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30일(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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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강의 (9)
- 제22장 ≪혁명의기치를끝까지고수하자≫에서 23장≪국제반제역량과연합하여≫까지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안녕하십니까. ≪세기와 더불어≫강의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는 항일무장투쟁 세째 단계, 곧 마지막 시기에 대하여 학습하겠습니다. 오늘은 소할바령회의, 하바로프스크회의를 중심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소할바령회의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신던 곳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1940년 8월 소할바령에서 역사적인 회의를 주재하시었습니다. 그 회의를 지명을 따서 소할바령회의라고 부릅니다. 소할바령회의는 항일무장투쟁의 전략적 단계를 가르는 겨울명월구회의(1931년 12월)와 남호두회의(1936년 2월)와 격을 같이하는 중요한 회의입니다. 이 회의를 시작으로 항일무장투쟁의 세째 단계, 곧 마지막 단계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항일무장투쟁의 마지막 단계란 곧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준비하는 시기를 뜻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소할바령회의는 다름아닌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전략적 방침을 결정한 회의로 됩니다. 그래서 위대한 주석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에서 제출하신 보고의 제목도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할 데 대하여≫입니다. 이 노작에 대한 해설은 지난 주 금요일자 ≪노작특강≫에 발표된 바 있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당시 독일로부터 비롯된 유럽에서의 전쟁이 확대되고 일본도 중일전쟁을 결속하지 못한 채 동남아시아로 전쟁을 확대하며 ≪후방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광분하고 있는 정세를 분석하시었습니다. 그로부터 일제의 멸망이 확정적이고 시간문제이며 우리 민족이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성취할 날이 멀지않았다는 것을 확신하시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10년간의 항일무장투쟁행정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들을 총화하고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여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역량보존축적을 잘할 데 대한 새로운 노선을 구상하시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소할바령회의를 소집하신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호두회의 장소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먼저 선행단계에서 제출한 전략적 과제가 해결되었가를 꼼꼼히 따져보시었습니다. 남호두회에서 제시된 전략적 임무가 무엇이지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국경지대에로 진출시켜 무장투쟁을 국내에도 확대하는 문제반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과 확대발전, 그리고 당창건을 위한 조직사상적 기초축성의 3대 임무이지요. 다시 강조하는데, 카륜회의이래 중요한 전략적 회의에서 위대한 주석님께서 제출하신 전략적 임무의 체계는 무장투쟁, 통일전선운동, 당창건의 3대 체계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소할바령회의를 준비하시면서도 이러한 3대 전략적 임무에 대한 총화를 먼저 하시었으며 역시 소할바령회의에서의 보고내용도 이러한 3대 전략적 임무를 기본으로 체계화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해방과 함께 제출하신 건당, 건국, 건군의 3대 노선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항일무장투쟁사는 곧 무장투쟁과 통일전선운동, 당창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남호두회의에서 제출된 전략적 임무가 모두 해결되었다고 총화하시었습니다.

무장투쟁의 전략적 단계를 규정하는데서 반드시 고려하여야 할 중요한 문제는 적아의 역량관계의 변화입니다. 역시 이 역량관계가 정세를 규정하는 것이고 이로부터 전략적 임무가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적으로는 적아의 역량이 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달랐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한 사람이 일당백, 일당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지난 기간 수적을 수십, 수백 배나 되는 대적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승리하는 싸움만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임기응변이 능하고 다양한 전법과 전술을 소유한 강군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인민혁명군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당천의 군사이면서도 유능한 정치일군이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군대이자 곧 당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소할바령회의를 회상하시면서 선군혁명노선에 대한 귀중한 교시를 주시었습니다. 바로 ≪돌이켜보면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 뿐 아니라 전반적 조선혁명수행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차지하고 있는 확고한 영도적 지위와 증대되는 핵심적 역할은 우리가 혁명무력건설을 튼튼히 틀어쥐고 그것을 모든 사업에 선행시키는 원칙을 견지한 것이 천백번 옳았다는 것을 뚜렷이 실증하였습니다.≫라는 대목입니다. 일반적으로 주권전취를 위한 공산주의자의 투쟁에서 정치적 영도기관인 당을 먼저 꾸리고 그 다음에 무력건설에 착수하는 것이 하나의 원리로 됩니다. 그러나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혁명무력, 폭력적 진출이 가지는 결정적 역할과 당시 조선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먼저 무력을 건설하시고 다음에 당을 건설하시는 방식을 선택하시었습니다. 실제로 1932년에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가 1934년에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확대발전되면서 조선혁명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에 의거하여 반일무장투쟁의 불길이 높아가면서 전반적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앙양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의 영도와 무력적 담보밑에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도, 조국광복회조직과 통일전선운동의 확대발전도, 전민항쟁의 준비도 성과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조선혁명에서 놀았던 조선인민혁명군의 역할을 총화하시면서 ≪항일혁명시기 우리 혁명의 중추적 핵심역량이며 정치적 향도자이며 민족적 이익의 무력적 담보자였던 조선인민혁명군은 그대로 우리의 군대이자 당이고 정권이었다≫고 지적하시었습니다.

올해 2.16때 공연되었던 "선군의 기치따라"이것이 바로 선군혁명노선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선군혁명사상은 바로 항일혁명시기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선군혁명노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항일혁명시기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이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의 역할을 기본으로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위원장을 동시에 맡아 수행하시면서 조선혁명을 영도하시었다면, 통일혁명시기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위원장)의 역할을 기본으로 조선노동당 총비서를 동시에 맡아 수행하시면서 통일혁명을 영도하고 계십니다. 항일혁명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이야말로 군대이자 당이고 정권이었다면, 통일혁명시기 조선인민군이야말로 군대이자 당이고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일혁명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이야말로 항일혁명의 주력 중 주력이었다면, 통일혁명시기 조선인민군이야말로 통일혁명의 주력 중 주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일혁명시기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가 조선인민혁명군을 영도하고 조국광복회를 지도하며 전민항쟁을 추동하였다면, 통일혁명시기 조선노동당이 조선인민군을 영도하고 전국적 통일전선을 조직, 지도하며 전민항쟁을 추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영도하신 승리한 항일혁명의 경험을 총화하시면서 오늘 통일혁명의 사상과 전략을 정립하시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전사, 제자를 자임하는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통일혁명 사상과 전략을 잘 알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항일혁명사를 깊이 연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인터넷회고록강좌를 개설한 근본이유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새로운 전략적 단계의 과업을 능히 맡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하게 준비되었고 조국광복회역량도 무려 20여만에 이른다고 총화하시었습니다. 또한 국내에 무수히 조직된 노동자돌격대나 생산유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이 모체가 되어 도처에서 전민항쟁을 위한 무장부대들을 조직하고 있는 점도 감안하시었습니다. 그리고 비조직군중들의 동향도 아주 좋았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회고록에서 김일의 소부대의 두만강도하를 도와준 민중들의 일화를 언급하시면서 민중의 정치사상적 준비의 강화와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에 대하여 강조하시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전략적 단계의 과업을 규정하는데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주체적 핵심역량이 튼튼히 준비되었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주체혁명역량의 준비상태가 양호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처럼 먼저 주체혁명역량의 준비정도를 총화하신 연후에 적의 전략전술적 기도에서의 변화를 분석하시었습니다. 1940년 여름에 일본공병장교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적들이 간도일대와 남만쪽에 방대한 군용도로망을 형성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도로들이 바로 적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을 ≪토벌≫하는 데 써먹자는 기동로였던 것입니다. 적들은 또한 이 지역에 비행장들도 대대적으로 건설하였습니다. 이 또한 노조에사령관의 극비지령에 따라 동남부 3성에다 건설되었습니다. 결국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육지와 항공으로 포위하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은밀히 추진중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부대선회작전으로 녹아난 일본군들이 절치부심하며 어떤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판을 내려고 잡도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적정의 급격한 변화는 종전의 전략적 방책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대책이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새로운 전략이 무엇인가요?

소부대활동시기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바로 소부대전술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항일혁명시기 대부대활동과 소부대활동을 배합하시었습니다. 물론 1930년대 후반기에는 대부대활동을 기본으로 하시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주어진 조건과 필요에 따라 소부대활동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적용하시었습니다. 특히 1940년 봄과 여름에는 소부대들을 단위로 하여 도처에서 연속타격, 반복타격, 동시타격을 많이 하였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적들의 ≪토벌≫역량이 증강되고 포위망과 경비망을 좁혀질수록 전투단위를 작게 하여 소부대활동방식으로 유격전을 벌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중요한 경험을 얻게 되시었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바로 이 경험을 소할바령회의에서 총화하시면서 향후의 전략적 단계에 적용할 일반적인 방책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언제나 몸소 모범을 창조하시고 이를 널리 일반화하는 방식은 위대한 주석님의 혁명적인 사업방법 중 하나입니다. 이는 개별과 일반의 변증법적 연관을 응용하신 과학적인 사업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소할바령회의에서 소부대활동방식을 채택하시게 된 데에는 이러한 적정변화에 따라 전술적 대책으로서의 이유만이 아니라 쏘련 및 국제당의 권고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당시 서부에서 독일과의 대전을 준비중인 쏘련은 동부에서 일본의 협격을 받는 것은 무척이나 신경썼습니다. 그리하여 동만이라는 소련국경지대에서의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부대활동이 일본의 대쏘전쟁의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며, 한동안 대부대활동을 중단할 것을 조선인민혁명군에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당시 유일한 사회주의국가이며 조선혁명의 위력한 국제적 지원역량인 쏘련과 국제당의 권고를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차원에서 신중하게 받아들이시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대활동을 소부대활동으로 전환하면 이러한 문제도 해결된다는 점에 착안하시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회의에서 대사변의 시기에 실행하여야 할 전략적 과업을 ≪조선혁명의 중추역량인 조선인민혁명군의 역량을 보존축적하면서 그들을 유능한 정치군사간부로 키우는 것≫으로 규정하시었습니다. 그 대사변은 적아 쌍방의 정치군사적 잠재력이 최대한으로 동원되는 최후결전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그 결전에서 승리자로 되자면 매개 대원들이 종전보다 몇등급 높은 직무를 수행하여야 하였습니다. 조국광복에서도 새조국건설에서도 바로 그 대원들이 핵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최후결전과 새 조국건설, 이 두 가지는 우리 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고 우리 인민의 운명에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전략적 과제로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대신해줄 수도 없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해야하고 조선인민이 해내야 하였습니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이런 전략적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대부대작전을 소부대작전으로 전환할 데 대한 새로운 투쟁방침이 채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부대활동방식은 결코 피동적인 조치가 아니라 주동적인 조치로 됩니다.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조선혁명의 주력군인 조선인민혁명군의 역량을 보존하면서도 군사활동, 정치활동을 지속하여 전체 조선민중을 의식화, 조직화, 전력화하여 전민항쟁을 추동하는 적극적이고 창발적인 방식인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만일 그때 우리가 대세의 흐름을 제때에 보지 못하고 목전의 성과에만 급급하여 대부대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역량도 보존하지 못하고 자기존재를 끝마쳤을 것이며 역사에 순국한 열사들로만 남아있게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지적하시었습니다.

국제연합군의 소부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항일혁명역사에서 1940년대 초반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쏘련과의 국제연합군을 편성하는 문제와 통일혁명의 전략의 전제로서의 항일혁명의 전민항쟁전략의 문제에 미묘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항일혁명의 결정적 시기, 국제연합군을 편성하고 자력으로 전민항쟁을 추동하던 시기의 구체적인 내막과 전략전술이 회고록 8권을 통해 공개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통일혁명의 대사변이 멀지않았다는 사실의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그간 ≪현대조선역사≫나 ≪조선노동당약사≫, ≪역사사전≫, ≪정치사전≫ 등 어떤 자료에서도 볼 수 없는 중요한 사실자료가 회고록 8권에는 풍부하게 담겨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우리 동지들도 회고록 8권을 중시하며 반복해 읽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회고록 8권을 학습하는데서는 소할바령회의라는 전략적, 역사적 회의에 대한 연구와 함께 하바로프스크회의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940년 12월에 소집되어 1941년 3월 중순까지 계속된 하바로프스크회의는 비밀사업을 하는 군대병영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하바로프스크회의에서 논의된 중심의제는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장래활동방향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결국 조선과 동북에서의 유격투쟁과 쏘련군대와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맺으며 그것을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어떻게 적응시키고 강화발전시켜 나가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회의에서 복잡하게 논의되게 된 까닭은 쏘련군이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의 파쑈세력이 방공연합을 형성하고 있고 2차대전이 계속 확대되고 있는 조건에서, 동북항일연군이 독자성을 포기하고 쏘련군과 통합하는 것이 어떤가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쏘련이 원동군과 동북항일연군을 하나로 합치는 군사체계의 창설을 제안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일본에 쏘련침공의 구실을 주지 말자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일작전이 벌어지게 될 경우 원동군과 협동할 수 있는 동맹자를 얻으려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보시었습니다. 문제는 쏘련측이 그 목적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동북항일연군의 독자성을 포기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중국측이 완강히 반대하며 회의가 공회전을 거듭하는데 있었습니다. 쏘련측과 중국측은 모두 위대한 주석님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측의 견해를 듣고싶어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쏘련측에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을 항일연군에 용해시키는 것도 반대하지만 쏘련군대에 배속시키자는 것도 반대한다, 그것은 형식과 내용에서 우리의 독자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그리고 쏘련원동군과의 공동투쟁을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진행하겠는가하는 구체적인 방법문제는 앞으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공동투쟁의 형식과 방법이 쏘련에도 도움이 되어야 하겠지만 조선혁명이나 중국혁명의 이익에도 다같이 맞아야 한다≫고 대답하시었습니다. 이어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중국측에 ≪나는 각자의 독자성만 인정해준다면 여러 무장력의 국제적인 연합을 반대하지 않겠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연합인가 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좀더 연구해보아야 한다, 쏘련측의 제안이 일방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씨앗은 있다, 그러니 무턱대고 배척하지 말자, 우리가 다같이 동지적이고 사심없는 태도로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를 최대한으로 발양하여 공동의 이익에 맞게 문제토의를 빨리 끝내도록 하자≫고 호소하시었습니다. 회의과정에서 발현된 조선의 원칙적인 입장은 조선과 쏘련, 중국 세 나라 혁명무장력사이의 단결과 협조를 실현하는데서 긍정적이고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습니다.

결국 이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항일혁명기간 주로 중국땅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시면서,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의 관계를 독자성을 견지하면서도 공동전선을 형성할 데 대한 원칙적이면서도 용의주도한 결합을 이룩하신 경험이 조선과 쏘련, 중국의 혁명무장력이 독자성을 견지하면서도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문제의 해결방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경험은 국제공산주의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경험으로 됩니다. 훗날 6-70년대 국제공산주의운동대오내의 독자성을 견지하며 단결을 이룩할 데 대한 문제의 해결방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쏘련과 동구사회주의나라들이 동시에 연쇄적으로 와해된 데에는 쏘련의 대국주의와 동구권의 사대주의가 맞물려 작용한 것이 한 이유로 되었습니다. 대국주의는 제국주의와는 질이 다르지만 다른 나라의 자주성을 유린한다는 측면에서는 넓은 의미의 지배주의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나라의 공산당일수록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크게 기여하며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지 독단을 부리고 패권을 노린다면 그만큼 국제공산주의운동대열의 단결에는 부정적인 후과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국주의세력들은 이 점을 주목하여 쏘련과 중국 사이의 갈등과 알력을 조장하는 정책을 구사하였으며 일부 먹혀들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항일혁명시기나 6-70년대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혁명대열에서는 독자성을 견지하면서도 단결과 협조를 이룩하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바로프스크회의가 주는 역사적인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바로프스크회의가 있은 후 쏘련은 원동지역에 2개의 기지를 제공하여주었는데, 조선인민혁명군은 잠정적으로 남야영을 차지하였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당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으로서 남야영을 책임지고 활동하시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원동에 새로운 임시기지를 꾸린 다음 국내와 만주일대를 왔다갔다하면서 소부대활동을 활발하게 벌여나가게 된 것은 항일무장투쟁사에서 하나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하바로프스크회의는 소할바령회의와 함께 우리 혁명의 새로운 전환기를 열어놓은 하나의 계기로 되었습니다. 소할바령회의와 하바로프스크회의는 1940년대 전반기 항일무장투쟁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해주고 조선혁명가들이 조국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면서 다가올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회합이었습니다.≫라고 회상하시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원동의 임시기지에서 군정훈련도 하면서 백두산을 비롯한 국내 여러 곳에 튼튼히 꾸려놓은 비밀근거지를 거점으로 삼고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을 다같이 힘있게 밀고 나감으로써 조국해방의 새날을 앞당기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원동에 임시기지를 정하고 동북지방과 국내에서 적극적인 소부대활동을 벌이던 시기에 국제정세발전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41년 4월에 쏘련과 일본사이에는 중립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독일과 일본은 쏘련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한 세계최악의 호전국가들이었습니다. 쏘련은 반공의 돌격대로 등장한 히틀러독일의 침공을 미연에 방지해보려고 여러 모로 애를 쓰면서 독일과의 있을 수 있는 전쟁을 피하든가 최소한 지연이라도 시킬 목적으로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일본사람들과의 화평을 추구하면서 그들의 침공을 예방하려고 하였습니다. 쏘일중립조약의 체결은 이런 맥락속에 이루어진 일시적인 결과물이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이 조약의 목적은 쏘일쌍방이 서로 상대를 견제하자는 데 있었으므로,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해서 쏘일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담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갑룡과 같이 주체적인 관점이 없고 신념이 약한 일부 대원들은 쏘일중립조약을 보고는 투쟁을 포기하고 변절하고 말았습니다. 쏘련과 일본간의 모순으로 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야 조국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지갑룡의 변절사건에서 조선인민혁명군내에 주체확립을 강화할 데 대한 교훈을 찾으시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조선민중의 힘, 자력으로 독립을 이룩할 데 대한 주체사상이 확고하지 않은데서 큰 나라에 의지하여 혁명하려는 사대주의가 싹 트고 결국 쏘일중립조약이라는 정세변화의 현상만 보고 변절로 이르게 된 것입니다. 통일혁명의 대사변이 임박한 오늘, 갈수록 발악하는 미제국주의와 국내반동들의 반혁명책동에 필승의 신념을 확고히 하며 끝까지 혁명을 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 청년혁명가들에게 필요한 것도 역시 주체적인 사상관점입니다.

1941년 6월에는 소독전쟁이 발발되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소부대의 전체성원들에게 ≪불가침을 약속했던 독일이 쏘련을 침공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히틀러는 처신을 달리할 수 없다, 앞에서는 악수를 하고 돌아서서는 불의에 뺨을 때리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자들의 본성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산하고 있다, 독일이 쏘련을 침공하는 것은 히틀러의 무덤을 파는 것으로 될 것이다, 대세가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우리는 곁눈을 팔지 말고 기존방침대로 최후결전준비를 착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시었습니다. 1941년 1월 일본군은 하와이에 있는 미군기지 진주만을 불의에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터쳐놓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결속짓지 못한 상태에서 또 하나의 다른 전쟁을 도발한 것은 무모한 도박이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석유, 고무, 철과 같은 전략물자를 긁어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섬나라 일본이 무슨 타산을 가지고 그런 모험에 뛰어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국력을 탕진하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습니다.≫라고 지적하시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이라는 큰 함정속에 스스로 뛰어든 것을 조선혁명의 최후결전을 앞당길 수 있는 좋은 계기로 판단하시었습니다. 또한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쏘일사이에 조마간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시었습니다. 그리고 쏘일전쟁이 현실로 된다면 일본은 중국, 미국, 쏘련을 상대로 하는 세 방면에서의 큰 전쟁을 동시에 치르게 되니 조선인민혁명군은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작전을 벌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을 내다보시었습니다.

국제연합군의 전우들과 함께 계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이런 정세변화의 조건에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핵심으로 하는 주체혁명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국제반제반파쑈역량과의 연대를 강화하는데 역점을 주시었습니다. 조선, 쏘련, 중국의 세 나라 무장력의 협동을 실현하는 것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우리 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고 그것을 확대공고히 하기 위한 국제적 환경을 마련하는데서도 반드시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될 전략적인 문제≫였다고 회상하시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앞서 밝힌대로 조선인민혁명군의 독자성은 독자성대로 유지하면서 중국의 무장부대들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을 뭇고 공동투쟁을 해온 경험에 바탕하여, 조선, 쏘련, 중국의 세 나라 무장력의 이상적인 연합형태를 국제연합군으로 보시었습니다. 그리고 1942년 7월 중순경, 세 나라 군사간부들이 이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토의결정하고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의 독자성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전제하에 국제연합군을 창설할 데 대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식상 국제연합군을 쏘련원동군 독립88여단으로 부르도록 하고 부대의 대외번호는 8461보병특별여단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국제연합군이 여단으로 조직된 것은 그 존재와 활동의 비밀을 보장하며 위장을 철저히 하기 위해 축성하여 편성하는 원칙 때문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1로군 역량으로 편성된 제1지대, 곧 국제연합군의 조선지대를 지휘하시었습니다.

1943년 5월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이 원동의 훈련기지에 날아왔습니다. 레닌의 1919년에 조직한 국제당이 해산된 데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보시면서, 그 하나의 이유는 ≪국제당이 세계혁명을 영도해오는 동안 각국에서 공산주의적 정당들과 혁명역량이 충분히 자라나 국제당의 중앙집권적인 영도와 간참이 없이도 자기나라 혁명을 자신의 노선과 힘에 의거하여 독자적으로 추진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의 이유는 ≪존재가 세계적인 범위에서의 보다 폭넓은 반파쑈연합을 실현해 나가는데서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되고 있었던 사정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보시었습니다. 사회주의국가인 쏘련과 자본주의국가들인 미국, 영국, 프랑스가 반파쇼연합을 이룩할 수 있는 조건에서 반제,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국제당의 존재가 재고되게 된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국제공산당의 해산에 대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당시 정세발전의 요구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시기적절한 조치로 된다≫고 인정하시면서 ≪우리는 일찍부터 남의 힘이나 노선에 의거하지 않고 혁명의 매단계에서 전략과 전술도 자체로 채택하고 혁명역량도 자체로 꾸리면서 만사를 자주적으로 개척해온 우리 자신의 투쟁노정을 두고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라고 회상하시었습니다. 그러시면서 국제당이 해산되었지만 ≪우리는 국제연합군의 테두리안에서 활동의 독자성을 계속 고수하면서도 의연히 국제적인 벗들과의 단결과 협조를 강화 나갔습니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역시 국제당의 해산조치를 받아들이는데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조선혁명을 중심에 놓고 자력을 기본으로 해방을 이룩하겠다는 주체적인 관점이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회고록 8권의 전반부와 중반부에는 세 명의 혁명가에 대한 중요한 회상기록이 담겨있습니다. 바로 백두여장군 김정숙동지김책, 위증민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탄생과 백두산 및 원동기지에서의 유년시절에 대한 회고가 나옵니다. 이에 대하여는 인터넷회고록강좌의 다른 시간들에 자세히 공개되기에 이 자리에서는 위대한 주석님의 중요한 회상교시를 발췌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시간순으로 하면 ≪위증민에 대한 회상≫, ≪혁명가 김책≫,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혁명의 뿌리를 가꾸며≫로 됩니다. 하나하나 깊이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다음 시간, 마지막 강의시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위증민≪위증민은 인간으로서도 훌륭한 사람이었고 혁명가로서도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인간이고 훌륭한 혁명가였기 때문에 우리도 있는 성의를 다하여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위증민이 보살펴주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였습니다. 위증민을 목숨으로 보호해준 국제주의전사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조선혁명에 대한 관심과 우리에 대한 우애에 있어서 위증민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때 위증민 곁에 가서 오래 일한 바 있는 우리 동무들의 말에 의하면 위증민은 언제나 조선혁명의 운명을 우리와 연결시켰고 그래서 말끝마다 김일성동지를 잘 받들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증민의 생애가 아름다운 일생으로 되는 것은 시작과 끝이 같은데 있습니다. 인생의 첫 자욱을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뗀 사람은 인생의 마감도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일생의 사람들의 추억속에 영원히 남는 고결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될 수 있습니다.

항일혁명시절에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참으로 깨끗하였습니다.

국제공산주의운동내부에 현대수정주의가 대두하면서부터는 국제주의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별반 없습니다. 입만 벌이면 국제주의를 부르짖던 사람들도 지금은 제 주머니를 채우느라고 바삐 돌아가고 있습니다.

못먹고 못입어도 혁명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국적을 따지지 않고 먹어라, 써라 하던 때가 좋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언제 어떤 환경에서나 국제주의적 의무와 의리를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김책≪김책은 한생을 나의 충직한 전우로 살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내 그래서 그 사람을 더 잊지 못합니다. 김책이 돌아간 다음 나는 그의 자식들을 친부모처럼 돌보아주었습니다. 외국에 유학도 보내고 잔치도 차려주고 손녀가 태어났을 때는 축하도 해주고 우리 집에 종종 불러다가 음식도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김책을 위해 무엇인가 더해주지 못한 것만 같아 노상 허전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혁명이 시련에 부닥치거나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할 때면 김책 생각이 정말 간절해집니다.

내가 그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김책의 묘앞까지 차를 타고 가지 못합니다. 그의 묘지를 찾을 때는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죄스러워 대성산밑에서 내려 걸어서 올라가군 했습니다.

김책이 저 세상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내 마음이야 변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나는 혁명을 하면서 많은 것을 체험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가슴깊이 새긴 것 중의 하나가 동지에 대한 체험입니다.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결사의 각오를 품고 혁명의 길에 나선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귀중한 것이 바로 동지이고 동지애입니다. 진실한 동지는 제2의 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충직하고 의리깊은 동지들이 뭉치면 하늘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동지를 얻으면 천하를 얻고 동지를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고 말하곤 합니다.

동지라는 말은 뜻을 같이한다는 말인데 뜻이란 곧 사상입니다. 일시적인 이해관계나 타산에 의하여 맺어진 동지관계는 공고할 수 없으며 때에 따라 쉽게 깨여지고 맙니다. 그러나 사상의지적으로 결합된 동지관계는 영원하며 총알도 단두대도 그런 동지관계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조선혁명은 영도자에 대한 충정으로 숭고한 모범을 보여준 수많은 동지들을 낳았습니다. 그런 동지들이 우리 주위에 하나의 은하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김책이 서거한 다음 우리는 그를 영원히 추억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 가까이에 있는 성진시와 그의 심혈이 깃든 청진제철소, 그리고 평양공업대학을 각각 김책시, 김책제철소, 김책공업대학으로 명명하고 인민군대의 한 군관학교도 그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김책시에는 그의 동상도 세웠습니다.

나는 오늘도 사회주의건설에서 언제나 김책의 이름을 가진 도시와 공장, 대학이 앞장서기를 바랍니다.≫(혁명가 김책)

김정숙동지≪한평생 동지들과 인민들을 위해 모든 것을 송두리채 바치고 세상을 떠나간 김정숙이었지만 자녀들을 위해서는 한푼의 돈도 재산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가 소비한 돈은 내가 받은 생활비였고 그가 사용한 집과 가구들은 다 나라의 것이었습니다.

김정숙동무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김정일동무를 미래의 영도자로 키워 당과 조국앞에 내세워준 것입니다. 동무들은 내가 김정일동무를 후계자로 키워냈다고 하지만 사실 그 기초는 김정숙이 쌓아놓은 것입니다. 그가 혁명앞에 남긴 가장 큰 공로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김정숙동무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에도 김정일동무를 불러앉히고 그에게 아버지를 잘 받들라는 것과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김정일동무에게 남긴 유언으로 되었습니다. 그 유언을 남긴 후 3시간이 지나서 김정숙은 눈을 감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김정숙을 자주 생각하군 합니다. 그가 여러 해 동안 치마저고리도 입고 다녔지만 어째서인지 사복을 입은 모습보다 군복을 입은 모습이 더 자주 떠오릅니다. 제일 많이 떠오르는 것이 몸으로 말린 옷을 들고 나를 찾아왔을 때 오한으로 떨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습니다.≫(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정일봉≪김정일동무의 생가가 있는 골짜기를 소백수골이라고 부릅니다. 소백수골안은 우리 나라의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뛰어난 절경입니다. 1980년대에 우리가 이 밀영을 발굴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백수골안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미치지 않는 천고의 밀림이었습니다.

군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도 천험의 요새나 금성탕지라고 할만한 곳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의 소재지로서는 명당자리였습니다.

정일봉의 이전 이름은 장수봉입니다. 김정일동무의 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서 장수봉을 정일봉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우리 인민들은 지금 노래까지 지어부르면서 온 세상에 정일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김정일동무를 민족의 영도자로 키운 것은 백두산입니다. 백두산의 투사들이 그를 향도성으로 내세워 주었으며 백두산의 정기가 그의 기개로 되었습니다.

우리 혁명의 대가 굳건한 것은 김정일동무가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나서자란 민족의 영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만민의 지지와 총애를 받는 인민의 영도자입니다.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와 인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임속에서 수령의 후계자가 되고 민족의 영도자가 될 김정일동무의 위업은 앞으로도 필승불패할 것입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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