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1일(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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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혁명이란 투쟁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혁명에는 투쟁도 있고 생활도 있습니다. 투쟁과 생활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투쟁속에서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하여 사회적 진보와 번영을 이룩해 나가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지향하고 있는 혁명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간난신고속에서도 공산주의자들만이 설계할 수 있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하였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도덕의리의 이상향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들은 투쟁속에서 사랑도 하고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투사들의 생활에는 도 있고 노래도 있고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었습니다.

우리 혁명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가지고 더욱 풍만한 발전의 길을 헤쳐나갔습니다. 바야흐로 항일혁명의 최후승리를 향하여 줄달음치던 1940년대에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안겨준 것은 혁명의 2세들이 태어난 사실이었습니다.

김정일1942년 2월 16일 새벽에 백두밀영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정일의 출생은 우리 일가로 볼 때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대경사였습니다. 나와 김정숙총포성이 울부짖는 가열한 전장에서 조선의 남아로 태어난 김정일의 장래를 뜨거운 마음으로 축복해주었습니다.

나는 김정일이 태어났을 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였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우리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장손, 장손 하면서 나를 사랑해 주었던 것처럼 끔찍이 사랑해 주었을 것입니다. 두벌 자식이 더 곱다고도 하는데 그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었습니다.

김정일의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가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고향에 계시다나니 증손자의 출생을 알리는 소식마저 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린시절에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10여 명이나 되는 대가정의 모든 식솔들이 한 사람처럼 나를 가문의 기둥이라고 하면서 극진하게 돌보아 주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의 사랑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는 집안 자손이니 더 살뜰하게 대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정일은 그런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백두밀영과 원동의 훈련기지에는 인가조차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소도 없고 번지도 없는 귀틀집과 천막에서, 때로는 빙설로 덮인 노천에서 청춘시절을 보냈습니다.

김정일유년시절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속에서 흘러갔습니다. 그는 집안어른들한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나의 전우들한테서 받았습니다. 김정일은 내 사랑보다도 빨치산대원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그때 나의 동무들은 백두산에서 또 한 사람의 장군감이 태어났다고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김책은 유년시절의 김정일을 늘 어린 장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대원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혁명의 새로운 세대가 항일의 불길속에서 태어나 백두산의 이깔처럼 싱싱하게 자라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조선혁명의 양양한 전도를 확신하게 되었으며 천백 배의 힘과 용기와 투지를 가다듬고 조국해방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더 억세게 싸워나가게 되었습니다.

김정일의 출생을 공동의 경사로 받아들이고 그를 사심없이 보살펴주는 전우들의 진실한 모습을 통하여 나는 우리 일가를 위해 바치는 그들의 사랑이 대를 이어가며 계속되는 참다운 사랑이라는 것을 가슴뜨겁게 느끼었습니다.

전에도 말한 것이지만 나는 한평생 동지들의 사랑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건강한 몸으로 혁명과 건설을 영도해올 수 있은 것은 전적으로 동지들과 인민들의 덕분입니다.

나는 열다섯 살 때 어머니의 슬하를 떠난 이후로는 줄곧 인민들과 동지들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항일 혁명의 나날이나, 새 조국 건설의 나날이나, 조국해방전쟁의 나날이나 동지들은 나를 시종일관 성실하게 도와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방패가 되어 총알도 막아주고 눈비도 막아주고 병마도 막아주었습니다. 내가 마음고생을 할 때도 동지들과 인민들이 나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나도 힘이 진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면 먼저 동지들과 인민들로부터 찾군 했습니다. 그들만 있으면 없던 힘도 생기고 캄캄하던 앞길도 트이었으며 어떤 어려운 일도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심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동무들한테 원동의 훈련기지에 가 있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국제연합군을 조직하고 우리가 북야영에 집결했던 그 해 겨울 만주와 원동 지방에는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눈이 어찌나 많이 내렸던지 산짐승들까지 먹을 것을 찾아 민가에 내려오는 판이었습니다. 무릎을 치는 눈 때문에 거리로는 얼마동안 자동차도 다니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김일이 무거운 쌀자루를 메고 기지에 돌아와 김정숙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빵이 주식으로 되어있는 그곳 형편을 생각해서 쌀을 좀 구해왔는데 다른데 쓰지 말고 사령관에게 꼭 밥을 대접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김일이 나를 위해 쌀자루를 메고 다닌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자기는 만날 통강냉이만 먹으면서도 나한테만은 어떻게 하나 쌀밥을 마련해 주려고 항상 마음을 썼습니다.

유경수도 후방부에서 쌀을 조금씩 공급해주면 김정숙이한테 맡기고 가면서 소문을 내지 말고 나한테 밥을 지어주라고 했습니다.

나와 전우들사이에 오고간 혁명적 동지애와 공산주의적 도덕의리김정일이 태어난 후부터 김정숙김정일에 대한 도덕의리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김정일이 갓 태어나자 김정숙은 그에게 나와 자기 군복을 줄여서 지은 옷을 입히었습니다.

훈련기지에 있을 때도 형편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는 쏘련사람들도 전쟁을 치르느라고 배불리 먹지 못하였습니다. 적게 먹고 적게 자고 수수하게 입고 다니자는 것이 그들의 구호였습니다. 그러니 강보도 포단도 모자도 마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대원들이 자투리 천들을 모아다가 그에게 쪽무이포단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김정일은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 쪽무이포단을 덮고 지냈습니다.

나의 전우들은 자기 사령관의 아들이 쪽무이포단을 덮고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을 몹시 가슴아프게 여기었습니다. 그때의 일이 얼마나 가슴에 맺혔던지 해방 후 임춘추는 중국 동북지방에 가서 사업하다가 휴가차로 조국에 나올 때 모포 500장을 사다가 나와 김정숙에게 선물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그 모포를 모두 만경대혁명학원에 보내주었습니다.

생활형편이 몹시 어려운 때였지만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온갖 지성을 다하여 김정숙김정일을 돌보아주었습니다.

김정일어려서부터 군대를 몹시 따르고 군인들의 세계를 동경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의 전우들은 김정일이만 만나면 그의 머리에 군모부터 씌워주군했습니다. 어떤 동무들은 김정일에게 선물하려고 적구공작을 하면서도 나무권총을 깎았습니다.

백두밀영과 달리 원동에 있을 때는 우리 집과 부대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훈련여가나 휴식일이 되면 많은 대원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김정일을 안고돌면서 걸음마도 떼주고 목마도 태워주고 노래도 배워주었습니다. 때로는 아무르강변에 데리고나가 발동선이 지나가는 광경도 구경시키고 철새들이 날아가는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나 포연에 절은 옷을 입고 군대밥을 먹으며 돌격구령소리와 함께 성장한 그의 인생은 첫 시작부터가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김정일어려서부터 대가 바르고 배짱이 센 품성을 지닐 수 있은 것은 선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중요하게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신념이 강한 투사들의 품에서 투쟁과 생활의 참다운 진리를 배우며 아무런 구김살도 없이 씩씩하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김정일이 어린 나이에 비해 정신적으로 조숙한 것도 빨치산의 물을 먹으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빨치산들이 지니고 있던 고결한 감정정서는 풍만한 자양이 되어 그의 넋속에 그대로 흘러들었고 백두산의 뫼부리처럼 억센 그들의 기질은 그의 남아다운 성격에 피와 살을 보태주었습니다.

김정숙김정일을 돕는데서는 남대원들도 짝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남대원들이 우리 집에 와서는 김정숙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여러 모로 애를 썼습니다.

백두밀영도 그렇지만 원동의 훈련기지라고 해야 영양제가 될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만사람이 다 허리띠를 조이며 어렵게 사는 때여서 돕고 싶어도 마음뿐이지 사실 별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 임춘추랑 많은 동무들이 자기 몫으로 차례지는 빵을 조금씩 아껴두었다가 김정숙이한테 가져다 주군 했습니다. 쏘독전선을 지원하느라고 누구나 다 배를 곯던 때였지만 그들은 매일같이 빵을 모아주었습니다.

김정숙은 전우들이 가져온 빵중에서 일부만 소비하고 나머지는 간수해두었다가 그들에게 도로 돌려주군 하였습니다.

언제인가 임춘추가 무전기를 메고 만주에 소부대공작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령부와 무전연계를 가지면서 몇 달 동안 정치공작을 하였습니다. 그가 그때 임무를 아주 잘 수행하였는데 기지로 들어올 때에는 적구에서 닭알까지 수십 알 구해가지고 왔습니다. 소부대공작지에서 우리 훈련기지라는데가 거리가 먼데다가 거기로 오가는 길이 평탄한 대통로도 아니고 총검이 숲을 이룬 사지판이었습니다. 그러니 제 한 몸 건사도 하기 어려운 사지판으로 등에 무전기를 짊어진 사람이 닭알짐까지 들고오자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임춘추가 그 닭알보따리를 들고 우리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김정숙김정일을 위하는 그의 고결한 진정에 감복하였습니다.

사실 임춘추와 김정숙은 서로 오랜 우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정숙이 부암동에서 야학에 다닐 때 임춘추는 곽지산과 함께 강사로 출연하였습니다.

임춘추는 병고로 시달리는 인민들에게 의료상 방조를 많이 주었습니다. 김정숙의 가족도 임춘추한테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언제인가 김정숙이 병에 걸렸을 때 그를 구완해준 사람도 임춘추였다고 합니다.

임춘추는 국제연합군시절만이 아니라 한 생을 나와 김정숙김정일을 위해 애쓴 사람입니다.

나라가 해방되자 임춘추는 김정숙의 일가친척들을 찾아주기 위해서도 여러 모로 마음을 썼습니다.

그는 후대들에게 김정숙, 김철주, 김기송의 생애와 투쟁업적을 소개선전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여기고 여러 해 동안 자료작업을 한데 기초하여 그들에 대한 책들도 많이 썼습니다.

임춘추는 손에 무장을 잡고 싸우면서 지식으로써 우리 사업을 보좌한 대표적인 인텔리입니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항일무장투쟁초기부터 역사기록과 저술활동을 하였습니다.

임춘추가 역사가로서의 첫걸음을 뗀 것은 연길현 조양천에서 당 및 공청간부들과 내가 한 담화를 기록으로 남긴 때부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조선인민혁명군 종군역사가로서 남호두회의와 남패자회의, 소할바령회의를 비롯한 주요회의들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충실하게 회의기록을 하였습니다.

임춘추는 국제당이 관계하는 출판물들에도 여러 건의 글을 써보냈습니다.

어느 해 였던지 잡지 ≪태평양≫이 그 잡지 특파원과 임춘추의 회견기를 실은 일이 있습니다. 나는 그 회견기를 보고 임춘추가 특파원에게 우리 부대 자랑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전투 전에 잘 세운 계획과 오묘한 전술과 신속정확성, 용감성으로 하여 실패를 모른다고 하였으며 우리 대오가 독자성이 강하고 문화적이며 낙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잡지특파원은 그 회견기에서 임춘추가 조선인민혁명군의 전과에 대한 글과 아동단원 김금순의 영웅적 최후에 대한 글을 써보낸 사실까지도 다 서술하고 있었습니다.

임춘추는 늘 전우들에게 대내출판물을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고 국제당에 보내는 보고서나 문건을 작성하는 것도 좋고 혁명군의 전과자료를 종합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공산주의운동과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김사령의 투쟁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해두는 것이다, 내 비록 필치가 무디고 지성도 천박하지만 김일성동지의 전기를 써서 후세에 길이 전하겠다고 말하군 했습니다.

우리 빨치산대원들 중에 무장을 가지고 혁명위업에 이바지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임춘추와 같이 굳은 신념을 가지고 빨치산의 역사를 자발적으로 수록해서 후세에 남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임춘추는 당사업을 많이 한 노숙한 정치일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치일군으로서의 임춘추보다 문필가, 역사가로서의 임춘추를 더 내세우게 되는 것은 그가 우리의 혁명역사를 정립하는데서 해놓은 일이 그 무엇으로써도 대신할 수 없는 커다란 공헌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임춘추는 풍부한 사료를 가지고 우리의 혁명역사를 종합체계화하고 깊이 있게 고증한 사람입니다.

그가 항일무장투쟁에 대하여 이렇게 고증하게 된 것은 그때 일기를 계속 썼기 때문입니다.

임춘추와 같은 문필가, 역사가가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자료들을 정리해두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활동역사 중에서 많은 것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파묻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임춘추는 우리의 혁명역사를 정립하는데서 뿐 아니라 그것을 소개선전하는데서도 많은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해방 직후에 평남도당에서 당사업을 하던 그는 조기천, 정관철을 비롯한 여러 문화인들에게 보천보전투를 비롯한 우리의 항일빨치산투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임춘추는 혁명전통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도서들과 수많은 회상실기들을 집필완성하여 우리 당 역사문헌고를 풍부히 하는데 공헌하였습니다.

그는 수령의 혁명사상과 혁명역사,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옹호하고 빛내이는 일이라면 그 어떤 장애도 박차고 나갔습니다.

임춘추는 내가 발표한 논문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를 가지고 국제연합군시절에 정치강의에 출연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나라의 일부 지휘관들이 우리의 논문을 강의안에 포함시키겠는가고 하면서 좀 고려해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춘추는 우리는 벌써 오래전부터 김일성사령관을 조선민족의 지도자로, 수령으로 모셔오고 있다, 자기 수령의 노작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데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도 많은가고 하면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에 대한 강의를 계속하였습니다.

임춘추는 내 건강을 위해서도 왼심을 많이 쓴 사람입니다.

그는 연대당서기를 할 때 회의에서 토의된 문제라고 하면서 나에게 통지해준 일이 있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하면 내가 배낭을 절대로 메고 다니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임춘추를 불러 동무는 혁명연조가 오랜 사람인데 어떻게 회의에서 그런 문제까지 다 토의하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원들의 요구입니다, 사령관이 배낭을 지고 다니는걸 보면 사람들이 우리를 손가락질합니다, 대중의 의사이니 받아주셔야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임춘추는 나에게 헌신적이었던것처럼 김정일동무의 영도에도 충실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 임춘추가 그처럼 자기 수령과 영도자를 열렬히 경모하고 그 영도에 충실한 혁명가로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김혁, 차광수나 김책과 마찬가지로 종파의 해독성을 잘 알고 실지체험을 통하여 수령이 귀중함을 그 누구보다도 뼈에 사무치게 통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정일동무는 임춘추를 혁명의 1세로 내세우고 존대하였습니다. 임춘추에 대한 그의 사랑과 배려는 참으로 극진하였습니다.

임춘추가 외국에서 대사로 있다가 원칙을 지켜 그 나라 당국자들과 되게 다투고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당안에 있던 종파사대주의자들은 외교관례에 있을 수 없는 일을 했다면서 조직문제까지 보아야 한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동무만은 임춘추가 현대수정주의자들과 잘 싸워 조선의 본때를 보여주었다고 하면서 그에게 우리 집 정원에서 딴 막물복숭아를 선물하였습니다. 그는 임춘추가 혁명투쟁의 초시기부터 함께 싸운 수많은 혁명열사들의 투쟁을 고증하여 우리 당의 역사적 재보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해외에 나가 외교대표로 사업하는 동안 국보적 가치를 가지는 도서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를 완성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을 우리의 투쟁역사,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역사로 정식화하고 종합적으로 체계화한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그 수고를 치하해 주었습니다.

임춘추가 저술활동을 하면서 김정일동무의 지도와 후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 그의 인간적 매력에 탄복하였으며 그를 스승으로, 영도자로 따르고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임춘추는 사업과 생활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김정일동무에게 보고하고 그의 결론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그의 위대성을 소개하고 선전하는 강연도 하고 책도 썼습니다.

임춘추가 저술활동에 전념하던 1960년대 후반기 국제공산주의운동무대에서는 혁명위업계승문제, 특히 후계자문제가 논의의 초점으로, 시대적 요구로 나서고 있었습니다.

후계자를 올바로 선정하는 것은 혁명과 건설, 나라와 인민의 장래운명을 결정하는 근본문제입니다. 후계자를 잘못 내세운 탓으로 혁명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는 실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10월 혁명 후 쏘련인민이 짧은 기간에 자기 나라를 세계적인 강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기본요인은 레닌이 후계자를 잘 골랐기 때문입니다. 레닌의 충실한 전우이며 제자인 스탈린은 한 평생 자기 수령의 위업에 충실하였습니다.

레닌이 서거한 다음 스탈린은 그의 영구앞에서 6개 조항의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혁명과 건설을 영도하는 과정에 그 결의들을 다 실천에 옮기었습니다.

스탈린은 독일군대가 모스크바 코앞에까지 들어왔을 때에도 다른 정치국위원들과 간부들은 소개지로 보내면서도 자기 자신은 그냥 크레믈린에 틀고앉아 전선지휘를 하였습니다.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는 쏘련에서 만사가 다 잘돼나갔습니다. 그런데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다음부터 일이 비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쏘련당안에서 현대수정주의가 대두하고 쏘련사람들이 사상적으로 병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흐루시초프는 자기를 길러준 수령의 은덕도 다 잊어버리고 개인미신에다 걸면서 스탈린을 헐뜯었으며 스탈린에게 충실한 노혁명가들도 모조리 정치국에서 쫓아내고 당대열에서까지 추방해버리었습니다.

그 후 언제인가 임춘추는 모스크바붉은광장에서 레닌묘를 참관하다가 우연히 심각한 몰로토프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몰로토프는 그때 임춘추에게 당신들은 쏘련당의 전례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수정주의를 하지 말고 자기 수령의 사상과 업적을 충실하게 계승해 나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임춘추는 그때 후계자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당도 망치고 혁명도 망친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역사의 쓰라린 교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후계자의 표징에서 기본을 이루는 것은 수령과 수령의 위업에 대한 충실성이며 도덕의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도덕의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과 도덕의리, 이것은 후계자가 갖추고 있어야 할 첫째가는 표징입니다.

그리고 높은 자질과 영도풍모를 지닌 실력가만이 수령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수령의 사상과 의도대로 빛내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민은 수령의 사상체계와 영도체계를 확립하는데서 김정일동무가 발휘한 비범한 수완과 혁명적 원칙성, 수령의 노선과 구상을 옹호하고 실현하는데서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정력, 고결한 충성심과 효성에 경탄하였으며 김정일동무야말로 수령의 사상과 의도대로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향도하고 완성해나갈 수 있는 영도자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민은 오래전부터 그를 존경하고 받들어왔습니다.

김정일동무를 받드는데서는 항일혁명투사들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앞장에 서 있습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김정일동무를 수령의 유일한 후계자로 내세운 것은 그가 당과 국가, 군대를 영도해야 민족의 장래가 담보되고 백두산에서 개척한 주체의 혁명위업이 한 치의 편차도 없이 대를 이어 빛나게 계승발전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그를 수령의 후계자로 추대했다는 것은 곧 군대가 그를 민족의 영수로 내세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일, 최현, 오진우와 함께 임춘추는 김정일동무를 우리 당과 국가의 수위에 추대하는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김정일동무를 나의 후계자로 한사코 추대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에게 인간적으로 매혹되었기 때문입니다.

김일이 늘 김정일동무처럼 수령께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충신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면 임춘추는 김정일동무처럼 혁명선배들을 존대하고 혁명전통을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은 없고 김정일동무와 같은 위대한 사상의 대가, 영도의 대가가 없다고 하였으며 오진우는 김정일동무처럼 무비의 담력과 뛰어난 지략을 소유한 영장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최현과 이종산은 종종 김정일동무처럼 인정미가 풍부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와 김정숙, 김정일을 돕는 데서는 이을설이도 역사가 깊은 사람입니다.

해방 후 그가 부관으로 일할 때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경비상태를 돌아보고 우리 집 부엌에서 김정일과 함께 식사를 하던 일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 정도로 이을설은 어린 김정일과 친밀한 사이었습니다.

내가 현지지도를 나갈 때마다 이을설은 김정일을 곁에 앉히고 다니었습니다. 그는 김정일을 언제나 잘 이해해주고 보살펴주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전쟁 때 신의주에서 김정일을 만나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소개지에 가 있다가 오래간만에 내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김정일이 부관장으로 나를 따라간 이을설에게 어머니를 대신해서 장군님을 잘 돌봐달라고 하던 말이 지금도 귀전에 쟁쟁합니다.

김정일동무가 왜 지금도 이을설을 믿고 고맙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이을설이 부관장으로 있으면서 자기를 따뜻이 돌보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김정일은 부모의 사랑을 한창 받아야 할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까지 겪다나니 그는 어린 동생과 함께 얼마동안 나와도 헤어져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경제를 복구하느라고 내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다나니 그들 남매를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린시절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을 때 부모와 친척들을 대신하여 그를 육친의 정으로 세심하게 보살펴준 사람이 바로 이을설과 같은 나의 전우들이었습니다.

이을설이 어린시절의 김정일을 얼마나 위해주고 보살펴주었는가 하는 한 가지 실례를 말해주겠습니다.

1953년 여름에 내가 우리 나라 당 및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쏘련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방문일정을 마치고 모스크바를 떠날 때 쏘련측에서는 환송연회를 차리었는데 그 연회상에 오른 수박맛이 특이하였습니다.

연회가 끝난 다음 숙소에 가니 지함을 포함하고 있던 이을설이 나를 보자 몹시 당황해하였습니다. 무슨 지함인가고 물었더니 그는 좀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자제분들 생각이 나서 수박 한 개를 마련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함안의 수박은 물동이만큼이나 큰 것이었습니다.

김정일은 그때 그 수박을 받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전쟁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인민들에게도 이런 수박을 맛보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씨를 받아 수박농사를 지어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날 김정일과 함께 받은 수박씨로 이을설은 이듬해부터 우리 집 정원에서 수박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박이 새끼를 쳐서 많이 펴지게 되었습니다.

이을설은 어려서 부모의 슬하를 떠난 한 생을 내곁에서 살아왔습니다. 수십 년 동안 경위대원으로 복무하면서 제국주의자들과도 싸우고 대국주의자들과도 싸우고 반동들과도 싸우고 종파들과도 싸우다나니 쓴맛, 단맛도 다 보고 산전수전도 다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 그는 무서운 배짱군으로 자라났습니다.

하바로프스크회의가 끝난 다음 나는 인차 박영순과 이을설을 워로쉴로브에 있는 무전강습소에 보내면서 강습을 마치고 곧추 부대에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소부대를 데리고 백두산동북부와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을설은 무전강습을 마치고 부대를 돌아올 차비를 하였습니다.

이을설이 무전강습총화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날 쏘련군대의 한 고위간부가 국제당의 요구라고 하면서 그더러 조선으로 나갈 차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을설은 조선으로 나가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쏘련의 군사일군은 당신이 믿음직해서 그런다, 우리가 전략상으로 중시하는 성진이 당신의 고향이니 거기에 가 배겨있으면서 적들의 움직임을 무전으로 우리에게 보고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을설은 고향에 가서 공작하고 싶지만 나는 우리 사령관동지한테서 강습이 끝난 다음 부대에 돌아와 무전교관을 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니 이해해달라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 쏘련사람은 다음날에도 이을설을 설복하였습니다. 김일성동지의 허락은 차후에 자기네가 받을 터이니 조선으로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국제당의 이름을 빌어가지고 좀 터세를 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을설은 그때 나는 사령관이 준 명령을 집행하기 전에는 어데도 갈 수 없는 몸이다, 지난날 무전기술을 소유한 통신병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아마 당신은 모를 것이다, 그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사령관동지의 명령대로 부대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들이댔습니다.

그때는 원동에 임시로 들어가 있었고 또 아직은 국제연합군이 조직되지 않은 때여서 통합된 지휘체계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이 각기 자기의 독자적인 지휘체계와 질서대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쏘련군사일군이 우리와의 사전협의도 없이 국제당을 걸고 무전강습소를 졸업하고 부대에 돌아가게 되어있는 이을설을 다른 일에 빼돌리려고 한 것은 무리한 일이었습니다.

이을설이 사령관이 준 명령을 집행하기 전에는 그 어떤 임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것은 우리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을설은 소년중대시절부터 현재까지 나를 위한 호위사업에 한 생을 바치면서도 나의 뜻을 어기거나 임무수행에 태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자나깨나 오직 자기 수령만을 생각하고 수령의 건강과 신변안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왔습니다.

내가 1939년에 올기강에서 낚시질을 할 때에도 내뒤에서 기관총을 걸어놓고 호위사업을 한 사람은 경위대원 이을설이었습니다.

이을설은 해방 후에도 나를 잘 호위하였습니다.

전쟁때 최고사령부주변에 반혁명분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운명과 직결된 극비자료들이 박헌영과 이승엽을 통해 계속 미국사람들에게로 날아갔습니다.

1952년 여름에 이승엽은 졸개들을 시켜 무전연락으로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건지리골안에 미국비행기들을 수십 대나 불러들였습니다. 그 비행기들이 최고사령부주변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최고사령부건물 곁에는 큰 시한탄까지 떨구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있던 집에서 그 시한탄까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때 이을설이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한 다음 당원증을 바치고 목도로 그 시한탄을 메다가 골짜기에 내던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을설은 최고사령부 주변에 잠복해있던 암해분자들과 반동분자들을 모두 잡아냈습니다.

이을설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과의 투쟁도 아주 잘하였습니다.

내가 1956년에 쏘련을 비롯한 구라파사회주의나라들을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부관장으로 사업하던 이을설이 하루는 지금 뒤에서 최창익이랑, 박창옥이랑 노는 꼴이 심상치 않은데 각별히 조심해야겠다고 하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까밝혀놓는 것이었습니다.

남일이도 나에게 전화로 최창익과 박창옥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것을 통보해왔습니다.

이을설은 김창봉의 군벌관료주의와도 정면으로 맞서 잘 싸웠습니다.

이을설은 나를 위해 일생을 바쳐온 것처럼 김정일동무를 위해서도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을설과 박영순은 남야영에 돌아와 많은 무전수들을 키워냈습니다.

이을설은 그 후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결전이 벌어지게 된 중요한 작전지점들과 일본군대의 기본역량이 배치되어있는 전략적 요충지들에서 소부대공작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그는 소부대에 망라되어 무전기를 메고 왕청현 노흑산일대에 나가 정찰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적들이 노흑산일대에 큰 비행장을 건설하고 수백 대의 비행기들과 수백 문의 대포, 수백 대의 자동차들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어 작전준비에서 큰 지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쏘련사람들도 그 정보의 정확성 여부를 검증하려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부대를 노흑산에 보냈습니다. 소부대성원들은 비행장안에까지 대담하게 뚫고 들어가 거기에 있는 새 비행기와 새 자동차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신형포들이 전부 나무로 만든 가짜라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이을설은 정찰을 끝내자마자 나에게 무전으로 소부대활동 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영도의 계승문제를 훌륭히 해결했다고 하는데 나는 항일혁명투사들이 영도의 계승문제를 해결하는데서 많은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어린시절의 김정일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걸음마를 떼주었습니다. 그 시절부터 김정일의 마음속에서는 항일혁명투사들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이 싹텄고 항일혁명투사들의 마음속에서는 그에 대한 믿음과 친애의 감정이 싹텄습니다. 김정일동무의 사상정신적 성장과 감정정서발전에서 가장 주동적이고 적극적인 작용을 한 사람들이 바로 항일혁명투사들입니다.

김정일동무가 지니고 있는 필승의 신념과 철의 의지, 혁명적 낙관주의는 항일혁명투사들과 가까이 지내는 과정에 더욱 풍부하게 터득하고 굳건히 연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동무와의 접촉을 통하여 항일혁명투사들은 그가 지니고 있는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효심과 도덕의리, 인민에 대한 사랑과 헌신적 복무정신, 수령의 사상과 의도대로 선열들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가며 끝까지 완성해가려는 불굴의 의지와 신념을 따라배우게 되었으며 김정일동무야말로 조국과 민족의 장래운명을 책임적으로 훌륭히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한결같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정일동무를 백두산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항일혁명의 산아라는 뜻이며 민족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항일혁명투사들의 품에서 인생의 첫걸음을 떼고 그 품에서 우리 혁명의 향도성으로 솟아오른 조선의 아들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은 김정일동무를 우리 위업의 계승자로 추대하는데서 뿐 아니라 그의 영도체계를 세우는데서도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후계자를 추대한다고 해서 만사가 저절로 다 잘돼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항일혁명투사들을 만나면 우리가 좀 더 오래 살아서 김정일동무를 잘 도와주자고 호소하군 합니다.

수령의 위업을 계승완성해나가는데서 또한 중요한 것은 후계자의 영도를 충실히 받들어갈 수 있는 핵심의 육성, 후비대의 육성입니다. 핵심을 잘 꾸리지 않거나 후비대를 잘 육성하지 않으면 후계자의 영도체계도 올바로 세울 수 없고 후계자로 노선과 방침도 관철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해방 후 백두산에서 싸워온 핵심들을 가지고 혁명을 발전시켰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원들과 군인들과 청년들로 이루어진 수십 수백만 명의 핵심부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도자가 있고 핵심이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김정일동무가 영도하는 조선혁명의 미래는 저 푸른 하늘처럼 밝고 창창합니다.

김정일동무의 생가가 있는 골짜기를 소백수골이라고 부릅니다. 소백수골안은 우리 나라의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뛰어난 절경입니다. 1980년대에 우리가 이 밀영을 발굴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백수골안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미치지 않는 천고의 밀림이었습니다.

군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도 천험의 요새나 금성탕지라고 할만한 곳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의 소재지로서는 명당자리였습니다.

정일봉의 이전 이름은 장수봉입니다. 김정일동무의 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서 장수봉을 정일봉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우리 인민들은 지금 노래까지 지어부르면서 온 세상에 정일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김정일동무를 민족의 영도자로 키운 것은 백두산입니다. 백두산의 투사들이 그를 향도성으로 내세워 주었으며 백두산의 정기가 그의 기개로 되었습니다.

우리 혁명의 대가 굳건한 것은 김정일동무가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나서 자란 민족의 영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만민의 지지와 총애를 받는 인민의 영도자입니다.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와 인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임속에서 수령의 후계자가 되고 민족의 영도자 김정일동무의 위업은 앞으로도 필승불패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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