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20일(금)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지난 강좌 보기

회고록과 통일전선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회고록에 나오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통일전선 사상과 이론, 그리고 통일전선 위업은 회고록의 시간과 권별 순서를 따라가며 이해하는 것이 가장 간명하다.

1권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배신한 것과 관련하여 당시 공산주의운동내부에서는 민족주의자들과의 동맹문제가 격렬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견해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와 기회주의자를 가르는 하나의 시금석처럼 되어있었다. 그래서 차광수도 만나자 바람으로 민족주의자들과의 동맹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물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 .

우리는 부르조아민족주의는 반대하고 경계하지만 참다운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지지하고 환영한다. 왜냐하면 참다운 민족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감정이 애국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다같이 소유하고 있은 공통적인 사상감정이며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을 위한 하나의 궤도에서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고 협력할 수 있게 하는 최대공약수이다. 애국애족은 공산주의를 참다운 민족주의와 연결시켜주는 대동맥이며 참다운 민족주의를 연공의 길로 이끌어주는 원동력이다. . . .

단일민족국가인 우리 나라에 있어서 진정한 민족주의가 곧 애국주의로 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하나의 원리이다. 이런 원리로 보면 나는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청년학생운동을 하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한평생 견지해온 견해이고 입장이다.≫(차광수가 찾은 길, 세기와 더불어 1권)

≪그때 나는 우리 나라의 구체적 현실과 사회계급적 제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무장한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하자면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하며 노동자, 농민, 민족자본가, 종교인을 비롯한 모든 반일애국역량을 반일의 기치하에 묶어세워 투쟁에 불러일으키고 파쟁이 없는 새로운 혁명적 당을 창건하여야 한다는 투쟁방침을 확정하였다.≫(철창속에서, 세기와 더불어 1권)

2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장투쟁을 본때있게 해나가자면 대중적 지반을 잘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로부터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대한 구상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조직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화성의숙시절이라면 민족의 힘을 처음으로 느끼고 뇌리에 새겨둔 것은 3.1인민봉기 때였다. 내가 인민들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을 묶어세우고 그들의 힘에 의거하여 혁명을 하겠다는 결심을 품은 것은 길림시절이었다. . . .

신간회 강령과 규약신간회의 해산으로 모처럼 성사되었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합작이 무산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몹시 분하게 여기였다. 민족을 우위에 놓지 않고 이념만 절대화하게 되면 진정한 합작이 이루어질 수 없다. 민족해방이라는 대전제를 첫 자리에 놓는다면 어떤 계층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당시 나의 견해였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가지고 해방 후 일생을 반공으로 살아온 김구선생과도 합작하였고 지금도 모든 겨레의 이성을 향해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면 남는 것은 외세와 매국노들뿐이다.

민족의 대단결이 그처럼 귀중한 지상의 과제이고 경륜이기에 우리는 반공일선에서 우리에게 총부리를 맞대고 평생을 살아온 최홍희, 최덕신 선생이 평양으로 찾아왔을 때에도 그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고 혈육의 정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최덕신그때 나는 최덕신선생에게 북에 사는 사람이건 남에 사는 사람이건 민족을 첫 자리에 놓고 통일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민족이 있고야 계급이 있고 주의도 있지 않겠는가, 민족이 없이 공산주의는 해서 뭣하고 민족주의는 해서 뭐하며 ≪하느님≫은 또 믿어서 뭣하겠는가고 하였다.

우리는 카륜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모색하던 60여 년 전에도 역시 그렇게 부르짖었다.

정치는 그릇이 커야 하며 정치가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정치가 그릇이 크지 못하면 대중을 다 담지 못하며 정치가가 도량이 넓지 못하면 대중이 그 정치가를 외면 . . .≫(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참모장동무는 상층의 표정만 보았지 하층의 얼굴은 보지 못했구만. 독립군대원들이 우리 유격대를 보고 얼마나 감탄하고 부러워하였소, 나는 무장해제설보다 그걸 더 중시하고싶단 말이요. 중요한 것은 상층의 표정이 아니라 하층의 태도요. 나는 거기서 합작의 장래를 보고 있소.≫ . . .

여러 해가 지난 후 부대를 이끌고 조선인민혁명군에 병변하여온 독립군의 사령 최윤구는 나와 함께 1932년의 여름을 감회깊이 회고하였다. . . .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양세봉의 묘비공산주의에 대한 몰이해와 본의아닌 적대감에 포로되어 우리와의 합작마저 결심하지 못했던 양사령이 연공에로 방향전환을 한 것은 그자신의 생애는 물론, 독립군의 투쟁역사에서 하나의 특기할 사변이었다. . . .

그 후 우리는 양사령의 아들 양의준을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공부시키었다. . . .

내가 이렇게 말하자 김구는 감격하여 ≪이 학원은 민족단합의 상징입니다!≫하고 말했다.≫(합작은 불가능한가?, 세기와 더불어 2권)

≪독립군의 상층은 아직 우리와의 통합을 달가와 하지 않았지만 하층병사들은 대결이 아니라 합작을 하고 힘을 합쳐 같이 싸워야 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기꺼이 우리와 손을 잡게 되었다. 이것은 독립군과의 통합의 첫 시작이었다. . . .

양세봉과의 결렬에다가 최창걸의 희생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덧붙여져 국민부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참을 수 없게 되살아오르던 그때 우리가 민족대단합의 경륜을 위해 20대의 젊은이들로서는 쉽지 않은 도량과 인내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그때 우리가 이성을 잃고 복수감에 사로잡혀 국민부를 타도하였거나 독립군대원들과 무장대결을 하였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떳떳한 마음으로 후대들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300여명에 달하는 양사령의 부하들이 엄동설한에 합작의 기발을 들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오는 역사적 화폭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애국애족처럼 위대하고 순결하고 신성한 감정은 없다.

민족단합정신은 애국애족의 감정가운데서도 그 정수를 이루는 최고의 넋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출범한 그 첫기슭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디서나 민족단합의 이념을 변함없이 소중하게 간직해오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단합의 이념아래, 세기와 더불어 2권)

≪우리는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에서 나타나고 있던 좌경적 편향을 없애고 그들을 항일연합전선에 더 많이 인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자구에서 반일병사위원회를 소집하였다.≫(나자구의 등판에서, 세기와 더불어 2권)

3권

각계각층 인민이라는 범주속에는 노동자와 빈고농만이 아닌 광범한 근로대중이 포괄되겠는데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부는 통일전선적 정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통일전선적 정권이야말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성격에 부합되는 정권으로 될 것이다. 그런 정권이라면 쌍수를 들어 찬성한다고 하면서 환성을 울렸다.

나는 통일전선적 정부를 세우되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적 인민혁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다시금 역점을 찍어 말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역사책들에서 인민혁명정부노선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정권건설노선이다. . . .

이날의 모임에서는 인민혁명정부는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라는 내용의 나의 연설이 있었고 10개조항에 달하는 정부정강 내용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그 정강 내용은 훗날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거의 그대로 반영 . . .≫(소비에트냐, 인민혁명정부냐?, 세기와 더불어 3권)

≪반성위는 우리의 인민혁명정부노선중국당에서 내놓고 있는 민중혁명정권노선과도 기본적으로 일치한다고 하면서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 . .

≪총체적으로는 옳은 말이오. 그러나 정권기관의 명칭은 인민의 마음에 들어야 하오. 아무래도 국제당에 이 문제를 상정시켜야 하겠소.≫

그 후 반성위가 결심대로 국제당에 편지를 보냈는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동만의 모든 유격구들에서 소비에트는 인민혁명정부나 농민위원회로 교체되었고 공농유격대는 반일인민유격대로 개칭되었으며 적위대는 반일자위대로 개편되었다.≫(국제당 파견원, 세기와 더불어 3권)

≪나자구담판의 결과로 하여 항일혁명앞에 가로놓였던 가장 큰 암초는 제거된 셈이었다. 우사령과의 합작이 공동전선을 위한 시발점이었다면 오의성과의 담판은 그 시발점에서 얻은 성과를 전 동만의 범위에로 확대시킨 역사적인 진일보였으며 5.30폭동과 만보산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조중 두 나라 민족의 무의미한 대립과 유혈을 종식시키고 반만항일의 거세찬 흐름을 하나의 대하에로 합류시킨 통쾌한 사변이었다. . . .

나는 구국군과의 합작을 실현한 그때부터 통일전선을 위한 최상의 수단은 주체적 힘이라는 것과 이 힘을 키우지 않고서는 어떤 우군이나 우방과도 연합하여 투쟁할 수 없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혁명의 주체를 튼튼히 하기 위한 투쟁을 일생동안 벌여왔다.≫(오의성과의 담판, 세기와 더불어 3권)

4권

≪그 궤도를 따라 곧바로 질주해 나가면 조국광복이라는 경축광장에도 가닿게 되고 인민의 나라라는 별천지에도 가닿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자면 그 궤도우로 달리게 될 든든한 기관차차량들을 마련해야 했고 위력한 사령지휘처도 꾸려야 했다.

조선인민혁명군조선혁명의 선두기관차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새로 조직하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창립하려는 조국광복회그 기관차 뒤를 따라가는 열차차량에 비길 수 있었다. 미구에 타고 않으려는 백두산조선혁명의 사령지휘처라고 할가.≫(새 사단의 탄생, 세기와 더불어 4권)

남호두회의 이후 시기부터 우리의 통일전선운동은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조직을 위한 활동에로 집중되었다. 하나의 상설적인 통일전선조직을 내오고 그 산하에 광범한 반일애국역량을 튼튼히 묶어 세우는 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견지에서 보나 내외 정세의 요구로 보나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로 나섰다.

자주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민족대단결을 바탕으로 하는 전민항쟁에 있고 민족대단결이 자력독립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일찍부터 주장해 온 사상이었다. 통일전선주체확립과 더불어 항일혁명투쟁의 초시기부터 견지해 온 가장 중요한 이념의 하나였다.

민족대단결의 통일전선의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여러 갈래의 민족주의세력과 반일애국역량과의 연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꾸준한 노력을 바쳐왔고 중국 땅에서 투쟁하는 조건에 맞게 중국의 광범한 반일역량, 공산주의자들과의 공동투쟁도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왔다. 이 과정에 우리가 쌓아올린 적지 않은 성과와 경험은 통일전선운동의 폭넓은 발전을 위하여 값있는 밑거름으로 되었다. 우리는 이런 성과와 경험에 토대하여 통일전선운동을 전민족적인 범위에서 벌여나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과 함께 그것을 맡아 수행할 수 있는 핵심과 주체적 역량을 빨리 키워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였다. . . .

좌우합작으로 민족의 총력을 하나로 집결시키려고 한 그 훌륭한 취지와 목적에도 불구하고 신간회는 1931년 5월에 자기의 존재를 끝마쳤다. . . .

신간회의 와해에서 뼈저린 교훈을 찾은 우리는 애국적 민족역량의 통일을 우리가 주도해야겠다는 비상한 각오와 결의밑에 반일민족통일전선문제를 중요한 방침으로 제기하고 민족의 총력을 항일구국위업의 깃발 아래 결집시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그 과정에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만한 핵심도 키워내고 유익한 경험도 축적하였다.

남호두회의는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창립에 대한 결정을 채택함으로써 우리 나라 통일전선운동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분수령으로 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시키기 위한 인민전선운동이 대두하여 파시즘과 대결하고 있을 때였다. . . .

국제공산당프랑스에서의 인민전선운동의 발전을 좋은 시사를 받고 전세계공산주의자들앞에 인민전선결성을 중요한 투쟁목표로 제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제공산주의운동은 자본주의의 즉시 타도를 목적한 세계혁명이 아니라 평화와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전쟁과 파쑈를 반대하는 운동을 당면한 과제로 내세웠다. 이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의 하나의 노선상 전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2국제당계열의 여러 정당들은 국제당의 통일전선 제의를 거부하였으나 프랑스, 에스파냐,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인민전선운동은 현저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1936년 2월 에스파니아에서의 아싸니아인민전선정부의 출현은 그 단적인 실례로 된다. . . .

국제당은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재빨리 포착하고 각국 노동계급과 근로인민들을 반전, 반파쑈 투쟁에로 묶어 세워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며 파쑈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고수하는 것을 당면한 전략적 과업으로 제시함으로써 세계혁명의 영도기관으로서의 명분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여기에 반파쑈인민전선운동과 관련한 국제당과 역사적 공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파시즘은 새로운 적이 아니었다. 국제파시즘이 대두함으로써 우리 나라 혁명의 대상이 달라진 것도 없었고 성격이 변화된 것도 없었다. 우리는 국제당이 반파쑈인민전선운동 노선을 제기하기 전부터 우리 식의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제기해왔고 그 궤도를 따라 우리 혁명을 줄기차게 전진시켜왔다. . . .

≪통일전선이란 반드시 정당단체들의 연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단체설을 절대화하게 되면 그것은 곧 교조가 됩니다. 군중이 있고 영도핵심만 있으면 능히 통일전선체를 내올 수 있습니다. 목적과 지향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하여 열 사람이건 백 사람이건 묶어 세워야 한다는 것이 통일전선에 대한 나의 견해입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가지고 오래 전부터 통일전선운동을 추진시켜 왔습니다.≫ . . .

그러나 식민지 예속국가들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식민지 예속국가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조국해방과 애국주의의 기치를 드는 것은 곧 종주국의 부르주아지를 반대하는 것으로 되며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민족혁명과 계급혁명 그리고 국제혁명위업에 다같이 기여하게 된다. . . .

진정한 공산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이며 또 진정한 민족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라고 보는 것은 나의 변함없는 신조이다.

이런 신조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시종일관 애국적인 진정한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을 중시해왔으며 그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는데 모든 힘을 다 바쳐왔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자신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공산주의자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다. . . .

조국광복회 창립대회

우리의 이러한 장구한 희생적인 투쟁의 결과로 보람찬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조국광복회 창립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국광복회≫라는 명칭 자체도 당당하게 내걸고 강령의 첫 조항에 우리 민족 성원 전체의 자력으로 조국광복을 이룩하고 동만유격근거지에 세웠던 것과 같은 진정한 인민의 정부를 세우려 한다는데 대해서도 뚜렷이 밝혀야 한다. . . .

우리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서 이처럼 주권문제의 해결을 조선민족앞에 나선 일차적 과제로 제시하고 인민들에게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사회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과업해외교포들의 민족적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과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정치적 과제들을 제시하였다.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이 강령에서는 또한 혁명적인 군건설과업도 제기하였으며 경제관계분야에서 일제와 매국적 친일지주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일본 국가, 일본인 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과 매국적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을 몰수하며 빈곤한 인민을 구제하며 민족적 공농상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고 민족경제를 건설할 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경제적 과업들도 명시하였다. . . .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또한 사회문화적 과업대외적 과업도 제시하였다. . . .

통칭하여 동강회의라고 부르는 그 회의는 15일 간이나 진행되었다.

나는 보고에서 조국광복의 기치밑에 전민족을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결속할 데 대한 과업과 국경지대와 국내에 진출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힘있게 전개하며 항일무장투쟁을 가일층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국경 연안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의거할 새로운 근거지를 창설할 데 대한 과업들을 제기하였다. 이 보고가 후에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더욱 확대발전시켜 전반적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어 올리자≫라는 제명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 . .

창립선언의 구절구절들은 처음부터 참가자들의 심장을 거머잡았다. 특히 온 민족이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이 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능과 지혜를 바치며 2천만 민중이 한데 뭉쳐 행동으로 반일조국광복전선에 참가한다면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고 모두다 조국광복회에 망라되어 싸울 것을 호소한 부분은 회의참가자들을 상당히 격동시켰다. . . .

우리 나라에서의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의 조국광복회의 창립은 혁명의 군중적 지반을 강화하는 사업에서 획기적인 사변으로 되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결합되어 전국적 범위에서 보다 조직성 있고 체계성 있게 빨리 발전하게 되었으며 모든 반일역량을 나라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 . .

조국광복회 창립은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꾸준히 키워온 우리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노력의 위력한 산물이었다. 그것은 우리 인민이 민족자체의 힘으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해 나갈 의지를 다시금 엄숙하게 선포한 역사적인 계기로 되었으며 항일무장투쟁을 기본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떠밀어가는 전환점으로 되었다.

조국광복회의 창립은 조선혁명 자체발전의 요구와 시대적 흐름에 부응한 것으로 하여 내외의 커다란 지지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 .

단시일 안에 수십만 회원을 가진 범민족적 조직으로 확대발전한 조국광복회의 발전사에 대해서는 아마 큰 책 몇 권에도 다 담기 어려울 것이다.

1936년 5월 백두산 북쪽 기슭에서의 조국광복회의 탄생은 조선혁명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조국광복의 밝은 서광을 안아온 역사적 사변으로 된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5권

≪우리는 간도에서 유격대를 창건하던 초시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와 좀 다른 점은 우리의 역량이 미력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사적 권위가 공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진영에 속하는 왕가대장도, 우리의 동맹자로 될 수 있는 만순대장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안정된 시간을 얻을 수 있겠는가.

방도를 연구하던 끝에 우리는 왕가대장과는 서로 상대방을 치지 않고 적당히 지내며 만순대장과는 공동전선을 형성하기로 작정하였다.≫(왕가대장을 치고 만순을 끌다, 세기와 더불어 6권)

≪물론 구체적 실천에서는 착취계급을 타도하는 문제와 그 계급의 개별적 존재, 개개의 유산자를 대하는 문제를 엄격히 갈라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일혁명시기 일본제국주의와 그 하수인이 된 악질적인 유산자들만을 투쟁의 과녁으로 삼았다. . . .

우리는 이러한 광폭정치를 반세기 전에도 하였고 지금도 실시하고 있다. 진정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벌써 항일혁명시기부터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들고 출신과 신앙과 재산정도가 서로 다른 각계각층의 군중을 하나의 역량으로 묶어세우기 위한 투쟁 . . .≫(애국지주 김정부, 세기와 더불어 5권)

이제순≪그는 국내인사들 가운데서 해외의 무장투쟁과 국내정치투쟁의 불가분리성과 일원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공리공담의 울타리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실현하였을 뿐 아니라 혁명군과의 연계를 성사시킨 다음에는 우리의 노선을 관철해 나가는 길에서 생명까지 바친 선각자, 투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 . .

우리는 장백현 상강구지역을 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출발에 앞서 이제순은 자기에게 신임장을 한 장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의 도장이 찍힌 신임장만 내대면 군중들을 조국광복회조직에 많이 묶어 세울 수 있고 또 일도 상당히 쉽게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이제순, 세기와 더불어 5권)

≪3·1월간≫은 조국광복회의 기관지로 발간되었으나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기관지로서의 사명도 띠고 있었으며 온 나라, 온 민족을 상대로 하는 대중정치잡지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담당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이 잡지는 조선인민혁명군대원들이나 공산주의혁명가들만이 아니라 민족부르조아지나 종교인들, 독립군병사들까지 다 읽고 사랑하는 범민족적인 잡지로 . . .≫(≪3·1월간≫, 세기와 더불어 5권)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하는데서 우리가 중요하게 내세운 전략적 과업은 한편으로는 국내에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총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믿음직한 책원지, 비밀거점을 꾸리는 것이었으며 다른 편으로는 강력한 정치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을 마련함으로써 자력광복을 위한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국내에 강력한 정치적 역량을 꾸리는 사업은 조국광복회망을 확대하여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굳게 묶어세우는 것과 함께 국내에 강력한 당조직망을 꾸림으로써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항일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핵심역량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아 벌이려고 하는 모든 정치적, 군사적 활동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적인 중심고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 . .

우리앞에는 이러한 요구에 민감하게 호응할 수 있는 실천대책이 필요하였다. 그 대책 중에서도 선차적인 것이 바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과제를 실행하자면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이제순과 같은 형의 견실한 혁명가들을 찾아내고 그들과의 공동노력을 통하여 조국광복회망을 빨리 늘이고 온 민족을 반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만 하였다.

그런 적임자로 물색된 것이 박달이었다. . . .

나는 박달에게 갑산공작위원회를 조국광복회의 산하조직으로 하되 그 명칭은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바꿀 데 대하여 제의하였다. 박달은 그 제의에 흔연히 동의하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그리고 그 당은 성격상 반일통일전선적인 당으로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국제당의 견해와 당시 국제당에 가있던 중국당일군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에서의 당조직건설문제와 통일전선결성문제를 우리의 독자적인 판단과 결심에 따라 해결하였다.

우리는 당조직건설문제와 통일전선결성문제를 같이 밀고 나가면서도 그것을 서로 뒤섞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당이 통일전선을 대표하거나 통일전선체조직이 곧 당으로 될 수 없기 때문 . . .

우리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여 당조직건설을 밀고나가는 한편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의 조국광복회를 내오는 방법으로 온 민족의 대단결을 실현하였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박인진≪조국광복회 기관지 ≪3·1월간≫ 창간호에는 ≪천도교 상급영수 모씨! 우리 광복회 대표를 친히 방문≫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내외에서 유력한 군중적 지반을 가지고 있는 천도교 위원 모씨가 끓어넘치는 애국열정을 가지고 친히 조국광복회 대표인 나를 방문하였다는 것과 그가 우리의 조국광복회 강령과 일체 주장에 찬동하였으며 아울러 천도교 청년당원 100만명을 조선독립전선에 출동시킬 의향을 표시하고 장차 조국광복회와 보다 긴밀한 연계를 취할 데 대하여 굳게 약속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 기사의 주인공인 모씨가 박인진도정이다. . . .

우리 나라 헌법에 명기되어 있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조항은 빈말공부나 비누거품 같은 약속이 아니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신앙의 자유를 유린해본 적도 없고 종교신자들을 탄압해본 적도 없다. 만일 공화국정권하에서 제재를 받았거나 정치적 시련을 겪은 종교인이 있다면 그것은 조국과 인민의 이익을 팔아먹은 범죄자들과 민족반역자들뿐일 것이다. . . .

들리는 말에 의하며 남조선에는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 신자들 중에는 민주, 통일, 평화를 위한 3대 전선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은 애국자들과 투사들이 적지 않다.

지금 남조선과 해외의 종교인들속에서 연공애국인사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공산당 선언≫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와 그들을 결합시켜주고 있는 유대는 애국애족의 사상감정이다.

이러한 유대는 1930년대에도 존재하였다. 애국애족만 있으면 그 어떤 계층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천명된 통일전선의 원칙이었다. 우리는 이 원칙에 따라 박인진도정과도 손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 . .

박인진도정이 청수를 모신 뒤 우리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된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박인진도정, 세기와 더불어 5권)

≪그가 도천리를 혁명화하는데서 중심고리로 잡은 것은 군중을 의식화하여 혁명조직에 묶어세우는 사업이었다. 김정숙≪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내걸고 우리의 혁명사상을 정력적으로 선전하였다. 이런 과정에 지도핵심들을 소문없이 키워냈다. 그리고 그 핵심들로 반일청년동맹도 조직하고 부녀회도 조직하였다. 조용하던 산골마을은 드디어 우리의 위력한 활동지반으로 되었다. 김정숙은 가는 곳마다에서 인민들은 옹군애병사상으로 교양하였으며 부녀회원들, 청소년들과 함께 원호물자들을 준비하여 부대에 보내주고는 하였다.≫(양민보증서, 세기와 더불어 5권)

6권

백두산기슭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조국광복회건설운동은 만주전역삼천리 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길처럼 거세차게 번져갔다.

나라와 인민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구절구절은 민족의 넋에로 새로운 활력을 심어주고 삼천리 온 강토가 광복열망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민족주의자들, 노동자, 농민과 더불어 지식인, 청년학생, 수공업자, 종교인, 민족자본가를 포함한 애국적인 온 겨레가 하나의 광복전선에 합세하였다.

조국광복회건설운동은 장백을 비롯한 서간도와 만주땅에서 먼저 활발히 벌어졌다. . . .

조국광복회창립 직후 우리는 밀영에서 먼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회의를 열고 부대 내 전체 병사, 지휘관들을 조국광복회에 가입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 . .

그 당시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 주역을 담당한 것은 조선인민혁명군 무장대오에서 선발된 정치공작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한때 조국광복회준비위원회에 망라되어 활동하던 성원들도 포함되어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불씨가 되어 만주 대륙에 통일전선운동의 열풍을 일으키었다. . . .

북만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사업에 대하여 말할 때 김책의 노고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책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입수하자 그 강령을 한 자 한 자 목판에 새겨가지고 수백부나 찍어냈다. 그가 손수 찍어낸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북만의 항일연군부대들과 각 현의 지방혁명조직들에 널리 배포되었다. 김책은 여러 차례의 회의들을 통하여 조국광복회조직망을 확대하고 그 조직들을 실천투쟁속에서 단련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 . . .

국내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은 일본침략자들의 무자비한 탄압종파분자들의 노선상 착오로 말미암아 매우 간고하고 복잡한 조건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 . .

우리는 국내에서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적 영도가 가장 손쉽게 미칠 수 있는 북부국경지대의 압록강연안에서부터 시작하여 국내 종심깊이 확대하는 방향에서 진척시키었는데 이 사업의 주요지역으로 선정된 곳이 갑산과 삼수, 풍산 지구였다. . . .

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과 애국투사들에 의하여 함경북도 지방에서는 노동계급이 많이 집결되어 있는 무산, 청진, 어대진, 연사 일대와 길주-혜산선철도를 낀 농조세력이 강한 남부 시, 군들에서부터 먼저 조국광복회운동의 불길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1937년 여름에는 벌써 이 고장들에서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의 결성을 보게되었다. . . .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서선지방과 중부조선, 남부조선 일대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도 응당한 주위를 돌리었다. . . .

평양과 평안남도 일대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는 이주연, 현준혁, 최경민 등이 큰 공로를 . . .

남부조선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과 관련된 자료들은 국토분단으로 하여 충분히 발굴되지 못하고 있지만 일제 경찰자료 들에 남아있는 것들만 해도 그 수는 많다.

최근에는 일본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과 그 활동에 관한 자료가 여러 건 발굴되었다. 조국광복회하부조직들이 오까야마를 비롯하여 도꾜에도 있었고 교또오사까, 호가이도에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20여만의 회원을 가지고 전민항쟁에로 육박하던 조국광복회조직은 조선민족해방투쟁역사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쌓아올린 하나의 기념비이다. 조국광복의 기치밑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민족해방위업에 조직동원하는데서 이 조직들은 실로 거대한 공헌들을 하였다. . . .

조국광복회조직들은 유격대를 도와주기 위한 전인민적인 운동을 힘있게 벌이었다. 조국광복회 갑산지회에서는 원래 천도교인들이 바치는 ≪성미≫를 천도교중앙에 올려보내군 했었는데 1930년대 후반기부터는 그 ≪성미≫를 조직적인 방법으로 인민혁명군에 보내었다. 인민혁명군이 식량고생을 한다는 소문만 들으면 서간도사람들은 결혼잔치, 환갑잔치, 생일잔치감으로 모아두었던 쌀마저 서슴없이 보내주었다. . . .

조국광복회 국내조직들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태업, 파업, 시위, 폭동, 소작쟁의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일제의 강도적 수탈을 반대하는 투쟁, 일제의 ≪황민화≫정책을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 일제의 대륙침략과 전쟁정책 수행에 타격을 주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조직 지도하였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통하여 조선의 혁명가들이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은 이 운동을 통하여 당조직건설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더욱 튼튼히 마련한 것이었다. 우리는 조국광복회조직들에서 육성된 핵심들로 전국각지에서 당소조들을 무었다. 이 소조들이 결국은 조국광복회조직들도 지도하고 대중투쟁도 지도하였다. 투쟁속에서 태어나 투쟁을 통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끊임없이 단련된 당조직들이야말로 장차 해방된 조국땅에서 근로대중의 위력한 정당을 창건할 수 있는 초석으로 되었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은 또한 조선의 혁명가들로 하여금 대중단체조직건설의 풍부한 경험도 쌓게 하였다. 이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해방 후 그처럼 짧은 기간에 민청, 직맹, 여맹, 소년단과 같은 계층별 대중단체들을 건설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과정을 통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우리 나라의 유구한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진실로 애국적이고 애족적이며 혁명적인 강유력한 통일전선의 참모습을 창조하였다. 백두산을 축으로 하여 형성된 반일민족통일전선은 우리 나라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전통으로 되었으며 우리 인민의 억센 기상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 . .

노동당시대의 우리 인민들은 그 단결력의 최고형태인 온 사회의 일심단결을 이미 오래전에 실현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쪽으로 갈라진 북남의 통일이다. 조국통일은 나의 일생을 관통하고 있은 변함없는 의지이고 신념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 마땅히 하나의 통일국가에서 살아가야 하며 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민족통일과 관련된 우리의 입장이고 관점이다. 무슨 담보를 가지고 북남통일이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우리에게는 민족대단결이라는 위력한 무기가 있다. 그리고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통해 이룩한 민족통일전선의 풍부한 경험이 있다.

반세기전에 이미 통일전선의 경륜을 훌륭하게 이루어온 우리 민족이 왜 지금에 와서 민족대단결을 실현하지 못하겠는가. 그 이유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무조건 통일전선을 해야 한다. 통일전선만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 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통일전선은 민족이 민족으로 살아남는데 필요한 영원한 생존방식이다. 민족이 살아나갈 길도 통일전선에 있고 민족이 부흥하고 번영하는 길도 통일전선에 있다. 이것이 내가 해내외의 우리 동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삼천리방방곡곡에, 세기와 더불어 6권)

≪우리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구호를 들고 한 편으로는 무장투쟁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당조직건설을 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통일전선운동과 반제공동전선운동을 하면서 항일혁명을 추진시켜왔다. . . .

그런데 놀라운 것은 후방공작조성원들이 의식을 차리기가 바쁘게 일어나 재봉기앞에 마주앉더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소덕수의 조국광복회원들과 인민들은 일심일체가 되어 600벌의 군복을 짓는데 필요한 천도 해결하고 제작도 끝내었다. . . .

우리는 이미 여러 갈래의 선을 통하여 보천보에 대한 정찰을 충분히 해두었었다. 권영벽이나 이제순의 선도 동원하고 박달의 선을 통해서도 적정을 입체적으로 파악하였다. . . .

그리고 조국인민들로 하여금 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항일혁명의 마당에 거족적으로 달려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일사천리로 내밀 수 있는 분위기를 지어주었다. . . .

이 일화는 김구를 비롯한 해내외의 명망높은 인사들이 보천보전투를 계기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얼마나 신뢰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로 된다.≫(보천보의 불길(1)(2), 세기와 더불어 6권)

≪나는 이 회의에서도 역시 두만강, 압록강 연안일대를 비롯한 광활한 지역에서 적배후교란작전을 강화하여 국내에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을 더 많이 파견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계속 확대강화해 나갈 데 대하여 힘주어 말하였다.≫(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나가며, 세기와 더불어 6권)

≪함흥, 흥남지구공작원들은 9월 호소문을 접수한 다음 노조와의 사업에서도 혁신을 가져왔다. 그들은 숨어있는 노조관계자들을 100여명이나 찾아내어 그들 모두를 조국광복회조직에 흡수하였다. 흥남지구노조는 노동자돌격대의 원천지로 되었다. . . .

내가 해방 후 평양에서 개선연설을 한 바로 그날에 문천제련소에서는 첫 쇠물을 뽑았다. 그것도 그 제련소에서 지하활동을 해오던 조국광복회조직원들이 발기한 애국적 소행이었다.≫(9월 호소문, 세기와 더불어 6권)

7권

우사령도 반공을 하였고 오의성도 처음에는 반공을 하였습니다. 조선사람인 양세봉도 애국자였지반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다가 생애의 말년에야 연공으로 돌아섰습니다. 우사령이나 오사령, 양사령과의 담판에서는 통일전선을 위해 내가 매번 공산주의를 변호하고 연공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설득시키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연공이냐 반공이냐 하는 선택권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주동적인 자세에서 담판을 끌고나가면서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유통사와의 담화에서는 문제가 달랐습니다. 나는 그의 반공행위를 규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유통사는 그 판결을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 . .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나라도 민족도 혈육도 안중에 없이 오로지 개인의 이익과 향락만을 추구하는 자산가들과는 뜻을 같이할 수 없지만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양심적인 자산가들은 국적과 당파, 정견에 관계없이 우리의 동행자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념의 차이나 재산의 유무는 인간을 평가하는데서 절대적 기준으로 될 수 없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사람평가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조국애와 민족애, 인민애, 인간애일 것입니다. 인간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 민족을 사랑하며 민족애가 강한 사람이 조국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며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 . .

재미교포 손원태는 어느 날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는 자리에서 주석님, 남조선에는 자산가들이 많습니다. 이제 통일이 되면 그 많은 자산가들을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해주시었다.

그때 외세에 붙어서 민족을 팔아먹는 극반동이 아닌 이상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은 우리의 이런 입장을 집대성한 것입니다.≫(중국인지주 유통사, 세기와 더불어 7권)

8권

≪1940년대에 이르러 항일혁명투쟁은 조국광복위업수행에서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을 수 있는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이 시기의 투쟁에서 중요한 내용의 하나로 된 것은 우리가 1942년 여름부터 쏘련경내에서 중국, 쏘련의 전우들과 함께 국제연합군을 편성하고 일제를 최종적으로 격멸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준비를 백방으로 강화해나간 것 . . .≫(국제연합군을 편성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전민항쟁 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백두산에 틀고앉아 무장투쟁을 압록강연안과 국내에로 확대하면서 조국광복회의 기치밑에 당건설과 통일전선운동, 대중조직건설을 활발히 벌이던 때부터였습니다.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나라의 해방을 이룩할 것을 호소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사실상 전민항쟁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9월 호소문우리가 전민항쟁방침을 독자적인 노선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무적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다음부터였다고 봅니다. 전인민적 반일항전문제를 가지고 백두산밀영에서도 회의를 했고 초수탄과 신흥에서도 회의를 하였습니다. 9월 호소문전민항쟁호소문이라고 이해해도 됩니다. . . .

민족내부의 애국역량이 최대한으로 단결되고 발동된 거족적인 반일항전, 이것이야말로 1940년대 전반기 우리 혁명발전의 새로운 모습인 동시에 특출한 성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로 대치되어있던 두 세력이 이 시기에 와서는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다시 합작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 . .

주의주장과 이념을 따질내기를 해가지고서는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지 못합니다. 1940년대 전반기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맞을 때처럼 제나름의 주의는 묻어두고 공통성을 찾아 그것을 절대화하여야 합니다. 항일혁명의 경험과 교훈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이극로가 민족의 얼을 지키는데서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이고 또 공산주의자들한테서도 사랑을 받고 민족주의자들한테서도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4월남북연석회의 때 그를 주석단에도 앉히고 회의참가자들의 이름으로 전체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전조선동포에게 격함≫이라는 문건도 낭독하게 하였습니다.≫(민족의 얼, 세기와 더불어 8권)

이극로≪나는 한평생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과의 단합을 중요한 노선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한때 민족주의운동공산주의운동과 함께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에서 2대 구성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 .

우리와의 연합을 성사시키기 위한 반일독립운동자들의 움직임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어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이루게 된 것은 1930년대 후반기부터였습니다. 1936년 5월에 우리가 조국광복회를 창립하고 민족의 총동원을 호소하면서 통일전선운동을 힘있게 벌려나가게 되자 민족주의자들은 그에 적극적인 자세로 호응해 나섰습니다.

남만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의 참모장 윤일파가 우리에게 지지서한을 보낸 것이라든가, 상해의 조선인거류민단에 있던 박씨성을 가진 독립운동자가 남만에까지 와서 조국광복회 남만대표였던 이동광을 만난 것이라든가, 김활석의 휘하에 있던 독립군의 잔존세력이 최윤구를 선두로 조선인민혁명군에 스스로 편입한 것은 그 대표적인 실례로 됩니다.

그러면 민족운동진영이 종전의 배타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어떻게 되여 우리와의 합작을 그처럼 중시하게 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권위가 높아지고 그 영향력이 확대된 데 있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은 조선민족해방운동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반일민족해방 전선의 주력군이었고 민족의 독립의지와 신념의 최고대표자였으며 항일혁명의 조직자, 영솔자였습니다.

국내외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하나로 묶어세워 강력한 전민항쟁역량을 꾸려나가는 것시대가 우리앞에 부과한 역사적 과제였고 각계각층의 애국인사들과 인민대중의 공통된 염원 . . .

조국광복회 국내조직들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태업, 파업, 시위, 폭동, 소작쟁의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일제의 강도적 수탈을 반대하는 투쟁, 일제의 ≪황민화≫정책을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 일제의 대륙침략과 전쟁정책 수행에 타격을 주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조직 지도 . . .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통하여 조선의 혁명가들이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은 이 운동을 통하여 당조직건설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더욱 튼튼히 마련한 것이었다. 우리는 조국광복회조직들에서 육성된 핵심들로 전국각지에서 당소조들을 무었다. 이 소조들이 결국은 조국광복회조직들도 지도하고 대중투쟁도 지도하였다. 투쟁속에서 태어나 투쟁을 통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끊임없이 단련된 당조직들이야말로 장차 해방된 조국땅에서 근로대중의 위력한 정당을 창건할 수 있는 초석으로 되었다. . . .

여운형이 보천보전투가 있은 때로부터 우리를 만나려고 각방으로 애를 쓴 것처럼 우리도 여운형과의 합작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운형과의 사업은 서울에 가있는 정치공작원에게 맡겼습니다. 품을 들여서라도 여운형과 접촉해보라는 임무를 주었으나 후에 들은데 의하면 상대가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아 그와 한번도 속깊은 말을 나누지 못했다고 합니다. . . .

관내의 모든 반일애국역량과의 합작을 위한 우리의 활동은 응당한 결실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이 너무나도 빨리 패망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와 국내의 항쟁조직들이 내응외합하여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최종작전을 벌일 때 관내의 무장력은 거기에 직접 참여하지 못 . . .

반일애국역량과의 단합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역사의 밑거름으로 되어 해방된 조국땅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통일전선의 결성으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우리가 항일혁명 초기부터 통일전선사업을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노선으로 삼고 그 실현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온 것이 백 번 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 . .

우리가 만일 이런 심리적 곡절을 이겨내지 못하고 감정에 사로잡혀 처신을 극단적으로 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을 적대시하는 방향으로만 나갔더라면 통일전선은 지상공론으로만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통일전선을 위한 우리의 변함없는 노력과 성의 앞에서는 김구와 같은 완고한 반공인사도 감동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 .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일찍부터 점을 찍어두었던 대상들은 해방 후 모두 통일전선의 기발아래 모여들었습니다.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에 어떤 정객들이 참가했는가를 보시오. 김구,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엄항섭, 조완구, 김월송… 이름있는 민족주의자들은 다 참가하지 않았습니까. 따지고 보면 김구네 임시정부인사들은 다 우리에게로 온 셈입니다.

조선건국동맹의 주인공인 여운형도 평양에 와서 나를 만나고 돌아갔고 조선독립동맹의 지도자들도 동료들과 함께 평양으로 찾아왔으며 김원봉도 평양에 와서 초대국가검열상으로 사업하였습니다.

공화국북반부에서는 벌써 1946년에 각당, 각파, 각계의 애국역량을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었습니다. . . .

외세의 위협을 항시적으로 받아오고 있는 우리 민족의 좌우명은 무엇보다도 민족대단결로 되어야 합니다. 민족의 흥망성쇠여부는 우리 민족 모두가 이 좌우명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데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상과 이념, 정견과 제도에 앞서 민족을 우선시하는 시종일관하고 공명정대한 정책의 깊은 역사적 뿌리와 크나큰 업적과 고귀한 경험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내놓고 온 민족을 통일위업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반일애국역량과의 단합을 위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나는 이런 견해에 기초하여 1945년 8월 20일 훈련기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적 과업으로 건당, 건국, 건군의 3대 과제를 제시하였습니다. . . .

나는 원산시당일군들에게 ≪공산주의기치아래 프롤레타리아트는 단결하라!≫고 한 시당청사의 구호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당면과제로 안고 있는 우리 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것만큼 민주주의기발아래 단결하라로 바꾸어야 한다, 해방된 조국땅에 인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면 노동계급 뿐 아니라 그 동맹자인 농민은 물론, 새 사회건설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각계각층의 애국적인 군중을 통일전선에 묶어세워 거족적인 힘으로 우리 나라를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 . .

그날 내가 한 연설의 골자는 민족대단결이었습니다. 나는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애국성업에 이바지하자고, 온 민족이 하나로 굳게 단결하여 이 땅우에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 나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군중은 하늘땅을 진감하는 박수와 환호로써 지지를 표시하였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위대한 김일성주석님민족통일전선사상은 회고록의 서문에 그 핵심이 다 담겨 있다.

민족수난의 비운이 칠칠히 드리웠던 망국초엽에 태어났고 격변하는 내외정세의 소용돌이속에서 생의 첫 걸음을 떼어야 했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조국과 운명을 같이하고 겨레와 더불어 희로애락을 나누는 길을 걷게 되었으며 바로 그 길에서 어언 팔순에 이르렀다. . . .

나는 나의 한 생이 결코 남달리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한 생이며 인민과 더불어 지나온 한 생이었다고 자부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나는 나의 글이 인민을 믿고 인민에게 의거하면 천하를 얻고 백 번 승리하며 인민을 멀리하고 그의 버림을 받게 되면 백 번 패한다는 진리, 생과 투쟁의 교훈을 후세에 남기게 되기를 바란다.≫

 

This counter provided for free from HTMLcounter.com! copyleft © 백두산편집부
이 문서는 Internet Explorer v5.0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