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17일(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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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보증서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우리가 김정숙을 도천리에 파견한 것은 1937년 3월, 서강회의 전야였다.

그 해는 어디서나 사람들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이제순도 박달도 권영벽도 김재수도 다같이 사람을 요구하였다. 그 요구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바로 김정숙의 도천리파견이었다.

이제순의 신흥촌과 박달의 큰웅뎅이마을을 연결하는 지하선이 함북도 전지역과 함남도의 동부지구에 우리의 지하조직망을 펼치기 위한 통로였다면 도천리와 신파를 연결하는 지하선은 함남도 서부 및 남부 지역과 국내의 내륙지대로 우리의 조직망을 펼치기 위한 통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도천리는 장백현 하강구지역의 중심위치에 있는 부락으로서 하강구지구는 물론이고 임강현을 포함한 남만의 광활한 지역에 조국광복회망을 펼쳐나가는 데서나 그 망들과의 연계를 짓는데서 중심거점으로 삼을 수 있는 곳이었다.

도천리의 맞은편에 있는 신파는 우리 나라 노동계급의 대군이 집결되어 있는 흥남공업지대와 연계를 맺는데 유리한 위치에 놓여있는 곳으로서 동해안 남부지역과 내륙깊이에로 우리의 지하조직망을 뻗치는데서 아주 좋은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지점이었다.

우리가 신파를 특별히 중시하게 된 것은 국내지하선통로를 비교적 용이하게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과도 관련된다.

신파에는 장해우(장효익)가 있었다. 우리 밀영에 찾아온 어떤 사람들은 장해우가 감방밥을 먹고 나온 다음에는 일개 소시민으로 전락되고만 것 같더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신파 지하세계의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타관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권영벽의 보고를 통하여 장해우가 소시민으로 전락된 것이 아니라 혁명을 하고 있으며 그가 벌써 김재수와도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해우는 독립운동자들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아버지와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독립운동자들과 망명자들이 많이 집결되어 있는 연해주쪽에 자주 왕래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우리 집에서 한두 밤씩 묵어가곤 하였다. 그가 찾아올 때마다 아버지가 겸상을 하고 반주를 권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가 1920년대 중기에 독립운동 관련자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형기도 알 수 없었고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경위도 알 수 없었다. 해방 후에야 나는 공판 때 그에게 차례진 형기가 7년이었으나 소화천황의 즉위일과 관련된 ≪은사≫로 그가 2년 동안만 형을 지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운동 경험이 풍부하고 나와 친분상으로도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장해우가 신파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 사업의 전도를 위해서 좋은 징조였다. 그 후 도천리지하조직을 통해 요해해 본 데 의하면 그는 성미가 약간 이지러졌을 뿐 속내는 여전한 것 같다고 하였다. 장해우가 기맥이 통하면 유력한 국내통로가 열릴 수 있었다.

장해우와의 공작에 누구를 파견할 것인가? 누구를 보내면 그 유망한 국내통로를 비교적 용이하게 개척해낼 수 있겠는가?

마땅한 적임자를 선발하기 위하여 나도 김평도 머리를 썼다. 7연대 정치위원이었던 김평은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는 비밀사업까지 겸하여 맡아보고 있었다.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밤 나는 김평을 숙영지 우등불가에 불렀다. 그것은 우리가 되골령을 넘어 무송현 양목정자 밀영쪽으로 북상행군을 하고 있던 때였다. 초강초강하던 김평의 얼굴은 연속되는 전투와 장설행군에 시달려 몹시 수척해진 것 같았다.

신파통로 개척자를 내정했소?≫

나는 며칠 전에 던졌던 질문을 되풀이하였다. 김평은 그날 시원스런 대답을 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입가에 자신만만한 표정이 비끼었다.

≪내정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깜장정숙이가 그 중 적당한 것 같습니다.≫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하였다. 내가 점찍은 대상과 신통히도 같았기 때문이다.

≪깜장정숙≫이란 김정숙을 말한다. 우리 부대에는 정숙이란 이름을 가진 여대원이 셋이나 되었다. 장정숙, 박정숙, 김정숙이었다. 누가 ≪정숙동무!≫하고 부르면 세 정숙이가 동시에 ≪예≫하고 대답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 광경이 이따금씩 즐거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지만 생활에서 불편과 혼란을 가져다주는 점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전우들은 그 세 정숙이를 가리켜 각각 ≪씩씩이정숙이≫, ≪퍼런정숙이≫, ≪깜장정숙이≫라고 구별하여 불렀다.

≪씩씩이정숙이≫라는 장정숙의 별명은 일할 때나 행군할 때 숨이 차서 씩씩거리는 그의 특징을 포착해서 지은 것이었다. 어떤 투사들은 그의 일거일동이 항상 기운차고 씩씩한데서부터 그런 별명이 생겼다고도 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 두 가지 경우가 다 들어맞는 것 같다. 박정숙에게 ≪퍼런정숙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그가 유격대에 처음 들어왔을 때 푸른색깔의 치마를 입은데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깜장정숙이≫라는 김정숙의 별명도 그와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유격구에서 생활할 때에는 물론, 혁명군에 입대할 때까지 단벌 검정치마를 입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신파개척의 중임을 꽤 감당해내겠소?≫

나는 김평이 김정숙을 적임자로 선택하게 된 사유를 알고 싶어 넌지시 의문을 던져보았다.

≪제가 연길현 팔도구에서 당사업을 할 때 정숙이는 저의 지도밑에 공청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빈틈이 없습니다. 게다가 여성중대의 정치사업경험도 있지 않습니까. 본인의 의향이 어떨는지는 모르겠지만... ≫

나도 김평의 견해에 동감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그때까지 인간 김정숙을 완전무결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우리 부대에 배속된 것은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서 망국민의 생활을 하였고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하여 혁명에 뛰어들었다. 내가 김정숙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소왕청 마촌에 있을 때였다. 왕우구 북동에 있다가 왕청에 온 연대원들이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말마디들속에 윤병도의 이름과 함께 그의 이름이 두간두간 튀어나왔다. 그 나비같은 아이들은 자기네 아동단 지도원에 대해 굉장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에는 연길현 아동국장으로 사업하다가 왕청현 아동국장으로 소환되어온 이순희가 종종 김정숙을 회상하였다. 윤병도도 이따금 그를 화제에 올리었다. 어느 동네에 가나 한두 명씩은 꼭꼭 만나게 되는 ≪정숙≫이라는 그 평범한 이름은 그렇게 되어 내 기억속에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김정숙에 대한 뭇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가 대단히 담차고 이악하면서도 마음씨가 무척 곱고 동정심이 남달리 강한 처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정숙에 대한 왕청시절의 나의 지식은 대체로 이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연길현 아동단연예대가 왕청에 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40개의 붉은 넥타이를 선물로 보내주었다. 그때 8구 공청위원 겸 현 아동단연예대 책임자로 활동하던 김정숙은 그 선물을 받고 몹시 감격하였다고 한다.

김정숙은 마안산밀영에 와있던 4중대의 성원들 가운데서 좌경분자들이 ≪민생단≫딱지를 함부로 붙일 수 없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좌경분자들은 그를 무턱대고 ≪민생단≫혐의자들의 중대에 배속시키었다. 너도 조선사람이니 혐의가 있건 없건 ≪죄≫진 조선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는 심보였다고 본다.

김정숙은 그 불쾌한 처사를 오히려 흔연히 받아들이었다. 그는 죄없이 죄를 들쓴 전우들과 생사운명을 같이 할 결심이었다.

그는 ≪민생단≫혐의자들과 함께 한 병실에서 숙식하면서도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외형상 남보다 특별히 뛰어난 데가 없는 그 작달막한 몸매의 수수한 여대원이 온 중대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이유를 나는 그 후의 생활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김정숙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남을 위해 자기를 깡그리 바친 삶, 그것이 바로 김정숙이었고 그가 걸어온 인생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를 희생시키면서 남을 위해주었다. 먹을 것이 차례지면 자기보다 체통이 크거나 나어린 대원들에게 덜어주었다. 정숙의 식사몫을 제일 많이 받아먹은 것은 기송동생의 짝패였다는 4중대 1소대의 곱슬머리 꼬마대원이었을 것이다. 김정숙은 남들이 다 잠든 때에도 남성대원들의 꿰진 옷이나 신발을 기워주고는 하였다.

동지들과 공동위업에 대한 헌신성, 이것은 김정숙의 성격에서 핵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가 지니고 있는 인간적 매력이기도 하였다.

나는 임춘추, 김정필, 박수환을 비롯한 연길출신의 대원들에게서 반≪민생단≫ 태풍이 온 동만을 휩쓸던 시기 능지영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던 ≪민생단≫ 혐의자들에게 매일같이 먹을 것을 가만가만 날라다준 어린 처녀가 있었는데 바로 그 처녀의 덕에 억울하게 갇혔던 수난자들이 굶어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그 어린 처녀가 김정숙이었다는 것이다. ≪민생단≫혐의자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실이 드러나는 날에는 그도 ≪민생단≫ 감투를 뒤집어 쓸 수 있었다.

내가 김정숙을 처음 본 것은 삼도만유격구에서였지만 그의 경력과 가정애사를 구체적으로 들은 것은 1936년 봄 만강에 가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나는 동강회의에 내놓을 보고문 준비를 끝내놓고 개운해진 기분으로 경계초소들을 돌아보며 강기슭에 나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향수를 자아내는 청아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노래소리가 나는 웃쪽 시냇가에 올라가니 버들숲속에서 여대원 둘이 빨래를 헹구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대원이 김정숙이었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김정숙의 고향이 함경북도 회령이라는 것과 그가 5살인가 6살 되던 해에 온 일가가 고향을 떠나 만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령사람들은 자기네 고장을 함북명승이라고 자랑한다. 6진중의 하나로 알려진 이 유서깊은 요새지가 항일혁명시기에는 일본군 나남 19사단 소속의 75연대 본부와 비행대가 자리잡은 군사적 요충지로 우리의 작전지도에도 큼직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 회령사람들은 자기네 고장에서 나운규와 같은 영화 재사가 나오고 조기천과 같은 유명한 시인이 배출된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의 고향 도시가 유명한 백살구산지라는데 대해서도 자랑하고 있다. 백화난만한 봄날 회령을 찾는 사람들은 온 시가지가 백살구꽃속에 묻힌 풍경을 구경하게 된다.

하지만 김정숙은 그처럼 아름다운 고장에서 몇 년밖에 살지 못하였다. 철이 들면서부터 그의 눈에 비쳐든 것은 마적들이 먼지를 뿌옇게 일구며 싸다니는 북간도의 거치른 산야였다.

김정숙의 부모형제자매들은 그의 곁을 차례차례로 떠나갔다.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자였다. 적들에게 붙잡혀 악형도 많이 받고 풍찬노숙하는 가운데 동상도 심하게 입은 분이었는데 그 어혈로 중병에 시달리다가 일찍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불우한 운명의 낭떠러지에 선 아버지는 사랑하는 막내딸 정숙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짓물린 눈귀를 눈물로 적시며 남쪽 하늘가를 자꾸만 더듬었다.

≪나는 죽더라도 조선에 묻히고 싶었다. 흙이 되더라도 조선의 흙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소원마저 이룰 수 없을 것 같구나. 너는 어데 가서나 고향을 잊지 말고 조선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조선을 위해 싸워라.≫

김정숙이 15살 되던 해에는 온 간도땅을 피바다에 잠근 침략자들이 부암동에 달려들어 마을에 불을 지르고 그의 어머니와 올케를 참혹하게 학살하였다.

올케가 그에게 남긴 것은 아직 걸음마도 채 떼지 못한 젖먹이였다. 그는 그때부터 젖동냥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배고파서 보채는 조카애를 안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10리도 더되는 이웃동네에까지 가서 젖을 구걸했다.

김정숙은 애써 키워오던 조카애와도 생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가 유격대로 들어갈 때 지하공작임무를 받고 8도구 광산에 가기로 되어있던 오빠 김기준이 그의 품에서 조카애를 억지로 앗아냈던 것이다. 김정숙은 그 애를 유격구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결심하였으나 오빠가 종시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출발을 하루 미루었다.

다음날 새벽 ≪토벌대≫가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치었다. 총소리가 울리자 그는 무작정 조카애를 안고 산으로 올랐다. 그 길로 그냥 유격구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오빠가 숨가쁘게 뛰어와 혁명할 각오가 덜 되었다고 그를 꾸짖었다. 혁명에 나섰으면 먼저 혁명부터 생각해야지 자기 집 식구나 생각해서야 어떻게 혁명을 하겠는가, 애걱정은 말라고 하였다.

오빠는 우는 애를 안고 돌아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짜기로 내려갔다. 아마 그도 말은 모질게 하였지만 눈물이 나서 누이동생을 돌아보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이 두 남매의 영원한 이별로 되었다.

김정숙은 그 후 오빠도 조카애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오빠는 광산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체포되어 고문 끝에 희생되었고 조카애는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안개속에 사라진 새가 되었다. 단 한 점의 살붙이로 남아있던 동생 기송이마저 부암동에서 삼도만유격구로 이동해가는 장재촌인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동단 신호나팔로 적 ≪토벌대≫를 유인해가다가 적의 흉탄에 맞아 최후를 마치었다.

김정숙은 해방 후에도 동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지었고 거리에서 10대의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 조카애도 살아있으면 저 애들만큼 컸겠는데 하면서 남모르게 한숨을 쉬고는 하였다.

김평과의 담화가 있은 후 나는 김정숙을 사령부에 불렀다.

≪김재수동무는 통신원들을 통하여 지하공작에 능숙한 사람들을 더 보내달라고 벌써 여러 번 요구해왔소. 날파람도 있고 지하공작경험도 많은 사람이지만 관할구역이 하도 넓다나니 상당한 정도로 곤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소. 그는 특히 부녀들과의 사업을 추켜세우지 못해서 무척 안타까와 하고 있소. 부녀들을 지하조직에 끌어들이자면 그들을 통제하고 있는 노인들과의 사업을 잘해야겠는데 그게 간단치 않다는거요. 동무는 도천리에 거점을 잡고 하강구 일대의 부녀사업을 지도하면서 김재수동무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방조해주어야겠소.

하강구일대의 사업을 추켜세운 다음에는 신파에 건너가서 장해우와 손을 잡고 삼수지대에 강력한 지하조직망을 꾸리시오. 그리고 흥남, 함흥, 북청, 단천, 성진, 원산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의 공업도시들과 농어천들에 조국광복회조직망을 빠른 속도로 확대해 나가시오.

국내에 가서 비밀결사활동을 벌이는 것은 인민혁명군의 보호하에 있는 장백에서 군중공작을 하는 것보다 몇 곱절 더 위험하고 힘든 일이요. 각별히 조심하여 일을 잘해주시오.

우리는 동무가 이 어려운 과업을 능히 수행하리라는 걸 믿소. 곤란에 부닥칠 때마다 동지들에게 의거하고 인민들에게 의거하시오.

이것은 내가 김정숙을 도천리에 파견하면서 한 말의 일부이다.

도천리지구에는 이미 1936년 늦여름부터 우리의 공작선이 뻗어있었다. 정동철의 말에 의하면 베를린 올림픽 경기대회 소식이 도천리 산촌에까지 날아들던 그 무렵에 김원달이라고 하는 낯선 ≪도박꾼≫이 하강구 일대에 나타나 청년들속에 투전바람을 일구며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가 투전꾼들한테 주로 해대는 이야기는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1등과 3등으로 달린 것은 조선사람이었으나 시상식 때 깃발게양대에 오른 것은 일장기였다는 것이다.

작은 키에 동작이 민첩하고 영리하게 생긴 그 젊은 ≪도박꾼≫이 바로 우리가 파견한 정치공작원 김재수였다. 그는 모험소설의 줄거리와도 같은 특이한 투쟁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왕우구쏘비에트초대회장, 연길현당위원회서기, 동만특위조직부장 ㅗㅗㅗ 이것이 1930년대 전반기의 그의 행로를 한두 마디로 압축할 수 있는 경력이었다.

그런데 순조롭던 그의 인생행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을 뻔한 곡절이 생기었다. 동만특위가 나자구로 옮겨갔을 때 그는 다른 특위성원들과 함께 그만 적들에게 체포되어 헌병대에 끌려갔다. 적들은 김재수와 주명에게 전향문을 씌우고 각각 자기네 일을 도와달라고 강요하면서 임무를 주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체포당했던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특위사업을 계속하라. 혁명조직들도 계속 만들라. 우리는 그것을 상관치 않겠다. 다만 새로 끌어들인 조직성원명단을 정상적으로 넘겨주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적들은 특위급의 간부가 전향을 하였다고 쾌재를 올리었으나 김재수는 혁명을 다시 하기 위하여 가전향하고 가짜서약을 맹세하였을 뿐이다. 그는 적들의 비밀문건과 공작자금을 탈취해가지고 동만특위에 찾아가서 사건의 전말을 솔직하게 보고하였다. 뒤늦게 특위를 찾아간 주명은 적들이 짜준 각본대로 조직을 속이었다. 그 대가로 그는 응당한 징벌을 받았다.

김재수는 용서를 받았지만 그대신 당대열에서 제거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죽은 목숨이 되었지만 도덕적으로도 매장당한 몸이 되었다. 일조에 모든 것을 다 잃고 투쟁권 밖으로 밀려난 그는 홀로 산골에 들어박혀 죽음보다 못한 가전향을 후회하며 번민속에 모대기었다.

어떠한 역경속에서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과 의지, 정신도덕적 순결성을 고수하는 것을 가장 큰 명예로, 최상의 미덕으로 간주하는 혁명가들의 세계에서는 가전향도 허용할 수 없는 하나의 범죄행위로 공인되어 있다. 비록 가짜로 전향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적들에게 역선전할 구실을 마련해주고 진짜 변절자들에게 변절의 전례와 변명할 여지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혁명가로서의 양심과 지조에서는 변화가 없다 하더라도 적들앞에 전향을 선언하는 것은 찬양할만한 것이 못되는 것은 사실이다.

김재수는 적들을 속여넘기고 살아나가서 혁명을 계속하면 그만이라는 단순한 생각에만 집착했던 나머지 혁명가로서의 숭고한 도덕적 규범을 어긴 것이다. 그는 번민 끝에 우리가 마안산에서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사르고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범죄≫행위를 완전히 백지화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나를 찾아와 실천투쟁을 통하여 자기의 결백성을 증명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를 처단하든지 살리든지 그건 결심대로 해주십시오. 그렇지만 나는 혁명을 하고 싶습니다. 이대로는 정말 더 못견디겠습니다.≫

그때 김재수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이렇게 하소하였다.

나는 김재수를 믿었다. 그래서 그에게 지하공작임무를 주어 장백현 하강구 방면에 파견하였다. 우리는 김재수가 다시는 자기의 행적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가 조직앞에 솔직하였다는 것은 혁명적 양심을 지니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나는 그가 지니고 있는 그 양심을 믿었다. 김재수는 협애한 생각에 지배된 나머지 한번은 가전향하였으나 그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죄악으로 되는가를 깨닫고 체험한 이상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두 번 다시 치욕의 길을 택하자고 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였다.

그는 가명을 가지고 천상수를 거쳐 도천리에 침투하였다. 처음에는 천상수의 조국광복회 지회장 이용술이 믿을만한 인물들이라고 소개하여준 정동철, 김두원, 김혁철(김병국) 등을 요해하느라고 투전판을 벌려놓았다. 하강구일대에는 그의 투전솜씨를 따를만한 사람이 없었다. 김재수는 투전을 할 때마다 토씨를 끼고 그 토씨속에 화투장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번개같이 눈속임을 하였다. 가보나 장땅 같은 높은 수가 나올 때에는 건들건들한 소리로 ≪어랑타령≫까지 불렀다.

내막을 알리 없는 늙은이들은 저 김원달인지 건달인지 하는 난봉꾼이 젊은것들을 다 못쓰게 만들어놓는다고 아우성이었으나 그들이 아부재기를 치는 사이에 투전판에서는 조직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 조직은 후에 조국광복회 장백현하강구위원회의 핵심조직으로 전환되었다. 김재수의 정력적인 활동에 의하여 1937년초까지 도천리를 중심으로 한 하강구의 거의 모든 마을들에 조국광복회조직들이 생겨났고 그 후에는 생산유격대도 조직되었다.

도천리로 파견된 김정숙이 처음으로 김재수와 접선한 곳은 바로 천상수사람들이 ≪안골집≫이라고 부르는 이용술의 집이었다. 그 집은 여덟 형제자매가 함께 모여사는 보기 드문 대가정이었다. 이 집에서 조국광복회 천상수지회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의 지회장사업을 넷째인 이용술이 맡아보았다.

우리가 그 집 신세를 많이 졌다. 많은 우리 동무들이 지방공작을 나갈 때마다 그 집 신세를 톡톡히 지고는 하였다. 나도 1936년 말과 1937년 여름에 걸쳐 세 번씩이나 그 집에 폐를 끼쳤는데 첫 번째 갔을 때에는 사흘이나 묵었다. 화전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았지만 그 집 사람들의 인심이 대단히 좋았다.

이용술의 맏형은 김재수의 부탁을 받고 우리 부대의 도장을 두 개나 새겨보냈다. 그 도장을 우리가 퍼그나 오래 사용하였다.

김정숙은 ≪안골집≫에 보름가량 머무르면서 지회사업을 방조하는 한편 사민으로 변신하여 공작할 준비를 하였다.

김정숙은 엄옥순이라는 가명으로 자기를 위장한 다음 무산에서 살다가 오는 이주민 가족으로 가장하고 도천리에 내려갔다.

자주색 저고리에 곤색 세루치마, 목이 긴 버선, 그것이 ≪무산집 새애기≫ 엄옥순이 도천리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차림새였다. 함경도사람들은 젊은 여인들을 새애기라고 불렀다.

도천리는 신파대안에서 30리쯤 떨어져있는 산간마을이었다. 출생직후부터 내내 도천리 한곳에서만 20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경력을 가진 위인찬의 말에 의하면 이 고장을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들은 ≪한일합병≫ 직후 조선에서 건너온 독립운동자들이었다고 한다.

1930년 초까지만 해도 도천리는 독립군들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그 후 농조운동에 참가하였던 선각자들이 국내에서 집단적으로 망명해오면서부터 도천리 일대에서는 공산주의사상조류가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6년 하반기부터는 인민혁명군의 소부대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인민들에게 혁명바람을 불어넣었다. 도천리와 그 주변은 조국광복회조직들로 뒤덮이었다.

인민혁명군의 왕래가 잦아지고 도천리와 그 부근에서 유격대들이 연전연승의 전과를 올리는 가운데 이 일대에서는 인민들의 기세가 고조되고 투쟁열의가 비등되었다. 반면에 적들은 공포에 떨었다.

적들의 공포상을 보여주는 이런 일화가 있다.

도천리 학교앞에 샘물이 하나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에도 그 샘물을 마시면 너무도 차서 이가 시릴 지경이었다. 일본경찰들이 그 샘물이 특별히 좋다는 소문을 듣고 원인을 해명하려고 저울에 물의 중량을 달아보았는데 다른 물보다 무게가 더 나갔다.

≪그런 샘치물을 마시니 도천리 새끼들이 눈깔이 새까만 게 또릿또릿하구나. 모두 빨치산 새끼들이다!≫

적들은 이렇게 뇌까리면서 샘물을 메워버리려고 하였다.

그 소문을 듣고 정동철구장이 경찰들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물은 유격대들이 가며오며 마시는 물인데 그분들이 샘치가 없어진걸 알면 나리들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나요?≫

적들은 감히 샘물을 메꾸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도천리는 군중토대가 좋고 혁명역량이 강한 곳이었다.

김정숙은 농사일로 바쁘게 보내면서도 밤이면 나들이를 다니며 마을사람들과 얼굴을 익히었다. 얼굴을 익힌 다음에는 이름을 익혀두고 무슨 북청집이요, 갑산집이요, 흥남집이요 하는 집이름도 익혀두었다. 그가 후에 하는 말에 의하면 한 주일 동안에 마을사람들의 이름도 다 외우고 집이름도 다 외워두었다는 것이었다. 김정숙은 이 별치않은 일을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공정으로 보았다.

≪교원들도 학급을 맡으면 먼저 출석부를 놓고 학생들의 이름부터 익힌다질 않습니까. 그래야 학생들속에 들어가니까요. 정치공작원도 교원과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름을 모르고야 인민들속에 들어가나요.

그가 도천리공작을 마치고 돌아와서 김평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사령부에서 받은 과업대로 자기 사업의 중심을 부녀공작에 두고 그들과 열심히 접촉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천리에는 여성들의 조직이 없었다. 대다수의 여자들은 집안살림에 파묻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노인들이 그들을 몹시 구속하고 있었다. 간혹 여자들이 글공부를 하고싶어 야학방문앞에 가서 기웃거리기만 해도 늙은이들은 큰 변이라도 난 듯이 야단법석을 하였다.

김정숙은 도천리에서 여성혁명화를 빨리 다그칠 수 있는 기본열쇠가 노인들과의 사업을 잘하는데 있다는 것을 판단하였다. 사실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에 비해 노인들은 모든 면에서 매우 완고하였다. 그들은 신세타령은 하면서도 자기 운명을 개척할 궁리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노인들을 각성시키지 않고서는 젊은 세대들을 조직화하는 사업이 잘돼나갈 수 없었다. 실지로 김정숙은 노인들과 부녀자들 때문에 애를 먹은 실례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길림과 고유수, 오가자 일대에서의 우리의 활동경험이 이것을 잘 실증해주고 있다. 에서도 서술한 바이지만 오가자를 혁명화할 때에는 ≪변트로츠키≫영감이 암초로 되었다. 그 노인을 휘어놓지 않고서는 오가자를 혁명화할 수 없었으며 도대체 조직을 내올 수 없었다. 우리는 ≪변트로츠키≫영감을 쟁취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곳에 반제청년동맹을 내올 수 있었다. 고유수의 현하죽도 우리의 중요한 사업대상이었다. 현하죽이 우리 아버지의 친구인데다가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는 고유수에 갈 때마다 선참으로 그에게 들려 인사도 하고 어머니의 안부도 전하고는 하였다.

김정숙은 원래 노인들을 무척 존경하고 우대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도천리에서 노인들과의 사업을 하던 경험을 들어보았는데 의식적인 공작이라는 감을 별로 느낄 수 없었다.

김정숙은 사람들을 공작대상이나 교양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순수한 보통인간으로 대하였다. 설사 공작상 필요로 쟁취하지 않으면 안될 인물과 교제를 하는 경우에도 그를 피교양자의 위치에 놓거나 자기를 교양자의 위치에 놓지 않고 정든 이웃을 대하듯이 예사롭게 대하였다. 그 과정에 그는 인민들의 신임을 받는 딸이 되고 이웃이 되었다. 이것이 지하공작원으로서의 김정숙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나도 일생을 통해 절실히 체험한 바이지만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려면 자신을 먼저 인민의 아들딸, 인민의 충복, 인민의 벗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동시에 인민을 자기의 부모, 자기의 형제, 자기의 선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기를 인민의 선생, 인민 위에 군림한 관료, 인민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인민들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인민의 신임을 받을 수가 없다. 인민은 그런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김정숙은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던 집에서도 그냥 앉았다가 일어서는 법이 없이 나무도 패주고 물도 길어주고 방아도 찧어주었다. 마을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김정숙의 정성은 참으로 돌위에 꽃이라도 피울 수 있으리만큼 지극하였다. 이 과정에 노인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도천리혁명화의 돌파구는 이렇게 열리었다.

한번은 유가골지주가 열병에 걸린 부엌데기소녀를 산중초막에 내버린 일이 있었다. 아무도 그 불쌍한 소녀를 돌봐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런 사연을 알게 된 김정숙은 꺼리낌없이 초막에 찾아가서 소녀와 침식을 같이하며 병구완을 해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 동무들이 초막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살릴 가망도 없는 아이 하나 때문에 위험천만한 자선모험을 하다가 감염되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사령부에서 준 큰 임무는 어찌하며 그 책임은 누가 지겠는가, 돌봐주더라도 침식을 같이하는 것만은 제발 그만두라고 말리었다.

김정숙은 웃으면서 그들을 안심시키었다.

≪걱정말고 돌아가세요. 목숨이 두렵다고 아이 하나 살려못낸다면 나라는 어떻게 찾고 인민은 어떻게 구원해내겠어요? 인민을 살리자고 내댄 목숨인데 두려울 것이 없어요.

동무들은 김정숙을 그 초막에서 끌어내지 못하였다.

김정숙은 끝끝내 그 불쌍한 소녀를 살려냈다. 도천리사람들은 마침내 그를 ≪우리 옥순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소금에 절인 고등어 한 마리가 생겨도 그들은 ≪우리 옥순이≫를 찾았고 갓난애기의 백날잔치를 차려도 ≪우리 옥순이≫부터 찾았다. 김정숙은 그들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딸로 되었고 손녀로 되었고 누이로 되었고 언니로 되었다.

그는 마을사람들의 생활을 다심히 보살펴주면서도 하강구지역의 혁명화를 다그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김재수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는데 심중한 주의를 돌리었다.

그 해 2월 김재수는 우리가 산에서 내려보내준 ≪3·1월간≫을 조국광복회조직들에 배포해주다가 그만 마지막 한 부를 몸에 지닌 채 적들의 눈에 걸려들었다. 경찰서에 잡혀간 그는 글 한자 읽을 줄 모르는 머저리 시늉을 하면서 떼를 썼다.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얻은 책이오다. 담배종이를 하자고 그러는데 어째 빼앗소? 그걸 빨리 도루 주오다.≫

적들은 그를 천치로 인정하고 일단 놓아주었다. 그러나 뒤에 돌아앉아서는 그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였다.

한때 김원달이라는 가명을 가지고 하강구일대를 왔다갔다하던 김재수는 도천리 본부락에 사는 이효준이라는 사람의 집에 거처를 옮기면서부터 그의 4촌형으로 가장하느라고 ≪준≫자 돌림의 이름을 고르던 끝에 이영준으로 변성명을 하였다.

김정숙은 김재수와 함께 적들이 뒷조사를 걷어치우게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책을 의논하였다. 두 사람은 적들에게 ≪이영준의 천치성≫을 확증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들이 짠 각본에 따라 이튿날 이효준이네 집에서는 동네방네를 떠들썩하게 하는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새파랗게 젊은 이효준의 처가 자기 집에 홀아비로 얹혀사는 ≪사촌시형≫ 이영준을 방치로 때려 내쫓는 해괴망측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 여자는 머저리 시형이 집안물건들을 계속 훔쳐내다가 투전을 붙어먹어서 자기네는 알거지로 되었다고 마구 고아대며 대성통곡하였다.

처가 집에서 소동을 벌인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이효준은 경찰서에 찾아가서 투전밖에 모르는 머저리 4촌형 때문에 패가망신을 하게 됐으니 호적부에서 형이름을 지워버리고 내쫓게 해달라고 애걸하였다.

한편 ≪머저리 시형≫도 ≪3·1월간≫잡지 한 권을 뻐젓이 들고 경찰서에 찾아가서 ≪나리님들이 좋아하는 이 책을 드릴 테니 제발 우리 효준이하구 우리 제수가 나를 때리지 말구 내쫓지두 말게 해주시오다≫하고 사정을 하였다.

≪3·1월간≫을 본 경관들은 눈들이 휘둥그래서 그것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따져 물었다.

김재수는 이전 날 유격대와 일본군이 접전한 삼개골 싸움터에서 얻었다고 대꾸하였다.

≪그 전에 나리님들이 탐나서 빼앗은 그 책두 실은 거기서 얻은 건데 우리 마을 포대산에서 얻었다구 꽝포를 났소다.≫

경관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자 김재수는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들고 히죽히죽 웃었다.

≪그 자리에 가면 이런 시계랑 만년필이랑 돈이랑 별의별 것이 잔뜩 널려져있는데 그 걸 대주면 남의 손에 다 들어가고 말지 않소다? 우리 동생네가 나를 내쫓지 못하게만 해주면 내 나리님들한테 노다지가 있는 자리를 대주겠소다.≫

경관들은 그것만으로도 이영준의 천치성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적들은 뒷조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정동철, 유영찬, 김혁철, 이철수를 비롯한 도천리의 선각자들과 혁명적 군중은 김정숙의 지하공작과 신변호위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였다. 그들은 김정숙을 위해 신파에 건너가서 그가 읽을 수 있는 신문까지 정기적으로 얻어왔다. 정동철이 신파 조직성원인 잡화점 주인에게 구독료를 주면 그는 자기 이름으로 신문을 신청하였다. 신문이 나오는 족족 포장지 대용으로 상품을 싸서 넘겨주든가 그대로 넘겨주었다. 그래서 김정숙은 정기적으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받아볼 수 있었다.

정동철은 관혼상제가 있을 때마다 김정숙을 초청하여 도천리에 찾아오는 유격대 공작원들과도 만나게 해주고 다른 지방에서 찾아오는 지하조직의 연락원들과도 만나게 해주곤 하였다.

1937년 여름에 그의 집에서는 생남잔치를 차리었다. 그 잔치에는 유격대에서 갓 파견되어온 ≪퍼런정숙≫(박정숙)을 비롯한 여러 명의 정치공작원들과 지하조직원들이 참가하였으며 순사며 구장이며 밀정들도 참가하였다.

정동철은 적들의 감시로부터 공작원들을 철저히 위장시키기 위하여 그들끼리 서로 맞절을 시키었다. 김정숙은 관례대로 박정숙과 맞절을 하였다. 그는 ≪퍼런정숙≫앞에 엎드려 ≪처음 뵙겠습니다≫하면서 큰절을 하였다. 김정숙은 밤마다 우물가에 나가서 물동이를 이는 법과 물동이를 이고 걸어가는 법도 숙달하였다. 단오명절을 앞두고는 여러 날 밤을 그네뛰는 연습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여성지하공작원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필수적 공정으로 여기었다.

그가 도천리를 혁명화하는데서 중심고리로 잡은 것은 군중을 의식화하여 혁명조직에 묶어세우는 사업이었다. 김정숙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내걸고 우리의 혁명사상을 정력적으로 선전하였다. 이런 과정에 지도핵심들을 소문없이 키워냈다. 그리고 그 핵심들로 반일청년동맹도 조직하고 부녀회도 조직하였다. 조용하던 산골마을은 드디어 우리의 위력한 활동지반으로 되었다. 김정숙은 가는 곳마다에서 인민들은 옹군애병사상으로 교양하였으며 부녀회원들, 청소년들과 함께 원호물자들을 준비하여 부대에 보내주고는 하였다. 그가 원군교양을 얼마나 잘하였던지 도천리부락에서는 산동지방에서 온 중국이주민들까지 발동되어 인민혁명군에 원호물자들을 보내주었다. 아동단원들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총탄을 수집하였다.

원군운동의 최고형태는 참군이었다. 김정숙은 조국광복회 하강구위원회의 위원들과 함께 조직을 통하여 장악한 핵심들 중에서 파악있는 청년들을 선발하여 인민혁명군에 참군시키었다. 정동철의 회상에 의하더라도 하강구일대에서 혁명군에 입대한 청년들의 수는 무려 1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도천리부락에서만도 김혁철, 유영찬, 이철수, 최인덕, 한창봉 등 10여명이 입대하였다.

우리 혁명의 1세대인 한창봉은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연대를 이끌고 낙동강을 희생적으로 도하하였으며 강대안의 산고지들을 견지하는데서 특출한 군공을 세웠다.

김정숙의 지도를 받던 세 아이를 가진 요방자의 부녀회회장 윤어복은 두 살난 아이를 업고 80리도 넘는 우리 밀영에 찾아와 자기를 유격대에 보내달라고 강떼를 썼다.

참군열도가 어찌나 높았던지 어떤 집에서는 자식을 유격대에 보내고는 그 자식의 가짜무덤을 만들어놓고 제사까지 지냈다. 유격대 가족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심하다나니 그런 방법으로라도 적들을 속여넘기자는 것이었다.

김재수의 ≪3·1월간≫ 배포탄로사건이 있은 후 얼마 안되어 우리는 김정숙의 신파공작을 뒷받침해줄 목적으로 최희숙을 요방자에 파견하였다. 최희숙이 오자 김정숙은 도천리를 비롯한 하강구 지구의 부녀회, 청년회, 소년회 조직들에 대한 지도를 그에게 맡기고 신파공작에 주력하였다.

김정숙의 신파공작은 장해우와의 사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장해우는 신파지구에서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성원들과 함께 반일혁명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에 도천리구장이며 조국광복회특수회원인 정동철과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성원들이었던 장해우, 임원삼, 서재일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지고 호상기맥이 통하기 시작하였다.

서재일은 세탁공으로 일하면서 조직공작에 투신하였으며 김정숙과의 연락임무도 수행하였다.

장해우와 그 조직들의 동향을 구체적으로 요해장악하기 위하여 김정숙은 정동철로 하여금 장해우네 조직성원인 임원삼과 결의형제를 맺게 하였다. 그는 정동철을 통하여 충분한 사전요해를 한 기초위에서 마침내 장해우와의 직접적인 접촉에 나섰다.

김정숙은 석전양복점 뒷방에서 처음으로 장해우를 만나보았다. 그 날 김정숙은 장해우에게 나의 친서를 전하였다.

김일성장군이 김형직선생의 자제분 김성주라니 이 장해우는 형직선생을 따를 때처럼 장군을 따르겠소.≫

장해우가 그런 소신을 밝혔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그때 김정숙의 신파공작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었다.

장해우는 연령이나 투쟁연조 따위를 계산하며 콧대를 세우거나 옹졸하게 구는 시시한 혁명가가 아니었다. 의로운 것이면 조건없이 따르고 지지하였으며 사사로운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대의와 대업을 위하여서는 서슴없이 자신을 바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장해우는 얼마 후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성원들로 조국광복회신갈파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같은 시기에 김재수와 김정숙의 지도밑에 석전양복점 뒷방에서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를 모체로 하여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직속 신파지구당소조도 결성하였다.

조국광복회 지회결성모임은 광선사진관에서 진행되었다. 그 사진관의 2층 사진수정실은 김정숙이 가장 많이 이용한 비밀연락장소였다.

광선사진관을 운영하는 이순원은 조국광복회 신갈파지회의 핵심성원이었다. 그는 서울에 가서 사진강습소를 나온 다음 사진관을 차린 사람이었다. 이순원은 사진도 잘 만들고 인망도 높고 접촉성도 좋아서 그를 내세우면 사람들과의 사업을 편리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적측자료들을 촬영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언제인가는 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신파전경도 찍어서 보내주었다. 그 집 사진현상실에서는 삐라도 많이 찍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조직의 비밀사업을 묵묵히 뒷받침해준 성실한 방조자였다.

김정숙은 광선사진관 외에도 석전양복점, 샘물터국수집, 신파객주집, 사발상점, 물방아집을 비롯한 신파지구의 여러 곳에 비밀연락장소와 비밀사업장소들을 정해놓고 그곳에 은밀히 드나들면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샘물터국수집, 신파객주집, 사발상점 같은 곳은 조직원들의 접선과 연락을 위한 장소로 많이 이용된 동시에 유격대에 보낼 원호물자의 수집과 보관을 위한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원호물자의 기본운반통로로 이용된 비밀지점은 물방아집이었다. 읍거리에서 얼마쯤 떨어져있는 그 물방아집은 적들의 시선이 덜 미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를 보관하고 운반하는데 아주 편리하였다. 그 집주인의 친척되는 사람이 뗏목꾼이어서 원호물자들을 압록강 너머로 넘겨보낼 때에는 그의 도움을 쉽사리 받을 수 있었다. 물방아집 주인이나 뗏목꾼도 역시 조국광복회 회원들이었다.

신파를 통하여 우리에게 실로 많은 원호물자들이 들어왔다. 13도구에는 물품들이 많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백현 하강구일대의 조직들에서도 원호물자의 대부분은 압록강 건너쪽의 신파에서 사들여와야 하였다.

신파지구조직들에서 유격대에 보내오는 식량, 천 같은 다량의 원호물자들은 대부분 물방아집 아지트와 오함덕객주집을 통하여 뗏목이나 나룻배에 실려 압록강을 건너가고는 하였다. 오함덕객주집은 가족단위로 무은 특수분회였다.

김정숙은 도천리와 신파지구에서 활동하는 기간 백두산밀영과 삼수에도 다녀왔으며 신흥, 흥남, 북청, 단천을 비롯한 동해안지구에 나가 이 지대 혁명가들과의 사업도 심도있게 하였다.

아안리와 오함덕의 비밀연락장소들은 주로 타지방공작원파견아지트로 많이 이용되었다. 김정숙은 부전, 장진, 신흥, 흥남 일대에 가게 되는 지하혁명조직성원들은 주로 아안리분회 책임자의 집에서 파견하였고 갑산, 북청, 덕성, 단천 일대에 가게 되는 성원들은 오함덕 비밀연락장소들을 거점으로 하여 파견하였다. 흥남공업지구에 지하혁명조직을 꾸릴 임무를 주어 파견한 위인찬공작조를 떠나보낸 곳도 아안리아지트였다.

김정숙과 신파지구의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그 수많은 아지트들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조직들을 넓혀나갔다. 그는 절대로 고정된 아지트를 쓰지 않았다. 자신을 변장해가며 여러 가지 비밀연락지점들과 공작장소들을 엇바꾸어 재치있게 이용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은 조직을 위장하는데도 좋았고 신변안전을 위해서도 좋았다.

김정숙이 도천리에서 돌아온 다음 나는 그에게 물었다. 신파경찰들의 눈이 올빼미눈이라는데 동무는 무슨 수를 써서 자기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았는가. 신파시내에 수십 번 들락날락하면서도 적들에게 잡히지 않고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는가.

김정숙은 대답대신 웃으면서 신파에 건너갔다가 밀정의 미행을 당하던 일화를 말해주었다.

≪신파도선장에서 시내로 들어가는데 허즐한 농립모를 쓴 어떤 사람이 저를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미행인줄 몰랐는데 제가 시내에 들어선 다음에도 그 사람 이 그냥 내뒤에서 어물거리는걸 보고 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음식점앞에서 소일거리삼아 담배를 꺼내물었는데 그게 마라초가 아니고 가치담배였습니다. 그 가치담배를 보니 수상한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가난한 농사꾼들이야 어디 가치담배를 피웁니까.≫

김정숙은 골목과 골목들을 에돌며 밀정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장마당안에 들어가 어린애를 업고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가는 어떤 낯익은 여인의 임을 날래게 받아 이었다. 그러는 바람에 밀정은 그를 놓치었다.

≪제가 밀정들이나 경찰들의 손에 걸려들지 않은 건 책임성 때문이었습니다. 놈들에게 붙잡히면 사령부에서 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저절로 대담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군중이 저를 목숨을 걸고 보호해주었습니다.≫

김정숙의 이 말은 도천리-신파지구공작에 대한 그 자신의 총화이기도 하였다. 그로 하여금 어려운 적구공작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한 중요한 비결은 바로 책임성이었으며 군중속에 깊이 뿌리를 박은 것이었다.

그가 적구지하공작에서 발휘한 놀라운 창발성도 결국 이런 책임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그를 도천리로 파견할 때 정치공작과 관련된 지시만 주었지 다른 과업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적구공작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정숙은 정치공작에 주력하는 한편 우리 부대의 활동에 필요한 군사정보들을 수시로 수집하여 사령부에 보내주었다.

그는 도천리와 신파의 지하조직들을 발동하여 많은 정보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정동철, 장해우, 임원삼을 비롯한 혁명가들이 그에게 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정동철은 정보공작의 능수였다. 경찰서장, 세관장, 면장을 비롯한 적통치기관 우두머리들과 결의형제를 맺고 그들과 ≪형님≫, ≪동생≫하면서 살금살금 비밀을 뽑아냈다. 이 결의형제패에는 13도구의 관청 우두머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파에서 파견된 고등계 형사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정동철은 그들을 위해 자주 술추렴을 마련하였다. 아편을 좋아하는 관리들을 위해서는 약담배먹기도 의식적으로 조직하였다.

조국광복회하강구위원회에서는 적기관에 회원들을 교묘하게 박아넣었다. 13도구 경찰서 관하에만 해도 2-3명의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 침투하였다고 한다. 적의 행정말단 단위의 심부름꾼인 구장들과 십가장들도 대부분 혁명조직에 망라되었었다.

임원삼은 정안군 연대본부에 가서 필사작업을 하게 된 기회를 이용하여 많은 군사비밀들을 수집하였다. 그는 혁명군의 활동에 참고가 될만한 작전도나 통계자료가 나오면 종이에 날쌔게 기록하고는 꾸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가 저녁에 휴지들을 불태울 때 다시 꺼내어 조직에 가져다주었다.

광선사진관과 석전양복점은 적정자료수집과 연락장소로 많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신파지회 산하의 조국광복회 회원들 가운데는 면사무소나 금융조합 같은 적기관에서 서기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정상적으로 적정자료를 수집하여 광선사진관이나 석전양복점에 집결시켰다가 조직에 통보하고는 하였다. 김정숙간삼봉전투 때에도 바로 이 지구의 아지트를 통하여 김석원이 인솔하는 대군의 움직임에 대한 자료를 낱낱이 조사수집하여 제 때 제 때에 사령부에 통지함으로써 인민혁명군의 전투승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정숙은 조직성원들을 발동하여 신파일대에 진을 치고 있는 적군경들의 병력과 군사시설 배치상태, 무장장비상태를 조사장악하고 압록강의 너비와 깊이, 유속, 지어는 도하와 철수에 유리한 지점까지 직접 확인한 다음 필요한 약도까지 작성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나는 도천리공작 정형을 총화할 때 김정숙의 이 창발적 노력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도하와 철수에 필요한 지점들은 어떻게 되어 조사하게 되었는가고 물었더니 우리 혁명군이 아무 때건 신파도 공격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고 그는 대답하는 것이었다.

1937년 여름김정숙은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도천리의 부녀회원들이 우리 출판소에 보내려고 장만해두었던 종이퉁구리들이 정안군의 수색과정에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화근으로 되었다. 김정숙은 그 종이퉁구리는 정동철구장의 부탁을 받고 주민대장용으로 쓰기 위하여 자기가 사다 보관시킨 것이었다고 그럴듯하게 변명해나섰다. 그의 당당한 태도와 사리정연한 대답이 적들의 부아를 돋구어주었다. 말문이 막힌 채 약이 오른 장교는 네가 겁도 먹지 않고 말을 잘하는 것을 보니 혁명군의 스파이가 틀림없다고 하면서 무작정 그를 결박하여 자기들의 부대본부가 있는 요방자로 끌고 갔다.

김정숙은 최후를 각오하고 조직에 보내는 유서를 썼다.

≪안심하십시오. 나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직은 살 것입니다. 나의 재산의 전부인 2원을 보냅니다. 조직의 자금으로 써주십시오.≫

연필로 씌여진 그 유서쪽지와 2원의 돈은 그가 갇혀있는 집 노파의 손을 거쳐 그 옆집에 전달되고 다시 정동철을 거쳐 조직에 전하여졌다.

조직에서는 성원들을 발동하여 비상구출작전을 벌이었다. 도천리의 조직원들은 대표단을 무어가지고 정안군부대 본부에 찾아가서 아무런 죄도 없는 양민을 불법체포한 데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고 즉시 석방을 요구하였다.

도천리조직원들의 항의투쟁이 마침내 은을 내었다. 정안군부대 본부에서는 부대이동을 구실로 김정숙을 14도구 경찰서에 넘겼다.

정동철은 김정숙을 그 경찰서에서 13도구 경찰서로 이송시키도록 교섭하였다.

13도구 경찰서가 한 급 높은 1급 경찰서였기 때문에 김정숙을 거기로 이송시키는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다.

김정숙은 두 손을 묶이운 채 압송당하였다. 그 두 경찰서 사이에 도천리부락이 있었다.

그가 경찰들의 호송하에 도천리 부락을 지난 것은 한낮이 조금 지난 때였다.

신도 없이 맨발로 경찰들의 총부리에 떠밀리우며 걸어가는 ≪무산집 새애기≫의 결박당한 모습을 보게 된 도천리마을사람들은 비분의 눈물로 그를 배웅하였다. 한 할머니는 짚신짝을 들고 길바닥에 달려나와 김정숙의 피흐르는 발에 신겨주면서 그를 호송하는 순경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이놈들아, 우리 옥순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생사람을 잡아가느냐? 네놈들이 우리 옥순이를 공산당이라구 잡아간다는데 옥순이 같은 사람이 공산당이라면 나도 공산당을 따라가겠다!

정동철은 그 길로 김정숙을 뒤따라가서 13도구 경찰서장에게 석방교섭을 들이댔다. 경찰서장은 500명분의 양민보증서를 작성해오면 김정숙을 ≪양민≫으로 인정하고 석방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경찰서장이 그와 같은 엄청난 양의 보증서를 요구한 것은 차후 상급에서 문제시하게 되는 경우 책임을 회피할 증빙문건을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바치라는 것만치나 실행하기 어려운 요구였다. 그러나 정동철은 그들이 요구하는 보증서를 작성해 가지고 가서 서장의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서장은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으로 놀랐다. ≪역적≫이나 ≪공비≫로 지목된 ≪불온분자≫를 ≪양민≫으로 인정하는 보증서에는 아무나 함부로 손지장을 누르려 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대중심리였다. 경찰서장은 정동철과의 ≪우정≫ 때문에 체면상 양민보증서를 받아오면 석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절대로 실행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500명의 도장과 지장이 주런이 찍혀있는 양민보증서, 실로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와 같은 일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는가? 200여 호밖에 안되는 도천리마을에 그렇게 많은 지하조직원이 있었을 수도 없다. 아무리 조직이 발동되었다 해도 조직원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그 숱한 비조직원들이 모두 남의 풍에 떠서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보증서에 함부로 도장을 누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뭇사람들로 하여금 양민보증서에 서슴없이 도장을 누르게 할 수 있은 것은 김정숙에 대한 인민들의 다함없는 사랑이었고 지지였다. 달리 말하여 강권이나 금권보다도 더 위력한 인민의 절대적 신뢰와 지지가 그런 기적을 낳게 한 것이다.

적들의 마수에서 무사히 풀려난 김정숙은 도천리에 돌아와 마을사람들속에 에워싸이기 바쁘게 ≪아이구, 난 배가 너무 고파서 혼났어요. 형님, 나 밥부터 줘요.≫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집안식구들끼리만 할 수 있는 허물없는 말이다. 그가 도천리사람들을 한집안식구처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말을 선뜻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해방 후 흥남시인민위원회위원장사업을 하던 임원삼이 회의차로 평양에 올라왔던 기회를 타서 옛날의 도천리, 신파 친구들이었던 장해우, 정동철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장해우와 정동철은 그 당시 중앙의 주요직무에서 일하였다. 평남도민주당위원회위원장사업을 하던 김재수도 함께 왔었다. 그 날 김정숙은 손님들을 위해 교즈를 빚었다. 그 날의 화제는 자연히 도천리-신파시절로 흘러갔다.

김정숙동지들의 도움으로 사경에서 구원되던 때의 일을 감회깊이 회고하면서 눈물을 지었다. 그는 불쑥 자기는 요방자에 잡혀가 감금당했을 때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노라고 말하였다.

≪사실 보초 하나쯤 제끼고 내뛰는거야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더군요. 제가 갇혀있던 집의 늙은 내외의 가긍한 정상을 생각하면 어떻게 보초를 제끼고 달아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도망가기는 쉽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빠져나가면 이 집 늙은이들은 어떻게 되고 나를 좋은 여자라고 보증해나선 정구장은 어떻게 되고 도천리의 지하조직과 인민들은 또 얼마나 큰 피해와 시달림을 당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내 한 몸이 희생되더라도 조직을 지켜내고 인민을 지켜내야 하겠다는 각오가 생기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 편안한 마음으로 그 집 웃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일신을 바치려고 마음먹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두려운 것도 없고 주저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천리-신파시절의 ≪무산집 새애기≫의 모습이었다.

양민보증서의 덕으로 역경에서 구원된 김정숙은 얼마동안 도천리지구와 국내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사령부로 돌아왔다. 그가 부대로 돌아올 때 조국광복회 도천리지회 성원이었던 유영찬도 같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김정숙의 보증으로 유격대에 입대하였다. 우리가 하바로프스크 주변의 훈련기지에서 대일작전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1944년 유영찬은 야영지의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건설자재들을 배로 실어 나르다가 불행하게도 아무르강에서 익사하였다.

김정숙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잊을 수 없는 은인이라고 하면서 그를 회상하고는 하였다.

김정숙이 도천리를 떠날 때 그를 따라가려고 결심한 사람은 비단 유영찬뿐이 아니었다고 한다. 부녀회원들도 울면서 그를 따라오며 함께 가게 해달라고 졸랐다는 것이다.

한 부녀회원은 김정숙이 포대산을 넘을 때까지도 그냥 그에게 매달려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김정숙은 달래다 못해 자기가 끼고 있던 은가락지를 부녀회원의 손에 끼워주고 그가 띠고 있던 빨간 허리띠를 풀어 자기의 허리에 띠었다. 털실로 뜬 빨간 허리띠는 그 여자가 김정숙의 보증으로 부녀회에 가입하는 날 기념으로 손수 떠서 자랑삼아 띠고다니던 소중한 치장품이었다.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데리고 갈 수 없어서 나 혼자 떠나는 거니 섭섭해말아요. 나는 이 빨간 띠가 다 해어져서 마지막 실 한 오리가 남을 때까지 품고 다니며 정든 도천리사람들을 잊지 않겠어요.≫

그 유정한 말을 받아안은 여인은 더 이상 따라가겠다는 말을 못하고 어디로 가는지 가서 소식만이라도 알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는 자기가 한 약속대로 부대에 돌아와서도 늘 군복안에 그 빨간털실허리띠를 띠고 지냈다. 나는 그와 결혼한 다음에야 그의 허리에서 한 번도 풀려본 적 없는 빨간 허리띠에 깃든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 띠와 함께 김정숙은 늘 인민의 체온을 자기 몸에 간직하고 살았다. 그의 넋은 언제나 인민에게서 떠나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따금 이런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어떻게 되어 김정숙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후원속에서 어려운 지하공작을 해낼 수 있었을까?

만일 김정숙이 인민에게 참다운 사랑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인민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민을 위해 자기를 깡그리 바치지 않는 사람은 위기일발의 순간에 인민의 진정한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김정숙은 인민에게 사랑을 바친 것만큼 자기가 그처럼 아끼고 품어준 인민들로부터 응당한 보답을 받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500명의 인장이 찍힌 양민보증서는 그가 인민의 참된 충복임을 증명하는 영원한 증서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김정숙이 도천리를 떠난 때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1991년 가을에 나는 양강도지방을 현지지도하다가 그가 심혼을 바쳐 개척한 신파땅을 찾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때였지만 그의 지하활동과 관련된 사적물들은 옛모습 그대로 고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 하나 하나의 유물들과 사적지들에 바친 신파사람들의 정성은 실로 탄복할만한 것이었다.

그 날 강사들은 김정숙의 발자취가 깃들어있는 사적지로 나를 일일이 안내하면서 그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 설명가운데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건이나 세부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압록강기슭에 옛모양 그대로 서있는 음험한 포대를 바라보면서 김정숙이 그 고장을 혁명화하느라고 모험도 많이 하고 아슬아슬한 고비도 여러 번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무렵에 정거장으로 나오면서 신파거리를 뒤돌아보니 어쩐지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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