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16일(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세기와 더불어≫ 강의 (7)
- 제18장 ≪중일전쟁의 불길속에서≫에서 제19장 ≪시련의 언덕을 넘어≫까지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안녕하십니까. ≪세기와 더불어≫강의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의 전성기, 곧 둘째 단계에 대한 학습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은 국내당공작위원회, 두 번째 시간은 보천보전투가 중심이었다면 네 번째 시간은 고난의 행군과 대부대선회작전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의 기간으로서 중일전쟁과 열하원정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오늘 학습의 초점은 항일무장투쟁 전성기인 둘째 단계의 왕성하면서도 복잡한 일련의 투쟁과 사건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있습니다. 먼저 동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기간의 역사적 주요사건들을 시간대별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936년

2월 27일∼3월 3일 - 남호두회의 : 항일무장투쟁 둘째단계의 전략적 방침 확정

미혼진밀영에 있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   3월 - 미혼진회의 : 민생단보따리를 소각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새 사단 조직

5월 - 동강회의 : 조국광복회 창립(1936년 5월 5일)

9월 : 장백현 19도구에서의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회의 - 정치공작원을 압록강, 두만강 연안일대와 국내에 파견 결정(김정숙과 권영벽, 김주현, 지태환, 박록금, 최희숙)

11월경 :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과 천도교도정 박인진의 면담.

12월 1일 : 조국광복회 기관지 ≪3.1월간≫ 창간호발간

12월 :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과 갑산공작위원장 박달의 면담. 국내당공작위원회 결성

* 곰의골어귀전투(1936.11), 홍두산전투(1937.2), 도천리전투(1937.2), 이명수전투(1937.2) - 일제의 ≪동기토벌≫(1936년 11월-3월) 격파

1937년

1월 : 박달, 갑산공작위원회를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전환

1월 : 조국광복회 신파지회, 북청지구위원회, 풍산지회 등 조직

2월 :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과 애국지주 김정부의 면담(백두산근거지의 홍두산밀영)

3월 - 무송원정 : 100킬로, 25일. 양목정자밀영을 습격한 위만군에 의해 8연대정치위원 김산호전사. 소탕하에서의 일행천리

3월 중순 : 백두여장군 김정숙동지께서 장백현 도천리에 파견되시어 국내신파지구 등에서 활동. 김정숙동지는 그해 여름에 체포되시었으나 500여명의 ≪양민보증서≫로 석방되심

3월 29일∼31일 - 서강회의 : 보천보전투를 비롯한 대부대에 의한 국내진공작전 확정

5월 : 조선인민혁명군 대내기관지 ≪서광≫ 창간

6월 4일 : 보천보전투

보천보전투당시 보천보시가

6월 30일 : 간삼봉전투 - 적 1,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

7월 7일 : 중일전쟁(7.7사변)발발 - 노구교사건. *만주사변(9.18사변) - 류조규사건, 1932년

8월 : 초수탄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 및 병사대회

8월 : 쏘련, 중국과 불가침조약 체결

9월 : ≪9월 호소문≫ 발표

* 장백현 신방자전투, 림강현 요강전투(1937년 8월), 휘남현성전투(1937년 9월), 무송-서강도로매복전투(1937년 10월) 등 - 중국본토를 침략한 일본군의 배후타격교란전

* 남포제련소노동자파업(1937년 7월), 단풍철도부설공사장파업(1937년 하반기) 해주시멘트공자노동자파업(1938년 3월) 등

8월-9월 : 김주현무장소조 국내파견 실패 몽강현 마당거우밀영

9월 : 정치공작원 대거 국내 파견

9월 : 위대한 김일성장군님, 수행성원 10여명을 인솔하시고 함경북도 신흥지구와 풍산지구 방문

11월 :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 발표

1937∼1938년 겨울 : 몽강현의 마당거우밀영(서패자)에서의 동기집중학습

* ≪갑산, 혜산 사건≫

1차 : 1937년 10월 경 - 장백현의 권영벽, 이제순 등 체포

2차 : 1938년 5월∼10월 - 마동희, 박달 등 체포

1941년 8월 ≪혜산사건≫이라는 이름하에 함흥지방법원에서만도 167명 유죄판결, 서대문형무소 이관

마동희 - 자결, 권영벽, 이제순, 지태환, 이동걸 - 사형

1938년

1월 : 일본당국이 만주땅에 불시착륙한 쏘련비행기를 억류한 사건 발생

봄 : 양정우 1군의 열하원정 * 국제당 1936년 봄, 1937년 여름과 1938년 봄에 열하원정 요구

3월 :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과 마지막 독립군부대장 최윤구의 재회(남패자).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

7월중순 : 양정우 1군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정식으로 서정(열하원정)계획 취소

7월 29∼8월 10일 - 하싼호(장고봉)사건 : 쏘련을 옹호하기 위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적배후교란전

가을 :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과 양정우와의 만남(남패자)

11월 25∼12월 6일 : 몽강현 남패자회의

1938∼1939년 겨울 : 고난의 행군. 100여일

유화-고난의행군

1939년

4월 3∼4일 - 장백현 북대정자회의 : 고난의 행군 총화, 제2차 국내진공작전(무산지구전투) 결정

5월 18일 : 압록강도하. 청봉, 건창, 베개봉, 삼지연, 무포를 거쳐 대홍단일대에 진출 - 갑무경비도로를 대낮에 행군한 일행천리전술. 대홍단전투

5월 22일 :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신사동주민들과 목재소노동자들앞에서 역사적인 연설

5월 24일 : 안도현 큰골, 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 백두산동북지대에서의 군사정치활동 방향 제시

5∼9월 - 할힌골(노몽한)사건 : 쏘련을 옹호하기 위한 조선인민혁명군 적후방교란작전

8월 : 위대한 김일성장군님,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에게 적후방교란작전 강화 명령(8월 명령)

* 대사하전투, 대장강전투(8월), 요차전투(9월)

* 대사하전투에서 김진, 적의 화구를 가슴으로 막으며 전사

군정학습에 참가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 10월 6∼7일 : 안도현 양강구 군정간부회의에서 대부대선회작전방침 결정. 두만강 - 화룡 - 돈화 - 육과송 - 쟈신즈 - 무송현 백석탄 (1939년 9월이후의 관동군사령관 직속 ≪토벌사령부≫의 20여만의 대포위작전과 ≪장거리추격전≫ 격파)

12월 - 육과송전투 : 7연대장 오중흡 전사

겨울 : 무송현 백석탄에서 40여일간 군정학습

1940년

2월 : 양정우, 몽강현의 한 수림속에서 영웅적으로 전사

소할바령회의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신던 곳   2월 : 무산지구대안 진출

3월 - 대마록구전투(국경지대 일제 본거지 중 하나)

3월 - 홍기하전투 : 일제의 ≪정예부대≫인 ≪마에다부대≫ 전멸

봄과 여름 : 안도 - 화룡 - 연길 - 돈화 순회하면서 대사하치기전투

8월 - 소할바령회의 : 항일무장투쟁 세째단계로 전환

대충 정리가 되나요? 우선 항일무장투쟁 둘째 단계와 세째 단계의 시작인 남호두회의소할바령회의를 처음과 끝으로 잡아두고, 그 사이에 조국광복회창립, 국내당공작위원회조직, 보천보전투, 중일전쟁, 열하원정, ≪혜산사건≫, 남패자회의, 고난의 행군, 북대정자회의, 무산지구전투, 대부대선회작전 등의 흐름을 잡아두면 될 것입니다. 보천보전투 이전은 지난 시간까지 학습하였고 고난의 행군 이후는 다음 시간에 학습할 것이므로 오늘은 주로 중일전쟁과 ≪9월 호소문≫, 마당거우동기학습, 열하원정, ≪혜산사건≫, 남패자회의 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32년 9.18사변으로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드디어 1937년 7.7사변으로 중국본토를 침략하며 중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일제가 중국침략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심한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후방의 안전이지요. 무릇 후방이 불안해서는 큰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전투는 참으로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군사적 측면에서는 규모가 크지 않은 전투였지만 군사정치적 의의만큼은 지대한 것입니다. 하여튼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역량과 역할이 비약적으로 강화되는데에 큰 불안을 느끼면서도 오래전부터 계획하던 중국침략전쟁을 도발하였습니다.

1937년 9월 전체 조선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   일제는 중국침략을 도발하면서 조선혁명을 더욱 파쇼적으로 진압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과 조선인민혁명군과 연결된 국내외지하조직의 대대적인 검거소동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침략전쟁이 일어나면 이처럼 파쇼통치가 강화되고 ≪토벌작전≫, 검거선풍이 일게 되므로 혁명운동에는 일단 불리한 국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이러한 정세를 오래 전에 예견하시었으며 그 정세가 내포하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주목하시면서 정세의 주동을 쥐기 위한 주체적이고 전략적인 방침을 발표하시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초수탄에서의 군정간부회의와 지휘관, 병사 대회의 연설이고 바로 ≪9월 호소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중일전쟁이 장기전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고 쏘일간의 긴장이 고조될 것이며 일본내의 모순도 격화될 것이며 특히 일제와 조선민족의 민족 및 계급 모순이 격화되어 결국 일제의 패배로 끝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내다보시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를 ≪끝없는 치부욕과 팽창욕에 환장이 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침략한 다음 그것을 채 소화하지도 않고 연방 중국본토까지 삼키겠다고 욕심사납게 덤벼들었지만 그것은 고양이가 소대가리를 맡은 격이었다.≫고 통속적으로 설명하시었습니다. 그러시면서 주동을 틀어쥐는 전략에 대하여 ≪백두산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기 위한 과업을 조직건설의 측면에서 많이 논의하였지만 초수탄회의에서는 적배후교란작전방침을 관철하는데서 나서는 과업을 항일연군부대들과의 협동작전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군사적 측면에서 많이 협의하였다. 나는 이 회의에서도 역시 두만강, 압록강 연안일대를 비롯한 광활한 지역에서 적배후교란작전을 강화하여 국내에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을 더 많이 파견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계속 확대강화해 나갈 데 대하여 힘주어 말하였다.≫고 밝히시었습니다.

한마디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중일전쟁을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결정적으로 앞당기기 위한 주체혁명역량의 강화의 호기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체적인 전술적 방침도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연군부대와의 협동작전, 적배후교란작전, 국내당조직과 통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소부대와 정치공작원의 파견 등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유례없는 파쇼적이고 야수적 폭압국면을 오히려 주체역량강화의 호기로 삼으시는 데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세계를 뒤흔드는 복잡한 정국의 소용돌이속에서 우리가 만일 방어나 후퇴, 우회하든 방법에만 매달렸다면 우리앞에 가로놓였던 난국을 타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우리가 그때 역경을 맞받아나가 그것을 순경으로 전환시킨 혁명적 전략이 천백 번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회상하시면서 ≪내 일생의 총적 지향은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고 특유의 공격정신을 강조하시었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불굴의 공격정신, 우리 김일성주의혁명가들이 명심하여야 할 주체의 혁명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장백현 초수탄회의와 지휘관, 병사 대회에서 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나가는 전략전술적 방침들을 발표하신 후, 국내의 반일통일전선운동과 당창건사업, 혁명적 대중투신흥지구 동오골밀영의 사령부자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무장소조와 정치공작원을 많이 파견하시었습니다. 그 중 한 소조가 바로 김주현소조였습니다. 그런데 김주현은 도중에 금광을 치는 바람에 노출되어 한달만에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김주현은 그후 철직되어 작식대원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혁명화사업을 잘하여 다시 복직되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잘 싸웠습니다. 이는 청봉에서 엄광호에 놀아난 이동걸이 총화사업을 잘 하여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혁명투쟁에 투신한 것과 함께 총화와 혁신의 좋은 모범으로 됩니다. 어쨌든 김주현소조가 실패하고 돌아오자,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직접 국내에 들어가실 결심을 하시고 10여명의 수행원만을 이끌고 신흥지구와 풍산지구에 진출하십니다. 위대한 주석님의 이 대담하면서도 헌신적인 투쟁으로 국내 노동계급 속의 투쟁열기가 고조되고 ≪9월 호소문≫이 더욱 깊이 침투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혜산사건≫이 터졌습니다. ≪갑산, 혜산사건≫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건은 1, 2차에 걸쳐서 장백지구와 갑산, 혜산지구의 지도핵심들이 일제의 탄압선풍에 의하여 검거된 사건입니다. 그 실질적인 내용과 규모, 파장 면에서 가히 일제시대 가장 큰 규모의 지하조직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사건으로 권영벽, 이제순, 지태환, 이동걸은 말할 것도 없고 박달도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혜산사건을 취급한 당시 일제의 문건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친히 파견하신 마동희도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마동희는 적들의 고문에 굴하지 않고 꿈결에라도 사령부의 위치를 누설할까봐 스스로 혀를 끊고 자결한 견결한 혁명가입니다. 이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은 보천보전투 이후 이 지역에 조선인민혁명군과 연계된 지하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일본놈들이, 모험적인 열하원정의 후과를 씻어내기 위하여 무송방면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이 이동한 틈을 타서 저지른 희대의 애국운동, 혁명운동 탄압책동이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열하원정에 대하여 회상하시면서 ≪만일 국제당이 열하원정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서간도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서간도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혜산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제때에 수습하고 손실도 최대한으로 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력부대가 서간도에 그냥 있으면 적들이 우리의 혁명조직들에 손을 대고싶어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합니다. 설사 손을 댄다 하더라도 체포를 면한 사람들이 산에 들어와서 부대에 입대하면 피해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박달도 체포되지 않고 산으로 돌아다니었는데 우리와 제때에 접선하지 못하다나니 붙잡히었습니다.≫고 지적하시었습니다. 이 회상교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외지하혁명조직의 든든한 보호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한편 열하원정이 조선혁명에 얼마나 큰 후과를 끼쳤는가를 잘 가르쳐준다고 할 것입니다.

열하로 진격하는 8로군   열하원정은 국제당의 중국공산주의자 왕명이 중국과 동북 혁명의 구체적 실정에 맞지않게 주관주의적으로 세운 방침으로서 혁명에서 주관주의가 얼마나 큰 폐해를 끼치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열하원정의 문제점에 대하여 ≪중국본토전체가 싸움터로 된 조건에서 8로군 열하진격대와의 합류라고 하는 문제설정은 솔직히 말해서 별 의의가 없는 것≫≪유격전의 요구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시었습니다. 실제로 항일연군부대들이 열하로 가려면 평원지대를 통과해야 하며 탱크나 대포로 무장한 일본의 정규군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니 열하원정이란 고기가 물을 떠나 뭍에 오르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남만의 양정우부대와 북만의 위증민부대들은 열하원정에 크게 녹아났습니다. 양정우는 1군이 다 녹아나는 것을 경험한 후에서야 열하원정의 문제점을 깨닫고 그 원정을 중단하였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열하원정의 문제점을 객관조건에서만 찾지 않으시고 주체적인 측면도 지적하시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내 개인의 견해에 의하면 국제당은 노선작성과 지도에서 주관주의를 범하였고 항일연군부대들은 그 집행과 실천에서 맹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국제당의 주관주의와 모험주의가 원정을 실패에로 이끈 기본요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 지적하시었습니다. 결국 국제당의 주관주의, 모험주의와 항일연군의 교조주의가 열하원정의 패배를 낳은 사상적 문제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열하원정의 사례에서 주관주의와 교조주의, 모험주의가 혁명에 얼마나 커다란 후과를 끼치는가를 명심하고, 언제나 사상에서의 주체확립을 대원칙으로, 생명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 혁명운동에 어떠한 주관주의, 교조주의, 모험주의가 발호하고 있는지 깊이 연구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투쟁, 사상에서 주체를 확립하기 위한 사상투쟁을 견결하고 적극적으로 전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열하원정을 강행하는 중국인부대들을 엄호하기 위한 적배후교란전을 맹렬히 전개하였습니다. 실제로 양정우는 주석님의 적배후교란전에 큰 덕을 보았다고 높이 평가하며 깊이 감사해 하였습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임무친필원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정세가 첨예해지고 복잡해지는 한편 ≪혜산사건≫이나 열하원정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는 와중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주체를 튼튼히 세울 필요성을 절감하시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라는 불후의 고전적 노작을 발표하시었으며 몽강현의 마당거우밀영에서 장기간의 동기학습을 진행하시었습니다. 이 때 들었던 구호가 바로 ≪학습도 전투다!≫, ≪어렵고 복잡한 때일수록 학습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모든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와중에 조선혁명의 주력 중의 주력인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아무것도 하지않고 너덧달이나 사상학습만 집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로 사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의 사상론, 진리를 깊이 터득하신 위대한 주석님이 아니고서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사업인 것입니다. 우리 김일성주의혁명가들은 사상학습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시는 이 위대한 주석님의 혁명사상을 깊이 체득하고 상황이 어렵고 복잡할수록 사상학습, 사상사업을 우선하는 혁명적 학습기풍을 확립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터넷회고록강좌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기획되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남패자에서 양정우와도 상면하시었지만 독립군의 마지막부대의 대장이었던 최윤구와도 재회하시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 1932년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시고 민족주의 독립군부대와의 합작을 위해서 남만원정을 하시었는데, 바로 그 양세봉독립군부대의 마지막 부대장이었습니다. 결국 그 때 위대한 주석님의 통일전선사업은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최윤구부대는 조국광복회가 창건되고 그 10대강령에 크게 감복하면서 백두산으로 찾아왔습니다. 이로써 조선인 최윤구반일무장부대는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영도아래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완전히 통일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위대한 주석님께서 항일혁명기간 일관하게 추진하시었던 반일민족통일전선정책이 이룩한 또하나의 빛나는 성과라고 할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최윤구가 단행한 거사는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사와 민족통일전선역사에 대서특필할만한 의의를 가진 경이적인 사변으로 됩니다. 그것은 항일무장투쟁초기부터 우리가 시종일관하게 실시해온 통일전선정책의 승리였으며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쌓아올린 또 하나의 탑이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독립군의 연합은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반드시 따라배우고 참고로 삼아야 할 하나의 선구적인 본보기로 되었습니다.≫고 긍지높이 회상하시었습니다.

항일혁명시기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양대 세력은 공산주의세력민족주의세력입니다. 물론 그 주도역량은 공산주의세력이었으며 그 공산주의세력의 주도역량은 조선인민혁명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이 항일의 기치아래 단결하는 것이 바로 반일민족통일전선이며 그 핵이 조국광복회였던 것입니다. 물론 조국광복회란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영도한 조직은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국내당공작위원회였음을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오늘의 통일혁명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오늘 통일혁명시기 민족해방민주주의운동의 양대 세력은 무엇인가요?

바로 민족민주세력시민운동세력(재야개혁세력, 화해협력세력, 평화공존세력)입니다. 물론 그 주도역량은 민족민주세력이며 그 민족민주세력의 영도조직은 전위당입니다. 항일혁명승리의 비결이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혁명무력과 조국광복회라는 전국적 민족통일전선이 하나가 되어 전체민족을 항일전민항쟁으로 추동한데 있다고 할 때, 오늘 우리의 통일혁명승리의 비결 또한 조선인민군이라는 혁명무력과 해방직후 조국전선과 같은 전국적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전체 민족이 반미전민항쟁에 궐기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김일성주의혁명가들과 민족민주운동가들은 남측에서 지역통일전선, 민족민주전선을 형성하기 위하여 그 대상인 재야개혁세력과의 통일전선사업을 일관되고 적극적으로 전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선에서 우리들이 추구하여야 할 목표는 바로 지역통일전선의 조직형태이며 주체세력인 진보적 대중정당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민주세력과 재야개혁세력이 하나가 되는 지역통일전선형성인 것입니다. 특히 우리 민족민주세력은 그 어떤 조건에서도, 어떤 강령으로도 이미 미제국주의의 대리통치세력, 주구세력으로 전락한 현집권세력, 집권상층개혁파와는 절대로 통일전선을 형성할 수 없다는 통일전선의 기본원칙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에서 김일(박덕산)과 황순희, 이을설, 임춘추를 혁명적 의리가 있는 혁명가로, ≪≪혜산사건≫을 겪으면서≫에서 마동희와 김혁, 유경수를 각각 장중열, 장소봉, 임수산과 대비하시며 신념과 의지가 강한 혁명가로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오늘 강의를 결속하면서 특히 마동희유경수에 대하여 회상하신 교시를 아래와 같이 발췌, 인용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혁명적 의리가 있고 신념과 의지가 강한 주체형의 혁명가, 김일성주의혁명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유화 (사령부는 우리의 심장속에 있다) - 마동희

≪마동희가 어떤 사람인가고 물으면 인민학교 아이들까지도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혀를 끊은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사람이 자기 혀를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각오는 살아서 역적으로 되는 것보다 죽어서 충신이 되기를 바라는 참인간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일단 죽음을 각오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

마동희의 용기와 희생성은 신념이 강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 용기와 희생성은 어떤 고문이나 위협으로써도 거세할 수 없는 무쇠같은 의지의 발현이었다. 마동희는 자기가 비밀을 지키면 조직은 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자기가 죽어도 혁명은 승리한다고 말하였다.

마동희를 신념이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준 것은 혁명실천이었다.≫

≪우리가 믿을 만한 사령관동지의 품밖에 없다. 사령과 동지를 잘 모시고 받들어야 우리는 조국의 해방도 이룩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운명도 개척할 수 있다. 사령관동지의 의도대로 하기만 하면 우리는 이긴다. 이것이 바로 유경수가 일상적으로 간직하고 있던 신념이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나의 명령이나 지시를 훌륭하게 집행할 수 . . .

류경수   그렇지만 유경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제 남은 시간은 30분밖에 없다. 이 30분 동안에 우리가 저 불무지가 있는 사령부자리까지 가지 않으면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어기게 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 위험속에서도 우리 세 사람을 끝까지 기다리실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는 대원들을 달래었다. 그리고는 그들을 산봉우리에 남겨두고 사령부의 천막자리를 향해 주저없이 기여 내려갔다. 그러다가 그 근처에서 우리가 떨궈두고온 대원을 만났다. 유경수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사령부자리부터 어김없이 찾을 것이라는 나의 확신과 정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자기 사령관이 소조를 파견한 출발지에서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부하들을 기다릴 것이라는 유경수의 판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였다. . . .

이런 신념과 의리심을 가지고 유경수는 해방 후 철도경비대를 조직하고 탱크부대를 건설하였으며 전쟁의 매 단계에서 최고사령부의 작전적 방침을 실현하는 데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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