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3일(목)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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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룡과 이을설

 

서정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 ≪세기와 더불어≫에서 빛나는 수령님의 혁명동지에 대한 해설강좌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열 번째 시간으로 오백룡과 이을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오백룡과 이을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연구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두 동지를 높이 평가하시는 지 깊이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유격구시절부터 오백룡을 혁명가로 육성하시었습니다.

오백룡    회령에서 태어난 오백룡은 왕청현에서 소년선봉대를 거쳐 1932년에 반일인민유격대에 입대한 경력의 혁명가입니다.

≪오백룡은 일찍이 소년선봉대시절에 비지깨권총이라는 자작권총을 가지고 온성에 건너가 세관순사를 쏴죽이고 무기를 탈취해가지고 온 만만치 않은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식솔이 열일곱이나 되는 가정에서 고생스럽게 자라난 그는 어려서부터 대바르고 의협심이 강하여 동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오백룡은 입대 후 적들의 ≪토벌≫에 희생된 부모형제들의 복수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웠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오백룡은 위대한 수령님을 친형처럼 따르며 존경하였으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백룡을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시었습니다.

≪그는 까막눈이었던 자기에게 조선말 자모를 배워준 사람도 김일성이고 처음으로 세상물정을 알게 해준 사람도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나를 친형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

나도 그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백룡이 수령님의 건강과 안전에 필수적인 백마를 보내지 않기 위하여 목재소까지 친 일화를 인상적으로 추억하시었습니다.

≪내가 손때를 묻혀 키운 지휘관이 오늘은 나의 백마를 위해 한 몸을 내대어 목재소를 치고 돌아온 것이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대장동지, 저를 처벌해도 좋고 강직시켜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이 오백룡이 살아 있는 한 백마를 어데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랍니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사료가 많이 장만되면 자기 상관이 백마를 이웃마을로 보내기로 한 결심을 철회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제나름의 판단을 가지고 목재소까지 들이친 오백룡의 저 주관과 뻔뻔스러운 배짱은 사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가.≫(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생각 같아서는 오백룡을 붙안고 ≪고맙소!≫, ≪고맙소!≫하면서 등이라도 두드려 주고 싶었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오백룡은 일제간첩에 의하여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오백룡이 오발사고를 냈을 때 그놈이 적용한 처벌방법은 혁명군대의 규율이나 도덕의 척도로 볼 때 상상조차 하지 못할 비인간적이고 야비한 것이었다. 오백룡에게 처벌로 위만군 한 개 중대가 도사리고 있는 모다니에 가서 토성 한복판에 꽂혀있는 만주국 깃발을 떼오라고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 적구에 내려가 모험을 하다가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는 명령이었다. 전우들은 모두 오백룡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백룡은 유격대 주둔지에서 100리나 떨어진 모다니에 내려가 만주국 깃발을 떼가지고 무사히 돌아왔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전우들이 보증하지 않았더라면 오백룡은 ≪민생단≫의 누명을 쓴 채로 처형되었을 것이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정치지도원은 그 후 간첩이라는 것이 판명되어 오백룡에게 처단되었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오백룡은 자기 삼촌일줄 모르고 혼을 내준 적이 있었습니다.

≪오백룡은 그 대답을 듣고 펄쩍 놀랐다. 자기 삼촌이 조선사람 구실을 못하고 반편같이 행동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자기가 20살이 넘도록 삼촌 얼굴조차 모르고 지내왔다는 사실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라웠다. 오백룡이 아직 철도 들기 전에 오춘삼은 가문을 떠나 타지방에 가서 떠살이를 하였다. 그러다나니 삼촌도 오백룡을 몰랐고 오백룡도 삼촌을 알 수 없었다. 오백룡이 혁명가로 성장하는 사이에 오춘삼은 혁명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되었다. 삼촌은 자기 자신이 혁명에 나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식들이 혁명에 나서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소심하고 비겁한 사나이였다.

오백룡은 삼촌의 따귀를 친데 대하여 몹시 후회하였으나 그것을 사과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 먼 친척을 통하여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 4권)

위대한 수령님께서 대부분의 전우들을 북으로 보내시고 남은 동지들로 백두산기슭에서 새 사단을 결성할 때에도 오백룡은 수령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미혼진을 떠날 때의 우리 일행은 20명도 안되었다. 2명의 나어린 전령병과 오백룡을 포함한 10명의 호위성원들, 김산호와 화룡오지에서 서당훈장을 하다가 우리를 찾아온 ≪대통영감≫, 이들이 내가 거느린 식솔의 전부였다.≫(새 사단의 탄생, 4권)

오백룡은 위대한 수령님을 호위하는 사업에서 어떤 고행도 마다하지 않은 충신이었습니다.

≪경위중대의 초대중대장인 이동학으로부터 4대 중대장인 오백룡에 이르기까지 사령부 호위를 위해 복무한 모든 중대장들이 다 나를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고행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며 나의 명령, 지시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충실한 전우들이었다.≫(경위대원들, 6권)

오백룡은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 명령을 관철하는 투쟁에서 용감하였습니다.

≪나의 총성을 신호로 하여 사방에서 적기관들을 들부시는 사격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왔다. 먼저 이 고장 경찰들의 소굴이며 온갖 폭압과 만행의 아성인 경찰관주재소에 주되는 타격을 안기였다. 오백룡의 기관총이 주재소창문을 향해 사정없이 불을 뿜었다. . . . 주재소에 쳐들어가 ≪애국부인회≫의 이름으로 된 기관총을 노획해가지고 나온 오백룡이 기뻐 어쩔줄 모르던 모습도 꽤 인상적이었다.≫(보천보의 불길(2), 6권)

≪돌격나팔이 울리자 오백룡은 비호같이 달려내려가 적기관총부터 제껴버리었다. 그리고는 내쪽을 향해 노획한 기관총을 힘있게 흔들어 보이었다. 김운신은 몸집이 장대한 적병과의 힘겨운 격투 끝에 척탄통을 노획하였다.≫(지양개군민연환대회, 6권)

오백룡은 특히 고난의 행군시기에 위대한 수령님을 직접 호위한 충신 중의 충신입니다.

≪뒤에서 우리를 추격하는 것은 일본군 토벌대였지만 앞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만주국군대였습니다. 만주국군대는 우리 부대와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즉 약한 고리는 앞에 있었습니다. 나는 오백룡에게 부대를 데리고 앞을 돌파하라, 약한 고리를 답새겨서 조금만 주춤거리면 숨돌릴 틈을 주지 말고 돌격해서 적들의 병영까지 따라가 혼쌀을 내주라고 하였습니다.

오백룡은 대열앞에다가 기관총을 걸고 적들을 한바탕 족친 다음 나팔을 불면서 돌격을 들이댔습니다. 만주국군대는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자 우리가 굉장한 대부대인줄로 알고 지고 있던 배낭이며 짐짝들을 다 내던지고 퇴각하였습니다.≫(고난의 행군, 7권)

오백룡은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 명령을 관철하는데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김철만은 소부대활동기간에도 줄곧 오백룡이 인솔하는 소조에 망라되어 쏘만국경과 두만강을 뻔질나게 넘나들며 반일항쟁역량을 묶어세우기 위한 정치공작과 적의 군사요충지들에 대한 정찰활동을 과감히 벌이었다.≫(총을 쥔 소년들, 6권)

≪우리는 오백룡을 시켜 적들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면서 실컷 골탕을 먹이다가 백석탄으로부터 400-500리 되는 곳에 따돌리게 하고 각지에 소부대들을 파견하여 예비로 저장해두었던 후방물자들과 무기들을 운반해오게 한 다음 밀영에 들어박혀 군정학습을 진행하였습니다.≫(마당거우밀영, 7권)

≪하루는 오백룡이 내 허락을 받고 7도구치기에 내려가서 목재소를 치고 여러 필의 말을 끌어온 적이 있습니다. 식량이 거덜난 때라 우리는 말고기로 끼니를 에우기로 하였습니다.≫(고난의 행군, 7권)

≪그때 김일이네 소부대에는 왕청, 동녕 일대에서 활동할 과업을 주고 오백룡이네 소부대에는 연길, 안도 일대에서 겨울나이식량을 해결할 임무를 주어 떠나보냈습니다.≫(1940년 가을, 8권)

처창즈유격구역 ≪연락원을 만나지 못한 오백룡은 그 후 우리의 행방을 찾느라고 안도땅을 다 뒤졌다고 합니다. 오백룡이 처창즈치기에 당도했을 때는 우리가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 . .

그 후 오백룡소부대도 뒤따라 원동으로 들어왔습니다.≫(1940년 가을,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백룡과 소부대에 대하여 각별히 심려하시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가 묻어두고간 식량과 동복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 바로 그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원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오백룡이네를 생각해서 쌀 두 가마니와 솜옷 몇십 벌을 파묻어두고 갔는데 그것이 그들을 구원해준 셈입니다.≫(1940년 가을, 8권)

오백룡과 그 소부대들은 최후결전을 준비하기 위한 정찰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연길, 화룡, 안도현에서는 오백룡이네 소부대들이, 훈춘과 동녕현 일대에서는 김일, 손장상의 소부대들이, 동녕현과 영안현, 목릉현, 오상현 일대에서는 한인화와 함께 박성철, 윤태홍이네 소부대들이 싸움을 벌이었습니다.≫(소부대활동의 나날, 8권)

≪요새구역과 요새를 정찰하는데서는 오백룡을 조장으로 하고 김철만, 한천추, 김혁철 등을 망라한 정찰조가 특출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오백룡이네 조는 국내정찰임무를 수십 차례나 수행하였습니다.≫(대일작전의 돌파구, 8권)

≪오백룡이네 정찰조는 국내공작과정에 임시비밀근거지들을 많이 개척해놓았습니다. 보로지산임시비밀근거지, 작은가매원임시비밀근거지, 청학산임시비밀근거지 등은 그 조가 개척한 것들이었습니다.≫(대일작전의 돌파구, 8권)

≪오백룡이네 정찰조의 활동에서 특징으로 되는 것은 활동범위가 크고 자료가 매우 과학적인 것이었습니다.

조선남단의 요시지들인 진해, 마산, 부산 일대의 정보들도 오백룡이네가 파견한 정보원들이 걷어들였습니다.≫(대일작전의 돌파구, 8권)

≪대일전쟁전야에 쏘련군대가 작정한 나진, 웅기, 청진 등 동해안지대의 주요항구들에 대한 상륙작전계획은 전적으로 오백룡이네 정찰조가 수집한 자료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그 조가 항구들에 대한 정찰을 아주 대담무쌍하게 하였습니다.≫(대일작전의 돌파구, 8권)

08-22-14오백룡     오백룡과 그 선견대는 최후결전의 날 돌격로를 개척하는데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토리습격전투에 참가하였던 오백룡이네 선견대는 만향고개전투에서도 위훈을 세웠습니다.

만향고개는 적들이 웅기-나진요새를 육로에서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만향고개에서 부대의 전진이 좌절되자 오백룡은 자기네 선견대가 고지의 적화점과 포진지를 까부시겠다고 자청해나섰습니다. 그는 대원들을 데리고 고지에 기어올라 아군의 전진을 막고 있는 화점들을 모조리 까부시고 부대의 진격로를 열어놓았습니다.

쏘련군장병들은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조선빨치산이 제일이라고 하였습니다.≫(최후결전의 날,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백룡을 얼마나 신임하시었는지는 적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적들이 보낸 선물보따리속에는 밀봉한 편지도 한 통 들어있었습니다. 그 편지는 오백룡한테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적들이 오백룡의 이름을 특별히 지명한 것으로 보아 그가 나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오백룡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수령님께 한없이 충직한 오백룡을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나를 위한 일이라면 생사를 가리지 않고 불과 물속에라도 뛰어드는 이 대담무쌍한 소대장의 충직성에 나는 한두 번만 감탄한 것이 아니었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오백룡은 1960년대 초 내무성 부상 겸 호위총국장의 중책을 지니며 자기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오백룡이 호위총국장으로 일하던 1960년대 초에 나는 그와 함께 말을 타고 산책하며 백마에 대한 회고담을 나눈 적이 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으나 어젯날의 유격대 소대장은 백마와 관련된 세부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백마에 대한 추억, 3권)

이을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을설을 소년시절부터 알고 계시었습니다. 이을설의 가정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충심으로 원호한 혁명가정이었습니다.

≪원군운동에 떨쳐나섰던 장백사람들의 군상을 돌이켜볼 때마다 내 눈앞에는 영화동 촌장이며 조직원이었던 이을설의 아버지 이병혼의 강직하고 소박한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물방아소리, 5권)

≪영화동인민들이 벌인 원군운동의 전모를 우리는 이듬해에 이을설을 통하여 상세히 알게 되었다. 그 해에 그는 우리 부대에 입대하였다.≫(물방아소리, 5권)

≪자식들의 심정을 잘 아는 어머니였건만 그들에게 딸기 한 알 선뜻 쥐어주지 못하였다. 아이들이 딸기를 먹으면 혁명군에 바치는 지성이 그만큼 모자라게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물방아소리, 5권)

≪이병혼은 즉석에서 그 제의를 일축해버리고 아들을 조국광복회 분회조직에 넣어 단련시키었다. 이듬해 여름에 그는 아들과 조카를 유격대에 보냈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는 것은 원군정신의 최고표현이었다.≫(물방아소리, 5권)

이을설은 아버지를 닮아 과묵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도 아버지처럼 자랑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의 수고와 관련된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물방아소리, 5권)

이을설은 무엇보다도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가 강한 혁명가였습니다.

≪신입대원은 좀처럼 동료의 호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말로써는 그 대원의 고집을 좀처럼 휘여놓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을설은 그의 몸에서 불에 탄 옷을 강짜로 벗기고 그 대신 그에게 자기의 군복을 입히었다. 그가 이런 선행을 베풀 수 있은 것은 구대원이 신입대원을 돕는 것을 응당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언제인가도 이야기하였지만 이을설은 한 신입대원이 불곁에서 자다가 옷을 태우고 우들우들 떠는 것을 보자 자기 솜옷을 벗어 그 동무에게 입혀주고 무서운 혹한속에서 홑옷을 입고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얼어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동무들이 또 그에게 불보다 뜨거운 동지적인 사랑을 기울여주었기 때문입니다.≫(고난의 행군, 7권)

≪그러나 이을설은 춥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행군을 할 때마다 앞장에서 생눈을 헤치었다. 숙영지에서는 언제나 그가 선참으로 나무를 해오고 천막을 쳤다. 그는 기관총반의 일을 다하고 전우들이 우등불가에 둘러앉은 다음에야 불에 자기의 신발을 말리우곤 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나는 북대정자회의에서 고난의 행군을 총화할 때 이을설을 동지애의 모범으로 내세우고 그의 품성과 동지적 의리를 평가하였다. ≪철혈≫편집집단도 창간호를 내면서 그의 모범을 찬양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이을설은 입대 후 열심히 노력하여 명사수가 되었고 공산당에도 입당하였습니다.

≪소년들을 돕는데서 중대장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열성분자는 김운신이었다. 그는 당조직에서 이을설을 담당하라는 과업을 받았던 것 같다. 짬이 생길 때마다 이을설을 옆구리에 달고 다니면서 조준연습을 시키는 김운신의 모습은 다른 구대원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 덕으로 이을설은 명사수가 될 수 있었다. 훗날 이을설이 공산당에 입당할 때 김운신은 보증인으로 나섰다.≫(총을 쥔 소년들, 6권)

경위대원들과 함께 이을설은 남패자회의 이후 경위중대 기관총 부사수로 있으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호위에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이을설은 남패자회의 후부터는 경위중대 기관총반에 배속되어 기관총 부사수로 있었다. 그날부터 그는 사령부를 보위하는 사업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한평생 손에 총을 잡고 궂은날이나 마른날이나 변함없는 자세로 나를 호위해온 경위대원이었다.≫(경위대원, 6권)

≪이을설은 소년중대시절부터 현재까지 나를 위한 호위사업에 한 생을 바치면서도 나의 뜻을 어기거나 임무수행에 태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자나깨나 오직 자기 수령만을 생각하고 수령의 건강과 신변안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왔습니다.

내가 1939년에 올기강에서 낚시질을 할 때에도 내뒤에서 기관총을 걸어놓고 호위사업을 한 사람은 경위대원 이을설이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특히 이을설은 안도현에서 변절자 임수산이 끌고온 적 ≪토벌대≫의 기습공격이라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걸고 위대한 수령님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었습니다.

강위룡    ≪그날 아침 내가 인적기를 느끼고 진대나무밑에 엎드리면서 싸창을 갈긴 순간은 눈깜박할 사이였다. 그처럼 짧은 순간 식사중에 있던 강위룡과 이을설은 나의 안전을 염려하여 보초소로 뛰어왔다. 먼저 강위룡이 나를 완력으로 진대나무밑에서 끌어내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을설이 경기관총을 휘둘러댔다. 솔직한 고백이지만 나는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이 여기에서 결판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래서 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강위룡이 나를 진대나무밑에서 끌어내려고 모지름을 쓸 때에도 그들이 죽으면 나도 함께 죽으리라는 비장한 생각까지 하였다. . . .

그러나 그 불사신같은 경위대원들은 탄막속에 몸을 통채로 내대고 천신만고하여 나를 사경에서 구원하였다. 적들이 포위환을 좁히며 다가들자 이을설은 수류탄을 뽑아들고 우뚝 서서 ≪이놈들아 덤빌테면 덤벼들라. 너 죽고 나죽고 해보자!≫고 부르짖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서슬푸르고 도고했던지 적들은 비실비실 뒤로 물러났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강위룡은 나를 탄막속에서 완전히 뽑아내었다.≫(경위대원들, 6권)

해방후에도 이을설은 위대한 수령님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습니다.

≪이을설은 해방 후에도 나를 잘 호위하였습니다.

전쟁때 최고사령부주변에 반혁명분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운명과 직결된 극비자료들이 박헌영과 이승엽을 통해 계속 미국사람들에게로 날아갔습니다.

1952년 여름에 이승엽은 졸개들을 시켜 무전연락으로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건지리골안에 미국비행기들을 수십 대나 불러들였습니다. 그 비행기들이 최고사령부주변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최고사령부건물 곁에는 큰 시한탄까지 떨구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있던 집에서 그 시한탄까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때 이을설이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한 다음 당원증을 바치고 목도로 그 시한탄을 메다가 골짜기에 내던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을설은 최고사령부 주변에 잠복해있던 암해분자들과 반동분자들을 모두 잡아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이을설은 무전통신기술을 습득해 많은 무전수들을 키워내었습니다.

박영순 ≪이을설과 박영순은 남야영에 돌아와 많은 무전수들을 키워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북만에서는 1930년대 후반기에 쏘련으로 들락날락하면서 무전기술을 배운 동무들이 있었지만 우리 지대에서는 박영순, 이을설이 임시기지에 들어와서 처음 무전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들이 워로쉴로브에 가서 석 달동안 무전강습을 받고와서 다른 동무들에게 배워주었습니다. 무선통신훈련에는 남대원들인 이종산, 이오송 등과 김정숙, 박경숙, 박경옥, 김옥순, 이영숙, 왕옥환, 이재덕, 이민을 비롯하여 여대원들이 거의 다 참가하였습니다.≫(해방의 날을 그리며, 8권)

이을설은 최후결전을 준비하는 정찰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을설은 그 후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결전이 벌어지게 된 중요한 작전지점들과 일본군대의 기본역량이 배치되어있는 전략적 요충지들에서 소부대공작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그는 소부대에 망라되어 무전기를 메고 왕청현 노흑산일대에 나가 정찰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적들이 노흑산일대에 큰 비행장을 건설하고 수백 대의 비행기들과 수백 문의 대포, 수백 대의 자동차들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어 작전준비에서 큰 지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쏘련사람들도 그 정보의 정확성 여부를 검증하려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부대를 노흑산에 보냈습니다. 소부대성원들은 비행장안에까지 대담하게 뚫고 들어가 거기에 있는 새 비행기와 새 자동차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신형포들이 전부 나무로 만든 가짜라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이을설은 정찰을 끝내자마자 나에게 무전으로 소부대활동 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이을설은 위대한 수령님의 호위임무와 혁명투쟁, 사상투쟁을 통하여 담력있는 혁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을설은 어려서 부모의 슬하를 떠난 한 생을 내곁에서 살아왔습니다. 수십 년동안 경위대원으로 복무하면서 제국주의자들과도 싸우고 대국주의자들과도 싸우고 반동들과도 싸우고 종파들과도 싸우다나니 쓴맛, 단맛도 다 보고 산전수전도 다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 그는 무서운 배짱군으로 자라났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이을설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과의 투쟁도 아주 잘하였습니다.

내가 1956년에 쏘련을 비롯한 구라파사회주의나라들을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부관장으로 사업하던 이을설이 하루는 지금 뒤에서 최창익이랑, 박창옥이랑 노는 꼴이 심상치 않은데 각별히 조심해야겠다고 하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까밝혀놓는 것이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이을설은 김창봉의 군벌관료주의와도 정면으로 맞서 잘 싸웠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이을설은 언제나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와 명령만을 따르며 위대한 수령님께 무한히 충실하였습니다.

≪그 쏘련사람은 다음날에도 이을설을 설복하였습니다. 김일성동지의 허락은 차후에 자기네가 받을터이니 조선으로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국제당의 이름을 빌어가지고 좀 터세를 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을설은 그때 나는 사령관이 준 명령을 집행하기 전에는 어데도 갈 수 없는 몸이다, 지난날 무전기술을 소유한 통신병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아마 당신은 모를 것이다, 그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사령관동지의 명령대로 부대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들이댔습니다.

그때는 원동에 임시로 들어가 있었고 또 아직은 국제연합군이 조직되지 않은 때여서 통합된 지휘체계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이 각기 자기의 독자적인 지휘체계와 질서대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쏘련군사일군이 우리와의 사전협의도 없이 국제당을 걸고 무전강습소를 졸업하고 부대에 돌아가게 되어있는 이을설을 다른 일에 빼돌리려고 한 것은 무리한 일이었습니다.

이을설이 사령관이 준 명령을 집행하기 전에는 그 어떤 임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것은 우리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의 표현이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나는 떠나가는 김책에게 짬이 생기거들랑 고향에 꼭 찾아가보라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최춘국과 유경수, 조정철, 이을설에게도 같은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모두 함경남북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파견지에 갔다가 평양으로 소환되어올 때까지 그들은 모두 고향에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고향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높은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무들은 내가 강선제강소로 갈 때 고향집에도 들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만경대갈림길에 대한 노래를 지어부르고 있지만 사실 항일혁명투사들은 개선 후 누구도 고향에 가보지 않고 건당, 건국, 건군을 위한 기초작업을 하였습니다.

만경대갈림길헌시비 (강선으로 가시는 길에서)

사령관의 명령지시를 관철하기 전에는 고향에 갈 권리도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 투사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개선,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을설의 낙천성과 배짱을 좋게 보시었습니다.

≪다음날 강위룡은 전령병인 전문섭과 이을설 그리고 한창봉을 데리고 산나물을 뜯으러 갔습니다. 네 사람은 저녁녘에야 돌아왔는데 나물은 한 바구니도 채 못되었습니다. 사연을 알아본 즉 풀밭에서 장시간 씨름을 하느라고 나물을 많이 뜯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어 뜯으라는 나물은 뜯지 않고 씨름판을 펼쳐놓게 됐는가고 물으니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꽃향기가 진동하는데다가 폭신폭신한 잔디밭을 보니 고향생각이 절로 나고 봄동산에서 즐겁게 뛰놀던 어릴적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씨름으로 한나절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 .

이을설   내가 강위룡, 이을설, 전문섭, 한창봉 네 대원이 저지른 잘못을 엄중하다고 보면서도 그들에게 주의 이상의 처벌을 주지 않은 것은 그 소행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구김살 없는 낙천성과 배짱을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는 그 자그마한 사건을 겪고 나서 설사 우리가 고난의 행군과 같은 행군을 열백 번한다고 해도 그들은 끝까지 우리를 따를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미래에 대한 낙관, 8권)

이을설은 백두여장군 김정숙동지와 어리신 김정일장군님의 안전과 생활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나와 김정숙, 김정일을 돕는 데서는 이을설이도 역사가 깊은 사람입니다.

해방 후 그가 부관으로 일할 때 아침일찍 일어나서는 경비상태를 돌아보고 우리 집 부엌에서 김정일과 함께 식사를 하던 일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 정도로 이을설은 어린 김정일과 친밀한 사이었습니다.

내가 현지지도를 나갈 때마다 이을설은 김정일을 곁에 앉히고 다니었습니다. 그는 김정일을 언제나 잘 이해해주고 보살펴주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김정일은 부모의 사랑을 한창 받아야 할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까지 겪다나니 그는 어린 동생과 함께 얼마동안 나와도 헤어져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경제를 복구하느라고 내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다나니 그들 남매를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린시절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을 때 부모와 친척들을 대신하여 그를 육친의 정으로 세심하게 보살펴준 사람이 바로 이을설과 같은 나의 전우들이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연회가 끝난 다음 숙소에 가니 지함을 포함하고 있던 이을설이 나를 보자 몹시 당황해하였습니다. 무슨 지함인가고 물었더니 그는 좀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자제분들 생각이 나서 수박 한 개를 마련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함안의 수박은 물동이만큼이나 큰 것이었습니다.

김정일은 그때 그 수박을 받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전쟁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인민들에게도 이런 수박을 맛보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씨를 받아 수박농사를 지어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날 김정일과 함께 받은 수박씨로 이을설은 이듬해부터 우리 집 정원에서 수박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박이 새끼를 쳐서 많이 펴지게 되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을설을 믿고 고맙게 생각하시었습니다.

≪김정일동무가 왜 지금도 이을설을 믿고 고맙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이을설이 부관장으로 있으면서 자기를 따뜻이 돌보아주었기 때문입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께 충직하였던 이을설에게 원수칭호를 수여하시었습니다.

≪이을설은 나를 위해 일생을 바쳐온 것처럼 김정일동무를 위해서도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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