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27일(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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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카륜회의가 끝난 다음날인 1930년 7월 3일 우리가 새 형의 당조직을 내온 사실은 여러 해 전에 공개되었고 그 모임에서 한 나의 연설도 이미 세상에 나갔다.

당이 혁명에서 참모부의 역할을 수행하며 당의 역할에 따라 혁명의 승패가 좌우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혁명이 역사의 기관차라면 당은 혁명의 기관차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당을 중시하고 당을 꾸리는 일에 그처럼 큰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맑스가 과학적 공산주의이론을 창시한 후 실천투쟁에서 첫 사업으로 공산주의자동맹을 창건하고 ≪공산당선언≫을 발표한 것이 그의 활동에서 가장 큰 공적으로 오늘까지도 찬양되고 있는 것은 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서 당이 노는 사명과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지기 때문인 것이다.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노동운동상에서 나타났던 여러 가지 유형의 기회주의, 개량주의 구경은 당에 대한 견해와 입장이 그릇된 데서 발생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산주의가 새로운 시대사조로서 노동운동무대에 출현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지구상에서 이룩해놓은 모든 세기적 변혁들은 그 어느 것이나 다 당이라는 신성한 이름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는 카륜회의에서 내세운 과업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당조직을 내오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리가 새 형의 당을 창건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그 방도를 전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공산당이 국제당에서 제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였다.

우리 나라에서 공산당이 조직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각국에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속속 출현하여 대중을 이끌던 세계적 추세에 발을 맞추어 정치적 활동의 자유와 권리의 불모지였던 우리 나라에서 공산주의정당이 창건되었다는 사실은 새 사조와 시대적 추세에 대한 조선사람들의 정치적 감수성이 얼마나 민감하고 풍부하였는가를 실증해준다.

조선공산당의 창건은 조선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 발전의 필연적 귀결이며 합법칙적 산물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창건 후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대중속에 사회주의사상을 보급하고 노동운동을 영도하여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영도되는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놓았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이 존재하는 기간 6.10만세시위투쟁과 같은 큰 규모의 투쟁을 지도하며 민족의 기개를 과시하였으며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으로 신간회와 같은 대중단체도 만들어 반일애국역량을 집결시키는 사업에도 이바지하였다.

조선공산당이 창건되고 그 영도밑에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대중운동이 전개된 것은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의 시초를 열어놓은 하나의 역사적 사변으로서 민족해방운동발전을 일정하게 추동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상층인물들의 파쟁으로 하여 1928년에 조직된 역량으로서의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었다.

국제공산당에서는 1928년 여름에 있은 제6차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조선공산당이 국제당대열에서 제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는 조선공산당이 존재할 때에도 파쟁을 일삼는 그 상층부에 대하여서는 시답지 않게 여기었다. 그러나 그 당마저 국제당대열에서 제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분하고 수치스러운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때 국제공산당의 처사에 대하여 야속하게 생각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비록 나이도 어리고 공산주의운동경험도 적지만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 새 형의 당을 창건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여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순결하고 참신한 새 형의 당을 창건하자면 여러 가지 장애와 난관을 타개해야 하였다.

가장 큰 난점은 공산주의대열안에 종파주의가 의연히 남아있는 것이었다. 종파주의가 청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초기공산주의자들은 당재건운동도 통일적으로 하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분열된 상태에서 파벌별로 하였다.

조선공산당이 국제당에서 제명처분을 받은 후 우리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국내외에서 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을 치열하게 벌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무차별적인 탄압과 방해책동으로 어느 파벌도 재건에 성공할 수 없었다. 화요파와 엠엘파가 재건운동을 포기하고 만주지방에 조직되어 있는 총국을 해체한다고 선언한 후 서상파가 국내에서 재건바람을 일으켰지만 그것마저 노출되어 많은 당원들이 감옥에 끌려가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해산된 당을 재건하거나 파쟁의 악습에 물젖은 기성세대에 의거해 가지고서는 혁명적 당을 창건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당을 창건하는데서 제기되었던 다른 하나의 난관은 국제공산당이 제정한 1국1당제원칙에 의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만주지방에서 독자적인 당을 창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된 것이었다.

국제당은 제6차대회에서 채택한 규약의 총칙에서도 국제공산당에 소속되는 개개의 당은 해당 나라의 공산당(국제공산당지부)이라는 명칭을 가지며 매개 나라에서는 하나의 공산당만이 국제당의 지부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1국1당제의 원칙을 규정하였다.

국제공산당 동양선전부에서는 1930년 5월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중공산당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조선공산당조직문제에 대한 국제당의 결정을 통지해주었다. 국제당은 그 결정에서 재만조선인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당에 가입하여 중국당원으로서 활동할 데 대한 과업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되어 재건운동에 열을 올리던 공산주의자들속에서 태도를 바꾸어 해체성명을 발표하고 중국당에 전당하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으며 그 바람을 타고 5.30폭동의 불길이 동만을 휩쓸게 되었다.

조선당원이 중국당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문제는 민족적 자부심이 남달리 강한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에게 심각한 자극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원칙을 놓고 우리 동무들은 열기띤 논쟁을 벌이었다. 국제당의 지령을 무책임한 처사,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비난하는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그 조치를 공명정대한 것으로 평가하는 청년들도 있었으며 국제당이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당가입을 요구하는 것은 당 재건의 가능성을 영영 배제하는 것으로 된다고 하면서 의분을 참지 못하고 울화를 터뜨리는 청년들도 있었다.

우리 동무들은 이 문제를 화제에 올리고 나의 입장을 알고 싶어하였다.

나는 국제당이 1국1당제원칙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의 중국당가입을 요구하는 것은 비난받을 처사가 아니며 그 요구가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서 당재건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고 명백히 말해주었다.

≪현재의 형편에서 국제당의 요구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다.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기의 독자적인 정당이 있다면 구태여 무엇 때문에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라고 요구하겠는가. 그러니 국제당의 결정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국제주의적 입장이다. 중국당원의 모자를 써도 조선을 잊지 않고 조선혁명을 위해 싸우면 된다. 그러나 국제당의 지시대로 한다고 하여 독자적인 당건설을 단념하고 무한정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할 수는 없다.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의 당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전당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였고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 견해가 1국1당제원칙에 대한 국제당의 해석과 일치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나는 1국1당제원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당건설방침을 하루속히 확정하기 위하여 1930년 6월 하순에 쟈쟈툰에서 국제공산당 연락원 김광열(김열)을 만나보았다. 김광열은 일본에서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쏘련에 가있다가 나온 인텔리였는데 우리의 활동구역인 고유수, 오가자, 카륜지방에 많이 와있었다. 연락원의 신분을 가지고 우리와 국제당과의 연계를 지어주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쏘련에서 사회주의물을 많이 먹다가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장소봉과 이종락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기대를 가지고 그를 만나보았다. 만나고 보니 소문과 같이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노어와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였고 쏘련춤도 그 나라 사람들 못지 않게 잘 추었으며 연설도 잘하였다. 그때 김광열은 나에게 자기의 개인적인 견해를 듣기보다는 국제당에 가보라, 국제당 하얼빈연락소에 소개해줄 터이니 거기에 가서 1국1당제원칙에 대하여 토론해보라고 하였다.

김광열을 만난 후 나는 동무들과 함께 1국1당제원칙에 대한 논쟁을 거듭하였다.

우리는 1국1당제원칙의 요구를 한 나라에서 둘 또는 그 이상의 공산당이 국제당에 가입할 수 없고 오직 하나의 공산당만이 가입할 수 있다는 것, 한 나라에는 한 개 이상의 공산당중앙이 존재할 수 없고 하나의 공산당중앙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원칙의 본질은 한 나라에 같은 이해관계와 목적을 가진 당중앙이 하나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국제당이 1국1당제원칙을 내놓고 그것을 엄격히 이행하도록 요구한 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종파주의를 비롯한 온갖 기회주의를 청산하고 대열의 통일단결을 보장하자는데 기본목적이 있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역사적 교훈은 국제공산당으로 하여금 1국1당제원칙을 내세우고 공산주의운동 내에 여러 가지 이색적인 요소들이 침습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하게 하였다.

국제공산당이 1국1당제원칙을 명시하게 된 것은 또한 적들이 공산주의대열을 내부로부터 분열와해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한 것과도 관련된다.

그런데 국제공산당 규약은 1국1당제의 원칙만 제시했을 뿐 다른 나라에 가서 공산주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재국의 당에 전당하는 방법은 어떻고 전당 후 그들의 혁명임무를 어떻게 설정하겠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만주지방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당에 전당하는 문제가 그처럼 복잡한 논의를 불러일으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하여 일부 사람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땅에서 자체의 당 조직을 꾸리는 것이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된다고까지 판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 대한 각이한 해석으로 하여 조국의 해방을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서 엄청난 혼란과 동요가 빚어지고 조선의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조국을 위해 싸울 권리조차 의문시되고 있던 그런 시기에 나는 당을 창건하기 위한 방도를 꾸준히 모색하고 있었다.

국제당의 지시에도 부합되고 조선혁명도 강력히 추진시킬 수 있는 그런 길이 과연 없단 말인가.

이런 모색 끝에 내가 찾아낸 출로가 바로 선행공산주의운동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조급하게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착실하게 다지고 그 토대 우에서 명실공히 우리 혁명의 참모부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당을 창건하자는 것이었다. 계급적으로 각성되고 준비된 조직적 골간의 육성과 대열의 사상의지적 통일, 당이 의거할 수 있는 군중적 지반의 구축이 없이 주관적 욕망만으로는 당을 창건할 수 없었다.

나는 종파와 인연이 없는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을 골간으로 기층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 방법으로 당을 창건하는 것이 우리앞에 주어진 가장 적합하고 현실적인 창당방법이라고 간주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당을 창건하면 국제당에서도 환영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키워온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로 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 역할을 부단히 높여나가면서 우리의 발길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기층당조직을 확대강화해 나간다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지도도 능히 보장하고 우리에게 지워진 국제적 임무도 원만히 이행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중국땅안에서 우리의 당중앙을 따로 내와 가지고 중국당과 병존하지 않는다면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도 모순될 것이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정립하여 카륜회의에서 당창건방침을 제시하고 첫 당조직을 내오게 되었다.

혁명적 당조직을 결성하는 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필연적 요구이기도 하였다.

조선에 당이 없으니 단천농민폭동지도자들은 폭동의 전술적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받기 위하여 국제당에까지 찾아다니었다. 조선에 노동자,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혁명적 당이 있고 세련된 지도역량이 있었다면 그들이 노자를 쓰면서까지 국제당에 찾아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1930년대 초엽의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은 그 폭과 심도에 있어서 종전의 반일투쟁과는 대비도 할 수 없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우리의 투쟁도 초기보다도 비할 바 없이 전진하였다. 활동범위는 길림을 벗어나 멀리 동만과 북부조선일대에까지 확대되었다. 청년학생운동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혁명투쟁은 지하활동의 양상을 띠고 광범한 노동자, 농민 대중속으로 줄을 뻗치었다. 경험이 축적되고 군사정치적 준비가 성숙되면 상비적인 혁명군대를 조직해 가지고 대부대역량으로 본격적인 유격전쟁을 해야겠는데 공청이 그 영도를 다 감당할 수는 없었다. 지난날 공청이 여러 대중단체들을 지도한 것은 과도적인 현상이었지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당을 만들어 그 당이 공청을 비롯한 여러 대중단체들을 장악하고 민족해방운동전반을 영도하며 중국당과의 관계도 가지고 국제당과의 사업도 해야 하였다. 공청의 간판을 가지고서는 국제당과의 거래도 원만히 할 수 없었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이 저마다 자기 파를 ≪정통파≫로 자처하면서 승인을 받으러 다녔기 때문에 국제당에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국제당은 조선에서 종파가 청산되기 전에는 진정한 노동계급의 전위대가 나올 수 없으며 종파를 근절하고 새로운 당을 창건하기 위해서는 파쟁도 모르고 집권욕도 없는 새 세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의 투쟁에 주의를 돌리었으며 우리와 손을 잡아보려고 여러 방면으로 줄을 놓았다.

우리는 여러 해 동안의 혁명활동과정을 통하여 새 형의 혁명적 당조직을 내올 수 있는 초석도 쌓아놓았다.

≪ㅌ·ㄷ≫의 결성은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종전의 당과 구별되는 새 형의 혁명적 당창건을 위한 출발점으로 되었다. 모든 것이 ≪ㅌ·ㄷ≫로부터 시작되었다. ≪ㅌ·ㄷ≫가 발전하여 반제청년동맹으로 되고 공청으로 되었다.

공청이 키워낸 우리 혁명의 핵심부대, 반제청년동맹이 이루어놓은 우리 혁명의 대중적 지반이 곧 당창건의 기초로 되었다. 공청이 창립되고 그것이 강력한 전위조직으로 혁명운동을 영솔하던 나날에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선행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범하였던 오류들을 극복하고 대중전취와 영도예술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발양된 영웅적인 투쟁정신과 혁명적 투쟁기풍은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을 타승한 원동력으로 되었으며 훗날 우리 당의 넋으로 되고 기개로 되었다.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서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는 것은 카륜회의를 계기로 조선혁명의 지도사상을 정립해놓은 것이었다. 카륜회의 결정에는 ≪ㅌ·ㄷ≫와 공청의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길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원칙으로 삼아야 할 전략들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새 형의 당을 창건하기 위한 사상적 기초로 되었으며 실패와 좌절의 진통속에서 오랫동안 갈 길을 찾아 암중모색하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상 지침으로 되었다.

지도사상, 영도핵심, 군중지반, 이것은 당조직을 내오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1930년 7월 3일 카륜의 진명학교교실에서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최효일 동무들로 첫 당조직을 무었다.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김리갑, 김형권, 박근원, 이제우 동무들도 첫 당조직의 성원으로 되었으며 조선혁명군 대장으로 내정되어있던 이종락과 박차석도 이 조직의 성원으로 되었다.

진명학교는 마을에서 500미터 가량 떨어진 쟈쟈툰 앞벌에 있었다. 학교의 동쪽과 남쪽에는 5-6정보 가량되는 개버들밭이 펼쳐져 있었고 버들밭 가운데로는 무개하라는 큰 개울이 동남방향으로 흐르면서 학교를 에워싸고 있었다. 학교 동쪽에서부터 마을까지는 늪과 진펄이었다. 진명학교로 오갈 수 있는 통로는 오직 서쪽밖에 없었다. 길목에서 경비만 잘 서주면 학교에서 무슨 일을 해도 모르게 되어있었으며 설사 위험이 조성되는 경우에도 개버들밭으로 빠지면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밀정들이 나타날 수 있는 서쪽관문에 2중3중의 보초를 세우고 회의를 하였다. 논밭에서 개구리들이 소란스럽게 울어대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개구리소리가 신비스러운 정서를 자아냈다.

첫 당조직을 내올 때의 인상 가운데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김원우가 회의장을 꾸리면서 연탁앞에 붉은기를 세우느라고 애쓰던 일이다. 그 깃발의 붉은 색조는 혁명을 위해서 마지막 피한방울이 다할 때까지 싸우려는 우리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주었다.

지금도 첫 당조직하면 진명학교를 생각하게 되고 진명학교를 생각하면 연탁앞에 비스듬히 서있던 그 잊지못할 깃발을 그려보게 된다.

나는 그날 연설을 길게 하지 않았다. 첫 당조직을 내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카륜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 논의를 거듭했기 때문에 구구하게 그 취지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당조직성원들이 해야 할 과업으로 기층당조직을 확대하고 그에 대한 통일적 지도체계를 수립할 데 대한 문제, 대오의 조직사상적 통일과 동지적 단합을 확고히 이룩할 데 대한 문제, 혁명의 대중적 지반을 튼튼히 다질 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실현방도로서 당조직이 모든 활동에서 자주적 입장을 확고히 견지할 데 대해서와 당조직 건설사업을 반일투쟁과 밀접히 결부시킬 데 대하여 강조하였을 뿐이다.

우리는 당 강령과 규약을 따로 채택하지 않았다. ≪ㅌ·ㄷ≫의 강령규약에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최종목표와 당면투쟁과업이 명백히 밝혀져 있었고 카륜회의에서 채택된 혁명노선과 전략적 방침들에 우리가 가야할 길과 행동규범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첫 당조직에 건설동지사라는 소박한 명칭을 붙이었다. 그 명칭은 동지를 얻는 것으로부터 혁명의 첫걸음을 떼었고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동지들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결속시켜 혁명을 심화발전시키며 종국적인 승리를 달성하려는 우리의 포부와 의지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건설동지사에 가입한 동무들은 모두가 일어나서 격정에 넘치는 열변을 토하였다. 김혁은 그때 ≪출범이다. 우리의 는 항구를 떠났다. 우리는 격랑을 헤치며 먼바다로 노를 저어간다.≫는 내용으로 즉흥시를 읊었다.

김혁의 시낭송이 끝난 다음 최효일이 일어나서 일장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을 마치자 이렇게 말했다.

≪성주, 여기가 교실이 아니고 산중이라면 기념으로 예총을 쏘고싶소.≫

나는 일본놈들과 대결할 날도 멀지 않으니 그 때가 되면 실컷 총을 쏘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때 첫 당조직의 결성을 기념하여 권총이 아니라 대포라도 쏘고싶은 심정이었다. 자기의 당조직을 가지고 조선의 당원으로 시대와 역사앞에서 혁명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엄숙히 선서한 우리의 기쁨과 자부심은 참으로 말이나 글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15년 후 해방된 조국에서 당을 창건하고 어린 시절의 체취가 그대로 스며있는 고향집 온돌방에 멍석을 깔고 누웠을 때 나는 만가지 시름을 다 털어버리고 카륜에서 첫 당조직을 내오던 때의 일을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첫 당조직 건설동지사는 우리 당의 태아였고 씨앗이었으며 당의 기층조직들을 내오고 확대하는데서 모체적 의의를 가지는 조직이었다. 첫 당조직을 가지게 된 때로부터 우리 혁명은 종파의 물을 먹지 않은 백지장 같이 깨끗하고 참신한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의 영도를 받으며 승승장구해왔다. 자주적인 당 건설을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이때로부터 항일대전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줄기차게 진척되어왔다.

그 후 우리는 건설동지사 성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두만강연안의 북부조선일대와 만주의 여러 지역에 당조직들을 내왔다.

국내에 당조직을 내오는 일은 내가 맡아하였다. 나는 1930년 가을에 우리의 영향이 비교적 강하게 미치고 있던 함경북도 온성군에 나가 국내 당조직을 무었다.

우리의 청소한 당조직들은 인민대중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언제나 그들의 선두에서 항일전쟁의 진군로를 헤쳤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강철의 전위대오로 단련되고 군중의 절대적인 사랑과 신임을 받는 불패의 역량으로 자라났다.

우리는 자기의 독자적인 조직을 가지고 활동하면서도 중국당과의 밀접한 연관속에서 사업하였다. 우리는 조선의 공산주의자이지만 조중 두 민족의 유구한 선린관계와 두 나라가 처한 처지의 유사성, 두 나라 혁명가들이 짊어지고 있는 시대적 사명의 공통성으로부터 시종일관 중국혁명을 지지해주었으며 중국당과 중국인민의 이익을 옹호하여 싸웠다. 중국당과 중국인민이 자기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거듭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제일처럼 기뻐하였으며 그들이 일시적인 실패와 곡절을 겪을 때면 그들과 함께 아파하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땅에서 활동하는 이상 중국당과의 관계를 가지지 않고서는 중국인민의 방조를 받을 수 없었으며 반제공동전선을 튼튼히 유지해나갈 수 없었다.

우리가 중국당과의 연계를 중시한 것은 만주성위 산하의 당조직들에 조선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정과도 관련된다. 동만특위에도 조선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동만지역의 현당위원회와 구당위원회 지도부도 절대다수가 조선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원비율에 있어서도 90프로 이상이 조선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동만지역 당조직에서 주도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만주지방에 조선인 당원들이 많은 것은 간도지방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선구자들의 대다수가 조선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 후부터였다.

화성의숙에서 ≪ㅌ·ㄷ≫를 조직할 때나 길림과 오가자 등지에서 활동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중국공산당과의 연계가 없었다.

원래 혁명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의 신념과 목적에 따라 자주적으로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혁명의 지도사상을 마련하는 사업도 제 힘으로 하였고 우리 당의 시원인 ≪ㅌ·ㄷ≫도 독자적으로 조직하게 되었다.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강점함으로써 조성된 새로운 정세, 일제가 조중인민의 공동의 적으로 된 새로운 환경은 우리와 중국공산당과의 연계문제를 성숙된 요구로 내세웠다.

1931년 겨울 명월구회의를 전후한 시기에 나는 조아범의 집에 가있으면서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조직과 연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조아범은 길림에서 공부할 때 나와 함께 공청사업을 하였으며 그 후에는 화룡지방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중국공산당조직에 관계하고 있었다. 그 후 유격대를 조직하고 왕청 등지에서 활동할 때에는 영안현당의 책임적 지위에 있으면서 동만지구까지 맡아보던 왕윤성이와 연계를 가졌으며 동장영이 대련에 있다가 동만특위에 파견되어왔을 때는 그와 깊은 연계를 맺었다. 나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이렇게 맺어졌으며 이 과정에 나는 중국공산당조직의 간부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동장영이 희생된 다음에는 위증민과 연계를 가지었다. 그밖에 나는 국제당 순시원이었던 반동무와도 연계를 맺고 사업하였다.

중국공산당과의 이러한 관계는 항일무장투쟁의 전 기간 유지되었으며 그것은 일제를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확대하고 공동투쟁을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우리가 중국공산당과의 깊은 연계밑에 공동투쟁을 발전시켜나간 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혁명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당시의 복잡다단한 정세와 1국1당제에 관한 국제당 노선의 요구에 부합되는 주동적이면서도 신축성있는 조치였다. 우리는 중국공산당과의 이러한 공동투쟁을 적극 발전시키면서 시종일관 조국해방의 기치,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견지하였으며 그것을 빛나게 관철하였다. 우리의 이러한 원칙적인 입장과 성실한 노력에 대하여 중국의 전우들은 혁명의 민족적 의무와 국제적 의무를 옳게 결합한 뚜렷한 모범으로 된다고 진심으로 찬양하였다.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간고하고 시련에 찬 항일의 대장정에 참가하였다.

1963년에 최용건동무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주은래총리는 심양에서 그의 생일을 축하하여 연회를 마련해주고 인상깊은 축하연설을 하였다. 그 때 그는 축하연설에서 동북혁명을 개척하는데서 조선사람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 중조친선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영원한 것이다, 항일연군은 중조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의 연합된 혁명무력이었다 라고 하였다.

동북혁명을 개척하는데서 조선사람들의 공로가 많다는데 대해서는 양정우, 주보중, 위증민 동무들도 자주 이야기하였다.

우리가 중국혁명을 위해 사심없는 방조를 해주었기 때문에 중국사람들도 우리의 일이라면 생사를 가리지 않고 성심성의로 도와주곤 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된 후 우리는 유격대 안에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를 내왔다. 그것은 카륜에서 조직된 첫 당조직의 확대발전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우리의 자주적인 당조직은 그 후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농조, 노조들에도 뿌리를 뻗치었다.

우리가 조국에 개선한 후 한 달도 못되는 사이에 당창건의 위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항일혁명의 장구한 나날 당건설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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