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4일(금)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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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과 전민항쟁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회고록에 나오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전민항쟁 사상영도를 회고록의 시간과 권별 순서를 따라가며 살펴본다.

1권

≪그때 나는 우리 나라의 구체적 현실과 사회계급적 제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무장한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하자면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하며 노동자, 농민, 민족자본가, 종교인을 비롯한 모든 반일애국역량을 반일의 기치하에 묶어세워 투쟁에 불러일으키고 파쟁이 없는 새로운 혁명적 당을 창건하여야 한다는 투쟁방침을 확정하였다.≫(철창속에서, 세기와 더불어 1권)

2권

≪우리가 믿을 것은 인민대중의 힘밖에 없다. 2천만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세워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혈전을 벌이자.≫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웨침이 자주 울리었다. . . .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애국심이었고 젊은 혈기뿐이었다. 우리가 3-4년안팎이라고 한 것은 일본의 힘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애국심이 그보다 더 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담보가 있었다면 그것은 2천만 민중의 힘이었다. 2천만을 잘 훈련시켜 도처에서 들고일어나 일본군경들을 족치면 나라를 독립시킬 수 있으리라는 배심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장투쟁을 본때있게 해나가자면 대중적 지반을 잘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로부터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대한 구상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3.1인민봉기에 호응해 나선 군중   내가 조직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화성의숙시절이라면 민족의 힘을 처음으로 느끼고 뇌리에 새겨둔 것은 3.1인민봉기 때였다. 내가 인민들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을 묶어세우고 그들의 힘에 의거하여 혁명을 하겠다는 결심을 품은 것은 길림시절이었다.

2천만의 총동원으로 이루어지는 거족적인 항전이 없이는 식민지노예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 .

우리는 카륜회의 후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우리가 그 회의에서 내놓은 노선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적들은 우리는 ≪창해일속≫이라고 하였지만 우리의 뒤에는 무궁무진한 힘을 가진 인민의 바다가 있었다. 우리가 무슨 노선을 내놓기만 하면 인민들은 그것을 쉽게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며 우리 대오에 수천 수만 명의 아들딸들과 형제자매들을 보내주면서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도와주었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만주는 범의 굴로 되었다. 이 굴에서 일본제국주의라는 범을 잡아야 한다. 이제는 무장을 들고 투쟁할 때가 되었다. 이런 때에 싸워서 결판을 짓지 못하면 우리는 영영 사람구실을 못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일어서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였다.

일제는 전쟁승리를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통치를 강화하고 전쟁물자보급을 위한 경제적 수탈에 미쳐날뛸 것이다.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은 극한점에 달할 것이며 조선민족의 반일기운은 고조될 것이다. 우리가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면 인민대중이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적극 지지성원해 줄 것이다.

918사변 피바다에 잠긴 동북 중국의 수억만 인민대중도 거족적인 반일항전에 떨쳐나설 것이다.≫(9.18사변, 세기와 더불어 2권)

10여 만명의 간도농민들은 1931년 9월부터 그 해 말까지 일본군경들과 반동군벌의 야만적인 탄압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피어린 투쟁을 벌이었다. . . .

추수투쟁은 농민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 투쟁을 통하여 동만지방 인민들은 신심을 얻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투쟁의 승패가 대중자신의 불굴의 의지와 지도방법에 결정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깨닫고 추수투쟁을 승리에로 인도한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을 경이적인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그들의 주위에 굳게 결속. . . .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정당하고 분별있는 시기적절한 폭력만이 그것을 틀어쥔 사람들에게 승리를 기약해줄 수 있다. 오직 그런 폭력만이 사회를 개조하고 역사발전을 추동하는데 참답게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런 폭력만을 지지할 뿐이다.

문제는 대중을 어떻게 동원하고 조직하며 지휘하는가 하는데 달려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하나의 모범을 창조해놓은 셈이었다. 추수투쟁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고 평화적 방법과 폭력적 방법을 적절하게 배합하면서 시종일관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적을 피동에 몰아넣은 독특한 투쟁이었다. . . .

나는 추수투쟁을 지도하면서 무장투쟁에 대한 구상을 계속 심화시켜나갔다. 투쟁속에서 발현되고 있던 동만인민들의 대중적 영웅주의와 불굴의 투쟁정신은 새로운 단계의 혁명노선을 모색하고 있던 나를 무한히 고무해주었으며 우리가 일단 무장을 잡고 일제와의 혈전을 벌이게 되면 대중이 반드시 우리를 지지성원해나서리라는 확신 을 가지게 되었다.≫(무장에는 무장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3권

≪(그렇다. 인민이 싸운다면 싸우는 것이고 인민이 이긴다면 이기는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인민의 의지에 달려 있으며 인민을 얼마나 잘 동원시키는가에 달려 있다.) . . .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도

나는 우리가 벌이게 될 소왕청방위전투는 유격구의 남녀노소가 다 동원되는 전민항전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전민항전이라는 이 규정속에는 2년째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군대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유격근거지의 인민들에 대한 최대의 믿음이 담겨져 있었다. . . .

전민항전을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게 된 배경에는 인민의 힘에 대한 이런 타산이 적용하였다.

이 타산은 살아도 유격근거지에서 살고 죽어도 유격근거지를 베고 죽는다는 각오를 가지고 어떤 경우에도 군대와 혼연일체가 되려는 인민의 의사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인민을 최대한 동원한다면 그것은 무서운 힘으로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치백노인이 나에게 귀뜸해준 유격대의 예비였다. 아니 유격구의 인민은 우리가 의거해야 할 예비정도가 아니라 가장 믿음직한 주력군이었다.

우리는 적의 역량이 분산되어 있을 때에는 힘을 합쳐 습격소멸하고 적이 역량을 집결하여 쳐들어올 때에는 분산하여 도처에서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종래의 전술적 원칙을 다시금 확정하고 소왕청 관내 전체주민들에게 전민항전을 호소하였다.

유격구인민들은 그 호소를 받들고 조직별, 계층별로 격전준비에 한 사람같이 떨쳐나섰다. . . .

이런 인민의 지지와 후원이 없었더라면 우리 유격대는 적의 대≪토벌≫을 격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마촌작전의 승리는 군민일치의 열매이며 인민항쟁의 결실인 것이다.≫(마촌작전, 세기와 더불어 3권)

4권

자주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민족대단결을 바탕으로 하는 전민항쟁에 있고 민족대단결이 자력독립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일찍부터 주장해 온 사상이었다. . . .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결합되어 전국적 범위에서 보다 조직성 있고 체계성 있게 빨리 발전하게 되었으며 모든 반일역량을 나라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 . .

조국광복회창립대회

조국광복회 창립은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꾸준히 키워온 우리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노력의 위력한 산물이었다. 그것은 우리 인민이 민족자체의 힘으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해 나갈 의지를 다시금 엄숙하게 선포한 역사적인 계기로 되었으며 항일무장투쟁을 기본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떠밀어가는 전환점으로 되었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5권

조국광복회 장백현 위원회 위원장 리제순    ≪그는 국내인사들 가운데서 해외의 무장투쟁과 국내정치투쟁의 불가분리성과 일원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공리공담의 울타리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실현하였을 뿐 아니라 혁명군과의 연계를 성사시킨 다음에는 우리의 노선을 관철해 나가는 길에서 생명까지 바친 선각자, 투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이제순, 세기와 더불어 5권)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하는데서 우리가 중요하게 내세운 전략적 과업은 한편으로는 국내에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총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믿음직한 책원지, 비밀거점을 꾸리는 것이었으며 다른 편으로는 강력한 정치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을 마련함으로써 자력광복을 위한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국내에 강력한 정치적 역량을 꾸리는 사업은 조국광복회망을 확대하여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굳게 묶어세우는 것과 함께 국내에 강력한 당조직망을 꾸림으로써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항일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핵심역량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아 벌이려고 하는 모든 정치적, 군사적 활동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적인중심고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 . .

국내혁명운동을 더 높은 단계에로 추켜올리자면 조선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적인 지도세력으로 등장한 인민혁명군의 조선경내에로의 본격적인 정치군사적 진출국내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방조가 필요하였다. . . .

우리앞에는 이러한 요구에 민감하게 호응할 수 있는 실천대책이 필요하였다. 그 대책 중에서도 선차적인 것이 바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 . .

그래서 나는 혁명이란 공산주의자들 몇 사람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이 총동원되어야 우리 혁명은 승산있는 혁명으로 될 수 있다 . . .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 조선민족해방동맹 책임자 박달    ≪우리가 말하는 민족의 개념속에는 노동자, 농민 뿐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창조적 노동을 사랑하고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사랑하는 각계각층 군중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총동원의 기준이며 조국광복회 입회기준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준에 기초하여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다 동원해야 합니다. 외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하며 또 이룩할 수 있다는 자주독립사상에 기초한 민족의 총동원만이 조선의 운명을 칠성판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 . .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잘 움직여서 반일역량을 더 많이 집결시키며 폭동적 진출에로 나갈 수 있는 차비도 잘 갖추어놓아야 하겠습니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항일혁명의 주력을 담당했던 조선인민혁명군은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를 책임진 당건설의 주도적 역량으로 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영도적 기능과 역할이 높아지는 가운데 활발히 조직전개된 당건설사업은 무장투쟁을 정치적으로 강력히 뒷받침하는 한편 그에 대한 당적 영도와 대중적 지반을 강화하고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가는 강력한 추동력으로 되었다. . . .

이것은 항일혁명투쟁에서 우리가 이룩한 또 하나의 크나큰 전취물로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은 후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지구에서 얻은 군사작전들에서의 승리에 못지 않은 정치적 승리였다. 당조직건설을 위한 우리의 피어린 투쟁은 조국해방을 앞당겨오는 힘있는 추진력으로 되었을 뿐 아니라 자주적인 당창건위업을 빛나게 완성할 수 있는 강유력한 기초로 되었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얼마전에 나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후신 이라고 할 수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공포하였다.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나와서 박인진과의 제휴를 성사시키던 1930년대에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조국광복이 지상의 대과제였다면 20세기가 다 저물어가는 오늘은 분단조국을 통일조국으로 만드는 것이 절대의 종지로, 이상으로 되고 있다.≫(민족종교 천도교를 두고, 세기와 더불어 5권)

인민의 지지를 떠난 군대가 결코 강군으로 될 수 없으며 싸움에서 승자로 될 수 없다는 것은 항일혁명의 전 기간 우리가 뼈에 사무치게 체험한 진리이다.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의 나날에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시종일관하게 주장해왔다. . . .

간판에 ≪인민≫자가 있어도 행실이 좋지 않고 군풍이 문란하면 인민은 그런 군대를 곱게 보지 않는다. 인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대하며 인민의 이익을 진정으로 옹호보위하고 인민의 생명재산을 진정으로 지켜주는 군대만이 인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받을 수 있다.≫(인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세기와 더불어 5권)

6권

조국광복회10대강령친필원고백두산기슭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조국광복회건설운동은 만주전역과 삼천리 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길처럼 거세차게 번져갔다.

나라와 인민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구절구절은 민족의 넋에로 새로운 활력을 심어주고 삼천리 온 강토가 광복열망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민족주의자들, 노동자, 농민과 더불어 지식인, 청년학생, 수공업자, 종교인, 민족자본가를 포함한 애국적인 온 겨레가 하나의 광복전선에 합세하였다. . . .

북만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사업에 대하여 말할 때 김책의 노고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책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입수하자 그 강령을 한 자 한 자 목판에 새겨가지고 수백부나 찍어냈다. . . .

요하현 삼의툰의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격문을 발표하여 우리의 조국광복회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들은 그 격문에서 ≪제군들이여! 조국을 잊지 말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방당파를 불문하고 사소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반일을 하는 동포들은 모두 단결하여 반일공동전선에 매진하자. 일반동포들은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무기 있는 사람은 무기를, 노력 있는 사람은 노력을 조국독립을 위한 반일전선에 바치라.≫고 호소하였다. 북만사람들의 이 호소는 우리의 목소리와 일치하였다. 남만의 전우들도 같은 목소리로 말하였다.≫(삼천리 방방곡곡에, 세기와 더불어 6권)

≪이 힘을 가지고 국내에 나가면 못해낼 일이 없었다. 백두산에 틀고앉아서 낭림산에도 1개 사단, 관모봉에도 1개 사단, 태백산에도 1개 사단, 지리산에도 1개 사단 하는 식으로 사방에다 무장부대들을 파견해서 근거지를 건설하고 적들을 연거퍼 답새기면 조선반도를 죽가마처럼 끓게 할 수 있었으며2천 300만 조선민족을 전민항쟁의 마당으로 모조리 불러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자신의 힘으로 조국해방의 숙원을 달성할 수 있는 대통로를 열어놓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남호두와 동강, 서강 등지에서 열린 일련의 회의들에서 거듭되는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민족사의 요구, 항일혁명발전의 총화 . . .

보천보전투는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민족적 독립과 자주권을 부활시키려는 우리 인민의 혁명적 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을 내외에 널리 보여주었다. . . .

보천보전투_무장을 위하여    그리고 조국인민들로 하여금 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항일혁명의 마당에 거족적으로 달려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일사천리로 내밀 수 있는 분위기를 지어주었다.≫(보천보의 불길(1)(2), 세기와 더불어 6권)

≪이 회의에서 논의된 문제들 가운데서 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중일전쟁에 대처하여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튼튼히 꾸리고 적배후교란작전을 강화하며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주요한 방도의 하나로서 백두산서남부일대와 국내에 더 많은 지하조직을 내올 데 대한 문제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공작소조들이 낭림산 줄기를 이용하여 혁명근거지를 꾸리며 국내도처에 생산유격대와 노동자돌격대를 조직할 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 . .≫(새로운 정세를 맞박아, 세기와 더불어 6권)

≪중일전쟁발발 후에 새로운 정세는 전민항쟁준비를 절박하게 요구하였다. 우리는 힘을 미리 길렀다가 때가 오던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작전에 전민항쟁을 배합하는 방법으로 조국광복을 이룩할 구상을 점차 무르익혀 나갔다.

농민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우리 나라에서 그들의 참가없이는 전민항쟁이 성립될 수 없었다. . . . 올바른 지도가 보장되고 조직적으로 결속만 된다면 농민대중도 거대한 혁명역량으로 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1931년의 추수투쟁 때 이미 체험하였다. 우리는 실지 체험을 통하여 농민대중을 혁명적으로 잘 준비시키기만 한다면 거대한 항쟁역량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 . .

우리는 농조운동과정에 발휘된 농민대중의 이러한 용감성과 대중성, 견인불발성을 매우 중시하였다. 우리가 노동계급과 함께 농민대중을 전민항쟁역량의 기둥으로 본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이었다.

중일전쟁의 개시는 우리에게 전민항쟁준비를 가속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 . . .

나는 농민을 전민항쟁역량으로 준비시키는데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국내에 있는 기성농민조직들을 조국광복회하부조직으로 개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 .

우리는 전민항쟁준비와 관련한 지휘관모임에서 국내의 모든 노조단체들과 농조단체들을 조국광복회하부조직으로 개편하거나 그 영향하에 들데 대한 방침을 채택하였다. 국내의 기성운동단체들을 조국광복회하부조직으로 개편하거나 그 영향하에 둔다는 것은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인 영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 . .

김정숙은 감옥에서 고생을 하고 병까지 만난 이주연을 따뜻이 위로해준 다음 그에게 우리가 내놓은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과 전민항쟁방침을 전달하고 농민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여 전민항쟁역량준비를 다그칠 데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 . .

전민항쟁을 준비하던 나날에 국내에서 우리의 노선을 받들고 희생적으로 싸운 애국열사들은 천이나 만으로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수많은 유명무명의 혁명가들은 우리 공작원들과 함께 전국도처에서 조국광복회산하에 수십 수백 만의 농민대중을 결속시키었다.

농조조직들이 혁명적으로 개편된 후부터 우리 나라 농민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착되었다. 이것은 농민운동의 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되었다. 전국의 농민단체들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을 통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고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농민을 준비시키던 나날에, 세기와 더불어 6권)1937년 9월 전체 조선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

≪1937년 9월 우리는 중일전쟁에 대처하여 전체 조선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많은 정치공작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나 자신도 직접 국내로 들어갈 것을 결심하였다. 노동계급의 대부대가 집중되어 있는 곳에 가서 전민항쟁준비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였다. 첫 목적지는 함경북도 신흥지구, 두 번째는 풍산지구였고 수행성원은 10여명이었다. . . .

9월호소문에서 중요하게 제기한 다른 하나의 문제는 전민항쟁준비의 전략적 방도를 밝혀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호소문에 중일사변은 더욱더 긴장한 성격을 띠고 있다. 종국적 승리가 중국에 있게 되리라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보다 더 유리한 기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유사시에 가장 단호하게 행동하여야 한다, 후방에서 무장폭동과 파괴공작의 실현을 위한 전위적 집행조직으로서 생산유격대와 노동자돌격대를 조직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며 긴요하다, 생산유격대와 노동자돌격대는 자기 조직의 성원들을 동원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며 후방에서 파괴공작을 조직하며 군수공장들과 기타 중요한 기업소들을 방화 및 파괴하며… 전인민적인 항쟁시기가 도래할 때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행동에 합세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일본군대를 완전히 패배시켜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우리의 과업 즉 조선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들을 박아 넣었다.

우리는 9월호소문에서 생산유격대와 노동자돌격대를 중심으로 전민항쟁준비를 확대해나가는 것을 전략적 방침으로 제시하였다. . . .

하지만 노동계급은 동요하지 않고 우리가 내놓은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쳐나갔다. . . . 우리의 노동계급은 9월호소문을 적극 실천하였다.

9월호소문은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고 있던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중일전쟁으로 하여 변화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근로대중속에 깊이 침투하여 그들을 깨우치고 조직하고 궐기시킴으로써 조국광복의 대업을 더욱 성과적으로 이룩해나갈 수 있게 하는 위력한 무기로 되었다.≫(9월호소문, 세기와 더불어 6권)

7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담하게 국내진출을 위해 압록강연안에로의 행군을 단행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우리 혁명앞에 닥쳐온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우리가 조국진군을 하게 된 다른 하나의 주되는 목적은 파괴된 혁명조직들을 복구하고 그것을 확대하자는데도 있었고 당조직건설과 통일전선운동을 더 잘하여 인민들을 전민항쟁에로 불러일으키자는데도 있었습니다. . . .

1무산지구전투에대한신문보도자료 무산지구전투는 보천보전투와 함께 우리가 국내에서 진행한 군사작전들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의의가 큰 전투였습니다. 보천보전투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시위한 전투였다면 대홍단전투는 적들이 전멸당했다고 선전하던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해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강대한 역량으로 자라나 일본제국의자들에게 계속 철추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실지로 보여준 역사적인 전투였습니다. . . .

무산지구전투가 있은 뒤로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국내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은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하는 한 조국광복의 새날은 반드시 오고야만다는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항일혁명의 흐름속에 앞을 다투어 뛰어들었습니다.≫(대홍단전투, 세기와 더불어 7권)

인민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에 자기들의 장래를 전적으로 의탁하게 된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앞두고 조선의 모든 반일애국역량이 신심을 가지고 전민항쟁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홍기하전투를 통하여 우리가 거둔 가장 큰 소득입니다.≫(≪마에다토벌대≫의 종말, 세기와 더불어 7권)

8권

≪돌이켜보면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 뿐 아니라 전반적 조선혁명수행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차지하고 있는 확고한 영도적 지위와 증대되는 핵심적 역할 은 우리가 혁명무력건설을 튼튼히 틀어쥐고 그것을 모든 사업에 선행시키는 원칙을 견지한 것이 천백번 옳았다는 것을 뚜렷이 실증하였습니다. . . .

우리는 1932년 4월에 첫 혁명적 무장력으로서의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그것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확대발전시켰으며 바로 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의거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의 불길을 높여나가면서 전반적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새로운 앙양에로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의 영도와 무력적 담보밑에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도, 조국광복회조직과 통일전선운동의 확대발전도, 전민항쟁 준비도 성과적으로 이끌어나갔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항일혁명시기 우리 혁명의 중추적 핵심역량이며 정치적 향도자이며 민족적 이익의 무력적 담보자였던 조선인민혁명군은 그대로 우리의 군대이자 당이고 정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전략적 단계의 과업을 능히 맡아 수행할 수 있는 주체적 핵심역량이 믿음직하게 준비되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민대중의 의식화, 조직화를 다그쳐 그들을 정치사상적으로 준비시키는 사업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때 조국광복회 산하 회원이 20여 만이나 되었습니다.

국내에는 또한 노동자돌격대나 생산유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조직들이 모체가 되어 도처에서 전민항쟁을 위한 무장부대들을 조직하고 있었습니다.소할바령회의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신던 곳

비조직군중들의 동향도 아주 좋았습니다. . . .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이 이 장기간의 항일혁명과정을 통해 마련한 주체적 역량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인이 되어 최후결전을 벌일 때 남들이 스스로 우리를 도와주면 좋은 것이다, 그래서 동무들, 수준을 두세 등급씩 높일 수 있는가고 물었더니 다들 자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전민을 무장시켜 항쟁에 동원시킬 수 있는가고 물었더니 그것도 해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8권)

≪소할바령회의와 하바로프스크회의는 1940년대 전반기 항일무장투쟁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해주고 조선혁명가들이 조국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면서 다가올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회합이었습니다.≫≫(하바로프스크회의, 세기와 더불어 8권)

≪우리는 국제연합군의 테두리안에서 활동의 독자성을 계속 고수하면서도 의연히 국제적인 벗들과의 단결과 협조를 강화해 나갔습니다.≫(국제연합군을 편성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우리는 항일혁명을 시작한 첫날부터 시종일관 전민항쟁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말한 전민항쟁이란 전민을 혁명화하여 항일혁명에 총동원시킨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온 나라, 온 민족을 망라하는 거족적이고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반일항전으로 나라의 해방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전민을 혁명화하자면 그들을의식화, 조직화해야 하며 전민항쟁으로 일제를 타도하자면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인민을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튼튼히 준비시켜야 한다는 것이 전민항쟁과 관련된 우리의 주장이었습니다.

전민항쟁 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백두산에 틀고앉아 무장투쟁을 압록강연안과 국내에로 확대하면서 조국광복회의 기치밑에 당건설과 통일전선운동, 대중조직건설을 활발히 벌이던 때부터였습니다.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나라의 해방을 이룩할 것을 호소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사실상 전민항쟁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리가 전민항쟁방침을 독자적인 노선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무적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다음부터였다고 봅니다. 전인민적 반일항전문제를 가지고 백두산밀영에서도 회의를 했고 초수탄과 신흥에서도 회의를 하였습니다. 9월호소문은 전민항쟁호소문이라고 이해해도 됩니다.

우리는 백두산에 나와 있을 때 북선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할 데 대한 구상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간백산에 꾸려진 강습소를 통하여 지방조직들에서 단련된 사람들을 뽑아다가 전민항쟁에 필요한 지도핵심들을 많이 길러내는 한편 북부지대를 비롯한 국내의 여러 곳에 반군사조직들을 더 많이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데 큰 힘을 넣었습니다.

국내에 파견된 우리의 정치공작원들은 도처에서 노동자돌격대와 생산유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최후결전의 날이 다가옴에 따라 우리는 전민항쟁을 위한 작전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 .

그 후 우리는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대중단체건설 정형, 그리고 비밀무장조직들의 활동정형을 요해한데 기초하여 조국해방의 3대노선 을 내놓았습니다. 조국해방의 3대노선이라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그에 배합한 전인민적 봉기, 배후연합작전으로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이룩할 데 대한 노선입니다.

그것은 실현할 가망이 충분히 있는 노선이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가망이 있다고 했는가. 민심을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 . .

최후결전을 위한 작전계획의 골자는 우리 주력부대가 신속히 국내에 진출하여 모든 도들을 차지하고 거기서 전투행동을 벌이는 한편 전국에 호소문을 내어 산에 숨어있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집결시켜 무장대오를 조직하도록 하며 여기에 배합하여 전인민적 무장봉기를 일으켜 일거에 적들을 요정내고 나라를 해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승산이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단련된 혁명군대원들을 골간으로 하고 국내의 애국적인 청장년들도 무장대오를 확대한 다음 여기저기서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인다면 우리자체의 힘으로 얼마든지 나라를 해방할 수 있었습니다. . . .

나는 그들에게 전민무장, 전민봉기는 우리의 주관이 아니다, 인민이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인민이 갈망하고 요구하는 것을 구호로 들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 . .

전민항쟁이란 무장봉기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활동거점이 없이는 성사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찍이 전민항쟁과 관련된 노선을 제시하면서 낭림산줄기를 비롯한 큰 산줄기들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의 활동기지, 작전기지, 후방기지, 전민항쟁역량의 무력적 지탱점으로 될 수 있는 비밀근거지들을 꾸리는 사업에 선차적인 주의를 돌렸습니다. . . .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데서 또한 중요한 것은 국내항쟁운동에 대한 통일적 지도를 실현할 수 있는 영도기관을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국내당공작위원회가 결성된 후 우리 나라에서는 각지에 당소조들이 조직되어 대중단체들에 대한 지도를 보장하였습니다. 1930년대 말부터 여러 지역에 산발적으로 꾸려진 당소조들과 반일대중조직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실현할 사명을 지닌 지구당위원회들이 태어나 지역적 영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 .

백두산회는 1942년 여름에 함북도 성진(김책)에서 조직되었습니다. . . .

조국해방단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해방작전에 합세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킬 것을 주되는 목적으로 삼고 있던 적극적인 항쟁조직이었습니다. . . .

국내의 항쟁조직들 가운데서 그 중 규모가 큰 조직으로는 일철비밀결사와 경성제국대학출신들로 조직되었던 무장봉기준비결사를 들 수 있습니다. . . .

우리의 영향밑에서 활동하던 흥남지구의 항쟁조직들은 일제가 극비밀리에 개발해오던 대량살륙무기생산을 파탄시키기 위한 결사적인 투쟁을 벌려 패망할 때까지 끝내 그 개발에 성공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 . .

전민항쟁조직은 일본침략군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 . .

그 형무소에 박달도 있었고 권영벽이랑 이제순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현상이한테 조국해방작전과 관련한 우리의 구상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 . .

조동욱 김삼룡  우리가 파견한 조동욱도 서울에 가서 전민항쟁준비를 잘하였습니다. 그가 만든 6.6동맹이라는 조직은 그 산하에 등산대와 축구단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합법조직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울바닥의 반일조직과도 연계가 깊었다고 합니다. . . .

옥중에서 비밀조직을 뭇고 우리의 전민항쟁방침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한 사람들가운데는 김삼룡이도 있습니다. . . .

그 조직에 망라되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내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우리의 영도를 받아들였고 나중에는 전민항쟁에 합세하였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파견한 공작원들이 서울 한복판에까지 침투하여 콩그룹성원들에게 조국광복회10대강령도 배포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전과도 통보해 주었습니다. . . .

우리 혁명은 1940년대 전반기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앞두고 전민을 빈틈없이 준비시켰습니다. 1945년 8월에 우리 나라에서 적의 통치체계가 왜 그렇게 빨리 허물어졌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전민항쟁조직들이 도처에서 들고일어나 일본사람들이 틀고 앉아있던 통치기관들을 철저히 짓부셔 놓았기 때문입니다.≫(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우리가 수집한 수백 수천 건에 달하는 정찰자료들은 대일작전의 준비와 최후승리에 큰 도움으로 되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이러한 대담하고 폭넓은 정찰활동이 없었더라면 100만 관동군을 격파하는 대일작전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승리적으로 결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1940년대 전반기 조선인민혁명군이 적극적인 소부대, 소조 활동과 꾸준하고 과감한 군사정찰활동으로 대일작전의 돌파구를 피로써 개척하여 일본제국주의를 격멸소탕하는데서 선봉적이며 결정적인 역할을 한데 대하여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대일작전의 돌파구, 세기와 더불어 8권)

민족의 얼을 고수하는 문제와 전민항쟁준비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있었습니다. 민족의 얼을 지키는 문제는 전민항쟁준비의 정신적 기초일 뿐 아니라 그 중요한 일환이었습니다. 민족의 얼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이 없이는 전민항쟁대오에 광범한 애국역량을 묶어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 . .

나는 국내로 떠나가는 정치공작원들에게 . . . 동무들은 전민이 무장을 잡는 것과 전민이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밀접히 결합시켜 전민항쟁준비를 잘하며 학자들, 교육자들, 언론인들, 문예인들을 비롯한 광범한 지식계층속에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여 그들 모두가 민족의 얼을 지키는 불꽃이 되고 총탄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군 하였습니다. . . .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학자들, 종교인들, 교육자들, 문예인들, 언론인들이 전민항쟁조직들에 망라되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반대하여 끝까지 과감하게 싸웠습니다.≫(민족의 얼, 세기와 더불어 8권)

≪민족해방운동선상에 여러 갈래의 반일세력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적들에게 제일 심대한 타격을 가한 것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제일 두려워한 존재도 조선인민혁명군이었고 우리 인민이 제일 큰 기대를 가지고 바라본 무장력도 조선인민혁명군이었습니다.

우리 인민은 일제를 조국강토에서 몰아낼 수 있는 실제적인 군사력은 조선인민혁명군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 . .

김구를 보좌하고 있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보천보전투에서 일제가 녹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환성을 울리며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 .

해외의 민족운동단체들에서 우리의 투쟁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연공의 움직임이 전에 없이 활발해지게 된 것은 우리가 조국광복회를 창립하고 만인이 다 접수할 수 있는 민족공동의 투쟁강령인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발표한 것과도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 . .

격변하는 정세는 국내와 해외에서 활동하는 모든 반일역량이 하나로 결속되어 일제와의 최후결전을 준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수십 년간의 반일투쟁역사는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주의와 당파를 초월한 민족역량의 굳건한 단합만이 조국광복의 날을 앞당기는 지름길로 된다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게 하였습니다.

국내외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하나로 묶어세워 강력한 전민항쟁역량을 꾸려나가는 것은 시대가 우리앞에 부과한 역사적 과제였고 각계각층의 애국인사들과 인민대중의 공통된 염원이었 . . .

여운형은 건국동맹 안에 군사위원회를 내오고 무장투쟁으로 일제의 배후를 교란시키기 위한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이 계획은 우리가 지향하고 있던 전민항쟁노선에도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반일애국역량과의 단합을 위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다그치고 있던 1940년대 전반기에 우리는 국내에 강력한 전민항쟁역량을 꾸리는 한편 일본본토 안에서 우리의 혁명조직이 전민항쟁운동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하는데 특별한 주목을 돌렸습니다.

일본땅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일본에 이미 조직되어 있는 조국광복회조직들과 여러 가지 형태의 반일조직들을 조선인민혁명군이 최후공격작전을 개시할 때 그에 합세할 수 있도록 정비하면서 새로운 조직을 계속 늘여나가는 것이었고 다른 편으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특수공작원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아성에 깊이 침투하여 적들의 군사정보를 정찰함으로써 대일군사작전의 승리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본격화하는 것. . . .

반일항쟁조직은 노동자들속에도 많았습니다. 일본의 주요공업지대인 경빈지구, 판신지구 그리고 북해도나 니이가다 등 조선사람들이 많이 가 있던 곳에 노동자들로 조직된 항쟁조직이 적지 않았 . . .

원동의 훈련기지에 있을 때 우리는 국내와 만주, 일본에 많은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전에 합세할 수 있도록 전민항쟁역량을 잘 꾸렸습니다. . . .

어쨌든 이 모든 정치공작원들은 우리가 제시한 전민항쟁계획에 초점을 맞추면서 일본의 모든 반일역량을 철저히 준비시키기 위하여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 . .

일본땅은 전국에 조밀하게 꾸려진 조선인들의 항쟁조직들에 의하여 분출직전의 활화산우에 놓여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치공작원들과 소조성원들의 적극적인 투쟁에 의하여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 . .

항일혁명의 전 노정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식민지민족해방 투쟁에서는 기본의 기본이 무장투쟁입니다. 무장투쟁을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켜야 인민들도 그만큼 빨리 각성하게 되고 각계각층의 광범한 대중을 제국주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항전에로 쉽게 동원할 수 있습니다. . . .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밑에 일본땅에 꾸려진 전민항쟁조직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실천투쟁을 통하여 민족자주의식을 높이고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는데 기여하였습니다.≫(현해탄너머에서도, 세기와 더불어 8권)

≪논의의 초점은 자력독립과 전민항쟁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한다는 확고한 주체적 입장을 튼튼히 견지해야 한다,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하자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군사적 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고 국내의 항쟁조직들을 잘 준비시켜 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작전을 벌일 때 그에 합세해서 전인민적 항전을 벌여야 한다, 쏘련, 중국의 무장력과의 군사적 연계를 강화하고 쏘련의 전반적 대일작전과의 깊은 연관속에서 협동작전준비를 잘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날 우리가 논의한 요점이었습니다. . . .

평양시와 평안남도에서는 항쟁조직들과 무장조직들이 쏘련군이 입성하기 전에 일본군의 패잔무력을 소멸하고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당조직도 내오고 지방자치기관들도 창설하였습니다. . . .

자료에 의하면 함경남북도를 내놓고도 국내의 항쟁조직들과 무장대들은 8월 중순의 1주일 동안에만도 근 1천개소의 적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나라의 해방은 15성상이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강력한 군사적 타격을 안겨 그것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조선인민혁명군각계각층을 망라한전민항쟁역량의 총동원으로 이룩되었습니다. 우리 군대와 인민의 장기간에 걸치는 항전이 선행되었기에 쏘련의 대일작전은 그처럼 짧은 기간에 결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최후결전의 날, 세기와 더불어 8권)

≪조국이 해방되기 바쁘게 우리 나라 각지에서는 인민위원회들이 조직되었습니다. 국내당조직에 망라되었던 혁명가들과 항쟁조직성원들이 핵심이 되어 도처에서 당단체와 군중단체 조직들도 내왔습니다. 평양과 서울을 비롯한 국내의 주요도시들에는 해내외의 문예인들이 민족문화건설의 새로운 꿈을 안고 집결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은 무장자위대를 조직하고 공장, 기업소들과 탄광, 광산, 항만, 철도 등을 스스로 보위하였습니다. 전민항쟁을 통하여 발양되었던 우리 인민의 구국열은 해방과 함께 건국열로 전환되었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항일혁명 전기간 일관되게 견지하신 전민항쟁노선주체사상과 이민위천의 구현이었으며 항일무장투쟁노선과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 자주적인 당창건노선의 총화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영도아래 조선인민혁명군의 무장투쟁을 핵으로 하는 전체민중의 거족적인 반일항전조선해방을 이룩한 원동력이며 모든 승리의 비결이었다.

≪조선의 해방은 쏘련군이 일본관동군을 격멸하는 유리한 환경에서 우리 인민과 인민혁명군 자체의 역량에 의해 마련된 위대한 결실입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 우리가 조직한 국내의 항쟁조직들과 무장대들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계획에 따라 국내도처에 웅거하고 있는 일제의 침략무력과 식민지통치기구들을 제압소탕하고 나라를 해방하였습니다.≫(최후결전의 날, 세기와 더불어 8권)

영광스러운 항일혁명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시고 개선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우리는 혁명의 길에 나선 첫날 부터 항일혁명의 직접적 담당자인 인민을 교양하고 조직하고 동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결전에 참가한 수십 수백 만에 달하는 항쟁대오는 즉흥적으로 전장에 뛰쳐나온 자연군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러 해를 두고 가꾸어온 조직군중의 대오였습니다. . . .

항일혁명의 전 노정은 인민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고 그들을 의식화, 조직화하여 광복성전의 1선에 내세워준 사랑과 믿음의 역사이며 인민대중자신이 자기의 피와 땀으로써 당당한 역사의 주체임을 과시해온 위대한 투쟁의 창조적 역사입니다. 이 인민인민혁명군의 투사들이야말로 새 조국 건설을 담당하게 될 우리 혁명의 주체였습니다. 인민의 사랑과 지지속에서 인민의 힘을 믿고 인민에 의거하여 투쟁할 때 그 어떤 준엄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으며 그 어떤 어려운 투쟁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찾아낸 귀중한 진리입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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