태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안형준도 서울에서 전민항쟁조직들을 꾸리고 잘 싸웠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북부국경일대에서 형권삼촌의 지도를 받으며 반일청년운동을 해온 사람입니다.

안형준은 서울의 종로네거리에 무슨 주식회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산하기업소들을 내온 다음 조직공작을 추진시키는 한편 혁명자금을 마련하는 사업을 통이 크게 벌였습니다. 그는 산하기업소들의 목재소노동자들과 유벌노동자들속에 전민항쟁조직들을 꾸려나갔습니다.

안형준은 다른 동지들과 함께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있던 일본사람의 피혁공장을 눅거리로 사서 무장봉기준비결사의 후방기지, 연락기지로 전환시키고 그 공장에서 뽑은 수만 원의 돈을 허리에 띠고 다니면서 무기같은 것을 사들이었다고 합니다.

해방 직후 안형준은 서울시인민위원회 초대선전부장을 하였습니다.

나는 1946년 봄에 김책과 함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보았습니다.

이극로를 비롯한 조선어학회에 망라된 학자들도 조직을 뭇고 투쟁을 벌였습니다.

함경북도동무들이 회령 까치봉인민무장대, 곰산노농무장대, 나진인민무장대 하면서 자기네 고장 무장대 자랑을 많이 하는데 사실은 그들이 그런 자랑을 할만도 합니다. 그 무장대들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산광산의 청년노동자들로 무어진 백의사라는 조직에서는 계통적으로 쏘련으로 내보내는 조선말방송을 들으면서 선전공작도 하고 투쟁도 조직하였습니다.

철산의 애국단, 순안철공소 반일무장대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명칭을 가진 무장대들이 온 나라의 곳곳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직들 중에서 적지 않은 것이 우리와 함께 일했거나 직접 파견한 사람들에 의하여 꾸려진 것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영향밑에서 활동하던 흥남지구의 항쟁조직들은 일제가 극비밀리에 개발해오던 대량살륙무기생산을 파탄시키기 위한 결사적인 투쟁을 벌려 패망할 때까지 끝내 그 개발에 성공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박인진, 이창선 등과 함께 일찍부터 풍산일대에서 반일대중단체건설에 참가하였던 이귀현이 파견되어 활동한 함경남도 허천일대에서도 수전공사장 노동자들과 많은 애국자들이 조직을 뭇고 잘 싸웠습니다.

전민항쟁조직은 일본침략군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1944년에 진해해병단에 끌려간 조선청년들이 전쟁이 일제의 패망으로 끝난다는 것을 확신하고 패전국의 군대에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사전에 김일성부대에 달려가 그 산하에서 조선독립에 기여하자고 하면서 집단탈출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동무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해인가 중국에 갔을 때 주은래팽덕회가 항일전쟁 때 중국전선에서 많은 조선청년들이 무장을 갖추고 자기들한테 찾아와 김일성부대에 보내달라고 했는데 그때 형편이 허락치 않아서 그들의 요구대로 해주지 못하고 화북에 있던 의용군에 넘겨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30사단에서도 조선청년들이 반일학도병무장대를 조직하고 조선인민혁명군에 집단적으로 합류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이 무장대는 산하에 2개의 지대를 두고 그 지대아래에 4-5개의 분지대를 둔 잘 째인 조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투쟁방향을 몰라서 암중모색하다가 우리의 선이 가닿은 다음 옳은 진로를 찾고 활동을 더욱 강화해나갔다고 합니다.

반일학도병무장대는 행동계획을 아주 통이 크게 세웠습니다. 그들은 추석날을 계기로 일제히 병영을 탈출해서 일단 양덕군 북대봉기슭에 집결했다가 경찰서나 헌병대 같은 것을 치는 방법으로 무기, 탄약, 식량을 보충해가면서 산줄기를 타고 보천보근방의 산중에까지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 다음 거기서 산속에 숨어있는 징용, 징병 기피자들로 대오를 보충하고는 활동거점을 꾸리고 유격투쟁을 벌이다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와 합세하여 조국해방작전에 참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마지막작전회의에서 목표 백두산이라는 구호를 내놓고 조선인민혁명군에 합세할 준비를 면밀하게 갖추었댔는데 한 조직성원의 부주의로 거사가 유산되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군부는 이 사건을 건군이래의 큰 반란음모의 하나라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제날 국내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하면서 이러저러한 조직에 관계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도 전민항쟁노선을 받들고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최후결전의 시기에 우리의 투쟁에 합류해 나섰습니다.

이현상도 콩그룹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할 때 우리가 내놓은 전민항쟁방침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형무소에 박달도 있었고 권영벽이랑 이제순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현상이한테 조국해방작전과 관련한 우리의 구상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구상을 알게 된 때로부터 그는 단식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나가서 항쟁대오를 뭇고 왜놈들과 결판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20여 일간의 단식 끝에 생긴 병으로 하여 가석방된 이현상은 얼마동안 몸조리를 하다가 지리산에 들어가 징병, 징용을 피해서 숨어있는 청장년들과 학생들로 무장소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이현상이 타고 앉은 지리산은 해방구 형태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는 우리와의 연합작전을 위해 백두산에 연락원도 파견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파견한 조동욱도 서울에 가서 전민항쟁준비를 잘하였습니다. 그가 만든 6.6동맹이라는 조직은 그 산하에 등산대와 축구단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합법조직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울바닥의 반일조직과도 연계가 깊었다고 합니다. 조동욱은 해방 후에도 서울에 틀고 앉아서 남조선청년운동을 우리의 의도대로 끌고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는 평양에 들어오자 바람으로 나를 찾아와 10년 동안의 활동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옥중에서 비밀조직을 뭇고 우리의 전민항쟁방침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한 사람들가운데는 김삼룡이도 있습니다. 김삼룡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살이를 할 때 옥중에서 공산주의자써클을 조직하고 일제의 전향강요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은 콩그룹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김삼룡은 콩그룹을 내온 다음 조직부책임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서울콩그룹은 서울공산주의자그룹이라는 뜻입니다. 당을 재건해보자고 만들어낸 조직이었습니다.

그 조직에 망라되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내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우리의 영도를 받아들였고 나중에는 전민항쟁에 합세하였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파견한 공작원들이 서울 한복판에까지 침투하여 콩그룹성원들에게 조국광복회10대강령도 배포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전과도 통보해 주었습니다.

서울콩그룹은 서울일대의 여러 공장, 기업소들에 직종별 산하노조까지 두고 여러 가지 형태의 반일투쟁도 벌였다고 합니다.

이 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하던 김삼룡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적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박달이 서울에서 들어와 김삼룡을 의리가 있고 절개가 강한 혁명가라고 자주 말하였습니다. 감옥에서도 일본놈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몇몇 안되는 사람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현상과 마찬가지로 김삼룡도 서대문형무소에서 박달이네를 만났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두 사람의 친교가 깊어진 것 같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박달을 서울병원에 입원시키고 온갖 성의를 다해 보살펴준 사람이 김삼룡이었습니다. 박달이 우리의 부름을 받고 평양으로 들어올 때에도 그가 뒤에서 조직사업을 했습니다. 그는 박달을 통해 나에게 문안편지도 보내왔습니다.

김삼룡은 강의한 신념과 능숙한 조직력을 가진 당활동가였으며 나라와 민족과 공산주의위업을 위해 한 생을 바친 애국자였습니다.

남로당활동이 비법화되었을 때 우리는 김삼룡의 신변이 걱정되어 정세가 험해지면 주저하지 말고 북반부로 넘어와서 사업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초소를 떠나지 않고 지하에서 남조선의 당사업을 책임적으로 지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변절자들의 밀고로 남조선경찰당국에 붙잡혀 총살당하였습니다.

우리 혁명은 1940년대 전반기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앞두고 전민을 빈틈없이 준비시켰습니다. 1945년 8월에 우리 나라에서 적의 통치체계가 왜 그렇게 빨리 허물어졌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전민항쟁조직들이 도처에서 들고일어나 일본사람들이 틀고 앉아있던 통치기관들을 철저히 짓부셔 놓았기 때문입니다.

1940년대 전반기 전국도처에 조직된 전민항쟁역량의 반일투쟁이 적극화된 데 대하여 이전 쏘련의 출판물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태평양전쟁시기 조선에서의 반일운동이 더욱 크게 강화됨으로써 일본의 형편은 나빠졌다.

조선에서는 일본군사대상들에서의 태업과 파괴공작에 대한 사실들이 수많이 기록되었다. 예컨대 1942년 2월 신의주에서 7개의 군수물자를 실은 차량이 폭파되었으며 제지공장이 소각되었다. 웅기에서는 6개의 연유창이 폭발하고 창고가 불타버렸다. 제주도에서는 일본항공기지에 고용된 조선노동자들이 69대의 일본비행기를 파괴하였다.…≫≪베. 야로보이≪조선≫43-44페이지, 쏘련해군출판사 1945년 9월≫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결전을 준비할 때 우리 민족내부의 힘이 다 발동되었습니다.

민족내부의 애국역량이 최대한으로 단결되고 발동된 거족적인 반일항전, 이것이야말로 1940년대 전반기 우리 혁명발전의 새로운 모습인 동시에 특출한 성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로 대치되어있던 두 세력이 이 시기에 와서는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다시 합작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용이 공산주의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원래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것도 우리 아버지벌이나 되는 노세대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용은 우리와 걸음을 같이하였습니다. 진실로 애국을 하는 사람에게는 공산주의냐, 민족주의냐 하는 것이 문제로 되지 않습니다.

김구가 공산주의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완고한 반공분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군자금을 보내자고 미국에 있는 동포들에게까지 호소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우리와의 군사적 연합을 위해 연락원까지 파견하였습니다.

일본유학생들이 공산주의신봉자들이기 때문에 김일성의 부하가 되겠다고 절규한 것이 아닙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이 애국의 길이고 독립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의주장과 이념을 따질내기를 해가지고서는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지 못합니다. 1940년대 전반기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맞을 때처럼 제나름의 주의는 묻어두고 공통성을 찾아 그것을 절대화하여야 합니다. 항일혁명의 경험과 교훈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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