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10월 3일(목)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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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과 임춘추

 

서정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 ≪세기와 더불어≫에서 빛나는 수령님의 혁명동지에 대한 해설강좌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아홉 번째 시간으로 김일과 임춘추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김일과 임춘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연구하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두 동지를 깊이 추억하시는 이유를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련대정치위원 김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35년 백두산밀영에서 김일을 처음으로 만나시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일에 대하여 과묵하다는 첫인상을 받으시었습니다.

≪김일은 답답하다고 할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었다. 첫날 밀영에서 담화를 할 때 혁명에는 언제 참가했고 어떤 투쟁을 했는가고 물어보니 혁명에는 1930년초부터 참가했는데 별로 해놓은 일이 없다는 외마디대답만 하였다. 아무리 물어보아야 매양 같은 대답이었다. 첫 대면이지만 지나치게 과묵하고 사교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흠이기도 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이계순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려면 김일제1부수상과 박영순동무를 취재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일제1부수상이 과묵해서 취재할 멋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그것은 김일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한 자랑은 잘 안하지만 남에 대한 이야기는 곧잘 합니다.≫(여투사들의 절개, 7권)

김일은 노숙한 정치일군이었습니다.

≪항일혁명시절의 김일은 사업경험이 풍부한 노숙한 정치일군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는 안도와 화룡 지방을 중심으로 간도일대에서 지하당사업과 반일부대공작을 많이 하였다. 그 과정에 수많은 혁명가들을 육성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화룡현당 서기 김일환≪화룡에서 김일환과 함께 지하활동을 다년간 해온 김일과 박영순은 그가 사업작풍이 좋고 사업방법이 노숙하며 군중성이 좋다는데 대해서 자주 회상하였다. 김일, 박영순은 다 그의 영향밑에서 당일군으로 자라난 사람들이었다.≫(다홍왜에서의 논쟁, 4권)

≪최원봉의 성실한 방조자인 윤경환은 김일이 장백현 8도구 가재수에서 공작할 때 그 고장의 조국광복회조직에 망라되어 활동하던 사람이었다.≫(삼천리 방방곡곡에, 6권)

≪군민연환대회장소로 내정된 덕부골은 이제순, 김운신, 마동회, 김주현, 지태환, 김일 등이 개척한 혁명촌이었다.≫(지양개군민연환대회, 6권)

≪지태환은 김일이 지방사업을 하는 과정에 찾아내고 단련시켜 우리 부대에 보내온 사람이었다. 김일처럼 그도 입이 무겁고 실속이 있었다. 무슨 과업을 받아안기만 하면 실농군처럼 수걱수걱 해냈다. 김일과 지태환은 성격이며 일솜씨며 행동거지까지도 신통히 비슷하였다.≫(사진과 추억, 6권)

김성국   ≪김일의 도움으로 어린 나이에 입대한 김성국의 실례를 들어보자. . . . 김일은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를 늘 보살펴주었다. . . . 추운 겨울날 맨발바람으로 얼음판에서 기관총을 냅다갈기는 김성국도 보통내기가 아니었지만 탄우를 무릅쓰고 전장에까지 뒤쫓아가서 내의를 찢어 어린 사수의 발을 싸매준 김일 역시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김일이 그렇게 해주지 않았더라면 김성국은 틀림없이 발에 큰 동상을 입고 날개없는 새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후에 나와 김일의 보증으로 공산당에 입당하였다.≫(총을 쥔 소년들, 6권)

≪우리는 심룡준에게 유능한 정치일군을 한 사람 파견하여 뒤에서 그를 도와주기로 하였습니다. 그 적임자로 정치사업경험이 풍부한 김일동무가 선발되었습니다.≫(족제비사냥군, 7권)

≪가재수부락에는 김일동무가 꾸려놓은 지하조직이 살아있었습니다. 안 무엇이라는 지하조직원도 그 부락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우리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던 농민이었습니다. . . . 그 농민은 김일의 영향밑에서 혁명사업을 돕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인차 지하조직원이 되었습니다.≫(고난의 행군, 7권)

김일은 조건타발을 몰랐으며 어려운 일을 책임적으로 수행하는 혁명가였습니다.

≪김일의 성격에서 좋은 점은 가식이 없고 고지식한 것이었으며 어떤 풍파가 있어도 드놀지 않고 한 본새로 충실하게 일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평생 조건타발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저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수걱수걱 일만 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그가 과업을 받을 때의 태도를 보면 언제나 한 본새였다. 무거운 일이건 가벼운 일이건 매양 ≪알았습니다≫하는 한마디의 말로 받아들이었다. 그리고는 구구한 말을 하지 않았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몽강현 마당거우밀영   ≪마당거우밀영에서 김일을 8연대 1중대 정치지도원으로 임명하던 때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8연대 1중대 정치지도원의 임무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연대장 전영림은 전해에 휘남현성전투에서 희생되고 연대정치위원마저 적임자가 없어 배치하지 못한 형편에서 1중대 정치지도원은 임시로 연대정치위원의 임무까지 겸임해야 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김일은 다음날 새벽 숱한 식량과 무기를 가지고 중대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당거우에서 북강군까지는 100리길이 잘된다. 김일이 중대로 돌아온 것이 분명하다면 그는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왕복 200리길도 훨씬 넘는 강행군을 한 것으로 된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김일은 내가 준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두 노인에게 먼저 안전한 은신처를 마련해 준 다음 가족들도 그리로 몰래 빼돌리었습니다. 그는 노인들이 지고 왔던 소금에 독약이 들어가게 된 내막도 탐지해가지고 왔습니다.≫(소금사건, 7권)

≪그 후 김일은 소부대 하나를 데리고 살금살금 국내로 들어갔습니다. 그 소부대는 5월중순경에 무산군 삼장면일대에 진출하여 국경수비대에 대한 기습작전을 벌이면서 이틀동안이나 인민들과의 사업을 하였습니다.

미나미총독이 국경으로는 단 한 명의 유격대원도 스며들지 못하게 하라고 호통치던 때에 조선인민혁명군의 1개 소부대가 국내에 뻐젓이 나타나 총소리도 내고 여유작작하게 정치사업도 한 것은 1940년대 전반기의 항일혁명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소할바령에서, 7권)

≪그때 김일이네 소부대에는 왕청, 동녕 일대에서 활동할 과업을 주고 오백룡이네 소부대에는 연길, 안도 일대에서 겨울나이식량을 해결할 임무를 주어 떠나보냈습니다.≫(1940년 가을, 8권)

≪나는 소부대공작을 떠나면서 중대장으로 유경수를 선발하고 정치지도원으로는 김일을 임명하였습니다.≫(소부대활동의 나날, 8권)

≪나는 김일이네를 금창에 보냈습니다. 왕청현 금창부근에 가서 금광을 치고 식량도 해결하고 군중공작도 하라고 했습니다. . . . 며칠후 김일이네가 식량을 해결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소부대활동의 나날, 8권)

김일은 해방이후에도 책임적인 위치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맡아 수행하였습니다.

≪김일은 해방 후에도 항일혁명시절처럼 우리를 잘 도와주고 받들어주었다, 그는 내가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면 진일 마른일을 가리지 않았다. 당사업이면 당사업, 군건설이면 군건설, 경제지도면 경제지도 초소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복잡한 국사에 묵묵히 몸을 적시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향산읍을 감돌아 흐르는 청천강≪어느 해였던지 김일은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자기를 청천강화력발전소 건설장에 전권대표로 파견해줄 것을 요구한 일이 있다. 청천강화력발전소는 그 당시 국가적 투자와 이목이 집중되던 중요한 건설대상이었다. 그런 것만큼 나도 마음속으로 공사지휘를 담당할만한 인물을 은근히 물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제기를 받고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건강상태가 대단히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전처럼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는 날엔 무슨 화단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김일이 어찌나 집요하게 자기 요구를 되풀이하였던지 나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신 공사장에 가면 고문격으로 훈수나 하는 정도로 일하되 절대로 무리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내놓았다.

김일은 공사장에 가자마자 가설건물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7-8층짜리 아파트 높이만한 계단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오르내리면서 건설을 불이 번쩍나게 추진시키었다. 그는 섣달그믐날까지 공사장에 있으면서 불철주야로 일하다가 1호보이라에 물을 지피는 것까지 보고서야 평양으로 돌아와 나에게 그 동안의 사업정형을 보고하였다.

김일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김일은 혁명적 동지애와 원칙성이 강한 혁명가였습니다.

≪부대에 식량이 떨어지면서 노상 김일이 맨 선참으로 자진해서 대원들을 데리고 식량공작을 떠나군 하였다. 그는 적구에 가서 지하공작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자루에 쌀을 넣어가지고 오군 하였다. 자기는 굶거나 통강냉이를 먹으면서도 우리에게만은 늘 쌀밥을 지어주려고 여간만 애를 쓰지 않았다. 김일의 배낭이 다른 사람들의 배낭보다 곱절로 더 크고 무거웠던 것은 그가 그 배낭속에 예비식량주머니를 늘 넣어가지고 다녔기 때문이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김일은 어떤 경우에나 자기자신을 먼저 생각한 것이 아니라 동지들을 먼저 생각하고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당과 혁명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당과 국가의 높은 직급에서 활동하였지만 자기에게 특전, 특혜, 특대가 차례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래사람들이 자기를 특대하려고 하면 그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김일은 반일부대사병들이 자기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좋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겠거든 죽이라, 그 대신 청이나 하나 있다, 내가 인삼밭주인을 찾아가서 사죄하고 돌아올 터이니 그 때까지 기다려달라, 그 대신 인삼은 더 축내지 말아달라, 인삼을 더 축내면 그것을 보상할 돈이 없다고 하면서 태연하게 그들을 설복하였다. . . .

감동된 인삼밭주인은 산에 저장해둔 겨울나이용식량을 다 내놓았고 전영림부대를 만강까지 안내해주었다. 만강에 도착한 반일부대대원들은 김일한테 찾아와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일의 혁명적 의리를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김일   ≪항일혁명투사들의 의리를 두고 논할 때면 김일의 얼굴을 먼저 돌이켜보게 된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김일은 우리의 명령, 지시에 대한 집행을 상급앞에 지닌 하급의 의무로만 간주한 것이 아니라 영도자에 대한 전사의 의리로 여기는 진짜배기혁명가였다. 그는 무슨 일이건 의리감으로 집행했기 때문에 임무수행에서 큰 파동은 없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이런 때에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김일이 무거운 쌀자루를 메고 기지에 돌아와 김정숙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빵이 주식으로 되어있는 그곳 형편을 생각해서 쌀을 좀 구해왔는데 다른데 쓰지 말고 사령관에게 꼭 밥을 대접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김일이 나를 위해 쌀자루를 메고 다닌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자기는 만날 통강냉이만 먹으면서도 나한테만은 어떻게 하나 쌀밥을 마련해 주려고 항상 마음을 썼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김책, 강건 동무들이 있는 열에 여투사를 2명 배치하였는데 그것은 항일혁명투쟁에서 우리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와 역할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일, 임춘추, 최현을 비롯한 노투사들은 나에게 인민의 일치한 염원이고 전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라고 하면서 김정숙을 거기에 세워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여투사들의 절개, 7권)

위대한 수령님은 한평생 당과 혁명에 충실하였던 김일을 아끼고 사랑해주시었습니다.

≪김일이 한평생 우리를 충심으로 따르고 받들어온 것처럼 나도 한평생 그를 친혈육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위대한 수령님은 김일의 건강에 대하여 늘 심려하시며 깊이 배려하시었습니다.

≪쏘련의사들은 김일을 진찰하고 나서 암이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었다. 그들이 김일을 데리고 쏘련에 들어가서 다른 명의에게도 보였지만 그 의사 역시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내리었다. 그때 만일 암이라는 최초의 진단결과만을 믿고 김일의 위를 잘라 버리기라도 했다면 그는 오래 살지 못하고 인차 잘못되었을 것이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김일이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를 만나 동무는 우리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다. 이제는 나와 함께 항일혁명을 하던 노투사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동무가 없으면 내가 허전해서 어떻게 견디겠는가,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을 돌보면서 일하라고 당부하군 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김일은 당과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과정에서 불치의 병에 걸리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은 중병에 걸려 지팽이를 짚고 다니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에도 집무실이나 생산현장을 떠나지 않고 당과 혁명을 위해 한 가지 일이라도 더 많이 해 놓으려고 온갖 정열을 다 바치었다. 그러다가 불치의 병에 걸리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아닌게 아니라 김일은 그 해 섣달그믐날 아이들의 설맞이공연관람에도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해마다 설맞이공연을 동무와 같이 보았는데 오늘 저녁에 동무가 곁에 없으니까 자꾸 눈물이 나와서 볼 수 없더군, 그래서 내 이렇게 왔소.≫

침상에 누워있는 김일에게 이런 말을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그는 오히려 현관문밖까지 따라나오면서 제 부탁인데 과로하시면 안됩니다, 절대로 과로하지 마십시오 하고 거듭 당부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김일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를 존경하고 흠모하였습니다.

≪김일은 나를 대하듯이 김정일동무를 대하였고 나에 대한 의리를 지키듯이 김정일동무에 대한 의리도 지키었다. 나는 김정일동무에 대한 김일의 남다른 경모심에 한두 번만 탄복하지 않았다. 김정일동무가 중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김일은 지팽이를 짚고 역에까지 나가 그를 맞이하였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지도자에 대한 그의 진실한 자세를 두고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그가 임종 사흘전까지 집무실에서 일을 했고 소속세포에서 당생활총화를 하였으며 당중앙위원회의 책임일군을 찾아 김정일동무를 잘 모셔달라는 부탁을 하였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이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김일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를 당과 국가의 수위에 추대하는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최현오진우   ≪김일, 최현, 오진우와 함께 임춘추는 김정일동무를 우리 당과 국가의 수위에 추대하는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김정일동무를 나의 후계자로 한사코 추대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에게 인간적으로 매혹되었기 때문입니다.

김일이 늘 김정일동무처럼 수령께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충신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면 임춘추는 김정일동무처럼 혁명선배들을 존대하고 혁명전통을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은 없고 김정일동무와 같은 위대한 사상의 대가, 영도의 대가가 없다고 하였으며 오진우는 김정일동무처럼 무비의 담력과 뛰어난 지략을 소유한 영장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최현과 이종산은 종종 김정일동무처럼 인정미가 풍부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는 김일을 혁명선배로서 존경하고 사랑하였으며 따뜻이 보살펴 주었습니다.

≪김정일동무도 김일을 혁명선배로서 각별히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김정일동무는 늘 김일부주석동지는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우리 당의 강화발전과 혁명승리를 위해 그 누구보다도 견결히 투쟁한 공산주의혁명투사의 모범이라고 하면서 그를 내세워주고 따뜻이 돌보아주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내가 김일을 나의 오른팔이라고 한 것처럼 김정일동무도 그를 나의 오른팔로 보았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는 김일이 서거하였을 때 가장 애석해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김일이 서거하였을 때 제일 애석해한 사람이 아마 김정일동무였을 것이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30년 가을 임춘추를 처음으로 만나시었습니다.

임춘추   ≪훗날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한 임춘추동무도 조양천에서 ≪봉춘당약방의사 임춘봉≫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혁명사업을 하였다. . . . 나는 그때 조양천에서 처음으로 임춘추동무와 만났다. 내눈에는 젊은 나이에 동의기술을 터득해낸 그가 퍼그나 인상적으로 보이었다. 그의 동의기술 때문에 항일무장투쟁 전기간 우리 유격대원들이 덕을 많이 입었다.≫(두만강을 건너, 2권)

≪내가 1930년 가을에 조양천에서 봉춘한약방주인의 간판을 가지고 간도지구 당 및 공청 비서처의 연락원으로 공작하던 임춘추와 첫 통성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간단히 소개한 바가 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임춘추의 60년 혁명활동 중 특히 지식으로 기여한 부분을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그때로부터 그는 장장 60년 가까운 세월을 고스란히 혁명에 바치었다. 당의 영원한 동행자, 충실한 방조자, 훌륭한 조언자라는 명구는 김정일동무가 인텔리들에게 붙여준 칭호인데 임춘추와 같은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는 지식을 가지고 조선혁명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식을 밑천으로 하여 당건설활동도 하고 군의활동도 하고 저술활동도 하였다. 그의 생은 이러한 사업으로 일관되어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는 의술로써 조선혁명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임춘추의 재능가운데서 가장 큰 장기는 독학으로 섭취한 의술이었다. . . . 그는 의사라는 간판을 가지고 군중계몽도 하고 연락공작도 하고 혁명가육성사업도 하였다. 그가 팔도구근방의 용수평마을에 가있을 때만 해도 숱한 사람들을 유격대에 추천하여 보냈다고 하니 그의 의술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그는 임춘추동무의 침을 며칠동안 맞고나서 편두통 때문에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임의원덕으로 골통속에 숨어들어왔던 잡귀를 쫓아버렸다고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철주는 서규오부대에 눌러앉아 반일병사들과의 사업을 합법적으로 하였다.≫(나자구 등판에서, 2권)

리봉수≪임춘추, 이봉수 등은 치료사업에서 특출한 업적을 쌓은 명의들인 동시에 후비육성에도 무시할 수 없는 공로를 세운 권위있는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품에서 삶의 노래, 소생의 노래를 부르며 뛰쳐일어나 대오로 돌아갔던가.≫(밀림 속의 병기창, 3권)

≪임춘추가 유격구로 들어오자 혁명조직에서도 그를 군의로 임명하였다. 그는 군의로 활동하는 기간 수많은 전상자들과 인민들의 병을 보아주었다. 14-15살 때부터 농사를 지으면서 자습으로 연마한 의술이라는데 임상성과가 대단히 좋았다. 그 의술의 덕을 한두 번 본 사람들은 다들 그를 명의라고 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최춘국은 1년 후부터 대지를 활보하였다. 상한 다리가 짧아져서 조금씩 절기는 하였으나 그런대로 행군도 하고 전투지휘도 하였다. 임춘추의 대담무쌍한 수술이 크게 은을 낸 것이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최현, 오진우, 조아범, 조도언도 그의 치료를 받고 상처를 완치시키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1937년 가을부터 1938년 가을까지의 옹근 한해 동안 임춘추는 금천현과 임강현, 몽강현 용천진의 대수림지대에 널려있는 인민혁명군의 밀영들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전상자들을 치료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는 경위연대 당서기로 활동할 때 위증민의 곁에 오래동안 가있으면서 그의 사업도 도와주고 병치료도 해주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임춘추의 의술덕을 보시었습니다.

≪나도 1차 북만원정을 끝내고 삼도만 능지영에 있는 동만당 비서처를 찾았을 때 임춘추의 덕을 많이 보았다. 그는 효능이 좋은 초약과 보양제음식을 매일같이 가지고 와서 있는 성의를 다하여 나를 따뜻이 돌보아주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는 저술활동을 통해서도 조선혁명에 특별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임춘추가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가 ≪3.1월간≫의 명예기자로 일한 다음부터였다. 그가 쓴 글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내기관지들에 여러 편 나갔다. ≪3.1월간≫에 실린 ≪만신창이 된 일본경제≫라는 그의 글은 성과작으로 평가되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조국광복회 기관지 (3.1월간)   ≪≪서광≫의 열성필자들 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낸 또 하나의 인물은 임춘추였다. 그는 김영국을 도와 ≪서광≫의 편집과 발간에 적극 참여하였다.≫(≪3.1월간≫, 5권)

≪임춘추는 손에 무장을 잡고 싸우면서 지식으로써 우리 사업을 보좌한 대표적인 인텔리입니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항일무장투쟁초기부터 역사기록과 저술활동을 하였습니다.

임춘추가 역사가로서의 첫걸음을 뗀 것은 연길현 조양천에서 당 및 공청간부들과 내가 한 담화를 기록으로 남긴 때부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조선인민혁명군 종군역사가로서 남호두회의와 남패자회의, 소할바령회의를 비롯한 주요회의들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충실하게 회의기록을 하였습니다.

임춘추는 국제당이 관계하는 출판물들에도 여러 건의 글을 써보냈습니다.

어느 해 였던지 잡지 ≪태평양≫이 그 잡지 특파원과 임춘추의 회견기를 실은 일이 있습니다. 나는 그 회견기를 보고 임춘추가 특파원에게 우리 부대 자랑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임춘추의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를 내가 처음으로 받아본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사대주의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혁명전통교양이 잘되지 않아 인민들과 청소년들속에 우리의 무장투쟁역사가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었다. 적지 않은 간부들은 ≪쏘련공산당약사≫에 대해서는 ≪이스크라≫가 어떻고 부하린이 어떻다고 줄줄 외무면서도 남호두에서 무슨 회의가 있었는가고 물으면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가 출판되어 인민들에게 항일혁명에 대한 윤곽을 처음으로 그려주었다. 그때로부터 이 책은 항일혁명역사를 연구하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원전으로 되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는 김정숙, 김철주의 활동내용을 중심으로 한 회상실기들을 비롯하여 우리 당의 혁명전통과 관련된 많은 책들과 교양자료들을 써냈다. 그리고 많은 자료들을 고증하고 체계화하여 우리 당 역사에 빛나는 위훈을 세웠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그는 청년공산주의자들을 원형으로 하는 ≪청년전위≫라는 다부작 장편소설까지 창작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우리 당은 지금 임춘추를 우리가 개척하고 승리에로 이끌어온 항일전의 빛나는 혁명역사에 대한 권위있는 증견자, 힘있는 보증자로 평가하고 있다. 나는 그 평가가 정확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영화 <시인 조기천>중에서≪임춘추는 우리의 혁명역사를 정립하는데서 뿐 아니라 그것을 소개선전하는데서도 많은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해방 직후에 평남도당에서 당사업을 하던 그는 조기천, 정관철을 비롯한 여러 문화인들에게 보천보전투를 비롯한 우리의 항일빨치산투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임춘추는 혁명전통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도서들과 수많은 회상실기들을 집필완성하여 우리 당 역사문헌고를 풍부히 하는데 공헌하였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임춘추는 늘 전우들에게 대내출판물을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고 국제당에 보내는 보고서나 문건을 작성하는 것도 좋고 혁명군의 전과자료를 종합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공산주의운동과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김사령의 투쟁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해두는 것이다, 내 비록 필치가 무디고 지성도 천박하지만 김일성동지의 전기를 써서 후세에 길이 전하겠다고 말하군 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임춘추는 당사업을 많이 한 노숙한 정치일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치일군으로서의 임춘추보다 문필가, 역사가로서의 임춘추를 더 내세우게 되는 것은 그가 우리의 혁명역사를 정립하는데서 해놓은 일이 그 무엇으로써도 대신할 수 없는 커다란 공헌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임춘추는 풍부한 사료를 가지고 우리의 혁명역사를 종합체계화하고 깊이 있게 고증한 사람입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임춘추의 저술활동을 지도하여 주시고 후원해 주시었습니다.

≪임춘추가 저술활동을 하면서 김정일동무의 지도와 후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 그의 인간적 매력에 탄복하였으며 그를 스승으로, 영도자로 따르고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임춘추는 사업과 생활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김정일동무에게 보고하고 그의 결론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그의 위대성을 소개하고 선전하는 강연도 하고 책도 썼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임춘추는 항상 자기를 김정일동무의 늙은 제자라고 하면서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는 노숙하고 유능한 정치일군이었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의 접촉을 통하여 임춘추가 정치일군의 기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실지로 그는 입대 전에 연길지방에서 대중단체 일군으로서 군중을 교양하고 통솔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군의사업과 함께 당사업을 맡기었다. 그는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위원도 하고 경위연대 당서기로도 활동하였으며 동만당공작위원회사업도 맡아 수행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남패자회의가 진행된 장소≪그래서 우리는 남패자회의가 끝난 후 임춘추를 동만당공작위원회의 책임적 지위에 임명하였다. ≫(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는 나와의 연계밑에 무산, 연사 일대와 동만지방에 수많은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여 당조직과 대중단체들을 확대해나갔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소할바령회의후 왕청, 연길, 돈화, 훈춘, 안도, 화룡 일대에서 소부대활동을 할 때 우리는 동만당공작위원회가 꾸려놓은 혁명조직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는 강의도 잘했지만 학습에 대한 개별지도를 더 잘하였습니다. 그는 토론이나 논쟁을 붙여놓고 매개 청강생들의 준비정도와 배운 지식에 대한 소화정형을 다 요해하고는 필요한 개별수업을 과외시간에 조직하였습니다. 그래도 강의내용을 잘 소화하지 못하는 대원이 있으면 잠자는 시간에 그 대원의 곁에 잠자리를 옮겨가면서 개별지도를 해주었습니다.≫(해방의 날을 그리며, 8권)

≪해방 직후 우리는 항일혁명투사들에게 될수록 높은 지위를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고위직은 국내인사들이나 해외에서 혁명운동을 하다가 들어온 사람들에게 주었다. 우리와 함께 무장투쟁의 시련을 겪은 사람들가운데 능력있는 인재들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다 망라하는 통일전선정치를 하자니 그런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북반부에 5개 도당밖에 존재하지 않던 그때 임춘추에게만은 강원도당위원장의 임무를 맡기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당사업경험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임춘추의 혁명적 의리에 대하여 각별히 회상하시었습니다.

임춘추   ≪나는 우리의 간부들과 당원들이 임춘추의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의리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임춘추는 당과 수령에 대한 의리를 높은 경지에서 구현한 투사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털어놓고 말해서 임춘추는 어려운 항일혁명을 하지 않고 의술만으로도 제 밥벌이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선의 고비를 수십 수백 번이나 넘으면서도 혁명의 길에서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자기 수령과 동지들앞에 지닌 의리를 한 번도 저버리지 않았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는 용정감옥에 갇혔을 때 자기가 죽어도 혁명은 승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자기 개인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혁명조직과 동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야수적인 고문을 이겨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나는 임춘추가 의리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해방 후 여러 가지 사실들을 통하여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그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준비를 위해 중국동북지방에 전권대표로 파견되어갈 때 나는 그에게 동만에 가면 항일혁명열사의 자녀들을 많이 찾아 조국으로 내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임춘추는 중국인민이 어려운 국내전쟁을 치르고 있는 때에 전선을 원호하고 정권기관들을 조직하며 교육사업의 토대를 마련하고 각계각층 인사들과의 사업을 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항일혁명열사의 자녀들을 빠짐없이 조사장악하여 조국에 내보내주었다. . . .

누데기를 걸친 남루한 행색의 아이들이 광고를 보고 찾아올 때마다 임춘추는 그들의 품에 와락 끌어안고 너는 누구의 아들이구나, 너는 누구의 딸이지, 김일성장군님께서 너희들을 얼마나 안타깝게 찾고계시는지 아느냐고 하면서 아이들의 볼을 막 비비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찾아낸 유자녀가 수십 명이 되었을 때 그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장군님, 1차로 찾아낸 유자녀들을 데리고 곧 조국에 나가겠습니다 하고 전보를 쳤다. 나는 그 짤막한 문구들에서 혁명전우들에 대한 의리를 지킨 데서 오는 임춘추의 격정과 희열을 느끼었다.

임춘추는 수많은 유자녀들과 혁명열사의 가족들을 찾아서 조국의 품으로 보내주었다. 그때 학원에 입학했던 아이들이 지금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으로도 되고 도당책임비서로도 되고 인민군장령으로도 되어 일을 잘하고 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유자녀들을 한품에 안으시여

≪임춘추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얼마동안 지방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보건성에서 소집하는 회의에 참가하려고 평양으로 출장을 올 때마다 모란봉에 올라가 투사들의 묘소옆 잔디밭에 백포를 펴고 잠을 자군 하였다고 한다. 시내의 여관에서는 아예 유숙할 잡도리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의 모란봉에는 김책, 안길, 최춘국, 김정숙 등의 묘소가 있었다. 한지에서 그것도 전후좌우에 전우들의 무덤이 있는 산등성이에서 한 장의 백포에 몸을 맡기는 그런 노숙이라 잠이 잘 올 리가 만무하였다. 하건만 임춘추는 평양에만 오면 무작정 모란봉에 올라가 전우들의 무덤곁에 잠자리를 정하군 하였다. 그리고는 그 자신이 훗날 말한 바와 같이 ≪이 사람들아, 조국이 당신들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있은 때에 당신들은 어찌하여 이곳에서 잠들고 있는가. 장군님께서 지금 조선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지고 얼마나 고군분투하시는지 아는가?≫고 하면서 무덤속의 전우들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 . . 나는 그 사연을 듣고 임춘추야말로 의리가 있는 참사람이며 참투사라고 생각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는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동지, 김정일동지께 충실한 혁명가였습니다.

≪임춘추는 내가 발표한 논문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를 가지고 국제연합군시절에 정치강의에 출연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나라의 일부 지휘관들이 우리의 논문을 강의안에 포함시키겠는가고 하면서 좀 고려해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춘추는 우리는 벌써 오래전부터 김일성사령관을 조선민족의 지도자로, 수령으로 모셔오고 있다, 자기 수령의 노작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데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도 많은가고 하면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에 대한 강의를 계속하였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언제인가 임춘추가 무전기를 메고 만주에 소부대공작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령부와 무전연계를 가지면서 몇 달 동안 정치공작을 하였습니다. 그가 그때 임무를 아주 잘 수행하였는데 기지로 들어올 때에는 적구에서 닭알까지 수십 알 구해가지고 왔습니다. . . .

임춘추가 그 닭알보따리를 들고 우리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김정숙과 김정일을 위하는 그의 고결한 진정에 감복하였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임춘추는 병고로 시달리는 인민들에게 의료상 방조를 많이 주었습니다. 김정숙의 가족도 임춘추한테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언제인가 김정숙이 병에 걸렸을 때 그를 구완해준 사람도 임춘추였다고 합니다.

임춘추는 국제연합군시절만이 아니라 한 생을 나와 김정숙과 김정일을 위해 애쓴 사람입니다.

나라가 해방되자 임춘추는 김정숙의 일가친척들을 찾아주기 위해서도 여러 모로 마음을 썼습니다.

그는 후대들에게 김정숙, 김철주, 김기송의 생애와 투쟁업적을 소개선전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여기고 여러 해 동안 자료작업을 한데 기초하여 그들에 대한 책들도 많이 썼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김책, 강건 동무들이 있는 열에 여투사를 2명 배치하였는데 그것은 항일혁명투쟁에서 우리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와 역할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일, 임춘추, 최현을 비롯한 노투사들은 나에게 인민의 일치한 염원이고 전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라고 하면서 김정숙을 거기에 세워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7권)

임춘추가 수령과 영도자에 충실한 혁명가가 된 이유는 실지체험을 통해 수령의 귀중함으로 통감하였기 때문입니다.

≪임춘추는 어떻게 되어 임춘추가 그처럼 자기 수령과 영도자를 열렬히 경모하고 그 영도에 충실한 혁명가로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김혁, 차광수나 김책과 마찬가지로 종파의 해독성을 잘 알고 실지체험을 통하여 수령이 귀중함을 그 누구보다도 뼈에 사무치게 통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임춘추는 위대한 쏘련당의 전례에서 교훈을 찾아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를 당과 국가의 수위에 추대하는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후 언제인가 임춘추는 모스크바붉은광장에서 레닌묘를 참관하다가 우연히 심각한 몰로토프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몰로토프는 그때 임춘추에게 당신들은 쏘련당의 전례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수정주의를 하지 말고 자기 수령의 사상과 업적을 충실하게 계승해 나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임춘추는 그때 후계자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당도 망치고 혁명도 망친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고 합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김일, 최현, 오진우와 함께 임춘추는 김정일동무를 우리 당과 국가의 수위에 추대하는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김정일동무를 나의 후계자로 한사코 추대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에게 인간적으로 매혹되었기 때문입니다.

김일이 늘 김정일동무처럼 수령께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충신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면 임춘추는 김정일동무처럼 혁명선배들을 존대하고 혁명전통을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은 없고 김정일동무와 같은 위대한 사상의 대가, 영도의 대가가 없다고 하였으며 오진우는 김정일동무처럼 무비의 담력과 뛰어난 지략을 소유한 영장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최현과 이종산은 종종 김정일동무처럼 인정미가 풍부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는 임춘추를 사랑하고 존경하시었으며 각별히 배려하시었습니다.

임춘추   ≪김정일동무 역시 임춘추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는 늘 임춘추동지가 앉아계시기만 해도 우리 당과 국가에는 귀중한 재부로 된다고 하면서 그를 극진히 아끼고 돌보아주었다. 임춘추에 대한 김정일동무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속에는 노혁명가들에 대한 지도자의 고결한 의리가 반영되어있다. 그것은 백두산에서 마련된 항일유격대식 의리이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임춘추가 외국에서 대사로 있다가 원칙을 지켜 그 나라 당국자들과 되게 다투고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당안에 있던 종파사대주의자들은 외교관례에 있을 수 없는 일을 했다면서 조직문제까지 보아야 한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동무\은 임춘추가 현대수정주의자들과 잘 싸워 조선의 본때를 보여주었다고 하면서 그에게 우리 집 정원에서 딴 막물복숭아를 선물하였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김정일동무는 임춘추를 혁명의 1세로 내세우고 존대하였습니다. 임춘추에 대한 그의 사랑과 배려는 참으로 극진하였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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