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19일(토)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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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선언과 디마고지, 기회주의로의 변질 - 사회당 비판 (4)

대표집필자 최성원

통일여명 편집국 해설

 

11) ≪수령자본주의≫라는 신조어는 독설과 궤변의 극치다

사회당 지도부가 사회주의 체제에 계급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궤변을 ≪논증≫하기 위해 등장시킨 것은 ≪수령자본주의≫라는 신조어다. 그들은 이른바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 또는 ≪국가사회주의≫라고 모략하였던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악질적 선동을 슬쩍 차용하여, 마치 사회주의 체제에 계급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령자본주의≫라는 해괴한 신조어를 조작하였다. 그들의 선동적 신조어인 ≪수령자본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당 지도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모든 부문, 단위, 개인의 활동들은 수령의 사상과 의도를 실현함으로써 가치를 가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것은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사실인식이므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점은 사회당 지도부가 ≪수령절대체제≫를 ≪수령지배체제≫와 ≪수령자본주의≫라고 왜곡하는 독설과 궤변을 토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노동이 화폐로 표현되어야만 노동의 자격을 부여받듯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개인의 활동은 수령을 빛내는 한에서만 활동으로 취급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악질적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령절대체제에 대해서 무슨 ≪지배체제≫니 ≪독재체제≫니 하는 식의 독설과 궤변을 늘어놓은 적은 있었어도, ≪수령자본주의≫라고 하는 해괴한 독설과 궤변을 토해낸 것은 사회당 지도부가 처음이다. 그들은 독설을 토해낼 때도 일개 당의 지도부답게 선정적 신조어를 등장시킨 ≪창의적인 독설≫을 선호하는 것일까?

그들의 독설과 궤변에 의하면, ≪수령자본주의≫는 ≪부패한 수령자본주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전세계 노동자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령자본주의적 사회체제≫이며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사회체제≫라는 것이다.

그들은 ≪수령이라는 화폐도, ≪우리 사상 제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우리 군대 제일주의≫라는 강권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수령제일주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사회주의의 최악의 변형태를 수령자본주의라는 국가자본주의의 최악의 변형태로 이행시키기 위한 지렛대가 된다. ≪우리 제도 제일주의≫는 그리하여 ≪수령자본주의 제일주의≫가 된다≫고 주장한다.

사회당 지도부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과 화폐의 관계를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수령과 대중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과 화폐의 관계문제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노동이 화폐로 표현되어야만 노동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과 자본이 적대적 모순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확립됨으로써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관계가 폐절된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이 화폐로 표현되지 않아도 노동의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당 지도부가 노동과 자본의 관계문제에 대한 노동계급의 계급적 관점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12) 사회주의 체제에는 자본의 지배와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이 극복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어떻게 하여 노동의 가치를 부여받는가? 단순하고 무지한 사회당 지도부의 독설에 대한 해독작용으로 부연설명을 덧붙이겠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은 생산활동의 주체인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은 사회화, 집단화되지만,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왜곡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의 가치는 노동자의 개별적 생계수단으로 전락하며, 또한 노동은 자본가계급에게 판매되어 착취당하는 노동력으로 전화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은 착취로부터 해방된 노동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로자(노동자, 농민, 지식인)는 착취계급을 위해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노동하지만, 사회주의적 생산활동의 주체인 근로자는 자신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노동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근로자의 노동은 두 가지 가치를 창출한다. 하나는 근로자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노동함으로써 생겨나는 개별적 가치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노동함으로써 생겨나는 사회적 가치다.

사회주의 체제의 근로자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말은 그의 노동이 사회적 창조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사회주의적 노동은 사회적 창조로서의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창조라는 말에서 ≪사회적≫이라는 개념은 사회주의적 생산활동의 주체인 근로자가 노동의 가치를 자신의 개별적 생계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창조≫라는 개념은 사회주의적 생산활동이 시장에서 화폐로 표현되는 노동력으로 전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노동은 매매불가능한 ≪노력≫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매매가능한 ≪노동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노동력의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노동계급이 자본가계급에게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로 받는 임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체제의 노동계급은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생활비를 받는다.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생활비를 받는다는 것은 과학적 인식이 결핍되어 있는 통속적인 표현이다. 그 표현을 과학적인 인식으로 다시 해설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과 국가기구의 관계는 어떻게 성립되는가? 국가기구가 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활동을 벌이고 그 생산활동의 결과로 생겨난 사회적 가치를 노동자들에게 분배하는 그런 국가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자기의 생산활동을 통하여 창조한 사회적 가치를 노동계급이 전 사회적으로 분배할 수 없으므로, 국가기구를 통하여 분배하는 사회주의적 분배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기구는 노동계급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 그 노동계급이 창조한 사회적 가치를 전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기능을 대리적으로 수행한다.

사회주의 체제의 노동계급은 왜 자신이 창조한 사회적 가치를 스스로 전 사회적으로 분배하지 못하고 국가기구를 통하여 대리적으로 분배할 수밖에 없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사회주의 사회가 아직 노동계급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회에는 노동계급 이외에도 협동농민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협동농민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을 노동계급화하는 것이 사회주의 사회의 최종 목적인데, 현실 속의 사회주의 사회는 그 목적을 아직 실현하지 못한 과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의 과도적 성격 때문에 노동계급이 창조한 사회적 가치, 그리고 협동농민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창조한 사회적 가치를 상호교환하고 분배하는 것은 국가기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 사회는 사회주의 국가기구의 지휘기능에 의하여 집단화, 조직화되기 때문이다. 장차 사회주의 체제가 고도로 발전하여 협동농민이 농업노동자로 전환되고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노동계급화되는 높은 수준에 이르더라도, 사회적 가치의 교환과 분배는 국가기구의 지휘기능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은 현재의 형태와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교환과 분배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기구가 사회적 가치의 교환과 분배를 수행하는 원칙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것은 노동강도, 노동조건, 노동의 사회적 기여도 등에 의하여 결정된다. 근로자의 노동은 양과 질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 그 원칙은 많이 일한 근로자, 유해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근로자,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는 근로자에게는 더 많이 분배한다는 원칙이다.

그 분배원칙에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이 받는 생활비는 양적 차이를 보인다. 일종의 소득격차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 생겨나는 이른바 ≪소득격차≫(실제로는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착취의 결과)와 비교한다면 미미한 차이에 불과하다.

사회주의 체제의 집권당과 국가기구에서 일하는 관료들과 사회주의 체제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적용되는 분배원칙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당과 국가의 관료라고 해서 노동자들보다 엄청나게 많은 분배를 받지 못하게 되어 있다. 혹시 사회주의 체제의 당과 국가의 일부 관료들이 반인민적 관료주의에 빠져서 그 분배원칙을 어기는 범죄의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집권당과 국가의 관료들 속에 천문학적 금액의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는 것에 비교한다면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기구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배를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발생하는 착취와 동일한 것으로 왜곡하면서 이른바 ≪국가자본주의≫라고 비난·모략한다.

원래 국가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국유화)하는 자본주의적 소유의 한 형태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생산수단의 국가자본주의적 소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이 승리한 이후에 국가권력을 장악한 민족부르조아지들이 식민지 낙후성을 극복하고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을 막아내는 자립경제를 추진한다는 명목 아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국영기업을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개별적 자본가 대신에 국가기구가 총자본가로 등장하여 노동계급과 인민에게 계급적 착취를 가하는 유형이 있다.

둘째, 독점자본에게 장악된 국가기구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유형이 있다. 이것은 독점자본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적 기업을 국유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여 임금을 지불하지만, 사회주의 국가기구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국가기구와 노동계급의 관계는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가 아니다.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매매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에서 발생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계급이 노동계급을 고용하고, 그들의 생산활동에서 창출된 이윤을 구조적으로 빼앗는 착취체제인데, 사회주의 국가기구가 자본가계급을 대신하여 노동계급을 착취한다는 궤변 중의 궤변은 ≪국가자본주의≫에 관한 사회당 지도부의 악선전이다.

13)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국가기구의 역할

사회주의 혁명에 의하여 수립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국가의 계급적 본질은 질적으로 변화된다. 적대적 계급모순에 의하여 성립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부르조아 계급독재의 도구로 되지만, 적대적 모순이 해소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로 근본적인 성격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기구의 계급적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존재근거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지향과 요구는 완전히 부합된다.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국가관과 일치한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노동자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다.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파악하는 종래의 이론에서는 사회주의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전인민적 국가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여 계급적 차이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사회적 관계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차츰 사라질 것으로 예견하였다. 이 때 국가는 철폐되는 것이 아니라 조락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 체제에서 계급적 차이가 사라지고 전 인민이 노동계급화되어 가는 과정은 곧 국가가 조락하는 과정과 일치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국가조락론이다.

그런데 국가조락론에서는 세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 보인다.

첫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국가의 조락을 사회주의 체제가 최고도로 발전한 결과로 보았다.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된 사회·경제적 관계가 최고도로 발전하면 국가는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 차츰 조락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경제적 관계가 최고도로 발전한다는 의미는 생산양식이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회주의 체제를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을 생산력으로 파악하였음을 말해준다. 국가조락론은 사회주의적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이론이다.

그러나 생산력을 사회주의 체제 발전의 결정적 요인으로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김일성주의는 사회주의 체제 발전의 결정적 요인을 생산력이 아니라 사상으로 보았다. 사회주의 체제는 그 체제의 구성원들의 사상을 노동계급화하고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여야 발전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주의는 사회주의 체제가 자체의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기술혁명과 함께 사상혁명과 문화혁명을 포괄하는 3대 혁명을 수행함으로써 통전적으로 발전될 것이라고 해명하였으며, 3대 혁명 가운데서도 사상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상혁명을 선차적 임무로 규정하였다.

둘째, 국가조락론은 국가와 계급의 관계만을 중시한 나머지 국가와 민족의 관계를 간과하였다. 특정한 계급은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생성·발전·소멸하지만, 민족은 특정계급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가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되고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여 계급적 차이가 사라지고 사회성원 전체가 노동계급으로 단일화되더라도 민족은 존속할 것이며, 민족적 차이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계급사회의 국가는 계급지배의 도구이지만, 사회주의 사회의 국가는 민족적 발전의 도구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민족적 발전의 도구로서의 국가기능은 존속될 것이다.

셋째, 국가의 조락이라는 것은 엥겔스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관계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조락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조락은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제의 조락이라는 뜻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국가가 조락한 이후에는 공산주의적 자치가 실현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처럼 국가조락론은 국가기구와 시민사회를 일단 불화의 관계로 파악한다. 사회주의 국가가 사회주의 사회에 간섭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강제하고 있다고 보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국가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만일 사회주의 국가가 조락한다면, 사회주의 집권당도 국가와 함께 조락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 물음에 대한 명백한 답변은 찾을 수 없지만,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사회주의 국가와 함께 조락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사회주의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지도하는 것은, 그 국가가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다.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인 국가는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협동농민과 근로인텔리를 비롯한 비프롤레타리아 근로대중을 사회주의 건설로 이끌어 간다.

사회주의 국가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서 간섭하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의 영도에 따라서 사회성원들을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길로 이끌어가며,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의 전취물과 사회성원들을 옹호한다. 사회주의 국가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서 간섭자, 강제자의 역할이 아니라 안내자, 옹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적 임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경제적 임무는 무엇인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에게 그들의 생활에 요구되는 물질을 공급하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국가기구다. 사회주의 국가기구의 공급체계에는 무상공급과 저가공급의 두 형태가 있다. 노동계급은 국가기구로부터 화폐형태로 분배받은 생활비를 가지고 저가로 공급되는 물질을 구매하고 자기의 생활에 이용한다. 이를테면 식량과 기초식품, 생활필수품, 전기, 수도를 무상공급 또는 저가공급의 형태로 구매하고, 주택, 교육, 의료, 휴양시설, 문화시설, 도로 등을 무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에는 시장경제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자본주의적 상품도 존재할 수 없다. 시장과 상품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매우 소박한 것은 당연하다. 시장과 상품으로 와글거리며 핑핑 돌아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진 감각으로 그 사회를 볼 때, 그 쪽은 사회 분위기가 왜 그렇게 조용할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낙후성과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지적하는 한심한 사람도 있다. 실제로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평양 거리의 모습은 매우 소박하고 한적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는 시장과 상품으로 들끓으며 복잡해야 정상이고, 사회주의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는 소박해야 정상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목표는 현재 과도적으로 잔존하고 있는 시장과 상품마저도 종국적으로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과 상품을 얼마나 없앴는가 하는 것은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경제적 발전의 척도가 된다.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경제적 발전척도는 시장과 상품이 얼마나 지배적으로 되었는가 하는 것이라면,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경제적 발전척도는 시장과 상품을 얼마나 소멸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특정사회는 그 자체의 발전척도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국가기구가 노동자에게 공급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인민소비품이다. 인민소비품과 상품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 물건의 가격이 시장에 의하여 결정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데 있다. 똑같은 생산물이라도 그 가격이 시장에 의하여 결정되면 상품으로 되며,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경제시책에 의하여 그 가격이 결정되면 인민소비품으로 된다.

사회주의 체제에 존재하는 시장, 상품, 화폐는 과도적으로 잔존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는 물질·경제적 생산력이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과도체제이므로 노동계급과 근로인민이 자기의 생활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질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과 근로인민은 자기의 생활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질을 국가기구를 통하여 충분하게 분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국가기구가 분배하지 못하는 물질을 국영상점, 조합상점, 농민시장에서 화폐로 구입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자본주의적 시장과 상품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화폐의 기능도 또한 현저히 축소된다.

14) ≪국가사회주의≫에 관한 사회당 지도부의 왜곡선전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난과 왜곡선전에 종종 등장하는 ≪국가자본주의≫라는 개념은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과 동의어다. ≪국가사회주의≫는 국가기구가 사회경제발전을 지배하면서 정당한 분배, 노동조건 개선, 기간산업의 국유화 등을 추진하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다. ≪국가사회주의≫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국가자본주의≫다. 근대 독일의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듯이, ≪국가사회주의≫는 민족사회주의로 변모하였고 결국 히틀러의 극악한 파시즘으로 전화되었다.

그런데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파렴치하게도 ≪현실 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고 왜곡하였다. 그들의 비난과 왜곡선전에 따라오는 것은 이른바 ≪당의 독재≫와 ≪국가기구의 행정명령체제≫라는 따위의 용어들이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당관료들의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를 ≪당의 독재≫라고 왜곡하였고, 국가관료들의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를 ≪국가기구의 행정명령체제≫라고 왜곡하였다. ≪전체주의 국가≫ 또는 ≪병영국가≫라는 왜곡선전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관료적으로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악선전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따위의 왜곡선전들은 흔히 ≪반스탈린주의≫라는 구호로 통칭된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집요하게 자행하고 있는 왜곡선전, 즉 ≪반스탈린주의≫로 통칭되는 왜곡선전에 관련해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사회주의 체제의 고유한 본성인 집단주의를 전체주의로 왜곡하였다는 사실이다. 개인주의가 전체를 허구적 관념으로 보고 개체만을 실체로 인정하는 궤변인 것처럼, 개체를 허구적 관념으로 보고 전체만을 실체로 인정하는 전체주의도 역시 궤변이다.

집단주의가 개인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전체주의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집단주의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 사회적 의식에 대비되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총체에서 규정되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라는 진리에서 도출되는 사회관에 기초하는 이념으로서,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양극적 궤변을 모두 반대한다. 집단주의는 인간이 개별적으로 분리·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집단으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내포하는 이념이다.

둘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집권당과 국가기구의 관료들에게 나타나는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를 물고 늘어지면서 ≪반스탈린주의≫로 통칭되는 왜곡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가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는 그러한 통제와 형식주의가 사회주의 체제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에서 아직 청산되지 못한 비사회주의적 요인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일종의 시행착오라는 점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당과 국가의 관료들이 인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과 지시만을 내리고 인민의 요구와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 그리고 당과 국가의 관료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 범죄행위를 의미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당과 국가의 관료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는 그 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행정에서 발생하는 비사회주의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행되는 노동계급에 대한 부르조아계급의 지배와 착취는 그 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만일 사회주의 체제에서 당과 국가의 관료들에 의하여 저질러졌던 관료주의 통제와 형식주의가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지배와 착취처럼 구조적 모순에 의한 것으로서 가혹하고 폭력적이었다면,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가 존속했던 기간동안 그 체제 안에서 반사회주의 폭동이 수없이 전개되어야 했었고,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는 전인민적 항쟁에 의해서 타도되었어야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역사적 경험을 되돌아본다면, 1956년에 헝가리에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반사회주의 폭동이 일어난 것과, 1980년대 폴란드에서 반사회주의 노동자파업투쟁이 일어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기인 1989년에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에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어난 바 있었다. 헝가리, 폴란드, 알바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사회주의 정권이 선거에서 패함으로써 ≪평화적으로≫ 퇴진하였다.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는 반사회주의 인민폭동에 의하여 타도된 것이 아니라,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를 해결하지 못하고 인민과 유리됨으로써 오랜 기간 동안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어 가다가 결국 와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를 발생시킨 것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서식하였던 현대 수정주의자들의 집요한 암해책동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부패·타락한 관료와 인민대중의 관계는 분명히 모순관계다. 그렇지만 그 관계에서 발생된 모순은 사회주의 체제를 해체하지 않고, 사회주의 체제의 내부혁신에 의해서 얼마든지 해소·극복될 수 있었고 또한 해소·극복되어야 했던 그런 모순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자본주의 체제를 전면적, 근원적으로 해체하지 않고서 개량 또는 개혁에 의해서 해소·극복될 수 있는 모순이 아니다. 그 모순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서 발생되는 근원적인 것이다.

그런데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에 존재하였던 부패·타락한 관료와 인민대중 사이의 모순과 자본주의 체제에 존재하고 있는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모순을 마치 동일한 것처럼 왜곡하였다. 그러면서 내놓은 것은 관료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민주주의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혁신해야 한다는 궤변이었다. 저들이 그러한 궤변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의 영도적 지위와 역할을 부정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점에서 사회당 지도부의 ≪반조선로동당 구호≫는 신통하게도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악선전을 그대로 닮았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라는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한편,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수령자본주의≫라는 용어로 슬쩍 바꿔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따위의 어설픈 모방이 무슨 굉장한 것인 양 떠들었다.

≪국가사회주의≫에 관련한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악선전은 이미 오래 전에 서구의 강단과 언론에서 나돌아다니다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기에 이르러 맹위를 떨친 바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주위의 관심조차 별로 모으지 못하는 케케묵은 궤변이다. 그런데 사회당 지도부가 유행이 지난 낡은 수입품을 이제서야 들고 나오면서 약간의 소동을 피우는 것을 보면, 그들은 아마 오래 전에 이 땅에 수입된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반사회주의 선전물을 최근에 뒤늦게 탐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말하는데, 사회당 지도부가 반사회주의 선동을 하려면 때를 가려보고 해야 하지 않을까?

결론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적 입장, 민주적 사회주의의 다양한 조류, 신자유주의적 왜곡 이전의 전통적 의미의 사회민주주의, 신좌파적 조류, 급진적 조합주의자, 여러 형태의 노동자주의, 환경생태주의의 여러 경험들, 근본적 평화운동, 여성주의의 여러 경향, 소수자 운동, 급진적인 인권운동, 심지어 급진적 자유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모든 경험을 포괄하고, 의사소통과 민주주의적 경쟁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것은 이색적인 사조들을 모두 포괄하겠다는 사회당 지도부의 야심적인 주장이다. 이 주장이야말로 그들이 ≪사회주의≫라는 차명으로 출몰한 기회주의 집단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원래 기회주의의 이론적 기초는 해당 사회에 풍미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색적인 사조들을 잡탕으로 뒤섞어놓은 절충주의다. 절충주의는 사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사회당 지도부는 물론이고, ≪자칭≫...는 세력들이 제각기 사회주의 세력임을 자처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반도 식민지의 사회주의 운동은 사상적 스펙트럼의 요란스러운 분광에 넋을 빼앗기고 있어서는 안 되며, 눈길을 사상의 광원으로 돌림으로써 그 광원에서 분출되고 있는 무한한 사상·정신적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사상의 광원은 김일성주의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사회주의 운동은 사상의 광원인 김일성주의에 의하여 전개되는 김일성주의 운동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일성주의 운동은 20세기에 등장하였던 온갖 사회주의 운동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이후 미 제국주의 세력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 연합세력이 광분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최대 시련기에도 주체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활동을 더욱 위력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김일성주의의 세계관적 진리와 사상적 위대성과 혁명적 생활력을 실천으로 입증하였다. 자주시대의 사회주의는 다름 아닌 김일성주의이며, 21세기의 진보적 인류가 추구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은 곧 김일성주의 혁명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민족민주운동진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조선로동당 추종세력≫과 ≪근본적 평화운동세력(사회당)≫의 대각이 존재하고 이 사이에 ≪반조선로동당 입장 표명을 주저하는 평화적 통일운동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광범위한 집단이 있다.≫

그들의 자의적인 분석에 따르면, 민족민주운동진영은 대략 삼등분된다. ≪조선로동당 추종세력≫, ≪조선로동당 반대세력≫,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중간세력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민족민주운동진영을 이처럼 조선로동당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중심으로 하여 적아로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당 지도부가 조선로동당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중심으로 하여 운동진영을 구분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 의도는 명백하다. 그들은 조선반도 식민지에서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여러 종류의 진보적 사회·정치운동들 가운데서 이른바 ≪조선로동당 추종세력≫을 배제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배제되어야 할 세력은 조선로동당 추종세력, 그리고 구태의연한 반미지상주의, 민족제일주의, 통일지상주의 세력≫이라고 서슴없이 떠들고 있다. 이 지점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회당 지도부의 의도는 노골적이다. 그들은 조선로동당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중간세력,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평화적 통일운동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이른바 ≪조선로동당 추종세력≫을 고립·배제하고 자기들이 운동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해보려는 것이다.

그들은 ≪반조선로동당 선언은, 일차적인 청자를 조선로동당이 아니라 한국에서 조선로동당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하여 행해진 발언≫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반조선로동당 선언≫을 내놓은 의도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그들은 ≪조선로동당을 추종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조선로동당의 지도사상, 역사, 한반도 정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사회체제에 관한 포괄적 논쟁을 통하여 계몽하고 낡은 미신을 타파해야≫한다고 떠들어댄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사회당 지도부의 ≪반조선로동당 선언≫은 그들이 품고 있는 종파주의적 적대감의 투영이다. 민족민주운동진영을 자기들 편이 아니면 적으로 분할하면서, 이른바 ≪조선로동당 추종세력≫을 고립·배제해보겠다는 의도는 종파주의적 범죄심리의 발로다.

어느 나라의 운동사에서건 종파주의자들은 언제나 운동진영의 주변부를 뱅뱅 맴돌면서 운동진영의 중심부를 중상·모략한다. 종파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진리라고 믿는 궤변에 대한 맹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현실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지능지수가 현저하게 저하되어 있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사회당 지도부가 내놓은 ≪반조선로동당, 반자본주의 선언≫은 종파주의자들의 그러한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반조선로동당 선언≫을 내놓고 운동진영의 광범위한 중간세력들에게 사회당이냐 아니면 ≪조선로동당 추종세력≫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반북≫이냐 ≪종북≫이냐를 선택하라는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강요다.

사회당 지도부의 어법과 미 제국주의자들의 어법은 놀랍게도 일치한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반테러 선언≫을 내놓고 전 세계를 향해서 ≪테러반대≫냐 아니면 ≪테러지지≫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당 지도부는 ≪반조선로동당 선언≫을 내놓고 조선로동당에 대한 반대냐 지지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한 줌도 안 되는 극소수 기회주의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운동진영을 양분하려는 것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행위를 흉내내려는 범죄적 모방심리가 빚어낸 가소로운 짓이다.

세계혁명의 역사적 경험은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을 배신한 현대 수정주의자들이며 너절한 기회주의자들이 어떻게 변질·타락하였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카우츠키, 베른스타인, 쉬미트, 애들러로 이어지는 추악한 수정주의 종파들은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을 배신한 뒤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부르조아지들과 야합하여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공격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사회민주주의≫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출몰하면서 노골적으로 반공노선을 들고 나왔다. 1947년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그것이다.

수정주의자들과 사회개량주의자들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부정하면서 기회주의적인 계급화해론을 설교하였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로 평화적으로 이행할 것이므로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타파할 것이 아니라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더욱 확장하고 부르조아 의회에 진출하여 정치세력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수정주의는 언제나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그 운동을 갉아먹는 악성 박테리아였으며, 사회개량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운동 외부에 존재하면서 그 운동을 망쳐놓는 파괴자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집권당에 침습했던 현대 수정주의의 종파적 탁류는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서거한 뒤에 열렸던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1956년 2월)에서 본격적으로 방류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관료주의적으로 왜곡되었으므로 이를 혁신해야 한다는 이른바 ≪사회주의 혁신론≫을 들고 나왔다. 그로써 그들은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 비판≫을 떠들면서 이른바 ≪소비에트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계급화해론≫을 제국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 사이의 ≪체제화해론≫으로 전환시켜놓고서, 이른바 ≪제국주의자들과의 평화공존≫,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세계전쟁 불가피론에 대한 수정≫,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다양성≫ 등의 궤변을 늘어놓았다.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는 고도로 발달된 미래의 새로운 산업사회로 수렴될 것이라는 궤변도 서슴없이 늘어놓았다.

현대 수정주의의 괴수 흐루시초프가 장악한 소련공산당은 1957년에 ≪산업의 분산화정책≫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체계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흐루시초프 자신이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와 정상회담을 열었으며, 1962년에는 미 제국주의 세력의 정치·군사적 압박에 굴복하고 쿠바에 배치했던 미사일을 철수하는 투항정책으로 나오면서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유린하였다.

그렇다면 한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적 기치를 들었던 소련공산당이 어찌하여 그처럼 어이없게 현대 수정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장악되었을까? 그 원인을 소급하여 추적해 올라가면, 1936년에 채택된 새로운 헌법에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이른바 ≪전인민적 국가≫로 이행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전인민적 국가로 이행하였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사라지고 이른바 ≪전인민적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은 소련공산당의 착각이었다. 당시 스탈린이 이끌었던 소련공산당은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고도의 발전단계에 이르러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조락하면서 ≪전인민적 국가≫로 이행하였다고 착각하였던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혁명과 건설을 위하여 투쟁하는 장구한 행정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노선을 성급하게 폐기하는 것은 명백한 우경적 편향이었다. 그 우경적 편향은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세계혁명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되었으며, 다시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소련공산당을 현대 수정주의가 침습·장악하게 만든 사상적 원인으로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노선을 폐기한 오류 때문에 소련공산당은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세계혁명의 수행과정에서도 역시 소극적이고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제국주의 세력과의 절충과 타협을 능사로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중대한 시기에 소련공산당은 조선, 독일, 오스트리아를 분할·점령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의 책동을 단호하게 격파하지 못하고 절충·타협했으며, 전후 만주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장개석 반동정권과 밀약을 맺음으로써 제국주의 세력에게 유리하게 양보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스탈린 시기의 소련공산당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노선을 폐기하는 우경적 편향이 발생하였던 근본원인은 또 무엇일까? 그 근본원인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이 지니고 있는 오류에 있다. 자연사의 진화과정과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을 동일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적 원리로 해명하였던 오류를 의미한다. 이러한 세계관의 오류는 사회주의 자동발전론, 제국주의 자동소멸론으로 재생산되었다. 자연이 진화과정을 자동적으로 밟아가듯이, 사회주의 체제도 자동적으로 발전되고 제국주의 체제도 역시 자동적으로 소멸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제국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회피하는 ≪혁명전쟁 회피론≫을 불러오게 되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타파하려는 혁명노선을 폐기하고 그 체제와 평화적으로 공존·경쟁하는 현대 수정주의 노선으로 변질되고 만다.

이른바 ≪사회주의 자동발전론≫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사회·역사의 발전을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과업으로 국한시키는 ≪생산력주의≫의 편향을 불러왔다.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동인을 혁명과 건설의 주체에서 찾지 못하고, 사회적 생산력의 증대라는 객관적 조건에서 찾으려 했던 소련공산당을 묶어놓았던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오류였다.

소련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노선을 폐기한 우경적 편향에 기울어졌던 때로부터 30년이 지난 1986년 2월에 열렸던 소련공산당 제27차 대회에서는 현대 수정주의의 종파적 탁류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그들은 ≪현실주의 노선≫이라는 구실로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완전히 포기했으며,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기업운영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자영업을 촉진함으로써 개인의 권리, 자유, 복지를 향상시키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개방과 경제협력을 추진하였으며, 제국주의자들과의 군축협상을 시작하였다.

1956년의 20차 당대회에 등장했던 후르시초프에서 시작하여 1986년의 27차 당대회에 등장했던 고르바초프로 이어진 일군의 사회주의 배신자들은 30여 년 동안의 집요한 반사회주의 암해책동 끝에 ≪개혁≫과 ≪개방≫이라는 투항의 백기를 들고 미 제국주의자들과 손을 잡았으며(1989년 12월의 몰타회담), 결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를 와해시키고 말았다.

그 충격적 파장에 휘말린 독일민주공화국, 폴란드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사회주의공화국, 헝가리인민공화국,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 알바니아인민공화국, 불가리아인민공화국, 루마니아사회주의공화국 등 8개 나라에서도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그러므로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은 사회주의 혁명의 패배가 아니라 현대 수정주의, 기회주의의 파산을 의미한다.

중국공산당은 1982년에 이른바 ≪유(唯)생산력론≫이라는 간판을 내건 뒤로 지난 20년 동안 차츰 ≪시장사회주의≫로 변질되었다. 2000년 2월 25일에 장쩌민은 이른바 ≪3개 대표론≫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선진사회 생산력 발전요구를 대표하고, 중국의 선진문화 창달을 대표하며, 중국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현대화 과업≫의 수행이라는 미명 아래 자본가의 입당을 허용하였다. 베트남공산당은 1986년의 6차 당대회에서 이른바 ≪쇄신정책≫의 간판을 내건 뒤로 차츰 ≪시장사회주의≫로 변질되었다. 중국공산당과 베트남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노선을 폐기하고 생산력 중심의 사회주의 발전노선을 들고 나오면서 소련공산당의 우경적 편향과 그에 따른 정치적 실패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현대 수정주의의 종파적 탁류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를 몰락시켰던 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 바로 그 탁류는 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출몰하였다. 오랜 사상적 혼란기를 벗어나 날로 장성·발전하고 있는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저해하기 위해서...

세계혁명사의 역사적 경험이 증언하고 있는 대로,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을 배신한 추악한 수정주의, 기회주의 종파세력은 언제나 혁명운동 안에서 출몰한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철학적 세계관의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진리를 제거하고 부르조아 반동이론으로 대체하려고 날뛴다. 그들은 정세변화에 따라 적아 사이에서 끝없이 동요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결국 반혁명세력과 손을 잡고 미 제국주의 세력에게 투항하게 될 것이다.

현대 수정주의, 기회주의 종파세력은 현란한 혁명적 언사로 치장한 궤변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을 잠시 기만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결코 민중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독설과 궤변을 토해내고 있는 그들은 민중으로부터 고립되고 배척을 받아 결국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다. 지난 20세기 후반에 혁명적 언사를 남발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회주의 원칙을 제거하고 노동계급을 배반했던 현대 수정주의자들의 비참한 말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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