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27일(금)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지난 강좌 보기

회고록과 당건설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회고록에 나오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당건설 사상과 이론, 그리고 당건설위업은 회고록의 시간과 권별 순서를 따라가며 이해하는 것이 가장 간명하다.

1권

ㅌ.ㄷ를 조직하신데 대한 자료≪우리는 준비기간을 거친 다음 당시 중국의 국경절인 쌍십절(10월10일)에 조직을 내오기 위한 예비회의를 열고 조직의 명칭과 성격, 투쟁강령, 활동규범들에 대한 토의를 하였으며 한 주일 후인 1926년 10월 17일에는 김시우네 집에서 정식으로 조직을 무었다. . . .

우리가 내오게 된 조직의 강령에는 아버지의 이념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날 모임에 참가하여 열변을 토하던 청년들의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 최창걸, 김리갑, 이제우, 강병선, 김원우, 박근원,… 후날 배신은 하였지만 이종락과 박차석도 혁명을 위해 피와 살을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전투적인 언약을 하였다. . . .

그 모임에서 나는 우리가 뭇는 조직을 타도제국주의동맹으로, 약칭으로는 ≪ㅌ·ㄷ≫라고 할 것을 제의하였다. . . .

타도제국주의동맹의 당면과업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는 것이며 최종목적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며 나아가서는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세계에 공산주의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 . .

그 회의에서 최창걸이 나를 타도제국주의동맹 책임자로 추천하였다. . . .

그 후 ≪ㅌ·ㄷ≫성원들은 우리가 개척한 혁명위업이 어려운 국면에 처할 때마다 항상 육탄이 되어 그 출로를 열어나갔다. 그들은 조선혁명의 핵심부대로서 어데서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혁, 차광수, 최창걸, 김리갑, 강병선, 이제우를 비롯하여 ≪ㅌ·ㄷ≫의 산아들 중 많은 사람들은 투쟁의 앞장에서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고결하게 생애를 마치었다. . . .

우리 당 역사에서는 ≪ㅌ·ㄷ≫를 당의 뿌리로 보고 있으며 ≪ㅌ·ㄷ≫의 결성을 조선공산주의운동과 조선혁명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시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 뿌리에서 우리 당의 강령이 태어나고 우리 당 건설과 활동의 원칙에 마련되고 우리 당창건의 골간이 육성되었다. ≪ㅌ·ㄷ≫가 조직된 때로부터 우리 혁명은 자주성의 원칙에 기초하여 새로운 걸음을 떼였다.≫(타도제국주의동맹, 세기와 더불어 1권)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결성 모임이 이루어진 약왕묘 지하실≪우리는 이런 준비에 기초하여 1927년 8월 28일 북산공원의 약왕묘 지하실에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모임을 가지었다.

모임에는 최창걸, 김원우, 계영춘, 김혁, 차광수, 허율, 박소심, 박근원, 한영애를 비롯한 반제청년동맹 핵심들과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참가하였다. . . .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은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의 선봉대로서 각계각층 대중단체들을 조직지도하는 전위조직이었다.≫(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세기와 더불어 1권)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인민대중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결속하며 투쟁에 동원할 대신 인민들과 동떨어져 말공부나 하고 ≪영도권≫쟁탈을 위한 권력싸움만 하였다. . . .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자체로 당을 꾸리고 혁명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파가 ≪정통파≫라고 하면서 감자도장까지 만들어가지고 국제당의 승인을 받으러 돌아다니었다.

나는 우리 나라 민족주의운동과 초기공산주의운동의 이러한 실태를 분석하여 보고 혁명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심각히 느끼게 되었다.

이로부터 나는 자기 나라 혁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수행하여야 승리할 수 있으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 말하는 주체사상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 . .

그때 나는 우리 나라의 구체적 현실과 사회계급적 제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무장한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하자면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하며 노동자, 농민, 민족자본가, 종교인을 비롯한 모든 반일애국역량을 반일의 기치하에 묶어세워 투쟁에 불러일으키고 파쟁이 없는 새로운 혁명적 당을 창건하여야 한다는 투쟁방침을 확정하였다.≫(철창속에서, 세기와 더불어 1권)

2권

카륜회의

≪우리가 카륜에서 이처럼 조선혁명의 진로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시절에 이미 청년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조선혁명에 대한 주체적 입장과 태도를 확립하고 공산주의운동의 새 길을 개척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투쟁의 나날에 심어지고 옥중에서 무르익힌 그 사상과 입장을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을 뿐이다.

그것이 곧 우리 혁명의 노선으로 되고 지도사상으로 되었다.

우리가 그 논문에서 전개한 내용을 보면 모두가 주체사상을 핵으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당이 혁명에서 참모부의 역할을 수행하며 당의 역할에 따라 혁명의 승패가 좌우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혁명이 역사의 기관차라면 당은 혁명의 기관차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당을 중시하고 당을 꾸리는 일에 그처럼 큰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맑스가 과학적 공산주의이론을 창시한 후 실천투쟁에서 첫 사업으로 공산주의자동맹을 창건하고 ≪공산당선언≫을 발표한 것이 그의 활동에서 가장 큰 공적으로 오늘까지도 찬양되고 있는 것은 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서 당이 노는 사명과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지기 때문인 것이다.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노동운동상에서 나타났던 여러 가지 유형의 기회주의, 개량주의도 구경은 당에 대한 견해와 입장이 그릇된 데서 발생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산주의가 새로운 시대사조로서 노동운동무대에 출현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지구상에서 이룩해놓은 모든 세기적 변혁들은 그 어느 것이나 다 당이라는 신성한 이름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는 카륜회의에서 내세운 과업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당조직을 내오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리가 새 형의 당을 창건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그 방도를 전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공산당이 국제당에서 제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였다. . . .

국제당의 지시에도 부합되고 조선혁명도 강력히 추진시킬 수 있는 그런 길이 과연 없단 말인가.

이런 모색 끝에 내가 찾아낸 출로가 바로 선행공산주의운동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조급하게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착실하게 다지고 그 토대 우에서 명실공히 우리 혁명의 참모부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당을 창건하자는 것이었다. 계급적으로 각성되고 준비된 조직적 골간의 육성대열의 사상의지적 통일, 당이 의거할 수 있는 군중적 지반의 구축이 없이 주관적 욕망만으로는 당을 창건할 수 없었다.

나는 종파와 인연이 없는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을 골간으로 기층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 방법으로 당을 창건하는 것이 우리앞에 주어진 가장 적합하고 현실적인 창당방법이라고 간주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당을 창건하면 국제당에서도 환영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키워온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로 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 역할을 부단히 높여나가면서 우리의 발길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기층당조직을 확대강화해 나간다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지도도 능히 보장하고 우리에게 지워진 국제적 임무도 원만히 이행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중국땅안에서 우리의 당중앙을 따로 내와 가지고 중국당과 병존하지 않는다면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도 모순될 것이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정립하여 카륜회의에서 당창건방침을 제시하고 첫 당조직을 내오게 되었다.

혁명적 당조직을 결성하는 것우리 혁명발전의 필연적 요구이기도 하였다. . . .

지난날 공청이 여러 대중단체들을 지도한 것은 과도적인 현상이었지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당을 만들어 그 당이 공청을 비롯한 여러 대중단체들을 장악하고 민족해방운동전반을 영도하며 중국당과의 관계도 가지고 국제당과의 사업도 해야 하였다. 공청의 간판을 가지고서는 국제당과의 거래도 원만히 할 수 없었다. . . .

≪ㅌ·ㄷ≫의 결성은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종전의 당과 구별되는 새 형의 혁명적 당창건을 위한 출발점으로 되었다. 모든 것이 ≪ㅌ·ㄷ≫로부터 시작되었다. ≪ㅌ·ㄷ≫가 발전하여 반제청년동맹으로 되고 공청으로 되었다.

공청이 키워낸 우리 혁명의 핵심부대, 반제청년동맹이 이루어놓은 우리 혁명의 대중적 지반이 곧 당창건의 기초로 되었다. 공청이 창립되고 그것이 강력한 전위조직으로 혁명운동을 영솔하던 나날에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선행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범하였던 오류들을 극복하고 대중전취와 영도예술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 . .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서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는 것은 카륜회의를 계기로 조선혁명의 지도사상을 정립해놓은 것이었다. . . .

지도사상, 영도핵심, 군중지반, 이것은 당조직을 내오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첫 당조직을 무으시는 김일성동지

우리는 1930년 7월 3일 카륜의 진명학교교실에서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최효일 동무들로 첫 당조직을 무었다.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김리갑, 김형권, 박근원, 이제우 동무들도 첫 당조직의 성원으로 되었으며 조선혁명군 대장으로 내정되어있던 이종락과 박차석도 이 조직의 성원으로 되었다. . . .

다만 당조직성원들이 해야 할 과업으로 기층당조직을 확대하고 그에 대한 통일적 지도체계를 수립할 데 대한 문제, 대오의 조직사상적 통일과 동지적 단합을 확고히 이룩할 데 대한 문제, 혁명의 대중적 지반을 튼튼히 다질 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실현방도로서 당조직이 모든 활동에서 자주적 입장을 확고히 견지할 데 대해서와 당조직 건설사업을 반일투쟁과 밀접히 결부시킬 데 대하여 강조하였을 뿐이다. . . .

첫 당조직 건설동지사우리 당의 태아였고 씨앗이었으며 당의 기층조직들을 내오고 확대하는데서 모체적 의의를 가지는 조직이었다. . . .

국내에 당조직을 내오는 일은 내가 맡아하였다. 나는 1930년 가을에 우리의 영향이 비교적 강하게 미치고 있던 함경북도 온성군에 나가 국내 당조직을 무었다. . . .

우리가 중국공산당과의 깊은 연계밑에 공동투쟁을 발전시켜나간 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혁명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당시의 복잡다단한 정세 1국1당제에 관한 국제당 노선의 요구에 부합되는 주동적이면서도 신축성있는 조치였다. 우리는 중국공산당과의 이러한 공동투쟁을 적극 발전시키면서 시종일관 조국해방의 기치,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견지하였으며 그것을 빛나게 관철하였다. . . .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된 후 우리는 유격대 안에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내왔다. 그것은 카륜에서 조직된 첫 당조직의 확대발전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우리의 자주적인 당조직은 그 후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농조, 노조들에도 뿌리를 뻗치었다.

우리가 조국에 개선한 후 한 달도 못되는 사이에 당창건의 위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항일혁명의 장구한 나날 당건설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2권)

김혁차광수최창걸

≪김혁을 하얼빈에 보낸 중요한 목적은 하얼빈일대에서 우리의 혁명조직을 늘이는 한편 국제당과의 연계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 . .

내가 나이도 어리고 투쟁경력도 짧았지만 그들이 나를 세우지 못해 그처럼 애쓴 것은 통일단결의 중심도 없이 각당, 각파가 저마끔씩 영웅호걸행세를 하면서 파쟁으로 혁명운동을 말아먹던 전 세대의 운동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고 나라를 찾자면 2천만 민중이 합심해야 하며 2천만 민중을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하자면 영도의 중심, 통일단결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도록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김혁, 차광수, 최창걸과 같은 사람들을 그토록 사랑하고 잊지 못해 하는 것은 그들에 나에 대한 노래를 짓고 나를 지도자로 내세워서가 아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 민족이 그처럼 절절하게 바라면서도 실현할 수 없었던 통일단결, 우리 인민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무궁무진한 힘의 원천인 참다운 통일단결의 시원을 열어놓고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에서 영도자와 대중의 일심동체를 이룩한 통일단결의 새 역사를 피로써 개척한 선구자들이기 때문이다. . . .

그들의 첫째가는 역사적 공적이 바로 거기에 있다. 지도자를 내세우고 그 지도자를 핵으로 통일단결한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넋은 오늘 우리 당이 일심단결이라고 부르는 통일단결을 낳은 위대한 전통으로 되었다.≫(혁명시인 김혁, 세기와 더불어 2권)

두루봉 혁명사적지

≪온성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는 1930년 10월 1일 두루봉에서 당조직을 무은 것이었다. . . .

나는 먼저 회의참가자들에게 카륜에서 채택된 노선을 전달하고 그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선차적으로 나서는 과업은 혁명적인 당을 건설하는 것임을 밝힌 다음 온성지구에서 새 형의 당조직을 내오게 되는 취지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조직생활과 실천을 통해 검열된 우수한 선진분자들로 당대열을 부단히 확대강화할 데 대하여서와 대중을 반일투쟁에 조직동원할 데 대한 온성지구 당조직의 과업을 제기하였다.

나의 제의에 의하여 오중성, 전장원, 전창룡, 최춘국, 최봉송, 최근주 동무들이 온성지구 당조직에 가입하였다. 당조직책임자로는 오중성동무가 선거되었다. . . .

온성지구에 당조직이 나온 것은 국내에서 당건설의 기초를 축적하는 돌파구로 되었으니 국내인민들의 반일투쟁을 떠밀어주는데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되었다. 온성지구 당조직의 활동에 의하여 육읍일대에서는 대중의 의식화, 조직화 과정이 빠른 속도로 다그쳐지고 반일투쟁이 앙양되었다.≫(두만강을 건너, 세기와 더불어 2권)

3권

≪당이 해산되게 된 기본적인 이유의 하나를 지도자와 영도핵심이 없는데서 찾는 반성위의 말은 당 해산의 1차적 원인을 파쟁에서만 찾아보는데 습관된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국제당의 인정을 받을 만한 세계적인 지도자의 결핍, 그것으로 하여 조선공산당의 해산을 저지시킬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는 반성위식의 분석이고 발견이었다. . . .

≪내가 조선혁명가이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공산당을 창건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오. 조선공산당이 해체선언을 받았다고 해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당재건의 가능성을 영영 박탈당한 것으로 그 선언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오. 조선사람이 자기의 당을 가지는 것은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정정당당한 권리요. 곁방살이도 한두 해이지 한정없이 남의 집에 그냥 얹혀 살수야 없지 않소.≫

국제당파견원 이기동(반경유)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당을 재건해야 한다는 반성위의 주장은 카륜에서 채택되었던 우리의 당창건 방침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나는 반성위의 그 말에 힘을 얻었다.

≪옳습니다. 조선사람이 자기 당을 재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조선혁명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집 곁방에서 눈치놀음이나 하며 껄렁껄렁한 세월을 보내는 그런 인간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입장을 가지고 우리는 세 해 전에 이미 기층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 상향식 방법으로 당을 창건할 데 대한 새로운 방침을 내놓고 건설동지사란 명칭을 가진 당조직을 내왔습니다.≫ . . .

≪내가 공상가라면 동무는 철저한 실천가라고 할 수 있겠구만. 어쨌든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것 보시오. 조선공산주의운동 선상에는 파벌이 너무 많아서 야단이오. 그러니 파벌을 하는 놈팽이들은 인정하지 말고 반드시 젊은 사람들끼리 새 출발을 해야 하오. 종파를 그냥 두어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소. 적잖은 종파꾼들이 왜놈의 개가 되었소. 개가 안 된 놈팽이들 가운데도 종파습성이 골수에 사무쳐서 혁명을 하려고는 생각지 않고 헤게모니 쟁탈에만 열중하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소. 파벌과 싸우려면 우리가 반일투쟁을 잘해야 합니다. 투쟁과정에 대열이 강화되고 핵심이 묶어지면 그것이 곧 당을 창건하는 밑천으로 되는 것이오.≫ . . .

나는 어떻게 하든지 조선사람들로 핵심을 꾸리고 그들을 묶어세워 당도 창건하고 조국해방의 대사도 이루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더욱 굳게 다졌다.

반성위와 함께 국제공산주의운동 문제와 국제당문제, 조선에서의 당건설문제를 논의하고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국제당파견원, 세기와 더불어 2권)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과정에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가 새로운 당지도기관으로 출현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는 군대 안의 당조직에 대한 지도와 함께 지방의 당조직들에 대한 지도도 동시에 감당하는 무거운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무력의 담보가 없이는 지방당조직들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전까지는 지방당조직들이 군대안의 당조직까지 지도하였다.≫(조선인민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3권)

4권

다홍왜회의 장소≪그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한다고 하여 자기 조국을 해방하고 자기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워야 할 신성한 권리마저 포기해야 하는가. . . . 매개 나라 혁명에는 자체의 노정이 있고 시간표가 있다. 자체의 역량이 준비되지 못하면 이웃나라의 혁명이 승리한다고 해도 그 승리가 절대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남들이 자기 나라 혁명을 도와주는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체의 힘으로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혁명에 대한 주인다운 태도이다. . . .

공산주의자들은 그 어디에 가서 활동하건 자기 나라 혁명의 구호를 들고 싸워야 하며 그것으로 그 나라 혁명도 도와주고 세계혁명에도 이바지해야 한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는 자주적 권리이며 신성한 의무이다.≫≫(다홍왜에서의 논쟁, 세기와 더불어 4권)

남호두회의 장소≪남호두회의는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투쟁 역사에서 처음으로 주체를 완전히 확립한 회의라고 할 수 있다. . . .

남호두회의는 또한 승리자들의 잔치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승리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과 인민과 역사와 시대앞에 아낌없이 바친 무수한 희생과 피와 노고의 대가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의 파쟁과 조선공산당의 해산, 반≪민생단≫투쟁에서 범한 좌경기회주의자들의 오류로 하여 국제당에서도 경원시되고 형제나라 당들에서도 경원시되고 부분적이기는 하나 우리 인민들에게도 경원시된 조선공산주의운동은 남호두회의를 계기로 하여 지난날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승승장구 할 수 있게 되었다.

소자지하에서는 회의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강습이 한 주일 가량 계속되고 당창건방침에 대한 실현방도를 토의하기 위한 당정치일군회의가 진행되었다.≫(경박호기슭에서, 세기와 더불어 4권)

5권

박달≪참으로 박달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나온 이후시기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의 일원화맨 처음으로 실현한 국내혁명가의 당당한 대표자였으며 우리를 위하여 일도 제일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겪은 우리의 국내전권대표였다. 박달과 같은 이런 투사들의 덕으로 우리는 해방 직후 그처럼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단시일안에 당을 창건하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일떠세울 수 있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우리 자체의 독자적인 공산당을 가지는 것조선혁명가들의 일관한 염원이었고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하면서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내세웠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과업의 하나였다.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의 전기간 혁명투쟁의 실천속에서 단련육성된 우수한 전위투사들로 당의 기층조직들을 확대강화해 나가는 자주적인 당건설방침을 관철하도록 하였다.

항일혁명의 주력을 담당했던 조선인민혁명군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를 책임진 당건설의 주도적 역량으로 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영도적 기능과 역할이 높아지는 가운데 활발히 조직전개된 당건설사업무장투쟁을 정치적으로 강력히 뒷받침하는 한편 그에 대한 당적 영도와 대중적 지반을 강화하고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가는 강력한 추동력으로 되었다.

항일무장투쟁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공산주의적 전위투사들에 의하여 추진된 당조직건설사업은 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의 당당한 주류를 이루었으며 확고한 정통성을 대표하게 되었다. . . .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국제당1928년에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고 그것을 재조직할 것을 지령하였으며 1국1당제원칙에 따라 만주와 일본에 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주재국의 당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였다. . . .

문제는 국제당이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서 모체조직을 거세해버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구차스러운 곁방살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굴욕적인 처지에 떨어지게 한데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하여 우리는 처음부터 국제당의 처사를 온당하게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서 엇나가거나 운동 그 자체를 줴버리는 것과 같은 자포자기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제당이 취한 조치를 일시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자체의 주동적 노력으로 새 형의 당을 건설하기 위하여 꾸준하게 투쟁하였다.

우선 국제당에서 내놓은 원칙이 용납하는 테두리 안에서 우리 혁명의 구체적 실정에 맞는 방도들을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독자적인 당을 내오기 위한 준비를 추진시켜나갔다. ≪ㅌ·ㄷ≫의 전위투사들을 망라한 건설동지사의 조직은 그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 . .

물론 그 시기에 벌써 우리는 온성, 종성 등 두만강 연안의 국내 여러 곳에 몇 개의 기층당조직을 꾸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당조직건설을 위한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적인 활동판도는 아직은 동만이었다.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튼튼히 꾸리는데 주력하면서 간도 각 현의 당조직들과 밀접한 연계속에서 우리 당 조직을 확대해나갔으며 앞으로 국내에 당조직을 대대적으로 꾸려나가는데 필요한 핵심들을 육성하였다.

우리가 남호두회의 정신에 따라 당건설방침을 심화시키고 그 방침의 실현을 위한 대책적 문제들을 토의한 것은 1936년 5월의 동강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는 국내에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기틀을 본격적으로 마련하기 위한 과업이 상정되고 그 대책으로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고 혁명투쟁의 골간들로 전위적인 당조직을 확대할 데 대한 문제가 협의되었다.

그때 동강회의에서는 당조직건설사업은 유격대에 국한시켜도 안되고 동북일대만을 무대로 삼아도 안되며 국내깊이까지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 지금까지는 두만강 대안 국경연선의 일부 지역들에만 기층당조직을 내왔으나 이제부터는 국내의 광활한 지대에 당조직들을 꾸려나가야 하며 국내에서의 당창건 준비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하여서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내와야 한다는 문제들이 중점적으로 강조되었다.

국내당공작위원회를 내오는 문제는 전국적 범위에서 벌어지게 될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화하기 위하여서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 . .

조국광복회 문제에 대한 논의가 끝난 다음 나는 박달과 함께 국내에 당조직을 꾸릴 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반나절이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맑스나 레닌은 누구의 승인도 받지 않고 당을 만들었는데 우리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국제당은 이미 1928년 12월 테제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앞에 당재건의 과업을 제시하였습니다. 테제에 명시된 대로 국내에 우리 당 조직을 내오려고 하는데 누가 감히 그걸 시비하겠습니까. 국제당도 시비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승인이고 비준이고 하는 문제자체가 설정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자주권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집안일을 우리 집안사람들끼리 처리하면 되는 것인데 괜히 바깥사람들에게 우리 집일을 어떻게 하라느냐고 물을 필요야 있습니까? 조선혁명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닙니까.≫ . . .

국내의 당조직들은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에 소속되고 또 그 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조선에 공산당이 없는 현재의 특수한 상황에서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는 조선혁명전반에 대한 영도적 기능을 담당한 참모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당위원회의 활동은 무력에 의해 튼튼히 보호되고 있습니다. 일제의 야만적인 헌병경찰통치는 조선에서 당재건의 모든 가능성을 박탈해버리었습니다. 당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투사들의 대부분이 지금 철창속에 갇혀 있습니다. 적들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은 것은 오직 무력의 담보를 받고 있는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뿐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가 조선혁명 전반에 대한 영도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가 조선혁명의 참모부적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은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발전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역사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사명을 수행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앞으로 조직되게 될 국내당공작위원회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적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 . .

≪내가 보건대 그것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후차를 결정하는 거야 구체적인 조건과 실정이지 여기에 12월 테제가 무슨 상관입니까. 조건에 따라 당조직을 먼저 내올만한 곳에서는 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군중단체를 먼저 내올만한 곳에서는 군중단체를 먼저 내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당원자격을 갖춘 사람이 단 3명이라도 있다면 그 3명만으로도 당장 공산당 소조를 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원자격을 갖춘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군중단체를 먼저 내오고 거기서 공산주의자들을 키워낸 다음 당조직을 꾸릴 수 있습니다. 물론 당과 군중단체라는 이 양자는 서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분리해서 고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선후차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공산주의자들은 군중속에서 당의 후비대를 육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 .

국내당공작위원회는 국내에서 혁명투쟁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국내당조직건설을 맡아보게 될 지역적 지도기관이다. 통일적 영도기능을 수행하는 참모부가 없는 것으로 하여 국내운동은 지금 분산성자연발생성이라는 두 가지의 치명적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과 공산주의자들을 하나의 역량으로 결속하며 그들 사이에 직접적인 연계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서는 그것을 맡아 수행할만한 지도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런 지도기관이 바로 국내당공작위원회다. . . .

우리는 그때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소집하고 나를 책임자로 하고 김평과 박달을 위원으로 하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박달은 이 위원회의 현지집행인으로서 갑산지방을 비롯한 국내 여러 지역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을 주관할 임무를 지니었다.

박달은 국내에 기층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에 기초하여 장차 당중앙기관을 조직하며 당창건을 선포할 데 대한 우리의 방법론을 지지하였다. . . .

국내당공작위원회의 결성은 우리가 내놓은 자주적인 당창건방침을 고수하여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을 힘있게 밀고나가는데서 실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었다.

이것은 조선공산당이 해산된 후에 여러 갈래로 진행되었던 당재건운동의 단순한 연장이나 반복이 아니었다. 국내당공작위원회의 지도밑에 전개된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이야말로 국제당이 직접 주관한 당재건운동이나 또 국제적색노동조합(프로핀테른)이 적색노조운동을 통하여 이룩해보려고 시도한 당재건운동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철두철미 자주적인 당재건운동, 당조직건설투쟁이었다. . . .

그러나 우리는 조선에서의 당조직건설문제와 통일전선결성문제를 우리의 독자적인 판단과 결심에 따라 해결하였다.

우리는 당조직건설문제와 통일전선결성문제를 같이 밀고 나가면서도 그것을 서로 뒤섞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당이 통일전선을 대표하거나 통일전선체조직이 곧 당으로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일부 독립운동자들 가운데는 민족유일당이라는 명목으로 좌우의 모든 정치적 역량을 포섭하는 중국의 국민당과 같은 정치단체를 내올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여 당조직건설을 밀고나가는 한편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의 조국광복회를 내오는 방법으로 온 민족의 대단결을 실현하였다. . . .

1937년 5월 하순 우리는 백두산근거지에서 국내당공작위원회 제2차 회의를 소집하고 국내당공작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을 높이고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과 혁명운동에 대한 지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세웠다. 회의에서는 국내당공작위원회 결성 이후의 당조직건설정형을 총화하고 국내당조직건설사업에서 나서는 과업과 방도들을 놓고 진지하게 협의하였다.

나는 그때 당조직건설과 당생활에서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할 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고 국내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당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혁명조직들에 받아들이며 당조직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적 요구에 맞게 당조직지도체계를 바로세우기 위한 몇 가지 방도를 제기하였다.

그 회의에서 토의결정된 내용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조선경내에로의 진출을 강화하고 당조직건설과 국내혁명투쟁을 발전시켜 나가는데서 하나의 뚜렷한 이정표로 되었다.

그 후 우리는 국내당공작사업을 방조할 사명을 지닌 정치공작대를 파견하였다. 1937년 여름과 가을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 김평과 권영벽, 정일권, 김주현, 마동희, 김정숙, 백영철, 이동학, 최경화, 김운신, 이창선, 이경운, 이병선 등을 성원으로 하는 정치공작대가 북부조선의 여러 지역들에 파견되어 당조직건설사업과 군중과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공작대를 북선정치공작대라고 불렀다. 북선정치공작대는 북부조선 일대를 혁명화하는 방법으로써 국내당조직건설사업을 직접적으로 도와주었다. . . .

우리는 국내당조직건설을 위한 또 하나의 조치로 조선민족해방동맹조직에서 단련된 우수한 동맹원들을 망라하는 국내당소조를 무어주었다. 역사가들은 박달을 책임자로 하는 이 소조를 ≪3인조≫라고 부르고 있다. ≪3인조≫는 기층당조직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국내당건설을 위한 모체조직으로서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당조직을 확대하고 당대열을 늘이기 위한 박달의 사업방법에서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명당조직의 결성이다. 무명의 당조직이란 정식명칭은 없으나 실지로는 비밀리에 활동을 벌이고 있는 당원들의 당조직을 말한다. 이런 조직은 조국광복회의 내부에도 있었다. . . .

박달은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으로서 우리를 도와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확대하는데서 큰 공헌을 하였다. 실로 그는 국내당조직의 주되는 담당자였다.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을 추진시켜 나가는데서 김평, 권영벽, 김정숙을 비롯한 정치공작원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신파, 풍산, 낭림, 부전, 흥남, 신흥, 이원, 단천, 허천을 비롯한 북부조선 일대와 장백 일대에서 겹쌓인 난관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여러 지역에 당조직들을 내오고 공산주의자들을 튼튼히 묶어세웠다.

우리 당 전위투사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국내의 넓은 지역에 당조직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갑산, 신파, 풍산을 비롯한 함경남북도와 양덕지방 그리고 평양, 벽성 등 서선일대의 여러 광산, 탄광, 공장, 농촌, 어촌, 도시들에 혁명조직들이 속속 건설되었다. 적색노조나 적색농조 운동으로 들끓다가 잠잠해진 지역들에서 다시금 혁명적인 노조, 농조 운동이 전개되었다. 어제날의 노조, 농조들이 재조직, 재편성되는 과정은 곧 당조직들이 생겨나는 과정과 일치하였다. 당조직망과 조국광복회망은 북부조선 일대의 영역을 멀리 벗어나 서울을 비롯한 중부조선 일대와 경상도와 전라도 경계에까지 이르렀으며 제주도와 현해탄을 넘어 일본땅에까지 확대되었다.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은 장백과 임강 일대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과 밀접한 연관속에서 추진되었다. 장백, 무송, 임강 일대의 조선인 거주지역들에도 당조직들이 뿌리를 박았다. 동만과 남만 일대에도 당조직들이 확대되었다. 전국적 판도와 전민족적 범위에서 당조직건설사업이 힘있게 추진되는 과정을 통하여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결속되고 전반적 조선혁명에 대한 당적 영도가 더욱 강화되게 되었다.

모든 당조직들이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움직이는 전국적 범위의 강력한 당조직체계가 세워졌다. 최고영도기관인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로부터 기층조직인 세포에 이르기까지 당조직지도체계가 정연하게 세워짐에 따라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기초축성사업에서 획기적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항일혁명투쟁에서 우리가 이룩한 또 하나의 크나큰 전취물로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은 후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지구에서 얻은 군사작전들에서의 승리에 못지 않은 정치적 승리였다. 당조직건설을 위한 우리의 피어린 투쟁은 조국해방을 앞당겨오는 힘있는 추진력으로 되었을 뿐 아니라 자주적인 당창건위업을 빛나게 완성할 수 있는 강유력한 기초로 되었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장해우는 얼마 후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성원들로 조국광복회신갈파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같은 시기에 김재수와 김정숙의 지도밑에 석전양복점 뒷방에서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를 모체로 하여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직속 신파지구당소조도 결성하였다.≫(양민보증서, 세기와 더불어 5권)

6권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통하여 조선의 혁명가들이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은 이 운동을 통하여 당조직건설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더욱 튼튼히 마련한 것이었다. 우리는 조국광복회조직들에서 육성된 핵심들로 전국각지에서 당소조들을 무었다. 이 소조들이 결국은 조국광복회조직들도 지도하고 대중투쟁도 지도하였다. 투쟁속에서 태어나 투쟁을 통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끊임없이 단련된 당조직들이야말로 장차 해방된 조국땅에서 근로대중의 위력한 정당을 창건할 수 있는 초석으로 되었다.≫(삼천리 방방곡곡에, 세기와 더불어 6권)

권영벽≪우리가 백두산과 서간도를 주되는 활동지대로 삼고 싸우던 당시 권영벽에게 장백현당위원회 책임자의 중책을 맡긴 것도 기실은 그 인간적 매력을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장백현당 책임자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였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자면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장백현당은 우리가 백두산밀영에서 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열고 무슨 노선을 세우거나 긴급한 과업을 제기하면 그것을 제일 먼저 접수하고 집행하는 중추적인 당조직의 하나였다. 우리가 내놓은 노선이나 과업들은 많은 경우 장백현당과 국내당공작위원회, 동만당공작위원회를 통하여 서간도와 북간도, 국내에 전달침투되었으며 그 집행과정도 대부분은 이 통로를 거쳐 인민혁명군당위원회에 보고되었다.

장백현당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지위와 역할은 우리가 백두산밀영에 활동거점을 잡은 조건에서 서간도 땅을 또 하나의 발판으로 삼아 국내와 만주에서 혁명을 확대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정과 조선공산당이 해산된 후 새 형의 당을 창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인민혁명군당위원회가 국내당공작위원회와 동만당공작위원회, 장백현당위원회 등을 통하여 당조직건설과 전반적인 항일혁명을 영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정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1930년대 전반기 우리가 동만에서 유격근거지를 꾸려놓고 싸울 때 소왕청이 항일혁명의 중심지로 되었던 것처럼 후반기에는 서간도를 포함하는 백두산근거지가 항일혁명의 중심지로 되었다. 백두산밀영은 그 중심에 있는 핵이었고, 백두산주변 국내의 넓은 지역과 함께 장백땅은 그 핵을 둘러싼 살이었다. . . .

이런 실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장백현당 책임자를 선발하는데서 기준을 높이 세웠다. 장백현당 책임자라는 중책을 감당하자면 큰 담력과 선도력, 포옹력, 조직력, 활동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였다. 지하전선을 움직이는 것만큼 정확한 판단력과 치밀성, 임기응변의 지략도 지니고 있어야 하였다. 특히나 시야가 넓어야 하였다. . . .

권영벽은 이전보다 더 분망한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직접 교양하고 육성한 믿음직한 공작원들이 여러 명 국내에로 들어갔다. 17도구의 지하혁명조직들은 지하공작의 담당자들을 양성해내는 원종장이나 다름없었다. . . .

그러나 정작 이 고장에 와서 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지하전선을 2선이라고 보던 관점에서 멀리 벗어났습니다. 이 전선은 분명 2선이 아니라 1선입니다. 조직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사람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이 비옥한 토양의 주인으로 나를 세워준 사령관동지에게 감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인민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데서 사는 보람을 느낀다고 한 권영벽의 말에는 심오한 진리가 깃들어 있었다. 인민을 조직동원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한시도 놓쳐서는 안되는 항구적인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민을 부단히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여기에 바로 우리 혁명의 생명이 있고 승리가 있고 영구불멸성이 있다.≫(권영벽, 세기와 더불어 6권)

조선인민혁명군≪일반적으로 주권전취를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서 정치적 영도기관으로서의 당을 먼저 꾸리고 그 다음에 무력건설에 착수하는 것이 하나의 원리로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혁명투쟁, 특히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혁명무력, 폭력적 진출이 가지는 결정적 역할과 당시 우리 나라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먼저 무력을 건설하고 다음에 당을 건설하는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우리는 1932년 4월에 첫 혁명적 무장력으로서의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그것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확대발전시켰으며 바로 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의거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의 불길을 높여나가면서 전반적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새로운 앙양에로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의 영도와 무력적 담보밑에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도, 조국광복회조직과 통일전선운동의 확대발전도, 전민항쟁 준비도 성과적으로 이끌어나갔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항일혁명시기 우리 혁명의 중추적 핵심역량이며 정치적 향도자이며 민족적 이익의 무력적 담보자였던 조선인민혁명군은 그대로 우리의 군대이자 이고 정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6권)

7권

≪그날 나는 이동걸의 안내를 받으며 두만강 물동다리를 건너 회의장소로 내정된 국사봉에 올랐습니다. 국사봉회의에서는 지하혁명조직들을 확대하며 조선혁명을 계속 앙양시키기 위한 일련의 대책적 문제들이 토의되었습니다.

이동걸은 회의를 마친 다음 나에게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하나의 문제는 자기가 꾸려놓은 삼장지구의 조직을 국사봉회의방침대로 연사일대에로 확대발전시켜 당조직의 본보기, 조국광복회조직의 본보기로 만들어보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내조직책임자들에게 정치사업방향을 배워주기 위해 국사봉회의참가자들을 다 옥돌골단오명절행사에 참가시키게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두 가지 제기를 모두 승인해주었습니다. . . .

이동걸은 비록 희생되었으나 그가 바친 심혈은 두만강연안과 국내 깊이에서 수십 수백 개의 불씨로 자라났습니다. 이동걸이 체포된 후에는 김정숙이 그를 대신해서 연사지구에 나가 그 고장 조직원들에게 선을 이어주고 그가 바라던 대로 당조직과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려놓았습니다. 그 조직들은 전민항쟁을 준비하는데서 큰 밑천으로 되었습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세기와 더불어 7권)

8권

길림시절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나를 영도의 중심으로 내세웠다면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김책을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이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 나라 혁명에서는 영도중심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영도중심을 꾸리는데서 김책은 특출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역사에서 김책이 차지하는 몫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혁명가 김책, 세기와 더불어 8권)

≪그 후 언제인가 임춘추는 모스크바붉은광장에서 레닌묘를 참관하다가 우연히 심각한 몰로토프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몰로토프는 그때 임춘추에게 당신들은 쏘련당의 전례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수정주의를 하지 말고 자기 수령의 사상과 업적을 충실하게 계승해 나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임춘추는 그때 후계자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당도 망치고 혁명도 망친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역사의 쓰라린 교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후계자의 표정에서 기본을 이루는 것은 수령과 수령의 위업에 대한 충실성이며 도덕의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도덕의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 . .

우리 인민 수령의 사상체계와 영도체계를 확립하는데서 김정일동무가 발휘한 비범한 수완과 혁명적 원칙성, 수령의 노선과 구상을 옹호하고 실현하는데서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정력, 고결한 충성심과 효성에 경탄하였으며 김정일동무야말로 수령의 사상과 의도대로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향도하고 완성해나갈 수 있는 영도자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 . .

항일혁명투사들김정일동무를 수령의 유일한 후계자로 내세운 것은 그가 당과 국가, 군대를 영도해야 민족의 장래가 담보되고 백두산에서 개척한 주체의 혁명위업이 한 치의 편차도 없이 대를 이어 빛나게 계승발전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그를 수령의 후계자로 추대했다는 것은 곧 군대가 그를 민족의 영수로 내세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일, 최현, 오진우와 함께 임춘추김정일동무를 우리 당과 국가의 수위에 추대하는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세기와 더불어 8권)

≪전민항쟁 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백두산에 틀고앉아 무장투쟁을 압록강연안과 국내에로 확대하면서 조국광복회의 기치밑에 당건설과 통일전선운동, 대중조직건설을 활발히 벌이던 때부터였습니다.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나라의 해방을 이룩할 것을 호소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사실상 전민항쟁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 . .

그 후 우리는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대중단체건설 정형 그리고 비밀무장조직들의 활동정형을 요해한데 기초하여 조국해방의 3대노선을 내놓았습니다. 조국해방의 3대노선이라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그에 배합한 전인민적 봉기, 배후연합작전으로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이룩할 데 대한 노선입니다. . . .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데서 또한 중요한 것은 국내항쟁운동에 대한 통일적 지도를 실현할 수 있는 영도기관을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국내당공작위원회가 결성된 후 우리 나라에서는 각지에 당소조들이 조직되어 대중단체들에 대한 지도를 보장하였습니다. 1930년대 말부터 여러 지역에 산발적으로 꾸려진 당소조들과 반일대중조직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실현할 사명을 지닌 지구당위원회들이 태어나 지역적 영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실례로 김정숙이 조직한 연사지구당위원회를 들 수 있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에는 평안남도 일대에서 공산주의선각자들을 망라한 지구당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습니다. 평안남도지구당위원회는 자기 산하에 평양, 개천, 남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당소조를 두고 있었으며 이 당소조들을 통하여 도내 각지의 조국광복회조직들과 전민항쟁조직들을 지도하였습니다.

함경북도에 조직된 청진지구당위원회는 일철을 중심으로 청진지구의 공장들에 수많은 당세포들을 두고 있었습니다.≫(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항일혁명을 우리 인민자신의 힘으로 해낸 것처럼 우리는 새 조국 건설도 조선사람자신의 힘으로 해내야 하였습니다. 건당, 건국, 건군은 물론, 민족경제와 민족교육, 민족문화를 건설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포함하는 모든 분야를 우리 인민자신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자는 것이 바로 우리의 결심이었습니다. 인민을 새 조국 건설에 불러일으키자면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는 혁명의 참모부가 있어야 하고 정권이 있어야 하고 새 사회 건설을 무력으로 담보할 수 있는 군대가 있어야 하였습니다.

나는 이런 견해에 기초하여 1945년 8월 20일 훈련기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적 과업으로 건당, 건국, 건군의 3대 과제를 제시하였습니다. . . .

이주하를 비롯한 원산시당일군들, 원산의 유지들을 만나보고나서 나는 우리가 8.15해방 후 즉시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업을 내용으로 하는 새 조선 건설의 이정표를 작성하고 그것을 마련한 기초우에서 조국행을 한 것과 조국에 발을 들여놓는 그 길로 지정된 파견지로 떠나갈 결심을 한 것이 천만번 정당하였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였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조선노동당 창건 55돌항일혁명시기 당창건준비활동경험에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사를 주는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가 사실상의 당중앙이었다는 점이고 그 산하의 국내당공작위원회의 위원장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이시라는 점이다. 이는 오늘의 통일혁명투쟁의 당중앙이 무엇이고 전위당의 위원장이 누구인가를 충분히 시사해준다고 할 것이다.

≪≪국내의 당조직들은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에 소속되고 또 그 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조선에 공산당이 없는 현재의 특수한 상황에서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는 조선혁명전반에 대한 영도적 기능을 담당한 참모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당위원회의 활동은 무력에 의해 튼튼히 보호되고 있습니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우리는 그때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소집하고 나를 책임자로 하고 김평과 박달을 위원으로 하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박달은 이 위원회의 현지집행인으로서 갑산지방을 비롯한 국내 여러 지역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을 주관할 임무를 지니었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This counter provided for free from HTMLcounter.com! copyleft © 백두산편집부
이 문서는 Internet Explorer v5.0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