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19일(토)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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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선언과 디마고지, 기회주의로의 변질 - 사회당 비판 (3)

대표집필자 최성원

통일여명 편집국 해설

 

5)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역사의 주체로 출현한 노동계급

사람이 물질세계의 주체로 출현하고 사회·역사가 시작되었지만, 그 장구한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이 진행된 이후에도 매우 오랫동안 사회·역사의 주체는 아직 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혁명운동의 주체로 등장한 최초의 사회적 집단은 노동계급이었다. 노동계급은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자주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지니게 되었고, 처음으로 사회를 개조·변혁하는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노동계급은 자신만이 아니라 여타의 사회계급·계층(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을 사회·역사를 변혁하는 혁명으로 이끌었다.

그 이전에 출현했던 그 어떤 계급도 이러한 지위와 역할을 가지지 못했다. 노동계급이 혁명의 영도계급이라고 하는 명제와 인민대중이 사회·역사의 주체라는 명제는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자본가계급은 봉건체제를 타도하는 부르조아혁명을 일으키고 사회·역사를 변혁하였지만, 부르조아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지배·착취계급으로 변질되어 사회·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반혁명세력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혁명의 영도계급이 될 수 없었으며 자주적 주체도 될 수 없었다.

노동계급의 출현 이후의 사회·역사는 그 이전 시대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자주적 주체의 시대로 되었다. 노동계급의 영도에 따라 인민대중이 사회·역사의 주체로 당당히 등장한 시대, 곧 자주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김일성주의가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명한 사회·역사관의 요체다.

인류가 물질세계의 장구한 진화과정에 출현한 수많은 유기체 집단들 가운데 유일무이하게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집단이라면, 노동계급은 수 천년 사회·역사에 출현했던 집단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에서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집단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가장 선진적이며 가장 힘있는 사회·정치적 집단이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노동계급을 자주적 주체로 되게 한 근본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문제다. 종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이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였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사회·역사를 발전시키는 가장 강한, 그리고 가장 주요한 추진력으로 되고,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사회·역사의 모든 운동력을 규정한다는 답변 아닌 답변을 내놓았다.

노동계급이 자주적 주체로 된 근본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집단주의적 생명관과 그에 기초한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형성에 관한 김일성주의 철학이론에 의해서 해명되었다.

물질세계 일반에서 유기체가 자연계의 진화작용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는데 비하여 사회·역사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주체의 목적·의식적인 작용에 의하여 발생한다. 주체의 목적·의식적 작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집단이 사상·의식적으로 각성되고 조직적으로 단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역사에서 사상·의식적으로 각성되고 조직적으로 단결된 최초의 사회적 집단으로 출현한 것은 노동계급이다.

6) 노동계급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어떻게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되는가?

그렇다면 노동계급은 어떻게 사상·의식적으로 각성되고 조직적으로 단결되는가?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에 의하여 생산의 사회화가 진행되고 생산활동의 집단화와 조직화가 강화·발전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이 자연적으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자본과 노동간의 모순이 첨예화되면서 자본가계급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이 전개되고, 노동계급은 그 투쟁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발생적 계급의식은 맹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계급의식은 노동계급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될 수 없다. 노동계급이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의 역사적 임무를 자기의 임무로 자각하는 것,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혁명사상을 획득하는 것, 다시 말해서 혁명적 계급의식은 목적·의식적 작용에 의하여 형성되고 노동계급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계급의식과 부르조아 혁명운동은 자본주의 경제제도(uklad)가 상당히 존재하고 있는 조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였던 것에 비하여, 노동계급의 계급의식과 혁명운동은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발생한다. 사회주의적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 조건이므로 당연히 목적·의식적 작용에 전적으로 의거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계급의식을 각성시키고 그에 의거하여 혁명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철두철미 주체의 목적·의식적인 작용이다.

목적·의식적 작용의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주의 혁명사상으로 각성되고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된 혁명의 주체다. 그 주체를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라고 부른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어떠한 임무를 수행하는가? 노동계급에게 사회·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각성시키고, 노동계급과 동맹관계를 맺은 다양한 비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을 혁명적으로 교양하고 조직화하며, 노동계급과 전체 근로인민에게 계급투쟁의 전략과 전술에 관한 과학적 인식을 제공하고, 사회주의 혁명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을 정치적으로 조직·지도한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그러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사회정치적 생명체, 곧 사회·역사의 주체를 생성시킨다.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을 수령을 중심으로 결집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없이는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은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될 수 없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을 사상·의식적으로 각성시키고 조직적으로 단결시키는 문제를 올바르게 해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철학적 세계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적 세계관으로부터 혁명적 당 건설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세계관과 사회·역사관 전체를 수미일관하게 주체라는 최고의 철학적 개념으로 통찰하면서, 마침내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혁명적 철학사상을 발전시킨 김일성주의는 혁명적 당과 노동계급의 관계를 완벽하게 해명하였다. 그래서 김일성주의를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7)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사상의 최고 결정체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마지막 질문, 최고의 질문이 아직 남아있다. 그 질문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지 않으며 목적·의식적인 주체에 의하여 형성된다는 것은 더 이상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자명한 이치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을 형성하는 목적·의식적인 활동은 노동계급의 수령에 의하여, 그 수령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된다. 수령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의 중심으로서, 그 당을 창건하고 끊임없이 강화·발전시키는 혁명적 임무를 수행한다. 노동계급의 수령이 없이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존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수령의 영도에 의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닌 혁명의 자주적 주체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수령의 당이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수령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을 통하여 노동계급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을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시킨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는 이렇게 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혁명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 즉 혁명의 자주적 주체에 의하여 수행된다. 혁명위업을 완수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김일성주의의 혁명적 수령관의 중심내용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이러한 혁명적 수령관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사상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 곧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사상은 혁명적 수령관을 핵심으로 하여 성립된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혁명사상이다. 혁명적 수령관은 인류역사에 출현하였던 모든 철학사상과 혁명이론의 이러저러한 시대적 제한성과 이론적 오류를 극복·청산한 최고의 결정체며, 고도로 발전된 혁명사상의 진수다. 혁명적 수령관은 노동계급의 수령관이며, 혁명적 세계관의 진수다.

그러므로 혁명적 수령관을 이해하면,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으로부터 시작되어 혁명적 수령관에서 정점에 이르는 혁명사상과 혁명이론의 모든 구성체계와 내용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거꾸로 표현하면, 혁명적 수령관을 이해하지 못하면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도 된다.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사상인 김일성주의를 이해하고 교양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혁명적 수령관을 가장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혁명적 수령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사회·정치적 생명에 관한 철학적 세계관의 기초이론, 집단주의적 생명관에 관한 철학적 해명,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 건설에 관한 이론 등을 종합·체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일 수령은 ≪ 근로인민대중의 최고 뇌수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이라는 명제를 비유의 통속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혁명적 수령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생물학주의의 논리적 장벽을 뛰어넘기 힘들다. 혁명적 수령관은 ≪혁명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특징짓는 기본척도이며 참다운 혁명가와 우연분자를 가르는 시금석≫이다.

혁명의 자주적 주체가 형성되지 못한 조건에서 수행되었던 수많은 혁명이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경험은, 오직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만이 혁명위업을 완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파렴치하게도 혁명적 수령관을 단순한 통치 이데올로기라고 왜곡하고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따위의 악선전은 논박할 가치조차 없는 잡음이다.

8) 통치기능과 사회정치적 생명체

수령은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과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수령은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과 마찬가지로 통치기능을 수행하지만, 통치기능만 수행하지 않는다. 수령은 인민대중을 당의 주위에 튼튼하게 결합시킴으로써 인민대중에게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하고,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를 형성한다. 이것은 단순히 통치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이 할 수 없는 수령의 고유한 임무, 혁명의 최고 임무다. 김일성주의의 혁명적 수령관과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지도자론이 질을 달리하여 갈라서는 사상적 분기점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이다.

만일 수령을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 수령의 통치기능이 왜곡되면서 지배기능과 독재라는 부정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논리적 오류가 생겨나게 된다. 이것은 수령과 대중의 관계를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통치기능적 측면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류다. 수령과 대중의 관계는, 수령은 대중에 대해서 통치기능을 수행하고 대중은 수령의 통치를 받기만 하는 그런 기능적 관계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은, 순전히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중을 통치하는 통치기능의 수행자로 설명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계급적 모순관계에 의하여 규정된 착취체제이므로 이론상의 통치기능은 실제로는 수행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모순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적대적 모순에 의해서 그들의 통치기능은 계급적 모순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기능으로 변질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지배기능과 계급독재로 전화된다.

계급적 모순관계에 대한 인식을 떠나서 자본주의 정치체제의 통치문제를 논하려는 것은 오류다.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적 모순관계는 통치자를 지배기능을 수행하는 부르조아 계급독재의 수행자로 만든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계급적 모순관계가 폐절된 사회주의 정치체제에서는 전혀 다른 정치가 실현된다. 수령은 대중에게 통치기능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수령의 통치기능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본질에 속해있는 하나의 기능에 불과하다. 수령의 존재근거는 통치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과 대중을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상호결합시킴으로써 대중에게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김일성주의의 표현을 빌리면, 수령과 대중의 결합관계는 일심단결, 혼연일체의 관계다. 이처럼 수령과 대중의 관계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수령의 통치기능이 독재기능으로 변질·타락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9) 모든 형태의 독재와 민주주의는 두 개의 계급적 기반으로 나뉜다

사회당 지도부는 수령절대주의를 ≪수령지배주의≫라고 왜곡하면서, 수령이 사회주의 체제의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성원들을 지배하는 ≪수령의 독재≫라고 악선전하고 있다. 수령절대주의에 퍼붓는 사회당 지도부의 격렬한 비난공격은 결국 그들이 머리 속에서 만들어낸 ≪수령의 독재≫라는 허구적 관념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수령절대주의에 관한 사회당 지도부의 악선전에는 수령이라는 개인이 인민대중에 대해서 독재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수령을 개인으로 보는 것도 무지의 소산인데, 거기에다 한 술 더 떠서 계급이 아닌 개인이 인민대중에게 독재를 실시한다고 하는 악선전은,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초보적 지식도 없는 무식자들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어쨌든 그래도 명색이 당의 지도부인데 그처럼 무식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모르고 있는 것(혹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은, 독재와 민주주의가 계급적 기반을 가지는 정치적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정치권력이 어느 계급에 의하여 장악·행사되는가에 따라서 독재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문제의 본질이 결정된다. 독재와 민주주의를 가르는 정치체제의 문제는 계급적 관점을 떠나서는 인식될 수 없다. 그 문제는 자본가계급의 계급독재와 ≪자유민주주의≫냐 아니면 노동계급의 계급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냐 하는 문제로 갈라서 보아야 한다. 오늘 인류사회에는 오직 두 가지 독재, 자본가계급의 독재와 노동계급의 독재만이 존재하며, 오직 두 가지 민주주의, 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와 노동계급의 민주주의만이 존재한다.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민주주의에 속하는 유형들이다. 노동계급의 계급독재는 노동계급 자신과 비프롤레타리아 근로대중(협동농민, 근로인텔리)의 계급동맹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는 독재다.

파시스트 독재라든지 노농독재와 같이 변형된 계급독재가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하였지만, 그것은 형식적 차이의 문제이지 본질적 차이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독재는 자본가계급의 독재와 노동계급의 독재 두 유형에 속한다. 따라서 개인의 독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에 등장하였다가 비참하게 종말을 고했던 파시스트 독재체제들, 이를테면 히틀러, 프랑코, 마르코스, 피노체트, 쏘모사 그리고 이 땅에서 출몰하였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따위의 파시스트 두목들이 이끌었던 파시스트 독재체제들은 파시스트 독재자 개인이 인민대중에 대해 독재를 실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본가계급 독재의 가장 반동적인 형태인 파시스트 독재를 수행했던 두목이었다.

그런데 파시스트 독재를 파시스트 독재자 개인의 독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상과 본질을 구분할 줄도 모르는 중학생의 지능수준을 가진 자들의 강변이 아니면, 사회과학의 기초지식마저 부정하려는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궤변, 둘 중에 하나다.

파시스트 두목이 실시하는 파시스트 독재의 계급적, 정치적 기반은 자본가계급이다. 파시스트 독재는 엄연히 자본가계급의 독재에 속하는 한 유형이다. 노농독재가 노동계급의 독재에 속하는 한 유형이듯이...

수령을 개인으로 보면서, 개인의 독재가 실시되고 있다고 떠드는 사회당 지도부의 궤변은 개인의 독재가 존재할 수 없고, 오직 계급의 독재만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무너진다.

그렇다면 오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자본가계급이 존재하고 있는가? 정신이상자가 아니라면 그렇다고 답변할 사람은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자본가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본가계급의 독재가 없으며 오직 노동계급의 독재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파시스트 독재자들이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실시하는 가장 악질적인 괴수라면, 수령은 노동계급의 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최고 영도자이다.

수령이 노동계급과 그 동맹자인 농민, 그리고 통일전선에 망라된 인민대중을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으로 영도함으로써 인민민주주의가 실현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의 적인 자본가계급과 제국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독재를 실시하는 주체혁명의 길이 개척된다.

사회주의혁명을 영도하는 수령은 노동계급과 그 동맹자인 협동농민과 근로인텔리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길로 이끌어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형성하고, 이미 전복된 반혁명세력과 제국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독재를 실시하는 주체혁명위업을 완수해나간다.

그런데 일부 무식자들은 조선로동당이 ≪일당독재≫를 실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주장도 역시 궤변에 불과하다. 일당제냐 다당제냐 하는 것은 독재와 민주주의를 가르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회에 정당이 복수로 존재하면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것이고, 정당이 유일적으로 존재하면 독재를 실시하는 것이라고 떠드는 것은 정당의 계급적 본질을 은폐하려는 선동이다. 자본주의 정치체제의 부르조아 정당들은 자본가계급에 의하여, 자본가계급의 계급적 이익과 권리를 위하여 생겨난 것들이다. 자기들끼리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추잡한 정쟁을 일삼는 꼴을 ≪자유민주주의≫라고 강변하는 것은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은폐하려는 서투른 기만극이다.

정당의 본질은 복수냐 단수냐 하는 피상적인 문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당이 어느 계급의 이익과 권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하는 근본문제에 의해서 결정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자본가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조선로동당이 노동계급과 그 동맹자인 협동농민, 근로인텔리의 이익과 권리를 위하여 활동하는 것을 자기의 존재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조선로동당은 전복된 계급사회를 복구해보려고 날뛰고 있는 반혁명세력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해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의 독재를 실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당의 독재≫라고 말한다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노동계급을 지배·착취하는 자본가계급 정당의 독재가 실시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정치적 현실을 판단할 때, 항상 노동계급적 관점에 의거하여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노동계급적 관점에서 이탈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면서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수령절대주의를 운운하면서 ≪반조선로동당≫ 구호를 내건 것은 수령절대주의의 계급적 본질을 외면하는 결정적 오류이다. ≪반조선로동당≫ 구호는 그 오류가 낳아놓은 궤변이다.

10)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본 수령과 대중의 관계

수령과 대중의 관계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수령에 대한 대중의 관계는 충성과 숭배의 관계이며, 대중에 대한 수령의 관계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에 대한 대중의 관계가 신뢰와 존경의 관계라는 사실과 대비되며, 대중에 대한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의 관계가 신뢰와 권위의 관계라는 사실과 대비된다.

그런데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수령과 대중의 관계가 충성과 숭배, 신뢰와 사랑의 관계라는 말을 들으면 우선 심리적인 알레르기 반응부터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충성≫이라는 개념이 봉건군주에 대한 충성을 연상시키고, ≪숭배≫라는 개념은 신적 존재에 대한 숭배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생겨나는 심리적 조건반사일 것이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충성≫과 ≪숭배≫라는 말에 대해서 알레르기성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그 말의 과학적 의미에 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주는 언어감각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심리적 알레르기 반응의 원인이 언어감각 때문이라면 그것은 수령과 대중의 관계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반응은 과학적 인식으로 극복할 수 있으며, 또 극복해야 한다.

≪충성≫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라는 뜻이다.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좋은 말을 봉건지배계급들이 사용했었다는 데 있다. 봉건주의 체제는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봉건지배계급과 인민대중 사이의 적대적 모순관계에 의하여 성립된 체제였으므로, 그러한 봉건주의 체제의 적대적 모순관계에서 봉건군주에 대한 ≪충성≫이 존재할 리 없었던 것은 자명하다. 충성이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충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봉건지배계급이 인민대중에 대한 지배·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인민대중을 기만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물론 봉건지배계급이 자기들의 지배·착취를 은폐·위장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말이기 때문에 언어감각이 좋지 않을 수 있지만, 봉건지배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에 와서 그 말 자체를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컨대, 자본가계급이 자기들의 지배·착취체제를 은폐·위장하려고 ≪평화≫와 ≪인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노동계급이 ≪평화≫와 ≪인권≫이라는 말 자체를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의 핵심은 언어감각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표출이 아니라, 언어의 사회·정치적 의미를 어느 계급의 관점에서 이해하는가 하는 데 있다.

사회정치적 생명체와 관련해서 ≪충성≫이라는 말과 더불어 ≪효성≫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효성이라는 말은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이다. 이 역시 참 좋은 말이다. 서구의 개인주의 시각에서 보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낡은 봉건주의 도덕의 잔재쯤으로 치부될 것이다. 물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도덕률이 군주에게 충성하라는 도덕률과 함께 봉건주의 체제에서 특별히 강조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계약관계로 이해하고 있는 서구의 개인주의자들에게 효성은 배척되어야 할 낡은 덕목으로 보일 것이다. 계약관계는 계약을 체결한 쌍방이 계약을 준수하는 한에만 성립되며, 만일 계약조건이 없어지면 그 관계 자체가 깨지는 그런 관계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이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조건에 한정해서 관계를 유지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유기체적 생명으로 결합된 혈연적 연계로 성립되며, 자식에 대한 부모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 그리고 부모에 대한 자식의 관계는 효성의 관계다. 유기체적 생명의 관계로 결합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계약이 아니라 효성이 존재한다면, 유기체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사회·정치적 생명의 관계로 결합된 수령과 대중의 관계에서 효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구의 개인주의자들은 모든 사회적 관계가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인들의 계약관계라는 기초 위에 성립한다고 떠들었고, 반면에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모든 사회적 관계가 계급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계약이 아니라 계급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해명하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사회적 관계는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지배·착취적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물론이지만, 계급적 모순이 철폐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사회적 관계는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에 기초하여 성립된다. 사회주의 체제의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에 경험담을 소개한다. 사회주의 조국을 배반하고 미제의 식민지로 넘어와 적들에게 투항했던 배신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약간 어색할 수 있겠으나, 주체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에 기초하여 성립된 사회적 관계를 체험하지 못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데 참고로 삼을 만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을 유지하는 힘 가운데 하나가 동지적 유대관계입니다. 직장이나 당이나 군을 가릴 것 없이 조직원간의 유대관계를 중시하고, 그것을 체제의 힘으로 연결시키는 사회가 바로 ≪북한≫입니다. 그러한 분위기 아래서는 동료에 대한 비판은 관심과 격려로 받아들여집니다. 애정이 있으니까 비판하는 것이고, 비판받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를 이렇게까지 배려해준다는 생각에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아비판을 하거든요. ≪귀순≫초기에 이런 얘기를 몇 차례 했더니 다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사회·정치적 생명은 계급관계가 아니라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발현된다.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는 계급적 모순이나 계급적 차이에 의해서 형성된 관계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지도자, 국가수반과 대중의 관계는 사회계급에 기초하여 형성된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수령과 대중의 관계는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로 결합된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다. 그러므로 수령에 대한 대중의 관계에 존재하는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를 ≪충성≫, ≪효성≫과 같은 의리관계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충성과 효성은 사회·정치적 생명으로 결합된 의리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만일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점에서 이탈하여 수령과 대중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 ≪충성≫, ≪효성≫과 같은 의리관계의 개념은 봉건주의적 개념으로 오해될 수 있다.

수령과 대중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 가운데는 ≪숭배≫라는 말도 있다. ≪숭배≫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높이어 우러러 공경한다는 뜻이다. 참 좋은 말이다. ≪숭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도 역시 그 말을 주로 신적 존재를 우러러 모시는 종교집단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종교집단의 숭배대상인 신적 존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이므로, 사람이 허구적 관념을 숭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집단이 자기들의 종교적 행위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언어감각이 좋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 자체를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수령숭배를 종교집단에서의 신적 존재에 대한 숭배로 바꾸어놓고 이른바 ≪개인숭배≫라고 왜곡·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숭배라는 말이 주는 언어감각에 대해서 저들이 자행하고 있는 두 종류의 교활한 책동이다.

첫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수령이라는 사회·정치적 개념을 개인이라는 비사회·비정치적 개념으로 대체하려고 책동하고 있다. 수령은 개인이 아니다. 수령은 사적 관계 속에 성립되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인민대중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회·정치적 존재다. ≪개인≫이라는 개념은 인민대중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성립되지만, 수령이라는 개념은 오직 인민대중의 관계 안에서만 성립된다. 만일 인민대중이 없으면 수령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 반대도 진리이다.

수령이라는 말을 영어권에서는 흔히 leader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는 데, 그 말은 어떤 집단의 지도자라는 일반적인 의미에 불과한 것이며, 인민대중과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로 결합된 수령이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수령이라는 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신조어가 아니라 한자문화권에서 옛날부터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영수라는 말도 사용한다. 수령이나 영수라는 말은 원래 최고의 정치지도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김일성주의에 의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진리가 밝혀진 이후에 수령이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둘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높이어 우러러 공경한다는 뜻의 숭배(admiration)라는 말을 광신적인 소수집단이 신적 존재에 대해 열광한다는 뜻의 숭배(cult)라는 말로 대체하려고 책동하고 있다. 교회, 사찰, 사원 등에서 진행되는 종교행위에 대해서는 숭배(cult)라는 말을 쓰지 않고 흔히 예배(worship)라는 말을 쓴다. cult라는 말에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소수집단의 종교행위, 이성을 잃은 광신적 종교행위, 정통성을 갖지 못한 이단적 종교행위라는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수령에 대한 인민대중의 숭배는 원래의 말뜻 그대로 수령을 높이어 우러르고 공경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회주의 체제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충성≫, ≪숭배≫라는 말은 봉건주의 체제에서 사용했던, 그리고 종교집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런 왜곡된 의미와 기능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사회주의 체제의 인민대중이 자기의 수령에 대하여 충성심과 숭배심을 지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충성과 숭배는 인민대중이 수행하는 어떤 사회적 기능이 아니다. 인민대중이 수령에 대해서 충성과 숭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충성과 숭배는 수령에 대한 인민대중의 관계, 다시 말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관계의 한 측면을 표현한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사용되는 ≪충성≫, ≪숭배≫라는 말이 인민대중에 대한 수령의 신뢰, 사랑이라는 개념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신뢰≫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사회·정치적 관계와 그 현실을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계급사회의 특정한 사회·역사적 경험 속에서 길들여진 언어감각의 문제다.

계급사회의 사회·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신뢰나 사랑이라는 말은 사적 관계와 그 현실을 표현하는 도덕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수령과 대중의 관계의 한 측면을 표현하는 신뢰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개념은 그러한 통념과 전혀 다르다.

신뢰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왜 사적 관계와 그 현실만을 표현하고, 사회·정치적 관계와 그 현실은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사적 관계는 도덕적일 수 있어도, 사회·정치적 관계는 철저하게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사회체제의 성격은 언어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규정하는 요소다. 사회체제의 기본성격이 계급적 적대성으로 규정되어 있다면, 그러한 사회체제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도 계급적 적대성에 의하여 규정을 받게 된다.

계급사회의 적대적 모순관계에 의하여 규정되는 사회·정치적 현실 속에서는 신뢰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러한 적대적 모순관계를 극복·청산한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정치적 현실 속에서는 신뢰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있고, 또 성립되어야 마땅하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관계를 도덕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신뢰와 사랑이 실현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관계에 신뢰와 사랑이 없다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던 계급사회의 적대적 모순관계 속에서 자기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단지 사적 관계와 그 현실만을 표현하는 데 한정되었던 신뢰와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주체의 사회주의가 실현됨으로써 사회·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지도자, 국가수반과 대중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계급독재의 관계로 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수령과 대중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주의 체제가 계급적 모순을 청산·극복한 체제라는 데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는 계급적 모순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계급독재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수령과 대중의 관계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되는 것이다. 사회정치적 생명체 안에서 모순과 대립성이 발생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 까닭에 수령과 대중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계급독재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진리를 부정하는 궤변이며 사회주의 체제가 계급적 모순을 지닌 체제라고 주장하는 궤변이다.

수령과 대중의 관계에 관한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왜곡선전 가운데는 이른바 ≪수령 무오류설 비판≫이라는 것도 있다. 그들의 왜곡선전에 의하면, 수령은 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는데, 수령에게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수령 무오류설≫은 오류라는 것이다.

수령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어디까지나 수령과 대중의 관계에 관한 사회·역사적 문제인데,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수령 무오류설 비판≫은 수령에 대한 인식을 사람이냐 신적 존재냐 하는 신학적 비판의 문제로 끌어들임으로써 자가당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수령은 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의미한다. 사회적 관계를 떠난 개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이므로, 수령이 사람이냐 신적 존재냐 하는 문제의식은 성립될 수 없다. 수령은 대중과의 사회적 관계를 떠나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다.

이처럼 수령에 대한 인식문제를 이미 파탄된 관념론의 극치인 신학문제로 설정하였으므로, ≪수령 무오류설≫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궤변이다. ≪수령 무오류설≫은 실제로 신학학설의 변종이다. 그것은 근대 개인주의에 기초한 개신교 신학이 봉건적 전체주의에 기초한 천주교 신학을 비판하면서 제기하였던 현대판 ≪교황 무오류성 비판≫인 것이다.

수령이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인가 아니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자들은, 대중이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인가 아니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해괴망측한 질문을 제기하는 관념론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사회정치적 생명체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허무맹랑한 물음을 제기하는 관념론에 빠져있는 궤변가들이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수령 무오류설 비판≫은, 수령의 위대성을 신적인 전지전능성의 문제로 슬쩍 바꿔놓으면서 대중과의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에서 수령이 지니고 있는 지위와 역할을 왜곡하려는 조잡한 술책이며 파탄된 관념론의 잔해다.

인민대중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힘, 곧 자기의 자주역량으로 사회·역사를 창조하고 변혁하는 위대한 존재이며, 수령은 인민대중을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시킴으로써 그들을 사회·역사를 주체의 요구대로 개조·변혁하는 창조자, 변혁자로 일으켜 세우는 위대한 존재다. 수령이 위대하므로 그와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인민대중도 위대한 존재로 된다.

물질세계를 초월한 어떤 신적 존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떠드는 궤변에 매달려있는 관념론자들은 신적 존재의 전지전능을 설교하면서 혹세무민하고 있지만, 무한하고 영원한 물질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 가장 힘있는 존재로 등장하여 물질세계의 참다운 주인으로 된 것은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가 발휘하는 위대한 생활력은 산도 떠옮기고 바다도 메울 수 있다. 물질세계는 그 통일체의 요구대로 개변되고 있다. 그 통일체의 위대성은 인류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영도하는 영생불멸의 위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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