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3일(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지난 강좌 보기

     ※강조된 문단에 마우스를 올려놓으면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다홍왜에서의 논쟁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민생단≫문제와 관련된 나와 동만당 지도부 인물들 사이의 논쟁이 다홍왜회의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고찰이라고 볼 수 없다. 그 논쟁의 시초는 1932년 10월에 있었다. 북만진출을 개시한 우리 부대가 왕청지방에 와서 얼마 동안 머물러 있을 때였다.

나는 그때 왕청 체류 일정의 첫 순서로 1구(요영구)당 사업을 지도하였는데 그 과정에 현당과 구당의 일부 일군들이 반≪민생단≫투쟁을 혁명적 원칙과 배치되게 극좌적인 방법으로 망탕 진행하고 있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어느 날 아침 1구당 조직부장 이웅걸과 함께 마을을 돌아보던 나는 구당 사무실에서 터져나오는 비명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건 무슨 소립니까?≫

이웅걸은 웬일인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현당 사람들이 이종진이란 사람을 잡아놓고 문초를 하는 소립니다.≫

≪왜요? ≪민생단≫혐의자입니까?≫

≪그런가 봅니다. 본인은 사흘째 아니라고 뻗대는데 간부들은 자꾸 죄상을 내놓으라고 달구치지요. 저 소리만 들으면 하루 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습니다. 빨리 지나쳐 버립시다.≫

≪그를 ≪민생단≫으로 보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적구공작을 나갔다가 며칠 늦어서 유격구로 돌아온 게 문제가 되었지요.≫

≪아니, 그런 것도 이유로 된단 말이오?≫

≪대장 동무, 말을 삼가하시우. 여기서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민생단≫으로 몰릴 수 있습니다. ≪민생단≫바람에 살기가 여간 어렵게 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웅걸의 만류를 물리치고 구당 사무실로 향하였다.

현당에서 온 사람은 1구의 적위대원들과 함께 그냥 이종진을 무섭게 문초하고 있었다. 현당의 간부는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낯선 손님에게 왕청사람들이 계급투쟁을 얼마나 본때 있게 하는 한번 구경하라고나 하는 듯이 기광을 부리며 이종진을 두드려 팼다.

이종진은 중국인 지주집에서 10년 이상이나 머슴살이를 해온 고농이었다. 적의 ≪토벌≫에 아내를 잃고 어린 두 자식은 혁명을 하기 위하여 남들에게 주었다. 유격구에 들어와서는 1구 소속의 지부 당서기로 공작하였는데 군중들의 신망이 높았다. 이런 사람이 이적단체에 가담하여 반혁명을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래 공작 날짜가 지연되었다고 하여 사업상의 불찰을 ≪민생단≫근거로 삼는 것이 정당하겠는가.

나는 심문을 중단시키고 현당과 구당의 간부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주었다.

≪동무들, 내가 요해한 데 의하면 이종진동무는 ≪민생단≫으로 취급할 근거가 없다. 똑똑한 근거도 없이 자그마한 공작상 오류를 가지고 아무 사람한테나 망탕 몽둥이질을 해서는 안된다. 반≪민생단≫투쟁은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심중하게 해야 한다.≫

심문은 일단 중지되었으나 현당 사람들은 내가 요영구를 떠나 마촌으로 간 다음 이종진을 끝내 학살하였다.

그대신 안도에서 온 김일성대장이 요영구 구당 사무실에 나타나 현당에서 내려간 모모한 간부들의 ≪민생단≫ 심문을 정지시키고 그들을 탄핵했다는 소문이 왕청현당과 동만특위 간부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 소문은 왕청지경을 넘어 연길, 화룡, 훈춘 지방에도 퍼져갔다. ≪그 사람이 무슨 화를 입으려구 그런 참견을 했을까, 물불을 모르는구만.≫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왕청맛을 잘 몰라서 그래. 대장이야 안도사람이 아닌가.≫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쨌든 담은 큰 사람이야.≫하고 조심스럽게 칭찬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1구당 사무실에서 보여준 언행은 사실상 ≪민생단≫문제와 관련된 나와 좌경분자들 사이의 논쟁의 발단으로 되었다.

이 논쟁은 1933년에 들어서면서 심화되었다. 1933년은 동만지방의 유격구들에서 ≪민생단≫과 관련된 숙청사업이 제일 소란스럽게 벌어지던 때였다. ≪민생단≫혐의를 뒤집어쓴 조선족 출신의 적지 않은 군정간부들과 혁명가들이 바로 이 해에 죽거나 도주하였다.

나도 역시 ≪민생단≫올가미에 걸려들 뻔하였다. ≪숙반≫사업을 극좌의 흔들레판으로 끌고가던 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은 나를 ≪민생단≫과 연관시키려고 검질기게 애를 썼다.

그들이 내두르는 ≪증거≫라는 것은 아무런 타당성도 없는 황당무계한 것이었다. 그 ≪증거≫ 가운데는 도문지주납치사건이라는 것도 있었다.

그 당시 유수하자지방에 상주하고 있던 100여 명의 반일부대들은 군복을 해결하지 못하여 우리에게 방조를 요청해 왔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우리는 구국군이 경제모연공작에 써먹으려고 잡았다가 놓친 지주를 데려가다 잘 설복하여 그의 도움으로 500벌의 옷을 만들 수 있는 군복천과 면화를 해결하였는데 이것을 도문지주납치사건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때 그 천과 솜으로 왕청지방반일부대장병들에게 옷을 다해 입혔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엄동설한에 군복조차 해 입히지 못하면 반일부대장병들이 적들에게 귀순하거나 투항해갈 우려가 많았다. 구국군과 같은 우군의 협력이 없이 혁명군의 힘만으로 고군독전해서는 유격구를 유지해 나가기가 곤란하였다.

이용국의 후임으로 왕청현당서기의 자리에 등용된 김권일은 동만특위의 몇몇 간부들과 함께 유격대가 지주를 이용하여 구국군의 동기군복을 해결한 것은 우경투항주의적 행동이라고 비난하면서 군대를 맡고 있는 김일성은 ≪민생단≫의 작용을 방임하고 조장시킨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이 내 이름까지 걸고들며 그 무슨 책임을 운운한 것은 사실 동만땅에서 발언권이 있는 조선족 출신 간부들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제거해 버리려는 속심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그들은 지어 김일성이 반≪민생단≫투쟁을 잘 안하기 때문에 왕청유격대 안에 ≪민생단≫이 많이 들어와 있다는 터무니없는 소리까지 하면서 어떻게 해서나 나를 ≪숙반≫의 심판대 위에 올려 세우려고 애썼다.

이렇게 되어 나와 그들 사이에 정면충돌이 생겼다.

나는 지주를 통하여 구국군의 옷을 해결한 것이 우경으로 될 수 없고 더구나 ≪민생단≫의 작용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 다음 반≪민생단≫투쟁에 대한 나의 견해도 서슴지 않고 공개하였다.

≪민생단≫을 반대하는 투쟁이 곧 간첩을 반대하는 투쟁으로 되는 것만큼 그것은 누구든지 외면할 권리가 없다, 나도 우리 내부에 ≪민생단≫이 침습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민생단≫을 숙청한다고 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생사람을 잡는데 대해서는 수수방관할 수가 없다, 죄도 없는 자기편 사람들을 망탕 잡아죽이는 것이야말로 혁명을 파괴하는 이적행위인데 우리가 어찌 그런 행위를 보면서도 함구무언할 수 있겠는가, 보라, 당신들이 ≪민생단≫이라는 꼬리표를 달아놓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이 유격구에서 우리와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쟁쟁한 싸움꾼들이 아닌가, 그런 싸움꾼들이 무엇 때문에 혁명을 반대하는 ≪민생단≫이 되겠는가, 당신들이 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좌경분자들은 내 말을 듣자 노발대발하면서 ≪동무는 그럼 반≪민생단≫투쟁노선을 반대하는가?≫고 큰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혁명에 충실한 자기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당신들이 추구하는 반≪민생단≫투쟁노선이라면 나는 그런 노선을 지지할 수 없다. ≪민생단≫을 잡아내려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똑똑히 잡아낼 것이지 하필 왜 이 산속에서 배를 곯으며 혁명을 하느라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제껴 버리는가, 이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나의 논박이었다.

내가 날을 세워 가지고 문제를 첨예하게 끌고가자 동만특위의 좌경분자들은 ≪김일성이 ≪민생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비난하였다.

나는 ≪부족하면 좋다. 당신들이 ≪민생단≫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을 내가 직접 만나보겠다. 수감자들의 진술을 듣고 싶은 생각이 있거든 당신들도 입회하라.≫고 하였다.

이수구골 안의 ≪민생단≫감옥에 갇혀 있던 수감자들 중에는 장포리(본명 장룡산)라고 부르는 중대장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왕청지방의 명포수였다.

장룡산은 아버지를 따라 사냥터에 자주 다니면서 총 쏘는 솜씨를 익혔는데 밀가루 반죽을 해놓고 밖에 나가서 단꺼번에 8마리의 노루를 잡아다가 수제비국을 해먹을 정도로 사격술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가 소왕청방위전에서 혼자 쏘아잡은 적만 해도 아마 100명은 넘을 것이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해온 지휘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런 인물이 하루아침 사이에 ≪민생단≫ 벙거지를 쓰고 짐승우리나 다름없는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 그것을 보는 내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장포리, 똑똑히 대답해 보라. 너 정말 ≪민생단≫인가?≫

나는 ≪민생단≫ 감옥에 가자 장룡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장룡산은 별로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민생단≫입니다.≫하고 얼른 시인해 버렸다.

≪그럼 ≪민생단≫ 노릇을 하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 새끼들은 수태 쏴죽였는가?≫

장룡산의 진술을 들어보려고 감옥까지 따라온 좌경분자들은 모두 댕댕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장룡산을 조리 있게 타일렀다.

≪이것 보라. 장포리, ≪민생단≫이라는 거야 일본놈들을 옹호하는 것이고 또 일본놈들이 만들어낸 반동조직인데 네가 ≪민생단≫이라면 그놈들을 100여명 이상이나 쏘아 잡았다는 게 이상하지 않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이야 바른대로 해야 할 게 아닌가. 솔직하게 말해 보라.≫

장룡산은 그제서야 내 손을 붙들고 오열을 터뜨리면서 목이 꺽꺽 메이는 하소연을 하였다.

≪대장 동무, 나야 무슨 까닭으로 ≪민생단≫이 되겠소. 아니라고 대답해도 들어주지 않고 자꾸 두드려 패니 다른 수가 없이 ≪민생단≫이라구 했소. 대장 얼굴에 먹칠을 해서 죄송스럽소.≫

≪내 얼굴에 흙칠을 하건 먹칠을 하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네가 주리를 트는 폭군들앞에서는 ≪민생단≫이라고 대답하고 내앞에서는 아니라고 하는 줏대없는 인간이라는데 있다. 나에게는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하는 겁쟁이가 필요 없다.≫

내가 얼마나 노기등등해서 ≪감옥≫문을 나섰던지 좌경분자들은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하였다.

그날 나는 동장영을 만나서 한바탕 항의를 들이댔다.

≪내 보기에는 당신들의 사업에 문제가 있다. 반≪민생단≫투쟁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함부로 잡아가둘 수 있는가? 반≪민생단≫투쟁은 민주주의적으로 해야 한다. 상층에 있는 몇몇 권력자들의 독단이 아니라 대중의 토의를 거쳐 적아를 정확히 식별해야 한다. 고문과 위협의 방법으로 없는 ≪민생단≫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 지금 이 왕청에서 장포리를 ≪민생단≫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당신들밖에 없다. 장포리는 내가 목숨을 걸고 보증하니 당장 석방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좌경분자들에게 유격대 안에 있는 ≪민생단≫은 정치부의 승인이 없이 마음대로 다치지 못한다고 선포한 다음 부대에 돌아와 장룡산을 ≪숙반≫지휘부에 제멋대로 넘겨준 지휘관을 처벌하였다.

그날 동만특위에서는 나의 요구대로 장룡산을 석방하였다.

장포리는 그 후 영안현 주지툰이라는 곳에 파견되어 식량공작을 하면서 마지막까지 잘 싸웠다.

세상에 널리 소개된 박창길사건도 하나의 시련이라면 시련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허라는 곳에 주둔해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우리는 도문부근에서부터 끌고 온 민회소를 잡아 군인들과 마을사람들에게 먹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소고기를 먹고 많은 사람들이 설사에 걸려 고생하였다.

전우들은 내 숙소에 우르르 쓸어와서 ≪민생단≫이 우물에 다 독약을 쳐서 전부 중독되었는데 무리죽음이 나지 않겠는지 모르겠다고 야단법석을 하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중대는 전멸될 수 있었다.

나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중대를 전부 뒷산에 데리고 올라가 있을 수 있는 적의 내습에 대처하여 만단의 전투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리 시간이 경과하여도 내 자신은 전혀 배가 아파나지 않는 것이었다. 응당 있게 되리라고 예측했던 적의 출동도 없었다.

나는 중대장과 정치지도원, 공청서기, 청년간사를 비롯한 중대의 지휘관들을 한자리에 모두 불러다놓고 동무들도 ≪민생단≫이 정말로 우물에 독약을 쳤다고 생각하는가고 물었다.

지휘관들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일제히 ≪예, 그런 것 같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나는 소고기국을 어제 저녁에도 먹고 오늘 새벽에도 먹었는데 배가 아프지 않소. 다른 사람들이 아프면 내 배나 중대장의 배도 아프겠는데 아프지 않으니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소?≫

≪지휘관들이 먹는 국은 깨끗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중대장이 하는 말이었다.

≪그건 이치에 맞지 않소. 한 가마국을 먹은 이상 지휘관들의 것이라고 해서 약독이 미치지 못한다는 법이야 없지 않소.≫

얼마 후 마을을 순찰하던 소대장이 우물에 독약을 친 ≪민생단≫을 찾아냈다고 하면서 키가 장총 기장만큼 되는 아이를 나한테로 데려왔다. 그 아이가 바로 문제의 박창길이었다. 소대장이 하는 말이 그가 마을사람들앞에서 자기 죄를 솔직히 인정했다는 것이었다.

동네에서는 범인들 잡아냈다고 술렁술렁 끓었다. 그놈이 몹쓸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창길의 어머니를 때려죽일 여자라고 쌍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창길이는 중국인 지주네 집에서 돼지몰이를 하며 고생스럽게 자라난 애였다. 그의 형들 가운데는 유격대에서 중대 후방책임자로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당지부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아이가 유격대의 한 개 중대 역량을 전멸시킬 수 있는 해독행위를 했다는 것은 잘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창길이와 몇 시간 동안 담화를 하였다. 창길이는 내앞에서도 자기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울면서 그것을 부정하였다. 그가 처음에 마을사람들앞에서 자기 ≪죄≫를 시인한 것은 자기에게 독약을 쳤다는 험턱을 억지로 들씌우는 마을아낙네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우리는 중대를 데리고 지체없이 산에서 내려와 군중대회를 열고 박창길의 무죄를 선포하였다.

≪이 애는 약을 치지 않았다. 그러면 누가 약을 쳤는가? 여러 분들 가운데는 약을 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약을 먹은 사람도 없다. 있다면 설사를 만나서 하루이틀 고생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배앓이를 한 것은 오래간만에 소고기를 너무 많이 먹은 탓이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들이 ≪민생단≫이라고 몰아주던 창길이를 유격대에 받아들인다는 것을 선포한다.≫

마을아낙네들은 나의 연설을 듣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박창길이를 ≪민생단≫으로 몰아주던 여자들까지도 다 흐느껴 울었다.

좌경분자들은 박창길사건도 역시 우경적 입장에서 처리하였다고 하면서 문제시하였다.

박창길은 그 후 유격대에 입대하여 소왕청방위전투에서 영용하게 싸웠다.

이처럼 나는 좌경분자들의 포위속에서 몇 가지의 큰 모험을 하였다. ≪민생단≫ 감옥에서 장포리와 양성룡을 빼내온 것이 하나의 모험이었다면 다른 하나의 모험은 박창길의 무죄를 선포하고 그를 유격대에 받아들인 것이었다.

권력에 환장한 천박하고 암둔한 인간들이 색안경 너머로 만사람의 진가를 가늠해보며 검사나 판사나 형리의 행세를 하고 있을 때 인간을 인간으로 보고 동지를 동지로 대하며 인민을 인민으로 섬기는 믿음의 정치, 사랑의 정치를 펼쳐 나간다는 것은 털어놓고 말해서 당시로서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지만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야 했던 투쟁이었다.

만사를 ≪민생단≫의 작간으로 보는 불신의 감시경밑에서 자기를 건져낼 수 있는 최대의 보신책은 사실 아무 일에도 참견하지 않으며 보고서도 못 본 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른 것을 보고서도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도 죽은목숨과 같고 구태여 살 필요조차 없는 생명 없는 생명이라는 제나름의 배짱을 가지고 우리가 불의라고 보는 모든 것을 향하여 반기를 들었다. 일신의 안위만을 걱정한다면 그것이 무슨 혁명가이겠는가. 나는 ≪숙반≫의 회오리가 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우리가 한 몸을 내대고 투쟁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밀어제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민생단≫ 아닌 ≪민생단≫을 숙청하는데서 권력의 진미를 느낀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은 심지어 동만유격구 내에 꾸려진 당과 유격대의 조직체계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동만당의 ≪민생단≫체계와 인민혁명군의 ≪민생단≫체계라는 것까지 고안해내고 그것을 공포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좌경분자들은 우리에게 유격대 내에도 ≪민생단≫이 많이 침투되었다는 인상을 주고 반≪민생단≫투쟁에서 더는 제동을 걸지 못하도록 나와 내 수하의 대원들 사이에도 쐐기를 박으려고 획책하였다.

어느 날 모 간부가 우리 부대를 찾아와 동만당조직부장이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해 주었다. 편지를 뜯어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입수한 자료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조직부장은 한봉선이라는 대원이 ≪민생단≫을 크게 해 가지고 나까지 죽이려 하였는데 죄상으로 보아 마땅히 체포하여야 할 대상이니 당장 잡아내야겠다고 하였다.

한봉선의 ≪죄상≫은 엄청난 것이었으나 편지를 읽어보니 어째서인지 거기에 씌어진 사연들에 믿음이 잘 가지 않았다. 우선 그가 ≪민생단≫책동을 크게 벌인다는 사실이 몹시 허황해 보였다. 지금껏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움을 잘해온 한봉선이 무슨 망녕이 들어 ≪민생단≫에 가담한단 말인가.

인격상으로 보더라도 그는 자기 상관을 모함하거나 살해하는 것과 같은 악행을 할 수 있는 포악한 성격의 사나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이 시샘을 하리만치 선량하고 예절이 밝은 미남자였다. 평상시 나와의 친분도 이만저만 두텁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자기를 그토록 사랑해 준 상관을 해치려고 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편지에 씌어진 사연들을 무턱대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조직부장이 아무려면 나에게 거짓말을 꾸며내겠는가. 내 심중은 이래저래 불쾌해졌다.

나는 편지를 가지고 온 간부에게 내가 직접 더 검열해보고 처리할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말했다.

≪언제 일이 날지 모를 판인데…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군.≫하고 그 간부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내 곁을 떠나가 버렸다.

내 머리속에서는 복잡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한봉선이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가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자고 할까? 나를 해칠 건덕지가 없지 않는가. 그를 특위에 보내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그를 둬두었다가 정말로 후환이 생기면 야단이 아닌가.

며칠 후 나는 한봉선을 지휘부로 불렀다.

한봉선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대장동지, 무슨 일로 저를 불렀습니까? 혹시 적구공작에 내보내자고 그러시는 게 아닙니까?≫

≪맞혔소. 오늘 당장 삼차구에 가서 밀정 한 놈을 붙잡아와야겠소. 동문 참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구만.≫

≪후각이고 뭐고가 있습니까. 지난밤 꿈에 도문구경을 좀 했는데 우리 중대 친구들이 해몽하기를 적구공작에 나갈 징조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친구들이 해몽을 멋있게 해낸 셈이지요.≫

≪그럼 내가 호신용 권총을 한 자루 줄 테니 그걸 가지고 떠나도록 하오.≫

≪총은 거치장스러워서 두고 가겠습니다. 입으로 구슬려서 데리고 올 테니 염려마십시오.≫

≪그럼 총은 묻어두었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오시오.≫

한봉선은 내가 시킨 대로 싸창 한 자루를 중도에 묻어두고 삼차구시내에 들어가서 우리가 지명한 밀정을 만났다. 너 공산구역에 한번 들어가보지 않겠는가? 너의 신변안전은 내가 담보한다는 말로 그를 구슬려서 유격구에 데리고 들어왔다.

그 밀정을 내가 직접 심문하였다.

≪우린 네가 일본놈의 개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그대신 우리 일을 좀 해줘야겠다. 헌병대에 이름을 걸고 서약도 했으니 일본놈들이 시키는 일은 그냥 하면서 ≪토벌대≫가 올 때에만 우리한테 미리 알려 달라. 너에게 다른 임무는 주지 않겠다. 너 그것만 잘해 주면 이 다음에 혁명가로 인정해 주겠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

밀정은 대장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으니 혁명조직성원들이 자기를 죽이지 않도록 신변보호만 잘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나는 밀정이 돌아갈 때에도 한봉선을 불러 그를 삼차구까지 데려다주라고 하였다. 물론 한봉선은 그 임무도 훌륭히 집행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나는 동만특위의 간부들에게 말했다.

≪한봉선을 검열해보느라고 총을 주었는데 이 사람이 뛰지 않았다. 일본놈 개를 잡아오라고 했는데 개도 잡아왔다. 총과 탄알을 다 주었으니 나를 해치려면 얼마든지 해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과연 ≪민생단≫이겠는가?≫

동만당의 간부들은 ≪민생단≫도 그런 흉내는 낼 수 있다, 그가 총을 가지고서도 도망치거나 당신을 해치지 않은 것은 간부들의 신용을 얻어 가지고 대열에 더 깊이 침투하여 ≪민생단≫작용을 큼직하게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니 그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한봉선에게 두 번째 과업을 주었다. 도가선 철길에 가서 폭발을 묻고 오라고 하였다.

한봉선은 이번에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슴지 않고 공작지로 떠나갔다. 동무는 모험심이 너무 강한 것이 탈이다, 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였더니 그는 잡히면 잡히고… 까짓 것, 그런 건 꿈만합니다. 잡혀도 변절은 하지 않을 테니 나를 믿어 주십시오, 기껏해서 총살을 당하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한봉선을 돌격조에 망라시킨 것은 그 다음에 있은 일이었다. 우리는 그때 왕청 주변의 어느 집단부락을 습격하였는데 그 전투가 아주 치열했다. 돌격조를 책임진 한봉선은 선두에서 포대를 들이치다가 불행하게도 한 쪽 손을 잃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이 용감무쌍한 낙천가는 ≪민생단≫혐의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세 차례의 검열을 통하여 그가 ≪민생단≫이 아니고 혁명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때 내가 한봉선을 검열해보지 않고 조직부장에게 보냈더라면 그는 영락없이 반동분자의 감투를 쓰고 처단되었을 것이다. 내가 좌경분자들의 영을 잠깐 보류시키고 검열을 통하여 한봉선을 구원해 준 것은 사실 목숨까지도 왔다갔다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그때 한봉선이 총을 가지고 어느 간부를 살해했거나 적구로 달아났다면 나는 그를 신임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세 번째 모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모험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개별적 일군이 내던지는 한 마디의 명령이나 한 번의 손짓에 따라 수십 수백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험악한 ≪계급투쟁≫의 마당에서 혁명가의 냉철한 이성과 분별력은 고사하고 초보적인 인정이나 의리마저 저버린 목석 같은 인간들의 도전을 순간마다 당하면서도 내가 그 어떤 압력에도 굽어들지 않고 자기 신념에 따라 끝까지 정정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은 것은 깨끗한 나의 경력과 유격대지휘관으로서의 전투성과와 이론적 뒷받침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간도에서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던 중국인간부들 중 적지 않은 인물들이 또한 길림시절부터 우리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사람들이어서 그들이 나만은 함부로 ≪민생단≫으로 걸어 제끼지 못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의 사나운 회오리가 동만의 유격구들을 한창 휩쓸고 있을 때 나는 병석에서 일어나 다홍왜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

수십 일간이나 내처 앓던 몸이어서 회의에 참가할 만한 기력은 없었으나 내가 요구한 회의이니 반드시 가야 했다. 그런데 4중대장과 정치지도원을 비롯한 군대 내의 많은 동무들이 내가 다홍왜로 떠나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대장동지, 만주성당에서도 파견원이 오고 공청 만주성위에서도 파견원이 왔다는데 어쩐지 심상치 않습니다. 진리가 아무리 대장동지 편에 있다고 해도 어쨌든 대장동지는 혼자이고 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4중대 정치지도원이 나에게 넌지시 한 말이었다.

전령병인 오대성까지도 나의 다홍왜행에 대해 우려하였다. 다홍왜회의가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고 축복의 인사를 보내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나를 고무해 주는 낙천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나의 출발을 앞두고 그처럼 불안해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1933년 2월이면 만주성당이 동만 각급당부와 전체당원들에게 전당을 볼셰비키화하기 위하여 숙반공작과 좌우경을 반대하는 양조전선의 투쟁을 강하게 전개하여 당내에 침입한 반혁명분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파쟁주의, 민족주의, 사회개량주의를 청산구축할 데 대한 비밀지령을 하달한 뒤였다. 이 지령이 하달된 후 동만 각급 당조직들에서는 반≪민생단≫투쟁이 더욱 극좌적으로 무자비하게 전개되었다.

≪민생단≫문제와 관련된 나와 좌경분자들 사이의 논쟁은 그때까지 비공식적인 장소에서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당과 군대, 공청의 주요 간부들이 다 모이는 다홍왜회의에서는 논쟁이 공식적인 형태를 띠고 첨예하게 벌어질 것이다. 좌경을 반대하는 세력이 나 하나라면 나를 반대하는 세력은 10이나 20명도 넘을 수 있다. ≪민생단≫문제가 일정에 오르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대체로 다 입을 봉하고 아닌 보살을 하는 것이 전례이니까. 그런즉 나는 좌경의 포위속에서 전체를 향해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논쟁은 나를 단죄하는 성토장으로 되고 회의장은 나를 매장해 버리는 재판장으로 변할 수 있다. ≪민생단≫이라고 하면서 나를 정치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장해 버리려는 극단한 시도도 있을 우려가 없지 않았다.

전우들은 바로 그 점을 제일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숙반≫을 주관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사정없는 돌심장들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우들은 사색이 되어 다홍왜로 가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길을 떠났다.

≪동무들, 이 길은 죽든지 살든지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길이다. 내가 만일 다홍왜로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멸을 가져올 뿐이다. 우리앞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운명을 구원하고 조선혁명을 위기에서 건질 수 있는 가장 심각한 기회가 왔다. 대결은 피할 수 없고 흑백은 반드시 가려져야 한다.≫

나는 오대성과 다른 한 명의 전령병의 부축을 받으며 회의가 시작된 지 이틀 만에야 다홍왜에 도착하였다.

인민혁명군 대원들의 엄한 경호조치가 실시되고 있는 제8구 농민위원회 사무소에서 만주성당 파견원 위증민이 왕윤성, 주수동, 조아범, 왕덕태, 왕중산을 비롯한 동만당단특위의 간부들과 함께 나를 맞아 주었다. 이 너렁청한 사무소건물에서 바로 중국사람들이 동만당단특위 연석대회라고 규정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회의를 다홍왜회의라고 부르고 있다. 한때 일부 역사가들이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라고도 하였는데 그것은 정확한 명명이라고 볼 수 없다.

다홍왜회의는 약 10일 가량 진행되었다. 회의 도중 들락날락하는 사람들도 있어 출석자의 숫자는 고르롭지 못하였다. 대부분은 중국사람들이었고 조선족 출신으로는 나와 송일, 임수산, 조동욱을 비롯한 몇몇 간부들뿐이었다고 생각된다. 조동욱은 회의 전기간 중국말을 잘 모르는 조선족 간부들을 위해 통역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나는 동만당 특위위원의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다홍왜에서 회의가 소집되게 된 동기는 공청 만주성우 순시원의 자격으로 간도지방의 사업을 요해하러 내려왔던 종자운(쏘중)이 동만지방 조선사람들의 70%가 ≪민생단≫이라는 허황하기 그지없는 보고를 성당조직에 제출한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동만혁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만주성당이 대표를 동만에 급파하여 수습책을 강구하려고 한 것은 응당한 일이었다. 논쟁은 낮에도 하고 밤에도 하였다.

논쟁이 열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종자운이 보고에서 동만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70%, 조선혁명가들이 80-90%가 ≪민생단≫이거나 그 혐의자들이면 유격구가 ≪민생단≫의 양성소라는 종래의 견해를 되풀이한 순간부터였다.

회의분위기는 종자운의 보고를 지지하는데로 기울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숙반공작위원회를 강화해야겠다는 발언을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민생단≫숙청은 혁명으로 대내의 반혁명을 포위섬멸하는 특수전이라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민생단≫이 뿌려놓은 씨종자들을 보다 철저히 무자비하게 뿌리째 뽑아내야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몇 마디 질문을 들이댔다.

동만에서 활동하는 조선혁명가들의 대부분이 ≪민생단≫이라면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나와 기타 조선동지들도 다 ≪민생단≫으로 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당신들은 지금 ≪민생단≫과 마주앉아 회의를 하는가? 우리가 ≪민생단≫이라면 무엇 때문에 감옥에 가두거나 죽이지 않고 여기에 불러다 놓고 정치를 상론하는가?

동무들이 찍어놓은 그 숫자속에는 싸움터에서 전사한 혁명가들도 포함되는가? 만일 포함된다고 가정하면 그들이 항일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일본놈들이 자기편 사람들을 수없이 죽인 것으로 되는데 그들이 모처럼 키워놓은 ≪민생단≫원들을 그렇게 죽일 필요가 있겠는가?

이 회의장을 호위하고 있는 1중대의 80-90%도 ≪민생단≫으로 보는가?

이 질문으로 하여 술렁거리던 회의장 안에서는 갑자기 우리 자신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차거운 정적이 깃들었다. 사람들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집행석에 앉아 있는 위증민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다 알다시피 어떤 물질이든지 본래의 구성요소와 다른 요소가 80-90% 이상을 차지하게 되면 그 물질은 다른 물질로 변하게 된다. 이것은 과학이다.

동만에 사는 조선사람의 70%가 ≪민생단≫이라는 것은 노인들과 아녀자들을 제외한 조선족 청장년들 전부가 ≪민생단≫이라는 말과 같은데 그렇다면 동만에서는 ≪민생단≫이 혁명을 하고 있으며 ≪민생단≫이 자기 상전을 반대하는 혈전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동만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대부분이 ≪민생단≫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데 이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이다. 그들이 만일 ≪민생단≫이라면 무엇 때문에 3년 동안이나 만성적인 봉쇄상태에 놓여 있는 유격구들에서 엄동설한에 집도 없이 입을 것도 입지 못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적들과 힘에 겨운 싸움을 해왔겠는가?

조선혁명가들의 80-90%는 고사하고 그 십분의 일인 8-9%만 ≪민생단≫이라고 하여도 우리는 이 자리에서 마음놓고 회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회의장 주변에서는 지금 조선사람들로 편성된 1중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우리들에 대한 경위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는 몇 해째 적들이 소멸하지 못해 애를 쓰는 동만지방의 이름난 혁명가들과 지도핵심들이 다 모여 있다. 당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1중대 성원들도 거의나 ≪민생단≫이겠는데 그들이 좋은 총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습격하여 일망타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모두가 ≪민생단≫이라는 생억지의 주창자들은 이 물음에도 역시 함구무언이었다.

≪1중대는 원래 당신들이 ≪민생단≫중대라고 선포했던 불우한 중대이다. 우리가 20일 가량 중대에 직접 내려가서 요해해본 데 의하면 중대전원을 ≪민생단≫으로 볼 근거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20일 간의 지도검열과정을 통해 1중대는 모범중대로 되었고 여기서 7중대가 새롭게 태어나기까지 하였다. 실천투쟁을 통해 검열된 결과를 놓고 보더라도 동만유격구들에 사는 조선사람들이나 조선혁명가들의 대부분이 ≪민생단≫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로 되고 있다.

보고에서는 유격구를 ≪민생단≫의 양성소라고 하고 당, 단조직도 ≪민생단≫조직이라고 하면서 이용국은 ≪민생단≫왕청현당책임자, 김명균은 ≪민생단≫왕청현 조직 및 군사책임자, 이상묵은 ≪민생단≫동만당조직책, 주진은 인민혁명군 1사 ≪민생단≫책임자, 박춘은 인민혁명군 ≪민생단≫참모장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동만당이나 왕청현당이나 인민혁명군 1사를 모두 ≪민생단≫조직으로 보아도 되겠는가? 동만당간부들을 ≪민생단≫의 조종자, 지도자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는가?≫

청중은 이 물음에도 침묵으로 대답하였다.

성당 파견원으로서 이 투쟁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종합분석하고 평가할 사명을 걸머진 위증민 한 사람만이 당, 단 조직 자체를 ≪민생단≫조직으로 보는 것은 착오이며 부분과 전체는 반드시 구별해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발표하여 장내에 조성된 긴장도를 약간 늦추어놓았다.

나는 동만인민의 대부분을 ≪민생단≫이라고 낙인하는 것은 조선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며 이 견해는 이번 회의에서 당장 시정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즉석에서 조아범의 반격을 받았다.

≪당신은 무턱대고 ≪민생단≫이 없다고만 하는데 그것은 주관이다. 감옥들에는 지금 수백 명의 ≪민생단≫혐의자들이 갇혀 있다. 그들이 자기 입으로 ≪민생단≫에 들었다고 자백하고 있고 자기 손으로 자백서까지 쓰고 있는데 그 자백과 자백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래 당신은 이런 증거자료들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당신들이 말하는 그 자백이나 자백서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 증거자료들이라는 것이 대부분 고문장에서 강제적인 방법으로 받아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옥에 가서 자백을 했다는 혐의자들을 수십 명이나 만나보았는데 자기의 자백을 인정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당신들의 그 증거자료보다 사업과 생활을 통해 발휘된 그들이 충실성을 더 믿는다. 솔직히 말해 보라. 당신들이 자백과 자백서를 어떻게 받아냈는지.… 당신들이 ≪민생단≫이라고 몰아대는 혐의자들의 대다수는 ≪숙반≫의 집행자들에 의해 가해지는 육체적 고통에 견디지 못해 가짜 자백을 한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지금 ≪민생단≫ 아닌 ≪민생단≫을 마구 만들어내고 있다.≫

이때 조아범이 ≪부뚜이!≫(아니다!)하고 소리쳤다.

그 ≪부뚜이!≫라는 말에 나는 그만 신경이 한껏 팽팽해졌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조아범이 감히 이 자리에서 ≪아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쾅하고 내리쳤다.

≪간도의 조선사람들은 지금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당신이 직권을 악용하여 사람잡이를 망탕했기 때문이다.

안도유격대 정치위원 김정룡이 누구한테 죽었는가? 화룡현당 서기 김일환은 누구 손에 죽었는가? 오늘 이 자리에서 솔직히 대답해 보라. 길림시절의 조아범은 포악하지도 않았고 탐위욕도 없는 사람이었다. 김일환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분해서 울었다. 그 사람이야 당신의 혁명선배가 아닌가. 당신이 그를 구제하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죽이기까지 한단 말인가.≫

나는 김일환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달프게 조상한 전우의 한 사람으로 그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김일환은 우리가 동만지방을 개척할 때 처음으로 쟁취한 혁명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오중화와 쌍벽을 이룬 인물이었다. 그와의 첫 상봉이 이루어진 곳이 조아범이네 집이었던지 이청산이네 집이었던지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명월구회의 때 그와 함께 밤을 밝혀가며 허심탄회하게 담화를 나누던 일만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첫 담화가 아주 인상이 깊었다. 심한 연령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김일환은 그때 틀을 차리거나 거드름을 부리지 않고 동등한 자세로 나를 겸손하게 대해 주었다.

나에게 오중화를 소개한 것이 김준, 채수항인 것처럼 김일환을 소개해 준 것도 길림, 용정 바닥을 쌍둥이같이 붙어다니던 김준, 채수항이네 패거리들이었다.

≪축구를 해서 황소를 탄 사람.≫

김일환에 대한 채수항의 소개는 언제나 이런 말로 시작되곤 하였다. 명월구회의 참가자들에게 김일환을 소개할 때에도 그는 이 광고부터 휘둘렀다. 이름난 운동선수인 채수항은 사람들을 평가하는데서 그가 축구를 얼마만큼 잘하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곧잘 삼았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재미나는 기준이었다.

채수항의 소개로 하여 김일환은 어쨌든 동만지방의 많은 혁명가들속에서 재능있는 운동선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일환은 노숙하고 경험 많은 정치일군이었다. 그는 오중화와 마찬가지로 간도지방 공산주의자들속에서 본보기로 내세울 수 있는 가정혁명화의 선구자이다. 그의 집안사람들은 모두가 이름있는 혁명가들이었고 혁명을 하다가 순국한 열렬한 애국자들이었다.

김일환의 어머니 오옥경은 혁명가들의 시중을 위해 일생을 바친 오랜 공산당원이었고 아내 이계순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혁명가의 지조를 지켜 용감하게 싸우다 쓰러진 조선민족의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동생 김동산은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적의 ≪토벌≫에 희생되었다. 화룡유격대의 김정식이란 사람도 김일환의 4촌이다. 김일환의 처가 편 사람들도 혁명에 한 생을 바쳤다. 처남 이지춘은 일찍이 길림시절에 우리를 찾아와서 투쟁방향을 받아 가지고 간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김일환에 대한 인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씨알이 박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공부를 착실하게 한 듬직한 지식분자였다.

화룡에서 김일환과 함께 지하활동을 다년간 해온 김일과 박영순은 그가 사업작풍이 좋고 사업방법이 노숙하며 군중성이 좋다는데 대해서 자주 회상하였다. 김일, 박영순은 다 그의 영향밑에서 당일군으로 자라난 사람들이었다. 그가 구국군공작에 종종 파견된 것은 이런 우점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당신 화룡지방의 구국군들은 누구나 김일환을 존경하고 우대하였다.

한번은 안도에서 이도선부대가 구국군을 ≪토벌≫하느라고 처창즈에 갑작스레 쓸어든 적이 있다. 정안군놈들은 구국군을 찾느라고 마을을 발칵 뒤졌다. 그러다가 김일환이네 집에서 삐라뭉테기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김일환의 어머니가 다른 지방조직에 전해 주기로 되어 있는 중요한 삐라뭉테기였다.

이도선은 공산당을 찾아냈다고 하면서 김일환이네 일가족을 모두 붙잡아놓고 심문을 시작하였다. 낯모를 사람이 맡기고 간 삐라라고 김일환의 어머니가 그럴듯하게 둘러대기는 하였으나 적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도선의 눈은 온통 살기로 무섭게 번뜩거렸다. 김일환일가의 운명에 어떤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바로 그 순간에 이웃에 사는 지주가 그들은 공산당이 아니고 알짜 농사꾼이라는 것을 온갖 감언이설을 다하여 보증해 나섬으로써 이도선을 설득시켰다. 이것도 역시 평시에 김일환이 그 지주와의 사업을 잘한 덕이었다.

김일환의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불의에 대한 비타협성과 드팀없는 혁명적 원칙성이었다. 이러한 성격적 특질로 하여 그는 훗날 ≪민생단≫누명을 쓰고 박해를 받게 되었고 종당에는 좌경분자들의 손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은 권력앞에 아부하지 않고 남의 장단에 춤을 추지 않으면서 제 정신을 가지고 원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였다. 원칙이 있는 곳에서는 부정이 판을 칠 수 없고 도깨비나 잡귀신 같은 것들이 제멋대로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김일환이네가 살던 마을에는 이억만이라는 당조직책임자가 있었다. 그는 혁명대열 내에 우연히 끼어들어 부화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아편중독자였다. 김일환은 이억만이 직권을 이용하여 숱한 여자들과 치정관계를 맺고 있는데 대하여 동지적으로 충고해 주고 약담배를 끊을 것을 권고하였다. 이억만이 만일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 비판을 고맙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부에 있는 좌경분자들을 사촉하여 김일환에게 ≪민생단≫모자를 씌우고 현당 서기의 자리에서 내쫓는 방법으로 비판에 대한 복수를 하였다.

김일환은 현당 서기직에서 철직을 당한 다음에도 일을 충실하게 하였다. 좌경분자들은 그를 검열하기 위하여 개인자본가가 경영하는 탄광에 노동자공작을 보냈다.

김일환은 자기를 검열하는 기간에 좌경분자들한테서 당하는 고통과 결별하고 가족들과 함께 적구로 내려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민생단≫혐의를 벗지 못한 채 유격구인민들앞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혁명대오를 버리고 달아난 도주자라는 치욕을 걸머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체포되어 죽을 것이오.

나는 일본놈의 주구단체인 ≪민생단≫이 될 수도 없고 또 ≪민생단≫이 되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소. 그러나 나는 혁명가의 절개를 끝까지 지키다가 이곳에서 ≪민생단≫으로 몰려 죽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만약 내가 살기를 원하여 적에게 투항하여 변절한다면 혁명에 더 큰 손실을 줄 수 있기 때문이오.

이렇게 되면 혁명을 배반한 나의 죄악은 천추만대에 씻을 수 없게 될 것이오.

마지막으로 나의 부탁은 온 가족이 우리 나라가 해방되고 독립되는 날까지 굴하지 않고 싸워 달라는 그것뿐이오.≫

이것은 김일환이 자기의 최후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였을 때 어머니와 아내에게 한 말이다.

1934년 11월에 좌경분자들은 그를 마침내 재판장으로 끌어냈다. 이억만의 악에 받친 논고는 온통 허위와 날조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자는 반동치고도 아주 지독한 반동이다. 오랫동안 심문했으나 한마디도 불지 않았다. 속에 구렝이가 있는지 독사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놈들을 그냥 살려두면 우리 혁명이 10년 안팎에 넝마조각처럼 거덜날 수 있다. 살려야겠는가, 죽여야겠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는 청중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저런 사람들을 다 죽이고 앞으로 어떻게 공산혁명을 하겠는가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있어도 정면에서 그의 무죄를 부르짖는 정의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처창즈사람들은 권력자들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에 있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김일환의 무죄를 주장하면 그들 자신도 ≪민생단≫으로 되기 때문이다.

좌경분자들은 화룡유격대 창건자의 한 사람인 김일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두고 보아라, 누가 진짜 ≪민생단≫이고 누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인지.… 역사는 반드시 흑백을 갈라 줄 것이다.≫

사형판결을 받은 김일환은 형리들을 쏘아보며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손장상부대의 구국군대원들이 여기저기에서 총을 들고 뛰쳐 일어나 분격을 터뜨렸다. 김일환이를 왜 죽이는가? 그분은 우리의 선생이고 은인이다. 저런 혁명가가 ≪민생단≫이라면 도대체 ≪민생단≫이 아닌 사람이 누구인가. 김일환은 우리가 보증한다. 총살형을 취소하지 않으면 너희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겠다.…

좌경분자들은 구국군의 압력에 못 이겨 사형언도를 취소하고 김일환을 석방하였으나 그날 밤중으로 그를 학살하였다.

≪나는 당신들에게 묻고 싶다. 그래 당신들은 정말로 김일환을 ≪민생단≫이라고 생각하였는가? ≪민생단≫이 아닌 줄 알면서도 딴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총살하지 않았는가? 김일환과 같은 사람들이 ≪민생단≫이라면 이 간도 땅에서 ≪민생단≫이 아닌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조아범을 응시하며 목갈린 소리로 이런 주장을 피력했다. 그리고는 어성을 낮추어 연설을 계속했다.

≪동무들, 이제 더는 인간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지 말라.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고 동지들을 동지답게 대하며 민중을 민중답게 대하라. 우리는 인간애와 동지애, 민중애의 무기를 가지고 이 세상을 개조하고 변혁하기 위해 일어난 투사들이 아닌가. 이 사랑의 무기가 없다면 우리가 부르주아지들이나 마적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이상 ≪숙반≫의 이름을 걸고 사람들을 우롱한다면 인민이 영원히 우리를 외면할 것이며 후대들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민생단≫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희생된 수천 명의 열사들의 죽음을 보상하는 길은 오직 우리가 이 무의미한 살육을 중단하고 사랑과 믿음과 단합의 정치로 모든 힘을 항일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적들이 던진 ≪민생단≫의 미끼를 뱉아버리고 우리의 대오에서 종파주의, 배타주의, 모험주의가 발붙일 틈을 주지 말라. 이것만이 지난 몇 해 동안 ≪민생단≫으로 생긴 상처를 가시고 민중을 구원하고 혁명을 구원하여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유대를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우리 두 나라 혁명가들의 진정한 화합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상호이해, 계급적 믿음에 기초해야 하며 형제적 우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공동투쟁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느 일방이 이기를 추구하거나 그 이기를 위해 상대방을 희생시킨다면 그러한 합작은 공고한 것으로 될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의 화합은 믿음과 사랑을 원동력으로 할 때 영원히 불패의 것으로 될 것이다.≫

다홍왜회의에서는 간부문제에 대한 논쟁도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논쟁의 발단으로 된 것은 특위지도부를 차지하고 있는 일부 사람들이 소수민족은 간부로 될 수 없고 다수민족만이 간부로 될 수 있으며 소수민족이 다수민족을 지도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합리하다는 주장을 내놓은 데 있었다. 그들은 조선사람은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다수민족을 지도할 수 없으며 더욱이 조선혁명가들은 종파적 습성과 동요성이 많고 반동화되기 쉽기 때문에 간부로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만주성당이 동만당지도부의 간부 선발과 배치에서 종래의 조선인 중심주의부터 중국인 중심주의로 전환할 데 대한 비밀지령을 하달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지령의 요점은 지난날 조선사람들이 민족운동에서도 실패하고 공산주의운동에서도 실패하고 또 동요하가나 반동화되기 쉬운 데다가 언어풍속이 다른 것으로 하여 ≪소수민족의 혁명기초≫가 공고하지 못하고 ≪소수민족의 영도에 의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의 성공이 불가능≫하므로 ≪동만에 있어서 조선인의 기초를 중국인의 기초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지령의 요구에 의하면 동만특위 서기 이하 주요 간부들은 모두 만주성위에서 임명하며 조선사람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인민혁명군 중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으로 될수록 등용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이 지령이 중국공산당중앙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지령이 하달된 때는 중국당중앙의 지도핵심들이 장개석군의 포위를 돌파하고 2만 5천리장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내전의 진통속에서 혁명전쟁의 중하를 걸머지고 간고분투의 길을 걷고 있던 중국당중앙은 자기 조국의 동북변방에서 벌어지고 있던 사변들에 주의를 돌릴 수가 없었다.

만주성당의 조치들 가운데는 왕명과 강생이 주관하고 있던 국제당동양부의 지령을 그대로 받아들였거나 그 지령에 준하여 만들어낸 것들이 적지 않았다. 만주성당의 소재지인 하얼빈에서 국제당 동양부기관들이 자리잡고 있던 이르쿠츠크나 불라디보스톡이나 하바로프스크로 가는 것은 정강산이나 연안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소수민족이 다수민족을 지도할 수 없다고 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은 우리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려놓았다. 그러한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의 간부선발배치원칙에도 맞지 않고 그 당시 동만의 간부구성실태에도 맞지 않는 부당한 논조였다.

나는 또 논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공동의 원쑤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승리하는 그날까지 함께 싸워야 할 숭고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것만큼 조중 인민이 전투적 단결과 반일공동투쟁을 강화하는데 부합되게 간부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맑스-레닌주의적인 입장에서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능력을 위주로 하여 간부를 선발 배치하는 원칙을 견지하여야 한다.

당신들도 인정하다시피 조선사람들은 동만지방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선구자들이다. 동만지방에서 간부들과 당원들의 구성을 보아도 압도적 다수는 조선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보지 않고 공동투쟁을 몇 해 동안 해오다가 소수민족에 대한 다수민족의 지도이니, 다수민족 간부에 의한 소수민족 간부의 교체니 하는 주장들을 새삼스럽게 들고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민족주의적인 견지에서 조선민족 우월론을 제창하자는 것도 아니고 다른 민족의 열등론을 떠들자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능력도 없고 자질도 없는 사람들을 다수민족의 출신이라고 하여 덮어놓고 등용시키는 경향은 반드시 시정 퇴치되어야 한다.

국적이나 소속, 인구의 다수가 간부 선발의 기준으로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소수민족이건 다수민족이건 간부의 표징을 갖추었으면 간부로 되는 것이고 갖추지 못했으면 간부로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자 누군가가 조선혁명가들이 지난날 대부분의 민족주의운동이나 종파에 관계했던 사람들이어서 간부로 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 주장을 즉석에서 일축해 버렸다.

≪동만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혁명가들의 절대 다수는 그 어떤 종파에도 관계하지 않은 참신한 새 세대들이다. 우리가 일심전력으로 키워낸 기본계급 출신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인민혁명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당신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젊은 세대는 당, 정부, 대중단체에서도 간부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날 민족주의운동에 참가했거나 파벌에 속했던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다 혁명적으로 개조되었다.≫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또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반격을 하였다. 그 사람은 ≪민생단≫의 아버지는 종파이고 종파의 아버지는 민족주의자이며 민족주의의 아버지는 일본제국주의라는 괴이한 주장으로 회의장 안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 주장을 거꾸로 해석하면 지난날 민족운동에 참가했거나 파벌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모두 일본제국주의의 부양을 받는 아들로 된다. 이것은 아무런 이론적 타당성도 없는 궤변으로서 교양개조된 파벌경력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하고 있는 조선공산주의운동 대열에 대한 불신의 표시였다.

나는 그 궤변에 타격을 가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사상이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 민족주의사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꾸준한 개조과정을 통하여 공산주의자로 될 수 있다. 과거 경력 중에 민족운동에 참가한 사실이 있다고 하여 그런 사람을 종파의 아버지라거나 일본제국주의의 아들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 아닌가.

원래 민족주의의 이념적 기초는 애국애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큼 그것을 반동시하는 것은 곧 애국주의를 반동시하는 것으로 된다. 민족주의라고 하여 덮어놓고 이단시하지 말라. 민족주의가 부르주아지의 사상적 도구로 이용되지 않는 이상 그것을 무턱대고 배척할 필요가 없다. 민족주의가 역사의 반동으로 되는 것은 다만 온 민족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만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때뿐이다.

만일 그 누가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창시한 손문선생을 제국주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당신들은 그런 망발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민족주의를 반대한다면 그 자체가 심한 민족적 편견이다.

조선의 종파분자들과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적 진영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이 소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파쟁이 마치 조선민족이 가지고 있는 선차적인 기질인 것처럼 여기며 조선공산주의자라면 의례 종파와 무슨 관련이 있는 듯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데 이것 역시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이다.

털어놓고 말해서 종파는 조선공산주의대열 내에만 있은 것이 아니다. 종파는 독일과 쏘련에도 있었고 중국에도 있으며 일본에도 있고 국제당에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유독 조선사람들만이 종파적 습성을 기질적으로 소유한 민족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조선공산주의자라는 이름이 왜 종파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져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지금 조선민족은 과거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서 실패한 소수민족으로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서 성공이 불가능하다느니, 혁명투쟁에서 동요성이 많고 반동화되기 쉬운 민족이라느니 하면서 간부로 쓸 수 없다는 논거를 들고 나오는데 이것은 모두 조선인간부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꾸며낸 허황된 논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배타주의적 입장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신들은 이미 동만의 군정관계 간부들 중에서 당신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한 전호에서 충실하게 싸워온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수십 수백 명 제거하거나 ≪민생단≫으로 몰아 학살하였다.

수많은 지도핵심들이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자기 자리를 내놓았는데 아직도 더 제거해야겠는가.

당신들이 만일 지금과 같이 조선사람들을 배척하고 학대하는 길로 집요하게 나간다면 우리는 그러한 곁방살이를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폭탄 같은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목구멍으로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릴 만큼 회의장의 긴장도 팽팽하였다.

그때 만일 누가 내 말을 반박했거나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조금이라도 하였더라면 논쟁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간부문제에 대한 토의는 그 이상의 격론을 빚어내지 않았다.

회의가 심화됨에 따라 나와 좌경분자들 사이의 논전은 더 치열해졌다. 회의장에 조선인 간부들이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침묵만 지켰다.

그러나 그들도 내심으로는 나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좌경의 대리인역을 수행하면서 가슴아픈 흔적을 적지 않게 남긴 송일이조차도 나를 찾아와 누구도 못하는 일을 혼자서 해 제꼈다고 하면서 나를 격려해 주었다. 위증민과 왕윤성도 공식적으로는 자기들의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지만 내적으로는 나의 주장에 이해를 표시하였다. 특히 위증민의 이성적 판단과 공정한 태도는 나에게 적지 않은 도움으로 되었다.

하루 세 끼의 콩죽을 먹으면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논쟁을 하다나니 나는 뼈만 남은 몸이 되었다. 하루종일 회의를 하고 밤늦게 숙소를 돌아와 앓다가도 아침이 되면 또 논쟁마당에 나가야 했다. 단독으로 여러 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나에게 결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기권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간도의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인민들의 운명을 위해서 싫건 좋건 논쟁마당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회의에서 토의된 또 하나의 논쟁거리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추켜들고 있는 민족해방의 구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다시 말하여 중국 땅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해방의 구호를 들고 싸우는 것이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 부합되는가 부합되지 않는가, 그 구호가 ≪민생단≫이 표방했던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구호와 본질상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민족해방의 구호가 ≪민생단≫에서 만들어낸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구호와 같으며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도 모순된다고 하였다.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간부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의 견해와 완전히 상반되는 위험한 견해였다. 만일 이 견해대로 한다면 우리는 조선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혁명을 위해서 그들의 시중꾼이나 국제군의 한 구분대의 사명만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조선혁명을 한갓 다른 큰 나라 혁명의 부속물로밖에 보지 않는 이런 견해를 용인할 수 없었다.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구호는 일제가 조중인민을 이간시키고 공산주의자들의 대열을 내부로부터 분열시켜 저들의 식민지 통치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목적으로 ≪민생단≫에 쥐어 준 구호이다. 그것이 간도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민족해방의 구호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는 것은 논의할 여지조차 없다.

우리가 내세운 민족해방의 구호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전복하고 조국을 광복하며 우리 인민이 착취 없고 압박 없는 자주적인 새 사회에서 참다운 자유와 권리를 누리게 하려는 목적으로부터 내놓은 구호이다.

그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한다고 하여 자기 조국을 해방하고 자기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워야 할 신성한 권리마저 포기해야 하는가. 우리가 자기 나라 혁명을 하지 않고 남의 나라의 혁명만 할 바에야 무엇 때문에 이 만주 땅에 주저앉아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면서 여러 해 동안 조선의 민중을 결속시키고 훈련시키겠는가. 일부 사람들은 중국혁명이 승리하면 조선혁명도 저절로 승리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허황된 소리이다. 매개 나라 혁명에는 자체의 노정이 있고 시간표가 있다. 자체의 역량이 준비되지 못하면 이웃나라의 혁명이 승리한다고 해도 그 승리가 절대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남들이 자기 나라 혁명을 도와주는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체의 힘으로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혁명에 대한 주인다운 태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을 내걸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의 구호를 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다른 나라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자기 나라 혁명에서 손을 떼게 하려는 견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프랑스에 가서 활동한 중국공산주의자들에게 그 나라의 공산당원들이 중국혁명의 구호를 들지 말라고 했다면 그것을 감수할 수 있겠는가.

공산주의자들은 그 어디에 가서 활동하건 자기 나라 혁명의 구호를 들고 싸워야 하며 그것으로 그 나라 혁명도 도와주고 세계혁명에도 이바지해야 한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는 자주적 권리이며 신성한 의무이다.≫

다홍왜회의에서 시작된 논쟁은 그 해 3월에 열린 요영구회의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회의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주장을 지지하였으며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도 의견상이는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미결로 남게 되었다.

우리는 두 회의의 논점에서 핵으로 되어 있는 몇 가지 문제들을 국제당에 제소하기로 하고 그에 대한 결론을 받기 위하여 위증민과 공청동만특위 간부인 윤병도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민생단≫ 문제로 하여 파생된 간도지방의 혼란은 일종의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좌경분자들은 무분별한 ≪숙반≫운동으로써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간고한 투쟁을 통하여 힘들게 축성해놓은 혁명의 기초를 거의나 허물어 버렸다. 그러면 그들이 죄다 ≪민생단≫이었단 말인가. 아니다. 적들의 문건에는 ≪민생단≫이 겨우 7-8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7-8명을 색출해 내려고 ≪숙반≫운동은 2,000여 명의 자기편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학살한 것이었다. 이것은 세계 공산주의운동역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세의 비극으로서 우매와 무지와 몰상식의 극치였다.

조선과 해외 각지에서 청운의 뜻을 품고 간도지방에 모여들었던 끌끌한 사람들이 2-3년 사이에 ≪숙반≫의 총 끝에서 다 녹아났다. 그 불우한 수난자들 가운데는 별의별 인재들이 다 있었다. 무슨 재간둥이인들 없었겠는가. ≪숙반≫의 미친 바람은 우리의 항일혁명만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민족의 자랑스러운 총아들을 사정없이 쓸어갔다.

≪민생단≫의 여파로 죽은 사람들의 수가 전장에서 싸우다 쓰러진 사람들의 수를 능가한다면 아마 후대들을 잘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항일전쟁의 역사는 무수한 적과의 교전을 기록하고 있지만 유격구들에서는 20-30명의 전사자를 낸 실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동만의 유격구들에서는 20-30명의 혁명가들이 ≪민생단≫이라는 죄명을 쓰고 무리죽음을 당한 날도 많았다. 우리는 그들의 영전에 정중하게 명복을 빈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들은 지하에 가서도 살인자들을 저주하였을 것이다.

≪민생단≫이 해체된 간도 땅에 ≪민생단≫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나는 이 물음에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처형이 두려워서 유격구를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민생단≫은 없었다.

주진이 ≪민생단≫이었는가? 아니다.

박길이 ≪민생단≫이었는가? 아니다. 박길은 독립운동으로부터 항일구국의 성전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연해주지방에 가서 공산주의사상으로 자신의 이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성전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간도 땅에 달려나와 지하정치공작도 하고 무장투쟁도 하였다. 그는 우리가 비밀유격대라고 명명했던 소규모 유격대 시절에 벌써 대중의 신망을 받는 정치지도원으로 되었으며 반일인민유격대가 정식으로 창건된 후에는 연길대대에서 대대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연길지방에서 혁명을 개척한 선구자였던 박길은 대중의 심장에 불을 지필 줄 아는 유능한 정치활동가, 선동가였고 뛰어난 군사지휘관이었다.

그의 일가는 5-6명이나 되는 항일혁명열사들을 배출한 애국적 가정이었다. 박길의 아버지 박중원(별명 호랑이)은 원래 소작살이를 할 때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이었는데 품삯 대신 새끼소를 어미소로 키워 그것을 원호기금으로 바치면서까지 유격대를 성심성의로 후원하였다.

이런 가정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박길을 ≪민생단≫으로 모는 것은 문자 그대로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경분자들은 박길이 이전날 독립군이었다는 것과 그의 누이가 강제에 못 이겨 순사의 첩으로 끌려갔다가 도망쳐 나온 여자라는 것을 문제시하던 끝에 학살하였다.

김명균이 ≪민생단≫이었는가? 아니다. 김명균은 왕청유격대 창건자의 한 사람이다. 현당 군사책인 그가 무엇이 탐나서 ≪민생단≫에 들었겠는가. 적들이 작성한 공판문건은 그가 ≪민생단≫감옥에 구금되기 전까지 일본인을 사살한 사건이 20여 건, 일만관헌을 습격한 사건이 20여 건, 무기를 탈취한 사건이 8건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만일 ≪민생단≫이라면 이런 공적을 세울 수 있겠는가? 유격구를 탈출한 다음에도 훈도가 되어 아이들의 넋속에 민족정기를 부어넣을 수 있겠는가? 적들에게서 총살형을 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이웅걸은? 그도 ≪민생단≫이 아니다. 나는 이웅걸이란 사람을 잘 안다. 우리가 왕청땅에 처음으로 입성했던 1932년 10월 나를 마중하기 위해 군마 두 필을 끌고 소북구로 맨 먼저 찾아온 사람이 바로 ≪민생단≫으로 몰려 죽을 뻔했던 1구당 조직부장 이웅걸이다. 젊은 빨치산대장을 위해 한꺼번에 군마를 두 필이나 끌고 온 이 체통이 큰 사나이의 융숭한 대접에서 나는 그날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이웅걸은 화룡현에서 공청시기로 사업하다가 용정과 서울에서 감옥생활도 해보고 이광이 지휘한 별동대에서 정치위원으로도 공작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감수성도 풍부하고 투쟁역사가 깊은 혁명가였다.

나는 이웅걸을 통하여 구당사업을 지도하였고 그 모범을 일반화하는 방법으로 왕청지방의 당사업에 깊이 관여하였다.

1933년 여름에 이웅걸은 ≪민생단≫의 혐의를 받고 좌경분자들에게 체포되었다가 ≪나에게는 ≪민생단≫이 당치 않다!≫는 글을 남기고 유격구를 탈출하여 국내에 나왔다. 부령지방에 활동거점을 잡은 그는 함북, 함남일대에서 애국적인 청장년들을 결속하여 공산주의동맹을 뭇고 군용도로건설반대투쟁, 공출반대투쟁, 징용반대투쟁 등의 반일투쟁을 조직지도하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서울에서 감옥생활을 하였다. 징역 12년이 그에게 떨어진 판결이었다. 일본법관들이 그의 금새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사람이 과연 ≪민생단≫으로 처형되었어야 하겠는가.

다홍왜에서의 논쟁의 의의는 바로 이웅걸과 같은 사람들의 경력에서 ≪민생단≫감투를 벗겨준 데 있다. 이 회의의 논쟁과 그 후 국제당이 내린 결론으로 하여 처형된 사람들도 무죄로 판명되었다. 육체적 생명은 회복될 수 없었지만 정치적 생명은 부활되었다. 이 회의의 다른 하나의 의의는 일제의 음험한 모략이 얼마나 간악하고 지독했는가 하는 것과 그에 농락된 자들의 정치적 졸렬성을 고발함으로써 좌경분자들의 정치적 쿠데타에 자갈을 물리고 그 손발을 철저히 얽어맨 데 있다. 그렇다. ≪숙반≫의 좌경화는 곧 높은 직권을 가진 사람들이 보다 낮은 직권을 가진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소멸하기 위하여 공개적인 방법으로 단행한 정치적 폭행이며 하향식 쿠데타이다.

다홍왜회의를 분기점으로 하여 동만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사람들속에서 우리의 활동이 보다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내가 이 글에서 ≪민생단≫문제와 관련된 과거를 지루할 정도로 길게 추억하는 것은 그런 비화를 빚어낸 장본인들을 구태여 만천하에 고발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계산하자는 것도 아니다. 이 추억은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분열 와해시키려는 적들의 모략과 간계는 어제만이 아니라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것이며 민족배타주의와 좌경분자들의 정치적 졸렬성은 지금도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똑똑히 인식시킴으로써 후대들에게 조선혁명의 주체확립과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된 교훈을 심어주자는데 있다.

나는 반≪민생단≫투쟁과 그 총화로서의 다홍왜회의 과정을 통하여 자주성은 민족의 첫째가는 생명이라는 것과 이 자주성을 고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 특히는 그 선각자들의 희생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장 깊이 절감하였다.

인간의 첫째가는 속성이 자주성인 것처럼 민족의 생존을 담보하는 첫째가는 원천도 자주성에 있다. 개별적인 인간들의 생활에 있어서나 민족을 이루는 대집단의 생활에 있어서나 그 운명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생존조건은 자주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항일혁명을 민족적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성전으로 묘사하는 것은 자주권의 부활이야말로 조선인민이 수십 년 동안 절절히 품어온 일차적 숙망이었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의 강령으로 내세운 지상의 과제였다는 사정과 관련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민족해방투쟁의 총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은 이 목표를 실현하는데 복종되어야 했다. 우리는 사고와 실천에서 자주성에 대한 옹호를 생명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환경에서나 맹호가 되고 우뢰가 되어야 했다.

자주성이란 그 누가 만들어서 선사하는 것도 아니며 시간의 누적과 더불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투쟁을 통해서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백절불굴의 희생적인 투쟁정신을 발휘하는 사람들만이 자주성을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구상에는 다른 민족의 자주권을 짓밟는 강도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자기네가 자주성을 가지는 것은 응당하다고 여기면서도 남들이 자주적으로 살려는데 대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방해하는 인간들도 수두룩하다. 자주성을 저들만이 점유할 수 있는 독점물로 여기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 지배주의의 오만성이다.

자주성을 유린하는 세력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싸워온 투쟁대열 내부에 있은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역사의 변덕이었다. 이 변덕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심각한 고민과 좌절을 겪었다. 우리는 좌절에서 돌격에로 이전하기 위하여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조선민족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자주적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들과 맹호가 되어 싸웠다. 다홍왜회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주의 깃발을 들고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견지하고 그 권리를 옹호고수하기 위하여 벌인 대사상전이었다.

만일 우리가 인정사정없는 좌경의 철권앞에서 질겁하였거나 희생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했더라면 우리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그 좌경의 무한궤도밑에서 혁명을 구원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혁명을 위기에서 구원한 것은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강의한 희생정신과 공산주의적 원칙성, 자기 위업의 정당성에 대한 불변의 신념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의 종말을 떠들며 우리 공화국을 주체의 궤도에서 밀어던지려고 정치적 심리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오늘 자주성을 계속 옹호고수해 나가는 것은 여전히 우리 민족과 우리 공화국의 생사존망과 관련된 사활적 요구로 나서고 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제국주의자들과 대결에서도 역시 승리자가 될 것이다.

나는 반≪민생단≫투쟁과정을 통하여 일상생활에서나 혁명투쟁에서 모함과 모해가 얼마나 유해로운가 하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으며 종파를 하는 사람들과는 혁명을 같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심각하게 받아안았다. 모함, 모해, 파쟁의 해독성과 반동성을 이해하려면 이조 500년사만 돌이켜보아도 충분하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부모자식사이, 형제사이에도 칼부림을 하는 것이 바로 반동화된 인간들의 본성이며 종파의 악습이다.

해방 후 적들은 일제가 적용했던 ≪민생단≫의 수법을 이용하여 우리 내부를 와해시켜보려고 시도하였다. 한때 그들은 위조편지를 보내는 방법으로 백남운, 강영창, 최응석과 같이 당에 충실한 남조선출신 간부들을 모해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그 모해에 넘어가지 않은 것은 유격구에서 겪은 반≪민생단≫투쟁 경험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체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치안대 가담자들과 그 관련자들에 대한 처리에서 좌경을 범하였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혁명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에서 치안대 가담자들과 그 연루자들의 정치적 운명문제를 관대하게 처리하였다.

나는 새 사회안전부장이 임명될 때마다 매번 우경을 범해서도 안되지만 좌경을 경계하며 ≪민생단≫의 교훈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곤 한다.

좌경은 정치적 사기꾼들과 야심가들이 새 형의 ≪민생단≫소동을 창출해낼 수 있는 온상이다. 이 온상의 주인들은 남들보다 10배나 20배쯤 더 높은 목소리로 당을 운운하고 혁명을 운운하고 충실성을 운운한다. 이러한 초혁명성이 지난날 유격구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생명을 제멋대로 농락하던 좌경분자들의 소행과 무엇이 다른 점이 있는가.

우경이 공개적인 반혁명이라면 좌경은 은폐된 반혁명이고 우경이 암이라면 좌경도 그에 못지 않은 독버섯이다. 우경과 좌경은 혁명이라는 하나의 거목 위에 기생하면서도 서로 등을 돌려대고 동상이몽하는 듯하지만 실은 하나의 맥락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개인이 좌경을 하면 집단을 해칠 수 있고 집권당이 좌경을 하면 인민을 잃어 혁명을 망칠 수 있다는 진리를 명심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도 고수할 수 없다. 이것은 반≪민생단≫투쟁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이며 좌경의 침해로 하여 막대한 출혈을 당한 일련의 나라들에서의 뼈아픈 체험이 전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호소이다.

초당적인 언행으로 가리워진 좌경을 반대하고 경계하며 그 침해로부터 사람들의 정치적 운명을 보호해 주는 것은 정권을 잡은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의 활동에서 한시도 놓치지 말고 틀어쥐고 나가야 할 영원한 주제이다.

This counter provided for free from HTMLcounter.com! copyleft © 백두산편집부
이 문서는 Internet Explorer v5.0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