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18일(금)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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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선언과 디마고지, 기회주의로의 변질 - 사회당 비판 (2)

대표집필자 최성원

통일여명 편집국 해설

 

(2) ≪반조선로동당 선언≫은 독설과 궤변의 디마고지다

1)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사회당 지도부의 사실인식

사회당 지도부는 당당하게 말한다. ≪반조선로동당 선언을 통하여 사회당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사회당이 지향하는 사회가 지난 20세기의 ≪국가사회주의≫일 수 없다는 원론적인 수준이 아니다.≫

원론적 수준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들은 ≪반조선로동당 선언의 내용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그 두 가지 내용을 그들의 표현대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민족민주운동진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립되어 있는 ≪수령절대체제≫를 지향해서는 안 되며, 사회당은 그런 체제를 지향하는 운동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고, ≪한국≫ 진보세력에 대하여 지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조선로동당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조선로동당을 반대하는 첫 번째 이유는 위의 주장에 나타나있듯이 명백하다. 그들에 의하면, 조선로동당이 ≪수령-당-인민의 일체의 수령절대체제≫를 만들어냈고, 발전시켜왔으며 오늘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사용하는 ≪수령절대체제≫라는 용어는 그들이 만들어낸 신조어인데, 그들은 그 신조어가 지시하고 있는 내용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체제인 수령절대체제는 조선로동당의 유일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조선로동당이라는 정치세력의 수미일관한 발전에 따라 수립된, 조선로동당 운동의 역사적 완결형태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위의 인용구는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사실인식으로서는 제법 정확하게 표현된 문장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수령, 당, 인민이 일체가 된 수령절대체제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라고 해야 한다. 조선로동당의 문헌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를 말할 때, 대중, 인민, 민중, 인민대중, 근로인민, 근로대중이라는 매우 유사한 용어들, 일상적으로 대충 혼용되고 있는 용어들 가운데 오직 대중이라는 용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다른 용어는 쓰지 않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사회당 지도부는 조선로동당의 핵심개념에 관련한 용어를 인용하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핵심개념에 관련한 용어를 인용할 때, 정확하게 인용하여야 인식의 혼동을 막을 수 있다. 사회당 지도부가 수령절대체제의 핵심개념을 논하면서 이처럼 용어를 부정확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은,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그들의 사실인식이 그리 정확하지 못할 것임을 예고한다.

용어사용이 그리 정확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회당 지도부는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해서 수령절대체제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신조어를 사용하여 사실인식에 접근하려고 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사실인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인식대상에 대한 가치판단까지 내리고 있다는 데서 생겨난다. 더 정확하게 지적하자면, 가치판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치판단이 사실인식을 완전히 압도한다.

2)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사회당 지도부의 가치판단

사회당 지도부의 신조어인 수령절대체제는 어떠한 가치판단을 담고 있는 개념인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최악의 가치판단이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수령절대체제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최악의 사회정치체제라는 것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그 체제는 ≪수령지배체제≫, ≪국가사회주의의 당 독재체제≫다.

수령절대체제가 수령지배체제, 국가사회주의의 당 독재체제라는 사회당 지도부의 주장은 과연 과학적인 사실인식에 기초한 가치판단일까? 필자의 답변은 부정적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가치판단은 가치판단이 아니라, 악의에 가득 찬 독설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이다.

필자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독설과 궤변을 논박하는 것 자체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지를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독설과 궤변을 접한 뒤에 심정적 불쾌감을 느끼고 있을 건전한 상식인들의 정신위생을 위하여 논박하기로 하였다.

일반적으로 독설과 궤변을 토하면서 열을 올리다보면 두뇌기능에 혼란이 발생하여 논리전개가 뒤엉키기 십상인데, 사회당 지도부의 행위도 예외는 아니다. 궤변가와 독설가들에 대한 ≪지나친 친절≫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필자는 논박을 시작하면서 그들의 궤변과 독설을 정리해주고 싶다. 필자가 보기에, 사회당 지도부의 ≪반조선로동당 선언≫이 담고 있는 궤변과 독설은 두 가지 내용으로 정리된다.

첫째,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그들의 궤변과 독설은 그 체제는 수령지배체제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둘째, 조선로동당에 대한 그들의 궤변과 독설은 ≪국가사회주의 당 독재≫와 ≪조선로동당의 반민중적 지배≫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회당 지도부는 위의 두 내용을 어떤 대목에서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보인다. 어쨌든 그것은 악의에 찬 독설,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에 지나지 않으므로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있다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이 그러하듯이, 사회당 지도부도 역시 인식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에서 동의어 반복이라는 수법으로 건전한 상식인의 정신위생을 오염시키려 한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처럼 사회당 지도부도, 수령절대체제가 어째서 최악의 정치체제인가 라는 근본물음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고, 그 체제가 지배체제, 독재체제이므로 최악의 정치체제라고 하는 단순·명쾌한 답변을 내놓는다.

수령절대체제가 최악의 정치체제라는 사회당 지도부의 ≪가치판단≫이 성립되려면, 그들은 자기들의 ≪가치판단≫을 논증해야 한다. 그러한 논증이 없이 수령절대체제는 지배체제, 독재체제이므로 무조건 최악의 정치체제라고 떠드는 것은 어떤 절대악을 관념 속에 상정하고 동의어를 주문처럼 반복하여 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어떤 인식대상이 어째서 나쁜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논증하지 않으면서 그 인식대상은 나쁘니까 나쁘다라는 부정적 가치판단을 반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의어 반복의 순환논법은 논증을 배제한 궤변의 악순환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수령절대체제에 관하여 언급한 문건 그 어디에도 수령절대체제가 어째서 최악의 정치체제인가를 논증하는 내용은 없다. 수령절대체제를 최악의 정치체제라고 이미 전제해놓고 그 체제를 반대하는 독설과 궤변을 끝없이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원래 독설과 궤변을 늘어놓는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사회주의가 어째서 악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논증하지 못 하면서, 사회주의를 악이라고 전제한 적개심을 앞세우고 나서 사회주의는 악이니까 악이다라는 식의 동의어 반복으로 대중심리를 선동한다. 자본가계급의 충실한 앞잡이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선동하는 반공캠페인은 대충 그런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그런데 사회당 지도부의 독설과 궤변에서 드러난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동의어 반복의 대중선동은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자행하는 반공캠페인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조선로동당의 수령절대체제는 악이다라는 사회당 지도부의 대중선동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의 말을 조작했던 박정희 극우파시스트정권의 반공캠페인이 무엇이 다른가! 사회당 지도부는 이미 역사의 쓰레기통에 쳐 박혀 버린 파시스트의 오물인 반공캠페인을 다시 꺼내어 대중심리를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수령절대체제가 최악의 정치체제라는 주장은 가치판단은 고사하고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사실인식마저도 파괴하는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광기 어린 독설과 궤변이다.

3)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는 노동계급의 세계관적 기초와 계급적 관점에서 인식해야 한다

모든 사실인식과 가치판단의 기초에는 철학적 세계관의 문제가 놓여있다. 객관세계에 대한 인식은 철학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성립되고 진행된다. 인식은 헤아릴 수 없이 다종다양한 내용으로 성립되며, 무한히 많은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인식의 근원을 파헤쳐 들어가면 결국 철학적 세계관으로 귀착된다. 현상적으로 보면, 인식의 내용과 형식에는 이러저러한 변형태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근원은 단 하나, 곧 철학적 세계관밖에 없다.

모든 인식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철학적 세계관은 두 개의 상호대립적이며 모순적인 세계관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귀착된다. 즉 노동계급의 세계관이냐 아니면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이냐 하는 근원적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그러한 세계관 인식의 계급적 근원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은폐하기 위하여 농민, 소자산계급, 여성, 지식인, 청년 등 다양한 사회계급·계층의 ≪중립적 세계관≫, 또는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제3의 세계관≫ 따위를 떠들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계급이나 계층의 관점은 세계관적 근원이 될 수 없으며, 노동계급의 세계관 또는 자본가계급의 세계관 두 가지 중에 하나의 세계관에 속해 있는 것이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한 사실인식과 가치판단도 이 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한 인식은 어떤 계급의 세계관적 기초에서 성립되는가? 두 말하면 잔소리가 되겠지만, 당연히 노동계급의 세계관적 기초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한 인식이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적 기초에서 성립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이상자일 것이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노동계급의 세계관적 기초에서 성립되어야 하며, 또한 노동계급의 계급적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적 기초 위에서, 그리고 자본가계급의 관점에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한 인식을 진행하는 경우, 그의 인식은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광기 어린 독설과 궤변으로 흐르지 않을 수 없다.

4) 노동계급의 철학적 세계관과 사회정치적 생명체

김일성주의에 의하면,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수령을 중심으로 당과 인민대중이 단결된 사회·정치체제를 의미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논제로 되는 것은 ≪단결되었다≫는 말의 의미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가 내포하고 있는 단결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집단적 단결이나 사회·정치적 조직화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통일체를 구성하고 있는 3자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세계관적 의미를 내포한다.

만일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김일성주의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라는 철학개념을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김일성주의의 혁명적 수령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김일성주의는 주체의 철학적 세계관, 주체의 사회역사관, 주체의 혁명관이라는 세 개의 거대한 사상적 관점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 체계로 쌓아올린 뒤에, 그 최고의 정점에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철학개념을 정립하였다. 김일성주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새로운 철학개념을 인류사상사에서 최초로 창시하고 완벽하게 해명한 철학적 세계관, 최고로 발전된 혁명이론, 영생불멸의 혁명방도를 자기의 전일적 체계 안에 포괄하게 되었다.

그러면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무엇보다 먼저 ≪생명≫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어떤 신비한 실체가 아니다. 생명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던 근대 이전의 시기에는 생명을 신비한 힘으로 생각하는 신비주의적 오류를 극복하지 못했었다. 생명 신비주의가 생명을 신적 근원으로 생각하는 종교적 세계관의 부산물이었음은 물론이다.

생명 신비주의는 근대에 들어와서도 소멸하기는커녕 이른바 생명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였다. 독일의 쉘링, 쇼펜하우어, 니체, 딜타이, 슈펭글러, 트뢸치, 덴마크의 키에르케골, 프랑스의 베르그송, 스페인의 오르테가 이 가쎄트 등이 퍼뜨렸던 생명철학의 전통은, 인류의 사상을 부르조아 관념론의 탁류로 오염시키려고 하였고, 특히 독일에서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성립을 위하여 복무하였다.

생명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처음으로 성립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견해에 의하면, ≪생명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의 지속적인 물질대사를 그 본질적 계기로 하는 단백질의 존재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은 유기체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이다.

물질세계는 무기물과 유기체로 구별된다. 무기물은 생명이 없는 물질이고, 유기체는 생명을 지니고 있는 물질이다. 유기체는 물질의 생물학적 운동형태의 조직방식으로서, 고도로 복잡하게 조직화된 단백질과 핵산, 즉 디옥시리보핵산(DNA)과 리보핵산(RNA)을 구성요소로 하는 생명체다. 생명체는 물질적 실체이지만, 생명 그 자체는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생명체의 운동형태다. 생명체의 운동은 물질대사, 성장, 번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생명을 통속적으로는 ≪생활력≫ 또는 ≪생명력≫이라고도 부른다.

유기체라는 물질이 존재하므로 생명이 발생한다. 무한하고 영원한 물질세계에 유기체가 출현하기 이전 장구한 기간 동안에는 오로지 무기물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45억-50억 년 전에 생겨난 태양계에 속해 있는 지구의 진화과정에서 유기체가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현대 생물학에서 과학적으로 해명되었다.

사회·정치적 생명이라는 개념은 유기체적 생명이라는 개념과의 대비 속에서 고찰된다. 사람은 유기체에 속하는 생명체지만, 다른 유기체와 질적으로 다른 매우 특수한 생명체다. 사람이라는 특수한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유기체적 생명과 더불어 사회·정치적 생명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사람에게만이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최고로 발전된 유기체가 되는 것이며, 다른 유기체들과 달리 물질세계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무한하고 영원한 물질세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기물과 유기체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오직 사람만이 주체가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며, 물질세계와 주체의 관계를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인식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서양의 언어체계에서는 주체라는 개념과 주관이라는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subject라는 개념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주관이라는 개념은 인식능력의 담지자라는 의미이고, 주체라는 개념은 물질세계에 목적·의식적인 작용을 가하여 물질세계를 자기의 의사와 요구대로 개조·변혁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뜻이다.

유기체적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정치적 생명이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사람의 본질과 사회적 관계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은, 이른바 ≪사회유기체설≫과 같은 조야한 생물학주의의 파탄을 의미한다. 생물학주의는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반영하는 기계적 관념론의 한 유파이다. 생물학주의는 어리석게도 생물학적 개념들을 가지고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려 하면서, 사회구조와 인간유기체 구조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사회·역사가 생물학적 법칙에 의하여 변화·발전한다고 떠드는 궤변이다.

그런데도 사회·정치적 생명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기초하여 성립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관한 철학이론을 생물학주의의 ≪유기체설≫이라고 우겨대는 궤변가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수령을 근로인민대중의 최고 뇌수라고 표현한 비유를 두고, 마치 그 비유가 ≪유기체설≫의 논거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그들의 궤변은 유기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에 대한 개념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함이 빚어낸 우스꽝스러운 촌극이다.

인류가 발생하기 이전의 물질세계에는 주체가 없었다. 무기물과 유기체만이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발생 이후에 비로소 물질세계는 주체에 의해서 변화·발전되는 질적으로 새로운 시대로 전진할 수 있었다. 이것이 김일성주의가 주체라는 철학개념으로 해명한 노동계급의 새로운 철학적 세계관의 진리다.

그렇다면 물질세계에서 주체는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출현하였는가? 이것은 인류사상사 최고의 철학문제다. 이 철학문제는 김일성주의에 의해서 해명되었다. 다시 말해서, 의식성의 발생과 그에 의거한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생에 관한 노동계급의 새로운 철학적 세계관에 의하여 인류사상사에서 최초로 완벽하게 해명되었던 것이다.

이 최고의 철학문제에 대한 김일성주의의 해명을 이해하려면, 먼저 의식과 의식성이라는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서양의 언어체계에 자주성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성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용어도 없다. 그래서 서양의 언어체계에서는 의식성과 의식을 동일하게 consciousness라는 용어로 표기한다.

일찍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노동계급의 투쟁과 그 전위당의 영도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를 해명하면서 의식성(Bewusstheit)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 경우에 의식성은 자연발생성(spontaneity)라는 개념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자연발생성에 의하여 발전하는가 아니면 노동계급의 전위당의 지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의식성에 의하여 발전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 문제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자연발생성을 지니고 있지만 의식성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의식성은 노동계급의 전위당에 의하여 영도된다는 레닌의 이론에 의하여 해명되었다.

이처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의식성이라는 개념과 김일성주의의 의식성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해명하고 있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김일성주의에서 사용하는 의식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고, 의식이라는 개념만을 사용하였다. 그에 비하여 김일성주의에서는 두뇌기능으로서의 의식이라는 개념과 사람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의식이라는 개념을 구분하고, 후자를 의식성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에서 사람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의식성이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그 철학이 사람의 본질적 속성에 대해서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논점이다.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면, 의식은 그 자체가 물질이 아니며, 레닌이 지적한대로, ≪인간의 뇌라고 하는 매우 복잡한 물질의 기능≫이다. 의식은 인간두뇌의 기능이라는 것, 이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이 인류사상사에서 처음으로 해명한 진리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식이 인간두뇌의 기능이라는 진리는 생물학의 진리이지 철학적 세계관의 진리가 아니다. 의식이 인간두뇌의 기능이라는 진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의식을 물질과 대립시켰던 관념론과 형이상학을 타파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던 특정한 시대에 한정되어 사상사적 의의를 지녔던 것이었다. 그러나 관념론과 형이상학이 타파되고 변증법적 유물론이 확립된 이후의 시대에 오면, 의식이 인간두뇌의 기능이라는 진리는 더 이상 철학적 의의를 지니지 못하게 되며 개별과학의 진리로 남게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새로운 철학적 세계관의 문제는, 의식기능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의식이라는 기능은 장구한 자연사적 진화과정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다고 해명하였다. 의식은 진화의 산물이며, 고도로 발달된 물질인 인간두뇌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그러한 해명이 오류이었음을 논증한 것은 김일성주의였다. 김일성주의에 의하면, 의식기능을 수행하는 고도로 발달된 신체기관인 두뇌는 진화의 산물이지만, 의식기능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두뇌라는 신체기관이 장구한 진화과정을 통하여 고도로 발달되지 못했다면 의식기능이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 명백하지만, 두뇌라는 신체기관을 원인으로 하여 의식기능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의식기능은 두뇌라는 신체기관을 통하여 발생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의식기능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였는가? 의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성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였다는 김일성주의의 명제에 의하여 인류역사상 최초로 해명되었다. 의식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의식기능이 두뇌라는 고도로 발달된 신체기관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이다. 의식은 인간두뇌의 특성이 아니라 의식성의 산물이다.

의식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성된 것으로서, 사람의 본질적 속성이다. 의식성은 ≪사람이 사회적 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사회력사적 과정에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회적 속성≫이다. 의식성은 자연적, 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속성이다. 이 의식성을 기반으로 하여 자주성과 창조성이 형성되고 발전된다.

그러므로 의식성은 사회적 관계를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며, 두뇌는 바로 그 의식성에 의하여 의식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없다면, 아무리 발달된 두뇌를 가지고 있더라도 의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의식기능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

자연사적 진화과정 속에서 상대적으로 덜 발달된 두뇌를 가진 포유류 고등동물들과 고도로 발달된 두뇌를 가진 현존인류 사이의 차이는 두뇌의 구성요소와 결합구조가 어느 정도로 발달하였는가 하는 생리기능적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차이, 다시 말해서 사회적 관계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차이다. 이것은 진화과정에서 생겨나는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자연과 사회·역사 사이를 갈라놓는 질적인 차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람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서 이러한 질적 차이를 간과하였다.

그렇게 되었던 까닭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자연, 사회·역사, 사유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운동법칙을 해명하였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자연의 운동과 사회·역사의 운동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질적인 차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 양자를 동일한 운동법칙으로 인식하는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다.

자연사적 과정은 합법칙적인 발전과정, 곧 진화과정이다. 자연은 객관적인 운동법칙에 의하여 변화·발전한다. 사회·역사적 과정도 역시 합법칙적인 발전과정이다. 그렇지만 사회·역사적 과정은 자연사적 과정이 아니라 주체의 목적·의식적 작용을 중심으로 하여 변화·발전한다. 물론 사회·역사에도 자연의 객관적인 운동법칙이 작용하고 있으나, 사회·역사적 운동은 어디까지나 주체의 목적·의식적 작용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된다. 그리하여 김일성주의는 ≪사회·역사적 운동은 자연의 운동과 구별되는 자체의 고유한 합법칙성을 가진다≫는 명제를 성립하였던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고유한 합법칙성을 알지 못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자는 물질세계 일반의 보편적 법칙에 의하여 동일하게 해명된다. 레닌의 표현을 빌리면, ≪유물론 철학은 역사의 영역, 사회의 영역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은 물질세계 일반에 관한 철학적 원리를 사회·역사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세계 일반의 철학적 원리를 사회·역사의 영역으로 확장해서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법칙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물질세계 일반의 합법칙성이 사회·역사의 영역에서도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사회·역사적 운동은 물질세계 일반의 합법칙성에 따라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목적·의식적 작용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회·역사적 운동법칙과 물질세계 일반의 운동법칙을 동일한 것으로 보게 되면, 자연사의 진화과정과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이 동일하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이 사회·역사적 운동의 고유한 합법칙성을 알지 못하고 물질세계 일반의 운동법칙과 혼동하였던 오류는, 1961년부터 수년 동안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던 철학논쟁에서 노정되었다. 이 철학논쟁은 자연사의 진화과정과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의 관계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해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결국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해명시도는 과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관계라고 규정한 ≪결론 아닌 결론≫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에서 그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중반에 일부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은 ≪실천≫이라는 철학개념을 도입하여 그 오류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물질이라는 철학개념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철학개념을 철학적 세계관을 해명하는 중심범주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도도 역시 실패하였다. 물질-의식의 관계문제에 대한 유물론적 해명을 객관적 실재(자연과 사회·역사)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운동법칙, 발전법칙으로 정식화하였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에 ≪실천≫이라는 철학개념을 도입한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이 물질-의식의 관계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제기하였던 것은, ≪의식≫을 물질에 대립하는 실체인 것처럼, 또는 물질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궁극적인 실체인 것처럼 떠들어왔던 낡아빠진 궤변인 관념론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사상투쟁에 의하여 물질-의식의 관계문제가 유물론적으로 해명됨으로써 관념론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그러나 실천이라는 개념은 물질에 대한 관계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성립될 수 있는 철학개념이 아니다. ≪실천≫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작용이다. ≪실천≫은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 물질세계에 가하는 목적·의식적인 작용이므로, 물질-의식의 관계문제를 물질-실천의 관계문제로 대체하고 그로부터 철학적 세계관을 해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이 사회·역사적 운동의 법칙을 해명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던가? 물질-의식의 관계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의 원리변증법적 발전의 원리를 가지고 정립하였던 철학을 넘어서야 했었다. 그와 함께 철학의 새로운 근본문제를 따로 설정하고 새로운 철학적 원리를 가지고 철학적 세계관을 해명해야 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질-의식의 관계문제는 유물론 대 관념론의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관념론을 타파하기 위한 사상사적 의의를 가진 문제였으며, 그 자체가 철학적 세계관을 해명하는 철학의 근본문제는 아니었다. 물질-의식의 관계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해명은 관념론을 타파하였지만 철학적 세계관을 정립하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인류사상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철학적 세계관의 문제는, ≪주체≫라는 새로운 철학개념을 제기하고 주체의 철학적 원리를 가지고 철학적 세계관을 해명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 문제는 세계-사람의 관계문제를 ≪철학의 새로운 근본문제≫로 설정한 뒤에, 주체를 중심으로 물질세계를 인식하고 세계와 사람의 관계문제를 해명하는 주체의 철학적 원리에 의하여 독창적으로 해결되었다.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의 철학적 원리≫에 의하여 완벽하게 해명되었다. 이로써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은 인류사상사에서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철학적 세계관으로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가리켜 철학적 세계관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김일성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은 철학적 세계관이 아니며, 단지 철학적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한 철학적 전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적 세계관과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이 병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전제로 삼고 있는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만이 존재한다. 김일성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적 원리를 계승하고 그 미완의 한계를 발전시킨 사상이 아니다. 김일성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전제로 삼고 있는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사상이다.

김일성주의의 새롭고 독창적인 철학적 세계관은 ≪사람을 위주로 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 세계에 대한 관점과 립장을 밝힌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다.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는 물질세계의 유일한 주체인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변화·발전한다. 주체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다. 오직 사회적 존재인 사람만이 육체적 생명과 구별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진다. 사람은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이며 세계의 유일한 개조자≫로 되는 것이다.

자연의 유기체적 생명이 자연계의 현실 속에서 발생하고 생장·소멸하는 것처럼, 주체의 사회·정치적 생명도 어떤 초현실적인 신비한 현상이 아니며,사회·정치적 현실 속에서 발생하고 생장·소멸한다.

유기체적 생명을 지닌 개체는 생장·소멸하지만, 유기체적 생명을 지닌 개체가 속한 종(種)은 생장·소멸하지 않으며 진화과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 물론 자연환경에 대한 순응에 실패한 종은 결국 멸종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닌 개체(개인)는 생장·소멸하지만, 그 개체가 속한 사회·정치적 집단은 사회·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하여 영생한다. 물론 사회·역사의 변화·발전에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회·정치적 집단이 자연계의 멸종현상처럼 소멸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사회·정치적 집단의 생명이 자주성이라고 하는 철학명제가 성립된다.

사회·정치적 생명은 개체(개인)를 포함하는 사회적 집단이 지니고 있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으로 존재한다.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되고 발전해 가는 근본원리인 집단주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원리에 기초한 이념체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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