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18일(수)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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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의 불길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1)


보천보전투의 역사적 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연구하고 이야기하였지만 이 전투를 직접 조직하고 지휘한 나에게는 정신적 체험이나 추억거리들이 적지 않다. 지금도 반세기전에 있었던 가지가지의 정경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천보전투는 한마디로 말하여 생이별을 당한 어머니와 그 자식들의 상봉과 같은 사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국은 보천보에서 울린 총소리를 계기로 하여 자기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충직한 아들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전투는 망국사의 흐름을 광복에로 돌려세운 결정적인 계기의 하나였다고도 표현 할 수 있다.

나는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전투담을 들려달라는 각계인사들의 요청에 접할 때마다 늘 보천보전투에 대해서 말해주군 하였다. 전과로 보면 이 전투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전투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보천보를 칠 때 우리가 살상한 군경수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일전쟁당시의 주요전투들을 소개할 때면 언제나 이 전투를 댄 웃자리에 놓군 한다. 그것은 내가 이 전투를 그 어느 전투보다도 특별히 중시하기 때문이다.

보천보전투에 대하여서는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대하였다. 적측의 손실이라든가 피해정도 같은 것은 이미 전투 직후 지상을 통해 소개되었으니 새삼스럽게 확인할 것도 없었지만 그 작전의 동기에 대해서만은 누구나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컨대 어떻게 되어 보천보전투를 하게 되었는가, 국경부근에 그런 정도의 고을들과 촌락들이 수십 개나 되는데 유독 보천보를 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천보전투를 조직한 목적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민족재생의 전기를 마련하려는데 있었고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항일혁명투쟁에서의 결정적인 단계, 질적 비약을 이룩하자는 데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의 민족사는 피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이 피눈물은 일제가 강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항전을 개시하였다. 무장투쟁은 조선의 아들들이 선택한 항일의지이고 수단이었다. 우리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구호를 들고 한 편으로는 무장투쟁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당조직건설을 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통일전선운동과 반제공동전선운동을 하면서 항일혁명을 추진시켜왔다.

이 길에는 난관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의 구호를 들고 싸우는 것까지도 범죄시하면서 저들의 당리당략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혁명의 길에 나선 첫날부터 언제나 사고의 출발점을 조선혁명에 두었다. 몸은 비록 이국에 있었으나 마음은 항상 조국에 가있었고 조국의 동포들에게 가있었다. 1920년대 후반기부터 우리가 이국땅에서 한 모든 일은 다 조국을 위한 것, 조국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의 기발을 들고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당당한 권리로 되고 의무로 된다는데 대하여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남호두회의에서는 다른 일련의 문제들과 함께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할 데 대한 문제가 중요하게 논의되었다.

이 회의를 통해 표현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지향은 조선에 나가서 총소리를 크게 내자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한다면 활동판도를 국내깊이에로 확대하여 조선혁명을 앙양시키자는 것이었다. 1930년대 전반기까지의 우리의 주되는 활동판도는 만주지방이었다. 항일유격대창건을 전후로 하여 국내에도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그것은 제한된 활동이었다. 1930년대 전반기의 우리의 활동은 주로 힘을 축적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무장대오는 여러 개의 사단을 이룰만치 장성하였다. 이 힘을 가지고 국내에 나가면 못해낼 일이 없었다. 백두산에 틀고앉아서 낭림산에도 1개 사단, 관모봉에도 1개 사단, 태백산에도 1개 사단, 지리산에도 1개 사단 하는 식으로 사방에다 무장부대들을 파견해서 근거지를 건설하고 적들을 연거퍼 답새기면 조선반도를 죽가마처럼 끓게 할 수 있었으며 2천 300만 조선민족을 전민항쟁의 마당으로 모조리 불러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조국해방의 숙원을 달성할 수 있는 대통로를 열어놓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남호두동강, 서강 등지에서 열린 일련의 회의들에서 거듭되는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민족사의 요구, 항일혁명 발전의 총화였다.

1937년 봄에 우리는 서강에서 수년간에 걸친 무장투쟁 과정을 총화하면서 대부대에 의한 국내진출을 당면과업으로 내세우고 그에 따라 몇 가지 실무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 조치에 따라 혁명군무력을 3개의 방향으로 진출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군사작전이 세워졌다. 그 작전에 의하면 최현부대는 무송으로부터 안도, 화룡을 거쳐 두만강연안의 북부국경일대로 진출하게 되어있었고 다른 하나의 역량은 임강, 장백 일대로 진출하게 되어있었으며 내가 인솔하는 주력부대는 적의 공격이 두 부대에 집중될 때 혜산쪽에 쳐들어가서 한바탕 총소리를 내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이 작전의 총적인 지향점은 국내의 적을 치는데 있었다. 임강과 장백 일대에 진출하게 되는 2사부대의 활동도 기실은 국내에 진공하게 될 두 부대의 활동에 대한 배후지원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우리 인민들속에는 일본군의 강대성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이 만주를 단숨에 삼켜버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세상에 이런 군대를 당해낼 군대는 없다고까지 생각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일본과 같은 강국을 상대로 하여 독립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닭알로 바위를 깨겠다고 덤벼드는 것과 같이 황당하고 무모한 짓이라고 하였다.

여러 가지 징후들로 보아 일제가 중국관내에로 침략전쟁을 확대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현실로 되었다. 중일전쟁은 시간문제로만 남아있었다. 일본군이 기세등등해서 전쟁의 불길을 넓혀가는데 따라 무적황군에 대한 공포와 환상은 점점 더 커질 것이었다. 적의 강대성에 대한 환상은 혁명의식을 마비로 만들려면 일본군에 대한 신화를 깨뜨려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군이 강군이기는 하지만 치면 꺼꾸러뜨릴 수도 있고 괴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어야 하였다.

우리가 한 5년 동안 북간도와 서간도를 중심으로 하여 벌인 무장투쟁은 일본의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려버리었다. 그러나 흑심한 보도관제와 왜곡된 선전으로 하여 우리 군대의 전파는 국내깊이에까지 사실대로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우리가 대부대로 국내에 쳐들어가게 되면은 나라 강산이 경탄과 감격으로 발칵 뒤집히고 인민들은 일제를 쳐부시고 조선을 독립시킬 군대가 있다고 할 것이다. 조국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조선의 혁명군대가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 이것이야말로 2천 300만 동포들이 조국광복전선에 과감히 떨쳐나설 수 있는 힘과 의지의 기초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내진공작전에 일관되어있는 우리의 전략적 의도였다.

나는 그 당시 두 가지 점에 사색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나는 군사적으로 국내의 큰 요충지들을 공격해서 온 나라에 충격을 주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조직망을 조밀하게 펼쳐서 전민을 반일항전에 준비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국을 해방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가 도래할 때 무장투쟁과 전민봉기를 배합하여 일제를 격멸하고 독립을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피와 땀을 많이 바쳐야 하는 어려운 전략이었지만 달리는 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였다. 백두산지구와 서간도일대에서의 우리의 모든 활동은 이 전략의 실현에 철저히 바쳐지고 있었다.

국내진공을 앞둔 때의 나의 제일 큰 관심사는 조국의 실정을 깊이 요해하는 것이었다. 출판물만으로는 국내의 실정을 속속들이 다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국내에 갔다오는 공작원들과 담화를 많이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지하조직원들을 불러다가 국내실정을 들어보기도 하였다. 실정자료는 새로운 통계수자나 충격적인 사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마당풍경이나 길가의 객주집에서 울려나오는 아낙네들의 넉두리에서도 우리는 어용신문의 눅거리보도기사에서는 볼 수 없는 주요한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 자료들가운데서도 우리가 제일 중시한 것은 인민들의 동향이었다. 인민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 우리의 주되는 관심사였다.

그 해 4월이 아니면 5월이었다고 기억된다. 만포쪽에 나갔다가 돌아온 한 무장소조원이 나에게 사업보고를 하다가 산중에서 목격한 사실이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글쎄 팔다리가 젓가락 같이 여윈 10살 되나마나한 사내애들이 솔밭에서 삭정이를 줏고 있지 않겠습니까. 알아보니 학교에서 얼결에 조선말을 한 것 때문에 매를 맞고 벌금을 무느라고 나무를 한다는 겁니다. 그 애들은 모두 보통학교 2학년생들이었습니다.≫

무장소조원이 그 아이들한테서 들은 데 의하면 일본인교원은 목검으로 아이들의 다리와 잔등을 굴뱀이 지게 두드려 패고 머리에 물통을 뒤집어씌워 운동장에 장시간 꿇어앉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벌금까지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그 학급에서는 조선말을 한마디하면 5전, 두 번하면 10전, 세 번 이상하면 퇴학이라고 하였다. 다른 학교나 학급들에서는 아직 그런 규정을 내지 않았는데 일본인교원이 담당한 그 학급만은 유독 ≪국어상용≫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조선말을 한 아이들한테서 벌금을 받아낸 것 자체는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나라를 통채로 빼앗은 일제가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나는 이전에도 조선총독부 당국이 조선사람들에게 일본말사용을 강제로 내리먹이지 못해 안달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었다. 경상북도에 있는 어느 한 보통학교에서는 벌써 1931년 말부터 강제적인 방법으로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1937년 봄에 총독부당국은 조선의 각급 관공청들에서 일체 공문서작성을 일본어로 할 데 대한 지시를 내리먹였다.

이 모든 사실들은 일본의 치하에서는 달리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다잡을 수 없었다.

사람이 말까지 빼앗기면 한 민족이기를 그만두는 것이며 민족이 민족어를 빼앗기면 한 민족이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민족의 징표가운데서 피줄의 공통성과 함께 언어의 공통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된다는 것은 세상이 다 공인하고 있는 바이다.

민족어는 민족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를 빼앗고 말살하는 것은 민족의 전체 성원들에게서 혀를 잘라내고 얼을 빼앗는 것과 같은 잔학무도한 짓으로 된다. 영토와 국권을 잃은 민족에게 남는 것이란 언어와 정신밖에 없다.

그런즉,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민족전부를 숨쉬는 시체로 만들려는 것이다. ≪황민화≫의 본질은 조선사람들을 일본사람들과 꼭 같은 ≪1등국민≫으로 만들어서 흰쌀밥을 먹이려는 것이 아니고 아침마다 ≪궁성요배≫나 ≪신사참배≫를 하여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일본국민의 종복으로 만들려는데 있었다.

언어를 빼앗는 것은 몇몇 사람들의 불행이나 희생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온 겨레의 운명과 관련되는 문제로서 2천 300만 동포를 한 줄에 세워놓고 그들 모두를 한칼로 쳐없애는 것과 같은 대살륙이나 다름없었다.

식민주의자들의 첫째가는 특성이 야만성과 탐욕성, 철면피성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국적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남의 나라를 강탈한 자들은 모두가 포악하고 교활하고 후안무치한 놈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나라의 말과 글을 빼앗는 자들, 다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의 신사앞에 절을 하게 하는 그토록 야비하고 뻔뻔스러운 식민주의자들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조선민족의 운명이 과연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무장소조원이 안고온 소식은 나의 피를 끓게 하였다. (조국으로 하루빨리 진군해서 그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조선민족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조선민족은 자기의 말과 글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조선민족은 ≪내선일체≫와 ≪동조동근≫을 인정하지 않으며 ≪황민화≫를 거부한다는 것, 조선민족은 일본이 망할 때까지 손에서 무장을 놓지 않고 항쟁을 계속한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렇게 하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1937년 5월초였다. 나는 놀라운 국내소식을 또 하나 받아안게 되었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의 거물 이재유가 체포되었다는 ≪매일신보≫특간호의 상보를 접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옹근 4면짜리의 대대적인 특집이었다. 거기에는 경찰에 여섯 번이나 체포된 데 대한 경위와 그에 대한 소개가 지나치다고 할만치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신문은 이재유를 ≪조선공산운동괴멸의 최후진≫이니, 공산주의운동 ≪20년 역사 최후거물≫이니 하면서 그의 체포로써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영영 끝나게 되었다고 요란하게 떠들고 있었다.

부르조아정치일반이 워낙 지능적인 속임수로 되어있지만 그 시녀노릇을 하는 관보의 활자뒤에는 항상 지배계급의 검은 속심이 숨어있는 법이다. ≪매일신보≫의 그 호외도 예외가 아니었다. 워낙 잡도리부터가 총독부의 골방에 깊숙이 들어않아 반공을 업으로 삼는 노회한 책사들이 야심적으로 꾸며낸 가면극이라는 것이 대번에 알리었다.

이재유가 이름난 공산주의자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삼수사람이었다. 일본에 건너가서 고학을 하다가 노동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서울을 활동무대로 하여 공산주의운동을 하였는데 주로 태평양노조조직들을 맡아가지고 함흥일대에까지 드나들면서 각 지방의 노조, 농조 운동을 지도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담력도 있고 임기응변하는 기지와 변장술도 있어 붙잡힐 때마다 매번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신문은 이 이상의 탈출이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조선공산주의운동은 최종적으로 막을 내린 셈이라고 단언하였다.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모략선전은 기실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혼란시키고 있었다. 그 점에서 적들은 대단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대검거로 공산당이 무너지고 얼마 남지 않았던 개별적 공산주의자들마저 이재유의 체포로 활동의 종말을 고했다고 하니 그 실망과 좌절감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산주의운동을 학문으로 연구하던 사람들속에도 허무감에 잠겨 맥을 놓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적들은 과녁을 면바로 고른 셈이었다. 그 과녁이란 조선민족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이룩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들은 어떤 폭언이나 감언이설도 아끼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한 쪽으로는 총을 내대고 ≪복종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하고 을러메는가 하면 다른 쪽으로는 ≪자, ≪동조동근≫에 ≪내선일체≫이니 신사참배도 같이하자≫, ≪만주에서는 ≪왕도낙토≫에 ≪오족협화≫와 꽃이 피여있고 일본에는 사꾸라꽃속에 복지가 기다리니 만주나 일본에 가서 부자가 되라≫, ≪남쪽에서는 목화를 심고 북쪽에서는 양을 치며 대일본의 신민이 되어 온 아세아를 주물러보라.≫하고 입에 침발린 소리로 구슬리기도 하였다.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은 가장 무서운 비극적 사태는 정신이 무너진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일제의 독재기관으로부터 유행가를 불어넣은 축음기판대기에 이르는 모든 것들이 조선을 없애고 조선민족의 넋을 뿌리채 뽑아버리는데 집중되고 있었다.

조선은 사람이 살지 못할 생지옥으로 변하였다. 동방조선에 칠칠야밤과 같은 암흑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그 밤은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지샐 줄 몰랐다.

≪이 지리한 예속의 밤, 굴욕의 밤을 끝장내지 못한다면 우리 어찌 감히 자기들을 조선의 장부라고 할 수 있으랴. 어서 빨리 조국으로 나가자. 조국에 나가서 기나긴 악몽속에서 시달리는 민족의 넋에 생명을 불어넣자≫

이것은 조국진군을 준비하던 나날 우리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머리를 지배한 생각이었다.

천상수와 소덕수를 거쳐 5월중순경 지양개등판에 이른 우리는 거기서 국내진공을 위한 대오정비와 여러 가지 선동사업을 벌이었다. 한편 국내정세를 보다 상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박달을 불러다가 만나 보았다.

박달은 놀라운 소식을 알려주었다. 혜산, 갑산 방면으로부터 적들의 국경경비무력이 대대적으로 북상하여 최현부대가 진출하고 있는 무산쪽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정보가 정확한 것이라면 최현부대는 포위를 면할 수 없었다. 물론 우리가 이런 정황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들이 혁명군의 움직임에 그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뜻밖이었다.

서강회의 후 최현이 부대를 이끌고 작전지역으로 떠나간 것은 1937년 4월경이었다. 나는 그가 떠날 때 안도에 가면 이도선의 부대를 주의하라고 말해주었다. 그 부대는 만주지방의 ≪토벌대≫들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적인 부대였다.

이도선은 안도에 와서 처음에는 소사하의 대지주 쌍빙준의 가병대장으로 있었다. 그때 그가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소작인들을 총칼로 악착하게 다스린다는 소리를 나도 많이 들었다. 유격대의 습격에 몇 번 혼쌀이 난 이도선은 가난뱅이는 다 공산당편이라고 하면서 걸핏하면 부락들을 기습해서 불을 지르거나 생사람의 목을 치군 하였다. 주민들속에서는 이도선에 대한 원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 수급졸개로서의 이도선의 야수같은 기질을 잘 알게 된 일제는 그를 간도지구 경비사령부산하 안도≪토벌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부대는 혁명에 앙심을 품은 자산계급출신의 망나니들로 꾸려져있었다. 이도선의 특기란 한 번 걸려든 대상은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적아가 다 공인하는 명사수였다.

최현은 험한 산발을 타고 북상하여 거듭되는 싸움을 치르면서 무송오지에 적들을 깊숙이 끌어들인 다음 갑자기 방향을 꺾어 안도지구에 진출하였다. 그의 부대는 금강에 도착하자 난관에 봉착하였다. 부대가 건너가야 할 강물이 범람했던 것이다. 일부 대원들이 가교를 건설하는 동안 부대는 휴식하게 되었다. 대원들이 방금 잠에 곯아 떨어졌을 때 이도선부대와 버럭더미들을 사이에 두고 쌍방간에는 치열한 화력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총격전에서 주수동이 그만 전사하였다. 처음에는 적들이 주동에 서서 일방적인 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주수동을 대신하여 부대의 지휘를 담당한 최현은 불리한 정황을 재빨리 수습하고 역습으로 적들을 호되게 답새기었다. 적아간에 총격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그 전판에 있던 인부들이 이도선이 도망친다고 소리질렀다. 그 금전군들이 아마 이도선의 용모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유격대원들은 도주하는 이도선을 뒤쫓아서 기관총몰사격으로 즉사시키었다. 그날 최현부대는 도망치는 적들을 15리까지 따라가서 족쳐대었다.

금창전투는 인민들의 원한을 통쾌하게 풀어준 유명한 전투였다. 최현이 이도선을 죽이고 ≪토벌대≫를 전멸시킨 소식은 그 당시의 신문들에 크게 소개되었다. 최현은 원래 이름난 싸움꾼이었다. 최현부대의 무산지구 진출과정에는 가슴아픈 회생도 없지 않았다. 그 과정에 그들은 ≪4사의 꽃≫이라고 불리우던 이경희를 잃었다.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경희네 집안은 온 일가가 혁명사업을 하다가 희생된 애국정신이 강한 집안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오빠들과 삼촌들을 잃고 할머니마저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격대원이었다. 이경희도 원한을 품고 쓰러진 혈육들의 복수를 위해 무장대오에 들어섰다. 나이도 나이었지만 그마저 총을 잡는다면 이씨가문을 지킬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경희의 떼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참군을 허락하고 말았다.

전우들이 ≪4사의 꽃≫이라고 하면서 이경희를 친딸이나 친동생처럼 애지중지하게 된 것은 그의 용모가 특별히 아름답고 귀염성스러운데다가 일솜씨가 좋고 마음씨가 고운데 있었다.

그의 특기인 춤과 노래는 부대의 자랑이었다. 이경희가 유격대에 입대하였을 때 지휘관은 그에게 권총을 주었다. 체소하고 연약한 이 처녀에게는 보총이 적합치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경희는 권총으로 싸우는 것이 성차지 않아서 마상대총을 메고 다니었다. 그가 마상대를 메고 춤을 출 때면 전우들이 손벽을 치며 늘 재청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경희는 부대의 분위기를 조절할 줄 아는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어떤 대원이 성을 내거나 울적한 기분에 잠겨있으면 그 대원에게 허물없이 감겨들어 웃겨놓으면서 귀엽게 어리광을 부리었다. 그가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지쳐서 쓰러졌던 대원들도 기운을 내어 자리에서 일어나군 하였다. 이경희는 바느질도 잘하고 수놓이도 잘하였다. 그가 만든 담배쌈지는 누구에게나 귀물이고 자랑거리였다. 깔깔한 풀도 경희의 손에만 들어가면 맛있는 요리가 된다고 하였다.

이경희는 ≪토벌대≫와 맞다들어 싸울 때마다 일부러 전우들의 곁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좌지를 정하고 조준사격을 해가면서 자기가 쏘아죽이는 적을 한 명 한 명 세군 하였다. 어느 한 전투 때에는 적을 연거퍼 6명이나 쏴눕히었다. 그가 총알을 갈아재우는 사이에 두세 명의 적들이 도망쳤다. 이경희는 그 놈들을 놓친 것이 분해서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보천보전투가 끝난 다음 3개 방면에서 활동하던 부대들이 지양개에서 만나 군민연환대회를 할 때 최현은 나에게 이경희의 최후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눈물로 수건을 적시었다. 이 범같은 사나이의 눈에서 소리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을 때 나는 이경희의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얼마나 비통한 손실로 되는가를 가슴저리게 느끼었다.

최현이 치명상을 당한 이경희를 안아 일으켰을 때 그의 손가락짬으로는 피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ㅗㅗㅗ여기가 조국땅이라지요? 그래도 조국땅을 밟아보았으니 다행입니다. 모두들 내 몫까지 잘 싸워주십시오.≫

이것은 최현의 품에서 전사할 때 그가 전우들에게 남긴 마지막말이었다.

그 후 이경희의 아버지도 회령쪽에 국내공작을 나갔다가 적들에게 학살당하였다. 아버지와 딸은 이렇게 조국땅에 묻히었다. 해방 후 나의 부탁을 받고 그와 한 부대에서 싸우던 전우들이 무산지구에 가서 이경희의 유물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전사한 지점이 아리숭한 데다가 창황중에 평토장을 한 무덤이어서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우리는 이처럼 전우들의 피로 물든 징검돌들을 하나 하나 밟으면서 조국진군을 하였다.

최현부대는 무산지구의 붉은바위일대에 진출하여 적을 타격한 다음 만주지경으로 일단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시 백두산 동남쪽에 있는 일본인목재소의 상흥경수리 7토장을 들이치고 베개봉쪽으로 번개같이 이동하였다. 혜산, 호인, 신파 등지에 있는 특설경비대와 군경들은 도로를 따라 베개봉쪽으로 급속히 진출하였다. 최현은 통신원을 보내어 우리에게 부대가 처한 형편을 간단히 보고해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구원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통신원을 보낸 것은 적의 움직임이 여사여사하니 작전상 참고하라는 것이지 도와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최현은 원래 곤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최현과 같은 노련한 싸움군이 최선을 다하여 난국을 타개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었다. 그러나 전국의 흐름을 낙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돌발적인 사태는 우리의 작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었다. 당시의 정황은 우리로 하여금 전면포위의 위기에 처한 최현부대를 구출하는 일과 국내진공작전을 다같이 밀고나갈 수 있는 묘술 을 찾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나는 지휘관들을 모여놓고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였다ㅗㅗㅗ 4사가 포위에 들었다. 최현은 자체로 빠져나올 수 있다고 하는데 그 결심을 믿고 우리가 가만있어야겠는가. 만일 그 결심이 미덥지 못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내진공을 뒤로 미루고 최현부대부터 구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국내진공을 먼저 한 다음 연이어 구출작전을 펼쳐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주력부대역량을 둘로 갈라서 두 개의 작전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옳겠는가, 최현부대를 포위에서 구출하자면 국내의 어느 지점을 치는 것이 이상적이겠는가...

모두가 긴장하여 나를 주시하였다. 어느 것이나 다 절박하고 심각해서 논쟁은 처음부터 열을 띠었다. 지휘관들이 내놓은 의견을 종합하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한 부류의 주장은 북쪽으로 몰려간 적들을 배후에서 타격하는 방법으로 먼저 최현부대부터 구출하고 그 후에 형편을 봐가다가 적당한 때에 국내진공을 단행하자는 것이었다. 이 의견은 여러 사람들의 반박을 받았다. 주력부대가 최현부대를 구출하는 작전부터 벌인다면 물론 성공할 수 잇겠지만 우리의 총소리를 듣고 북부조선과 서간도일대의 적들이 기동로를 따라 물밀듯이 쓸어올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력부대가 적의 포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 부류의 주장은 최현부대는 전투력이 강한 부대이기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체의 힘으로 포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은 것만큼 예정대로 한시바삐 국경1선인 혜산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적들도 당황하여 최현부대에 대한 포위를 풀고 총소리가 나는 쪽으로 되돌아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도 역시 허점이 있다는 이유로 하여 부정을 당하였다. 그 허점이란 최현부대가 전투력이 강한 부대인 것은 사실이나 거듭되는 전투와 행군 때문에 포위를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주력부대가 혜산을 친다고 하여 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무산지구로 북상하고 있는 적들이 과연 최현부대에 대한 포위환을 풀고 돌아서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두 가지 작전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방안을 내놓았다.

≪우리는 반드시 국내에로 진공해야 한다. 이 작전에는 변동이나 취소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시급히 최현부대를 구원해내야 한다. 국내진공을 중시한다고 하여 혁명동지들을 사지판에 내버려두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출로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국내의 어느 한 지점을 때려 두 가지 목적을 단꺼번에 다 달성하는 것이다.≫

지휘관들은 ≪어느 한 지점≫이라는 말이 나오자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지점이란 어느 고장인가고 이동학이 일동을 대표해서 물었다.

나는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을 계속하였다.

≪우리는 그 지점을 선택하는데서 다음과 같은 측면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것은 적의 역량이 집결되어있는 베개봉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고장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턱밑에 바싹 붙어있는 고장이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국내진공이 두 가지 효과를 다 낼 수 있다. 베개봉쪽에서 제일 가까운 요충지는 혜산과의 중간지점에 있는 보천보이다. 보천보를 때려야 베개봉쪽에 집중되어있는 적들이 우리 주력부대와 최현부대에 역포위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포위추격전을 포기하고 이미 진출했던 계선에서 철수할 수 있다. 보천보를 치면 혜산을 치는 것 못지 않게 국내에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보천보를 치는데 있다.

내가 이런 방안을 발표하자 지휘관들은 고개를 끄덕거리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였다.

≪보천보를 치자면 여러 가지로 타산을 해보아야 한다. 첫째로, 수백 명에 달하는 부대가 적의 조밀한 국경감시망을 번개처럼 뚫고 들어가 적을 치고 번개처럼 빠져나오는 전격전을 할 수 있는가? 둘째로, 이 전투는 단순한 화력전이 아니라 국내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주는 것을 주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것만큼 화력전을 하면서 강력하고 신속한 정치선동을 동시에 해야 하는데 이런 신속한 선전선동이 가능한가? 셋째로, 우리는 이번 기회에 혁명군무력과 지하조직이 하나의 목표를 놓고 연합작전을 하는 모범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

그 세 가지가 다 헐치않은 전제들이어서인지 지휘관들은 또다시 팽팽한 분위기에 휩싸이었다.

그러나 그때 권영벽이 무게있는 목소리로 정적을 깨뜨리었다.

≪사령관동지, 해낼 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해낼만한 담보가 있소?≫

나는 권영벽의 대답이 달리는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우쳐 물었다.

≪있습니다. 보천보야 조국이 아닙니까!≫

나는 그 대답을 귀로 들었다기보다는 자신이 웨친 것만 같았다. 어쩌면 권영벽의 심정이 내 심정과 그렇게도 같은가. 아니 다른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는 그런 대답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타향의 이슬비와 설한풍속에서도 연전연승하여온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어찌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혼을 준 사랑하는 조국땅에서 승리하지 못하겠는가.

짧은 모임이었지만 많은 것들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 세부들은 세월의 연륜속에 묻혀버리었다. 다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보천보야 조국이 아닙니까!≫하고 자신있게 웨치던 권영벽의 음성뿐이다. 국내진공이라는 역사적인 출정을 앞둔 그 순간에도 우리의 가슴속에는 조국이라는 크나큰 존재를 강탈당한 망국노의 울분이 자리잡고 있었다.


(2)

 

우리는 장백현 19도구 지양개에서 국내진공대열을 편성하고 대원들에게 일제히 여름군복을 갈아입히었다. 장사진을 이룬 대오가 일매지게 새 군복을 입고 지양개를 떠났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차림새가 그때처럼 좋은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걸음은 작전상의 단순한 위치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망국의 한을 품고 이국의 하늘밑에 큰 총성을 울리기 위해 여러 해 동안 피흘려 준비해온 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이별끝에 몹시 그리웠던 부모를 찾아가는 심정으로 조국인민들에게 혁명군의 위용을 보여줄 수 있도록 옷차림과 행장구를 최상의 것으로 갖추었다.

이전의 군복들가운데는 제 나름으로 지은 것들도 없지 않았다. 혁명군의 군복은 재봉대가 맡아가지고 제작하는 것이 통례였으나 일손이 딸릴 때에는 주민주구의 아낙네들까지 동원시키었다. 그러다나니 모양새가 어설픈 것들도 더러 있었다. 군복과 사복이 혼탕을 이루어서 차림새가 얼럭덜럭한 경우도 간혹 있었다.

나는 국내진공작전을 결심한 때부터 사령부가 작성한 도안에 따라 부대 전체성원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군복을 지어 입히기로 하였다.

새로 작성한 군복도안에서는 모자에 붉은 별모표를, 군복저고리에는 영장을 달았다. 그리고 남대원들의 바지는 유격활동에 편리하게 약간 개조한 승마복형태였고 여대원들에게는 주름치마나 바지를 입히는 것으로 하였다. 남여대원들의 저고리는 종전처럼 닫긴깃형태였다.

우리가 600벌의 군복을 만들기로 하고 재봉대를 포함한 후방부성원들을 장백으로 파견한 것은 양목정자에서였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천신만고의 무송원정길을 돌아가던 그 당시의 우리 형편으로 보면 군복 같은데 신경을 쓸 경황이 못되었다. 그때에는 군복보다도 당장 먹을 한두 끼의 식량이 더 절박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조국진군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예견성있게 수백 벌의 군복제작을 포치하였다.

600벌의 군복제작과업을 수행하느라고 오중흡과 김주현이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오중흡이 인솔하는 후방공작조가 서강에서 장백으로 나갈 때 겪은 고초에 대해서 여러 투사들이 회고도 하고 증언도 하였으나 그 전모는 아직 완전히 알려지지 못하였다. 우리가 무송으로 북상행군을 할 때에는 그래도 이명수전투에서 얻은 식량을 가지고 떠났다. 그런데 오중흡이 장백으로 데리고 가는 후방공작조에는 한 되박의 식량도 없었다. 대원들은 허기가 나고 기력이 진해서 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맹물로 끼니를 때운다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노상 시장기를 달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굶다 못해 단두산쪽으로 발길을 돌리었다. 거기에 가면 단두산전투 후에 파묻었던 소대가리를 우려먹을 수 있다는 타산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소대가리를 파묻었던 현장에 가보니 살은 산짐승들이 다 뜯어먹고 뼈만 댕그렇게 남아있었다. 그래도 오중흡이네는 그 뼈를 우려먹고 얼마쯤 기력을 회복하였다. 기아는 또다시 그들을 위협하였다. 일행은 아사의 위협과 함께 동사의 위협도 동시에 받았다. 모두가 칼날같은 눈얼음에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맨살이 드러나서 얼어죽을 지경이었다.

만일 조국진군이라는 목전의 대망을 단 한순간만이라도 잊었더라면 후방공작조성원들은 무송이나 장백의 어느 설령에서 더는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영영 눈속에 묻히었을지도 모른다.

김주현의 말에 의하면 오중흡이네 후방공작조가 소덕수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참혹하고 끔직해서 눈물이 없이는 볼 수 없더라는 것이었다. 겨우 숨이 붙어있는 그들을 소덕수인민들이 맞아들여다가 형체만 남아있는 누데기같은 옷을 가위로 째내고 새 옷을 갈아입혔는데 온몸에 피얼음들이 엉켜 붙어있어 상처자리부터 소금물로 소독하고 언독을 빼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오중흡 이하 전원이 동상을 입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후방공작조성원들이 의식을 차리기가 바쁘게 일어나 재봉기앞에 마주앉더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소덕수의 조국광복회원들과 인민들은 일심일체가 되어 600벌의 군복을 짓는데 필요한 천도 해결하고 제작도 끝내었다.

언제인가 박영순은 나보고 항일혁명투쟁시기 군대와 인민이 처창즈에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가 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말하게 되면 후대들이 잘 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정 험한 것은 생략하고 줄여서 말한다고 했는데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항일혁명당시의 고난을 직접적으로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력을 아무리 발동하여도 그때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언제인가 쏘련에서 발행하는 군사잡지를 보니 쏘련군사사상의 핵을 쏘비에트애국주의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나는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쏘련군사사상의 핵으로 본 쏘련사람들의 관점을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성격과 활동을 관통하고 있던 군사사상도 그 핵은 애국애민에 두고 있었다. 우리는 항일유격대의 모든 대원들이 언제 어디서나 조국과 인민의 참다운 해방자, 성실한 수호자가 되도록 부단히 교양하였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사라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거기에 항일유격대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애국주의의 본질이 있었다.

오중흡이 새로 지은 600벌의 군복을 가지고 지양개에 나타난 것은 5월말이었다. 전우들의 피땀이 스며있는 새 군복으로 옷차림을 일신한 행군대오는 1937년 6월초에 19도구를 떠나 20도구, 21도구, 22도구를 거쳐 구시산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곳에 와닿았다. 그때 우리의 길안내는 19도구사람인 천봉순이 하였다. 천봉순은 앞쪽에 바라보이는 등판이 제비등판인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국땅 곤장덕과 마주서있다고 하였다.

부대는 구시산마을에서 얼마간 머무르다가 제비등판에 올랐다. 6월3일 새벽이었다. 조국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키돋이를 하며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았다.

그날 부대는 제비등판에서 노독을 풀었다. 김운신을 비롯한 선발대성원들은 구시물동에 가서 떼목다리를 마련하였다.

우리는 6월 3일 밤 압록강을 건넜다.

전원이 강을 도하할 때까지 자신도 모를 긴장감이 온몸을 엄습하였다. 적들이 1선, 2선, 3선도 모자라 4선으로 경계진을 치고 있다는 삼엄하고 조밀한 국경경비였다. 300여 개를 헤아린다는 북부국경지대의 경찰서와 경찰관주재소들, 거기에만도 수천 명의 폭압무력이 배치되어있었다. 기동성도 여간 아니었다. 혜산경찰서에서는 국경특설경비대라는 것까지 무어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에 대비하였고 후날 이 경비대의 대장이었던 오사와 슈이찌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국경지대의 경찰관주재소와 출장소 건물들의 주변에는 참호를 굴설하고 토벽, 철조망, 나무울타리 등 인공적인 장애물들로 보루를 축성하였으며 필요한 장소에는 감시대를 설치하거나 교통호를 파놓았다. 평안북도경찰수비대에는 비행기도 있고 기관총을 갖춘 두 척의 발동선도 있고 탐조등, 망원경, 철갑모를 분배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어 대부대에 의한 국내침투는 거의나 불가능할 것 같은 형세였다.

하지만 아무리 삼엄한 국경경비도 우리를 주저하게 하지는 못하였다.

구시물동은 소연한 물소리로 우리의 도하를 감싸주었다. 근대조선의 소란스러운 민족사가 그 물소리속에 응축되어 만단사연을 속삭여주는 듯하였다.

우리는 지체없이 곤장덕에 올랐다. 곤장덕은 울창한 수림으로 덮혀있는 평평한 야산이었다. 여기서 부대는 보초를 세우고 하루밤을 숙영하였다.

다음날 아침부터 곤장덕 숲속에서 전투준비를 하였다. 포고, 삐라, 격문도 준비하고 지휘관부회의도 열고 정찰도 조직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미 장악한 적정자료를 현지에서 다시 확인 해 보는 것이었다. 마동희와 김확실에게 정찰임무를 주어 보천보거리로 내려보냈다. 그들은 어리무던한 농민부부로 가장하였다. 적당한 구실을 붙여가면서 여러 기관들에 들어가 수작을 붙이고 정보를 수집하였다 어찌나 정찰을 실속있게 했던지 그날 밤에 다른 데로 부임되어가는 산림보호구 주임의 송별연회가 있다는 정보까지 걷어가지고 돌아왔다.

우리는 이미 여러 갈래의 선을 통하여 보천보에 대한 정찰을 충분히 해두었었다. 권영벽이나 이제순의 선도 동원하고 박달의 선을 통해서도 적정을 입체적으로 파악하였다.

우리는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 곤장덕을 내리었다. 거리에 돌아서자 대오는 여러 단위로 분산되어 소정된 위치를 차지하였다.

나는 거리초입에 있는 황철나무아래에 지휘처를 정하였다. 거기에서 주요공격목표인 경찰관주재소가지의 거리는 불과 100미터 안팎이었다. 시가전을 하는 경우 지휘처와 시가와의 거리가 이처럼 가까운 실례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것이 보천보전투가 가지고 있은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지휘관들은 나에게 지휘처를 시내에서 좀더 멀리 떨어진 곳에 정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나는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가전의 움직임을 순간마다 포착할 수 있는 곳에 지휘처를 정하고 내 자신을 전투의 도가니속에 밀어넣으려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

전투전야의 정경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지휘처근방의 농가앞마당에서 장기를 두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지하활동을 할 때 같으면 그 사람들에게 말도 걸어보고 훈수도 하였을 것이다.

정각 10시, 나는 권총을 높이 쳐들고 방아쇠를 당기었다. 10여 년 세월 조국의 동포들에게 말하고싶었던 모든 사연들이 그 한방의 총성에 담겨 밤거리에 울려 퍼졌다. 그 총소리는 우리 시인들이 노래하듯이 어머니조국앞에 드리는 상봉의 인사였고 강도 일제를 징벌의 마당으로 불러내는 호출신호였다.

나의 총성을 신호로 하여 사방에서 적기관들을 들부시는 사격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왔다. 먼저 이 고장 경찰들의 소굴이며 온갖 폭압과 만행의 아성인 경찰관주재소에 주되는 타격을 안기었다. 오백룡의 기관총이 주재소창문을 향해 사정없이 불을 뿜었다. 그때 우리는 산림보호구역에 적들이 많이 모이게 되어있다는 정보에 기초하여 거기도 드세게 공격하게 하였다. 순식간에 온 거리가 발칵 뒤집히었다. 전령병들은 연이어 황철나무 곁으로 달려와 전투정황을 보고하였다. 나는 그들이 왔다갈 때마다 인민들을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하라고 강조하군 하였다.

얼마 후에는 여기저기서 불길이 타래쳐 오르기 시작했다. 면사무소, 우편국, 산림보호구, 소방회관을 비롯한 여러 개의 적통치기관들이 일시에 화염에 휩싸였다. 거리전체가 여러 개의 대형조명등을 설치한 무대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우리 대원들은 우편국을 수색하다가 철궤속에서 일본각전을 많이 발견하였다. 그들은 보천보에서 철수할 때 그 각전들을 시내 여기저기에 다 줴던지었다. 주재소에 쳐들어가 ≪애국부인회≫의 이름으로 된 기관총을 노획해 가지고 나온 오백룡이 기뻐 어쩔 줄 모르던 모습도 꽤 인상적이었다.

나는 김주현을 앞세우고 거리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총소리를 듣고 움쩍도 못했는데 우리 선동원들이 부르는 구호를 듣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막 쓸어나왔다. 시인 조기천은 그때의 정경을 그리면서 ≪밤바다같이 웅실거리는 군중≫이라고 하였는데 그 표현이 참으로 적중한 것이었다.

군중이 우리를 둘러싸고 끓어대자 권영벽이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조국동포들에게 인사 겸 연설을 한마디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운집한 사람들을 둘러보니 별빛같은 시선들이 일제히 나한테로 쏠리었다.

나는 모자를 벗어쥔 다음 팔을 높이 들어 흔들면서 만장을 향해 필승의 사상으로 일관된 반일연설을 하였다.

≪여러 분, 나라가 해방되는 날 다시 만납시다!≫

연설을 다친 다음 이런 말을 남기고 화랑이 충천하는 면사무소앞을 떠났으나 가슴이 그냥 저려들었다. 칼로 살을 도려낸 것처럼 몹시도 아파났다. 우리는 저마다 이 자그마한 국경의 거리에 심장의 한 부분을 떼두고 가는 것이었다. 가는 심장과 남는 심장이 이별앞에서 소리없이 통곡하였다.

부대가 곤장덕에 올랐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구령도 없이 갑자기 대열이 흩어지는 것이었다. 대원들이 저마끔 흙을 움켜져 배낭속에 넣고 있었다.

지휘관들도 뒤질세라 조국의 흙을 간수하였다. 22만 평방킬로미터라는 나라의 땅덩어리에 비하면 한 줌의 흙이라는 것은 너무도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한줌의 흙에는 삼천리가 담겨 있고 2천 300만이 담겨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옹근 조국과도 같이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오늘은 우리 비록 한 거리를 치고 가지만 내일은 100개의 거리, 1000개의 거리를 치리라. 지금은 우리 비록 한 줌의 흙을 안고 가지만 내일은 온 나라를 다 해방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리라!

우리는 이런 맹세를 다지면서 압록강을 다시 건넜다.

보천보전투는 대포도 비행기도 탱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었다. 보총과 기관총에 선동연설이 배합된 평범한 습격전투였다.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우리측으로 볼 때에도 전사자는 없었다.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습전이어서 어떤 대원들은 오히려 아쉬워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유격전의 요구를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전투였다. 전투목표의 설정과 시간의 선택, 불의의 공격, 방화를 통한 충격적인 선동, 활발한 선전활동의 배합 등 모든 과정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입체적으로 맞물린 빈틈없는 작전이었다.

전쟁이나 전투의 가치는 군사적 의의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치적 의의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이런 이치로 볼 때 우리는 대단히 큰 싸움을 치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천보전투는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아세아의 제왕처럼 행세하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보기 좋게 후려친 통쾌한 전투였다. 인민혁명군은 조선총독부당국이 치안유지가 잘된다고 장담하던 국내에 들어가 한 개 면소재지의 통치기관들을 일격에 소탕해버림으로써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주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타격을 받은 셈이었다. ≪후두부를 꽝 하고 강타를 당한 것 같다.≫느니, ≪천 날 동안 베여들인 새초를 한 순간에 태워버린 듯한 한을 남겼다.≫느니 하는 따위의 군경 당사자들의 고백자체가 그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만국평화회의장 문전에 나타나 일본의 죄악을 고발하여 열강들에게 독립을 구걸하던 조선이라는 약소국에 세계 5대강국의 일원임을 자랑하는 일본군을 사정없이 쳐갈기는 혁명군대가 있으며 그 군사들이 일제가 축성한 ≪금성철벽≫을 바람처럼 넘어들어가 침략자들을 호되게 징벌하였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판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보천보전투를 통하여 일제란 칼로 내려치면 동강이 나고 불을 지르면 짚검불이나 북데기처럼 타번지는 일종의 폐기물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해와 달도 빛을 잃어가던 조국땅에 있어서 보천보 밤하늘에 타오른 불길은 민족의 재생을 예고하는 서광이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성일보≫를 비롯한 국내의 주요신문들은 일제히 인상적인 표를 달고 보천보전투소식을 전하였다.

≪도메이≫통신, ≪도꼬니찌니찌신봉≫, ≪오사까아사이신붕≫ 등 일본의 출판보도물들과 ≪만주일일신문≫, ≪만주보≫, ≪대만일신보≫를 비롯한 중국의 신문들도 이 전투를 광범히 취급하였다. 쏘련의 따쓰통신은 물론, ≪프라우다≫와 ≪크라스노예 즈나마≫도 이 전투를 위해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동방식민지 약소국의 변강에서 울린 한방의 총소리에 온 세계가 놀라움과 흥분을 금치 못하였다. 바로 이 무렵 쏘련에서 발간되는 잡지 ≪태평양≫에 ≪북부조선지역에서의 빨치산투쟁≫이라는 제목으로 된 글이 실렸는데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였다. 쏘련출판물에 우리의 이름과 투쟁소식이 크게 소개된 것이 이때부터였던 생각이 든다.

보천보전투에 대한 글은 에스페란트어잡지 ≪동방사자≫에도 실리었다.

≪동방사자≫의 발행취지는 일제의 야수성과 약탈상을 폭로하고 항일전쟁을 소개하며 동방문화를 선전하는데 있었다. 잡지에 제재된 모든 기사들은 대상국들에서 번역하여 다시 출판할 수 있었다. ≪동방사자≫의 이런 특징으로 하여 보천보전투소식은 이 잡지가 배포되는 많은 나라들에 광범히 전파되었다.

보천보전투는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민족적 독립과 자주권을 부활시키려는 우리 인민의 혁명적 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을 내외에 널리 보여주었다. 이 전투를 통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자기 활동의 전 노정에서 시종일관하게 견지해온 투철한 반제적 입장과 자주적 입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철저한 실행력과 유력한 전투력을 시위하였다.

우리는 또한 이 전투를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고 있은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진실하고 참된 애국자들이며 민족해방위업을 승리적으로 완수해나갈 수 있는 가장 헌신적이고 책임적인 투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조국인민들로 하여금 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항일혁명의 마당에 거족적으로 달려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일사천리로 내밀 수 있는 분위기를 지어주었다.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가장 주요한 의의는 조선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우리 인민들에게 조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싸우면 반드시 민족적 독립과 해방을 이룩할 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준 데 있다.

이 전투가 국내인민들에게 참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보천보를 들이쳤다는 소식을 듣고 여운형은 전투현장에 달려갔다고 한다. 그가 이 전투소식을 접하고 몹시 흥분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는 해방 후 평양에서 나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유격대가 보천보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보니 20여 년 세월 왜놈들치하에서 수모를 당해온 망국민의 설움이 순간에 다 녹아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 그때 보천보에 가보고 무릎을 쳤지요. 이제는 됐구나, 단군조선이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절로 나지 않겠습니까.≫

안우생의 말에 의하면 김구도 보천보전투에서 이만저만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안우생은 오래동안 상해임시정부를 따라다니면서 김구의 서기로 있었다.

어느 날 김구는 신문을 뒤적이다가 보천보전투소식을 읽게 되었는데 어찌나 흥분했던지 창문을 열어제끼고 배달민족은 살아있다고 몇 번이나 고함을 질렀다는 것이다.

김구는 그때 안우생에게 지금은 시국이 험한 때이다, 중일전쟁이 임박하니 운동을 한다던 사람들은 되골목으로 다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판국에 김일성이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까지 쳐들어가서 왜놈들을 전면으로 후려친 것은 얼마나 장쾌한 일인가, 인제는 우리 임시정부가 김일성장군을 후원해야겠다, 수일내에 백두산쪽으로 사람을 보내자고 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김구를 비롯한 해내외의 명망높은 인사들이 보천보전투를 계기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얼마나 신뢰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로 된다. 이런 풍조는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각계각층의 애국적인 인사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보천보전투가 있은 다음 적지 않은 민족운동자들이 우리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에 받은 인상이 해방된 다음에도 계속 유지되어 새 조선 건설을 위한 합작에서 크게 은을 내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보천보전투의 덕을 많이 본 셈이었다.

나의 팔도구시절의 잊을 수 없는 친구 김종항은 일본 도꾜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고학을 할 때 ≪아사히신붕≫지면을 통해 보천보전투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새벽 ≪아사히신붕≫지국에 나간 그는 주인으로부터 오늘은 책임량외에 100부의 신문을 더 배달해야겠다는 지령을 받았다. 무엇 때문에 지국이 그런 지령을 내리는지 알 수 없어 신문을 펼쳐보니 거기에 김일성부대가 보천보를 쳤다는 놀라운 기사가 실려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종항은 보천보를 친 김일성이 팔도구시절의 김성주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지식인으로서의 김종항의 고민은 보천보전투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애국청년들은 무장을 들고 왜놈들과 싸우는 데 나는 지금 도대체 이 일본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밥벌이를 하려고 대학을 다니는 게 과연 옳은 인생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김종항의 이런 자아반성은 유격대에 찾아가 무장을 잡으려는 심각한 결심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는 참군결심이 서자 지체없이 일본땅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후의 그의 행로는 항일유격대를 찾는데 전적으로 바쳐졌다. 김종항은 조국에 돌아와서야 보천보를 친 김일성이 소년시절의 김성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백두산으로 찾아가려는 열의도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참군시도는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우리의 상봉은 해방 후에야 실현되었다.

김종항의 실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보천보전투는 조선의 양심적인 지성인들의 인생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보천보의 밤하늘에 타오른 홰불은 조선의 모든 양심인들과 애국지사들에게 참된 인생의 좌표를 밝혀주는 등불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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