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4일(금)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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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과 선군혁명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회고록에 나오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선군혁명 사상영도도 역시 회고록의 시간과 권별 순서를 따라가며 이해하는 것이 가장 간명하다.

1권

김형직선생님께서 김일성주석님께 물려주신 권총≪≪지원≫의 사상, 3대각오, 동지획득에 대한 사상, 두 자루의 권총, 이것이 내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유산의 전부였다.≫(유산, 세기와 더불어 1권)

≪일제침략자들을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하자면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싸워야 하며 . . .

그때 나는 우리 나라의 구체적 현실과 사회계급적 제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무장한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하자면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하며 . . .≫(철창속에서, 세기와 더불어 1권)

2권

≪우리는 보고에서 무장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벌일 데 대한 문제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기본노선으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첫째가는 과업으로 제기하였다. . . .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무장투쟁만이 가장 철저하고 혁명적인 반일항전으로 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만이 자기의 무장대오에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반일애국역량을 폭넓게 집결시킬 수 있으며 대중의 이익을 정확히 반영한 과학적인 전략전술로 무장성전을 끝까지 책임적으로 전개하면서 전반적 조선혁명을 승리에로 영도할 수 있기 때문. . . .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애국심이었고 젊은 혈기뿐이었다. 우리가 3-4년안팎이라고 한 것은 일본의 힘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애국심이 그보다 더 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담보가 있었다면 그것은 2천만 민중의 힘이었다. 2천만을 잘 훈련시켜 도처에서 들고일어나 일본군경들을 족치면 나라를 독립시킬 수 있으리라는 배심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장투쟁을 본때있게 해나가자면 대중적 지반을 잘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로부터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대한 구상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우리는 무장투쟁준비를 위한 첫 사업으로 고유수에서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였다.≫(조선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2권)

명월구회의가 진행된 장소≪우리는 1931년 12월 중순경명월구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우리가 편의상 ≪겨울명월구회의≫라고 부르는 회의였다. . . .

변화무쌍한 유격전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본무장 투쟁형식이다. 국가가 없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 정규전으로 일제와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 .

우리는 본회의에서 무장투쟁을 위한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는 문제조중인민의 반일공동전선을 형성할 데 대한 문제, 당조직사업과 공청사업을 강화할 데 대한 문제도 토의하였다.

이 모든 것은 유격전을 기본으로 하는 무장투쟁을 벌이는데서 반드시 해결을 요하는 중요한 문제들이었다.≫(무장에는 무장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우리는 우사령과의 담판에 성공함으로써 유격대의 존재와 활동을 합법화하고 우리와 연합하여 일제와의 항전을 벌일 수 있는 동맹군을 가지게 되었다. 담판의 성공은 또한 우리에게 애국애족의 대의를 내세운다면 사상과 이념이 서로 다른 타국의 민족주의자들과도 통일전선을 뭇고 공동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하였다. . . .

1932년 4월 25일 아침

우리는 토기점골 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가지었다.≫(새 무장력의 탄생, 세기와 더불어 2권)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하시는 김일성동지

≪항일전쟁의 길에 나선 우리 부대앞에는 그 당시 아래와 같은 과업들이 제기되고 있었다. 첫째로, 반일인민유격대를 실천투쟁속에서 단련시켜야 하였다. 둘째로, 부대를 질량적으로 급속히 확대강화해야 하였다. 셋째로, 혁명군대가 의거할 대중적 지반을 튼튼히 축성하고 유격대의 주위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묶어세워야 하였다.

우리는 이상의 과업을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를 남만원정에서 찾고 그것을 1932년 한해 동안의 주되는 전략으로 설정하였다.≫(남만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양세봉의 부대가 우리와 손을 잡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독립군이 합작을 이룩한다는 것은 곧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에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정치군사적 통일이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적들에게 큰 위협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합작은 불가능한가?, 세기와 더불어 2권)

≪나는 안도-무송현경 전투결과에 대한 사람들의 반향을 종합하면서 대중에게 우리 민족 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는 신심을 주자면 말보다도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며 실전을 통하여 유격대의 위력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 . .

그들은 무장투쟁도 조직생활을 통해 육성된 핵심들에 의해 수행되며 조직이라는 거대한 저수지가 없이는 무장대오도 조직할 수 없고 더욱이는 그 대열을 늘어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도 역시 9.18사변이 만들어놓은 좌익소아병적인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만일 그때 우리가 이성을 잃고 복수감에 사로잡혀 국민부를 타도하였거나 독립군대원들과 무장대결을 하였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떳떳한 마음으로 후대들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300여 명에 달하는 양사령의 부하들이 엄동설한에 합작의 기발을 들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오는 역사적 화폭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단합의 이념아래, 세기와 더불어 2권)

≪우리는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에서 나타나고 있던 좌경적 편향을 없애고 그들을 항일연합전선에 더 많이 인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자구에서 반일병사위원회를 소집하였다.≫(나자구등판에서, 세기와 더불어 2권)

3권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책원지가 마련된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항일근거지들에서 유격대오를 늘리고 당, 공청을 비롯하여 반제동맹, 농민협회, 반일부녀회, 아동단, 적위대, 소년선봉대와 같은 계층별 조직들과 반군사조직들을 내옴으로써 전민항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보금자리, 세기와 더불어 3권)

반유격구창설의 필요성은 무장투쟁의 실천속에서 더욱 절박하게 제기되었다. 광대한 영역을 사수하자니 힘이 달렸고 힘이 달리는 그 타개책을 빨리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세기와 더불어 3권)

≪나는 구국군과의 합작을 실현한 그때부터 통일전선을 위한 최상의 수단은 주체적 힘이라는 것과 이 힘을 키우지 않고서는 어떤 우군이나 우방과도 연합하여 투쟁할 수 없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혁명의 주체를 튼튼히 하기 위한 투쟁을 일생동안 벌여왔다. . . .

오의성과의 담판과 동녕현성전투의 성공으로 하여 동만의 유격부대들과 구국군부대들, 반만항일세력들속에서 우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의성과의 합작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통일전선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전반적 항일혁명을 추진시키는데서 계속 틀어쥐고 나가야 할 생명선이며 중심고리라는 것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오의성과의 담판, 세기와 더불어 3권)

≪나는 우리가 벌이게 될 소왕청방위전투유격구의 남녀노소가 다 동원되는 전민항전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전민항전이라는 이 규정속에는 2년째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군대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유격근거지의 인민들에 대한 최대의 믿음이 담겨져 있었다. . . .

이것이 바로 이치백노인이 나에게 귀뜸해준 유격대의 예비였다. 아니 유격구의 인민은 우리가 의거해야 할 예비정도가 아니라 가장 믿음직한 주력군이었다.

우리는 적의 역량이 분산되어 있을 때에는 힘을 합쳐 습격소멸하고 적이 역량을 집결하여 쳐들어올 때에는 분산하여 도처에서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종래의 전술적 원칙을 다시금 확정하고 소왕청 관내 전체주민들에게 전민항전을 호소하였다.≫(마촌작전, 세기와 더불어 3권)

≪만일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남의 나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환상에 포로되어 자력갱생할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자력갱생만이 살길이고 조선을 구원할 길이라는 투철한 신념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유격구에는 애당초 병기창이라는 것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나무포연길폭탄과 같은 위력한 무기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밀림속의 병기창, 세기와 더불어 3권)

≪구한국의 군대도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고 괴멸되었다. 내란을 평정할 때는 그렇게도 그악스럽던 군대가 외적앞에서는 대포도 변변히 쏘아보지 못하고 삿대질을 얼마간 하다가 주저앉아버렸다. 우리 나라가 망한 데는 국정이 부패한 데도 있었지만 군력이 쇠약한 탓도 있었다. . . .

1933년 하반기부터 간도에서는 유격대역량을 통합하고 그 지휘체계를 단일화할 데 대한 문제가 중요한 논점으로 상정되었다. 그것은 적의 동기≪토벌≫을 격파하기 위한 마촌작전과 수천 수만 킬로미터의 판도에서 영웅적 방위전이 가르쳐준 교훈이기도 하였다. . . .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과정에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가 새로운 당지도기관으로 출현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는 군대 안의 당조직에 대한 지도와 함께 지방의 당조직들에 대한 지도도 동시에 감당하는 무거운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무력의 담보가 없이는 지방당조직들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우리가 조직한 인민혁명군이 ≪만주인민혁명군≫이나 ≪중국인민혁명군≫이 아니라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으로도 활동한 것은 반만항일을 투쟁목적으로 내세우고 있던 중국동지들에게 있어서도 적합한 것이었다. 결국 동북인민혁명군은 조선인민혁명군으로서의 사명과 함께 중국공산주의자들의 반만항일위업에 이바지하는 혁명무력으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감당하였다. . . .

그들은 동만남만에서 활동하는 우리의 항일무장력을 그 명칭은 어떻든 ≪김일성군≫으로 통칭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조선인민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3권)

1934년 10월 하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내리는 날 왕청, 훈춘, 연길에서 선발된 3개 중대의 역량으로 꾸려진 170여 명의 북만원정대는 뒤틀라즈를 출발하여 노야령을 넘기 시작했다.≫(노야령을 넘어, 세기와 더불어 3권)

≪고려홍군≫이 지나간 고장들에서는 당대열이 늘어나고 공청과 부녀회, 아동단을 비롯한 혁명조직들이 급속히 확대되었다.≫(영안땅에 울린 하모니카소리, 세기와 더불어 3권)

우리 유격대가 인간해방을 위해 싸우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무력이라는 것을 인민이 몰랐더라면 그리고 그 유격대의 영상이 아름답고 신성하고 거룩한 것으로 인민들의 망막속에 깊이 심어지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그때 천교령에서 김노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천교령의 김노인, 세기와 더불어 3권)

(군대가 싸움을 잘하면 인민의 배짱이 커지는구나!)

이것은 그날 조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받아안았던 충격이었다.≫(인민의 품, 세기와 더불어 3권)

4권

≪민생단≫의 여파로 죽은 사람들의 수가 전장에서 싸우다 쓰러진 사람들의 수를 능가한다면 아마 후대들을 잘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 . .

나는 반≪민생단≫투쟁과 그 총화로서의 다홍왜회의 과정을 통하여 자주성은 민족의 첫째가는 생명이라는 것과 이 자주성을 고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 특히는 그 선각자들의 희생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장 깊이 절감하였다.≫(다홍왜에서의 논쟁, 세기와 더불어 4권)

인민을 건드리는 놈들은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흑산이 태평구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이 의지를 다시금 실천으로 힘있게 보여 주었다.≫(사도구참변에 대한 대답, 세기와 더불어 4권)

≪두만강 연안에 건설된 유격구들은 자기앞에 부과된 사명과 임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유격구의 사명과 임무로 내세웠던 최대의 과제는 혁명역량을 보존육성하는데 있었고 아울러 항일무장투쟁의 확대발전을 위한 정치군사적, 물질기술적 토대를 튼튼히 축성하자는데 있었다. . . .

요영구회의는 인민혁명군이 유격구역을 사수하기 위한 전략적 방어로부터 전략적 공격의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적 계기로 되었다. . . .

미국과 일본 등 현대제국주의는 지금 우리 나라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도 그 봉쇄를 보기 좋게 격파할 활력소가 얼마든지 있다. 조선노동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을 군사적으로 정복하거나 정치경제적으로 질식, 압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닭알로 바위를 깨려고 덤벼드는 것과 같은 망상이다.≫(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 세기와 더불어 4권)

≪1차 북만원정 당시의 노야령은 장설로 뒤덮인 설령이었으나 2차 북만원정을 떠날 때의 노야령은 일만초목에 여름빛이 짙어가던 청산녹림이었다.≫(북만의 전우들을 찾아, 세기와 더불어 4권)

우리가 요구한 것은 자주권이었지 분권은 아니었다. . . .

항일무장부대를 민족별로 가르는 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존중해서 제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결코 문제를 형식적으로 고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중국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싸우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조건하에서는 형식적인 분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 .

우리는 1936년 2월 하순부터 근 한 일주일 동안 소자지하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일명 남호두회의라고도 부른다. . . .

다시 말해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국경지대와 백두산지구에로 진출시키며 투쟁무대를 점차 국내에로 확대할 데 대한 방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확대할 데 대한 방침, 당창건준비사업을 적극 추진시킬 데 대한 방침, 공청을 반일청년동맹으로 개편할 데 대한 방침 등 항일무장투쟁과 그를 중심으로 한 전반적 조선혁명을 일대 앙양에로이끌어올리기 위한 새로운 방도들을 제기하고 토의에 붙였다.≫(경박호기슭에서, 세기와 더불어 4권)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 속에 계시는 김일성동지조선혁명의 선두기관차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새로 조직하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창립하려는 조국광복회그 기관차 뒤를 따라가는 열차차량에 비길 수 있었다. 미구에 타고 않으려는 백두산조선혁명의 사령지휘처라고 할가. 우리는 이러한 과업수행에 지체없이 매진하여야 하였다. . . .

이 사단군사활동을 하면서도 우리가 목표로 삼은 백두산에 나가 국내도처에 당조직망도 확대하고 조국광복회나 여러 가지 반일조직을 통하여 전망을 반일항전에 집결하고 영도해 나가야 할 정치군대로서의 새로운 임무와 면모를 갖추어야 했다.≫(새 사단의 탄생, 세기와 더불어 4권)

새 사단의 탄생으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더욱 강화발전된 것으로 하여 우리의 앞길에는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과 당창건을 위한 조직사상적 준비를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전개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렸다. 새 사단의 출현은 무장투쟁을 국내 깊이에로 확대하며 각계각층의 애국역량을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군사정치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되었으며 카륜회의 이후부터 우리가 줄기차게 전개해 온 통일전선운동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광활한 전망을 열어놓았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5권

≪우리는 간도에서 유격대를 창건하던 초시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와 좀 다른 점은 우리의 역량이 미력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사적 권위가 공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진영에 속하는 왕가대장도, 우리의 동맹자로 될 수 있는 만순대장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안정된 시간을 얻을 수 있겠는가.

방도를 연구하던 끝에 우리는 왕가대장과는 서로 상대방을 치지 않고 적당히 지내며 만순대장과는 공동전선을 형성하기로 작정하였다.≫(왕가대장을 치고 만순을 끌다, 세기와 더불어 5권)

조선인민혁명군 여대원들과 함께 계시는 김정숙동지여성중대의 탄생, 그것은 봉건적 질곡에 의해 수천 년 동안 뒤고방에 갇혀있던 우리 조선의 여성들이 혁명투쟁의 제1선에 당당히 나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중대사였다.≫(여성중대, 세기와 더불어 5권)

≪그는 국내인사들 가운데서 해외의 무장투쟁과 국내정치투쟁의 불가분리성과 일원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공리공담의 울타리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실현하였을 뿐 아니라 혁명군과의 연계를 성사시킨 다음에는 우리의 노선을 관철해 나가는 길에서 생명까지 바친 선각자, 투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이제순, 세기와 더불어 5권)

≪≪3.1월간≫은 조국광복회의 기관지로 발간되었으나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기관지로서의 사명도 띠고 있었으며 온 나라, 온 민족을 상대로 하는 대중정치잡지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 . .≫(≪3.1월간≫, 세기와 더불어 5권)

조선혁명의 주체노선 을 관철하는데서 우리가 중요하게 내세운 전략적 과업은 한편으로는 국내에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총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믿음직한 책원지, 비밀거점을 꾸리는 것이었으며 다른 편으로는 강력한 정치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을 마련함으로써 자력광복을 위한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국내에 강력한 정치적 역량을 꾸리는 사업은 조국광복회망을 확대하여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굳게 묶어세우는 것과 함께 국내에 강력한 당조직망을 꾸림으로써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항일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핵심역량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 . .

우리앞에는 이러한 요구에 민감하게 호응할 수 있는 실천대책이 필요하였다. 그 대책 중에서도 선차적인 것이 바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과제를 실행하자면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이제순과 같은 형의 견실한 혁명가들을 찾아내고 그들과의 공동노력을 통하여 조국광복회망을 빨리 늘이고 온 민족을 반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만 하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항일혁명의 주력을 담당했던 조선인민혁명군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를 책임진 당건설의 주도적 역량으로 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영도적 기능과 역할이 높아지는 가운데 활발히 조직전개된 당건설사업무장투쟁을 정치적으로 강력히 뒷받침하는 한편 그에 대한 당적 영도와 대중적 지반을 강화하고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가는 강력한 추동력으로 되었다.

항일무장투쟁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공산주의적 전위투사들에 의하여 추진된 당조직건설사업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의 당당한 주류를 이루었으며 확고한 정통성을 대표하게 되었다. . . .

≪국내의 당조직들은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에 소속되고 또 그 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조선에 공산당이 없는 현재의 특수한 상황에서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는 조선혁명전반에 대한 영도적 기능을 담당한 참모부의 역할 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당위원회의 활동은 무력에 의해 튼튼히 보호되고 있습니다. . . .

우리는 그때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소집하고 나를 책임자로 하고 김평과 박달을 위원으로 하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박달은 이 위원회의 현지집행인으로서 갑산지방을 비롯한 국내 여러 지역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을 주관할 임무를 지니었다. . . .

모든 당조직들이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움직이는 전국적 범위의 강력한 당조직체계가 세워졌다. 최고영도기관인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로부터 기층조직인 세포에 이르기까지 당조직지도체계가 정연하게 세워짐에 따라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기초축성사업에서 획기적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항일혁명투쟁에서 우리가 이룩한 또 하나의 크나큰 전취물로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은 후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지구에서 얻은 군사작전들에서의 승리에 못지 않은 정치적 승리 . . .

파쟁과 이론적 결핍과 실천적 능력의 부족으로 소외되고 경시당해오던 조선공산주의운동은 항일무장투쟁의 불길속에서 자기의 새로운 길을 힘있게 개척해나가기 시작하였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인민의 지지를 떠난 군대가 결코 강군으로 될 수 없으며 싸움에서 승자로 될 수 없다는 것은 항일혁명의 전 기간 우리가 뼈에 사무치게 체험한 진리이다.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의 나날에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시종일관하게 주장해왔다.≫(인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세기와 더불어 5권)

김정숙은 가는 곳마다에서 인민들을 옹군애병사상으로 교양하였으며 부녀회원들, 청소년들과 함께 원호물자들을 준비하여 부대에 보내주고는 하였다. . . .

원군운동의 최고형태는 참군이었다. 김정숙은 조국광복회 하강구위원회의 위원들과 함께 조직을 통하여 장악한 핵심들 중에서 파악있는 청년들을 선발하여 인민혁명군에 참군시키었다.≫(양민보증서, 세기와 더불어 5권)

6권

조국광복회 창립(예술영화 "민족의 태양")조국광복회창립 직후 우리는 밀영에서 먼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회의를 열고 부대 내 전체 병사, 지휘관들을 조국광복회에 가입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 . .

그 당시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 주역을 담당한 것은 조선인민혁명군 무장대오에서 선발된 정치공작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한때 조국광복회준비위원회에 망라되어 활동하던 성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불씨가 되어 만주대륙에 통일전선운동의 열풍을 일으키었다. . . .

인민대중의 사상의식의 개조에서 특기할 것은 그들이 무장을 들고 일제와의 혈전을 벌이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조국해방의 주력으로 보고 우리에게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면서 우리의 영도를 더욱 충실하게 받들어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민족해방투쟁과 조선공산주의운동은 1930년 후반기부터 인민혁명군의 중심활동거점인 백두산을 축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 . .

조선혁명의 영도중심에 대한 인민대중의 충실성은 곧 인민혁명군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으로 표현되었다.≫(삼천리 방방곡곡에, 세기와 더불어 6권)

≪우리가 보천보전투를 조직한 목적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민족재생의 전기를 마련하려는데 있었고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항일혁명투쟁에서의 결정적인 단계, 질적 비약을 이룩하자는데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 . .

우리는 또한 이 전투를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고 있은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진실하고 참된 애국자들이며 민족해방위업을 승리적으로 완수해나갈 수 있는 가장 헌신적이고 책임적인 투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조국인민들로 하여금 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항일혁명의 마당에 거족적으로 달려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일사천리로 내밀 수 있는 분위기를 지어주었다.≫(보천보전투(1)(2), 세기와 더불어 6권)

유화 - 보천보의 횟불

지양개군민연환대회는 군민의 위대한 정치적 단결력을 만천하에 보여준 회합이었다.≫(지양개군민연환대회, 세기와 더불어 6권)

≪이 회의에서 논의된 문제들 가운데서 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중일전쟁에 대처하여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튼튼히 꾸리고 적배후교란작전을 강화하며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주요한 방도의 하나로서 백두산서남부일대와 국내에 더 많은 지하조직을 내올 데 대한 문제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공작소조들이 낭림산 줄기를 이용하여 혁명근거지를 꾸리며 국내도처에 생산유격대와 노동자돌격대를 조직할 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진지하게 논의하였으며 이와 함께 신파, 장백현 하강구 일대에서의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하부조직건설 정형, 군중정치사업과 유격대원호사업 정형을 요해하고 그 경험을 일반화하기 위한 대책도 동시에 토의하였다.≫(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세기와 더불어 6권)

7권

조선인민혁명군은 단순한 군사집단이 아니라 정치와 군사를 다같이 중시하는 혁명군대입니다. 문과 무를 겸비해야 무장투쟁도 잘할 수 있고 인민들과의 사업이라든가, 통일전선사업이라든가 적군와해사업도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군인들의 교육과 교양에 많은 힘을 넣은 것은 그때문이었습니다. 군인들을 육성하는데서도 힘있는 수단은 학습입니다.≫(마당거우밀영, 세기와 더불어 7권)

≪최윤구는 독립군이 쇠퇴, 고립, 붕괴되어가는 근본원인을 바로 여기에서 찾고 인민혁명군과의 연합을 실현한 다음 공산주의자들이 구축해놓은 민중적 지반우에서 활동할 때만이 민족앞에 지닌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독립군의 마지막부대, 세기와 더불어 7권)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당신이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열하원정을 성사시키고싶어 하는 심정에 대해서는 나도 이해한다, 그렇지만 나는 국제당이 원정에 대한 계획을 작성할 때 동북의 현실과 중국혁명의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였는가 반영하지 않았는가, 그 계획의 군사적 가능성 여부를 정확히 타산하였는가 타산하지 않았는가, 더욱이는 그들이 시도하는 원정이 유격전의 특성에 부합되는가 부합되지 않는가 하는데 대하여 심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당이 시달한 열하원정계획에는 중국혁명의 현 실태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 부족할 뿐 아니라 조선혁명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왕명이 국제당에 가서 중공당대표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 사람이 주관주의가 보통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해주었습니다.≫(열하원정, 세기와 더불어 7권)

무산지구에서 울린 조선인민혁명군의 총소리는 남패자회의와 북대정자회의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남패자에서 우리 부대의 대원들로 양정우와 위증민에게 경위연대를 새로 개편해주었습니다. 그 연대에 숱한 인원을 보충해주었습니다.≫(양정우와 만나, 세기와 더불어 7권)

≪혁명군이 녹아났다고 적들이 선전할 때 그것을 허위라고 까밝히며 혁명군이 살아있다고 선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국내에 들어가서 총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총소리만 내면 지하조직도 많이 내올 수 있었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국내에 있는 우리의 혁명조직들이 대오를 제일 크게 늘인 것은 보천보전투 직후와 간삼봉전투 직후입니다. 총소리가 한번씩 울리면 사람들이 각성되게 되고 각성된 인민들이 혁명조직의 품으로 흘러들기 마련입니다. . . .

무산지구에서 울린 조선인민혁명군의 총소리는 기가 죽었던 국내인민들에게 우리 혁명이 계속 상승일로를 걷고 있다는 신심을 주고 ≪혜산사건≫의 여파로 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위축되었던 국내혁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준 강심제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무산지구에서 이룩한 우리의 군사적 승리는 또한 조선인민혁명군이 다 망했다고 떠들어대던 적들의 선전이 완전한 허위라는 것을 만천하에 폭로하였습니다. 이 전투가 있은 후부터 우리 인민들은 적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절대로 곧이 듣지 않았습니다. 무산지구전투가 있은 뒤로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국내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은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하는 한 조국광복의 새날은 반드시 오고야만다는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항일혁명의 흐름속에 앞을 다투어 뛰어들었습니다.≫(대홍단전투, 세기와 더불어 7권)

≪수십만 대군의 공세를 파탄시키고 혁명의 지속적인 고조를 이룩하자면 그 어느 때보다도 치밀하고 적극적인 작전을 뒤받침할 수 있는 묘술을 찾아내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묘술로 대부대선회작전을 선택하였습니다.≫(수십만의 ≪대토벌군≫과 맞서, 세기와 더불어 7권)

≪일군들은 김정일동무를 혁명의 수뇌로 받들고 백두밀림에서 개척된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해갈 굳은 각오를 가지고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계속 빛나는 성과를 이룩해야 하며 오중흡연대가 사령부를 보위한 것처럼 조선혁명의 최고사령부인 당중앙위원회와 김정일동무를 목숨으로 옹호보위하여야 합니다.≫(오중흡과 7연대, 세기와 더불어 7권)

≪적들은 하싼호사건 때 우리의 역량을 견제하기 위해 간도지구에만도 2개 여단의 역량을 투입하였습니다. 할힌골사건 때는 그보다 더 많은 역량을 들이밀었다고 합니다. 보는 바와 같이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할 데 대한 구호를 들고 우리가 진행한 배후타격전은 일제의 대쏘침략을 좌절시키는데서 중요한 역할 을 하였습니다.≫(≪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 세기와 더불어 7권)

홍기하전투를 계기로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더 넓은 범위에서 전파되어갔습니다. 인민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에 자기들의 장래를 전적으로 의탁하게 된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앞두고 조선의 모든 반일애국역량이 신심을 가지고 전민항쟁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킬 수 있게 하였습니다.≫(≪마에다토벌대≫의 종말, 세기와 더불어 7권)

8권

≪돌이켜보면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 뿐 아니라 전반적 조선혁명수행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차지하고 있는 확고한 영도적 지위와 증대되는 핵심적 역할우리가 혁명무력건설을 튼튼히 틀어쥐고 그것을 모든 사업에 선행시키는 원칙을 견지한 것이 천백번 옳았다는 것을 뚜렷이 실증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주권전취를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서 정치적 영도기관으로서의 당을 먼저 꾸리고 그 다음에 무력건설에 착수하는 것이 하나의 원리로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혁명투쟁, 특히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혁명무력, 폭력적 진출이 가지는 결정적 역할 과 당시 우리 나라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먼저 무력을 건설하고 다음에 당을 건설하는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우리는 1932년 4월에 첫 혁명적 무장력으로서의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그것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확대발전시켰으며 바로 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의거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의 불길을 높여나가면서 전반적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새로운 앙양에로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의 영도와 무력적 담보밑에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도, 조국광복회조직과 통일전선운동의 확대발전도, 전민항쟁 준비도 성과적으로 이끌어나갔습니다.

군정학습에 참가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 사실에 있어서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항일혁명시기 우리 혁명의 중추적 핵심역량이며 정치적 향도자이며 민족적 이익의 무력적 담보자였던 조선인민혁명군은 그대로 우리의 군대이자 당이고 정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 .

우리는 그때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사업에서 조선혁명의 중추역량인 조선인민혁명군의 역량을 보존축적하면서 그들을 유능한 정치군사간부로 키우는 것을 새로운 전략적 과업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전투훈련을 벌리고있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 그 대사변은 적아 쌍방의 정치군사적 잠재력이 최대한으로 동원되는 최후결전을 전제로 하는데 그런 결전에서 승리자가 되자면 매개 대원들이 종전보다 몇 등급 높은 직무를 수행해야 하였습니다. 조국이 광복되면 바로 그 대원들이 핵심이 되어 새 조국건설도 해야 하였습니다. . . .

우리는 이상과 같은 전략적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대부대작전으로부터 소부대작전으로 이행할 데 대한 새로운 투쟁방침을 제시하였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8권)

하바로프스크회의에서 논의된 중심의제는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장래활동방향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결국 조선과 동북에서의 유격투쟁과 쏘련군대와의 호상관계를 어떻게 맺으며 그것을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어떻게 적응시키고 강화발전시켜 나가겠는가 하는 것. . . .

회의과정에 발현된 우리의 원칙적인 입장조선, 쏘련, 중국 세 나라 혁명무장력사이의 단결과 협조를 실현하는데서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습니다. . . .

소할바령회의와 하바로프스크회의1940년대 전반기 항일무장투쟁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해주고 조선혁명가들이 조국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면서 다가올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회합이었습니다.

하바로프스크회의가 있은 후 우리는 원동의 임시기지에서 군정훈련도 하면서 백두산을 비롯한 국내 여러 곳에 튼튼히 꾸려놓은 비밀근거지를 거점으로 삼고 무장투쟁과 혁명운동을 다같이 힘있게 밀고 나감으로써 조국해방의 새날을 앞당기었습니다.≫(하바로프스크회의, 세기와 더불어 8권)

≪김책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무장을 하지 못하면 무장한 강도들앞에서 허수아비처럼 무력한 존재가 되고 자기자신마저 지켜낼 수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의 교훈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김책의 그 말을 듣고 그가 옳은 교훈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김책의 반생이 도달한 교훈이기도 했지만 혁명투쟁의 일반적 합법칙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해야 하며 민족적 독립이나 사회적 해방을 위한 모든 투쟁의 결말은 대체로 무장투쟁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우리가 항일혁명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기본요인도 자체의 독자적인 혁명무력을 가지고 있은 데 있습니다. . . .

항일혁명의 승리는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진리의 정당성을 확증해주었으며 해방 후 우리로 하여금 새 조국건설과 사회주의위업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의 전행정에서 혁명적 건설노선을 확고히 틀어쥐고 강유력한 혁명무력을 건설하는데 모든 힘을 다 바치게 하였습니다.

국력도 총대에서 나오고 민족적 자부심도 총대에서 나옵니다. 군대가 강해야 민족이 부흥하고 나라도 융성번영합니다. 총대를 떠난 자주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총대에 녹이 쓸면 인민이 노예가 됩니다.

오늘 김정일동무가 혁명무력의 수위에 서서 인민군대를 무적필승의 강군으로 키우고 군건설에서 경이적인 성과를 이룩하고 있는 것은 백두산에서 개척된 주체의 혁명위업을 계승완성해 나가는데서 이룩한 가장 빛나는 역사적 업적으로 됩니다.≫(혁명가 김책, 세기와 더불어 8권)

1942년 7월 중순경에 우리는 쏘련, 중국의 군사간부들과 함께 조, 중, 쏘 무장력의 연합문제를 최종적으로 토의하고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의 독자성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전제하에 국제연합군을 창설할 데 대하여 결정하였습니다. . . .

조선인민혁명군대원들은 백두광야에서 연마해온 유격전법들을 더욱 완성하는 한편 정규군의 요구에 맞는 현대전법들을 익혀나감으로써 조선혁명을 담당한 주력군으로서의 정치군사적 면모를 훌륭히 갖추어나갔습니다. . . .

국제연합군의 조직과 그 강화발전을 위해 기울인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고심어린 노력은 혁명투쟁에서 매개나라의 자주성, 독자성과 국제적인 단결과 협조의 두 개 원칙을 옳게 결합시킨 모범으로 됩니다.

국제연합군을 조직하고 그것을 강화발전시키는 나날에 얻은 성과와 경험은 일제를 격멸하는 최후격전의 나날 에는 물론, 전후 복잡한 정치정세하에서 주체적 입장을 가지고 사회주의나라들을 비롯한 국제혁명역량과의 연합전선을 유지하고 확대해 나가는데서도 귀중한 밑천으로 되었습니다.≫(국제연합군을 편성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김정일장군님

≪항일혁명투사들이 김정일동무를 수령의 유일한 후계자로 내세운 것은 그가 당과 국가, 군대를 영도해야 민족의 장래가 담보되고 백두산에서 개척한 주체의 혁명위업이 한 치의 편차도 없이 대를 이어 빛나게 계승발전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그를 수령의 후계자로 추대했다는 것은 곧 군대가 그를 민족의 영수로 내세웠다는 것을 의미 . . . .

김일이 늘 김정일동무처럼 수령께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충신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면 임춘추는 김정일동무처럼 혁명선배들을 존대하고 혁명전통을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은 없고 김정일동무와 같은 위대한 사상의 대가, 영도의 대가가 없다고 하였으며 오진우는 김정일동무처럼 무비의 담력과 뛰어난 지략을 소유한 영장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최현과 이종산은 종종 김정일동무처럼 인정미가 풍부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세기와 더불어 8권)

≪국제연합군이 편성된 후 우리는 소부대작전과 정찰활동을 맹렬하게 벌이는 한편 군정 학습과 훈련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해방의 날을 그리며, 세기와 더불어 8권)

≪전민항쟁 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백두산에 틀고앉아 무장투쟁을 압록강연안과 국내에로 확대하면서 조국광복회의 기치밑에 당건설과 통일전선운동, 대중조직건설을 활발히 벌이던 때부터였습니다.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나라의 해방을 이룩할 것을 호소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사실상 전민항쟁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리가 전민항쟁방침을 독자적인 노선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무적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다음부터였다고 봅니다. 전인민적 반일항전문제를 가지고 백두산밀영에서도 회의를 했고 초수탄과 신흥에서도 회의를 하였습니다. 9월호소문전민항쟁호소문이라고 이해해도 됩니다. . . .

그 후 우리는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대중단체건설 정형, 그리고 비밀무장조직들의 활동정형을 요해한데 기초하여 조국해방의 3대노선 을 내놓았습니다. 조국해방의 3대노선이라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그에 배합한 전인민적 봉기, 배후연합작전으로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이룩할 데 대한 노선 입니다.≫(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조선인민혁명군의 이러한 대담하고 폭넓은 정찰활동이 없었더라면 100만 관동군을 격파하는 대일작전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승리적으로 결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대일작전의 돌파구, 세기와 더불어 8권)

선봉항에 상륙하는 조선인민혁명군≪1945년 8월 9일 쏘련은 동맹국들과의 협약에 따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군대와 교전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날 나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에 조국해방을 위한 총공격전을 개시할 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 . .

자료에 의하면 함경남북도를 내놓고도 국내의 항쟁조직들과 무장대들은 8월 중순의 1주일 동안에만도 근 1천개소의 적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나라의 해방은 15성상이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강력한 군사적 타격을 안겨 그것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조선인민혁명군각계각층을 망라한 전민항쟁역량의 총동원으로 이룩되었습니다. 우리 군대와 인민의 장기간에 걸치는 항전이 선행되었기에 쏘련의 대일작전은 그처럼 짧은 기간에 결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해방은 쏘련군이 일본관동군을 격멸하는 유리한 환경에서 우리 인민과 인민혁명군자체의 역량에 의해 마련된 위대한 결실입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 우리가 조직한 국내의 항쟁조직들과 무장대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계획에 따라 국내도처에 웅거하고 있는 일제의 침략무력과 식민지통치기구들을 제압소탕하고 나라를 해방하였습니다. . . .

백두산이 조종의 산으로서 조선의 만산을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백두밀림에서 개척되고 발전해온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민족적 해방과 사회적 진보를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최후결전의 날, 세기와 더불어 8권)

≪이 인민인민혁명군의 투사들이야말로 새 조국 건설을 담당하게 될 우리 혁명의 주체였습니다. 인민의 사랑과 지지속에서 인민의 힘을 믿고 인민에 의거하여 투쟁할 때 그 어떤 준엄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으며 그 어떤 어려운 투쟁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찾아낸 귀중한 진리입니다. . . .

인민을 새 조국 건설에 불러일으키자면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는 혁명의 참모부가 있어야 하고 정권이 있어야 하고 새 사회 건설을 무력으로 담보할 수 있는 군대가 있어야 하였습니다. . . .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폭발한 민중의 환호성은 조국과 겨레를 위해 우리가 겪어온 반생의 간난신고에 대한 표창이고 답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답례를 나에 대한 인민의 사랑과 신뢰로 받아들이었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항일무장투쟁노선 이야말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선군혁명노선의 뿌리이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강화하고 그 영도적 역할을 높임으로써 조선혁명을 이룩하시었다면, 오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조선인민군조선노동당을 강화하고 그 영도적 역할을 높임으로써 통일혁명을 승리에로 영도하고 계신다.

조선혁명의 선두기관차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새로 조직하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창립하려는 조국광복회그 기관차 뒤를 따라가는 열차차량에 비길 수 있었다. 미구에 타고 않으려는 백두산조선혁명의 사령지휘처라고 할가. 우리는 이러한 과업수행에 지체없이 매진하여야 하였다.≫(새 사단의 탄생, 세기와 더불어 4권)

≪우리는 그때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소집하고 나를 책임자로 하고 김평과 박달을 위원으로 하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박달은 이 위원회의 현지집행인으로서 갑산지방을 비롯한 국내 여러 지역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을 주관할 임무를 지니었다. . . .

모든 당조직들이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움직이는 전국적 범위의 강력한 당조직체계가 세워졌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그러나 나는 혁명투쟁, 특히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혁명무력, 폭력적 진출이 가지는 결정적 역할과 당시 우리 나라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먼저 무력을 건설하고 다음에 당을 건설하는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우리는 1932년 4월에 첫 혁명적 무장력으로서의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그것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확대발전시켰으며 바로 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의거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의 불길을 높여나가면서 전반적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새로운 앙양에로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의 영도와 무력적 담보밑에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도, 조국광복회조직과 통일전선운동의 확대발전도, 전민항쟁 준비도 성과적으로 이끌어나갔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항일혁명시기 우리 혁명의 중추적 핵심역량이며 정치적 향도자이며 민족적 이익의 무력적 담보자였던 조선인민혁명군은 그대로 우리의 군대이자 당이고 정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8권)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 열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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