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26일(목)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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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과 이동걸

서정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 ≪세기와 더불어≫에서 빛나는 수령님의 혁명동지에 대한 해설강좌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여덟 번째 시간으로 김주현과 이동걸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김주현과 이동걸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연구하면서 특히 공산주의혁명가는 총화와 혁신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주현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김주현을 1931년에 처음으로 만나시었으며 그 겸허함에 좋은 인상을 가지시었습니다.

≪나에게 그를 처음으로 소개해준 사람은 소사하구 당조직책임자였던 김정룡이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아주 허심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김주현, 6권)

≪8살이라는 나이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럼없는 친구로 되었다. 1931년이면 내가 항일유격대 대장을 하던 때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김주현은 나의 의견을 항상 허심하게 받아들이었다.

나는 그의 겸허성에 매혹되었다.≫(김주현, 6권)

김주현은 어업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퍼그나 애어린 시절에 떠나온 고국땅을 늘 그리워하던 김주현은 서당공부를 마치자 어대진에 나가 어업노동을 하면서 잔뼈를 굳히었다.≫(김주현, 6권)

김주현은 완강성과 진취성을 가진 혁명가였습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의 의사와 결심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길을 완강하게 헤쳐나가는 김주현의 그 성미는 우리 마음에 퍽 들었다.

김주현은 바로 그런 완강성과 진취성을 가지고 우리가 안도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한지 얼마 안되어 화룡땅에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지휘성원으로 활약하였다.≫(김주현,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마안산에서 새 사단을 편성하던 시점에 김주현을 다시 만나시었습니다.

≪몇 년 동안 서로 헤어져 활동하던 우리가 다시 만나서 한 부대의 식솔로 된 것은 마안산에서 새 사단을 편성하던 무렵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새로 편성된다는 소식을 듣고 맨 먼저 우리를 찾아 마안산으로 달려온 것이 김주현이네 소부대였다. 간부감이 발라서 애를 먹고 있던 차에 그가 와주니 귀인을 만난 듯이 반가왔다.≫(김주현, 6권)

김주현은 사령부후방부관으로 활약하였습니다.

≪부대를 편성하는 기회에 나는 김주현을 사령부후방부관으로 임명하였다. 김주현은 부대의 후방사업을 드세게 내밀었다. 별로 분주히 뛰어다니거나 후방부문의 대원들을 다몰아대는 것 같지는 않은데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을 어렵지 않게 구해들이고 부대살림을 윤택하게 만들었다.≫(김주현, 6권)

군복을 짓던 재봉기≪보천보전투를 앞두고 마련한 600여벌의 군복, 군모, 행전, 탄띠, 배낭감들과 천막감 그리고 또 그만한 수량의 신발들과 막대한 식량들도 그가 책임지고 오중흡과 함께 구해들인 것이었다.≫(김주현, 6권)

김주현이 후방사업을 잘 한 이유는 민중들속으로 들어가서 민중의 아들이 되고 정치사업을 선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부대의 살림살이 때문에 늘 입술이 부르터 가지고 눈에 충혈이 가셔질 새 없이 돌아다니는 김주현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된 인민들은 스스로 지혜를 짜내어 그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김주현, 6권)

≪김주현은 인민들속에 들어가면 항상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알아주고 풀어주는 인민의 아들이 되었으며 대원들속에 돌아오면 다심하고 후덕한 어머니로 되었다. 서간도 사람들은 그를 가르켜 ≪우리 김부관≫이라고도 하였다.≫(김주현, 6권)

≪김주현은 아무리 굳게 닫긴 마음의 문도 어렵지 않게 열어제끼는 독특한 수완과 특이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진정으로 대하며 양심적으로 행동하고 검박하고 겸허하게 처신하는 참사람으로서의 인간적 향취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김주현, 6권)

≪내가 김주현의 후방사업에서 독특한 점이라고 본 것은 그가 매사를 정치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간다는데 있었다. 가령 우리가 후방부에 군복제작과 관련한 과업을 주면 그는 아래일군들에게 사령부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되받아 넘긴 것이 아니라 그 과업의 절박성과 수행방도에 대하여 진지하게 해설해주었다.≫(김주현, 6권)

백두산밀영의 사령부김주현은 백두산근거지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의 정치사업능력을 귀중히 여긴 나는 어렵고 복잡한 정치공작임무가 제기될 때마다 자주 그를 찾군 하였다. 나는 백두산근거지창설을 위하여 선발대를 파견할 때에도 김주현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김주현, 6권)

≪남호두와 동강에서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를 창설할 데 대한 문제가 논의된 후 우리는 김주현을 책임자로 하는 소부대를 서간도일대에 내보냈다. 소부대성원들은 장백현을 중심으로 하는 백두산 주변의 여러 마을들을 다니면서 이 고장의 혁명운동실태도 요해하고 핵심도 장악하고 군중교양도 하면서 장차 주력부대의 정치군사활동에 도움이 될 기초준비를 하였다.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서간도 일대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주력부대의 활동을 지원하며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광범하게 전개해나갈 수 있는 확고한 토대가 이루어졌다.≫(서간도, 5권)

≪그가 백두산지구에 선발대로 나가서 이룩해놓은 업적은 응당 글로 써서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소백수골, 곰산, 사자봉, 선오산, 곰의골, 지양개골, 덕수골을 비롯한 백두산지구의 밀영후보지들은 모두 김주현이 인솔한 선발대가 찾아낸 것이었다.≫(김주현, 6권)

김주현은 당조직건설과 통일전선운동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들도 많이 발굴하였습니다.

≪그는 지양개, 소덕수, 신창동, 판도거리, 종리원촌, 평강덕, 상풍덕, 도천리, 삼수골과 같은 서간도의 여러 농촌들을 돌아다니면서 당조직건설과 통일전선운동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들도 많이 발굴하였으며 혁명군의 후비원천도 적지 않게 마련해놓았다.≫(김주현, 6권)

이주익최원봉≪장백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 마을≫이 되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사람≫이 되었다. 장백의 거의 모든 촌락의 구장, 촌장의 직책들도 ≪우리 사람≫들이 차지하였다. 그들은 겉으로는 적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척 하였으나 안속으로는 우리 일을 하였다.

면장 이주익도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가 백두산 진출을 앞두고 장백지방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을 때 그는 김주현에게 흡수된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었다.≫(이제순, 5권)

≪최원봉은 줏대가 굳고 궁냥이 깊으며 혁명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우점을 맨먼저 찾아내고 그것을 값높게 평가한 사람이 바로 김주현이었다. 김주현은 동강에서 선발대의 임무를 받고 장백에 나와있을 때 최원봉을 찾아내어 권영벽과 이제순에게 소개하여주었다.≫(삼천리 방방곡곡에, 6권)

김주현은 7연대출신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 중에는 7연대에서 배출된 지휘관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오중흡, 김주현, 이동학, 이동걸, 오백룡, 김택환, 최일현, 오일남, 손태춘, 강흥석, 강증룡 등은 7연대출신들입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주현을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그의 혁명임무에 대한 강한 책임성과 높은 정치적 자질, 능숙한 조직적 수완, 노련한 사업방법은 모든 지휘관들이 귀감으로 삼을만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김주현은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김주현, 6권)

그렇지만 김주현에게도 안목이 편협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언제인가 김주현이 그 숱한 짐짝들을 정리해서 절반쯤이라도 줄이라고 권고했다가 되게 면박을 당한 일이 있었다.

≪아니, 이 문서장들이 ≪민생단≫문서보따리 따위 같은 줄로 아는가. 자네가 지휘관이기는 하지만 안목은 넓지 못한 사람이야. 저 짐짝들은 나 같은 목숨 열백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야. 군사직급으로는 연대장이지만 이 짐짝앞에서는 졸병이나 같애. 국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기나 해?≫≫(조국광복회, 4권)

≪우리가 여성중대에 대한 문제를 화제에 올리자마자 김주현은 펄쩍 뛰었다. 순수 여성들만으로 중대를 편성하여 전투장에 내보내면 싸움을 망치고 말터인데 그렇게 되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여성중대, 4권)

김정부≪그러면 김정부에게 우점은 전혀 없다던가고 묻자 김주현은 좀 얼떠름해졌다. 우점에 대한 반영은 수집하지도 않았거니와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을 두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우점이라니요. 그런 친일분자한테 우점같은 게 있을게 뭡니까.≫

소부대 책임자의 보고는 마디마디가 다 부정적이었다. 시종일관 주관적인 해석으로 가득찬 그의 보고는 어쩐지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다. 계급투쟁과 계급성밖에 안중에 두지 않고 있던 종래의 타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데다가 김정부에 대한 구체적 파악이 없는 그들은 우리가 장백땅으로 나오면서 중요한 통일전선사업대상으로 점찍어 놓았던 그에게 ≪친일지주≫니, ≪반동분자≫니 하는 어마어마한 딱지를 붙이고 지주자신은 물론, 그의 아들까지도 붙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통일전선방침에도 맞지 않고 조국광복회창립선언문이나 10대 강령 정신에도 어긋나는 행위였다.≫(애국지주 김정부, 5권)

≪≪저는 조막도끼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사령관동지의 신변가까이에 깨끗한 사람들만 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주현이 고백한 장철구의 조동이유였다. . . .

장철구그의 말을 들어보면 결국 장철구와 같은 ≪민생단≫혐의자는 사령부작식대원으로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하고 격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오직 성실성 하나만을 가지고 혁명을 위해 애쓰는 순박하고 무던한 그 어머니를 어쩌면 그렇게도 몰인정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매사에 그처럼 대범하고 용의주도한 김주현이 이런 엄청난 실수를 하였다고 생각하니 더구나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불같이 다불렀다. . . .

김주현은 그날로 후방병원에 가서 장철구를 데려왔다. 다음날은 재봉대원들을 다과대여 그에게 입힐 옷까지 한 벌 지어 왔다.

하지만 장철구는 김주현의 지시를 매번 책임적으로 집행하면서도 그를 멀리하였다.≫(유격대의 어머니, 6권)

≪내가 국내깊이에로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제일 난처해한 것은 김주현과 그와 동행했던 소부대성원들이었다. 김주현은 마치 자기네 수부대가 대사를 망쳐놓았기 때문에 사령관이 직접 국내공작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하기는 노여움도 전혀 없은 것은 아니었다.≫(9월 호소문, 6권)

김주현은 국내파견소부대의 책임자로서 엄중한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김주현의 업적과 사업능력을 늘 좋게 평가하고 있던 나는 1937년 8월중순에 그를 국내로 파견되어가는 소부대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김주현, 6권)

≪소부대의 기본임무는 그런 애국청년들을 찾아내어 유격대를 조직하고 그들에 대한 훈련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무장투쟁에 참가할 수 없는 허약한 사람들은 그밖에도 소부대는 주민들속에서 지하조직과 무장대오를 확대하기 위한 대중정치사업과 인재탐색사업도 겸해서 하게 되어있었다. 우리는 소부대에 백두산줄기와 마천령산줄기, 부전령산줄기들에서 무장투쟁거점으로 삼을만한 밀영후보지들을 탐색할 데 대한 과업도 동시에 주었다.≫(김주현, 6권)

≪나는 김주현의 얼굴빛을 보고 국내공작이 실패로 끝났음을 즉시에 간파하였다. 그의 보고는 나를 아연케 하였다. 소부대는 애국청년들이 모여있다는 성진지방에 가닿지도 못하고 갑산땅에서만 맴돌다가 되돌아왔던 것이다.≫(김주현, 6권)

≪소부대는 요행 포위망에서 벗어났으나 국내깊이에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함경남북도의 산악지방들과 유격대공작원들이 다닐 수 있다고 보는 길목들에 적들이 벌써 한 벌 쭉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주현은 차후에 다시 기회를 보아 국내에 들어가 공작임무를 수행하기로 하고 일단 부대로 돌아오고 말았다.≫(김주현, 6권)

≪보천보전투를 계기로 하여 절정으로 치달아오른 우리 인민의 독립열망과 청년들이 참군열의에 편승하여 국내항일무력을 창설하고 무장투쟁의 불길을 동해안일대에까지 확대하려던 우리의 계획은 김주현소부대의 황당한 모험과 혹심한 자유주의로 하여 뒤로 멀리우게 되었다. 마천령산줄기에 만날 장소까지 정해놓고 소부대를 기다리던 국내의 애국청년들도 혁명군의 사절들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과 실망을 안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김주현, 6권)

≪김주현의 자유주의로 해서 인민혁명군의 적배후교란작전과 국내진공작전에서는 하나의 커다란 공백이 생긴 셈이었다.≫(김주현, 6권)

김주현이 범한 오류는 그 근저에 자유주의와 소총명이 있었으며 위대한 수령님의 전략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지 못한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날 사령부당위원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정당하게 분석한 바와 같이 김주현이 극심한 자유주의를 범하게 된 근본원인은 소총명과 자고자대로부터 문제를 근시안적으로 본데 있었다. 그는 소부대의 임무를 전략적인 높이에서 새겨두지 못하였다.≫(김주현,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주현에게 과오를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인정에 못이겨 그의 과오를 눈감아준다면 그것은 어느모로 보든지 백해무익한 일이었다. 내가 김주현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상의 방조는 그가 자기 과오를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김주현, 6권)

≪사령부당위원회는 김주현을 후방부관의 자리에서 철직시키기로 결정하였다.≫(김주현, 6권)

김주현은 후방부관에서 철직된 다음 사상단련을 아주 잘 하였습니다.

≪김주현은 후방부관의 자리에서 철직된 다음 사상단련을 아주 잘하였다. 지금은 그런 사상단련을 혁명화라고 한다.≫(김주현, 6권)

≪사령부후방부관의 자리를 내놓고 작식대원으로 배치된 김주현은 새 초소에 온 첫날부터 가마를 지고 다니었다. 어제까지 자기가 지도하던 대원들앞에서 가마를 지고 다닌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경우에 부닥치게 되면 사람들은 흔히 다른데로 보내달라고 제기한다. 그러나 김주현은 작식대원으로 일하는 것을 조금도 나무라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옆의 대원들이 미안해할 정도로 수걱수걱 맡은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표정도 밝고 기분도 늘 명랑하였다.≫(김주현, 6권)

≪사람은 자기의 이웃이 곡절을 겪을 때일수록 그를 더 따뜻하게 충심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자기의 전우들이 과오를 범하고 본래의 직책에서 사업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냉대하거나 따돌리지 않고 그들이 과오를 깨끗이 씻을 수 있도록 각방으로 도와주었다.≫(김주현, 6권)

≪≪나는 낮에 동무가 남모르게 우는 것을 보았소. 그래서 그 눈물을 내 나름대로 해석했지. 작식대원일이 고통스러워서 그러는 줄로 알고 병기창으로 옮겨줄 생각까지 했구만.≫

내가 이런 말을 하자 김주현은 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잡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저는 사령관동지가 저에게 책벌을 주고 가슴아파하는 것이 하도 고맙고 또 저 자신이 배은망덕한 것이 너무도 죄스러워 울었습니다. 사령부당회의에서 제 문제를 취급할 때 제가 제일 두려워한 게 뭔지 아십니까? 그건 저를 대오에서 제명하여 멀리로 쫓아버리지나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죽어도 여기서 죽고 싶었습니다. 제가 혁명대오에서 떠난다면 무슨 사는 보람이 있겠습니까. 저를 버리지 않고 작식대에서 일하게 해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입니다.≫≫(김주현, 6권)

≪그는 일신의 문제야 어떻게 되든 우리 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곁에 있기만 하면 지휘관을 해도 좋고 작식대원을 해도 좋고 비판을 받아도 좋고 책벌을 받아도 좋고 그저 혁명대오에서 탈락당하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여기에 바로 김주현의 참모습이 있었다.≫(김주현, 6권)

≪김주현은 가마를 지고 다니던 나날에 공부도 많이 하였다. 김주현이 책벌을 받은 그 해 11월에 사령부비서처성원들은 내가 쓴 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를 소책자로 찍어냈는데 그는 그 소책자를 제일 먼저 구해다가 열독하였다. 그가 몸을 돌보지 않고 너무도 직심스레 공부를 하기 때문에 작식대원들은 자기들이 그처럼 따르고 존경하던 옛 후방부관이 쓰러지기라도 할가봐 모두 걱정하였다.≫(김주현, 6권)

≪그러나 수양이 높은 사람들은 동지들이 아무리 가혹한 비판을 해도 그것을 항상 허심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혁명동지들이 자기에게 주는 비판을 보약으로 생각합니다. 김주현과 이동걸이 지휘관의 자리에서 떨어져나가는 무거운 책벌을 받은 다음에도 실망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자기의 과오를 깨끗이 고칠 수 있은 것은 동지들의 비판을 보약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잘 소화하였기 때문입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6개월 후 김주현은 7연대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사상단련을 참으로 잘하였다. 역시 노동계급출신의 오랜 혁명가가 달랐다. 그가 자신을 개조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감동없이는 볼 수 없는 그런 높은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김주현이 후방부관자리에서 철직된 때로부터 6개월만에 우리는 그를 7연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우리가 그를 본래의 자리에 복직시키지 않고 연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그가 늘 총포성이 울리는 전장을 그리워하였기 때문이다.≫(김주현, 6권)

김주현은 연대장으로 임명된 다음 싸움을 잘 하였습니다.

≪김주현은 연대장으로 임명된 다음 싸움을 잘 하였다. 그는 장백현의 가재수와 12도구 전투를 비롯하여 임강현 6도구전투, 쌍산자전투, 오가영전투, 가가영전투, 신태자전투 등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벌인 1938년의 춘기공세와 그 이후 진행된 여러 차례의 대소전투들에서 영활하고 대담한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 해 여름에는 신태자에서 몽강, 유하, 금천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적의 배후를 타격하는 전투들을 능숙하게 지휘하였다. 그가 이끄는 7년대는 인민들에 대한 정치선전도 대단히 잘하였다.≫(김주현, 6권)

김주현은 1938년 동지들을 위해 애쓰다 불의습격을 받아 전사하였습니다.

≪김주현은 1938년 10월 몽강현 남패자의 수림에서 김택환, 김영국과 함께 후방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산꿀을 채취하다가 적 ≪토벌대≫의 불의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김주현,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주현이 남긴 배낭을 열어보고 눈물을 흘리시었습니다.

≪그가 전사한 후 전우들은 그의 유물로 남은 배낭을 헤쳐보았다.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전령병에게 물어보니 그 전날 신발을 꿰뜨린 대원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김주현이 남기고 간 빈 배낭을 부둥켜안으니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가 후방부관을 하던 시절부터 우리 혁명군을 위해 공작해들인 쌀과 군복천, 신발을 전부 쌓으면 아마 산더미를 이룰 것이다. 그는 신발만 해도 수천 켤레나 구해 들었다. 그러나 김주현은 자기 배낭에 있던 예비신발 한 켤레마저 대원들에게 주었다.≫(김주현,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주현의 삶과 인생관을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그 빈 배낭은 혁명가의 재산과 인생관에 대하여 깊이 생각게 하였다. 행복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세상에는 황금만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김주현은 아무 재산도 없는 무산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김주현이야말로 진짜 거부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억만금의 황금으로 살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고결한 사상과 넋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김주현,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주현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시었습니다.

≪남패자에서 양정우와 함께 우정을 나누던 그 시기 나는 김주현, 김택환, 김영국 등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세 지휘관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패자를 더더구나 잊지 못합니다.≫(양정우와 만나, 7권)

이동걸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이동걸을 처음 만나신 것은 길림시절이었습니다.

≪우리의 운동선에 합류하려고 국내와 일본, 연해주, 만주각지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길림으로 모여들었다. 독립군에 관계했던 청년들, 일본에 가서 고학을 하던 청년들, 백파들과 싸우던 청년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주폭동에 참가했던 청년들, 국민당반동들의 추격을 피해 여기저기 숨어다니던 청년들, 레닌의 숭배자, 손문의 숭배자, 루소의 숭배자 등 정견과 소속, 생활경로가 서로 다른 천태만상의 청년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김혁, 차광수, 김준, 채수항, 안붕 등도 그 시기에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교양하여 ≪ㅌ·ㄷ≫에 받아들이는 한편 조직을 시내 여러 학교들에 확대해나갔다.≫(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1권)

이동걸은 본명이고 김준은 다른 이름입니다.

≪항일혁명투쟁시기 이동걸은 이동걸이라는 본명과 함께 김준이라는 이름도 썼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이광오중화위대한 수령님께 이광과 오중화를 소개한 사람이 이동걸입니다.

≪나와 이광과의 우정은 길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만청총 계통에서 온 김준이네 패거리들이 하루는 낯선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그 낯선 청년이 바로 이광이었다.≫(이광, 2권)

≪나에게 오중화를 소개한 것이 김준, 채수항인 것처럼 김일환을 소개해 준 것도 길림, 용정 바닥을 쌍둥이같이 붙어다니던 김준, 채수항이네 패거리들이었다.≫(다홍왜에서의 논쟁, 4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동걸이 견결하고 인정미가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시었습니다.

≪이동걸은 속대가 단단하면서도 인정미가 있고 구수한 사람이었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동걸의 정치사업과 지하사업 능력을 평가하시었습니다.

≪정치사업과 지하공작분야에서는 한다하는 실력자였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동걸을 7연대의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시었습니다.

≪우리가 남패자회의에서 오중흡을 7연대장으로 임명할 때 그를 같은 연대의 정치위원으로 임명한 것은 그의 자질과 풍부한 정치사업경험을 귀중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청봉의 교훈, 7권)

이동걸은 청봉에서 엄광호와 함께 엄중한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통신원은 간첩단사건의 전말을 요약한 이동걸의 편지와 함께 증거물로 압수하였다고 하는 독약봉지라는 것까지 내놓았습니다. 이동걸의 편지에는 여대원들인 김정숙, 김혜순, 김선, 서순옥 등이 모두 일제의 간첩이라는 것과 그들이 독약으로 혁명전우들을 해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통신원의 말이 자기가 청봉에 갔을 때 그 여대원들은 포승줄에 묶이어 있었고 고문을 받은 흔적까지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나는 처음부터 청봉에서 적발해냈다고 하는 간첩단사건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조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여대원들을 간첩으로 낙인한 밀영지휘관들의 주장에는 믿을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증거물이라고 하면서 보내준 독약은 사실상 독약이 아니라 치분가루였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청봉의 여대원들은 혁명실천을 통해 충분히 단련되고 검열된 대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 혁명 하나밖에 모르는 여성들이었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나는 그날로 김평을 불러 사태의 진상을 조사할 것과 간첩단을 적발해냈다는 밀영책임자 엄광호와 정치책임자 이동걸, 그리고 구속된 여대원전부를 사령부로 소환해올 데 대한 과업을 주어 사건현장으로 떠나보냈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엄광호가 이처럼 위험한 전횡을 부리고 있을 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밀영의 정치책임자인 이동걸이었습니다. 7연대 정치위원인 그는 직급으로 볼 때 엄광호의 상급이었습니다. 그가 부상을 당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7도구치기에서 분산행동으로 넘어갈 때 밀영의 정치사업을 맡아할 데 대한 과업을 주어 청봉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동걸은 엄가의 아첨과 권모술수에 녹아서 사태의 진상과 본질을 가려보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통신원을 청봉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엄광호의 모략이 실현되어 여대원들은 생명을 잃었을 것입니다.≫(청봉의 교훈, 7권)

≪청봉밀영에서 벌어졌던 사태가 구체적으로 발표되자 모든 관병들은 최악의 역경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우리의 노선을 고수한 여대원들을 일치하게 지지하였습니다. 그와 반대로 엄광호와 사태의 본질을 높은 정치적 안목에서 정확히 해부해보지 못하고 그 범죄를 묵인한 이동걸에 대해서는 인민혁명군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그러나 이동걸은 엄광호와 달리 과오를 인정하고 비판을 허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엄광호는 처음에 자기의 죄과를 변명하느라고 전전긍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군중의 규탄을 받고서야 범행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눈물을 홀리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동걸은 처음부터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자기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였으며 죽여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대중의 비판을 허심하게 받아들이었으며 자신을 심각하게 뉘우치었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이동걸이 과오를 범한 것은 군중과 호흡을 같이 하지 않고 엄광호의 아첨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급지휘관한테 농락당하는 과오를 범한 것은 밀영에 가있는 동안 엄광호의 방에 숙소를 정하고 있으면서 그의 아부아첨에 녹은 데다가 대원들과의 사업을 잘하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물론 몸에 중상을 당한 사람인 것만큼 대원들과의 사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면 병실에 대원들을 불러서라도 자주 만나야 하였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밀영에서 간첩단사건이 발생했다고 엄광호가 수선을 떨 때 그가 대원 한 명만 만나도 진상을 인차 알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동걸은 엄광호의 보고를 들은 다음 한 명의 대원도 만나지 않고 그가 마음대로 전횡을 부릴 수 있게 내버려두었습니다. 엄광호가 신입대원을 심문하겠다고 하면 심문하라고 하고 여대원들을 가두겠다고 하면 잡아가두라고 하였습니다.

이동걸은 엄광호의 말만 듣고 대원들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나니 엄광호와 같은 야심가의 농간앞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 바로 정치일군으로서의 이동걸의 죄책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체 관병들은 엄광호를 보는 것과 꼭같은 시각으로 이동걸을 보았습니다. 정치일군이 군중과의 호흡을 잘하지 않으면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청봉의 교훈, 7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동걸의 과오가 엄중하였지만 용서하시었으며 강직시키는 책벌을 주시었습니다.

≪과오는 엄중했지만 이동걸은 용서할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과오를 범한 것은 정치책임자라는 자각을 버리고 엄광호한테 기만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주동이 아니라 피동에서 엄광호에게 동조하고 그의 모략을 묵인해주었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우리는 이런 점을 참작하여 이동걸을 강직시키는 것으로 그쳤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위대한 수령님께 이동걸은 자신의 책벌이 가볍다고 제기하였습니다.

≪엄한 처벌을 면한 이동걸은 나를 찾아와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제기하였습니다.

≪좀더 무거운 책벌을 받고 싶습니다. 저를 가장 위험한 곳에 보내주십시오. 저의 과오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야 씻을 수 있습니다. 제가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야 전우들은 나를 용서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날처럼 동무라고 불러줄 것입니다.≫≫(청봉의 교훈, 7권)

이동걸은 엄중한 과오를 저질렀지만 혁명실천을 통해 그 과오를 씻고 인생의 마무리를 잘 하였습니다.

≪이동걸은 김주현처럼 사업과정에 엄중한 과오를 범한 사람이지만 혁명실천을 통해 그 과오를 씻고 인생의 마무리를 잘한 사람입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일을 하노라면 더러 과오도 범할 수 있습니다. 범한 과오를 어떻게 고치는가 하는 것은 사람의 사상과 수양에 달려있습니다. 이동걸은 자기비판도 잘했지만 연대정치위원의 자리에서 해임된 후 사상단련도 잘했습니다. 그런 덕으로 동지들의 신임을 인차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그러나 수양이 높은 사람들은 동지들이 아무리 가혹한 비판을 해도 그것을 항상 허심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혁명동지들이 자기에게 주는 비판을 보약으로 생각합니다. 김주현과 이동걸이 지휘관의 자리에서 떨어져나가는 무거운 책벌을 받은 다음에도 실망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자기의 과오를 깨끗이 고칠 수 있은 것은 동지들의 비판을 보약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잘 소화하였기 때문입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지들의 비판을 소화해내는 이동걸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동지들의 비판에 대한 소화능력을 보면 사람의 인격과 수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동걸은 인격과 수양에서 모범으로 내세울 수 있는 공산주의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홍단전투 이후 이동걸의 책벌을 해제해주시고 국내정치공작의 책임적인 임무를 맡기시었습니다.

≪우리는 대홍단전투를 치르고 화룡땅에 건너가자 인차 사령부당회의를 열고 이동걸동무의 책벌을 해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로 그에게 국내정치공작의 책임적인 임무를 맡기였습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이동걸은 연사, 무산지구의 정치공작을 수행하면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진행한 국사봉회의를 잘 준비하였습니다.

≪이동걸은 청봉밀영에서 과오를 범하고 책벌을 받은 후 연사, 무산 지구에 나와 정치공작을 하였다. 그는 최원봉과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연사지구의 혁명운동을 지도하였다.≫(삼천리 방방곡곡에, 6권)

≪나는 이동걸에게 국내에 나가면 무산경내의 적당한 지점에서 국내 지하조직책임자들과 정치공작원들의 회의를 가질 계획이니 그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이동걸은 회의준비를 잘하였습니다. 그는 두만강가의 중국인마을들에 살고 있는 조선사람들을 먼저 장악하고 그 줄을 타고 국내에 드나들면서 조직선도 찾고 회의준비도 착실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사령부와 이동걸사이에서 통신을 책임지고 보장하면서 적극 도와준 사람은 김정숙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두만강연안의 국경마을에 내보내어 이동걸과 자주 연계를 가지게 하였습니다. 김정숙은 사령부와 이동걸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면서 우리의 지령과 의사를 제때 제때에 전달해주었습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그날 나는 이동걸의 안내를 받으며 두만강 물동다리를 건너 회의장소로 내정된 국사봉에 올랐습니다. 국사봉회의에서는 지하혁명조직들을 확대하며 조선혁명을 계속 앙양시키기 위한 일련의 대책적 문제들이 토의되었습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이동걸은 회의를 마친 다음 나에게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하나의 문제는 자기가 꾸려놓은 삼장지구의 조직을 국사봉회의방침대로 연사일대에로 확대발전시켜 당조직의 본보기, 조국광복회조직의 본보기로 만들어보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내조직책임자들에게 정치사업방향을 배워주기 위해 국사봉회의참가자들을 다 옥돌골단오명절행사에 참가시키게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두 가지 제기를 모두 승인해주었습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이동걸은 혁명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였습니다.

≪박달의 말을 들어보면 이동걸은 옥중에서도 감방벽을 두드려가며 혁명동지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그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법정투쟁도 잘했습니다. 법정에 나설 때면 그가 노상 선참으로 조선혁명 만세! 를 불러 공산주의자의 기개를 시위하였다고 합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이동걸은 비록 희생되었으나 그가 바친 심혈은 두만강연안과 국내 깊이에서 수십수백 개의 불씨로 자라났습니다. 이동걸이 체포된 후에는 김정숙이 그를 대신해서 연사지구에 나가 그 고장 조직원들에게 선을 이어주고 그가 바라던 대로 당조직과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려놓았습니다. 그 조직들은 전민항쟁을 준비하는데서 큰 밑천으로 되었습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7권)

≪이동걸은 그 후 사령부가 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어 8.15해방 전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였습니다.≫(청봉의 교훈, 7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국사봉회의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각별한 애정과 친근감으로 이동걸을 회상하시며 그를 충실한 지휘관이라고 평가하시었습니다.

≪국사봉회의를 준비하고 소집하는데서 주역을 담당한 사람은 정치공작소조책임자였던 이동걸이었다. 국사봉회의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어버이수령께서는 각별한 애정과 친근감을 가지고 이동걸을 회상하시었으며 그를 충실한 지휘관이라고 평가하군 하시었다.≫(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해설문, 7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동걸의 항일업적으로 높이 평가하시며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그의 반신상을 세워주시었습니다.

≪이제순은 그처럼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늘도 대성산 혁명열사릉에서 자그마한 반신상의 겸허한 모습으로 후대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곁에는 그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권영벽, 이동걸, 지태환도 나란히 서있다.≫(이제순,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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