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4일(수)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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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의 산아들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청년사업은 내가 일생을 두고 심혈을 바쳐온 중대사의 하나이다. 나의 혁명활동이 청년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길림시절의 생활이 잘 말해 주고 있다. 나는 길림감옥에 구금되기 전에도 청년학생운동을 하였지만 감옥을 나온 후에도 지하활동의 형식으로 청년학생들과의 사업을 많이 하였다. 국제당일군들과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던 1930년 여름부터는 공청 길동지구책임비서로 임명되어 공청사업을 하였다.

물론 왕청시절에도 청년들과의 사업은 나의 군사정치활동에서 주선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로 되고 있었다. 유격대의 정치사업을 책임진 지휘관이 군대 안의 공청사업을 지도하는 것은 직능에 맞는 응당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동만당지도부와 왕청현당일군들의 요구에 의하여 군대 밖의 공청사업에도 많은 시간을 투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당시는 당, 공청, 아동단을 가리켜 3대동맹이라고 하였는데 이 3대동맹에서 공청은 당 다음 가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공청을 가리켜 당의 교대자, 당의 후비대 또는 당의 저수지라고 불렀으며 그 사명과 역할의 중대성을 부각하는 의미에서 제2의 당이라고도 명명하였다.

혁명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전략전술적 문제들과 그 집행대책을 논의하는 당회의들에는 언제나 공청서기들이 연석으로 참가하였다. 동만당에서는 이런 회의를 가리켜 당연석회의라고 하였다. 그런 회의들에서 공청서기들은 당원들과 동등한 발언권과 결의권까지 당당하게 행사하였다. 당원들이 없거나 당세가 미약한 고장들에서는 공청열성자들이 주동이 되어 대중운동을 지도하였다.

남북만진출을 끝마치고 간도에 도착한 후 나는 이광별동대공청서기 조동욱, 왕청현공청서기 한재출, 왕청현공청조직부장 김중권 등을 통하여 동만지방공청사업의 실태를 전면적으로 요해했다.

그 당시 동만지방의 공청사업에서는 공청조직건설과 혁명발전에 지장을 주는 엄중한 좌우경적 편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왕청지방 공청사업에서 제일 큰 애로로 제기된 것은 유능한 지도일군의 부족이었다.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이 눈부신 상승기를 걷고 있던 당시의 환경에 맞게 사업을 능숙하게 조직하고 처리할 만한 능력 있는 공청간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공청원들의 대부분은 문맹자거나 국해정도였고 쌀에 뉘만큼한 사람들만이 중학졸업 정도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종파분자들은 청년운동을 협소한 유격구역의 범위에서 제한시키고 청년사업을 노동자, 농민 계층의 청년 본위로 진행하면서 마치도 공청활동은 성분이 좋고 식견이 높은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떠들어댔다. 이런 경향은 불피코 공청건설에서 관문주의를 낳게 하였다. 종파분자들은 공청조직의 순결성과 비밀보장의 미명하에 문을 꽁꽁 닫아걸고 이 구실 저 구실 붙여가면서 공청에 들고 싶어하는 청년들을 무턱대고 배척하였다. 학생들은 나이가 어리거나 출신이 걸린다고 하면서 따돌렸고 소박한 노농청년들을 무식하다고 외면하였다.

공청에 가입하자면 적어도 ≪사회주의대의≫쯤은 통달해야 했고 ≪공산당선언≫이나 ≪임금노동과 자본≫과 같은 고전들도 읽고 분석할 줄 알아야 했다. 만일 심사과정에 ≪공산당선언≫을 읽지 못했다는 것이 판명되면 ≪≪공산당선언≫도 모르면서 어떻게 공청생활을 해!≫하고 까박을 붙이는 것이 통례였다.

대왕청의 어떤 청년은 소비에트정부에 소를 몰수당한 것이 흠으로 되어 공청가맹을 청원하였다가 부결당하였다. 부림소를 몰수당하는 정도의 집이면 자산가 출신이라는 것이고 소비에트의 수탈대상이 되었으니 가맹 적격자가 못된다는 것이다.

좌경관문주의자들은 지어 농민협회, 반제동맹, 혁명호제회, 소년선봉대에서 조직생활을 충실하게 해온 청년들까지도 공청조직에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좌경이 차단봉을 내리고 문을 굳게 닫아 맨 지역들에서는 100여 명을 망라한 군중단체 안에 공청원이 고작 3-4명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였다. 동만당 지도부가 자리잡고 있던 곳이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청지방에서는 공청대열을 확대하는데서도 텃세가 셌다. 다른 현에서 아무리 조직생활에 충실했던 사람들도 해당 조직이 발급한 이동문건이나 보증서가 없으면 왕청에 와서 공청대열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동녕현성에서 지하혁명활동을 하다가 군벌의 체포소동을 피해 왕청으로 온 전문진도 유격대의 재봉대에서 일을 잘하였지만 이동문건이 없다는 이유로 적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군복을 해준 데 대한 답례 인사를 하려고 재봉대에 찾아간 나는 그가 무슨 일인지 몹시 의기소침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후에도 재봉대 출입을 여러 번 하였지만 전문진의 침울한 기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그와 담화를 하였다. 전문진은 소심한 여자였지만 심중의 고충을 솔직하게 다 말했다. 그는 목적했던 새 고장에 와서 소망대로 유격대에 입대하였지만 공청조직이 자기를 받아 주지 않는 것 때문에 외기러기처럼 늘 우울하게 살았다. 그의 고충이 조직문제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나는 해당 일군들과 의논하여 그가 종전대로 공청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떤 공청조직들에서는 동향, 동창, 친척, 친우 등의 안면 정실관계를 타고 이색분자들과 불순분자들, 동요분자들만이 대열 내에 망탕 끼어들었다. 어떤 공청 일군들은 출신성분만을 절대화하던 나머지 머슴꾼 출신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간첩임무를 받고 유격구에 잠입한 불순분자들까지 공청에 받아들였다. 이런 좌우경의 틈바구니에서 혁명적 세련이 부족한 일부 공청원들은 난관을 이겨내지 못하고 적구로 내려갔다.

공청사업에서 나타난 편향들은 적지 않은 청년들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을 낳게 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이 주관하는 혁명운동을 경원시하게 하였다. 궁극적으로는 유격대 내의 공청사업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애국적 인민들을 항일의 깃발 아래 묶어 세우기 위한 통일전선운동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유격구의 공청사업에서 이와 같은 좌우경적 편향이 나타나게 된 것은 공청의 지도일군들이 조선혁명의 실정과 이익에 알맞은 옳은 조직건설노선을 가지지 못하고 고전의 요구를 교조적으로 적용하거나 남들의 경험을 통째로 직수입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유격구사업을 주관하는 지도일군들이 공청이 범하고 있는 편향들을 극복하고 청년사업을 혁신하기 위한 방도와 출로를 열심히 모색하고 있던 1933년 3월 소왕청 마촌에서는 공청일군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는 왕청지구 공청위원들, 아동국장들, 연길에서 온 청년대표들과 용정학생대표들(지하공작원)을 비롯한 30명 정도의 청년사업 관계자들이 참석하였다. 지금까지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들로는 김중권, 박현숙, 조동욱, 박길송, 이성일, 김범수, 최봉송 동무들을 들 수 있다.

공청일군회의를 회상할 때면 어째서인지 회의 전기간 유달리 영채 도는 시선으로 내 얼굴을 줄곧 지켜보던 박길송의 눈동자가 삼삼히 떠오르곤 한다. 내가 박길송의 눈에 대해 특별히 인상 깊게 회상하게 되는 것은 훗날 그가 그 영롱한 두 눈의 한 쪽을 관동군부대와의 조우전에서 잃어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26살의 젊은 나이에 북만의 뛰어난 유격대장으로서 최후를 마친 박길송이 1933년 당시에는 특별한 공청직위도 없이 모범공청원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가했던 것 같다.

회의를 마감짓는 날 현공청 일군들과 대표들은 나에게 연설을 청탁하였다.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길림에서도 공청활동을 많이 하고 간도지방에 와서도 길동지구 공청책임비서라는 간판을 가지고 청년들과의 사업을 많이 해왔는데 참고할 만한 경험이 있을 수 있으니 그 견해나 들어보자고 자기들끼리 의논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일치한 요구에 따라 공청단체들앞에 나선 과업을 두고 길다란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 중의 적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조동욱이 자상하게 회고하였다.

동서고금의 철학자, 정치가, 교육자들은 예외없이 사회개조와 변혁을 위한 투쟁에서 청년세대들이 차지하는 지위와 사명을 두고 많은 고견들을 내놓았다. 맑스주의고전가들은 일치하게 청년들을 혁명의 교량자, 혁명의 후비대라고 보았다. 고대철학가인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국가의 장래 운명은 청년에 대한 교육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유물론철학가이든 관념론철학가이든, 동양의 학자이든 서양의 학자이든 미래의 운명으로 되는 청년세대에 대해서는 그 세대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대동소이하게 평가하였다.

청년들을 미래의 역군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는 우리도 물론 그들과 견해를 달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청년들의 지위를 혁명의 교량자나 후비대에 국한시키는 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선행 고전가들과 이론가들은 청년들을 전세대에 의거하여 그들의 지도와 교양을 받으며 보조적으로 혁명을 해 나가는 계층으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런 규정에 동의할 수 없었다. 청년들을 보조적인 역량 이상의 것으로 보지 않는 견해는 조선혁명이 걸어온 노정과 실정>을 볼 때 정당한 것이라 볼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청년들을 혁명의 전위로 보았다. 청년들은 혁명투쟁과 사회적 운동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부문을 담당한 선봉대이고 주력부대이며 미래의 운명까지도 걸머진 골간부대이다. 이것은 실천을 통해 그 진리성이 충분히 검증된 주장이었다. 80고령에 이른 지금에 와서도 나는 혁명의 전위로서 청년들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지 않는다. 우리가 혁명운동을 독자적으로 개척하지 않고 전세대에만 의거하여 그들이 시키는 일이나 하고 그들의 뒤를 피동적으로 따라가면서 세월을 보냈더라면 일제 식민지통치의 가장 암담한 시기에 낡은 사조와 단호히 결별하고 주체사상의 기치밑에 단결하여 조선혁명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지 못하고 항일유격대도 창건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민족의 선봉에 서서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혁명 전반을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키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민족해방투쟁 역사를 보아도 앞장에는 언제나 청년들이 서 있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감옥도, 죽음도, 교수대도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투사들이었다. 조선의 청년들은 3.1인민봉기가 발발했을 때에도 선봉결사대로 나섰고 6.10만세시위운동이 서울의 거리를 휩쓸 때에도 주력으로 등장하여 애국적인 구호들을 고창하였다.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운동도 그 주체는 청년학생들이었다. 그 누구의 조종도 받지 않는 청년학생들이 스스로 떨쳐 일어나 대오를 짜고 노도와 같이 거리를 누볐으며 총검을 박차고 항쟁의 광장으로 달려나갔다.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은 1920년대 중엽부터 민족해방투쟁 무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항일혁명사의 새 페이지를 열어놓았다.

나의 청춘시절이 공청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앞 권들에서도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항일혁명투쟁의 전기간은 나의 청년기와 일치하였다. 우리는 그 나이에 연대도 이끌고 사단도 지휘하고 군도 영솔하였다. 한때 우리 인민들속에는 나를 백발노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개선연설을 하던 당시의 나의 나이는 34살도 못되었다.

유격전쟁은 옛날의 군사들처럼 서로 대치되어 영채를 치고 북을 두드리면서 장수들이 필마단창으로 접전하거나 높은 성벽에 의지하여 화살을 날리는 그런 구식싸움도 아니며 발달된 군수기재를 이용하여 전화나 무선으로 전투를 지휘하는 신식싸움도 아니다. 그런 싸움에서는 50-70대의 노장군들도 능히 전투를 지휘할 수 있다. 하지만 유격전쟁에서는 전사나 지휘관이나 할 것 없이 동빙한설의 쓴맛을 다같이 맛보아야 한다.

지휘관들도 때로는 기관총을 잡아야 하며 정황이 요구하면 총창을 꼬나들고 백병전에 뛰어들어야 한다. 건강한 육체와 건실한 정신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런 부담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항일혁명에 참가한 투사들은 거의 모두가 20대의 청년들이었다. 양정우는 32살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장으로 되었고 진한장은 27살부터 제3방면군 군장으로 활동하였다. 오중흡이 연대장의 중책을 지니고 싸우다가 전사한 것도 29살의 꽃나이였다.

참으로 항일무장투쟁은 청년들이 전적으로 맡아서 수행한 투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니 어찌 청년세대를 혁명의 교량자, 혁명의 후비대라고만 평가하겠는가.

나의 이런 견해와 입장은 그날의 연설과 담화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청년들은 우리 혁명을 추진시키는 주력 중에서 기간적인 역량으로 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펼쳐보아도 사회개조의 앞장에는 언제나 청년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산도 허물고 바다도 막을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여 혁명투쟁의 전열에 내세운 것이 바로 우리의 청년사업이다.

그런데 공청조직이 문을 딱 닫아걸고 청년군중을 등지고 앉아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닌가. 어떤 공청조직에서는 나이가 어리다고 하면서 우수한 청년들을 대열에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것이야말로 관문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유관순이 나이가 많아서 3.1이 낳은 영웅으로 민족사에 남아 있겠는가. 남이장군도 남아 20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자기들을 가리켜 대장부라 하겠는가고 하였다.

나이를 문제시하면서 10대의 열혈청년들을 배척하거나 외면한다면 그것은 공청조직을 청년조직으로가 아니라 장년조직으로 만드는 결과밖에 가져올 것이 없다. 10년이나 20년쯤 도를 닦고 성인현자가 된 다음에 들어가는 것이 공청이라면 그것이 무슨 청년들의 조직이겠는가.≫

다음으로 대표들의 흥미를 끈 것이 공청일군들이 엄수해야 할 사업 방법과 작풍에 관한 문제였다.

나는 이 항목에 들어가서도 많은 말을 하였다.

광범한 청년들을 묶어세우자면 공청사업을 담당한 일군들의 사업 방법과 작풍을 바로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한 공청원이 총 5발을 쏘았는데 적을 한 놈도 잡지 못하였다고 하자. 유격대에서는 탄알 한 알에 원쑤 한 놈이라는 구호가 통용되고 있는데 5발 쏘아서 한 놈도 잡지 못했으면 잘못된 것은 사실이다.

가령 이런 결함을 범한 공청원에게 해당 조직에서 비판을 주고 조직문제를 보았다면 이것을 정당한 처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동무들은 문제를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처리해서는 안된다. 우선 과오를 범했다면 여러 각도에서 요해해야 한다. 측면으로도 요해하고 후면으로도 요해해야 한다. 무기성능이 좋지 못한가? 조성, 조문이 틀리지 않았는가? 총탁을 어깨에 대고 방아쇠를 살그머니 당기지 못하지는 않았는가? 방아쇠를 당길 때 숨조절을 잘했는가?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생리적 약점이 없는가 하는 것도 알아보아야 한다. 근시인가? 원시인가? 아니면 난시인가? 그리고 대담하지 못하고 사상적으로 비겁한 데 있지 않는가?

이와 같이 여러 모로 따져보고 문제를 취급해야지 일률적으로 사상이 나쁘다고 보고 사상투쟁만 하면 안된다.

비판은 어디까지나 동지를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야 한다. 결함에 대해서는 융화 묵과하지 말고 비판하되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납득이 되도록 해야 한다. 폭로하는 식으로 욕설하고 모욕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날 회의에서 공청대오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강화하고 선전선동 교양사업을 개선하는 문제, 상호비판, 자기비판을 성실히 하는 문제, 아동단을 공청후비로 육성하는 문제 그리고 과거 애국청년들의 투쟁에서 그 우수한 점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공청사업의 전반 분야를 포괄하여 연설도 하고 담화도 하였다.

그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청지도일군들이 항상 군중속에서 살며 사업에서는 대중의 선두에 서는 기수가 되고 사람과의 사업에서는 참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공청일군회의가 있은 후 공청지도일군들의 일본새에서는 혁신이 일어났다. 관료주의와 관문주의, 형식주의의 낡은 틀에 얽매여 있던 공청조직들은 생기발랄한 산 조직으로 되어 청년대중속에 깊이 침투했다.

어느 날 나는 김중권을 만나려고 공청현위를 찾아갔다. 그런데 현위에는 통신원 한 동무만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모두 어디로 갔는가고 물으니 구와 지부 조직들에 내려갔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흐뭇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종전까지는 현 공청일군들이 동맹원들속으로 내려가지 않고 사무실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서 지부서기, 구서기들을 불러다가 일거리를 맡기고 받아내는 식으로 안일하게 사업을 하였다. 현 공청은 어디서 수말이 새끼를 낳았다고 하여도 믿을 정도로 하부실정에 깜깜하였다. 그러면서도 회의를 열고 사상전을 한바탕씩하고는 만세를 불렀다. 공청단체들은 회의와 비판이며 만사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런 재래식 사업방법이 공청일군들의 일본새에서 어느덧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공청일군들은 유격대와 지방의 지부조직들에 내려가서 공청사업을 책임적으로 도와주었다. 현위 사무실에서 말공부와 문서놀음으로 세월을 보내던 사람들이 아래에 내려가 맹원들도 만나보고 소조모임이나 지부회의에도 참석하였으며 공청서기들을 도와 사업계획도 세워 주었다. 현위 사무실에 공청간부들이 모이는 것은 회의가 있는 날뿐이었다.

공청열성자들의 대오에는 정황과 조건에 맞게 임기응변하는 능숙한 수완가들과 작풍이 좋고 지도방법이 원만한 세련된 일군들도 적지 않았다.

연길현에서 8도공청 조직부장으로 사업한 김범수는 명월구회의에도 참가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청년들의 사랑을 받는 유능한 공청지도일군들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김범수가 소학교를 다닐 때 그의 어머니는 외아들이 글공부를 하는 것이 너무나 대견스러워 그를 학교에 업고 다녔다.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운 아들이 총각꼴이 잡히기 바쁘게 장가도 일찍 보냈다.

김범수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사회운동에 뛰어들까봐 그가 장가를 간 다음에도 문밖출입을 엄하게 단속하였다.

그러나 김범수는 문밖출입을 못하는 대신 자기 집 뒷고방을 회합장소로 정하고 울바자밑에 사람들이 드나들 만한 개구멍을 감쪽같이 만들어 놓은 다음 청년들을 뻔질나게 자기 집으로 불러들였다. 김범수의 부모들은 아들이 나들이도 가지 않고 신랑구실을 ≪착실하게≫ 한다고 기쁨을 금치 못하였지만 아들은 밤마다 뒷고방에서 청년들과의 사업을 하느라고 새색시의 얼굴을 쳐다볼 경황도 없었다. 그 뒷고방에서 김범수는 수십 명의 열성공청원들을 육성해냈다.

현공청서기는 주로 유격대공청조직에 들어가서 청년사업을 지도하였으며 조직부장과 선전부장은 유격구공청조직과 적구공청조직들과의 연계밑에 청년운동을 지도하였다. 현공청서기는 필요에 따라 유격대원들과 함께 전투작전에도 직접 참가하면서 대중을 지도하였다.

마촌작전 때의 일이다. 마촌 앞덕에 배치된 중대 공청지부는 현공청서기의 참석하에 비상회의를 열었다. 결전을 눈앞에 둔 공청원들은 저마다 불같은 맹세를 토하였다.

≪공청원의 심장으로 피로써 쟁취한 우리의 땅을 끝까지 지키자!≫

공청원들의 총구에서는 복수의 명중탄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왔다. 적들은 이 전투에서만도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구국군과 함께 동녕현성나자구를 들이칠 때에도 공청서기는 빨치산대오의 앞장에 서 있었다.

나는 공청일군회의가 있은 다음에도 공청지도일군들을 자주 만나 공청사업과 관련된 문제들을 논의하였다. 그 당시 내가 공청사업과 관련하여 제일 역점을 찍어 강조한 것은 청년들속에서 애국주의교양, 혁명교양, 계급교양, 공산주의교양, 낙관주의교양을 강화하고 군사교육을 강화하여 공청지도일군들과 공청원들속에서 군중관점을 똑바로 세우고 공산주의적인 사업방법과 작풍을 수립할 데 대한 문제들이었다.

우리는 공청조직들이 당면한 정치, 군사, 경제상의 문제들에 우선적으로 낯을 돌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다 바치도록 하였다. 공청조직은 학술단체도 아니고 계몽단체도 아니며 구락부도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의 승리를 위해 청년대중을 교양하고 결속시키는 조직이었다. 그러므로 이 조직들의 활동은 언제나 현행 정치실천, 군사실천, 경제실천에 복종되어야 했다. 그래야 매개 조직들이 움직이는 산 조직으로, 강력한 발동기로 될 수 있었다.

그 당시 유격구의 인민들과 청년들속에는 경제문제의 해결에 얼굴을 잘 돌리지 않는 편향들이 존재하였다. 유격구에서의 경제문제란 먹고 입고 쓰고 사는 문제를 말한다. 지금 식대로 표현하면 식의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유격구인민들이 소비하는 식량의 대부분은 유격대가 적들을 치고 노획한 전리품 식량으로 충당하였다. 유격구의 척박한 경작지들에서 생산되는 알곡으로는 한 해 농량도 보장하기가 어려웠다. 인민들은 먹을 것이 떨어질 때마다 군대를 쳐다보곤 하였다. 이런 과정에 적지 않은 일군들과 유격구주민들속에서는 유격구주민들속에서는 유격대에 대한 의존심이 생겼다. 절량기가 닥쳐오면 으레 군대가 또 적들을 답새기고 식량을 빼앗아다가 주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팔짱을 지르고 앉아 농사차비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1934년 봄 다홍왜에 가서 3중대동무들과 함께 5.1절을 쇠었다. 중대사업을 지도하는 과정을 겸하여 영농준비정형도 요해하였는데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이 고장사람들은 춘경기가 다되었는데도 씨붙임준비를 하지 않고 하루하루 태평스럽게 보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어쩌자는 셈판인가. 놀란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나와 동행했던 현공청서기도 사람들이 이렇게도 나태해질 수 있는가고 하면서 불안을 감추지 않았다.

며칠 후 우리는 요영구의 비밀아지트에서 현공청확대회의를 소집하고 춘기파종을 위한 청년들의 과업을 협의하였다. 1932년 가을에 추수대를 조직하여 중간지대농경지들의 가을걷이를 보장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청년생산돌격대가 조직되어 간도전역의 유격구들에서 봄씨붙임을 위한 전투에 돌입하였다. 이 돌격대에는 공청열성자들을 비롯한 유격구의 핵심청년들이 다 망라되었다. 그들은 보탑을 쥐고 밭갈이만 한 것이 아니라 종곡을 마련하고 농쟁기를 준비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파손된 연장들은 야장간에서 청년들이 달라붙어 집체적으로 수리하였다. 부림소가 모자라는 지역들에서는 곡괭이나 삽으로 뚜져서라도 씨붙임을 일매지게 다하였다. 1934년의 춘기파종은 성과적으로 끝났다.

이 돌격대의 활동을 통하여 유격구들에서는 공청의 위신이 쑥 올라가고 청년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 당조직들은 공청이 바라고 설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지지해 주었으며 공청지도일군들이 청년사업을 대담하게 밀고 나가도록 힘있게 떠밀어 주었다. 인민혁명정부와 농민협회, 부녀회를 비롯한 대중조직들도 공청사업을 각방으로 후원해 주었다.

유격구인민들이 공청사업을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는 것은 1934년 9월의 9청데이기념일 행사과정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9청데이란 국제무산청년절이라는 뜻이다.

전세계 무산청년들은 1915년에 1차로 이 날을 기념하였고 그 다음부터는 해마다 9청데이 행사를 하였다. 이 기념행사는 중국에서도 하고 우리 나라에서도 하였다.

왕청사람들은 1934년 9청데이를 대대적으로 준비하였다. 이 행사를 앞두고 우리는 적구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여 부락단위로 되는 참관단들을 초청하는 한편 행사를 당일 참관단 접대에 소비하게 될 입쌀, 밀가루, 고기 등의 후방물자들을 구입해 들였다. 어떤 후방일군들은 차까지 구해 가지고 돌아왔다. 유격대는 적들을 치고 명절준비에 필요한 일용필수품들을 노획해왔다.

요영구광장에는 솔문을 해 세우고 광장 변두리에는 유격대의 전과를 반영한 연속화들을 그려 붙였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는 격동적인 구호들도 써 붙였다. 그 당시 5중대에서는 그림을 기막히게 그리는 재간둥이가 한 명 있었다. 쏘련에서 살다가 나온 동무였는데 서예솜씨도 놀랄 만하였다. 그는 광장 주변에 인민혁명군의 업적을 보여 주는 전투약도까지 내다 붙였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하였다.

우리는 정부청사를 통째로 내어 손님들이 들 숙소를 꾸리고 거기에도 참관단원들이 감상할 수 있는 선전화를 붙였다.

9청데이를 앞두고 계관라자, 영벽라자, 천교령, 전각루 등 유격구와 그 주변의 마을들에서는 대표들을 선출하여 요영구로 파견하였다. 적들이 집단부락을 만들어놓고 성문밖 출입을 엄격히 단속하였기 때문에 적구대표들은 집단적으로 무리를 지어 오지 못하고 한 사람씩 낫을 들거나 광주리를 이고 전야작업에 나가는 차림새로 유격구행을 하였다.

행사 당일이 되자 유격구청년들은 인민들과 함께 북삼차구에서 노획한 비단과 세루로 만든 옷을 쭉쭉 뽑아 입고 광장으로 모여들었었다. 현 공청일군들도 새 양복들을 쑥 빼고 광장에 나타나 행사를 주관하였다. 주름을 세운 군복을 입고 대오를 지어 정연하게 행사장에 들어서는 유격대원들의 늠름한 모습은 적구대표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이날의 개회선언은 연길폭탄을 터뜨리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참관단원들은 ≪쾅≫하는 폭탄소리를 신호로 하여 수십 폭의 붉은 깃발들이 광장에 나부끼고 구호소리, 박수소리, 북소리가 장내를 진감하는 광경을 보면서 다같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9청데이에 대한 보고가 있은 다음 각계 대표들은 공청의 업적을 찬양하고 반일을 선동하는 전투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 당시는 이런 연설을 감상발표라고 하였다. 우리는 행사 끝에 적구 참관단원들을 위하여 성대한 환영회를 가졌다. 현당과 현공청일군들의 요청으로 나는 이 환영모임에서 인민혁명군의 정치군사활동을 적극 방조할 데 대한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에 대한 답사를 하려고 적구에서 온 대표 한 사람이 발언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감격에 목메어 아무 말도 못하고 사방에 대고 연방 절만 하였다.

9청데이행사에 참가한 적구대표들은 나의 연설까지 듣고나서 저저마다 입대를 청원하였다. 모두가 유격대에 들어가겠다고 간청하므로 오히려 설복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 우리는 가정사정과 사업관계를 고려하여 일부 대표들만 혁명군에 받아들였다.

그날의 환영공연에서 이채를 띤 것은 5중대가 준비한 연예종목들이었다. 노흑산지하조직에서 활동하다가 입대한 유격대원이 연해주에 가 있을 때 배웠다는 러시아춤은 참말로 장관이었다.

참관단원들이 유격구를 떠날 때 우리는 적구인민들의 몫으로 따로 남겨놓았던 전리품들을 그들에게 지워 보냈다.

내가 여기에서 1934년의 9청데이행사를 이처럼 상세히 언급한 것은 그 행사가 유격구시절의 청년들의 명절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인상 깊은 명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당시 국제적인 성격의 기념일들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국제당, 국제공청, 국제노조, 국제농조와 같은 국제적인 조직들과 연계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공산당들에 코민테른이라는 국제적인 중앙이 있었던 것처럼 만국의 공청들에도 낌이라는 명칭을 가진 국제적 중앙이 있었다.

낌은 국제공산주의청년조직의 약칭이다. 우리가 하얼빈에 가서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던 조직도 국제공청 산하의 조직이었고 우리에게 모스크바유학을 주선한 단체도 국제당청년부의 사명을 담당하고 있던 국제공청조직이었다.

공청의 강령을 집행하기 위한 실천투쟁과정을 통하여 청년들속에서는 민족해방투쟁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한 훌륭한 혁명가들이 무수히 배출되었다. ≪13연발≫, 강차위(김봉욱), 박길송, 황정해, 김택만, 김충진, 주춘일, 이신순, 김범수, 이동화, 이순희, 박호준 등 무수한 항일영웅들은 다 조직생활을 통하여 교양되고 육성된 공청의 산아들이다. 공청이 낳은 이름있는 영웅들 가운데는 빨치산지휘관도 있고 지하공작원도 있고 교육자도 있다.

요영구 비밀회의실에서 열린 공청모임에서는 적구활동을 더욱 확대강화할 데 대한 문제도 겸하여 토의하였다.

적구에서는 정치실무적으로 튼튼히 준비된 공청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좌경분자들의 그릇된 시책으로 하여 적통치구역에서의 공청활동은 홀시되었다. 이런 실정을 충분히 참작하여 공청모임은 ≪원쑤의 심장에 포대를 쌓자!≫는 전투적 구호를 제기하였다. 이것은 ≪적군들속에 혁명의 포대를 쌓자!≫는 것은 구호와 대동소이한 말이었다. ≪원쑤의 심장에 포대를 쌓자!≫는 것은 원쑤의 심장부에 우리의 조직체들을 튼튼히 꾸려나가자는 사상이다.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수많은 공청간부들이 적구공작의 어려운 임무를 맡고 동만지방과 조선 국내를 비롯한 광활한 지역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동만특별구위원회 아동국장으로 사업하던 박길송도 나자구에 파견되었다. 그는 유능한 공청열성자들과 함께 조직들을 늘려갔으며 청년들을 실천투쟁속에서 단련시켰다. 수많은 소년 계절노동자들을 가지고 있는 간도 굴지의 나자구양주소에도 그가 박아넣은 공작선이 넝쿨을 깊숙이 뻗쳤다.

나자구아동국장으로 사업하던 최광도 공청조직의 지시로 이 양주소에 들어가서 활동하였다.

유가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이 양주소에서는 해마다 2-5월 사이와 9-10월 사이에 계절노동자들을 모집하였는데 품삯을 적게 주고도 많은 일을 시킬 수 있는 소년노동자들만 채용하였다. 공장주는 소년노동자들에게 성인 일노임의 절반도 안되는 30전의 돈을 주었다. 그것도 현금이 아니라 술을 주었다. 30전이면 술 한 병 값밖에 되지 않았다. 이 한 병의 술을 벌려고 아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된 노동을 하였다. 퇴근 후에는 노임 대신 받아 가지고 나온 술을 팔려고 시내를 온밤 돌아다니곤 하였다.

최광은 공청조직의 지도밑에 임금인상을 위한 투쟁에로 소년노동자들을 궐기시켰다. 양주소에 입직한 후 아동단조직에 받아들여 10여 명의 동료들을 동원하여 파업을 호소하는 선동활동을 벌였다. 그 자신도 바로크식으로 되어 있는 식당의 문들마다 보초를 세우고 선동연설을 하였다. 조직생활을 해보지 못한 소년들을 파업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느라고 그는 무척 애를 먹었다. 그래도 최광은 인내성 있게 설복하고 또 설복하였다. ≪술 한 병을 받아가지고는 생활을 해나갈 수 없다. 모두가 단결해서 일한 것만큼 돈을 받아내자. 힘만 합치면 공장주를 굴복시킬 수 있다!≫

그의 호소에 따라 소년노동자들은 3일 동안이나 공장에 출근하지 않았다. 일자리를 떼울까봐 공장으로 나가던 소년공들도 그의 해설을 듣고는 마음을 굳게 가지고 파업대열에 합류하였다. 두 차례에 걸치는 파업을 통하여 소년노동자들은 공장주를 굴복시키고 하루임금을 30전으로부터 40전으로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나자구공청위원으로 사업하던 박호준은 뛰어난 조직적 수완과 능란한 군중공작으로 적구 공청사업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나자구양주소의 소년노동자들은 반일조직에 묶어 세우고 파업투쟁이 승리하도록 배후에서 지도한 인물은 다름아닌 박호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작 도중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적들은 그를 체포하자 금시 나자구일대의 비밀조직을 다 알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쾌재를 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써도 박호준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어느 날 놈들은 반주검이 된 그를 회유해 보려고 이렇게 구슬렸다.

≪너는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청년이다. 나이가 아깝다. 너를 믿고 홀로 사는 너의 어머니가 불쌍하지 않은가.

공청조직과 간부들의 이름만 대면 너는 많은 상금을 받고 호강스럽게 살 수 있다. 그러니 되지도 않을 혁명에 대한 공상을 말고 살길을 찾는게 어떤가.≫

그러자 박호준은 쓴웃음을 짓고 이렇게 말하였다.

≪공청조직과 간부의 이름을 부를 테니 받아쓰시오. 나를 지도한 간부의 성은 ≪공≫가요, 이름은 ≪산당≫이요.≫

적들이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적다가 놀라는 것을 보고 박호준은 벽을 짚고 일어나 그들을 조롱하였다.

나를 키워 준 그 위대한 간부의 이름을 너희들이 수첩에 적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제 공산당은 내 원쑤를 갚아 줄 것이다.≫

박준호는 이렇게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저고리 앞자락을 활짝 헤치고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공청원의 불굴의 영상을 눈앞에 그려 보라. 그가 어떻게나 떳떳이 걸어갔던지 적군 사병들조차 모두 공산주의자들이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공포에 질려 수군거렸다.

한 애연가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그의 손에 슬그머니 담배를 쥐어 주기까지 했다. 처녀들은 그의 발밑에 꽃묶음들을 내던졌다.

항일혁명이 키워낸 공청의 첫 세대들은 이렇게 신의를 지켜 싸웠고 깨끗이 죽을 줄도 알았다.

그때 공청대열에서 교양육성된 공청원들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조직과 혁명의 이익에 완전히 복종시켰다.

공청원 임춘익도 바로 그런 투사였다.

공청 연길현 8구 남선특별지부 서기였던 그는 일찍이 지하공청단체를 조직한 유능한 정치공작원이었으나 그 단체를 지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도 역시 야수적인 고문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조직의 비밀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임춘익은 다른 동지들이 한 비밀공작까지도 다 자기가 했다고 진술하였다. 그 덕으로 체포되었던 동지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는 18살 꽃나이에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아름답고 고상한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조직과 동지들을 살려내고 홀로 형장에 나선 18살 공청원의 고결한 인품앞에서는 적들도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공청원 이순희도 항일혁명이 낳은 불굴의 투사이다. 내가 이순희를 처음으로 만나본 것은 1934년초 겨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나는 적들의 ≪토벌≫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만나려고 아동단학교에 갔다가 이순희를 보게 되었다. 연길에서 현 아동국장으로 사업하던 그가 왕청현 아동국장으로 소환되어온 지 얼마 안 되는 때였다.

내가 아이들속에 싸여 아동단학교 마당에 서 있을 때 이순희가 급히 달려와 인사를 하였다. 눈매가 시원하게 생긴 그는 시냇가의 물망초처럼 청초한 기운을 풍기는 처녀였다.

학교마당에서는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보고 좋아라 매달리는 아이들속에는 홑바지 저고리를 입고 있거나 맨짚신에 몽당치마를 두른 애들이 많았다. ≪토벌≫을 당할 때 불속에서 뛰쳐나왔는지 얼굴에 화상을 입은 어린이들도 보였다. 적통치구역에서 부모를 잃고 찾아들어 온 아동단원들은 거의나 헐벗은 몸들이었다.

나는 화상을 입은 한 어린이의 손을 어루만지며 아동단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초롱초롱 빛나는 아이들의 새까만 눈동자들이 그 무슨 간절한 기원을 담고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몹시 아픈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기어이 너희들을 고아로 만든 왜놈들을 쳐 없애야겠다고 속다짐하였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애들에게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너희들은 우리 조국의 꽃봉오리이며 앞날의 기둥이다. 너희들이 명랑할 때 우리도 명랑하고 너희들이 잘 자라면 우리도 기운이 솟는다.… 어서 무럭무럭 커서 나라의 훌륭한 기둥들이 되거라.≫

아이들은 금시 밝아진 얼굴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소리를 모아 기운차게 대답하고 나서 좋아라고 떠들어댔으나 아동국장 순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장군님, 용서해 주십시오. 공청조직은 저에게 아동국장의 책임을 맡겨 주었는데 아이들이 저렇게 헐벗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순희는 내앞에서 죄를 진 사람처럼 민망해 하였다. 눈물에 젖은 그의 얼굴에는 짙은 회오의 빛이 어려 있었다.

헐벗은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어찌 이순희에게 있겠는가. 사실상 이순희는 아이들의 옷을 꿰매 주고 신발을 손질하고 공책들을 매주느라고 밤에도 눈을 붙일 새가 없었다.

내가 이순희와의 첫 상봉에서 받은 강한 인상은 자기 사업권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잘못과 불상사들의 원인을 늘 주관에서 찾는 그 혁명가적인 자아반성의 태도였다.

나는 며칠 후 아동단원들을 위해 일부러 전투를 조직하였다. 노획한 전리품을 가지고 아동단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솜이불과 새 옷 그리고 신발, 학습장들을 마련하여 보내주었다.

유격대원들이 피를 바쳐서 마련한 어린이들의 새 옷에 볼을 비비며 울고 있던 이순희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순희는 그 일이 고마워서 어느 날인가 아동단유희대를 무어 가지고 우리를 찾아왔다.

≪장군님! 솜이불과 새 옷을 보내주신 장군님의 은혜에 다소나마 보답하겠다고 아이들과 연예대를 무어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날 유격대와 근거지 인민들의 심금을 울려 준 종목 중의 하나가 구연이었다.

나어린 소녀가 새 옷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내가 입은 이 새 옷은 유격대 언니, 오빠들이 피를 바쳐 구해 준 옷이다 하고 허두를 떼고 화상을 입은 자기의 자그마한 손을 내보였다.

≪장군님께서는 왜놈의 ≪토벌≫에 상처입은 이 손을 어루만지시며 너희들이 명랑할 때 우리도 명랑하고 너희들이 잘 자라면 우리도 기운이 솟는다고 하셨어요.

유격대 오빠, 언니들!

우리들은 명랑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 기뻐해 주세요. 기운을 내 주세요.

장군님 말씀대로 나도 어서 무럭무럭 커서 공청원 오빠, 언니들처럼 총잡고 왜놈과 싸우겠어요.…≫

소녀의 구연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무르익은 풍년 이삭에서 근실한 농민의 구슬땀을 보듯이 우리는 그 무대에서 어린이들에게 바친 이순희의 심혈을 읽었다.

어느 날 이순희는 나를 찾아와서 느닷없이 자기를 적구공작에 보내 달라고 제기하였다.

아동사업에 심혈을 쏟아왔고 거기에서 더없는 보람을 느끼고 있던 그가 갑작스레 그런 제기를 하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희는 그 후 공청조직에 거듭 제기하여 마침내 박길송과 함께 나자구로 파견되었다.

삼면이 험준한 산으로 첩첩히 둘러싸여 있는 나자구의 만첩청산과 비옥한 전야에는 항일혈전의 발자취와 함께 적구공작의 길을 걸어간 용감한 공청원들의 붉은 넋이 어려 있다.

나는 여기서 이순희의 적구공작과정을 누누히 기록하려고 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꽃다운 나이에 서슴없이 목숨을 바친 그의 정신력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순희는 그때 나자구에서 조금 떨어진 초막을 근거지로 삼고 공작하였다. 찬바람이 스며들고 빗물이 새는 어설픈 그 초막에서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았다. 그 기간에 나자구에서는 공청조직이 늘어나고 아동당조직이 자라났다. 원쑤들의 아성에 강유력한 혁명의 포대가 쌓아진 것이다.

이순희는 이 포대를 쌓느라고 변장한 몸으로 군경들의 총검과 밀정들의 감시가 무시로 뒤따르는 위험천만한 적구를 주야불식으로 수없이 누비며 다녔다.

그러나 그는 이봉문이라는 고약한 밀정 놈에게 뒤를 밟혀 그만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적들은 나자구의 지하조직을 들춰내려고 순희를 음침한 철창속에 가둬 놓고 가혹하게 고문하였다. 지하조직의 운명은 이순희에게 달려 있었다. 그가 입을 열기만 하면 나자구에 깔려 있는 조직망들이 다 들장이 나고 애써 쌓아 올린 혁명의 포대가 일조에 무너질 수 있었다.

놈들은 거짓 약속과 감언이설로 처녀의 심장을 움직여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순희에게 알아낸 비밀은 오직 하나, 그가 공청원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아마도 순희는 철장속에 들어가서 공청원의 의미를 더욱 크게 느꼈던 것 같았다.

고문을 주관하던 나자구헌병대대장은 악에 치받쳐 마침내 순희를 총살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사형 전날 밤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헌병대장이 이순희에게 사형을 선포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꾀어보려고 졸개들을 이끌고 이순희를 찾아갔을 때였다.

그때 순희는 옷을 손질하고 있었다. 비록 땀에 절고 피로 얼룩지고 갈기갈기 찢어진 옷이나마 단정히 입고 사형장에 나가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헌병대장을 개처럼 따라다니던 이봉문이란 자가 처녀의 곁에 다가가서 네가 살아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는 이 시간밖에 없다, 꽃다운 네 나이가 아깝고 불쌍해서 그러니 나자구에 있는 지하조직원의 이름을 한 사람만이라도 외워 바쳐라, 그러면 너는 살아난다고 하였다. 처녀는 아무 대꾸도 없이 피에 엉킨 머리를 비다듬고 찢어진 저고리품에 손을 가져가더니 조그마한 회색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순간 이봉문은 사색이 되어 감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교형리들도 아우성을 치며 그를 따라나갔다. 이봉문은 순희가 꺼낸 회색주머니를 수류탄과 같은 무슨 폭발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폭발물이 아니라 흙주머니였다. 그 앙증스러운 주머니는 순희아버지가 유격근거지에서 전사할 때 딸에게 물려준 것이다.

≪놀라지들 말거라! 이것은 내 나라의 흙을 담은 주머니다. 더러운 그 목숨이 무얼 그리 귀중해서 줄행랑을 놓느냐!≫

조국의 흙을 품에 안고 철장속에서 광복의 그날을 그려본 공청원 이순희와 변절자 이봉문의 인격적 대조를 ≪봉황새와 까마귀≫라는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결코 무리한 비유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봉문과 같은 배신자가 그 흙주머니의 가치를 알 수 있었겠는가.

이튿날 이순희는 사형장에서 혁명만세를 부르며 최후를 마쳤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부른≪공청가≫를 아래에 소개하고 싶다.

새 세상 동터온다 어서 마중가자

우리는 무산청년 모두 앞서가자

놈들의 낡은 사회를 용감히 무찔러 나가자

우리는 무산청년이니 무산청년답게

우리는 근로대중의 청년전위대

나는 언제인가 이순희와 함께 아동단학교에서 풍금을 타며 이 노래를 불렀다. ≪공청가≫는 공청원들 뿐만 아니라 공산당원들과 아동단원들, 부녀회원들까지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그것은 그 노래속에 새 사회에 대한 근로대중의 한결같은 동경과 미래에 대한 열렬한 사랑, 새 세상을 앞당기려는 청년들의 확고부동한 의지가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공청원들이 이순희처럼 단두대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공청가≫는 원래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청년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그러나 가사와 선율속에 흐르는 사상감정은 자유를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온 세계 청년들의 심장을 억세게 틀어잡았다. 에젠 포치에의 ≪인터내셔널≫이 많은 나라 당들의 당가로 되었던 것처럼 ≪공청가≫역시 국제적인 청년가로 널리 애창되었다.

이순희와 같은 열녀를 배출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그의 정치적 생명에 빛을 주고 날개를 달아 준 공청조직의 공로라고 말할 수 있다. 조직이라는 존재가 없고 조직적 단련이라는 성장과정이 없었더라면 과연 이순희와 같이 앳된 처녀가 교형리들앞에서 그처럼 용감해질 수 있으며 그처럼 도도한 긍지와 자부를 안고 최후의 순간을 떳떳하게 장식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조직은 영웅을 낳는 집이며 대학이라고 말한다. 조직생활을 통해 단련된 1명의 공청원이나 사로청원은 100명, 1,000명의 적도 타승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진다. 우리 인민이 일당백의 인민으로 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조직생활을 통해 단련된 인민이기 때문이며 우리 인민군대가 일당백, 일당천의 군대로 되는 것은 그들이 다같이 조직이라고 불리우는 용광로에서 자신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철저히 연마해가는 군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사로청이라는 조직을 통하여 투사로, 영웅으로, 혁명가로 자라나고 있다. 항일전쟁 당시의 공청조직이 직업적인 혁명가들을 키워내는 학교였다면 지금의 사로청조직사회주의건설의 전위부대를 육성해내는 기지라고 말할 수 있다. 항일혁명시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청년들은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주공을 담당하고 있다. 사로청은 우리 당이 가장 믿고 아끼고 사랑하는 믿음직한 주력부대로 되고 있다. 이 주력부대가 진출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위훈이 창조되고 기적이 나래친다. 서해갑문, 북부철길, 광복거리, 5.1경기장,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태권도전당 등 우리 조국의 만년재부로 되고 있는 위대한 기념비적 창조물들에는 어느 것이나 할 것 없이 노동당시대의 청년들이 바친 고귀한 피와 땀이 스며 있다. 우리 인민이 ≪속도전청년돌격대≫를 사랑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우리 시대 사로청원들과 청년들속에서는 만민의 찬탄을 자아내는 공산주의적 미거들이 끝없이 발양되고 있다. 한 번 죽으면 두 번 다시 받아안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생명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청년들은 남의 목숨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내던지고 있다. 일생을 영예군인의 손발이 되어 줄 것을 결심하고 그들의 아내가 된 처녀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이름을 다 꼽아 내려갈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 나라 사로청원들속에는 미혼의 몸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준 고마운 처녀도 있다. 다른 나라 청년들이 수도시민권을 얻지 못해 애를 쓰고 있을 때 우리 청년들은 정든 수도를 서슴없이 떠나 전야로, 탄전으로, 개발지로 자진하여 탄원해가고 있다. 진실을 말하건대 나는 이런 청년들을 금방석에 앉히고 싶은 심정이다.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우리 시대 청년들속에서 발양되고 있는 공산주의적 미거를 접할 때마다 나는 청년운동을 위해 바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노고를 더듬어보며 그 운동의 전통을 훌륭히 계승해가고 있는 사로청을 생각하곤 한다. 우리 시대의 청년들속에서 세계를 뒤흔드는 미담들이 연이어 태어나 만 사람을 격동시키고 있는 것은 사로청의 공적에 속한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조직생활을 통해 단련된 청년들의 대부대, 그것은 사실상 원자탄보다도 더 위력한 것이다.

세상에 청년사업처럼 보람차고 영예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나에게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행운이 오고 직업을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길림시절처럼 단연코 청년사업에 몸을 잠글 것이다.

유격구해산을 계기로 우리는 많은 정치공작원들을 또다시 적구에 파견하였다. 우리는 그 당시 안도, 돈화, 무송, 장백, 임강 등지에 사람들을 보내 공청 요길변 중심현위원회를 꾸리고 적구에서의 지하청년사업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요길변이란 요녕, 길림, 간도의 변경지대를 말한다. 우리는 또한 지하청년조직을 무산, 갑산, 풍산, 회령을 비롯한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에 일차적으로 꾸리고 나아가서 평양, 서울, 부산을 비롯한 조선의 중부일대와 남부지대에까지 확대할 원대한 구상을 세웠다.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왕청현 공청서기 조동욱도 공청 요길변 중심현위원회 서기의 책임을 지니고 적구로 들어갔다.

조동욱도 공청사업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5.30폭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길림성 제3감옥이라고 부르던 하얼빈감옥에서 1년 이상의 옥중생활까지 하였다. 감옥에서 중어공부도 하고 공청에도 들었다는데 중학교졸업생치고는 지식이 매우 풍부하고 학구욕이 강하였다. 조동욱은 공청 영안현위의 위임을 받고 구국군부대에 파견되어 공청사업을 하다가 40여 명에 달하는 무장인원을 이끌고 1932년 9월경에 왕청으로 나왔다.

내가 조동욱을 처음으로 만난 것이 그 해 가을이었다고 기억된다. 우리는 그를 이광별동대의 공청간사로 임명하고 영안에서 나온 무장인원들을 그 별동대에 배속시킨 다음 대원들을 북만에 파견하여 그의 가족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조동욱의 의붓아버지 장기섭은 ≪공산주의아바이≫라고 불리우던 성실한 당원이었다.

조동욱은 나와 오의성과의 담판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왕윤성과 함께 담판 중의 내 사업을 적극적으로 보좌해 준 사람이다. 이 담판이 있은 후 나는 그와 왕윤성을 나자구시내에 있는 반일부대연합판사처에 파견하였다.

조동욱과 왕윤성은 각지의 반일부대들에서 파견되어온 연락군관들과 결의형제를 뭇고 중하층 장교들과 병사대중속에 공산당지부와 공청지부까지 조직하였다.

반일부대 연합판사처에서의 활동을 통하여 조동욱의 정치활동솜씨는 더 세련되었다. 그가 적구에 내려가서 처음으로 발을 붙인 곳은 안도현 양강구였다. 그는 자그마한 상점을 하나 차려놓고 ≪장사≫질을 하면서 상점에 드나드는 위만군들과의 사업을 능란하게 하여 15명의 중하층 장교와 병사들로 결의형제를 뭇고 1개 중대를 완전히 전취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1개 중대는 조동욱의 조종에 따라 병변을 일으키고 산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조동욱은 산중에 웅거해 있는 병변군인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지어 주려고 처창즈로 찾아갔다. 그런데 좌경분자들은 그를 ≪민생단≫혐의자로 보면서 구속하려고 하였다.

훗날 조동욱은 그때의 일을 아래와 같이 술회하였다.

≪그때 동만특위의 좌경분자들은 나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문초했습니다. 송일이 ≪민생단≫이니 너도 ≪민생단≫이 아니겠는가, 증거를 내놓기 전에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엄포를 놓지 않겠습니까. 저는 탈출을 결심하였습니다. 저에게 밥을 날라다주던 김정숙동무도 그 결심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정숙동무는 여비로 쓰라고 하면서 돈까지 주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양강구에 돌아온 다음 어머니를 데리고 조선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그 후 조선의 여러 지역에 나가 청년사업을 계속하였다.

김진의 넋이 이수복에 의해 이어지고 이수복의 넋이 김광철, 한영철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공청의 명맥은 민청에 의해 이어지고 민청의 명맥은 사로청에 의해 튼튼히 이어지고 있다. 일부 나라들에서 청년학생들이 사회의 우환거리로 되고 반혁명의 하수인이 되어 할아버지네 세대들이 쌓아올린 탑을 허물어가고 있을 때 우리의 청년들은 성새가 되고 방패가 되어 선열들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믿음직하게 이어가고 있다.

지금 사로청대열에는 김정일조직비서의 영도에 끝없이 충실한 수백만 맹원들이 집결되어 있다. 21세기의 우리의 조국은 그들의 힘에 의하여 보다 살기 좋은 낙원으로 꾸려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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